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진 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했지만, 뒤늦게 시작된 혹독한 사춘기 탓에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은 끝나지 않았고 책 작업으로 눈을 돌려 런던 칼리지의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아티스트 북’을 전공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아, 지금은 결국 제일 좋아했던 ‘그림’으로 다시 돌아왔다.
무수히 많은 글이나 장면들을 엮어 몇 시간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책이나 영화와 비교할 때, 그림 한 장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책이 증명하듯이 때로 그림 한 장은 예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후루룩 넘겨보던 이미지들 사이에 시선을 붙잡는 그림이 있었다. 한 손에는 조심스레 달걀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옷을 벗으려고 (혹은 입으려고) 애쓰는 여자 아이. 구이진 씨의 <드레스 입기>라는 작품이었다. 달걀은 잠시 내려놓고 두 손을 사용하면 될 것을 왜 저러고 있을까, 소녀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소녀의 모습은 내 머리 속에 빈틈이 생길 때마다 떠올랐다. 어쩌면 나에게도 내려놓지 못하는 달걀 같은 게 있지 않느냐고, 여자 아이가 묻곤 했다.
작품은 작가를 닮아 있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뒤늦게 찾아 들어간 작가의 홈페이지(www.egenekoo.com)에는 달걀을 든 여자 아이 못지 않게, 나름의 사연을 간직한 작품의 주인공들로 가득하였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섬에서 버티기>, <계모와 딸>, <마녀가 된 아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그림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회화’ 에서 약간 빗겨나 있었고, 퍼즐을 맞추듯 자꾸만 어떤 이야기를 추리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떤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1. 이야기를 품은 그림
퍼슨웹(이하 ‘퍼’): 작가님 작업이 독특하신 것 같아요. 동화 같기도 하고.
구이진(이하 ‘구’): 제가 원래 이야기를 좋아해요. 제가 왜 그걸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알아가는 과정이지만, 동화나 판타지의 어떤 요소가 저를 끌어당기는 게 있었어요. 저뿐 아니라 창작하는 사람들이 그럴 텐데, 왜 하는지 모르고 그냥 하게 되는 게 있어요.
퍼: 달걀을 들고 있는 소녀 그림 때문에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관심이 생겼어요.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구: 하하. 제가 읽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얻은 소재인데, 소녀라기보다 처녀였어요. 마법사의 성에 갇혀 있던 어느 날 마법사가 장기간 외출을 하게 되자 처녀는 이제 자유라고 펄쩍 뛰며 좋아했죠. 그런데 마법사가 떠나면서 소녀에게 조건을 걸었어요.
퍼: 어떤 조건이에요? 역시 마법사가 그냥 떠나지 않네요.
구: 소녀에게 알을 하나 주는데, 절대로 그 알을 바닥에 내려 놓거나 깨뜨리면 안 되는 거에요. 처녀가 조건을 잘 지키면 부유한 마법사의 아내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퍼: 아, 그래서 옷을 입을 때도 알을 어쩌지 못해서 힘겨워 하는 거구나.
구: 그렇죠. 마법사의 감시 아래 있는 것보다 더 큰 구속이죠.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있겠어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있겠어요. 화장실에 편하게 갈 수가 있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옥이죠.
퍼: 이야기를 읽고 등장인물의 상황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편이세요?
구: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우리 사는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좋은 것이 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한테 나쁜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순간에는 알지 못하죠.
퍼: 언제부터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구: 대학 때, 도서관에 다른 책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그림 책을 보게 됐어요. 그때 엄청난 방황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랑 ‘이야기’가 다 있는 거에요. 와, 이거다 싶었죠.
퍼: 요즘에는 어떤 이야기에 빠져 계세요?
구: 안데르센 동화인데, 빵을 밟고 서 있는 소녀에 관한 거에요.
퍼: 왜 빵을 밟고 서 있을까? 벌써 궁금해요.
구: 외모가 참 예쁜 아이인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소녀도 자신이 예쁜 줄을 알고 만족해서 늘 거울을 확인하고,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은데, 주변에선 허영이 가득한 못된 아이 취급을 했어요. 늘 허름한 옷을 입고 일을 해야 하는 거에요.
퍼: 그래서요?
구: 그러다가 시내에 있는 부잣집에 심부름 하는 아이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 집 사람들이 인심도 좋고 아이를 예뻐해서 소녀는 자기가 마치 부잣집 아가씨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즐겁게 지냈죠.
