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설계하는 건축가 – 오카베 도모히코

오카베 도모히코(岡部友彦). 1977년 6월 가나가와 현 출생. 건축을 전공하고, 2004년부터 요코하마 시 고토부키초를 거점으로 "YOKOHAMA KOTOBUKI STYLE" 지역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물건(hard)"이 아닌, "일(soft)" 만들기를 통해 ‘마을을 만든다’(지역 활성화)는 콘셉트로 간이 숙박소인 쪽방을 개조한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3월 11일 금요일 오후,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한 시간, 나는 나의 일본인 친구 오카베 도모히코 씨의 인터뷰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오카베에게 지진이 났다며 연락이 왔다. 메일을 받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본에서 지진은 흔한 일이었으니. 큰 피해 없어 다행이라는 답변을 보낸 지 몇 분 후, 일본 역사상 최대의 지진이 났다는 뉴스 속보를 들었다.

지진 피해 소식으로 내 마음은 어수선해졌다. 무엇보다도 대지진으로 일본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는데, 고작 7천 여 명이 살고 있는 한 마을의 변화를 설계하고 있는 한 일본 청년을 소개하는 인터뷰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해 휴대용 램프를 구하는데,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뉴스에서 보던 쓰나미의 항공사진만이 지진 피해의 전부가 아니었다. 지진 피해 지역 외에도 전력 공급에 영향을 받아 램프와 같이 비상시 필요한 생필품은 이미 물량이 없어 구하기 힘들다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램프 문제는 해결됐으니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며 다시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자신의 일상에, 혹은 고토부키 마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진의 피해를 하나씩 해결하고 대비하며, 더 나은 마을의 변화를 만들고 있는 오카베 씨의 일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9년 3월 도쿄,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기업, 소셜 벤처를 소개하는 한 심포지엄에서였다. 그가 나와 발표를 할 때, 순간 암흑이 되더니 그가 하고 있는 일, 활동을 하고 있는 마을을 소개하는 프로모션 영상이 상영되었다.

* KOTOBUKI Promotion

요코하마 고토부키초
하루살이 노동자의 마을
고령화의 마을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마을
‘미나토미라이’가 요코하마의 빛이라면,
이곳은 요코하마의 발전을 지탱해온 그늘.
이 마을은 오해받고 있다.
과거의 폭력과 범죄로 뒤범벅되었던 광경은
이미 노후화되어
이젠 고령화와 간병이라는 단어가 이어받아
마을은 생산성을 잃고
한쪽마저 떨어져나가길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생활하고 있다.

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생기있게 사는 모습은
고토부키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것이 무기
어느 마을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한 마을
고토부키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영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어를 몰라도, 고토부키초를 몰라도, 10분짜리 영상 한편만 보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토부키초가 어떤 지역이고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초등학생조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한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난 후, 10여장 남짓한 슬라이드를 통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과정을 설명했다.

* YOKOHAMA KOTOBUKI STYLE 소개 슬라이드

이러한 그를 일본에서는 ‘건축 놀이를 통해 마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축가’, ‘지역 활성화 사업의 전도사’, ‘슬럼가를 여행지로 바꾼 호스텔 빌리지 대표’, ‘사회를 바꿔나갈 청년 사회적 기업가’ 등 여러 수식어를 붙여 소개한다. 한국에서도 2009년 9월 KBS 스페셜 <사회적 기업, 마음을 깨어 세상을 바꾸다>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KBS 스페셜 다시보기

일이 생겨 일본에 갈 때마다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YOKOHAMA HOSTEL VILLAGE)’에서 묵었다. 1년에 3~4번씩 3년 동안 그곳을 드나들다보니 갈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 가는 마을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담담하게 변화를 축적해 나가고 있는 그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다. 2011년 3월 6일 오후, 고토부키초 외각에 위치한 호스텔 프론트에서 그를 만났다.

미래 도시의 상징이 된 요코하마 항구 근처의 간나이(関内)역에서 항구 쪽이 아니라 그 뒷편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고토부키 마을이 나온다.
‘고토부키초’는 요코하마에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슬럼가, 빈민촌 가운데 한 곳이다. 예전에는 주로 항만 노동자들과 하루 벌이 노동자(일용직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요세바(寄せ場)라 불리는 인력시장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고, 주변에는 ‘야도'(쪽방)촌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은 항만 노동자들과 하루 벌이 노동자들이 고령화하면서, 빈방도 늘어나고, 노동력을 잃은 사람들은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었다.

마치 ‘느린 재생’의 영화 한 장면처럼,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일본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2배 정도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팡이에 의지해 걷거나,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고토부키 마을 한복판을 지나, 호스텔 프론트에 도착했다. 뒤따라서 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머니 : 여기 마사 씨가 하는 가게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오카베 : 글쎄요. 남자분이세요? 여자분이세요?

할머니 : 여자분인데…

오카베 : 아… 글쎄요. 마사 씨… 음, 음,,,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할머니 : 아, 모르세요?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고)

퍼슨웹 : 여기가 마치 마을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됐네요.

오카베 : 그런가요? ‘인포메이션’도 별로 없는데… (웃음)

퍼슨웹 : 그러게요. 마사 씨네 가게가 어딨는지 모르니. (웃음)

 

그는 유쾌하면서 겸손하다. 여느 때처럼 그렇게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프론트 앞의 널찍한 데스크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1. 고토부키 마을에 ‘점’을 찍다
: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 만들기

 

퍼슨웹(이하 ‘퍼’) : 고토부키 마을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오카베(이하 ‘오’) : 어릴 때부터 대학원까지 같이 다닌 친구가 있는데, 대학원 졸업하면 ‘마을 만들기’를 같이 하자고 했어요. 이왕 할 거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있었던 요코하마에서 하면 좋겠다 했죠. 그때가 마침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개최된 첫해였어요. 거기서 알게 된 아티스트에게, 요코하마에 ‘고토부키초’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사나기다치'(さなぎ達 : 번데기들의 일본어, 이하 ‘번데기들’)라는 NPO가 활동하고 있다면서 소개받았어요.

퍼 : ‘번데기들’이요?

오 : 고토부키초와 이 주변에서 노숙하고 있거나, 노숙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자립 지원’을 하는 NPO예요. 무엇보다 정신적 케어를 중점에 두고, ‘의, 식, 주, 의료, 취업’ 각 방면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요.

* 사나기다치(http://www.sanagitachi.com/)
‘사나기’는 일본어로 ‘번데기’라는 의미로, 언젠가는 아름답게 날지도 모르고, 번데기인 채로 평생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며 지원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퍼 : 그때 처음 왔던 때가 언제예요?

오 : 2004년 8월 20일 정도였어요.

퍼 : 7년 전이네요. 그때 처음 와서 뭐했나요?

오 : 고토부키초 지역에서는 ‘사나기다치’와 같은 NPO가 이곳에 필요한 지원을 이미 하고 있었어요.

퍼 : 그런데 왜 고토부키초에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오 :   이 마을에서 만난 주민 할아버지들이 재밌었어요. 한 홈리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 할아버지가 가진 철학, 가치관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사고방식도 여러 가지 방면에서 다양하게 보는 것 같아 재밌었고, 알고 있는 것도 굉장히 많았어요. 그렇게 사람 만나는 게 재밌어서 들락거리다가, ‘여기를 거점으로 해야겠구나.’ 했죠.

