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꾸는 아나키스트, 제프 라자르

제프 라자르 씨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디어 활동가다. 멕시코 혁명의 현장에서, 한국 대추리 한복판에서 미디어를 통한 국제 연대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라벨을 거부하지만, 누가 보든 제프 라자르 씨는 무정부주의자, 미국인, 사회 활동가이다.

3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방에서 무국적의 커리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난 네 명의 비한국인과 한 식탁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울리대리티(Seoulidarity)**의 멤버들이었다. 대추리의 실상을 인터넷을 통해 국제 사회에 알리는 일을 하며 친해진 이들은 한국 사회의 여러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며 국제 연대를 시도하였다. 지금은 많은 멤버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어, 아쉽게도 모임을 지속하지는 않는다.

 

제프 라자르 씨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의 하우스 메이트였고, 그 친구와의 인연으로 자주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그의 인생에 대해 속속들이 캐묻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지식인 연구 공동체. 

홈페이지 http://www.transs.pe.kr/
** 서울리대리티(Seoulidarity). 국제 연대를 위한 미디어 활동 조직. 홈페이지  http://blog.jinbo.net/seoulidarity

 

 

1. 의미 있는 삶을 찾아서

 

 

제프(이하 ‘제’)> 왜 나를 인터뷰하려고 해요?

  

퍼슨웹(이하 ‘퍼’)> 처음 만났을 때 제프가 나에게 국제백수라고 소개했잖아요. 요즘 안정된 직업을 구하는 게 인생의 최대 목표인 젊은이들이 많은데, 다른 삶도 있다는 걸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돈 안 쓰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삶이요.

 

제> 의미 있는 일로 돈 버는 게 내 꿈이에요. 의미 있는 일로 돈 벌기 정말 힘들어요.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기에 돈이 안 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퍼> 의미 있는 일로 돈 벌기 힘들다는 데에 동의해요. 저도 NGO에서 많이 일했는데, 계속 지쳐요.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제>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글로벌 익스체인지 (Global Exchange)***에서 잠깐 일했는데,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점점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많이 내야 했죠. 인턴이었던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의미 없는 일이 집중적으로 주어져서 재미 없었어요. 그만 뒀죠.

 

*** Global Exchange. http://www.globalexchange.org 평화운동가 미디어 벤자민(Medea Benjamin)이 설립한 시민단체, 공정무역, 공정여행, 친환경 상품 판매, 그린 페스티벌 등의 일을 한다.

 

퍼> 얼마나 일했는데요? 

 

제> 일주일

 

퍼> 일주일? 하하. 그 뒤에는요?

 

제> 텍사스에 있는 노숙자 쉼터에서 1년 동안 야간 지킴이를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미디어에 비추어진 노숙자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했었거든요. 노숙자를 범죄자화하는 미디어에 대해서요. 그 연구에서 얻은 성과라면, 대학생 차림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경찰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데, 노숙자의 모습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면 잡혀간다는 걸 알게 되었죠.

 

퍼>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일이 많죠. 거긴 왜 그만 둔 거에요? 

 

제> 노숙자 쉼터는 밤에 일하는 거라서 다른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글쓰기랑 책읽기, 또 그때 참여하고 있었던 인디미디어****의 일 등이요. 그렇지만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또 쉼터와 노숙자가 서로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나오게 되었어요.

  

**** 인디미디어(indymedia.org). 시민 운동가들이 직접 작성하는 국제 뉴스 사이트, 열린 출판 형태로 누구나 기사 작성, 전송이 가능하다.

 

퍼> 어떤 점 때문에 실망하게 되었죠?

 

제> 노숙자는 집을 가져야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노숙자는 집을 가지려는 욕구가 없었어요. 집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고, 정신병이 있거나 마약복용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쉼터는 도움을 주지 못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노숙자를 대했어요.

 

퍼> 노숙자를 돕는 쉼터가 노숙자에게 권위적이라니 의외로군요.

 

제> 쉼터에는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어요. 매일 밤 남자만 100명. 매일 내가 종이에 150까지 숫자를 적어서, 100까지 뽑은 사람들만 건물 안에 들어오게 했어요. 그 다음은 소지품 검사. 총기나 마약을 가지고 있는지. 그 다음엔 샤워를 시켰어요. 공장식으로.. 비인간적이었어요.

