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굴을 파다 – 단편선

풀 네임은 회기동 단편선.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비평하기도 한다. 두리반을 만나고 나서 본인이 고민해 오던 ‘정치와 음악이 맞붙는 지점’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작년 5월 1일의 ‘51플러스 조직 뉴타운컬처제공 재개발파티’ 기획을 시작으로 ‘자립음악생산자모임’을 조직하는데 일조. 석관동에 공간 ‘클럽 대공분실’을 오픈하기 위해 분주한 그를 만났다.

작년 5월 1일 메이데이. 홍대 앞의 철거 투쟁 현장 ‘두리반’에는 60개가 넘는 밴드들이 모였다. ‘홍대 클럽 공연사’ 같은 것이 있다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이 공연은 이미 이름이 많이 알려진 밴드에서부터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노이즈 음악을 하는 밴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성 ‘돋는’ 라인업을 자랑했다. ‘51+재개발 파티’라고 불린 이 공연 덕분에 두리반의 힘겨운 투쟁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자세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공연하는 철거 농성장’ 정도로 두리반을 인식시키게 된 데에는 이 거대한 기획이 한 몫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두 밴드가 공연을 하는 작은 행사를 기획하고 치러본 경험이 있는 나는 ‘60개의 밴드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행사’라는 생각만으로도 이 일을 치러낸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다녀온 지인들로부터 그날이 대단했다는 말은 익히 들어오던 바였다. 이 ‘기획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어 달 전 두리반 투쟁의 주체인 안종녀, 유채림씨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두리반을 드나드는 동안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어떤 에너지들이 응축된 그 ‘공간’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그곳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긴 철거민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처절한 농성장이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분명히 그 이상의 ‘정치적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기를 뿜어내며 두리반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곳을 위해 해야 할 저항을 벌여 나가고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제 두리반은 유채림, 안종녀 씨만의 두리반은 아니게 되었고, 이 싸움도 철거민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철거 농성’으로만 기록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공간에서 싸움을 만들어 온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어떤 길들을 지나 두리반에 도착한 걸까. 어떤 생각들이 그들의 삶을 스쳐갔을까. 자연스럽게 선택된 인터뷰어는 단편선(@danpyunsun). 그는 작년 3월부터 매주 토요일 ‘자립음악회’를 열며 두리반을 지키는 활동가였는데, 알고 보니 51+재개발 파티의 기획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트위터 바이오에 쓰인 대로라면 열 개도 넘는 직함을 가진 그와의 흥미진진한 인터뷰를 기대하며 퍼슨웹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51+ 파티, 음악으로 저항하다

 

퍼슨웹(이하 ‘퍼’): 지난 3월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꾸준히 두리반 자립음악회를 열어왔어요. 처음에 두리반에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단편선(이하 ‘단’): 제가 작년 3월쯤에 전태일 거리문화제*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공연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현장에서 활동하는 음악활동가들을 처음으로 만났는데, 거기서 한받 씨를 만난 거예요.

*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다리로 부르게 됐지만> 기사 보러 가기

퍼: 한받 씨는 홍대에서 ‘아마추어 증폭기’로도 활동하셨죠?

단: 네. 요즘에는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두리반 이야기를 듣고 한받 씨와 함께 처음 오게 됐는데, 저희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공연을 해서 두리반을 도우면 어떨까 싶었어요.
  
퍼: 작년 5월 1일 메이데이 때 열렸던 51+ 파티도 그 날이 토요일이었으니까 자립음악회였던 거네요? 어떻게 그렇게 큰 공연을 열 생각을 했어요?

* <그룹51, 노동절 ‘뉴타운컬쳐파티’> 기사 보러 가기

단: 그게 뭐 체계적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었어요. 3월 말이었나 한받 씨가 SSAM이란 클럽에서 공연하신다고 해서 놀러갔어요. 제가 원래 한받 씨 팬이거든요. 거기서 기타치고 놀고 있다가 핸드폰 스케줄러 보니까 올해 메이데이가 토요일이네, ‘자립음학회 하는 날인데, 저희 이날 크게 공연이나 할까요’ 했죠.

퍼: 그랬더니요?

단: 그러니까 한받 씨가 특유의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그러면 51밴드 모아서 공연할까요’ 하시는 거예요.

퍼: 51 ‘밴드’가 움직이는 거면 일이 엄청 커지는 건데.

단: 그러니까요. 저는 ‘51밴드 말고 51명 하죠’ 하다가 어쩌다보니 ‘51밴드’가 된 거예요.

퍼: 처음엔 꽤 막막했겠어요.

단: 그렇죠. 이거 뭐 규모도 안 잡히고. 우선 우리가 듣고 싶은 밴드들 목록을 쭉 적고 그 밴드들에게 이메일을 써서 돌렸어요. ‘음악가도 노동자 아니냐. 홍대 앞에 자본이 들어오고 있는데 두리반이라는 곳이 지금 쫓겨나려하고 있다. 우리 선배들도 다 그렇게 쫓겨나지 않았느냐.’ 뭐 이런 맥락으로.

