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반 농성 1년 (2) – 유채림, 병주

투쟁 1년째, 철거된 두리반은 소위 말하는 ‘복합 문화 공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음악회, 영화 상영회, 포럼 등이 정례화 되었다. ‘나를 모두 던져야 하는 싸움이기에 즐거워야 한다’는 이들의 투쟁 방식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벼랑의 끝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두리반을 지키고 있는 유채림 씨와 상근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리반에서는 요일마다 다른 문화 행사가 진행된다. 주말에는 인디 밴드들의 공연으로 관객 몰이를 한다. 라인업으로만 본다면, 가히 ‘클럽, 두리반’이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홍대에 ‘두리반’이라는 새로운 클럽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든, 시인의 강연회를 듣기 위해서든, 두리반에 들어서는 순간 알게 된다.

 

그곳은 잘못된 재개발법으로 인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자들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철거 투쟁의 현장이다. ‘벼랑 끝’의 그곳은 그로테스크하게 의도된 ‘컬처 라운지’에 가깝다. 두리반은 왜 이런 방식의 투쟁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선택이 아니라면 어떻게 두리반은 ‘두리반’이 되었을까?

 

두리반 철거 대책 위원장으로서 외부와 연대하며 투쟁을 이끌고 있는 분은 안종녀 씨*이다. 그리고 안종녀 씨를 대신하여 안주인 역할을 맡아 철거된 두리반을 묵묵히 지키는 분은 그녀의 남편 유채림 씨이다.

* 안종녀 씨 인터뷰 <두리반 농성 1년 (1) – 안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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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림 씨는 두리반이 용역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작년 이맘 때 여섯 번째 소설인 <15년 7개월>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교인들을 위한 묵상집 등 기독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의 성실한 출판부장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두리반을 지켜 온 것일까? 어릴 때부터 항상 소설가의 꿈을 키워온 그는 평생 동안 자신만의 눈과 혀를 갖기 위해서 수련해 왔을 것이다. 혹시, 그러한 수련의 결과가 ‘두리반’으로 나타난 것일까?

 

두리반은 3층짜리 건물이다. 예전에는 1층만을 사용하였지만 이제 세 개의 층을 모두 사용한다. 1층은 모두의 거실과도 같은 공간, 2층으로 올라가니 좀 더 안락한 생활공간이 나온다. 이곳에서 유채림 씨와 상근자들이 잠을 잔다. 3층은 공연장이다.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한 가운데 드럼이 세팅되어 있다. 아방가르드한 설치 작품 같은 구조물이 천장의 3분의 1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공연도 열리고, 어떤 이는 무료 강좌를 열기도 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지난 1년 간 내부에서 두리반을 지켜온 유채림 씨와 상근자 병주 씨의 이야기를 들을 예정이다. 한때 아내가 손님들을 위해 정갈한 칼국수와 만두를 내놓던 곳에서 이제는 남편이 차를 대접한다. 따뜻한 둥글레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두리반 요일별 문화 행사 두리반 다음 카페    

 

월요일  하늘지붕 음악회  부부 밴드 엄보컬, 김선수가 1월 초부터 공연을 해왔고 지금은 민중의 집에서 기획을 맡게 되어 라인업이 다양해졌다.


엄보컬, 김선수 레디앙 인터뷰 보러 가기

    

화요일  푸른영상 영화상영회  다큐 공동체 푸른영상에서 기획하는 다큐멘터리 상영회. 웬만해서는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주제의 다큐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서른 편이 넘는 다큐가 상영되었다. 
 푸른 영상 홈페이지    

 

수요일  한 달에 한번 한국작가회의에서 기획하는 문학 포럼.  지난 10월 심보선 시인의 강연이 있었고, 2011년 1월에는 백무산 시인의 포럼이 마련될 예정이다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

 

목요일  농성의 현장을 찾아가는 ‘촛불을 드는 그리스도인’ 촛불 예배

 

금요일  칼국수 음악회 아나키스트이자 문화 활동가인 조약골 씨가 기획하는 투쟁 기금 마련음악회. 3월 12일 첫 번째 음악회가 열렸고 매주 저녁 7시반부터 시작된다.

 

토요일  자립 음악회  ‘자립음악생산자모임’에서 기획하는 음악회. 이들은 5월 1일 노동절에 51+철거 파티를 기획하였다. 그 후 인디 밴드들의 공연이 36회째 이어지고 있다. 

 

일요일  두리반 3층 강좌  간헐적으로 열리는 무료 강연. 주제는 제한이 없다. 사진 강좌, 그리스 비극 읽기, 녹색으로 본 세계사 등의 강의가 진행되었고, 2011년 1월에는 일본어 강좌가 신설된다. 국제연대를 위한 두리반 영어 모임도 진행 중이다.  

 

 

두리반의 새로운 안주인

 

 

퍼슨웹(이하 ‘퍼) : 오늘은 두리반 쉬는 날이죠?

 

유채림(이하 ‘유) : 네. 수요일에는 한 달에 한번 문학 포럼이 열리는데 오늘은 행사가 없어요.

 

퍼 : 여기서 매일 주무시는 데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유 : 아침에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놔요. 조금 미적거리다가 8시쯤에 나오죠. 요즘은 연탄난로까지 생겨서 우선은 1층에 내려가서 불부터 갈아요. 1, 2층 불을 다 갈고, 바닥 쓸고 닦고, 설거지 하고, 쌀 씻어놓고요.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는 3층으로 가서 공연 뒷정리를 해요. 언제든지 행사 요청이 들어오면 “네 언제든지 오셔서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를 항상 해놨었어요.

 

퍼 : 언제나 ‘준비된 공간’이 있었던 거로군요. 항상 바쁘실 것 같아요.

 

유 : 농성에도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퍼 : 기본 예의요?

 

유 : 네. 누가 오더라도 깨끗한 공간. 농성을 해도 참 깔끔하게 한다는 소리 듣고 싶어요. 사람이 많으니까 ‘나 오늘 집에 갔다 올게’ 그러지를 못하겠어요. 그러지 않아 왔어요. 누가 오더라도 만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거고. 그래야 한 번 왔던 사람이 두 번 올 수 있는 것이고. 지저분하거나 내가 자리를 비운다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면서 여기를 지켜 왔어요.

 

퍼 : 공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시고 공간을 깨끗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군요. 의식적으로 이런 두리반을 만들어 오신 것이 유효한 것 같습니다.

 

유 : 용산에서 목요일마다 기도회가 있었거든요. 빠지지 않고 나갔었는데, 그때 농성장 화장실에 가보면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었는데 보기에 안 좋았었어요.

  

퍼 : 몇 시에 주무세요?