 

퍼> 매일매일 제비를 뽑았다고요?

 

제> 네.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인간으로서 대우해주려고 노력했어요. 결국엔 일을 그만 두고 멕시코로 자전거 여행을 갔죠.

  

2. 멕시코 혁명을 알리다 (1)

–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에서

 

     

퍼> 멕시코에는 처음 간 거였나요?

 

제> 그 전에도 간 적 있어요. 인권 감시하러.

 

퍼> 인권 감시(human right watch)?

 

제> 인권이 잘 지켜지나 보는 거요.
 
 

퍼> 멕시코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 멕시코 사람들의 인권이 아니라 그냥 인권에 관심이 많아요. 멕시코에는 저항, 투쟁, 혁명 때문에 인권 침해가 많았어요.  

 

퍼> 미국 사람이면서 멕시코 사람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거 좀 특이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근처에 캐나다도 있는데. (웃음)

 

제> 캐나다에서도 할 일을 발견했다면 지금 캐나다에서 뭔가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웃음) 나는 아나키스트적인 경향이 있고, 국가와 상관없이 인권에 관심이 많아요.

 

퍼>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도 멕시코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나요?

 

제> 네. 멕시코와 미국은 정치적인 상황이 많이 달라요. 멕시코에 갔을 때에는 싸빠띠스따* 저항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에 대해 배우고 싶었어요.

 

*싸빠띠스따(Zapatista).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 ‘자파티스타’, ‘사파티스타’라고도 불린다.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 기반을 둔 무장 혁명 단체로 1994년 1월 1일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NAFTA)가 발효되던 날 출범하였다.

 

퍼> ‘싸빠띠스따’에 대해서 조금만 설명해줄 수 있어요? 한국은 멕시코랑 멀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해요.

 

제> ‘싸빠띠스따’라는 이름은 1910년대 멕시코 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에밀리아노 싸빠따’에서 따왔어요. 싸빠띠스따는 원주민 커뮤니티인데, 여러 원주민 부족이 모여서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NAFTA)**에 저항하는 한 개의 군대, 즉 ‘국립 해방 싸빠띠스따 군대(EZLN. 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tional)를 만든 거죠. 쉽게 말해 자치권을 주장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무장봉기한 거예요.

 

**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NAFTA) : 미국, 캐나다, 멕시코 북미 3개국을 단일시장으로 통합하여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 지대를 형성시킨 무역 협정이다.

 

퍼> 멕시코 원주민들이 북아메리카 자유 무역 협정(NAFTA)를 반대한 이유는 뭐죠?

 

제> 원주민은 협정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멕시코 헌법에 따라 마을이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있었는데, 협정 체결로 인해 헌법을 수정해야 했어요. 마을 공동 소유의 토지는 자본주의에 맞지 않잖아요.

 

퍼> 싸빠띠스따는 인터넷을 활용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활동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죠. 특히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는 눈, 코, 입만 보이는 검은 털모자에 담배 파이프를 물고 총 대신 글로서 정부에 대항한 게릴라 지도자로 알려져 있고요.

 

제> 네. 싸빠띠스따는 자신의 요구를 알리기 위해 미디어와 인터넷을 잘 이용했어요. 최초의 포스트모던한 수단을 이용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죠. 미디어, 인터넷, 국제연대가 중요한 수단이라는 걸 여기서 크게 깨달았어요.

 

퍼> 제프가 처음 싸빠띠스따에 끌렸던 이유는 뭔가요?

 

제> 혁명적인 성격 때문이에요. 싸빠띠스따가 저항과 대안적인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는 시위가 많이 일어나지만 실제 변화는 거의 없어요. 정부는 드러내놓고 억압하진 않지만, 조용하게, 몰래, 보이지 않게 억압하죠.(웃음)

 

퍼> 멕시코와는 상황이 다르군요.

 

제> 멕시코에서는 시위하면, 구청이나 시청 건물 점거도 하고, 정부 없는 자율 지역도 만들죠. 멕시코 정부의 대처도 만만치 않죠. 무척 폭력적이죠.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데자빠레시도스(desaparecid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예요. 세계적으로 기자에게 제일 위험한 나라가 멕시코에요.

