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 패턴 뜨는 환갑의 장인 – 장효웅

명동 부띠끄 출신. 1970년대 당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5급 공무원으로의 길이 아닌 앙드레김 부띠끄 보조 재단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장효웅 선생은 현재 무역회사 한솔섬유 패턴팀 차장이자 동대문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강사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아직도 직접 컴퓨터로 패턴을 뜨고, 동대문에서 CAD 강의를 한다.
소규모 봉제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창신동 골목을 오르다 보면 단번에 봉제와 관련된 일임을 짐작하게 하는 표지들이 즐비하다. 돗도, 미싱, 시아게, 오바사, 삼봉사, 하청, 재단보조 혹은 시다 구함 등이 그것인데 ‘패턴’이라는 말 또한 숙녀복, 남성복, 부인복, 아동복, 특수복 등과 어울려(숙녀복 패턴, 아동복 패턴 등)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말 중에 하나다.

동대문 창신동에 자리한 참여성노동복지터*(이하 ’참터’)를 찾았을 때 한 켠에서는 이사 준비로 분주했다. 그 동안 참터 산하에서 장인들의 고급 봉제 기술을 전수한다는 교육 목표 아래 봉제 기술을 가르치던 봉제기술학교 ‘수다공방’이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KASSA;Korean Apparel Sewing Skills Advanced, 이하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건물로 이사 가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나 봉제 관련 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술을 더 향상 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봉제와 관련된 다양한 수업***이 개설되었다.

이는 봉제 기술을 고급화 시켜 3D 업종으로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는 봉제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이 계통 사람들의 노력이 맺은 결실인 것이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아카데미에서 처음 개설된 CAD 수업을 청강하게 되었다. 마침 올해 첫 수업이기도 했다. CAD 강사 장효웅 선생은 강의에 앞서 서두를 띄우다가 눈시울을 적셨다. 

CAD가 무엇인지, 어디에 필요한지도 모르던 내가 쉰이 넘은 이의 눈물을 본 것은 갑작스럽고도 뜻밖의 일이었다(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는 워낙 눈물이 많다고 했다). 그 눈물의 의미가 궁금했다.

회사 일이 워낙 바쁜 데다가 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씩 CAD 강의를 하러 아카데미에 온다는 그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토요일임에도 그의 사무실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는 한 시간밖에 시간을 내주지 못하고 나머지는 강의하러 가는 길에 이야기 하자고 한다. 토요일에 또 무슨 강의인가 싶었는데 격주로 신설동 근처에서 무료 패턴 강의를 맡고 있다고 했다. 여느 스타강사의 스케줄 못지 않다.

인터뷰는 그의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한 시간, 그리고 나머지는 신설동 패턴 강의실로 향하는 지하철 안과 거리에서 이어졌다.

* 참여성노동복지터: (여성)봉제노동자의 노동 환경 개선과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2003년 설립되었다.

**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봉제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세계 최고 봉제 장인의 기술을 전수, 예비 봉제 장인을 육성하고 지속적인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는 취지를 가지고 설립된 봉제기술학교.

*** 봉제 초∙중∙고급, 리폼수선, 천연소재봉제, 패턴, CAD 수업이 개설되었다.

 

1. 옷 본을 뜨는 패턴



퍼슨웹(이하 ‘퍼’): 패턴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을 말하나요?

장효웅(이하 ‘장’): 옷 본을 뜨는 거지요.

퍼: 옷에 일정한 무늬가 박힌다는 것과는 다른 거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장: 그건 텍스타일 디자인*에 속하는 직물 패턴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패턴은 체촌*을 해서 그 사람 체형에 맞게 옷 본을 뜨는 걸 말해요.

* 텍스타일 디자인: 직물이나 그 무늬, 색조 등을 디자인하는 것을 일컫는다.
* 체촌: 패턴을 뜨기 전에 신체 치수를 측정하는 것을 말한다.


퍼: 캐드*라는 용어도 좀 생소한데요?