퍼 :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고토부키초에 거점을 둔 거군요.

오 : 당시 친구들과 <funny bee>라는 주식회사를 만들었어요. 거기에 참가하면서 고토부키 마을을 변화시킬 여러 프로젝트를 모색했죠.

퍼 : 그때 오자마자 ‘여기서 호스텔을 해야지!’ 했던 건가요?

오 : 그런 건 아니예요. <funny bee> 같이하던 친구들이랑 NPO ‘번데기들’과 협력해서 이곳 주민들에게 식재료를 판매하거나 작은 프로젝트들을 했지요.

퍼 : 고토부키 마을에서의 반응은 어땠어요?

오 : 잘 팔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과도 별로 없었어요. (웃음)

퍼 : 그런 작은 활동들 중에 호스텔 활동도 있었나요?

오 : 성과도 별로 없이 작은 활동만 하다가, 고토부키 마을의 여러 소식들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는데, 그때 마을에 빈 쪽방이 많아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도쿄에 ‘산야'(三谷)라는 곳도 인력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쪽방촌이죠. 2002년 월드컵 때 산야의 빈 쪽방을 호스텔로 개조해서 관광객을 유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퍼  그걸 고토부키에서도 할 수 있었겠네요.
 
퍼 : 네, 2004년에 호스텔 설립을 준비하고 2005년 5월에 오픈했어요. 가장 첫 손님도 기억하는데, 한국 여성분이었어요.

퍼 :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오 : 홈페이지 보고 왔나 봐요. 그때 호스텔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홈페이지가 필요했는데, 자본도 없고 하니 제가 인터넷에서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어설프게 만들어 봤어요. 그걸 보고 찾아온 거죠.

퍼 : 그게 지금 만든 건가요?

오 : 아니죠. 지금 홈페이지는 전문가가 만들었어요.

퍼 : 어쩐지, 지금은 굉장히 편리하게 되어 있잖아요. 처음 방 몇 개로 시작했어요?

오 : 10개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홈페이지만 만들어놨는데, 진짜 여행객이 예약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얼른 방 청소하고 손님 맞고, 그렇게 2~3개월 정도 실험해봤어요.

 

2. 고토부키 마을에 ‘선’을 그리다.
 : 1평 평상 만들기, ‘선거하러 가자’ 캠페인

 

퍼 : 호스텔 실험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시작하게 된 때가 언제인가요?

오 : 마침 2005년에 제1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개최되었죠. 그 이벤트에 예술가들이 해외에서도 많이 왔어요. 다들 싸게 묵을 곳을 찾는다 해서, 본격적으로 빈방을 개조해서 호스텔처럼 만들었지요.

퍼 : 그럼 그 전 실험을 했던 10개의 방은 개조하지 않고 그냥 호스텔로 사용했던 거예요?

오 : 네, 그냥 청소만 좀 해서 깔끔하게만 해놨었죠. (웃음) 프론트도 없어서 <funny bee> 이후에 본격적으로 ‘고토랩'(kotolab)을 차렸는데, 그 사무실이 프론트 역할을 했죠.

*고토랩은 ‘물건’이 아니라 ‘일/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며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는 회사이다.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호스텔을 비롯, 일본의 여러 지역의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퍼 : 아티스트들을 맞이하기 위해 방 개조 하는 것도 직접 했나요?

오 : <funny bee> 멤버들과 같이 했지요.

퍼 : 그 멤버가 지금 ‘고토랩’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직원인가요?

오 : 아니요. 지금은 한 명도 없어요. 2005년에 오픈하고, 2007년까지는 호스텔 자체에서 전혀 수익이 나지 않았어요. 다들 자기 일을 찾아 나섰죠.

퍼 : 그럼 오카베 씨는 계속 호스텔 하면서, 돈은 어떻게 벌었어요?

오 : 아르바이트했지요. 과외하고 그랬어요. (웃음)

퍼 : 돈이 안 벌리는데도 왜 계속 한 거예요? 다른 멤버들 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나가는데, 둔감해서 그만 둘 타이밍을 놓쳤다거나… 농담이에요. (웃음)

오 : 맞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저는 그때, 무엇보다 호스텔을 둘러싼 모든 일이 즐거웠어요. 2005년에 호스텔 오픈하고 나서 대학원 친구들이랑 홍보 비디오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같이 1평 평상, 벤치 만들기 프로젝트도 했어요.

쪽방 촌에 낯선 여행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고토부키 마을 주민들도 ‘이게 대체 뭐지?’ 하며 호스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호기심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낯설고 어색하고 나아가 ‘반감’ 섞인 시선도 있었다. 마을 만들기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할 ‘텃새’였다. 고토부키 마을에 여행자들의 새로운 흐름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관계 만들기도 필요했다. 그는 방이 너무 좁아 낮에는 주로 밖에서 보내지만 편히 앉아 쉬거나 놀고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없는 할아버지들을 발견했다. 그런 할아버지들을 위해 기획한 프로젝트가 1평 평상 벤치 만들기. 1평짜리 나무 상자를 만들어 그 위에서 바둑도 두고, 편히 쉬기도 했다. 마을 잔치가 있을 때에는 평상을 한 곳에 모아 다 같이 모여 놀았다.

*1평 평상 프로젝트 소개

2006년 3월 요코하마 시장 선거날도 고토부키초에서는 다른 마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투표소는 여기에요’, ‘편지(안내서)가 없어도 투표권은 있어요’라는 문구를 담은 화살표가 마을 전체에 붙었다.

고토부키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이 주거지가 불안정하기에 선거 때 각 가정으로 배달되는 선거 안내서를 받을 확률은 드물다.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투표하러 갑시다.’, ‘투표는 권리입니다’로 일방적으로 알리는 게 아니라, ‘안내서가 없어도 투표권은 있어요.’로 마을 주민들에게 말을 걸었다.

퍼 : ‘선거하러 가자’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 ‘선거하러 가자’ 프로모션 영상

오 : 고토부키 마을에는 6,500명이 살고 있는데, 그만큼 투표할 수 있는 투표권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가 자기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을이 변화하기 위해서 행정 관료와 시장과 같은 정치인이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도 중요해요. 마을 정책을 직접 정하고 운영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투표도 굉장히 중요하죠.

퍼 : 후보자들도 이 마을에는 관심이 없었겠네요.

오 : 네, 이 프로젝트를 한 이유 중 하나가 정치 후보자들에게도 이 마을은 관심 밖인데, ‘여기에도 표가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거였어요. 또 색색의 화살표에 메시지를 담아 붙인 것 자체가 하나의 ‘공공예술’로 마을 전체의 색다른 이미지를 만든 효과도 있었죠.

퍼 : 투표율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나요?

오 : 있었죠. 그 때 전체적으로 투표율이 3% 감소했는데, 고토부키만 4% 증가했어요. 전체적으로는 7% 증가했다고 봐야죠. 그 다음 선거 때부터는 후보들이 이곳까지 유세를 하러 왔어요. 그러면서 이 마을을 직접 보게 된 거고요.

