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私見] 막막함에 대한 존중

나는 왜 나의 젊음을, 또한 그 젊음으로 인한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나만의 언어를 고안해내지 않고 세대론이나 멘토들의 잠언에 의존할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 매우 주관적이고 사적인 영화 읽기. 영화 <허수아비>에는 몰라서 막막한데도 의존하지도, 도망가지도 않는 사내가 나온다. 대신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가! (본 리뷰에는 <허수아비>(제리 샤츠버그, 1973)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른 말씀에 조아리고 싶은 욕망

현재 개봉작도 아니고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온 것도 아닌, 이 오래된 영화를 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매년 초,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열어 다양한 감독과 배우가 소개하는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갖는다. 1973년 칸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는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영화였다.

그는 추천의 글에서 영화 속 풍경이 요즘 젊은이들의 내면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썼다. 이 말이 마음을 끌었다. 물론 세대론을 그다지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젊은이의 내적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그 젊은이들이 너무나 제각각이지 않나 싶긴 했다. 또래라 하더라도 계급, 젠더, 학벌 그 외의 무수한 조건에 따라 균질적이지 않으며 그만큼 마음 속 정경도 모두 다르리라.

영화로 예를 들자면, <타임 투 리브>(프랑소와 오종, 2006)에는 아무리 허비해도 삶이 동나지 않을 것 같던 젊디젊은 남자가 나온다. 그런 그가 시한부 암 선고를 받고 처음으로 찾아가는 사람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아니라 할머니이다. 질병을 가진 후, ‘젊음은 그 자체로 그에게 너무나 마음 아픈 과거이자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제 그의 동지는 느리고 빌빌대는 노인들이고, 동료의식을 매개하는 것은 취향이나 일, 쾌락, 역사의식 등이 아니라 죽음과 소멸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대상은 연령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성이라는 것은 허구다. 생각은 이렇지만, 이 생각대로라면 저 추천사에 마음이 동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 추천사에 끌린 이유는 조금 더 감정적인 문제였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어디 한번 젊은이들의 내면을 (그런 게 있다면!) 당신은 어찌 보고 있는지 펼쳐 보쇼!’ 하고 호기롭게 까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명한 어르신이 ‘너희들 마음속 풍경은 이렇지 않니’ 하고 슬쩍 내비치면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고 그 아래 조아리고 싶은 욕망에 더 가까웠다. 이는 추천의 의도를 완전히 빗겨난 것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욕망이 있었다. 이제 20대를 살짝 벗어난 나이이기는 하나 그래도 연세 지긋한 노감독보다야 젊음을 관통하고 있을 인간이, 오히려 그에게서 젊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이상한 욕망.

이 의존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는 사실 그다지 당황할 것 없는 익숙한 욕망이다. 물론 20대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의존성으로만 환원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 자기 세대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비교항으로서 20대를 이용한다거나(386 세대의 경우), G세대로 대표되는 “’20대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포섭 전략‘, 즉 자신의 규정에 들어오는 20대가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구실“(이택광)로 세대론을 전파하려는 시도를 간과할 수는 없다.

G세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태어난 세대로 글로벌 마인드와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무장하고 자란 ‘글로벌 세대’를 말한다.

하지만당사자 운동보다는, ‘위대한 멘토(이외수, 김태원, 김난도 등등)’나 세대론에 매달려 내 고통에 이름을 붙여달라고, 내 처지를 설명해낼언어를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침(“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88만원 세대>)과 위로 (“그대, 좌절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안주하는, 질긴 의존성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왜 답을 직접 생성하지 못하고, 다만 간절히 구하는 것일까. ‘멘토링의 이데올로기적 함정 말고, 이를 추진하는 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아니, 개인까지 갈 것도 없이 내내면의 풍경은 무엇일까.

내가 느낀 저 의존성은 실은 ‘정말’ 모르겠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감독이 <허수아비>라는 영화의 정경이 젊은이들의 내면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했을 때나는 도대체 저 영화가 어떤 정경을 품고 있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굉장히 화가 나고 곤두서있을 것도 같고, 쓸쓸할 것도 같고, 답답할 것도 같고, 피상적이고 천박할 것도 같고, 우울할 것도 같고, 우울하여 죽어버리고 싶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죽을 만큼 우울한 건 또 아닌 정도일 것도 같았다.