 

유 : 새벽 1시 반이나 2시 정도에 자요. 공연 끝나고 1층에서 뒤풀이 하거든요. 그러면 상근자 친구들과 공연한 친구들이 같이 어울려서 놀아요. 그러면 혼자 2층에 올라와서 책도 보고 쓰기도 하고. 그 시간이 좋아요. 같이 어울리면 불편해할 것 같아요.

 

퍼 : 그들은 불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유 : 그렇죠. 우리 애들은 같이 어울려서 놀자고 하거든요. 그런데도 나는 2층에 올라와서 있는 게 습관이 돼서. 해 놓을 거 다 해 놓고, 밤에 불 꺼지면 안 되니까 12시 반쯤에 1층 2층 불을 다 갈아놓고 올라와요. 

 

퍼 : 지금은 상근하는 친구들도 많아졌죠. 20대 초반 친구들도 꽤 있고. 그들은 처음에 어떻게 두리반에 오게 된 건가요?

 

유 : 두리반에서 같이 생활하고 싶다고 찾아오면 그냥 같이 생활해 온 거죠.

 

퍼 : 그들과 함께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유 : 별로 없어요. 지난번에 한겨레 르포 작가 분께 들은 얘기가 있어요. 용산 현장, 기륭전자 농성 현장, 쌍용 자동차 농성 현장, 대추리에서도 내부 연대하는 활동가들끼리 확 올라가는 고조기에 돌연 침체가 되고 하는 현상을 누누이 지켜봐 왔다고.

 

퍼 : 그렇죠.

 

유 : 두리반은 의식 있는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곳도 아니고 개성이 워낙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다른 어떤 곳보다도 내부적으로 쉽게 무너질 것만 같은데, 지금까지 아기자기하게 해왔고 바깥에 그런 소문이 안 돌고 있다. 그 이유가 뭔지 여기서 한 삼 개월 정도 상주하면서 쓰고 싶다는 거였어요.

 

퍼 : 시작했나요?

 

유 : 기자분이 지난번에 노숙 생활하는 사람들 얘기 쓰느라 같이 노숙 생활하는 와중에 몸이 많이 망가졌다면서 그거 좀 추스르는 대로 들어 오신다네요.

 

퍼 : 어떻게 이런 분위기들이 생겨났다고 보세요?

 

유 : 제일 중요한 것은 ‘용산’이죠. 용산이 토대를 만들어줬죠. 문화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연대하셨어요. 그런데 용산에는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다양한 형태로 연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는 항상 열사 다섯 분이 있는 거예요. 무겁죠.

 

퍼 : 그에 반해 두리반은 정신적인 상처는 없었죠.

 

유 : 네. 그러니까 즐겁게 즐기면서 뭘 해도 되는 공간이라는 것. 그게 용산과 두리반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수 있고. 두 번째는 ‘홍대 앞’이라는 지리적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구요.

 

퍼 : 다양한 사람들이 두리반에 왔다갔죠. 지리적인 특성과 함께 ‘촛불 집회’ 같은 집단 경험을 공유한 시민이 많아진 것도 두리반의 문턱을 낮추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유 : 그런 생각까지는 못 해봤어요. 두리반은 이렇게 저렇게 얽혀서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기는 했어요. 1차적으로 작가들이 모여 줬고.

 

퍼 : 네.

 

유 : 또 제가 용산 사태 때 매주 목요일마다 촛불 예배에도 빠짐없이 다녔거든요. 그래서인지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와줬고, 모교 민주동문회 식구들도 왔구요. 회사가 한국 기독교 장로회거든요. 문익환 목사님 활동 교단이에요 굉장히 래디컬한 교단이죠. 초장기에는 직장 동료들도 와 주었어요. 어느 정도 기본적인 토대가 있었어요.

 

 

두리반의 겨울 – 작가, 철거민 되다.

   

퍼 : 철거민이 되었다고 인정을 하신 것이 언제쯤이셨는지? 좀 시간이 걸리셨을 것 같아서요. 저항 없이 받아 들이시기에는.

유 : 처음에는 무지무지 창피했어요.

 

퍼 : 어떤 점이?

 

유 : 첫 번째 체면 때문에 하지 말자고 그랬고, 두 번째는 용산 사태를 봤으니까 엄두가 안 났죠. 못 견딜 것 같더라고. 세 번째로는 만약 농성이 장기화된다면 나 자신이 인내를 못 할 것 같았어요.

 

퍼 : 네.

 

유 : 설령 폭력적으로 들려 나가는 일 없이 농성을 하더라도 ‘내가 집에서 잠을 안 자고 농성장에서 새우잠 자는 꼴을 견뎌낼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감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죠. 그랬는데, 막상 들어오니까 그때부터는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퍼 : 두리반에 대해서 언론에 기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두리반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하셨나요?

 

유 : 처음에는 쉴 새 없이 불안했어요. 안에 있으면 철거민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다가 문을 여는 순간, 인도에 오고 사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너무 창피했어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죠.

 

퍼 : 왜죠?

 

유 : 저 사람들은 두리반이 내막을 모를 텐데, 단순히 ‘돈을 몇 푼 더 받으려고 떼를 쓰고 있는 사람이 홍대 앞에도 생겼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저렇게 모양 사납게 철거 농성을 하느니 나 같으면 새 출발을 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견딜 수 없어서 문을 못 열었죠.

 

퍼 : 아, 네.

 

유 : 당시에는 ‘내가 철거민이다’라는 자각은 있었는데, ‘재개발의 문제점으로 인한 사회 구조악의 희생자인 철거민’이라는 자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퍼 : ‘철거민’이라는 자각을 갖고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 했네요, 그때는?

 

유 : 그렇죠. 소설조차 못 읽을 정도였으니까. 바람에 철판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어도 용역이 왔나 보다 싶은 불안감, 그건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고통이죠. 그렇게 한 열흘 정도 흘러가던 와중에 한국작가회의 대변인이 찾아왔어요.

  

퍼 : 처음부터 한국작가회의 분들이 많이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유 : 네. 첫날 뜯고 들어와서 당장 다음날부터 어떻게 용역들을 막아야 할까 막막하기만 할 때, 생각해보니까 용산에서처럼, 내가 한국작가회의 소속 소설가니까 작가들 도움을 받는 것 밖에는 없겠다 싶었어요. 새벽에 이사진들에게 메일을 돌렸어요.

 

퍼 : 다음날 그분들께서 와 주셨나요?

 

유 : 이사님들이 한 분도 안 빠지고 다 나와 주셨었어요. 그날 무척 추웠어요. 눈도 많이 왔고. 매직이 얼었는데 그거를 몸으로 녹여가면서 일일이 구호를 쓰고 함께 있어 줬죠.

 

퍼 : 한국작가회의 대변인 분은 왜 오셨던 거예요?

