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

정 양 시인 전주우석대 문창과 교수.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까마귀떼』(은혜, 1980; 문학동네, 1999 재간), 『수수깡을 씹으며』(청사, 1984), 『빈집의 꿈』(푸른숲, 1993),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비평사, 1997), 『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2001),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005) 등이 있으며, 저서로 『판소리의 이해와 아름다움』(인동, 1986, 공편), 『두보시의 이해』(이회, 1994, 공역), 『한국 리얼리즘 한시의 이해』(새문사, 1998, 공역), 『판소리 더늠의 시학』(문학동네, 2001) 등이 있음.

일시: 2005 5 14()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장소: 전주우석대학교 내 정양 시인 연구실

참석자: 정양, 김조영혜, 이정희, 백상웅, 채은

 

 

     

 

 

(어떤 중이 조주 화상에게스님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 화상이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답했다. 이에 중이그 말씀도 분별심이 아닙니까!”라고 따지자, 조주 화상은이 촌놈아, 대체 분별심이 어디 있느냐!”라고 꾸짖었다. 이 말에 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趙州田庫奴 , 碧巖錄 

 

 

김조(김조영혜 이하김조“): 우선 이번 시집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정양: 대부분 최근에 쓴 것들인데, 2부에 실린 몇 편은 예전에 쓴 시들 중에 좀 고친 것들이에요. 다시 읽어달라는 뜻으로. 애초에 이 시집(『길』)을 내려고 보니까 시가 팔십 몇 편 되더라구요. 그렇게 많으면 책이 두꺼워지고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까 좀 빼야 된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몇 편 빼달라고 부탁했는데, 대부분 그냥 다 넣자고 그러데요. 그게 좋은 건지 알고. 다행히 안도현이라는 친구가 용감하게 빼주드만요. 그런데 안도현 시인이 뺀 시들을 보니까 나도 빼고 싶긴 했는데 그냥 넣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들이더라구요. 왜 그런 시들 있잖아요? 그래서 열 몇 편인가를 뺐어요. 안도현 시인이 참 고맙죠. 남의 시집에 들어갈 시를 고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안도현 시인한테 부탁할 때 절대 빼지 말라고 했던 시들이 있는데, 「똥차」「지평선」 「낙화암」 연작(『길』)이 그런 시들이에요. 「똥차」는 뒷부분을 좀 고쳤어요.

 

 

 

김조: 2부에 실린 시편들에선 선생님의 일상과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이 어떤 분일지 마치 머릿속에 환히 떠오르는 듯하더라구요. 특히 「똥차」가 그런 시였어요.

 

정양: 그 시하고 「별」(『길』) 같은 시는 말하자면 팔십년대 시에요. 전 팔십년대를 참 좋아해요. 팔십년대가 젤루 중요한 시기였던 거 같애. 그래 그 시대를 좋아하는데 팔십년대의 열정, 뭐 그런 것을 지금 사람들은 너무 잊어버린 채 그냥 지나가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서운한 생각이 늘 있어요. 그래서 그런 시들을 좀 썼어요.

 

 

 

(이정희 이하“): 저도 그 점에 대해 공감합니다. 전 선생님 시집을 읽으면서 팔십년대의 거대담론은 비록 흩어졌을지라도 아주 작은 일상에서부터 새로운 힘이 여전히 솟구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마을에 떠돌아다니던 예전 이야기들을 시로 쓰신 1부의 시편들이 참 좋았어요.

 

정양: 예전부터 그 마을(마현리) 얘기를 자주 쓴 편이에요. 이전 시집에도 여러 편 있어요.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 마을 이야기를 쓰면서 나를 쑥 빼봤어요. 예전에는 내 얘기가 좀 들어가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그냥 두기에 참 아까워요. 예를 들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세무서 직원들을 특무상사가 두들겨 팬 얘기는 그 동네에서는 아직도 아주 큰 묵은 신화로 남아 있거든요.(「술 뒤지는 날」, 『길』) 그리고 또 방귀를 한꺼번에 백 번 넘게 뀌는 꼬마 얘기도 있는데(「보리방귀」, 『길』) 사람들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요. 그럴 수가 있냐고. 실제로 그랬어요. 그 마을에서는 지금도 아무개는 방귀를 뀔 때 어떻게 뀌었다는 게 신화로 남아 있어요. 그런 이야기들은 그냥 넘겨버리기엔 좀 아깝더라구요.

 

 

 

김조: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가령 특무상사도 그렇고 장구재비도 그렇고 말하자면 민중인 셈인데, 그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나요?