퍼: 다행이네요.
구: 그런데 명절이 되자 부잣집에서는 식구들과 함께 먹을 커다란 빵을 주면서 소녀를 집에 다녀오게 했어요. 소녀는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생각으로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섰는데 비가 와서 길이 진창길이 되어버린 거에요.
퍼: 그래서, 설마..
구: 네, 소녀는 자기의 옷과 구두가 더러워질까봐 가족들이 먹을 빵을 진창길에 던지고 그 위를 밟고 건너가려 한 거예요. 그런데 결국 소녀는 진흙 바다 속에서 예쁜 구두로 빵을 밝고 고통스럽게 서 있어야 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버텨야 하는 거에요. 인생의 모순, 헛된 희망 앞에서요.
퍼: 아아. 아이들 동화가 아닌 것 같아요. 달걀을 들고 서 있는 처녀와 같은 맥락인 것 같고요.
구: 그렇죠. 우리가 사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동화라고 그 의미가 약한 것은 아니에요. 사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은 게 큰 잘못은 아닌데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사치나 허영에 대해 좀 엄격한 면은 있어요. 저는 그 어린 소녀의 상황을 연민을 담아 가만히 바라보고 싶었어요.
퍼: 작품에 소녀가 많이 나오네요.
구: 소녀는 사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 아이’ 일 수도 있어요. 우리들 안에 다 그런 부분이 존재 하잖아요.
퍼: 빵을 밟고 서 있는 소녀는 작가님 작품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나요?
구: 예를 들어 제 작품 안에서 소녀는 새로 변했어요. 소녀가 구두를 벗든 어떻게든 땅에 내려설 수 있는데 스스로 빵 위에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날개가 있는 데도 날지 않는 새가 있죠. 두려워하는 뭔가가 있어서일 수도 있고, 더 중요한 게 있어서일 수도 있고, 선택의 문제로 볼 수도 있어요.
2. 방황의 시작
퍼: 처음부터 미술대학에 다니신 게 아니죠?
구: 네, 제가 대학을 두 번 다녔어요. 처음 대학을 다닐 때는 정말 고민이 많을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잘 살다가 뒤늦게 심하게 사춘기 같은 게 오더라고요. 이대로 취직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를 찾아 계속 헤맸죠.
퍼: 답이 나왔어요?
구: 그나마 제일 좋아하고 잘 하는 게 끄적거리며 그림 그리는 것 같아서 그쪽 일을 하면 좀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는 학원에 다니면서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전문 직업인이 될 수 없더라고요.
퍼: 그래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 입학하셨군요. 입학이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떠셨어요?
구: 마침 한예종이 생기면서 1회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등록금도 싸고, 무엇보다 입시미술을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떨어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에 준비를 시작했죠.
퍼: 입시미술을 안 해도 된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입학하셨어요?
구: 숨어있는 인재를 뽑으려 했는지 저한테는 꽤 빡빡한 입시였어요. 그림은 자신있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크레파스 정도라서 크레파스로 그렸고, 만들기는 그나마 중학교 때 주물럭거렸던 경험이 있던 지점토가 나오더라고요. 세 번째가 포트폴리오랑 인터뷰인데 취직이나 해볼까 하고 학원에서 그린 그림들 가지고 갔더니 ‘이거 정말 네가 그렸냐’ 하면서 못 믿겠다고 저쪽에서 그려보라고 하더라고요.
퍼: 하하. 작가님께 맞는 입시였던 것 같아요. 미대에 가서는 즐거우셨어요?
구: 물론 즐겁기도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갔는데도 미술이 내 길인지 방황은 계속했어요. 친구들이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니 좋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또 불편하기도 했고요.
퍼: 왜요?
구: 입시 미술의 맛을 안보고 입학한 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대부분 예고를 나왔거나 다른 미대를 졸업하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어요. 우습긴 하지만 멋모르는 예술학교 신입생 시절, 그 땐 모두 자기가 천재인줄 알잖아요. 그런 친구들 틈에서 ‘내가 지진아구나, 수준이 떨어지는구나.’ 하는 일종의 자괴감을 느끼고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걸 처음 경험했던 것 같아요.
퍼: 학교는 어땠어요?
