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안 학교는 1996년 경남 산청에서 개교한 ‘간디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대안 학교 10여 년의 시간이 흐름 지금, 서울시 대안교육 센터(http://seoulallnet.org)는 도시형 대안 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학교 밖 아이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맥락, 그리고 대안 학교 안에서 아이의 성장을 짚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10년 전 하자 센터를 중심으로 대안 교육 현장 사람들을 인터뷰*했던 퍼슨웹은 그 기획에 동참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성미산 학교, 꿈터 학교, 성장학교 별, 도시 속 작은 학교 등 인터뷰가 예정된 도시형 대안 학교 중 퍼슨웹에서는 하자 작업장 학교의 졸업생 인터뷰를 담당하였다.
하자 센터 죽돌, 강진주 퍼슨웹 인터뷰(2001) 보러 가기
하자 센터 판돌, 허진 퍼슨웹 인터뷰(2001) 보러 가기
하자 센터 기획부장, 김종휘 퍼슨웹 인터뷰(2001) 보러 가기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퍼슨웹 인터뷰(2001) 보러 가기
하자 작업장 학교(http://productionschool.org/)는 2001년 9월 문을 열었다. 하자 센터와 서울시 대안교육 센터의 지원 속에 운영되고 있는 탈학교 학생 대상 비인가 도시형 대안 학교이다. 하자 작업장 학교에서는 21세기 불안정 고용 시대에 능동적으로 살아갈 자기 주도적 평생 학습자 되기, 자기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문화 작업자 되기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함께 하고 있다.
하자 작업장 학교의 대표 선수로 추천받은 친구는 허정연,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아호’. ‘예쁜 하늘’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하늘처럼 변화무쌍한 사람이 되고 싶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다. 하자 작업장 학교의 생활 디자인 방에서 편집 디자인을 전공하였으며, 졸업 후 인쇄 대행 기획사에서 잠시 일한 후, 지금은 사회적 기업 ‘트래블스 맵’의 디자인 팀에서 일하고 있다.
1. 펜싱 소녀, 허정연
퍼슨웹(이하 ‘퍼’): 중고등학교 때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대안 교육에 간 친구들은 공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아호는 대안 학교에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아호(이하 ‘아’): 하자를 선택한 배경들이 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운동을 했거든요.
퍼: 운동? 무슨 운동?
아: 펜싱이요.
퍼: 우와, 주변에서 펜싱 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어떻게 펜싱 선수가 된 거죠?
아: 팔이 길어서. 흐흐
퍼: 아, 팔이 길어서(웃음) 펜싱을 얼마나 했죠?
아: 2년 반 정도요. 운동을 하는 동안 다른 강제적인 일들은 다 참아낼 수 있었는데, 운동부 안 선․후배 관계는 중학교 3학년이 되니까 도저히 더는 못 버티겠더라고요. 선배는 신이라는 전제가 너무 철저한 거.
퍼: 그래도 2년 반이나 버텨낸 것을 보면, 아호가 펜싱부의 유망주였던 것 같은데요?
아: 그냥 팔이 길었어요, 운동부는 오전에만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수업을 안 들었어요. 요즘에는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방과 후 수업도 하지만, 당시에는 운동선수는 운동만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퍼: 그런 경향이 있었죠.
아: 제가 뭐 딱히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강제적인 분위기가 저를 더 고립시키는 것 같았어요. 운동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빨리 관두고 싶더라고요. 게다가 당시 집안 사정도 좀 불안정했어요.
퍼: 집안 사정?
아: 지금은 엄마가 재혼하셨지만, 그 당시에는 한 부모 가정이었거든요. 저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엄마는 서울에 계셨어요. 엄마랑 계속 떨어져 지내니 여름방학 때 코치가 저만 특별 케이스로 엄마 보고 오라며 일주일 정도 시간을 줬어요. 그때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학교를 그만둘 일로 치열하게 고민했죠.
퍼: 엄마가 있는 서울로 전학을 올 수도 있지 않았나요?
아: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려면 가족 전체가 다 서울로 와야 해요.