퍼: 사람들은 그냥 ‘51 플러스’, ‘51플러스 파티’ 이렇게 불렀지만 정식명칭은 엄청 길던데?

단: ‘51플러스 조직 뉴타운컬처제공 재개발파티’(http://www.party51.com/main.htm)에요. ‘재개발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이 제공해준 파티다, 우리의 미학은 더 이상 도시나 언더그라운드가 아니고 재개발의 미학이다’ 뭐 이런 정리되지 않은 얘기들이 있었죠.

퍼: 아무튼 5월 1일 공연에 60개가 넘는 밴드들이 두리반에 모였죠.

단: 그러니까요. 신기하게도 회신이 오는데 다 한다는 거예요. 그동안 정치적인 움직임 없었던 ‘3호선 버터플라이’나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백현진’씨까지.


퍼: 예상치 못했던 밴드들도 거의 왔던 거네요?

단: 그렇죠. 그동안 음악가들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고 싶어도 이렇다 할 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퍼: 한 번에 모으기 진짜 어려운 라인업이라 아마 ‘홍대 클럽 공연사’ 같은 것이 있다면 길이 기록해 둬야 할 일이에요. 라인업은 어떻게 짰어요? 기준이 있었나요?

단: 기준은 그냥 우리가 듣고 싶은 밴드나 가수였어요. 다들 취향이 있다 보니 어찌어찌 라인업이 잘 짜였죠.

퍼: 행사 준비는 어땠나요?

단: 4월 첫째 주가 되니까 한 달 남은 건데 우리한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스텝도 없고 음악가 몇 명만 있었는데, 20 몇 팀은 벌써 섭외가 되어있고. 그때부터 발등에 불 떨어져서 정신없이 겨우 치러낸 거죠.

퍼: 사람도 엄청 왔죠?

단: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 많이 왔어요. 3천 명 정도 온 것 같아요.

퍼: 라인업이 다 추려진 후에도 공연하고 싶다고 밴드들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구요?

단: 네 그랬죠. 참여 밴드가 60개가 넘어가면 힘들 것 같아서 안 되겠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까지 됐어요.

퍼: 파티가 성황리에 끝나서 다들 붐업 됐겠어요?

단: 끝나고 한동안은 굉장히 패배적이었어요.

퍼: 의외인데요? 왜?

단: 끝나고 얼마 안 돼서는 공연하면 밖에서 오는 관객 수는 전과 똑같고 뭐 가시적인 효과는 안 보이는데, 내부 사람들은 많이 불었거든요. 스텝으로 뛰었던 청소년 활동가도 들어오고. 사람이 많아지니까 의견 조율도 안 되고 분란도 생기고 하니까 우리가 이걸 괜히 했나 하는 자책을 많이 했어요.

퍼: 내부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단: 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거치면서 빠질 것 빠지고 들어올 것 들어오면서 카오스 상태도 좀 정리가 되고 작년 말 정도에 두리반이라는 공동체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고 생각해요. 공연 관객들도 꾸준히 늘기 시작 했구요. 음악가들도 계속 와서 놀고.

퍼: 개인적으로 51+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요?

단: 아무래도 큰 일이었죠. 제게도 두리반에게도. 생각했던 것만큼 엄청난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뭔가를 했다는 건 있어요. 두리반은 계속 이렇게 운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우리가 또 계속 해 나갈 거고 두리반에서 이런 걸 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아요.

퍼: 철거 농성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는 농성이 되었어요.

단: 처음 저희가 올 때만 하더라도 작은 농성장이었는데 이제 두리반은 한국 사회에서도 중요한 농성 중 하나가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진행되어 온 농성이 없었죠.

퍼: 한받 씨는 요즘 두리반에서는 안 보이시는 것 같던데.

단: 얼마 전에 아빠가 됐거든요. 애기 보느라 요즘 두리반에 잘 못 와요.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 우리끼리는 한집사라고 불러요. (웃음)

퍼: 개인사적으로 ‘두리반’의 영향이 크죠?

단: 그렇다고 생각해요. 두리반에 온 뒤에 만드는 음악도 많이 달라졌어요. 그전까지 교류가 없던 친구들하고도 많이 교류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음악적인 것들을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음악가들의 자립을 위하여

 

퍼: 51+파티의 여파로 ‘자립음악생산자모임’이 결성됐다죠?

단: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다들 ‘우리 이걸 단발성으로 끝내면 안 된다.’, ‘뭔가를 해야 한다.’ 그랬죠. 근데 음악가들끼리 할 수 있는 ‘협동조합’ 방식의 어떤 공간을 만들자는 얘기는 한받 씨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이미 해오던 얘기들이었어요.

퍼: 여기서 ‘자립’의 의미는 뭔가요?

단: 우선 음악가 자신이 사회 속에서 스스로가 생산자임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악의 생산과 유통을 통하여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죠.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더욱 좋은 질의 음악을 만들어낼 토대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거죠.

퍼: ‘자본’으로부터의 자립이라는 의미도 있나요?

단: 어느 정도 그렇죠. 클럽, 레이블 같은 기존의 소자본 유통망을 경유하지 않거나 일부만 경유하고서도 독자적인 공연 기획과 음반 유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을 갖게 되는 게 이 모임의 큰 목적이기도 하구요.

