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아들과 국토 한바퀴 – 이진섭

이진섭 씨는 발달장애인 이균도 씨의 아버지다. 두 사람은 지난 3월과 10월, 장애인 문제를 알려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 부산에서 광주를 걸어서 여행하는 ‘균도와 세상 걷기’를 통해 유명해졌다. 두 사람의 39박 40일 세상걷기 이후, 지난 4월에는 국회에서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 통과되기도 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난 봄, 눈에 띄는 소식을 접했다. 한 아버지가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스무 살 아들을 데리고 국토 종단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길이었다. 장애인 정책을 개선하라는 구호를 몸에 두르고 큰 가방을 짊어진 두 사람이 걷는 사진이 보였다. 아버지는 매일의 걷기 일지를 한 장애인 인권 관련 웹진에 소개하고 있었다. 기사를 보면서 무수한 물음표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물음표는 ‘어떻게 아버지가?’라는 것이었다.

보통의 가정이 그렇듯이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서도 자녀 양육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임이 분명할 때에도 아버지들은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 돌봄 노동에 익숙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예고없이 인생에 등장한, 장애를 가진 자녀를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어머니들보다 아버지들은 유달리 느린 편이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기사를 읽으며 무수한 물음표들을 떠올리고 또 아버지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두세 살의 지적 능력을 가진, 나이는 어느새 서른하나가 된 자폐성 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다. 발달장애인이란 이렇게 제 나이에 발달되어야 하는 신체, 언어, 인지 기능 등의 발달이 성취되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다.

스스로가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누나이면서도 발달장애인 관련 정책의 문제, 그들의 인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가족 안에서도 동생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나 역시도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고 아직 동생을 나의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균도 아버님이 마침 서울로 강연을 하러 오실 일이 생겨,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일의 만남은 예상치 못했던, 여느 때와는 다른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드님을 데리고 오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인터뷰를 준비한 우리는 그것을 뒤늦게야 알고 조금 당황했었다. 또 균도 아버님은 계속해서 돌봄이 필요한 아드님을 쉴 새 없이 신경쓰면서, 우리와 대화를 시작하셨다.

스무 살 아들과 떠난 여행


퍼슨웹(이하 퍼) : 아드님과 이렇게 오랜 기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이진섭(이하 이) : 제 모토가, 아빠가 아니고 친구가 되자는 거예요. 누구든 스무 살쯤 되면 친구들과 여행 떠날 수 있는 나이인데 그걸 못하는 균도가 안타까워서 걷기 시작했어요.

퍼 : 걷기 여행을 가자고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이 : 균도는 저하고 얘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설득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내 아이한테는 조금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나의 소원이었거든요. 각 지역 구경하고 특산물도 먹어보고요. 스무 살쯤 됐으면 여행할 나이인데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걸 배려하지 않기에는 내가 너무 비겁해보였어요. 혼자서는 힘들어서 여행을 못한다면 내가 따라가면 되는 거고, 균도는 기억력이 좋으니까 내가 빨리 죽어도 균도는 아빠하고 여행한 기억을 할 테니까 추억을 만들어주고도 싶었고요.

퍼 : 걷지 않을 때엔 주간보호시설에서 낮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 보내는 건 만족하시나요?

이 : 만족 못 하죠. 여러 모로 열악해요. 그렇지만 발달장애인들이 스무 살이 넘으면 마땅히 갈 곳이 없어요.

퍼 : 제 동생도 겪어 보니, 발달장애인들이 성인이 되고 나면 생활할 곳이 마땅치가 않더군요.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 저는 대규모 생활 시설에 대해서는 반대해요.

퍼 : 대규모 생활 시설이라면?

이 : 보통 장애인 생활 시설이라고 하면 저기 시골 산 중턱에 장애인들 2-30명이 모여 있는 시설을 말하죠. 그런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90프로가 발달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저런 애들 시설 한번 가보세요, 아이들에게 자유란 없고 기상 시간에 다 일어나고 낮잠은 금지, 밤에는 사람을 묶어놓다시피 하고 감시를 하는 곳이 태반이에요. 그건, 사람이기를 시설자체가 거부하는 거죠. 저는 그래서 대규모 시설이 싫다는 거죠.

퍼 : 대규모 시설의 획일적인 운영이 문제군요.

이 : 학생들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것, 학교에서 인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모두 대규모 시설에 한꺼번에 몰아 넣기 때문이 아닌가요? 획일적으로 하다보면 문제가 생기죠. 하물며 발달장애인들에게는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건 더더욱 안 돼요. 인지가 안 되는 애들을 그렇게 해서 뭘 합니까?

퍼 : 인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겠네요.

이 : 뿐만 아니라 저는 소규모 그룹홈*이라고 하더라도 도시에서 먼 곳에서 떨어져 장애인들끼리 생활하는 분위기로 만드는 것에는 반대해요. 도시 근처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거라면 필요하죠.

* 그룹홈 : 장애인 수용 시설의 대안으로 등장한, 지적장애인 서넛이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형태. 가정의 형태를 이루어 살아가면서도 자립생활, 사회적응, 지역사회와의 유대 등을 학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복지사가 함께 한다.


퍼 :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에 반대하신다는 거죠?

이 : 네. 소규모로 운영하되, 시내 중심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전남에서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마을*을 만드는 시도를 했는데요, 그것도 그런 시골 구석에다 만들어 놓으면 결국은 시설이지 그게 무슨 마을이 됩니까?  

* 함평 장애인 희망 타운 관련 기사 보러 가기

퍼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 그 방안을 부모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회가 함께 고민할 때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 발달장애인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퍼 : 발달장애인 법이요?

