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고집쟁이 – 대안학교 졸업생 박명화

'돌봄'과 '나눔'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길러내고 있는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 졸업생 박명화. 그녀는 18살 무렵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게 그곳의 1년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웠던 값진 시간이었다고.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이하 ‘꿈 학교’)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일명 ‘밥가’가 울려 퍼진다.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꿈 학교에서는 점심시간 대신, 밥상 공동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다 같이 모여 함께 밥상을 준비하고 얼굴을 마주하며 밥을 먹는 모습은 편의점 창문을 바라보며 혼자서 라면을 먹는 광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퍼슨웹은 서울시 대안교육 센터(http://seoulallnet.org)의 도시형 대안학교 졸업생 인터뷰기획에 동참하고 있다. 도시형 대안학교 졸업생 인터뷰 첫 번째 <대안학교 모범생 – 허정연>*에 이어 퍼슨웹이 만난 또 다른 친구는 꿈 학교 졸업생인 박명화 씨이다.

 

* <대안학교 모범생 – 허정연> 보러가기
 

꿈 학교는 신림동 난곡 지역의 남부 야학에서 시작되었다. 남부 야학은 일과 공부를 병행했던 청소년들을 위한 오랜 배움터였다. 남부 야학을 남부 교육 센터로 개칭하고 그 안에 있었던 청소년 교실을 서울시 대안교육 센터가 일부 지원하며 2001년 9월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가 탄생하였다. 2001년부터 현재까지 60여명의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돌봄과 나눔’을 추구하는 꿈 학교를 거쳐 갔다. 

 
 
박명화 씨는 꿈 학교를 거쳐 무역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였다.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를 휴학하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자기 생각이 분명했고, 자기 고집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가령 그녀는 인터뷰에 응하되, 사진 촬영은 거부했다. 평소 사진 찍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손과 발이라도 찍자는 제안도 거부했다. 그 거부는 강고했고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받아들인 영역에서 그녀는 완벽을 추구하였다. 이왕 시작한 일은 마무리까지 완벽한 것이 좋다는 그녀, 사진 촬영은 거부하였지만 일단 인터뷰가 시작되자 성심성의껏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1. 밥상 공동체를 지향하는 ‘꿈 학교’

  

퍼슨웹(이하 ‘퍼’): 꿈 학교가 지향하는 밥상 공동체가 흥미롭습니다.

 

박명화(이하 ‘화’): 사랑의 밥집이라고 무료로 밥을 나눠주는 데가 있었어요. 거기서 밑반찬을 타 와요. 밥은 학교 큰 밥솥으로 직접 하고요. 요리가 취미인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빠가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오기도 했어요.

  

퍼: 다른 아이들도 음식을 가져오고요?

 

화: 네, 집에 맛있는 거 있으면 각자 자발적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간단한 음식은 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서 만들어주시기도 했고요.

 

퍼: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집 밥’이네요. 흐흐

 

화: 자기가 먹을 만큼만 뷔페식으로 가져가서, 밥가 부르고 먹고.

 

퍼: 밥가가 있었어요?

 

화: 네, 밥 먹기 전에 부르는 노래가 있었어요. 은임 선생님께서 만드신.

 

퍼: 노래 기억나세요?

 

화: <영심이> 만화의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노래에 ‘밥이면 밥이지’ 이런 가사를 붙인 거예요.(웃음)

 

** 만화 <영심이> 숫자송(하나면 하나지) 보고 들으러 가기
 

  <밥가> (출처: 꿈 학교 게시판)

  밥밥밥밥
  밥이면 밥이지~ 돌이겠느냐~
  우리가 나누면 돌도 밥이야~
  밥으로 나누는 사랑 만들기~
  우리가 함께면 밥은 사아랑~
  밥은 사랑입니다아아~~~

 

화: 밥 먹기 전 책상 준비도, 먹고 난 후 치우는 것도, 다 당연히 ‘우리가 먹었으니 스스로 치워야지?’ 이런 식이었어요.

 

퍼: 자율적이네요.

