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마포구 부위원장 – 오현주

오현주 씨는 진보신당 활동가다.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진보신당 마포구당의 부위원장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마포구 구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아까운 표차로 낙선하기도 했다. 오현주 씨를 만나 진보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정치’하면 시커먼 양복을 입은 배나온 사람들이 벌이는 몸싸움이 연상되고, ‘선거운동’하면 아르바이트하는 아줌마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전철역이 떠오르는 우리 정치판에서 똑부러진 자기 주장을 가진 젊은 여성들은 흔치 않은 존재다. 그렇지만 ‘진보’라는 이름을 내건 곳에서는 종종 그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신 공격과 허울좋은 공약으로 가득찬 선거철에 이들의 목소리는 신선함을 던져준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마포구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오현주 씨는 내 친구다. 우리는 대학 시절 PC 통신의 한 운동권 대학생들의 게시판에서 만났다.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공감하는 지점이 많아 금세 서로가 통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도 각종 현장에서, 회의 자리에서 뜻을 함께하는 친구가 됐다. 눈을 빛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녀는 어느 자리에나 생기를 주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방황하며 과외 아르바이트 정보를 공유하는 신세가 됐다. 함께 활동하던 진보정당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망한 상태였고 그곳에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자연스레 연락도 끊겼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삶의 방향을 잡아 살아갔고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여성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 참여하여 ‘오김현주’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그녀가 마포구 구의원 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오현주’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연히 전철역에서 그녀를 봤다. 짧은 대화였지만 예의 그 반짝이는 눈을 보니 반가웠다.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안하기도 했다. 한번 찾아가 응원의 뜻을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선거에까지 출마하게 된 이유도 궁금했고, 낙선 후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또,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정당들의 행보가 주목받는 가운데, 그녀의 생각은 어떤지도 듣고 싶었다.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개인적인 통화를 한 지도 오래되어 쑥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통화버튼을 눌러 인터뷰를 청했다.


마포구 구의원 후보 오현주

퍼 : 마포구에 산 지 오래되었나요?
 
오 : 아뇨. 마포에 대해 그리 잘 알고 뛰어든 건 아니었어요. 저는 원래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제안을 받아서 제가 사는 지역인 마포구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었죠.
 
퍼 : 후보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어요?
 
오 : 하룻밤 고민하고 하겠다고 했어요. 예전에도 학생회 선거에 출마도 해보고 그랬지만 그땐, 선거 끝나고 나서 자괴감이 컸거든요. 뭘 잘 모르고 떠든다는 느낌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를 하게 된 데에는 2008년 총선에서 선거운동을 했던 기억이 컸던 것 같아요.
 
퍼 : 아, 다큐멘터리 영화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에서 현주씨가 활동하는 모습을 봤어요.
 
오 : 네, 맞아요. 사실 저는 진보정당 활동을 좀 꺼리고 있었어요. 예전에 다른 진보정당에서 활동할 때, 좀 힘들었었거든요. 그랬지만 2008년 총선에 최현숙 씨*가 레즈비언임을 선언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함께 하게 됐죠.
 

*최현숙 씨 인터뷰 기사 보러 가기

 
퍼 : 현주 씨는 예전에도 뭘 하든 참 재미있게 하는 분 같았어요.
 
오 : 선거운동 같은 정치활동을 좋아해요. 행사 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으고, 사람들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 일들. 그런데 예전에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내부의 가부장적 문화에 실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활동을 좀 쉬기도 했었죠.
 
퍼 : 우리가 처음에 만났던 것도 그런 대화를 통해서였죠?
 
오 : 맞아요. PC통신 나우누리의 무슨 게시판이었는지, 학생운동 관련 게시판에서 ‘여성주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보고, ‘나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네!’ 싶어서 반가워서 대화를 시작했던 기억이 나요.
 
퍼 : 하하, 나우누리라니, 정말 오래된 기억이에요. 그때가 대학 2학년인가 3학년인가 그랬죠?
 
오 : 네. 그 때 우리 둘 다 여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학생운동의 권위적인 문화,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고민을 하던 때였죠. 그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점점 커질 때였구요. 제가 다니던 여성학 대학원에도 학생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많이 왔는데, 아마 학생운동에 대한 그런 회의, 고민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퍼 : 최현숙 씨 선거운동에서는 그런 고민은 없었겠어요.
 
