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노트, 를 떠나다 – 이수영

자장면을 찾아 중국을 헤매고, 소복을 입고 뉴타운의 부푼 꿈을 위해 부수어진 철거촌을 돌아다니는 미술작가 이수영. 그녀는 자신의 신체에 자라는 습진에서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을 채집하고, 자신이 목격한 길림성 조선족의 삶을 서울의 변두리 가리봉동에서 풀어내는 흥미로운 작업들을 해왔다. 무언가를 모으고 맥락지어, 기록으로 만드는 아카이브 작업은 그녀 작품의 중심이다. 그가 풀어놓는 또 하나의 이야기 <죽음 항해>는 우리 사는 세상의 이슈들을 하나씩 들추어내는 여정의 시작이다.

0. 죽음 하나하나가 베이스캠프다.

죽음 하나하나가 베이스캠프다.
∙∙∙∙∙∙∙∙∙∙∙∙∙∙∙
모래 위의 낙타뼈와  
그보다 몇 걸음 앞에 놓인 사람뼈를 보고  
길잡이를 삼는다
그러므로 뼈는 별
죽음 하나하나가 生의 징검다리다.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이수영_개인전 3회. 첫 번째 개인전에서 자신의 주민등록초본, 범죄경력증명서, 졸업증명서, 반공웅변대회 상장, 핸드폰 통화 내역, 교통카드 내역, 신용카드 내역 등, 개인의 공적기록을 모으고 분류하여 전시했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피부병을 앓았을 때 발랐던 연고, 피 묻은 붕대, 병원 진료기록, 매일 벗겨져 떨어지는 피부각질 등을 모아 전시했다. 그 밖에 작업으로는, 시장에서 야채 팔고 생선 파는 상인들의 四柱(사주)를 봐주며 개인사 구술을 채집했다. 사주 복채로 구운 김, 배추, 찐 옥수수, 참기름, 머리 빗 등을 받아 기록했다.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 식당에서 먹어 본 양(羊) 꼬치구이에 깊은 감응을 받아 커다란 솥단지를 옆에 끼고 살림살이를 꾸려 중국 연길시, 신강우루무치, 카슈가르까지 양고기를 쫒아 초원과 사막을 건너갔다 왔다. 지금은 구제역으로 생매장 당한 돼지를 천도하기 위해 영매되기 훈련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작가 이수영은 40여 명의 일반인들을 자신의 퍼포먼스 <죽음 항해>에 초대했다. 죽음의 항해에 동참할 타나토 노트(ThanatosNaute; 죽음 항해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제목이기도 함)는 인터넷을 통해 모집했다.  
작가가 대절한 소형버스를 타고, 죽음의 현장들을 순례하는 죽음의 항해.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이들의
참여가 많았던 그날의 항해에서, 그들은 어떤 죽음과 마주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바쁘게 사느라, 혹은 터부시하며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자기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마주하는 시간들은 항해자들의 마음 속에서 많은 의미를 생산하고 있었다.  

광화문을 출발한 버스가 처음 선 곳은 벽제 승화원. 망자와 남겨진 이들이 마지막 이별을 하는 그 화장터에서, 항해자들은 다른 이들의 죽음과 마주했다. 구제역 매몰지에 들러 제가 들어갈 관을 직접 옮기며, 그들은 살처분된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어루만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센터에서 진행된 <죽음 항해>의 마지막 코스는 ‘입관의식’. 유언장을 쓰고, 수의를 입은 그들의 손에는 조금 전 환하게 웃으며 찍은 영정사진이 들려 있었다. 관 앞에 서서 유언장을 낭독하고, 제 발로 관으로 걸어 들어간 그들의 몸을 장례지도사들이 정성껏 염했다. 관 뚜껑이 덮이자, 그들은 좁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오롯이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벽제와 구제역 매몰지를 돌며 보았던 다른 생명들의 죽음에 비추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관 뚜껑이 열리면, 죽음의 항해에 참여한 항해자들은 다시 삶의 한복판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지금의 삶을 대하게 될 것 같다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다시 버스에 올라, 처음 출발했던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를 배웅하며 작가는 ‘열심히 살다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 한마디에 순간 웃음이 터졌는데,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길 내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음 항해>를 다녀온 지 오래지 않아, 망각의 동물답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 그나마 작가를 다시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잊었던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시 다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1. <죽음 항해>를 떠나다

 
퍼슨웹(이하 퍼): 오랜만이에요. 제가 작가님의 <죽음 항해>에 참가한 게 지난 7월이니, 벌써 한달이 훌쩍 넘었네요. <죽음 항해> 끝나고 금방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가고 말았어요.  
 
이수영(이하 이): 그러게요. 벌써 한달이 넘었네요. 저도 정신 없이 보냈어요.  
 
퍼: 그럼 인터뷰로 들어가볼께요. 죽음은 옛날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주목해 온 주제였잖아요. 그런데,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죽음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이: 계기가 몇 개 있었어요.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에 작업실(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이 있는데요, 그 곳에 가려면 벽제를 지나게 되요. 그곳은 옛날부터 화장터로 유명한 동네잖아요. 가볼 기회는 없었지만,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엔 서삼릉도 있어요. 사람들이 소풍도 가고, 나들이로도 자주 가는. 생각해보니, 고양시에는 다른 지역보다 묘지가 참 많아요. 벽제, 용미리엔 시립묘지가 있구요. 낮은 산봉우리를 몇 개 지나도록, 묘지가 끝없이 이어진 풍경도 거기에선 볼 수 있죠. 여름이면 풀이 자라 봉분이 안보일 정도로 누군가의 손길을 받지 못한 묘들도 많아요. 눈길이 가더라구요.  
 
퍼: 여기가 일산 근처죠? 고양시보다 일산 신도시가 더 유명해져서 그런지, 일산 근처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못했어요.
 