 

화: 네. 그런 상황에서도 무의식중에 밥은 선생님들께서 먼저 가져오시고,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나이순으로 퍼서 먹었어요.

 

퍼: 어떤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군요. ‘다 같이 준비하고 함께 먹는다’는 경험이 만만치 않습니다.

 

화:  네, 그렇죠.

 

 

2. ‘꿈 학교’로 가는 길

 

 

퍼: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 이름이 참 예뻐요. 명화 씨는 대안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꿈꾸는 아이였나요?

 

화: 아니요. 대안학교에 오기 전에 전 상고에 다녔어요. 6개월 정도.

 

퍼: 상고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화: 제가 중학교 때 공부를 지지리 못했거든요. 그래서 인문계에 가서 다른 애들 등수 받쳐주느니, 상고에 가서 중간이라고 가자 생각했죠.

 

퍼: 부모님이 반대하진 않으셨어요? 그 당시에는 아무래도 상고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으니까.

 

화: 그런 이유로 당연히 반대하셨죠. 보통의 어머니들은 다들 남들처럼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를 바라시니까. 그때 어머니께서 일주일동안 아침밥도 안 주셨어요. 흐흐

 

퍼: 반대가 심하셨군요. 아침밥은 엄마들이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잖아요.

 

화: 네, 그렇죠. 그래도 결국 저는 상고에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제 인생 최고의 점수를 받았죠. 자연스럽게 어머니도 더 이상 뭐라고 안하셨고요.

 

퍼: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군요. 그 학교를 나오게 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화: 제가 상고를 간 이유는 성적 문제도 있었지만, 그 학교 교복이 예뻐서였거든요. 물론 첫 시험에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학업에 제 모든 걸 쏟아 붓자는 계획은 아니었어요.

 

퍼: 학교를 그만둔 계기가 있나요?

 

화: 고등학교에서는 시험이 끝나면 선생님과 따로 개인면담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음 시험의 목표 점수를 대라고 압박하시는데, 그건 좀 아니다 싶었어요.

 

퍼: 시험을 보자마자 바로요?

 

화: 네. 보자마자. 저는 시험 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수로 뭘 할 수 있겠냐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뭔가 저를 몰아세우는 것이 싫었어요. 

   

퍼: 그럼 언제 학교를 나왔죠?

 

화: 3월에 입학해서 그 해 9월에 나왔어요.

 

퍼: 상고에 진학하면서도 어머니와 한번 부딪쳤는데, 고등학교를 나올 때도 어머니와 충돌이 있었겠는데요?

 

화: 충돌보다도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말이 좋아 고등학교 자퇴지 중졸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때 어머니 심정이 걱정 반, 미안함 반이었대요.

 

퍼: 명화 씨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왜 어머니께서 미안해 하시죠?

 

화: 왜 어머니들은 그런 마음이 있으시잖아요.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적어도 평범하게 살게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 그냥 제가 고등학교를 나오게 된 것이 마냥 어머니 탓인 것 같으셨나 봐요.

 

퍼: 아, 우리 부모님들께서 자식들의 뻔뻔함을 반에 반만이라도 가지면 좋으실 텐데요. 평소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예요?

 

화: 제가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말을 별로 많이 안 한 것 같아요. 엄마랑 친하기는 했는데,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퍼: 지금은?

 

화: 고등학교를 나왔던 즈음부터 대화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그때는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오해하실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요. 나이도 있고. 흐흐

 

퍼: 그 후 꿈 학교에 들어갔나요?

 

화: 고등학교를 나오고 약간의 공백기가 있었어요. 제가 17살 9월에 학교를 그만두고, 18살 3월인가 4월에 대안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사이에는 어머니랑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어요.

 

퍼: 시골에선 뭘 했나요?

 

화: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 생활이 나름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레스가 점점 쌓이더라고요.

 

퍼: 아무래도 명화 씨에게는 도시의 삶이 더 익숙했을 테니까요.

 

화: 네, 외딴 시골에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싫어지더라고요. 게다가 그곳에 계신 할아버지 친구 분이 저를 손녀처럼 예뻐해 주셨는데, 제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퍼: 왜요?