퍼: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하려는 수요가 많고 위장전입을 방지하느라 그런 거였군요.
아: 네. 저는 아버지가 부산에 계셨고, 엄마만 서울에 계신 상태라 전학이 불가능했죠. 그러느니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랑 같이 서울에 살고 싶었어요.
퍼: 펜싱을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다가왔군요.
아: 제가 학교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운동이 싫어서가 아니라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싫어서였어요. 서울에 있는 동안 엄마를 설득했죠. 처음에는 물론 안 된다고 계속 다니라고 하시다가 결국엔 중학교는 졸업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퍼: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 왔군요.
아: 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아예 안 했죠.
퍼: 아호는 힘들다는 운동부의 선후배 관계를 2년 반이나 버텼잖아요. 한 순간 갑자기 펜싱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가 있어요?
아: 펜싱을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렸어요. 나이가 들어 생각이 많아지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어요. 군대처럼 2년만 참으면 된다는 개념이 아니잖아요. 만약 내가 여기서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가서도 이 사람들과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그게 싫었어요.
퍼: 강제적으로 아호를 억누르는 그런 행동들?
아: 네, 말끝마다 무조건 명령뿐이죠. 소통이 된다는 느낌보다는 항상 일방적인 명령.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끼리는 진짜 친구가 되는 게 좀 힘든 것 같아요. 펜싱이 조금 개인적인 운동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퍼: 개인적인 운동?
아: 펜싱도 단체전이 있긴 하지만 늘 1:1로 겨루는 거죠.
퍼: 한편으로는 그저 그 상황을 참고 견디면서 펜싱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 면에서 아호는 어려서부터 자신만의 생각이 분명했던 것 같아요.
아: 그대로 고등학교 진학해서 3년을 히히덕 거리면서 보낼 수도 있었겠죠.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그런데 그건 결코 제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어요.
퍼: 이미 지나버린 상황을 가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만약 아호가 펜싱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 음… 뭐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크게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즐겁지가 않았을 것 같아요. 운동을 잘 해서 성공하는 게 제 욕구가 아니었어요. 하루를 살아도 나랑 마음이 맞는 사람과 대화하며 즐겁게 살고 싶었어요.
퍼: 중학교 졸업 후 곧바로 하자 작업장 학교에 입학한 건가요? 아호도 아호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허락하신 어머니도 대단해 보여요.
아: 대안 학교 진학은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퍼: 일반 고등학교 입학 거부는 허락하시고?
아: 네, 엄마는 그냥 검정고시 봐서 우수한 검정고시 성적으로 대학을 가라고 하셨죠. 사실 은밀하게 바라셨던 거예요. 저는 할 만큼만 하려고 했는데, 엄마는 그 이상을 원하시더라고요.
퍼: 서로가 바라보는 이상이 달랐군요.(웃음)
아: (웃음) 네. 검정고시를 보고나니 저는 그때 겨우 18살이었어요. 막상 대학을 가려니 나보다 2살이나 많은, 기가 센 언니들하고 함께 대학 생활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퍼: 운동했을 때 그 선배들과 같은 나이의.
아: 네, 근데 상상이 되더라고요.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 해도 또 선후배의 수직적인 명령 관계가 시작되겠구나 싶고. 그렇다고 저는 혼자 지내기는 싫었어요. 제 또래 친구들이 필요했어요. 제 친구들은 다 부산에 있는 상황이라 좀 외로웠거든요.
퍼: 네… 그랬겠네요.
아: 그런데 그 외로움이 학원을 다닌다고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방황을 하다가 우연히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하자 센터가 생각났어요. 그때는 솔직히 하자센터 이름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인터넷으로 찾아봤어요.
퍼: 처음부터 하자 센터에 들어가려고 했었나요?
아: 아니요, 하자는 센터형이라서 프로젝트 위주로 진행이 되거든요. 학업에 대한 졸업 제도는 당시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간디학교를 생각했어요.
퍼: 간디학교는 지방에 있어서 좀 멀지 않나요?
