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미디어아트센터 BAYCAT대표 – 빌리 왕

빌리 왕은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이민 2세이다. 은행가, 변호사, 공교육 초등학교 선생님, 축제 기획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 단체이자 미디어 스튜디오인 <baycat>을 창업 후 운영하며 빈곤 청소년들에게 미디어 아트 교육을 통해 삶의 동기 부여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2년 전 여름, 휴가를 받아 요코하마 고토부기초의 호스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던 오카베가 같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초대했다.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중국계 미국인 친구가 호스텔 프론트에 있었다. 빌리였다. 마침 내가 요코하마를 찾았던 때 빌리는 오카베가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의 실상이 궁금하다며 놀러왔던 참이었다. 

*’마을을 설계하는 건축가’ – 오카베 도모히코 _ 퍼슨웹 인터뷰 

그때 나는 빌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그녀는 중국계 2세로 교육열 높은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얼마 전까지 변호사를 했다고 했다. 5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삶에 곤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미디어 아트 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영화와 노래를 만들며, 교육 후에는 일자리도 소개해서 고용까지 연결하는 <베이켓>(bayc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빌리도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나는 청소년 시절 학교 공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베이켓>과 같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에서 놀았었다고, 지금은 청년이 되어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과 함께 심각한 한국의 청년 실업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내 자신을 소개했다.

다른 언어, 다른 지역, 다른 삶의 경험치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과 ‘고용’이라는 중복되는 핵심어 덕분에, 이런 문제를 안고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로 충분히 공감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빌리의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계 이민 2세 여성으로 겪었던 여러 경험이 계기가 되어 만든 <베이켓>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빌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아이폰의 스타워즈 칼싸움 게임 어플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노는 사람이었다. 또한 내일 후지산에 올라간다는 친구에게, “나 내일 비행기 타고 홍콩 가는데 가는 길에 후지산 보면 손 흔들게, 정상에 도착하면 손 흔들어줘”하며 엉뚱한 제안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정체가 점점 궁금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반나절의 만남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헤어졌다. 귀국 후 조금이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나는 그녀가 하고 있는 일, 그녀가 해왔던 일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운영하는 <베이켓>(www.baycat.org)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취약 계층 청소년들에게 디지털 미디어 예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영화 제작, TV 프로그램 제작, 애니메이션, 그래픽 및 웹 디자인 등의 기술, 교육, 인성교육, 고용까지 이어주는 비영리 단체이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는 미션으로 “Empowering Individuals. Transforming Communities”를 실천하고 있다.

2005년 설립 이래, 1500여명의 청소년이 미디어 교육을 받았고, 이 가운데 90%가 빈곤 지역의 청소년이다. 지역에 있는 청소년 미디어 센터겠거니 했지만, 하는 활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빈곤 청소년의 동기 부여를 위한 미디어 교육 – 고용 기회 제공 – 지역사회 변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진행하고 있었다. 은행가, 변호사, 비영리단체 간사, 초등학교 교사 등을 거친 후 <베이켓>을 설립한 그녀의 이력도 흥미롭다.

_브라운대학에서 공학 기술 전공, 
_이후 월 스트리트에서 은행가로 5년간 근무.
_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 수료후, 
_Morrison & Foerster LLP 법률사무소 샌프란시스코 지점에서 변호사로 3년 반 근무.
_SF Jazz Festival 비즈니스 매니저로 5년간 근무, 현재는 운영 이사.
_SFUSD 초등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
_샌프란시스코 통합 교육과정(SFUSD) 커리큘럼 개발자
_현 BAYCAT, Studio BAYCAT 의 대표, 최고경영자

마침 그녀가 문화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으로 ‘2011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 천 개의 시선, 천 개의 삶’ 행사에서 오프닝 스피치 발표자로 초대되었다. 덕분에 극적으로 2011년 5월, 2년만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머무는 5일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퍼슨웹(이하 ‘퍼’) : 빌리, 그냥 <베이켓>을 하기까지, 빌리의 인생 이야기를 좀 들을까 해서요.

빌리(이하 ‘빌) : 내 삶이 아니라, 그저 내 나이가 궁금한 거 아니예요? 나 60살이에요.(웃음)

 

역시나 그녀답게 재치있게 받아친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나이도 궁금했다. 어느 프로필에도 그녀의 나이가 나와있지는 않았다. 60살? 설마… 인터뷰 끝에는 진짜 나이도 밝혀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년 전 여름, 휴가를 받아 요코하마 고토부기초의 호스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던 오카베가 같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초대했다.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중국계 미국인 친구가 호스텔 프론트에 있었다. 빌리였다. 마침 내가 요코하마를 찾았던 때 빌리는 오카베가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의 실상이 궁금하다며 놀러왔던 참이었다. 

*’마을을 설계하는 건축가’ – 오카베 도모히코 _ 퍼슨웹 인터뷰 

그때 나는 빌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그녀는 중국계 2세로 교육열 높은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얼마 전까지 변호사를 했다고 했다. 5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삶에 곤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미디어 아트 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영화와 노래를 만들며, 교육 후에는 일자리도 소개해서 고용까지 연결하는 <베이켓>(bayc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빌리도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나는 청소년 시절 학교 공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다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베이켓>과 같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에서 놀았었다고, 지금은 청년이 되어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과 함께 심각한 한국의 청년 실업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내 자신을 소개했다.

다른 언어, 다른 지역, 다른 삶의 경험치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과 ‘고용’이라는 중복되는 핵심어 덕분에, 이런 문제를 안고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로 충분히 공감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빌리의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계 이민 2세 여성으로 겪었던 여러 경험이 계기가 되어 만든 <베이켓>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빌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아이폰의 스타워즈 칼싸움 게임 어플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노는 사람이었다. 또한 내일 후지산에 올라간다는 친구에게, “나 내일 비행기 타고 홍콩 가는데 가는 길에 후지산 보면 손 흔들게, 정상에 도착하면 손 흔들어줘”하며 엉뚱한 제안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정체가 점점 궁금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반나절의 만남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헤어졌다. 귀국 후 조금이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나는 그녀가 하고 있는 일, 그녀가 해왔던 일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운영하는 <베이켓>(www.baycat.org)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취약 계층 청소년들에게 디지털 미디어 예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영화 제작, TV 프로그램 제작, 애니메이션, 그래픽 및 웹 디자인 등의 기술, 교육, 인성교육, 고용까지 이어주는 비영리 단체이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는 미션으로 “Empowering Individuals. Transforming Communities”를 실천하고 있다.

2005년 설립 이래, 1500여명의 청소년이 미디어 교육을 받았고, 이 가운데 90%가 빈곤 지역의 청소년이다. 지역에 있는 청소년 미디어 센터겠거니 했지만, 하는 활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빈곤 청소년의 동기 부여를 위한 미디어 교육 – 고용 기회 제공 – 지역사회 변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진행하고 있었다. 은행가, 변호사, 비영리단체 간사, 초등학교 교사 등을 거친 후 <베이켓>을 설립한 그녀의 이력도 흥미롭다.

_브라운대학에서 공학 기술 전공, 
_이후 월 스트리트에서 은행가로 5년간 근무.
_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 수료후, 
_Morrison & Foerster LLP 법률사무소 샌프란시스코 지점에서 변호사로 3년 반 근무.
_SF Jazz Festival 비즈니스 매니저로 5년간 근무, 현재는 운영 이사.
_SFUSD 초등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
_샌프란시스코 통합 교육과정(SFUSD) 커리큘럼 개발자
_현 BAYCAT, Studio BAYCAT 의 대표, 최고경영자

마침 그녀가 문화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으로 ‘2011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 천 개의 시선, 천 개의 삶’ 행사에서 오프닝 스피치 발표자로 초대되었다. 덕분에 극적으로 2011년 5월, 2년만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머무는 5일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퍼슨웹(이하 ‘퍼’) : 빌리, 그냥 <베이켓>을 하기까지, 빌리의 인생 이야기를 좀 들을까 해서요.

빌리(이하 ‘빌) : 내 삶이 아니라, 그저 내 나이가 궁금한 거 아니예요? 나 60살이에요.(웃음)

 

역시나 그녀답게 재치있게 받아친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나이도 궁금했다. 어느 프로필에도 그녀의 나이가 나와있지는 않았다. 60살? 설마… 인터뷰 끝에는 진짜 나이도 밝혀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1. <베이켓>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5월 23일 ~ 27일 서울 체제 기간중 진행했던 발표, 간담회 등을 통해서 빌리는 베이켓에서 하고 있는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베이켓>의 활동을 홈페이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직접적인 소개를 통해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담긴 철학, 비전, 지역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그녀의 삶의 경험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으로 녹여낸 결과인지도 알 수 있었다. 빌리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베이켓> 활동에 대한 발표 내용을 요약적으로 소개한다. 

 

베이켓에 대해서 십 년간 생각을 하고 나서야 만들었구요. 물론 고민은 10살 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스무 살입니다. 파트너십을 맺은 이야기를 할텐데 열매를 맺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베이켓의 아이디어는 세 키워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에듀케이트educate, 임파워먼트empowerment, 임플로이먼트empolyment. 영화제작, 음반제작, 애니메이션, 그래픽, 웹 디자인 등의 미디어 아트를 통해 이 세 키워드를 실현합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작품은 제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역공동체 목소리, 영혼, 이야기입니다. 베이켓에서 편집이나 음향 등의 기술적인 부분은 도와줄 수 있지만 근본은 청소년, 청년 자신,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 이야기와 아이디어입니다.

닉은 라틴계 미국인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베이켓에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베이켓은 청소년들에게 ‘정신 나간’ 제안을 하나 했는데, 바로 직접 TV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그걸 본 ABC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소년들이 만든 작품이라 너무 신선하고 좋다고, ABC에서도 상영하자는 제안이었죠. 그러면서 동시에 얼마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방송 시간을 판다는 의미였지요. 반대로 그럼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대신 저에게 얼마냐 줄거냐고 물었죠.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에 왜 청소년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지부터 생각해보았습니다. 상업적인 방송을 위해 이 작업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상기했습니다. 청소년과 이 지역을 위해 지금 이 일을 한다는 것이 베이켓의 심장 중심에 있는, 절대 변하지 않는 목적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이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오클랜드 지역에 굉장히 큰 어린이병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베이켓 청소년들이 만든 방송 프로그램을 모두 사기로 했습니다. 이 병원은 20만 명의 어린이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난치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이 어린이들이 베이켓의 방송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무엇이 과연 성공인가?’를 어떻게 정의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베이켓에서 만든 작품의 관객도 정해질 겁니다. 그렇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청소년들이 직접 광고를 만들면 좋겠다 하는 곳에서 찾아옵니다. 자연스럽게 베이켓의 고객이 되는 거죠. 샌프란시스코 시가 우리를 고용한 사업도 있습니다. 지역의 여러 광고판에 싣는 마약, 폭력 방지 캠페인이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탁월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습니다. 

베이켓에 일을 맡긴 의뢰인에게도 명확하게 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과 작업을 할 건데, 그 청소년들을 어떤 상황에서도 불편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만일 의뢰인이 청소년들과 일을 하는 걸 꺼려한다면, 함께 작업하지 않도록 세팅하거나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의뢰를 받은 영상 혹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 때, 청소년들은 카메라 뒤에서 세트 디자인, 배우 섭외 등 모든 역할을 함께 나누어 담당합니다. 아이디어 컨셉을 정하는 것부터 청소년들과 함께 합니다.