장: 그건 이쪽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생소한 게 아니에요. 옛날부터 제도하던 사람들은 캐드를 진작부터 썼어요. 우리가 말하는 건 어패럴 캐드(Apparel Cad)라고 하는 건데 옷 만드는 전용 캐드지요.

* 캐드(Computer Aided Design) : 컴퓨터를 이용한 제도 또는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를 의미한다.


퍼: 캐드가 광범위한 용어군요.

장: 왜 컴퓨터 학원 같은데 보면 다 하나씩 있는데 못 봤어요? 손으로 제도하던 것을 컴퓨터로 하는 걸 오토캐드라고 해요. 전기, 자동차, 건축 등에서 다 사용하거든. 옷에서 패턴을 뜰 수 있도록 만든 캐드가 어패럴 캐드지요.

퍼: 어패럴 캐드는 어떻게 달라요?

장: 원래는 그레이딩*을 전문으로 했었어요. 그레이딩이라는 건 기본으로 한 사이즈 옷의 패턴을 만들어 놓으면은 늘이고 줄이고 하는 작업이거든. 처음에 손으로 하던 것을 컴퓨터로 그레이딩 하면서 어패럴 캐드가 들어왔어요.

* 그레이딩(grading): 표준 치수의 본(本)을 확대ㆍ축소하는 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성복의 본을 뜰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퍼: 처음엔 단순한 작업을 컴퓨터가 하기 시작했군요.

장: 우리 나라에 컴퓨터로 패턴을 뜨게 들어온 것은 유까(Yuka) 시스템이 제일 먼저 들어왔어요.

퍼: 유까 시스템이라는 게 뭐에요?

장: 어패럴 캐드 프로그램 이름인데 일본에서 만들었어요. 어패럴 캐드 쪽에서는 제일 많이 쓰이지.

퍼: 아, 네.

장: 어패럴 쪽에서는 선만 그리면 되기 때문에 실제로 오토캐드를 가지고도 패턴을 뜰 수 있어요. 사람이 손으로 뜨는 걸 대신 컴퓨터가 뜰 수 있게 만든 게 유까 캐드에요. 그게 들어온지 한 20년 됐어. 그 전에 그레이딩만 하는 건 그거보다 더 먼저 들어와서 큰 무역회사 같은 데서 썼었고. 처음 들어왔을 때만해도 ‘에이~’ 그러면서 아무도 안 썼어요.

퍼: 그러니까 오토캐드로는 선 그리는 작업만 했었는데 패턴을 뜨기 위한 정교한 프로그램이 개발된 것이군요. 그럼 선생님은 언제 캐드를 배우신 거에요?

장: 10년 전인가? 내가 유까 캐드를 배우러 갔을 때만 해도 나이 사십 먹은 사람이 캐드에 관심 갖는 사람 처음 봤다고 거기 선생님이 그럴 정도로 캐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지금도 극히 일부에서만 쓰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캐드로 패턴을 뜨면 손으로 뜨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요.

퍼: 선생님은 기존에 손으로 패턴을 뜨셨는데 지금은 컴퓨터로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어떤 차이가 있어요? 더 정확한가요?

장: 손으로도 뜰 줄 아는 건 당연하고. 아주 엄밀히 따지면 캐드가 정확성이 더 있어요. 자로 재면 안 나오지만 컴퓨터로 하면 아주 세밀한 수치까지 나오니까. 그런데 옷 만드는 데는 그 정도까지의 숫자의 정확성은 필요 없어요.

퍼: 그럼 뭐가 나은 거예요?

장: 우리가 손으로 작업할 때 같으면 샘플팀은 여기 우리 나라에 있고 메인 작업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하고 그래요. 전에 같으면 우리가 손으로 패턴을 뜬 것을 거기까지 우편물로 보내줘야 하지.

퍼: 아,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겠군요.

장: 가는 데만 며칠 걸리고. 가다가 비를 맞았다든지 해서 손상이라도 되면 못쓰게 돼 버리니까.

