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私見] 여름의 영화, 겨울의 영화

작년에 개봉한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夏夏夏)>와 <옥희의 영화>는, 나에게 '강원도(<강원도의 힘>)'나 '춘천(<생활의 발견>)'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 즉 시간의 영화로 다가왔다.
<옥희의 영화>에서 진구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는 무언가와 비슷한 물건." 여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또 여름으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계절처럼, 홍상수의 영화 역시 실로 그러했다.

연말은 ‘올해의 000’로 시작하는 리스트의 기간이다. 올해의 음악, 영화, 사건, 만남, 실수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들은 정작 순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꼭 리스트를 작성하고 넘어간다. 아니, 어쩌면 넘어가기 위해서 리스트를 작성하는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또박또박 박힘으로써 물질성을 얻게 된, 추상적인 취향, 기억, 감정은 만질 수 있는 형태가 되어 해당 연도에 ‘두고 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바람 또는 기대와는 달리 많은 것들이 질척거리며 우리를 따라온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첫 영화는 작년부터 내동 뒤통수를 잡아끄는 영화, 두고 올 수 없었던 영화, 설명되지 않은 영화, 여전히 ‘찝찝한’ 영화로 골라봤다.

 

그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바로, <옥희의 영화>다.

 

 

• 나는 좋은 것만 본다

 

 

<옥희의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같은 해 5월에 개봉했던 <하하하>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하하하>는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 두 남자가 막걸리를 기울이며 각자 여름에 놀러갔던 통영에서 ‘좋았던’ 사건만을(이것이 규칙이다)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옥희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나에게는 미스터리였다.

 

<하하하>는 관객들이 시종일관 박장대소를 하는 굉장히 웃긴 영화이며 “좋은 쪽”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남다은의 말처럼 홍상수의 영화는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표면을 희생(씨네21 753호)” 시키지 않기에 그 웃음은 진짜고, 웃음 뒤에 감춰둔 슬픔 따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펐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기에 우울해져버렸나.’ 이것이 내가 가진 미스터리였다.

 

그러므로 전제해야 할 것은 내가 꽤나 이 영화를 잘못 봤을 테고, 이 글은 나의 오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에 관한 한 그게 그렇게 나쁜 태도 같지 않다. 사실 좋은 태도, 나쁜 태도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은 느낌이야말로 아마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숨구멍일 것이다.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아마도 <하하하>에서 가장 웃긴 장면은 이순신 장군(김영호)이 문경에게 “너는 무엇을 보느냐”고 묻고 “나는 좋은 것만 본다.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게 있다”고 말하며 매일 예쁜 시를 쓰라고 조언해주는 꿈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두 남자는 통영에서 있었던 ‘좋았던 일’만 이야기하고 둘의 회상을 메우는 문장들은 “좋더라”, “정말 좋더라”, “정말이지 너무 좋더라” 식으로 좋음의 증폭을 보여준다.

 

하지만 좋은 쪽을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생긴 문경은, 기존 홍상수 영화 속 김상경이 자주 그랬듯, 여전히 다소 어벙해 보인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아 울어놓고도 훗날 엄마의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회상하며, 애인의 전애인에게 공개적, 일방적으로 맞고도 자신이 잘 참아서 사람들이 경외의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좋았다고 회상한다.

 

좋은 쪽을 보려는 그의 ‘선택적 지각’은 가히 심각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짝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말 좋은 쪽만 보기로 결단을 내리고 실제 좋은 쪽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그게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경의 직업이 영화감독이자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천진해 보이는 이유는 ‘좋은 쪽’만 보려는 행위가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되는 것 같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별로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나쁜 것들은 어디로 가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는 중식이다. 우울증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등장하는 중식은 영화 내내 과장되게 웃고, 웃으며 우울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항상 불편해보였고, 우울로부터 허겁지겁 도망치면서 동시에 행복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리하여 잠시도 마음 편히 서있을 수 없이 분주하기만 한 사람 같았다. 그는 항상 발작하듯 웃었다.

 

그의 편치 못한 표정은 좋은 쪽과 나쁜 쪽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좋은 쪽은 보는 것이고, 나쁜 쪽은 보이는 것이다. <하하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것만 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나쁜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전히 중식은 어둠 앞에서 수동적인 듯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폐적인 동굴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 젊은 시인 정호(김강우)에게 너는 ‘일부러’ 어두운 쪽으로 가려한다며 답답해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코를 박지 않아도 나쁜 생각은 이미 코 밑까지 와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호는 형이야말로 생활을 무뎌지게 만들면서 살아가는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그 장면에서 그만, 울컥해버렸다. <하하하>가, 중식이 슬펐던 이유는 그가 애쓰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무뎌지지가 않아서, 어두운 쪽을 보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아서, 죽을힘을 다해 좋은 쪽을 보려는 절박함과 의지가 있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더 큰 비극은 그가 그렇게도 지키려고 하는 ‘좋은 쪽’이 고작해야 행복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홍상수 영화는 점점 더 행복한 ‘순간’을 위해 애쓰자는 쪽으로 변해왔다. 나는 정말이지 환상과 순진함을 버려야할 영역이 지속적,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원한 행복인 줄만 알았지, 행복한 ‘순간’ 따위인 줄은 몰랐다. 순간적인 행복 따위도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만이, 그러니까 “좋은 쪽만 보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의도적인 지각적 왜곡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니!

