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두 달간 상하이에 체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상하이에 가자마자 참가한 한 여행에서 사귄 친구가 ‘내일 친구랑 와이탄에서 놀고 배 타고 강 건너기로 했어. 같이 갈래?’ 그 친구가 함께 데리고 나온 친구가 바로 ‘리닝’이다. 상하이 중심가의 쇼핑몰을 구경하고 와이탄에서 야경을 감상하고 배를 타고 황푸강을 건너 푸동 지구의 높은 빌딩들을 돌아다녔다. 상하이에 온지 얼마 안된 나를 배려해준 듯한 코스였다. 상하이의 높게 솟은 빌딩들, 그 빌딩 중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가 내가 일하는 회사예요’ 강 건너 간 푸동 지구에서 한 높은 건물을 가르키며 ‘저기가 내가 사는 집이에요’ 상하이의 그 높은 건물엔 누가 일하고 누가 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바로 그 중 한명이 리닝이었던 게다.
리닝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상하이의 한 증권회사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증권회사 애널리스트’하면 밤이고 낮이고 주말이고 평일이고 일만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리닝은 주말은 물론 일 안하고, 평일에는 5시에 칼퇴근을 했다. 덕분에 평일이고 주말이고 상하이에 있는 동안 리닝과는 실컷 놀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어느 날, 리닝은 만나자마자 물었다.
“오늘 오후에 비 온거 봤어요? 회사 동료들이랑도 보면서 오늘은 하늘이 노했구나 했죠.”
여름에 상하이에 가면 매일 만날 수 있는 게 바로 거찬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 스콜이다. 땅이라도 가를 기세로 찾아오는 이 천둥 소리에 하루이틀 놀란 게 아니었다. 리닝과 만난 그 날 오후에 찾아온 스콜은 우박까지 동반했더랬다.
“중국 정부가 경제 성장을 무리하게 추진하니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최근에 그런 일이 좀 많았는데, 결국 하늘이 노한거죠.”
마침 리닝과 만나기 며칠 전, 2011년 7월 23일, 중국의 고속 성장에 일침을 가한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고속철도 열차 탈선 사고다. 중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벼락 맞은 열차가 급작스럽게 정지하는 바람에 일어났다 했다. 사상자가 200여명이 넘는 대형사고, 중국의 미디어 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외신도 이 대형 철도사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고속철도 사고의 원인을 하늘에서 내려친 ‘벼락’이라고 했으니, 하늘도 얼마나 억울할까 싶긴 했다. 그 날의 식사 주제는 ‘하늘이 노한 이유’였다. 중국 정부가 급속도로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 그걸 은폐하려고 미디어까지 통제하고 있다 했다.
‘그러게요. 중국에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못한다면서요’ ‘리닝, 동생도 있어요? 중국은 자녀 한 명밖에 못 갖는다면서요?’ 지금까지 중국에 대해 주어들은 ‘정보’를 대입하며 대화를 이어가면서 ‘이런 정보는 굳이 리닝한테 확인하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인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더 궁금한 것은 나와 같은 해인 1984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리닝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상하이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지 였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변화를 얼마나 실감하고 있는지, 그리고 ‘노한 하늘을 달래줄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본격적으로 궁금증을 풀어볼 요량으로 인터뷰를 제안했다.
“리닝, 인터뷰 할래요?”
“Sure!”
1. 그럼 제 어릴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상하이런'(上海人). 파리지앵, 뉴요커를 표방하여 세련된 상하이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상하이런’은 상하이에서 어릴 때 부터 성장해 상하이 방언도 구사할 줄 알고 ‘상하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상하이 인구중 ‘상하이런’이 차지하는 인구비율은 점점 줄고 있다. 타지에서 이주한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0년 상하이시 통계국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39%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타지역의 평균 인구 밀도보다 20배나 많다. 타지 사람들이 상하이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상하이는 타지보다 월급도 비교적 많고, 일을 찾을 기회도 많다. 리닝도 그런 이유에서 상하이를 찾은 타지인 중 한 명이었다.
