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남기 – 홍성희

참여연대에서 시민강좌를 기획하던 홍성희는 1년 전,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춘천으로 떠났다. ‘무조건 쉬기’. 오랫동안 시민운동 판에서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했던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떠났던 여행이 1년을 넘어섰다. 그런데 쉬러 떠난 그곳에서 새로운 판을 벌이고 있다. ‘산골유학’이라는 생소한 판.

‘산골유학’은 도시의 아이가 산골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방학을 이용한 농촌 체험도 아니고, 주말의 팜스테이(farm stay)도 아닌, 말 그대로 학교를 옮기는 것이다.
대개는 산골의 아이가 도시로 전학을 온다. 좋은 교육도, 좋은 학교도 모두 도시에 몰려 있다고 생각하므로. ‘교육’ 혹은 ‘학교’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도 이 일반적인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내 친구 홍성희도 그러했을 것이다. 적어도 1년 전, 춘천으로 떠나 생활하기 전까지는.

 

걱정스럽지만 대안도 보이지 않고, 또 대안을 생각할 만큼 치열하게 부딪혀오지도 않던 문제가 바로 교육이다. 그리고 교육만큼이나 답답한 또 다른 문제, 농촌.
이 두 가지 이슈가 최근 내 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홍성희 때문이다. 여성민우회와 참여연대에서 오랫동안 시민강좌를 기획하던 홍성희는 휴식이 필요해서 1년 정도 쉬기를 작정하고 춘천으로 떠났다.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에서 자란, ‘도시 토박이’가 휴식을 위해서 도시를 떠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나기는 두려운 상황. ‘춘천’은 그런 사람에게 꼭 맞는 곳이다. 1시간 30분만 달리면 서울이고, 게다가 춘천은 교육의 도시, 공무원의 도시, 문화의 도시가 아니던가. 그러니 타고난 도시인인 홍성희도 조금은 마음 놓고 춘천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일도 하지 않고, 애써 놀지도 않고, 그저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기 위해서 떠난 춘천에서 한동안 홍성희는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연락한 그는 “바빠 죽겠다”고 말한다. 산골유학 때문에.

 

이 인터뷰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전제
– 산골유학은 도시 아이가 산골 학교로 유학 가는 것이다.
– 유학 온 아이는 마을의 농가에서 생활하고, 농가 부모가 아이를 돌본다
– 홍성희는 춘천시 고탄리의 <춘천별빛산골유학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 고탄리는 마을 사람들끼리 자체적으로 마을 공부방을 운영하다가, 1년 전부터 ‘산골유학’을 시작했다.
– 유학을 결정하기 전에 도시 부모와 아이는 여름/겨울방학 캠프를 통해, 아이가 과연 산골에서 생활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고, 결정하도록 한다.
– 최소 반년 이상의 유학이 적당하고, 가능하면 1년의 농촌 ’생활’을 경험해보기를 권장한다. 
– 고탄리에는 1934년에 개교한 송화 초등학교가 있다. 현재 전교생은 18명. 지역 학생 14명과 4명의 유학생이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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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고탄리, 산골유학을 시작하다

 

 

퍼슨웹(이하 ‘퍼’): 고탄리가 산골유학을 하는 것을 알고 갔나?

 

홍성희(이하 ‘홍’): 아니, 몰랐다. 내가 이사 간 다음에 시작됐다. 만약에 할 줄 알았으면 안 갔을 거다. (웃음)

  

퍼: 고탄리 사람들이 왜 산골유학을 시작하게 된 건가?

 

홍: 이 마을에서 아이들이 줄기 시작한 건 좀 오래됐다. 10년 전부터 좀 줄기 시작했고. 시골 학교라 하더라도 예전에는 몇 백 명이었는데, 지금은 전교생이 18명이다. 그것도 유학생 4명 합쳐서. 이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퍼: 산골유학의 결정적 계기가 있을 거 같다.

 

홍: 산골유학의 출발은 젊은 이장님이다. 10년 전에 고탄리로 돌아와 귀농을 했다. 그런데 이장님의 아이가 다닐 학교가 폐교가 되면 다시 이 마을을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귀농 10년 차, 아직 마흔이 안됐다.