 

화: 저희 할아버지는 좀 무뚝뚝하신 편이라, 그냥 티 안 나게 밥 먹을 때 말없이 그냥 생선살 발라주시고 뭐 그렇게 애정 표현을 하시는 편이었어요.

 

퍼: 전형적인 우리네 할아버지의 모습이요?

 

화: 네. 그런데 할아버지 친구 분은 머리 쓰다듬으면서 친근하게 애정 표현을 하셨거든요.

 

퍼: 명화 씨는 그런 표현 방식이 부담스러우셨나요?

 

화: 네. 부담스럽기도 했고, 정확하게 말하면 싫었어요. 그렇게 저에 대해서 대놓고 관심을 주는 것 자체가.

 

퍼: 원래 명화 씨 성격인가요?

 

화: 원래 겉으로 대놓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또 그때 어머니랑 아버지랑 별거하고 있는 상태였거든요. 제가 아버지랑 원래 친하지 않았어요. 싫어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게 아빠를 싫어하다가 나중에는 남자가 싫어졌거든요.

 

퍼: 그 할아버지도 아빠 때문에 싫었던 거네요.

 

화: 네, 그 할아버지 친구 분의 말투나 행동 같은 게 아버지랑 비슷한 부분이 좀 많았어요. 아마 그것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퍼: 엄마도 그 부분을 눈치 채셨을까요?

 

화: 네.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어머님이 저를 서울에 계신 어머님 친구 분 집에 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엄마랑 가장 친한 친구 분이라서, 제가 이모라고 부르거든요.

 

퍼: 그렇죠. 대한민국에서 엄마랑 친한 친구는 다 이모죠. 흐흐

 

화: 그 이모께서 꿈 학교를 알아봐 주셔서 다니게 됐어요. 이모께서 먼저, ‘이런 학교가 있다는데, 한번 가보는 것이 어떻겠니?’ 하셨어요. ‘여기 가!’ 이게 아니라. 그런데 처음에는 사실 진짜 가기 싫었어요.

 

퍼: 가기 싫었던 이유가?

 

화: 처음에는 대안학교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거기는 뭐 문제 있는 애들이 가는 곳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퍼: 대안학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반응처럼.

 

화: 네, 아무래도 인식이. ‘왜 내가 어디가 안 좋아 보이나?’ 그런 생각을 했죠.

 

 

3. ‘꿈 학교’ 적응기

 

 

퍼: 꿈 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낌은?

 

화: 여기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퍼: 왜 그렇게 생각했죠?

 

화: 대안학교 들어갈 때, 그 쪽 학교 선생님들께서 개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세요. 그래야 이 아이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 경계심이 강했던 편이라서, 그게 싫었어요.

 

퍼: 거부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화: ‘내가 이 학교를 다니려고, 이런 내 사생활까지 말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요. 면담을 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싫었던 거예요. 제가 말하기 싫어하는 부분에 대해서 딱 물어보시니까.

 

퍼: 어떤 질문이었나요?

 

화: 저의 가정환경에 관한 질문이요. 그 외 고등학교를 나온 이후 상황에 관한 것.

 

퍼: 그래도 명화 씨는 결국 꿈 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화: 그렇죠.

 

퍼: 명화 씨가 입학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었을까요?

 

화: 검정고시 교육을 해준다는 점이었어요. 원래는 검정고시 치르려면 학원을 가야 하는데, 그것도 다 돈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돈을 안 내도 된다는 점이 좋았어요.

 

퍼: 당시의 명화 씨와 조건이 맞았던 거네요.

 

화: 네. ‘일단 학교를 다니다가 나중에 정 아니다 싶으면 나오자’ 했었죠.

 

퍼: 검정고시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어요?

 

화: 선생님들께서 수학과 영어를 공부할 때도, 최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쪽으로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요. 뭐 하나 설명을 할 때도 정말 기초부터 해주시고, 영어도 미국 드라마 틀어주시면서 대사 같이 봐가면서 배우고.

 

퍼: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던가요?