이: 제가 일산에 10년 넘게 살았거든요. 같은 고양시지만, 신도시로 개발된 일산구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죠. 하지만, 바로 옆 덕양구는 아직도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어요. 사람 사는 집 뒤로 개인 묘지들이 있는 그런 곳들이 많거든요.  
 
퍼: <죽음 항해> 하던 날 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  
 
이: 옛날에는 삶과 죽음이 크게 다른 일이 아니었잖아요. 자기 살던 마을 뒷산에 묻히는 것이 자연스러웠구요. 서울에서 벽제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제가 접하는 풍경,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 거에요. 묘지, 화장터, 납골당, 비석을 깎는 석재소, 납골함을 파는 장례품 상점, 납골이나 묘역 등을 대행해주는 장례대행 가게같은, 죽음과 관련된 대상을 접할 일이 많아졌죠. 그러다 보니, 죽음이라는 테마를 정면으로 마주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죠.
 
퍼: 작업실 이전 때문에 생긴 환경의 변화가 꽤 큰 계기가 된 거군요. 그 외에, 다른 계기는 없었나요?
 
이: 있었어요. 지난해 가을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발생했잖아요. TV에서 보고 듣는 구제역 소식, 살아 있는 동물을 살처분하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죠. 그 전에도 세상엔 분노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 왔었어요. 죄 없는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라크 전쟁, 근로조건과 대우에서 차별을 받아야 하는 계약직 문제, 힘과 권력 있는 자들에게 밀려 소외되고 피해받는 사람들의 일, 그 밖에도 천인공로할 일들이 많잖아요.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고… 그런데, 구제역만큼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퍼: 지난 가을과 겨울, 정말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조금 다른 느낌으로 왔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이: 저… 구제역 이후, 고기를 끊었어요.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시죠? 끊었다기 보다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아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식습관만큼 바꾸기 어려운 것도 없다는데… 40년 넘게 먹어오던, 오래 묵은 식습관에 변화를 줄만큼, 구제역은 저에겐 충격적인 이슈였던 거죠. 의식이 몸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그때 했어요.   
 
퍼: 고양시도 구제역 피해지역이었죠? 서울과 제주를 제외하곤 거의 전국이 구제역 피해지역이었으니… 그래서 더 피부로 와 닿았던 거 아닐까요?  
 
이: 네, 고양시에는 생각보다 축산농가가 많아요. 실제로 고양시에서도 가축들이 살처분되는 일들이 벌어졌지요. 물론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퍼: 그럼, 구제역 매몰지 앞에서 진행한 퍼포먼스는 그 동물들의 죽음에 대한 항변 같은 거였군요?
 
이: 그 가축들은 우리의 먹이로 길러지던 생명들이잖아요. 옛날 인디언들은 자신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는 존중하여 죽이고, 감사히 먹었대요. 그리고 인간도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 싱싱한 자연의 먹이사슬의 일부였다 하더라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존중하여 죽인 게 아니라 그 생명들을 산채로 땅에 묻었잖아요. 시간과 비용,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안락사 대신 산채로 매장을 했던 우리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고 싶었어요.  
 
퍼: 그래서 그때,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보자’고 하셨던 거군요?
 
이: 그때 가보셔서 알겠지만, 소들이 살던 3동의 축사 바로 옆이 동물들이 묻힌 그 자리에요. 자기가 살던 집이 무덤이 된거죠. 그 농장의 소들은 구제역엔 걸리지 않았지만, 구제역 발생 지역이기 때문에 전염을 막기 위해 죽임을 당하고 묻힌건데, 비닐로 덮어놓은 그곳은 3년간 접근이나 발굴을 해서는 안되는 자리래요.  
 
퍼: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가 살던 자리에 묻혔다는 사실이, 전 많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옆에 빈 축사를 보니까 마음이 아리더라구요.     
 
이: 축사 바로 옆이 소 키우시는 분의 집이잖아요. 자기 손으로 키우던 소들을 그곳에 묻고,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마음은 오죽하시겠어요. 거기를 떠나지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실테고…
 
퍼: 퍼포먼스장소였던 그 축산농가는 어떻게 섭외하셨어요?  
 
이: <죽음 항해>를 준비하면서 구제역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고양시청에 구제역 매몰지 리스트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했죠. 일반인이 열람할 수 없는 자료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시의원들은 자료열람이 가능할 듯 해, 몇다리 건너 아는 분 통해 부탁을 드렸죠.  
퍼: 구해주시던가요?  
 
이: 고맙게도 구해주셔서 어디가 좋을지 찾아다녔죠. 제가 다니는 행동반경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매몰지가 좋겠다는 생각에 근방의 몇군데를 가봤어요.  
 
퍼: 그 집이 눈에 딱 들어오시던가요? 특별히 그 집으로 정하신 이유가 있으실텐데…
 
이: 퍼포먼스를 하기에는 그 집이 제일 좋더라구요. 매몰지의 모습이 건너편 도로에서도 한눈에 들여다보이기도 했고, 농장주를 만나 작업에 대한 이야기와 상황을 말씀 드렸더니, 처음엔 흔쾌히 승낙을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다음날 연락이 왔어요. 허락하신 걸 취소하시겠다고…
 
퍼: 왜요? 왜 갑자기 취소하시겠대요?
 
이: 뭐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이야기를 했겠죠. 미술작업하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작업을 하는데, 사람들과 여기 와서 뭘 할꺼다 라는… 모르죠, 다른 분들이 안하는 게 좋겠다고 그랬을지도요. 구제역매몰지에 사람들이 와서 혹시나 병이라도 났다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말썽이라도 나면 귀찮아질까 그러셨는지… 매몰지가 원래 3년간 출입금지라잖아요. 그런 곳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이 많으셨나봐요. 