 

퍼> 지금도 그래요? 수단이나 아프가니스탄이 아니고요?

 

제> 음.. 확인해봐야겠지만, 멕시코도 되게 위험해요. 인권 변호사도 살해당하는 일 많고.

 

퍼> 그렇군요. 제프는 멕시코에 가서 어떤 일을 했죠?

 

제> 2001년 멕시코에 갔어요.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 학생들과 교류했죠.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는 북미에서 제일 큰 대학이죠. 멕시코는 헌법에 따라 멕시코 국민에게 공립학교 등록금을 받지 않는데, 2000년에 정부에서 학비를 도입하려 해서, 학교 행정직원들이 많이 쫓겨나고 학생 시위가 심했었죠.

 

퍼> 그 상황에서 제프는 무슨 역할을 한 거죠?

 

제> 내가 그 학교에 갔을 때 휴교령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자치공간이 많았어요. 케후엘가(Khuelga)라는 해적 라디오 방송국 사람들과 만났어요. K는 라디오에 많이 붙이는 글자고. 후엘가는 시위라는 뜻이에요.

 

퍼> 그 방송국은 2000년 학생시위 때 개국하였나요?

 

제> 언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직도 운영하고 있어요.

 

퍼> 방송국에서 일했어요?

 

제> 아니요. 멕시코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게 제 목표였어요. 멕시코에서 있던 일들을 기록해서 미국에 있는 신문사와 인디미디어에 전송했죠.

 

퍼> 멕시코에서는 그 일을 계속 하였나요?

 

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권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학생들이 싸빠띠스따가 있는 ‘치아빠스’ 주는 유명해져 인권 감시하는 사람들, 인권 변호사, 기자, 인류학자도 많지만, 그 바로 옆에 있는 ‘와하카’는 비슷한 상황이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알려줬어요.

 

3. 멕시코 혁명을 알리다 (2) – 와하카에서

 

 

퍼> 그래서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를 떠나 ‘와하카’로 갔나요?

 

제> 네. 그들이 ‘치아빠스’보다 ‘와하카’에 가면 더 의미 있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갔는데, 우리가 가기 전에 ‘와하카’에서 스물 여섯 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퍼> 학살된 스물 여섯 명이 다 원주민이었어요?

 

제> 네. 원주민이요. 그리고 그 다음날 경찰들이 시민 열 다섯 명을 폭력적으로 잡아갔어요.

 

퍼> 심각한 상황이었군요.

 

제> 그래서 친구와 함께 반 신자유주의, 원주민 인권 단체에 참여하였어요.

 

퍼> 어떤 단체였죠?

 

제> ‘코뎁(CODEP)’이요. ‘인민 인권 수호 위원회’라는 의미예요. 나중에 ‘와하카 반자유주의 마곤주의자 인민위원회’라는 의미의 조합인 ‘꼼빠(COMPA)’로 바뀌었어요.

 

퍼> 오, 이름이 좀 어려워요.

 

제> 말 그대로에요. 멕시코는 여러 인종이 있어요. 그 중 원주민(인디언)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만든 단체가 ‘코뎁’이었는데, 혁명이 진행되면서 ‘반자유주의 마곤주의자 인민위원회’로 단체가 확장되었고, 단체의 색깔도 확실해진 거에요.

 

퍼> 멕시코 상황에 익숙치 않아 물어보게 되네요. ‘마곤주의자(Magonist)’는 뭐에요?

 

제> 리카르도 플로리스 마곤(Ricardo F Magon)이라는 사민주의자가 있었는데, 와하카 출신이에요. 같이 일하던 인민 인권 위원회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곤주의자라고 생각했어요.

 

퍼> 마곤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듣고 싶군요.

 

제> 마곤은 재미있는 인물이에요. 그는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의 아버지로 불려요. 멕시코 민주 의회 설립을 바랐죠.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정권을 세우자고 신문도 발행했고요.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혁명 중에는 미국에서 멕시코 간첩으로 낙인 찍혀 미국 정부에게 쫓겨가며 혁명 신문을 만들다 감옥에 갇히게 돼요.

