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 임유철

2006년 임유철 감독은 극장용 축구 다큐멘터리 <비상>을 만들어 4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스포츠와 다큐는 극장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깨고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이다. 지금은 두 번째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도 축구를 소재로 한 극장용 다큐멘터리지만, 놀랍게도 충무로 자본의 전액 투자로 만들어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축구, 그리고 흥행이라는 3개의 지점에 서 있는 임유철 감독을 만났다.
필자는 2002년 월드컵 때 축구 경기를 처음 봤고, 이후에도 월드컵 때만 축구를 보고 있는 사람이다. 자랑할 일은 못 되지만 국가대표 이외의 선수들은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2006년 축구 다큐 <비상>을 보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었다. ‘다큐멘터리’ 라고 하기에 기대하지 않았던 재미까지 있었다. 종목은 다르지만 인천이라는 지역, 꼴찌 팀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삼미 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란 소설도 떠올랐다. 그 책을 읽고 소설가 박민규를 기대했던 만큼 <비상>을 보고 임유철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오랜만에 임유철 감독의 소식이 들려왔다. <비상>과 마찬가지로 축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인데 소재가 독특하다. 프로 선수들이 아니라 경남 지역에 있는 복지시설의 아이들이 하는 축구 이야기란다. 게다가 이번에는 CJ의 전액 투자로 제작이 된다고 한다. <비상> 이후의 공백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왜 이번엔 복지시설 아이들일까?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청하는 전화를 하자, 임유철 감독은 쉽게 오케이를 했다. 지방과 서울을 수시로 오가는 탓에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떤 매체인지, 인터뷰어가 누구인지,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같은 건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인터뷰 하는 게 직업인 다큐멘터리 감독을, 그것도 축구 다큐로 알려진 사람을 막상 인터뷰 하자니 이 쪽에서 약간의 부담이 밀려왔다. <비상>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그의 트위터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는 <나는 꼼수다>를 즐겨 듣고, 서울시장 투표 인증샷도 남겨두었다.  
 
11월의 어느 저녁, 홍대 앞 까페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임유철 감독을 만났다. 무척 동안인 그는 하이 톤의 밝은 목소리로 주저함 없이 명쾌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1. <누구에게나 찬란한>

퍼슨웹(이하 ‘퍼’): 요즘은 새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 준비에 정신이 없으시죠?  
 
임유철(이하 ‘임’): 네, 그렇죠. 촬영 때문에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퍼: <비상>에 이어 이번에도 축구인데요,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임: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경남지역의 복지시설 아이들로 구성된 축구팀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찍으려고 기획했던 게 아니라, 다큐 강의를 하다가 학생들이 소재를 못 찾기에 어떻게 소재를 찾고 인터뷰를 하는지 보여주겠다고 찾아간 곳이었는데, 제가 박철우 감독한테 한방에 간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부터 바로 찍기 시작했어요. 친해져서 시설 아이들의 현실도 더 알게 됐고,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게 제 목표가 됐어요.
 
퍼: <비상>도 그렇고 <누구에게나 찬란한>도 그렇고 제목이 밝고 긍정적 입니다. 제목을 먼저 지어놓고 작업을 하시나요?  
 
임: <비상>때는 제목을 나중에 지었고, 이번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 은 <축구감독 박철우> 였다가 바꿨어요. 전주 국제영화제에 ‘다큐멘터리 피칭’ 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기 위해 제목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찬란>이라는 시집을 보게 됐어요. 누구나 태어남으로써 그 자체가 찬란함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이게 내가 찾던 거다 싶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너무 설명적이라고 하네요.  
 
퍼: CJ에서 전액 투자를 받게 되셨는데 트레일러만 가지고 투자를 받으셨나요?  
 

임: 트레일러도 있었고 기획안도 있었죠. 제가 한 때 예고편 감독으로 꽤 날렸습니다. 하하.  
 
* <누구에게나 찬란한> 예고편

퍼: 예고편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운 훈련도 해내던데요.
 
임: 이 아이들은 못 먹었기 때문에 몸이 다르고, 마음이 닫혀있어요. 그래도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굉장해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쏟으면 폭발력이 대단해요. 예고편의 그 훈련이 지구력 테스트 훈련인데 중학생용이거든요.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그걸 해내요. 이 아이들은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죠. 그 정도의 정신력이 있어요.  
 
퍼: 촬영은 몇 퍼센트 정도 진행되었나요?  
 
임: 트레일러 만든 데서 촬영이 멈춰있어요. 축구단이 해체되어서 제가 축구단을 다시 만들러 뛰어다니고 있어요. 일단 경남FC 산하 유소년 팀을 만드는 것은 확정이 됐어요.  
 
파: 축구단이 왜 해체하게 된 건가요?  
 
임: 경남지역 28개 시설에서 재능 있다고 모인 아이들인데 시설 원장님들의 반대도 있었고, 아이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아요. 시설들이 다 공지영 씨의 소설 ‘도가니’ 와 같지는 않지만, 분명 문제들을 안고 있죠. 어른들이 싸워서 아이들을 가로막으면 안되기 때문에 제가 참고 예의를 지키면서 문을 열려고 하고 있어요.  
 
퍼: 그 쪽에서 끝내 문을 열지 않으면요?  
 

임: 그렇게 되면 다른 방법을 찾긴 해야 되는데, 계속 노력해봐야죠. 이미 투자계약을 해놓은 상태라 내년까지 개봉을 안 하면 안 되는 문제도 있고, 일단 시작을 해보려고 해요.  
 
퍼: 경남FC 산하 팀을 만들면 그 쪽에서 어떤 지원을 해주나요?
 

임: 거기서 지원해 주는 건 유니폼, 팀이 유지될 수 있는 노하우,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경남FC 산하의 여러 유소년 클럽에 갈 수 있는 기회죠.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거니까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영화를 위한 단기 프로젝트가 아닌 거고요. 그런데 경남FC도 예산이 많지 않아서 제가 구해와야 해요.
 