2.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퍼: 아…그래서 길가에서 관에 들어가는 작업을 진행한 거군요?  
 
이: 네. 축사 안에서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매몰지도 보이고, 한적한 도로 옆이라 퍼포먼스를 하기엔 큰 무리는 없었던 것 같아요.
 
퍼: 저, 관 말인데요. 몇 개나 만드신 거에요?
 
이: 나무와 판자 사다가 열개 넘게 만들었어요. 정식 관이 아니니까 관 형태의 상자인 셈이죠. 구제역 매몰지에서 2인 1조가 되어 입관 체험을 할 때, 고양 스튜디오에서 유서 쓰고 수의 입고 약식으로 염하는 입관의식을 할 때 쓰려구요.  
 
퍼: 물론 정식 관은 아니라지만, 관에 들어가는 것은 접해보기 힘든 경험이잖아요. 관에 누워 뚜껑이 덮이고 어두운 공간에 누워있자니, 자꾸 관과 뚜껑 사이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눈길이 가더라구요. 영문도 모르고, 아니 영문을 모른다기보다는 어이없는 죽음을 직감하면서, 소들이 두려움과 절망 속에 바라봤을 마지막 빛도 그런 모습이었겠다 싶었어요.  
 
이: 그랬군요. (웃음)
 
퍼: 그러고 보니, 작가님이 활동하는 그 동네는 아픔이 있는 동네네요.  
 
이: 네. 구제역 말고도 동물들이 죽음을 당한 사건은 또 있었어요. 저희 옆 동네인 사리현동에서 작년 7월 잣나무와 느티나무를 벌목했는데, 그 때문에 백로 3백여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거든요.  
 
퍼: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이: 서식지가 없어지면서 일어난 일이죠.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을 기르던 계절이었는데, 벌목으로 인해 나무에 깔려 죽기도 하고… 마을 주민들이 백로들이 죽은 그곳에 위령비를 세웠어요. 그 나무가 아무리 개인의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생명을 앗아갈 위험이 있다면 생태계 보호와 복지차원에서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게 맞죠.  
 
퍼: 그랬군요… 그런데, 작가님이 <죽음 항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정확하게 무엇이었나요?  
 

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잖아요. 그것이 진리구요. 하지만 죽음을 마치 자기에게는 오지 않는 것처럼 터부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죽음은 삶과 동일선상에서 진행되는 과정인데, 지금 우리에겐 죽음이 격리되어 있잖아요.  
 
퍼: 그러네요. 옛날에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것이 당연했는데, 요즘은 모두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 혹은 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하니까요.
 
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격리되어 있는 셈이에요. 우리가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다보니, 태어남에 지나치게 기뻐하고, 죽는 것에 지나치게 슬퍼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나 싶어요. 옛날에는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생활의 일부이고, 자연스러웠거든요.  
 
퍼: 그런 면이 있긴 하죠. 죽음이라고 하면 왠지 두렵기도 하고…
 
이: 제 생각은 그래요. 먼저 죽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 생을 비추어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요. ‘죽음 하나하나가 베이스캠프’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가 죽으면 뒤에 그 죽음이 남은 이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죽음 하나하나를 징검다리로 우리 생을 싱싱하게 같이 건너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
 
퍼: 결국은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베이스캠프가 될 내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네요. 어찌 보면 ‘잘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테마를 건드리신 셈이네요?
 

이: 그렇죠. 우리나라 자살률이 꽤나 높다잖아요. 2010년 기준으로 청소년 사망원인 중에 가장 많은 것도 자살이구요. 2009년엔 세브란스 병원 김할머니의 존엄사 논쟁으로 시끄러웠구요. 거기에 지난 가을 구제역까지 거대한 죽음의 쓰나미가 휩쓸고 갔어요. 우리나라뿐 아니고 전세계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들이 매일 뉴스를 통해 전해지잖아요. 우리는 그 흉흉한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천재지변이 아닌 한, 잘 살아야만 잘 죽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퍼: 웰빙과 웰다잉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거네요.  
 
이: 재미난 일이지만, 사람들은 웰빙에만 매달리지 웰다잉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죽는 것이 두렵다고들 하는데,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자존감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요?
 

3. 진정성을 위해 합일을 꿈꾸다.  

 
퍼: 이야기가 좀 무거워지는 것도 같으니 화제를 바꿔보죠. 퍼포먼스 하시던 날, 소복 입으셨잖아요. 여느 상복과 다르게 어찌나 고와 보이던지… 벽제 승화원에 갔을 때, 상주들의 시선이 많이 꽂히던데요?  
 
이: 그랬어요? 퍼포먼스 복장으로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소복으로 결정했어요. 남대문 시장에서 10만 원 주고 맞춰 입었죠.
 
퍼: 장례 기간에만 입는 나일론 한복이 아니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어요.
 
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죽음 항해>를 준비하러 승화원에 갔을 때, 직원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한 여름에도 검은 색 긴팔 장례복을 입는 것은 좀 과해 보인다구요.  
 
퍼: 과해 보인다구요?
 
이: 형식에 얽매여 장례를 너무 격리시킨다는 의미셨어요. 평상복으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곳이 화장터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셨어요.  
 
퍼: 아 네… 근데, 작가님. 그날 흰 한복 위에 빨간 모자를 쓰셨잖아요. 무당들이 쓰는 모자요. 그 모자는 어떤 상징성을 가지는 건지 궁금하네요.
 
이: 전 <죽음 항해>에서 ‘영매’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매개자가 무당이잖아요. 영매가 되려면 ‘신빨’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저에게 금방 내릴 리는 없잖아요. 그래서 영매라기 보다는 죽음 전체를 가이드해주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흰 한복에 영매를 상징하는 무당모자, 이렇게 입으면 죽음을 가이드하는 복장으로는 괜찮을 것 같았어요.  
 