퍼> 리닝은 상하이온지 얼마나 됐어요?
리> 거의 2년 되어가요.
퍼> 그 전에 상하이온 적 있었어요?
리> 아니요. 지금 회사 입사하고 처음 와봤어요.
퍼> 상하이에서 일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한국은 취업난이 심해서 보통 한번 취직하려면 기본 이력서 30~50통 정도는 내야해요.
리> 중국도 비슷한 거 같은데 저는 10곳 정도 지원해서 지금 이 회사가 됐어요.
퍼> 다른 곳 다 떨어진 거예요?
리> 지금이야 많은 회사들이 저를 원하겠지만, 그땐 그랬죠. 하하
퍼> 대학원 같이 다녔던 친구들은 지금 주로 뭐해요?
리> 제가 다녔던 대학원이 정부와 밀착되어 있는 곳이었어요. 중국사회과학원연구생원이라고. 그래서 대부분 졸업하고 정부 공무원 되거나 선생님 되거나, 아니면 기자되거나. 저처럼 민간 금융 쪽으로 취직한 친구는 드물어요.
퍼> 리닝은 왜 공무원안하고?
리> 전 중국 정부에 불만이 많아서. 하하
퍼> 하하. 지금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뭐예요?
리> 해통증권(海通证券)이라는 회사에서 일해요. 한국으로 치면, 대우증권쯤 될거예요. 회사가 하는 일이 크게 세 분야로 나눠져있어요. 투자(Investment), 컨설팅(Consulting), 에셋 매니지먼트(Asset Manegement). 이 중에서 전 컨설팅 부분의 리서치팀에 있어요. 투자를 하면 좋을지, 어디에 투자를 하면 좋을지 그런 걸 결정하는 데 필요한 리서치를 하죠.
퍼> 일은 재밌나요? 적성에 맞아요?
리> 재밌어요. 일은 재밌긴 한데,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좀 제한되어 있다고 할까.
퍼> 리서치팀에서 하는 일에서 한계를 느낀다는 건가요? 아니면 지금 입사한지 얼마 안된 신입사원이라 결정권 같은 게 별로 없어서 한계를 느낀다는 건가요?
리> 신입사원이라 결정권이 없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것보다 우리 회사가 상하이시랑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죠.
퍼> 연봉은 얼마나 되나요?
리> 연봉은 회사 규정상 공개하면 안 되는데, 보너스와 기본급 합치면 한국 돈으로 대략 5천 만원 정도?
퍼> 중국 평균 급여는 3000~4000위안(50~70만원)인데 그보다는 훨씬 많이 벌고 있는 거 아니예요?
리>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친구는 다른 증권회사 다니고 있고 지금 4년차인데 저보다 세네배 많아요. 그 차이를 보면 제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죠.
중국의 증권시장 성장에 따라 애널리스트의 연봉은 중국의 평균 급여의 최고 50배나 차이가 난다고 한다. 리닝은 서울의 물가를 물었다. 집값이며 대졸자의 연봉이며. 슥슥 계산을 하더니.
리> 봐요. 서울이랑 상하이랑 수입 차이는 큰 데, 물가는 별 차이 없잖아요. 상하이는 수입과 물가의 그 큰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정말 큰 도시죠.
퍼> 리닝도 스트레스 받나요? 안그래 보이는데? 하하
리> 저도 돈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데요.
퍼> 그럼 대책같은 거 세우나요?
리> 대책은 없죠. 하하. 그래도 저 같은 경우엔 지금 당장 큰 문제는 없는 편이에요. 다른 친구들보면 일단 상하이에서 돈 어느정도 벌어서 고향에 가서 결혼하고 사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상하이 드림’을 품고 상하이를 찾는다. 리닝이 지금 상하이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어릴 때 부터 ‘상하이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겠어’ 하며 계획해왔던 삶인지 궁금했다.
퍼> 리닝 어릴 적 꿈은 뭐였어요?
