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반 농성 1년 (1) – 안종녀

2011년 첫 기사로 두리반의 사장인 안종녀 씨, 그리고 그의 남편이자 소설가인 유채림 씨와 두리반 상근자 병주 씨의 인터뷰를 싣는다. 우리는 두리반이 2010년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화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철거가 낯설지 않은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철거 농성의 진화를 보여주는 두리반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되짚어 본다.

 

 

 

2010년 12월 26일. 두리반 농성이 1주년을 맞이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아침 뉴스에서는 철거민 다섯 분과 전경 한 분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200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 점심 장사를 끝내고 여자들만 남아 있던 두리반에 용역 30여 명이 들이닥쳐 집기를 들어낸 후, 사람들을 내쫓았다. 12월 26일 새벽 2시 두리반 사장 안종녀 씨는 두리반을 둘러싼 회색의 펜스를 절단기로 끊고 다시 두리반으로 들어섰다. 그날 새벽, 끝까지 아내를 말렸던 남편 유채림 씨는 지난 365일 두리반을 떠나지 않은 채 먹고 자며 두리반에서 기거하는 중이다. 
 
 

퍼슨웹은 2011년 첫 인터뷰를 위해 자본의 폭력과 철거에 맞서 두리반을 지켜온 사장 안종녀 씨와 그의 남편인자 소설가인 유채림 씨, 그리고 20대의 두리반 상근자 병주 씨*를 만났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두리반인가?’
 
 

* 유채림 씨와 병주 씨 인터뷰 <두리반 농성 1년 (2) – 유채림, 병주> 보러가기

 

그것은 ‘부채감’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한 해, 밤마다 버스를 타고 경전철 공사가 한창인 동교동 로터리를 돌아올 때마다 희미한 어둠 속에 서있는 두리반을 보았다. 용산에 이어지는 두리반 소식을 들으며, 두리반을 후원하는 ‘51+’ 공연 소식과 주점 소식을 트위터로 전하면서도 그곳에 발걸음 한번 하지 못 하고 저녁마다 그 곁을 지나쳤던 마음, 나는 ‘여기’ 있는데, 그들은 ‘저기’ 있다는 경계 안과 밖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부채감’과 ‘미안함’은 다른 한편, ‘불안감’과도 맞닿아 있다. 용산의 ‘남일당을 잊는 순간 당신의 삶이 철거당할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경계의 안과 밖은 명확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늘 ‘여기’에 있지만, 언제 어느 순간 ‘저기’로 내몰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불안감을 해소할,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용산을 통해, 두리반을 통해 적은 돈으로 가족들끼리 끼니 걱정 없이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소시민의 꿈이 얼마나 우습게 희롱 당하고 파괴당하는지를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2010년 한 해 두리반은 우리 시대의 가장 뚜렷한 자화상 중 하나였다. 그들의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요, 그들의 미래는 곧 우리의 미래였다. 하여 퍼슨웹은 두리반 농성 1년을 풀어내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충실히 기록해두고 싶었다. 
 
 

2010년 12월, 유난히 춥던 날, 우리는 두리반으로 향한다. 그리고 수십 번을 지나쳤던 두리반의 문을 열고, 드디어 문턱을 넘는다. 두리반 지킴이 유채림 씨가 우리를 맞이한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연탄과 석유로 난방을 했음에도 실내에는 냉기가 돈다. 상담을 위해 아들의 학교에 다니러 간 안종녀 씨는 안평도 포격 이후 전면 실시된 민방위 훈련에 발이 묶여 잠시 지체 중이었다. 유채림 씨는 안종녀 씨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차를 권하면서도 쉴 새 없이 바닥을 닦고, 석유통을 옮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민방위 훈련이 끝나고 두리반으로 돌아온 안종녀 씨와 마주 앉았다. 
 
 

 

퍼슨웹(이하 ‘퍼’) : 올해 둘째 아드님이 고3이시라고요. 대학 진학 상담하고 오셨나요?

 

안종녀(이하 ‘안’) : 아뇨. 진학 때문이 아니라 학교 납부금 때문에요.

 

퍼 : 납부금이요?

 

안 : 전에는 이런 거 미뤄 본 적이 없었어요. 남편이 1년 동안 직장 안 다니고 제가 장사를 안 하니까 못 내게 됐어요. 8월에 상반기 납부금은 다 내고 후반기 걸 못 냈는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해주더라구요. 장학금을 받았는데 725,000원인가 그래요.

 

퍼 : 네.

 

안 : 납부금을 다 못 내면 고등학교 졸업이 어려워요. 근데 납부금을 못 냈다고 고등학교 졸업을 안 시킨다는 것, 대학 입학을 못 하게 하는 게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거든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하려고 선생님이 만나자고 한 것 같아요.

 

퍼 : 아.

 

안 : 학교나 선생님들한테 굉장히 미안한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한테 그랬어요. 납부금이 없어서 밀리면 주변 사람들한테 돈을 꿔서 낼 수 있다. 그거 못 한다면 이 나이까지 인생 헛산 거다.

 

퍼 : 돈을 꿔서 내셨나요?

 

안 : 저는 다른 사람이랑 다르게 1년 동안 이런 상태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동안 가까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겠어요, 그 도움으로 1년 동안 농성을 이끌어올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사람들한테 납부금을 못 내니 돈을 꿔달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어요. 얼마나 어려우면 그 돈을 꿔달라고 하겠는가 생각하지 싶어서 저는 정말 가까운 사람들한테 손 못 벌린다고 선생님께 그랬어요. 그거 아니면 저도 얼마든지 그 정도는 꿔서 낼 수 있었다고 했더니 선생님들도 이해를 하죠. 선생님들께서 곤란해 죽을라고 하시죠. 
 
 

 

인터뷰 초반부터 두리반 농성 1년 안에 잠복한 문제들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농성자와 그들의 아이, 아이의 학교, 농성자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 그리고 다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농성자 마음의 결, 우리는 섣부른 예단이나 짐작 따위는 걷어치우고 안종녀 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그녀의 1년

   

 
 
퍼 : 기존 인터뷰에 성함이 ‘안종녀’, ‘안종여’, ‘안종려’로 표기되어 있던데요.

  

안 : 여자 여(女) 써요.

 

퍼 : 그럼, ‘안종녀’라고 표기하는 게 맞네요. 기존 인터뷰는 주로 유채림 씨께서 담당하시던데 인터뷰를 거절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안 : 그냥 역할을 분담한 거죠. 제겐 인터뷰가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제가 낮에 두리반에 없는 경우가 많아 오래 기다리셔야 하기도 하고, 저희는 부부니까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요.

 

퍼 : 저희 인터뷰 제안을 수락하신 이유는?

