유하

유 하 시인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시집으로 『무림일기』『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 『세운상가 키드의 생애』, 산문집으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등이 있다.

 

 

일시: 2004 11 11() 오후 6시부터 7 30분까지

장소: 동국대학교 김영준(유하) 교수 연구실

 

참석자: 유하, 김기창(퍼슨웹 편집위원), 채은(시인)

 

 

 

댄디 보이(dandy boy). 유하 시인을 떠올릴 때면 맨 앞자리를 차지하던 명칭이다. 무엇보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1991)가 남긴 강렬한 인상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끔 마주칠 적마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던 이미지도 한몫 단단히 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위압감을 줄 만큼 큰 키에 넥타이를 매지는 않았지만 매번 깔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하 시인과 인터뷰를 하기 직전까지 나는 그를 <영웅본색>(오우삼, 1986)의 주윤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고백컨대 한때 내게 주윤발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었고, 오우삼 감독은 그런 영웅을 만든 대부였다. 재차 고백컨대 중3 시절 나는 밥 먹을 때 빼고는 언제 어디서나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그 시절 침 묻은 성냥개비에서 솔솔 일렁이던 유황 냄새만큼 감미로운 향기가 또 있을까. 그러나, 모두 지난 시절의 일일 뿐. 그만큼 주윤발을 향한 내 사모의 정은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흘러갔다.

 

 

 

그런 주윤발을 다시 호명한 사람이 바로 유하 시인이었다. 그런데 유하 시인은 냉정하게도 주윤발을 <폭력에 대한 집단 무의식적 원한>(『싸랑해요 밀키스, 혹은 주윤발, 『압구정동』)의 표본으로 지목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구십년대 초반 막 대학에 들어간 나는 당시 그 장엄한 거대담론들의 끝물에서 한창 재미나게 뛰어다니기에도 바빴으니깐. 그리고 재차 고백컨대 그런 시절에 유하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좀 쑥스러운 일이었다. 『압구정동』이 출간된 그해 봄엔 하루가 멀다 하고 분신 소식으로 온 신문이 도배되곤 했을 때였으니깐 말이다. 그래도 그 한 시절 난 가끔 골방에 틀어박혀 『압구정동』과 『무림일기』(중앙일보사, 1989: 세계사, 1995, 재출간)를 음탕하게 키득거리면서 읽었다. 사실 그때 내게 유하 시인의 시는 시이기도 했고, 무협지이기도 했고, 선데이 서울이기도 했고, 사회과학이론 서적이기도 했다. 어느 곳에서나 순혈만을 원하던 그 시절에 말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해졌다. 게다가 올(2004) 2학기부터는 동국대학교 영상정보통신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로 적을 두고 있기도 하다. 유하 시인의 삶은 참, 대박의 연속이다.

 

영상은 활자에서 나온다

 

 

 

: 선생님은 근래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제겐 여전히 시인의 잔영이 완강하다. 선생님의 산문집(『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문학동네, 1995)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난 모든 예술이 한 우물이라 생각한다.>(59) 이미 이 구절에 모든 답이 들어 있긴 하지만, 선생님에게 시와 영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각각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 정답은 없어. 굳이 얘기하자면 나는 영화감독의 멘탈리티보다 시인으로서의 정서가 더 승한 편이야. 내 영화는 내 시의 확장이라고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래서야.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 층위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시인으로서도 그런 욕망이 있긴 있지. 시인이라고 해서 소수의 독자만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시가 워낙 마이너 장르다 보니까 독자가 적은 거지 시인도 시를 통해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잖아? 야무진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있는 시적 정서를 영화로 끄집어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그리고 시의 매력은 한마디로 마이너리티로서의 매력이야. 발레리는 백 명의 독자를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시에는 그런 매력이 있어. 시란 자신의 정서나 관념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이지. 그에 반해 영화는 정서나 관념을 최대한 일상화하는 작업이고. 그런 점에서 시와 영화는 정반대야. 그런데 그처럼 상반된 작업인데도 서로 만나는 부분이 있어. 명확하게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scene)마다 미세하게나마 문학적인 그 무엇이 조금씩 들어가면 꼭 그만큼씩 고급스러워지는데 뭐 그런 게 있어. 요컨대 시의 매력은 마이너리티 장르로 존재하지만 자신의 정서와 관념을 극한까지 최대한 밀어붙이는 그런 쾌감에 있다고 봐. 영화는 감독의 관념과 정서를 최대한 일상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다수의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영화는 한마디로 메이저리티의 쾌감을 준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좀 전에도 말했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만나는 부분이 있어.

