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도-제주참여환경연대 김아현

김아현 씨는 지금 다섯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모범생 제주소녀이었던 그녀는 영화판을 기웃거리다가 드라마 피디가 되고 싶어 언론고시생 생활을 하였다. 미대 졸업 후 광고인과 기자를 거쳐 지금은 고향 제주도에서 <제주참여환경연대>의 정책국장으로 4년째 일하고 있다.
김아현 씨(@eyedaho)는 현재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모범 고등학생은 만화 <블루>를 보며 여자 주인공처럼 미대생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대학생이 되고 보니 세상은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방황하다 만난 영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휴학하고 영화판에서 일했다. 졸업 후엔 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드라마 피디가 되고 싶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향 제주에 돌아와 기자생활을 경험하고 현재는 시민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영화 <혜화,동>의 제주 공동체 상영을 준비하며 김아현 씨를 처음 알게 되었다. 보고 싶은 영화였지만 제주도에서 상영하는 곳이 없었다. 트위터에 공동체 상영으로 <혜화,동> 보고 싶으신 분 없냐는 글을 남겼다. 누군가가 한밤중에 답을 해왔다. 그가 바로 김아현 씨다. 김아현 씨가 가담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상영 날짜와 상영 장소가 정해졌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그녀가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며,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이 버는 직업이 더 좋은 직업이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김아현 씨에게는 우등생 욕구는 없지만 주차 구획선이 아니면 주차를 잘 못할 정도로 모범생 기질이 다분하다. 본 것을 못 본 척 하고, 아닌 것을 맞는 척 하지 못한다. 이것이 김아현 씨가 가진 미루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 성격과 만나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켜왔다.
 
맑지만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김아현 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간에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 하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지금 몇 개째의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몇 년 전,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영화 <9 lives> 상영 후 심영섭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던진 질문이다. 당시에 열심히 꼽아봤지만, 20대 초반이던 나는 아무리 부풀리려 해도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김아현 씨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완전 다른, 다섯 개째 인생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아현 씨의 ‘다섯 개째의, 완전 다른 인생’을 들어본다.

김아현 씨(@eyedaho)는 현재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모범 고등학생은 만화 <블루>를 보며 여자 주인공처럼 미대생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대학생이 되고 보니 세상은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방황하다 만난 영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휴학하고 영화판에서 일했다. 졸업 후엔 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드라마 피디가 되고 싶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향 제주에 돌아와 기자생활을 경험하고 현재는 시민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영화 <혜화,동>의 제주 공동체 상영을 준비하며 김아현 씨를 처음 알게 되었다. 보고 싶은 영화였지만 제주도에서 상영하는 곳이 없었다. 트위터에 공동체 상영으로 <혜화,동> 보고 싶으신 분 없냐는 글을 남겼다. 누군가가 한밤중에 답을 해왔다. 그가 바로 김아현 씨다. 김아현 씨가 가담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상영 날짜와 상영 장소가 정해졌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그녀가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며,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이 버는 직업이 더 좋은 직업이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김아현 씨에게는 우등생 욕구는 없지만 주차 구획선이 아니면 주차를 잘 못할 정도로 모범생 기질이 다분하다. 본 것을 못 본 척 하고, 아닌 것을 맞는 척 하지 못한다. 이것이 김아현 씨가 가진 미루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 성격과 만나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켜왔다.
 
맑지만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김아현 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간에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 하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지금 몇 개째의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몇 년 전,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영화 <9 lives> 상영 후 심영섭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던진 질문이다. 당시에 열심히 꼽아봤지만, 20대 초반이던 나는 아무리 부풀리려 해도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김아현 씨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완전 다른, 다섯 개째 인생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아현 씨의 ‘다섯 개째의, 완전 다른 인생’을 들어본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퍼슨웹(이하 퍼) : 요즘 여기저기서 서귀포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한창인데요. 5월에는 법원이 행정소송에서 해군 측의 손을 들어줬다고 하던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한다고 하는 논리는 무엇인가요?
 
*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진행 사항

1992      해군 화순항 개발 계획에 해군부두 건설 요구


2002. 5   해군 제주 해군전략기지 건설 필요성 공식화


2002. 5   제주 화순항 해군기지로 선정, 주민 반대


2005. 1   정부, 4.3사건지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


2005      해군 제주 위미리로 해군기지 변경 선정, 주민 반대


2007. 4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마을회 해군기지 유치의사 발표


             (마을임시총회 주민 1,900명 중 87명 참석.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결의 _ 총회 성사 규정 : 120명 이상)


2007. 5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해군기지 강정동 유치결정 발표


2007. 6   국방부,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 지역 강정마을로 결정 통보


2007. 8   강정마을회 해군기지 유치 주민투표 실시


             (725명의 94%인 680명 유치 반대)


2009. 4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제주해군기지
             실시계획 승인처분 취소소송 제기


2009. 4   국방부. 국토해양부. 제주도 해군기지건설 기본협약서(MOU) 체결


2009. 5   시민단체, 김태환 (전)도지사 주민소환 선언 기자회견


2009. 8   주민소환투표 발의. 제주지사 직무정지


2009. 8   주민소환투표 부결. 제주지사 직무 복귀

             (개표기준 33.33%, 투표율이 11.0%로 미개표)


2010. 4.  제주 종교, 시민단체 2010년 4월 28일 예정인

            해군기지 착공식 중단 서명운동 (이후 착공 연기 발표)


2010. 12  해군기지 공사 강행


2010. 12  제주도의회 공사 중단 요구 결의문 발표


2011. 2    해군기지 공사 시작


2011. 3    제주도의회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변 절대보전지역
             변경동의 의결에 대한 취소의결안’ 가결


2011. 4    강정마을회 대국민 호소문 발표


              강정마을회 포함 시민단체 ‘제주도 특별법 개정안
              제주해군기지 관련내용 삭제 촉구‘ 공동기자회견


2011. 5    ‘절대보전지역 해제’에 대한 2차 항소심 기각


* 해군기지 또다시 해군 측 승소(2011.05 /경향신문)

 
김아현(이하 김) : ‘제주가 아시아태평양에서 굉장히 중요한 군사 요충지’라는 군사지정학적 논리가 있고, ‘기지가 들어와야 관광도 살아나고, 정주 인구도 늘어나 경제가 좋아진다’ 는 논리가 있어요. 또 원유를 수송하는 난방 수송로를 우리가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제주에 해군기지를 지어야 한다는 논리도 있고, 노무현 정부 때 나온 대양해군론도 있고요.
 
퍼 : 여러 가지 있네요. 이런 논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모두가 다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해요. 제주가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을 자극을 할 염려도 있으니까 군사화가 안 되는 것이 맞는 것일 수 있어요. 특히나 강정마을에 추진하려고 하는 기지는 핵잠수함이나 핵미사일을 보유하려고 하거든요. 일각에서는 이 기지가 자주국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2014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한 이후에 미군기지로 활용될 거라 주장하는 설도 있어요.
 
퍼 :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들인가요?
 
김 :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의견이 분분한데도 국방부나 정부 혹은 미군 그 누구도 명쾌하게 ‘아니다’라고 대답을 준 적이 없어요. 옛날부터 계속해서 제주도에 위미, 화순, 강정 등에 공군기지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어요.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공군기지까지 확장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준 바도 없죠.
 
퍼 : 일단 한 번 자리만 잡으면 앞으로 어떻게 더 악화될지 모르는 거네요.
 
김 : 국방 중요하고, 어딘가에 기지는 있어야 되겠죠. 경제적인 논리나 원유수송로 확보와 같은 논리들은 반박이 가능해요. 해적으로부터 원유를 보호한다는 것도 그것도 사실은 해경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근데 가장 깨기 어려운 게 그 국방의 논리예요.
 
퍼 : 특히나 한국에선 더욱 어렵죠.
 
김 : 원론적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이야기하면 군축, 전 세계가 다 무기경쟁 하지 말고 다 같이 무기를 놓자 하면 이게 가장 좋은 건데 거기까지 얘기하면 너무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게 되고요.
 
퍼 :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에서 어떤 원칙들이 깨지고 있는 거 같아요? 평화의 문제부터 경제의 논리, 무엇보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 없어지게 되잖아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강정마을에 지금 중첩되어 있어요.
 
김 : 저는 총칼로 억지로 지키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고요라고 생각하거든요. 군사기지나 무기나 전쟁 같은 것들이 절대 평화를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나 강정마을 같은 경우엔, 전 공동체에 대한 확인이라고 할까요, 사람 사는 풍경을 보며 강정마을에서 감동이나 애착을 처음 느꼈었어요.
 
퍼 : 공동체가 주는 감동과 애착이요?
 
김 : 강정마을에 오래 들락날락 하다 보니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어요. 마을 주민분들은 농사짓고 고기 잡으면서 살고 계시거든요. 각자가 수확한 것들을 공동체가 나눠먹고 그걸 공유해요. 그러면서 서로 관계가 유지되지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 거예요. ‘이런 게 정말 사람 사는 맛이고, 공동체라는 게 이런 걸 얘기하는 거였구나, 이게 너무 소중한 거구나, 국가나 복지나 시스템이 절대 커버할 수 없는 영역, 소중한 가치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강정에서 진짜 많이 느꼈어요.
 
퍼 : 사람 사는 맛이라. 그런데 요즘 해군기지 상황이 더 심각해졌잖아요.
 
김 : 해군기지 절차가 그 공동체를 완전히 와해시키고 그게 사람들 가슴에 얼마나 상처로 남았는지를 계속 확인하고 있어요. 환경적인 문제라든가 평화의 문제라든가 절차의 문제, 공동체 문제. 일일이 열거하기도 너무 많은 상식과 원칙들이 정말 이렇게 깨져나가는 그런 과정이 강정 해군기지 추진 과정이에요.
 
퍼 : 특히 절차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어요.
 
김 : 마을 사람들 대부분 모르는 상태에서 총회를 하지도 않았는데 마을 회장하고 몇 사람이 가짜로 서류 만들어서 유치 결정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행정적, 법적인 절차들이 되게 상식적이지 못했고, 반민주적이었어요.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로요.
 