오 : 그럼요, 없었죠. 그 선거 운동 하던 기간이 참 좋았어요. 나하고 생각이 맞는 사람들하고 신나게, 즐겁게 활동하는 일,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 모두 참 재미있었죠. 선거 운동 하느라 대학원 수업 들으러 가서는 졸면서 듣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득표율이 낮기는 했지만, 의미 있는 선거였다고 생각해요.
 
퍼 : 그 선거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당 활동을 시작했나요?
 
오 : 선거가 끝나고 나서, 함께 활동한 사람들끼리 진보신당 내에서 성정치위원회를 만들어서 선거 활동을 이어가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보니 구의원 후보 제안까지 받게 됐죠. 고민해 보았는데, 최현숙 씨와 선거활동을 하면서, 저도 사람들 앞에 서서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더군요.  
 

퍼 : 직접 후보가 되어보니 선거의 느낌이 어땠어요?
 
오 : 제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제 생각을 잘 이야기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선거를 해보니 과연 다르더군요.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만난다는 느낌이 좋았어요. 지역을 기반으로 만난다는 건 무작위 대중을 만나는 게 아니니까요.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요.
 
퍼 : 선거 때 만난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요?
 
오 : 선거 끝난 다음 날, 매일 인사드리던 길로 낙선 인사를 나갔어요.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한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오시는 거예요. 당신께서 많이 못 도와줘서 이렇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선거 기간에 굉장히 친절하게 해 주시고, 지금 나라가 잘못 되었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분이었죠. 그 분을 보니 내가 앞으로도 정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 : 마음이 찡했겠어요.

마포구, 진보 정당을 만나다.

 
퍼 : 꽤 아깝게 낙선했던 걸로 기억해요. 당선되는 줄 알았었다고.
 
오 : 선거 시작하고 한 사흘 쯤 됐을 때는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잘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론조사 결과도 점점 상승되었구요. 한나라당 쪽에서도 당선될 수도 있겠다고 저에게 말해줬었어요.  
 
퍼 : 한나라당 쪽에서요?
 
오 : 그분들은 지역구 사람들 집에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거든요. 아파트 한 동에 지지자가 누구누구인지도 다 안다고 해요. 그래서 선거 분위기는 그 쪽에서 얘기 나오는 게 가장 정확해요. 그런 한나라당에서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당선 되나보다 싶었죠.
 
퍼 : 그런데요?
 
오 : 저희 지역구는 2등까지가 당선이었고 1등이 한나라당인 건 너무 확실했어요. 민주당과 저희가 2, 3등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막판에 민주당 바람이 확 불면서 민주당 후보의 자신감이 달라진 것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낙선할 수도 있다는 감이 왔죠. 그랬지만 개표장에서는 제 표가 참 많이 나와서 당선되는 것 아니냐며 웅성웅성하기도 했어요.
 

퍼 : 차이가 얼마 안 났죠?
 
오 : 네. 3퍼센트 차이로 떨어졌으니까. 아깝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선전했다고 생각했어요.
 
퍼 : 구의원이 되면 뭘 해보고 싶었어요?
 
오 : 마을버스를 친환경적으로 만들기에 대한 공약도 있었고, 마포구에는 1인 가구가 많이 사니까 이들의 주택문제에 대한 고민들도 많았어요. 또 ‘마포구 인권 조례’를 만들고 싶기도 했구요.  
 
퍼 : 인권 조례라면, 일종의 차별 금지법인가요?
 
오 : 그렇죠, 일종의 차별 금지법의 지역 판인거죠. 선거 당시에 저희 지역구 국회의원인 강용석 의원의 성 차별 발언이 문제가 되었었거든요.
 
퍼 : 아, 기억나요.

강용석 의원 기사 보러 가기


오 : 네. 그래서 저희 선본에서는 성 차별 발언에 대해서도 강력히 문제제기를 했고, 지역에서부터 성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 나가고 싶었죠.
 
퍼 : 다음에도 또 출마할 생각이죠?
 
오 : 출마해야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거를 하면서,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퍼 :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 : 이를테면, 이번에 마포구 상인연합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찾아갔었거든요. 예전 같으면 제가 이들을 ‘이익집단’이라고 하면서 편견의 눈으로 바라봤을 거예요. 그런데 만들어지는 과정에 저희가 함께 하면서 이분들에게 식당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나 SSM(기업형 수퍼마켓) 문제도 함께 말씀드리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갔어요.
 