퍼: 조직의 형태는 ‘협동조합방식’이라구요?

단: 네. 이 형태에 대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요. 우선 출자 방식으로 하니까 리스크가 적구요. 정도나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씩 의견이 달라서 앞으로 계속 조율해 나가야죠.

퍼: 생활협동조합, 의료생활협동조합처럼, 음악협동조합이 되겠군요?

단: 음악가들이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장이 만들어지는 건 중요해요. 녹음을 하고 데모를 만드는 공간일 수도 있고, 공연을 하는 공간일 수도 있어요.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게 우선은 이 모임의 주된 작업이에요.

퍼: 음악 생산자들에게 유용한 공간이 되겠네요.

단: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장비도 필요하고 공간도 필요하죠.

퍼: 음악 장비들이 비싸죠?

단: 그렇죠. 개인이 구비하려면 돈이 많이 들죠. 그런 것들을 공공으로 소유하자는 거예요.

퍼: 아무래도 그런 공간 있으면 음악 만드는 사람들은 많은 돈 안들이고 자기기 원하는 음악 만들 수 있겠네요.

단: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산된 다양한 음악들 속에서 자기에게 맞는 음악을 찾아들을 수 있으면 좋은 거구요.

퍼: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홍대 씬은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게 안타깝죠.

단: 다들 그런 문제의식이 있어요. 홍대 씬이 많이 상업화 되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상업화 자체가 나쁘다는 입장은 아니에요. 문제는 소수 장르, 사람들이 많이 안 듣는 장르는 버틸 수가 없다는 거죠.

퍼: 그런 거 하는 데는 점점 망해가죠.

단: 많이 했던 클럽들도 이제는 못 해요. 유지가 안 되니까. 언더그라운드라고 하는 게 엄청나게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는 상태여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퍼: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설 자리가 없죠.
 
단: 네. 엄청나게 이상한 기획들도 존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두리반은 이런 저런 시도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괜찮은 공간이에요.

퍼: 현재 구성원은 몇 명 정도 되나요?

단: 15명 정도 됐어요.

퍼: 아직 정식 조직은 아니죠?

단: 네. 준비 모임이고 3월쯤에 정식으로 발족을 하려고 해요.

퍼: 공간을 꾸리는 것 말고도 준비하고 있는 활동이 있나요?

단: 2월에 음악가들을 위한 대안저작권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직 확정된 상황은 아니에요. ‘자립’할 수 있으려면 법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되거든요.

 

 

 

새로운 굴을 파다.

 

퍼: 석관동에 ‘클럽 대공분실’이라는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단: 네. 여기가 자립음악생산자 모임에서 준비하는 첫 거점이 되는 거구요. 더 나중에는 석관동 쪽에 가급적 여러 군데 네트워크를 만든 다음에 거기서 새로운 어떤 시도들을 해보는 거죠.

퍼: 홍대에서는 비싸서 엄두를 못 냈던 시도들 해볼 수 있겠네요.

단: 장기적인 프로젝트들도 구상해 볼 수 있겠죠.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교육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공연을 하는 새로운 씬이 될 수도 있고요. 이런 게 만약 생긴다면 홍대와는 좀 달랐으면 좋겠어요.

퍼: 진척은 어느 정도 되고 있어요?

단: 아직 돈이 없어서 별로 진척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내일 후원기금 마련 공연하는 거예요. 돈이 아주 조금은 있어야겠더라구요.

퍼: 공연 표 미리 선매했는데, 매진됐다면서요?

단: 한 120장 정도만 만들었어요. 두리반에서 하는데 공간도 그렇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면 공연을 잘 못 즐기니까.

퍼: 표는 한 장에 얼마?

단: 2만원이요. 총 수입에서 밴드들에게 돌아가는 페이 빼고, 두리반 후원금 빼고 150~200만원 정도면 클럽 꾸미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들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퍼: 오픈은 언제에요?

단: 3월쯤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클럽 오픈식 하면서 ‘자립음악생산자모임’ 정식 발족식도 같이 하려구요. 그러고 나서 차근차근 해나가야죠. 한 십 년에서 이십 년 정도로 길게 보고 있어요.

퍼: 오, 이건 대한민국 ‘국가’ 단위에서도 보지 못한 거시적 관점! (웃음).

단: 서둘러서 엄청나게 키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내실을 쌓아가면서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다 같이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퍼: 대공분실 오픈하면 가난한 사람들 돈 없어도 공연 볼 수 있나요?

단: 고민하는 지점이에요. 밴드들 페이를 주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 무료 공연을 할 수는 없는데 만약 무료로 한다면 알콜을 팔아야 되나 생각하고 있어요. 돈을 받는다면 염가로 하겠죠.

퍼: 클럽을 할 만한 공간은 어떻게 얻었어요? 꽤 커야 할텐데.

단: 한예종 학교 밖에 동아리 연합회가 쓰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 지하가 비었어요. 우리가 동아리 연합회랑 짜고 거기를 클럽으로 만들려는 거죠.

퍼: 아 그럼, 정식으로 돈을 내고 빌리는 게 아니라?