 

그러므로 상대를 “천사새끼”라 부르며 서로를 순간에 묶어두려는 중식과 연주 커플이 바닷가를 산책하다 집게를 든 광인에게 쫓겨 달아나는 장면은, 그들의 힘겨운 상황을 은유한다. 그 장면은 마치 심야에 차에서 장난 키스나 하는, 딱 그 정도의 순간적인 쾌락만으로도 족한 가여운 연인들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공포 영화를 연상시킨다. 그 소박한 순간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결국 <하하하>는 미래가 없는 중식과 연주 커플이 또 다른 여행지인 여수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굳이 다른 “좋은 쪽”을 언급할 필요 없이, 일상에서 가장 “좋은 쪽”은 다름 아닌 여행 자체임을 경험상 모두 알고 있다. 많은 홍상수 영화에서 여행의 ‘이전’과 ‘이후’에 해당하는 생활은 없다. 생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해 하곤 했다. 다들 집에서는 어떻게 살까. 불행하지는 않을까. 이에 대답하듯, 중식은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하며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말한다.

 

사실 <하하하>에도 집(아파트)이 하나 나오기는 한다. 문경이 재수 없어 떠나고 중식이 감흥 없어 떠나는 동굴 같은 아파트에서 정호와 정화(김규리)는 끊어진 전선과 토막 난 대화 위에 누워 섹스를 한다. 이 아파트에서의 섹스는 참혹해 보이며, 오히려 문경과 상옥(문소리)이 여관에서 하는 섹스가 오래된 살림살이처럼 훨씬 정겹다.

 

그러나 두 남자가 그 동굴 같은 아파트로 기어들어가는 정호를 보고 우울한 놈, 내지는 불쌍한 놈이라고 말하며 그곳을 피한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겠나. 통영이 끝나고 또 여수가 끝나면 다들 어디로 기어 들어갈 수 있겠나. 귀향의 공간은 <밤과 낮>의 마지막 방처럼 막혀있고 답답하다. 아무리 ‘구름’을 그려도, 아무리 ‘좋은 쪽’만 보려 해도 마찬가지다.

 

돌아갈 곳도 없고(중식은 자신을 일컬어 “집 잃은 강아지 같아.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강아지”라고 한다), 돌아만 다닐 수도 없다(원래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던 문경은 마지막에 캐나다도, 서울도 싫고 어디에서도 잘 살 것 같지가 않다고 하소연한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꿈속에서라도 이순신 장군을 붙잡고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매달릴 수밖에. 그러므로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또는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평온해질 수 있을까.  
 

 

• 욕망이 없어지면 명징해진다

  

 
홍상수 영화에서 더 이상 자고, 안 자고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주인공들은 자려다가 멈추고 생각 없다가 자는 등, 자든 말든 별로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그 자리를 평온함과 아름다움이 메우는데, 특히 여자들이 그러하다.

 

그녀들은 욕망이 다 지나가고 난 폐허에 앉아 모든 것이 명징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해변의 여인>에서는 애인이 바람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는 자신이 바람났던 문숙과 고순(둘 다 고현정이 연기했다)이 모든 소동이 다 끝난 뒤 그랬고, <하하하>의 성옥(문소리)이 복집을 뒤로 하고 걸어 나올 때가 그랬다. 또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 아팠던 인물인 <밤과 낮>의 유정(박은혜)이 모든 거짓말이 들통 난 뒤 체념하듯 “난 정말 재수가 없나봐”라고 읊조릴 때가 그랬다.

 

홍상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항상 지향하는 곳은 밝은 곳, 힘찬 곳, 명료한 곳이었다(어떤 것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명료함까지 포함해서).” 어찌 보면 많은 것들이 공평하여, 욕망이라는 앙금이 죄 가라앉아야 맑은 물 같은 명료함이 오고, 명료해지면 즉, 어떤 것을 알게 되면 그제야 고요함이 찾아오는 것 같다. 욕망과 명징함.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외간 남자와 자다 걸려도 솔직하게 젊은 몸뚱이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고순을 비롯해 많은 여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선택한 후 책임진다. 그녀들은 모두 여름 영화에 등장하여 태양 아래 빛나는 살갗을 드러내는 밝은 존재들이다. 중식 말마따나 그녀들에게는 헛것이 없다. 그러므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는 아웃이고, 어찌 보면 그녀들은 더 이상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오수정>)”도 아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었을 문경의 늙은 엄마(윤여정)는 남자들이 한심하여 혼자 산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들은 고요한 순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전히 싸돌아다니고 싸지르고 다니면서도 다들 편치 못한 표정이다. 중식은 연주에게 “네가 얼마나 힘들든, 무조건 내가 10배 더 괴롭다”며 징징거린다.