 

퍼: 아, 되게 젊은 이장님이다.

 

홍: 춘천 최연소 이장이다. 그래서 열정도 있고. (웃음) 애를 두 명 키우시는데, 3,4년 전에 자기가 농사 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공부방을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는데, 그때 사람들은 공부방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더라. 우여곡절 끝에 공부방이 만들어졌고, 이후 공부방이 마을 아이들을 책임지는 하나의 보금자리로 크게 된 거다.

 

퍼: 마을 단위의 아이들 보금자리가 산골유학의 구심점이 된 건가?

 

홍: 그런 셈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어떻게 돌볼까, 에서 시작한 것인데, 농촌에서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퍼: 어떤 면에서 중요한 문제인가? 좀 더 설명해 달라.

 

홍: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귀농했다가 포기한 사람이 있는데, 아이를 밧줄에 매어 놓고 일을 했다더라. 그래서 그 사람은 귀농 이야기만 하면 운다.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아이를 밧줄에 매놓고 방에 가두고 자기는 일을 나가는 거지. 결국 귀농을 포기했다.

 

퍼: 그럴 수 밖에 없었겠다.

 

홍: 그런데 공부방이 있어도 지속성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맡기는 곳이 생겼다고 해도 폐교를 막을 수는 없었던 거다. 그런데 어느 날 이장님이 민들레 잡지를 보다가 산골유학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걸 보고, 우리 마을에서 산골유학을 하면 좀 순환적인 구조가 되지 않겠냐 싶었던 거지.

 

퍼: 순환적 구조?

 

홍: 공부방 같은 경우에는 아이들을 방과 후에 맡아주기만 하는데, 산골유학을 하면 전학생이 생기니까 학생 수가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학교가 유지되고. 학교가 유지되면 공부방도 계속 돌아가야 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서 교육이 순환을 할 수 있다는 거다.

 

퍼: 공부방이 방과 후 학교 정도에 그친다면 산골유학은 학교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홍: 그렇지. 산골유학을 통해 학생수가 늘어나면 공부방이 아이들을 잠시 맡아주는 것,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여기서 그냥 자생적으로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된 거다. 그렇게 산골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첫 시기에 내가 이사를 간 거였다. 진작에 알았으면 안 갔을 텐데. (웃음)

 

퍼: 운명이다. (웃음)

 

홍: 공부방 겨울 캠프에 참여한 아이 중 우리 집에서 묵었던 아이가 산골유학을 오고 싶어 해서 우연히 내가 그 아이를 맡게 됐다. 산골 유학 온 아이들은 대부분 캠프를 와 본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는 캠프를 세 번 오고 나서 유학을 온 친구도 있다.

 

퍼: 캠프는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하나?

 

홈: 마을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산골 캠프를 하기 시작했다. 여름, 겨울마다. 숙소가 마을회관인데, 일정 중 이틀 정도를 농가에서 묵게 한다.

 

퍼: 산골캠프가 산골유학으로 발전한 건가?

 

홍: 그 힘으로 산골유학을 시작을 한 거다. 산골캠프를 하다 보니까 도시 아이들에 대한 감성도 알 것 같고, 도시 아이들한테 우리 마을의 교육이 조금 더 다가갔으면 좋겠고, 도시 아이들이 마을에 오면서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직관이, 그런 확신이 이장님한테 있었던 거다.

 

퍼: 모집은 어떤 식으로 했나?

 

홍: 인터넷으로. 그냥 뭐, 적당히 올리면 항상 사람들이 온다. 왔던 사람들은 항상 또 온다. 지난 캠프 때 내가 접수 담당을 했었는데, 가장 힘든 건 사람들을 잘라내는 거더라. 산골캠프가 많지 않고, 믿고 맡길 만한 캠프가 없으니까, 이렇게 일단 자리를 잡은 캠프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퍼: 왔던 사람들은 계속 오겠다.

