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gender) 전공하는 남자 – 김올튼

김올튼. 1984년 전주 출생. 전교조 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학교에 들어가면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한 첫 주에 바로 학내 동아리인 ‘노동문제연구회’에 가입했다. 동아리 활동 중 여성노동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노동문제와 젠더문제의 접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졸업 후 스웨덴의 룬드 대학교(Lund University)에서 Gender Studies를 전공하며 유럽 내의 이주여성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들어가며

올해 초, 스웨덴에서 형을 처음 만났다. 형은 오전에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거나 책을 보다가 밤10시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생활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형은 과제가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수업에서 언급한 거의 모든 자료를 읽는다고 했다. 형은 왜 하루 종일 책만 볼까. 형은 왜 이 머나먼 스웨덴까지 와서 젠더를 공부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 열심히.

젠더 공부를 스웨덴까지 와서 지속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형은 공익복무기간 동안 지역의 여성단체에서 2년간 자원활동을 했는데, 그 때 경험이 젠더 공부를 계속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자원활동 하던 시절에 성매매 집결지에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어. 밤 10시부터 새벽 두, 세시까지 어떤 남성들이 오나,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오나 봤는데, 생각보다 많은 남성들이 꾸준히 찾아오더라. 보통 여러 명이 술 한잔씩 하고 오더라고.  예전에 정희진 씨가* 『페미니즘의 도전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거든. 성매매는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 24시간을 혁명하지 않고는 변화가 불가능한 문제라고.  나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남성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느꼈어.”

 

‘공적’인 곳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 남성은 국가나 자본의 형태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가족, 이성애 관계, 성매매에서는 관계성을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감정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지만, 여성주의 정치의 최후, 절대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 그들의 24시간을 혁명하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남성 젠더 문제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성판매 여성’의 인권 중에서.

 

군대를 갔다 와서 4학년에 복학한 후,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형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Gender전공? 남자가? 스웨덴까지 와서? 아니, 도대체 왜???

사실 이 인터뷰는 형을 만난 그 날부터 시작된 셈이다.

 

 

1.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퍼슨웹(이하 “퍼”): 스웨덴에서 젠더학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는 반대 없었나요?

김올튼(이하 “김”): 다행히 집에서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퍼: 젠더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김: 대학교 때 <노동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어. 그 동아리에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선배들과 동기들이 많아서 영향을 받았어. 정치학과에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지. 주변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

퍼: <노동문제연구회>요? 거기는 왜 들어갔어요? 과 학회였나요?

김: 중앙동아리였고 대학교오면 학생운동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찾아갔지.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싶어서 들어간거야. 입학하고 3월 첫째 주에 들어갔던 것 같아.

퍼: 입학 초기에는 다들 미팅이나 술, 여행… 이런 대학생활을 꿈꾸지 않나요? 어떻게 형은 바로 학생운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시나브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 아버지가 전교조 활동을 하셨어.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나 하시는 활동도 보고, 집에 있는 책도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어. 그 영향을 많이 받았지.

퍼:  어떤 영향인가요?

김: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어 보셨었어. 당연히 이순신장군이라고 대답했는데, 아버지는 거북선을 실제로 만든 사람은 이순신장군이 아니라 당시 일반백성들이나 목공들이라고 하시더라고.

퍼: 아.

김:  그리고 <노동의 역사>라는 만화책을 읽었던 것도 기억의 나. 자본주의 역사를 노동자의 시각에서 그렸던 만화였어. 

퍼: 흔한 일은 아니네요.

김: 그렇지, 흔한 일은 아니지, 내가 초등학교 때 단편소설을 썼었거든, 아주 짧은 소설, 그때 내용이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에 관한 얘기인데, 중국 조선족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노가다’ 일을 하면서 힘들지만 돈을 차곡차곡 모으다가 같이 일하는 한국 동료에게 사기를 당해. 하지만 미등록신분이라 경찰에 신고하지도 못하고 결국은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내용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

퍼: <노동문제연구회>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어요?

김: 대기업 해고자 복직 투쟁 위원회하고 연대해서 주점을 열기도 하고, 매주 세미나도 했지.

퍼: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나요?