구: 학교도 학생들도 1기여서 그런지 활기차고 의욕이 있었어요. 영상원, 전통예술원, 연극원 등 모두 열려서 듣고 싶은 수업들 다 들을 수 있었고요. 그땐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이 발동할 때라서 미술원 수업보다 영상원 수업에 빠져들었던 경험도 있었고요. 재미는 있는데 그럴수록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정체성이 약해지는 거예요.
퍼: 정체성이요?
구: 미대라는 곳, 제도화된 학교에서의 미술은 내가 생각했던 ‘그림 그리는 것’ 과는 또 다른 거였죠. 특히 그때는 미디어아트를 안 하면 후진 것 같은 때였어요. 그러면서 그림을 등한시했죠.
퍼: 아, 미디어아트!
구: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고 재미있어서 시작한 거고 그게 가장 순수한 이유였고, 지금도 그것만한 이유는 없거든요. 그때는 더구나 이야기, 설명이 있는 그림이라면 유치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퍼: 상처를 받으셨겠어요.
구: 네. 그런 말을 들으면 전 상처 고스란히 받고, ‘내건 후졌나봐, 미술이 아닌가봐’ 했죠. 3학년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 결국 포기했어요. 그리고 저도 컴퓨터 작업을 어설프게 시도했는데 얼굴이 뜨거워져 누구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졸업전을 하고 회의에 빠져서 그림을 그만 둬버렸어요.
퍼: 당시 미대 혹은 미술계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구: 제가 미술대학에 다닐 때는 전반적으로 어떤 자조감이랄까, 패배감 같은 게 있었어요.
퍼: 패배감이요?
구: 나름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강사님들조차 ‘선생님, 삼십 대가 되면 길이 좀 보이나요?’ 라고 물으면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길이 안 보였던 거야. 미술을 해도, 게다가 작품이 좋아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까요.
퍼: 아..
구: 심지어 선생님들이 저에게 이런 말도 했어요. ‘넌 왜 그 학교(이화여대) 나와서 여기(미대) 와서 이러고 있니, 시집이나 가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폭력적인 말이지만 그땐 화도 못 내고 쫄아 있었죠.
퍼: 우울한 얘기네요.
구: 그렇죠. 그런 말을 예술가들이 할 정도로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죠. 지금은 아트페어나 옥션이 활성화 되어서 그때보다 활기찬 느낌이 들어요. 내가 어떻게 보면 순진하고, 어떻게 보면 생각이 없어서 미술을 한 것 같아요. 영리한 사람이었으면 못했겠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구요.
퍼: 졸업하면서 작가를 선택하는 일이 드물었나요?
구: 네, 그렇긴 해도 다들 미술 학교 학생으로서의 오만함 같은 게 있어서 예술학교 나와서 전혀 다른 쪽으로 취업을 한다든지 결혼이라든지 제2의 삶을 찾아가면 차선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 같았어요. 사실 자기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정: 지금까지 작업을 계속 하는 동기들이 있나요?
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예종에서는 우리가 1기라서 그런지 활기차긴 해도 사람들이 모래알 같았어요. 예술 계열 중에서도 미술 하는 사람들은 개인 작업을 하는 편이라 뭔가를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졸업하며 뿔뿔이 흩어진 것 같아요. 서로 소식도 잘 모르고요.
3. 화가가 되다
퍼: 그림을 그만두고 뭘 하셨어요?
구: 미술이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생각했더니 책, 아까 말한 그림책이 떠올랐어요. 그림 말고 좋아하는 게 이야기이고 책인데, 책 만드는 일을 하며 내가 가진 그림이란 베이스를 어떻게 쓸 수 없을까 생각했죠.
퍼: 그래서 책을 만드셨어요?
구: 졸업 후 3년 정도 혼자 작업을 했는데, 출판을 할 수 있는 책은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더라고요. 그림과 책이란 영역이 만나는 부분을 찾고 싶은데 ‘일러스트레이션’이라 불리는 영역화된 곳으로는 가기 싫었어요.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편견이 있었거든요.
퍼: 영국에 가서 책 만드는 걸 공부하셨다고 들었어요.
구: 난 왜 이렇게 하는 것마다 안 되고 안 보일까, 정말 벼랑에 선 느낌이었죠. 그러다가 ‘아티스트 북’을 알게 됐어요.
퍼: 아티스트 북이요?
구: 책을 만드는 걸 가지고 예술 작업을 하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런던에 있는 대학원 코스가 길지도 않았고, 절박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1년만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영국으로 갔죠. 학교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아티스트 북’ 또는 ‘북 아트’라는 것을 이제 막 영역화, 제도화 시키려다 보니 첫 수업 내용이 ‘책이란 무엇인가?’일 정도로 개념적이었어요.