 

 

 

: 그러면 시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수용자에 대해 각각 다르게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다는 말인가?

 

: 그렇지.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 시의 독자와 영화의 관객은 상당히 다르지. 시의 독자는 그야말로 잘 무장된 사람들이야. 이에 반해 영화의 관객은 일단 무장해제된 대중이라고 할 수 있어. 영화란, 영화의 스토리란 인생의 은유라고 할 수 있겠는데 관객은 그 은유를 쉽게 만나길 원해. 혹은 그럴 때 금방 반응해. 시의 독자는 다르지. 시 독자는 시인이 구사하는 토씨 하나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사람이잖아? 당연히 같을 수가 없지. 이 둘, 즉 고급독자인 시의 독자와 일반대중인 영화 관객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그런데 그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작업하면서 얻는 쾌감은 더 커. 어렵기 때문에.

 

 

 

: 첫 영화(<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993)의 실패 원인을 그런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그렇지. <압구정동>을 찍기 이전까지 난 시인이었어. 그때까지 내가 상대한 사람은 일반대중이 아니고 고급독자였지. 고급독자만 상대하다가 일반대중을 처음 만난 셈이야. 그때 그들에게 다가가는 내 나름의 언어와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거지. 시의 문법과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는 달라. 드라마투르기는 자신의 관념이나 정서를 지극히 일상적인 항목들로 바꿔서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 1시간 50분 동안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거지. 예컨대 밥 먹고 똥 누고 이런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감동을 줘야 한다는 말이야. 그런데 시는 달라. 시는 관념의 레토릭이거든.

 

 

 

: 영화감독으로 처음 데뷔할 당시 그 외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 우선 인간관계에서부터 많이 부딪쳤을 텐데.

 

: 물론 그런 부분이 있었지. 시집을 낸다는 건 시인이 제작, 감독, 스텝, 배우까지 다 하는 거야. 마이너리티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완전히 만끽할 수 있는 게 시집 작업이지. 영화는 그렇지 않아. 영상도 촬영감독이 찍지 영화감독이 찍는 게 아니야. 그처럼 영화 작업은 수많은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감독의 생각을 일상적인 어투로 하나하나 얘기해서 이해시켜야 가능해. 감독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 구현해낼 수 있게끔 타인에게 말걸기를 잘해야만 하는 거지. 그런 점에서 문제가 많았어. 시인으로서의 의사소통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의사소통은 분명히 다른 건데 그에 대한 준비가 덜 돼 있었어.

 

 

 

: 현장에서는 어떤 스타일의 감독인가? 조용한 편인가?

 

: 처음엔 조용한 편이었어. 내가 처음 영화판에 들어갔을 때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별로 없었지. 내가 감독인데도 말야. 그래서 사실 조용조용하게 연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어. (웃음)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원작 이만교)를 찍을 때는 세월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현실 장악력이 어느 정도 생겼을 때지. <말죽거리 잔혹사>(2004) 할 때는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좀 터프했었다고 기억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 같아. 멜로물 찍을 때는 좀 조용해지는 것 같고. (웃음) 그리고 내가 첫 영화를 찍을 때와 지금의 영화계를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해. 어떻게 보면 난 뉴웨이브가 오기 직전에 영화를 시작한 셈이거든. 그때는 감독이 볼 수 있는 모니터도 없었어. 한마디로 구충무로였지.