청소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 과정 안에서 청소년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작업하는 청소년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규정하는 것보다 조금 높은 기대치를 제안합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입니다.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 기대치를 달성 못한다는 것도 압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실력과 높은 기대치 사이의 간극은 재미와 즐거움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굉장히 어렵지만 항상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계 안에 자신이 살아 가고 있는 지역 세계를 담습니다. 지역에 대해 재발견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업을 할 때에는 예산은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은 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주어진 시간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크레인을 사용해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크레인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예산은 이것밖에 쓸 수 없는데, 이 안에서는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합니다. 이 순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역 공동체가 참여하는 것이죠. 크레인을 만들만한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아버지에게 장비를 빌리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고, 그래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크레인은 지금도 베이켓 청소년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지역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단편영화 두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THE GOTAS DE AGUA
이 영화의 제목은 <세 방울의 눈물>입니다. 세 게이 청년이 자신의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는 내용입니다. <SOMOS FAMILIA>라는 동성애 이슈를 다루는 굉장히 작은 단체와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베이켓이 이 작품을 만들고 벌었던 돈은 제작비의 10%밖에 안됐습니다. 비즈니스로 치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일은 다음에 벌어집니다. 관객들이 자기앞 수표를 써서 기부를 했습니다. 100% 자원활동가로 운영되던 단체는 여기저기서 모인 기부금으로 직원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용이 된 스텝이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이 다시 모이고, 메시지들도 점점 더 퍼지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는 겁니다.

There is a place
베이켓에 오는 청소년들은 위탁 가정에서 자라는 친구들도 있습니다(미국은 고아원이 따로 없고 위탁 가정에서 고아를 돌보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내용도 어린 소녀가 위탁 가정에서 자라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는 데 엄마가 찾아옵니다. 엄마는 마약 중독자이고, ‘이번에는 다시는 안 할거다’라고 딸에게 이야기하지만, 다시 잡혀가고 다시 찾아오고 하는 내용입니다. 시나리오 초고를 직접 만들고, 지역의 위탁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과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을 모시고 초고 리뷰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자를 섭외했고 예산과 기간을 정하고, 가장 작은 문제부터 청소년들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작업했습니다. 이 영화 한편으로 지역의 위탁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와의 대화의 어려움을 위탁 가정에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끔 하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그리고 세계어린이재단에서 교육용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첫째,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끝에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 봐야하는 거고, 이를 통해서 청소년들도 지속가능하게 뭔가를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1. <베이켓>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5월 23일 ~ 27일 서울 체제 기간중 진행했던 발표, 간담회 등을 통해서 빌리는 베이켓에서 하고 있는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베이켓>의 활동을 홈페이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직접적인 소개를 통해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담긴 철학, 비전, 지역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그녀의 삶의 경험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으로 녹여낸 결과인지도 알 수 있었다. 빌리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베이켓> 활동에 대한 발표 내용을 요약적으로 소개한다. 

 

베이켓에 대해서 십 년간 생각을 하고 나서야 만들었구요. 물론 고민은 10살 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스무 살입니다. 파트너십을 맺은 이야기를 할텐데 열매를 맺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베이켓의 아이디어는 세 키워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에듀케이트educate, 임파워먼트empowerment, 임플로이먼트empolyment. 영화제작, 음반제작, 애니메이션, 그래픽, 웹 디자인 등의 미디어 아트를 통해 이 세 키워드를 실현합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작품은 제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역공동체 목소리, 영혼, 이야기입니다. 베이켓에서 편집이나 음향 등의 기술적인 부분은 도와줄 수 있지만 근본은 청소년, 청년 자신,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 이야기와 아이디어입니다.

닉은 라틴계 미국인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베이켓에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베이켓은 청소년들에게 ‘정신 나간’ 제안을 하나 했는데, 바로 직접 TV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그걸 본 ABC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소년들이 만든 작품이라 너무 신선하고 좋다고, ABC에서도 상영하자는 제안이었죠. 그러면서 동시에 얼마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방송 시간을 판다는 의미였지요. 반대로 그럼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대신 저에게 얼마냐 줄거냐고 물었죠.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에 왜 청소년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지부터 생각해보았습니다. 상업적인 방송을 위해 이 작업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상기했습니다. 청소년과 이 지역을 위해 지금 이 일을 한다는 것이 베이켓의 심장 중심에 있는, 절대 변하지 않는 목적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이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오클랜드 지역에 굉장히 큰 어린이병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베이켓 청소년들이 만든 방송 프로그램을 모두 사기로 했습니다. 이 병원은 20만 명의 어린이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난치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이 어린이들이 베이켓의 방송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무엇이 과연 성공인가?’를 어떻게 정의내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베이켓에서 만든 작품의 관객도 정해질 겁니다. 그렇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청소년들이 직접 광고를 만들면 좋겠다 하는 곳에서 찾아옵니다. 자연스럽게 베이켓의 고객이 되는 거죠. 샌프란시스코 시가 우리를 고용한 사업도 있습니다. 지역의 여러 광고판에 싣는 마약, 폭력 방지 캠페인이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탁월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습니다. 

베이켓에 일을 맡긴 의뢰인에게도 명확하게 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과 작업을 할 건데, 그 청소년들을 어떤 상황에서도 불편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만일 의뢰인이 청소년들과 일을 하는 걸 꺼려한다면, 함께 작업하지 않도록 세팅하거나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의뢰를 받은 영상 혹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 때, 청소년들은 카메라 뒤에서 세트 디자인, 배우 섭외 등 모든 역할을 함께 나누어 담당합니다. 아이디어 컨셉을 정하는 것부터 청소년들과 함께 합니다.

청소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 과정 안에서 청소년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작업하는 청소년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규정하는 것보다 조금 높은 기대치를 제안합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입니다.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 기대치를 달성 못한다는 것도 압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실력과 높은 기대치 사이의 간극은 재미와 즐거움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굉장히 어렵지만 항상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계 안에 자신이 살아 가고 있는 지역 세계를 담습니다. 지역에 대해 재발견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업을 할 때에는 예산은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은 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주어진 시간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크레인을 사용해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크레인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예산은 이것밖에 쓸 수 없는데, 이 안에서는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합니다. 이 순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역 공동체가 참여하는 것이죠. 크레인을 만들만한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아버지에게 장비를 빌리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고, 그래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크레인은 지금도 베이켓 청소년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지역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단편영화 두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THE GOTAS DE AGUA
이 영화의 제목은 <세 방울의 눈물>입니다. 세 게이 청년이 자신의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는 내용입니다. <SOMOS FAMILIA>라는 동성애 이슈를 다루는 굉장히 작은 단체와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베이켓이 이 작품을 만들고 벌었던 돈은 제작비의 10%밖에 안됐습니다. 비즈니스로 치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일은 다음에 벌어집니다. 관객들이 자기앞 수표를 써서 기부를 했습니다. 100% 자원활동가로 운영되던 단체는 여기저기서 모인 기부금으로 직원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용이 된 스텝이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이 다시 모이고, 메시지들도 점점 더 퍼지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는 겁니다.

There is a place
베이켓에 오는 청소년들은 위탁 가정에서 자라는 친구들도 있습니다(미국은 고아원이 따로 없고 위탁 가정에서 고아를 돌보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내용도 어린 소녀가 위탁 가정에서 자라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는 데 엄마가 찾아옵니다. 엄마는 마약 중독자이고, ‘이번에는 다시는 안 할거다’라고 딸에게 이야기하지만, 다시 잡혀가고 다시 찾아오고 하는 내용입니다. 시나리오 초고를 직접 만들고, 지역의 위탁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과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을 모시고 초고 리뷰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자를 섭외했고 예산과 기간을 정하고, 가장 작은 문제부터 청소년들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작업했습니다. 이 영화 한편으로 지역의 위탁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와의 대화의 어려움을 위탁 가정에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끔 하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그리고 세계어린이재단에서 교육용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첫째,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끝에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 봐야하는 거고, 이를 통해서 청소년들도 지속가능하게 뭔가를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2. 빌리 왕의 가족사 (1)

 

퍼 : 오프닝 스피치에서 가족 이야기로 시작을 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사를 그렇게 드러내는 것은 꺼려지지 않을까 했는데, 개인사로 발표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빌리는 5월 23일, ‘2011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 천 개의 시선, 천 개의 삶’(문화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 행사에서 <베이켓>의 활동을 소개하는 오프닝 스피치를 자신의 가족사로 시작했다.

 

<브래디 번치(The Brady Bunch)>라는 미국 시트콤을 아시나요?
어머니의 봉제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이 시트콤을 봤습니다.

‘텔레비전’이라고 불리는 이 마법 상자, 지금의 인터넷쯤 되겠죠. 이 마법 상자는 저에게 완벽한 가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세 딸이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죠. 이 시트콤은 굉장히 다이내믹한 가족을 보여줍니다. 그 가족이 매일 어떻게 사는지, 딸들과 아들들 사이의 갈등들. 그리고 항상 저는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들의 그 갈등은 시트콤이 끝날 30분 후 무렵에 다 해결되는지. 이건 그저 텔레비전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이게 아이들이 보는 인식의 전부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들도 브래디 번치와 같이 더 많은 형제와 자매가 있길 바랐습니다. 엄마는 전업주부이면 좋겠고, 일이 끝나고 허겁지겁 들어와 요리를 해주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엄마에게 키스를 해주며 퇴근 도장을 찍길 바랐고요. 이게 행복한 가족들과 연인들이 바라는 것이지 않을까요? 우리 가족은 과연 평범했던 걸까요?

이건 왕 번치(The Wang Bunch), 저희 가족입니다. 저는 아빠 아브라함의 무릎 위에 앉아있고, 이분은 저희 엄마 마가렛, 그 옆에는 오빠 안토니가 있습니다. 모두 꽤 괜찮은 ‘미국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이름이 어떻게 빌리가 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중국에서 이주했습니다. 저의 오빠는 대만에서 태어났고, 6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함께 왔습니다. 엄마가 패션을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할 수 있죠? 잘 맞춰 입은 이 옷들 보이시죠? 엄마는 저에게 작은 발을 하나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해야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귀여운 아이는 그렇게 서야만 했죠. 그녀는 어릴 때부터 첫 인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이 행복해 보이는 순간이 담긴 사진을 보고, 여러분은 저의 첫 집이 판자집이었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오빠는 마약 딜러였고,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제가 영양실조 상태에서 한 달 일찍 나와 거의 죽을뻔한 일들은 전혀 모를 겁니다.

그러나 전 전혀 가난을 체감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항상 저와 오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셨으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가난하다, 너무 중국인 같다, 혹은 중국어를 못한다고 말하기 전까지, 전 제 자신이 괜찮다고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전혀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좀 더 커서 알게 되었죠. 우리는 브래디 가족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도 저와 우리 가족은 항상 모든 것이 평범한 것처럼 생활했지요. 이 ‘가족 드라마’는 그저 자기 안에 담아 놔야 할 비밀입니다.

– 빌리 왕의 오프닝 발표 내용 중

 

빌 : 베이켓에서도 강조하는 게 개인의 스토리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사업을 소개할 수도 있지만, 왜 그런 사업을 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사를 이야기했지요.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를 제가 잘 몰라서, 사회적인 이야기보다 공통적으로 통할 수 있는 개인사를 넣은 것도 있지요.

퍼 : 부모님은 언제 중국에서 이주하셨나요?

빌 : 일본군이 주둔하던 시기에 중국 베이징 근처에 살고 계셨어요. 1940년대 즈음에 중국 공산당이 지배를 하게 되어 부모님은 타이완으로 이주를 하셨죠. 그리고 1960년 정도에 미국 뉴욕으로 왔죠.

퍼 : 이주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나요?

빌 : 당시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장사를 하셔서 비교적 잘 살았다고 했어요. 일본에게도 환대받는 집안이었고요. 어머니는 주변에서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어요. 그러면서 관계가 없으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했어요.

퍼 : 어머니와 아버지도 중국에서 만난 거죠?