김: 스탑크랙다운(강제추방반대)이라는 이주노동자밴드와 함께 학내에서 하는 전태일추모제를 준비했던 게 기억에 남아. 인터뷰를 담은 영상을 뮤직비디오처럼 만들어서 학내에서 상영했었어. 혹시 글을 보는 사람 중에 성균관대학생이 있다면 이 동아리 활동을 추천하고 싶다.

퍼: <노동문제연구회>에서 여러 문제를 보았을텐데, 왜 젠더[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건가요?

김: 활동 중에 여성노동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어. 학습지교사나 대기업에서 해고된 여성노동자들도 만날 기회가 있었어. 90년대 말에 보험회사에서 해고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였거든.* 출산 휴가 후에 책상을 없애는 식으로. 이런 일을 접하면서 점점 노동문제와 젠더문제를 연관 짓기 시작했던 것 같아.

 

98년도에 IMF라고 적자타령하며 해고될 때 1700명이 해고됐는데, 1200명이 여사원이었다. 사내 결혼자, 관계사근무자, 맞벌이, 기혼여성, 신용불량자, 승급을 늦게 한 자•못한 자, 이런 식으로 해고대상자를 골랐는데, 그러니 10년 이상 근무한 여사원은 전원 해당됐다. ‘후배를 위해 선배가 희생해라’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며 여사원들을 내몬거다. (중략)

말로는 합의퇴직이지만 정리해고과정에서 완전히 여성노동자들 대상으로 해고리스트를 작성했다. 해고과정에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압력을 넣었다. 일차로 퇴직등록을 하면 기본급등퇴직금을 100%로 준다고 꼬시고, 2차로 등록하면 12개월 분에서 9개월만 준다고 을렀다. 그래도 할당량이 안되면 회사에서 찝어서 짤랐다.

* 당시 해고된 삼성생명직원의 퍼슨웹 인터뷰 “삼성의 젖줄은 누가 살찌우는가? 보러 가기

 

 

 

2. 현장에서 만난 ‘남성’의 얼굴

 

퍼: 젠더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김: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공익으로 복무했어. 그 때 복무하면서 여성단체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었지. 2년 정도.

퍼: 자원봉사 활동이 공익 활동 중 하나였나요?

김: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개인적으로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를 찾아갔어.

퍼: 그냥 혼자서요? 왜요?

김: 여성학 공부를 하려면 꾸준히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차별에 저항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알고 긴장해야 하는데, 공익 생활하면서 공무원사회에 찌드는 것이 무서웠거든.

퍼: 아..

김: 그곳에서 했던 봉사활동 경험이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진로도 결정하게 되었고.

퍼: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2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어요?

김: 심야 캠페인도 벌이고, 아웃리치 활동도 했어.

퍼: 그게 뭔가요?

김: 심야 캠페인은 유흥가 밀집 지역에서 남성들을 상대로 반성구매 캠페인을 벌이는 거야. 아웃리치는 그곳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만나는 활동이고.

퍼: 아웃리치 활동도 직접 했나요?

김: 나는 아웃리치 활동은 많이 못했어. 그래도 아웃리치 활동을 보면서 굉장히 인상적인 게 있었어. 활동가와 집결지에서 일하는 여성분들간에 만들어진 신뢰관계나 유대관계. 뭔가 거창하거나 특별한 게 아니라, 농담도 주고받고 일상적인 안부도 나누면서, 서로간에 라포(rapport, 상호간에 신뢰하며 감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 관계)를 쌓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 정말 오랜 기간 꾸준한 만남과 활동들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더라고.

퍼: 직접 활동해 보니까 어땠어요?

김: 심야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금요일 밤에 많은 남성들이 환하게 웃으며 업소에 들어가는 걸 봤어. 2차 대전 당시에 일본군인이 위안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한 군인이 웃으면서 기다리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진이 떠오르더라.

퍼: 아.

김: 아무런 죄책감, 문제의식 없이 위안소에 가는 일본군 남성의 웃는 얼굴과 업소에 환하게 웃으며 들어가는 한국인 남성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거였어. 지금 위안소는 없지만 위안소를 가능케 했던 조건들은 아직도 여기서 강하게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퍼: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나 보네요.

 

내가 스웨덴에 있던 시기에 한국에서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 형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형을 알게 된 지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흥분한 형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형은 대개의 경우에 웃으면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욕을 한다거나 흥분한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형은 그 사건을 두고 ‘파렴치’하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내가 그에게서 들어온 표현 중에 가장 강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 위키백과: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정리

 

3. 여성학은 재밌다

 

퍼: 형은 남자인데, 여성주의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김: 나는 남성이 여성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 그리고 이 공부가 재미있어.