단: 돈은 안 들어요. 돈 들면 못하죠. (웃음) 쓰지 않는 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해서 쓰는 스쿼팅(squatting. 빈 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사용하는 행위) 같은 건데 엄밀히 말하면 스쿼팅은 아니죠. 동아리 연합회랑 말은 맞췄으니까.

퍼: 우리나라처럼 건물 소유에 대한 개념이 철저한 나라에서는 스쿼팅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단: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는 건물주 한예종에서 방 빼라고 하면 방 빼면 되요. 또 다른 데로 옮기면 되니까. 쫓겨나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계속 뭔가를 배제하고 쫓아내는 시스템이니까.

퍼: 음. 그럼 뭘 할 수 있을까요?

단: 우리는 계속 굴을 팔 수 밖에 없는 거죠.

퍼: 굴?

단: 생각해보니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이 모두 어떤 굴을 파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어른들 눈을 피해 어떻게든 벙커 같은 거를 뚫고 그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고.

퍼: 지금 대공분실도 또 하나의 굴?

단: 그쵸. 언더그라운드 씬에 벙커 같은 걸 파는 작업인 것 같아요. 열심히 파서 거기서 열심히 놀다가 나가라면 또 다른 데 파서 놀고.(웃음) 두리반도 어떻게 보면 제대로 된 굴을 하나 판 거죠.

퍼: 어떤 의미에서?

단: 두리반에서는 이런 저런 실험들을 많이 해 볼 수 있었어요. 또 열심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놀았고.

퍼: 홍대에 괜찮은 거 하나 파는 시도를 했으니 이 경험으로 계속 다른 곳에?

단: 네. 파고, 파고, 또 파는 거예요. 계속 파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그 굴 중에 어딘가에서는 자그맣게 생태가 가능해질 수도 있구요. 그러면 썩 괜찮은 거죠.

퍼: 이런 ‘굴’의 은유, 재밌어요.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단: 군대 있을 때 촛불 집회가 시작됐거든요. 제 인생에 큰 사건이었죠.

퍼: 어떻게 알게 됐나요?

단: 인터넷 신문으로 봤어요. 촛불 집회라는 걸 한다는데 보니까 와 이건 내가 원하는 시위였던 거예요. ‘존나 가고 싶은데 나는 여기에 있네.’ 하면서 맨날 인터넷 신문들 검색해서 기사 보면서 눈물을 흘렸죠 아주.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퍼: 조금 설명해주세요.

단: 뭔가 새로운 정치적 공간이 생겨난 것 같았어요. 그동안 생각하던 이상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것에 가장 근접한 어떤 방식이 현실화 되는 걸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로망 같은 게 그때부터 저한테 생겨난 것 같아요. 그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구요.

퍼: 그랬구나.

단: 제가 촛불 집회를 통해 봤던 건 어떤 정치적 구멍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정치의 공간으로서의 어떤 구멍. 그 구멍에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 상상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퍼: 휴가 나오거나 해서 직접 가보기도 했나요?

단: 한참 격렬할 때는 휴가를 낼 수가 없었어요. 휴가 나오니까 끝나버렸더라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촛불 시위에 직접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상상들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퍼: 어째서요?

단: 직접 갔었다면 그런 일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제약이 있는지 알았을 거고, 후진 부분도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걸 다 목격했다면 제 생각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오락왕, 음악을 시작하다.

 

퍼: 트위터 팔로우 하고 있어요. 바이오에 뭐가 이렇게나 많아요?

“25남, 서울 양천구, 음악가, 자유기고가, 자립음악생산자모임 구성원, 공산주의자, 한국마오쩌둥협의회 조직원, 대중음악전문웹진 보다(bo-da.net) 필진, 진보신당 마포구 당원, 가라타니 고진, 메를로 퐁티, 음예술은 (어떤식으로든) 과잉을 현시해야 한다.”

단: 뺄 거 다 빼고 남은 게 이겁니다.

퍼: 남은 것 치고는 꽤 많은데.

단: 원래 엄청 많은데, 이거 두 배의 길이였거든요.

퍼: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고, 한국 마오쩌둥 협의회 조직원? 이건 뭐에요?

단: 이거, 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직원은 총 3명이에요. 박가분이라는 인문학 공부하는 친구와, 홍명교라는 영화하는 친구와 저. 이렇게 셋이 조직원인데 한 번도 모인 적이 없고 우리는 그냥 ‘마오가 좋아, 마오짱! ’이런 분위기의 조직이에요. 심지어 친하지도 않아요, 셋이.

퍼: ‘음악가’ 라는 프로필이 제일 먼저 나오는군요. 처음에 단편선 만났을 때 뮤지션인 건 몰랐고 두리반 대변인인 줄 알았어요 (웃음)

단: 저 중 3때부터 음악 했어요. 처음에는 일렉트로니카를 하고 싶었어요. 투스텝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팝적이고 비트로 치면 음타 음음타 음음타 음음타, 살짝 째지(jazzy)한 피아노 나오고 하는 장르인데 우연한 계기로 이런 음악들을 접했어요.