 

홍: 그런 셈이다. 캠프가 일주일에 35만 원 한다. 처음에는 25만 원을 받았는데, 사람들한테서 전화가 왔다더라. 그 적은 비용으로 일주일 동안 아이들 마을캠프를 하니 뭔가 허술한 건 아니냐, 애들 밥은 제대로 주냐, 이런 전화. 그러니까 다들 무지했던 거지. (웃음) 재밌는 건, 그 돈을 전혀 남기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사들은 운영비용을 포함하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공부방도 지역에서 지원을 받기 때문에 돈을 모아두지 않는다. 몽땅 다 쓴다.
 

 

산골, 도시 아이를 만나다

 

 
홍: 산골유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농가형, 센터형, 복합형. 농가형은 보통 귀농을 한 사람들이 많이 하는데, 말 그대로 농가에서 아이가 생활하는 거다. 농가 부모가 아이를 완전히 케어하는 거지. 그러니까 농촌 토박이 부부들이 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센터형은 농가가 아니라 큰 기숙사 형태의 공간에서 한 열 명 정도의 아이들과 두 세 명의 선생님들이 24시간 숙식을 하면서 키우는 거다. 세 번째 복합형이 지금, 우리 마을 같은 경우인데, 농가+센터 결합형이다.

 

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홍: 다 일장일단이 있다. 농가형의 경우, 대개는 자기 조카를 맡으면 시작하지. (웃음) 그런데 아이를 하루 종일 농가에서 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학교 끝난 후의 시간까지 모두 책임져야 하니까. 그리고 아이가 다닐 학교와 지역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퍼: 학교와 지역 전체를 상대한다는 게 무엇인가?

 

홍: 농촌에 온 도시 아이들 때문에 지역에서 분쟁이 생기는 일도 있다. 다른 지역에서 생긴 일인데, 도시에서 온 아이가 돌멩이를 던져서 시골의 개를 죽인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 밖에도 논밭에 들어가서 뭘 꺾는다든가 하면, 도시에서 애들 들어와서 마을 망친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런 민원이나 학교의 행정 처리를 다 해야 하니까 쉽지 않지.

 

퍼: 도시에서 아이가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지역에서 아이를 받는 것도 쉽지 않겠다.

 

홍: 맞다. 그리고 학교도 쉽지 않다. 도시 아이들이 오는 것에 대해서 반기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냥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다. 사실은 마을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시골은 보수적이다. 마을의 질서가 견고하다. 도시 사람이나 도시 아이들은 그 질서를 흐트러트릴 수도 있는 존재들인 셈이다.

 

퍼: 센터형의 장단점은 뭔가?

 

홍: 센터형은 전문적인 선생님이 아이들과 계속 함께 있다. 그러니까 교육적인 면에서는 좀 더 쉽지. 대신 농가의 생활을 모른다는 한계는 있다. 그리고 센터형은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 농가형은 자기의 생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이들을 받는 거지만, 센터형은 일단 공간이 있어야 하고, 교사도 있어야 하고, 또 밥 해주시는 분도 있어야 하니까.

 

퍼: 그러면 복합형은?

 

홍: 여기, 별빛산골유학센터가 전국에서 유일한 복합형이다. 생활은 농가에서 하고, 센터에서 그 밖의 일들을 맡는다. 방과 후 학습이라든가, 학교행정이라든가, 그리고 도시 부모와 만나는 일 같은 거. 별빛산골유학센터 이전에도 몇 군데가 더 있었는데, 다 잘 안됐다고 하더라. 농가형의 장점과 센터형의 장점을 결합시켰는데,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지.

 

퍼: 어떤 점이 어렵나?

 

홍: 도시하고 산골하고 차이 나는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감성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퍼: 감성의 차이? 예를 들면?

 

홍: 예를 들면…. 이건 어디까지나 예다. 여기 사람들은, 내가 정성 들여서 키운 농작물이니까 사람들이 알아주겠지, 이렇게 생각하신다. 홍보의 중요성을 잘 모르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좋은데 안 오면 손해지. 이렇게 좋은데 안 사먹으면 어쩔 수 없지.” 이런 생각이 있는 거다. 그런데 도시에서 우리가 소비할 때는 그렇지 않지 않은가. 주문하면 “고객님의 상품이 접수되었습니다, 배송 중입니다” 이런 메시지도 와야 하고, 또 바로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이런 기타 등등의 포장들.

 

퍼: 요즘은 다 그렇게 하니까.