 

안 : ‘꼭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길래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야겠다 싶었어요.

 

퍼 : 조마조마 했었어요. 안 하실까봐.(웃음)

 

안 : 저는 두리반 내 행사 인사말 같은 것도 절대 안 해요.

 

퍼 : 잠깐 말씀 들어봐도, 말씀 잘 하시고, 말씀을 꺼리시는 분 아닌 거 같은데요.

  

안 : 못 하지는 않는데, 영광스러운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철거민이잖아요 철거민의 처지를 느끼고 그 일들을 상기한다는 게 굉장히 고통스럽더라구요. 인터뷰하다가 눈물도 나고 그래서 하기 싫어요.

 

 : 아, 저희 인터뷰 수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루 일과부터 들었으면 해요. 

 

안 : 지난 1월에 전철연( ‘전국 철거민 연합회’의 약자)에 들어가 집회 있을 때마다 매번 갔어요. 끝나면 저녁때 두리반 들렸다가 집에 가서 애 밥 주고, 아침에 고3 아들 깨워 학교 보내고 또 집회 가고. 그렇게 세 군데를 돌았어요 1년 동안.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퍼: 지금 재판이 진행 중이시죠?

 

안: 네. 원래는 벌금이 100만원 나온 거예요. 업무 방해, 건조물 침입-여기 들어온 거, 그리고 재물 손괴-펜스 뜯은 것, 그 세 가지에 대해서 고소당했어요.

 

퍼 : 벌금을 내셨나요?

 

안 : 아뇨. 벌금 내면 되는 건데 저는 인정할 수가 없으니까. 정식 재판 청구를 해서 3차까지 간 거죠. 건조물 침입에 대해서는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죠. 여기 들어온 거니까. 하지만 펜스 재물 손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어요.

 

퍼 : 왜죠?

 

안 : 그들이 와서 확인 안 하고 고소를 한 거니 저는 위증이라 주장하고 있어요. 그쪽에서는 성명 검사 때 우리가 위력으로 못 들어오게 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사람들 왔다는 12월 7일에 가게 장사하고 있었으니 손님인지 성명 검사하러 온 사람인지 모르는데, 못 들어오게 할 리가 없잖아요.

 

퍼 : 다음 재판일이 언제죠?

 

안 : 1월이요. 그때는 피고인 측에서 증인 심문을 신청해서 재판을 받으려구요.

 

퍼 : 1년 동안 몸이 많이 축나셨죠?

 

안 : 외모가 많이 상했어요. 여름 내내 땡볕에 앉아서 집회하니까. 원래 감기 잘 안 걸렸는데 올 겨울에는 자주 걸리네요.

 

퍼 : 두리반 처음 문 열 때 은행에서 대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안 : 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부족했어요. 그래서 아는 분들한테 꾸어서 가게를 얻고, 보험 들었던 것 깨고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대출 받았어요.

 

퍼 : 지금도 은행 대출금이 남아 있나요?

 

안 : 남아 있어요. 유채림 씨 퇴직금 받은 걸로 생활하면서 좀 갚고 그랬어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거기도 한번에는 못 주는데 우리가 이런 상태니까 좀 여유 있게 주시기도 하고 매달 주시기도 했어요. 좀 부담스러운 건 갚고 해도 아직 남아 있죠.

 

퍼: 그 전에 장사는 잘되셨나요?

 

안 : 젊은 분들이 참 좋아했어요, 가게 분위기나 음식을. 잘된 편이었죠. 재개발 한다고 들었을 때는 역세권이 되면 그 전보다 더 잘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올해 여기 전철이 개통하니 만약 장사를 계속했더라면 올해는 돈을 좀 벌었겠죠. 그동안 애들 아빠도 직장 다니고 했으면 애들 키우면서 먹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었겠죠.

 

퍼 : 그릇이며 테이블이 예뻤던 게 기억나요. 하나하나 공들여서 마련하셨을 것 같던데요.

 

안 : 그게 하루아침에 다 날아간 거죠. 그런 것들은 살면서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문득문득 그게 떠오르면 자다가 확 열이 올라 깨고 잠을 못 자요. 너무나 약 오르고 억울해서.

 

퍼 : 요즘도 그러세요?

 

안 : 그럼요. 갈수록 더해요. 갈수록 그 분노를 삭일 수가 없는 거예요.

 

퍼 : 2010년 12월 25일이면 농성 1주년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으신지요?

 

안 :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너무나 많이 달라졌고 제 인생 자체가 완전히 180도로 바뀌었다고 봐야 되죠.

 

퍼 : 좀 더 구체적으로 변화를 말씀해 주신다면?

 

안 : 글쎄… 세상에 대해,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었던 것들, 잘못된 것인데 나는 몰랐던 것들로 인해 좌절감이 굉장히 컸어요. 좌절감으로 오니까 우울증도 생기더라구요. 힘들어요.

 

퍼 : 네.

 

안 : 내가 당해서 알기 때문에 스스로 추스리자, 잘못된 것을 아니까 그것을 바꿔 나가기 위해서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구요. 힘들 때마다 자기 최면처럼 ‘지지 않겠다, 무너질 수 없다’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퍼 : 전철연 다니시면서 그런 마음이 더 다져지신 거예요?

 

안 : 글쎄, 물론 전철연을 통해 방법, 투쟁하는 분들의 결진 마음 같은 것들, 여러 가지로 도움 받았지만 내가 애초에 전철연의 도움을 받고 농성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내 가게를 빼앗겼다는 거, 빼앗을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농성을 시작하면서부터 ‘난 빼앗길 수가 없다,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1년 전 그날

 

 

 
퍼 :  철거의 순간에 대해, 철거에 대해 회고하시는 게 고통스럽다고 하셨지만 여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9년 12월 24일부터 26일까지의 일에 대해서요.

 

안 : 24일까지 계고장 하나 제대로 받지 못 했어요.

 

퍼 : 갑자기 들이닥친 거로군요. 그때 용역이 몇 명이나 왔었나요?

 

안 : 한 30명 정도. 우리 물건을 제대로 상자에 넣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자루에다 넣어서 들어냈어요. 내가 너무나 아꼈던 나무 테이블이었는데, 테이블 위에다 또 다른 테이블을 얹고 아무렇게나 직직 긁으면서 차에다 싣는 모습들을 봤어요. 끝으로 저를 내쫓았죠.

 

퍼 : 아.

 

안 : 다 내쫓고 펜스를 쳤는데, 그때는 끝난 거예요. 회색 펜스가 묘한 감정을 갖게 하더라구요. 절망감 같은 거,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폭력을 상징하는 색으로 다가오더라고요.

 

퍼 : 쫓겨난 후 어떻게 하셨어요?