퍼: 축구단 꾸릴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고 계세요?  
 

임: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 모금도 하고, 보건복지부도 만나고 있고, 경남 지역의 기업체들, 경남도청에도 지원요청을 해놓은 상태에요. 안정적인 자금을 만들어야죠. 서울에선 투자도 받고 응원도 받는데 경남에선 오히려 힘든 것들이 있어요. 뭐 돈이 다 모아지지 않아도 일단 시작은 할거예요.
 
퍼: 영화 감독이 해체된 팀을 다시 만들기 위해 선수도, 자금도 직접 모으고 계신데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임: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됐어요. 그 동안 박철우 감독 개인이 월급을 받으면 집에는 생활비로 60만원 정도만 갖다 주고 나머지를 전부 축구단에 썼어요. 그런데 이건 당연히 국가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하준, 우석훈씨 같은 진보 경제학자들이 말했듯이 펌프를 위쪽에 꽂은 다음 아래 쪽으로 물을 내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밑에 있는 계층이 바로 시설아동, 차상위계층 아이들이죠.  
 
퍼: 아이들의 복지문제를 이슈화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으신 거군요.
 
임: 그 아이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부모 또는 사회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거기 있는 거죠. 18세가 되면 보호시설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 때 받는 500만원 남짓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엇나가는 거예요.  
 
퍼: 이 축구팀이 대안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임: 재능이 있는 애들을 선발해서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똑같은 스타트라인에 서게 해주고 싶어요. 제가 명명한 게 드림라인 프로젝트인데 스타트라인만이 아니라 엔드라인까지 맞춰주는 거예요. 퍼스트라인과 엔드라인의 공정성을 확보해주자는 게 이 영화의 주제고, 제가 밖에 나가서 팀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 인거죠.  
 
퍼: 엔드라인까지 맞춰 준다는 건 어떤 얘긴가요?  
 
임: 어떤 지도자가 이 아이들을 가르치느냐가 중요해요. 스타트라인이 같아도 엔드라인까지 가는 과정에서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운동을 잘한다고 해도, 돈이 목적인 곳에서는 그 계급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저는 최하층 계급이 엘리트와 싸워서 이기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퍼: 박철우 감독님이 그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임: 박철우 감독은 아이들을 엔드라인까지 데려다 줄 최고의 선생님이에요. 딴 애들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이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이죠. 사실 팀 만드는 걸 박철우 감독이 해줘야 제가 그걸 찍는데 그 분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세요. 경상도 특유의 “됐습니다. 마, 그냥 내 돈으로 하지예” 하는 스타일이죠. (웃음)  
 
퍼: 박철우 감독님은 아이들 축구 가르치려고 지도자 자격증도 따셨다고 하는데, 원래 어떤 일을 하던 분이신가요?  
 
임: 원래 사회복지사셨어요. 시설 원장들은 박철우 감독을 별로 안 좋아해요. 예전에 노동운동을 했던 분이고 마산 자전거회사에서 노조위원장까지 했던 분이에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시는 분이죠.  
 
퍼: <누구에게나 찬란한>이 원하는 메시지와 파급력을 가지게 될 거라고 자신하세요?  
 
임: 이게 내년 말에 극장에 걸리면 대선과도 맞물려 있어서 어떤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소니 알파 동호회 분들이 아이들 다큐 사진을 찍겠다고 하세요. 영화가 개봉하면 그분들의 사진에, 글과 동영상까지 들어간 연재물 형태의 전자 책을 내고 싶어요. 모든 수익은 축구팀 아이들에게 가도록 하고요. 영화에서 말 못하는 사회복지의 문제도 다뤄보고 싶고요. 

 

2. 집회 영상을 기막히게 만들던 시절 

  
퍼: 감독님은 공대를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전공이 뭐였나요?  
 
임: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에요. 거기서 재미있는 걸 안 가르쳐줘서 이쪽으로 빠진 거죠.  
 
퍼: 대학에 오자마자 영화동아리에 가입하실 만큼 영화를 좋아하셨나요?
 
임: 저는 중학교 때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과학자 지망생이었어요. 대학 가기 전에는 거의 영화도 안 봤어요. 그런데 연년생인 친형이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형이 성균관대 전자공학과를 가더니 영화동아리 ‘영상촌’ 에 가입했어요. 한 학기를 신나게 놀고 올 F를 맞더니 재수를 해서 다른 대학에 가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다음해에 성균관대 컴공을 가게 되면서 형이 하던 동아리에 끌려갔죠.  
 
퍼: 친형이 한 학기 활동했던 동아리에 끌려가다니, 재미있네요.  
 
임: 배신자의 동생이라고 계속 저에게 술을 먹이는 거예요. 1학년 1학기 내내 매일 술을 먹었어요. 한번은 제가 “나 공부할거야!” 그러면서 뛰쳐나왔는데 선배들이 쫓아오고, 저는 “저리 가, 이 미친놈들아!” 그러면서 도망갔죠. 심지어 잠자는 하숙집까지 찾아와서 술을 먹였어요. 지금 3개월째 매일 술 먹는 게 기록인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하루에 한 모금이라도 먹으라고요. 그러다 보니 성적은 안되고 수업은 가끔 들어가면 쫓아가지도 못하고.. 뭔가는 해야 되니까 결국 영화동아리를 열심히 한 거죠.
 
퍼: 그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셨겠네요?  
 
임: 우린 감상이 아니라 제작 동아리였어요. 집회영상을 만들었죠. 선배들 중에 영화 쪽에 계신 분들이 있긴 했어요.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님, 촬영감독 조용규 선배님, <투캅스> 기획자도 선배고, 영상촌 이전의 영화동아리 출신으로는 전향준 부산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키노 편집장이셨던 정성일씨도 저희 선배죠. 그 분들은 저희를 후배로 생각 안 하실 수도 있어요. 하하.
 