아: 저도 그 점이 좀 망설여졌어요. 엄마랑 계속 떨어져 살아서 더는 떨어져 살기가 싫었거든요. 그때 마침 하자 작업장 학교가 2001년 9월에 생겼어요. 저는 그 다음 해인 2002년 9월에 하자 작업장학교에 입학했죠.
퍼: 아호 말을 들으니 수요자 입장에서 도시형 대안 학교의 필요성이 확인되는군요. 그 즈음 기숙형 대안 학교와는 달리 등하교가 가능한 도시형 대안 학교가 많이 생겨났죠.
아: 네. 바로 그 점이 제가 하자 작업장학교를 선택한 이유예요. 사실 좀 고마웠어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죠. 엄마와 함께 살면서 학교를 통학할 수 있으니까요!
2. 하자 작업장 학교의 바른 생활 소녀, 아호
퍼: 하자 작업장 학교(이하 작업장)에 처음 갔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아: 엄마, 그리고 엄마랑 재혼한 아빠랑 같이 작업장에 처음 갔었어요. 그때 지금의 노리단 단장인 휘가 작업장을 소개해줬는데, 거기에 부모님이 반하신 거예요. 흐흐
퍼: 무엇에?
아: 휘가 3개월의 길 찾기 과정이 있으니 경험해보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다고. 그리고 오히려 아이가 근성이 없으면 작업장에서 안 받아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주위에서는 다들 제가 3개월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죠.
퍼: 아호를 그렇게 판단한 그들의 기준이 뭘까요?
아: 음… 제가 집에서는 좀 내성적이에요. 말도 없고, 엄마랑 어려서부터 떨어져 지내서 친근감도 조금 없는 편이고.
퍼: 길 찾기 과정 동안 아호는 즐거웠나요?
아: 정말 나한테 딱 맞는다는 느낌?
퍼: 특히 어떤 점이요?
아: 자유롭잖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일방적인 잔소리거든요. 상대방의 상태는 확인도 않고, 자신의 감정만 그때그때 상대방에게 전달하잖아요. 작업장에서는 상대방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주고, 소통하려 한다는 점이 제 삐뚤어진 성격과 맞았다고 할까요? 흐흐
퍼: 아호는 초창기에 굉장히 많은 일들을 했더라고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아: 의욕만 앞서서요.
퍼: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요.
아: 마무리는 잘 지었는데, 왠지 끝은 항상 허무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에 중독된 것 같아요.
퍼: 왜 그럴까요?
아: 글쎄.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뭔가 직성이 안 풀려요. 제가 운동을 중간에 그만뒀잖아요. 그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쟤는 뭘 해도 안 될 거야’라는 식이었어요. 운동 그만둘 때 엄청 욕을 먹었거든요. 그래서 중간에 뭔가를 그만둔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퍼: 아호가 펜싱을 잘 했나 봐요. 잘 하는데, 그만두니까 아쉬워서 그렇게 말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아: 아니, 그렇게 잘 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 당시 들었던 욕들이 좀 제가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네가 운동을 관두면 뭘 하겠냐, 술밖에 더 따르겠니?’ 뭐 이런 식의 욕. 그래서 제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극복해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퍼: 중학생이 극복하기에는 상당히 큰 상처였네요.
아: 워낙 그 쪽이 막말하고 그러니까.
퍼: 그런 강박 관념들이 작업장에서 아호를 움직이게 만들었군요.
아: 내가 운동을 그만뒀어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내가 펜싱을 그만둔 걸 절대로 후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요. 내가 나중에 그들 앞에 섰을 때 절대로 지기 싫다고 생각했죠. 어쩌면 저한테 독이 되는 생각일 수도 있는데, 지금 보면 약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퍼: 그래서 아호는 작업장에서 바른생활 소녀가 됐군요?
아: 뭐 저도 대안 학교 다니기 전에 코도 뚫고 염색도 하고 다녔어요. 하지만 하고 다니는 것만 그랬지 그때도 여전히 마음은 바른 생활 학생이었던 거 같네요.
퍼: 누구나 한번쯤은 중고등학교 시절, 그 당시 금기에 도전하고 싶어 하잖아요.