퍼: 뮤지션들의 전형적인 입문 스토리 같은 건가요? 사촌형이 음악 매니아여서 집에 음반이 엄청 많았다던가, 아버지가 기타를 사줬다던가..

단: 아, 그런 거라면, 저희 어머니가 현대 무용 전공하셔서 집에 클래식 음반도 많았고, 아버지가 음악을 워낙 좋아해서 엘피가 많았어요.

퍼: 역시나.

단: 근데 그런 것보다 그냥 심심해서 음악을 만들게 됐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고 1때부터는 모던록이나 인디음악들 찾아 듣게 되고 뭐 그런 스토리에요.

퍼: 중 3때 일렉트로니카를 어디서 접한 건가요?

단: 그때쯤이 저의 오락실 전성기였어요.

퍼: 오락실? 피씨방이 아니고?

단: 네. 중 1때쯤 이미 주도권은 피씨방으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꿋꿋하게 오락실에 다녔어요.

퍼: 이유가 있겠죠?

단: 피씨방 게임들은 캐릭터 키우고, 레벨 높이고 오랫동안 해야 되는데 저는 그런 게임들 적성에 안 맞고 그때그때 결론 나는 걸 좋아했어요. 

퍼: 그럼 오락실과 일렉트로니카의 관계는?

단: 아, 뿅뿅뿅 삥삥삥 거리는 전자음들 많이 나오는 아날로그 오락을 엄청 좋아했어요. 저는 드럼 매니아 같은 거 정말 잘했거든요.

퍼: 아! 기억나요. 음악에 맞춰서 정말 드럼 치는 것처럼 틀리지 않고 비트 맞추는 게임!

단: 네. 그때 그런 음악 게임들 유행했었어요. 거기 나오는 음악들이 다 전자 음악이었는데 제가 그런 음악 게임을 되게 좋아해가지고 많이 했었는데 하다보니까 나도 이런 음악할 수 있겠네 싶었던 거죠.

퍼: 맞아요.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임도 대유행이었죠.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단: 그게 디디알, 댄스댄스 레볼루션이에요. 나름 전문적으로 퍼포먼스하는 팀도 있었어요. 중3때 그 팀 팀장도 하고 그랬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오락실에 다니기 시작해서 굉장한 실력이 있었거든요.(웃음) 한국 전체로 보자면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동네에서 짱은 먹었죠.

퍼: 맞다 디디알. 내 친구중 하나는 그거에 빠져서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수업도 하나도 안 들어오고 그랬다는.(웃음)

단: 저도 그거 엄청 열심히 하다가 드럼 매니아가 나중에 나왔는데, 그거도 또 존나 했죠. 기깔나게 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이런 자랑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웃음) 한번 하면 뒤에 사람이 이삼십 명씩 모여들어서 봤었으니까.

퍼: 오락실에 사람들 떼로 몰려 서 있는 거 보면 어떤 오타쿠 같이 생긴 애가 그거 막 두들기고 있던 기억나는데. (웃음)

단: 그게 저에요. 동네 양아치 형들하고 관계 설정도 좀 힘들었죠. 게임 시합만 하면 너무 이기니까. 저는 봐 주는 게 없었거든요. 맞은 적도 많고 돈 뺏긴 적도 많고.

퍼: 그런 실력 유지하려면 하루 종일 오락만 했었겠어요?

단: 하루에 7~8시간씩은 한 거 같아요. 만날 펄펄 뛰고 했으니까 그땐 체력도 진짜 좋았어요.

퍼: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은 그렇게 오락만 했겠네요?

단: 근데 다른 것들도 많이 했어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만화도 그려서 동인지에도 참여했었구요. 게임소설 같은 것 쓴 적도 있었고, 애니메이션도 좋아했죠. SF, <에반겔리온>, <카우보이비밥>, 이런 거 많이 봤죠.

퍼: 우와. 오덕의 탄생이로군요.

단: 그런 게 지금 생각해보면 세기말 졸라 데카당스한 이미지들을 표현했던 것 같은데. 암튼 엄청 빠져들었죠. 일본 애니 <이나중 탁구부> 같은 것들에도 영향을 좀 받은 거 같아요. 이런 거 저런 거 하다가 중3 때 모든 관심이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다 쏠려서 고 1때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어요.

 

 

첫 데모 – ‘스무살, 도시의 밤’

 

단: 고 1때부터는 일렉트로니카가 아니라 기타로 만들어진 포크 음악 등에 취향이 생기게 되면서 한국 인디 음반들, 외국 음반들 조금씩 듣다가 고2 때 밴드를 만들었어요. 고3 때는 어느 정도 라인업이 안정이 됐었고 곡도 어느 정도 생겼구요.

퍼: 공부는? (웃음)

단: 고 2때부터 예체능계였거든요. 2년 동안 클래식, 컴퓨터 음악 같은 거 공부했고, 대학가서 전공도 음악을 하려고 그랬구요. 다른 공부는 거의 안했어요. 그래서 기술, 가정 30점, 40점 이랬고, 근데 다행히 국영수 같은 건 점수가 좀 나와서 대학은 갔죠.
 