리> 어릴 적 꿈이요? 그럼 제 어릴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저는 1984년 산둥에서 태어났어요. 산둥 태안시 동티현 허촌에서 태어났죠. 제가 어릴 때 허촌은 원시적인 농촌이었어요. 가난했지요. 또 어찌나 외진 곳에 있는지. 그런 동네에서 태어난 제 어릴 적 꿈을 물은 거잖아요?
퍼> 네, 어릴 때 꿈.
리> 제 어릴 때 꿈은 그저 먹고 마시며 살 수만 있으면 되는거였죠. 하하
퍼> 세끼 걱정 없이 사는 게 꿈이었다고요?
리> 네. 먹을 거 걱정 없이 사는 게 꿈이었죠. 하하
리닝은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축구선수, 의사, 사업가, 선생님 그런 대답을 의심 없이 기대하고 있던 나에게 ‘기대했던 답은 아니죠?’라고 말하는 듯했다. 맞다. 먹고 사는 게 꿈이었다니. 리닝이 꿈을 말하기 앞서 어릴 시절의 환경을 먼저 이야기해준 이유는 내가 당연히 기대하고 있었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리> 산둥이 어딨는지 알아요? (노트에 중국 지도를 그리며 산둥의 위치를 알려준다) 여기에 있어요. 산둥은 제가 태어날 1980년대 당시에는 아주 낙후된 농촌이었어요. 아주 가난했지만, 모든 사람이 공유한 한 가지 문화가 있었어요.
퍼> 어떤 문화요?
리> 일종의 마을의 ‘도리’와 같은 건데요. 뭐냐면 바로 ‘아이들은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거 였어요. 비록 가난 하더라도 아이들 공부는 소홀히 하지 않았죠.
퍼> 그럼 어릴 때 공부 많이 했겠네요.
리> 그렇죠. 우리 집이 마을에서도 굉장히 외진 곳에 있어서 공부만 했죠 뭐.
퍼> 어릴 때 만화영화 보거나 그러면서 노는데, 그런 것도 안봤어요?
리> 제가 1984년에 태어났잖아요. 그때 중국 농촌에는 테레비전이 그리 보급되지도 않았어요. 제가 어릴 때는 아마 한국의 70년대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거예요. 발전 속도를 보면 한국보다 10~20년 정도 늦다고 보면 돼요. 한국에서는 구테타 일으키고 나서 박정희가 정권 잡고 개발 시작했고, 그 이후에 급속히 발전했잖아요. 그게 중국에서는 80년대 초 정도 되려나?
퍼> 리닝, 잘 알고 있네요.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리> 저를 인터뷰하려는 이유가 그런 거 잘 알고 있어서 그런거 아니였어요? 인터뷰 대상을 잘 고른거죠. 하하
2. 공부를 통해 스스로를 계몽했죠.
퍼> 어릴 때 먹고 사는 게 꿈이었고, 그 이후에 ‘이런 일 하고 싶다, 이런 사람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은요?
리> 별로 없었어요. 어릴 땐 뭐 다른 거 할것도 없고 해서 주로 공부했어요. 공부하면서 다른 곳은 어떻게 살고 있구나,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나가고 있구나, 그런 걸 차차 알게 되었어요. 공부하면서 스스로 계몽했죠. ‘계몽’ 알죠?
퍼> 네, 계몽.
리> 스스로 사고하면서 깨달았죠. 그러면서 꿈이 하나 생겼어요.
퍼> 어떤 꿈?
리>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퍼> 선생님요?
리> 네. 근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은 있었는데, 정작 해야하는 공부는 대학 입시시험이었어요. 한국도 대학 들어가는 시험 경쟁 엄청 치열하잖아요? 중국도 비슷해요. 입시 공부하면서 점점 사고 능력이 떨어졌죠. 하하
리닝이 태어난 산둥성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학구열이 높았던 이유도 그것과 관련 있을까. 통역을 해주던 같은 산둥성 출신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런 배경도 있겠지만 일단 인구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며 현실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퍼> 학창시절 친구들은 지금 연락해요? 뭐하고 있어요?