 

 

 

: 다른 감독들에 비해 스텝들이 대하는 태도가 다를 듯하다.

 

: ?

 

 

 

: 일단 시인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좀더 예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 안 그래. 실제로 영화 하는 사람들 만나보면 시를 몰라. 그게 아이러닌데, 영화하는 사람들 중에 시집 읽는 사람은 거의 없어. 아까 내가 시는 마이너리티 장르라고 했지만, 내가 처음 시를 쓸 때(1980년대 후반)는 그렇지 않았어. 그때는 문학의 시대였어. 지금은 문화의 중심부에서 밀려났지만. 난 내가 시인이라는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어. 그런데 영화판에 가보면 내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인정해주고 그렇지 않고의 차원이 아냐. 그런 건 아예 몰라. (웃음) 그런 상황에서 이 사람이 예민한지 알게 뭐야, 뭐 이래. 나중에 <, 시인이셨어요?> 이런 정도야.

 

 

 

: 이소룡 영화를 좋아한 것으로 아는데.

 

: 어렸을 때나 좋아했지. 지금도 좋아 하면 그건 문제 있는 거지. (웃음)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환데.

 

 

 

: 최근엔 주로 어떤 영화를 보나? 

 

: 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은 편이야. 예전에 헐리우드 키드 뭐 이렇게 알려졌었는데 실은 그렇지도 않아.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꼽으라면, 어렸을 때 본 영화들, 그러니까 핵체험으로써 본 영화들, 그리고 이후에 영화 공부하면서 봤던 우디 알렌의 영화들 정도야. 뭐 영화에 대해 다 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지금도 보지 않은 영화들이 참 많아. 난 대부분의 상상력을 문학에서 길어오는 편이야. <영상은 영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영상은 활자에서 나온다> 이렇게 믿어. 영상은 활자에서 촉발되는 거고, 그래야만 좋은 영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요즘 <영화적으로 사고한다> 이런 류의 말들이 있는데 난 그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이야.

 

 

 

: <말죽거리>에 대해 과거를 좀 서정적으로 미화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말죽거리>는 리얼리즘 영화야. 그 당시의 디테일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어. 지금 신세대들은 모르겠지만, <말죽거리>에서 배우들이 내뱉는 어투라든지 뉘앙스, 침 뱉는 각도 등은 정말 사실적이야. <말죽거리>는 단순한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칠십년대의 박물학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야. 그 정도로 난 당시의 디테일들을 리얼하게 재현해내려고 노력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해. 그리고 서정성이라는 건 결국 문맥에서 생기는 거지 장면이 이쁘다거나 해서 생기는 건 아니잖아? <말죽거리>가 서정적이라는 말은 그 영화를 보고 당시의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 <말죽거리>는 처음엔 주로 이십대가 봤다. 나중에 삼사십대가 극장으로 몰려들었는데.

 

: 글쎄, 난 그 점에 대해서는 마케팅의 조급성이라고 봐. 그게 뭐냐 하면 대중영화는 일단 첫 주에 관객들을 많이 불러들여야 하거든. 그래서 결국 십대와 이십대를 겨냥할 수밖에 없어. 삼사십대는 영화관에 잘 안 나와. 어떤 영화가 좀 터졌다 싶으면 <그 영화 재밌다메?> 그러면서 부화뇌동해서 나오지. 그리고 십대와 이십대가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사실 연애 때문이지. (웃음) 사실 그렇잖아? 영화 자체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연애 과정으로서의 영화 관람이잖아? 그러다 보니까 마케팅의 주요대상이 십대, 이십대가 될 수밖에 없는 거지. 헐리우드 용어로 포지셔닝(positioning)이라고 하는데, <말죽거리>의 경우는 학원액션로망, 학원폭력물로 포지셔닝했어. 엄밀히 말하자면 포지셔닝이 잘못된 거지. 내 생각엔 <말죽거리>는 성장영화이자 기억에 관한 영환데, 포지셔닝이 그렇게 돼버렸어.