 

유 : 그때는 한국작가회의 분들이나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들은 돌아가면서 번을 서줬었어요. 최소한 우리 부부만을 남겨 두지는 않았어요. 그날도 일상처럼 두리반에 들러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가기 전에 나한테 묻는 거예요. “형님 노동자는 어떻게 싸우죠?”

 

퍼 :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유 : “뭘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노동자의 방식으로 싸우겠죠.” 하는 거예요.

 

퍼 : 맞는 말이네요.

 

유 : 그 다음엔 “그럼 농민은 어떻게 싸워요?”라고 물어보더라구요. “농민의 방식으로 싸우겠지.” 했더니 “작가는 어떻게 싸워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퍼 : 아.

 

유 : 제가 그때 정말, 홍두깨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철거민’이라는 자각보다 ‘나는 작가였지’ 하는 게 먼저 왔어요.

 

퍼 : 아, 네…

 

유 : 그걸 느끼고부터 철거의 문제점, 우리의 억울한 사례들을 내 시선으로, 내가 겪은 그대로 쓰면 얼마나 더 호소력이 있을까 싶어서 쓰기 시작했어요.

 

퍼 : 처음 쓰신 글이?

 

유 : 한겨레에 썼던 칼럼이었어요. ‘아내의 우물 두리반’*이라는 제목이에요. 그 후로 가능하면 모든 지면을 통해서 알리려고 노력을 했죠. 프레시안, 작은 책, 한살림 등등 계속해서 써나갔어요.

 

* <아내의 우물>(한겨레) 보기
 

두리반의 봄 – 인디밴드와 만남

 

 

퍼 : 인디밴드들은 처음에 어떻게 찾아왔나요?

 

유 : 2월초에 머머스룸의 정동민이라는 친구가 왔어요. ‘아내의 우물 두리반’을 읽고 두리반에 꼭 오고 싶었는데 좀 늦었다고 하면서 여기서 공연을 해도 되겠냐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허락해달라고 그랬죠.

 

퍼 : 뭐라 하셨나요?

 

유 : 고맙다고 그랬죠. 음악회 이름을 ‘사막의 우물, 두리반’이라고 정하고 매주 토요일 정기적으로 공연을 시작했어요.

 

퍼 : 인디밴드와 만남이 두리반 1년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일 텐데요, 수락하시면서 도움이 되겠다 싶으셨어요?

 

유 : 아무 것도 몰랐어요. 이를테면 그때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인디 밴드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였냐면 ‘상업 자본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예비 주자들.’ (웃음)

 

퍼 : 지금은 밴드 음악에 중독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유 : 그 전에는 인디 음악을 접해 본 적이 없었어요. 홍대 앞쪽으로 다녀보지도 않았고요.

 

퍼 : 정말요?

 

유 : 네. 부끄럽지만 다큐멘터리도 <워낭소리> 외에는 본 것이 거의 없어요. <상계동 올림픽> 같은 다큐의 고전도 두리반 농성하면서 보게 됐죠. 그 정도로 이쪽 문화를 전혀 접하지 못했어요.

 

퍼 : 그런 분이 인디밴드와 함께 농성을 만들어가고 있으시네요.(웃음)

 

유 : 그렇죠. 지금도 공연하는 음악가나 영화 찍는 감독, 문화 활동가들, 우리 두리반 식구들에게 누누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이다. 그런데 문화적으로는 터무니없이 보수적이다.” 우리 애들이 담배 피는 꼴도 처음에는 굉장히 거북했어요.

 

퍼 : 담배 안 피우세요?

 

유 : 아니요. 피우죠. 많이 피우는데도 ‘나이도 어린 것들이 내 앞에서 맞담배질을 해?’ 그랬으니까요. (웃음) 아무 것도 몰랐죠.

 

퍼 : 문화적으로 그렇게 보수적인데 인디밴드를 받아들인 이유가 있으시겠죠?

 

유 : 농성 초기에는 두리반에 항상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어요. 그래야만 용역들이 못 들어올 테니까.

 

퍼 : 아까 언급하신 불안감 때문이셨겠죠?

 

유 : 네. 그렇기도 했고. 저는 두리반을 찾아주는 사람들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우선 흡수하는 쪽으로 와주셔서 고맙다 했죠. 공연 때도 와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두리반을 돕는 거라고 관객들한테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덕인지 정말 많은 분들이 와주셨어요.

 

퍼 :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는 말씀이시죠?

 

유 : 그렇죠.

 

퍼 : 인디밴드의 첫 공연이 언제였죠?

 

유 : 2월말에 첫 공연을 했어요.

 

퍼 : 그때 인디밴드 공연을 처음 보신 거죠? 어떠셨어요?

 

유 : 어마어마하게 충격을 받았어요. 관객도 꽉 찼지만 제가 풀 밴드 공연은 처음 봤어요. 드럼이 가져다주는 통쾌함이 불안을 떨쳐주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퍼 : 아까 3층에서 드럼 치시던데요?

 

유 : 드럼이 불안이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어요. (웃음)

 

퍼 : 드럼을 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으셨나요?

 

유 : 7월 21일 날 단전이 되고 나서는 굉장히 고통스러웠거든요.

 

퍼 : 어떤 면에서?

 

유 : 촛불 20개 켜도 밝지도 않고, 실내 온도는 37도가 넘어가고. 몸에 물을 끼얹고 누우면 두 시간쯤 자다가 땀으로 흥건해서 깨곤 했죠. 선풍기 한 대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죠. 하루에 평균 세 번 정도는 깼어요. 너무 더워서.

 

퍼 : 저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군요.

 

유 : 밥은 두 끼만 간신히 먹었어요. 세 끼를 못 먹겠더라구요. 냉장고를 못 켰으니까. 냉장고는 진열장이었죠.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저녁에 먹으려면 상하려고 해서 버리고 새로 끓이고, 그렇게 매 끼니를 해 먹어야 하니까 불편해서 자연스럽게 두 끼만 먹게 되더라구요.

퍼 : 그렇겠네요.

 

유 : 상근하는 친구들도 더워서 미치겠으니까 밤에는 피씨방에 가고 낮에는 은행에도 가고 이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지켜야 했죠. 그때부터 칠 줄도 모르는 드럼 앞에 앉았어요. 새벽 2시도 좋고 한낮도 좋고 사정없이 두드리는 거예요. 한 30분 두드리고 내려와서 물 끼얹고 눕고 이런 식이었죠.

 

퍼 : 드럼이 정말 큰 역할을 했네요.

 

유 : 가을에 우리 애들이 드럼 한번 본격적으로 배워보라고 하면서 주법을 몇 가지 알려줘서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농성하며 다양한 악기 경험을 했어요. 제일 맘에 드는 게 드럼이었어요. 밴드에 드럼이 없으면 흥이 안 나요. 근데 드럼은 흥을 내주는 거지만 밴드의 주체는 아니거든요. 박자 맞추는 보조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내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고.