퍼: 전공은 신문방송학이죠?

단: 네. 고3 올라가면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음악을 잘하려면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 것인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던 것 같아요. 인문학 공부도 같이 했었어요. 

퍼: 전공을 신문방송학으로 선택한 건 왜에요?

단: 왠지 간지 나잖아요.(웃음) 아무것도 모르고. 신방과에 광고홍보학과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광고 같은 거 배우면 나중에 음악 할 때 마케팅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어간 거죠.

퍼: 밴드는 대학 가서도 계속 했나요?

단: 네. 1학년 때 홍대 클럽 씬에 데뷔했어요. 별 볼일 없는 모던락 밴드였죠. 그렇게 1년 좀 넘게 공연을 하다가 멤버들 간에 불화도 있고 군대 문제도 있고 해서 밴드는 해체됐어요.

퍼: 첫 밴드가 그렇게 사라졌군요.

단: 기타 치던 친구랑은 다시 계속했죠. 일렉트로니카와 포크를 섞어가지고 굉장히 초보적인 수준의 실험들을 했었어요. 2006년 4월에 그 친구도 군대에 갔고, 저도 군대 가기 전까지 뭘 할까 하다가 곡은 계속 쓰고 있었고 해서 데모를 만들었어요.

퍼: ‘스무살 도시의 밤’?

단: 네. 홍대에서 공연도 좀 했어요.

퍼: 판매도 했나요?

단: 네. 의외로 잘 팔렸어요. 이름도 적잖이 알려졌죠. 비평 웹진 ‘가슴’에서 뽑은 올해의 노래 중 하나에 들어갔거든요.

퍼: 데모치고는 훌륭한 성적이네.

단: 그거 내고 바로 며칠 있다 군대 갔죠. (웃음)

퍼: 대학 들어가서 밴드 말고 다른 활동은 안 했나요?

단: 많이 했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영화 동아리, 광고 동아리에서 만날 엄청 술 먹고 놀았어요. 사람들 하고 술 먹고 노는 게 너무 좋았어요.

퍼: 학생회 활동은 열심히 했나요? 2000년대 초반부터는 학생회가 거의 안 꾸려지는 학교도 생겨났는데. 

단: 그건 장학금 준다고 해서. (웃음) 제가 다니던 경희대는 나름 학생회가 잘 꾸려지고 있었어요. 총학생회 선거하면 이삼백 명 정도 동원도 가능했으니까요.

퍼: 경희대가 NL 세력이 강한 학교죠?

단: 그땐 그런 거 잘 몰랐어요. 개인적으로 북한에 대해 호의적이지도 않고. 한 선배는 이런 저를 설득하려다 운 적도 있었어요. (웃음)

퍼: 이런..

단: 당시 제가 학교에서 하는 운동의 방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선배들도 절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날 좀 설득해줬으면 좋겠다. 그걸 못하니까 술로 무마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퍼: 그럼 개인적으로 다른 활동들을 했어요?

단: 군대 가기 전까지는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세미나는 많이 했어요. 좋은 선생님도 만나서 공산당 선언 세미나,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세미나 같은 거 했어요. 군대 가기 전에 철학아카데미도 다니면서 진짜 열심히 했죠. 

퍼: 지금 생각하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은가요?

단: 그럼요. 그때 세미나 하면서 혼자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 덕에 군대 가서 혼자 공부하다가 현실 감각이 마비되기도 했지만.


퍼: 왜요?

단: 세미나 할 때는 주어진 책들 위주로 공부하다가 군대에서는 제가 스스로 책들을 골라서 보기 시작했거든요.

 

 

언니네 이발관과 아리스토텔레스

 

퍼: 군대 있을 때 책을 많이 봤구나. 어떤 책들 봤어요?

단: 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들뢰즈, 라캉 뭐 이런 데까지. 그때가 지식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가지고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무엇이든지 쫙쫙 흡수했었고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있었으니 그런 걸 써먹지 못해서 안달이 났어요.

퍼: 군대에서 그런 걸 써먹을 데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단: 입대하고 나서 일병 때부터 음악 비평 웹진 ‘보다’라는 곳에서 필진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지금 읽어보면 무슨 소린지도 모를 허세 돋는 것들을 거기에다 막 쓰고 그랬죠.

퍼: 이를테면?

단: ‘언니네 이발관’ 얘기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진리와 형상이 뭐 어쩌구 저쩌구 에이포 열장을 쓰는 식이었죠.

퍼: 진짜 허세 돋네.(웃음) 사람들의 반응은?

단: 악플이 쩔었어요. 글 하나에 악플 50개씩 달리고 그랬으니까. 너무 자의식 과잉된 글들을 쓰다보니까 욕도 미친 듯이 먹었죠. 근데 이해해요. 나도 그랬을 거야. 저런 글 봤으면. 그리고 고맙기도 해요.

퍼: 왜요?

단: 저런 욕들 먹는 순간은 그나마 현실 감각이 좀 생겼다고나 할까요. 뭔가 고립된 상태에서 혼자 만날 책만 팠으니까. 현실에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근데 욕먹으면 힘들긴 했죠.