 

정양: 장구재비 같은 사람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이 말하자면 공산당 기간당원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보면 마을을 떠날 때 그동안 마을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한테만 실은 내가 이런이런 사람이다라고 살짝 말해주고 가거든요. 그러면 뒤에 <실은 그 사람이 공산당이었데야> 어쩌구 그러면서 입소문이 나고 그래서 공산당의 이미지도 상승하고 그러거든요. 장구재비는 그런 기간당원이었던 거 같아요.

 

 

 

남도땅 무안 어디서 왔다던가 / 윤생원네 행랑채 살던 홀애비 기수 아저씨 / 소 잡고 개돼지 잡고 초상집 화톳불 놓고 / 우물 칠 때면 맡아놓고 우물 밑바닥에 내려가고 / 구들장 밑에 기어들어가 막힌 고래도 긁어내고 / 마을의 험한 일 궂은 일 도맡던 벙어리 아저씨 / 지붕 이을 때면 맡아놓고 용마름을 엮던 상일꾼 / 둥글둥글 보름달 멍석도 잘도 매던 재주꾼 / 단옷날이면 왕소나무에 그네 매어주고 돼지 잡을 때 / 오줌깨 따서 던져주며 씽긋 웃던 벙어리 아저씨 / 어디 아파도 마을 사람들은 / 약방집보다 먼저 벙어리를 찾았다 / 지어주는 단방약으로 효험 본 사람들이 많았다 // 아 그 벙어리가 글씨 / 해방?? 말문이 열려떠래야 / 징용 안 갈라고, 이사 옴서부터 / 내내 벙어리 행세를 혀떠래야 / 해방되자마자 장구채부터 잡더래야 // 은행나무 밑에서 풍물을 칠 때마다 / 먼 마을 사람들까지 장구재비 구경을 오곤 했다 / 왔다리갔다리 정신없이 양장구를 몰아치다가 / 공중에 장구채를 내던지고 천연덕스럽게 / 골련까지 피워물며 다시 장구채를 받는 / 그 손발놀림 어깻짓 고갯짓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 함께 풍물 치던 패들도 장구재비에게 넋을 놓곤 했다 // 저런 재주를 어치케 참꼬 사러때야 / 아 저 벙어리가 글씨 / 남도에서도 아러주는 장구재비여때야 / 조선 팔도 가는 디마다 각씨 하나씩 둔 / 천하에 바람둥이래야 // 기수 아저씨 바람처럼 마을에서 사라진 뒤에도 / 마을에는 장구재비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각씨들 다 데리꼬 / 삼팔서늘 너머가때야 /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 인공 때 남도 어디서 군땅위원장을 혀때야 /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 지리산으서 대장 노릇을 허더래야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전문,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정양: 그리고 시를 써놓고 보니까 말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많더라구요. 맨 앞에 있는 「이른 봄」(『길』)도 말하자면 그게 노름방에서 나락 다 잃어버리고 다시 개똥 주으러 가는 얘기거든요. 개똥을 왜 줍냐 하면 그것으로 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그런 건데, 옛날 시골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왜 개똥을 줍는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모릅디다. 뒷표지글 쓴 고형렬이도 그저 쓰레기통에 버릴라구 그러는 줄로만 알고 있어요. 고형렬 시인도 시골 출신인데. 그 시는 말하자면 시 쓰다가 절망하고 시를 안 써야지 그러다가도 또 시를 쓰고 그러는 건데. 저는 마음먹고 시를 쭉 써본 적이 없어요. 등단하고 칠십년대 초에는 좀 유명한 신인이었지만. 그런데 좀 있으니까 시월유신이 되어가지고 그래서 ??에 글이고 뭐고 안 쓰고 살아야지 마음먹고는 한 칠팔 년 그냥 술만 먹고, 허허허, 그러고 살았어요.

 

 

 

김조: 「끝」(『까마귀떼』)이라는 시 발표하고 나서 말이죠?

 

정양: 그렇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글을 좀 쓸 걸 그랬어요. 그 중요한 시기에 그냥 술만 먹고 산 게 아쉬워요. 그동안 친구들은 어느덧 중견문인이 되고 그랬는데. 그 시절 한승원이하고 윤흥길이하고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나온 인연 때문에 자주 만나 돌아다녔어요. 그 친구들은 내가 술만 마시는 동안 문단에서 자리도 잡고 그랬는데 난 늘 신인이었지요. 허허허. 그렇게 칠팔십년대를 보냈어요.

 

 

 

김조: 그때 시를 쓰지 않으신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무엇인가요?

 

정양: 이게 뭔 짓이냐 싶어서. 허허허.

 

 

 

김조: 시 쓰는 일이요?