 

퍼 : 곧 공연도 하셔야겠어요 (웃음)

 

유 : 제가 박치예요 (웃음)

 

퍼 : 인디밴드들이 첫 공연 이후 계속 결합하고 있는 거죠.

 

유 : 네. 그때부터 머머스 룸의 정동민이랑 한받, 단편선이 항상 지켰어요. 다른 밴드가 펑크를 낼 경우에는 그 셋이 대타를 서면서 음악회가 틀이 잡힐 때까지 항상 두리반에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모두에게 고맙지만 이들에게는 첫 정이란 게 있어요.

 

퍼 : 5월 1일 노동절에 열렸던 51+ 파티 준비는 같이 하셨나요?

 

유 : 저는 하나도 안하고 기획하는 친구들이 다 준비를 했죠. 이렇게 진행할건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식으로 의견 공유는 했죠. 일을 해 나가는 건 젊은 친구들이 다 했어요. 다 그 친구들의 공이에요. 뭘 해도 잘 모르는 영역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일임을 했죠.

 

퍼: 최고의 경영 방식인데요. (웃음)

 

 

두리반의 여름 – 단전과 사투

 

 

퍼 : 원래 출판사에 다니고 계셨죠? 회사는 언제 그만 두신 건가요?

 

유 : 공식적으로 8월 25일이었고 실질적으로는 4월말에 그만뒀죠. 5월부터는 급여가 안 나왔으니까. 근데 의료보험이나 연금은 회사에서 8월까지 해줬어요. 내가 일을 맡은 부분이 좀 중요한 것이어서 8월 말까지 계속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어요.

 

퍼 : 두리반 안살림을 맡고 계신 걸 보면 출판사 일도 꼼꼼하게 해나가셨을 듯합니다.

 

유 : 제가 되지도 않은 책임감이 강해요. (웃음) 다니던 회사가 기독교 출판사라 교단의 교인들이 보는 구역 예배나 어린이 교재, 묵상집을 만들었어요. 구역 예배나 묵상집은 일반 교인들이 보는 책인데, 이런 책을 만들다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우리 어머니예요.

 

퍼 : 어머니요?

 

유 : 올해 일흔 다섯 되셨는데 제가 만든 책을 보고 성경 공부를 하시거든요. 책을 만들다 보면 아젠다, 트라우마 같은 단어들이 나와요. ‘이런 걸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안단 말이야.’ 하면서 다 한글로 바꾸고, 문장은 단문으로 다 쪼개고 그래서 늘 야근을 했죠.

 

퍼 : 성실한 아들이셨네요.

 

유 : 이 정도면 우리 어머니가 이해하실 수 있겠다 싶을 정도가 되어도, 대학교수들이나 큰 교회 장로 같은 사람들이 봤을 때 “너무 유치하게 책을 만들어냈네”라는 소리는 안 들어야 하니까. 곡예를 하는 것 같았어요. 국민학교 졸업하고 일흔 넘는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이 봐도 이해가 되고, 교수 같은 사람이 봐도 유치하지는 않아야 했으니까요.

 

퍼 : 4월 말에 그만두시고 5월 1일에 51+ 파티가 있었으니 그리 멀지 않네요.

 

유 : 8월 말에 사장님께서 제가 맡고 있던 출판 부장 자리에 들어올 새 사람을 데리고 오셨어요. 농성이 금방 끝날 줄 알고 견뎠는데 일이 너무 많이 쌓였다고 하시면서. 사실 벌써 뽑아서 했어야죠. 그런데도 약간 서운하기는 해요.

 

퍼 : 네.

 

유 : 처음에는 4월 말까지만이라도 GS나 남전 쪽에서 어떤 협상 제시를 하기를 하늘에 빌었어요. 그러면 내가 돌아갈 길이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두리반 같은 가게 보상이 아니라 돈으로 보상한다고 하면 대출을 받든지 해서 다시 가게를 차리고 싶었죠.

 

퍼 : 그런데 제안이 없었군요.

 

유 : 네. 4월말까지 그쪽에서 그런 제안을 해왔다면 5월 1일 51+파티 성대하게 치루고 농성을 정리할 수 있는 모양새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죠. 5월로 접어들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 가보자, 끝까지.’ 이렇게 됐죠.

 

퍼 : 기독교 신자이신데, 신에 대해서 원망은 안 하세요?

 

유 : 원망 안 해요. 날라리 집사라서 기도 잘 안 하거든요. (웃음) 근데 딱 한번 기도를 했어요.

 

퍼 : 어떤 것에 대해서요?

 

유 : 단전이 되고 나서 경향신문 574명 의견 광고 나가려고 할 때였어요. 한겨레신문에 ‘111명 작가 선언’ 의견 광고 나가려고 할 때도 그랬고, 한전에서 거의 매일 찾아왔었어요. 어떤 식으로든 전기를 공급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의견 광고 좀 유보시켰으면 하는 투로 얘기를 했어요.

 

퍼 : 네.

 

유 : 그러면서 계량기만 떼어갔다 뿐이지 전기선은 다 살아있다고 흘려주는 거예요. 도전(盜電)해서 쓰라 이거죠. 그러면 골치 아픈 이빨 뽑은 셈이 되니까 한전은 그렇게까지 얘기를 했어요.

 

퍼 : 도전을 하셨더라면 그 여름이 덜 끔찍하셨을 텐데…

 

유 : 그때 갈등을 많이 했죠. 그랬는데, ‘내가 싸워야 되겠다. 나는 작가니까 작가들 도움 받고 싸울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퍼 :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유 : 다 필요 없고, 전기 공급 약관대로 해라 했죠. 건설사나 건물주가 전기 공급 해지 요청을 하면 한전 직원은 반드시 현장에 나와서 실 사용자가 살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 살고 있다면 끊어도 되겠냐고 동의를 구하고, 동의하면 전기를 해지해야 한다고 약관에 나와 있어요.

 

퍼 : 두리반에 한전 직원들이 나왔었나요?

 

유 : 나오지 않았어요. 30년 넘는 동안 건설사들이 전기를 무기로 삼을 수 있도록 한전이 직무를 유기해 온 거예요. 현장에 단 한 번도 나와 보지 않고 건설사들이 먼저 전기를 끊고 나서 일주일 뒤에 공급 해지 요청을 하면 책상머리에 앉아서 해지 요청을 수락해준 거예요. 그래서 철거민들이 어쩔 수 없이 도전을 해서 쓰면 벌금을 물리거나 심지어 건설사가 그것을 고소해서 구속까지 시킨 사례도 있어요. 철거민들이 전기 때문에 농성을 계속하지 못하고 쫓겨난 사례가 허다했거든요.