퍼: 리스트가 굉장한데요? 영화동아리라고만 들어서 제작 쪽 인줄도 몰랐습니다. ‘영상촌’ 활동은 어땠나요?
 
임: 영화를 해야겠다는 것 보다는 문화운동 쪽이었죠. 아니, 거창하게 운동이라고 하기도 웃기고 그냥 집회영상을 만드는 게 일상이었어요. 제가 컴공 이잖아요, 그 때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올 때에요. ‘프리미어’ 라는 편집 툴이 있는데 그 때는 국내에서 ‘프리미어’ 유저가 5명도 안 될 때 인데 그 중에 하나가 저였어요.  
 
퍼: 전공 덕을 보신 건가요? (웃음)  
 

임: 그 정도는 할 줄 알았죠. PC통신을 이용해 외국에서 캡쳐 카드를 산 다음, 한국에 가지고 들어와 컴퓨터에 조립을 해서 영상을 캡쳐했어요. 예를 들어 ‘디졸브’ 라는 게 있는데 화면이 오버랩 되면서 A화면에서 B화면으로 변하는데 지금은 실시간으로 ‘뿅’ 하고 되지만 그 때는 비디오 데크 3대가 있어야 가능했어요. A화면, B화면, 녹음용도로 하나. 그것도 싱크를 정확히 맞추려면 비싼 방송국 장비가 아니면 안됐죠. 그런데 저는 프리미어 버전1.2인가로 그걸 했어요. 그것도 랜더링 거는 데만 6시간 걸리고 말도 안 되는 버그가 나왔지만 획기적인 거였어요.  
 
퍼: 대통령 표창 받은 과학도 같습니다. 반응은 좋았나요?
 
임: 그걸로 만든 영상이 대박이 났어요. 디졸브 하나만도 대단한 건데, 저희는 3D를 써서 화면이 막 날아다니고, 깨지고 그랬거든요. 음악도 다들 민중가요 쓸 때 락을 깔았어요. 그래서 집회영상치고 튀었죠.  
 
퍼: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네요. 그리고는 어떻게 되셨어요?  
 
임: 대학생 신분으로는 제가 잘 팔리게 돼서 그쪽 일들을 계속 하게 됐어요. 그 때는 진보진영에서 영상을 파트너로 처음 인정하는 시기였어요. 그 전에 변영주 감독이나 홍영숙 감독, 거슬러 박광수 감독님이 계셨지만 서로 교류가 뜸했다면, 우리 때는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것들이 있어서 진보진영 안에서 직접 문화 담당을 했죠. 영상이 무기가 되는 첫 번째 시기였어요.  
 
퍼: 집회 영상 만드는 일은 언제까지 하셨나요?
 
임: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영화제 일을 하게 됐어요. 집회영상 만들면서 한계라고 느낀 게 있었어요. 제가 만들려고 하는걸 이미 그분들이 다 너무 잘 아는 것들 이라는 점이었어요. 제가 가진 고민의 수준이라는 게 현장에서 오래 계셨던 분들에 비하면 초보자였죠. 그분들의 삶에서 내가 뭔가를 배우면 배웠지 제가 만든 영상물로 감동을 주거나 할 수가 없었어요. 영상물은 민주노총같은 진보단체를 통해 보급되는 형태였는데 일종의 장식물, 결혼식장 화환처럼 끼어있는 느낌이었죠. 그렇게 해서 돈을 받는다는 것도 싫었고요.  
 
퍼: 영화제는 어땠나요?  
 
임: ’96 서울 국제 독립영화제’ 라고, 사무국 막내로 들어갔어요. 저까지 포함해서 4명이 그 영화제를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였죠. “영화제가 뭐야?” 그럴 때였어요. ‘삼성 단편영화제’ 라는 게 있었지만, 해외 작품을 가져와서 틀어주는 거였고, 프로그램의 개념 같은 건 없었죠. 개막작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였고,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이라는 작품이랑 두 작품을 걸었는데 동숭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사상 처음으로 전회매진을 할 정도로 성공했어요. 그게 잘 돼서 그 힘으로 이용관 교수님, 전향준 선배 등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추진하게 된 거죠.
 
퍼: 영화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임: 군대 있을 때 ‘부산 시네마테크 1/24’ 이라는 곳에 영화공부 한다고 갔었는데 경성대학교 교수였던 이용관 교수님한테 영화제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영화제 일이 해보니 재미있어서 계속 했고요.  
 
퍼: ‘재미’라는 말을 많이 쓰시네요
 

임: 저는 스스로 재미있고, 하고 싶어야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 재미있는 일이면 잘 할 자신이 있고, 아니면 잘 못하겠어요. 

 

3. 시사에서 다큐로, 변절과 변화 사이

  
퍼: 졸업 후에 취직을 하셨나요?  
 
임: 대학생활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의식이나 신념을 떠나서 할 줄 아는 게 영상 만드는 거 밖에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죠. 처음엔 월간스크린에 기자로 취직을 했어요. 거기서 인터넷 관련된 영상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다시 영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마이뉴스’랑 인천방송 <무비쇼, 영화가 좋다> 라는 영화프로그램 꼭지 피디로 들어가게 됐고요.  
 
퍼: ‘오마이뉴스’에서는 어떤 영상을 찍으셨나요?
 
임: 인터넷 방송을 최초로 시작할 때였는데 2000년에 찍은 YS의 고대강의*가 화제가 됐었어요. 기사에 글과 동영상이 같이 들어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 건데, 취재를 해서 올리면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 YS 고대앞 14시간 ‘농성’ 1-25신(오마이뉴스)

퍼: 거기서도 새로운 일을 하셨군요.  
 
임: 우리는 취재를 갈 때 수첩이 아니라 캠코더를 들고 다닌 거죠. 방송은 그들만의 카르텔이 있었는데 우리가 가니까 “너희는 뭐야?” 하고, “오마이뉴스다!” 그러는 거죠. 1인 미디어, VJ(비디오 저널리즘) 같은 개념들이 저랑 몇몇 선배들이 그 때 했던 것들이에요.
 