한 마디로 젊은이들 각 개인이 불균질한 만큼이나, 내 속에도 일관된 내면의 풍경이 없었다. 여러 감정들이 분화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덩어리로 어딘 가에 턱 걸려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누가 좀 네 내면 풍경은 이거다! 결정 지어줬음 좋겠기도 하다. 그것이 기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것은 아이러니다. 그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하기 힘들다.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고 있기에, 그리고 경험은 용어와 달리 지극히도 복잡하기에 명쾌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반면 누군가 명쾌해질 수 있다면, 그는 과거에는 앓아본 ‘적’ 있을지 모르나 현재는 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젊음이든, 뭐든. 그러나 모호함은 불안을 야기하므로 오히려 경험하고 있는 자들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답을 구하러 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가장 핫한 문장이 괜히 “불확실성 속에 있으므로 버겁고 어두운 시기가 바로 청춘이다”인 게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고용과 생존의 불확실성을, 보편적인 심리적 문제로 환원하여 버티라고, 이는 모두에게 주어진 ‘인간’의 조건이므로 낙오하면 그것은 네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일말의 진실도 품고 있다.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을 때, 바로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명쾌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끝없는 의문만이 반복된다. 그리고 내가 영화에서 어떤 ‘내면의 풍경’을 봤다면, 그것은 바로 이 ‘모름’이었다. 주인공 중 청춘에 속하는 프란시스가 보여주는 초반의 밝음과 긍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도, 무엇과 싸워야하는 지도 모르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 총체적인 거부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냉혈인간의 허수아비화()

영화는 두 남자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한다. 6년간 감옥 생활을 한 맥스(진 핵크만 분) 5년간 선원생활을 한 프란시스(알 파치노 분), 황량한 도로 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다 친해지게 된다. 둘은 함께 피츠버그에서 세차사업을 하기로 하고, 피츠버그에 가기 전에 맥스의 동생이 살고 있는 덴버와 프란시스의 아내와 아이가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에 들리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두 주인공은 단순히 상반된 성격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각자 복잡한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대립된 요소들은 여행을 하면서 섞이고 역전된다. 마치 둘은 부둥켜안고 세상을 굴러다니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 같다.

한쪽은 끊임없이 화를 내고 경직되어 있다가 웃는 법을 배우고 이완되지만(맥스), 한쪽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움직이다 어느 순간 소금 기둥처럼 굳어버린다(프란시스). 앞서 말했던 ‘모름’은, 프란시스의 경로를 말한다. 그러나 일단은 맥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진 핵크만이 연기하는 맥스는, 큰 덩치에 항상 많은 옷을 껴입고 다닌다. 그가 잠들기 전에 끝없이 옷을 벗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인데, 내복 한 벌, 흰색 티셔츠 두 벌, 검은색 티셔츠 한 벌, 남방 세 벌, 카디건 한 벌, 코트 한 벌, 상의만 총 아홉 벌을 차례대로 벗는다. 이렇게 껴입고도 그는 늘 한기를 느끼며 따뜻한 커피나 오트밀을 찾는다.

그는 스스로를냉혈 동물이라고 칭하며 자신은 항상 추위를 탄다고 말하는데, ‘냉혈이라는 표현에는 타인에게 냉담하다는 것과 동시에 항상 온기를 쫓을 수밖에 없는 취약함이라는 상반되는 면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사가 있는데, 그는 프란시스를 처음 만나 “I don’t trust anybody, I don’t love anybody” 라며 자신을 배신했다가는 가만 안 놔두겠다고 위협한다. 그는 불신에 차 있고 누가 자신을 해할지 항상 경계하고 있으며, 사소한 문제에도 싸움을 일으킨다(그래서 6년 간 감옥 생활을 했다).

반면 프란시스는 모든 공격적인 것들을 강박적으로 막아보려는 습성이 있다. 예를 들어 맥스가 다짜고짜 폭언을 해대는 여자와 싸우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나 좀 봐요!’라며 소리치고는 마네킹에 자신의 코를 끼우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과장된 움직임을 통해 주의를 전환시키려 애쓴다. 그는 웃음을 통해 점차 고조되어 가는 공격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이완시켜버린다.

이는 영화의 제목인 ‘허수아비’와도 연결된다. 프란시스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일삼는 맥스에게 사람들을 때리기보다 웃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까마귀가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까마귀는 허수아비를 우스워해. 우스꽝스러운 모자에 어설픈 모습을 보면서 실컷 웃고는, 주인이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착한 사람인 것 같으니 그냥 가자고 하는 거지.

프란시스에게는 약간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천사나 백치 같은 이미지가 있다. 그가 코미디로 맥스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의 웃음 속으로 이끄는 장면은 자주 반복되지만,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건 술집에서 벌어지는 작은 축제 장면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그 장면은 이상하다 못해 기묘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그의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가 세차장에서 무엇을 나누어 줄까,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막대 사탕! 하고 외치고는 죽도록 웃고, 공짜 풍선! 하고 외치고는 죽도록 웃는다.