 

퍼 : 한국 전력과 ‘전기 공급 약관 지켜라’ 하고 싸우면 두리반은 전기 공급은 절대 못 받을 것이라는 건 각오를 하신 거네요?

 

유 : 그 대신 다른 철거 지역에 또 건설사가 전기를 끊고 공급 해지 요청을 하면 한전이 지금처럼 직무 유기는 못할 것이다, 싶었죠. 직원이 현장에 나와 보고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끊을 수 없다고 건설사에 오히려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총대를 메야 되는데 그걸 누구한테 짐 지우나, 내가 짊어져야지 그랬는데 그때는 기도가 나오더라구요.

 

퍼 : 기도 내용이?

 

유 : 다른 기도가 아니고 다른 철거민들 위해서 견딜 수 있는 용기 달라고…. 그 얘기만 했어요. 근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퍼 : 전기를 끊는다는 것이 바깥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철거민들에게 큰 압박이고 고통인 거군요.

 

유 : 그렇죠. 단전, 단수, 어마어마하죠.

 

퍼 : 어떻게 할 수 없나요?

 

유 : 어쩔 수 없어요. 나중에 이 사람들이랑 협상을 하게 되면 다른 무엇보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전기 넣고서 얘기하자.” 꼭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퍼 : 단수는 안 됐죠?

 

유 : 수도국은 내부 규약을 지켰어요. 건설사가 단수 요청을 했는데, 우리에게 와서 물어봤고 끊지 말라고 얘기를 했죠. 그래서 계속 쓰고 있어요. 그리고 수도관을 끊는 것은 좀 더 어려우니까.

 

퍼 : 유채림 씨께서 두리반을 지키며 하신 활동들을 보면 인간적인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모습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단전은 생활의 어려움이나 불편함 주는 것 이상으로 비인간적인 대우의 상징으로 다가오네요. 심리적 고통도 크셨겠어요.

 

유 : 그럼요. 그쪽은 공연 못하게 해서 사람 발길 끊고, 단전으로 견뎌내기가 힘드니까 농성을 포기하게끔 의도를 했겠지만,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 단전을 한 게 아니라 나한테 모욕을 주기 위해서 단전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퍼: 네.

 

유: 사마천이 한무제한테 궁형을 당하고 나서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선비는 때려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그 말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이놈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지. 그럼 내가 죽어줄까?’ 옥상에도 많이 뛰어올라 갔어요.

 

퍼 :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셨었군요.

 

유 : 네. 그랬죠. 그런 극단적인 감정들을 극복하는 데 드럼이 큰 역할을 한 거예요. 옥상으로 갈 것을 3층으로 가서 드럼 스네어가 찢어질 정도로 치고 그래서 두 번이나 갈았어요.(웃음)

 

 

두리반의 가을 – 그 남자, 유채림

 

 

퍼 : 집에 있는 두 아드님보다 두리반에 있는 친구들과 더 오래 지내시는데, 아드님이 서운함이나 원망 같은 표현한 적이 있나요?

 

유 : 그런 건 전혀 없구요. 얼마 전에는 “아빠가 완성된 것 같아.” 이런 말을 해요. 작은놈이 소설을 굉장히 많이 읽어요. “그동안 아빠가 학생 운동하고 촛불 집회 열심히 나가고 그래 왔지만 그걸로는 완성된 게 아니고 이 농성을 하면서 완성이 됐으니까 아빠도 <남쪽으로 튀어> 같은 소설을 하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퍼 : 그 소설,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어요. 그 얘기 듣고 굉장히 좋으셨겠어요.

 

유 : 우린 별 얘기를 다해요. 그 녀석은 꿈이 결혼이에요. 예전에 우리 부부가 퇴근하고 12시 넘어서 집에서 조고조곤 얘기하면 작은 녀석이 끼어들어서 자기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새벽 1시 되고, 엄마가 성질을 내면 그제야 들어가는데 약 올라서 심통을 부리죠. 엄마 아빠가 둘이 재밌게 얘기하고 사는 걸 좋아해요. 부부는 다 그렇게 사는 걸로 알고.

 

퍼 : 부러운 가정이세요.

 

유 : 우리 가정의 이런 분위기가 두리반에서 한 역할을 한 것도 같아요. 농성을 하면서 1년 동안 같이 연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봤을 거 아니에요. 화목한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활동가들 중에 더러는 우리 부부에게서 가족 같은 푸근함을 느끼는 모양이에요. 그것도 두리반에 사람이 모여드는 한 역할은 했겠다 싶어요.

 

퍼 : 두리반의 아버지와 어머니시네요.

 

유 : 실제로 저희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어요.

 

퍼 : 아드님 말씀처럼 ‘소설가’이신데, 1년 동안 두리반에 계시면서 ‘쓰는 일’의 진전은 있었나요?

 

유 : 원래 소설을 쓰고 있던 게 있었어요. 투쟁 전에 3분의 1 정도 썼었고, 투쟁 중에 틈틈이 써서 3분의 2까지 썼어요. 단전 된 여름부터는 컴퓨터를 켜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 중단이 되었죠.

 

퍼 : 아.

 

유 : 대신에 농성 첫 날부터 오늘까지 일지를 계속 써왔어요. 지금 두 권 끝났고 세 권째 들어가는데, 매일 밤마다 손으로 써요. 오늘 일어난 일들, 어떤 밴드의 공연이 특히 좋았고, 어떤 밴드는 내 정서에는 안 맞았다. (웃음) 뭐 이렇게 소소한 부분을 써왔어요.

 

퍼 : 언젠가 두리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소설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유 : 그런데 소설로는 이걸 감당을 못 하겠어요. 사건들과 인물들을 얽어야 하는데, 이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소설로 만들면 무지무지 진부하겠어요. 두리반 지켜준 친구들 되도록이면 다 어루만지고 싶은데.

 

퍼 : 애정이 있으시겠죠.

  

유 : 네. 우선은 재밌는 에피소드 위주로 한 산문집 준비하고 있어요. 산문집 먼저 내고, 그 다음에는 두리반을 골격으로 한 소설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퍼 : 글을 쓰시는 것도 치유의 역할을 하죠?

 

유 : 역할을 하죠. 일지에는 사실만 쓰거든요. 나중에 소설을 쓸 때 자료로 삼아야 하니까. 그런데 그것도 분명하게 느낀 점도 써놓고 하면 풀려요. 저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저렇게 푸는 걸 타고 났어요. (웃음)

 

퍼 : 글을 쓰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실 텐데 두리반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잖아요. 힘드실 때도 있으시죠?

 

유 : 제가 되게 폐쇄적인 사람이거든요. 내 노트북을 누가 쓰게 되면 왠지 발가벗은 것 같은 치욕감을 느꼈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퍼 : 심리적으로 가장 힘드신 부분이 있다면?