 

* 멕시코 혁명. 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 집권하던 정권에 반대하며 시작된 무장 투쟁.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인민주의, 토지 균분론 운동 등 다양한 사상이 쏟아져 나왔다.

 

퍼> 왜 미국 정부가 그를 감옥에 가뒀죠?

 

제> 미국에서 모금 활동한 돈으로 무기를 사서 멕시코로 보냈어요.

 

퍼> 아.

 

제> 마곤은 미국에서 많은 혁명가들과 에마 골드만(Emma Goldman)**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만났어요. 마곤은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급진적으로 변해요. 한때 사민주의자였지만, 자기가 모든 형태의 정부에 반대한다는 걸 깨닫고 아나키스트가 되죠.

 

** 에마 골드만(Emma Goldman). 러시아 태생. 국제적인 무정부주의자. 1890-1917년 미국에서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였다.

 

제> 마침내 멕시코 혁명이 승리하고, 대통령이 선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마곤을 기억하고 미국 감옥에서 그를 빼내 정부에서 일을 시키기 바랐어요. 그런데 마곤은 정부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미국 감옥에 남아서 생을 마쳤어요.

 

퍼> 확고한 아나키스트였군요.

 

제> 그러나 멕시코에서 마곤은 아나키스트로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 혁명의 아버지로만 알려져 있죠. 멕시코에 가면 마곤의 이름은 사방에 적혀 있어요. 내가 다시 멕시코에 가면 마곤의 일생과 현재의 마고니스트에 대한 영화를 만들 거에요.

  

퍼> 그들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싸빠띠스따와 와하카에 갔을 때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을 마고니스트라고 불렀어요. 마곤의 사상과 그들의 정책이 얼마나 닮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웃음)…

 

퍼> 제프가 멕시코에 있을 때 가장 두려운 건 뭐였어요? 위험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제> 제일 두려운 건, 언어 장벽이었어요.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없어서 내가 얻는 정보가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었어요. 와하카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외부 세계로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퍼> 그렇게 말하니까…(웃음)

 

제> 바보 천치처럼 보이죠. (웃음) 나도 알아요. 하지만 신문도 방송도 믿을 수 없었고, 멕시코에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은 나에게 모든 정보를 말해주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제한된 정보만을 접할 수 있었어요.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엇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4. 한국과 만나다 (1) – 대추리에서

 

 

제> 내가 한국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마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카메라를 사기 위해서였어요.

 

퍼> 카메라 살 돈을 벌기 위해 영어 학원 강사로 한국에 온 건가요?

 

제> 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었어요.

 

퍼> 왜요?

 

제> 외국에 나가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미국이라는 제국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달갑지 않았어요.

 

퍼> 그건 그렇죠.

 

제> 중국에서 괴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에 있는 대학 동창 로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한국에 오면 한국의 일등 아나키스트 ‘돕 헤드’(Dope head: 마약에 취한 머리라는 뜻의 속어, 한국에서는 ‘조약골’이라고 불리는 활동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퍼> 제프의 관심을 끌 만한 제안이었군요.

 

제> 그 친구가 대추리* 이야기도 해줬어요. 아나키스트 농부들이 비무장 지대 안에서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 농부가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냐며 주민등록증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진짜 쿨하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친구 이야기가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요.

 

*대추리 사건: 용산 미군기지 등을 모두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로 이전 확장하려는 계획에 대추리 주민들과 시민단체 운동가들이 저항한 사건이다. 2006년 대추리 초등학교 철거를 정점으로 경찰과 큰 충돌이 있었다.

 

퍼> 한국에 들어와 곧장 대추리에 합류하였나요?

 

제> 대추리에서 가까운 송탄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곧 삶의 괴리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주말에는 대추리 지킴이로 활동하고, 주중에는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한국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도밖에는 못 하는 수준이었는데, 가장 먼저 배운 한국말 구절이 ‘미군 기지 확장 반대’예요.

 

퍼> 하하

 

제> 어쨌든 전 빠른 시간 안에 카메라와 컴퓨터를 장만할 수 있었어요. 그 뒤 누구든지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야후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제가 모을 수 있는 대추리 정보들은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다 올리기 시작했어요. 한국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제 정보의 원천은 모두 돕 헤드였죠.