이 :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 법률은 과거 심신 장애인 복지법에서 왔어요. 그래서 거의 다 신체 장애인 중심의 내용이고, 발달 장애인 문제는 고민하지 않고 있어요.

퍼 : 발달 장애인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고 있네요.

이 : 예전에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죠. 그런데 요즘은 19세 이하 장애인의 70~80퍼센트가 발달 장애인이에요, 신체 장애인이 아니고요. 그런데 스무 살이 넘고 나면 이 아이들이 소수가 되어버려요. 전국에 장애인이 252만 명이고, 발달 장애인은 21만 5000명이거든요.

퍼 : 십 프로 정도네요.

이 : 네, 게다가 저건 등록된 수치만 계산한 것이고, 실제 장애인 수는 480만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더 많아요. 그런데도 ‘장애인’이라고 하면 다른 장애인에 대해서만 이야기들을 하죠. 그런데 발달 장애인이라는 건, 장애로 태어나서 장애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를테면 우리 균도는 혼자서 똥을 못 닦거든요. 똥 누면 엄마나 제가 가서 닦아 줘야 돼요. 부모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죠.

퍼 : 제 동생도 평생 어머니가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에요.

이 : 균도는 길을 가다가도 예쁜 여자를 보면 그 옆에 불쑥 가서 “이름이 뭐야?”하고 물어봐요. 갑자기 길을 걷고 있는데 저런 덩치 큰 놈이 다가가서 “이름이 뭐야?”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결국 이 아이는 평생을 부모가 24시간 옆에 붙어 있어야 돼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거죠.

장애인이라고 다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퍼 : 다행히 최근에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서비스*라는 제도가 생겨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여기에도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좀 설명해주세요.

* 장애인 활동 보조인 서비스 : 장애인의 일상생활 등을 보조하기 위한 활동보조인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에서 마련한 사회보장 제도.


이 : 그 활동 보조인 서비스의 자부담 원칙이 문제죠. 부모도 24시간 돌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나라에서 활동 보조인을 지원해주어야 하는데, 이 보조인의 도움을 받는 비용의 일부를 자부담하도록 제도가 되어 있어요.

퍼 : 전액을 나라에서 부담하기 어려워서인가요?

이 : 장애인도 일을 해야 먹고 산다는 원칙이죠. 사회적인 지원을 하되 일할 만큼 일을 하라는 건데요, 저희들도 무조건 받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문제는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문제예요. **

** 활동 보조인 서비스 자부담 원칙 관련 기사 보러 가기

퍼 :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부담금을 내기는 어렵겠네요.

이 :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1급밖에 받을 수가 없는데, 그 사람들은 일할 능력이 안 되잖아요. 일할 능력이 없는 그 사람들이,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자부담금을 많게는 30여만 원까지 내야 돼요. 이건 말이 안 되죠. 장애인은 그 자체로만 봐야지, 누군가가 그 돈을 내 줘야 하는 것을 전제로 만든 이런 정책은 잘못 됐죠.

퍼 : 자부담금을 내 줄 가족이 있을 거라고 전제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이 : 그렇죠. 만약 우리 균도를 제가 원조해주지 않으면 나라에서는 어떻게 할 건데요? 또, 발달 장애인뿐만 아니라 중증 장애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분들은 일을 할 수도 없는데 활동보조를 받기 위해 돈을 쓰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게다가 활동 보조 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한 이 발달장애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요. 한 달에 40시간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요.

퍼 : 왜 그런가요?

이 : 신체장애인들 위주로 서비스가 제공돼서 그래요. 팔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은 서울시 같은 경우는 360시간까지 활동 보조인 지원이 돼요. 유독 발달장애인들만 사회가 책임을 안 지고 부모가 책임을 져야 되는 상황이 문제인 거죠.

퍼 :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이 : 얘네들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발달장애인법을 만들어야죠. 다른 나라는 발달장애인 법이 따로 있어요. 신체장애인하고 다른 배려가 필요하니까요. 도로를 개선하고 버스를 개선하고 하는 것 말고 다른 부분이 필요하잖아요. 유럽 같은 경우는 발달장애인을 아예 포기를 했어요.

퍼 : 포기라니요?

이 : 발달장애인은 일을 못한다고 아예 전제를 하고 모든 부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어요. 이 부분만큼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받아들인 거죠. 신체장애인은 도움을 받으면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 조사 결과에 보면 신체장애인은 평균 월 75만원, 지적장애인은 월 15만원, 발달장애인은 월 7만원을 번다고 해요.

퍼 : 월 7만원이요?

이 : 노동시장에 나갔을 때 그렇다는 거예요. 발달장애인은 벌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런 현실인데도 장애인도 일을 해야 지원을 해준다는 신자유주의적인 복지 정책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복지 정책의 근간을 세운 사람이 유시민이죠. 저는 그 사람하고는 말을 안 하고 싶어요. 장애인 보기를 X같이 본 사람이죠.

퍼 : 참여정부 시절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던 때 이렇게 된 건가요?

이 : 아마 저는 정부가 바뀌어도 계속 반대 활동을 할 거예요.

퍼 :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장애인 운동을 계속 할 거라는 말씀이시죠?

이 : 그렇죠.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우리한테 호의적이지는 않았거든요. 장애인들이 집회하다가 잡혀가면 벌금을 지금 정부보다도 더 많이 때렸었죠.

퍼 : 말씀을 들으니 장애인 운동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는 것 같아요.