퍼 : 그렇군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퍼슨웹(이하 퍼) : 요즘 여기저기서 서귀포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한창인데요. 5월에는 법원이 행정소송에서 해군 측의 손을 들어줬다고 하던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한다고 하는 논리는 무엇인가요?
 
*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진행 사항

1992      해군 화순항 개발 계획에 해군부두 건설 요구


2002. 5   해군 제주 해군전략기지 건설 필요성 공식화


2002. 5   제주 화순항 해군기지로 선정, 주민 반대


2005. 1   정부, 4.3사건지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


2005      해군 제주 위미리로 해군기지 변경 선정, 주민 반대


2007. 4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마을회 해군기지 유치의사 발표


             (마을임시총회 주민 1,900명 중 87명 참석.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결의 _ 총회 성사 규정 : 120명 이상)


2007. 5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해군기지 강정동 유치결정 발표


2007. 6   국방부,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 지역 강정마을로 결정 통보


2007. 8   강정마을회 해군기지 유치 주민투표 실시


             (725명의 94%인 680명 유치 반대)


2009. 4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제주해군기지
             실시계획 승인처분 취소소송 제기


2009. 4   국방부. 국토해양부. 제주도 해군기지건설 기본협약서(MOU) 체결


2009. 5   시민단체, 김태환 (전)도지사 주민소환 선언 기자회견


2009. 8   주민소환투표 발의. 제주지사 직무정지


2009. 8   주민소환투표 부결. 제주지사 직무 복귀

             (개표기준 33.33%, 투표율이 11.0%로 미개표)


2010. 4.  제주 종교, 시민단체 2010년 4월 28일 예정인

            해군기지 착공식 중단 서명운동 (이후 착공 연기 발표)


2010. 12  해군기지 공사 강행


2010. 12  제주도의회 공사 중단 요구 결의문 발표


2011. 2    해군기지 공사 시작


2011. 3    제주도의회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변 절대보전지역
             변경동의 의결에 대한 취소의결안’ 가결


2011. 4    강정마을회 대국민 호소문 발표


              강정마을회 포함 시민단체 ‘제주도 특별법 개정안
              제주해군기지 관련내용 삭제 촉구‘ 공동기자회견


2011. 5    ‘절대보전지역 해제’에 대한 2차 항소심 기각


* 해군기지 또다시 해군 측 승소(2011.05 /경향신문)

 
김아현(이하 김) : ‘제주가 아시아태평양에서 굉장히 중요한 군사 요충지’라는 군사지정학적 논리가 있고, ‘기지가 들어와야 관광도 살아나고, 정주 인구도 늘어나 경제가 좋아진다’ 는 논리가 있어요. 또 원유를 수송하는 난방 수송로를 우리가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제주에 해군기지를 지어야 한다는 논리도 있고, 노무현 정부 때 나온 대양해군론도 있고요.
 
퍼 : 여러 가지 있네요. 이런 논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모두가 다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해요. 제주가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을 자극을 할 염려도 있으니까 군사화가 안 되는 것이 맞는 것일 수 있어요. 특히나 강정마을에 추진하려고 하는 기지는 핵잠수함이나 핵미사일을 보유하려고 하거든요. 일각에서는 이 기지가 자주국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2014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한 이후에 미군기지로 활용될 거라 주장하는 설도 있어요.
 
퍼 :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들인가요?
 
김 :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의견이 분분한데도 국방부나 정부 혹은 미군 그 누구도 명쾌하게 ‘아니다’라고 대답을 준 적이 없어요. 옛날부터 계속해서 제주도에 위미, 화순, 강정 등에 공군기지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어요.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공군기지까지 확장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준 바도 없죠.
 
퍼 : 일단 한 번 자리만 잡으면 앞으로 어떻게 더 악화될지 모르는 거네요.
 
김 : 국방 중요하고, 어딘가에 기지는 있어야 되겠죠. 경제적인 논리나 원유수송로 확보와 같은 논리들은 반박이 가능해요. 해적으로부터 원유를 보호한다는 것도 그것도 사실은 해경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근데 가장 깨기 어려운 게 그 국방의 논리예요.
 
퍼 : 특히나 한국에선 더욱 어렵죠.
 
김 : 원론적으로, 가장 이상적으로 이야기하면 군축, 전 세계가 다 무기경쟁 하지 말고 다 같이 무기를 놓자 하면 이게 가장 좋은 건데 거기까지 얘기하면 너무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게 되고요.
 
퍼 :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에서 어떤 원칙들이 깨지고 있는 거 같아요? 평화의 문제부터 경제의 논리, 무엇보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 없어지게 되잖아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강정마을에 지금 중첩되어 있어요.
 
김 : 저는 총칼로 억지로 지키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고요라고 생각하거든요. 군사기지나 무기나 전쟁 같은 것들이 절대 평화를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나 강정마을 같은 경우엔, 전 공동체에 대한 확인이라고 할까요, 사람 사는 풍경을 보며 강정마을에서 감동이나 애착을 처음 느꼈었어요.
 
퍼 : 공동체가 주는 감동과 애착이요?
 
김 : 강정마을에 오래 들락날락 하다 보니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어요. 마을 주민분들은 농사짓고 고기 잡으면서 살고 계시거든요. 각자가 수확한 것들을 공동체가 나눠먹고 그걸 공유해요. 그러면서 서로 관계가 유지되지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 거예요. ‘이런 게 정말 사람 사는 맛이고, 공동체라는 게 이런 걸 얘기하는 거였구나, 이게 너무 소중한 거구나, 국가나 복지나 시스템이 절대 커버할 수 없는 영역, 소중한 가치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강정에서 진짜 많이 느꼈어요.
 
퍼 : 사람 사는 맛이라. 그런데 요즘 해군기지 상황이 더 심각해졌잖아요.
 
김 : 해군기지 절차가 그 공동체를 완전히 와해시키고 그게 사람들 가슴에 얼마나 상처로 남았는지를 계속 확인하고 있어요. 환경적인 문제라든가 평화의 문제라든가 절차의 문제, 공동체 문제. 일일이 열거하기도 너무 많은 상식과 원칙들이 정말 이렇게 깨져나가는 그런 과정이 강정 해군기지 추진 과정이에요.
 
퍼 : 특히 절차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어요.
 
김 : 마을 사람들 대부분 모르는 상태에서 총회를 하지도 않았는데 마을 회장하고 몇 사람이 가짜로 서류 만들어서 유치 결정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행정적, 법적인 절차들이 되게 상식적이지 못했고, 반민주적이었어요.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로요.
 
퍼 : 그렇군요.

정의와 평화 사이

 

김 : 강정 마을 해군기지에 크게는 평화의 문제, 법의 문제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여러 가지 문제가 여기에 복합이 되어 있어요. 아직도 가끔 고민해요.
 
퍼 : 어떤 고민이요?
 
김 : 지금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일 만큼 일이 많이 진행이 되었잖아요.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나 뒤늦게 싸움에 합류한 사람들은 포크레인 앞에 있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단식을 하기도 하고 있어요.
 
퍼 : 그렇군요.
 
김 : 저 역시 정말 해군기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설령 들어와도 강정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끝까지 내가 원칙을 고수하고 우리가 시민단체가 변함없이 원래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이 최근에 들더라고요.
 
퍼 : 실질적인, 현실적인 시각에서 고민하게 된 건가요?
 
김 : 어쨌든 마을 주민들은 많이 지쳐있어요. 특히 임차농이라든가 이런 분들은 현실적으로 꼭 받아야 하는 보상 같은 것을, 지금까지 계속 반대를 해왔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죠. 근데 또 너무 많은 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요.
 
퍼 : 그런 부분이 있었군요.
 
김 :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갈등은 커져가고 공사는 강행하고 있고, 마을 분들은 그 사이에서 상처를 받고 있단 말이에요. 몸으로 막으면서 절대 안 된다는 원칙 고수하다가 잡혀가거나 벌금 물거나 그렇게 장렬히 산화하면, 원칙은 지킨 거니깐 마음은 편하죠. 원칙을 지켰고 내 개인적인 피해를 감수한 거니까요.
 
퍼 : 정의로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김 : 정의, 영웅이라고 남들은 치켜 세워줄 수 있겠죠 장렬히 산화하면.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누가 돌볼 수 있을까요.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돌보려는 눈과 마음이 없는데 그 싸움이 과연 옳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해군기지 문제 때문에 굉장히 심난하고 나 스스로도 마음에 상처를 계속 쌓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퍼 : 강정마을에 애정이 각별하신 것 같아요.
 
김 : 왜냐면 제가 활동가로 살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해군기지였고 지난 4년간 계속 보아왔으니까요. 해군기지가 들어온다고 해서 평화의 섬이라는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기지가 들어오지 않으면 여기가 평화의 섬이 될 것인가 묻는 도법스님의 질문이 있었어요. 전 처음엔 그게 패배주의적 관점,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 말이 어떤 고민을 던져주는지는 좀 알 것 같아요.
 
퍼 : 어떤 고민이요?
 
김 : 그냥 군사기지 안 된다고 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완성이 아니라 해군기지 막아내고 그 다음에 평화라는 가치가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토론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가장 좋고 궁극적인 평화운동이죠.
 
퍼 : 그렇죠.
 
김 :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해군기지 싸움은 “평화가 뭘까?”, “평화를 어떻게 지켜나가는 게 평화일까?” 이런 의제를 사회에 던져보질 못했어요. 우리 딴에는 평화 축제도 하면서, 던졌다고 보는데 학술적으로든 대중운동적으로든 던지기에는 너무 힘이 미약했고 일단 기지 막아내는 게 너무 급했죠.
 
퍼 : 그렇군요.
 
김 : 그리고 사람한텐 뭔가 진짜 잃어봐야 더 절실하게 논의가 되는 이상한 습성이 있잖아요.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만약에 기지 막아내는 것이 실패를 한다면, 기지를 통해서 환경도 잃어보고 공동체도 잃어보고 평화도 잃어봤을 때 그때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평화라는 담론을 꺼낼 수 있는 평화운동이 시작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들어요.
 