퍼: 재미있다고요?

김: Gender study라는 학문 혹은 페미니즘은 차별에 저항하는 것에서 출발했잖아. 차별이나 모순, 예를 들어 인종이나 계층에 따른 차별, 동성애 혐오같이 다른 권력관계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고. 그래서 항상 변화하는 역동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거든.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퍼: “재미있다”는 표현이 굉장히 포괄적이네요. (웃음)

김: 응. 단순히 지적인 흥미가 아니라, 그 활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더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자신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학문이고 운동이라고 받아들일 때, 페미니즘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

퍼: 그런데 젠더학이 역동적이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김: 페미니즘, 젠더학을 접하기 전에 나는 나 자신이 무고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어. 예컨대 변해야 할 것은 지금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과 제도들이지 내가 아니었거든.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는 더 이상 내가 무고한 위치가 아닌거야. 나도 변해야 할 대상인 거지.

퍼: 아.

김: 내가 기존에 당연시하던 나의 일상, 예를 들면 밥하고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것, 그런 것도 다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버린 거지. 그런 점에서 젠더학이 단순히 전지적 시점에서, 무고한 위치에서 사회에 훈수를 두는 학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권력관계를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해준 것 같아. 그런 측면에서 급진적이고, 이 급진성이 계속 페미니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돼준 것 같네.

 

형은 공익을 마치고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갔다.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 졸업 후 1년 동안 유학을 준비하고 지금은 스웨덴 룬드 대학교(Lund University) 대학원에서 Gender study를 공부하고 있다.

 

퍼: 젠더학을 공부하러 스웨덴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김: 사민주의나, 성평등국가, 복지국가로 유명한 북유럽사회가 궁금하기도 했고. 실은 많이 알아서 온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왔어. (웃음)

퍼: 한국에서 젠더학은 주류 학문이 아닌데, 스웨덴에서는 어떤가요?

김: 같은 과에 스웨덴사람도 있는데, 스웨덴사람들도 그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본다고 하더라. 그 친구한테 급진적인 페미니스트거나 레즈비언이냐고 물어보기도 한데. 스웨덴에서도 젠더 연구가 소위 잘나가는 과는 아닌가봐.

퍼: 의외네요.

김: 같은 북유럽인 덴마크 젊은 여성들의 성평등 인식을 인터뷰한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20대 여성 대부분이 젠더 평등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권리가 평등해야 한다고는 생각한대.

퍼: 그래서 오히려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상황이란 건가요?

김: 그런데 이게 집단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고.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잘 지켜야 된다는 수준이지. 하지만 지금의 성평등은 일면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가능했거든.

*덴마크여성의 성평등 인식에 관한 인터뷰자료 :「Gender Equality and Welfare Politics in Scandinavian」 by Wetterberg, Christina Carlsson (EDT), Melby, Kari

 

룬드 대학에는 타국에서 온 학생들을 스웨덴가족과 연결해 주는 제도가 있다. 타국에서 온 학생들의 외로움을 달래고 스웨덴적응을 돕기 위함인데, 신청하는 학생수에 비해 가족수가 모자라서 신청가족이 학생을 고르는 방식이다. 형은 스웨덴가족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가족에게서 아시아계 남성이 스웨덴에 와서 젠더를 전공한다는 것이 신기해서 골랐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4. 불안한 스웨덴의 ‘평등’

 

퍼: 그곳에서의 수업은 어때요?

김: 한국에서 접해보지 않았던 텍스트가 많아서 재미있어. Queer에 대해서 많이 배우는데 여기에서의 관점은 단순히 여성, 남성을 나누어 공정한 권리를 찾자가 아니라, 이성애중심주의 자체에 대해서 고민을 던지는 것 같아. 이성애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여성권리운동이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인 거지. 여성이나 남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게이, 레즈비언까지 포괄해서 배우거든.

퍼: 한 가지만 얘기해주세요.

김: 지난 학기에 에콰도르에서 출간된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읽었는데 재미있더라. 둘 사이의 관계가 미묘하거든. 그 논문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논문이었어. 인터뷰한 트랜스젠더들이 레즈비언을 볼 때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대. 한편으로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부러워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남장여성이나 레즈비언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를 레즈비언과 구별지으려고 한다더라.