이 : 장애 복지 분야에 투입될 수 있는 금액이 어차피 정해져 있으니, 저희들이 발달 장애인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다른 장애인 분야에서 그분들 몫이 적어진다고 생각하세요. 실제로 국가에서 복지 예산을 계산할 때 장애인 숫자를 계산합니다. 그런데 신체장애인은 비교적 경미한 4, 5, 6급도 장애인 수에 계산이 되죠. 그런데 발달 장애는 1, 2, 3급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 이상이 1급이에요, 거의 중증 장애인인거죠. 단순히 장애인 숫자만 보고 복지 예산을 책정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퍼 : 신체장애인과는 구분된 정책이 절실하네요.

이 : 미취학 아동은 발달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하고 계산해 보면 문제가 심각해요. 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장애인 등급을 받거든요. 그 문제 말고도, ‘장애인 당사자 주의’를 들먹이면서 장애인 본인의 목소리를 중시하는데, 발달 장애인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거든요. 부모가 이야기하면 당신이 당사자가 아니지 않느냐는 말들을 하면서 배척을 하더군요.

퍼 : 답답한 상황이네요.

이 : 그래도 요즘은 부모운동이 활성화가 되면서 부모들을 당사자로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장애인 단체들은 우리들은 협력 단체 정도로만 인지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도 인생


퍼 : 아드님 얻으셨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 : 그때가… 스물여섯 살쯤이었을 거예요.

퍼 : 그 전에 이런 아이들 본 적 있으셨어요?

이 :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별로 관심 없었죠.

퍼 : 아드님이 장애를 가졌다는 걸 언제 아셨어요?

이 : 균도는 원래 난산이었어요. 낳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서도 균도가 살기 어려울 거라고 했고, 아이 엄마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받다가, 균도 엄마가 균도를 태어난 지 이십일 만에 볼 수 있었어요.

퍼 : 그러고 나서는 잘 컸나요?

이 : 네, 그런데 크다보니까 아이가 말을 안 하는 걸 보고 장애가 있는 걸 알았죠. 돌 지나고부터는 교육에 들어갔어요. 집사람이 유치원 선생이어서도 더 빨리 잘 알았고요.

퍼 : 빨리 알고 잘 대처하셨네요.

이 : 네, 빨리했죠. 그러니까 저만큼 된 거죠. 돈도 많이 들었죠.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는 집에서는 아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퍼 : 좀 늦을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 : 그렇죠. 게다가 많은 부모들이 장애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죠. 이번에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 생겨난 다음부터, 장애 진단을 받으면 돈이 나와요, 7세 이하는 한 달에 20만원씩. 그런데 이게 웃기는 게, 우리나라는 부모들이 돈을 잘 안 받으려고 해요. 교육을 받으면 좋아질거다, 애가 조금은 늦되다, 라고 믿고 싶어하죠.

퍼 : 장애인으로 딱지 붙이고 싶지 않은 거죠.

이 : 네, 그래서 뇌병변과 같이 눈에 띄게 심하지 않으면 안 받으려고 해요. 그까짓 10만원, 20만원 돈 받으려고 아이 장애진단 받으러 가는 부모 없죠. 그 법 이야기 듣고 나는 씩 웃었습니다. 그냥 누가 그걸 받겠느냐고. 그런 심리 때문에, 언어치료 같은 것도 빨리 받아야 아이들에게 좋은데 그거 잘 안하려고 하죠. 머리에 전기를 좀 통해주면 정상으로 번쩍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우스개 소리도 하거든요. 비 많이 오면 애들 내보내라고 그러잖아요? 번개 맞으라고.

퍼 : 맞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쩡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돌쟁이 아기를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치료 받게 하셨을 때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이 : 저는 처음부터 무덤덤했어요. 이것도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마, 안 되면 그냥 사는 거지. 그냥 지금도 그래요. 저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퍼 : 행복하다고요?

이 : 제가 교도소에서 군 생활을 했거든요. 그러다보면 수감자들 면회실에서 감시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죄 짓고 와 있는 자식들 면회 온 부모들을 보면서, 부모들 속썩이는 젊은이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렇게 애 먹이는 아이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죠.

퍼 : 아버님이 전적으로 균도 씨를 돌보시는데, 경제적으로는 괜찮으세요?

이 : 저희 집은 잘 사는 집은 아니에요. 사업하다가 진 빚이 있어서 집사람과 제가 한 달에 삼백만 원씩 칠년 동안 갚았어요. 그래서 지금 재산은 제로예요. 본의 아니게 수술을 받는 바람에 제 자신이 중증 환자이기도 하고요.

퍼 : 아니, 어디가 아프세요?

이 : 직장암 수술을 했어요. 발견 당시 초기여서 지금은 괜찮기는 하지만 당뇨하고 혈압도 있어요. 지금도 당뇨는 걱정이 많이 되는 수준입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에요. 약을 식전에 한 주먹씩 먹으니까요.

퍼 : 그런데 걷기여행을 할 수 있으셨어요?

이 : 저는 나의 몸보다 아이의 미래가 더 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일을 시작했죠. 게다가 암환자 아빠라는 사실이 발달장애인 이슈를 만드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사실은 좀 계산을 한 거죠.

퍼 : 암인 걸 알고 걷기를 시작하신 건가요?

이 : 암을 가지고 서울까지 걸어왔지요. 저는 균도 덕에 암을 알게 됐어요. 우리 지역에 가까이 있는 고리 원자력 의학원에서 돈을 반 부담해주고 장애인 가족과 기초수급자에게 건강검진을 해줬는데, 그때 직장 내에서 용종이 발견된 거죠.