퍼: 손에 들고 계시던 해골은요? 설마 진짜는 아니죠?  
 
이: 그건 과학재료상에서 샀어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기 가장 좋은 물건이니까요.  
 
퍼: <죽음 항해>의 출발점은 광화문이었잖아요. 광화문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거였는데, 신청한 분들이 모두 오기까지 작가님은 버스 앞에 그 복장으로 서 계셨구요. 그걸 보고 함께 갔던 분이 묻더라구요. ‘작가지만 창피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그러고 서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도 힐끔거리던데, 솔직히 그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이: 쳐다보면 창피하죠. 저도 사람인데… 게다가 퍼포먼스를 전문으로 해왔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뻘쭘하니 서 있을 순 없잖아요. 제가 진행하는 퍼포먼스인데요.
 
퍼: 작가들은 그런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이: 하하. 죽음에 대한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그랬나봐요. 죽음을 테마로 작업을 계속하고, 작업에서 영매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몇 년을 더 노력하다 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퍼: <죽음 항해>에 대한 반응이랄까, 평가는 어땠나요?  
 
이: 교육적 차원에서는 좋았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하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건질게 없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퍼: 왜 그런 부정적인 평가를…
 
이: 제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퍼포먼스’를 했다라는 기록 외에도 뭔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었으면 했는데, 막상 퍼포먼스를 끝내고 정리를 하다보니, 이미지 생성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퍼: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작업이잖아요?
 
이: 뭐, 시작한지 6개월도 채 안된 작품으로 벌써 성공여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 조금 더 해나가다보면, 뭔가 맘에 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지가 되었건, 개념이 되었건 간에. 읽히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데, 이번 작업은 한눈에 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족하다 느꼈던 거죠.  
 
퍼: 아, 그래서 실패라고 생각을 하신거구나……
 
이: 죽음에 대한 식상한, 너무 뻔한 이야기가 아닌,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죽음에 대해 너무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만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퍼: 그럼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계세요? ‘죽음’이라는 주제가 아니라도,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나요?  
 
이: 음… 돼지 축사를 지어서 짧으면 일주일, 혹은 그보다 더 길게 직접 살아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퍼: 돼지 우리요? 그걸 어디에요? 설마 농장에?
 
이: 아뇨. 전시장에 돼지우리를 만들어 놓고, 돼지처럼 살아보는 거죠. 먹고 싸고…. 관객들에게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구요. 내가 직접 돼지의 입장이 되어보면, 제가 하고자 하는 이런 작업에도 진정성이 생기지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영매’라는 것은 어떤 대상과 합일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잖아요. 영매가 되기 위한 첫번째 노력으로 합일이라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퍼: 돼지 신과 합일을 해보시려구요?
 
이: 구제역으로 죽은 돼지의 영혼을 만나야 돼지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테니까요.  
 

4. 죽음 항해자, 죽음을 체험하다.

 
퍼: 참, <죽음 항해> 중에 유서 쓰는 시간도 있었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이나 쓰는 건가 보다 싶었는데… 저도 유언장은 그때 처음 써봤거든요. 써야 할 항목들이 꽤 많아 좀 놀랐어요. 언제, 어디서 죽고 싶다는 이야기도, 장례의 형식과 시신의 처리방법도 쓰라는 항목에서는 생각이 많아지더라구요.  
 
이: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좀 드신 분들도 대부분 해본 적이 없는 일일 거에요, 유서쓰기는. 유서를 쓴다거나 자기 장례식을 미리 계획한다는 거, 솔직히 주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결혼식은 어떻게 할지 몇 달을 고민하며 준비하면서도, 장례식을 직접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죠.  
 
퍼: 그건 그래요.  
 
이: 이번에 참가한 분들이 쓴 유서를 보면,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자기 집에서 잠들 듯 가길 원하더라구요, 다들…
 
퍼: 실은 저도 그렇게 썼어요. (웃음) 이번 퍼포먼스에 항해자로 참여해 영정사진을 찍고, 유서를 쓰고, 수의를 입고 염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체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더라구요.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적고, 어떻게 장례식을 치르고 싶은지 미리 계획해 보는 것도 꽤나 의미있었구요. 솔직히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 맞을지 모르는 것이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요? 작가님은 유서에 뭐라고 쓰셨어요?
 
이: ‘폐 많이 끼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을 주로 썼어요. 내 주위의 사람들, 가족으로, 친구로 내 곁에 있어준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꼭 전하고 싶더라구요. 솔직히 유서쓰기는 퍼포먼스 중의 한 프로그램이었잖아요. 뭐, 공증을 받으면 정식 유서가 되긴 하겠지만, 그럴 것도 아니구요. 그냥 프로그램의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유서를 쓰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안에서 올라오더라구요. 그렇게 감정이입이 될 줄은 몰랐어요. 놀라웠죠.  
 
퍼: 실제로 거기 참가한 이들 중에, 입관에 앞서 자기가 쓴 유서를 읽다가 울먹이는 분도 계시던데요.  
 
이: 네, 이틀 동안 두 팀으로 나눠 퍼포먼스를 진행했는데, 젊은 여자분께서 울먹이시더라구요.  
 
퍼: 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장례법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시대에 따라 장례법에도 트렌드가 있는데요. 매장, 화장, 납골당, 수목장 등 다양한 장례방식이 있잖아요.  
 
이: 전, 돌아가신 분을 떠나 보낼 물리적인 장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장 후 남겨지는 묘도, 화장 후 들어가는 납골당도 그런 장소죠. 하지만, 전 떠난 사람은 완전히 떠나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퍼: 화장해서 뼈를 뿌리신 분들은 보고 싶을 때 찾아갈 곳이 없어 섭섭해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요.
 