아: 네. 하루는 코를 뚫고 집에 가는 길에 혼자서 생각했어요. ‘그래, 엄마한테 혼나게 된다면, 뒤통수까지만 허락하자’ 그리고 나서 엄마에게 살포시 문자를 보냈어요. 내가 코를 뚫었는데, 일단 보고 판단하시라고. 어쨌든 나는 집에 들어간다고. 그리고 엄마 가게로 갔어요. 거기에는 가게 아주머니들 계시니까 좀 덜 혼날 것 같았거든요. 근데 안 맞았어요. 그냥 조용히 집에 들어가라고 하시더라고요.
퍼: 뒤통수를 안 맞아서 다행이네요. (웃음)
아: 그때 엄마는 다른 사람보다 아버지 눈치가 보였던 것 같아요. 친자식도 아니고, 데리고 온 딸이 그러고 다니니까 아버지 보기가 부끄러운 거죠. 그런데 오히려 아버지가 지금 그럴 시기니까 쟤가 저러는 거다. 저 아이가 20, 30살 먹어서도 여전히 저러고 다닐 것 같냐, 그때는 자기가 부끄러워서 저러고 못 다닐 거라고. 저를 이해해주신 거죠.
퍼: 작업장에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럼 아호는 작업장 학교 친구들의 다양한 스펙트럼 안 어디쯤 위치할까요?
아: 하자 내에서도 “아호, 네가 제일 일반 학교 학생 같다”고들 했어요. 제가 코를 뚫었어도 뭔가 작업장의 다른 아이들보다 평범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퍼: 아호는 작업장의 모범생이었나 봐요.
아: 그런가요? 평범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동시에 그 평범하다는 기준은 과연 누구의 기준일까 싶기도 했고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내가 아닌, 남의 시선으로 결론난다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했어요. 살면서 느끼는 건데, 저는 그렇게 잘못 판단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 별로 저항적이지 못해요.
퍼: 어떤 부분이?
아: 음… 상대방이 나에게 손가락질 한다고 해서 그 손가락질의 잘잘못을 따져가지는 않아요. 만약 그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냥 한번쯤 가만히 들어보는 정도예요.
퍼: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제가 아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아: 어떤 부분이요?
퍼: 아호가 잡지 프로젝트에서 만들었던 <작업창고2-불한당>(불안하고 한심해서 당황스러운 10대)을 읽었을 때, 그 메인 테마가 ‘우.리.는.타.인.에.게.관.심.없.다.’였죠. 그래서 저는 아호가 타인에게 굉장히 무신경한 줄 알았어요.
아: 그건 제가 혼자서 만든 게 아니라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작업한 것에요. 그 주제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우리들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메인 카피로 그 문구를 뽑은 건 당시 편집장의 의도였겠죠. 그 의도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퍼: 오해가 좀 풀렸네요.
아: 저한테는 그래요. 타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방에게 형식적으로 밥 먹었냐는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 이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지금 과연 그 사람을 왜곡되지 않은 마음으로 진정 배려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퍼: 그런 배려는 어떤 것일까요?
아: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써 이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칠까 생각하면서, 결코 내 감수성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퍼: 배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었나 봐요.
아: ‘나는 상당히 섬세하고 사려 깊은 아이구나’라는 자만심이 들었던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죠. 제가 불한당 잡지 작업할 때 욕심을 좀 부렸거든요
퍼: 어떻게요?
아: 제가 잡지 프로젝트 디자인 총괄이었어요. 애들한테 원고 받고, 그에 맞게 디자인에 대한 의견도 수렴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잡지 만들면서 애들한테 화를 좀 많이 냈어요. 그 후에는 물론 따로 애들을 다독거리고 그랬죠. 그 과정에서 저 스스로 자기 감정을 조절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어요.
3. 자발성을 배우다
퍼: 아호는 작업장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죠?
아: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디자인 하면 패션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길 찾기 과정에서 디자인의 범위가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후 어떤 물건을 보면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디자인된 것인지 궁금해졌어요.