퍼 : 관계를 만들었다…?
 
오 : 이 분들은 처음에는 상가 개발에 대한 민주적 절차에 대한 분노로만 모인 분들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문제, 이를테면 두리반의 철거 문제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연대할 마음이 없었죠. 그런데 저희와 함께 대화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퍼 : 어떤?
 
오 : 상가 개발의 문제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게 된 거죠. 두리반과 같은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도 점점 이해하게 되셨구요. 홍대 청소노동자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때도,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셨지만 저희가 설득했죠. 저곳에 가서 우리 이야기를 알리자, 그래야 상인연합회의 이슈도 더 잘 알려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지원 물품도 많이 전달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시는 걸 봤어요. 보람있었죠.
 
퍼 : 그러고 보니 마포에서 선거를 하면서 사안이 참 많았네요.
 
오 : 네. 그래서 참 바빴어요. 선거에 도움을 받기도 했구요. 그 이후에 두리반도 이겼고, 홍대 청소노동자들 싸움도 마포구 사안이었는데 결국 이겨서 기뻤죠.
 

퍼 : 좋은 일이네요.
 
오 : 이게 마포라는 지역적 특성이 있어서예요.
 
퍼 : 지역적 특성이요?
 
오 : 지역 주민들이 방어막을 치고 있거든요. 마포는 워낙 지역 운동 기반이 여기저기에 있고, 조금만 네트워킹을 하면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에요.
 
퍼 : 마포에 사회 단체들이 많이 있기는 하죠.
 
오 : 우리나라, 우리 사회에 대해 제 각각 발언하는 단체들은 많지만 어떤 사안에 지역적 네트워크로 공동대응 하는 건 잘 안 돼요. 정당이 해야 할 역할이 그 네트워킹의 역할이죠. 마포는 한 십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였대요.
 
퍼 : 그래요?
               
오 : 10년 전만해도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율이 바닥이었대요. 그런데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교육감 쪽으로 몰표가 나왔거든요. 서울시에서 진보 교육감 득표율 2위를 기록했어요.
 
퍼 : 비결이 뭘까요?
 
오 : 10년 간 진보 정당이 활동했기 때문이겠죠. 지역 운동과 진보 정당 운동이 함께 성장해 오면서 이루어진 결과인 것 같아요.
 

정의로운 고등학생

 
퍼 : 알게 된 지 10년 쯤 된 것 같은데, 늘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있어요. 언제부터 커트였어요?
 
오 : 초등학교 때부터요. 제가 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제가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걸 재밌어했죠. 엄마 말씀으로는 머리 묶어주는 것마다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꾸 풀어버려서 화가 나서 머리를 잘라버렸다고 하시더군요. 어쨌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하기도 했고, 저도 이 머리가 좋아서 계속 자르고 있어요.
 
퍼 : 옷도 항상 보이시하게 입는 것 같아요. 이런 스타일을 원래 좋아했어요?
 
오 : 커트머리에는 이런 옷이 어울리죠. 이것 역시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돈이 없어서 오빠 옷을 물려 입혔다고 해요. 그러니 커트머리에, 남자 옷에, 모르고 보면 영락없는 남자애로 자랐죠.
 
퍼 : 본인이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 : 유치원 때까지는 여자애답게 보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2-3학년 때 남자애들이 힘이 세져서 여자애들을 때리는 걸 봤어요. 억울한 거죠. 내가 왜 얘들한테 힘에 밀려야 하나.
 
퍼 : 그래서 힘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 : 네. 그래서 육상부도 하고 몸으로 노는 걸 좋아하게 됐던 것 같아요.
 
퍼 : 그런 경험이 혹시 여성주의 운동하는 데에도 관련이 있었을까요?
 
오 : ‘여자’로 취급받는 거에 대해 대학에 오면서부터 좀 싫어졌어요. 고등학교까지는 그냥 다 똑같이 노는데, 대학에 오니까 갑자기 남자 선배들이 여자 후배들을 ‘여자’로 대하는 걸 보면서 참 이상하고 싫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자라는 게 싫었었어요. 그랬던 것이 여성주의를 배우면서 많이 달라졌죠.
 