퍼: 그렇겠네요.

장: 컴퓨터로 한 거는 메일로 한 번 쫙 쏴버리면 거기서 받아서 출력해서 쓰면 그만인 거야. 그리고 컴퓨터에 저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쓰다가 잃어버려도 또 뽑아 주면 되는 거야. 근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안 써본 사람은 ‘그거 쓸 일 없어, 필요 없다’고 그래요.

퍼: 왜요?

장: 그러니까 답답한 거지. 손으로 패턴 뜰래면 패턴 다이(だい; 대, 받침대)도 필요한데 그게 공간을 얼마나 차지 한다고. 그런데 컴퓨터로 하면 그런 공간을 줄일 수 있잖아. 쓰레기도 줄일 수 있고. 그런데 사람들이 아직도 몰라.

퍼: 필요성을 왜 못 느낄까요?

장: 내가 어디 대학원 특강을 갔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거기 교수님조차도 캐드라는 걸 알기는 아는데 그게 얼마만큼 유용하게 쓰이는지를 모르고 있더라고. 근데 세상이 이렇게 디지털화 되고 있는데 대학에서도 그러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한심해.

2. ‘공돌이’ 아닌 ‘공돌님’

퍼: 그런데 한편으로, 창신동 골목을 오르다 보면 여전히 ‘시다’라는 표지가 가득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말 자체가 봉제 산업 자체 내에서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 아,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에 버스 요금이 학생은 35원인가 그랬고 일반인은 10원이 더 비싼가 그랬어. 그 때는 대학생도 학생 요금을 냈는데 내가 대학을 못 가고 가난하니까 돈을 좀 아낄 생각으로 대학생으로 위장을 하고, 학생요금 내려고 계산을 해봤어요.

퍼: 학생 요금을요?

장: 친구들이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내가 학생 요금을 내면 얼마나 절약이 되나 계산을 해보니까 그 액수가 생각보다 크지 않더라고. 그런데다가 내가 일을 하면서 생각을 했더니 자존심이 상하는 거야. 열심히 일하는 놈이 뭐가 부족해서, 뭐가 잘못이라고 대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 돈 아끼자고 거짓말을 해야 되나 하고 말이야.

퍼: 아.

장: 이건 아니다 싶어서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학생 요금 낸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얼마나 절약될까 계산까지 했던 놈이 막상 버스 안내양이 학생이냐고 물어봐도 ‘아니에요!’ 하고 돈을 다 내고 내렸다고. 그 때부터 나는 공장에 다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어.

퍼: 그런 계기가 있었군요.

장: 옛날에 유랑극단이 두레패하고 창우패하고 나뉘었어요.

퍼: 두레페? 창우패?

장: 요새말로 하면 연예인. 두레패는 돌아다니면서 하는 좀 싸구려 패거리들이고 창우패가 좀 고급이고 그래. 어렸을 때만해도 연예인이라고 그러면은 딴따라라고 그랬잖아. 지금 연예인들보고 뭐라고 그래? 스타라고 그래.

한 40년 전에 전부 딴따라라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스타라고 그래. 얼마나 웃기냐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는 일은 똑같애. 그런데 돈을 많이 버니까 사람 보는 눈이 바뀌는 거야.

나는 이랬어요. 나는 영원히 공돌이를 할 건데 공돌’이’가 아니고 공돌’님’이 될 거다.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사람들이 나보고 공돌이라고 못할 거다. 솔직히 서울 공대 나온 친구들도 공돌이에요. 그 사람들도 공장에서 일하는데 사람들은 그 사람들 보고 공돌이라고 안 그래요. 공돌이라고 하더라도 무시하는 투로 안 그래.

퍼: 어쨌든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거 아닌가요?

장: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이주일이도 봐. 못생겨서 죄송하다고 하고 돈 많이 벌었잖아.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잘 되면 그게 전체적으로 올라가는 거야. 난 그래서 죽어도 공돌님이다!

퍼: 시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가 있을까요?