퍼: 그럼 영국에서도 좌절을 하셨어요? (웃음)
구: (웃음)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런던은 저랑 잘 맞고 즐거웠어요. 학교 코스는 대충하고, 여기저기 숨어있는 갤러리들을 찾아 다니면서 알았어요. ‘와, 이런 작업도 하네, 이런 것도 하네’ 하면서 내가 미술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 어떤 오해요?
구: 미디어아트처럼, 강조된 어떤 트렌드만 보고 그게 미술이라고 믿어버린 거죠. 런던에는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한 갤러리에 갔는데 정말로 ‘이야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어요.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더라고요. ‘뭐야, 이 사람은 이렇게 자유롭게 그리는데 나는 왜 그만뒀지? 누가 나보고 그림 그리지 말라고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충격이었죠.
퍼: 그림을 포기하고 아티스트 북 공부하러 가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 거에요?
구: 네. 처음엔 ‘이건 뭘까, 무슨 상황이람. 난 왜 엉뚱한 데서 엉뚱한 것만 하고 싶나. 이게 옳은 생각일까’ 당황했지만 결국에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거에요. 남들이 주는 허상이나, 자기 안의 검열이 필요 이상으로 작용했다는 걸 깨달았죠.
퍼: 그럼, 그때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확인하신 건가요?
구: 네. “그래, 여기까지 와서라도 알았으면 된 거지. 나는 아티스트 북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구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구나.” 분명히 느꼈죠.
퍼: 그래서 바로 그리기 시작하셨어요?
구: 네, 그게2005년이에요. 런던 작은 방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3~4년 만에 작은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드는데 정말 두렵더라고요. 어떻게 시작할지. 그런데 오랫동안 안 그렸어도 신기하게 그려지더라고요.
퍼: 많이 돌긴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자리에 오셨네요.
구: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이런 모양이다.’ 하고, 내 길을 찾고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저는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난 어떤 성향의 사람이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린 후에 어떤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어하는구나.’라는 감이 오기 시작했어요.
퍼: 저도 좀 헤맸던 사람이라서 처음부터 자기 길을 택해 잘 가는 사람들 보면 신기해요.
구: 저도 부러웠지만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버텨야 하는 거죠. 자기 깨달음의 시간이 올 때까지요. 그때까지 기다린 사람들은, 배고파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 거예요. 그걸 못 버티면 다른 삶을 살아야겠죠.
퍼: 부모님은 딸이 오랜 방황을 거쳐 작가로 사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반응이셨어요?
구: 지금까지 견뎌온 것은 부모님이 수긍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평범한 대한민국의 부모님이신데도 제가 뭘 ‘하고 싶어요’라고 말 했을 때 안 된단 말씀은 없었어요. 후원까진 못해도 응원은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덕을 보고 있어요. 독립하지 못 하는 게 항상 죄송하죠.
4. 화가로 살다
퍼: 첫 전시회는 언제 하셨어요?
구: 2005년 한국에 들어온 후에, 영국에서 알던 친구가 소개해준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게 됐어요.
퍼: 작품 판매도 이루어졌나요?
구: 런던에서 절박하게 작업했던 그림이 팔리더라고요. 제가 제 작품을 판매한 첫 경험이었죠. 그 때서야 스스로에게 ‘나는 직업적인 화가다.’라는 인정을 했다고 할까요.
퍼: 그래서 다른 기회로 이어졌나요? 어떠셨어요?
구: 아니요. 그게 끝이었어요. (웃음)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다 보니 인맥, 학맥도 남아있지 않고, 그냥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거야, 좋은 건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어있어’.라는 믿음으로 2~3 년을 또 기약 없이 그리기만 했어요.
퍼: 그럼 첫 개인전은 언제 하셨어요?
구: 2008년에 헤이리에 있는 ‘터치아트’ 갤러리에서 했어요. 갑자기 계획된 전시가 펑크가 나서 저에게 기회가 왔어요. 저는 그동안 계속 그리기만 해서 작품이 꽤 모여있었으니까 개인전을 할 수 있었죠. 좀 팔리기도 했고요. 그때 ‘아, 어쩌면 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겠구나’ 라는 일말의 희망을 얻었어요.
퍼: 와, 어떤 작품들의 반응이 좋았나요?