 

홍: 그러니까 농촌 분들에게는 소비에 대한, 소비 감성에 대한 마인드가 너무 적다. 나중에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이것까지는 못 해도 말이다. (웃음) 그러니까 산골에 아이를 맡긴다고 생각하면, 도시 부모들은 얼마나 불안하겠나. 그런데 산골은, 그냥 믿고 맡기세요, 이런 식으로 무대뽀로 나간다는 거다. 아이건 농작물이건.

 

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이런?

   

홍: 그렇지. 그런데 도시 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이를 맡겼는데, CCTV라도 보고 싶은 거지. 여기 사람들은 이런 도시 부모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

 

퍼: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도 감성의 차이가 있을 거 같다.

 

홍: 도시 아이들과 여기 아이들은 전혀 달라. 도시 아이들은 집이 몇 평이에요, 평당 얼마에요, 수입이 얼마에요. 이런 걸 묻는다. 나한테도 묻더라. ‘아줌마는 재산이 얼마에요, 내가 이 집에서 살면 나중에 유산으로 물려주세요’라고.

 

퍼: 아, 도시 아이들이 그런가?

 

홍: 전에 캠프할 때, 음악회를 하면서 콩물을 팔았다. 한 잔에 500원. 처음에 이걸 팔지 말지 논란이 많았다. 돈을 남기자고 파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장님 생각은,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도시 부모들이 돈을 내고 사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500원을 주고 팔았는데, 캠프에 온 애가 “너무 비싸요, 공짜로 주세요.” 하더라. 그랬더니 여기 사는 아이가, “야, 이거 믹서기로 간 콩국물 아니야. 다 우리 엄마가 맷돌로 간 거야.”라고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그 콩물이 500원 이상의 가치인 거고, 도시 아이 생각으로는 종이컵 한 잔에 500원은 너무 비싼 거지.

 

퍼: 음…

 

홍: 여기서 느낀 건, 그 간극이 참 크다는 거다. 감성적 간극.
 

 

도시와 산골, 우리가 모르는 감성의 차이

 

 
홍: 일반적으로 학부모들에게 일치하는 교육관이 있다. 적어도 초등학교 때는 자연 감수성을 키웠으면 좋겠다는 것. 초등학교 때만큼은 아이가 입시 경쟁에 아이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초등학생은 사교육에 뺑뺑이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이 정도의 철학은 일치한다.

 

퍼: 여기 오는 아이들의 학부모 말인가?

 

홍: 그렇다. 적어도 초등학생일 때는 자연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 자연을 맛 본 아이들, 실컷 놀아본 아이들이 이후에도 더 성취 능력이 클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 맡기는 부모건 맡는 부모건 간에. 그런데 실제로 이 교육 감성에는 간극이 크다.

 

퍼: 어떤 간극? 도시 부모와 농촌 부모 사이의 간극을 말하나?

 

홍: 도시 부모의 내부에 이미 서로 다른 감수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그 사이에 간극이 있다. 누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아, 시골 가서 살고 싶다”고. 하지만 시골에서 일주일 있으면 미칠 것 같다. 머리로는, 자연적인 게 좋다 하지만, 입은 패스트푸드가 좋은 거다. 밤에 창 밖에서 들리는 풀소리가 좋다 이러지만, 컴퓨터 하는 게 더 좋은 거지. 우리, 농활 가서 ‘농촌 연대는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도시로 진입하는 순간 네온 사인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이 감성의 차이가 되게 크다는 거다.

 

퍼: 머리와 몸의 차이가 크다. 교육에 대한 감성에서도 그런 간극이 보인다는 건가?

 

홍: 도시 부모들은 머리로는 ‘아, 시골에서 내 아이가 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선입견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시골 부모들은 덜 배웠다고 생각한다든가 하는. 이번에 캠프 접수 받는데, 자기 아이가 성폭력에 노출될까 걱정하는 엄마가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다른 도시 아이들이 내 아이와 같이 자는 건 괜찮지만, 산골 아이가 내 아이와 같이 자는 건 싫다는 거다. 이건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그런 걱정을 하는 거다. 혹시라도 성감수성이 떨어지는 산골 아이가 내 아이를 그렇게 하진 않을까, 라고.