 

 

 

: 그 점에 대해 불만이 있는가?

 

: 감독의 입장으로서는 그렇지. 그렇지만 직업상 그런 점은 이해할 수밖에 없어. 마케팅의 한계도 있는 거고.

 

 

 

: 방금 <말죽거리>를 성장영화라고 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님의 산문집이나 시집을 보면 <말죽거리>는 자전적인 요소가 상당히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말죽거리>는 선생님 자신에게 어떤 영화인가?

 

: 앞서도 말했지만 내 영화는 내 시의 확장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시집을 관류하는 정서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내가 왜 <말죽거리>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시인 혹은 예술가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시와 예술을 추동시키는 요소 또는 에너지가 존재하지. 내 경우 그것은 추억이고 과거야. 그러니까 내가 타락하기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 내 예술적 정서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죽거리>를 통해서, 뭐라 그래야 하나? 좀 정리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미래는 현실 속의 나에겐 아직 고정화된 관념이고 어느 정도 읽혀진 정보 그 자체이다. 그러나 추억의 이미지란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담는 자의 마음의 모양에 따라 수시로 변화되는 액체성의 풍경이다. 그리고 현재를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볼 수 있는 살아 있는 거울이다. 그 살아 있는 거울에 의해 현실은 늘 새롭게 반추된다. 그러니까 추억한다는 건 마음에 새겨진 삶의 무늬를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흘러가는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서문」, 『이소룡』, 7-8

 

맨소래담과 짝퉁

 

 

 

: 지금까지 선생님의 시에 대한 평가는 <키치적>이라는 용어로 압축할 수 있다. 저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첫 시집(『무림일기』)을 읽고는 사실 정말 황당했었다. 그 시집은 말하자면 무협지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사실 그 시집을 읽을 당시 난 그저 그런, 그러니까 시류에 따라 씌여진 시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후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초지일관 키치적 요소들을 시에 계속 호명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선생님의 시 안에는 세운상가라든지 압구정동만이 아니라 하나대라는 지극히 서정적인 공간도 병존하고 있다. 선생님의 산문집을 보면 <이를테면『무림일기』 연작을 쓰게 된 것도 내가 무협지광이라서 아니라, 그것을 읽었던 공간이 유년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오촌 고모에게 무협지를 빌리기 위해, 눈이 무릎까지 쌓인 밤길을 무서움에 떨며 걸어가던 열한살의 내 모습. 그렇듯 동심의 절실함 속에 새겨진 무협지의 세계였기에, 그것은 두고두고 나의 시적 영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겨우 존재하는 추억들』, 「이소룡」, 212-213) 이런 대목이 있다. 결국 선생님의 시는 키치적이긴 하지만 그 기원은 하나대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말죽거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 첫 시집 해설을 김현 선생이 썼는데, 거기 보면 나에 대해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김현, 『키치 비판의 의미유하 시가 연 새 지평』, 『무림일기』, 144)라고 평한 구절이 있어. 처음엔 몰랐는데, 후에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이 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이 아니었는가 싶어. 그리고 <말죽거리>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었던 시절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화야. 상당히 절제해서 표현하긴 했지만.

 

 

 

: 선생님과 십 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은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 사실 <말죽거리> 첫 장면에서부터 전 좀 질려있었다.