이: 돌아가신 얼마 동안이야 자주 찾아가고 계속 잘 관리할 것 같죠.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돌보지 않는 곳들이 많아지잖아요. 무연고 묘들도 늘어나고…
 
퍼: 하긴 그렇죠. 후손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 그렇게 될 바에야, 수목장이 가장 좋은 장례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5. 다른 생명의 죽음에 주목하다.

 
퍼: 그렇군요. 아까 잠깐 이야기하다가 넘어간 부분인데요.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쪽으로 좀 더 이어가 볼게요.  
 
이: 우리가 먹는 육류는 대부분 공장식 대량 사육의 결과물들이에요. 환상적인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에 가둬놓고 키우잖아요. 초식동물인 소에게 풀만 먹이는 게 아니라 사료를 당연한 듯 섞어 먹이구요.  
 
퍼: 항생제도 꽤 많이 먹인다던데요.
 
이: 원래 자유롭게 풀밭 위에서 사는 것이 동물들의 본성인데, 그렇게 본성에 거스르는 환경에서 오로지 ‘고기’라는 제품이 되기 위해 사육되는 아이들은 삶 자체가 가여워요. 그렇게 사는 것도 가여운데, 구제역을 만나 그렇게라도 살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땅에 묻혔다는 사실, 전 그 죽음이 용서가 되지 않더라구요. 사람의 죽음만 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생명들이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어요.  
 
퍼: 동물복지가 이루어지지 않는 공장식 사육은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죠?  
 
이: 농장에서 사육되는 소들의 대부분이 사료를 먹잖아요. 그 사료는 옥수수를 비롯해서 곡식가루와 지방, 항생제, 성장발육제, 비타민들을 섞은 거래요. 몸무게를 불리기 위해,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지방도 넣어 먹인다 하더라구요.  
 
퍼: 얼핏 듣기엔 몸에 좋은 것들만 넣은 것 같은데요?  
 
이: 잡식동물인 사람의 입장에선 그래 보이죠. 하지만 초식동물들은 사료를 먹는 것 자체가 문제라더라구요. <잡식동물의 딜레마>*란 책을 보면, 우리가 먹는 고기들의 생산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요. 반추동물인 소는 옥수수를 먹게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라네요.

*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2006), MachaelPollan 작.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2008)
 
퍼: 그래요? 소가 옥수수를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인걸요?
 
이: 그 책에 의하면, 소는 풀만 먹고도 얼마든지 고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동물이라네요. 풀을 먹으면 그것이 위를 거쳐, 되새김질을 하는 과정에서 미생물이 작용해서 발효되고, 소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영양분으로 변한대요. 소의 위는 원래 중성인데, 풀이 아닌 옥수수가 주원료인 사료를 계속 먹게 되면서 위가 점점 산성으로 변하고, 결국은 병이 난다는 거죠.  
 
퍼: 아… 옥수수 사료가…그렇군요…
 
이: 옥수수가 주원료인 사료는 살 찌우는 데는 좋지만 소들에게는 맞지 않는 음식인 거에요. 사료를 먹는 소들의 대부분이 위궤양을 앓거나 배에 가스가 차는 등의 증상을 보인다 해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있으니 소들이 망가지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항생제를 달고 사는 거구요.  
 
퍼: 짧은 시간에 상품으로 도축할 소를 만들기 위해, 결국은 소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거네요?
 
이: 소는 보통 18개월 이후부터 도축을 한다고 해요. 그런데 자연상태에서는 그 기간에 도축할만한 크기로 자라질 않는다네요. 짧은 기간에 도축할 만한 크기의 어른소 몸을 만들기 위해 사료를 먹인다 하더라구요.  
 
퍼: 경제동물로 산다는 건 참 슬픈 일이네요.  
 
이: 그렇죠. 본성을 거스르는 환경에서, 자기에게 맞지 않은 먹이를 먹으며 자라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생이니까요.  
 
퍼: 소들이 행복해야, 그 고기를 먹는 우리도 행복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건데…
 

이: 소의 위가 산성으로 변하면서, 우리도 소가 앓는 질병들에 감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대요. 소의 위는 중성이고, 사람의 위는 산성이라 소의 몸에 살던 균들이 그 고기를 먹는 우리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못했었는데요. 그 병균들도 산성 위를 가진 소들의 몸에 적응하고 변형되면서 인간을 위협하는 병균이 된거죠. 어찌 보면 인간이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에요.  
 
퍼: 정말 고기를 전혀 입에 안대세요? 고기 끊기가 쉽진 않았을텐데… 지금까지도 안드시나요?
 
이: 아주 안 먹는 건 아니구요. 갇혀 자라지 않은, 방목해 키운 소나 돼지, 닭, 생선 등은 먹어요.  
 
퍼: 아하, 공장식으로 사육된 고기를 끊으신 거군요?
 
이: 동물복지 차원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도축된 고기들은 먹어요. 누가 토종닭 삶았다 하면, 얼른 뛰어가 먹습니다. (웃음) 얼마 전에 몽골에 갔다 왔는데, 초원에서 방목해 잡은 양고기는 마음껏, 즐겁게 먹다 왔어요.  
 

6. 교육은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퍼: 초원에서 사는 몽골의 양들은 행복해 보이던가요?
 
이: 그래 보이던데요. 낯선 이들을 좀 무서워하긴 했지만…
 
퍼: 몽골의 양들은 왜 행복해 보였을까요?
 