 

안 : 내 삶의 터전이자 일터인 곳을 그런 식으로 뺏긴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으니까 뺏기고 나니 여기를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르겠고, 방법도 없고 주변만 맴돌았어요. 그러다 하루 반나절 정도 지났나,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숨이 안 쉬어지고 막 죽을 것 같은 거예요.

 

퍼 : 실제로 그렇게?

 

안 : 네.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대로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새벽에 들어갔다가 25일 낮에 나오면서 우리 애 고3한테 그랬죠. “지금 엄마가 나가면 오늘 집에 다시 올지 못 올지 모르겠다.” 그랬더니 “자기는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해요. “네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학교를 잘 다니는 거다. 나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게 된다면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다. 하던 대로 학교만 잘 다녀라.” 그랬죠.

 

퍼 : 어떤 각오를 하고 나오신 건가요?

 

안 : 그때는 뜯고 들어올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막연했지만 집에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두리반으로 나왔는데 아무리 주변을 돌아다녀도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저녁 때 유채림 씨 민주동문회 친구들이 와서 위로해주시며 같이 있었죠. 12시쯤 그분들이 가시는데, 제가 집에 안 가니까 후배 두 분이 남았어요.

 

퍼 : 그때 들어가기로 결정하셨나요?

 

안 : “나는 못 간다. 어떻게든 들어가야겠다. 죽어도 나는 들어가야겠다” 그랬죠. 그래서 회의를 해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후배 분들은 침낭, 부르스타 등을 사고 저와 유채림 씨는 근처 카페에 있다가 새벽 2시에 뜯고 들어왔어요.

 

퍼 : 절단기도 그때 사신 거구요?

 

안 : 그렇죠. 너무 늦은 시간이라 구하기 힘들었는데, 후배가 철물점을 다 돌다 돌아서 사다 줬어요. 걔도 절단기 사러 다니느라 추운데 고생 많았어요.

 

퍼 : 두리반으로 다시 들어오실 때, 유채림 선생님께서 많이 말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안 : 유채림 씨는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으니까 하지 말자고 망설인 거죠. 아마 유채림 씨는 내 마음보다 더 괴로웠을 거예요. 분한 마음은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퍼 : 들어오실 때는 어떤 심정이셨어요?

 

안 : 말도 못하게 무섭죠.

 

퍼 : 정말 무서울 것 같아요.

 

안 : 낮에 들어낼 때 용역이나 인부들에게 저항을 못한 거예요. 저항을 할 수도 없고. 펜스 두드리면서 통곡하는 나약한 모습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사람들 수가 더 많으니까요. 용역들도 우리가 저항을 안 하니까 “일 깨끗하게 끝났네” 하면서 회식을 하러 갔대요.

 

퍼 : 크리스마스 이브였죠. 

 

안 : 용역들이 회식을 하러 가서도 우리가 여기를 다시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나 봐요. 그냥 일반 사람 몇 명이랑 부부밖에 없으니까 용역들이 여기를 지키지 않은 거예요.

 

퍼 : 그렇군요.

 

안 : 근데 우리는 그 사람들이 지킬지 안 지킬지 모르잖아요.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들어오려고 생각을 안 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들어와야겠다 생각을 하니까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긴 시간도 아니고 짧은 시간이었는데 남자들까지도 바들바들 떠는 거예요.

 

퍼 : 아.

 

안 : 만약에 딱 부딪쳤으면 싸움을 하든 뭐를 하든 안 무서웠을 텐데 ‘그러지 않을까, 오지 않을까’ 하는 게 더 불안했던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은 망보고, 제가 뜯고, 뜯은 펜스를 사람들이 안으로 들여보내고, 저한테 가게 열쇠가 있었으니까. 가게 문 열고 들어왔죠.

 

퍼 : 절단 작업은 안 어려우셨어요?

 

안 : 그거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웃음) 펜스를 거는 동그란 고리가 있어요. 쇠로 두껍게 만든 거예요. 그거를 자르는 거라면 힘들었을 거예요. 밖에서 보기에 펜스는 엄청난 두려움, 공포의 벽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막상 펜스를 거는 고리는 살짝만 돌리면 벗겨져요. 펜스를 묶은 철사를 자른 거죠. 

 

퍼 : 상상해 봐도 되게 무서울 것 같아요., 뭔가를 계산해서 무서운 게 아니라 원초적으로 무서운 거잖아요.

 

안 : 네, 그 공포. 우리가 뜯는 거 보고 설령 그 사람들이 실제로 왔다고 해도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런데도 그런 원초적인 공포, 본능적인 공포가 느껴졌어요.

 

퍼 : 펜스를 뜯고 들어오는 건 어떤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거잖아요. 뜯고 들어오실 때 여길 다시 들어가면 앞으로 그 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공포나 불안감은 없었나요?

 

안 : 그런 건 없었구요. 우선 뜯고 들어왔을 때 여기 맺혔던 게 확 풀어지는 것 같았어요. 후배랑 하이파이브 막 치고. (웃음) 내 가게를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안도감.

 

퍼 : 해방감.

 

안 : 네. 내 가게를 다시 들어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안심이 되던지. 내가 힘들여서 일군 내 가게를 어떤 폭력에 의해서 뺏긴다는 것을 나는 전혀 용납도 못하고 이해도 못 하는 거예요. 죽었다 깨어나도. 법에 의해서라고 한들 그 법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어요.

 

퍼 : 들어온 후에 어떻게 해야겠다 계획이 있어서 들어오신 게 아니죠?

 

안 : 그렇죠.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었죠. 본능적으로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어요. 들어와 보니 빈 공간에 쓰레기 더미만 남아 있었어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쭉 있게 된 거죠. 들어오고 나서는 너무 춥고, 밖은 두렵고.

 

퍼 : 어떤 두려움?

 

안 :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았어요. 하루아침에 세상과 완전히 격리가 된 거죠.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또 우리가 들어왔으니까 저쪽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조치가 있을 것 아니에요. 초기에는 불안하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날 이후

 

     
퍼 :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때 용역이나 사람들이 와서 압력을 넣었을 것 같습니다.

 

안 : 네. 왔었어요. 뜯고 들어온 날 꼬박 새고 새벽 6시인가 됐는데, 12월이라 캄캄했어요. 쩔그럭 쩔그럭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더군요.

 

퍼 : 새벽부터요?

 

안 : 밖을 봤더니 건물을 허물기 전에 천막 치는 장치를 하러 인부들이 온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장비들을 몸에다 차는 모양이에요. 일을 하려고 왔는데 펜스가 뜯겨 있잖아요. 들여다보더니 ‘사람이 있다’ 하고는 일을 못 하고 갔어요. 낮 되니까 바로 시행사 쪽 사람들이 왔는데, 여기로 들어온 게 아니라 전기를 끊은 거예요.