퍼: 비디오 저널리즘의 역할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시겠어요.  
 

임: 네, 저는 그 역할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비디오 저널리즘’ 이란 말은 싫어해요. 원래는 미국에서 비디오 액티비즘이란게 있었어요. 비디오용 카메라가 방송국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시민활동가들이 영상을 만들게 되고 방송국은 공공재니까 그걸 틀어주면서 시작된 건데, 일본에 와서는 기자로서의 소양 등을 교육시켜 전문성을 확보면서 비디오 저널리즘이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방송사들이 편집권을 주지 않았어요.  
 
퍼: 영상을 만드는 사람에게 편집권은 중요한 문제잖아요.
 
임: 저는 속보보다는 피디 저널리즘을 좋아했는데 ‘오마이뉴스’에서 오현호 선배랑도 그것 때문에 다투는 일이 생겼어요. 저는 완성도 높은 영상을 만들고 싶었는데, ‘오마이뉴스’는 속보를 원하니까. 그러다가 제가 대우자동차를 좀 세게 다룬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걸 메인에 안 걸어준 일이 있었어요. 지금도 저는 ‘오마이뉴스’를 좋아하지만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오마이뉴스’ 일을 안 하게 됐어요.  
 
퍼: 이후에 공중파인 MBC에서 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임: 더 많은 사람과 얘기해보고 싶은 욕심에 우리의 적이었던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죠. 하하 ‘오마이뉴스’를 하면서 임유철의 노선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걸 알았어요.
 
퍼: 그럼, 노선을 변경 하고 MBC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드셨나요?  
 
임: 하하. ‘생방송 화제집중’에서 주부 시청자들을 위해서 좀 순화된 시사물을 만들었어요. 그 다음엔 아침 프로로 가서 ‘생방송 오늘’ 같은 데서 시사를 다루었는데 점점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저는 취재력은 좀 되는 편이라 꽤 센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공채 피디가 아닌 한계 같은 게 있어서 제가 직접 ‘PD수첩’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극장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퍼: 그런데 <비상>이나 지금 준비하고 계신 다큐는 ‘PD수첩’과는 많이 다른데요?  
 
임: 네, 생각과 신념은 변하지 않았지만 표현방식은 긍정적으로 변한 게 맞아요. 한번은 선배랑 말다툼을 한 적이 있어요. 다큐의 최고봉은 시사다, 휴먼이다가 문제였죠. 그 선배는 보수우익 성향이었는데 결국 그 사람이 절 설득시켰어요. 휴먼을 하면 예쁜 여자를 꼬실 수 있다잖아요. 그래서 휴먼을 열심히 했는데 아직이네요. 하하, 마지막은 농담입니다.  
 
퍼: 시사에서 휴먼으로 오신 진짜 이유는요?
 
임: 저의 관심사는 무 당파, 합리적 보수, 보수진영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분들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진짜 크게 변할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비상>은 그래서 굉장히 상업적이에요. 새로 할 작품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좀 더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들어갈 거고요. 
 
 

4. 상업적으로 찍은 다큐 <비상>

퍼: <비상>이 그렇게 상업적이었나요?  
 
임: 원래<비상>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IMF 이후 10년의 역사적 아픔, 현대차, 대우자동차 분들의 이야기였어요. 복직이 잘 안됐잖아요. 그들의 얘기가 사실은 우리모두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명제가 통용되려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긍정적인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상업적으로 찍었죠.
 
퍼: <비상>은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임: MBC에서 나와서 ‘튜브 픽쳐스’에 들어갔는데 대표가 축구광이었어요. 저는 원래 야구빠였는데 어느 날 저에게 축구를 하래요. ‘충칭의 별’ 이장수 감독을 다룬 블록버스터 영화를 들어가는데 마케팅 비로 1억을 줄 테니 극장용 다큐를 만들라는 거였죠. 그래서 찍기 시작했는데 바로 박주영 신드롬이 생겨서 이건 ‘연예가 중계’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부적으로 맥도 잘 안 잡히고… 어쨌든 그 때 축구관련 책을 엄청 읽고 기자들하고 술 마시면서 배우다 보니까 축구가 정말 좋아졌어요.
 
퍼: 스타 이장수 감독도 있었고, 잘나가는 서울FC를 찍다가 카메라를 꼴찌 팀 인천 유나이티드로 돌린 이유는요?
 
임: 축구를 좀 알고 났더니 인천이 괜찮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휴머니티도 있고, 이게 IMF를 극복한 얘기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죠.  
 
퍼: 인천이 준우승을 할 거라는 걸 예상하셨어요? 인천 성적이 끝까지 좋지 않았으면 아무래도 <비상>의 감동이 덜했을 것 같은데요.  
 
임: 제가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할 때는 이미 인천이 리그 2위를 하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찍은 게 아닌 거죠. 그래서 처음부분은 인천 팀의 자체 자료를 사용한 거예요. 축구에서는 K리그에 빅3가 있거든요. 당시엔 수원삼성, 서울FC, 성남이었어요. 그런데 세 팀이 다 문제가 있었어요. 수원삼성은 선수들이 줄 부상이었고, FC서울은 제가 찍다가 그만둔 팀이었는데 팀이 자리 잡는 게 힘들겠구나 느꼈고, 성남도 역시 문제가 있었어요.  
 
퍼: 예상되는 그림이 있었군요. 제가 순진했네요. 하하
 
임: 빅3가 하위권이니까 나머지들의 경쟁인데 부산 아이파크가 전기 리그 1위를 하고 있었죠. 인천과 부산은 IMF 관련해서 아픔이 있었어요. 인천 역시 부산처럼 바다가 있는 도시이고, IMF로 대우 로얄이 망하고 방출된 선수들이 시민구단 인천 유나이티드로 오게 됐으니까요. 후기 리그에 부산 팀이랑 무조건 붙을 거라고 생각이 돼서 그걸로 몰자는 생각을 한 거죠,  
 
퍼: 축구를 잘 몰라도 <비상>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건 역시 의도하신 휴머니티 때문이었겠군요. 휴먼 다큐는 만드는 이유나 과정이나 결국 ‘설득’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출연진 섭외는 어떻게 하세요?
 