퍼 :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자로서 억울한 경험은 없었나 봐요.
 
오 : 남녀공학에서의 울분도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남자 반 일곱 반은 새 건물에 들어가고 여자 반은 화장실도 건물 밖에 있는 구 건물에 있었어요. 선생님들은 늘, “너네들이 공부해봤자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냐”고 하셨구요. 찬밥대접이었죠.
 
퍼 : 울분이 쌓일 만했네요.
 
오 : 그러다가 교사 성희롱 사건이 터졌어요. 제 뒷자리에 좀 잘 놀기도 하고 또 집안은 잘 살아서 맛있는 간식도 많이 싸오던 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느 날 같이 간식을 먹다가 ‘어느 선생님이 여관으로 불러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 선생님이 원래 수업시간에도 애들 팔을 주무르고 귀를 만지고 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사람이었어요.
 

퍼 : 성희롱이네요.
 
오 : 그 때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저 선생님 좀 더티하다’는 얘기나 쑥덕거렸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하나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 담임 선생님이 여자니까 담임 선생님한테 얘기를 하기로 했어요. 담임 선생님한테 그 선생님을 전근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하자, 우리의 결론은 그거였어요.
 
퍼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오 : 네 명 정도의 친구들이 의견을 모아서 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이 얘길 절대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퍼 : 당사자도 갔나요?
 
오 : 아니요. 우리가 누구한테 이런 얘길 들었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절대 이 얘길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라, 그건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납득을 했죠,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러고는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선생님이 여자반 수업만 안 들어오는 걸로 결정이 났더군요. 그러고 있다가 그 다음 해인가 다다음 해인가 전근을 가시기는 했어요.
 

퍼 : 쉬쉬하면서 내보낸 거네요.
 
오 : 그렇죠, 공식적으로 해결이 났어야 하는데. 그때 뭔가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어요.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몰랐는데 대학교 가서 여성주의를 배우고, 성희롱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다가 그 때 일을 다시 생각하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님은 우리 얘길 들어준 게 아니라 입막음을 했던 거예요.
 
퍼 : 선생님한테 말하자고 현주 씨가 설득했어요?
 
오 : 아뇨, 제 친구들이 다 정의감에 불타는 친구들이었어요. 하하. 얘기해야한다고 마음을 모았죠.
 
퍼 : 학창시절에, 반장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오 : 아뇨. 저는 떨려서 발표도 한번 제대로 못해봤는걸요. 사람들과의 활동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 활동을 재미있게 했었죠. 그렇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거에 대해서는 무대 공포증이 있었어요. 참, 학생이 하나 죽은 사건도 있었어요.
 
퍼 : 죽다니요?
 
오 : 남자애였는데, 같은 학년이었고 얼굴만 알던 애였어요. 어느 날 아이가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그 며칠 전에 어떤 선생님한테 아주 심하게 맞았다는 얘기가 돌면서 맞은 것 때문에 죽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어요.
 
퍼 : 어떻게 된 건가요?
 
오 : 그 아이가 원래 굉장히 심약한 아이였는데 선생님이 아이를 너무 심하게 때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맞은 후에 굉장히 힘들어했다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부검까지 했는데 결론은 그냥 심장마비라더군요. 이런 사건들이 대학에 와서 사회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하나로 엮여지더군요. 그리고 어린 나이에 겪은 이런 일들은 잘 잊혀지지가 않아요.
 

퍼 :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겪는 사회의 부조리이니 그럴 거예요. 그래서 혹시 교지에 그런 걸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오 : 전혀요, 하하하. 그런 의식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연애하면 대학 못 가는 줄 아는,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는걸요.

‘여성’과 ‘정치’ 사이

퍼 : 꽤 오랫동안 ‘오김현주’라는 이름을 써 왔죠.
 
오 : 대학생 때,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의 차원에서 ‘오김현주’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학생회장 선거도 ‘오김현주’라는 이름으로 출마했구요. 그런데 이번에 국가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나가는 거니까, 실명으로 등록해야 할 거라는 생각에서, ‘오현주’라고 다시 쓰기 시작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꼭 실명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더라구요. 강신성일 씨도 있었잖아요?
 
퍼 : 하하. 그러네요. 늘 불리던 이름이 바뀌어서 좀 어색하기도 했겠어요.
 