구: 제3세계 아이들 뒤에 손이 어우러져 있는 작업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사실 그건 계속 같은 스타일로 작업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 매몰될까 봐 시도했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맥락에서 약간 옆에 있는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리즈를 계속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걸로 마무리했어요.
퍼: 그럼 그 다음엔 어떤 작업을 하셨어요?
구: 첫 개인전 잘 마치고 다시 엄청난 혼란이 시작된 거에요. 이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로 가던 길을 가야 할까, 앞의 것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고.. 계단을 하나 건너가야 하는데 못 가겠어요.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몰라서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퍼: 전시 잘 마치고 또 슬럼프가 오다니..
구: 마구 고민을 했더니, 다음 단계가 막막했던 건 이야기를 바라볼 때 내 애기로 보지 않고 남들의 애기로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싹 빠지면서 세상에 대해 쉽게 냉소를 던지고 쉽게 비판했던 거죠. ‘너희들은 이러고 살지 않니.’ 그러면서요. 그런데 너희들이 아니라 ‘나’인 거에요.
퍼: 수행하시는 분 같아요. 늘 고민하고, 자아성찰. (웃음)
구: 되게 힘들었는데 그게 지나고 나니까 또 이제 다시 어느 정도 더 갈 수 있겠다는 힘이 좀 붙더라고요. 좋은 일이 있어서 탄력 받는 것 말고, 바닥을 치는 경험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슬럼프나 고민까지도, 완전히 나쁜 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퍼: 사람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작업을 좀 더 해서 우선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구: 저는 고민의 여왕이잖아요. 하하.
퍼: 지금까지 개인전은 그렇게 한 번 밖에 안 하셨어요?
구: 네, 저도 신진 작가랍니다.
퍼: 그럼 다음 개인전은 언제가 될까요?
구: 아까 말씀 드린 빵을 밟고 서 있는 소녀 이야기에 꽂혀서 작업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 소녀가 새로 변해서 ‘날지 않는 새들의 섬’이라는 시리즈로 개인전을 하게 될 것 같아요.
퍼: 와, 잘됐네요. 어디서 하세요? 일정은 잡히셨어요?
구: 하하, 아니죠. 저는 전시를 먼저 잡고 그 스케줄에 맞춰 작업을 하진 않아요. 뭔가에 쫓기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기도 하고요. 내가 스스로 그리고 싶고, 하고 싶어서 스스로 추진하는 그 힘, 자가 발전하는 힘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요.
퍼: 전시할 공간은 어떻게 찾으실 거에요?
구: 기회라는 건 첫 개인전처럼 제가 다 준비해놓고 기다리면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제 작업이 전시를 통해 보여줄 만큼 쌓이고 제 마음에 든다면, 그러면 될 거라는 믿음은 있어요.
퍼: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으신 거네요.
구: 첫 번째로 매료시키고 이해시켜야 하는 관객이 자기 자신이에요. 제가 매력을 못 느끼고 납득할 수 없으면 끝이에요. 그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죠. 하지만 저 자신이 수긍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고 믿어요.
퍼: 만약 잘 안 되면요?
구: 사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우선은 지금까지 알게 된 두어 명의 큐레이터를 만나서 작업 이렇게 했다고 보여주든지 해야겠죠.
퍼: 그림책에도 계속 관심이 있으신 거에요?
구: 제 작품에 어린아이 모티브가 나오니까 출판사에서 제안도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잘 안 되는 거에요. 보통 그림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독자로 설정하잖아요.
퍼: 아무래도 그렇겠죠.
구: 그런데 제 작업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정말 어린아이라기보다 성인의 내면에 있는 심리적인 아이의 존재였거든요. 제가 물리적인 나이로의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전 엄마도 아니고 아이들을 잘 이해하거나 깊이 사랑해본 적이 없거든요.
퍼: 작가님이 만들고 싶은 그림책은 어떤 건가요?
구: 제가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건 그림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인데, 어린이를 위해서 만든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거죠. 언젠가 내가 만들고 싶은 그림책,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다음 작업으로 구상 중인데 아마도 ‘젊은 어른’, 특히 여성들을 위한 그림책이 될 것 같아요.
5. 화가를 꿈꾸는 아이들
퍼: 대학에서 강의하신다고요? 어디서 하세요?