퍼 :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김 : 카지노나 영리병원, 경빙장(빙상 경주장)* 도입 등 처음부터 논의 자체가 되선 안 되는 의제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그때마다 정책을 막기 위해 일하고는 있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의제를 주도하지 못할망정 그 사람들이 던지는 말도 안 되는 의제 막아내는데 급급한 실정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지치고 오해받기도 하고 화도 나고 절망하는데 한번은 너무 속상해서 ‘다 들어와서 제주도 한 번 망가져봐야 알려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웃음)
 
* “제주 경빙 사업 공론화 미적…‘사행성 논란’ 두려워 쉬쉬?” (한겨레 2011년 5월)

 
 

정의와 평화 사이

 

김 : 강정 마을 해군기지에 크게는 평화의 문제, 법의 문제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여러 가지 문제가 여기에 복합이 되어 있어요. 아직도 가끔 고민해요.
 
퍼 : 어떤 고민이요?
 
김 : 지금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일 만큼 일이 많이 진행이 되었잖아요.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나 뒤늦게 싸움에 합류한 사람들은 포크레인 앞에 있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단식을 하기도 하고 있어요.
 
퍼 : 그렇군요.
 
김 : 저 역시 정말 해군기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설령 들어와도 강정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끝까지 내가 원칙을 고수하고 우리가 시민단체가 변함없이 원래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이 최근에 들더라고요.
 
퍼 : 실질적인, 현실적인 시각에서 고민하게 된 건가요?
 
김 : 어쨌든 마을 주민들은 많이 지쳐있어요. 특히 임차농이라든가 이런 분들은 현실적으로 꼭 받아야 하는 보상 같은 것을, 지금까지 계속 반대를 해왔기 때문에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죠. 근데 또 너무 많은 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요.
 
퍼 : 그런 부분이 있었군요.
 
김 :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갈등은 커져가고 공사는 강행하고 있고, 마을 분들은 그 사이에서 상처를 받고 있단 말이에요. 몸으로 막으면서 절대 안 된다는 원칙 고수하다가 잡혀가거나 벌금 물거나 그렇게 장렬히 산화하면, 원칙은 지킨 거니깐 마음은 편하죠. 원칙을 지켰고 내 개인적인 피해를 감수한 거니까요.
 
퍼 : 정의로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김 : 정의, 영웅이라고 남들은 치켜 세워줄 수 있겠죠 장렬히 산화하면.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누가 돌볼 수 있을까요.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돌보려는 눈과 마음이 없는데 그 싸움이 과연 옳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해군기지 문제 때문에 굉장히 심난하고 나 스스로도 마음에 상처를 계속 쌓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퍼 : 강정마을에 애정이 각별하신 것 같아요.
 
김 : 왜냐면 제가 활동가로 살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해군기지였고 지난 4년간 계속 보아왔으니까요. 해군기지가 들어온다고 해서 평화의 섬이라는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기지가 들어오지 않으면 여기가 평화의 섬이 될 것인가 묻는 도법스님의 질문이 있었어요. 전 처음엔 그게 패배주의적 관점,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 말이 어떤 고민을 던져주는지는 좀 알 것 같아요.
 
퍼 : 어떤 고민이요?
 
김 : 그냥 군사기지 안 된다고 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완성이 아니라 해군기지 막아내고 그 다음에 평화라는 가치가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토론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가장 좋고 궁극적인 평화운동이죠.
 
퍼 : 그렇죠.
 
김 :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해군기지 싸움은 “평화가 뭘까?”, “평화를 어떻게 지켜나가는 게 평화일까?” 이런 의제를 사회에 던져보질 못했어요. 우리 딴에는 평화 축제도 하면서, 던졌다고 보는데 학술적으로든 대중운동적으로든 던지기에는 너무 힘이 미약했고 일단 기지 막아내는 게 너무 급했죠.
 
퍼 : 그렇군요.
 
김 : 그리고 사람한텐 뭔가 진짜 잃어봐야 더 절실하게 논의가 되는 이상한 습성이 있잖아요.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만약에 기지 막아내는 것이 실패를 한다면, 기지를 통해서 환경도 잃어보고 공동체도 잃어보고 평화도 잃어봤을 때 그때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평화라는 담론을 꺼낼 수 있는 평화운동이 시작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들어요.
 
퍼 :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김 : 카지노나 영리병원, 경빙장(빙상 경주장)* 도입 등 처음부터 논의 자체가 되선 안 되는 의제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그때마다 정책을 막기 위해 일하고는 있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의제를 주도하지 못할망정 그 사람들이 던지는 말도 안 되는 의제 막아내는데 급급한 실정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지치고 오해받기도 하고 화도 나고 절망하는데 한번은 너무 속상해서 ‘다 들어와서 제주도 한 번 망가져봐야 알려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웃음)
 
* “제주 경빙 사업 공론화 미적…‘사행성 논란’ 두려워 쉬쉬?” (한겨레 2011년 5월)

 
 

제주도, 사람

 

퍼 :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제주도는 어떤 것인가요?
 
김 : 너무 진부하지만 자연환경이 되게 독특하거든요?
 
퍼 : 맞아요. 동의해요!
 
김 : 경관의 웅장함 같은 것만 보면 제주도랑은 비교가 안될 만큼 좋은 곳이 세계 곳곳에 많죠. 전 세계는 아니라도 여러 군데 가보면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분명히 제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 있고 여기가 주는 편안함이 있어요. 꾸미지 않고 소박하고 거칠지만 독특한 뭔가가 있어요.
 
퍼 : 내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김 : 네. 나는 제주도가 세계 최고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제주다운 것만 지켰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제주 돌담을 무너뜨리고 콘크리트 벽돌로 조형물을 쌓는다거나 하는 거요. 근데 오름이나 산 능선을 망가뜨리는 송전탑이나 아파트가 막 들어서고 있어요. 그런 정체성 없는 구조물 때문에 제주의 독특함을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퍼 : 사람들은 그게 개발되는 거고, 발전되는 것, 좋은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김 : 사람이든 동물이든 환경에 되게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제주의 독특함이 훼손되었을 때 제주의 정체성 역시 훼손되는 거잖아요. 서울이나 그런 큰 대도시 기준으로 보면 정도는 약할 수 있지만 지금 제주도, 제주시도 만만치 않게 사람 사이 관계가 원자화된 공간이 되었어요.
 
퍼 : 원자화된 공간이요?
 
김 : 제주도 안에서도 제주의 강남이 생겨나고 사교육 열풍이 불고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브랜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지 못하게 하는 이런 이상한 문화가 생겨나고 있어요. 전 이런 것들이 공간과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도 생각하거든요. 공동체의 성격도 많이 변했고요.
 
퍼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제주도 거리거리에 재벌기업 브랜드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빵집이나 치킨집이 많이 보여서 좋았어요. 근데 작년, 재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들이 부쩍 늘었어요. 원래 것들 들어내고 어디에서나 똑같은 프랜차이즈 체인들이 들어서면서 공간의 시간, 흔적 자체가 지워지게 되죠.
 
김 : 롯데리아, 맥도날드, 버거킹 이런 데 가서 정크푸드 사먹는 게 일종의 고급문화인 것처럼 만들고 유통하면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죠. 근데 그런 생각해요. 그래서 삶이 촉촉해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들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퍼 :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 : 맥도날드 가서 맥모닝 사먹으면서 도시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보다 자정에 들어오는 오징어잡이 배 맞이하러 대야 들고 나가서 오징어 사다가 엄마랑 같이 손질해서 친구들 불러서 소주 한 잔 하는 것 같은 거요. 특히 제주는 이런 시도를 해볼 만한 기회가 되게 많은 공간이에요.
 
퍼 : 네, 제주도가 다 같이 살 수 있고,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좋은 공간이죠.
 
김 : 제주도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이 공존하잖아요? 아직은 공동체도 많이 남아있고 전통 문화도 많이 남아있어요. 그리고 섬이기 때문에 어떤 가치관이나 논의들이 생겨났을 때 전파되고 유통되고 공유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되게 짧아요.
 
퍼 : 아직 주된 흐름은 아닌 것 같지만 요즘 들어 제주에서 그런 움직임이 다양한 것 같아서 재밌고 좋아요. 제주도 오면서 제주도에 대해 검색해보고 놀랐어요. 색다른 꿈을 가진 분들, 시도하고 계신 분들이 보이더라고요.
 
김 : 나는 어쨌든 감시하고 고발하고 분석하고 그런 딱딱한 것에서 재미를 느끼며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안을 시도하고 그런 삶을 사는 걸 적극 할 순 없어요. 다만 시민사회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의 창구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돕고 싶어요.
 
퍼 : 멋진데요.
 
김 : 예를 들어, 여기 있는 사람이 저기서 이뤄지는 저런 시도를 모를 수 있잖아요. 중간에 징검다리가 더 많아질수록 좋아지는 거잖아요. 그런 연결을 많이 해주고 싶어요.
 
퍼 : 요즘에 ‘한라산 만인보(http://jejungo.net/main/6970&nbsp;)’를 한다거나 ‘교육문화카페 자람(http://jejungo.net/main/jaram_home)’을 만든다거나, 좀 더 시민들과의 접촉 면적을 넓히고 계시잖아요.
 
김 : 지금은 제주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골프장이나 리조트가 그렇게 핑크빛 산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하는 타이밍이기도 해요. 개발주체만 배불린다는 걸 알게 된 거죠. 20년 동안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경관은 어떻게 변했는지 환경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의 주민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는 시도가 바로 만인보예요.
 
퍼 : 한 달에 한 번 하는 거죠?
 
김 : 네. 나머지 시간동안엔 계속 조사하고 인터뷰 다니면서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그걸 담은 자료집이나 개발지도 만들어 보려고요. 이쯤 되면 한 번쯤은 반성, 평가하면서 다른 방식의 개발이든 현재대로 계속 하든 제대로 점검해볼 타이밍이 되었죠.
 
퍼 : 교육문화카페 자람은요?
 