 

정양: 이게 무슨 짓이냐 싶었죠.

 

 

 

김조: 시 쓰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 시절엔?

 

정양: ……. 박정희 죽고 난 다음부터는 시를 쓰고 싶더라구요. 박정희 죽고 난 다음엔.

 

 

 

김조: 말하자면 내 시가 이 시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신건가요?

 

정양: 그렇죠.

 

 

 

김조: 오히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시를 쓰고 싶지 않나요?

 

정양: 쓰기는 좀 썼죠. 발표를 안 한 거죠. 그 무렵에 쓴 시로는 「암실일기」 연작(『까마귀떼』)이 있어요. 그때 제가 사진 작업을 좀 했거든요. 흑백 카메라로. 그리고 「1979 12월의 눈」(『까마귀떼』), 그 시가 박정희 죽고 난 뒤에 <, 이제 진짜 시 좀 써야겠다> 해서 쓴 거예요. 광주에서 일 터지기 전에. 그리고 그 무렵에 사르트르가 죽으면서 문학이라는 건 말하자면 개똥이다, 글자 그대로 이렇게 얘기했거든요. 나한테는 그 충격이 굉장히 심했어요. 세상에, 내가 좋아한 그 사르트르가 말년에 문학이란 건 생각할수록 개똥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단 말예요. 아마 그래서 시 같은 거, 글 같은 거 안 쓰고 살려고 마음먹었던 거 같아요. 허허허.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러더래도 시 쓰고 발표하고 그랬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태평성대 때보다 그런 험한 때 사실 문화인들이 정말 활동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에 <아유, 모르겠다> 하고 술만 먹었으니.

 

 

 

(백상웅 이하“): 저는 선생님 시 가운데 처음 접한 게 「어금니」였습니다. 그 전에는 솔직히 선생님을 몰랐어요.

 

정양: 그 「어금니」라는 시는 서정주 선생 돌아가셨을 무렵에 쓴 시예요. 그런데 난 서정주 선생에 대해 어떤 애증이 있어요. 중고등학교 때 서정주 선생의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니기도 했고, 대학에서는 선생에게서 직접 배우기도 했어요. 강의 내용은 재미없었어요. 출석 부르고는 <고만할까?> 그러고는 그냥 나가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 분이. 그리고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 서정주 선생이 내 시를 뽑아줬는데, 내가 동국대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뽑았어요. 그때 박목월 선생하고 두 분이 심사를 했는데, 서정주 선생은 <목월이가 다른 작품 들고 나오는데 내가 우겨서 했지> 그러고, 박목월 선생은 <서정주가 다른 작품 들고 왔는데 내가 자네 시가 좋다고 우겼지> 그러더라구요. 허허허. 서정주 선생하고 나하고는 그런 인연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분 시에는 사실 역사의식 같은 건 없잖아요? 시인이 뭐 그런 의식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의식이라든지 이런 게 좀 밑바탕에 있어야 하지 않나 해서 그런 점에서 늘 서운한 생각이 있었어요.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그렇게 됐구요. 서정주 선생 생각하면 그래서 좀 안타깝고 그래요. 그래서 「어금니」를 쓴 거예요. 늘 마음속에 어금니 아프듯 아픈 그런 선생이죠. 그리고 미안하기도 하더라구요. 젊었을 때는 서정주 선생 시를 패러디도 하고 그랬어요. <어떤 사람에게는/가난이야 한낱 남루이므로/부귀공명이 끝끝내 그리운/타고난 살결까지는 다/가릴 수가 없었겠지만>(「가난에 대하여」, 『까마귀떼』) 그러고. 그게 서정주 선생을 비아냥거린 건데. 그리고 그 시는 박재삼 선생 시집(『비 듣는 가을나무』)을 읽고 쓴 시이기도 해요. 그 시집 읽어보니까 박재삼 선생의 가난이, 박재삼 선생이 겪은 그 가난이 정말 찬란해요. 아름다워요. 그래 박재삼 선생 시집 읽고 충격을 받아서 쓴 시이기도 해요. 서정주 선생을 비난하기도 하면서. 허허허.

 

 

 

(채상우 이하“): 선생님께서 최근에 내신 시집 제목(<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이 참 눈길을 끕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선생님 시집을 읽어보니까 선생님은 어쩌면 한번도 길을 잃으신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양: ……. 늘 길을 잃고 싶으니까, 늘 길을 잃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까……. 우리 사는 걸 보면, 말하자면 귀소본능 같은 게 있어서 아무리 술이 취해도 집으로 돌아가잖아요? 술자리 끝나면 다 집에들 간다고. 그러면 난 <아이, 시끼들아, 갈 데가 집밖에 없냐!> 그러는데. 허허허.