이: 몽골은 인간도 양처럼 사는 곳이잖아요. 갇히지 않고 초원을 떠돌며 자유롭게… 몽골에서는 양의 생사가 인간의 생사와 맞닿아 있더라구요. 인간과 동물이 하나로 얽힌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몽골에서는 양을 잡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남김 없이 먹는다 하더라구요. 고기가 생산되는 과정이 소비하는 이에게까지 공개되는 상황이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퍼: 그러고 보니, 우리는 고기가 생산되는 과정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네요.
 
이: 그 과정이 소비자에겐 공개되지 않아요. 생략되어 있는 거죠. 소나 돼지, 닭이라는 살아있는 실체보다 랩으로 포장된 ‘고기’라는 제품으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만나게 되니까요. 키우고 도축하는 생산과정에 관해서는 우리가 생각을 안 하는 거죠. 제육회사들이 보여주지 않는 그 생산과정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많다 해요.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 필요가 있는 거죠. 아이들에게 견학도 하게 하구요.  
 
퍼: 고기뿐 아니라 알고 나면 불편해지는 것들이 많긴 하네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축구공이 그 또래의 동남아시아 어린이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던가,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의 상당수가 노동력 착취의 결과물이라는 것도 그렇고… 소시지가 어떤 부위들로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것도요.  
 
이: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잘 알지 못하거나 관심조차 없는 것들이 많잖아요. 그걸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죠. 교육이라는 건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퍼: 몽골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그쪽으로 여행도 많이 다니셨나봐요. 잘 씻지도 못하고, 여행하기 불편한 곳, 지저분한 곳으로 많이들 상상하시던데, 진짜 그래요?
 
이: 전 주로 우리나라의 왼쪽으로 여행을 다녔어요. 위구르,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그런 쪽으로요. 사람들이 흔히 못사는 곳, 여행하기 불편한 곳, 더러운 곳이라는 인상을 갖는 경우가 많아요. 가본 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많지 않으니까요. 더럽지 않구요. 실제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참 친절하고 좋아요.  
 
퍼: 어떤 느낌이었는데요?
 
이: 우리 어렸을 적만해도, 밥 때가 되면 지나가는 사람 불러 세워서 밥 먹고 가라고 그러고, 차도 주고 그랬었잖아요. 그런 훈훈한 정서가 그곳엔 아직 있더라구요. 매일 샤워를 하는 도시사람들은 물이 없는 그곳에선 잘 닦을 수가 없으니 더럽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듯 한데요. 그렇지 않더라구요. 물이 없어 잘 닦을 수 없는 건 맞는데, 이상하게 냄새가 나거나 더럽지 않아요.  
 

퍼: 진짜 그래요?  
 
이: 도시보다 오히려 깨끗한 느낌이랄까요?  
 
퍼: 뜻밖인데요?  
 
이: 시골에 가서 뭐 먹으면 괜찮지만, 도시에서 뭐 먹었다가 배탈나는 그런 경우 많잖아요. 비슷해요.  
 
퍼: 하긴 그런 경우가 있죠.  
 
이: 도시에서 살던 습관대로 화장하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그런 곳에 가면, 아마 그들의 입장에선 제가 가장 더러운 대상이지 않을까요? 동물들도 냄새 난다고 피할 것 같고… 진짜 희한한 건요, 양, 낙타, 염소, 소, 말 이런 가축들이 누는 똥에서도 똥냄새가 안나더라구요.  
 
퍼: 냄새가 안난다구요? 설마요…
 
이: 처음엔 말라서 냄새가 안나는 건가 싶었는데, 금방 눈 따끈한 것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냄새가 안나더라구요. 마른 풀 냄새가 났다고나 할까…
 
퍼: 그 똥을 말려 땔감으로도 쓰잖아요. TV에서 보고 으악… 어찌 저걸 저리 만질까, 그리고 저 냄새 나는 것에 어찌 빵을 굽고 음식을 익혀 먹을까 싶었는데, 진짜 그 정도의 느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어요.
 
이: 몸에 안 맞는 것을 먹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먹으니 그런가 봐요. 똥이라 해도 동물들이 흡수하고 남은 섬유질들이 뭉쳐진 것이니, 말리면 땔감으로도 쓸만하겠다 싶더라구요.  
 
 

7. 직업적 창작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퍼: 퍼포먼스 이야기에서 시작해 공장식동물사육, 몽골의 행복한 양 이야기까지 이어졌네요. 다시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죽음 항해>이전에는 어떤 작업을 하셨어요?  
 
이: 아카이브 성격의 작업들이 많았어요. 기록작업이라고나 할까.. <죽음 항해> 직전까지 하던 작업은 ‘사주’와 관련된 작업이었어요. 작년에 스페인에서 진행된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도, 사주 작업을 진행했죠.  
 
퍼: 사주요? 사주를 직접 봐주는 건가요?
 
이: 네. 사주를 보는 행위는 사주쟁이에게 자기 속에 감추어진 것을 털어내는 거잖아요. 대학은 가겠냐, 간다면 어느 대학에 가겠냐, 돈은 많이 벌겠냐, 결혼은 언제 하냐, 잘 살겠냐…
 
퍼: 맞아요. 주로 그런 것들을 묻죠.
 

이: 뭐 그런 식으로 묻는 것들이 자신 안에 꽁꽁 감추었던 욕망을 질문을 통해 드러내는 과정이더라구요. 사주를 보는 순간만큼은 다들 솔직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니까요. 인간의 욕망이야 대부분 뻔하죠. 거의 비슷한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들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라요. 끈적끈적한 이야기부터 돈 이야기 등등…
 
퍼: 그럼, 사주 보는 것 자체가 행위 예술이 되는 건가요?  
 
이: 그것도 그렇고, 사주풀이 노트에 사주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메모를 하잖아요. 사주 위에 그어진 밑줄이라던가, 강조하기 위해 쳤던 동그라미라던가… 이런 것들을 전 일종의 ‘드로잉’이라 생각한 거에요. 사주쟁이와 사주를 보러 온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함께 생성해 낸 드로잉…
 
퍼: 그 사주풀이 노트를 전시하는 거군요?
 