김 : 저희 활동가 중에 한 분이 시민단체들이 칙칙하고 재미없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제안했어요. 시민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완충 공간을 만들게 된 거죠. 사람이 모이고, 계속 와야 활동도 다른 게 생겨나고 확산되는 거니까요.
 
퍼 :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김 : 처음에 나는 이게 안 될 줄 알았어요. 매달 적자를 보며 운영도 어려운 구조인데 공간 만들고 인테리어 하려면 돈이 들잖아요. 얼마 이상의 돈을 마련하는 게 되게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에 안 될 줄 알았는데 초기의 씨앗자금을 한 10,000분 이상이 800만원 인가를 모아주셨어요.
 
퍼 : 와! 대단하네요.
 
김 : 그래서 공사 시작하고 공간이 완성이 되니깐 처음에 시큰둥해하던 사람들도 자기도 뭔가 해주고 싶다며 후원해주기도 하고요. 앞으로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프로그램 만들고 운영하게 되면 이 안에 되게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모이는 사람들이 각자 가져올 보따리들,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고, 만나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들이 여기에서 더 크게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제주도, 사람

 

퍼 :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제주도는 어떤 것인가요?
 
김 : 너무 진부하지만 자연환경이 되게 독특하거든요?
 
퍼 : 맞아요. 동의해요!
 
김 : 경관의 웅장함 같은 것만 보면 제주도랑은 비교가 안될 만큼 좋은 곳이 세계 곳곳에 많죠. 전 세계는 아니라도 여러 군데 가보면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분명히 제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 있고 여기가 주는 편안함이 있어요. 꾸미지 않고 소박하고 거칠지만 독특한 뭔가가 있어요.
 
퍼 : 내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김 : 네. 나는 제주도가 세계 최고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제주다운 것만 지켰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제주 돌담을 무너뜨리고 콘크리트 벽돌로 조형물을 쌓는다거나 하는 거요. 근데 오름이나 산 능선을 망가뜨리는 송전탑이나 아파트가 막 들어서고 있어요. 그런 정체성 없는 구조물 때문에 제주의 독특함을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퍼 : 사람들은 그게 개발되는 거고, 발전되는 것, 좋은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김 : 사람이든 동물이든 환경에 되게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제주의 독특함이 훼손되었을 때 제주의 정체성 역시 훼손되는 거잖아요. 서울이나 그런 큰 대도시 기준으로 보면 정도는 약할 수 있지만 지금 제주도, 제주시도 만만치 않게 사람 사이 관계가 원자화된 공간이 되었어요.
 
퍼 : 원자화된 공간이요?
 
김 : 제주도 안에서도 제주의 강남이 생겨나고 사교육 열풍이 불고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브랜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지 못하게 하는 이런 이상한 문화가 생겨나고 있어요. 전 이런 것들이 공간과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도 생각하거든요. 공동체의 성격도 많이 변했고요.
 
퍼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제주도 거리거리에 재벌기업 브랜드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빵집이나 치킨집이 많이 보여서 좋았어요. 근데 작년, 재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들이 부쩍 늘었어요. 원래 것들 들어내고 어디에서나 똑같은 프랜차이즈 체인들이 들어서면서 공간의 시간, 흔적 자체가 지워지게 되죠.
 
김 : 롯데리아, 맥도날드, 버거킹 이런 데 가서 정크푸드 사먹는 게 일종의 고급문화인 것처럼 만들고 유통하면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죠. 근데 그런 생각해요. 그래서 삶이 촉촉해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들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퍼 :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 : 맥도날드 가서 맥모닝 사먹으면서 도시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보다 자정에 들어오는 오징어잡이 배 맞이하러 대야 들고 나가서 오징어 사다가 엄마랑 같이 손질해서 친구들 불러서 소주 한 잔 하는 것 같은 거요. 특히 제주는 이런 시도를 해볼 만한 기회가 되게 많은 공간이에요.
 
퍼 : 네, 제주도가 다 같이 살 수 있고,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좋은 공간이죠.
 
김 : 제주도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이 공존하잖아요? 아직은 공동체도 많이 남아있고 전통 문화도 많이 남아있어요. 그리고 섬이기 때문에 어떤 가치관이나 논의들이 생겨났을 때 전파되고 유통되고 공유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되게 짧아요.
 
퍼 : 아직 주된 흐름은 아닌 것 같지만 요즘 들어 제주에서 그런 움직임이 다양한 것 같아서 재밌고 좋아요. 제주도 오면서 제주도에 대해 검색해보고 놀랐어요. 색다른 꿈을 가진 분들, 시도하고 계신 분들이 보이더라고요.
 
김 : 나는 어쨌든 감시하고 고발하고 분석하고 그런 딱딱한 것에서 재미를 느끼며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안을 시도하고 그런 삶을 사는 걸 적극 할 순 없어요. 다만 시민사회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하나의 창구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돕고 싶어요.
 
퍼 : 멋진데요.
 
김 : 예를 들어, 여기 있는 사람이 저기서 이뤄지는 저런 시도를 모를 수 있잖아요. 중간에 징검다리가 더 많아질수록 좋아지는 거잖아요. 그런 연결을 많이 해주고 싶어요.
 
퍼 : 요즘에 ‘한라산 만인보(http://jejungo.net/main/6970&nbsp;)’를 한다거나 ‘교육문화카페 자람(http://jejungo.net/main/jaram_home)’을 만든다거나, 좀 더 시민들과의 접촉 면적을 넓히고 계시잖아요.
 
김 : 지금은 제주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골프장이나 리조트가 그렇게 핑크빛 산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하는 타이밍이기도 해요. 개발주체만 배불린다는 걸 알게 된 거죠. 20년 동안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경관은 어떻게 변했는지 환경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의 주민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는 시도가 바로 만인보예요.
 
퍼 : 한 달에 한 번 하는 거죠?
 
김 : 네. 나머지 시간동안엔 계속 조사하고 인터뷰 다니면서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그걸 담은 자료집이나 개발지도 만들어 보려고요. 이쯤 되면 한 번쯤은 반성, 평가하면서 다른 방식의 개발이든 현재대로 계속 하든 제대로 점검해볼 타이밍이 되었죠.
 
퍼 : 교육문화카페 자람은요?
 
김 : 저희 활동가 중에 한 분이 시민단체들이 칙칙하고 재미없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제안했어요. 시민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완충 공간을 만들게 된 거죠. 사람이 모이고, 계속 와야 활동도 다른 게 생겨나고 확산되는 거니까요.
 
퍼 :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김 : 처음에 나는 이게 안 될 줄 알았어요. 매달 적자를 보며 운영도 어려운 구조인데 공간 만들고 인테리어 하려면 돈이 들잖아요. 얼마 이상의 돈을 마련하는 게 되게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에 안 될 줄 알았는데 초기의 씨앗자금을 한 10,000분 이상이 800만원 인가를 모아주셨어요.
 
퍼 : 와! 대단하네요.
 
김 : 그래서 공사 시작하고 공간이 완성이 되니깐 처음에 시큰둥해하던 사람들도 자기도 뭔가 해주고 싶다며 후원해주기도 하고요. 앞으로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프로그램 만들고 운영하게 되면 이 안에 되게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모이는 사람들이 각자 가져올 보따리들,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고, 만나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들이 여기에서 더 크게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다섯 개째 인생

퍼 : 다른 직업들 많이 가졌었다고 들었어요. 인생의 분기점 같은 걸 따져본다면 몇 번의 인생을 지나온 것 같으세요?
 
김 : 지나온 것은 한, 4번? 고등학교 때 범생이 시절, 미대 시절이랑, 언론고시 준비하던 2년의 백수 기간이랑 짧았지만 기자생활 하던 그 시간 그렇게 4번이요.  
 
퍼 :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된 계기는 어떤 거예요?
 

김 : 광고가 크리에이티브와 거리가 너무 멀더라고요. 성이나 아이나 동물들, 스포츠나 그런 것들 이용하는 광고 기법도 있지만 치밀하게 고민되어 집행되지 않더라고요. 또 빅모델만 선호하기도 하고요. 또 40대 50대 넘어가면 경력자로 더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폐기처분되는 구조도 분명히 보였어요. 일단 체력적으로 너무 힘드니깐 오래 할 수도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일을 생각해보게 되었죠.
 
퍼 : 어떤 일이요?
 
김 : <여명의 눈동자>처럼 대중성을 담보한 4.3 관련 드라마를 되게 만들어 보고픈 생각이 있었어요. 허영선 씨라고 민예총에 있는 분이 쓰신 4.3 책을 보다가 펑펑 운 적이 있어요. 정말 많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피디가 되어야겠다면서 시험 준비를 시작했죠.
 
퍼 : 결과는 어땠나요?
 
김 : 잘 안 됐죠. 그때 2년 동안 언론고시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시험보고 떨어진 기억이 내 인생 최초의 실패이자 좌절로 점철된 기간예요. 근데 또 한편으론 되게 즐겁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많이 기여했던 기간이기도 했고요. 시험을 봐야하니깐 책도 많이 읽고 상식공부도 하고 글도 쓰면서 그때,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사회를 보는 눈도 까막눈이었다가 좀 깨지게 된 것 같아요.
 
퍼 :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 : 2년 지나고 그동안의 시간 정리도 하고 계획도 세울 겸 남아공으로 여행 가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인사드린다고 제주도에 잠깐 들렀죠. 근데 엄마가 너무 아쉬워하시는 거예요. 딸이 나이는 차가고, 시험엔 계속 떨어지고,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고 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거 떨어지면 안 잡을 테니 제주도에 인터넷 신생 언론사 시험 한 번만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퍼 : 그렇게 기자 생활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제주도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요.
 
김 : 지금은 완전 다른 다섯 번째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근데 이게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인생으로 바뀔 것 같은 예감은 많이 안 들어요.
 
퍼 : 어떤 부분에서요?
 
김 : 시민운동 왜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건, 기자하던 거, 광고회사 다니던 거 그건 나한테 직업이었어요. 그러니까 어쩔 땐 무척 가기 싫고 힘들고 짜증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사회생활 해야 하니깐 나를 약간 양보하면서 끌려 다니던 직업이었죠.
 