빌 : 아버지는 고아였고 중국에서 어머니를 만나서 같이 타이완으로 갔어요. 할아버지가 어머니와 삼촌과 이모와 함께 타이완으로 갔어요. 그 당시만해도 중국에 있는 가족들과 다시 못 만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지요.

그녀의 어머니는 올해 85세라 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1915년에 태어난 셈이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되었고, 일본은 1937년 노구교 사변을 계기로 중국을 침략하였다. 1945년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후 1949년 10월에는 중국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국가가, 12월에는 타이완에 국민정부가 설립되었다.

퍼 : 그럼 부모님은 타이완에서 뭘 하셨나요?

빌 : 부모님은 미션스쿨을 다닌 독실한 신자셨지요. 어머니는 당시 중국 여자들은 전족을 해야하는데, 그런 건 안 하겠다며 거부했던 용감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가 따로 돈을 벌지 못하자, 어머니는 타이완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2. 빌리 왕의 가족사 (1)

 

퍼 : 오프닝 스피치에서 가족 이야기로 시작을 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사를 그렇게 드러내는 것은 꺼려지지 않을까 했는데, 개인사로 발표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빌리는 5월 23일, ‘2011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 천 개의 시선, 천 개의 삶’(문화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 행사에서 <베이켓>의 활동을 소개하는 오프닝 스피치를 자신의 가족사로 시작했다.

 

<브래디 번치(The Brady Bunch)>라는 미국 시트콤을 아시나요?
어머니의 봉제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이 시트콤을 봤습니다.

‘텔레비전’이라고 불리는 이 마법 상자, 지금의 인터넷쯤 되겠죠. 이 마법 상자는 저에게 완벽한 가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세 딸이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죠. 이 시트콤은 굉장히 다이내믹한 가족을 보여줍니다. 그 가족이 매일 어떻게 사는지, 딸들과 아들들 사이의 갈등들. 그리고 항상 저는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들의 그 갈등은 시트콤이 끝날 30분 후 무렵에 다 해결되는지. 이건 그저 텔레비전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이게 아이들이 보는 인식의 전부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들도 브래디 번치와 같이 더 많은 형제와 자매가 있길 바랐습니다. 엄마는 전업주부이면 좋겠고, 일이 끝나고 허겁지겁 들어와 요리를 해주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엄마에게 키스를 해주며 퇴근 도장을 찍길 바랐고요. 이게 행복한 가족들과 연인들이 바라는 것이지 않을까요? 우리 가족은 과연 평범했던 걸까요?

이건 왕 번치(The Wang Bunch), 저희 가족입니다. 저는 아빠 아브라함의 무릎 위에 앉아있고, 이분은 저희 엄마 마가렛, 그 옆에는 오빠 안토니가 있습니다. 모두 꽤 괜찮은 ‘미국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이름이 어떻게 빌리가 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중국에서 이주했습니다. 저의 오빠는 대만에서 태어났고, 6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함께 왔습니다. 엄마가 패션을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할 수 있죠? 잘 맞춰 입은 이 옷들 보이시죠? 엄마는 저에게 작은 발을 하나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해야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귀여운 아이는 그렇게 서야만 했죠. 그녀는 어릴 때부터 첫 인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이 행복해 보이는 순간이 담긴 사진을 보고, 여러분은 저의 첫 집이 판자집이었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오빠는 마약 딜러였고,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제가 영양실조 상태에서 한 달 일찍 나와 거의 죽을뻔한 일들은 전혀 모를 겁니다.

그러나 전 전혀 가난을 체감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항상 저와 오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셨으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가난하다, 너무 중국인 같다, 혹은 중국어를 못한다고 말하기 전까지, 전 제 자신이 괜찮다고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전혀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좀 더 커서 알게 되었죠. 우리는 브래디 가족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도 저와 우리 가족은 항상 모든 것이 평범한 것처럼 생활했지요. 이 ‘가족 드라마’는 그저 자기 안에 담아 놔야 할 비밀입니다.

– 빌리 왕의 오프닝 발표 내용 중

 

빌 : 베이켓에서도 강조하는 게 개인의 스토리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사업을 소개할 수도 있지만, 왜 그런 사업을 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사를 이야기했지요.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를 제가 잘 몰라서, 사회적인 이야기보다 공통적으로 통할 수 있는 개인사를 넣은 것도 있지요.

퍼 : 부모님은 언제 중국에서 이주하셨나요?

빌 : 일본군이 주둔하던 시기에 중국 베이징 근처에 살고 계셨어요. 1940년대 즈음에 중국 공산당이 지배를 하게 되어 부모님은 타이완으로 이주를 하셨죠. 그리고 1960년 정도에 미국 뉴욕으로 왔죠.

퍼 : 이주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나요?

빌 : 당시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장사를 하셔서 비교적 잘 살았다고 했어요. 일본에게도 환대받는 집안이었고요. 어머니는 주변에서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어요. 그러면서 관계가 없으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했어요.

퍼 : 어머니와 아버지도 중국에서 만난 거죠?

빌 : 아버지는 고아였고 중국에서 어머니를 만나서 같이 타이완으로 갔어요. 할아버지가 어머니와 삼촌과 이모와 함께 타이완으로 갔어요. 그 당시만해도 중국에 있는 가족들과 다시 못 만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지요.

그녀의 어머니는 올해 85세라 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1915년에 태어난 셈이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되었고, 일본은 1937년 노구교 사변을 계기로 중국을 침략하였다. 1945년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후 1949년 10월에는 중국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국가가, 12월에는 타이완에 국민정부가 설립되었다.

퍼 : 그럼 부모님은 타이완에서 뭘 하셨나요?

빌 : 부모님은 미션스쿨을 다닌 독실한 신자셨지요. 어머니는 당시 중국 여자들은 전족을 해야하는데, 그런 건 안 하겠다며 거부했던 용감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가 따로 돈을 벌지 못하자, 어머니는 타이완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3. 빌리 왕의 가족사 (2)

 

퍼 : 빌리의 부모님은 왜 미국으로 가신 거죠?

빌 : 아버지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퍼 : 그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떠난 게 1960년대인가요?

빌 : 이것 역시 진실인 줄 모르겠지만, 원래 엄마가 먼저 목회를 할 수 있는 부름을 받았는데, 아빠가 반대해서 못 가게 되었어요. 근데 이후 아버지가 부름을 받았고, 그때 함께 따라간 거지요. 오마이갓. 저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다니…!

퍼 : 하하. 그러세요? 아까 아버지를 믿지 못하신다고도 했는데,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빌 : 왜 믿지 못하는지, 아마 직접 만나보시면 바로 알텐데. (웃음) 이거 참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네요. 간단하게 대답할게요.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이 있었던 걸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보다 20살이나 많았고요. 꿈을 꾸고 나서 꿈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실제 꿈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잖아요. 말이 꿈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제게 말한 이야기들의 근저에는 사실이 있겠지만 이야기 하나하나는 꿈과 같은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아요.

퍼 : 아.

빌 : 얼마나 이상한 분이셨나면, 자신이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분이셨으니까요. (웃음) 아버지에 대해서 수만 가지 안 좋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좀 더 이야기하자면, 아버지는 훌륭한 서예가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예술가로 살고 싶은 아버지가 실패를 경험했기에 그렇게 산 게 아닐까 싶어요. 서예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그걸로 돈을 벌 수 없고, 아버진 ‘테러블 비즈니스맨’이었어요.

퍼 : 오빠는 마약을 거래했다고 했는데?

빌 : 오빠는 대만에서 태어났고, 오빠가 6살 때 미국으로 왔어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집, 그렇게 바뀐 새로운 환경이 가난하고 힘들다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나이였죠. 저도 어릴 때 엄마가 굉장히 일을 많이 하는 걸 알았어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셨죠. 가정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퍼 : 아, 돈을 벌기 위해 마약 거래를 한 거군요.

빌 : 저는 그때 뉴욕에서 두 번째로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사실 오빠가 저보다 더 똑똑해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 들어갔지요. 저는 못 가고요. (웃음) 저랑 오빠랑 그 당시 처해있던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과 연결될 뭔가 다리를 찾는 건 같았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보셨나요?

퍼 : 네, 봤죠.

빌 : 그 영화보면 스칼렛이 너무 가난해서 커튼으로 멋진 드레스를 만들고 땅에서 당근을 캐먹는데, 그걸 먹고 아프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스칼렛은 “난 다시는 배고프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해요. 그 장면은 오빠가 삶에 대해 반응했던 것과 일치해요. 너무 가난해서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 어떤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은 거고, 그게 마약거래였던 거죠.

퍼 : 그랬군요. 빌리는 그 가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나요?

빌 : 저도 가난한 가정환경에 대한 반응은 오빠와 다를 바 없어요. ‘배고프고 싶지 않다, 가난하고 싶지 않다’  반응은 했지만 그 당시에는 행동까지 옮기지는 않았지요.

퍼 : 그러셨군요. 아이폰에 어머니 사진도 있고, 빌리 왕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더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신뢰나 영감의 측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차이가 느껴졌어요.

빌 : 물론 어머니가 영감을 많이 줬지요. 같이 살았고, 싱글맘처럼 돌봐줬고요. 아빠가 있었지만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지요. 어릴 땐 아버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지요. 

퍼 :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빌 : 어머니가 훌륭했던 점은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이해하고 어디서 불빛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던 점인 것 같아요.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서 그 가난한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셨어요. 처음엔 봉제공장에서도 일을 하셨고요. 굉장히 능력이 뛰어나셨어요.

퍼 : 지금 베이켓을 운영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도 있겠네요.

빌 : 맞아요. 제가 베이켓을 만든 이유는 사람들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동양철학에 의하면 다른 관점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생겨나는 거지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빛나는 불빛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개인의 가능성을 찾고 실현해보는 거죠. 자신의 가능성을 직접 발견하지 못하면 타인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게 되니까요. 현실에서의 가능성도 찾기 힘들고 가능성 찾아 믿고 따라가는 경험도 못하는 거니까요.

3. 빌리 왕의 가족사 (2)

 

퍼 : 빌리의 부모님은 왜 미국으로 가신 거죠?

빌 : 아버지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퍼 : 그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떠난 게 1960년대인가요?

빌 : 이것 역시 진실인 줄 모르겠지만, 원래 엄마가 먼저 목회를 할 수 있는 부름을 받았는데, 아빠가 반대해서 못 가게 되었어요. 근데 이후 아버지가 부름을 받았고, 그때 함께 따라간 거지요. 오마이갓. 저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다니…!

퍼 : 하하. 그러세요? 아까 아버지를 믿지 못하신다고도 했는데,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빌 : 왜 믿지 못하는지, 아마 직접 만나보시면 바로 알텐데. (웃음) 이거 참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네요. 간단하게 대답할게요.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이 있었던 걸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보다 20살이나 많았고요. 꿈을 꾸고 나서 꿈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실제 꿈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잖아요. 말이 꿈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제게 말한 이야기들의 근저에는 사실이 있겠지만 이야기 하나하나는 꿈과 같은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아요.

퍼 : 아.

빌 : 얼마나 이상한 분이셨나면, 자신이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분이셨으니까요. (웃음) 아버지에 대해서 수만 가지 안 좋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좀 더 이야기하자면, 아버지는 훌륭한 서예가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예술가로 살고 싶은 아버지가 실패를 경험했기에 그렇게 산 게 아닐까 싶어요. 서예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그걸로 돈을 벌 수 없고, 아버진 ‘테러블 비즈니스맨’이었어요.

퍼 : 오빠는 마약을 거래했다고 했는데?

빌 : 오빠는 대만에서 태어났고, 오빠가 6살 때 미국으로 왔어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집, 그렇게 바뀐 새로운 환경이 가난하고 힘들다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나이였죠. 저도 어릴 때 엄마가 굉장히 일을 많이 하는 걸 알았어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셨죠. 가정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퍼 : 아, 돈을 벌기 위해 마약 거래를 한 거군요.