퍼: 디자인 수업 과정은 어땠어요?
아: 처음에는 철없이 ‘예쁜 것 많이 보겠지’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과정을 거치면서 정말 신기한 거예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들도 다 계획적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지는구나. 놀랍고 재밌었죠.
퍼: 작업장의 수업은 공교육 내 학교 수업과는 좀 다르죠?
아: 수동적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에요.
퍼: 작업장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주제를 놓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회의를 하고 역할을 나누는 과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어요.
아: 작업장 내 자치회의가 있어서 각자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해요. 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죠.
퍼: 그런 과정에서 아호가, 혹은 친구들이 겪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아: 물론 저도, 친구들도 그 과정 안에서 갈등도 겪었고, 서로 싸우고 패가 나뉘기도 하고 그랬어요. 의견이 언제나 딱 맞아 떨어질 수는 없으니까. 서로 주장이 강할 때도 있고.
퍼: 자치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죠?
아: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다 같이 모여서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의견을 서로 나눠요. 그러니까 내가 참여하게 될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무 발언을 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그 손해는 자기가 떠안게 되는 것이죠.
퍼: 학교에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정말 대답들 안하는데. 특히 학급회의 시간에는 더더욱.
아: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하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학교가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내 생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판돌*이조차도. 그래서 자치 회의에서 말을 안 하면 제가 뭔가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판돌: 하자 작업장 학교에서 교사를 부르는 명칭. 학생들이 놀 수 있는 ‘판을 벌여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퍼: 말 안 하면 나만 손해라는 느낌이라니. 공교육 내에서는 보통 그런 생각을 안 하죠. ‘말 하면 손해다’, ‘말 안 하면 중간이라도 간다.’ 그러지. 자발성이 시작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 같아요.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계기 혹은 작업장의 분위기가 있었나요?
아: 작업장의 길 찾기 과정에는 자치 회의가 없어요. 작업장 첫 학기가 시작되고 첫 회의에 들어갔는데, 진행하는 친구가 정말 똑 부러지는 거예요. 저는 멍해서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야, 너는 왜 말이 없어. 말 좀 해봐. 네게도 필요한 것이 있을 거 아냐!’ 그러는 거예요.
퍼: 멍했겠네요.
아: 저는 그냥 뭔가 강의를 들으면서 학습적인 경험을 더 쌓고 싶다고 말했고, 그 아이는 그럴 거면 일반학교 가지 왜 여기에 왔냐고 했어요. 판돌이 그 상황을 보고, “아호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다.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럴 때는 네가 그 부분을 잘 잡아줘야지!” 그러시는데.
퍼: 아!
아: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였거든요. 그런데 만약 그 아이가 제게 필요한 것을 물었을 때 아무 말을 안 하고 있었다면,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을 거 아녜요. 또 제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 그냥 아는 척하고 넘어가면 그건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퍼: 그런 점들을 첫 자치 회의를 통해서 느꼈던 거군요. 자발성의 중요성을.
아: 그렇죠.
퍼: 개별 프로젝트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나요?
아: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진행 중간 중간에 돌아가면서 해요. 학기가 시작하면 전체 기획은 다 같이 짜요. 그 후에 파트별로 팀을 꾸려 기획을 구체화하고 역할을 분담하죠. 다과를 준비하고, 음향작업을 누가 하고, 디자인은 누가 하는지 등을요.
퍼: 이런 일들을 매 학기마다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훈련이 되겠네요.
아: 네, 그런 경험들이 졸업식 때 빛을 발휘하게 되요. 작업장 졸업식은 자신이 스스로 기획하니까요.
퍼: 졸업 프로젝트는 어떻게 결정하고 진행하나요?
아: 시니어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테이블 시간을 가져야 해요. 제 경우, 4명이 시니어 과정을 밟고 졸업하겠다고 기획서 발표를 했어요. 그런데 다 떨어졌어요. 심사하던 조한이 “대학원에서는 떨어지면 눈물 질질 짜는데 왜 너희는 울지도 않냐?”며 농담도 하고 그랬죠.