 

화: 대체로요. 그런데 갑자기 ‘검정고시 특강’이 들이닥치니까. 그때부터는 다들 정신을 조금씩 놓기 시작했죠. 흐흐

 

퍼: 검정고시 특강?

 

화: 시험 치르기 한 달 반 정도 전쯤부터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는 거죠. 그때가 제가 대안학교 다니면서 제일 힘든 기간이었어요.

 

퍼: 아무래도 압박의 요소가 하나씩 추가되다 보면, 그렇죠.

 

화: 네. 그때는 다른 때보다 학교생활이 조금 덜 즐거웠어요. (웃음)

 

퍼: 그 기간을 제외하면, 명화 씨의 대안학교 생활은 즐거웠나요?

 

화: 네, 저는 진짜 재밌었어요. 어떤 틀에 박힌 수업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어요. 친구, 선생님들과 내 생각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게.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관계가 더 긴밀해지더라고요.

 

퍼: 선생님들과 사이가 좋으셨나요?

 

화: 길잡이 선생님(꿈 학교를 오랫동안 책임진 선생님)들에 비해서, 새로 오신 선생님들께는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죠. 물론 그게 오래 가진 않아요. 그 선생님들께서도 아이들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다가와 주시니까요. 그래서 저희도 처음에는 조금 심술을 부리다가도 이내 수그러들죠.

 

퍼: 명화 씨도 새로 오신 선생님들께 심술을 부린 적이 있나요?

 

화: 개인적으로 저는 남자 선생님하고는 별로 안 친했어요. 자원 봉사 선생님들 중에 유난히 장난기가 많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저는 그 분이 말을 걸어도 ‘네, 아니요’ 이렇게 단답형으로 말했거든요.

 

퍼: 아, 그 인터뷰하기 가장 힘들다는 사람이 바로 명화 씨였구나. (웃음)

 

화: 그런가요? (웃음) 그러다가 그 남자 선생님께 장구를 배우게 되었어요. 제가 그때 학습 발표회 공연을 준비해야 했거든요. 일 년에 한 번씩 외부사람에게 꿈 학교를 알리는 자리죠. 관객 대부분이 학생들 가족이지만요. (웃음)

 

퍼: 그 학습 발표회 공연으로 장구를 준비하면서,

 

화: 장구를 더 잘 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선생님께 다가가 질문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선생님과도 친해졌어요.

 

퍼: 학습 발표회를 겪으며 배운 점이 있다면?

 

화: 학습 발표회 준비 과정 자체가, 학교가 추구하는 공동체적 삶을 익혀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에요. 요즘은 누군가와 ‘같이’한다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혼자 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보니까, 이기적이기도 하고요.

 

퍼: 맞아요.

 

화: 꿈 학교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들 위주예요. 그 과정에서 서로 돌보고 나누는 태도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선생님들께서도 중간 중간에 그런 태도들을 많이 잡아주셨던 것 같아요.

 

퍼: 그 당시에 불만은 없었어요?

 

화: 아, 그때는 사실 ‘왜 자꾸 같이 하라 그러지?’ 그랬어요. 당연히 살짝 불만도 있었죠.

 

퍼: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또래끼리 모여서 준비하다보면, 아무래도요.

 

화: 그 아이들이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어린 마음에 ‘아, 얘는 왜 이것도 못하지? 왜 이렇게 밖에 말을 못하지?’하는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퍼: 그런 프로그램을 처음 접한 명화 씨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게 더 솔직했던 심정이었을 수 있죠.

 

화: 그런 점에서 그때는 제가 상당히 이기적이었던 같아요. 뭐 물론 지금도 이기적이지만.

 

퍼: 어떤 부분에서 명화 씨가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화: 아이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요. 가끔 짜증나고 답답하면 오빠, 동생들한테 일부러 상처 받으라고 한 말도 많았어요. 말을 좀 직설적으로 하거든요. 사람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그때는 ‘나는 되는데, 쟤는 왜 안 될까’라는 생각이 더 컸어요.

 

퍼: 공연은 잘 마쳤고요?