이: 네, 사주풀이 노트와 함께 복채들도 전시해요. 일종의 아카이브죠. 올해 초, 어떤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열었는데, 전시 제목이 <인터뷰>였어요. 인터뷰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을 모은 기획전이었는데, 그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제 사주작업도 거기에 포함시켰더라구요. 사주 보는 방식 또한 인터뷰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면서….
 
퍼: 흥미롭네요. 그럼, 복채로는 뭘 받으셨어요? 돈으로 받진 않았을테고…
 

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썩지 않는 것으로 달라 그랬어요. 머리핀, 손수건, 동전 뭐 이런 것을 놓고 간 이들도 있었고, 책갈피, 쿠폰… 다양해요.  
 
퍼: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뭘 드려야할지 고민될 거 같네요. 복채로는 주로 돈을 주니까…
 

이: 뭘 줄지 고민하면, 주머니에 있는 것 중에서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줘도 된다고 했었죠. 정말 별의 별 것들이 모이더라구요. 수유시장에서 사주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시장상인들은 자신이 팔던 것들을 주로 갖다 주시더라구요. 삶은 옥수수, 참기름, 들기름 같은 것도 있었고…
 
퍼: 어떤 것이 제일 많던가요?
 
이: 음료수요.
 
퍼: 그렇군요. 음… 작업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세요?  
 
이: 제 직업은 창작을 하는 거잖아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관념적으로 작업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자료조사를 하고, 그것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한거죠. 물론 쥐어짜는것 같은 과정도 있었어요. 창작이 직업인데,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퍼: 쥐어짜는 듯한 과정이라… <죽음 항해>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이: 글쎄요. <죽음 항해>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갖고 진행하고 있는 듯 해요. 죽음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한지는 이제6개월 남짓 된 거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습작과정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어찌보면 작업방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전에는 직업이니까 작업도 직업적으로 하려 했다면, 이제는 하고 싶어서 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퍼: 작가님의 작업은 사회적인 이슈와 맞닿으면서 변화를 겪고 있는 듯 하네요.  
 
이: 작가도 사회 구성원이니, 사회적인 이슈들에 무감할 순 없죠.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8. 정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

 
퍼: 구제역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슈가 또 있으세요?  
 
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지금도 농성중인 김진숙 위원장의 이야기요.  
 
퍼: 아. 네…
 
이: 희망버스에 올라 부산역에서 그분이 있는 곳까지 행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의지를 가진 한사람이 세상에 퍼뜨리는 에너지의 파장이 얼마나 크던지! 어찌보면 구제역과 한진중공업은 뜬금 없이 내 삶에 다가온 이슈들인데, 그로 인해 제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의식이 생활을 변화시키고, 감각을 바꾸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면서, 대체 이게 뭔지를 한번 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 생기더라구요.  
 
퍼: 김진숙 위원장과 관련한 작업도 하셨어요?  
 
이: 최근에 <김진숙 오마주>라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퍼: 어떤 작업인데요?
 
이: ‘김진숙 오마주’라는 응원구호를 적은 천을 들고 어딘가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는 형식의 작품이에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면 그 자체로 응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저도 찍고, 동료 작가들도 찍고… 말하자면 릴레이식 작품이지요. 이번에 몽골에 갔을 때도, 초원에서, 고비사막에서 ‘김진숙 오마주’가 적힌 천을 들고 사진을 찍었어요.  
 
퍼: 왜 그런 작업을 하시는데요?
 
이: 그 용기에 응원을 보내고, 존경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요. 저요, 혹시 김진숙 위원장이 농성을 풀고 크레인에서 내려온다 하더라도, 응원은 계속하고 싶어요.  
 
퍼: 마음에서 우러난 일이니, 그 작업은 계속되겠네요.  
 
이: 작가들은 마음에 고인 생각을 작품으로 풀어내잖아요. 감수성이 풍부하던 어린시절에는 잘도 고이더니, 어른이 되면서 고이는 속도가 점점 늦어지더라구요. 이 작업을 하면서 차오르는 느낌이 들어 기쁘더라구요.  
 
퍼: 고이지 않는다는거, 창작의 고통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 비슷해요. 하지만 요즘의 작업들에선 세상과 나의 기운이 만나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을 향한 내 안테나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점도 기쁘고요. 사실, 전 내 삶이 비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퍼: 비겁하다고요?
 
이: 네. 구제역 같은 경우도, 그 사건을 통해 뭔가를 느꼈다면, 뭔가 행동으로 옮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거든요. 현장에서 그 부조리에 대항하며 뜨겁게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데 대해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면승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컸죠. 정답은 현장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퍼: 정답은 현장에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예술가의 사회참여랄까,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사회참여라는 말보다는 뭐랄까, 내 밖의 이슈? 나를 둘러싼 이슈에 내가 참여하는 게 아니라, 이슈 자체가 내 문제라고 여겨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구요. 전 김진숙 위원장처럼 사회에 피부를 맞대고 사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작가라는 직업은 사회적인 관계 안에 완전히 들어있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퍼: 예술가들은 사회생활이라는 틀에 많이 묶이지 않으니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어요.  
 
이: MB정권이 예술을 고갈시킬 당시, 어느 문학작가회의에서 성명서를 냈는데, 거기에 ‘문학은 시대의 가장 바깥 피부다’라고 썼더라구요. 예술가들에겐 그게 필요한 거죠.  
 
퍼: 사회적 이슈 자체에 깊은 관심과 이해, 통찰이 있어야 하는 거네요.  
 
이: 사람들은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독재자에 대해 뭐라 하거나 거대한 권력, 정권에 대항하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몰라요.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립하고 대항해야 하는 상황이 더 어렵죠.  
 