* 선거 투표율 그래프

오 : 투표율은 높아져서 뿌듯하고 다 같이 즐겁게 작업해서 즐거웠지만, 실은 그날 너무 고생했어요. 다시 또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웃음)

 

3. 고토부키 마을, 하나의 ‘면’이 되다.
 : 마을의 생태계 살피며 신진대사 설계

 

2005년에 호스텔을 오픈하고, 2006년에는 주민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교류하며 ‘호스텔 집들이’를 했다. 고토부키 마을 사람들도 호스텔이 낯선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할 이웃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오카베 씨는 마을 안에 튀는 존재가 아니라 슬며시 슬며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했다. 건물 한 채를 호스텔로 하는 게 아니라, 한 층만을 호스텔로 하고 그 외에는 주민들이 그대로 살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도 그 이유다. 여행자들도 계단과 공동 주방을 사용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주민 할아버지와 마주치며 인사한다.

 

퍼 : 마을의 텃새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나요?

오 : 호스텔에서 뭔가 이벤트를 할 때 안 좋은 시선으로 보던 할아버지가 계세요. 근데 어느 날 한 외국인 여행자를 데리고 프론트로 오신 거예요. 역 앞에서 호스텔을 못 찾고 있길래 직접 데리고 왔다며… 눈물이 날 뻔했어요.

그 순간 1평 평상 만드느라 망치질하고 페인트칠 하고, 투표하러 가자고 화살표 포스터 붙이느라 고생했던 그 모든 ‘삽질’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으리라. 2007년부터 호스텔 시스템을 도입한 건물이 늘어나며, 호스텔이 고토부키 마을의 중심 콘셉트로 자리를 잡게 된다.

퍼 : 처음에 호스텔을 만든 목적은 외국인 관광객의 흐름을 고토부키에 만드는 거였잖아요. 그렇게 외국인 여행객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나타난 변화가 있나요?

오 : 외국인 관광객이 드나들기 시작하면, 일본인들도 드나들기 시작해요. 일본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니깐 경찰이 이 지역까지 순찰을 돌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니깐 외관도 점점 깨끗해지고, 녹지도 많아지게 됐어요. 특히 여기 호스텔 앞의 거리는 굉장히 많이 변했죠.

퍼 : 만일 호스텔이 없었다면 그런 변화도 없었을까요?

오 : 녹지 사업은 지자체나 다른 곳에서도 하기 때문에 진행은 됐겠지만, 지금 보이는 이 거리가 이렇게 외관이 깔끔해지고, 일반인들도 자주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퍼 : 여기 ‘요코하마 호스텔 빌리지’ 말고도 빈 쪽방을 이용한 게스트 하우스나 호스텔이 많이 있는데, 이런 곳은 언제 만들어진 거예요?

오 : 아마 2007년도 이후에 생겨났을 거예요.

퍼 : 처음 다른 호스텔이 생겼을 때에는 라이벌 의식 같은 거 있지 않았나요?

오 : 원래 우리 호스텔에서 일하던 분이 따로 독립해 나가서 만든 게 시초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어요. 저 혼자 뭔가 해나가는 게 아니라, 그걸 따라하는 사람이 생기고 점점 확대되면서 그 흐름이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다는 걸요.

퍼 : 그래도 처음에는 의식을 좀 하지 않았어요?

오 : 조금은 했죠. 근데 경쟁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마을 전체에는 좋은 흐름을 가져다주는 거잖아요.

퍼 : 그렇죠. 여행자들도 많이 오게 되고.

오 : 장기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감각으로 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사람은 다양하고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제가 가진 의견이 더 정의롭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에요.

퍼 : 그럼 어떤 입장인가요?

오 :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거기서부터 다른 변화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 마을에서 호스텔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호스텔을 하는 거고, 마을을 좋게 변화시켜 나가는 데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할 수 있는 거고. 다른 호스텔들도 큰 흐름 안에서는 고토부키 마을을 더 좋게 발전시켜 나가는 파트너죠.

퍼 : 2005년에 호스텔을 만든 목적의 첫 단계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거였다면, 최종 목표는 뭐였나요?

오 : 어디까지 변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최종목적 같은 건 없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가진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어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이미지, 지역 자체가 위험하지 않더라도 그런 이미지가 마을의 긍정적인 변화를 방해하고 있었거든요.

퍼 : 그럼 마을의 긍정적인 변화를 방해하는 마을 이미지가 호스텔을 통해 개선이 되는 건가요?

오 : 실제로 외부 사람들이 직접 들어와서 보게 만든 거죠. 외부 사람들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흐름을 만들면, 직접 와서 보고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구나.’, ‘여기도 많이 변했구나.’ 라는 식으로 의식이 변하고, 마을 이미지도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변화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 지역이 없어질 리는 없거든요. 한편으로는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고요.

퍼 : 필요하다고요?

오 :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단, 점점 이곳에 빈 방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안 다니게 되면, 마을 분위기와 이미지가 더 악화될 확률이 있어요. 이왕 비어있는 거면 활용해가면서, 마을의 신진대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퍼 : 마을의 신진대사라…

오 : 마을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예요.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해나갈지는 몰라요. 저 역시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는 거죠. 저 한 사람이 뭔가 만든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아요. ‘아키하바라'(秋葉原)라는 지역 알죠?

퍼 : 네, 알아요. 한국의 용산과 같은 전자상가죠?

오 : 아키하바라에도 원래 전자상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런 가게들이 모여들다보니 오타쿠 문화까지 만들어 내고 있잖아요. 작은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축적되어 가면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처음부터 그런 문화를 만드는 지역으로 하자고 해서 모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기 때문에 비즈니스 마켓까지 만들어진 거죠.

퍼 : ‘관심’이 모였다가 맞겠네요.

오 : 고토부키 역시도 ‘마을 만들기’라는 공공의 목적만이 아니라, 호스텔 하면서 돈을 벌고 싶거나 뭐 다른 이유도 있을 텐데 각기 나름 자기만의 이유를 갖고 호스텔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결과적으로는 ‘고토부키초는 여행자들의 마을이다.’라고 이미지가 바뀌는 거잖아요. ‘하루 벌이 노동자의 마을’에서 ‘여행자의 마을’로 이미지가 변화한 것만으로도 아주 큰 변화라 생각해요.

인터뷰 내내 오카베가 뭔가 했다고 하면 ‘그래서 변했나요?’라고 묻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알고 싶어 하는 분야의 키워드를 넣으면 1초도 안되어 관련 자료가 쏟아지는 시대에 너무 휩쓸려있던 탓인가? 오카베는 마을의 신진대사, 마을이라는 생태계에 관해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오 : 아 맞다, 마침 그 시기에 도쿄 공예대학교 연구팀이랑 직접 유럽에 가서 이민 지역을 연구했어요. 유럽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에스닉(ethnic) 커뮤니티를 형성해 살고 있는데, 대체로 정돈된 느낌이었어요.

퍼 : 정돈된 느낌?

오 : 예를 들면, 인도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끼리, 유대인끼리, 인종별로 모여 살고 있었죠.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은 전통의상인 ‘사리’를 파는 가게들이 쭉 늘어져 있고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주해온 곳은 정육점이 즐비했는데, 같은 종류의 가게들이 모여 있어도 안 망하는 게 신기했어요. (웃음)

퍼 : 그러게요. (웃음)

오 : 그리고 인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주로 사는 이민가라고 해도, 어떤 지역은 카레집이 집중적으로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굉장히 모던해서 가게에 있는 마네킹의 자세도 굉장히 세련되더라고요.