 

퍼 : 바로요?

 

안 : 네. 전 두꺼비집이 내려져 있어 전기가 나간 줄 알았어요. 옆에 공사하는 사람들한테 얘기를 했더니 너무 추우니 전기를 좀 주겠다 해서 전기장판을 사다가 꽂다가 아직 전기가 남아 있는 줄 알게 됐죠. 그런데 시행사 사람들이 와서 전기를 완전히 끊더라구요.

 

퍼 : 한겨울에요?

 

안 : 네. 이렇게 추운데 전기를 끊는다는 건 우리더러 죽으라는 것이냐 하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우리는 위에서 시켜서 할 뿐이라고 하면서 도망을 가더라구요.

 

퍼 : 음…

 

안 : 낮이 되니까 또 어떤 사람이 왔었어요.

 

퍼 : 남전 DNC 사람이었나요?

 

안 : 아뇨. 그 사람은 남전 DNC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 시행사거 처음에 땅을 사들일 때는 어떤 사람을 내세워서 작업을 해요. 두리반 사태에서는 (주) 액트 이십구라는 회사를 내세웠어요. 초기 작업을 하는 거죠. 계약하고 땅 사면 그 사람들은 자취를 감춰요, 부도가 났다고 떠나는 거죠. 그런 다음 남전 DNC라는 시행회사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내쫓는 작업을 했어요.

 

퍼 : 남전 DNC가 처음인줄 알았더니 그 앞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군요.

 

안 : 네. 그런데 결국 나중에 보면 부도났다고 떠난 사람과 남전 DNC 사람들이 다 한통속이에요. 그냥 사람만 바꿔서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나니 너무 야비하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면서 세입자를 내쫓는 작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퍼 : 근데 26일 새벽 두리반에 들어온 후 처음에 땅을 샀던 사람이 다시 나타난 거군요.

  


안 : 네. 그 사람이 와서는 우리가 여기 들어온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그제야 대화를 하자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퍼 : 그 사람에게 뭐라 하셨나요?

 

안 : “당신 처음에 우리한테 300만원 주며 나가라 하고, 땅 사들이고서는 부도났다고 떠난 사람 아니냐. 결국 나를 내쫓은 사람 아니냐. 당신하고는 할 얘기 없다. 나가라.” 그랬더니 정신없이 나가더라구요.

 

퍼 : 처음에 감정평가는 안 했어요?

 

안 : 일반적인 재개발일 때는 하죠. 그런데 여기는 지구단위계획이에요. 마포구에서 조그맣게 동네를 지정해 놓은 건데 이 경우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퍼 : 아무 것도?

 

안 : 네. 영업 보상도 없어요. 임대차보호법 자체가 재건축 지구단위계획일 때는 보상을 안 해줘도 된다는 식으로 보호받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퍼 : 아, 뭐 그런.

 

안 : 그래서 투기꾼들이 그런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하는 거죠. 역세권이 된다니까 땅 주인들은 땅값을 천정부지로 불러요. 초기 투기꾼들이 그걸 다 주고 사요. 그러고 나서는 ‘땅값이 너무 비싸서 세입자들에게는 보상해줄 돈이 없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퍼 : 세입자들이 누구와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게 하려 그러는 거겠죠.

 

안 : 그렇죠. 유령회사들이죠. 주인도 없고, 만나는 사람마다 책임이 없고. 원래 큰 건설회사들이 작은 유령 회사들을 만들어서 초반 작업을 한대요. 그러고 마지막에는 대형 건설회사가 작업을 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미리 작업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자본을 갖고 들어와서 큰 회사랑 합작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정확한 관계는 모르겠어요.

 

퍼 : 지금 대화하는 창구가 있으세요?

안 : 대화하는 창구는 있어요. 유령회사라고 해도 주체라고 세워놨으니까 대화를 하자고 하면 사람이 와요. 우리 같은 경우는 (주) 액트 이십구* 사람이 오는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이랑은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자기 죽는 소리나 하고 자기네는 합법적으로 했다 이런 말만 하니까. 내 가게를 빼앗은 사람은 결국 남전 DNC라고 생각해요. 남전 DNC가 GS 건설의 시행사로 알려져 있으니 그 뒤에는 GS 건설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 (주) 액트 이십구 사장 반용태 씨 인터뷰 보러 가기
 

 

퍼 : 구청에서도 적극적으로 안 나서는 상황이죠.

 

안 : 네. 모든 건설 사업 할 때 환수법에 따라 이익의 몇 프로가 지방자치단체로 들어가요. 그렇기 때문에 구청이나 시청, 경찰이 다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겠죠. 철거 이후 해결 과정에서 관공서는 전혀 나 몰라라 해요. 

 

퍼 : 해결은 철거민과 회사가 알아서 하라는 거군요.

 

안 : 나라를 기업경영처럼 하는 천박함에 치가 떨려요. 거지든 가난한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건데 돈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위주로 살게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본적인 권리에서도 제외시키는 천박함에 치가 떨리죠.

 

 

 

농성의 시간들
   

 
퍼 : 두리반에 다시 들어오신 후, 초기의 불안감이 얼마나 지속됐나요?

 

안 : 12월 26일부터 한 2~3개월 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밤에 난로도 없었는데 불침번 서면서 꼬박꼬박 밤 샜거든요. 그때는 얼굴이 지금보다 더 했어요. 새카맣게 죽어가지고. 잠 못 자고 불안하고, 낮에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잤어요.

 

퍼 : 그때 민주동문회 분들과 계속 함께 계셨던 거예요?

 

안 : 네. 그분들이 같이 먹고 자면서 고생 많이 했죠.

 

퍼 :  불안감이 사라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안 : 초기에는 작가회의 분들이 계속 오셨었어요. 현수막도 걸어주고 거의 매일 찾아오셨어요. 그러면서 용역들이 우리를 다시 들어낼 시기를 놓친 것 같아요.

 

퍼 : 다행입니다.

 

안 : 네. 또 기독교 쪽에 계신 선후배 분들 오셔서 함께 생활해주셨어요. 이후 그게 알려지면서 인디밴드 활동하시는 분들이 우리를 위로해주고 함께 하고 싶다면서 찾아왔어요.

 

퍼 : 아.

 

안 : 그분들이 자신들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음악으로밖에 해 줄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1층에서 공연을 하면 아는 분들 와서 보고 했죠. 그러다 알려지니까 다른 공연 하는 분들도 와서 하고 싶다 했고, 3월 되고 4월 되면서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죠.

 

퍼 : 결국 12월 말에 들어오신 후, 3, 4월 봄이 될 때까지 계속 긴장하며 지내셨던 거군요.