  

퍼> 음. 객관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정보들이었겠네요.  (웃음)

 

제> 하하 맞아요. 대추리 초등학교가 대추리를 지키려는 활동의 구심점이었는데, 대추리 초등학교가 크게 공격받던 날 저는 친구와 함께 인디미디어 사이트에 기사를 전송했어요.

 

퍼> 한국의 ‘대추리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군요.

 

제> 미국과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 대추리에 대한 인디 미디어의 기사를 읽고, 우리가 만든 대추리 영문 웹사이트를 방문했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트래픽 초과로 그 웹사이트는 완전히 다운되었었죠.

 

퍼> 정말요? 대단하군요.

 

제> 인디미디어의 기술자들이 ‘대추리’를 다룬 우리 웹사이트의 미러 사이트**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해줬어요. 이게 정말 네트워킹의 쿨한 면인 것 같아요.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돕잖아요. 대추리 사이트는 열 개의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한미 관계와 한국의 미군 주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미러 사이트. 인터넷의 복제 사이트. 동일한 정보를 여러 곳에서 제공하기 위한 장치.

 

퍼> 대추리에 수많은 국제적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몰랐을 걸요.

 

제> ‘수많은’ 국제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평균적인’ 미국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겠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열정적인 사람들도 많잖아요.

 

퍼> 활동가들이요?

 

제> 네. 평화 운동가라든가 세계 각지에서 미군 기지 철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미국에서 잘 알려진 반전 운동가 신디 쉬한(Cindy Sheehan)*** 도 미디어 벤자민(Medea Benjamin)과 함께 그 해에 대추리에 왔었어요.

 

*** 신디 쉬한. 아들이 이라크에서 전사한 이후, 조지 부시의 농장 앞에서 캠핑하며 반전시위를 한 인물.

 

퍼> 미디어 벤자민은 누구죠?

  

제> 유명한 평화 운동가에요. 코드 핑크(Code Pink)****를 만든 사람이죠. 부시가 이슬람을 테러 세력으로 규정하고 코드 레드를 발동시켰어요, 그것에 대한 조롱으로 분홍색을 평화의 상징으로 만든 거에요. ‘코드 레드’ 아니고 ‘코드 핑크’라고.

 

**** 2002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반전평화단체.

 

퍼> 기억나요. 한국에서도 반전을 의미하는 분홍색 스카프가 유행한 적 있었어요. 

  

제> 같은 거에요. 인디미디어에 전송했던 그 기사의 영향력을 보고 우리는 독자적인 사이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퍼> 학원에 다니면서 대추리 지킴이 하기 어렵진 않았어요?
 
  

제> 대추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학원과 대추리의 이중 생활을 했어요. 학원에서 입지가 좁아질까봐 학원 밖의 생활은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만 명쯤 되는 경찰이 개미처럼 줄지어 있었고, 그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한 친구가 뉴스 화면에 나왔어요. 그 친구가 가르치는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 “엄마, 우리 학원 선생님 나왔다!”고 말하는 바람에 학원에 알려졌죠.

  

퍼> 곤란했겠네요.

  

제> 어떤 날은 밤까지 대추리에 남아 있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이면 포크레인이 와서 논밭을 다 엎어 놓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사람들은 파괴행위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우리만 빠져 나가 학원에 출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니가 가라, 내가 남을게”, “아니야, 니가 가라, 내가 남을게”, “모두 남았다가 다 해고되면 생활은 어떻게 하냐” 실랑이를 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모두 학원에 출근하기로 결정했어요.

  

퍼> 아~

  

제> 단지 학원에 가는 것뿐인데 우리는 경찰을 피해서 미친 듯이 강을 넘고 산을 넘었어요. 학원에 도착해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가다듬고 어떻게 하면 영어 제국에서 유창한 영어 화자가 되는지를 꼬맹이들에게 가르쳤죠. 학원에서 대추리가 파괴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더욱 힘들었겠어요.

 

제> 그래요.  

  

5. 한국과 만나다 (2) – 서울리대리티

 

 

퍼> 대추리 사건 이후의 한국 생활이 궁금하군요.