임: 인천 유나이티드도 그렇고 제가 하려는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단한 사람, 스타가 아니에요. 한편으론 그들도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고, 저희는 단지 그들이 마음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죠. 일단 예의를 지키고 시간을 지키고 믿음을 쌓는 거예요. 제 스태프들한테도 그렇고요. 신뢰가 깨지면 안돼요. 그 사람의 속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 사람은 저랑 친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다루는걸 조심해야 해요. 비밀을 보호해줘야 하고요.  
 
퍼: 경기장의 라커룸은 민감한 곳일 텐데 쉽게 허락을 하시던가요?
 
임: 인천은 장외룡 감독님이 처음부터 완전히 오픈을 했어요. 그래서 라커룸을 여는 건 쉬웠지만 그 안의 선수들 마음을 여는 게 어려웠죠. 장외룡 감독은 축구 계의 비주류에요. 그래서 자기가 이만큼 열심히 하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어요.  
 
퍼: <비상>에서는 확실히 장외룡 감독이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카메라를 의식한 건가요?
 
임: 감독님이 멋있어 보이려고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장외룡 감독님은 축구라는 종교의 성직자처럼 정말 멋있었어요. 우리도 처음에 그렇게 설득을 했고요. 제가 축구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이 되게 열심히 사는 것, 사람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해서 감독님이 멋있으면 멋있는 한국 축구가 되지 않겠냐고 설득을 했어요.  
 
퍼: 그럼 라커룸보다 열기 어려운 선수들의 마음은 어떻게 여셨나요?
 
임: 사실 촬영할 때 저만의 꼼수나 협박이 있기는 하죠. 노하우랄까요. 예를 들면 임중용 선수가 주장인데 성대 후배였어요. 주장이 얘기하면 좀 먹히는 게 있잖아요. 제가 동안이라 그런지 처음엔 저에게 계속 반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제가 대뜸 불러서 세게 나갔죠. “야, 나 성대 선배다!” 그러면서 말을 막 했어요. 성대가 선후배 사이가 좀 거칠어요. 중용이는 운동하는 선수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거친 면이 좀 있어서 그 스타일로 좀 꺾었더니 형님이라고 하면서 다른 선수들한테도 “니들 협조 잘해!” 그러던걸요.
 
퍼: 하하. 학연을 이용하셨군요.  
 
임: 그래도 위에서 꽂는다고 선수들이 다 마음을 여는 건 아니라서 정말 힘들었어요. 취재를 하면서 이 사람이 뭐가 그립고 뭐가 힘들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 걸 위로해주면서 다가가죠. 예를 들어 부상으로 벤치에 있을 때 카메라 없이 가서 말을 걸고요. 그렇게 하면 천천히 마음을 열죠. 그리고 저는 길게 취재하는 걸 좋아해서 1년 반 동안 찍었으니까 나중엔 가족 같아졌죠.  

5. 축구, 그들의 찬란한 순간 

퍼: 축구가 어떤 스포츠라고 생각하세요? 두 영화 모두 축구를 다루고 있는데요.  
 
임: 프로스포츠의 세계는 사실 사람을 사고파는 곳이에요. 꼭 축구만이 아니라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본과 인간의 관계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프로스포츠의 세계죠.  
 
퍼: 자본과 인간의 관계요? <비상>을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임: 네, 인간의 노동이 자본 이외의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경제나 철학으로 설득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그런데 스포츠는 보여주는 게 돼요. 열심히 하고 경쟁해서 이기잖아요. 노동의 힘으로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스포츠를 하게 된 거고 거기 가장 어울리는 게 축구였죠. 그리고 축구는 야구처럼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스포츠니까요. <비상>에서 다 못한 얘기를 <누구에게나 찬란한> 을 통해서 마저 다 하고 싶고요. 그 다음에는 스포츠 말고 딴 걸로 넘어갈까 해요.
 
퍼: 선수는 순수하더라도 축구를 둘러싼 환경들이 아름답지만은 않은데, 아이들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나요?  
 
임: 그건 한국 축구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제에요. 선수를 사고 파는 게 공공연한 일이죠. 제가 예고편을 찍었던 팀이 2기에요. 보리수동산 아이들만으로 구성되었던 1기 아이들, 지금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도 여러 일을 겪으면서 축구를 포기한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박철우 감독의 축구는 달라요. 그래서 이걸 하는 거예요. 승리를 부르는 축구, 기술적으로 뛰어난 축구는 아니지만, 박 감독님은 축구로 인성을 가르치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퍼: 축구로 인성을 가르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예를 들면요?
 

임: 축구에 미드 필드가 있잖아요. 제가 그려볼게요. (종이에 경기장과 선수 위치를 그린다) 예를 들어 4,3,3 이면 공격이고 미들이고 수비잖아요. 공격을 하게 되면 우리진영이 앞으로 달려나가잖아요. 이때 공격형 미들에서 공을 몰고 나오다가 상대에게 뺏기면 바로 역습을 하거든요. 그게 축구에서 제일 위험해요. 앞에 뛰어나갔던 아이들이 전력 질주해서 되돌아와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려와야 하는데 경기 중에 그게 네 다섯 번 나오면 유소년 축구는 지는 거예요. 체력이 다운되니까.  
 
퍼: 네, 그렇게 되겠죠.
 