빌 : 저는 그때 뉴욕에서 두 번째로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사실 오빠가 저보다 더 똑똑해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 들어갔지요. 저는 못 가고요. (웃음) 저랑 오빠랑 그 당시 처해있던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과 연결될 뭔가 다리를 찾는 건 같았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보셨나요?

퍼 : 네, 봤죠.

빌 : 그 영화보면 스칼렛이 너무 가난해서 커튼으로 멋진 드레스를 만들고 땅에서 당근을 캐먹는데, 그걸 먹고 아프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스칼렛은 “난 다시는 배고프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해요. 그 장면은 오빠가 삶에 대해 반응했던 것과 일치해요. 너무 가난해서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 어떤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은 거고, 그게 마약거래였던 거죠.

퍼 : 그랬군요. 빌리는 그 가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나요?

빌 : 저도 가난한 가정환경에 대한 반응은 오빠와 다를 바 없어요. ‘배고프고 싶지 않다, 가난하고 싶지 않다’  반응은 했지만 그 당시에는 행동까지 옮기지는 않았지요.

퍼 : 그러셨군요. 아이폰에 어머니 사진도 있고, 빌리 왕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더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신뢰나 영감의 측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차이가 느껴졌어요.

빌 : 물론 어머니가 영감을 많이 줬지요. 같이 살았고, 싱글맘처럼 돌봐줬고요. 아빠가 있었지만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지요. 어릴 땐 아버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지요. 

퍼 :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빌 : 어머니가 훌륭했던 점은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이해하고 어디서 불빛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던 점인 것 같아요.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서 그 가난한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셨어요. 처음엔 봉제공장에서도 일을 하셨고요. 굉장히 능력이 뛰어나셨어요.

퍼 : 지금 베이켓을 운영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도 있겠네요.

빌 : 맞아요. 제가 베이켓을 만든 이유는 사람들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동양철학에 의하면 다른 관점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생겨나는 거지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빛나는 불빛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개인의 가능성을 찾고 실현해보는 거죠. 자신의 가능성을 직접 발견하지 못하면 타인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게 되니까요. 현실에서의 가능성도 찾기 힘들고 가능성 찾아 믿고 따라가는 경험도 못하는 거니까요.

4. 하이힐 위의 삶

 

빌리의 공식 일정을 챙기던 어느 날, 공식 일정이 끝나 식사 자리로 옮길 때, 하루종일 하이힐을 신고 바삐 움직였던 빌리 왕에게 편한 신발로 갈아 신겠느냐고 물었다. 청소년들과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고, 일정 중에 틈만 나면 리듬을 타며 자유롭게 다녔던 빌리인지라, 편한 복장을 선호할 거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퍼 : 하이힐 불편할텐데, 식사하러 가기 전에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갈래요?

빌 : 괜찮아요. 저는 그동안 힐 위에서 살아서 익숙해요.

아차, 베이켓을 시작하기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장과 하이힐의 형식을 갖춰야 하는 세계에서 살았던 걸 깜박했다.

 

퍼 : 대학 생활을 듣고 싶군요.

빌 : 고등학교 졸업한 후 브라운 대학에 입학했어요. 가족 중에 아이비리그 대학에 간 건 처음이었죠. 그 전까지는 항상 엄마와 다녔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일 등 모두 혼자해야 했어요. 그건 저에게 굉장히 큰 경험이었죠. 전 그때 16살이었어요. 어렸죠. 그 경험이 제 삶을 굉장히 많이 바꿔놓았어요.

퍼 :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나요?

빌 : 졸업 후에는 월 스트리트의 은행에서 5년간 일했어요. 그게 제가 다시 로스쿨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퍼 : 은행에서 일하다 왜 갑자기 그만두고 법을 공부했어요?

빌 : 저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주는 도전들을 좋아했어요. 은행에서 일할 때 변호사들과 매우 밀접하게 일했는데, 옆에서 볼 때에 그들은 이미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은행원보다 돈도 더 많이 버는 것 같았고요. 그래서 진로를 바꿨죠.

퍼 : 하하, 같이 일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거군요.

빌 : 네, 그래서 바로 로스쿨 들어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요. 그 이후 어느 로펌에서 일할지 찾아봤는데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 지사를 둔 로펌을 발견했지요. 그때 샌프란시스코 지사를 택해서 거기서 일하게 됐어요.

퍼 : 샌프란시스코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빌 : 은행에서 일을 할 때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여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후 다시 변호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죠.  3년 반 정도 변호사로 일했어요.

퍼 : 변호사는 왜 그만뒀어요?

빌 : 그 당시에 일을 하면서도 제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비영리 단체에서 자원활동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베이켓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베이켓을 위한 생각이나 여러 비영리 단체의 자원활동을 하면서 변호사를 지속하기는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변호사를 그만두었죠.

퍼 : 변호사와 은행가로 일한 경험은 빌리의 삶에서는 어떤 경험이었나요? 뭘 발견했나요?

빌 : 거의 10년동안 미국 경제계 (Corporate America)에 속해 있으면서 매우 중요한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당시 저에게 ‘성공’은 전문가로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어요.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게 저에게는 사치였었는데 회사생활을 하면서, 교육 받은 부모 밑에서, 미국의 부유층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런 교육이 호사나 사치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알게 되었죠.

퍼 : 아.

빌 : 제 배경이 그들의 배경과 얼마나 다르고 큰 차이나 나는지, 그들과 경쟁하며 제가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퍼 : 잘 극복했나요?

빌 : 그렇죠. 극복하고 나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하게 자랐어도 기업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이 자아 실현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선 그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죠.

퍼 : 그랬군요.

빌 :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라는 것이었어요. 특별히 미국경제계 안에서 “제대로 된” 저의 첫 직장이었던 금융계에서,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어요. 각자의 성장 경험이나, 국적, 배경은 매우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고 친구가 되었지요. 겉모습은 달라도 원하는 것은 같았으니까요.

퍼 : 그래도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었나봐요?

빌 : 네. 원래 비즈니스(사업)에 대해 매혹될 만큼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창업과 운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컸지요! 미국 경제계가 어떻게 비즈니스에 투자하고 활성화 시키는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이 지금 베이켓과 같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씨앗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구나’ 하고 다시 보게 되었죠.

4. 하이힐 위의 삶

 

빌리의 공식 일정을 챙기던 어느 날, 공식 일정이 끝나 식사 자리로 옮길 때, 하루종일 하이힐을 신고 바삐 움직였던 빌리 왕에게 편한 신발로 갈아 신겠느냐고 물었다. 청소년들과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고, 일정 중에 틈만 나면 리듬을 타며 자유롭게 다녔던 빌리인지라, 편한 복장을 선호할 거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퍼 : 하이힐 불편할텐데, 식사하러 가기 전에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갈래요?

빌 : 괜찮아요. 저는 그동안 힐 위에서 살아서 익숙해요.

아차, 베이켓을 시작하기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장과 하이힐의 형식을 갖춰야 하는 세계에서 살았던 걸 깜박했다.

 

퍼 : 대학 생활을 듣고 싶군요.

빌 : 고등학교 졸업한 후 브라운 대학에 입학했어요. 가족 중에 아이비리그 대학에 간 건 처음이었죠. 그 전까지는 항상 엄마와 다녔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일 등 모두 혼자해야 했어요. 그건 저에게 굉장히 큰 경험이었죠. 전 그때 16살이었어요. 어렸죠. 그 경험이 제 삶을 굉장히 많이 바꿔놓았어요.

퍼 :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나요?

빌 : 졸업 후에는 월 스트리트의 은행에서 5년간 일했어요. 그게 제가 다시 로스쿨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퍼 : 은행에서 일하다 왜 갑자기 그만두고 법을 공부했어요?

빌 : 저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주는 도전들을 좋아했어요. 은행에서 일할 때 변호사들과 매우 밀접하게 일했는데, 옆에서 볼 때에 그들은 이미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은행원보다 돈도 더 많이 버는 것 같았고요. 그래서 진로를 바꿨죠.

퍼 : 하하, 같이 일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거군요.

빌 : 네, 그래서 바로 로스쿨 들어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요. 그 이후 어느 로펌에서 일할지 찾아봤는데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 지사를 둔 로펌을 발견했지요. 그때 샌프란시스코 지사를 택해서 거기서 일하게 됐어요.

퍼 : 샌프란시스코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빌 : 은행에서 일을 할 때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여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후 다시 변호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죠.  3년 반 정도 변호사로 일했어요.

퍼 : 변호사는 왜 그만뒀어요?

빌 : 그 당시에 일을 하면서도 제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비영리 단체에서 자원활동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베이켓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베이켓을 위한 생각이나 여러 비영리 단체의 자원활동을 하면서 변호사를 지속하기는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변호사를 그만두었죠.

퍼 : 변호사와 은행가로 일한 경험은 빌리의 삶에서는 어떤 경험이었나요? 뭘 발견했나요?

빌 : 거의 10년동안 미국 경제계 (Corporate America)에 속해 있으면서 매우 중요한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당시 저에게 ‘성공’은 전문가로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어요.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게 저에게는 사치였었는데 회사생활을 하면서, 교육 받은 부모 밑에서, 미국의 부유층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런 교육이 호사나 사치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알게 되었죠.

퍼 : 아.

빌 : 제 배경이 그들의 배경과 얼마나 다르고 큰 차이나 나는지, 그들과 경쟁하며 제가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퍼 : 잘 극복했나요?

빌 : 그렇죠. 극복하고 나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하게 자랐어도 기업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이 자아 실현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선 그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죠.

퍼 : 그랬군요.

빌 :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라는 것이었어요. 특별히 미국경제계 안에서 “제대로 된” 저의 첫 직장이었던 금융계에서,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어요. 각자의 성장 경험이나, 국적, 배경은 매우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고 친구가 되었지요. 겉모습은 달라도 원하는 것은 같았으니까요.

퍼 : 그래도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었나봐요?

빌 : 네. 원래 비즈니스(사업)에 대해 매혹될 만큼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창업과 운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컸지요! 미국 경제계가 어떻게 비즈니스에 투자하고 활성화 시키는지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이 지금 베이켓과 같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씨앗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구나’ 하고 다시 보게 되었죠.

5. 재즈 축제 기획자로서의 삶

 

퍼 : 샌프란시스코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에서 일했는데, 그것도 그냥 자원활동으로 한 건가요?

빌 : 전 재즈 왕팬이에요. 그때 뭔가 제 능력을 사회에 환원할 수 없는지 찾고 있었어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도 잘 발달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 지역 전화번호부를 구해서, J를 찾고, JAZZ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단체에 전화를 했어요.

퍼 : 하하

빌 : 그때 샌프란시스코 재즈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단체가 ‘재즈 앤 더 시티’라는 곳이었어요.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나는 변호사고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어요. “잘 됐다, 2주 후에 공연이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라고 했어요.

퍼 : 오, 직접 가서 뭘 했나요?

빌 : 2주 후에 공연장으로 갔어요. 멋진 교회에서 공연을 하더라고요. 공연장에 가서 ‘전 빌리 왕이고 변호사고, 오늘 도와주러 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기 의자 좀 세팅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퍼 : 하하.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겠네요.

빌 : 그래도 잘 했지요. (웃음) 다 끝나고 나서 대표를 찾아가서 ‘당신 날 알아둬야 할 거다, 난 빌리 왕이고 변호사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별로 관심도 없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은 했지요.

퍼 : 그럼 계속 자원활동을 한건가요?