구: 하루는 홍익대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고 하루는 추계예술대에서 ‘기초회화’ 과목을 하고 있어요
퍼: 요즘 미술 대학은 어떻던가요?
구: 예술 학교들이 제일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상(像)을 만드는 거예요. ‘예술을 하고 좋은 작품을 한다는 건 이런 거다. 이런 색깔, 이런 요소, 트렌드 등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허상을 심어줘요. 그 순간 학생들은 자기를 숨기거든요
퍼: 안타까울 때도 많으시겠어요.
구: 기질적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라 작품을 해나갈 때 더 자유롭게 자신을 펼치고, 결국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자기 자리를 빨리 잡을 것 같지만, 결국 지속이 안되고, 버티기에서 무너질 때가 있거든요.
퍼: 아시아프(ASIAF) 같은 아트페어에도 학생들의 관심이 많죠?
구: 이른 시간에 젊은 작가들이 아트페어 등에서 빨리 알려지고, 작품을 파는 경험,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너무 빨리 감을 잡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 학생들도 나름대로의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구: 전 학생들이 고민하고 있으면 ‘고민은 충분히 하되 네 나이에 할 수 있는걸 즐기면서 해. 안 그러면 나처럼 되니까.’ 라고 말해줘요. 하지만 고민은 할 만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퍼: 학생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뭐에요?
구: 제가 느끼는 게, 학생들이 역시 허상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이래야만 한다, 저래야만 한다는 것들이요.
퍼: 작가님이 빠졌던 그 허상이요?
구: 한 번은 실험적으로 큰 주제만 던져주고 학생들에게 알아서 자유롭게 작업을 진행해 보라고 했어요. 시간 역시 한 학기를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고 했더니 처음엔 좋아하던 학생들이 나중엔 감당을 못하더라고요. 학기 끝날 쯤 되니까 그제서야 감을 못 잡겠대요.
퍼: 하하. 한 학기 내내 뭐하고요?
구: 저도 그랬죠. 며칠 남았는데 지금 와서 무슨 소리야, 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잡힌대요. 그 괴로워하는 학생들 대다수가 허상 때문이에요.
퍼: 예를 들면요?
구: 내가 어느 학교의 시각디자인과 3학년이니까 이 정도의 완성도와 퀄리티는 되어야 하는데 막상 그게 잘 안 되는 거죠. 그 기대에 못 따라갈 바에는 난 못하겠다. 완전히 내면화된 거짓말에 사로잡혀있는 거예요. 그건 허상이죠. 그거 다 버리고 진짜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하고 싶은걸 했으면 해요.
퍼: 작가님은 많이 방황하고 고민하신 만큼 잘 이해해주는 선생님일 것 같아요.
구: 저는 말하자면 선생님으로는 일종의 모델이 계신데, 런던에서 학교 다닐 때 현역에 계시는 분들이 와서 한 학기 두 번 정도 면담을 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제가 좋아했던 선생님은 제가 작업한 걸 가져가서 보여드리면, 아무 말 안하고 가만히 그냥 계속 보기만 하는 거에요.
퍼: 그리고요?
구: 그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은 잘 안 나는데 자기가 아는 범위 내로 학생을 끌어들여서 얘기 하는 게 아니라 학생이 해 온 것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는 게 감동이었죠.
퍼: 부러운 경험이네요. 그런 선생님이 드물잖아요.
구: 네.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많죠. 어떤 선생님은 제 그림을 보더니 ‘야, 이건 뭐 되게 옛날 그림 같다. 너 누구 아냐?’ 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 얘기를 꺼내는 거에요. ‘그 사람 작품 되게 러비쉬(rubbish. 쓰레기)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거에요.
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구: 학생들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데 당연히 단점을 찾으려고 하면 단점이 보일 수밖에 없겠죠. 그 시점에서 대놓고 단점부터 짚어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그건 아예 애들의 기를 죽이고, 결국엔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가거나, 허상을 제시하면서 그걸 쫓아가란 것이죠.
6. 밥벌이의 고단함.
퍼: 최근 화장품 편집매장 ‘투쿨포스쿨’의 광고 작업을 하셨다고요?
구: 네, 저도 의뢰 받아서 작업을 한 건 처음이에요. 갑자기 일이 들어와 열흘 정도 밤샘 작업을 하면서 매달렸어요. 엊그제 끝나서 이틀 정도 죽어있다 보니 오늘이네요.
퍼: 어떤 내용의 작업이었나요?