 

안 : 네. 작가들과 인디밴드들이 함께 한 다음부터 서서히 불안감이 가라앉았어요. 그때부터는 문도 안 잠갔죠. 처음에는 비상사태로 늘 초긴장으로 지냈어요.

 

퍼 : 섣불리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안 : 그 몇 개월 동안 쓰레기도 엄청났는데, 그때까지 쓰레기를 단 한 번도 밖으로 내 놓은 적이 없었어요.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나를 안 알리려고. 쓰레기를 다 2, 3층으로 올렸어요.

 

퍼 : 굉장히 용의주도하셨네요.

 

안 : 그거는 내가 잘한 거 같아요. 경찰이 계속 왔다 갔다 했거든요. 쓰레기 나오면 여기서 자는 사람들의 인원이 파악될 테니까 하나도 내놓지 말라고 했죠. 근데 날이 풀리니 냄새가 너무 나서 한꺼번에 내놓는데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어요. 그걸 정리하고 나서 3층을 공연장으로 만들었어요.

 

퍼 : 그 즈음이죠. ‘51+’ 공연이?

 

안 : 네. 5월 1일 51+공연이 있었죠.

 

퍼 : 이제는 음악회가 정례화 되었죠. 같이 참석하세요?

 

안 : 시간이 되면 참석하고 전철연 연대 갔다가 늦게 오면 참석 못 하죠.

 

퍼 : 인디밴드들의 공연, 어떠세요?

 

안 : 새로운 문화에요 저희한테는. 유채림 씨 같은 경우는 이 투쟁이 끝나도 가끔 클럽 같은데 가야 할 것 같다네요. (웃음) 중독성이 있다고. 이제는 일반 노래를 들으면 싱겁대요. 신선하고 충격적이고 터질 듯한 에너지가 굉장히 쌓여있는 것 같아요.

 

퍼 : 그런 에너지를 느껴 힘도 받고 그러세요?

 

안 : 그렇죠. 음악 하는 분들이 너무나 순수하세요.

 

퍼 : 주로 외부 활동을 전담하시는데, 전철연을 통해 다른 지역과 연대하시나요?

 

안 : 전철연은 언론을 통해서만 막연하게 알았었죠. 과격하고 폭력적이고 거칠고. 그러다 소개를 받고 전철연에 갔어요.

 

퍼 : 어떠셨어요?

 

안 : 처음 회의에 몇 번 다녔는데 마침 용산 열사 분들 장례식 때였어요. 나는 ‘전철연도 조직이니까 중앙 지도부 쪽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겠다. 그 사람들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일까?’ 그 생각만 계속 했죠.

 

퍼 : 네.

 

안 : 그런데 회의 때 나가봐도 중앙은 없더라고요. 그러다 위원장단 회의에 참석을 해야 된대요. 각 지역 철거대책위원회 중의 한 사람이 위원장인데 저는 이 지역에서 한 집이니까 제가 위원장이 되어버린 거예요.

 

퍼 : 얼결에 지역 위원장이 되셨군요.

 

안 : 그렇죠. 위원장단 회의를 갔는데 그때도 중앙은 없는 거에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특별히 중앙의 지도부가 있어서 지시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더라구요. 그냥 다 철거민들인 거예요. 철거 싸움에서 승리한 분들 몇 분이 중요한 일들을 하고 계시고 현재 싸우는 분들 중에 일을 좀 잘 하시거나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 도와주고 계시는 체제였어요.

 

퍼 : 그렇군요.

 

안 : 전철연에는 철거민이 아닌 사람은 들어올 수 없어요. 보니까 굉장히 억울한 사람이 많더라구요.

 

퍼 : 구체적으로 어떤?

 

안 : 아이들 교과서까지 하루아침에 다 뺏긴 사람도 있었어요. 재개발 과정에서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비슷한 일을 겪었더라구요.

 

퍼 : 아.

 

안 : 만약에 1000만원에 월세 얼마씩 내고 살던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한테 1000만원 줄 테니 나가라고 해요. 처음에 들어올 때는 1000만원으로 집을 구해서 살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난 지금에 와서는 개발 때문에 그 돈으로 그만한 집을 못 구해요.

 

퍼 : 그렇죠.

 

안 : 그러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자기네들 삶의 터전이 서울이었고 아이들도 여기서 학교 다니고 하니까 어디로 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을 달라고 요구하는 거죠. 나도 마찬가지죠.

 

퍼 : 어떤 면에서?

 

안 : 처음에 내가 여기 1억 2천만 원 들여서 왔는데 지금은 1억 2천으로 그만한 가게를 못 얻는 거예요. 근데 처음 내 상황과 비슷한 것을 얻어달라고 하면 그쪽에서는 말이 되느냐고 나오는 거죠. 그래서 분쟁이 생기는 거죠.

 

퍼 : 네.

 

안 : 근데 실제로는 내가 들인 돈을 그대로 보상해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보증금도 안 주고 내쫓는 거죠.

 

퍼 : 보증금도 안 준다면 결국은 여기 들인 돈이 모두 증발해버리는 거로군요.

 

안 : 그렇죠. 살던 집에서 내쫓겨나 세입자들은 영구임대주택이라도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건데 어림없다 이러죠. 기존에 가난하지만 잘 살고 있던 동네를 개발을 해서 자기네들이 이득을 보려고 한다면 이 나라가 영구임대주택을 지어서 들어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나는 봐요. 근데 그걸 절대로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퍼 : 이익이 안 남는다는 거겠죠.

 

안 : 네. 건설사 쪽에서는 평수를 넓게 지어서 비싸게 분양을 해야 이득을 보지 임대주택 짓는 건 손해라네요. 전철연에서 들어보니까 임대주택도 어떤 분이 싸움을 해서 이겨가지고 그나마 임대주택이라도 짓게 법을 바꾼 것이라네요. 지금은 그나마 몇 만 평짜리 아파트를 지으면 임대주택을 몇 동 지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진 거래요.

   

 

진화하는 철거 농성

 

 

퍼 : 두리반이 작은 용산이라 불립니다.

 

안: 용산 사태가 일어나고 1년 만에 장례를 치뤘잖아요. 그 이후 동절기 강제철거는 권고의 상황이 됐어요. 법으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지만 여전히 앞에서는 강제철거 안 하겠다 이러면서 다 강제로 철거하고 있어요.

 

퍼 : 그렇군요.

 

안 : 두리반 철거가 용산 사태 타결되기 바로 며칠 전에 시도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제2의 용산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죠. 만약에 나를 강제로 끌어내려는 두 번째 시도가 있었다면 내가 분신자살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죠.

 

퍼 : 아.