장: 그거는 우리 스스로가 공부를 해야 돼. 자기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게 공부를 안 한 게 아니에요. 그랬더라도 살면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드라마만 볼 게 아니라 교양프로그램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한다고. 패션 쪽에서 일하면 패션 용어 같은 것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이러면 저절로 우리도 대우를 받는다고요.

퍼: 앞서 참터 소식지 인터뷰에서 사장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도 하셨잖아요?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식지 “참신나는소식” 2008년 5월 통권 제55호 ‘참터가 만난 사람 인터뷰-패턴반 강사 장효웅 선생님)

장: 그건 뭐냐면 같이 먹고 살자는 거지.

퍼: 그건 어떤 의미에요?

장: 사장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미싱사들은 300만원 이상을 가져간대. 그런데 그게 미싱사 혼자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팀으로 가져가는 거거든. 미싱사들이 350만원 이상까지 가져가니까 많이 가져간다는 거야.

퍼: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요?

장: 그래서 내가 물어요. 몇 시까지들 일하는데 그렇게 버느냐고. 그럼 사장이 그래. 나는 뭐 들어가라고 하고 10시쯤 들어가는데 미싱사들은 새벽 1시까지 일하고 그런대요. 허, 참. 그러니 욕이 안 나오냐고. 화딱지가 나서. 새벽 1시까지 일해서 300만원 버는 걸, 그걸 많이 번다고 얘기 하냐고. 그만큼 무시를 하고 있는 거야. 정말 나쁜 놈들이야.

퍼: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일하면서 많이 번다고 한다는 말이군요.

장: 이게 아주 뿌리깊은 얘기야. 현재 공임 가지고서는 살 수가 없고 공임이 올라야 하는데 그러려면은 옷을 좀 덜 만들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퍼: 패션 디자인 관련된 TV 프로그램에서 옷을 적게 만드는 게 의류 산업의 오래된 숙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장: 내가 엊그제 대학원 강의 가서도 맞아 죽을 소리 하고 왔는데 대학원생들 보고 지금부터 미싱 배우고 패턴도 배워라. 당신네들 다음 세대가 되면 미싱사들이 대우받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퍼: 하하.

장: 왜? 무식한 공돌이가 감히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자원 환경 문제 때문에라도 옷을 지금처럼 못 맨드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잖아요. 옷 한 벌 만들려면 석유자원을 얼마나 캐야 하구 나무를 몇 그루 베야 하는지. 사실 필요한 건 100벌 밖에 없는데 싸게 만드느라고 베트남 가서 1000벌을 만들어와. 이런 식이라고. 그러고 나서 막 버려.

퍼: 버리기 위해 만드는 셈이네요. 그 과정에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요.

장: 이제 자원이 없어서라도 옷을 마음껏 못 만드는 세상이 올지도 몰라요. 옷을 아껴 입어야 돼. 또 오래 입으면 고쳐서 입어야 돼. 옛날에 가난했을 때는 줄여서만 입었지만 요즘은 살만하긴 한데 자원부족으로 옷값이 너무 비싸. 그렇지만 모양은 내고 싶어.

퍼: 리폼이 유용하겠네요.

장: 그래요. 앞으로 미싱에서도 리폼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지도 모른다고 헛소리를 하면서 소설을 써 봤는데 가능도 한 얘기야. 너무 요원한 얘기이긴 하지만 너무 만들어만 대기 때문에 지금 현재로는 옷 값을 맞출 수 밖에 없어. 서로 못할 일이야.

3. 독하게 공부한 놈

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패션 쪽 일을 하셨어요?

장: 앙드레김부터 하기 시작했지.

퍼: 어떻게 의류 쪽에서 일을 하게 되셨나요?

장: 앙드레김에서 심부름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그랬지.

퍼: 무작정이요? 애초부터 의류 쪽에서 일할 꿈을 꾸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장: 아이, 그런 거 없어요. 아는 사람이 거기 사람 구한다고 해서 간 거지. 나는 원래 교원 자격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월급을 따져보니까 미싱사들 월급이 장난이 아닌 거야. 정확한 거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5급 공무원 월급 뺨치는 거야. 그래서 배웠지 뭐.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잘 배운 것 같아.