 

퍼: 요즘 언론에서 한참 그런 뉴스가 많기도 했다.

 

홍: 맞다. 언론에서 엄청 나오고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나한테 따로 아이가 없는 농가에 자기 아이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우리가 보내시지 말라고 그랬다. 그 정도 믿음이 없으면 보내시지 않는 게 좋다고. 산골에서는 오히려 일주일이지만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도시 아이들이 무서워 죽겠는데. (웃음) 하지만 누구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 예뻐. 그런데 마주 대했을 때, 그 간극이 크다는 거다.

 

퍼: 마주하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는 간극이겠다. 

 

홍: 이런 간극들이 수시로 발생한다. 내 경우, 이런 감성은 이해를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퍼: 어떤 문제?

 

홍: 아이를 맡아 돌본다는 건 나의 사적 공간이 다 노출된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나 도시 부모 입장에서는 그게 다 보여야 안심이 되고. 그런데 나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이건 아마 내가 가진 도시인적인 감성 때문일 거다.

 

퍼: 그럴 수 있겠다.

 

홍: 농가 부모도 마찬가지로 부딪치는 면이 있다. 농가 부모 입장에서는 감성을 억지로 키워내면서까지 아이를 맡을 수는 없다.

 

퍼: 서로 다른 감성과 감성이 부딪치는 문제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부분이겠다.

 

홍: 이런 부분은 교육한다고 채워지는 게 아니다. 서로 이해해야 하는 면이 있어서 우리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육도 하고, 도시 부모 간담회도 하지만, 한 학기 만에 채워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퍼: 해결책은 없나?

 

홍: 이런 감성적인 충돌은 센터가 맡아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산골유학에서 농가와 센터의 결합형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별빛산골유학센터가 이 장점을 끝까지 잘 살려나갔으면 좋겠고.

 

퍼: 복합형 산골유학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있나?

 

홍: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마을’이라는 물질적인 토대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센터 역할을 하는 지금의 이장님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같이 귀촌을 한 농가가 있어야 한다.

 

퍼: 귀촌 농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홍: 도시 부모와 산골유학을 연결해주는 데 필요하다. 농촌에서는 도시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쪽 감성을 알 필요가 있고, 도시 부모 입장에서도 농촌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나 같은 사람이 그 가운데 있게 되지.

 

퍼: 쉽지 않은 조건이겠다.

 

홍: 그렇다. 마을과 도시, 농가 부모와 도시 부모, 그리고 학교를 연결하는 센터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많이 깨진다. 다른 지역의 산골유학의 경우, 일부러 재래식 화장실을 만드는 곳도 있다. 일명, 푸세식이라고 하는. 산골이라는 것에 대한 경험을 아주 근본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건데, 이것도 중요하긴 하다. 그런데 나는 산골유학이라고 꼭 그렇게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퍼: 요새는 ’귀농’이 아니라 ‘귀촌’이라고 하나? 농사는 짓지 않고 그냥 사는 곳이 ‘시골’이라는 말인가?

 

홍: 그렇다. 시골에서 산다고 다 농사를 짓는 건 아니니까. 예전에는 ‘귀농’하면 정말 촛불 하나 켜놓고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정도로 하지 않으면 무슨 변절인 것처럼, 그게 땅을 사랑하는 태도인 것처럼 얘기하던 시절도 있었지. (웃음)

 

퍼: 시골로 오는 사람들도 다양해졌다는 거다.

 

홍: 시골로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골도 달라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마을을 보여주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 마을은 강원도 산골이지만 다 수세식 화장실을 쓰는데, 산골유학을 하기 위해서 재래식 화장실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습 그대로, 도시와 산골의 교육이 합쳐지기를 원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퍼: 덧붙이거나 꾸미지 말고 도시와 산골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홍: 그래서 별빛산골유학센터의 모습이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 산골유학이 다 똑같은 모습일 필요는 없지만. (웃음)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캠프를 준비하고, 음악회도 준비하다 보면 그게 마을축제가 된다. 거기에 도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그런 모습이 참 예쁘다. 그런 자리를 통해서 조금 더 안심하고 도시 부모들이 아이를 맡기고 되고, 그리고 마을도 산골유학을 통해서 좀 더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도시 여자가 산골에서 살아가는 법

 

 
홍: 자연이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건 쉽지 않다. 산골 유학을 하면서 사람들도 함께 배워가야 한다. 여기 시스템이 막 뭔가를 작심하면서 가진 않아. 그런데 요즘은 일이 점점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일하던 방식과 좀 다르다.