 

제> 인디미디어 기사 이후에 조동원이라는 미디어 활동가에게서 이메일을 받았어요. “당신들은 누구냐, 나도 이런 기사를 통한 국제연대에 관심이 있다.” 그를 만나 국제 컨퍼런스에 초대받게 되었어요. 동원 씨가 이미 하고 있던 미디어 활동 모임이 있었는데, 좀 더 바깥으로 향한 연대에 중점을 둔 조직을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그게 서울리대리티에요. 급진적 언어교환 모임(Radical Language Exchange)이라고도 했어요.

 

퍼> 서울리대리티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제> 각종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고, 함께 의사소통하는 활동을 주로 했죠. 사회적 이슈를 담은 영상물을 번역해서 홍대 앞의 작은 카페에서 상영회도 하고, 놀기도 하고, 사회변혁과 국제연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어요. 2년 정도 지난 후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죠.

 

퍼> 서울리대리티의 상영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었나요?

 

제> 네. 친구들이 많이 왔죠. 상영물 중에는 광주 다큐멘터리도 있었고, 노무현에 관한 것,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담은 영상들이 있었어요.

 

퍼> 서울리대리티에서 제프가 했던 미디어 활동 좀 소개해주세요.

 

제> 서울리대리티에서 나와 내 룸메이트 니꼴라가 만든 건 한국 군사주의에 대한 비디오였어요.

 

퍼> 제목이 뭐죠? 유투브에서 볼 수 있나요?

 

제> ‘한국 군사주의와 저항(Militarism and Resistance in South Korea)’*이요. 영어 버전, 프랑스어 버전에 한국어 자막이 있어요.

 

*<한국 군사주의와 저항> 동영상 보러 가기
   

퍼> 지금 한국의 병역 거부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과 유사하네요.

 

제> 네. 그렇지만 처음에 만든 거라서 거의 사진과 나레이션뿐이에요.

 

퍼> 영화도 전공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 부전공이 연기였는데, 영화 찍는 법을 학교에서 배워본 적은 없어요. 그냥 만들면서 배우는 거에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몰라요.

 

퍼> 아, 그렇구나. 병역 거부자에 대해서는 원래 관심이 많아요?

 

제> 한국에서 점점 관심이 많아졌어요. 병역 거부와 병역 의무 시스템 전반에 대해서요. 병역이 주위에 있는 친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해요.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 유사시 징병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어요. 미국은 징병제가 폐지되었는데도 말이에요. 이게 뭐냐고 엄마에게 물어봤지만, 남들 다 하는 거니까 그냥 서명하라는 대답만 들었어요.

 

퍼> 그래서 서명했어요?

 

제> 네. 그땐 뭘 몰랐으니까. (웃음) 군입대는 나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특히 한국에서 종교적, 개인적 신념에 의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감옥에 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주지 않는 것은 잔인한 일이에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놀라죠.

 

퍼> 다큐멘터리 제작은 어떻게 시작했어요?

 

제> 내 친구 강의석이 군대 가기 싫다고 선언하고, 이벤트를 만들었어요. 그걸 찍고, 사람들과 회의 하면서 ‘전쟁 없는 세상’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도 했고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병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아가는 작업이 절 매료시켰어요.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병역의 의무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는 게 놀라웠어요.

 

퍼> 그렇죠. 대부분의 사람은 군대에 가고 싶지 않지만 행동하지 않죠.

 

제>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군대에 가기 싫어서 하는 미친 짓들이요. 여러 가지 일들을 마구 찍다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필요해졌어요. 은국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은국이 주인공이 되었죠.

 

퍼> 은국**은 누구에요?

 

제> 평화 활동가예요. 이라크전 직전에 반전 운동하러 이라크에 갔어요. 팔레스타인에도 갔었고. 한국에서도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했어요. 한의대를 졸업하고 1년 동안 한의사로 일하다가 감옥에 갔어요.

 

** <병역 거부자 은국 기자 회견> 동영상 보러 가기

 

퍼> 한의사였구나. 훌륭한 신념도 신념이지만, 좋은 직업이 있어서 좀더 용기를 낼 수 있었겠어요.

 

제> 결정하기가 조금 더 쉽긴 했겠죠.

 

퍼> 아, 쉬운 결정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고 싶지 않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직업이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미안.