구: 잡지 지면 광고용 일러스트레이션이에요. 10대부터 20대 초반을 타겟으로 하는 화장품 매장인데, ‘아트’를 원하셨어요.(웃음) 제 작업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연락을 주신 거라 스타일대로 해보라고 맡기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음대로 그렸죠.
퍼: 작업하는 것만으로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죠?
구: 작업만으로는 당연히 생활이 안 되죠. 제가 전시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개 판매가 된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하죠. 강의 나가는 걸로 용돈 정도만 해결해요.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얹혀 사는 게 저의 큰 콤플렉스에요.
퍼: 이번에 참여한 ‘투쿨포스쿨’ 광고 작업은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되셨겠네요?, 어떠셨어요?
구: 시간이 촉박해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제 스타일을 인정해 주시고 보수도 나쁘지 않았어요.
퍼: 그럼 앞으로도 이런 제의가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하실 건가요?
구: 경제적 자립이 제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숙제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해야죠.
퍼: 상업적인 일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으세요?
구: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 이라는 에세이도 있잖아요. 박경리 선생님도 밥벌이를 위해 글을 썼다고 했고, 그것에 대해 또 공지영씨가 고마워 했대요. 솔직하게 얘기해줬다고. 그런 대단한 분들도 그러시는데 제가 뭐라고 밥벌이 걱정을 안 하겠어요. 저도 노력을 할 참이에요.
퍼: 그래도 좀 의외에요. 자기 검열이 강한 편이라고 하셨는데.
구: 아닌 건 아니라는 스스로의 제어장치는 갖게 됐으니까요. 하기 싫은 것을 하지는 않을 거에요. 얼마 전에 제 작품이 좋다며 해바라기를 넣은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왔어요. 해도 괜찮았겠지만, 그 순간에는 왠지 내키지 않았어요.
퍼: 그래서 거절하셨어요?
구: ‘당장 몰입이 안되니까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고 그린 후에 맘에 안 드시면 안 되니까 안 그리겠습니다.’ 했죠. 그랬더니 고객이 허허 웃으면서 ‘작가네?’ 그러셨대요. 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해도 되냐 안 되냐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가 아닌가의 문제라고 봐요.
퍼: 작가들에 대한 나라의 지원이 부족하다고 느끼진 않으세요?
구: 다른 직업에 대해서는 뭐 지원이 있나요? 그냥 직업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특성상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맘대로 할 수 있는 반면 생계를 이루어가기엔 힘든.. 그런 직업인 거에요. 그걸 내가 선택한 거니까 스스로 책임지면서 가고, 못 하겠으면 다른 길을 찾는 거죠. 뭘 바라는 태도는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퍼: 그럼 아쉬운 점이 없으세요?
구: 지원이 적은 것보다 다양성이 좁은 게 아쉽죠. 10명이 있으면 10개의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게 너무 당연한 건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주류를 따르지 않으면 기회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퍼: 맞아요.
구: 사실 이런저런 레지던시나 전시 기회가 적지 않아요. 그런데 선호하는 성향이 좁은 편이라는 게 문제죠. 몇몇 작가들에게 지원이 집중되죠. 주류에 대한 야심이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유혹이 되는 건 당연하죠. (웃음) 기회를 잡기 위해 선호 성향을 따라가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퍼: 그런 걸 개선할 수는 없을까요?
구: 그런데 저는 그것조차 인정하는 편이에요. 말하자면 모두들 자기의 이익에 따르는 거니까요. 기관은 자기들과 맞는 조건을 가진 사람을 뽑고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그림을 기부한다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주게 되어있는 것 같아요. 저는 워낙 메인스트림과는 거리가 있어서 기대도 안 하고 큰 불만도 없어요.
퍼: 미대 졸업 후 작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1~2%에 불과한 건 너무한 것 같아서 뭔가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구: 사실 작가가 많을 필요도, 작가가 되는 것이 쉬울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다 각오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하는 직업이 예술가가 아닐까요?
퍼: 그래도 다른 전공을 선택하면 입사지원서라는걸 쓸 수가 있지만, 미대를 나와서는 작가 이외의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구: 내가 공부한 걸 통해서 직업을 찾길 원하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내가 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삶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깨달음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작가를 해야겠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돈도 못 번다더라..’ 그런 걱정들을 하는 상황에서 미대를 나왔다고 모두가 작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 같아요.
퍼: 그럼 작가님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세요?