리>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어요. 우리 동네도 그렇고 당시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 찾아서 일 시작했지요.
퍼>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고요?
리> 네. 그 당시 1990년대에는 중학교 졸업하고도 일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었어요. 지금 도시로 나가서 일 구하고 돈 많이 벌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잘 사느냐, 아니면 공부를 더해서 세계로 나가느냐.
퍼> 세계로 나간다?
리> 공부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공부하고 나서 겪게 되는 생활과 고향에서의 생활의 차이가 얼마나 클지를 이미 알고 있었어요.
퍼>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바로 일 할 수 있었겠네요?
리> 고등학교 졸업하고나서 돈 벌 생각은 없었어요. 왜냐면 대학을 졸업해야 월급이 더 많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할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지 그런 고민하는 건 고졸과 대졸의 월급차이가 별로 안났을 때였고,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2000년대 초반에는 이미 차이가 많이 났을 때여서 고민없이 대학갔죠.
퍼> 대학 수학과 들어간 건 수학 선생님 되고 싶어서 간 건가요?
리> 고등학교 때는 입시 준비 때문에 바빠서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그런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대학 입시 시험 때문에 바빴으니깐. 그래도 수학 공부할 땐 즐거웠고, 재밌어서, 수학과 선택했죠.
퍼> 수학이 재밌었다고요?
리> 그냥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수학 성적이 제일 좋았으니까. 하하. 그냥 잘하는 거 하자 그랬던거죠.
퍼> 대학은 광저우까지 갔잖아요?
리> 산둥에 있는 대학에서는 수학 전공하기에 마땅한 대학이 없었어요. 광저우의 화남이공대학교 수학과가 응용수학 분야가 유명했어요. 그걸 공부하고 싶어서 간 거예요. 그리고 대학 어디로 갈까 고민할 때 고려했던 게 바로 취업률이에요. 화남이공대학 수학과 졸업생 취업률이 높았어요.
퍼> 처음 광저우 갔을 때 어땠어요?
리> 처음 산둥에서 광저우 갔을 때 기차를 25시간 타고 갔어요. 근데 별 다른 건 없었죠. 부모님만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하셨죠.
퍼> 아, 혼자 갔어요?
리> 대부분 혼자가요. 원래 처음 시작은 다 혼자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퍼> 시작은 혼자라. 하하. 25시간동안 기차안에서 무슨 생각 했어요?
리> 25시간 기차 타는데, 그저 피곤했죠 뭐.
퍼> 대학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 갔다했죠? 대학원은 왜 간거예요?
리> 중국에서 요 몇년간 대학 졸업생들이 엄청 늘어났어요. 그럼에도 대학 졸업해도 일 찾기가 쉽지 않아요. 일은 뭐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는 있었는데, 어떤 일인지가 중요하잖아요. 졸업 후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저랑 맞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퍼> 그래서 대학원으로?
리> 수학말고 다른 분야도 공부해보고 싶었어고요. 대학원 가서는 경제학 전공했죠.
퍼> 경제학 전공한 이유는요?
리> 그냥 수학공부하기 싫어졌다고 할까, 이미 흥미를 잃었어요. 경제학은 굉장히 내 일상 생활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고 할까요. 수학은 일상 생활이랑 별로 관련이 없었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하하
퍼> 수학, 그렇죠! 중국 대학원에서 경제학 공부하면서 뭐 연구했나요?
리: 제 전공은 국제 경제였어요. 중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죠.
퍼> 예를 들면?
리> 예를 들면 중국에서 1위안을 소비하면 그 1원이 한국에는 얼마, 일본에는 얼마, 그렇게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 미치는가 같은 거요.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건데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죠. 그렇지만 중국 소비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저축과 투자 보다 적어요. 중국은 저축, 투자율이 높아요.