퍼: 그럼 시다라는 것도 거치신 거예요?

장: 난 미싱 쪽은 아니고 처음부터 패턴부터 했으니까 재단 보조로 일했어요. 그레이딩 하고 자르고. 옷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안 해본 거 없이 해봤지.

퍼: 그러셨군요.

장: 나는 마흔 다섯 살부터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껐다 켰다 할 지도 몰랐어. 아들한테 게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서 배웠어. 처음엔 컴퓨터 어떻게 끄는 줄도 모르고 전원 코드 그냥 뽑으면 컴퓨터 망가지는 줄로만 알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배웠거든.

퍼: 하하.

장: 집 앞에 있는 컴퓨터학원을 14개월 동안 다녔는데 나하고 연관 있는 과목이든 아니든 돈 내고 전부 다 들었어요. 나중에는 그 컴퓨터학원 고문이 됐어. 맨 마지막 강의까지 남아 있으면 끝나고 강사들이 “고문님, 약주하러 가시죠.” 라거나 “오늘은 술 값이 좀 모자른데요.” 그러면 내가 보태주고 그랬다고.

퍼: 고문 노릇을 톡톡히 하셨네요.

장: 한 6개월은 학원비도 안 내고 다녔어요.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과목이 있으면 ‘나 그게 궁금해 죽겠다야. 빈 자리 좀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니?’ 그러면 ‘우리 고문님이신데 뭘’ 하면서 아무 반이든지 들어가서 한 달씩이고 두 달씩이고 듣는 거야.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서.

퍼: 그렇게 하면서 컴퓨터를 배우셨구나.

장: 포토샵, 일러스트 안 배운 게 없어.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하지만 배워 봤기 때문에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아요.

퍼: 포토샵, 일러스트 프로그램 까지요?

장: 내가 나이 50살이 되어서 방송대를 졸업했는데 47살에만 방송대 시험을 본 게 아니라 76년에도 원서를 냈었고 30대에도 내고 세 번째는 또 징한 사연을 가지고 또 도전을 한 거에요. 첫 번째 두 번째 다 형편이 안 돼서 못한 거지 내 능력이 안 돼서 못 낸 건 아니거든.

퍼: 형편이 안 됐다는 것은?

장: 20대에는 돈이 없어서 못했고 30대에는 직장 다니느라 시간이 안 돼서 못하고. 30대에 내가 원서를 찢어버리면서 40대 되면 내가 돈, 시간 다 만들어서 또 할 거야 그랬는데 막상 40대가 되니까 이제 학위 같은 게 필요가 없더라고. 그래서 안 하려고 그랬는데-

퍼: 그런데 결국 방송대를 들어가게 되셨어요?

장: 이 계통에 어떤 사람이 겸임교수 하라고 하더니 학력 미달이라고 안 된다는 소리에 내가 욕을 하면서 다짐을 했어요. 지금 이 순간 방송대 입학에서 4년 만에 졸업을 하고야 만다고.

퍼: 아주 독하게 하셨겠네요.

장: 알랑가 모르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방송대를 4년 만에 졸업한 거는 전체 입학생 중에 1%도 안 돼요. 아줌마들이 와서 물어요. 진짜 직장 다니세요? 나이가 얼마나 되세요? 그래서 명함 보여주면 어, 진짜네? 그러면서 늙은 놈이 공부도 열심히 하네, 그래.

퍼: 하하.

장: 방송대를 직장 다니면서 4년 만에 졸업한 놈은 담배 끊은 놈보다 더 독한 놈이라고 상종을 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난 했다고.