 

 

 

: 길을 잃은 적은 없으신가요?

 

정양: 길을 많이 잃어버렸어야 했는데……. 지난번에도 몇 사람이서 술 한 잔 했는데, 술 먹고 했던 얘기가 <오늘밤에는 모두 다 길을 잃어버립시다>, 허허허, 그랬었죠.

 

 

 

(어떤 중이 조주 화상에게스님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그것 역시 스님께서 빠지신 소굴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조주 화상은일찍이 오 년 전에 그런 질문을 내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직도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라고 답했다.

 

趙州分疎不下, 碧巖錄

 

 

 

: 이번 시집(『길』)에서 단연 압권은 마현리 시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전 그 시들을 읽으면서 이시영 선생의 근작이 떠올랐습니다. 작년에 나온 이시영 선생의 시집들(『바다 호수』, 문학동네, 2004 및 『은빛 호각』, 창비, 2004)을 보면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나 창비 시절의 체험들, 그리고 고향 마을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김지하 선생이 근래 당신 시의 스승은 조동일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라고 직접 밝혀놓았던 게 기억납니다.(김지하, 「내 시의 스승은 조형 다음에 또 이형」, 『유목과 은둔』, 창비, 2004) 물론 김지하 선생의 시는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세 분의 시가 함께 호흡을 나눠가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양: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겠지요. ……. 내 경우엔 나이가 드니까 예전 시골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자꾸 아까워져서 그런 거죠. 사실은 여기에 써놓은 이야기들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성적으로 문란한 이야기들도 있고. 나이가 드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좀 정리해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쓴 거예요. 그리고 사실 1부에 있는 시들을 보면 서정성보다는 서사성을 더 중시하잖아요? 그러니까 서정시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질들을 포기한 상태에서 서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쓴 시들이란 말이거든요. 말하자면 차라리 좋은 시가 되기를 포기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들을 우선 써놓고 봐야지, 그런 생각이 앞서서 쓴 시들이 마현리 시편이에요. 사실은 고칠 데가 많아요.

 

 

 

: 아까 선생님께서 근래 쓰신 마현리 시편에서는 나를 쑥 빼봤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점은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있겠다 싶습니다. 우선 이전 시들에 비해 무척 밝아졌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정양: 그렇죠. 사람들이 내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시가 어둡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일부러 안 어둡게 쓸 수도 없는 거고.

 

 

 

: 칠팔십년대 시들은 정말 비장했죠. 사실 누구나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구요. 그리고 구십년대 중후반까지도 이전 연대의 기억들이 여러 시인들의 시집들 곳곳에 묻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선생님의 네 번째 시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해장국밥 앞에서」와 「모항에서」를 보면 김남주 선생과 이광웅 선생에 대한 부채의식이 문면에 직접 드러나 있습니다.

 

정양: 실제로 나는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한테 부끄러운 게 그런 거예요. 말하자면 시를 안 쓰고 살던 그 시절, 그 중요한 시기에 한번도 봉급을 안 받아본 달이 없었어요. 언제나 교편을 잡고 있었지. 그때 그 친구들은 학교도 그만두고 감옥에도 가고 그랬는데, 난 한번도 봉급을 안 받아본 달이 없이 살았어요. 그 점은 참 부끄러워요. 언젠가 <한번도 월급을 안 받아본 일이 없이 살았다는 게 시인으로서 참 부끄럽다>고 쓴 적이 있어요. 그게 미안하죠. 주변 사람들 보면. ……. 팔십년대에 학생들 데모 많이 하고 그럴 땐 늘 아이들을 따라다녔어요. 애들 뒷풀이도 많이 해주고. 그러니까 학교에선 요시찰 인물이 되어가지고 늘 뭐 도청도 당하고 학교 안에서는 저 사람이 운동권 대부다 그러고. 그때는 운동권이라는 말을 썼죠. 난 그때 학생들 그러는 게 참 좋았어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못 나가게 했어요. 얼굴 다치면 안 되니까. 허허허. 그땐 아주 험했어요. 팔십년대엔 백골단이라는 게 있어가지고 막 쇠파이프로 사정없이 학생들 두들겨 패고 그랬어요. 진짜 인정사정없이. 여하튼 팔십년대엔 이 학교에서 가장 문제 선생이 되어가지고 학교에서 날 쫓아낼라고 그러고. 허허허. 그러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고 앞서 나가고 그런 일은 없이 살았어요.