그 장면은 유독 갓 술집에서 캐스팅한 것 같은 평범한 얼굴들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그 속에서전문 배우인 맥스와 프란시스가 오히려 튄다). 그들이 미친 듯이 웃을 때, 마치 다들 웃음에 굶주렸던 것 같아,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웃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 같아 뭉클하다. 정말이지 깜짝 놀랄 만큼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 상황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원을 만들어 가게 밖까지 나가 행진을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우주복을 입고 술집 앞 공터의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프란시스를 향해, 사람들은 마치 메시아를 맞이하듯이 모두 깔깔 대며 절을 한다. 해사한 긍정이 승리를 거두는 듯하다.

웃음과 기쁨은 모두에게 잔잔히, 그리고 고르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맥스 역시 프란시스에게 웃는 법을, 타인을 웃기는 법을 배우며 허수아비가 되어간다. 영화의 후반부, 맥스는 늘 그래왔듯이 주정뱅이와 그의 조카랑 싸움을 벌이려 하고 그런 그를 보며 프란시스는 자신에게 배운 게 그리 없냐며 실망한다. 그러자 맥스는 그를 달래기 위해 그가 우스운 허수아비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자신을 겹겹이 방어하고 있던 수 겹의 옷들을 차례차례 벗으며 식당에서 스트립쇼를 흉내 낸다. 그런 그를 보며 잔뜩 싸울 준비를 하며 권투 자세를 취하고 있던 주정뱅이의 조카도, 슬슬 웃으며 몸의 긴장을 풀어낸다. 술집에서의 축제 장면처럼 이번 역시 주변이 웃음으로 빛난다. 하지만 정작 기뻐할 줄 알았던 프란시스는 이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미묘하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까불이

주변 사람들을 죄다 미지근한 목욕물에서 갓 나온 것처럼 노곤하게 이완시켰던, 천사 같은 프란시스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나. 앞서 이야기 한 대로 그는 아내인 애니를 만나기 위해 디트로이트에 들리기로 한다. 애니를 아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녀는 전 애인으로 그는 5년 전 혼전 임신한 그녀를 버리고 배를 탔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이에게 선물을 건네주겠다는 꿈을 갖고, 여행을 하는 내내 선물로 준비한 스탠드를 가지고 다닌다.

디트로이트를 가기 전 덴버에서, 그는 맥스의 싸움에 말려들어 잠시 감옥에 가게 된다. 그 곳에서 그는 라일리라는 죄수를 만나게 되고, 그의 줄을 타 감옥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좋은 보직을 맡아 편히 일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라일리는 프란시스를 강간하려 하고 이를 거부하다 프란시스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프란시스가 믿었던 웃음의 힘이 서서히 무너져 간다. 그는 라일리와 술을 마시고 웃고 까불며 한껏 무방비해져 있다가, 돌연 폭력을 마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떨떨한 상태에서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을 하며, “이고르, 이 몹쓸 괴물아! 그만두지 못할까”류의 장난을 계속 쳐보지만 장난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사실 프란시스는 겉은 유약해보이나 누구보다도 신념이 강한 인물이다. 웃음이 인간을, 세상을 바꾸리라는 강한 신념. 그리고 영화는 이 장면 전까지, 냉소적인 맥스가 그에게 감화되어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부터 다른 경로, 붕 떠 있다가 추락하게 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김영민은 <산책과 자본주의>(2007)에서, “의도가 몸을 비껴가고, 선의가 지옥을 불러오는 체험들 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몽의 명암을 동시에 접하면서, 우리는 차츰 악의를 느끼고 이해하고 소화하게 된다”고 했다. 이 문장을 빌려 표현하자면, 저 강간 장면은 프란시스에게 ‘선의가 지옥을 불러오는 체험’이자 ‘악의를 소화’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장이 된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통해 ‘계몽’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기에 이렇게 아픈 건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 뒤로 그는 말수가 적어지고 위에 맥스가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었음을 기쁘게 증명할 때에도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웃음이 뽑혀나가자, 그는 텅 비어 버렸다.

그리고도 아직 불행이 남았다. 마음을 방어할 줄 아는 맥스는 예감이 좋지 않다며 프란시스에게 애니를 찾아가지 말자고 하지만 그는 끝끝내 디트로이트로 간다. 그는 애니의 집 건너편 공중전화에서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전화를 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애니는, 둘 사이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이 되어 네 아들은 태어나지도 못했다고, (둘은 정황상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 같다) 세례도 받지 못하고 죽었으니 구원도 못 받는 다고, 네가 그 아이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희구하던 꿈이 어그러지는 순간, 프란시스의 무언가가 툭 끊어져버린다. 통화 내용을 묻는 맥스에게 그는 이제까지 해오던 슬랩스틱의 몸짓을 보이며 행복을 과장하지만, 사실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라 보인다.