리닝은 중국이 저축, 투자율이 높은 이유를 네 가지 들었다. 첫째, 저축을 선호하는 문화적 요인, 둘째 노년층 비율이 적고 청년 노동인구 비율이 높은 중국의 인구 구조 특징에 따른 요인, 셋째 중국의 미비한 사회보장 시스템(개인이 투자와 저축을 통해 스스로를 보장해야는 한다)의 요인, 마지막으로 소득 분배가 그 요인이라 했다.
퍼> 소득 분배요?
리> 네, 소득 분배 문제요. 아마 일본과 한국보다 중국이 소득 격차가 더 클 거예요. 더욱이 중국의 대부분의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죠. 이 소수의 투자율이 높으니 중국 전체의 투자율도 높아지는 거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비율이 낮게 나타나고요. 이게 지금 중국 현실이죠.
퍼> 지금 빈부 격차는 어느 정도?
리> 부를 엄청 가지고 있는 사람이 5%, 중산계급이 10%정도? 나머지 85%는 다 저소득층이에요.
퍼> 85%?!
리> 한 가지 예를 들면, 중국은 월 수입이 3000위안(50만 원) 이상이면 세금을 내야해요. 세금을 내는 인구가 중국 전체 인구 가운데 약 27%정도 될거예요. 나머지는 세금을 안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수입이 3000위안(50만 원) 이하라는 거죠.
중국 못지 않게 한국 역시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인데, 실제 통계로는 어떨지 궁금했다. 2010년에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상위 20%의 소득자는 국내총소득의 71.4%를 차지했다. 다시 말해, 나머지 28.6%의 소득을 나눠 갖는다는 말이다. 하위 소득자 20%가 국내총소득에서 차지한 비율은 겨우 1.6%였다. 중국의 저소득층 비율이 85%라고 놀랄 일은 아니었던 셈.
3. 문제 해결의 방법은 오직 하나예요.
퍼> 중국이 경제 발전을 급속하게 추진했잖아요. 그러면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있을텐데… 앞서 이야기한 빈부 격차도 그렇고, 얼마 전에 있었던 723 고속철도 사고도 그렇고.
리> 그렇죠. 많죠. 빠른 경제 성장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야기해요. 첫째, 퀄리티 문제. 둘째 환경 문제, 셋째, 불평등, 빈부 격차 문제. 723 고속철도 사고는 퀄리티의 문제였죠.
퍼> 얼마 전에 영국 런던에서 청년들이 폭동을 일으켰잖아요? 알죠? 곧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리> 그럼요. 유럽에서 자주 있잖아요. 몇 년 전에는 프랑스에서도 청년들이 들고 일어났었고. 중국에서 매일매일 그런 일 일어나고 있어요. 단지 뉴스를 통해 전해듣지 못할 뿐이죠. 그런 정보는 다 통제하고 있으니까.
2010년에 대만계 회사 팍스콘의 노동자 자살은 애플의 유명세 때문인지 주목을 받았지만, 그 외에 다른 시위들은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빈부 격차와 물가 폭등 등에 따른 반사회적 폭동(2011년)
4/20_상하이 트럭운전자 1000여명 기름값 인상 항의 시위
5/10_후베이성 우한 파출소 사제폭발물 자폭, 공안 5명 부상
5/12_장쑤성 난징에서 근로자 수천명 고물가 항의 거리 시위
5/13_간쑤성 텐주 농촌신용합작사 (신용협동조합)에 화염병 투척, 40여명 부상
5/26_ 장시성 푸저우 검찰청 차량폭발 테러, 2명 사망 6명 부상
5/28_ 스촨성 청두 버스회사 폭탄테러, 1명 사망 2명 부상
(출처: 국민일보 2011년 6월 2일 기사)
리> 요즘엔 약간 변화가 좀 일고 있긴 해요.
퍼> 변화요?
리> 웨이보 알죠? 웨이보가 미디어 통제에 도전하고 있죠. 그런 마이크로 블로그를 일일이 다 통제하지 못하잖아요.