 

 

 

: 시집 가운데 「빈 무덤」(『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같은 시를 보면 아버님의 사연도 만만치 않은 듯싶은데요.

 

정양: ……. 마현리 이야기는 사실 이 다음에 쓰고 싶은 글의 배경 삼아 쓴 거예요. 우리 아버지 얘기나 우리 할아버지 얘기를 인제 좀 쓰려고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그 뭐랄까, 사회주의자였어요. 사회주의자였는데. ……. 기수 아저씨(「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에 등장하는 인물) 같은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심어놓은 사람이었어요. 세포. 우리 아버지는 육이오 전에 돌아가셨어요. 

 

 

 

김조: 실종되신 게 아니구요?

 

정양: 실종이 아니고. 이런 얘기는 좀. ……. 여하튼 우리 아버지 얘기나 할아버지 얘기를 쓰려고 배경 삼아 이런 작업(마현리 시편)을 좀 했어요. 우리 아버지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 ……. 여운형 씨,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씨하고 무슨 일을 같이 했어요. 건국준비위원회 일을 같이 하다가 여운형 씨가 암살당한 뒤에 철도파업, 대구폭동, 대구항쟁 뭐 그런 것들을 하고 다니시다가 검거되어 가지고 육이오 나기 전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어요.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그 무렵이 어떤 때냐 하면, 사상범들을 재판하기 귀찮으니까 그 사람들을 여순반란이 일어난 그 현장으로 압송해요. 지리산 근처나 그런 쪽으로. 그 현장 근처로 가서 즉결처분을 해요. 유진오, 이병철 같은 쟁쟁한 시인들도 그렇게 해서 남원에서 즉결처분 당했어요. 문단 일각에서는 그 사람들을 빨치산이다, 참전용사다 그러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아요. 아마 다른 데서 검거해 가지고 현장에서 잡은 것처럼 그렇게 즉결처분한 걸 거예요. 재판하기 싫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됐을 거예요. 그때 우리 식구가 서울 종로5가에 살았어요. 효제동. 내가 효제국민학굘 다녔어요. 근데 식구들이 말이죠, 서대문 형무소에 문이 몇 개 있는데 그걸 다 지켰어요. 여기서 나가면 죽는다고, 거기서 끄집어내가지고 남쪽에 가서 즉결처분하니까, 나가는 것을 못 나가게 지킨다고 아는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형무소 문들을 지키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빼돌려서 남쪽에 가서 처형시켰을 거예요.

 

 

 

김조: 그때가 정확히?

 

정양: 그때가 국민학교 2학년 때지. 육이오 나기 전해. 육이오가 삼학년 때 났으니까.

 

 

 

김조: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정양: 어렸을 때는 우리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하고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마지막 기억이 참 오랜만에 집에 와가지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그 무슨 동물이야기 책 한 권 사주셨던 거예요. 골목길에서 만났는데 내가 인사를 잘했다고. 육이전 전에,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땐데 그게 마지막 기억이에요. 그때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잠복근무도 하고 우리 집 식구들을 밖에 못나가게 하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아버지한테 보내는 표신데, 대문에 뭔 표시를 허도록 되어 있었어요. 대문에다가. 말하자면 집에 들어와도 좋다는 그런 표시를 해두면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잡혀가실 때는 이미 집안 전체가 장악이 돼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무심코 그냥 집에 들어오다가 잽혀가지고 가셨는데, 그땐 좀 허했어요. 아유, 웬 아버지 얘기는 쓸데없이 해서. 허허허.

 

 

 

김조: 아까 마현리 시편을 쓰신 이유가 후에 아버님이나 할아버님 이야기를 쓰시기 위한 배경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후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정양: 마음 준비만 하고 있지요. 우리 할아버지도 말하자면 그 마을에서는 신화적인 인물이에요. 힘이 세가지구 산길을 가다가 산적을 만나면 소나무를 뽑아서 막 휘두르고 그래서 산적들이 놀라 달아났다고도 그러구. 허허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산에다가 산일을 해가지구 묘 앞에다 상석 같은 거 가져다 놓으면 그 돌을 엄한 데다 던져놓고. 혼자. 그렇게 힘이 센 그런 할아버지였어요. 그런데 그 양반이 돌아가신 뒤에 보니까 천장에 무슨 봉지들이 있었는데, 그게 구릿가루였데요. 구릿가루. 그래 마을 사람들이 구릿가루 먹고 힘을 썼다고. 허허허. 자신은 없지만 구한말 그런, 그 할아버짓적 얘기부터 하고 싶어요. 내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빼놓고 객관화시켜서 그런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그래서 그런 배경으로 이걸 좀 해야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