 

화: 네. 무대에서 호흡이 제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동안 장구 연습을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눈을 보면서 호흡을 맞춰나갔거든요. 그렇게 평소에는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친구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서로를 알아가게 되고,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공연을 잘 마치지 않았나 싶어요.

 

퍼: 좋은 경험을 했네요. 성취감도 컸겠어요.

 

화: 네, 그때 정말 확실한 성취감을 맛본 것 같아요.

 
 

4. ‘꿈 학교’ 활동기

 

 

퍼: 꿈 학교 프로그램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화: 독거노인 분들을 위해 도배하고 장판을 깔아드렸던 작업을 함께 했었어요.

 

퍼: 도배 작업이 상당히 힘든 일인데요.

 

화: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저희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잘 몰라서 그랬는지 재밌게 작업했어요. 도배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 와서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퍼: 원래 뭣 모르고 작업할 때가 더 재밌죠.(웃음)

 

화: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당시 저희가 그렇게 잘했던 건 아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좋아해주셔서 제게 아직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퍼: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가 곧 학교의 교육과정이었군요. 또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화: 학교에서 무전 도보 여행을 했었어요. 경쟁 구도로, 각자 다른 지역에서 출발하는 세 개의 팀이 하나의 도착지에서 만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여행하면서 돈을 가장 적게 쓴 팀에게는 상품도 줬고요.

  

퍼: 와, 재밌겠어요.

 

화: 여행하는 동안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팀은 그걸 여행 전체 일정이었던 2박 3일 중에 딱 한번만 쓸 수 있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게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었던 거였어요.

 

퍼: 다른 팀들은 하루에 한 번씩 히치하이킹을 했대요?

 

화: 네, 저희 팀만 진짜 죽어라 걷고 또 걸었어요.

 

퍼 : 와, 대단해요.

 

화: 이건 완전히 나와의 싸움이었죠. 내가 여기에서, 한 발자국을 떼고 앞으로 더 나가느냐 마느냐하는 문제가 제일 컸으니까. 짐도 온전히 내가 다 짊어지고, 그때가 여름이라서 또 엄청 더웠거든요.

 

퍼: 정말 힘들기도 했겠지만, 명화 씨 스스로 느낀 점도 많을 것 같아요.

 

화: 네,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제 자신에게 정말 말을 많이 걸었어요. 스스로 용기도 북돋우고, 여행 중간에 나에게 엽서도 썼어요. 여행하는 과정에 대한 생각, 지금의 기분 등을요. 그때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퍼: 만약 여행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요?

 

화: 여행이 정말 힘들면 중간에 포기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워낙 걷기 싫어했던 제가 이 여행을 마치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어요.

 

퍼: 그럼 여행하는 동안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화: 잠은 저희가 알아서 숙소를 정해서 잤어요. 동네 마을 회관에 들어가서 양해를 구하고 자기도 하고. 일반 집에서도 하루 잤고요. 의외로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참 감사했죠.

 

퍼: 같이 여행한 친구들과 힘든 경험을 함께 하다보면 왜 더 애틋해지잖아요.

 

화: 제가 자꾸 뒤처지니까, 저를 맨 앞에 세우고, 오빠들은 제 뒤를 따라오면서 많이 격려해줬어요. 제가 거의 자면서 걸었거든요. 그래서 가끔 오빠들 부축도 받았어요. (웃음)

 

퍼: 자면서 걷는 기분은 어떨까요?(웃음)

 

화: 아, 저희가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고 정말 잘 안 쉬고 걸었거든요. 돈도 아껴야 한다면서 만날 편의점가서 빵이랑 라면만 사먹고. 그렇게 결국 이기기는 했지만요.

 

퍼: 정말 대단한 집념이었네요. 이런 경험으로 명화 씨가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화: 자신감 같아요.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요.

 

퍼: 서로 함께 의지하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꿈 학교가 추구하는 공동체적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실제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체험한 명화 씨의 생각을 알고 싶어요.

 

화: 아무래도 꿈 학교도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이해를 못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무전도보여행 프로그램을 통해서,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친구들도 나같이 도보 여행을 했을 테니까, 그 힘든 게 이해가 가는 거예요. 여전히 그 친구가 좋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퍼: 함께 경험했던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그게 서로를 묶어주는 큰 힘이 되는군요. 이런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들과도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겠어요.