빌 : 그 당시 그 자원활동 외에도 이것저것 하고 있었는데, 변호사랑 도저히 병행할 수 없겠더라고요. 변호사를 그만두고 6개월인가 지나서 ‘재즈 앤 더 시티’에서 비즈니스 매니저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퍼 : 월급 차이가 컸을 텐데요.

빌 : 물론 월급은 제가 대학 졸업하자마자 받았던 초봉보다도 못 했죠.

퍼 : 그렇죠. 지원서 내고 바로 합격했나요?

빌 :  면접을 봤어요. 면접관에게 ‘나를 뽑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난 똑똑하다. 비영리 쪽 경험은 없지만 은행가로 비즈니스 경험은 많다. 둘째 난 변호사였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난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재즈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 당당하게 이야기했죠. (웃음)

퍼 : 하하, 빌리답네요. 그래서 붙었군요.

빌 :  네, ‘자, 그럼 와서 같이 일하자!’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정말요?’ 하며 기뻐했죠. (웃음)

퍼 : 거기서 몇 년이나 일했나요?

빌 : 5년 일했어요.

퍼 : 오래했네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나요?

빌 : 시스템이 전혀 없는 곳이었기에 처음부터 다 만들어야 했어요. 비영리 단체이지만 수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재즈 페스티벌 관련 상품들, 티셔츠나 모자 등을 제작해 판매하면서 운영비를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퍼 : 비영리 단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셨군요.

빌 : 그 일을 다 하면서 비영리 단체를 어떻게 경영하고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배웠지요.

퍼 : 배웠다고요?

빌 : 다른 게 아니라 5년 동안 일하면서 팀으로 일을 하는 법을 배웠어요. 혼자 다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팀으로 움직여야 잘 되는구나를 깨달은 거죠. 일을 하면서 ‘팀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다 사랑해야겠구나’, 그리고 ‘시키는 일이 아니라 창조적인 일을 해야겠구나’라고 결심을 했어요.

퍼 : 창조적인 일이라 …….

빌 : 그때 저 스스로한테 네 가지 질문을 해봤어요. 첫째,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뭔가? 둘째, 내가 잘 하는 게 뭔가? 셋쨰,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 뭔가? 넷째, 내가 잘 못하는 게 뭔가? 사랑하지만 못 하는 일도 있고, 잘 하지만 싫어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이런 걸 고민하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자신이 없는 일이 뭔가?

퍼 : 뭐였나요?

빌 : 비즈니스도 잘 하고, 문화 예술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익혔고, 남은 건 교육이더라고요. 다시 교육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 지역 공동체를 알아야 하고, 가르친다는 게 뭔지, 커리큘럼은 어떻게 만들지, 교육 평가를 할지, 그런 걸 다 배우고 교사 자격증을 땄죠.

5. 재즈 축제 기획자로서의 삶

 

퍼 : 샌프란시스코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에서 일했는데, 그것도 그냥 자원활동으로 한 건가요?

빌 : 전 재즈 왕팬이에요. 그때 뭔가 제 능력을 사회에 환원할 수 없는지 찾고 있었어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도 잘 발달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 지역 전화번호부를 구해서, J를 찾고, JAZZ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단체에 전화를 했어요.

퍼 : 하하

빌 : 그때 샌프란시스코 재즈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단체가 ‘재즈 앤 더 시티’라는 곳이었어요.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나는 변호사고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어요. “잘 됐다, 2주 후에 공연이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라고 했어요.

퍼 : 오, 직접 가서 뭘 했나요?

빌 : 2주 후에 공연장으로 갔어요. 멋진 교회에서 공연을 하더라고요. 공연장에 가서 ‘전 빌리 왕이고 변호사고, 오늘 도와주러 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기 의자 좀 세팅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퍼 : 하하.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겠네요.

빌 : 그래도 잘 했지요. (웃음) 다 끝나고 나서 대표를 찾아가서 ‘당신 날 알아둬야 할 거다, 난 빌리 왕이고 변호사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별로 관심도 없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은 했지요.

퍼 : 그럼 계속 자원활동을 한건가요?

빌 : 그 당시 그 자원활동 외에도 이것저것 하고 있었는데, 변호사랑 도저히 병행할 수 없겠더라고요. 변호사를 그만두고 6개월인가 지나서 ‘재즈 앤 더 시티’에서 비즈니스 매니저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퍼 : 월급 차이가 컸을 텐데요.

빌 : 물론 월급은 제가 대학 졸업하자마자 받았던 초봉보다도 못 했죠.

퍼 : 그렇죠. 지원서 내고 바로 합격했나요?

빌 :  면접을 봤어요. 면접관에게 ‘나를 뽑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난 똑똑하다. 비영리 쪽 경험은 없지만 은행가로 비즈니스 경험은 많다. 둘째 난 변호사였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난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재즈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 당당하게 이야기했죠. (웃음)

퍼 : 하하, 빌리답네요. 그래서 붙었군요.

빌 :  네, ‘자, 그럼 와서 같이 일하자!’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정말요?’ 하며 기뻐했죠. (웃음)

퍼 : 거기서 몇 년이나 일했나요?

빌 : 5년 일했어요.

퍼 : 오래했네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나요?

빌 : 시스템이 전혀 없는 곳이었기에 처음부터 다 만들어야 했어요. 비영리 단체이지만 수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재즈 페스티벌 관련 상품들, 티셔츠나 모자 등을 제작해 판매하면서 운영비를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퍼 : 비영리 단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셨군요.

빌 : 그 일을 다 하면서 비영리 단체를 어떻게 경영하고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배웠지요.

퍼 : 배웠다고요?

빌 : 다른 게 아니라 5년 동안 일하면서 팀으로 일을 하는 법을 배웠어요. 혼자 다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팀으로 움직여야 잘 되는구나를 깨달은 거죠. 일을 하면서 ‘팀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다 사랑해야겠구나’, 그리고 ‘시키는 일이 아니라 창조적인 일을 해야겠구나’라고 결심을 했어요.

퍼 : 창조적인 일이라 …….

빌 : 그때 저 스스로한테 네 가지 질문을 해봤어요. 첫째,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뭔가? 둘째, 내가 잘 하는 게 뭔가? 셋쨰,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 뭔가? 넷째, 내가 잘 못하는 게 뭔가? 사랑하지만 못 하는 일도 있고, 잘 하지만 싫어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이런 걸 고민하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자신이 없는 일이 뭔가?

퍼 : 뭐였나요?

빌 : 비즈니스도 잘 하고, 문화 예술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익혔고, 남은 건 교육이더라고요. 다시 교육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 지역 공동체를 알아야 하고, 가르친다는 게 뭔지, 커리큘럼은 어떻게 만들지, 교육 평가를 할지, 그런 걸 다 배우고 교사 자격증을 땄죠.

6.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 (1)

 

퍼 : 그럼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신 건가요?

빌 :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간 직접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과 병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교사 자격증을 받았죠.

퍼 : 선생님이 되기 위해 직접 공부해보니 어땠나요?

빌 : 교육을 공부하기 전에는 감으로는 알고 있었어요. 어떤 언어를 사용해서 그 과정을 설명해야할지는 잘 몰랐었지요. 아이들이 9단계를 거쳐 배운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학교가 학생들의 두뇌를 발달시키고 어떻게 마인드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배우게 되었어요.

퍼 : 아.

빌 : 그리고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같은 주에 있는 학교라도 예산이 많은 학교와 예산이 적은 학교로 나뉘고, 그에 따라 교육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았죠.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들도 많고, 여러 문제들이 있어요. 지금 주로 베이켓에 오는 학생들은 예산이 적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에요.

퍼 : 그 자격증을 따서 선생님이 되었군요?

빌 : 저는 초등학교 담임 교사를 했어요. 2년간 4학년과 5학년을 맡았지요. 

퍼 : 베이켓이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은 주로 중고등학생인데 왜 초등학교 교사가 됐나요?

빌 : 고등학교로 가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베이켓에서 하려던 것을 좀 변형해서 직접 학교 교육에 접목해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더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퍼 : 변형해서 수업을 진행해 보다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수업들을 진행했나요?

빌 : 아침에는 요가를 한다거나, 음악시간에 드럼을 배운다거나, 수업 중간에 음악을 듣는다거나 거대한 벽화를 그린다든지, 그런 식으로 미술 음악을 합쳐서 하는 여러 수업을 실험해봤어요. 뭐  한 번 시도를 해 본 거죠. (웃음)

퍼 : 공교육 안에서 주어진 교과목 외에 그런 수업을 직접 기획해서 진행하면, 주변의 억압이나 만류 같은 것도 있기 마련인데, 자유롭게 그런 수업을 할 수 있었나요?

빌 : 아니에요. 재밌는 사연이 있어요. 제가 처음에는 다른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시작을 했어요. 그 수업을 보던 한 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 학교 담임교사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 학교에 4학년 반 중에 담임이 없는 반이 있었어요.

퍼 : 담임교사가 없었다고요?

빌 : 전에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두고, 아무도 맡지 못하고 그냥 보조교사로만 운영이 되고 있던 반이었어요. 소위 말해 문제아 반인 거죠. (웃음)

퍼 : 하하, 초등학교 5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텐데, 이미 담임도 없는 문제아반이고, 그 사정을 알고도 담임을 하겠다고 했나요?

빌 : 그래서 담임을 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죠.

퍼 : 어떤 조건이요?

빌 :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 면접 볼 때처럼 여기서도 첫째, 둘째, 셋째하며 조건을 말했어요. “당신이 날 고용하고 싶다면, 이 조건을 들어 달라. 첫째, 이 교실의 물리적 분위기를 다 바꿀 것이다.  배치나 환경미화를 다시 하는 거죠. 둘째, 나에게 보조교사를 둘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  꼭 필요하니 보조교사를 제공해 달라. 셋째, 학교 규칙은 모두 따르겠지만, 내가 해야할 것은 하게 놔둬라.”

퍼 : 조건을 받아 들였나요?

빌 : 교장선생님이 다 듣고는 절 쳐다보면서 묻더라고요. “당신, 그 반에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느냐?” (웃음) 그래서 제 비전을 말해줬죠. 보조교사의 경우 학교 예산이 걸린 문제라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해줬지요.

퍼 : 하하, 그래도 들어줬군요. 직접 그 반 담임을 맡아보니 어땠어요?

빌 : 매일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펑펑 울었어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왜냐면, 음, 전 교사로 실패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몇 분 전까지 문제아반의 상황을 흥분하며 이야기하던 빌리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눈가가 빨개졌다. 곧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다시 이어갔다.

6.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 (1)

 

퍼 : 그럼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신 건가요?

빌 :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간 직접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과 병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교사 자격증을 받았죠.

퍼 : 선생님이 되기 위해 직접 공부해보니 어땠나요?

빌 : 교육을 공부하기 전에는 감으로는 알고 있었어요. 어떤 언어를 사용해서 그 과정을 설명해야할지는 잘 몰랐었지요. 아이들이 9단계를 거쳐 배운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학교가 학생들의 두뇌를 발달시키고 어떻게 마인드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배우게 되었어요.

퍼 : 아.

빌 : 그리고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같은 주에 있는 학교라도 예산이 많은 학교와 예산이 적은 학교로 나뉘고, 그에 따라 교육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았죠.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들도 많고, 여러 문제들이 있어요. 지금 주로 베이켓에 오는 학생들은 예산이 적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에요.

퍼 : 그 자격증을 따서 선생님이 되었군요?

빌 : 저는 초등학교 담임 교사를 했어요. 2년간 4학년과 5학년을 맡았지요. 

퍼 : 베이켓이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은 주로 중고등학생인데 왜 초등학교 교사가 됐나요?

빌 : 고등학교로 가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베이켓에서 하려던 것을 좀 변형해서 직접 학교 교육에 접목해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더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퍼 : 변형해서 수업을 진행해 보다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수업들을 진행했나요?