 

유 : 싫은 사람이 있어요. 근데 싫다고 말을 못 하지요. 지켜보다가 나중에는 그냥 넘어가면 쌓이니까 자꾸 풀어야 되거든요. 붙잡고 상처가 안 되는 선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이 싫다고 말을 하게 되요. 그런 부분이 고통스럽죠.

 

퍼 : 역시나 공동생활에서 오는 관계에 대한 어려움이군요.

 

유 : 그렇죠.

 

퍼 : 이제 농성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안종녀 사장님께도 같은 질문 드렸었는데, 농성 1년 지내 오시면서 아내에 대한 심경의 변확 있으신지요?

 

유 : 복잡하면 농성 못 해요. 극히 단순화 되어야 할 수 있죠. 예전과 현재를 비교 분석하면서는 농성 못 하죠. 그냥 저는 20년 전이나, 철판을 뜯고 들어왔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좀 다른 점은 있죠. 사랑해서 결혼하고 연애도 하고 그랬지만 살아오는 과정에서는 그냥 늘 불쌍해요. 지금도 그렇고.

 

퍼 : 안종녀 사장님 되게 강한 분인 거 같던데요.

 

유 : 강하더라도… 약할 때 더 강해 보이잖아요. 그런 거죠. 그리고 그런 마음이 부부를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퍼 : 미안하다는 말씀으로도 들리는데, 어떤 부분이 가장 미안하세요?

 

유 : 그냥 늘 그래요. 이를테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소설이 5권 나왔거든요. 그 중에 하나라도 잘 팔리는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식당 운영하다가 모진 세월 감내하게 됐을까. 좀 더 대중적인 소설을 썼어야 했는데…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다 미안하죠. 전철연 싸우러 나가는 것도 미안하고.

 

 

다시, 두리반의 겨울

 

 

퍼 : 투쟁 1년이 다가오는데, 만약 동일한 상황이 또 온다는 가정을 한다면, 같은 선택을 하실까요?

 

유 : 똑같을 거 같아요. 아내를 말렸겠죠. 농성 이건 못할 짓이에요. 꼭 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누군가 대신했으면 하고 바랄 것 같아요.

 

퍼 : 그러시군요.

 

유 : 그렇지만 어제까지 살 비비고 살던 여자가 사막 같고 전쟁터 같은 곳에 뛰어들겠다고 하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할 남편은 없죠. 고삐 잡혀 끌려 들어온 것 같았어요. 지금도 그래요. 이 농성의 주체는 아내이고 나는 그걸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거라는 생각을 해요.

 

퍼 : 농성에 필요한 비용이나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계신지?

 

유 : 5월 1일 51+ 공연 수익금하고 후원 주점 수익금을 모두 우리에게 줬어요. 그런 목돈이 생기는 것으로 꾸려왔는데 내년 봄부터는 위기는 위기다 싶어요. 봄 되기 전에 산문집을 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괜히 바빠요 여기서 지내면.

 

퍼 : 아직 정기적인 후원 회원 형태는 없죠?

 

유 : 네. 아직 없어요. 금요일 토요일 공연할 때 후원 모금함을 두고 자율적으로 기부를 받고 있어요. 조금 걷힐 때는 2만 원쯤, 많이 걷힐 때는 15만 원도 걷히거든요. 공연할 때 사용하는 경유 발전기 기름 값이 일주일에 12~3 만원, 삼층 석유난로까지 합치면 일주일에 기름 값으로만 15~17 만 원 정도 들어요. 후원금으로는 그런 거 감당하죠.

 

퍼 : 원래 사회 운동과 거리가 멀지 않으셨고 그 이전에도 철거 투쟁의 지난함에 대해서 알고 계셨을 텐데, 막상 본인에게 닥친 일이 되니 어떤 부분이 가장 절박하신가요?

 

유 : 사람들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잘 몰랐어요. 철거 문제만큼은. 85년 오목교 사태 때는 나가서 싸우기도 했고 붙잡혀서 두들겨 맞기도 했는데, 그 이듬해 상계동 철거 싸움에는 겁이 나서 못 갔어요. 사회 문제로서 분명히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갖던 관념 운동이었죠. 관념이 아닌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쭉 살아왔어요.

 

퍼 : 지난 용산 투쟁 때는 어떤 생각들 하셨나요?

 

유 : 철거민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전혀 몰랐었어요. 제가 분노한 부분은 이렇게 큰 일이 일어났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사과하고 책임을 통감하고 하야하겠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철거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행태에 대해서였어요.

 

퍼 : 네.

 

유 : 이제는 재개발, 뉴타운, 도시정비개발법에 해당되는 지역이 어떻게 철거되는지, 왜 이렇게 끝없이 개발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죠. 큰 덩어리에서 철거당하면 눈 가리고 아웅이나마 보상이 있고, 작은 덩어리는 한 푼도 없는 법을 하나하나 깨닫고 배우고 공부했죠.

 

퍼 : 이제 언제 어디서든 개발 문제 관련한 토론이 가능하시겠어요.

 

유 : 정곡을 찌를 만큼 몸으로 머리로 익혔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반성도 많이 하고. 과거에 철거민을 보던 안이한 시각에 대한 반성이죠.

 

퍼 : 사람들에게는 내가 살던 집, 일터를 빼앗긴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의식적인 방어도 있는 것 같아요. ‘나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인식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유 : 아주 구체적으로 자꾸만 알리는 길 말고는 없겠다 싶어요. 저는 여기저기 글을 쓰기 위해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퍼 : 바라시는 건?

 

유 : 이제 우리 부부의 맺힌 것 풀고, 원하는 것 쟁취하고 그게 다가 아닌 싸움이 되어버렸어요. 상징 싸움이 되어서 인근 어딘가에 반드시 두리반을 차려야만 해요. 그래야 상징 싸움으로 성공한 것이 되거든요. 

 

퍼 : 다른 사람들이 철거 싸움을 시작할 때 너희가 원하는 게 뭐냐고 했을 때 두리반처럼 해달라는 거다. 라고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이 생긴 거네요.

 

유 : 그렇죠. 철거되기 전에도 두리반처럼 싸우면 가게 안 뺏길 수 있으니 싸워보자는 용기를 심어주는 상징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두리반들이 많이 생겨나면 결국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도시정비개발법을 만들어낸 국회가 개정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꼭 이겨야겠어요. 근데 이러면 오래 가거든요. 지금 난감해요.(웃음)

 

퍼 : 두리반에 생활 공동체가 생긴 건데, ‘우리 이렇게 산다.’ 자랑하실 만한 부분이 있으신지요?