 

 

 

 : 난 고등학교 3년간 매일 맨소래담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어. 맨날 맞다보니까 졸업할 땐 엉덩이 쪽에 굳은살이 박혀서 꺼멓게 될 정도였어. 그 당시의 고등학교는 다 그랬어. 무지막지하게 폭압적이었지. 내가 다녔던 학교는 좀 더했던 거 같아. 나는 <말죽거리>를 만들기 직전까지 잠자다가도 고등학교 때 맞던 악몽을 꾸곤 했어. 그런데 영화를 다 만들고 난 뒤로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아. 그래서 <말죽거리>를 뭐, 살풀이나 해원굿 하는 그런 느낌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웃음) 그런데 어떤 평론가가 <말죽거리>에 대해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어 보인다고 쓴 적이 있어. 나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아까 <말죽거리>에 대해 서정적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어. 예전에 <지옥도 시효가 지나면 아름답다> 뭐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그런 거라고 할까? 돌아가기 싫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그런 묘한 게 <말죽거리>에 있지. 반성자이면서도 중독자이기도 한 거야.

 

 

 

: 그런 점에서 선생님에 대해 단순히 <키치적>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표피적이라고 생각한다.

 

: 엄밀히 말하자면 키치적인 소재로 이루어진 시지 키치시는 아니야. 키치는 한마디로 짝퉁을 말하는 거잖아? 옛날 동네 이발소에 걸려있던 그림들처럼 정품을 흉내낸 싸구려 짝퉁 말야. 

 

내 시와 영화는 그런 짝퉁에 중독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야. 그러니까 짝퉁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그리고 한편으로 그 점에 대해 반성하고 그런 것이 내 시이자 영화지 키치 자체는 아니지.

 

 

 

: 선생님 시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시에 비해 영화가 좀 무던하다고 해야 하나, 튀는 것 없이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 그거 중요한 지적이야. 내 시는 사실 좀 스타일리쉬한 편이야. 그에 비해 영화는 거의 기교가 없어. 사실 처음 영화 작업을 할 때는 시적 기교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있긴 했어. 영화가 되다 말았지만. 그런데 영화라는 장르를 차차 이해하면서 바뀌게 되었지. 영화의 생명은 관객이 처음엔 <저거 영화 같애>라고 하다가 <저건 진짜 같다,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데 있어. 그러니까 영화는 마치 옆집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보여줘야 하고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야. 코울릿지가 <불신의 자발적 정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건 관객이나 독자의 태도와 관련된 문제긴 하지만, 영화감독이나 시인은 그런 점에 유의해야 해. 그래서 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선호하는 입장이야.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영상으로 장난을 치는 그런 쪽보다는 관객이 스스로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할 수 있도록 좀더 안정적인 방식을 택하는 편이지.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무기교로 흘러가게 된 듯해. 그리고 근래 들어서는 나이를 먹어 그런지 무기교가 최상의 기교라고 생각해.

 

 

 

: 아까 우디 알렌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우디 알렌과 같은 경우에는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일반인들의 경우…….

 

 

 

: 그런데 우디 알렌의 영화 같은 경우는 모르고 보지 않나? 일반대중이 영화를 볼 때는 감독이 누군지 그런 거 모르고 보잖아? 감독이 누군지 그런 사전정보 없이 보다가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냐? 그리고 우디 알렌의 영화는 불신의 자발적 정지와는 거리가 있지. 왜냐하면 그 사람의 영화는 카메라를 보고 계속 얘기를 하잖아? 말하자면 브레히트적이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작품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쪽이고, 브레히트적인 작품은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쪽이잖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뿔 달린 암사슴도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느냐가 핵심이고, 브레히트는 그 반대잖아?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몰입의 구조 혹은 방식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에 대한 비판자인 셈이지. 우디 알렌의 영화는 브레히트 쪽에 가까워. 그리고 우디 알렌의 영화는 뉴요커 몇 만 명만 보지. 그 사람 영화치고 대박난 영화는 없어. 개인적으로 우디 알렌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 공부를 하면서 차차 깨닫게 된 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몰입의 구조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어. 외국 특히 헐리우드의 경우는 그런 몰입의 구조가 대단히 정교하게 발전돼 있어. 한국 영화는 그런 점에서 좀 부족해. 사실 한국은 선비의 문화고, 시의 문화지, 논리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짜나가는 그런 문화는 아니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이면 고스톱 치지 서로 얘기하지는 않잖아? 아니면 테레비 보고 선을 하든지. (웃음) 한국 사람은 논리적인 대화에 익숙치 않아. 그래서 그런지 한국 영화는 내러티브가 약해. 그런 점에서 스토리 공부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어. 로버트 맥기가 쓴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 외역, 황금가지, 2002) 그런 책은 참 좋은 책이야. 한 번 읽어봐.