 

퍼: 어떤 점에서?

 

홍: 지금까지 나는 내 이름을 가지고 일을 했다. 아, 내 이름을 타이틀로 걸고 일을 한다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해왔다.

 

퍼: 지금은 마을의 생활이 달린 건가?

 

홍: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뭔가 지금까지 일하던 감성과는 전혀 다른 감성이 요구된다는 거다. 전에 일할 때는, 범죄자가 아니라면 내가 성질이 나쁘든 뭐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만 잘하면 오케이 되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을 잘해도 기본적으로 여기서 요구되는, 안정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퍼: 어떤 안정감을 말하나?

 

홍: 예를 들면, 이장님은 절대 이혼을 하면 안 된다. 산골유학 하는 이장님이 만약 이혼을 한다, 그러면 이 산골유학은 성립이 안 된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퍼: 이장님이 이혼하면 산골유학이 성립 안 되는 이유가 뭔가?

 

홍: 여기 분들 생각에는, 이혼한 집은 문제가 있는 집이고, 그런 집에 도시 아이를 맡길 수 없다는 거다. 온전한 부부, 라는 조건은 이곳에서 일을 하든 뭘 하든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퍼: 음. 어쩌면 도시 부모 입장에서도 그럴 수 있겠다.

 

홍: 그런 점에서 도시와 완전히 다른 질서가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모든 일의 주체가 남자다. 이사 초기에는 그 ‘질서’를 몰라서 꽤 힘들었다. 산골유학 일을 하는 건 난데, 마을회관에 모여 회의할 때마다 내가 아니라 오빠가 와야만 회의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많이 싸웠다. 솔직히 여자라는 존재가 이렇게 평가절하되는 느낌도 처음이었다. 음. 마치 여자인 ‘홍성희’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여기는 가족, 가정이라는 울타리 자체가 기본이 되고, 그 위에서 일을 한다.

 

퍼: 그건 도시인의 시각인가, 아니면 마을 안의 생각인가?

 

홍: 내부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외부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웃음) 그러니까 이장님도 아이들 맡길 집을 고를 때, 화목한 집을 찾는다.

 

퍼: 하긴. 아저씨가 매일 술 마시고 그러면 곤란하겠다.

 

홍: 농촌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긴 한다. (웃음) 그런데 농촌에서는 교육의 개념이 도시와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고3 부모”의 뜻을 모른다.

 

퍼: 고3 부모,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상황들?

 

홍: 그렇다. 그래서 여기서 나도 말조심을 하고 있다. 누가 고3 부모라고 해서, “어머, 힘드시겠어요”, 이러면 “왜 힘들지? 이제 곧 해방인데.” 라는 거다. (웃음) 옛날처럼 학교를 못 가게 하고 농사일을 시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도시 부모들처럼 교육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퍼: 고3에 대한 건, 전국 공통인 줄 알았다. (웃음) 그런 얘길 듣고 있으면, 마치 그곳이 굉장한 시골처럼 느껴진다.

 

홍: 여긴 진짜 산골 맞다. 어르신들 중에는 한 번도 고탄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춘천 시내에서 20분 거리지만, 완벽한 산골이다. 심지어는 아직 남자, 여자 겸상을 안 하는 집도 있다. 그리고 처음에 이사 갔을 때, 나 혼자 돌아다니다가 마을 어르신을 보고 인사를 드리면, 아예 인사를 안 받는 어른도 계셨다. 여자가 혼자 다닌다고.

 

퍼: 무슨 60, 70년대 얘기 같다.