 

안 : 나는 하고도 남아요. 끌려 나가지 않으려면 내가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무덤으로 삼아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여기서 끌어낼 수는 없을 거다 이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신문에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던 거 같아요. 
 
 

퍼 : 상근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두리반이 희망일 것 같아요. 두리반이 무너지면 절망하겠죠. 혹시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싶은 게 있으세요?

 

안 : 그런 건 없어요. 정말 너무나 고맙기만 한 사람들이고. 여기 상근하는 사람들이라고 왜 스트레스가 없겠어요. 어떤 이유에서 왔든 함께 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힘들어요. 고맙죠. 그 분들이 우리를 많이 배려해줘요. 솔직히 그런 분들로 인해서 여기를 지킬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어림도 없었어요. 벌써 용역들에게 간단하게 들려나갔죠.

 

퍼 : 그 이후로 용역이 오기도 하고 그랬나요?

 

안 : 요즘 들어서 염탐 하는 식으로 몇 번 왔었대요. 마포경찰서 형사말로는 용역들이 여기를 들어낼 테니까 입회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대요. 근데 여기는 다른 데 같지 않고 강제로 들어내면 안 된다고 용역들을 막았다고 하더라구요.

 

퍼 : 경찰들이요?

 

안 : 네. 일반인들이 많은데 들어내다가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용역들이야 잠수 타버리면 되는데 결국 모든 욕은 경찰이 얻어먹죠. 그거 들어낼 때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야 되거든요. 경찰이 자기네 부담이 크니까 막은 거예요.

 

퍼 : 네.

 

안 : 경찰이 입회를 안 해주니까 방법을 바꿔서 펜스를 치겠다면서 와요. 다른 철거 현장에서도 시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에요. 저쪽에서 펜스를 치려고 하면, 우리가 펜스를 못 치게 막고 싸움을 하니까 경찰한테 “이거 봐라 우리는 일하러 오는 건데 이 사람들이 막으니까 방해 못하게 용역을 세워두는 거다.” 이러면서 시작을 하거든요.

 

퍼 : 아, 그렇게.

 

안 : 이런 식으로 하려고 두리반에도 왔었는데, 그날 연락을 받고 사람들이 급히 많이 모였었어요. 한 30~40 명이 밤을 꼬박 샌 거예요. 옥상에서도 망을 보고. 용역들은 맞은편 건물에 있었어요. 우리도 몰랐었는데,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퍼 : 결국 일반인들이 많이 있어서 못 온 거네요

 

안 : 그렇죠. 그렇다고 봐야죠.

 

퍼 : 그게 언제쯤?

 

안 : 11월 중순경에. 동절기 철거를 하게 되면 부담스럽잖아요. 동절기 철거로 들어가는 날짜가 12월 4일부터예요. 작년 12월 24일 우리를 들어낸 것도 동절기 철거였어요. 지금은 여기가 알려졌잖아요. 두 번째도 또 동절기 철거했다고 알려지면 부담스럽잖아요. 그래서 11월에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퍼 : 알려지는 게 최선일 수 있는 거네요? 일반 사람들이 상주해 버리면 경찰도 부담을 많이 느끼게 되니까.

 

안 : 인터뷰를 해서 기사에 실리거나 공중파*에 나온다는 것, 그것이 우리 쪽을 좋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인정을 한다는 거잖아요. 잘못된 개발법을 인정을 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걸 공감을 하고 도와주시는 거 같아요. 그럼, 저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부분을 뒤집어엎는 데 부담감을 갖게 되는 거죠.

 

* <후 플러스> “쫓겨난 이들의 ‘슬픈 축제’” 보러 가기
   

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도와줄수록 그렇겠죠.

 

안: 네. 저희도 인터뷰를 몇 백 군데 한 거 같아요. 그게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이제는 안 하려고 하는데 유채림 씨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잘못된 것을 알리고 우리가 그것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게 중요하다고 말을 하죠. 인터뷰 전문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웃음)

 

퍼 : 그걸 주로 유채림 씨가 담당하시나요?

 

안 : 네. 내가 보기에는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여기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설사 용역이라고 해도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죠. 유채림 씨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더 많이 알려졌을 수도 있어요. 오시는 것 꺼리고 하면 사람들이 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프레시안 같은 데서는 여러 번 보도를 해주시더라구요.

 

퍼 : 계속 노출이 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모르던 사람도 한번이라도 들으면 없던 관심도 생겨날 수 있고.

 

안 : 기자 분들께 고맙죠. 철거 싸움이라는 것이, 어떤 싸움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힘든 것 같아요. 다른 지역 철대위들 보면서 안타까운 게 장소도 너무 외져서 노출이 잘 안 되고 일반인들과 언론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퍼 : 네. 사람들이 잘 모르죠.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고.

 

안 : 전철연 쪽 저 열심히 다녀요. 근데 그것만으로는 어렵다고 봐요. 두리반은 일반 시민들이 늘 함께 해주고 언론 쪽에서도 많이 다뤄주시고 저는 전철연 연대 투쟁 다니고 삼박자가 잘 맞는 것 같아요. 농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웃음)

 

퍼 : 네. 농성의 모범 사례 같은 느낌. (웃음)

 

안 : 제가 전철연에도 그런 건의를 많이 했어요. 잘못된 개발법을 우리의 힘만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개발법에 대해 인정하는 사람들, 아는 사람들과 연대를 하는 게 중요하다구요.

 

퍼 : 농성 끝나면 식당 안 하시고 강의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웃음) 유채림 씨는 인터뷰 전문으로 하시고. 철거 투쟁이 사람들에게 힘든 모습만 부각되었었는데, 여기는 좀 다르게 보입니다.

 

안: 지금 이 엄동설한 추위에 시청 앞에서 비닐 치고 자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기들도 투쟁하면 저렇게 될 텐데 싶으면 철거민들이 어떻게 감히 뜯고 다시 들어가서 농성할 용기가 생기겠어요. 이렇게도 농성을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싸울 수 있지 싶어요. 

 

퍼 : 그렇죠.

 

안 : 지금 마포구에 재개발 하려는 계획 엄청 많거든요. 그 사람들이 두리반 보고 ‘쫓아내기만 해봐라 나도 이렇게 싸울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우리가 잘 싸워 이기는 게 중요해요.

 

퍼 : 저희가 교육 잘 받네요. (웃음)

 

안 : 용산 사태 때 일반 시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렇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어요. 그분들 아직도 병원에 계셨을지도 몰라요. 냉동고 속에. 시민 분들이 도와주셨고 내부적으로는 전철연이 끝까지 싸웠죠. 용산 이후로 전철연 분들도 생각의 전환을 많이 하시죠.