빌 : 아침에는 요가를 한다거나, 음악시간에 드럼을 배운다거나, 수업 중간에 음악을 듣는다거나 거대한 벽화를 그린다든지, 그런 식으로 미술 음악을 합쳐서 하는 여러 수업을 실험해봤어요. 뭐  한 번 시도를 해 본 거죠. (웃음)

퍼 : 공교육 안에서 주어진 교과목 외에 그런 수업을 직접 기획해서 진행하면, 주변의 억압이나 만류 같은 것도 있기 마련인데, 자유롭게 그런 수업을 할 수 있었나요?

빌 : 아니에요. 재밌는 사연이 있어요. 제가 처음에는 다른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시작을 했어요. 그 수업을 보던 한 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 학교 담임교사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 학교에 4학년 반 중에 담임이 없는 반이 있었어요.

퍼 : 담임교사가 없었다고요?

빌 : 전에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두고, 아무도 맡지 못하고 그냥 보조교사로만 운영이 되고 있던 반이었어요. 소위 말해 문제아 반인 거죠. (웃음)

퍼 : 하하, 초등학교 5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텐데, 이미 담임도 없는 문제아반이고, 그 사정을 알고도 담임을 하겠다고 했나요?

빌 : 그래서 담임을 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죠.

퍼 : 어떤 조건이요?

빌 :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 면접 볼 때처럼 여기서도 첫째, 둘째, 셋째하며 조건을 말했어요. “당신이 날 고용하고 싶다면, 이 조건을 들어 달라. 첫째, 이 교실의 물리적 분위기를 다 바꿀 것이다.  배치나 환경미화를 다시 하는 거죠. 둘째, 나에게 보조교사를 둘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  꼭 필요하니 보조교사를 제공해 달라. 셋째, 학교 규칙은 모두 따르겠지만, 내가 해야할 것은 하게 놔둬라.”

퍼 : 조건을 받아 들였나요?

빌 : 교장선생님이 다 듣고는 절 쳐다보면서 묻더라고요. “당신, 그 반에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느냐?” (웃음) 그래서 제 비전을 말해줬죠. 보조교사의 경우 학교 예산이 걸린 문제라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해줬지요.

퍼 : 하하, 그래도 들어줬군요. 직접 그 반 담임을 맡아보니 어땠어요?

빌 : 매일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펑펑 울었어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왜냐면, 음, 전 교사로 실패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몇 분 전까지 문제아반의 상황을 흥분하며 이야기하던 빌리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눈가가 빨개졌다. 곧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다시 이어갔다.

7.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 (2)

 

빌 : 초등학교 교사는 제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내가 있는 힘을 다 해도 모든 아이들이 다 학교 시스템 안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 시스템 밖으로 떨어지는 아이들도 생겨나고, 분명 실패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예요. 내가 그 아이를 실패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문제는 너무 크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하든 그 문제를 다 고칠 수는 없는 거였어요. 그 현실을 다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퍼 : 정말 힘들었겠네요.

빌 : 그 당시에 만났던 학생들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 반에서 어느 한 학생을 불러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학생과 이야기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냥 가만히 있게 되는 거고, 그 한명을 선택하는 것도 내 결정이에요.

퍼 : 그렇죠. 책임져야 하는 결정.

빌 : 어느 한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조차도 한 아이와 이야기하면 다른 아이와 이야기를 못 하게 되는 건데, 학생을 긍정하고, 무시하고 하는 그 하나하나를 다 선택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걸 제가 결정해서 해야한다는 게 굉장히 두려웠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베이켓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죠.

빌리의 말을 통역하는 사이, 그녀는 열심히 아이폰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빌 : 이 친구는 데이몬’Demon’이라고 해요. 근데 영어로는 ‘디몬’이라고 읽을 수 있어요. 악마라는 뜻이죠. 이 친구는 정말 힘들었어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친구였어요. 제 친구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데,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배워서 데이몬을 많이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 당시 제가 베이켓을 만들려고 결심했던 시기였어요.

퍼 : 데이몬과 같은 친구들을 위한 뭔가를 만들고자 했군요.

빌 : 아이들에게도 다 물어봤어요. 난 정말 완벽한 학교 같은 걸 만들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꿈꾸는 학교는 어떤 학교니? 아이들이 이야기한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그걸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여기저기 다 물어보고 다녔어요. 그리고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와 실현을 한 거죠.

퍼 : 그 후에 데이몬도 베이켓에 왔나요?

빌 : 그때 데이몬에게도 ‘난 너를 위해 학교를 만들거야. 그러니 원하면 오렴’이라고 이야기했죠. 참으로 그때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나는 건 정말 힘든 결정이었어요. 그래도 떠났죠.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 베이켓으로 꼭 와야하는 건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그땐 데이몬도 오진 않았죠.

퍼 : 그랬군요.

빌 : 그 후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데이몬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데이몬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졸업식에 오세요!” 저는 “와! 정말요? 저도 꼭 갈게요!”라고 대답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풋볼 선수 장학금을 받고 대학까지 이미 입학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어요. 모든 게 다 순조롭게 끝난 듯 했어요.

퍼 : 끝나는 듯했다뇨?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빌 : 졸업 후 1년이 지나고 나서 데이몬이 베이켓에 왔어요. “선생님, 저 좀 문제가 생겨서 학교 그만뒀어요.”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럼 당분간 그냥 베이켓에 와서 음악 수업을 들어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어요. 랩도 굉장히 잘하고 관심도 있었으니까요.

퍼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묻지 않았나요?

빌 : 어느 날 데이몬이 저한테 팔을 보여주는 거예요. 팔에 이름이 한가득 써 있는 굉장히 큰 문신을 했더라고요. 다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20명 정도 적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이름은 죽은 친구들 이름이에요”라고 했어요. (침묵)

퍼 : 왜 죽은 거죠?

빌 : 살해 당하고, 총살 당하고…

퍼 : 아…….

빌 : 그때서야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다시 여기(살던 동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전 원래 아이들에게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데, 돌아갈 차비도 없고, 밥 먹을 돈도 없다고 해서 밥을 사주고 차비를 줬어요. 이 이야기 들으니 어때요?

퍼 : 네?

빌 : 데이몬의 그 문신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퍼 : 음…….

빌 : 베이켓이 답은 아니었어요. 답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전 그 친구와 잘 알고, 관계를 맺고 있었지요. 그게 다였어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데이몬이 택배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에 돈을 벌러 가서는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모든 연락처를 바꿨어요. 연락을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데이몬 엄마가 가끔씩 연락해주는 정도예요.

퍼 : 연락이 됐다 안 됐다 그러네요.

빌 : 그렇죠. 대부분 초등학교 때 만나고 나서 그 이후로 전혀 연락이 없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이 오죠. 그때 만나면 그저 안아주고 괜찮을 거라 이야기해주고, 베이켓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주죠. 데이몬은 잠시나마 베이켓에 와서 음악 수업을 들었고, 그때 직접 음악을 하면서 뭔가 힘을 얻었고 자신감을 회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직업을 찾아 떠났고요. 그게 다예요.

퍼 : 베이켓은 그 전환의 ‘순간’을 만드는 거군요.

빌 : 힘들 때 그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가 있는 공간이 있길 바라요. 그런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만났을 때 제 마음은 정말 무거워지지만(heavy), 동시에 굉장히 행복해져요(happy). 왜냐면 그래도 베이켓이라는 어떤 희망을 가진 공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빌리가 다시 되물었다.

빌 : 상상할 수 있나요? 죽은 친구들의 이름이 가득한 문신. 독립선언문 같이 오래된 편지 같은 문신이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지요.

빌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을 때, 잠시 상상해보았다. 과연 나는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총기 소지’의 자유가 있는 곳의 ‘사건’, 그로 인해 인간이 받는 상처에 대한 도무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했다.

7.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 (2)

 

빌 : 초등학교 교사는 제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내가 있는 힘을 다 해도 모든 아이들이 다 학교 시스템 안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 시스템 밖으로 떨어지는 아이들도 생겨나고, 분명 실패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예요. 내가 그 아이를 실패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문제는 너무 크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하든 그 문제를 다 고칠 수는 없는 거였어요. 그 현실을 다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퍼 : 정말 힘들었겠네요.

빌 : 그 당시에 만났던 학생들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 반에서 어느 한 학생을 불러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학생과 이야기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냥 가만히 있게 되는 거고, 그 한명을 선택하는 것도 내 결정이에요.

퍼 : 그렇죠. 책임져야 하는 결정.

빌 : 어느 한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조차도 한 아이와 이야기하면 다른 아이와 이야기를 못 하게 되는 건데, 학생을 긍정하고, 무시하고 하는 그 하나하나를 다 선택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걸 제가 결정해서 해야한다는 게 굉장히 두려웠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베이켓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죠.

빌리의 말을 통역하는 사이, 그녀는 열심히 아이폰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빌 : 이 친구는 데이몬’Demon’이라고 해요. 근데 영어로는 ‘디몬’이라고 읽을 수 있어요. 악마라는 뜻이죠. 이 친구는 정말 힘들었어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친구였어요. 제 친구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데,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배워서 데이몬을 많이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 당시 제가 베이켓을 만들려고 결심했던 시기였어요.

퍼 : 데이몬과 같은 친구들을 위한 뭔가를 만들고자 했군요.

빌 : 아이들에게도 다 물어봤어요. 난 정말 완벽한 학교 같은 걸 만들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꿈꾸는 학교는 어떤 학교니? 아이들이 이야기한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그걸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여기저기 다 물어보고 다녔어요. 그리고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와 실현을 한 거죠.

퍼 : 그 후에 데이몬도 베이켓에 왔나요?

빌 : 그때 데이몬에게도 ‘난 너를 위해 학교를 만들거야. 그러니 원하면 오렴’이라고 이야기했죠. 참으로 그때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나는 건 정말 힘든 결정이었어요. 그래도 떠났죠.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 베이켓으로 꼭 와야하는 건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그땐 데이몬도 오진 않았죠.

퍼 : 그랬군요.

빌 : 그 후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데이몬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데이몬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졸업식에 오세요!” 저는 “와! 정말요? 저도 꼭 갈게요!”라고 대답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풋볼 선수 장학금을 받고 대학까지 이미 입학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어요. 모든 게 다 순조롭게 끝난 듯 했어요.

퍼 : 끝나는 듯했다뇨?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빌 : 졸업 후 1년이 지나고 나서 데이몬이 베이켓에 왔어요. “선생님, 저 좀 문제가 생겨서 학교 그만뒀어요.”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럼 당분간 그냥 베이켓에 와서 음악 수업을 들어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어요. 랩도 굉장히 잘하고 관심도 있었으니까요.

퍼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묻지 않았나요?

빌 : 어느 날 데이몬이 저한테 팔을 보여주는 거예요. 팔에 이름이 한가득 써 있는 굉장히 큰 문신을 했더라고요. 다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20명 정도 적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이름은 죽은 친구들 이름이에요”라고 했어요. (침묵)

퍼 : 왜 죽은 거죠?

빌 : 살해 당하고, 총살 당하고…

퍼 : 아…….

빌 : 그때서야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다시 여기(살던 동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전 원래 아이들에게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데, 돌아갈 차비도 없고, 밥 먹을 돈도 없다고 해서 밥을 사주고 차비를 줬어요. 이 이야기 들으니 어때요?

퍼 : 네?

빌 : 데이몬의 그 문신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퍼 : 음…….

빌 : 베이켓이 답은 아니었어요. 답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전 그 친구와 잘 알고, 관계를 맺고 있었지요. 그게 다였어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데이몬이 택배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곳에 돈을 벌러 가서는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모든 연락처를 바꿨어요. 연락을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데이몬 엄마가 가끔씩 연락해주는 정도예요.