임: 보통 그렇게 되면 감독은 불같이 화를 내고 공 뺏긴 선수를 호되게 야단을 쳐요. 그런데 박철우 감독은 초등학생들을 불러놓고 책임과 권한을 가르쳐요. 어른도 모르잖아요. 책임과 권한을. 얘네들도 그 말뜻을 정확히 모르지만 애들을 불러모아요. 다들 헉헉거리고 있죠. 공을 뺏긴 아이한테 말해요. “네 가 공을 잡았으면 네가 공의 주인이다. 네 마음대로 드리블을 해도 되고 동료에게 패스를 해도 된다. 그런데 네가 어쩔 수 없이 뺏기면 괜찮은데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뺏기면, 네가 책임을 못하면 애들이 니 땜에 지친다 아이가, 그렇게 네 다섯 번 하면 경기에 진다. 니 그럼 좋나?” 라고요.
 
퍼: 그러면 아이들이 알아듣나요?
 
임: 보통 애들은 경기장에서 “내꺼! 내꺼!” 하면서 공을 차요. 그런데 이 아이들은 “야, 책임지라! 니, 권한 있잖아!” “책임! 책임! 권한!” 이렇게 외치면서 축구를 해요. 애들이 아직 모범생이 된 건 아니지만 도벽이 없어졌어요.  
 
퍼: 특별한 감독님이시네요. 박철우, 장외룡 감독님 모두 멋진 지도자라고 생각이 되는데 굳이 비교를 하자면, 어떤 분들이신가요?
 
임: 극과 극이죠. 박철우 감독님은 전형적인 경상도 스타일, 그냥 믿고 가는 스타일이에요. 약간 마초 같은 면도 있죠. 아버지 같은 리더십이랄까요? 반면, 장외룡 감독은 어머니 스타일이죠. 일본에서 계셨기 때문인지 특유의 꼼꼼함도 있고요. 이번 영화는 <비상>의 장외룡 감독만큼 박철우 감독에게 비중이 있지는 않을 거예요. 이건 리더가 이끄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퍼: <비상> 은 꼴찌 팀이 준우승을 했는데, <누구에게나 찬란한>에서도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내줄까요?  
 

임: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이 생각한 결과 이상을 만들어내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비상>처럼 못하는 팀이 잘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많아요. 아이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 엄청 노력을 하겠지만, 성적과 상관없이 이 아이들이 독립된 사회구성원으로 사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이 영화는 1, 2, 3으로 계속 갈 거예요.  
 
퍼: 벌써 2, 3 편까지 생각하고 계세요?  
 
임: 제가 직접 찍진 않을 것 같지만, 아이들의 재능이 유지되는 한 경남FC 프로선수로 K리그를 밟을 때까지 찍을 거예요. 이 아이들을 응원하는 카메라, 팬들이 있으면 어디 가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거예요. 얼마의 돈으로 이 아이들을 보호할 수는 없어요. 공정한 룰에 끼게 할 수가 없어요.

6. <비상>이 극장에 걸리기까지

퍼: <누구에게나 찬란한> 도 1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인데, <비상>도 처음부터 그렇게 길게 예상을 하고 시작하셨나요?  
 
임: 네, 리그가 있으니까, 리그는 다 찍어야죠. 그러니 1년 아니면 2년까지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난 거예요. 보충 촬영하고 편집하느라 6개월이 더 걸려서 1년 반이었어요.
 
퍼: <비상> 때도 계속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신 건가요?
 
임: 당시 극장가에서는 다큐랑 스포츠는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비상>을 시작했던 ‘튜브 픽처스’ 에서는 돈이 안 나와서 제 돈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도 바닥이 났고, 월드컵 때 개봉을 해야 하는데 편집할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그 땐 불투명했죠.
 
퍼: 난관이 많으셨네요.
 
임: ‘레이드’ 라고 하드를 묶어서 작업하는 장비를 겨우 협찬 받아서 편집을 하는데 배급사 VIP가 와서 영상을 보기로 했어요. 극장 개봉이 걸린 정말 중요한 일이라 일주일 밤새면서 편집을 하는데 갑자기 레이드가 풀리면서 ‘탕,탕,탕!’ 하고 그 동안 편집한 게 다 날아가 버렸어요.  
 
퍼: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임: 옥상에서 3시간 동안 울었던 기억이 나요. 600개의 원본 테이프가 있었는데 그걸 다시 편집하려면 600시간 캡쳐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내일 모레 시사회까지 다시 하는 건 불가능해진 거죠. 스태프들한테 돈도 못 주고 약속만 해놓은 상태였고, 제 돈도 이미 1억5천이 들어간 상태였죠. 그 전에는 눈물이 없었는데 그 때 눈물이 터져서 정말 엉엉 울었어요.
 
퍼: 정말 까마득하셨겠어요.  
 
임: 울고 내려와 스태프들한테 말했어요. ‘그 동안 고마웠다. 이제 갈 사람 가라, 도와줄 사람만 남아다오’ 했는데 아무도 안 가더라고요. 너무 고마웠어요.  
 
퍼: 어떻게 다시 편집을 하고 마무리를 하셨어요?
 
임: 이후에 완성을 하는데도 색 보정, 사운드 등에 후반작업비용이 1억 정도가 필요했어요. CJ에 후배가 있어서 보여줬더니 배급은 해주겠는데 비용 지원은 못해준대요. 그래서 다른 영화사에 접촉을 했고, 조그만 영화사랑 계약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돈을 못 받았어요.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수익이 났는데도요. 소송까지 해서 이겼는데도 못 받았죠.  
 
퍼: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개봉을 하고 좋은 결과도 있었죠.  
 
임: 처음 15개관에서 개봉을 했는데 일주일도 안되어서 4개관으로 줄어요. 그것도 아침이랑 밤에만. 그런데 매진이 되고 4만 가까이 관객이 들었어요. 그 때 진 빚은 이제야 거의 다 갚았어요.  

7.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기

퍼: 지금의 감독님은 90년대 영상운동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봐도 될까요?  
 
임: 저보다 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 저랑 다른 지점은, <비상>은 철저하게 장르 컨벤션이었다는거예요. 헐리우드 상업영화처럼요. 저는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는 거거든요. 학생 때만 독립영화, 언더에 있었을 뿐이지 이후에는 사실 쭉 메이저에 있었어요.  
 