 

화: 뭐, 워낙 길잡이 선생님들하고는 친하니까. 그 외에 좀 어색했던 선생님과 한 조가 되면 아무래도 더 친해지겠죠.

 

퍼: 명화 씨는 특히 꿈 학교에서 가깝게 지낸 선생님이 있었어요?

 

화: 네, 저는 특히 윤희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어요.

 

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화: 그냥 상담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선생님들을 찾아가요.

 

퍼: 그럼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항상 상담 대기 중이셨던 거네요.

  

화: 네. 하시던 일도 멈추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퍼: 아, 그러시기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화: 네, 저도 사회 생활하면서 느꼈어요. ‘아, 내가 꿈 학교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생활한 거였구나.’하고요. 선생님들께서 저희들한테 정말 많은 사랑을 주셨죠.

 

퍼: 명화 씨는 그 중에서도 윤희 선생님과 특히 말이 잘 통했나 봐요?

 

화: 네, 윤희 선생님은 돌려 말하지 않고, 할 말을 딱 해주시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윤희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닌가 싶어요.

 

퍼: 그럴 수 있겠네요.

 

화: 제가 화를 잘 표출 안 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제게 힘들 때는 한 번씩 울러오라고 하셨어요.

 

퍼: 내가 힘들 때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참 감사한 일이죠. 이렇게 보니까, 꿈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화: 네. 꿈 학교의 공동체적 삶을 인식시켜주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 삶의 여러 요소들 중에서, 선생님들은 항상 나이가 많든 적든, 책임에 대한 부분을 인식시켜 주셨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이를 들먹여가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핑계를 대는 모습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들께서 책임감에 대한 언급을 자꾸 해주셨던 부분이 좋았어요.

 

퍼: 그런 책임감을 우리는 학창 시절에 강요 아닌 강요로 배웠었죠. 그런 책임감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익혀나갔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화: 그렇죠. 어디에서나 책임감이라는 말은 같은데, 특히 꿈 학교는 책임을 물을 때도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한 과정을 스스로 납득하게끔 해주었어요.

 

퍼: 꿈 학교에서 그토록 책임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화: 아무래도 저희는 일반 학교 애들하고는 다르잖아요, 주변의 시선이. 그러니 우리는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도 자주 해요.

 

퍼: 아무래도 꿈 학교의 내부 시선과 꿈 학교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다를 테니까요. 대안학교가 갖고 있는 핸디캡을 미리 받아들여, 그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다른 요소를 이렇게 익혀나가게 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화: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제가 대안학교 출신이라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거든요. 오히려 몇몇 분들은 제가 지나온 과정을 대수롭지 않게 말씀드리면, 또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시기도 해요. 그런데 이것도 다 제가 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퍼: 명화 씨 하기 나름이요?

 

화: 아무래도 일반 고등학교 출신 애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대안학교 졸업생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나 말이 좀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나 하나로 인해서 대안학교 전체에 안 좋은 인식이 생겨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안학교 애들, 또 나 자신도 인정받고 싶어서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퍼: 그것은 어떻게 보면 대안학교 출신, 앞선 세대가 갖는 책임감 같아요.

 

화: 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아요.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혹은 대안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내게 주어진 어떤 일이 있는데, 설사 그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끝맺음은 항상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퍼: 그 전에 명화 씨도 이런 책임감을 갖고 사는 성격이었나요?

 

화: 음… 원래 제 성격이 끝까지 할 생각이 아니면,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하는 편이예요. 그런데 대안학교에서는 싫어도 해야 하고, 자꾸 옆에서 하자, 하자고 다 같이 하는 작업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뒤처지기 싫어서 또 열심히 하게 되고 그랬어요.