퍼: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일이죠?
아: 네. 아직 애들이 졸업하기는 이르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우리는 ‘내가 왜? 나 졸업할 준비됐는데?’ 이러면서 좀 어슬렁어슬렁 거리기도 했죠. 당시 우리를 오래 지켜본 판돌들이 많이 들고 나는 시기였고.
퍼: 마음이 잘 맞는 판돌이 떠나면 혼란이 있겠네요?
아: 네, 있어요. 그래서 그만둔 친구들도 두어 명 있었던 것 같아요.
퍼: 판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 자기 작업의 능력이 있는 분들, 디자인, 인문학, 영상, 웹 등. 또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어야죠. 가르친다는 의미보다는 같이 하려는 사람들.
퍼: 아호의 경우, 어떤 판돌이 좋았나요? 아니면 이런 판돌은 좀 별로더라 하는.
아: 작업장 학교 내에서도 편이 나눠져 있었거든요. 이것은 저만 느낀 것일 수도 있는데, 기존에 있었던 1,2기수의 판돌들과 3기의 판돌들의 전형이 달랐어요. 느낌 자체도 다르고.
퍼: 어떤 점이요?
아: 한쪽 판돌은 되게 따뜻하고, 한쪽은 굉장히 자기 할 일을 잘 챙기는 타입이셨던 것 같아요. 저는 시원이라는 분이 담임이었고, 길 찾기 때는 자스민이 담임이었어요. 그분들은 제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셨어요.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같이 놀자는 느낌?
퍼: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롭게 시시때때로 이뤄졌던 관계였네요.
아: 네. 너무 자주 판돌을 찾아가니까, 아마 판돌들 입장에서는 힘든 점도 있었을 거예요.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판돌들도 분명히 우리말고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을 테니 우리가 너무 판돌들에게 징징대면 안 되겠다, 저희끼리 그런 이야기도 했죠.
퍼: 아호는 작업장 졸업생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요?
아: 졸업생들이랑 그리 친하지는 않아요. 제가 3기 중에서 유일한 졸업생이에요. 17명 중에서 유일하게 졸업했거든요. 저랑 같이 졸업했던 친구들은 다 저보다 윗 기수였어요.
퍼: 같이 입학한 친구 중 나중에라도 졸업한 친구들은 있어요?
아: 아니요, 시니어 과정 때 다 사라지고 졸업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퍼: 17명은 주니어 과정만 마친 건가요?
아: 주니어만 마치고 나간 아이들이 반, 시니어 과정 중간에 나간 아이들 반이예요.
퍼: 중간에 나간 이유가 뭐예요?
아: 몇몇은 하자가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사실 열린 공간인줄 알았는데, 고전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는 집단이었다는 거죠. 또 하자가 내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다 이해한다며 착한 척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은 실험대상일 뿐이라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경우도 있어요. 저도 그 중 일부는 인정을 해요. 그것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죠.
퍼: 그랬군요.
아: 작업장을 다니고 있지만 사실 학교라는 소속감이 필요 없는 아이들이 있어요.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도 작업장을 다닐 수 있으니까. 오히려 저 같은 탈학교 학생보다 그런 학생의 수가 더 많았어요. 그 친구들이 작업장을 찾아와 자신만의 공간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다는 감정을 표출할 때, 저는 ‘나 혼자 남았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퍼: 17명 중 한 명이라…
아: 1,2기는 그나마 졸업 비율이 높고요. 3기는 저, 4기는 페이퍼 한 명 졸업했어요, 나머지는 수료 후 사라지고. 학교 운영이 학점제**로 이루어지니 정해진 시간 동안 학교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졸업은 가능해요. 최근 시즌1 마지막 친구들도 졸업은 한 걸로 알고 있어요.
** 하자 작업장 학교는 길찾기 과정 – 주니어 과정 – 시니어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기별로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 학점을 부여받으며, 전 과정을 통틀어 240학점을 이수하면 졸업이 가능하다.