 

홍: 내가 운전하고 다니는 게 한동안 마을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심지어 아이들도 물어볼 정도였다. 왜 아줌마가 운전하냐고. 그런데 유학생 아이를 맡은 후에 나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도시에서 온 집인데, 마을에 좋은 일을 한다는 인식도 작용했고, 또 무엇보다 그분들 눈에는 이제 ‘아이’가 있는 ‘가정’이 된 거다. 나 혼자 인사 드리면 안 받으시던 분들이 아이랑 같이 있을 때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신다. 1년 동안 살면서, 일부러 쎄게 나간 부분들도 있다. 마을 형들이랑 맞담배를 피운다던가 하는 식으로. (웃음)
 

 

농촌과 도시, 우리가 살아가는 곳

 

 
퍼: 1년을 그곳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홍: 사실, 나는 이방인이다. 산골유학을 한 학기 하긴 했지만,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일을 하고 있지만. (웃음) 마을 입장에서도 산골유학 안 해도 그만이다. 학교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퍼: 지금까지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던 거 아닌가?

 

홍: 그렇다. 농촌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없어지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농촌이 사라질 수 있다. 요즘 같은 환경이면, 농업은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농촌은 죽어버릴 수 있다.

 

퍼: 농촌과 농업을 다른 개념으로 보는 건가? 

 

홍: 그렇다. 농촌과 농업은 분리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대농 10명만 있으면 농업은 살 수 있다. 그런데 소농이 죽어버리면 농촌은 죽는다. 그냥 기계 들여서, 사람 사서 논밭 가꾸면 수확물은 나온다. 하지만 농촌은 죽는 거지. 거기서 절박함이 나온다.

 

퍼: 우리 사회에서 농촌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나?

 

홍: 음. 사람이 사는 곳이지. 학교가 있고,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있는 곳. 전에 만난 분 중에, 혼자서 2만평 땅에 농사 짓는 분이 계시더라. 모두 기계로. 요즘 농업 기술로는 그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2만평을 100명이 500평씩 지을 수도 있고, 이렇게 한 명이 다 지을 수도 있다는 거다. 100명이 500평씩 짓는 농업을 할 것이냐, 아니면 1명이 2만평을 짓는 농업을 할 것이냐. 이걸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퍼: 그게 농촌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변화일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까 농촌이 사라진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도시인의 감성일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우리 같은 도시인의 입장에서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인 것 같다. 그냥 사적인 견해를 물어보겠다. (웃음) 농촌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홍: 그렇다. 농촌이 잘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퍼: 어떤 점에서?

 

홍: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웃음)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도시 말고 달리 갈 곳이 없다면 어땠을까? 농업을 하는 그냥 또 다른 도시에 가는 것이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었겠지. 다른 삶의 방식, 혹은 감성이 존재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도시를 떠나도 살 곳이 있다, 라는 느낌이랄까.

 

퍼: 나는 우리 사회에서 농촌이 가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홍: 좀 더 듣고 싶다.

 

퍼: 음. 예를 들면, 농촌은 전통적인 가치가 지켜지고 있을 것이다, 같은 생각 말이다. 아까 당신이 ‘여기서는 가정이 기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가족, 가정에 대한 가치가 농촌에서는 살아있을 것이다,’ 같은 기대는 지금 사회에서 도시가 잃어버리고 있는 게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홍: 그럴 수 있다.

 

퍼: 그런데 이런 생각조차도 어떻게 보면 도시인이 가진 시골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한다. 막연하게 그런 전통적인 가치관이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농촌이라는 사회에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지. 

 

홍: 맞다. 1년이 되어 가면서 느끼는 건데. 시골이 인심이 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퍼: 반대인가?

 

홍: 음. 인심이 야박하다는 게 아니라, 그런 거야말로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란 얘기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똑같다. (웃음)

 

 

 
이장님이 산골유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두 아이들 때문이다. 송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장님은 자신의 아이들도 똑같이 그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된 후에 “나는 송화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학교가 사라져서 도시의 학교로 전학 간다거나, “지금은 없어졌어”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작지만 원대한 꿈이 춘천별빛산골유학센터가 시작된 이유다. 어쩌다 보니 이 꿈에 동참하게 된, 도시 여자 홍성희는 내 친구다. 이들 덕분에 나는 평생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단어들을 만났다.

 

농촌, 학교, 아이들.

 

어떤 이들에게는 절박한 현실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 말들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조각들이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