퍼: 네, 앞에서 말씀하신 노선 변경이 생각납니다. (웃음)
 
임: 만드는 방식이나 제가 활동하려는 플랫폼이 다른 거죠. 선배님들한테 ‘넌 너무 상업적이야!’ 라는 말을 듣기도 해요. 제 타겟은 진보가 아니고 합리적 보수 내지는 중도파니까요.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해요.
 
퍼: CJ 전액 투자로 작품을 만들고 계신데, 주변에서 욕하진 않으시던가요?  
 
임: 아뇨, 욕보다는 밥을 사달라 그러죠. 다큐로서는 처음으로 CJ 자본을 받아서 제작 한다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퍼: <비상>이 4만 이었는데, 이번에는 투자까지 받았으니 부담이 더 크겠어요.  

 
임: 저는 다큐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손익분기점은 꼭 넘기고 싶어요.  
 
퍼: 이렇게 장기 프로젝트를 찍으려면 제작 기간이나 예산을 세우기가 어렵지 않나요?
 
임: 그건 예측 가능해야 해요. 기간이나 비용 등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죠. 아직도 영화 산업이란 말이 낯설고 영화 판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경제적 약속을 지켜야 해요. 저예산이라고 해도 보통 한 기업의 자본금이 5천 만원에서 5억 사이인걸 생각하면 영화에 투자되는 자금이 적은 돈이 아니죠. 어쨌든 투자자를 만족시키고 이 자금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집행해야죠.  
 
퍼: 그렇군요.  
 
임: 제가 그런 샘플이 되고 싶어요. 거장이 되고 싶다거나 임유철이 유명 감독이 되는게 아니라 작품이 기억되고, 영화 산업적으로 다큐멘터리가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계약서도 갑과 을의 관계가 이상한 계약서가 아직도 돌아다니는데 계약서도 잘 쓰고 싶고요. 그래서 CJ랑 계약할 때도 “이건 샘플이다. 내가 계약서 잘 써야 한다” 고 계속 생각했어요.  
 
퍼: 이미 15년 차 감독이시고, 자본으로 인한 인간의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고 계신데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으세요?
 
임: 일단 장가를 가고 싶어요. 다큐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죠. 하하. 다큐는 사실 엘리트들이 소비하는 거예요. 저는 그 틀을 깨고 싶어요. ‘다큐는 재미가 없다, 그들만의 범주다.’ 가 아니라 작은 예산으로도 극장 컨텐츠로 손색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직접 제작도 해서 안정적으로 극장 다큐를 생산하는 회사의 틀을 만들고 싶어요. 지역의 인재들을 발굴해서 서울뿐 아니라 지역까지 같이 어우러질 수 있게도 하고 싶고요.
 
퍼: 책임감을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임: 그래서 방송을 안 하다가 다시 좀 해보려고 왔다 갔다 해요. 다큐는 방송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회사의 틀을 만들려고요. 다큐가 쉬운 장르는 아니어서 방송에서는 10년 차 PD가 할 수 있어요. 한국영화의 감독은 조로현상이 있잖아요. 중년감독이 안 생기는 현상, 그런데 다큐는 안 그래요. 점점 익어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같이 성장하죠.  
 
퍼: <비상>으로 자신감도 생기셨을 것 같은데, 가능성을 느끼세요?
 
임: 비디오 저널리즘이 들어오면서 이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대한민국은 다큐를 잘 만드는 나라예요. 그러니까 극장용 다큐를 더 많이 만들어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그게 잘 안돼요. 독립 작가들이 좀 더 많이 도전 하셨으면 좋겠고 제가 그 틀을 만들고 싶어요.
 
퍼: 다음 영화는 어떤 다큐일까요?
 
임: 몇 개 생각하는 게 있어요. 다큐는 묵힐수록 좋거든요. 실종자 얘기도 하나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같은 느낌으로요. 또 하나는 여고생 이야기에요. 여배우가 되려는 고1 아이들인데 고3쯤 되면 멋있는 여성이 되겠구나 싶은 아이들이에요. 우리 교육이 말도 안되게 폭력적이고 지배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는데 이 아이들은 좋은 선생님이 계셔서 연극을 통해 제대로 배우고 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나 <써니> 같은 느낌을 생각하고 있어요.  
 
퍼: 감독님 다큐멘터리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걸 들 수 있을까요?
 
임: 제 다큐의 가장 큰 특징은 극영화의 장르 같은걸 많이 가져와요.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많이 달라진 점이죠. 실제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니까 믹스가 돼요. 또 하나는 남들이 안 들어가는데 카메라가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요. 축구도 방송카메라는 많이 들어가지만 라커룸까지 카메라가 들어간 적은 없거든요. 지금 시설아동 찍는 것도 그렇고요. 방송은 여유가 없어서 연출을 많이 하지만 저는 느긋함과 진지함으로 관찰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극장용 다큐를 할 소재가 아직 많아요.
 
퍼: 다큐를 찍을 때 출연하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나요?
 
임: 저는 계속 찍어요. 굉장히 많이요. 아무리 의식하는 사람도 정말 계속 찍고 있으면 긴장이 그렇게 계속 갈 순 없거든요. “지금 찍지마” 해도 계속 찍어요. 저는 원래 찍는 사람이란 걸 보여줘요. 그래도 못 찍게 하면 저는 심하게 삐집니다.  
 
퍼: 중간에 정말로 못 찍겠다고 변심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임: 아직까지 그렇게 엎어진 경우는 없어요. 제 비주얼 때문인가 봐요. 하하. 농담이고요. 그럴 거면 시작을 안 하죠. 저도 찍기 전에 많이 간을 봐요. 1년이 묶이는 거니까요. 그런데 찍고 나면 고맙다고들 하세요. 그리고 다음에 뭔가를 설득할 때는 제 전 작품을 보여주면 설득이 쉽더라고요.  
 