 

 

 

: 우디 알렌과 선생님의 공통점은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 그런 포부가 있었어. 『압구정동』 연작을 쓰고, <압구정동>을 찍을 때만 해도. 우디 알렌의 영화는 뉴요커들, 그러니까 부르주아에 대한 관찰기라고 할 수 있지. 우디 알렌은 영화를 통해 뉴요커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내재한 부조리나 그들의 심리적인 단면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비루함 등을 잘 표현하지. 나도 우디 알렌 식으로 강남을, 특히 압구정동을 이야기하고 싶은 포부가 있었어. 첫 영화에서 좌초되긴 했지만. 지금도 그런 욕망이 있긴 있어. 나는 강남에서 중3 때부터 쭉 살아왔어. 강남은 한국의 엘도라도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천민부르주아문화의 메카인 셈이잖아? 그리고 사실 난 촌놈이야. 촌놈이기 때문에 도시를 바라볼 때 항상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돼지. 내가 애초부터 아스팔트 보이였다면 『압구정동』은 쓰지 못했을 거야. 아스팔트 보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시들을 쓸 수 있었고 <말죽거리>를 만들 수 있었지.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 ???? 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 년간 하루 십 킬로의

로드웍과 섀도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 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엑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중략…)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부분, 『압구정동』

 

 

 

 

 

: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는가?

 

: 요즘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용법이 좀 의심스러워. 어느 감독이 스타일리쉬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의 스타일이 나름대로 정전화되었을 때에나 가능한 거거든. 그런데 스크린을 현란하게 한다든지 그러면 스타일리쉬하다고 말하는데, 그건 스타일리쉬한 게 아니라 그냥 정신없는 거지. 한마디로 뭐, 뮤직 비디오지. 뮤직 비디오와 영화는 다른 거잖아? 스타일리쉬하다는 말은 내용과 형식이 얼마나 잘 맞아떨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일관되게 그 사람의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는가에서 결정되는 건데. 뭐 패스트모션(fast motion)이나 걸고 그러면 그게 스타일리쉬한 건가? 그건 아니야.

 

 

 

: 차기작이 무협영화라는 얘기가 있던데,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인가?

 

: 무협영화는 한번 해보고 싶어. 그런데 고백을 하자면 잘 만들 자신이 없어. 무협영화는 완전히 가공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말야. 내가 직접 겪었거나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세계라면 그래도 체면치레 정도는 좀 할 수 있을 듯한데, 무협영화처럼 완벽하게 가공적인 세계를 다룰 재주는 아직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미루고 있어.

 

 

 

: 무협영화가 아니라면?

 

: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건 조직폭력배 영화야. 조폭영화는 이미 장르화 되었지. 그래서 굳이 니가 또 할 필요가 있냐고 말들을 많이 하던데, 그렇기 때문에 더 해보고 싶어.

 

 

 

: 그럼 느와르 쪽이라는 말인가?

 

: 구상중이어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장르의 틀 속에 완벽히 가둘 수는 없다고 생각해. 황종연 선생의 저서명을 빌려 얘기하자면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는 자여, 그대에게 축복 있을진저

 

 

 

: 지금까지의 얘기는 영화뿐만 아니라 시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시는 키치적인 것들, 비루한 것들이 발산하는 독특한 아우라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는 역설적이게도 때론 지극히 윤리적이다. 시에 대해 좀 얘기를 하자면, 전 사실 좀 의왼데, 근래 들어 선생님의 시 가운데 각광 받는 작품을 들라면 이전 『압구정동』이나 『세운상가』 계열의 시가 아니라 생뚱맞게도 『천일(문학과지성사, 2000)에 수록된 「自畵像」이. 자발적 가난과 관련해서 말이다.