오 : 저는 꽤 비장하게, 이제 제도권 정치인이 된다는 마음으로 “오김현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현주가 되겠습니다”라고 출마의 변까지 썼었어요. 아직도 당 내에서나 아는 사람들은 다 ‘오김현주’, ‘오김!’이라고 불러요. ‘오현주’라고 부르는 건 왠지 싱겁고 기운 빠진 느낌이라고들 그래요. 저도 그렇고요.
 
퍼 : 저도 좀 그런 느낌이에요. ‘오김현주’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할 때엔 학교에서 여성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었죠?
 
오 : 그렇죠. 여성위원회 활동과 학생운동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었고 저한테는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어요. 그 당시 남녀공학 대학은 MT 등의 학생 활동에서 알게 모르게 성희롱, 성폭력과 여성비하 문화가 일반적이었어요. 이런 대학사회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주고 싶어 오김현주라는 이름으로 학생회 선거에 나갔었죠.
 
퍼 : 잘못된 학생 사회 문화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거네요.
 
오 : 네. 저 나름대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인데 여성위원회 친구들에게는 좀 미안했었죠. 여성위원회 위원장 활동을 그만두고 출마했었거든요. 그 친구들에게는 여성운동을 그만두고 학생운동 쪽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보여서 많이 섭섭하고 실망스러웠을 거예요.
 
퍼 : 당시에는 여성위원회에서 학생운동을 많이 비판했었죠?
 
오 : 그렇죠. 대학 내 여학생 운동세력과 학생운동은 물과 기름처럼 반목하고 있던 시기였어요. 여성운동 진영에서 2000년 초반 운동 사회의 만연한 성폭력을 문제제기 하면서 첨예하고 폭발적인 논쟁이 있은 직후였거든요. 학생운동의 가부장적 문화는 뿌리가 깊었죠. 전 여성위원회의 문제제기가 맞다고 봤었고 학생운동 세력들에게 많이 실망스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었어요.
 
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위원회 활동이 아니라 학생운동 활동을 선택을 했던 이유라면?
 
오 : 여성운동에서 제기하는 이슈, 여성운동의 운동 방식은 좋아했지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저는 조직적 시스템을 갖추고 다 같이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남기는 걸 좋아하는데 학생회 운동의 그런 면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이런 면 때문에 지금도 정당운동을 하고 있는 걸 거예요.  
 
퍼 : 여성주의자로서 정치활동을 계속 해 왔으니 그 후에도 그런 긴장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었겠네요.
 
오 : 계속해서 그랬죠. 저는 늘 이중 멤버십이에요.
 
퍼 : 이중 멤버십?
 
오 : 대학 시절에도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여성운동을 했고, 지금 당에서도 지역위원회 활동가면서도 성정치위원회 활동가죠. 거기에 따르는 갈등이 있어요. 성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러 가면, 쟤는 지역 활동에는 관심 없고 저것만 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반대로 성정치위원회 활동을 같이 하는 친구들에게는 늘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있구요.
 
퍼 : 본인은 힘들지 않나요?
 
오 :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점점 덜해져요. 누구나 본인이 속해 있는 집단과 어느 정도 갈등과 경계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 괴로워하기보다는 그 긴장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기로 하자고 마음먹었죠. 지역 운동과 여성 운동의 공통분모를 점점 만들어 가고 싶어요.
 
퍼 : 예를 들면?
 
오 : 마포는 여성 담론, 성소수자 담론이 중요한 지역적 특성이 있어요. 마포에 성소수자들이 굉장히 많이 살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몰라요. 저도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내가 성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선거를 해서 그런지, 선거 이후에 입당한 성소수자 당원이 굉장히 많아요.
 
퍼 : 현주 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네요.
 
오 : 그렇죠. 여기에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포라는 지역에서 성정치 담론을 펼쳐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퍼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오 : 지방 선거 이후, 마포 레인보우유권자 연대가 생겨나 활동하고 있어요.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지역정치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죠. 매달 퀴어 밥상 모임을 하거나 번개 모임을 하면서 친목도 다지고, 최근에는 마포 지역에 사는 성 소수자 친구들에게 우리를 홍보하는 마을버스 광고를 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마포에 사는 성 소수자들에게는 유명한 단체가 되어 가고 있답니다.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 등 다양한 활동에 힘을 보태기도 하고요.
 