4. 수다공방과의 인연

퍼: 아카데미에서 캐드 수업 시작하던 날 수업에 앞서 말씀하시다가 눈물이 고여 있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장: 감격스러웠어요. 왜냐하면 나도 참터 이사이기 때문에 이 사업을 하기 위해 처음부터 같이 했었거든. 그 힘든 과정을 다 보고 있다가, 그날 내 수업이 여기 와서 하는 첫 수업이었는데, 애쓴 사람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나더라고. 내가 워낙 잘 울기도 해.

퍼: 전순옥 선생님이나 수다공방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아는 사이셨어요?

장: 아니야, 몰랐어. 내가 엊그제 대학원 특강 가서도 이런 말을 했어요. 디 밀으라고, 디 밀어! 그냥 디 밀어야 돼. 이력서 몇 장 틱틱 던져 놓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인맥을 총 동원해서 아무 데서라도 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디 밀어야지.

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 참, 사람이 말대로 된다고 신기해. 내가 40대 말에 방통대를 다니면서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라 좋은 뜻으로 ‘난 이제 대학생 새내기야’ 라고 말하면서 신나서 다니고 있었다고. 그 말을 해서 그런지 그 해 8월 달에 권고 사직 당했어요. 그때 이원재 부띠끄 다니고 있을 때거든.

퍼: 아이구. 권고 사직이요?

장: 이원재 부띠끄가 계속 위축되고 위축되고, 결국 몇 년 전에 이원재는 보따리 싸서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그렇게 어려워지는 중이었으니까 패턴사가 4명 있다가 3명 있다가 2명 있다가 마침내 내가 권고 사직 당한 거야. 그때가 쉰 한 살이라고.

퍼: 어려우셨을 때 였겠어요.

장: 진짜 하늘이 노래. 깝깝해 죽겠는 거야. 다행히 월급은 좀 적더라도 쪼그마한 데 취직이 됐어. 그러다가 더 늙어서는 이런 데서 일하면 안 되겠는 거야. 그래서 패턴 사무실이라도 해 보자. 그래야 늙어서라도 할 수 있지.

퍼: 결국 패턴 사무실을 차리신 거예요?

장: 잠깐 했었는데 돈 벌이가 안 돼 가지고.

퍼: 그래서요?

장: 미래가 고민 되니까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우연히 인터넷 뒤지다 보니까 ‘패디모’라고 카페가 있어요. 거기 이기호라는 사람이 운영자인데 패턴교육에 대한 글을 잔뜩 올려놨더라고. 거기다가 내 이력서를 써서 보내면서 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무료라도 좋으니까 내가 거기서 패턴 강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메일을 썼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날 찾아왔더라고. 너무 좋다고 하면서.

퍼: 그런 만남이 있으셨구나.

장: 근데 거기서도 유학파들이고 디자이너 모임이고 그래가지고 학력 같은 거 따지는 거 되게 좋아해요. 그러니까 거기 강의도 외국 유학 다녀온 사람이 맡아서 하더라구. 또 학력 때문에 뺀치를 맞았어. 실력은 내가 더 있지 학력이 무슨 상관이 있냐구.

퍼: 서러우셨겠네요.

장: 그런데 그때 그 인연이 참 묘한게 이기호라는 친구가 날 잘 본거야. 내가 젊은 마인드를 가지고 산다고. 어떻게 또 인연이 되었는지 몰라도 그 이기호라는 친구가 전순옥 대표랑 수다공방 초창기에 같이 일을 하게 된 거야. 이기호란 친구가 끝내주는 선생님 하나 있다고 그래서 날 소개해 준 거지.

퍼: 아, 그런 인연이 있으셨구나. 그래서 아까 디밀라고 그러신 거예요?

장: 그렇지. 워낙에 수다공방에서는 봉제만 했었는데 1년 있다가 패턴도 하자고 해서 소개를 받은 거야. 전순옥 대표 만나 가지고 얘길 하다 보니까 서로 취지가 맞고 하니까는 너무 좋다, 그래가지고 내가 패턴 강사로는 1회에요. 첫째 두 해 하다가 세 번째 해에는 너무 바빠서 못하고 그 다음 해에 다시 하다가 앞에 인터뷰 때문에 욕 먹어서 못하고 그렇게 됐지.