퍼: 관계가 미묘하다고요?

김: 이 사람들은 대부분 성매매업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서구 국가에서 온 백인 레즈비언이 자신들을 성애화[이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봄]하는 경우도 있어서 둘 사이의 긴장관계도 있다고 하더라. 우리는 이성애주의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사람을 하나로 묶어서 범주화하지만, 그 사이에 다양한 차이들과 권력관계가 있거든.

퍼: 아.

김: 물론 내가 읽은 논문은 철저하게 연구자가 만났던 에콰도르 트랜스젠더에 관한 내용이니까 이 내용을 일반화하기는 힘들 것 같고. 그러면 또 다른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생기는 거니까.

퍼: 요새 유럽 재정위기 이야기가 많잖아요. 스웨덴도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구요. 2010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반이민자정책을 내세운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이 원내에 진출했다고 하던데요. 스웨덴도 과거에 유지하던 ‘평등’기조가 변화하고 있지 않나요?

김: 나도 스웨덴의 과거는 잘 모르는데, 물론 경제나 정치의 영역이 평등에 입각해서 프레임이 짜여 있지. 법적인 강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비례대표제에서 50% 가까이가 여성의원에게 할당돼. 스웨덴 국회의원 가운데 40% 이상이 여성이기도 하고.

김: 한국과 같이 이곳도 여성에 대한 Glass Ceiling(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 막는 회사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말)은 있어. 노동시장에서 남성적 직업과 여성적 직업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거든. 여성은 공공부분이나 육아분야에서 일하고, 남성들은 사기업에서 일하고. 동시에 고위직에 생각보다 여성들이 많이 없어. 임금 차이도 있고. 작년에 페미니스트정당에서 성별에 따른 임금 차이만큼의 돈을 실제로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하더라고.

Sweden Feminist Party는 2010년 7월 스웨덴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남성과의 임금불평등에 항의하는 의미로 100,000 Swedish kronor, 한화로 약 1,700만 원의 돈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했다. 스웨덴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80% 수준이다. *관련 BBC 기사 보러 가기

김: 하지만 이것도 물론 스웨덴사람들 이야기고 이민자 여성의 경우는 상황이 더 안 좋지. 이주민들의 생활을 보면 노동시장이 인종화되거나 성별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

스웨덴의 복지국가모델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크게 성장했는데, 단순육체노동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서 누릴 수 있었던 전후의 단기적 이익이1960년대 들어 조금씩 사라지면서 단순육체노동자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었고, 스웨덴정부도 난민이민을 제외한 다른 목적의 이민을 점차적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현재도 인도적 차원의 난민이나 정치적 망명은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스웨덴 인구의 약 20%는 이민자이거나 이민자가족 출신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 스웨덴은 지자체 별로 모국어교육과 스웨덴어 교육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높은 청년실업률과 유럽의 경제위기 속에서 이민자에게 제공하는 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이민자 자녀의 경우 이차교육기관 진학을 위한 수료 시험의 탈략률이 스웨덴 학생에 비해 2.5배나 높다. 자연스럽게 학업을 지속하는 경우보다 식당이나 작은 식료품가게의 운영과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Lund 시내의 가게들 중에 가장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은 이민자가 운영하는 케밥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 여성의 경우 이민자가 받는 차별과 스웨덴 여성들이 받는 차별을 동시에 받고 있다.

 

김: 내가 공부하는 건물에서 청소하는 여성도 대부분 아시아계 여성이거든. 길가에서 청소하는 사람이 이민여성인 경우도 많고. 어느 정도 평등이란 원리에 입각해있지만, 그 안에서 인종화되고 성별화된 분리는 있는 것 같아.

형은 유럽의 이주 여성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5. 젠더적 시각이 필요할 때

 

퍼: 이주 여성에 관한 논문 주제가 구체적으로 뭔가요?

김: 유럽에서 이주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행위성에 대해 쓰려고 하고 있어. 여기서 공부하면서 아시아여성이 피해자화되어 있다고 느꼈거든.

퍼: 아시아 여성이 피해자화 되었다고요?