 

유 : 다 까놓고 사는 것이 다른 농성장이랑 다른 거 같아요. 2주에 한 번씩 반상회가 있어요. 12월 24일 1주기 행사를 어떻게 치룰 것인가, 경향 신문에 의견 광고를 내자는 의견, 후원금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모두 반상회에서 다루죠. 개방적이에요.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일을 풀어가는 것. 이런 부분이 내세울 만할까요?

 

 

두리반 상근자 – 병주

 

 

두리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중 두리반의 꽃은 상근자들이다. 전기장판 한 장도 꽂을 수 없는 곳에서 밤이면 음료수 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꼭 껴안고 자야 하지만, 그들은 즐겁다.

 

2010년 4월부터 두리반에서 지내고 있는 병주 씨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나온 재원이다. 풀무 학교에서 시작한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것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평화 운동의 일환으로. 그러나 풀무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그녀를 대한민국의 철거 투쟁현장의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았다. 흔히 볼 수 없는 젊음. 그녀가 겪은 두리반이 궁금했다.

 

 

퍼 : 지금 스무 살. 대학 휴학했다구요?

 

병주(이하 ‘병) : 네

 

퍼 : 두리반이 계기가 되었나요?

 

병 : 네. 남들은 학교 다니면서도 왔다 갔다 잘 하는데 저는 워낙 동시에 두 가지를 못 해요. 빈집이라는 생활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는데 두리반에 오면서 그것과 병행을 할 수가 없어서 거기도 나왔죠. 두리반에 올인을 하고 싶어서.

 

퍼 : 전공이?

 

병 : 신문방송학이에요. 성공회대.

 

퍼 : 어릴 때부터 그쪽에 관심이 있었나요?

 

병 : 원래는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다녔어요. 대안학교죠. 학교에서 재미로 연극을 시작했는데 무대 위에서 어떤 희열을 몇 차례 경험하다 보니 잊을 수가 없었어요. 졸업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연극으로 평화 운동을 하고 싶었죠. 

 

퍼 : 와,  용기가 대단해요.

 

병 : 두리반 오고 연극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하던 때가 있었어요. 재개발에 관한 극과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를 담은 대본을 쓰고 있었는데 단전되면서 다 그만둬 버렸죠.

 

퍼 : 두리반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병 : 4월 달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씨께서 성공회 대학에 강의를 하러 오셨는데, 그 행사의 문화제 행사를 도와주면서 두리반을 지키며 음악 하는 친구들을 만났죠.

 

퍼 : 누구?

 

병 : 단편선이라는 친구요. 제가 지금 홍대에서 젬베를 치며 공연을 하는데 그날도 젬베를 들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즉흥 연주도 하고 뒷풀이 가서 얘기를 들으며 알게 됐죠. 그런 공간이 있구나.

 

퍼 : 그때만 해도 두리반에 상근하는 사람은 없었죠?

 

병 : 네. 딱히 없었죠. 저는 4월부터 왔다갔다 했고 가끔씩 잠도 자고 하다가 거기서 만난 젊은 친구들하고 같이 동거동락을 하면서 굳어진 거예요.

 

퍼 : 단편선은 두리반 상근자들을 잉여라고 표현하던데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병 : 하루 24시간을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일정들이 없으면 잉여라고 불리는 게 맞겠죠. (웃음) 잉여 맞아요.

 

퍼 : 두리반에서 어떤 일들을 해요?

 

병 : 칼국수 음악회 밴드 섭외도 하고, 웹 자보 만들어 홍보도 해요. 두리반에 무슨 일이 있을 때 트위터나 전체 문자 통해서 사람들에게 빨리 모여 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하구요.

 

퍼 : 트위터, 그 일을 상근자들이 하는군요.

 

병 : 네. 마포구청에 점거 농성 갔을 때는 사장님과 3일 동안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같이 농성했어요. 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할 때 상근자들의 역할이 발휘되는 것 같아요.

 

퍼 : 지내는 건 어때요?

 

병 : 처음엔 1층에서 잤는데 1층에서 자다 보니 사람들이 술 마시고 늦게 갈 때 마다 너무 힘들었어요. 게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여기 뭐 하는 거야.” 하면서 새벽에 문 열고 들어오기도 하고 그러면 자다가 그 사람들이랑 눈 마주쳐서 깜짝 놀라고.

 

퍼 : 힘들었겠어요.

 

병 : 네. 지금은 앞에 공사가 끝났는데 여름철에는 포크 레인 소리, 드릴 소리 때문에 생활하기가 힘들었죠. 단전 되고 2층으로 잠자리를 옮겼어요.

 

퍼 : 유채림 선생님은 단전 이후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병 : 네. 그러셨을 거예요. 저희도 여름이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선풍기도 못 틀고 에어컨을 후원 받은 지 이주일 만에 전기가 끊겼어요. 이제는 겨울이 됐으니 또 추위가 문제죠.

 

퍼 : 그러게. 전기장판도 못 켤 테고.

 

병 : 낮 동안 난로에 데운 뜨거운 물을 포카리 스웨트 병에 넣어서 꼭 껴안고 자면 아침까지 따뜻해요. 다른 페트병은 다 찌그러지는데 그 페트병만 플라스틱이 단단한지 뜨거운 물을 넣어도 돼요. (웃음)

 

퍼 : 씻는 것도 문제겠네요.

 

병 : 저도 처음 와서는 찬물에 못 씻었는데 이젠 찬물로 머리도 잘 감고 그러죠. (웃음)

 

퍼 : 농성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름 단전 이후에 크게 힘들었던 적은?

 

병 : 어떤 이슈가 터질 때마다 힘든 거는 당연한 건데.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사람과 관계에서 힘들죠.

 

퍼 : 그래도 지금까지 사람들을 묶어 온 어떤 부분이 있겠죠?

 

병 : 두리반 내부 사람들이 바라는 건 다 똑같아요. ‘투쟁에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각자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다 다른데, 각자의 방법대로 하다가 부딪치는 것뿐이라서 외부로 퍼질 만큼 금이 가거나 했던 적은 없어요. 구성원들끼리 항상 얘기하면서 푸니까요. 근데 계속해서 논의 하는 부분은 있어요.

 

퍼 : 어떤 문제로?

 

병 :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독특하다 보니까 어떤 아우라 같은 게 있거든요. 자기들만의 강한 분위기가 있어요. 일반 사람들이 끼기 힘든 그런 분위기. 그래서 사람들이 오기 꺼려하면 어쩌냐. 처음 오신 분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자제를 좀 하자, 그런 거요.

 

퍼 : 어느 누구라도 두리반에 쉽게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건가요?

 

병 : 네. 본인들도 그런 분위기 덕분에 여기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두리반 삼백 일 vs 마포구청 일주일

 

 

퍼 : 여기 오기 전 철거 투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요?