퍼 : 다행히 빨리 알 수 있었네요.

이 : 그렇죠. 오십이 되면 의무적으로 검사 받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오십이 되고나서 검사하고 알았더라면 암이 많이 자라있었겠죠.

퍼 : 그래서 ‘균도 덕분’이라고 말씀하신 거군요. 암을 알게 된 것이 언제예요?

이 : 출발하기 이틀 전에 알았어요. 암은 초기에는 그냥 감기 같은 것일 뿐이에요. 병원에도 문의를 했더니, 어차피 바로 수술 날짜가 잡히는 것 아니니까 갔다 와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갔다 와서 수술하자고. 게다가 직장암, 대장암은 화이트칼라들의 병이거든요.

퍼 : 운동을 하지 않아서 걸리는 건가요?

이 : 네. 밥 먹고 앉아만 있어서 걸리는 병이니까. 결국 걷는 일은 내 몸을 위해서 시작했는지도 모르죠. 다행히 매우 초기였기 때문에 수술이 잘 됐고 지금은 앞으로의 상황을 보고 항암치료를 하자고 한 상태예요. 내시경 검사를 종종 할 뿐이고요.

퍼 : 너무 다행이네요.

이 : 저 아이 때문에 일을 하라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발달장애인의 음주, 결혼, 그리고 삶


이때 균도 씨가 사무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퍼 : 어머나, 술을 마셔도 돼요?

이 : 괜찮아요, 좀 먹다가 안 먹을 거예요.

퍼 : 제 동생은 술 못 먹게 하는데요.


: 저는 그런 거 제재 안 해요. 사람이잖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주는 먹여봤는데 안 먹더군요,
쓴가 봐요. 그런데 맥주는 가끔 마셔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잖아요. 우리들도 술 먹고 기분 좋은
것처럼 균도도 술 먹고 기분 좋아질 수 있죠. 뭐, 못 먹을 거 아니잖아요?

퍼 : 술을 많이 마셔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나요?


: 없었어요. 조금 먹다가 말더군요. 저는 뭐든지 다 시킵니다. 하고 싶어 하는 건 다 해보게 해요. 부모들이 자기 잣대에서
모든 걸 판단하고 애한테 안 시키고 막고 하는데, 이건 바뀌어야 해요. 해 보고 안 되면, 요만큼만 했어도 성공인거죠.

퍼 : 동생은 좀 어떻게 지내나요?

이 :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인데 스트레스 많이 받죠. 균도가 남들은 때리지 않는데 동생을 때려서요. 공부하는데 형이 때리니까 동생이 힘들어해요.

퍼 : 동생도 몸집이 클 텐데요?

이 : 네. 동생 균정이도 키가 175쯤 되고 키도 80몇킬로 정도인데 형이 패니까 그냥 맞죠. 같이 때리지는 못하고. 제가 형 때리면 싫어하거든요. 형이니까요.

퍼 : 동생이 많이 힘들겠어요.

이 : 불만이 많죠. ‘우리 아빠는 균도 형아만 좋아한다’고. 사실은 아닌데 말이죠. 아마 균정이 그 녀석도 알면서도 그러는 걸거예요. 우리 집은 균도 일은 제가 하고 동생 일은 엄마가 하는 걸로 분업이 되어 있어요.

퍼 : 둘이 터울이 좀 있던데요. 다섯 살 차이인가요?


: 네. 균도하고 균정이하고 생일이 같은 달이에요. 균도를 자연분만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균정이는 제왕절개를 했는데, 예정일이
균도 생일하고 얼마 차이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 병원에 부탁을 했어요. 균도와 균정이를 생일을 같은 날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퍼 : 왜 그렇게 하셨어요?

이 : 균도는 아마 장가를 못 가겠지, 싶었어요. 그래서 균정이랑 생일이 한 날이 되면 균정이 장가갔을 때 저그 마누라가 저그 신랑 생일날에 균도 밥이라도 한 술 안 떠줄까 싶었던 거죠.

퍼 : 그때 아드님은 다섯 살밖에 안 되었을 때일 텐데, 이미 장가 걱정까지 하고 계셨군요.


: 네, 그랬어요. 그래서 생일을 한 날로 만들려고 했는데, 균도 생일이 6월 6일이에요. 그런데 현충일은 의사들도 쉬는 날이라
수술을 할 수 없다더군요. 그래서 균정이는 6월 4일에 수술을 해서, 균정이 생일은 6월 4일, 균도 생일은 6월 6일이에요.
생일은 앞당겨서는 해도 뒤로는 못하는 거니까, 나중에 균정이 마누라가 균정이 생일상에 균도 밥그릇도 놓아 주겠지요? 참,
결혼했어요?

퍼 : 저요? 아니요, 안 했어요.

이 : 왜 안 했어요?

퍼 : 글쎄요, 하하.

이 : 발달 장애인하고 결혼하세요. 그것도 정말 좋은 삶이에요.

퍼 : 일부러 발달 장애인하고 결혼하는 분들이 있으세요?

이 : 그럼요, 많아요.

퍼 : 아드님을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 : 저는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활동가들하고 일부러 엮어요. 그냥 균도하고 결혼하라고. 살다보면 남자 다 똑같아요. 최소한 우리 균도는 바람은 안 피울 테니까요.

퍼 : 하하하, 아, 그렇게 설득하시는군요.

이 : 저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마 균도하고 내 마음을 알아줄 활동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퍼 : 살이 많이 쪄서 걱정이시라는 말을 들었어요. 발달장애인들이 비만 문제가 심각하죠. 제 동생도 뚱뚱하거든요.