웨이보(微薄)는 일명 ‘중국판 트위터’로 중국 포털사이트 시나(新娘)가 제공하는 마이크로 블로그다. 중국 정부는 2009년 6월 2일부터 트위터와 플리커 등의 외국 사이트를 차단했다. 외신은 이러한 중국 정보의 움직임을 천안문사태 20주년을 반정부 인사 모니터링과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는 데 따른 조치인 것으로 풀이했다. 대신 웨이보(微薄)를 이용하는 중국인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데, 2011년 현재 사용자 2억 명을 돌파했다. 참고로 전세계의 트위터 사용자도 2억 명이다.
퍼> 그럼 그 변화를 통해 지금 중국이 경제 발전으로 나온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 보는 건가요?
리> 그렇지는 않아요. 웨이보가 주변을 아주 조금 변화시킬 수 있지만 핵심(core)은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죠.
퍼> 그럼 위에서 지적한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야기된 문제의 해결책은 대체 뭔가요?
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죠. 개발 속도를 늦추는 것(slow down),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해야죠. 그런 다음에는 작은 정부가 되어야 해요. 그건 세금 줄여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중국이 미국보다 세금도 많이 걷거든요. 그 다음 셋째는 환경 보호, 넷째는 인권 보호.
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리닝은 정작 증권회사에서 경제 발전의 속도를 더 부추기는 일을 하잖아요? 하하
리> 그렇긴 하죠.
퍼> 그런 회사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 부작용을 어떻게 해결해야 겠다, 내가 좀 나서야 겠다, 그런 생각 해본적은 없나요?
리> 중국 정부는 상명하달 시스템이에요. 정부가 경제 발전을 개발 속도를 늦추지 않는 이상, 세금을 낮추지 않는 이상은 아마 바뀌기 힘들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 방법이 없다니까요. 하하
퍼> 글쎄…
리> 중국에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게 굉장히 적어요. 팀워크를 중요시하죠.
퍼> 리닝이 속한 팀은 그럼?
리> 팀 따로 없어요. 만일 사회를 바꾸기 위해 팀에 들어간다고 하면 들어갈 팀은 오직 한 팀, 공산당 외에는 없어요.
퍼> 하하. 리닝과 이야기하다 보니깐 중국에 참 희망이 없어 보여요.
리> 아니죠. 경제 발전 좀 늦추고 정부가 작아지면 되잖아요?
퍼> 그렇게 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나요?
리> 사고가 일어나면 바뀌잖아요. 723 사고 같은 것. 그런 사고 일어나면 정부도 생각하잖아요.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죠.
퍼> 그렇게 문제가 극단적으로 가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럼 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희생자는 나오고 그 희생자가 더 나와야 한다는 거고, 그럼 그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리> 기다릴 수밖에 없죠. 정부 행정 관료들도 자기 기관들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제안하고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역시 각각의 힘이 약하긴 하죠.
퍼> 그럼 무기력하거나 그렇지 않나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리> 물론 무기력하죠. 그래서 중국은 기력이 있는 리더가 필요해요.
퍼> 지금 현재 주목하고 있는 기력 있는 리더가 있어요?
리> 정치인 가운데는 없지만 이 사람이 하면 잘할 것 같다 하는 사람은 있어요. 스마트하고 네트워크가 좋은 사람이죠.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4. 정치. 이건 거의 변화 없죠.
퍼> 경제 변화 외에 정치 분야의 변화는 실감하나요?
리> 정치. 이건 거의 변화 없죠. 하하
퍼> 정말요?
리> 정말 발전 안했어요. 알다시피 중국은 오직 한 정당이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잖아요.
퍼> 정치 분야에선 발전과 변화가 없었다니… 중국 정치 구조는 변화 없겠지만, 정치가들의 사상이나 지향점 같은 건 변하지 않았나요?
리> 전혀 안변했어요. 정치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붕괴되고 있는 것 외에는.
퍼> 그래요?