퍼 : 그런데 시민단체 일은 그렇지 않은가요?
 
김 : 나는 이건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가는 방식이죠. 예를 들면, 예산은 혈세이기 때문에 투명하고 바르게 잘 쓰여야 한다는 게 원칙이잖아요. 근데 하나하나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영수증 하나하나 보면 제대로 쓰지 않고 있는 구멍이 보여요. 그런 거 찾아내면 일단 개인적으로 희열이 느껴지고, 분노도 생기면서 이거 바로 잡고 싶어지죠. 이 자체가 바로 시민활동이잖아요. 이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이에요.
 
퍼 :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게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네요.
 
김 : 월급 얘길 하거나, 뜯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거나, 화장 안 하고 칙칙하게 하고 다녀도, 내가 모자라거나 어느 부분이 부족해서 이러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 항상 가슴 속에 있어요. 되게 좋고 그래요.
 
퍼 : 시민활동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김 : 내가 부끄럽거나 누가 부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시민운동 하다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들어요. 돈이 필요한 곳이 많이 보이거든요. 시스템이 메우지 못하는 곳들도 많이 보이고 시민단체를 통해서 머리를 굴리면 할 것들,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되게 많아요. 그런데 다 돈이잖아요. 돈이 곧 기회가 되는 부분이 많으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많이 들죠.
 
퍼 : 역시 돈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죠.
 
김 : 근데 직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라 하면 그건 아니에요. 이 일을 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게 보이는 거지 돈을 따라 가다보면 또 이 일이 안보이지 않을까요? 후회나 그런 건 안 해봤어요.
 
 
 

다섯 개째 인생

퍼 : 다른 직업들 많이 가졌었다고 들었어요. 인생의 분기점 같은 걸 따져본다면 몇 번의 인생을 지나온 것 같으세요?
 
김 : 지나온 것은 한, 4번? 고등학교 때 범생이 시절, 미대 시절이랑, 언론고시 준비하던 2년의 백수 기간이랑 짧았지만 기자생활 하던 그 시간 그렇게 4번이요.  
 
퍼 :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된 계기는 어떤 거예요?
 

김 : 광고가 크리에이티브와 거리가 너무 멀더라고요. 성이나 아이나 동물들, 스포츠나 그런 것들 이용하는 광고 기법도 있지만 치밀하게 고민되어 집행되지 않더라고요. 또 빅모델만 선호하기도 하고요. 또 40대 50대 넘어가면 경력자로 더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폐기처분되는 구조도 분명히 보였어요. 일단 체력적으로 너무 힘드니깐 오래 할 수도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일을 생각해보게 되었죠.
 
퍼 : 어떤 일이요?
 
김 : <여명의 눈동자>처럼 대중성을 담보한 4.3 관련 드라마를 되게 만들어 보고픈 생각이 있었어요. 허영선 씨라고 민예총에 있는 분이 쓰신 4.3 책을 보다가 펑펑 운 적이 있어요. 정말 많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피디가 되어야겠다면서 시험 준비를 시작했죠.
 
퍼 : 결과는 어땠나요?
 
김 : 잘 안 됐죠. 그때 2년 동안 언론고시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시험보고 떨어진 기억이 내 인생 최초의 실패이자 좌절로 점철된 기간예요. 근데 또 한편으론 되게 즐겁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많이 기여했던 기간이기도 했고요. 시험을 봐야하니깐 책도 많이 읽고 상식공부도 하고 글도 쓰면서 그때,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사회를 보는 눈도 까막눈이었다가 좀 깨지게 된 것 같아요.
 
퍼 :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 : 2년 지나고 그동안의 시간 정리도 하고 계획도 세울 겸 남아공으로 여행 가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인사드린다고 제주도에 잠깐 들렀죠. 근데 엄마가 너무 아쉬워하시는 거예요. 딸이 나이는 차가고, 시험엔 계속 떨어지고,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고 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거 떨어지면 안 잡을 테니 제주도에 인터넷 신생 언론사 시험 한 번만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퍼 : 그렇게 기자 생활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제주도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요.
 
김 : 지금은 완전 다른 다섯 번째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근데 이게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인생으로 바뀔 것 같은 예감은 많이 안 들어요.
 
퍼 : 어떤 부분에서요?
 
김 : 시민운동 왜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건, 기자하던 거, 광고회사 다니던 거 그건 나한테 직업이었어요. 그러니까 어쩔 땐 무척 가기 싫고 힘들고 짜증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사회생활 해야 하니깐 나를 약간 양보하면서 끌려 다니던 직업이었죠.
 
퍼 : 그런데 시민단체 일은 그렇지 않은가요?
 
김 : 나는 이건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가는 방식이죠. 예를 들면, 예산은 혈세이기 때문에 투명하고 바르게 잘 쓰여야 한다는 게 원칙이잖아요. 근데 하나하나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영수증 하나하나 보면 제대로 쓰지 않고 있는 구멍이 보여요. 그런 거 찾아내면 일단 개인적으로 희열이 느껴지고, 분노도 생기면서 이거 바로 잡고 싶어지죠. 이 자체가 바로 시민활동이잖아요. 이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이에요.
 
퍼 :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게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네요.
 
김 : 월급 얘길 하거나, 뜯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거나, 화장 안 하고 칙칙하게 하고 다녀도, 내가 모자라거나 어느 부분이 부족해서 이러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 항상 가슴 속에 있어요. 되게 좋고 그래요.
 
퍼 : 시민활동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김 : 내가 부끄럽거나 누가 부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시민운동 하다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들어요. 돈이 필요한 곳이 많이 보이거든요. 시스템이 메우지 못하는 곳들도 많이 보이고 시민단체를 통해서 머리를 굴리면 할 것들,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되게 많아요. 그런데 다 돈이잖아요. 돈이 곧 기회가 되는 부분이 많으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많이 들죠.
 
퍼 : 역시 돈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죠.
 
김 : 근데 직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라 하면 그건 아니에요. 이 일을 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게 보이는 거지 돈을 따라 가다보면 또 이 일이 안보이지 않을까요? 후회나 그런 건 안 해봤어요.
 
 
 

고향 제주도와 사회 제주도

 

퍼 : 제주도에서 사는 지금, 좋으세요?
 
김 : 나는 정말 좋아요. 좋고, 행복하고, 지금 다시 서울 가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거 같고.(웃음)
 
퍼 : 제주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셨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나요?
 
김 : 원래 하고 싶어 했던 것을 실패하고 제주에 잠시 내려왔을 때는 그냥 ‘고향에 왔다’였지 ‘제주에 왔다’ 혹은 ‘여기 돌아온 게 어떤 의미가 있다’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나는 제주를 잘 모르지만, 시민운동하면서 제주라는 공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퍼 : 고향으로만 생각했던 제주도에 돌아와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조금 다르게 보이셨을 거 같아요. 어땠어요?
 
김 : 다르게 보게 된 아주 확실한 계기는 해군기지 문제였죠. 해군기지 때문에 맨 처음으로 세상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시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죠. 특히 기자하면서 제주에 왜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하나, 들어오면 안 되나, 그 논리를 듣다보니 저도 제주도라는 이 공간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죠.
 
퍼 : 내 추억과 가족이 있는 공간에서 해군기지를 계기로 객관적으로 접근하게 된 건가요?
 
김 : 앉아서 학술적으로 공부하기보다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하는 그런 과정을 통하며 제주를 공부해나갔어요. 공부하다보니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한다는 그 논리를 들으면 반박하고 싶고 들어오지 말아야할 이유를 더 찾고 있더라고요. 내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퍼 : 그렇군요.
 
김 :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해군기지 문제로 제주사회가 되게 떠들썩하던 때였어요. 2007년도 4월. 그땐 후보지가 지금의 강정이 아니라 위미였죠. 당시 국방부장관이 제주도 온다니깐 반대하는 위미 주민들하고 신부님, 수녀님들이 도청 앞에 모이셨어요. 쇠파이프나 화염병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항의 표시를 하기 위해 연좌농성을 했는데 경찰은 그 분들 다 잡아가버렸죠.
 
* 연행되는 해군기지 반대 주민들 (2007.04. / 뉴시스)
 
퍼 : 취재하셨어요?
 
김 : 카메라 들고 경찰서로 달려갔죠. 경찰서 바닥에 위미 해녀들이 바닥에 누워서 막 우는 거예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물질 밖에 없고 그거 하면서 먹고 살겠다는데 그게 이렇게 죄냐, 100% 알아들을 수는 없는 제주사투리로 얘기하면서.
 
퍼 : 맞는 말이죠. 평생 물질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그 바다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김 : 해녀 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경찰서 안이 아비규환이었는데 너무 눈물이 나고 화도 났어요. 근데 기자니깐, 아주 냉정하게 기계적이든 뭐든 객관을 유지하며 그 상황에 대해 경찰 얘기도 들어보고 해녀 분들 얘기도 들어봐야 하는 게 내 앞에 놓인 역할이었죠.
 
퍼 : 마음이 복잡했겠어요.
 
김 : 그때 이미 가지고 있던 이 직업에 대한 회의에 불이 확 붙었죠. 맘속으로는 이미 그 시민 단체 사람들이나 해녀 아줌마처럼 항의하고 싶고, 같이 따지고 싶고 소리치고 말하고 싶었어요. 마음이 확실히 굳어지더라고요. 기자라는 신분, 이건 나한텐 안 맞는다,
 
퍼 : 음.
 
김 : 게다가 그 당시 군사기지 범대위(정식 명칭 ‘제주군사기지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 대책 위원회’)측에서 도청 앞에 자리를 깔고 100배를 했어요. 최근까지 집행위원장하시던 고유기 위원장께 인터뷰할 게 있어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근데 그분이 절을 할 때마다 문장 하나씩을 외치시는 거예요.
 
퍼 :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 : “나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생명임을 마음에 새기며 서른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나의 의식주 생활이 뭇 생명체를 파괴하는 것을 참회하며 몇 번째 절을 올립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마음이 마구마구 울렸죠.
 
퍼 : 왜요?
 