둘은 큰 분수대가 있는 공원으로 걸어간다. 날씨가 음산하고 바람이 거칠어 분수대의 물줄기가 사방으로 갈기를 펼친다.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 또래의 남자애들을 만난 프란시스는 그들의 손금을 봐주며 이전처럼 장난을 치지만, 그 속에 즐거움과 이완은 더 이상 없다.

그가 아이들의 손금을 보며 들려주는 예언, “너는 단추 공장장이 될 거야. 그리고 미쳐서 단추를 모두 먹어 버릴 거야”라는 말 역시 이미 어딘가 비틀어져있다. 그는 무방비 상태에서 급격하게 폭력 속으로 진입하게 될 때의 그 당혹감, 라일리가 주조했던 그 상황을 아이들에게 똑같이 재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장난을 치면 칠수록 웃음은 사라지고, 아이의 엄마는 불안하다는 듯 그쪽을 자주 힐끔힐끔 쳐다본다.

결국 그는 자신을 가장 닮은 아이를 들쳐 업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고, 이에 놀라 엄마가 비명을 지르자 맥스가 아이를 놓지 않으려는 프란시스에게서 겨우 아이를 뺏어온다. 그는 이제 분수의 사자 동상에 올라가 ‘실버 선장을 사랑해야 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동상에 미동 없이 딱 붙어있다.

겨우 맥스가 그를 떼어 내고, 프란시스는 그의 팔에 안겨 긴장증(catatonia) 증상을 보인다. 그는 마치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완전히 굳어버려 그 어떤 외부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차에 부딪히기 직전의 놀란 눈을 한 상태로 박제가 되어 버린 짐승처럼, 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그는 ‘멈춰버린다’. 그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다.

긴장증(catatonia)
1874 kahlbaum이 처음 소개한 긴장증(catatonia), 현재는 정신분열증의 아형으로 분류된다. 대개 운동의 증가(심한 흥분)와 운동의 감소(심한 혼미)를 나타내는데, 특히 긴장성 혼미에서는 의식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외부 개입에 반응이 없고, 동작이나 자세를 변경하려는 노력에 저항하며, 입을 다물고 전혀 말하지 않는 등의 증세를 보인다.
 
 


긴장증(Catatonia)

긴장증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자세를 유지한 채 그 어떤 외부 자극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세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도리어 근육을 긴장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그들은 그저 가만히 있기에 자발성이 결여되어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에너지로 (결국 탈진하게 된다) 변화와 외부 세계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던, 허먼 멜빌의 소설에 나오는 필경사 바틀비와 유사하다. 그들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저항’이 아닌 총체적인 거부, ‘아니다!’ 라는 선언만을 보여준다. ‘무엇에’ 대한 아니오, 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소설에서 변호사가 바틀비의 불가해성에 점차 빠져드는 것처럼, 긴장증을 보이는 사람의 내적 세계 역시 궁극적으로 알 수 없고 (그들은 단지 멈출 뿐 증상의 의미나 정서적인 고통에 대해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매혹된다.

그러므로 이는 필시 나의 투사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완전한 거부와 정지를 보면서 고통의 원인도, 싸워야할 대상도 알지 못하는 막막함을 보았다. 프란시스는 무엇과 싸워야하는지 몰라 ‘모든’ 외부 세계를 거부해버렸고, 웃음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잃은 뒤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몰라 정지해버렸다. 마음 속 깊이 ‘아니다,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하는 ‘부정’은 격렬하게 느끼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의 막막함.

그의 딱딱하게 굳은, 정지된 몸을 보면서 막막함을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어쩌면 프란시스의 거부를, 서론에 썼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명사들의 잠언과 판단에 의존하고 싶은 나의 욕망과 대비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종종 내용보다도 단정적인 어조에 위로받듯이, 청춘이든 뭐든 나를 설명할 언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막막함과 불안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적도 많았다. 막막함에 머무르는 것보다 답에 매달리는 것은 항상 손쉬운 선택이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죽은 듯 누워있는 프란시스를 향해 맥스는, 이제는 너와 함께 하지 않는 세차장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병원비를 구해오겠다고 돈을 맡겨 놓은 피츠버그로 떠난다. 그러면서 그는 프란시스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그 기다려달라는 말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귀에 맴돌았다. 하지만 결국 기다려야 할 이는 프란시스가 아니라 맥스가 아닐까. 누군가 막막함을 해제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막막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를 기다려주는, 또한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도리어 나의 정답을 흩트려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