리> 특히 경제 분야는 정치가 컨트롤하기 힘들어지긴 했죠.
퍼> 그럼 경제 전문가가 정치가가 되거나 하면서 정치도 자연스럽게 변하지 않나요?
리> 그런 경향이 있긴 하죠. 예전에는 기술자 출신이 많았는데, 요즘엔 사회과학 특히 경제를 공부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도 여전히 핵심은 변하지 않아요. 공산당 한 정당이 모든 부분을 컨트롤 하는 건 여전하잖아요. 인권을 무시하면서. 인권 무시하는 건 정말 지금 정치의 가장 큰 문제죠.
퍼> 리닝은 언제부터 지금 정부에 불만 갖기 시작한 거예요?
리> 어릴 때 부터?
퍼> 일반적으로 자기 생활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때부터 불만을 갖게 되지 않나요?
리> 내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기보다 내 주변사람들이 한 말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닐까요? 주변에 불만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퍼> 직접 리닝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친적은 없고요?
리> 있어요. 예를 들면 호적 문제만 해도 불만이죠. 지금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는데 호적은 상하이로 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상하이에서는 아무리 일을 하고 있어도 의료, 교육 같은 복지 혜택은 못받아요. 정말 불공평하지 않아요? 불공평하다고 느껴도 아무도 그거 못 바꾸죠.
중국은 농민의 도시 이주를 통제하기 위해 호적 제도를 실시했다. 농업 호적자가 도시로 이주할 경우에는 복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다. 개혁개방 이후 인재확보를 위해 조건에 따라 이주가 가능해졌지만 베이징과 상하이 등의 대도시의 호적을 취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상하이시는 2009년부터 거주증 소유자 가운데 일정 조건을 갖춘 외지인들에게 상하이 호구를 발급하는 호적 개혁을 실시했으나 그 조건은 여전히 까다롭다. 학력, 상하이 근무 경력, 보험납부, 개인소득세 납부, 다른 성(省) 및 해외 지역에서의 근무 평가, 업무 성과 등 7개 지표의 누적점수 100점을 획득한 사람만이 상하이의 호구를 취득할 수 있다.
퍼> 그럼 그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하이시에 제안하면 되지 않을까요?
리> 중국 정치 시스템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죠. 중국 정치 시스템은 상명하달(up to down)이에요. 밑에서부터 출발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어요.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order)만 있을 뿐이죠. 하하
퍼> 투표같은 걸로 참여하면서 바꾸거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리> 투표 물론 할 수 있지만 알다시피 국민당이 대만으로 간 이후에 중국 대륙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은 오직 하나잖아요. 공산당. Vote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건 veto인셈이죠. 선택권이 아니라 거부권.
퍼> 만일 정부에 반대하는 데모가 있으면 참가할건가요?
리> 전 무정부주의자예요. 참가 안할거예요.
퍼> 왜요?
리> 전 지금 정부를 반대하지도 지지하지 않을거예요. 난 민주 정부를 지지할건데 지지할 곳이 없잖아요. 정치 분야에서도 여러 정당이 경쟁하면 좋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퍼> 어떤 정당을 원하는데요?
리> 어떤 정당을 원한다기보다 공산당 외에도 여러 정당이 있어서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만일 여러 정당이 있어서 투표를 통해 결정된다고 하면, 정당이 투표를 하는 사람을 고려하면서 움직일 거 아니예요? 그게 중요한 거죠.
스무살이 되던 해 한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주어졌던 투표권. 나에게 ‘정당이 투표를 하는 사람을 고려하면서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한편으로 식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정당선택권’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던 리닝을 통해 그 ‘식상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식상하지 않았다. 마치 ‘네가 두 발로 땅을 걸을 수 있는 이유가 중력때문이야’라고 다시 일깨워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예전에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했대’라는 상상하기 힘든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뭘까.