이 : 뚱뚱해지는 게 참 문제죠. 성인병 올까봐 걱정이 돼요. 집사람은 먹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은데 저는 아이를 내버려두는 편이에요.

장애인의 가족이 ‘되어버린’ 사람들


퍼 : 아버님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셨나요? 아까, 잠시 학교에서 잘렸다고 말씀하셨는데, 대학생 시절부터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이 : 그건 아니에요. 공부를 못해서 잘렸죠. 그 당시에는 학내 사태가 많아서. 광주 민주화 항쟁이 난 직후라 학교 수업이 거의 열리지 못했어요. 학교 간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아요. 그리고 서울대 입학하고 싶어서 재수도 했다가 또 다른 학교 다니다가… 좀 방황을 했죠.

퍼 :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셨어요?

이 :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원래 장애인에 대해서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어요. 내 과거 얘기를 좀 하자면 저는 그냥 보수 쪽에 매달려서 정치활동을 했었어요.  한나라당이 신한국당이던 시절이죠. 그 안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요.

퍼 : 신한국당이요?

이 : 제가 H자동차계열에서 근무했었는데 정주영 씨가 대통령 선거를 나가면서, 그걸 지지하던 정치인하고 같이 몇 년간 일했어요. 그분의 지내온 약력이 좋았고 사람이 믿을 만해서 따라다녔는데, 그분이 신한국당 입당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죠. 그분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고요.

퍼 :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 : 비서관, 인턴, 이런 일들을 했죠. 당시에 YS가 만든 나라사랑본부라고, 그게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계기가 된 단체인데요, 거기서 일하기도 하고 정치 외곽 쪽에 죽 있었죠. 그때에는 저 나름대로 전두환 정부에 대해서 항거하는 의미도 있었죠.

퍼 : 정치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이 : 실은 우리 아버지가 정신 장애인이에요. 419 때 머리에 총을 맞으신 후로 정신분열증을 앓으셨거든요. 평상시에는 정상인데, 정신분열이 올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수유리에 있는 419묘지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퍼 : 아, 놀랍고 마음이 아픕니다.

이 : 저는 이렇게 장애인 가족의 위아래, 그러니까 장애인 부모를 둔 고통과 장애인 자녀를 둔 고통을 모두 경험했어요. 어릴 적엔 혁대를 물에 적셔서 때리는 아버지, 상태가 나빠지셨을 때는 목을 조르기도 하시고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때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도망치고 싶었죠. 저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가족 문제에 주목하게 됐어요.

퍼 : 그러셨군요.

이 : 장애인 당사자 주의라고 하지만, 장애인은 본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적 장애인은 행복해요. 균도도 너무 행복해요.

퍼 : 저희 가족도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이 : 그렇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너무 불행하죠. 그런데 사회에서는 장애인 부모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아니, 그래도 요즘은 장애인 부모 이야기는 조금씩 합니다. 그런데 장애인 형제 이야기를 누가 해줍니까? 부모들은 장애인 형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제들이 무슨 죄로 그 고통을 다 당하나요? 나는 균도하고 살아봐야 50년 이상 되겠습니까? 균도 동생이 더 힘들죠. 나보다 한 세대를 더 살아야 되니까요.

퍼 : 저는 그래도 부모님이 더 힘드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 형제의 고통이 더 클 수 있죠. 이제는 가족들이 얼마나 괴롭고 형제간에 얼마나 고통을 받으면서 사는지 사회에서 귀를 기울여야죠. 나는 지금도 제일 불쌍한 사람이 장애인 동생으로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균정이한테 할 말이 없죠.

퍼 : 동생이 균도 씨에게 맞설 수도 있게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이 : 한번 하면 버릇이 될까봐 못하게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균도가 균정이와 터울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균도가 균정이보다 두 배 정도는 등치가 컸죠.

퍼 : 균도 씨가 누가 때리면 맞서 싸우는 일은 할 줄 모르죠?

이 : 이 아이들은 그런 것 할 줄 모르죠. 그런데 균도 같은 1급 장애인들이 그나마 낫습니다. 2, 3급은 더 힘들어요. 장애인들이 저지르는 폭력 사건이 다 2, 3급에서 일어나거든요. 균도는 때리는 것의 의미를 몰라요. 좀더 지적 능력이 있어야 그 재미를 알죠.

퍼 : 그렇군요.

이 : 게다가 부모들 입장에서도 3급쯤 되면 정상 같기도 하고 비정상 같기도 하고, 헷갈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만날 부모들한테 ‘당신들 참 힘들겠다, 포기도 못하고’ 하고 위로해요. 우리는 다 포기했어요. 근데 2, 3급 부모는 포기를 못해요. 포기가 안 돼요. 어찌보면 정상같거든요. 근데 막상 어느 순간에는 대책이 없고. 1급은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도와줘요. 그런데 2, 3급은 그런 차원도 안 돼요.

퍼 : 참 답답하네요.

이 : 장애인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가족들의 수를 생각하면 장애인 수 곱하기 3을 해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죠. 즉,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은 장애인 이야기를 어디 가면 소수의 이야기니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니 해버리지만 저는 장애인 가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각하는 대로 바로 행동하라


퍼 : 장애인 부모회 활동을 하신 건 언제부터이셨어요?

이 : 얼마 안 됐어요. 저는 시골에 살아서 부모회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균도가 고등학교를 특수학교를 가면서 학교에 문제가 많아서 싸우게 되면서 부모회 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퍼 : 부모회 활동을 해보시니 어떠셨나요?