구: 작가로 살아야 할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힘들어도 해나가야 할 이유가 있고, 즐거워요. 회사원도 고통이 있죠. 회사원의 고통이라고 작은가요. 작가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 부풀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난 생겨먹은 게 이래서 이걸 하는 게 나랑 맞는 것이고 최선인 거구나.’ 그렇게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7.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 요즘은 일반적으로 ‘작가’라는 말을 쓰는 데 굳이 ‘화가’ 라는 단어를 쓰시는 것 같아요.
구: 사실 작가라는 말이 저한테 맞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가끔 기회가 되면 감사히 가서 그림을 걸고 하는 걸 몇 번 했을 뿐이지, 아직도 제가 미술계라는 전문 분야에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퍼: 미술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건 어떤 얘긴가요?
구: 방황하느라 활동한 지도 얼마 안되었고 아는 작가나 관계자도 거의 없고요. 그리고 저는 경쟁구도에서 활동하는 게 싫은 사람이거든요. 사실 경쟁논리가 적용되면 안 되는 곳이 예술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작업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들인 척 해도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퍼: 친한 동료 작가가 있으세요?
구: 몇 명 정도. 제가 워낙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라 슬쩍 걱정이 되기는 해요. ‘나 정말 이러다 고립되는 게 아닌지, 하하. 아무리 걸작을 해도 그냥 묻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오기도 하죠.
퍼: 작가들끼리 모이면 어떤 얘기를 할까요?
구: 저도 궁금해서 가끔 다른 작가에게 물어봐요. 주로 돈 이야기를 한대요. 하하. 서로 작업 얘기 하는 걸 꺼린다고 해요, 큰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업실에 못 오게 하기도 하고. 그 얘길 들으니까 실망이 많이 들었어요. 개인 작업하는 작가들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뭔가를 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퍼: 왜 작업 얘기하는 걸 꺼릴까요?
구: 불편하니까요. 작품을 볼 때 좋은 것보다 문제점을 얘기하잖아요, 그래야만 크리틱인 것 같고.. 사실 말하는 태도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난 당신 작품이 이런 게 좋은데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라던지, 기본적으로 예의를 지키고 애정이 바탕이 된 얘기를 해주면 기분이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서로 잘 못하죠.
퍼: 요즘은 작가들도 바쁘게 다니며 네트워크를 만들고 정보나 홍보를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구: 저는 게으르고 낯가림이 있어서 못해요. 한때는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보여질 기회도 훨씬 적을 거고, 그러니까 다른 의미의 버티기 시간이 또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저한테는 그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닐 거에요. 하려고 했어도 결국 또 어느 길로 빠졌을 거에요.
퍼: 그럼 좋은 대안이 있을까요?
구: 방법 중 하나가, 인맥이나 학맥보다 동료가 있었으면 해요. 동병상련을 같이 나누면서 넘어질 때 혼자 있지 않게 하는 거, 같이 끌어올려주고, 힘들어서 같이 울고 위로해주고 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게 버티기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못했지만요.
퍼: 혼자 작업하는 특성상 그런 동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구: 동료가 있다는 건, 인맥 쌓기나 내가 누굴 만나서 나를 홍보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다른 거죠. 그런 건 그 사람이 준비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해요.
퍼: 작가로 살면서 제일 어려운 점이 뭘까요?
구: 한 단계씩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 찾게 되죠. 거기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나이만 들면, 에너지가 떨어지잖아요. 그럼 자기 하는 일에 회의가 오는 거죠. 물질적 어려움도 어렵지만, 제일 큰 어려움은 그거예요.
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구: 제가 요즘 찾은 재미있는 비유 중 하나가 미술가들이 마법사 같다는 거에요. 누가 하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걸 선택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하는 예술들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마법인 거예요. 그게 작은 마법이건 대단한 마법이건 상관없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마술을 하는 거에요. ‘예술가는, 화가는, 미술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지?’ 고민이 많았는데 제가 마법사라고 생각하니까 자존감도 올라가고요.(웃음)
스스로 사교성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구이진 씨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그 ‘이야기’에서 나온다. 조용한 작업실에서 혼자 보내는 그 많은 시간, 그녀는 읽고, 생각하고, 바라보며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동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살아가는 일은 동화 속의 어여쁜 소녀에게조차 쉽지 않지만, 고민하고 방황하며 자신을 받아들여 가는 모든 존재에게 구이진 씨는 그림으로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