김 : 취재하면서 봐왔던, 강하게 항의하고 투사처럼 보이던 ‘그 사람들의 언어’가 결코 아니었어요. 바람 부는 도청 앞에서 절하는 거 바라보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게 그렇게 마음을 울리더라고요. 그래서 그 고유기 위원장하고 그날 인터뷰를 하다가 마음이 잘 맞아서 소주를 한 잔 하게 되었고,
 
퍼 : 소주 또 좋아하시잖아요.
 
김 : 네. (웃음)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마음이 아예 굳어졌어요. 시민단체 일을 해야겠다. 근데 아빠가 엄청나게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본인하곤 다르게 자식이 후대에는 더 나은 삶을 살 거라고 기대하면서 희생을 감수하셨는데 얘가 직장을 옮길 때마다 점점 연봉이 떨어지고 누가 봐도 고된 길로 가겠다고 하니까 아빠가 크게 반대를 하셨어요. 심지어 호적을 파라고 할 정도셨어요. 그러면 나는 또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퍼 : 아버님 심정도 이해는 가네요.
 
김 : 그 정도로 극하게 한 3개월 이상, 6개월 가까이 대립했었죠.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인생 최초로 3박4일 가출을 했어요. 전화기 끄고, 차 몰고 성산일출봉 근처에 있는 여관에 가서(웃음)
 
퍼 : (웃음) 으하하하 잠수 타셨네요?(웃음)
 
김 : 지금 생각하면 완전 유치뽕짝인데(웃음) 거기서 3박 4일을 내내 잠만 자다 집에 갔어요. 아빠는 아직 마음이 안 열려 있었고, 엄마가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일단 아빠 모르게 다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일단 제주참여환경연대에 다니기 시작했죠.
 
퍼 : (웃음) 아버님과는 어떻게 풀었나요?
 
김 : 그러고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인가 두 달 지나서야 아빠가 “너 혹시 거기 그만두고 여기 다니냐?” 하시면서 의외로 화는 안내고 그냥 확인 차 물어보시더라고요.

고향 제주도와 사회 제주도

 

퍼 : 제주도에서 사는 지금, 좋으세요?
 
김 : 나는 정말 좋아요. 좋고, 행복하고, 지금 다시 서울 가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거 같고.(웃음)
 
퍼 : 제주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셨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나요?
 
김 : 원래 하고 싶어 했던 것을 실패하고 제주에 잠시 내려왔을 때는 그냥 ‘고향에 왔다’였지 ‘제주에 왔다’ 혹은 ‘여기 돌아온 게 어떤 의미가 있다’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나는 제주를 잘 모르지만, 시민운동하면서 제주라는 공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퍼 : 고향으로만 생각했던 제주도에 돌아와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조금 다르게 보이셨을 거 같아요. 어땠어요?
 
김 : 다르게 보게 된 아주 확실한 계기는 해군기지 문제였죠. 해군기지 때문에 맨 처음으로 세상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시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죠. 특히 기자하면서 제주에 왜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하나, 들어오면 안 되나, 그 논리를 듣다보니 저도 제주도라는 이 공간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죠.
 
퍼 : 내 추억과 가족이 있는 공간에서 해군기지를 계기로 객관적으로 접근하게 된 건가요?
 
김 : 앉아서 학술적으로 공부하기보다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하는 그런 과정을 통하며 제주를 공부해나갔어요. 공부하다보니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와야 한다는 그 논리를 들으면 반박하고 싶고 들어오지 말아야할 이유를 더 찾고 있더라고요. 내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퍼 : 그렇군요.
 
김 :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해군기지 문제로 제주사회가 되게 떠들썩하던 때였어요. 2007년도 4월. 그땐 후보지가 지금의 강정이 아니라 위미였죠. 당시 국방부장관이 제주도 온다니깐 반대하는 위미 주민들하고 신부님, 수녀님들이 도청 앞에 모이셨어요. 쇠파이프나 화염병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항의 표시를 하기 위해 연좌농성을 했는데 경찰은 그 분들 다 잡아가버렸죠.
 
* 연행되는 해군기지 반대 주민들 (2007.04. / 뉴시스)
 
퍼 : 취재하셨어요?
 
김 : 카메라 들고 경찰서로 달려갔죠. 경찰서 바닥에 위미 해녀들이 바닥에 누워서 막 우는 거예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물질 밖에 없고 그거 하면서 먹고 살겠다는데 그게 이렇게 죄냐, 100% 알아들을 수는 없는 제주사투리로 얘기하면서.
 
퍼 : 맞는 말이죠. 평생 물질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그 바다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김 : 해녀 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경찰서 안이 아비규환이었는데 너무 눈물이 나고 화도 났어요. 근데 기자니깐, 아주 냉정하게 기계적이든 뭐든 객관을 유지하며 그 상황에 대해 경찰 얘기도 들어보고 해녀 분들 얘기도 들어봐야 하는 게 내 앞에 놓인 역할이었죠.
 
퍼 : 마음이 복잡했겠어요.
 
김 : 그때 이미 가지고 있던 이 직업에 대한 회의에 불이 확 붙었죠. 맘속으로는 이미 그 시민 단체 사람들이나 해녀 아줌마처럼 항의하고 싶고, 같이 따지고 싶고 소리치고 말하고 싶었어요. 마음이 확실히 굳어지더라고요. 기자라는 신분, 이건 나한텐 안 맞는다,
 
퍼 : 음.
 
김 : 게다가 그 당시 군사기지 범대위(정식 명칭 ‘제주군사기지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 대책 위원회’)측에서 도청 앞에 자리를 깔고 100배를 했어요. 최근까지 집행위원장하시던 고유기 위원장께 인터뷰할 게 있어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근데 그분이 절을 할 때마다 문장 하나씩을 외치시는 거예요.
 
퍼 :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 : “나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생명임을 마음에 새기며 서른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나의 의식주 생활이 뭇 생명체를 파괴하는 것을 참회하며 몇 번째 절을 올립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마음이 마구마구 울렸죠.
 
퍼 : 왜요?
 
김 : 취재하면서 봐왔던, 강하게 항의하고 투사처럼 보이던 ‘그 사람들의 언어’가 결코 아니었어요. 바람 부는 도청 앞에서 절하는 거 바라보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게 그렇게 마음을 울리더라고요. 그래서 그 고유기 위원장하고 그날 인터뷰를 하다가 마음이 잘 맞아서 소주를 한 잔 하게 되었고,
 
퍼 : 소주 또 좋아하시잖아요.
 
김 : 네. (웃음)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마음이 아예 굳어졌어요. 시민단체 일을 해야겠다. 근데 아빠가 엄청나게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본인하곤 다르게 자식이 후대에는 더 나은 삶을 살 거라고 기대하면서 희생을 감수하셨는데 얘가 직장을 옮길 때마다 점점 연봉이 떨어지고 누가 봐도 고된 길로 가겠다고 하니까 아빠가 크게 반대를 하셨어요. 심지어 호적을 파라고 할 정도셨어요. 그러면 나는 또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퍼 : 아버님 심정도 이해는 가네요.
 
김 : 그 정도로 극하게 한 3개월 이상, 6개월 가까이 대립했었죠.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인생 최초로 3박4일 가출을 했어요. 전화기 끄고, 차 몰고 성산일출봉 근처에 있는 여관에 가서(웃음)
 
퍼 : (웃음) 으하하하 잠수 타셨네요?(웃음)
 
김 : 지금 생각하면 완전 유치뽕짝인데(웃음) 거기서 3박 4일을 내내 잠만 자다 집에 갔어요. 아빠는 아직 마음이 안 열려 있었고, 엄마가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일단 아빠 모르게 다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일단 제주참여환경연대에 다니기 시작했죠.
 
퍼 : (웃음) 아버님과는 어떻게 풀었나요?
 
김 : 그러고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인가 두 달 지나서야 아빠가 “너 혹시 거기 그만두고 여기 다니냐?” 하시면서 의외로 화는 안내고 그냥 확인 차 물어보시더라고요.

제주도는 실험실이 아닙니다

 

퍼 : 일하시는 시민단체가 ‘제주참여환경연대’죠. 여기가 91년도부터 시작되었죠? 어떤 계기로 생긴 단체인가요?
 
김 : 탑동 가보셨죠? 거기가 다 매립된 곳이에요. 그때 저 매립을 가능하게 했던 근거가 1991년에 재정됐던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죠. 물론 그 이전에도 제주라는 지역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여기를 자꾸 개발하려고 하고 뭔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고 해요.
 
퍼 : 제주도라는 지역이 아무래도 좀 특수하죠.
 
김 : 제주도가 본토에서 딱 한 단위로, 독립이 된 것처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잖아요. 인구라든가 도세라든가 전국의 딱 1%에요. 1%라서 비주류 중에 비주류고 변방이고 그렇게 사람들은 인식을 하고 있지만 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를 특별하게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에 저 탑동 매립하고 한라산 중산간을 둘러싼 골프장이라든가 각종 개발 사업이 자꾸 일어나고 있죠.
 
퍼 :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란 법 이후에 개발이 몰리면서 제주도가 가진 환경이 파괴되고 있고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제주환경참여연대군요.
 
김 : 네. 지금 제주도에서 이루어지는 개발은 제주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서 자기네 자본을 끌어 모아 아이디어를 담고 이렇게 개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림을 스스로 그려서 이루어지는 개발이 아니에요. 원주민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욕망을 여기에 투영하고 싶은 거대한 자본들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도 같지만 그 사람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죠.
 
퍼 : 각종 자본이 몰리면서 사람이나 제주라는 공간은 뒷전이 되고 있군요.
 
김 : 개발이라는 한 가지 표현으로 묶기엔 너무 좁고 나는 욕망의 전쟁터라고 생각해요. 영리병원, 최근의 해군기지, 각종 골프장, 리조트, 카지노, 경빙장까지요. 물론 다른 지방들에도 문제가 많겠지만 일단 제주도는 심리적으로 딱 한 덩어리로 있고 자연환경도 괜찮고 해서 그런 것들 때문에 더 호재가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퍼 : 제주도라는 게 육지의 축소판이랄까, 말씀처럼 딱 한 덩어리의 섬이라서 실험실처럼 여기는 것 같기도 해요. 제주도를 챙겨주는 척 하면서, 제주도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좀 더 합리화시키려고 한다고 할까요?
 