이 : 장애인 부모들이 참 보수적이라는 걸 느꼈어요. 부모들이 너무 자기 애 생각만 해서 불만이에요. 저는 좀 달라요. 우리 균도를 사회에 알려서 균도도 받고 다른 사람도 같이 받자는 주의예요. 그런데 장애인 부모 대다수는 우리 애한테만 주어지면 그다음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게 현실이에요.

퍼 : 아드님 문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이 : 제가 언론에 열심히 나가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예요. 발달장애인 문제를 이슈화하자는 것. 저도 균도 데리고 다니는 거, 쪽팔리거든요. 그렇지만 장애인끼리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죠. 대중에게 알려져야죠. 만약 한진 문제에 김여진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김진숙 씨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대중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거예요.

퍼 : 부모회 모임은 잘 되나요?

이 : 부모 모임을 하면 부모들만 나오고 아이들은 두고 나와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면 모임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부모가 운동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보여 주어야 해요. 저도 어딜 가면 반드시 균도를 데리고 나와요.

퍼 : 오늘도 그래서 데리고 올라오셨군요.

이 : 왜 그러겠어요? 신체장애인들은 보도블럭 바꾸고 버스 바꿀 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까요? 집에 안 있고 시내에 나온 거예요. 자꾸 투쟁을 했던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균도 같은 애들이 매일 백 명이 시청 광장에 나와서 논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달만 되면 서울시 전체가 바뀔 겁니다. 집회를 안 하더라도 저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발달장애인이 얼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닌데.

퍼 : 정말 그렇겠네요.

이 :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균도가 하교하면 집에 균도를 볼 사람이 없어요. 균도 엄마는 생업 때문에 일을 해야 하고, 균도가 다니는 곳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어요. 그래서 같이 다니면서 세상을 봅니다. 복지관보다 사회가 균도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니까요.

퍼 : 보통은 장애인의 어머니 이야기만 많이 들리고 장애인의 아버지들은 잘 안 보이세요. 가정에서부터 육아에 신경 안 쓰기도 하시고요.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됐어요?

이 : 장애인 부모회에도 거의 다 엄마만 나와요. 그런데 발달장애인의 75프로는 남자예요. 그리고 발달장애인들은 그들의 목욕 문제라든지 성 문제라든지 하는 문제들이 삶에서 크게 차지하기 때문에, 엄마들이 뒤처리해주고 이런 모습이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빠들이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사회는 엄마 100명보다는 아버지 두 명이 바꾼다는 겁니다.

퍼 : 무슨 뜻이신지요?

이 : 장애인 투쟁은 결국은 관공서를 대상으로 싸우거든요. 관공서에서 엄마들 스무 명이 가봐야 아줌마들이 재수 없이 왔다고 상대도 안 해요. 그런데 아버지들 한두 명 가서 고함지르고 하면 일단 앉으라고 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아버지 주변의 인맥을 두려워하는 것일 거예요.

퍼 : 아버지들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적극 이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부모회 나가서 아버지들 참여를 독려하시면 반응이 어떤가요?

이 :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들이 안 나오려고 하니 균도 아버지가 좀 설득해달라고들 하시죠. 그런데 이렇게 언론에 제가 나선 것 자체가, 저는 대중한테도 말하고 있지마는 아버지한테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지난 봄에는 장애인 부모 마흔아홉 명이 서울에 모여 삭발을 한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을 하는데도 진보주의 장애인계 신문 말고는 언론이 아무도 오지를 않았어요.

퍼 : 그래서 집회와 같은 방식은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이 : 집회 중심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됐죠. 그렇다면 조금 비틀어보자고 생각을 했어요. 그것 때문에 균도하고 걸어보자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언론사 몇 곳과 접촉을 먼저 하고 걷기를 시작했어요. 균도가 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이 별로 없기도 했고, 균도한테 세상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조금 먼 길을 가자, 그런데 이왕 먼 길을 가는 것, 거기에다가 좀 더 의미를 두어서 국회에 요구하는 구호들을 넣어서 이슈가 되도록 한 거죠.

퍼 : 부모회에서 반응은 어땠나요?

이 : 장애인 부모회 내에서도 내가 가는 걸 찬성은 안 했어요. 걷기 행사는 이미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부모들끼리만 간 게 문제였죠. 발달장애인 특성 상 하지 못한다고 자체에서 결정한 탓이겠지요. 언론에 알리지도 못했고. 그건 대중들을 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조직 관리 차원밖에 되지 못하죠.

퍼 : 부모회 자체를 지키기 위한 일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 알리는 게 더 중요한 거라는 말씀이시죠?

이 : 저는 지금도 제가 하는 건 일반 대중한테 만나기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해 보니 어느 정도 이슈가 됐고 부분적으로 보건복지 공무원들이 표시나게 부담을 가지기 시작을 하더군요. 보건복지부 공무원 말로는 발달장애인 법을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지금 연구 용역이 나와 있어요. 2-3년 내로 발달장애인법은 만들어질 것 같아요. 저는 그 법이 만들어질 때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 활동을 하는 겁니다.

퍼 : 내일 장애인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 위해서 서울에 오셨다구요?

이 : 네. 저와 같은 장애인 부모들이 모이는 자리예요. 얼마나 모이실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갑니다.

퍼 : 어떤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이 : 생각하는 대로 바로 행동하라고 하고 싶어요. 실은 부모들에게 좀 욕을 해주려고요.

퍼 : 욕을 하다니요?