퍼: 그럼 캐드 강의는 올해 처음 하신 거에요?

장: 네. 그러다가 작년에 또 캐드 얘기가 나와가지고 또 캐드반을 만드는 바람에 캐드 강의를 하고 있잖아.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캐드 그러니까 “손으로 패턴 뜰 줄 아세요?” 하고 물어.

퍼: 하하. 되려?

장: 무슨 캐드가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손으로 뜨는 패턴이랑 다른 줄 아는 거야. 이 계통의 잘 안다는 교수되는 사람들조차 그래. 그러니 학생들이 뭘 배워.

5. 살아 남을 수 있는 기술


퍼: 동대문, 창신동하고의 인연은 전순옥 선생님과의 인연 때문에 시작된 거예요?

장: 그럼. 나는 시장 쪽이 아니라 원래 명동 맞춤 쪽 최고급 부띠끄에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지만 급이 다르지. 불란서로 말하면은 나는 쁘레따포르떼(prêt-à-porter) 쇼에 해당하는 거고. 여기 동대문 쪽은 시장 쪽이고. 품질의 차이가 많이 나는 거뿐이지.

퍼: 아, 부띠끄랑 시장이라는 구분이 있구나…

장: 그런데 내가 거기 강의를 가면 역설을 하는 이유가, 정말로 난 잘 울어요. 이 기술이 이렇게나 좋은 기술인데 너무 소중하고 너무 지켜야 하는 기술인데 사람들이 다들 너무 싸구려 취급들을 하고 있으니 분통터지는 거야.

퍼: 봉제 기술 말씀이시죠?

장: 응. 그리고 중요한 거는 지금 배우는 사람들이 고급 기술을 배워야 살아 남는 다는 거야. 싸구려는 중국 사람들이 이미 다 배웠고 베트남 사람들도 다 할 줄 안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고급 기술을 해야만 살아 남는다는 거야. 누구든지 하는 게 아니라 걔네들이 못하는 걸 해야 해. 정말 고급 패턴을 떠야 하고 고급 봉제를 해야 하거든. 그래야 야, 샘플은 한국에 보내야지 베트남 가지고는 절대로 안 돼. 그래야 우리도 샘플 공장이라도 살아 남을 거 아니에요. 대충 싼 거는 누구나 비슷하게 다 해. 우린 비싼 만큼 비싼 기술을 전수해야 한다니까.

퍼: 더 값싼 인력을 찾아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쪽으로 옮겨 간 것이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장: 보통 문제가 아니지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과거에 우리나라 인건비가 싸니까 구로공단 같은 것에서 밤 새면서 삯바느질해서 우리나라 이만큼 키워 놓았는데 어쩌면 이제 못 사는 나라로 넘어간 건 당연한 거지. 그걸 붙들고 통곡을 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퍼: 기술의 차별화가 필요하군요.

장: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뭐든지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금방 추월해 와요. 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걸 자꾸 해나가야 하는 거라고.

퍼: 동대문이나 창신동에 대한 애착이 있으세요?

장: 솔직히 나는 시장 쪽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쪽에 대한 애정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큰 의미로 전체적인 봉제, 패션 쪽을 이야기하는 거지, 굳이 창신동만 그건 없어. 그런 구분 조차도 필요가 없는 거구 사실은.

퍼: 그렇네요.

장: 창신동이든 남대문이든 그쪽은 시장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품질 보다는 장수를 먼저 뽑아야 하기 때문에 속도가 위주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 실력이 없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거기서 살아 남기 위한 실력을 키운 거고 기술을 익힌 것 뿐이라구요.

퍼: 장수를 먼저 뽑아야 하는 속도 싸움이라…

장: “이건 한국에서 만든 겁니다. 품질이 달라요.” 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팔자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힘들더라도 그 동안 만들던 거하고 조금은 차별화 해서 만들어서 이 집 옷이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이 새겨져야 동대문 시장도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에요.