 

: 그래? 난 모르고 있었어. (웃음)

 

 

 

 

 

빈 양재 천변 길, 오늘도 자전거를 달린다

밤새 내린 비에 없었던 지렁이가 보이고

송장 메뚜기 한 마리 풀쩍 잡초 속으로 날아간다

아내는 직장에 간 시간

나는 자전거나 타면서 고작 지렁이도 익사를 할까

쑥부쟁이는 쑥과 뭐가 다른가 따위의 사소함을 붙들고 있다

몇 년째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구상했을 뿐

언제나 핵심을 피해왔다

시험 전날 만화방에 앉아 있는,

목적지를 놔두고 샛길에서 해찰하는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의 가슴엔 늘 쓸모 없는 것들만

다녀간다 가을 빛에 젖은 억새풀과 노란 은행잎 몇 개

길 옆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소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이다

내 자전거엔 어느새 함성 소리처럼 날개가 돋아

유년의 운동회로 나를 데려간다

은빛 운동장 저편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있고

그녀와 이인삼각으로 달려가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내 자전거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붉게 물들어

정적 속의 내게로 되돌아온다

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열망은 이제

나의 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노는 자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저물어 돌아가는 나의 자전거가

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순간을

 

―「自畵像」전문, 『천일화』

 

 

 

 

 

: 이 시가 의외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말은 시가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자발적 가난>이라는 특정 담론에 의해 호출되곤 한다는 점 때문에 한 말이다. <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지극히 미적인 순간을 반드시 <자발적 가난>이라는 담론의 통제 아래 둘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여하튼 그러고들 있다. 그리고 사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자발적 가난>만큼 허약한 대안도 없을 듯하다. 그런데 『안 이쁜 신부도 있나 뭐』(세계사, 1991, 하재봉·함민복·함성호·김정란 공저)를 보면 선생님의 <시작 노트> 가운데 <빈 곳을 <그대로> 두자는 老子 게으름>, <욕망의 대량 복제를 정당화시키고 결국 색과 맛과 음이 가득 채워진 도시>(9) 즉 천민자본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대목이 있다. 그럴듯한 얘기긴 하지만, 진정 이 세계에 대해 뭔가 제대로 비판하고 새로운 기획을.

 

: 하고 있는가?

 

 

 

: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압구정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시들도, 통쾌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세운상가? 시편들이 솔직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제 생각엔 세운상가에 매료된 상태를 극한까지 밀고 나갔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글쎄, 내 한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압구정동』에서도 그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에 매혹된 상태를 좀더 밀고 나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냐하면 예술은 계몽적 반성이 아니거든. 예술은 인간 쓰레기가 하는 거잖아? (웃음) 그 쓰레기의 극단을 보여주는 게 사회에 기여하는 거지. 자기가 잉여인간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묘사해내는 게 실은 독자들에게 반성적 시각을 얻을 수 있도록 기여하는 거란 말야. 지금 와서 보면『압구정동』 연작에서 내가 반성을 좀 빨리 해버렸어. 그 점에 대해서는 사실 아쉬운 점이 있어.

 

 

 

: 그런 맥락에서 『천일화』의 뒷표지글은 참 인상적이다. 거기에 적힌대로 요부의 불온한 매혹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잘 알면서도 그 유혹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참담한 심정, 혹은 그에 대한 동경이 예술을 추동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데.