퍼 :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오 : 빈부의 차이까지는 아닐 텐데, 번화한 곳과 번화하지 않은 곳의 차이가 뚜렷했죠. 차이나타운의 경우에는 이민 지역이 관광 지역으로 변화한 거잖아요? 인도 카레집이 많은 곳은 먹거리 거리로 유명해져서 외부 사람들이 온다거나, 사리 가게가 즐비한 곳은 패션의 핫스팟이 된다거나 하는 거죠.

퍼 :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진화하는 건가요?

오 : 처음에는 그냥 필요에 의해서 가게를 만들고 했을 텐데, 그 가게가 맛이 있어서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 지역 자체가 하나의 마켓을 형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마을의 변천을 보고 온 게 아마 지금 고토부키에서 호스텔을 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퍼 : 그게 언제쯤인가요?

오 : 2006~7년이었어요.

퍼 : 딱 고토부키초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고, 한 텀 끝날 때쯤이네요. 만일 고토부키초 이 지역 안에만 있었다면 프로젝트의 성과가 어떻게 마을의 변화로 나타났는지 찾게되고, 잘 드러나지 않았으면 좌절하고 그랬을 텐데, 그 시기에 맞춰 해외의 사례까지 보며 직접 비교하고 고토부키초에도 응용할 것도 발견했으니 정말 좋은 기회였겠어요.

오 : 맞아요. 이주한 에스닉 커뮤니티를 둘러본 건 저에게 정말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고토부키에서 활동할 때, 당장 직접적인 영향은 없어도, 그런 커뮤니티를 둘러보고 나서 다시 고토부키초에 와보니 어딘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죠.

퍼 : 비슷하다뇨?

오 : 뭐 인종이 다르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고토부키초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밖에서 들여다보면 고토부키초 지역 색이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잖아요. 그 정도의 인상이었지, 돌아와서 바로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오카베가 먼저 눈치를 챈 걸까? ‘이주민 거리 연구’가 고토부키 마을에서 활동하는 데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질문할 거라는 걸. ‘당장,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고 먼저 대답을 해주어 고마웠다. 이제 건축을 공부했던 오카베가 ‘건축물’이 아니라 ‘마을’의 관심을 갖기까지가 궁금해졌다.

 

4. 고토부키 마을을 찾아오기 전까지 (1)
 : ‘할아버지의 아이’에서, 럭비와 학교 축제가 즐거웠던 학창시절까지

 

퍼 : 오카베 씨는 어린 시절 어땠어요? 뭐에 관심이 많았나요?

오 : 저는 ‘할아버지 아이’였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랑 많이 놀았어요. 물론 가족이랑 같이 살기는 했는데, 할아버지 댁에 가서 같이 놀았어요. 근처 바다에 가서 물고기도 같이 잡고, 주로 해변에서 놀았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 뭘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의자도 만들고. 할아버지가 뭐든지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마당에 그네도 직접 만들어주시고,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뚝딱 만들어주셨어요. 그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아이’? 일본어로 ‘열쇠 아이’라는 말이 있다.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아이다. 부모님이 맞벌이일 경우 학교에서 돌아와 목에 걸린 열쇠로 직접 문을 열고 집을 들어가는 아이라는 말이다. 오카베의 부모 역시 어릴 때 일을 하느라 바빴고, 주로 할아버지가 돌봐주셨다고 했다. 아이들이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먹을 때, 자기는 할아버지와 근처 바다에 가서 낚시해 먹었다며 ‘바다가 나의 편의점’이라고 했다.

퍼 : 초등학교 때도요?

오 : 초등학교 때에는 뭐 매일 학교 다녔죠. 학교 끝나고는 뭐했더라? 평소에 나 자신에 대해 회고해본 적이 없어서… 매일 탐험했어요. 친구들이랑 자전거 타고 놀러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막대기 주어다가 빙글빙글 돌려서 그 막대기가 섰을 때 가리키는 방향으로 쭉 따라가 보거나 아지트도 만들고.

퍼 : 학창시절에 럭비 선수 했다고 그랬는데, 운동도 좋아했나요?

오 : (웃음) 운동을 좋아했다기보다 그건 좀 사연이 있어요. 럭비부 담당 선생님이 체육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이 담임선생님이었어요. 제 자리가 바로 교탁 앞이었던 거예요. 우리 반은 도시락 먹을 때 모여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먹었어요. 선생님도 교탁서 드셨는데, 선생님과 제 도시락 통이 같은 거예요. 왠지 모르게 그것 때문에 친해져서 어느 날 “너, 럭비부 들어올래?”라고 묻길래 “네… 네”하고 대답해서 들어가게 됐죠. (웃음)

퍼 : 운동 신경이 좋아서 스카웃된 게 아니군요!

오 : 그렇죠. 학교 축제에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아요. 각 반에서 뭔가 만들어서 발표해야하는데, ‘연극’을 발표하게 됐어요. 제가 담당했던 건 연극 엔딩 자막을 만드는 거였어요.

퍼 : 프리미어(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같은 걸로?

오 : 그 당시는 지금처럼 편집 프로그램이 편리하게 잘 되어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기계를 빌려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해야 했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엄청 집착하면서 연극에 참가한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 넣었죠. 근데 마지막에 집에 정전이 되서 다 날아간 거예요.

퍼 : 그래서요? 다시 했나요?

오 : 다시 했죠.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웃음) 아, 그리고 또 타임머신도 만들려고 했어요. ‘백 투 더 퓨처’의 영향이에요. 설계도까지 직접 그려서 학교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타임머신 만들려면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 만들 수 없단다.’라고 하셔서 실망했죠. 근데 왜 만들 수 없는지 그런 걸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즐거웠어요.

퍼 :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네요. 고등학교 때는 주로 뭐하고 놀았어요?

오 : 아, 고등학교 굉장히 자유로운 곳이었어요. (구글맵에서 찾아서 가리키면서) 여기 에노시마인데, 여기 해변 바로 옆에 있는 이 학교였어요.

퍼 : 아! 알아요! 혹시 만화 <슬램덩크>의 무대로 나온 그 학교 아닌가요?

오 : 맞아요! 날씨 좋으면 10시부터 여기 해변으로 나와서 도시락 까먹고, 수업 땡땡이 치고 여기 뒤에 있는 산에 가서 탐험했어요. (웃음) 학교 축제가 재밌는 걸로 유명했어요. 축제 끝나면 다 같이 해변 가서 술 마시면서 뒤풀이도 하곤 했는데, 경찰 오면 바로 해산해야하는 그런 뒤풀이였죠. ‘경찰 떴다!’ 하면 다 도망가고. (웃음)

퍼 : 하하

오 : 고등학교 때에는 아메리칸 풋볼 선수 했어요. 여기 학교 옆 건물 보면 여기가 아메리칸 풋볼 동아리실이었어요. 원래 화장실이었던 곳을 개조했는데, 실은 다른 메인 동아리실이 있었는데 저랑 제 친구들은 이 화장실 개조한 동아리실에서 줄곧 놀았죠.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큰 건물은 체육관인데, 여기 무대 밑에 물이 차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마 귀신이 있지 않을까. (웃음)

고등학교에 추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이야기 해주었다. 분명 그에게 학창시절이란, 이런저런 탐험거리와 같이 탐험할 친구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으리라.