김 : 구체적으로 영리병원하고 영리학교는 정부가 전국화를 염두에 두고 아주 열의를 두고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는 사업이에요. 사교육 시장이 있기에 좀 어불성설이지만 교육민영화나 의료민영화 같은 민영화 시도가 전국적으로 바로 시행되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충격을 줄이고 완충하기 위해서 시범적으로 제주도에 해보는 거죠. 심지어 신제품 담배 하나가 나와도 제주도에서 먼저 시범 판매를 해보고 육지에 팔아요.
 
퍼 : 헉. 그 정도인가요?
 
김 : 영리병원 대책위에서 우리가 되게 즐겨 쓰는 표현이 있는데 제주도 주민은 실험실 쥐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정책실험의 장으로 삼지 말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이상한 전국화의 예비 단계, 완충 단계로서 여기를 활용하는 그런 사고에 분노를 느끼죠. 전자주민 카드도 그렇고요. 전국의 1%니깐 평소에는 비주류 취급하고 무시하다가 요상한 거 할 때는 제주도를 제일 1순위에 두더라고요.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인데.
 
퍼 : 활동하시면서 답답한 점 많으시죠?
 
김 : 내가 만약에 도지사면 우리 지역에 대충 실험해보려고 하는 거 같으면 막고 “여러분 이건 반대해야합니다.”라고 할 것 같은데 실제 도지사는 “이렇게 하면 의료선진화가 되고 제주의 의료 기반이 좋아집니다, 암 치료하러 육지 안 가도 됩니다.” 중앙정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서 확대재생산하죠. 중앙정부의 하수인 노릇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가 되라고 뽑아놓은 도지사들이 그런 식으로 하고 있어요.
 
퍼 : 왜 그런 걸까요?
 
김 : 중앙의 일방적인 정책들, 개발 사업들, 정책의 변환들이 의제로 던져지고 제주 사회에 논란을 빚었을 때 지역의 권력자들이 그걸 나서서 적극 수호하지 않는 건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죠. 지역 토호로서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요.
 
퍼 : 그렇군요.
 
김 : 영리병원이든 영리학교든 중앙의 의제가 여기로 온 거지만 이게 제주에 관철이 되었을 때 지역 내에도 이익을 보는 집단들이 굉장히 많고 그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유지가 되기 위해선 중앙정부의 대변자 노릇을 해야 하는 여러 가지 맞물린 관계라고 봐요.
 

제주도는 실험실이 아닙니다

 

퍼 : 일하시는 시민단체가 ‘제주참여환경연대’죠. 여기가 91년도부터 시작되었죠? 어떤 계기로 생긴 단체인가요?
 
김 : 탑동 가보셨죠? 거기가 다 매립된 곳이에요. 그때 저 매립을 가능하게 했던 근거가 1991년에 재정됐던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죠. 물론 그 이전에도 제주라는 지역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여기를 자꾸 개발하려고 하고 뭔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고 해요.
 
퍼 : 제주도라는 지역이 아무래도 좀 특수하죠.
 
김 : 제주도가 본토에서 딱 한 단위로, 독립이 된 것처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잖아요. 인구라든가 도세라든가 전국의 딱 1%에요. 1%라서 비주류 중에 비주류고 변방이고 그렇게 사람들은 인식을 하고 있지만 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를 특별하게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에 저 탑동 매립하고 한라산 중산간을 둘러싼 골프장이라든가 각종 개발 사업이 자꾸 일어나고 있죠.
 
퍼 : 제주도 개발 특별법이란 법 이후에 개발이 몰리면서 제주도가 가진 환경이 파괴되고 있고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제주환경참여연대군요.
 
김 : 네. 지금 제주도에서 이루어지는 개발은 제주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서 자기네 자본을 끌어 모아 아이디어를 담고 이렇게 개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림을 스스로 그려서 이루어지는 개발이 아니에요. 원주민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욕망을 여기에 투영하고 싶은 거대한 자본들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도 같지만 그 사람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죠.
 
퍼 : 각종 자본이 몰리면서 사람이나 제주라는 공간은 뒷전이 되고 있군요.
 
김 : 개발이라는 한 가지 표현으로 묶기엔 너무 좁고 나는 욕망의 전쟁터라고 생각해요. 영리병원, 최근의 해군기지, 각종 골프장, 리조트, 카지노, 경빙장까지요. 물론 다른 지방들에도 문제가 많겠지만 일단 제주도는 심리적으로 딱 한 덩어리로 있고 자연환경도 괜찮고 해서 그런 것들 때문에 더 호재가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퍼 : 제주도라는 게 육지의 축소판이랄까, 말씀처럼 딱 한 덩어리의 섬이라서 실험실처럼 여기는 것 같기도 해요. 제주도를 챙겨주는 척 하면서, 제주도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좀 더 합리화시키려고 한다고 할까요?
 
김 : 구체적으로 영리병원하고 영리학교는 정부가 전국화를 염두에 두고 아주 열의를 두고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는 사업이에요. 사교육 시장이 있기에 좀 어불성설이지만 교육민영화나 의료민영화 같은 민영화 시도가 전국적으로 바로 시행되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충격을 줄이고 완충하기 위해서 시범적으로 제주도에 해보는 거죠. 심지어 신제품 담배 하나가 나와도 제주도에서 먼저 시범 판매를 해보고 육지에 팔아요.
 
퍼 : 헉. 그 정도인가요?
 
김 : 영리병원 대책위에서 우리가 되게 즐겨 쓰는 표현이 있는데 제주도 주민은 실험실 쥐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정책실험의 장으로 삼지 말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이상한 전국화의 예비 단계, 완충 단계로서 여기를 활용하는 그런 사고에 분노를 느끼죠. 전자주민 카드도 그렇고요. 전국의 1%니깐 평소에는 비주류 취급하고 무시하다가 요상한 거 할 때는 제주도를 제일 1순위에 두더라고요.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인데.
 
퍼 : 활동하시면서 답답한 점 많으시죠?
 
김 : 내가 만약에 도지사면 우리 지역에 대충 실험해보려고 하는 거 같으면 막고 “여러분 이건 반대해야합니다.”라고 할 것 같은데 실제 도지사는 “이렇게 하면 의료선진화가 되고 제주의 의료 기반이 좋아집니다, 암 치료하러 육지 안 가도 됩니다.” 중앙정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서 확대재생산하죠. 중앙정부의 하수인 노릇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가 되라고 뽑아놓은 도지사들이 그런 식으로 하고 있어요.
 
퍼 : 왜 그런 걸까요?
 
김 : 중앙의 일방적인 정책들, 개발 사업들, 정책의 변환들이 의제로 던져지고 제주 사회에 논란을 빚었을 때 지역의 권력자들이 그걸 나서서 적극 수호하지 않는 건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죠. 지역 토호로서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요.
 
퍼 : 그렇군요.
 
김 : 영리병원이든 영리학교든 중앙의 의제가 여기로 온 거지만 이게 제주에 관철이 되었을 때 지역 내에도 이익을 보는 집단들이 굉장히 많고 그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유지가 되기 위해선 중앙정부의 대변자 노릇을 해야 하는 여러 가지 맞물린 관계라고 봐요.
 

55만 제주도민의 1%

 

퍼 : 시민단체 일 하다보면 일반 시민들에게 서운할 때 없으세요? 시민들이 귀를 열고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면 도지사든 누구든 이해관계보다 사람이 더 우선이 될 텐데요.
 
김 : 제주도 사람들이 저항에 대한 역사도 있고 반골 기질도 있고 그래서 시민단체를 그렇게 배제하거나 무시하거나 한 적이 많지 않다고 하거든요. 지역에서도 그 전까진 시민 사회를 의식해서 의원회나 논의기구에 시민단체 자리가 반드시 있었고 도의회에도 우리가 의견서를 제출하면 반영이 되거나 반영까진 아니어도 배제하는 구조는 아니었는데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이 바뀌었죠.
 
퍼 : 답답하네요.
 
김 : 답답하긴 한데 이게 답답해서 힘들고 절망할 정도면 그러면 처음부터 주류의 길을 갔겠죠. 아니면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을 했거나. 근데 그건 아니니깐 그냥 이게 숙명이려니.
 
퍼 : (웃음) 시민단체 후원은 많나요?
 
김 : 농민회나 경실련처럼 20여년 된 단체 등 제주도에도 시민단체가 많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 기반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어요. 그중 우리 단체가 최대 단체이죠. 그런데도 회원 수가 1000여 명밖에 안 돼요. 제주도 인구가 55만인데 1%도 되지 않죠. 전국 수치와 비교하면 시민운동 기반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퍼 : 하지만 비율이 아니라 제주인구 대비 사람 수로 보면 숫자가 작으니까 일 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김 : 물론 조바심을 느끼고 때론 암담함을 느끼기도 해요. 아무래도 제가 하는 활동이 그들이 주도하는 의제에 끌려 다니는 식이 많죠. 그래서 벅차기도 하지만 전 시민운동 혼자 성장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저희가 의제를 주도한다 해도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과 시민사회 의식의 전반적인 변화와 문화운동이랑 제일 중요한 정치랑 몇 가지 박자가 딱 맞물려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퍼 : 너무 지난한 과정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김 : 어릴 땐 그렇잖아요. 세상을 바꾸겠다, 사회를 변화시키겠다고요. 그런데 그건 오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맡은 분야에서 현실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해요. 그래서 지금 내 향후 10년 안의 목표는 참여환경연대 회원을 5000명으로, 제주도민의 1% 가까이로 만드는 거예요. 제주도에서 1%의 도민이 시민단체에 직접 후원하는, 적극적인 기반을 만드는 거죠.
 
퍼 : 1%의 적극적인 시민이 지역 곳곳에서 씨앗이 될 수 있고요.
 