퍼: 군대에서 만날 책만 보고 이런 활동도 하고. 그래도 되나요?

단: 안 되죠. 제가 빽도 없었는데 운은 좋게 상급 부대였는데, 장교들 가는 도서관이 있었거든요. 사병도 들어가게 해줬어요.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뒤지면 은근 빨간 책들도 있었고. 온라인 활동 같은 건 하면 안 되니까 필명으로 했어요.

퍼: 인터넷도 할 수 있었나 보네요?

단: 네. 그래서 또 이런저런 거 하고 사람도 알게 되고 그랬죠. 온라인상에 군인들만 아는 온라인 시 동호회 지하조직도 있거든요.

퍼: 지하조직? 

단: 네. 군 안에 있는 서버에 몰래 기생하고 있는데 공개는 안 되어 있고 들어가려면 링크 주소를 누군가로부터 받아서 들어가는 식이었어요.

퍼: 온라인 카페 같은 거였나 보죠?

단: 그렇죠. 거기서 사람들끼리 좋은 시 있으면 돌려 읽고 비평도 하고 그랬죠. 시도 군대에서 더 많이 읽었어요.

퍼: 진짜 무슨 벙커 같은 곳이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단: 오픈 되어있는 독서 동호회 같은 데서 알게 된 사람이 이런 데가 있다며 가보라고 링크를 전해줬어요. 요즘 인문학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는 박가분 같은 친구도 여기 출신이에요.

퍼: 이런 것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단: 걸렸다간 영창 가죠. 근데 진짜로 걸려서 큰일 날 뻔 했어요. 장교한테 발각됐는데 이걸 모르고 있었던 게 상부에 알려지면 자기가 징계 먹으니까 그냥 본인 선에서 짬시켜서 전 살았죠.

퍼: 진짜 영창 갈 뻔 했네요. 군대에서도 온라인상으로 이런 것들 다 하는구나.

단: 그럼요. 싸이도 했어요.(웃음)

퍼: 제대하고는 어떤 활동들 했나요?

단: 군대에서 인터넷으로 만난 친구들이랑 말년 휴가 나가서 전역하자마자 뭘 할까 같이 고민했는데 전역하기 직전에 용산 참사가 터졌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랑 제대하자마자 곧바로 용산으로 갔죠.

퍼: 가서 뭐 했어요?

단: 망루 옆 건물을 갤러리 같은 걸로 만들려고 공간을 점거했죠. 뭐 준비를 많이 했던 것도 아니고 말년 휴가 때 모의를 하고 바로 한 거니까 엉성했죠. 바로 망했어요.

퍼: 경찰이 왔나요?

단: 벽을 흰 색으로 칠하려고 페인트로 바르고 있는데 40분 만에 경찰이 오더라구요. 바로 연행됐어요.

퍼: 뭐 해보지도 못 했네요.

단: 네. 그래서 같이 했던 누나랑 연행되면서 여기서는 못 하겠다 다른 데로 가자. 그러고는 왕십리 철거촌 쪽으로 갔어요.

퍼: 계속해서 철거 투쟁하는 곳으로 갔네요? 계기가 있나요?

단: 군대 가서 철거문제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뭐 자각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제가 살던 동네가 신시가지였는데 어릴 때 항상 ‘공사중’이었어요. 만날 새로운 게 들어서고, 내가 알던 것들이 없어지고. 감성 돋을 때여서 사라지는 것에 대해 뭔가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퍼: 왕십리에서는 얼마나 있었어요?

단: 여기서는 안 쫓겨나고 꽤 오래 있었어요.(웃음) 전 벽화 그리는 사람들하고 같이 팀을 짜서 움직였었는데 그 사람들이 벽화 그릴 때 저는 음악 만들고 공연도 하고 그랬죠.

퍼: 왕십리에서도 공연을 했군요. 그러고 나서 두리반으로 간 건가요?

단: 네. 그 연장선으로 본다면 그렇죠.

회기동 단편선, 나의 노래

 

퍼: 두리반에 있느라 올해 졸업 못 했다죠?

단: 원래 2009년에 했어야 돼요. 4월부터 두리반에 붙어 있기는 했지만 그거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은 학교를 가기 싫었던 거예요. 체제 부적응자인 건 맞죠.(웃음)

퍼: 부모님들은 뭐라고 하시나요?

단: 아버지가 386이세요. 저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덮어두고 포기한 부분도 있으시겠지만 또 너도 중간쯤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하시는 것 같을 때도 있어요.

퍼: 음

단: 저는 음악 잘 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에요. 아버지도 그걸 아시고. 그래서 네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겠지만 음악만큼은 정말 잘해서 네 앞가림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죠. 386스런 욕망이 있는 거죠.

퍼: 블로그의 자기 고백적인 글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글에서 단편선 개인의 흐름 속에서 두리반을 ‘무능의 종착지’라고 했어요.

단: 아, 그거요.(웃음) 그건 제가 ‘무능’하다는 의미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두리반에 잉여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들한테는 일종의 ‘망했다’는 의식이 있어요.

퍼: 어떤 의미에서요?