김: 일반적으로 제3세계에서 온 이주여성은 수동적이고 가부장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하고, 스웨덴 여성은 적극적이고, 평등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스웨덴이 내세우는 성평등의 가치가 오히려 자국인과 외국인을 가르고 타자화하는 기제로 쓰이는 면도 있더라고.

퍼: 실제로 그런 편견이 나타난 사례가 있나요?

김: 어떤 이주여성이 5번째 임신을 해서 산부인과에 찾아갔대. 그런데 간호사가 대뜸 성적자기결정권과, 몸에 대한 권리강의를 하더래.

퍼: 강의를요?

김: 그 간호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그 이주여성은 원치 않은 임신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지. 이 일화를 보면 스웨덴이 성평등의 가치를 강하게 지지하는 나라라는 걸 알 수 도 있지만, 동시에 간호사의 행동이 ‘수동적이고 무지한 이주 여성’이라는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퍼: 간호사의 ‘배려’ 속에 편견이 들어있는 거군요.

김: 9월에 한 스웨덴이주여성단체를 방문했는데, 여기 목표 중에 하나가 이주 여성에게 성평등을 배우도록 하는 거더라고. 물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주 여성에 대한 편견이 전제되어 있다는거지.

퍼: 아.

김: 나는 이주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주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일상의 권력관계를 협상하는지 주목하고 싶어. 단순히 구조나 권력관계에 의해서 포지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협상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가라는 측면의 행위성을 연구하려고.

퍼: 사회, 경제적 지위에 대한 분석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나요?

김: 행위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사회경제적 조건과 협상하면서 작동하니까. 단순히 진공상태에서 개인적 의지, 개인적 선택만을 행위성으로 간주하면 권력관계를 놓칠 위험이 있거든. 

퍼: 논문 다 쓰면 뭐할 생각이에요?

김: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Gender 쪽으로 박사도 하고 싶기는 하네. 그런데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좀 힘들 것 같고, 스웨덴도 박사과정은 잘 안 뽑아서. (웃음)  아마 교육대학원을 다니면서 사회과목 선생님이 되는 것을 준비할 것 같아.

퍼: 한국사회에서 주류학문도 아니고, 스펙에도 쌓이지 않고, 임용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석사도 아닌데,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다니… 형은 용감한가봐요. (웃음)

김: 나는 ‘용감’과는 거리가 멀어. 안전빵(?)을 택하면서 살아왔거든. 나에게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길을 살아온 것 같아. 내 기준에서는 내 길이 제일 편한거야. 물론 한국에 돌아가면 ‘잘못 생각했나?’ 할 수도 있겠지만. (웃음) 모험건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랬으면 못했을 것 같아. 나는 나중에 사회과목을 가르치고 싶은데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젠더가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교과서에 젠더적인 시각이 워낙 없거든.

퍼: 그런가요? 

김: 요새는 좀 바뀌기는 했을 거야. 여성단체에서 문제제기를 꾸준히 했다고 들었거든. 그래도 정치과목에 보면 보통 공과 사의 이분법 아래서 ‘공적 영역’의 시민권, 국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서 시민의 성별화된 역할이나 권리, 개인과 개인 사이의 성별화된 권력 관계는 나오지 않지. 경제과목에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확실해서 사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재생산노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퍼: 아, 학교 다니면서 그런 시각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김: 그래서 나중에 학생들과 수업할 기회가 생기면 같이 경제활동, 노동, 시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물론 젠더적 시각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한다거나, 젠더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고, 젠더가 다른 사회변수와 어떻게 얽히고설켜서 작동하는지를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퍼: 저는 형이 하는 공부가 교사로 취직하는데 도움이 될까를 먼저 생각했는데, 형은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웃음)

 

나오며

뭔가 대단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걸까?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된 화상 인터뷰, 그리고 그 후에도 몇 차례씩 주고받았던 이메일, 그 어디에도 내심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계기나 포부는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노동’이라는 말, 현장에서 만난 여성노동자들을 통해 그 동안 무고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절대로 무고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더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자신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학문이고 운동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형한테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항상 내 주변에는 페미니스트가 있었는데, 지금 공부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 아닐까. 주변에 취직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나도 취직했었을 것 같아.”

형은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스웨덴까지 가서 여성학을 전공하는 형의 꿈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형이 잠시 부러웠고, 또 잠시 내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형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궁금하다. 부디 이 인터뷰가 그의 지금보다 몇 년 후가 궁금한 인터뷰로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