4. 우물을 넘어 세상에 서다
퍼: 지금 공정 여행을 위한 사회적 기업인 트래블러스 맵(www.travelersmap.co.kr, 이하 ‘맵’)에서 일하고 있죠? 원래 여행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 여행은 항상 로망이었던 것 같아요.
퍼: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 제가 맵에서 일하기 전, 한 1년 정도 인쇄 대행 기획사에서 일했어요. 그 당시 지금 맵의 대표로 있는 변이 제게 회사 로고를 부탁했어요. 제가 맵의 감수성에 맞는 작업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변의 설명을 듣다 보니 맵에 매력을 느꼈어요. 가슴이 두근두근 하더라고요. 기존 회사를 정리할 시간을 갖고, 맵으로 옮기게 되었죠.
퍼: 맵이 사회적 기업이라는 점도 고려한 선택인가요?
아: 그 당시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점보다는 여행에 더 끌렸어요.
퍼: 그래도 맵이 일반 기업이 아닌 사회적 기업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아: 네. 사회적 기업이 일반 기업과는 목적의 방향 자체가 조금 다르잖아요. 이익을 추구하되 착한 일, 좋은 일을 해야 하죠. 가끔은 그 중간 지점에서 혼란을 느낄 때도 있어요.
퍼: 그 혼란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
아: 예를 들면, 디자인을 할 때 생기는 강박관념이랄까요? 디자인을 할 때 개인적으로는 디자인에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종이도 광택이 좀 있는 것으로 쓰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회적 기업이니까 되도록이면 재생 종이를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퍼: 그런 갈등을 겪을 때 아호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아: 그럴 때는 ‘이런 경우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를 생각해요.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재생 종이를 사용해서 디자인을 해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진행하는 거죠.
퍼: 다른 일반 여행 회사와 사회적 기업인 맵의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아: 맵은 소비자에게 가장 공정한 상품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소비자가 공정한 소비자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랄까. 내가 그 지역을 여행할 때, 왜곡되지 않은 가격과 왜곡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요.
퍼: 예를 들면요?
아: 제가 얼마 전 일본 에코투어 상품을 개발했어요. 숙소를 정할 때, 이 숙소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이익을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기업이 운영하는지,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것인지를 따져 봐요. 또 이 장소가 유명해졌을 경우, 주변 지역이 함께 공생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곧 죽어나가는 상황인지 등을 보죠.
퍼: 그게 소비자의 공정한 여행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 여행지인 지역 사회와 여행자의 관계가 동등한 상황. 내가 지불한 만큼 그 지역 사회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공정여행인 것 같아요. 소비자에게 가장 공정한 상품을 만들어 주는 것이 공정 여행을 추구하는 맵의 임무고요.
퍼: 저는 처음 공정 여행을 떠올리면서 혼자 하는 자유 여행의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아: 저도 맵을 접하기 전, 혼자 여행 다닐 때는 공정여행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혼자 다니는 게 공정여행 아니야?’ 그랬어요. 우리는 보통 ‘나쁜 여행=패키지’라고 생각하니까요.
퍼: 맵의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이죠?
아: 30-40대들도 많아요. 그들도 88만원을 받고 일해요. 책임져야 할 식구들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삶은 상황에 맞춰지는 것 같아요. 비용 부분은 여전히 힘들고 고민되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것만 빼면 정말 맵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신의 직장인 것 같아요.
퍼: 어떤 부분에서?
아: 구글이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경직된 회사 조직 안의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자유로움이 맵에는 있어요. 나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 구조를 최대한 맞추려는 곳이에요. 서로의 직함이 아닌, 스스로 불리고 싶은 이름을 만들어 불러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요.
퍼: 맵은 24명 직원들이 각자 비슷한 가치를 갖고 일하니 일의 효율이 높겠어요.
아: 맵의 일이 결코 편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다른 기업보다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는 힘들면 힘들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표현을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퍼: 지금 아호는 어떤 일을 담당하죠?
아: 경영 지원부가 디자인팀, 홍보팀, 회계팀으로 나뉘는데, 저는 디자인팀에서 일해요. 디자인도 하고 여행 기획을 하기도 하죠. 로드스꼴라 애들이랑 한 달에 한 번씩 <오드락>이라는 월간 소식지를 만들며 멘토의 역할을 하기도 해요.