 

 

그 여자, 안종녀

 

   
퍼 : 펜스를 직접 끊고 들어오신 분이 안종녀 씨라는 걸 알고 난 후, 안종녀 씨를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누구의 얘기를 듣고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아니라면.

 

안 : 글쎄요. 저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면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할 거에요. 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변할 수 없는 사실이고 포기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 : 허나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펜스를 끊고 다시 들어오는 건 아니죠.

 

안 : 설사 다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그냥 있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게 꼭 저라서 그런 거는 아닐 거예요.

 

퍼 : 저는 그 문제를 이런 부분과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인터뷰를 보니 결혼하시기 전 서점에서 일을 하셨다고요.

 

안 : 네.

 

퍼 : 그때 좋아하셨다는 책 목록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다자이 오사무, 사르트르, 이성복, 이인성 작가 등.

 

안 : 네. 처녀 시절에. (웃음)

 

퍼 : 그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가 바깥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 개인의 내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가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내면에 예민하게 반응할 거 같아요. 

 

안 : 그럴 수 있겠죠.

 

퍼 : 안종녀 씨께서 평소 그런 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리로 내쫓기셨고, 그 후 예상하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시죠. 철거는 사실 사회적 속성이 강한 문제인데, 개인의 내면에 대한 관심과 대사회적 활동의 교차점, 이 지점이 궁금해요

 

안 : 음. 글쎄… 제 자신이 당하고 보니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내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 삶과 내 개인 이외의 사회적인 문제에 참여를 못 하긴 했지만 결국 개개인이 파괴되거나 잘못되었을 때 그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퍼 : 그 부분을 좀 더 듣고 싶네요.

 

안 : 제가 저만의 내면세계에 집착이라고 하기는 뭐한데, 그런 쪽의 독서를 하면서 제 자아가 요만하게 있었다면, 내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스스로 그 부분, 자아를 포기 못 하는 거잖아요.

 

퍼 : 철거당한 날 ‘계속 맴돌 수밖에 없었다’, ‘억울함이나 분노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다’ 하셨습니다. 그러다 다시 들어오고 난 후 뭔가 뻥 뚫리는 느낌이 있었다는 건 그렇게 움직이게 만든 내면의 일관된 흐름이 있고 그것에 충실하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안 : 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내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고 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면 운동했던 사람으로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그냥 넘기나.’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다른 한편 나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끈질기고 치열하게 파고들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죠.

 

퍼 : 내면에 충실하게.

 

안 : 네. 내가 당한 현실을 유야무야 넘기고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독서의 영향이 내가 이런 농성을 할 수가 있었던 바탕, 힘이 되지 않았나 지금 질문을 듣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퍼 : 다음 질문은 다소 잔인하다는 거 알고 있는데, 그냥 하겠습니다. 농성 1년을 지내오셨죠. 1년을 되돌아보시더라도 똑같은 상황에서 역시 같은 선택을 하실까요?

 

안 : 더 잘 하죠 (웃음)

 

퍼 : 아, 네.(웃음) 지난 1년이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을 텐데 역시 결국은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보시는군요.

 

안 : 그렇죠. 그렇게 폭력적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퍼 :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더 잘 한다’고 말씀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어떤 시인이 용산 철거에 대해 “남일당을 잊는 순간 당신의 삶이 철거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남일당의 기억’은 철거되지 않는다> 보러 가기
   

퍼 : 그런데 자신에게 닥치기 전에는 우리 대부분 ‘나는 사회 안전망 속에 있다’고 생각하죠.

 

안 :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모를 거예요. 나는 내 돈, 빚까지 얻어서 가게를 만들었고, 나는 세금을 잘 내고 있었고, 법에 저촉되지 않게 장사를 했고 노력을 해서 벌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퍼 : 그렇죠.

 

안 : 그런데 이 나라 법이 내 가게를 뺏고 내쫓는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그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 어느 날 그렇게 되고 나니까 어느새 내가 이 나라 국민이 아닌 사람이 된 거에요. 그 배신감, 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엄청나게 컸어요.

퍼 : 네.

 

안 :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내가 기본적으로 보장 받고 살아야 할 것들에서 열외된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너무나 컸어요. 같이 철거 투쟁 하는 사람들 보면 분노가 굉장히 많이 쌓여있거든요. 나라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굉장히 커요. 신뢰감이 완전히 무너진 거죠.

 

퍼 : 그런 분노나 배신감들이 치유될 수 있는 어떤 통로가 있을까요?

 

안 : 없어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퍼 : 우울함이나 분노가 참기 힘든 지점까지 갔을 때 그걸 해소하시는 방법이 없으세요?

 

안 : 네. 무얼 해도 해소가 안 돼요. 가게를 다시 내는 것만이 내 화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다시, 두리반

 

 

퍼 : 농성 시작하신 이후에 같이 장사하시던 분들 가끔 보시나요?

 

안 : 가끔 만나요. 처음에는 다 같이 하기로 했었거든요. 다들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제의 받았고 “도대체 그것을 받고 어떻게 나가냐, 우리가 다 같이 투쟁하자.” 현수막 걸고 했죠.

 

퍼 : 처음 시작할 때는요.

 

안 : 네. 그랬더니 남전 DNC 사람들이 각개격파를 하려고 내용 증명을 다 보낸 거야. 얘기를 하자고. 단,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라네요. 사람들이 다 우리가게에 모였어요. 절대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면 안 된다 같이 만나야 된다 그랬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다 개별적으로 연락을 한 거예요. 나만 안 했던 거죠.

 

퍼 : 그래서요.

 

안 : 다 얼마씩 받아서 나갔어요. 제일 많이 받아서 나간 사람이 이천백만 원. 근데 그걸로 가게 못 얻죠.

 

퍼 : 어디로 가신지 아세요?

안 : 알죠. 저랑 만나고 있는 사람은 꽃 장사를 해요. 보상금 받은 걸로 일 년에서 이 년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꽃 단지에 들어가 있어요. 그 안에서 좌판을 해요. 아주 미치려고 그러더라고.

 

퍼 : 왜요?

 

안 : 자기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상인들이 하루 종일 같이 모여 있는 거고 일반인들 손님이 아니라 주문해서 대량으로만 팔 수 있는 거라 적성에도 안 맞는 영업을 해야 해요. 2년 동안 장사를 해서 가게를 차릴 만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 돈을 못 벌면 못 하는 거죠. 그 다음 보장이 없는 거죠. 경기 안 좋으면 꽃이 덜 팔리는데.

 

퍼 : 그 분은 후회 안 하세요?

 

안 : 후회하죠. 근데 우리 하는 거 보더니 했어도 큰일 날 뻔 했다 그러죠. 뭐 먹고 사느냐는 거지. 그 집도 고3이 있는데 미술을 하는 고3이라서 돈이 들어요.