마포 레인보우유권자 연대 기사 보러가기

여성의 정치 참여

퍼 : 남성이 아닌 여성이 정치를 하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까요?
 
오 : 예전에는 여성운동가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죠. 다른 무엇보다도 여성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박근혜 씨를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었어요. 그렇지만 이젠 안 그래요. 노무현 정부 겪고 나서부터, 여성 정치인이 나온다고 여성주의가 실현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됐어요.
 
퍼 : 생각이 달라지고 있군요.
 
오 : 그 중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올해 여성회의(전국의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여성정치 섹션에서 그 논쟁을 슬쩍 꺼내봤더니 다들 기분 나빠하시던 걸요? 생물학적 여성이 정치하는 것과 여성주의적인 정치는 관련이 없죠.
 
퍼 : 그럼 앞으로 여성 정치의 과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 : 지금까지는 여성에게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 아까 말씀드린 여성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위한 활동 등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지방자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사람들부터 만나고 바꿔가는 거죠. 아래에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퍼 : 지역이 중요하네요.
 
오 : 지역에서 여성운동을 열심히 해서 지방선거에서 당선을 시킨 좋은 사례를 봤어요. 민주노동당에서 출마한 인천 지역 사례였는데요, 다들 놀랄 정도로 참 활동을 잘 했더군요. 지역에서 일군 활동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배울 만했죠.
 

퍼 : 2-30대 여성당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 광고를 블로그에서 봤어요.
 
오 : 2-30대 여성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촛불 집회에 참여하면서 유명해졌잖아요? 그게 참 인상 깊었거든요. 그분들 커뮤니티가 참 재미있어요. 굉장히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면서도 여성주의적이기도 하고, 또 기존의 운동권을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동경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기존에 구분하는 정치성과는 굉장히 다른 정치성이죠.
 
퍼 : 어떤 분들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겠네요.
 
오 : 네. 그래서 그분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강연회를 기획했어요.
 
퍼 : 이분들에게 앞으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오 : 가능성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운동권 세력이 짜 놓은 판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이슈가 있고 사람들이 그 이슈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알리고, 모이고, 스스로 기획한 자리에는 많이 모이거든요. 두리반이 그랬고 홍대 청소노동자 싸움이 그랬죠. 이런 모습들이 예전과는 다른 감수성에 기반하고 있죠.
 
퍼 : 어떻게 다른가요?
 
오 : 사람들의 자발성, 그리고 정보력 등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 광우병 촛불집회를 지나면서 집회시위 문화 등이 많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소수의 사람이 움직이는 방식이 더 이상 사람들을 모이게 하지는 않더군요.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그 때 그 때 거기에 맞는 형식을 만들어가고 있고, 모인 사람들이 의논해서 결정하니까 거기서 사람들이 더 책임감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것 같아요.
 
퍼 : 네.
 
오 : 인터넷이 발달한 영향일까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많아져서인지, 훨씬 더 전문적이기도 해요. 해당하는 법률, 제도, 기관 다 찾아보고 오시더라구요. 철거 문제에서 구청이 무슨 역할 해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오세요. 그걸 통해서 경험을 쌓고 드러내는 방식도 매체도 다양해졌죠. 자발적으로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죠.
 
퍼 : 최근에 소위 ‘소셜테이너’를 중심으로 한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오 :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잘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잘 했으면 좋겠구요. 그걸 가지고 ‘연예인이 성과를 다 가져갔다’고 비판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봐요. 그분들이 의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하고 계신 거죠. 그분들의 활동에 결합하고 있는 분들 중에도 그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분들이 많아요.
 
퍼 :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 계신 거네요.
 
오 : 광우병 촛불 이후에도 열심히 활동하고 계세요. 4대강 문제도 굉장히 열심히 하셨어요. 지치지 않는 것 같아요. 적게 모이면 적게 모이는 대로, 많이 모이면 많이 모이는 대로 거기에 맞게 즐겁게 하니까 지치지 않는 것 아닐까요?
 
퍼 : 그분들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건 없나요?
 
오 : 저는 투쟁의 현장에 많이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활동과 공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지역 운동 같은 건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여기저기 사안이 있는 곳에만 열심히 결합하시기도 해요. 그런 모습은 좀 걱정스럽기도 해요.