 

퍼: 그렇게 성격이 조금씩 바뀌었네요. 그럼 명화 씨가 꿈 학교에서 느꼈던 소속감도 상당히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화: 나이가 적든 많든, 소속감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퍼: 저도 재수할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죠. 재수가 힘든 이유도 바로 그 소속감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거든요. 흐흐

 

화: 흐흐. 그렇죠. 소속감이 없으면 무기력해지고, 나는 누구인가 싶고 그렇죠.

 

퍼: 제가 영화관에 갔을 때, 재수생은 따로 학생증이 없으니까 고등학생 할인도, 대학생 할인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성인요금 내고 그랬거든요. 그런 상황이 얼마나 서러웠던지… 명화 씨는 어땠어요?

 

화: 어디를 가든, 어디 소속인 것을 증명하기를 요구받잖아요. 그런데 탈학교 학생은 그런 소속감이 없으니까, 인정받지 못 한다는 느낌, 이 사회에 낄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런 과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꿈 학교가 많은 역할을 해주었죠.

 

5. ‘꿈 학교’를 나와서

 

 

퍼: 지금은 명화 씨가 사회생활을 하고 있죠. 꿈 학교 교육과정이 2년 4학기제로 알고 있는데 졸업 후 사회생활을 곧바로 시작하셨나요?

 

화: 저는 정확하게 말하면 졸업은 아니고, 중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졸업이라고 쳐주시더라고요. 흐흐

 

퍼: 처음 사회생활의 시작은 어땠어요?

 

화: 제가 19살 때,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바로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꿈 학교도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던 거죠.

 

퍼: 그 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갔어요?

 

화: 이모님께서 소개해주셔서. 속칭 낙하산이라고 하죠. 흐흐

 

퍼: 아, 낙하산. 흐흐

 

화: 언어를 조금 순화하자면, 지인의 소개랄까 흐흐

 

퍼: 얼마 동안 일을 하셨죠?

 

화: 한 2년 2개월 동안 그 회사에서 송장 입력하고, 세관 신고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회사 들어가서 한동안은 정말 많이 울었어요. 사실 제가 진짜 안 우는 편이거든요.

 

퍼: 왜 울었던 거예요?

 

화: 같은 어른들인데, 학교 선생님들은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셨거든요. 그런데 회사 사람들은 이중적인 모습이었어요.

 

퍼: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요?

 

화: 회사 내에서도 따돌림이 존재하더라고요.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막말하고. 그러니까 점점 악에 받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들어가기 바로 전에 인사 조정이 좀 있었나 봐요. 그 와중에 제가 새로 들어갔으니, 분위기가 좀 험악했죠.

 

퍼: 시기가 좀 그랬네요. 그렇게 일을 하다가 생기는 힘든 마음은 어떻게 풀었어요?

  

화: 윤희 선생님한테 울러 갔죠.

 

퍼: 그게 혹시, 명화 씨가 대안학교 출신이라서 그런 점도 있었을까요?

 

화: 알게 모르게, 아마 그런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꿈 학교에서 정말 많이 배웠던 것이 바로 ‘이해심’과 ‘참을성’이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꿋꿋하게 참아냈어요.

 

퍼: 그래도 그러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화: 쉽지는 않았는데,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내가 당신들과 한번 친해져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퍼: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그만둔다가 아니고요?

 

화: 네. 저는 이왕 한번 시작한 일이면, 잘 해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제 빈자리가 확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퍼: 무역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꾸준히 일을 했나요?

 

화: 여기 저기 잠깐 잠깐씩 일했어요. 문서 작업하는 알바도 해보고, 악세서리 가게에서도 일했고요. 지금은 전자제품 AS센터 접수 데스크에서 일하고 있어요.

 

퍼: 일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어요?

 

화: 제가 서비스 직종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사람 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게 가장 힘들지만요. 간혹 막말하는 손님들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은 대뜸 ‘사장 나오라 그래’부터 시작하니까요.

 

퍼: 꼭 그렇게 사장부터 찾는 분들이 계시죠. 자꾸 찾아요, 사장을.

 

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까, 점점 내가 안과 겉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이 사람은 이렇게 대해야겠다, 저 사람을 저렇게 대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더라고요.

 

퍼: 일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가는 거네요.

 

화: 그런 셈이죠.