퍼: 일반적으로는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는 게 더 어렵다고들 생각할 텐데요…
 
이: 가장 가까운 동료, 함께 일했던 이들과 반대편이 되어 싸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자기 삶이 이슈와 동화되어야만 그런 것도 가능해지겠죠. 그런 마음으로, 이슈와 동화된 상황에서 작품을 한다면 정말 멋질 것같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흉내만 내는 수준이 아닐까요? 진짜 제 살이 아파야 아프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작가로서 이슈가 내 자신이 되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죠.  
 

9. 좋은 작업을 위해 잘 살아야 한다

 
퍼: 예술가로서 현재에 만족하세요?
 
이: 글쎄요. 몇몇 잘나가는 작가들은 몰라도, 예술가라는 직업은 돈이 되는 직업이 아니에요. 게다가 딱히 ‘나는 작가다’라고 말하며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퍼: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이: 장르를 불문하고 훌륭한 작가들을 보면, 뭔가 뚫고 나가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세상살이에 연연하지 않아요. 결국 그런 사람들의 작품에는 힘이 있고, 파급력을 가지죠. 전 그런 작가들의 작업이 부러워요. 잘 살아야 작품도 잘 나온다고 생각해요. 돈의 문제가 아니구요. 진정성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해야 진정성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보는 거에요.  
 
퍼: 스스로가 진정성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 목표시군요?  
 
이: 내 스스로가 내 안에서 분출되는 파장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외부의 것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을테니까요. 솔직히 예술가라는 직업은 불안해요. 남들은 다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할 때불안하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만 실력을 평가하는 이 세상도 불안하구요. 저도 인간인지라 짜증, 노여움, 자기비하 같은 것을 느끼게 되죠.  
 
퍼: 아, 네…
 
이: 이젠 남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내 자신이 파장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사람이니까 욕망이 없을 수는 없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 욕망에 휘둘려 왔었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컨트롤할 수 있었으면 해요. 분노도, 슬픔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너무 거기에 함몰되면 안되지만…
 
퍼: 그렇죠…
 
이: 잘 살아야 좋은 작업이 나온다는 생각도 그래서 하게 된 거에요. 남들이 보던 안보던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죠.  
 
퍼: 좀 우매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이: 몽골에 갔을 때, 티베트 불교 사원을 구경하러 갔었어요. 우리나라에선 많이 볼 수 없는데, 거기엔 돌리는 경전*이 있더라구요. 그걸 돌리면서 기도를 했죠. ‘다음 생에는 수도사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아니면 혁명가로 태어나게 해달라고요. 기도라기 보다는저 자신의 다짐에 가까운 이야기에요.
 
* 윤장대(輪藏臺): 불교에서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함.  
 
퍼: 왜 하필 수도사로 태어나고 싶으신 거에요?
 
이: 뭐, 딱히 이유는 없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불교식으로 말하면 생노병사라는 굴레 안에서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건가봐요. 몽골여행 중에 한국 수녀들을 만났는데, 같이 간 일행에게 수도생활을 하는 그들이 존경스럽고 부럽다고 말했더니 그러더라구요. ‘외롭지 않겠냐’고. 뭐… 존재는 모두 외로운 거잖아요. 결혼을 했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퍼: 그건 그래요. 혼자 있다고 더 외로운 것도 아니고…
 
이: 적어도 그 수녀들은 외로움을 직시하며 맞짱을 뜨고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일반인들은 뭔가 삶에 핑계가 많구요. 이래서 외로워, 저래서 외로워, 남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니 저도 한번도 정면승부를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존재의 심연, 우주의 기밀, 뭐 그런 것에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어요. 혁명가의 삶도 수도사와 마찬가지라 생각하구요.  
 
퍼: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내면세계가 강해서, 그런 것엔 크게 개의치 않고 사시는 줄 알았어요.  
 
이: 그럴리가요. 창작을 하는 사람일수록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전 내년에 해인사나 통도사 같은 큰 가람에 들어가 짧으면 1개월, 길면 3개월 정도 ‘템플 레지던스’를 해볼 계획이에요. 마음공부를 하는 기간이자, 작업을 열심히 하기 위한 과정으로 시간들을 좀 보내볼까 하고 있어요. 수도사들의 기운이라도 흠뻑 느껴보고 싶어서요.
 
퍼: 꼭 가시게되길 빕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 네, 저도요.
 
퍼: 뭐,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니, 고기라도 드시러 가실래요?

이: 하하하하하. 고기 끊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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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죽고 싶다’는 하소연 속에 ‘살고 싶다’는 절규가 담겨 있듯,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잘 살아보세’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슈로 떠오른 수많은 죽음을 통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이수영 작가와의 인터뷰는 남의 일인양 관심 갖지 않고 살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자각하게 했다. 주가와 환률, 재테크에는 촉각을 세우면서도 TV와 신문 등 매체를 통해 접하는 사회적 이슈들, 그 안에서 죽어간 생명들에는 시큰둥하게 반응해왔던 지난날들에 미안했다.
 
‘잘 산다’의 의미는 여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산다’라는 말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의식을, 양심을 갉아먹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잘 산다’의 참 뜻에 대해 고민하고, 몸소 실천하려는 이들도 많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잘 산다’의 의미를 더 폭 넓고 심도 깊게 생각하게 된다.
 
<죽음 여행>은 잘 죽기 위한 체험여행인 동시에, 잘 살기 위한 자각여행이었다. 남의 죽음에 기대어 내 삶을, 우리가 마주하는 생명들을, 그리고 그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진 사회를 다시금 적극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어깨를 토닥여준다. 앞 선 죽음들을 베이스캠프 삼아 보다 건강하게, 싱싱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