퍼: 휴먼 다큐를 찍고 있는 감독님에게 카메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임: 제가 가끔 강의도 하는데 카메라는 권력이라고 얘기를 해요. 뭔가 구린 데가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예절을 지키지 않는 카메라는 혼이 나는 거죠. 카메라가 권력을 잘 사용해야지 함부로 휘두르면 자기를 망치거나 작품을 망치거나 사회악 적인 요소가 되요.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얻어가지 않으면 마음의 문들 닫고 취재를 거절해버리는 경우가 휴먼 다큐에서는 비일비재해요.  

8. 트위터, 경제, 물 만난 73들

퍼: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트위터를 하고 계시던데요.  
 
임: 네, 요즘 저는 트위터랑 페이스북에 빠져있어요. 처음엔 타임라인에 다른 글이 들어오는 게 싫어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만 팔로잉 했거든요. 그런데 축구단 운영기금 모금 때문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이버에 팔로워 늘리는 법까지 검색해봤어요. 당연히 맞팔도 다 했죠. 타임라인은 리스트로 관리를 하면 되더라고요.  
 
* 2011년 11월19일 그의 팔로워는 1,138, 그의 팔로잉은 1,356 이며, 그는 1,108개의 메시지를 트윗했다. 그는 인터넷 포털 ‘Daum희망해’ 에서, 준비중인 다큐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 축구단을 위한 모금을 준비하고 있는데 트위터 홍보를 통해 4일만에 562명이 서명을 했다. 필수였던 500명을 넘겨 지금은 모금 진행을 위한 심사단계에 있다.
 
퍼: 트위터에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시던데요? 고재열, 공지영, 김여진 등 주로 멘션을 보내거나 리트윗 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도 일조를 하신 것 같고요.  
 
임: 조심하고 신경 쓰는 사람도 많죠. 제 영화를 보려다가도 그런 것 때문에 안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입 닫고 있기에는 너무 짜증나는 시간들이죠. 처음엔 공지영씨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는데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좋아졌어요
 
퍼: 진보진영이 경제 쪽이 약하다는 트윗도 봤는데요. 주가지수나 물가에 대한 언급도 하셨고요.  
 
임: 진보가 가지는 담론이 실제 삶과 좀 동떨어져 있잖아요. 그 전에는 저도 재테크 얘기하면 할말도 없고 싫었거든요. 소개팅을 나가도 여성분이 옷 얘기 하고 펀드 애기 하면 할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담쌓기 시작하면 갇혀있는 게 될 것 같아요. 박경철씨처럼,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나가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 그렇게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임: 한때 그 쪽 공부를 심하게 했어요. <비상>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까 영상물로 빚 갚기는 어렵겠다 싶어서 주식 판에 좀 있었어요.  
 
퍼: 의외의 사실인데요. 주식투자를 하셨단 말씀이세요?  
 

임: 투자가 아니라 교육 쪽 일을 좀 했어요. 투자기법 같은 것을 미친 듯이 공부하고, 그 쪽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강의도 좀 하게 됐죠. 주식시장에서 유일하게 돈 버는 사람들이 저처럼 교육하는 사람들이었죠. 사람들이 선생님을 신처럼 생각하니까.
 
퍼: 강의를 하셨다니 더 놀랍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으셨나요?
 
임: 그쪽 계통에 있는 친구가 있어서, 처음에는 외주방송을 하려고 만났다가 강의를 제안 받게 됐어요. 그래서 공부를 했죠. 처음엔 500만원 정도 주식을 해봤어요. 주로 작전주를 건드렸는데 2008년부터 마침 대세장이라 제가 찍으면 상한가를 치는 거예요.  
 
퍼: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데이트레이더가 떠오르면서, 감독님과 매칭이 안 되는데요.
 
임: 그 땐 재미있어서 기법 투자하는 분들 강의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짰어요. 매크로를 돌리면 종목이 튀어나오니까요. 그러다 나중에는 선물옵션을 해봤는데 더 재미있더라고요. 진짜 거시경제를 보게 되니까요. 이전에는 꼼수 공부였다면 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경제공부를 좀 해봤어요.  
 
퍼: 앞으로 그쪽으로의 활동계획은 없으세요?  
 
임: 저는 직접투자에는 관심이 없고 박경철씨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합니다. 언젠가 다시 제대로 경제 쪽을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논의를 진보진영에서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주식관련 다큐를 하려고도 했었어요. ‘나꼼수’ 수준으로 센 게 있었는데 주변에서 다 말려서 못했지만요.
 
퍼: 언젠가 영화감독이면서 동시에 경제전문가인 감독님을 만날 수도 있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트위터를 하실 생각이세요?
 
임: 네, 엄청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어떤 희망 같은 걸 봤어요. 이번 모금을 하면서도 그랬지만,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탁현민씨나 시사인의 독설기자도 그렇고 우리가 다 73년 소띠에요. 딴 데서 대접 못 받다가 트위터에서 대접받더라고요. 사랑스러운 악마기자 주진우도 73이에요. 선배들한테 치여서 열심히 일만 하던 애들이 이제 자기자리를 찾는 것 같네요.  
 
퍼: 물을 만난 고기 같습니다. (웃음) 인터뷰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임유철 감독은 이제 두 번째 장편을 준비하는 무명의 감독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응축된 에너지가 많았다. 대학에 입학해 영화 제작 동아리에 들어갔던 스무 살 무렵부터 20년 가까이 임유철 감독은 카메라와 함께 길 위에 있었다. 동시대의 굵직한 정치, 경제적 사건들을 대면하고 그로 인해 힘든 사람들의 편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자신의 카메라에 메시지를 담기 위해 그는 집요하게 취재하고 공부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을 체득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마흔을 앞에 둔 그를 보며, 그의 다음 20년을 기대한다. 그 동안 쌓아두었던 에너지들이 폭발력을 가지고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그는 누가 뭐래도 지금 메이저에 있다. 냉철한 계산아래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감동적인 다큐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유리한 지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망설임이 없는 그의 비상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