이 : 저는 다른 부모들하고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조금 나은 건, 생각이 나면 바로 행동을 하는 스타일이라는 거죠. 다른 장애인 엄마들도, 자녀랑 같이 어디 여행 가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엄마들은 못하겠다고 포기한 거고 저는 바로 한 것, 그게 차이인 거죠. 다른 아버지들도 저처럼 하고 싶다는 말씀 많이 하시는데, 망설이지고만 있지 말고 하시라고 하고 싶어요.

퍼 : 균도 아버님이 하시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이 : 네, 나는 평범한 아버지예요. 장애인 부모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말고도, 집에만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죠.

사회복지로 돈벌이 할 생각 마라


퍼 : 특수학교에서는 무엇 때문에 싸우셨나요?

이 : 학교도 이상하고 교육청도 이상하고 저그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같더만요. 제가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비리를 파헤쳐서 지금 학교가 검찰에 고발 되고 난리가 난 상황입니다.

퍼 : 사립학교였나요?

이 : 네. 특수학교는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가 훨씬 많아요. 문제는, 장애인 교육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사립학교에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학교를 생각하는 거죠. 균도가 다니던 학교도, 학교 운영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싸우게 됐어요.

퍼 : 학교에서 어떻게 하던가요?

이 : 장애아동들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에요. 그래서 나라에서 등록금은 다 대줍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쓸데없는 잡부금을 너무 많이 걷는 거예요. 부모들한테 학교 기부금을 강요하고.  

퍼 :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장사를 했군요.

이 : 학교와 학부모의 관계에서 학부모는 갑이고 학교가 을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부모가 을이 돼요. 저는 그게 싫어서 학교에서 ‘갑’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문제제기를 많이 했죠. 제가 학교에 가면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퍼 : 학교에서 아버님을 무서워했군요?

이 : 일반 선생님들은 나를 참 좋아했죠. 학교 재단을 향해 문제제기를 하는 거지 내가 학교 선생님에겐 절대로 건방지게 안 했거든요. 제가 선생님들을 대신해서 싸워준 거라고도 할 수 있죠. 선생님들은 재단이 무서워서 잘못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니까요. 제가 싸운 덕에 결국 지금은 학교가 반쯤 문 닫게 됐죠. 온갖 비리가 다 드러났거든요.

퍼 : 재단이 큰 타격을 받았겠네요.

이 : 만약 학교 재단에서 아이들한테 좋은 일을 같이 하자고 했다면 뭐든지 했을 거예요. 재단이 아이들 똥 닦아 달라고 했으면 똥 닦아 줬겠죠. 그렇지만 내 눈에 비리가 적발된 이상에는, 나는 그 대상이 누구든 가리지 않아요.

퍼 :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공부도 하셨죠?

이 : 사회복지사 공부를 남들은 사이버대학에서 해도 된다고 하는데 저는 정규 대학에 갔어요. 4년을 다닌 건 아니고 3학년에 편입하기는 했지마는 일반 대학생하고 같이 공부를 하고 졸업했죠.

퍼 : 왜 그렇게 하셨나요?

이 : 요즘 사회복지사가 노후대비 직업으로 전망이 좋다고들 하거든요. 한 몫 잡기 위해서 사회복지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로부터 복지시설 비리가 나오는 거죠.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기는 싫어서, 차라리 순수한 젊은 대학생들과 공부하면 낫겠다 싶어서 그리로 갔는데 저의 오판이었어요. 다들 취업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더군요.

퍼 : 취업이 하도 어렵다고들 하니까요.

이 : 지금 학생들이 기대하는 취업 잘 된다는 소문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취업하려고 결국은 사회복지 공무원 시험 준비들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구청이나 동사무소 가면, 하는 짓이 만날 서류에 치여 현장 한번 못 나가요. 긴급출동 SOS보면 늘 마지막에 사회복지 공무원은 몰랐다고 하잖아요?

퍼 : 사회복지 인력을 더 늘려야겠네요.

이 : 저는 정부의 사회복지 비용을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정부에서 사회복지 인력을 늘린다고 하면서도 그 재원을 지방자치 재원에서 가져오는 게 참 문제더군요. 이번에도 사회복지 공무원을 두 배 늘린다고 정부에서 발표했던데 그 재원이 지방자치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말뿐인 정책이나 다름없죠. 일부 지자체에서는 공무원들 월급을 빌려서 줘야 할 지경인 곳도 많다는 데요.

퍼 : 복지관 운영 지원비도 지방자치 재원에서 나오나요?

이 : 그렇죠. 그러니 복지관에서는 사랑의 열매 같은 자선 단체에 돈 좀 어떻게 더 받아볼까 해서 서류 준비하는 데에만 눈이 벌개있지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건 별로 없어요. 저도 사회복지사고 제가 사회복지에 대해 발언하는 건 누가 지원해 줍니까? 이런 건 안 해주잖아요.

퍼 :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신 것 같습니다.

이 : 저는 불의가 있다고 하면 누구하고도 싸울 수 있어요. 국회의원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아요. 불의인데 불의라고 말 못하는 거,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 하기 싫어요. 그렇기 때문에 꼭 싸움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따질 것은 따지고 싶어요. 바뀌지 않더라도 그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으로.

퍼 :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 저와 균도가 걷는 일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남들이 이야기해도 상관없어요. 다만 그 밑거름이 된다면 그걸로 의미를 찾을 수 있죠. 우리 둘이 좀 걷는다고 얼마나 세상이 바뀌겠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단초는 제공할 수 있잖아요. 세상은 우연한 기회에 바뀌어요. 계획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죠. 저 말고도 장애인 부모 운동한 사람들 많지만 인터넷에 안 나오지만 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죠. 이 기회에 좀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퍼 : 기존의 사회단체들이 세우는 계획과 일상적인 실천으로만 될 일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내년, 총선을 향해 또 걷는다

퍼 : 앞으로도 또 걸을 계획이 있으세요?