 

5. 고토부키 마을을 찾아오기 전까지 (2)
 :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와 ‘안도 다다오’를 동경하는 건축학도

 

퍼 : 대학 때 전공은 왜 건축학과를 선택했어요?

오 : 글쎄요. 원래는 예술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주변에서 예술 전공하고 나와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그럼 다음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건축’을 하자고 결심한 거죠.

퍼 : 주변에 건축을 전공하고 있던 분이 있었나요?

오 : 아니요. 전혀 없었어요. 그 당시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라는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를 알게 되었어요.

그는 앞에 있던 노트북으로 검색해 그의 작품을 보여주며 하나씩 설명을 해준다.

오 : 대표적인 작품이 ‘낙수장’이라는 작품이에요. 일본 ‘제국호텔’도 이 사람 작품이고,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도요. 멋있죠?

퍼 : 고등학교 때 이 건축가를 알게 되고 동경하게 된 거군요.

오 : ‘이야, 멋지다!’라는 느낌이었어요. 이 사람 자체를 동경했다기보다 작품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작품도 작품인데, 그때 우연히 그 건물의 설계 스케치를 보게 되었어요.

퍼 : 뭐가 멋졌어요?

오 : 분명 옛날 사람인데, 지금 사람도 상상하기 힘든, 미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잖아요. 이 작품도 보면 미래에나 등장할만한 건물 같죠? 이 스케치 보세요. 굉장히 미래 느낌이 나죠? 지금 보면 뭐 당연하게 있을 법한 건물이지만, 1920~50년대에 이런 건물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건 굉장하지 않아요? 이런 디테일 좀 보세요.

퍼 : 그럼 오카베 씨도 이런 멋진 건물 만들고 싶어서 건축을 공부하게 된 거예요?

오 : 그렇죠.

퍼 : 누가 사는 집을 만들고 싶다 뭐 그런 게 아니라, 무조건 멋진 건물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오 : (웃음) 그 당시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하는 일과는 좀 동떨어져 있었죠. 당시에 안도 다다오가 일본에서는 유명했는데, 대학 들어가기 직전에 ‘안도 다다오 투어’라고 친구 한 명이랑 둘이 계획해서, 침낭 하나 달랑 들고 안도 타다오 작품을 보러 다녔어요. 이 작품은 고분 옆에 있는데, 작품 다 보고 고분 옆에서 잤어요. 해 떨어지면 정말 깜깜해지는데, 동물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친구랑 둘이서 ‘늑대 나타나면 어쩌지?’하면서 덜덜 떨며 잠을 잤죠. (웃음)

퍼 : 그 정도로 안도 다다오 작품에도 빠졌었군요.

오 : 안도 다다오의 경우에는 콘크리트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건축물을 만들어내요. 콘크리트 건축물의 모델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죠. 제가 대학원 다닐 때, 명예교수셨고, 마침 은퇴하기 전 해였는데, 마지막 수업 들었었죠.

퍼 : 그랬군요. 그런 작품을 직접 만들고 싶어서 건축을 전공하겠다 하고 대학에 갔는데, 직접 공부하면서는 어땠어요?

오: 건축물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 공간을 디자인 하는 작업이 많았던 것 같아요.

퍼 : 학부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으로 갔나요?

오 : 원래 학부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좀 했었어요. 일을 하면서 학부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졌어요. 제가 나왔던 대학은 대학 안의 교류는 활발했지만, 외부 교류는 적었어요. 좀 더 활발하고 해외 네트워크도 있는 그런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지요.

퍼 : 연구 논문 주제는 뭐였어요?

오 : 주차장 연구했어요.

퍼 : 주차장이요?

오 : 도시의 활동을 데이터로 수집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근데 각 지역의 주차장에 지금 몇 대를 주차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이트가 있어요. 1,000곳 정도의 주차장의 공차수를 5분 단위로 알려주는 사이트죠.

퍼 : 주차장 데이터를 다 수집해서 뭘 알아보려고 했나요?

오 : 대학원 교수 중에 한분이 택시 운행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연구했어요. 운행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기계를 구해서, 연구해보니, 퇴근 시간 이후에는 도심에서 단거리로 운행을 하는데, 저녁 12시 이후가 되면 도심에서 장거리로 운행을 하지요. 마치 데이터로만 보면 멀리 점프를 하듯이 말이죠. 12시가 대부분 막차 시간이라, 그 이후에는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퍼 : 그렇군요.

오 : ‘택시의 이동’이라는 것을 시각화하여 도시의 행동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죠. 일상생활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거죠. 주차장도 마찬가지인데요. 논문을 쓸 시기가 되니깐, 내가 생활하는 가운데 어떤 데이터를 수집해서 행동 패턴이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매일 길을 걸을 때마다 찾았는데, 주차장을 발견한 거죠.

퍼 : 의도한대로 주차장 자료가 수집됐나요? 논문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오 : 글쎄요. 일단 그걸로 논문을 쓰고 교수님한테 갖고 가니, ‘오랜만에 학생 논문 끝까지 읽어 봤네.’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퍼 : 오, 주차장 데이터 수집해서 얻은 결론이 뭐였는데요?

오 : 결론이요? 특별한 건 발견 못했어요. (웃음) 도시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주차장이라는 속성을 통해 알아본 건데, 번화가와 주거지와 같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지역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한 정도였어요. 예를 들면, 역 앞의 주차장 몇 곳을 비교해보면 어떤 흐름이 나타나는데 그걸 분류해서 ‘볼록형’, ‘우뚝형’ 등으로 타입화 시켜보는 거죠. 각 지역별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그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도 다 분석했고요. 연구를 했지만, 결론은 뭐 별다른 특징은 없는 것 같다고 마무리 됐지요. (웃음)

퍼 : 결국 특징은 발견 못했군요.

오 : 이 논문이 지금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됐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도움이 됐다면 됐겠는데, 안 됐다면 안 됐고. (웃음) 이런 도시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가시화한다거나 다른 시각으로 본다거나 했던 건 지금 하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겠죠.

 

6. 물건/건물에 대한 관심에서
일/행위에 대한 관심으로

 

퍼 : 그럼 건축의 하드hard한 부분이 아니라 소프트soft한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였나요?

오 : 그렇죠. 대학원 들어가서 도시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학부 때에도 교수님가운데 노테이션notaion을 전공한 분이 계셔서 알고는 있었지요.

퍼 : 노테이션요?

오 : 공간을 기술한다거나, 행동을 기술한다거나, 뭐라고 표현하기 굉장히 어렵네요. 공간 체험을 기술한다거나, 뭔가 한 행동을 기술한다거나 하는 분야예요.

퍼 : 대학원에서 그럼 그 분야를 전공했나요?

오 : 네, 제가 속한 연구실에서 노테이션을 전공한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어요. ‘도시론’이라고 한다면, 도시에서 일어나는 어떤 행동에 대해 초점을 두고 기술하는 거지요. 원래 멋진 건축물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대학원 들어가서 도시론을 공부하게 되면서 점점 소프트한 쪽에 가까워진 거죠.

퍼 : 그렇네요. ‘소프트’를 연구하기 위한 현장으로 고토부키초를 찾아온 거고요?