단: 이 나라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공은 할 수 없다는 인식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20% 안쪽에 들지 못하면 80%로 가는 건데, 그 80%는 더 망하거나 덜 망하거나 망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해요.

퍼: 어차피 20%만 ‘성공’인 거니까.

단: 두리반에 있는 애들은 최소한 내가 남들보다 일찍 망했구나 하는 건 알고 있는 애들인 거죠.

퍼: 그 ‘망함’은 열패감 같은 것과는 다를 거라는 짐작이에요.

단: 네. 그건 아니에요. 그냥 내가 이렇다는 거예요. ‘나 같이 경쟁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상위 20% 안쪽에 들어갈 수 없을걸.’ 하고 인정하는 거죠.

퍼: 인정하고 나면 뭐가 달라지나요?

단: 그걸 인정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저는 생각해요. 내 위치가 어딘가에 대해서 인식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했을 때.

퍼: 단편선의 현실 인식은 어떤가요?

단: 뭐 이런 거죠. 나는 지금 25살 먹었고, 남자고, 목동에서 자랐고, 중산층의 자식이었으나 이제 나는 자본을 어떻게 재생산할지도 모르겠고, 경쟁하고 싶지도 않아서 공산주의자가 됐다. 단지 음악을 정말 잘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을 뿐이고 계속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걸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도.

퍼: 단편선의 생각은 두리반에 있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일 거라는 거죠?

단: 네. 아마도 저와 비슷할 거예요. 적어도 두리반에서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기 인식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퍼: 본인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단: 저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거 같아서 그 생각은 안 해요. 내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목표도 계속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저는 보통 한두 달까지는 철저히 계획을 해 놓거든요. 오히려 그런 건 되게 철저해요.

퍼: 근데 그 이상의 먼 앞날에 대해서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 편이군요?

단: 네. 계획을 세운다고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죠. 결혼 계획이나 자녀 계획 같은 건 아마 힘들어서 못할 거예요.(웃음)

퍼: 회기동 단편선 정식 1집도 준비하고 있죠?

단: 네. 그동안 앨범 기획만 네다섯 번 엎었어요. 이런 저런 컨셉과 방법들을 생각해 보다가 다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요.

퍼: 그러면 이번 앨범 컨셉은?

단: 컨셉이라기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작업한 노래들 중에서 청자들에게 듣는 재미를 주는 곡들을 골라서 만들어 보려구요. 음반이 그동안 ‘여기서 살아온 나’에 대한 셀프 다큐멘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퍼: 음 그렇군요.

단: 1집을 만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링도 공부할 거예요. 얼마 전에 친구가 ‘음악은 스포츠다’라는 얘길 했는데 그 얘기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퍼: 어떤 의미에서?

단: 음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테크닉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도 생각 많이 해요. 기술적인 것들도 열심히 익혀 두려구요.

퍼: 음악과 정치가 맞붙는 지점을 오랫동안 고민해오고 있다고 했어요. 지금껏 해 온 일들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라고 이해가 되요. 직접적으로 듣고 싶은데, 단편선이 생각하는 그 둘의 관계는 어떤가요?

단: 저 같은 경우는 제 삶에서 그 둘은 항상 붙었다 떨어졌다 하겠죠. 그러다 언젠가 한 순간에 그 둘이 부딪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무엇인가가 만들어질 순 있겠죠. 그런 순간이 작년 51+였다고 생각해요.

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단: 뭔가 좀 더 근본적인, 인간적인 삶에, 세계의 중심에 맞닿아있는 환희라고 해야 할까요. 너무 추상적인 얘기긴 하지만 그런 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걸 느끼는 게 목표는 아니지만 그런 순간이 잔여처럼 딸려오는 거죠.

퍼: 종교의 순간 같다. (웃음)

단: 이게 뭐 그렇네요.(웃음) 그런 순간의 기억들, 계기들에 기꺼이 매어있고 어떻게 하면 이것을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골몰하고 있는 거죠.

퍼: 올해 5월에도 두리반에서 일 벌일 계획 있나요?

단: 아마도요. 메이데이 빅 쑈를 하나 준비해 볼까 해요.

 

두더지는 겨울잠을 자지도 않고 새로운 굴을 뚫고, 이미 뚫은 굴을 순찰하며 분주히 먹이를 찾는 독립적이고 부지런한 동물이라고 한다. 다른 포식자들과 경쟁을 피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땅속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어둡고 습한 땅 아래서 사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더지는 지하 공간을 독점한다.

인터넷에서 ‘굴’에 관해 뒤적여 보다가 두더지의 습속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왠지 내가 들은 단편선의 일대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저기 땅을 파고 흙무덤을 쌓아 푸른 잔디밭을 흉하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시각적으로 보기에만 안 좋을 뿐, 오히려 토양을 건강하게 만든다. 굴을 파헤침으로써 공기를 순환시켜 땅을 숨 쉬게 하기 때문이다. 

단편선이 앞으로도 다양한 지역에, 수많은 굴들을 뚫고 다녔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 준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굴속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음악들이 흐르고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렇지만 굴을 파고 흙을 퍼 올리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일 터, 기회가 되면 가끔씩 그가 좋아하는 술을 사며 격려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