이 : 내년 삼월에요. 이제 광주에서 서울까지 걸으면 국토 한 바퀴를 도는 것이 되죠.

퍼 : 봄이 오면 또 걸으시는군요.

이 : 그렇죠. 그리고 내년 사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니까, 장애인 이슈를 압박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내년에는 ‘균도와 세상걷기’가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서 사업이 될 거예요. 동시다발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백팀, 이백팀 정도가 출발해서 사월 1일 국회 집결해서 집회를 가지는 계획이 있어요. 그러면 장애인 이슈가 크게 한번 만들어지겠죠.

퍼 : 철저히 정치적인 계획이네요?

이 : 그럼요, 정치적일 수밖에 없죠. 국회의원에게 부담을 주자는 거거든요. 다음 국회에서는 발달장애인법이 입안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거죠.

퍼 : 정치를 직접 해볼 생각은 없으세요?

이 : 저는 정치인이에요. 지금도 진보신당 부산시당 장애인위원장이에요. 그렇지만 선거에 나설 생각은 없어요. 나는 후보를 할 감은 아니에요.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퍼 : 장애인이 직접 정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서 활동하시는 분들도 있던데요.

이 : 저는 이번에 탈당하고, 순수하게 무당파로 제 주장을 이야기할 거예요. 왜냐, 진보진영에서도 너무 무기력한 걸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에. 저는 장애인운동계 내부에서도 인정받고 있어요. 균도 아빠같은 사람이 장애인운동계를 한번 바꿔놨다, 비틀어놨다고들 말해요. 제가 그 가능성을 열어준 거라고 생각해요.

퍼 : 지금까지의 어떤 잘못된 모습을 바꾸고 싶으세요?

이 : 타협 없이 무조건 가는 것.

퍼 : 타협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 당연하죠, 조금씩 나아지는 게 진보라고 생각하거든요. 확 바뀌는 거? 진보 아니에요. 서서히 나아지는 게 진짜로 바뀌는 거죠. 싸움을 하면 실적을 조금씩이라도 남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모 아니면 도로 싸우는 것도 불만이고요. 저는 장애인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타협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죠.

퍼 : 또 어떤 점이 잘못 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 이제 곧 김진숙 씨가 내려올 거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장애인 이슈를 다루는 장애인 웹진에서 김진숙 씨 이야기만 너무 많이 쓰는데 그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연대의 차원은 좋은데 너무 한진, 비정규직 이야기에 집중하니 주객 전도가 되더라구요.

퍼 : 네

이 : 솔직히 말해서, 비정규직 철폐 이야기를 하는 게, 장애인 시각으로 보기에는요, 부러워요. 부럽다구요. 우리는 그 비정규직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하거든요. 또 서운한 것은 장애인 계에서는 노동자들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안 보이더라구요. 물론 활동가들은 우리를 알고 연대해주시지만 정작 당사자 노동자분들은 우리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주시지 않는 걸 느꼈어요.

퍼 : 아, 여기서는 연대하는데 저쪽에서는 연대하는 모습이 안 보이셨군요.

이 : 네. 그래서 장애인 운동계에서는 장애인 이슈, 이명박 정부의 장애인 정책 비판, 이런 쪽에 좀더 집중하고 우리끼리 소통을 잘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 : 혹시 아드님과 왜 걷는지에 대한 대화를 하세요?

이 :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퍼 : 균도 씨, 왜 걸어요?

이균도 : 발달장애인을 위해서 걸어요. 서울까지!

퍼 : 저렇게 말하도록 아버님이 가르쳐주셨어요?

이 :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옆에서 다른 장애인 부모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도 배웠겠죠. 만날 부모들이 균도를 보면 “균도야 고맙다, 너는 발달장애인 대표다!” 하니까 스스로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균도 이름이 고를 균에 길 도예요. 균도는 이렇게 걷는 것을 팔자에 타고 난 것 같아요.

서두에서도 밝혔듯 인터뷰는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녹음된 인터뷰 기록에는 글에 드러나지 않은 균도 씨의 말소리, 흥얼거림, 부스럭거림, 움직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균도 씨는 사무실에 있던 간식들을 뒤져서 꺼내 먹고, 물과 음료수를 끊임없이 마시고, 화장실을 몇 번 가고, 뒤처리를 부탁하기 위해 아버지를 부르고, 사무실 옆방에 불쑥 찾아가기도 했다.

또 균도 씨는 내가 태어난 연도를 듣고 내가 양띠이며 그 해가 기미년이라는 것을 바로 맞출 줄을 알았다. 내 생일을 듣고 그날이 토요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에디슨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톨스토이가 어떤 문학작품을 썼는지도 다 외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여행하면서 지나온 곳들에 대해 몇 월 며칠에 어느 도시에 머물렀는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모두 알려주었다. 균도 씨의 이런 모습들까지 인터뷰에 함께 담아낼 만한 필력이 되지 못해 균도 씨와 아버님에게 사과하고 싶다.

방현석의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은 ‘우리는 왜 랍스터처럼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내버릴 수 없을까?’라고 묻는다. 아픈 기억도, 시끄러운 이웃도, 인생에 불쑥 등장한 장애를 가진 자식도, 우리는 다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 사실을 빨리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이 쉽게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균도 아버지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우리 사회도 그럴 것이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자꾸만 잘라내려고 하는 한, 우리는 다함께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