오 : 맞아요. 그 당시 한 지역에 거점을 두고 그 지역의 변화를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장기간에 걸쳐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퍼 : 연구를 넘어서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으로까지 옮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오 : 연구실 선배인 ‘오다 히로시’ 씨의 영향이 컸어요. 이 선배는 굉장히 재밌는 프로젝트 많이 하는 좀 이상한 사람이예요. ‘도쿄 피크닉 클럽’같은 걸 해요.

퍼 : ‘도쿄 피크닉 클럽’이요?

* ‘도쿄 피크닉 클럽’ 사이트  

오 : 네 말 그대로 피크닉, 소풍을 다니는 거예요. 도쿄도 잔디밭 같은 녹지가 굉장히 많은데 쓸 수 있는 녹지가 없어요. ‘들어갈 수 있는 녹지’보다는 ‘들어갈 수 없는 녹지’가 더 많죠. 잔디밭 보면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잖아요.

퍼 : 맞아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웃음)

오 : 왜 들어갈 수 없는지,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면, 시민들이 더 활발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데모만 한다고 뭐 변하는 게 없으니깐, 그냥 ‘소풍을 가자.’고 해서 같이 갈 사람들을 모아서 여기저기 들어갈 수 없는 녹지를 순회하는 거예요. (웃음)

퍼 : 오카베 씨도 참가했었나요?

오 : 저는 ‘피크닉’은 약하다, 가서 고기도 구워먹고 해야 한다 ‘바비큐’로 하자고 주장했죠. (웃음)

퍼 : 실행했나요?

오 : 바비큐는 못하고요. (웃음) 피크닉은 여러 곳에서 했어요. 도쿄뿐 아니라, 영국, 싱가폴까지 퍼졌고요. (바로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 보니 저녁에 공원으로 소풍가서 불꽃놀이도 하며 노는 ‘피크닉 인 더 다크’라는 것도 했네요.(웃음)

퍼 : 오, 재밌네요.

오 : 그렇죠. 이 선배의 영향이 컸어요. 이 선배뿐 아니라 주변에 이런 일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죠. 뭔가 변화를 만들어 낼 때, 자기들끼리도 즐길 수 있는 걸로 하는 거죠.

퍼 : 그럼 오카베 씨는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뭘 연구했나요?

오 : ‘population scape’라는 걸 만들었어요. 각 나라의 인구를 표현한 건데요. 아이치 박람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만들었던 거죠.

 

오카베가 건축을 전공했는데 마을 흐름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한편으로는 의외였다. ‘멋진 건물’을 지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게 건축가의 일 아닌가라는 편견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건축가는 일상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일상 생활공간을 디자인해 주거공간을 만들어 갔다고 치자. 그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곳에 사는 순간부터 일상의 ‘변화’와 마주하게 된다. 마을에 한 건물이 생겼다고 하자. 그 건물이 백화점이면 사람의 소비생활이, 그 건물이 오피스 공간이면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생활로 건물 주변에 상점도 들어서는 등 변화가 만들어진다. 어떻게 보면 건축가는 ‘변화’의 가장 기본적인 거점에 위치한 사람이다.

그가 건축을 공부하고 있었을 때, 일본은 그럴 땅도 별로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건축물 포화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멋진 건축물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았기에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건축학도들이 많아졌던 시기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이라는 분야가 ‘하드’한 것을 만들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 ‘소프트’한 것을 만들어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까지 분야를 확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않았을까?

 

7. 고토부키 마을의 새로운 변화에 맞서기
 : 사람의 입장이 아닌, 고토부키 마을의 입장에서

 

퍼 : 예전에 만났을 때, 고토부키초에서 앞으로 30~40년 활동할 거라고 했잖아요? 저는 그 대답이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거든요. 제가 일을 할 때에는 짧게는 한 달, 길어야 3년 정도 계획을 하고 하는 일인데, 어떻게 30~40년의 기간을 두고 일을 생각할 수 있는지!

오 : 그랬나요? 아! 제가 30~40년 활동하겠다는 게 아니라, 고토부키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보면 안 되고, 30~40년 걸려야 겨우 변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간을 두고 지속해야한다는 거였지요.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하다고 해서 마을에 커다란 변화가 온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매일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잘 축적되어야 하니, 최소 30~40년은 걸려요.

퍼 : 30~40년을 염두에 두고 하나씩 발전시켜 나가나요?

오 : 무엇보다 매일 꾸준히 담담하게 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거지요. 여기서 갑자기 뭔가 확신시키고 싶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퍼져나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고토부키 마을에 관련된 일은 기본적으로 하고, 다른 일도 해나가면서 운영비도 마련하면서 지속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지요.

퍼 : 그럼 여기서 평생 일하시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오 : 아니요. 물론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을 거예요. 계속 할 거예요. 작년 3월에 위기가 오긴 했지만요. (웃음)

2010년 3월 일본 출장 때에도 고토부키에 있는 호스텔에 묵으며 오카베 씨를 만났다. 리만 쇼크 이후 세계경제의 위기는 일본까지 바로 영향을 미쳤고, 파견 사원 등이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해 해고가 되면 바로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는데 비교적 30~40대의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고토부키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당시 1500개 가량 되던 빈 방도 거의 차게 되었다 했다.

오 : 그런 변화는 상상해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어서 아마 그렇게 걱정했었을 거예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어서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세계 경제 위기가 닥치니 이곳 인구가 급상승한 거예요. ‘대체 이 마을은 뭐지?’ 했어요. 놀랐죠.

퍼 : 그때 호스텔도 줄어들었겠네요?

오 : 호스텔 하고 있던 건물주들도 생활 보호 대상자들이 들어오니깐 월세를 받으려고 호스텔을 그만두고 다시 쪽방 임대업으로 돌아섰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호스텔은 여행자가 묵을 때에만 수익이 들어오니 매달 수익이 비정기적인데, 생활 보호 대상자가 들어가게 되면 매달 안정적으로 월세를 낼 수 있으니까 건물주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좋은 거죠. 그러나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몰랐고요. 지금도 모르고요.
 
퍼 : 그 위기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럼 지금은 적자겠네요?

오 : 꼭 그렇지는 않아요. 상황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요. 호스텔 자체에 나온 이익은 줄었으니, 고토부키 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다른 지역 컨설팅이라든지. 그런 일 하면서 운영비는 충당하고 있어요.

퍼 : 앞으로 대책은?

오 : 만일 일본에서 생활보호대상자 정책을 바꾼다면 이 마을이 다시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빈방이 다시 엄청 많아질 수도 있겠고요. 마을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니까, 그때그때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마을의 입장에서 어떤 흐름, 어떤 변화를 만들어갈지, 무엇이 필요한지, 궁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퍼 : 호스텔은 다른 사람들도 하기 시작했으니 오카베 씨는 이제 이 마을에 필요한 다른 일을 시도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겠네요?

오 : 맞아요. 한편으로는 고토부키초 지역 외에서 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 하나가 자전거 대여 인프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는 거예요.

퍼 : 그게 고토부키와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오 : 고토부키에 사는 사람들이 굳이 이 마을 안에서 일을 찾고 하는 게 아니라, 여길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일을 해보고 싶다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요코하마 전체에 자전거를 대여점을 만들 예정인데, 그러면 고토부키 외의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일을 소개한다거나, 요즘에는 아침 시장을 열어요.