퍼 : 연락이 됐다 안 됐다 그러네요.

빌 : 그렇죠. 대부분 초등학교 때 만나고 나서 그 이후로 전혀 연락이 없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이 오죠. 그때 만나면 그저 안아주고 괜찮을 거라 이야기해주고, 베이켓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주죠. 데이몬은 잠시나마 베이켓에 와서 음악 수업을 들었고, 그때 직접 음악을 하면서 뭔가 힘을 얻었고 자신감을 회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직업을 찾아 떠났고요. 그게 다예요.

퍼 : 베이켓은 그 전환의 ‘순간’을 만드는 거군요.

빌 : 힘들 때 그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가 있는 공간이 있길 바라요. 그런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만났을 때 제 마음은 정말 무거워지지만(heavy), 동시에 굉장히 행복해져요(happy). 왜냐면 그래도 베이켓이라는 어떤 희망을 가진 공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빌리가 다시 되물었다.

빌 : 상상할 수 있나요? 죽은 친구들의 이름이 가득한 문신. 독립선언문 같이 오래된 편지 같은 문신이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지요.

빌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을 때, 잠시 상상해보았다. 과연 나는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총기 소지’의 자유가 있는 곳의 ‘사건’, 그로 인해 인간이 받는 상처에 대한 도무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했다.

8. 삶을 바꾼 마법

 

퍼 : 빌리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은행가, 변호사가 꿈이었나요?

빌 :  원래 우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 다음엔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퍼 : 우주인이라!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어요?

빌 : 고등학교 때 만난 영어 선생님 때문이에요.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분이에요. 대부분 어릴 때 엄마가 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저희 엄마는 바빴기 때문에 중국어로든 영어로든 읽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만난 그 선생님 덕분에 저는 ‘읽기’를 사랑하게 되었죠. 읽는 것의 즐거움, 읽기의 마법을 알려준 분이죠.

퍼 : 읽기 마법이요?

빌 : 저는 굉장히 시각적인 사람이에요. 단어를 하나 읽으면 그 단어가 머리 속에 그림이 되고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신기했어요. 그건 그야말로 마법이었죠. 쓰기를 할 때에는 현실의 어떠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해 글로 옮기고요.

퍼 : 그렇네요.

빌 : 요즘 많은 영화들이 책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지잖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책을 안 읽죠. 그저 영화만 보죠. 책을 읽고 상상을 하면 그 상상은 자기가 한 거라서 자기 것으로 되지만, 아무리 멋진 영화라해도 책을 읽는 것과는 달라요.

퍼 : 그렇죠. 다르긴 하죠.

빌 : 영상으로 보게 되면 그 영상이 그림으로 머리속에 박히게 되잖아요. 전 그게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그 단어를 가지고 상상을 하는 게 마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상상력이고, 창의력이죠.

퍼 : 지금은 영상을 더 쉽게 접해서 읽고 쓰기의 마법과는 좀 멀어져 가는 것 같아요.

빌 : 지금 미디어 역시 굉장히 중요하긴 하지만,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 단어들을 시각적인 그림과 함께 미리 주는 거죠. 그렇게 입력된 단어들을 가지고 글을 읽는다는 건 한편으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퍼 : <베이켓>에서 청소년들에게  읽고 쓰기의 마법을 교육하는 게 아니라, 영상 등을 통한 미디어 아트를 주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요?

빌 : 중요한 것은 미국만 아니라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서 미디어를 없애거나 뺏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어요. 여성이 어떻게 표현이 되었나,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너를 감동시키는지, 여기서 보여주는 게 무엇을 상징하는가, 가족인지, 커뮤니티인지, 광고 같은 경우는 굉장히 비판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지요.  보는 것은 뺏을 수 없지만 보는 것을 다시 질문하게 할 수는 있어요.

퍼 : 그래서 미디어를 통해 글의 읽고 쓰기의 마법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건가요?

빌 : 글쓰기가 좀 더 추상적인 작업이라 한 단계 높은 작업이지만, 영화를 만드는 작업도 사실 글을 쓰는 작업과 비슷해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글도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그 기적, 매직을 경험하는 거죠.

빌 : 베이켓에 오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뭔가 잘해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인 친구들이죠. 제가 읽기를 통해서 놀라운 경험을 한 것처럼, <베이켓>을 찾아오는 청소년들도 그 경험을 하는 거죠. 그러나 사람마다 경험의 체화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완전 같다고 할 수는 없어요.

퍼 : 그렇죠.

빌 : 베이켓에 오자마자 가장 처음 하는 작업은 생각하던 걸 뭔가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작업이에요. 노래 가사를 쓴다거나 하는 작업으로 시작을 해요. 그 과정을 진정한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거죠.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퍼 : 아.

빌 : <베이켓>이 하는 건 그 경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해도 괜찮은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1번 답은 a, 2번 답은 c, 3번 답은 a, 뭐 이런 식으로 정해놓고 맞고 틀리고를 알려주는 데 <베이켓>은 오직 경험과 생각을 끝까지 표현해 보는 거지, 맞고 틀리고는 없어요.

퍼 : 그럼 끝까지 영화가 만들어지는 걸 목표로 지원을 하는군요.

빌 : 전문가와 다른 학생들이 팀을 이뤄서 직접 작품을 만들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작품을 마지막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게 해줘요. 레드카펫도 깔고 가족이든 친구든 초대해서 시사회를 해요. 그건 곧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동시에, 같이 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경험을 갖는 거예요. 물론 내용이 부실해서 못 봐줄 정도의 영상은 거의 없지만, 아무리 영화 내용이 부실해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쳐주는 거죠. 만들어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요.

퍼 : <베이켓> 홈페이지에서 활동 사진으로 봤던 레드카펫이 깔려있던 활동 사진들이 바로 그 순간들인 거군요.

빌 : 네, 그렇게 인정받는 경험은 학교나 가정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이에요. 그 경험을 거치면, 다음엔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시나리오를 더 잘 쓰려면 더 많이 읽어야 하고, 더 많이 봐야 하니깐, 자연스럽게 읽기의 마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퍼 : 성공과 실패를 가를 필요는 없지만, ‘성공이 무엇이냐’를 정의하는 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빌 : 계속해서 “무엇이 성공인가?”를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계속 바뀌어 왔거든요.  ‘성공’ 에 대해 제가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어요. 이건 저의 답이지요.

퍼 : 사회에서 정의하는 게 성공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는 거네요.

빌 : 종종 사회나 어떤 사람들은 “답은 이거다” 라고 주입시키고 우리는 우리가 얻어낸 또는 찾아낸 답이 아니라 사회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답을 근거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기도 하죠. 베이켓을 만드는 것은 마치 저의 소명처럼 느껴졌는데, 그 느낌은 “무엇이 성공인가?” 를 포함한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솔직한 답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거죠.

8. 삶을 바꾼 마법

 

퍼 : 빌리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은행가, 변호사가 꿈이었나요?

빌 :  원래 우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 다음엔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퍼 : 우주인이라!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어요?

빌 : 고등학교 때 만난 영어 선생님 때문이에요.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분이에요. 대부분 어릴 때 엄마가 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저희 엄마는 바빴기 때문에 중국어로든 영어로든 읽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만난 그 선생님 덕분에 저는 ‘읽기’를 사랑하게 되었죠. 읽는 것의 즐거움, 읽기의 마법을 알려준 분이죠.

퍼 : 읽기 마법이요?

빌 : 저는 굉장히 시각적인 사람이에요. 단어를 하나 읽으면 그 단어가 머리 속에 그림이 되고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신기했어요. 그건 그야말로 마법이었죠. 쓰기를 할 때에는 현실의 어떠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해 글로 옮기고요.

퍼 : 그렇네요.

빌 : 요즘 많은 영화들이 책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지잖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책을 안 읽죠. 그저 영화만 보죠. 책을 읽고 상상을 하면 그 상상은 자기가 한 거라서 자기 것으로 되지만, 아무리 멋진 영화라해도 책을 읽는 것과는 달라요.

퍼 : 그렇죠. 다르긴 하죠.

빌 : 영상으로 보게 되면 그 영상이 그림으로 머리속에 박히게 되잖아요. 전 그게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그 단어를 가지고 상상을 하는 게 마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상상력이고, 창의력이죠.

퍼 : 지금은 영상을 더 쉽게 접해서 읽고 쓰기의 마법과는 좀 멀어져 가는 것 같아요.

빌 : 지금 미디어 역시 굉장히 중요하긴 하지만,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 단어들을 시각적인 그림과 함께 미리 주는 거죠. 그렇게 입력된 단어들을 가지고 글을 읽는다는 건 한편으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퍼 : <베이켓>에서 청소년들에게  읽고 쓰기의 마법을 교육하는 게 아니라, 영상 등을 통한 미디어 아트를 주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요?

빌 : 중요한 것은 미국만 아니라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서 미디어를 없애거나 뺏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어요. 여성이 어떻게 표현이 되었나,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너를 감동시키는지, 여기서 보여주는 게 무엇을 상징하는가, 가족인지, 커뮤니티인지, 광고 같은 경우는 굉장히 비판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지요.  보는 것은 뺏을 수 없지만 보는 것을 다시 질문하게 할 수는 있어요.

퍼 : 그래서 미디어를 통해 글의 읽고 쓰기의 마법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건가요?

빌 : 글쓰기가 좀 더 추상적인 작업이라 한 단계 높은 작업이지만, 영화를 만드는 작업도 사실 글을 쓰는 작업과 비슷해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글도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그 기적, 매직을 경험하는 거죠.

빌 : 베이켓에 오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뭔가 잘해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인 친구들이죠. 제가 읽기를 통해서 놀라운 경험을 한 것처럼, <베이켓>을 찾아오는 청소년들도 그 경험을 하는 거죠. 그러나 사람마다 경험의 체화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완전 같다고 할 수는 없어요.

퍼 : 그렇죠.

빌 : 베이켓에 오자마자 가장 처음 하는 작업은 생각하던 걸 뭔가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작업이에요. 노래 가사를 쓴다거나 하는 작업으로 시작을 해요. 그 과정을 진정한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거죠.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퍼 : 아.

빌 : <베이켓>이 하는 건 그 경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해도 괜찮은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1번 답은 a, 2번 답은 c, 3번 답은 a, 뭐 이런 식으로 정해놓고 맞고 틀리고를 알려주는 데 <베이켓>은 오직 경험과 생각을 끝까지 표현해 보는 거지, 맞고 틀리고는 없어요.

퍼 : 그럼 끝까지 영화가 만들어지는 걸 목표로 지원을 하는군요.

빌 : 전문가와 다른 학생들이 팀을 이뤄서 직접 작품을 만들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작품을 마지막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게 해줘요. 레드카펫도 깔고 가족이든 친구든 초대해서 시사회를 해요. 그건 곧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동시에, 같이 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경험을 갖는 거예요. 물론 내용이 부실해서 못 봐줄 정도의 영상은 거의 없지만, 아무리 영화 내용이 부실해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쳐주는 거죠. 만들어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요.

퍼 : <베이켓> 홈페이지에서 활동 사진으로 봤던 레드카펫이 깔려있던 활동 사진들이 바로 그 순간들인 거군요.

빌 : 네, 그렇게 인정받는 경험은 학교나 가정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이에요. 그 경험을 거치면, 다음엔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시나리오를 더 잘 쓰려면 더 많이 읽어야 하고, 더 많이 봐야 하니깐, 자연스럽게 읽기의 마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퍼 : 성공과 실패를 가를 필요는 없지만, ‘성공이 무엇이냐’를 정의하는 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빌 : 계속해서 “무엇이 성공인가?”를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계속 바뀌어 왔거든요.  ‘성공’ 에 대해 제가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어요. 이건 저의 답이지요.