‘진보’ 정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퍼 : 정치를 하면서 험한 욕을 듣거나 시비에 시달리지는 않나요?
 
오 : 요즘엔 없어요. 아무도 시비 안 걸고 욕도 안 해요. 진보정당 역사가 10년 되고 나니까 달라졌어요. 이런 게 역사가 쌓인다는 느낌이에요. 2000년 쯤에 거리에 나갔을 땐 많이 무시당하고 욕먹고 그랬죠. 그런데 이젠 아무도 안 그러고 세력으로 인정하는 걸 느껴요.
 
퍼 : 10년이 지나면서 달라지긴 달라졌군요. 가족들은 어떠세요?  
 
오 : 혹시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되던 날>이라는 영화 아세요? 대구 출신인 사람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본인의 아버지를 주제로 찍은 영화예요. 아버지가 너무 가난한데도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영화를 찍으면서 점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영화예요.
 
퍼 :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나요?
 
오 : 이 영화에서 말하는 건 뭐냐면, 사람들은 결국 힘의 논리에 종속된다는 거예요. 떡고물이 있는 데 사람들이 모인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꼭 본인에게 주어지는 돈이 아니더라도, 정책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 데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거죠.
 
퍼 : 떡고물이 있는 데에 모인다.
 
오 : 저희 아버지가 제가 정치한다는 걸 좀 좋아하시는데, 정치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파워가 있는 집단이니까, 혹시나 자식이 권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든든해 하신다고나 할까?
 
퍼 : 그런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기도 하시겠어요.
 
오 : 저희 아버지도 워낙에 가난하게 태어나 못 배우고 자라시고 이런저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신 터라 든든한 ‘빽’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신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힘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좋은 정책들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 맞기는 하죠. 진보정당이 좋은 정책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국민들 지지와 실현시킬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퍼 : 갈등이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오 :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던 것 때문에, 아주 보수적인 대구라는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살다 보니 ‘누구네 집 딸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았었나 봐요. 저는 나중에야 알게 된 건데 엄마는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10년 동안 일절 안 하셨어요. 오히려 제가 상처 받을까봐 걱정하신 거죠. 갈등보다는 부모님께 상처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하죠.
 
퍼 : 부모님께서 그래도 반대를 하지 않으셨나 봐요.
 
오 : 엄마 아빠는 기본적으로 절 많이 믿어주세요. 제가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신가 봐요. 작년에 선거 나간다고 할 때엔 엄마가 싫어하기도 하셨어요. ‘왜 사람들한테 욕먹을 짓을 하냐’는 거죠. 정치라는 건 잘 해도 못 해도 욕먹는 거라고 하세요.
 
퍼 :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만해요.
 
오 :  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공자님 이야기인데요, 자공이 공자에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혹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대요. 그런데 공자는 둘 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는 거죠.
 
퍼 :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
 
오 : 그렇죠.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저는 늘 이 말을 새기고 있었어요. 엄마가 ‘욕 먹을 짓’이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을 해 드렸죠.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난 어렵고 힘든 사람이 믿는 사람,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거라고 늘 대답해요.
 
퍼 : 다른 가족들은요?
 
오 : 저희 오빠는, 대구 지하철에서 일하는데 몇 년 전에 대구 지하철 파업에 참여하고 난 이후에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제 활동에 대해서도 많이 지지해줘요.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기도 했고요. 부모님도 그 뒤 많은 변화가 있으셨죠. 그래도 아직도 아버지는 한나라당에 미련을 못 버리셨고 엄마는 집안의 평화와 자신의 선택에서 늘 갈팡질팡하시죠. 그래서 저희 집은 선거 때 각 정당에 다 한 표씩을 주는 특이한 집이에요.
 
퍼 : 하하, 재미있네요.

우리 모두의 ‘진보’

 
퍼 : 현주 씨가 롤모델로 삼는 정치인이 있어요?
 
오 : 한 사람은 아니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배우고 싶어요. 우리 마포 지역위원장은 창의적인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해요. 학생운동 출신들은 지역 운동에 대해 틀에 박힌 사업만 생각하곤 하는데 이분은 달라요.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많아요. 이분이 여성주의나 성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지만 그걸 풀어내고 대중화시키는 걸 잘 해서, 많이 배우고 싶어요.
 
퍼 : 네.
 