 

퍼 : 댁의 자녀분은 어떠세요? 보통은 자녀분들 때문에 빨리 포기하고 접으시더라고요.

 

안 : 지금 생각하니까,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싶어요.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투쟁 시작할 때 둘째가 고3 올라갔어요. 도시락도 자기가 싸서 다녔고 공부도 잘했어요. 명도 소송 당하고 그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학원을 끊더라구요. 원래 반에서는 3등 정도 했는데, 수능을 평소보다 많이 못 봤더라구요. 그래서 영향이 많이 있었겠구나 싶더라구요.

 

퍼 : 맘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안 : 네. 맘이 많이 아프죠. 자기가 원하던 학교를 못 가게 되니까. 1년이라는 시간이 고3한테는 중요한 거였는데 위로 하나 못 해주고 따뜻하게 한번 못 해주고 나도 힘드니까 짜증내도 받아주지도 못하고 그런 것이 공부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퍼 : 큰 아드님은 군대 갔죠?

 

안 : 5월에 갔어요. 지난해 수능 보고나서 올해 학교에 들어갔으면 했는데 자기 생각에 들어가 봐야 군대도 가야 되고, 돈도 없는데 등록금만 내고 가는 게 아닌가 싶으니까 그냥 군대 가겠다고 하더라구요. 

 

퍼 : 1년 동안 지내오시면서 남편인 유채림 씨와는 어떠세요?

 

안 : 농성 1년 하면서 속상하고 아쉬운 건 남편하고 예전 같지 않다는 거죠. 제가 전철연 나가면서 이 사람이 직장도 그만두고 여기에 계속 있었던 거예요. 내가 두리반 농성을 하면서 전철연 연대 투쟁도 다녔다면 여기는 금방 헐릴 거예요. 용역들이 장악을 하겠죠.

 

퍼 : 그렇겠군요.

 

안 : 그렇게 되면 결국 천막을 친다든가 해야 되는데 유채림 씨는 그걸 보면서 직장 못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유채림 씨가 ‘여기를 내가 지키겠다’ 해서 시작했죠.

 

퍼 : 바깥 활동은 안종녀 씨께서 주력하셨다면, 두리반 내부를 지키는 안주인 역할을 유채림 씨께서 하신 거군요.

 

안 : 여기 오면 동지죠. 남편이 아니라. 그래서 의견이 안 맞으면 싸우는 거죠. 동지로서. (웃음) 분명히 남편이었는데 남편은 없고 동지만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게 힘들었죠.

 

퍼 : 네.

 

안 : 지난번에 사람들이 남편이랑 저랑 둘이 집에 갔다 오라고 보내준 적이 있어요. 2~3개월 만에. 집에 가니 거기에는 안온하고 편안한 남편이 있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웃음) 지금은 몇 달 만에 집에 와있어도 초기의 그 안온하고 편안한 남편이 없어요. 강퍅해지고 삭막해지고 그런 거 같아요. 아쉽고 미안하죠.

 

퍼 : 특히 어떤 점이 미안하세요?

 

안 : 유채림 씨가 1년 동안 꼬박 있으면서 감성적으로 많이 파괴가 된 것 같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혼자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랑 늘 함께 있어야 하니까 그런 부분이 굉장히 힘든 것 같더라구요. 그러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 있으니까 저하고도 많이 부딪치죠. 예전 같지 않으니까 아쉽죠.

퍼 : 네.

 

안 : 글을 쓰는 사람인데 회복이 되려면 지금까지 보낸 세월만큼을 더 보내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해요. ‘차라리 그때 그만둘걸. 내가 농성을 괜히 했나?’ 싶은 후회가 드는 단 하나가 남편 볼 때. 그 사람이 나중에 글 쓸 때 굉장히 힘들지 않을까 그것 때문에.

 

퍼 : 농성이 얼른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요. 사태를 종결하기 위한 구체적 요구 사항이 있으시겠죠.

 

안 : 나는 이 근방에서 이만한 평수의 가게를 할 사람이에요. 그거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공문을 통해서 나한테 사과하고 대화해서 그 가게를 차려내라.’

 

퍼 : 공문을 통한 공식적 사과요.

 

안 : 네. 먼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그 다음에 지금과 같은 가게를 낼 수 있으면 되요. 처음에 임시상가 요구할 때 홍대를 고집했던 이유는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가게 자리 잡으려면 최하 6개월은 있어야 되고 힘들잖아요. 그게 컸는데 지금은 반드시 홍대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에 있는 인디밴드들이 함께 해줬고 근처에 계신 분들이 많이 함께 해줬기 때문에. 반드시 홍대에서 가게를 하는 거, 그게 희망사항이죠.  

 

퍼 : 그러실 거예요. 다시 열면 잘 되실 거 같아요. 인디밴드들 만날 오고 (웃음)

 

안 : 한 식구 같은 사람들이 됐어요. 저도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이제는 가게를 하든 뭘 하든 다르게 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 : 어떻게요?

 

안 : 힘든 사람들 절대로 외면 못 할 거 같고 잘못된 상황을 바꿔나가는 데 미약하나마 함께할 것 같은 생각, 그런 부분이요. 저는 촛불 집회니 뭐니 거의 안 다녔거든요. 애기 아빠만 열심히 다녔지. 근데 이제 저도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죠.

 

퍼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안 : 저도 오래간만에 마음속의 이야기를 했네요.

 

 

     1년 전 그날, 안종녀 씨는 회색의 펜스를 끊어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두리반 1년의 농성이 비롯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두리반 농성 1년을 돌아보며 안종녀 씨의 인터뷰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펜스를 넘어 두리반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내면을 되짚어 두리반 농성의 시작점을 찾아가고 싶었다.

 

남편 유채림 씨와는 달리 촛불집회조차 나가본 적이 없다던 그녀는, 긴 시간의 인터뷰 동안 두리반 사장이었다가, 전철연 회원이었다가,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가, 한 남자의 아내였다가 문학소녀의 모습까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의 중심에는 자기 내면을 보듬을 줄 알았기에 내면의 목소리에 누구보다도 충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한 여인이 흔들리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계산하지 않은 공포, 본능적 공포가 엄습하던 밤이 그려지던 순간, 우리 모두는 숙연해졌다. 두리반을 철거하는 장면이 ‘깨끗하게 처리된 하루의 일거리’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철거당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는 성탄의 평화가 축복처럼 내리던 그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수면 아래로 잠복할 뻔한 흐름을 온몸으로 거스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내면을 얼핏 엿보아서일까?

 

인터뷰를 마친 후, 여전히 남는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는 정말 선 안에 서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