 

 

 

 

 

요부femme fatale. 불온한 매혹. 나는 그 치명적인 관능성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그녀의 매혹을 손에 쥐었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는 벌써 저만치 달아나 깔깔거린다. 아직은 내 것이 아닌 매혹이기에, 그녀의 깔깔거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일 수밖에 없다.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요부의 위험스러운 매혹으로 인하여 영화의 내러티브는 연장되고, 극장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내 삶의 내러티브가 한순간 한순간 연장된다. 물론 아내라는 건전한 일상으로 복귀하면 내러티브는 즉각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저만치 깔깔대는 요부의 관능성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소 안락하고 다소 지리멸렬한 아내의 일상으로 귀환할 것인가. 하나 후자의 선택은 내겐 시 쓰기의 종말을 의미한다. 필름 누아르가 요부의 깔깔거림 덕택에 내러티브의 서스펜스를 이어나가듯, 나의 시 쓰기 역시도 해피 엔딩의 지속적인 유보를 통해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얻는다.

―『천일화』 뒷표지글 부분

 

 

 

 

 

: 예전엔 쓸모 있는 시를 써야겠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시를 써서 뭔가 이 사회에 기여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 말야. 그런데 오히려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쪽으로 더 가야 했어. 서정주 선생의 시는 잉여미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잖아? 그런 세계가 오히려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미답지들인 건데. 난 시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불량식품이라고 봐. 특히 영화가 그렇지. 시는 좀 그렇지 않은 듯하고. (웃음) 자꾸 먹고 싶게 하는 불량식품. 불량식품은 먹으면 배탈이 나잖아? 배탈이 나면 <, 이건 불량식품이구나, 앞으론 먹지 말아야지> 그러는 건데.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불량식품이잖아? 그러니까 자꾸 배탈이 나게 만들어야지. 사실 초기에는 민중시의 영향도 있었어. 팔십년대 끝무렵이었으니까. 그땐 ?세운상가? 같은 시를 쓴다는 건 그 자체가 죄였다고, . 지금은 너무나 뻔한 시들이 돼버렸는데. 그래서 저 시들(탁자 위에 놓인 ?압구정동? ?세운상가? )을 쓸 때 용기가 상당히 필요했어. 무협지를 빌려 와서 시를 쓴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때였지. 그리고 그래서 그런 작업을 나나 장정일이 먼저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없지 않아 있어. 방금도 말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긴 있지. 좀더 불량식품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배탈이 나도록 했어야 했는데, 자꾸 보약으로 만들다 보니까. 예술은 보약이 아닌데 말야.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체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천마대제가 죽자 무림존패의 위기를 느낀 동창서열 제오위 광두일귀 동문혹은

낙성천마를 기습, 금나수법으로 제압한 뒤 고수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무력 18년 겨울, 고금성 주위엔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천수신마, 건곤일검, 남해일노등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이 암암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벽안의 무사들에게 빌린 천마벽력탄과 육혈포를 가지고

동창서열 제삼위 무적금괴 승룡을 제압 중원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역의 천마벽력탄 앞에서 무적금괴의 철풍장 정도는 조족지혈이었다

무력 19년 초봄, 칠청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백골계곡에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무렵 하남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공의 소유자가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찬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천마대제는 비명에 갔지만 강자존 약자멸!

이 무림의 대원칙이 깨질 것을 우려한 광두일귀 및 일부 뜻있는 고수들은

武歷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앞에 숙연해 하며

한층 겸허하게 무공연마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전문, 『무림일기』

 

 

 

 

 

: 『무림일기』<자서>를 보면 <내 시의 처음이었던 진이정 시인에게 첫시집을 바칩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진이정 시인과는 어떤 사이였나?

 

: 사실 난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았었어. 고등학교 때 수업 빼먹고 세운상가에서 배회하곤 했지. 대학 다닐 때도 실은 그랬어. 그런데 그 양반 만나면서 키치 반성자가 된 셈이야. 말하자면 비판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달아준 사람이 그 양반인데. 그 양반 일찍 돌아가셨지.

 

 

 

: 전 정반대로 생각했다. 진이정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참 순정한 시인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 순박한 시인을 선생님이 꼬드겨서 여기저기 신세계로 인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이다.

 

: 서로 삼투하는 뭐 그런 게 있었겠지. (웃음) , 약속이 있었는데, 늦었네. 시간 있으면 또 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