김 :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것을 해볼 만해요. 정치 변화도 그렇고. 왜 세상은 1%가 바꾼다고 하잖아요. 브레인 1%가 아니라, 1%의 여론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제 현실적인 목표는 회원 5000명 만드는 거예요.
 
퍼 : 멋진 목표예요!
 
김 : 그러면 활동으로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냥 “우리는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 같아도 안 해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서 예산 낭비 몇 십억 이렇게 가던 것 막았습니다”, “이런 리조트 특혜 의혹 이렇게 밝혀냈습니다.” 이런 거 보여주면 분명히 100명 중의 한 사람의 마음은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이런 것도 필요하지’라며 생각해주는 사람.
 
퍼 : 100명 중에 한 명은 있을 거예요!
 

김 : 그러면 실무 노가다 열심히 하면서도 즐거워요. 시민 단체 안에는 뒤에서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열심히 하는 활동가도 시민 분들이 진짜 많아요.
 
퍼 : 제주도 오셔서 새로 만나신 분 많죠?
 
김 : 시민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 사람들을 통해서 생활인으로서 생계를 유지해가면서도 운동이나 대안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돈을 쪼개어 활동하는, 좋은 사람들, 숨어있는 사람들 진짜 많이 알게 되었죠.
 
퍼 : 제주도에서 시민활동 하는 것은 어떤가요? 서울 같은 대도시랑 무엇이 달라요?
 
김 : 서울의 큰 단체에 가면 활동가도 많고 분야도 나누어져 전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 같아요. 부럽죠.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 밖에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어요. 일반 회사처럼요.
 
퍼 : 그런 면이 있겠군요.
 
김 : 근데 제주에서는 단체에 활동가가 적으니깐 한 사람이 맡는 일이 훨씬 많아요. 자기 일부터 회원관리, 조직관리, 대외협력까지. 시민단체의 직원이 아니라 활동가로서의 능력치만 본다면 작은 곳, 지역에서 운동하는 게 나한테 더 맞는 거 같아요.
 
퍼 : 그렇군요.
 
김 : 서울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중앙권력을 상대하는 거대담론을 얘기하게 되어요. 천암함이나 통신비 같은. 우리는 자잘하게 널려있는 지방 토호와 지방 권력과 지역 특유의 관례, 부조리와 싸우죠. 지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파고든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퍼 : 더 자세하면 말씀해 주신다면요?
 
김 : 지역 주민들이 이 근처에 어묵공장을 짓는데 냄새도 날 거고 불편해질 텐데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든가 이 해안에 우리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 건물을 짓는데 여기가 절대보전지역이라든가 하는 민원들이 많이 들어와요. 자잘해 보이지만 가서 이야기를 듣고 진행되는 과정들을 보면 제주도 또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축소판이에요.
 
퍼 : 그렇군요.
 
김 : 그렇게 구체적인 일을 하다보면 생겨나는 게 하나 있어요. ‘관계’. 그 지역 주민들과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내가 맡았던 이 일이 연결되지 않았던 다른 일들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어 주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엔 작은 일들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되게 넓고 깊고 입체적이 된다고 할까요.
 
퍼 : 관계를 맺고 서로 연결고리가 되면서 작은 문제들이 하나하나 엮어지며 큰 담론이 되고 여론을 만들고, 그런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김아현 씨는 열심히 활동한다. 그녀는 즐겁게 구체적인 꿈을 꾼다. 선명한 목표 하에 열심히 즐겁게 활동하는 것은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김 아현 씨는 말한다. 광고인이나 기자는 직업이었으며 그때의 야근이나 회식은 사회생활이었다고. 하지만 지금,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예산을 감시하고 비리를 찾아내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으로 ‘활동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라고.
 
김아현 씨는 그렇게 ‘평화의 섬’ 제주도에서, 제주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55만 제주도민의 1%

 

퍼 : 시민단체 일 하다보면 일반 시민들에게 서운할 때 없으세요? 시민들이 귀를 열고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면 도지사든 누구든 이해관계보다 사람이 더 우선이 될 텐데요.
 
김 : 제주도 사람들이 저항에 대한 역사도 있고 반골 기질도 있고 그래서 시민단체를 그렇게 배제하거나 무시하거나 한 적이 많지 않다고 하거든요. 지역에서도 그 전까진 시민 사회를 의식해서 의원회나 논의기구에 시민단체 자리가 반드시 있었고 도의회에도 우리가 의견서를 제출하면 반영이 되거나 반영까진 아니어도 배제하는 구조는 아니었는데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이 바뀌었죠.
 
퍼 : 답답하네요.
 
김 : 답답하긴 한데 이게 답답해서 힘들고 절망할 정도면 그러면 처음부터 주류의 길을 갔겠죠. 아니면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을 했거나. 근데 그건 아니니깐 그냥 이게 숙명이려니.
 
퍼 : (웃음) 시민단체 후원은 많나요?
 
김 : 농민회나 경실련처럼 20여년 된 단체 등 제주도에도 시민단체가 많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 기반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어요. 그중 우리 단체가 최대 단체이죠. 그런데도 회원 수가 1000여 명밖에 안 돼요. 제주도 인구가 55만인데 1%도 되지 않죠. 전국 수치와 비교하면 시민운동 기반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퍼 : 하지만 비율이 아니라 제주인구 대비 사람 수로 보면 숫자가 작으니까 일 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김 : 물론 조바심을 느끼고 때론 암담함을 느끼기도 해요. 아무래도 제가 하는 활동이 그들이 주도하는 의제에 끌려 다니는 식이 많죠. 그래서 벅차기도 하지만 전 시민운동 혼자 성장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저희가 의제를 주도한다 해도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과 시민사회 의식의 전반적인 변화와 문화운동이랑 제일 중요한 정치랑 몇 가지 박자가 딱 맞물려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퍼 : 너무 지난한 과정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김 : 어릴 땐 그렇잖아요. 세상을 바꾸겠다, 사회를 변화시키겠다고요. 그런데 그건 오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맡은 분야에서 현실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해요. 그래서 지금 내 향후 10년 안의 목표는 참여환경연대 회원을 5000명으로, 제주도민의 1% 가까이로 만드는 거예요. 제주도에서 1%의 도민이 시민단체에 직접 후원하는, 적극적인 기반을 만드는 거죠.
 
퍼 : 1%의 적극적인 시민이 지역 곳곳에서 씨앗이 될 수 있고요.
 
김 :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것을 해볼 만해요. 정치 변화도 그렇고. 왜 세상은 1%가 바꾼다고 하잖아요. 브레인 1%가 아니라, 1%의 여론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제 현실적인 목표는 회원 5000명 만드는 거예요.
 
퍼 : 멋진 목표예요!
 
김 : 그러면 활동으로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냥 “우리는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 같아도 안 해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서 예산 낭비 몇 십억 이렇게 가던 것 막았습니다”, “이런 리조트 특혜 의혹 이렇게 밝혀냈습니다.” 이런 거 보여주면 분명히 100명 중의 한 사람의 마음은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이런 것도 필요하지’라며 생각해주는 사람.
 
퍼 : 100명 중에 한 명은 있을 거예요!
 

김 : 그러면 실무 노가다 열심히 하면서도 즐거워요. 시민 단체 안에는 뒤에서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열심히 하는 활동가도 시민 분들이 진짜 많아요.
 
퍼 : 제주도 오셔서 새로 만나신 분 많죠?
 
김 : 시민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 사람들을 통해서 생활인으로서 생계를 유지해가면서도 운동이나 대안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돈을 쪼개어 활동하는, 좋은 사람들, 숨어있는 사람들 진짜 많이 알게 되었죠.
 
퍼 : 제주도에서 시민활동 하는 것은 어떤가요? 서울 같은 대도시랑 무엇이 달라요?
 
김 : 서울의 큰 단체에 가면 활동가도 많고 분야도 나누어져 전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 같아요. 부럽죠.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 밖에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어요. 일반 회사처럼요.
 
퍼 : 그런 면이 있겠군요.
 
김 : 근데 제주에서는 단체에 활동가가 적으니깐 한 사람이 맡는 일이 훨씬 많아요. 자기 일부터 회원관리, 조직관리, 대외협력까지. 시민단체의 직원이 아니라 활동가로서의 능력치만 본다면 작은 곳, 지역에서 운동하는 게 나한테 더 맞는 거 같아요.
 
퍼 : 그렇군요.
 
김 : 서울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중앙권력을 상대하는 거대담론을 얘기하게 되어요. 천암함이나 통신비 같은. 우리는 자잘하게 널려있는 지방 토호와 지방 권력과 지역 특유의 관례, 부조리와 싸우죠. 지역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파고든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퍼 : 더 자세하면 말씀해 주신다면요?
 
김 : 지역 주민들이 이 근처에 어묵공장을 짓는데 냄새도 날 거고 불편해질 텐데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든가 이 해안에 우리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 건물을 짓는데 여기가 절대보전지역이라든가 하는 민원들이 많이 들어와요. 자잘해 보이지만 가서 이야기를 듣고 진행되는 과정들을 보면 제주도 또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축소판이에요.
 
퍼 : 그렇군요.
 
김 : 그렇게 구체적인 일을 하다보면 생겨나는 게 하나 있어요. ‘관계’. 그 지역 주민들과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내가 맡았던 이 일이 연결되지 않았던 다른 일들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어 주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엔 작은 일들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되게 넓고 깊고 입체적이 된다고 할까요.
 
퍼 : 관계를 맺고 서로 연결고리가 되면서 작은 문제들이 하나하나 엮어지며 큰 담론이 되고 여론을 만들고, 그런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김아현 씨는 열심히 활동한다. 그녀는 즐겁게 구체적인 꿈을 꾼다. 선명한 목표 하에 열심히 즐겁게 활동하는 것은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김 아현 씨는 말한다. 광고인이나 기자는 직업이었으며 그때의 야근이나 회식은 사회생활이었다고. 하지만 지금,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예산을 감시하고 비리를 찾아내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으로 ‘활동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라고.
 
김아현 씨는 그렇게 ‘평화의 섬’ 제주도에서, 제주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