 

병 : 잘 몰랐어요. 비정규직 투쟁이나 다른 투쟁은 알고 있었는데. 왜냐면 이상하게 철거 문제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 이유를 두리반에 있으면서 전철연 분들 만나서 알게 됐죠. 일반인들이 접근하는 걸 원치 않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꺼리고.

 

퍼 : 그렇게 본다면 두리반이 특이한 곳이네요.

 

병 : 그렇죠. 언론에 이렇게 많이 노출이 되고 오겠다는 기자 분들과 일일이 만나서 인터뷰하고 이런 곳이 제가 알기에는 거의 없었어요. 다들 못 믿죠. 방송사나 기자들을.

 

퍼 : 촛불 집회 같은 데는 다녔었어요?

 

병 : 초기부터 많이 다녔죠. 무대가 없고 시민들끼리 목청 높여서 외칠 때부터. 이년 전이니까 18살 때요.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면 집회 나가기도 했고, 방학 동안에는 학교 동아리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집회 다녔죠.

 

퍼 : 왜 그렇게 열심히 나갔어요?
 
 

병 : 80년대 이후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공간에 모여서 같은 목소리를 외치는 것은 근래 들어서 처음인 거 같아서 그런 현장을 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고, 이 판이 어떻게 흘러갈까도 궁금했고.

 

퍼 : 18세부터 그런 생각을.(웃음)

 

병 : 다른 무엇보다 모두가 즐거워했던 거 같아요. 촛불 집회 나갔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즐거워서였어요. 두리반에 있는 이유도 즐거움이구요.

 

퍼 : 무엇이 즐거운가요? 두리반에 있으면?

 

병 : 큰 거 없고 일상 속에서 작게 소소하게 웃는 것들이 많아요. 유채림 선생님께서 연애 얘기 하시면 웃고, 아들 얘기 하시면 또 웃고, 누가 들어와서 뭐라고 한마디 하면 웃고. 사실 커다란 거 없어요. 그냥 즐거워요.

 

퍼 : 지금 두리반에서 모두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요?

 

병 : 재개발 강제철거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어요.

 

퍼 : 본인이 경험해 본 두리반 투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병 : 뭔가 관성화 되고 일상화 되면 안 먹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걸 깊이 느낀 게 마포구청 1인 시위 할 때였어요.

 

퍼 : 얼마나 했어요?

 

병 : 여름부터 계속 했죠. 그러다가 겨울이 되고 추워지면서 못 했거든요. 오랜만에 한 친구가 시위를 하러 나갔는데 마포구청 직원이 “아, 오랜만이에요.” 하면서 지나가더래요.

 

퍼 : 아.

 

병 :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이거 씨알도 안 먹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런데 하루 이틀 계속 보다 보니까 그냥 거기 서 있는 애들이 된 거에요.

 

퍼 : 이젠 봐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거네요.

 

병 :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기존에 하던 투쟁 방법들도 정부나 기업, 자본가들에게는 이렇게 익숙한 방법인 거죠. 이렇게 나올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시나리오가 쫙 나와 있는 거죠.

 

퍼 : 네.

 

병 : 지금 저들이 두리반을 함부로 못하는 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파악 당하면 절대 안 되죠.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 두리반은 그걸 해 나가고 있는 거 같아요.

 

퍼 : 즐겁다고 했지만 힘든 점도 많겠죠.

 

병 : 네. 투쟁은 너무 힘들어요. 왜냐면 다 던져야 하니까, 자신을. 돈과 싸우려면 오래 버텨야 하는 거 같아요. 시간 싸움이에요. 예전부터 하던 생각인데, 마포구청 점거 농성 하면서 더 굳건해졌어요. 마포구청에서 일주일 농성하는 게 두리반에서 몇 백일 농성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어요.

 

퍼 : 어째서?

 

병 : 두리반 안에서는 용역 올까 긴장하고 있지만 밤 되면 기타도 치고 낮게 노래도 하고 술도 마시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서로를 다독이고 자연스럽게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요.

 

퍼 : 그런데 마포구청에서는 달랐군요.

 

병 : 네. 마포구청 안에서 점거 농성 할 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24시간 구청 직원들과 매번 부딪쳐야 되고, 소리 지르고, 녹음하고, 경찰들 왔다 갔다 하고. 그 스트레스는 말도 못해요.

 

퍼 : 그렇구나.

 

병 : 그 안에서 서로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싸우는 거니까 빨리 지치기도 하고 본인만 지치는 게 아니라 남과도 마찰이 생기면서 내부 균열이 생기니까요. 결국 내가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계속 뚫어가면서 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절대 못 버틸 것 같아요. 두리반은 즐겁게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퍼 : 두리반 농성이 마무리 되면 앞으로 뭘 하고 싶어요?

 

병 : 또 다른 농성장이나 투쟁 현장에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많은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고, 두리반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을 품어주고 일거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켜봐 줬다고 생각해요. 저 말고 다른 친구들도 이런 생각하죠.

 

퍼 : 그러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나요?

병 : 그건 모르겠어요. 단편선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마사모’를 만들자고. 마포구를 사수하는 모임. 우리는 좋은 생각이다 그랬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퍼 : 스무 살을 두리반에서 보냈는데 본인에게 두리반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였어요?

 

병 : 어느 새벽에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갔다가 두리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해보니 정말 나의 스무 살을 꼬박 두리반이라는 홍대 앞 철거 농성장에서 보냈구나 싶었어요.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싫지 않았어요. 기쁘더라구요.

 

퍼 : 어떤 면에서?

 

병 : 두리반에서 보낸 시간, 여기서 했던 일들 모두 제 삶에 있어서 값진 경험과 어떤 거름이 될 거고,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도 관계가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어요. 제2의 전환점 같아요. 제1의 전환점은 풀무학교. 두리반은 이제 제2의 고향 같기도 하구요.

 

 

 
      이렇게 하여 두리반 농성 1주년을 되짚는 우리의 인터뷰는 끝이 났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용산 참사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용산에서, 또 다른 곳에서, 철거 투쟁을 했던 분들의 증언은 너무나 생생하여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걱정이 이어졌었다. 두리반에 가서 보이지 않는 분위기의 무게에 짓눌려 제대로 된 질문이나 할 수 있을까? 상황을 잘 모르는 질문을 멍청하게 던지는 건 아닐까? 인터뷰 전날, 밤잠을 설쳤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고 난 후, 내가 느낀 건 안도감이랄까,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우리의 예측과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이 한 편의 소설처럼 펼쳐졌다. 씩씩하고 똑 부러지게 말씀하시는 안종녀 씨와 하나하나의 단어를 고르듯 신중하게 답변하시는 유채림 씨,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단단한 스무 살 병주 씨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인터뷰를 나간 우리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인터뷰에 참여했던 우리 모두는 두리반의 사람들에게서 새롭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는 느낌을 공유하였다. 그 어떤 위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지라고 요청하는 그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