퍼: 다양한 일을 하는군요.
아 : 멘토의 역할을 처음 시작할 때는 겁이 났어요. 제가 대학에서 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누구를 가르친다니. 그러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바뀌었어요.
퍼: 어떻게요?
아: 처음에는 애들이 제가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야 그런 거 물어보지 마.” 그랬는데, 이제는 점점 교육자의 마인드랄까? 그런 느낌을 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퍼: 와, 하자 작업장 학교 출신이 하자 센터를 베이스로 한 사회적 기업에서 멘토로 성장한 것이군요.
아: 그 부분은 조금 우려되는 면도 있어요. 친구들이 “하자에서 배워서 하자에서 일하고 다시 하자에서 직업을 찾고, 죽을 때까지 ‘하자, 하자’ 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물어요. 처음에 변에게 맵 입사 제안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도 바로 그거예요. 우물 안 개구리.
퍼: 아호가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는 뭘까요?
아: 저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미 저를 알고 있고, 또 저와 같은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좋았어요.
퍼: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아: 한때 잠시, 내가 하자를 나와서 뭔가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을 거둔다면 사회에 대한 역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사회로부터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다면 왜 굳이 대안 학교를 왔을까 싶더라고요. 제가 지금 당장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지내보려구요. 그 상황이 지겨워지면 스스로 고립될 수 있으니까 주의해 가면서요.
퍼: 고립감을 경계하기 위한 방안을 갖고 있나요? 대안 학교가 처음 시작할 때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씨앗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호와 같은 졸업생들이 이제 사회로 나오는 시점이니 그 씨앗의 결과가 사회 속으로 어떻게 침투할까 하는 거죠?
아: 거기에 대한 열망도 있죠. 그 전에 일하던 인쇄 회사에서 약간의 자부심을 느낀 경험이 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대안 학교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거예요.
퍼: 대안 학교에 대한 어떤 이미지죠?
아: 처음에는 대안 학교를 듣도 보도 못했던 학교, 잘 사는 애들이 다니는 학교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학교”라고 일일이 설명해야 했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이렇게 내가 속한 사회 안에서 대안 학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면 나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내가 노력했던 시간이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퍼: 네
아: 좋은 학벌, 대기업 같이 사회가 요구하는 나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라 하자 작업장 학교가 저런 인재를 발굴해 내는 학교구나 그렇게 여기는 순간을 꿈꿨었어요. 그럼 재밌는 역습이겠다 생각했는데, 제가 그만한 인재는 아니더라구요. 흐흐
퍼: 흐흐
아: 우리 사회가 학연 지연으로 이루어지는 카테고리잖아요. 하자에서 하자로 되돌아온 것, 이것도 비슷한 순환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이것을 깨는 것이 과제이긴 하지만 사실 당장 내가 무얼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퍼: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아: 일단 계속 지내보려고요. 내가 이 생활이 지겹다고 느꼈을 때는 고립된 것이겠죠. 반면 내가 즐겁다면 뭔가 계속 뻗어 나가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들거든요. 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내 성격상 고립되는 것을 싫어하니까.
퍼: 음…
아: 아직까지 제가 즐거운 것을 봐선 그렇게 고립되지 않았고, 현재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하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맵이 하는 일이 좋아서 들어오신 분들이어서 그런 것들을 믿고 가게 되요.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 같아요.
대안 학교와 모범생,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이미지는 ‘아호’ 안으로 자연스럽게 모아지고 있었다. 내가 만난 하자 작업장 학교의 모범생 아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적극적으로 완성해 나가고, 끊임없이 타인과 의사소통하며 다른 의견을 기꺼이 수렴할 줄 아는 친구였다.
인터뷰 이후 나는, 대안 학교라는 우물을 아호만의 방식으로 벗어나 우리 사회에서 굳건히 뿌리 내릴 그 날,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금 더 아름다운 사회와 마주하게 될 그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 날은 내가 아호를 만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