작년 말, 고토부키를 찾아왔을 때, 오카베는 호스텔 근처에 있는 ‘가도베아’ 앞에서 대학생들과 할아버지들과 함께 야채를 팔고 있었다. 요코하마에 있는 농장과 요코하마에 있는 예술대학 학생들이 기획했다. 할아버지들이 직접 야채를 팔기도 사기도 하면서, 이 야채로는 뭘 해먹으면 맛있다느니, 요즘 제철이라느니, 고토부키 마을 외의 주민들과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토부키 마을 주민과 다른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퍼 : 작년 말에 왔을 때 아침시장 열렸던 게 그거군요.

오 : 맞아요. 직접 할아버지가 아침 장사에 참가도 해보고 거기서 야채도 직접 사고 하면서 참여하고 있어요. 고토부키초 외의 주민들도 많이 와서 사면서, 자연스럽게 고토부키초와 타 지역 주민들과 교류도 할 수 있고요.

퍼 : 그런 일은 처음에 어떻게 기획하나요?

오 : 주로 외부에서 제안이 많이 들어와요. 고토부키와 관련 없는 일도, 어떻게 이 마을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 염두에 두고 기획을 해요. 그러면서 고토부키초와 외부와 연결접점들이 만들어지는 거죠. 자전거 대여 인프라 만드는 일 역시, 처음에는 이 인프라를 요코하마에 만들 예정인데, 각 지역에서 누가 관리를 할 수 있는지 추천해달라는 제안이었어요.

퍼 : 그랬군요. 그냥 추천하고 끝내면 되는 일이었겠네요.

오 : 물론 자전거를 잘 관리할 단체들은 많이 있겠지만, 고토부키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근처에 니트, 은둔형 외톨이 친구들의 자립을 지원해주는 단체가 있는데 그런 단체와도 연결해서 진행해보면 좀 더 사회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런 곳 연결해주면서 지금 같이 진행하게 된 거죠.

작년 말에 만났을 때 고토부키에서 멀지 않는 지역에 사회를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보려는 청년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할 것이라 했다. 요코하마가 항구도시이기에 ‘교류의 거점’이라는 이미지도 있기에, 일본 외의 다른 곳의 소셜 비즈니스를 하는 곳과 연계해 운영하고 싶은데 한국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퍼 : 이번 3월에 오픈하는 ‘333 간나이 퓨처 센터’는 어떻게 관여하게 된 거예요?

오 : 한때 번성기였을 때 항구 쪽 건물들에 모두 회사가 있었어요. 지금은 경제도 안 좋아져서 빈 사무공간이 많이 생겨났어요. 그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의논을 하러 찾아왔더라고요.

퍼 : 고토부키에 빈 방에 여행자들을 초대했던 것처럼, 빈 사무실에 오카베 씨와 같은 청년들을 초대하려는 거였군요.

오 : 저도 처음에 뭔가 하려고 했을 때 그런 공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했어요. 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자본이 없어도 회사등록을 할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저렴하게 공유해줄 만한 곳이요. ‘333 간나이 퓨처 센터’는 그 모든 걸 다 할 수 있도록 세팅해두었어요.

퍼 : 그럼 그 건물이 ‘소셜 비즈니스’의 거점이 되겠네요.

오 : 그 건물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도 바뀔 거예요. 일단 센터에서 사업의 기반이 잘 잡히면 그 주변에 빈 사무실로 독립해 나갈 수 있겠지요. 그 회사들과 협력하고 싶은 곳도 그 주변에 다시 입주할 거고, 고용까지 창출해낼 수 있게 되지요. 고토부키 마을 주민들에게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에요.

‘고토부키 마을’의 빈 방을 활용해봤던 경험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점점 더 ‘고토부키 마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세팅을 하는 그의 상상력, 그의 변화의 상상을 따라가노라면 나도 절로 신이 난다.

퍼 : 결국 제안이 들어오면 다시 역제안 하는군요? 뭔가 ‘서류’와 같은 딱딱한 움직이지 않는 걸 통해 들어온 제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과 같이요. 그리고 오카베 씨도 직접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거죠.

오 : 맞아요. 바로 그거지요. 새 생명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웃음) 그런 작업 과정이 분명 요코하마 전체로 봤을 때 좋을 것이고, 사회 전체로 봐도 더 도움이 되면서 즐거운 일이 될 거라 생각해요. 그런 걸 염두에 두면서 다시 역제안을 해보는 거죠.

 

8. 마을을 만드는 네트워크의 핵심
 : who(어떤 사람)이 아닌, where(어디에 있느냐)

 

퍼 : 호스텔이 여기에 계속 있을 터고, 오카베 씨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요?

오 :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단위보다 조금 더 확장된 단체가 하나 만들어질 것 같아요. 호스텔 자체만으로 적자 없이 운영을 하는 건 무리이기 때문에 좀 더 큰 단체에서 다양한 일 중에 하나로 호스텔 일을 맡으면 더 지속가능하게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퍼 : 그럼 변화도 더 확장되겠네요.

오 : 물론 변화 역시 더 확장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마을 만들기의 순환구조’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작게 하면 할수록 작아지는 건 아닌가 싶어요. 하나의 조직이 안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넓은 단위로 확장해 나가야 하는데, 이건 분명 여기 호스텔뿐만 아니라 일본의 시민운동의 흐름에서 봤을 때에도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퍼 : 지금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단카이 세대 등과의 교류는 어떤가요?

오 : 처음 호스텔 할 때에는 단카이 세대와도 협력해 진행했어요. 실은 바로 옆에 있는 호스텔이 처음에 같이 호스텔 했던 분이 독립해서 차린 거죠. 진행하면서 역시 의견 차이가 있어서, 그럼 따로 하겠다고 해서 옆에서 다른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었죠.

퍼 : 그래도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왔던, 전 세대의 유산이나 그런 것을 이어받고자 노력한 적은 없나요?

오 : 뭐 사람에 따라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잘 이어받고자 하는 사람도, 물려주고자 하는 사람도.

퍼 : 일본은 굉장히 다양하고 참신한 사회 변혁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는 있는데, 각 단체별 사업별 세대별 지역별로 비슷한 분야끼리의 네트워크나 공동사업 기획 등은 약하더라고요. 조금만 더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면 시너지가 날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요. 그나마 다른 곳보다 오카베 씨가 고토부키를 중심으로 진행했던 일은 비교적 다양한 분야의 네트워크 활발하게 협력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 : 그런가요? 지금까지 하나하나의 활동 자체만은 좀 미약했지만, 비슷한 것을 연결시켜 나가면 더 영향력 있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한국은 그런 점은 강한 것 같은데 일본은 그 점이 약한 것 같아요. 각각 자기 영역에서만 하려고 하니까요.

퍼 : 왜 각기 자기분야 안에서만 하려고 하는 걸까요?

오 : 하다보면 자기랑 다른 의견도 나오곤 하는데, 그러면 다른 의견 가진 사람이 ‘그럼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해봐야지’하잖아요. 이런 현상은 자발적으로 생겨난 단체, 사업에서는 많이 벌어져요. 월급을 받고 어디에 고용돼서 일을 하게 되면 의견이 다를 때 따로 한다고 하면 원래 받게 되던 월급을 못 받을 수 있게 되니까요.