 

퍼: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화: 나는 서비스직은 안 맞는다? 흐흐

 

퍼: 저는 명화 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명화 씨한테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화: 저는 일적으로 항상 부딪히는 사람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는 견딜 수 있거든요. 그 사람들은 만날 보니까 나중에라도 풀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서비스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한번 보고 안 볼 수도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는 좀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장사할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퍼: 그것도 큰 깨달음이네요. 앞으로 명화 씨가 특별히 해보고 싶은 일이나 꿈은 무엇일까요?

 

화: 아직은 제 꿈은 찾아가고 있는 중이예요. 그보다 지금은 그냥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목표가 있죠.

 

퍼: 그 목표가 뭐예요?

 

화: 일단은 일본어 1급을 따고,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고, 가능하다면 성신여대 쪽으로 편입을 하고 싶어요.

 

퍼: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화: 전 사실 대학에 갈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무역회사를 다닐 때, 실제로 경력은 내가 더 오래됐는데, 저 사람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돈을 더 받는 거예요. 저하고는 임금 협상도 안 하고, 전문대와 4년제 대학이냐에 따라서 임금이 달라졌죠. 그런 상황이 정말 자존심 상했어요. 그래서 저는 오기로 대학을 갔던 거예요.

 

퍼: 명화 씨의 전공은?

 

화: 지금 방통대에서는 ‘일본학’을 전공하고 있고 앞으로 일어학과로 편입하고 싶어요. 성신여대는 따로 편입 시험을 거치지 않고, 1급 자격증이 있고, 일본어 면접을 통과하면 편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퍼: 원래 일본어를 좋아 했나요?

 

화: 아뇨. 일본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대안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일본어를 보고 글자가 예뻐서 처음 관심을 갖게 됐어요.

 

퍼: 오, 글자가 예뻐서.

 

화: 네. 영어보다는 쉽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웃음)

 

퍼: 명화 씨는 일어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찾고 싶은 거예요?

 

화: 뭐 딱히 그렇다기보다, 음… 일단은 제가 뭐라도 안 놓고 싶어요. 지금 상황에서 일어마저 놓으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제가 한 살 한 살 먹어 가면서 어떤 일을 할 때 따지는 게 많아지더라고요. 시도해 보기도 전에 미리 계산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해 버리고.

 

퍼: 현실을 알면 알수록 스스로에게 조건을 많이 붙여 놓고, 변화를 겁내 하죠.

 

화: 일어는 제가 20대 초반부터 꾸준하게 잡고 있는 끈이에요. 이 끈을 이용해서 뭐라도 기회를 마련해보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일어는 내 미래에 변화를 가져다 줄 유일한 준비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언어는 누가 뺏어갈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퍼: 관심을 가진 다른 분야가 있나요?

 

화: 대안학교 관련 일도 해보고 싶어요. 대신에 현장에서 직접 아이들과 부딪히는 그런 일 말고 뒤에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좋아요. 선생님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기회가 닿으면 한번 해보고는 싶어요.

 

 

인터뷰를 마친 후, 자기 생각이 분명했던 강한 이미지의 명화 씨를 떠올리면 동시에 하나의 형용사가 생각난다. ‘예쁘다’. 교복이 ‘예뻐서’ 상고에 진학했고, 또 일본어가 ‘예뻐서’ 공부를 시작했던 그녀는 꿈 학교를 다니며 ‘예쁘다’에서 시작한 선택을 책임질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아호와 박명화 씨에게서는 사회로 진출한 대안학교 1세대들이 지닌 공통의 책임감과 욕망을 찾아볼 수 있다. 나 하나 잘못하여 대안학교 전체가 비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그리고 대안학교에서 받았던 특별한 보호와 사랑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다는 욕망.
내 또래 대안학교 졸업생들과 만나며, 나는 나와는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친구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처음에 나는, 그녀들이 별세계의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나와 그녀들은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같은 고민, 다른 욕망을 지닌 20대 청춘들이다. 서로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우리들이 만들어 갈 사회는 지금보다 좀 더 다양하되,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조화로운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들의 미래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