오 : 지금 마포에서 구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진아 씨는 처음에 계획했던 일을 참 성실하게, 끝까지 놓지 않고 하세요. 보통 사람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의 10퍼센트 정도의 결과물에 머물잖아요. 관악 지역구에서 구청장 선거에 나왔던 이봉화 씨는 여성주의 정치, 소수자 정치에 대해 표방하고 지향성을 확실히 가지고 계시면서도 당내에서 인정받는 분이에요. 그런 지향을 밝히면서도 정치적 인지도를 인정받아 나가는 것에 대해 본받고 싶어요.
 

퍼 : 다 젊은 분들이네요.
 
오 : 딱 마흔 정도 되신 분들이에요.
 
퍼 : 진보 정치의 세대 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오 : 세대교체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해요. 제 또래가 굉장히 드물어요. 어떤 정치적 의견그룹을 형성할만한 숫자가 안 돼요. 여기저기에서 각자 성장해나가고 있는 거죠. 중간에 낀 세대라는 느낌이에요. 지금은, 마흔 살 정도 되신 분들이 당 내에서 의견을 많이 내고 지역에 대한 의견, 성과를 내 보이는 사람들에요.
 
퍼 : 좀더 젊은 세대는 어떤가요?
 
오 : 지금의 20대 초반의 사람들은 굉장히 자생적이에요. 혼자서 책 읽고 진보사상을 접한 사람들이라 남달리 똑똑하기는 하지만 운동에 대한 정치적 감각은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촛불 세대랄까요?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가 돼요.
 
퍼 : 지금의 고등학생들이요?
 
오 : 물론 더 자라봐야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집단적인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고등학생들은 그 경험을 했죠. 이명박 정권이라는 경험. 그리고 예전과는 달라진 이슈들이 있죠. 환경 문제와 같은 것들은 8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잖아요?
 

퍼 : 다음 대선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오 : 하하하, 모르죠. 그렇지만 진보진영이 이번 선거에서 함께 하면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결을 따내고 선거 제도 개편을 얻어내는 것은 꼭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으로는 선거를 통해 지역이 달라지는 걸 보고 싶고요. 이렇게 되면 다음 지방선거, 총선에서 다른 결과를 볼 수 있겠죠.  
 
퍼 : 진보 진영이 함께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오 : 네. 진보신당이 “1퍼센트 등대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좀 더 대중적인 진보 정치를 하고 싶거든요. 만약 한국 사회가 유럽처럼 소수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라면 다르겠죠. 그렇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선 진보정당이 함께 힘을 합쳐야 된다고 봐요. 그만큼 한국사회 정치가 격변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진보정당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봐야겠죠.
 
퍼 : 그동안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도 많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 허무주의도 만만치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는 이유를 말한다면?
 
오 : 사람들이 정치 굉장히 싫어하고 신물나게 생각한다는 거 알죠. 그런데 반대로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또 정치라고 생각해요. 기대가 강하게 걸려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엄청난 열망들이, 이 정치에 모여 있죠. 그 열망들은 가히 폭발적이고요. 제가 가진 생각들, 이야기들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화답하는 장면들을 떠올리면 굉장히 보람 있어요.
 
퍼 : 그 강한 기대와 열망을 알고 계신 만큼,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진보정당이라는 낯선 이름이 우리 사회에 등장한 지도 십여 년이 흘렀다. 투쟁 구호가 적힌 붉은 머리띠에 붉은 조끼를 입고 거리에 앉아 농성하는 모습으로만 보던 이들이 선거철에 양복을 입고 TV의 토론회에 후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을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의 실력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나 이젠 출세하겠다는 거냐며 비아냥거리는 눈빛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선거철에 ‘진보’의 이름을 만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이제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대안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다.
 
진보정치가 이렇게 자리를 잡는 진통 과정 속에서 오현주 씨는 운동 사회 내부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며 진보정치가 자신이 갈 길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고민이 있기에 진보정치를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더 넓은 지평으로 이끌고 가는 몫을 자신이 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비록 낙선했지만 그 경험이 있기에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꾸준히 지역 정치 활동을 펼쳐 나가겠다고 다짐하고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정치인이라면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회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방향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 다를 것 같다. 정치인은 서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선거철에만 ‘서민을 위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로 불신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지역 주민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의 소수자 문제를 먼저 찾아내고 그들과 함께 할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