 

그들은 오로지 잘 때만 평온해 보인다. 전에는 여자와 자기 위해 술을 마셨다면, 이제는 악몽 말고 예쁜 꿈을 많이 꾸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도 같았다. 속된 말로, 구원은 구멍이 아니라 숙면인 것 같았다. “생각을 하면서 살” 것도 아니고, “좋은 쪽만 볼” 것도 아니고 그저 자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식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는 두 번의 장면을 보면서, 나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에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생겼음을 알았 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 어깨가 큰 코트를 입은 남자

 

 

사실 고순(<잘 알지도 못하면서>)을 필두로 한, 욕망을 직시하고 쿨하게 책임을 지는 현명한 여인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왜냐하면 평생 그녀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들은 결핍이라는 구멍을 막아버린 완전체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옥희의 영화>에서 그녀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늙은 남자를 봤다.

 

늙은 남자, 송교수(문성근)는 <하하하>의 중식과 달리 행복과 관계의 소멸, 즉 상실을 피하지 않고 염두에 두고 산다. 이렇게 상실을 다루는 일은 부분적으로 이 영화가 시간차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동진은 기존 홍상수 영화들이 공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면, <옥희의 영화>는 “시간을 바라보는” 그의 첫 영화라고 했다(씨네21 773호). 따라서 기존에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영화에는 죽음이 없었다고 본다.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가진 순간과 잃은 순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옥희의 영화>에는 1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순간이 아닌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므로 송교수의 배경은 여행지가 아니라 직장이다. 그는 학생이 한명도 오지 않는 계절 학기를 맡고 있는, 봉지 빵과 아메리카노를 빈 강의실에서 쭈그려 먹으며 사는 게 “너무 쪽팔리다”고 말하는 시간강사이자(같은 영화에 나오는 진구(이선균)는 학교에서 갈 곳이 없어 학교 이발관에 들어가 있는 시간강사이다), 어린 연인 앞에서 빠진 머리를 걱정하는 늙은 남자이다.

 

그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는다. 교수 회식 자리에서 진구는 혼자 술에 취해 송교수의 나쁜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에 송교수는 소문의 진위 여부보다는 그가 ‘말의 TPO(Time, Place, Occasion)’를 어겼다는 데 불쾌해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 모두 맨 정신으로 진구의 말실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는데, 사실 그의 말을 실수로 만드는 것은 이들의 냉정한 시선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술자리가 기존 홍상수 영화의 그 어떤 술자리보다 현실로 느껴졌다. 직장 상사의 폭력적인 강권은 덜하지만 대신 하나의 의례가 되어버린 술자리, 취하지 않고 적당히 마시거나 많이 마셨으면 취한 티를 내지 않아야 하는 술자리, 끊임없이 자기 통제 및 관리 능력을 평가 받는 술자리. 그곳에는 뻘소리와 솔직함, 어울렁 더울렁 우야 무야 서로서로 민폐 끼치고 용서해주는 관대함이 없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술’자리’라는 공간, 꼴리는 대로 기행을 일삼고 욕망을 들이대는 즐거운 삶의 한 순간이 아니라, 인생의 기획과 관리의 일부로 포섭되어 시시해져버린 ‘회식’이다.

 

그 회식의 주인인 늙은 남자는 제자이자 어린 연인인 옥희와 아차산에 오를 때, 이미 이 관계가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뿐인가. 앞으로 사랑이든, 몸뚱이든, 정신이든 죽죽 잃을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계를 안고 순간에 자족하며 ‘명료한 곳, 밝은 곳, 힘찬 곳’으로 홀로 걸어 나갔던 여인들과 달리, 그는 이 앎으로 인해 우울해 보인다.

 

만약에 헤어지면 1년 뒤 1월 1일에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늙은 남자는 아차산에 갔다가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옥희를 보고 웃으며 뒤돌아 내려간다. 그 모습은 너무나 아프고 춥다. 그때, 그는 뽕 때문에 어깨가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유행 지난 겨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과장된 어깨는 마치 어쩔 수 없다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양새를 닮았다. 그 순간, 여름 동안 “좋은 쪽”만 보려 기를 쓰고 발악했던 인물들이 죄다, 폭설의 한 가운데서 슬픈 건 슬픈 거고, 추운 건 추운 거라고 인정하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화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힌 채 묘한 표정을 짓는 옥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그녀는 늙은 남자와 아차산을 내려오면서는 “그분을 정말 사랑한다.”고 느꼈으나, 1년 뒤 젊은 남자와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이별을 예감한다. 늙은 남자가 1년 전에 이미 알았던 상실이라는 비밀을 그녀도 뒤늦게 엿보았으나, 젊은 남자는 아직 그 비밀을 모르고 있다.

 

어쩌면 이번에는 옥희가 늙은 남자의 뒷모습을 봤지만 다음에는 자신의 뒷모습을 젊은 남자에게 보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언젠가 젊은 남자도 누군가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떠날지 모르겠다. 누구라도 버림받고 버리면서 상실을 배워나가고, 자주 우울해질 것이다. 다름  아닌 ‘시간의 힘’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