 

제> 네. (웃음) 길거리에서 나이, 성별 등에 구애 받지 않고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다양한 의견을 얻을 수 있었어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회사의 CEO가 되고 싶은데, 트렌스젠더로 커밍아웃도 한 상태였죠. 그 사람은 자기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일을 정치적으로 풀지 않았어요. 그냥 정체성에 관한 거라고 생각했지.

 

퍼>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는 거군요.

 

제> 이 경우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도 흥미로웠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군대에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자기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군대에 가기 싫은 건 안 된대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좀 우스워요.

 

퍼> 음.. 트렌스젠더는 한국의 사회 통념상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결함에 속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트렌스젠더가 면제 사유가 된다고 하면 일시적으로 트렌스젠더가 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라요. 신념에 따라 군대에 가기 싫다는 건, 신념에 따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일시적인 위장으로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별일을 다 하잖아요. 생니도 뽑고, 손가락도 자르고..

 

제> 혈압도 바꾸고.

 

퍼> 아는 사람 중에 혹독하게 다이어트해서 군대 안 간 사람도 있어요.

 

제> 내가 인터뷰해도 돼요? 만나보고 싶다. 언제에요?

 

퍼> 89년쯤? 키는 180이 넘는데 심하게 살 빼서 안 갔어요.

 

제> 옛날이니까 인터뷰하면 안 돼요? 싫어하겠죠?

 

퍼> 지금은 안 친해요..

 

제> 모자이크 해도 안 돼요? 음.. 난 살 찌워서 군대 안 간 사람 인터뷰 한 적 있는데, 그 사람은 면제가 아니라 공익이 목표였어요.

  

퍼> 그건 왜요? 군대에 가기 싫으면 면제가 더 나은 거 아니에요?

 

제> 면제 받으려고 살찌우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웃음)

  

6. 아나키스트 눈에 비친 한국 사회

 

 

퍼> 제프가 지금까지 한국에 있는 걸 보면 한국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봐요.

 

제> 미국에 있다면 하지 못할 경험을 하고 있죠. 미국에선 난 백인 남성이잖아요.

 

퍼> 대졸자에 중산층이기도..

 

제> 맞아요. 그런데 한국에 와선 난 소수자에요. 지하철을 타면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나 “외국인이다, 외국인”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이 있고, 공원에 앉아 있으면 대학생들의 외국인 의식 설문조사를 꼭 당해요.

 

퍼> 대학생들이 왜 그런 걸 해요?

 

제> 대학생들이 영어 시간에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할 기회를 얻어보라며 받는 숙제가 있어요. 외국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라는 건데, 그럴 때마다 난 그냥 외국인이에요.

 

퍼> 외국인이라고 하면 방글라데시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많은데, 그런 숙제 하려면 꼭 제프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거겠죠.

 

제> 그런 사람이 진짜 많아요. 내가 외국인 아니고 백인 한국인이면 어쩌려고 그러나 몰라요. 그리고 외국인에도 많은 층위가 있는데 설문 자체의 설계가 잘못된 거죠. 그냥 외국인.

 

퍼> 또 다른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제> 어떤 사람들은 내가 관심을 가진 한국 사회의 일에 무신경해요. 뇌가 비워진 로봇처럼요. 심지어, “왜 그런 일에 신경 써? 너희 나라도 아닌데. 나도 신경 안 쓰는데”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정말 짜증났어요. 내가 만들고 있는 영화에 대해서도 어떤 한국 여자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있어요. “너희 나라 가서 하지 왜 한국 와서 이러냐”고.

 

퍼>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왜 제프가 한국에 왔는지, 왜 한국 사회 이슈에 관심 갖는지 나도 궁금했었어요. 사람들이 당연히 궁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 사람이 한국 문제에 관심 갖는 것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는 게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퍼> 꼭 내가 그 여자의 천부적 권리인 한국인으로 존재하기를 짓밟고 있는 것처럼 굴었어요. ‘우리나라’? 우리나라가 도대체 뭐에요? 우리는 누구에요?

 

퍼> 나는 오히려 제프와는 다른 종류의 미국인들을 더 많이 만났었는데, 미군기지 얘기나 조지 부시 이야기를 꺼내면 공격받았다고 느끼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들.

 

제> 누구랑 놀길래 그러죠? (웃음). 미군들이랑 노나?