5. 중국의 현대사, 리닝의 가족사
퍼> 경제 발전도 물론 급속하게 했지만 중국은 규모가 큰 사회 변혁의 시도를 참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인상이 있어요. 예를 들면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노년층은 항일전쟁,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건, 개혁개방 이걸 다 몸으로 겪었을 텐데, 리닝도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 그런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들었나요?
눈치 빠른 리닝은 노트에 긴 줄을 하나 쭉 긋더니 올해 아흔 살이 되셨다는 증조 할머니의 생애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1920년 증조 할머니가 산둥에서 태어났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단.
1937년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항일 전쟁.
1945년 항일 전쟁에서 승리.
1949년 대륙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에는 중화민국이 설립.
1950년 ~ 53년 조선전쟁. 증조 할머니의 남동생은 중공군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했다.
1958년 ~ 60년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
1960년대 초에 리닝의 부모님이 태어났다.
1966년 ~ 76년 문화대혁명 시기.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
1983년 리닝의 부모님 결혼. 당시 아버지는 19살, 어머니는 22살.
1984년 리닝이 태어났다. 이후 동생도 태어났다. 당시 1인 1자녀 정책 때문에 동생을 호적에 등록시키기 위해서는 벌금을 내야 했다. 당시 돈으로 약 2000위안(34만 원).
1989년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1997년 홍콩 반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했다. 리닝은 베이징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2011년, 공산당 창단 90주년.
대량의 사상자를 나은 ‘723 고속열차 사고’가 발발한 해에, 27살 리닝과 내가 상하이에서 만났다.
리닝은 ‘이 때 박정희가 경제 개발을 급속하게 추진했죠.’ ‘이 때는 대학생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지 않았나요?’ ‘이 때 한국은 경제위기를 겪었죠’ 하며, 중국의 현대사를 소개해주는 중간중간에 한국의 주요 사건도 곁들였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를 놀라게 했던 건 다름아닌 증조 할머니의 남동생이 조선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었다.
퍼> 증조 할머님의 남동생분은 조선전쟁에 참가해서 살아 돌아오셨나요?
리> 네. 살아 돌아오셨어요.
퍼> 아, 다행이네요.
그 말 외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선 전쟁의 한국 측 참전 용사들의 무용담을 접하거나 그들의 손자인 내 또래 친구들은 만나 보았어도, 당시 ‘적’으로 삼아야 했던 누군가의 후손을 만날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평소 궁금했던 천안문 사건에 대해 물었지만, 리닝의 답변을 인터뷰 글로 옮기지는 못한다. 리닝은 천안문 사건은 누군가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우연히 듣고 나서 직접 자료를 찾으며 알아봤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해 공공연한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주제라 했다. 중국의 미디어를 검열하고 있는 <중앙선전부>가 과연 퍼슨웹의 웹사이트까지 방문할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리닝이 물었다.
리> 인터뷰 이제 끝났나요?
퍼> 네. 슬슬.
리> 그럼 이제 제가 인터뷰해도 될까요? 한국 상황에 대해서도 좀 알려줘요.
퍼> 하하. 그럼 인터뷰해서 퍼슨웹에 올릴 거죠?
리> 글쎄요. 그냥 머리 속에 담아두려 했는데. 하하
리닝을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사회 변화나 현재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인터뷰를 하면서, 그리고 녹취를 풀며 글로 정리하면서는 중국 사회보다는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더 비추어보게 되었다. 만일 리닝이 진짜 인터뷰를 해서 내가 리닝에게 던졌던 질문이 나에게 고스란히 반사되어 오면 나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투표할 때에는 여러 정당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결정해요?”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 해결책은 뭐예요?”
“한국은 반정부 시위도 많이 하는데, 그럼 어떤 변화가 나타나요?”
“한국 정부도 미디어 통제 하나요?”
무엇보다 한국의 70~80년대의 급속한 경제 발전 시기에 관심이 많은 리닝은 분명 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 물을 텐데, 그 시대에 대한 평가와 당시 권력자의 딸이 지금 한국의 집권 정당의 주요 세력 중 하나라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가 가장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