퍼 : 사회에서 정의하는 게 성공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는 거네요.

빌 : 종종 사회나 어떤 사람들은 “답은 이거다” 라고 주입시키고 우리는 우리가 얻어낸 또는 찾아낸 답이 아니라 사회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답을 근거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기도 하죠. 베이켓을 만드는 것은 마치 저의 소명처럼 느껴졌는데, 그 느낌은 “무엇이 성공인가?” 를 포함한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솔직한 답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거죠.

9.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월 가의 은행가가 되었어요. 부엌에서 내다보면 이 빌딩이 보였어요. 이 빌딩은 성공의 상징이었어요. 돈이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점심 시간에 쌍둥이 빌딩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어요. 전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이 사진을 찍었지요.

잠시 저처럼 이 빌딩 사이에 누워서 올려다 봅시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떻게 인식하나요?
제가 인식했던 것은 이런 거였죠.

뉴욕에서 가장 좋은 사무실이 있는 곳
세계 금융 센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멋진 건물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누군가가는 이 빌딩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진과 두 타워에 관한 인식은 비행기가 이 빌딩을 지나간다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포함하고 있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 특히 젊은 세대들은 항상 이를 기억할 겁니다.
테러리즘, 타겟, 카오스, 죽음의 덫.

이 사진은 남아있지만, 절대 다시 찍을 수는 없지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지요.

이 쌍둥이 빌딩을 사진을 보고 다른 인식을 하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떤 인식을 기반으로 실천할 것인지를 선택합니다.

– 빌리 왕의 오프닝 발표 내용 중

 

퍼 :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계 여성이라 차별 받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빌 : 그렇죠. 물론 평등하지 않다고, 차별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충분히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떄그때의 인식을 바꿔가면서 다른 면을 보고 그 일에만 몰두했어요. 그렇게 차별받는 상황에서 그래도 그 일을 지속했던 건, 여기가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일,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퍼 :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강조하는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과 과연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 흔히 말하는 ‘현실  도피’와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 걸까요?

빌 : ‘현실 도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것, 진실을 회피할 것을 목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잊으려고 하거나 무시하려는 결정이지요. 각기 다른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열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현실 도피” 가 될 수 밖에 없죠.

퍼 : 그럼 ‘인식’은요?

빌 :  인식은 각기 다른 렌즈를 사용해서, 다시 말해 세계에는 무한한 수의 다양한 안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실을 바라보는 거에서 출발하지요. 우리가 어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많죠. 우리의 육체적 구성 요소들, 예를 들어 성별, 나이, 감정, 어릴 적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는 신이 있는가?” 질문하는 영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죠.

퍼 :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 베이켓의 활동과도 연결되겠군요. 

빌 :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어떤 인식이 옳다 그르다에 대해 언쟁하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짧아요. 그러나 저는 다른 인식들에 대해 이해하도록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지요. 중요한 것은 판단을 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함께 아파하는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역시 질문은 ‘어떻게 그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실천할 수 있나’ 하는 것이죠.

 

빌리는 서울에 오기 전, 서울이 처음이라며 어디를 놀려가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서울의 유명한 관광 명소 몇 곳과 함께 동대문의 사회적기업 ‘참신나는옷’을 추천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이 창업한 의류회사다. 전순옥은 영국에서 귀국한 후 창신동으로 돌아가 ‘참여성노동복지터’를 설립하고,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 조사부터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을 설립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했고, 그 중 하나로 윤리적 패션 회사인 ‘참신나는옷’을 창업했다.

* <그녀의 영국인 남편> 전순옥와 크리스토퍼 조엘 _ 퍼슨웹 2006년 인터뷰 

빌리는 전순옥과 함께 창신동을 둘러보고 광장시장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전태일 다리에 함께 갔다. 전순옥은 동상 앞에서 ‘이게 우리 오빠예요’라고 소개했다. 빌리는 갑자기 전순옥을 껴안았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했다. 순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이후에 빌리에게 물어보았다.

 

퍼 : 전태일 동상 앞에서, 왜 눈물을 흘렸어요?

빌 : 가기 전에 통역자에게 전태일과 동생 전순옥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동상 앞에서 전순옥 씨가 ‘이게 우리 오빠예요’라고 하는 순간 정말 뭔가가 마음을 강하게 때린 느낌이었어요.

퍼 : 강하게 때린 느낌?

빌 : ‘이 사람이 그녀의 오빠이고, 이게 바로 그녀의 이야기구나’ 하는 게 순간 정말 강하게 마음 속으로 꽂혀 들어왔다고나 할까요? 감동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실재’와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지요.  전순옥 씨와 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을지, 충격과 상실이 얼마나 컸을지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상상이 마음을 울렸으니 당연히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어요.

빌 : 다른 이유였지만, 저 또한 오빠를 잃었거든요. 베이켓을 시작할 즈음이었지요. 그녀의 삶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어요. 전순옥 씨의 회복력, 강인함, 용기,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신을 정말 높이 사고 있고,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지금 창신동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 전태일 씨의 희생에 대한, 그녀와 공동체의 치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요.

 

함께 아파하는 것, 이 마음이 바로 아무런 판단 없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실천을 선택한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빌리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전태일과 전순옥이 남매라는 사실, 그리고 그 단순한 사실 속에서 그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자리에 같이 서있었던 나에게 전태일은 그저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노동운동가’ ’70년대 어느날 일어났던 가슴아픈 일’ 정도의 인식이었다. 이미 사회적, 역사적 편견에 길들여진 나는 전태일 동상 앞에서 조차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베이켓>의 미디어 교육 핵심은 ‘사회적, 역사적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뒤로하고 먼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즉 자신의 ‘중요한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인식한 것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를 여러 사람과 함께 보면서 지지받고 응원받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순간’의 경험을 통해 다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가족, 지역, 사회에게도 똑같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무런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ㅡ, 새로운 상상과 실천이 일어난다. 

<베이켓>에서 유명 감독이 되는 것은 ‘성공’의 척도가 아니다. <베이켓> 또한 청소년의 미래를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있기에, <베이켓>을 다녀간 청소년들이 과연 샌프란시스코 지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갈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 <베이켓>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My moment, Our movement” 캠페인 보러 가기

 

 

9.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월 가의 은행가가 되었어요. 부엌에서 내다보면 이 빌딩이 보였어요. 이 빌딩은 성공의 상징이었어요. 돈이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점심 시간에 쌍둥이 빌딩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어요. 전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이 사진을 찍었지요.

잠시 저처럼 이 빌딩 사이에 누워서 올려다 봅시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떻게 인식하나요?
제가 인식했던 것은 이런 거였죠.

뉴욕에서 가장 좋은 사무실이 있는 곳
세계 금융 센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멋진 건물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누군가가는 이 빌딩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진과 두 타워에 관한 인식은 비행기가 이 빌딩을 지나간다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포함하고 있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 특히 젊은 세대들은 항상 이를 기억할 겁니다.
테러리즘, 타겟, 카오스, 죽음의 덫.

이 사진은 남아있지만, 절대 다시 찍을 수는 없지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지요.

이 쌍둥이 빌딩을 사진을 보고 다른 인식을 하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떤 인식을 기반으로 실천할 것인지를 선택합니다.

– 빌리 왕의 오프닝 발표 내용 중

 

퍼 :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계 여성이라 차별 받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빌 : 그렇죠. 물론 평등하지 않다고, 차별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충분히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떄그때의 인식을 바꿔가면서 다른 면을 보고 그 일에만 몰두했어요. 그렇게 차별받는 상황에서 그래도 그 일을 지속했던 건, 여기가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일,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퍼 :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강조하는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과 과연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 흔히 말하는 ‘현실  도피’와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 걸까요?

빌 : ‘현실 도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것, 진실을 회피할 것을 목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잊으려고 하거나 무시하려는 결정이지요. 각기 다른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열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현실 도피” 가 될 수 밖에 없죠.

퍼 : 그럼 ‘인식’은요?

빌 :  인식은 각기 다른 렌즈를 사용해서, 다시 말해 세계에는 무한한 수의 다양한 안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실을 바라보는 거에서 출발하지요. 우리가 어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많죠. 우리의 육체적 구성 요소들, 예를 들어 성별, 나이, 감정, 어릴 적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는 신이 있는가?” 질문하는 영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죠.

퍼 :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 베이켓의 활동과도 연결되겠군요. 

빌 :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어떤 인식이 옳다 그르다에 대해 언쟁하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짧아요. 그러나 저는 다른 인식들에 대해 이해하도록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지요. 중요한 것은 판단을 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함께 아파하는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역시 질문은 ‘어떻게 그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실천할 수 있나’ 하는 것이죠.

 

빌리는 서울에 오기 전, 서울이 처음이라며 어디를 놀려가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서울의 유명한 관광 명소 몇 곳과 함께 동대문의 사회적기업 ‘참신나는옷’을 추천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이 창업한 의류회사다. 전순옥은 영국에서 귀국한 후 창신동으로 돌아가 ‘참여성노동복지터’를 설립하고,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 조사부터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을 설립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했고, 그 중 하나로 윤리적 패션 회사인 ‘참신나는옷’을 창업했다.

* <그녀의 영국인 남편> 전순옥와 크리스토퍼 조엘 _ 퍼슨웹 2006년 인터뷰 

빌리는 전순옥과 함께 창신동을 둘러보고 광장시장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전태일 다리에 함께 갔다. 전순옥은 동상 앞에서 ‘이게 우리 오빠예요’라고 소개했다. 빌리는 갑자기 전순옥을 껴안았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했다. 순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이후에 빌리에게 물어보았다.

 

퍼 : 전태일 동상 앞에서, 왜 눈물을 흘렸어요?

빌 : 가기 전에 통역자에게 전태일과 동생 전순옥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동상 앞에서 전순옥 씨가 ‘이게 우리 오빠예요’라고 하는 순간 정말 뭔가가 마음을 강하게 때린 느낌이었어요.

퍼 : 강하게 때린 느낌?

빌 : ‘이 사람이 그녀의 오빠이고, 이게 바로 그녀의 이야기구나’ 하는 게 순간 정말 강하게 마음 속으로 꽂혀 들어왔다고나 할까요? 감동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실재’와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지요.  전순옥 씨와 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을지, 충격과 상실이 얼마나 컸을지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상상이 마음을 울렸으니 당연히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어요.

빌 : 다른 이유였지만, 저 또한 오빠를 잃었거든요. 베이켓을 시작할 즈음이었지요. 그녀의 삶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어요. 전순옥 씨의 회복력, 강인함, 용기,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신을 정말 높이 사고 있고,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지금 창신동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 전태일 씨의 희생에 대한, 그녀와 공동체의 치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요.

 

함께 아파하는 것, 이 마음이 바로 아무런 판단 없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실천을 선택한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빌리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전태일과 전순옥이 남매라는 사실, 그리고 그 단순한 사실 속에서 그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자리에 같이 서있었던 나에게 전태일은 그저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노동운동가’ ’70년대 어느날 일어났던 가슴아픈 일’ 정도의 인식이었다. 이미 사회적, 역사적 편견에 길들여진 나는 전태일 동상 앞에서 조차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베이켓>의 미디어 교육 핵심은 ‘사회적, 역사적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뒤로하고 먼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즉 자신의 ‘중요한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인식한 것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를 여러 사람과 함께 보면서 지지받고 응원받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순간’의 경험을 통해 다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가족, 지역, 사회에게도 똑같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무런 편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ㅡ, 새로운 상상과 실천이 일어난다. 

<베이켓>에서 유명 감독이 되는 것은 ‘성공’의 척도가 아니다. <베이켓> 또한 청소년의 미래를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있기에, <베이켓>을 다녀간 청소년들이 과연 샌프란시스코 지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갈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 <베이켓>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My moment, Our movement” 캠페인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