퍼: 그럼 지금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의 취지하고 맞는 건가요?

장: 그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거든.

6. 화가 나고 눈물이 나는 이유

퍼: 참터 소식지에서 이미 인터뷰를 한 번 하셨잖아요?

장: 내가 거기다 막 욕을 했잖아. 흐흐흐. 내가 항상 그것 때문에 욕을 먹는데. 근데 사실 처음 보고 그냥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는 그런 말도 안 해요. 정말 친하고 이제 좀 믿을만한데 일 제대로 못 따라와주면 속이 터지니까 그러는 거라고. 몰라, 좋은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성질이 원래 그래서.

퍼: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장: 그야말로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막 이것저것 때려 부수고 사고치고 그럴 때가 건강한 건데 걔가 조용하면은 어디 아픈 거거든. 내 성질이 딱 그래.

퍼: 그러면 선생님은 건강하신 거네요.

장: 근데 요새는 병이 들어가지고 안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 마음의 병이 생겼어.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려고 안 하고 겉 모양만 보려고 하고 말이야. 내가 육두문자를 쓰면 그 속에 담긴 것은 안 보고 그것만 보고 뭐라고 그래.

퍼: 마음의 병이요?

장: 나는 사랑의 매는 있어야 된다고 봐. 요즘 애들 나약해져서 연봉을 그렇게 준다고 해도 그만두잖아.

퍼: 요즘 애들이요?

장: 왜 항상 눈물이 나는가 하면 사람들이 열심히 안 해. 나는 정말로 열과 성의를 다하는데 너무 속이 상해. 내가 얼만큼 자기네를 가르쳐주려고 하는지 그걸 몰라. 공짜니까 한 번 해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퍼: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요즘 젊은이들이 안타까우시구나.

장: 근데 아직도 나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봐라. 그 동안 땡땡이 친 거 포기하지 말라고 그래.나 학교 다닐 때 서울대 졸업하시고 나만큼이나 처절하게 가난했었기 때문에 사회에 좀 반감이 많으신 선생님이 있었어. 그 선생님이 사람이 똥이 두 개면 안 된다고 했어. 할 똥 말똥, 갈 똥 말똥, 그게 뭐야. 한 번 가면 가는 거지. 지금 듣는 캐드반의 학생들 전부 대학 졸업 하고 필요해서 온 거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거 해야 하나, 저거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야.

퍼: 아, 그 똥이 두 개요?

장: 내가 몇 달만 여기에 투자하라고 말 해도 소용 없어요. 혹시나 하고 기웃거리기를 하다 보면 평생 기웃거리다 끝나. 눈 딱 감고 이거다! 큰 성공은 아니라도 무얼 하든 우뚝 서면 그것도 괜찮잖아. 비록 그지왕이라고 해도.

퍼: 다른 삶을 꿈 꿔보신 적은 없으세요?

장: 이거 배운 이후로 이거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정말 나는 좋은 거 잘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 요거보다 조게 더 나을까 생각하다 보면은 끝이 없잖아.

에필로그

퍼: 지금은 어디로 강의 가시는 거예요?

장: 신설동 기술학교.

퍼: 거기는 패턴 강의 하러 가시는 거예요?

장: 응. 예전에는 돈을 받고 특강을 했는데 올해는 지원을 못 받아가지고 돈이 없대요. 다른 강사들도 무료봉사하고 있거든. 나도 무료로 해주겠다 그랬지.
    

강의실에서 나를 의아하게 했던, 장효웅 선생의 눈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패턴이나 CAD라는 조금 생경한 직업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술 경시 풍조에 대한 비판이나 분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그려졌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신을 가지고 욕하는 “건강한 사람”이다. 자신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가 흔히 ‘학력’을 들이대며 기술을 깎아 내리는 것에 분노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한다.

인터뷰의 끝에 “나 정도되는 직업이면 누구든 해 볼만 하지 않어?”하는 물음 속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홀로 걷는 이의 외로움이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