퍼 : 자발적으로 하는 일에는 그런 속면도 있었네요. 근데 오카베 씨는 어떻게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단체들과 협력하고 포용하면서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오 : 저도 모두 다 같이 행동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같이 의견을 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으면 어떨까 해서 시도해보는 거지요. 의견을 낸다는 것은, 요코하마시한테 ‘이 지역은 이렇게 바꿔야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의견을 낼 때에 저 혼자 하는 것보다, 몇 십 개의 단체가 제안하는 것이 ‘시민의 의견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퍼 : 그런가요?

오 : 혼자 제안하면 그저 불만이 될 수도 있고, ‘그건 너의 의견이지?’라고 반문할 텐데, 서명과 같이 ‘이정도의 사람이 동의하는 의견입니다’하면 달라지니까요. 저는 결국엔 이게 오히려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초가 될 거라 봐요. 아닌가요?

퍼 : 직접 시장이 되거나 하면 빨리 해결될지도 모르겠네요.

오 :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아직은 젊잖아요. (웃음)

퍼 : 고토부키 마을은 지금 오카베 씨의 현장이잖아요. 고토부키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오카베 씨가 움직여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텐데요, 뉴스 같은 데서 다른 지역 혹은 일본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에는, 왜 저렇게 밖에 못하나 하고 답답해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오 : 근데 전 답답하다기보다는 하나씩 해나가야지, 해나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일단 다 관심은 갖고 있어요. (웃음)

퍼 : (웃음) 그래요?

오 : 요즘에 구상하고 있는 게 있어요. 지금까지 자기 집은 사적인 공간이고, 거기서 한 발짝 나가는 순간부터부터가 공공의 장소이기에 정부, 지자체가 책임져야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잖아요.

퍼 : 그렇죠. 공공장소.

오 : 어느 날 집 외에도 일을 하는 일터, 회사까지 갈 때  거쳐 가는 길, 그리고 집 주변도 모두 자기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개념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정부나 지자체에게만 책임을 맡기는 공간이 아니라 ‘같이 만들어 가야할 공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 주변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니까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책상 위의 펜을 들고 말을 이어간다.

오 : 어떤 척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이 펜을 볼 때도 이 펜만 보는 것과, 이 펜이 놓인 테이블 위를 보는 것, 나아가서 이 펜이 있는 이 호스텔 프론트 공간 안에서 보는 게 달라지잖아요. 테이블 위해서 보면 옆에 있는 노트에 쓸 수 있는 펜이 되고, 좀 더 나가면 노트에 뭔가를 쓰고 그걸 누군가에게 전달해서 알리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거죠.

퍼 : 어떤 면에서는 지금 사회가 그렇게 점점 넓은 각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이 생겨나면 반으로 쪼개지고, 또 그 안에서 의견이 다르면 쪼개지고, 그걸 반복해서 파편화된 걸 수도 있겠군요.

오 : 그 갈라진 지점을 이어보는 걸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모두 다 연결할 필요는 없지만, 만일 저를 통해 서로 다른 곳이 연결된다고 하면 저 역시 그곳과 연결된 거잖아요. 전 네트워크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 같고,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퍼 : 그렇네요. 어떤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하는 걸까요?

오 :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곳’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사람의 성향이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바로 ‘어떤 곳인가요?’라고 물었을 거다. 그는 전화를 받았고 쉽게 끊지 않을 듯한 전화인 것 같았다. 혼자 ‘어떤 곳이지, 어떤 곳이지, 어떤 곳일까?’ 되물었다. 10분 후, 그의 전화가 끝났지만 바로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네트워크, 연결의 접점인 그곳이 과연 어디인지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9. 대지진 이후에 설계하는 마을 Earth Society

 

마감이 다가오고, 글을 마치기로 한 날, 그가 그동안 교류를 하고 있던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 메일을 번역해 전달해 달라며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생각한 것을 간략히 정리했는데, 여기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덧붙이고 실제 협력자들을 찾아 실행해 보겠다고 했다.

다음은 메일 전문이다.

 

이재민 구제 준비에 협력을.

현재, 일본의 동북지방에서 지진, 그리고 원자력 발전의 피해로 인한 이재민이 있습니다.
이재민이 매우 많으며, 피해 지역 또한 방대하기에, 향후 가주택의 건설은 장기화 될 것이고, 수입이 맞지 않을 상황이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활동하고 있는 요코하마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주거 환경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직접 재해 지역에 가서 서포트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재민을 서포트할 수 있게 되고, 요코하마는 도쿄에서도 가까우며, 많은 시민 단체나 중간 지원 조직이 있습니다.

요코하마에는 빈 방이나 빈 집도 있기에, 그곳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향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며, 정신적 치유와 돌봄(멘탈 케어)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서포트할 수 있는 체제를 지금부터 정돈해두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이 준비는 저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의 부동산 소개소나 협회, 시민단체, 중간지원조직 등 많은 단체, 사람들과 협력해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해야 합니다.

2, 또한, 정신적 치유와 돌봄을 할 수 있는 전문 인재 확보, 주거 공간 확보, 재해지부터 이곳까지의 이동을 위한 자금을 준비하는 모금도 실시해야 합니다.
 
3, 나아가 장기적인 전개도 고려하여,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갈 필요, 예를 들어, 국내는 물론 공정 무역과 같은 글로벌인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방 자치체도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지방 자치체의 움직임은 느릴 뿐 아니라, 이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쩌면 지자체의 힘만으로는 수입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지점에서의 여러분의 협력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2010년 3월 17일 오카베 토모히코 드림

 

이 메일은 한국을 비롯, 중국, 영국 등 그가 그동안 교류를 했던 곳에 모두 전달되었다. 메일을 다 읽고, 3년 전 그가 만든 고토부키 프로모션 영상을 봤을 때와 같은 신선한 충격이 또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7년간 7000명이 사는 작은 고토부키 마을의 신진대사를 설계했던 그는 어느새, 요코하마시의 신진대사, 일본의 전 지역의 신진대사, 나아가 세계의 신진대사마저 살피며, 지금 자기가 뿌리내린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지진 소식으로 어수선했던 마음이 그의 도움 요청 메일로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이후 원전 폭발 소식에 과연 요코하마로 받아들이는 게 과연 안전할지 걱정이 시작됐다. 언론에서는 ‘침착한 일본’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지만, 정작 일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사재기는 다 끝났고, 방사능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도쿄에 있던 친구들은 더 남쪽 지역으로 이주를 하고, 심할 경우 외국으로 피난하기 위해 여권을 만들고 있다 했다.

오카베에게도 곧 연락이 왔다. 요코하마보다 이재민들이 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다른 지역이 있을지 알아보고 그곳으로 지원금과 물자가 흐를 수 있도록 할 것이라 했다. 그가 뿌리내린 곳이 ‘요코하마의 고토부키’라고만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 수 있겠다 싶었다. 어느 특정 지역으로 한정된 게 아니라 ‘마을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그곳일지도 모르겠다.

* 오카베가 이번 대지진 이재민을 돕기 위해 만든 facebook – Earth Society
http://www.facebook.com/pages/Earth-Society/142376779161424
* Earth Society 문의 : 모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