 

퍼> 음 그냥 옛날 친구들. 화내면서 미국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책임질 수 없다면서 주한미군 등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부정하다가도 이라크전 이야기가 나오면 부시를 옹호하면서 국제사회의 성원으로서 이라크 인권을 위해 마땅히 의무를 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나 제프나 모두 미국인이라고 불리기 싫어하는 건 똑같은 거 같아요. 

 

제> 나에게 이라크전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미국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개인 한 사람으로서 부시가 한 모든 미친 짓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디 여행 가면 꼭 미국 정부와 나는 별개임을 알리려고 하죠. 

 

퍼> 하하. 갑자기 미국 여행 책자에서 본 문구가 생각나요. 어디어디 여행가면 안전을 위해 캐나다 사람이라고 말하라고, 실제로 배낭에 큰 캐나다 국기 붙이고 다니는 미국 사람들도 본 적 있어요.

 

제> 음. 나는 미국인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요. 사실 인종 차별적이라고 생각해요.

 

퍼> 어떤 의미에서요?

 

제> 한국사회에서는 한국사람이 주류잖아요. 나를 미국인으로 정의하는 순간 내가 타자화되는 거에요. 그냥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어요.

 

퍼> 그렇군요.

 

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한국어 공부 모임에서 생긴 에피소드도 있어요.

 

퍼> 어떤 일이었죠?

 

제> 한국어 공부 모임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자기소개란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제국의 무기인 영어를 팔고 있다(slinging English)*고 적었어요. 그때 제 메일 주소가 칭카스카였거든요. 칭카스카(chinkasqa)는 고대 잉카 문명의 공용어인 케추아(Quechua)로 ‘잃어버린’이라는 뜻이에요.

 

* ‘sling’은 마약 따위의 불법적 물건을 파는 행위를 뜻하는 속어.

 

퍼> 잉카어도 배운 적이 있어요?

 

제> 네. 대학교 때 1년 동안. 대학 전공이 문화인류학이니까요. 근데 그 메일 주소 때문에 한국어 모임에 나온 사람들이 난리였어요. 어떻게 메일에 칭크라는 중국인 비하의 단어를 적을 수 있냐고. 또 미국이 왜 제국이냐, 미국은 대영제국에서 해방된 이후로 제국인 적이 없다고…(웃음). 나를 언어 교환 모임 메일링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도 했어요.

 

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만난 거에요?

 

제> 언어 교환에 나온 사람들은 한국의 영어 선생님들이었으니까 무정부주의자 친구들에게 세뇌당한 나와는 다르게 당연히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죠. (웃음) 미국에 가면 많은 인디언들이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마찬가지죠.

 

퍼> 한국에서 좀 더 지내볼 계획인가요?

 

제> 일단 멕시코나 미국에 돌아가려는 계획은 바뀌었어요.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을 모두 누린 것 같지 않아서요.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서 겨우 한국말도 하게 되었는데, 돌아가면 한국어 배운 것도 아깝죠.(웃음) 대추리 일이 정리되고 평택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어요. 하지메라는 친구가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소개해줘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어요. 수유의 기본 이념에는 동의하지만 수유의 실제는 나랑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퍼> 맞아요. 사람들이 좀 너무 학구적이죠. 

 

제> 음.. 나중에 다른 퍼슨웹 사람들 소개해주세요. 재미있는 사람들 만나고 싶어요.

 

퍼> 네, 그러죠.(웃음)

 

 

최근 제프는 수유 너머n(www.nomadist.org)에서 영어 세미나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데이빗 그래버의 가능성들 (David Graeber, Possibilities)를 읽었고, 10월 현재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는다.

 

사회의 모든 제도적 규정을 거부하는 그는 뼛속까지 아나키스트다. 그는 계속해서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용산 참사 때에는 주위의 철거된 건물 잔해에 친구들과 함께 꽃을 심기도 했다. 이 게릴라 가든은 몇 시간 만에 경찰이 뒤엎어버렸지만.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게스트하우스 빈집의 네 번째 집이 되었다. 얼마 전에 소파를 주워와 거실을 만들었는데, 이 거실에서 조만간 저주파 라디오 방송국도 운영하고 스페인어 강좌도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