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브리 스튜디오 옆 동네 빵집
<바람이 머무는 곳>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 바로 앞에는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빵집이 있다. ‘바람은 불어야지, 왜 머물러?’ 쉽게 이해되지 않던 가게 이름.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안전한 식재료로 만든 맛있는 빵을,
얼굴을 보며 만나는 관계에서 제공하고 싶습니다 “
커뮤니티 베이커리 ‘바람이 머무는 곳’은
일하는 것, 사회에 참여하는 것에
높은 장벽을 느끼고 있는 청년이
일을 하며 배울 수 있는 빵집입니다.
* <바람이 머무는 곳> 빵집 홈페이지 바로 가기
다른 동네 빵집과 다를바 없어 보이지만, 이 빵집의 빵은 일을 하는 것, 사회에 참여하는 것에 높은 장벽을 느끼고 있는 청년들이 만든 것이다. 이러한 청년들은 이른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니트(NEET)’**, 혹은 학교에 가지 않는 ‘부등교 청소년’이라 불리는 친구들이다.
** 니트에 관해서는 “갈 길 잃은 니트족, 출구는 어디에”<시사저널, 2010년 8월 11일> 참조. 한국과 일본의 니트의 현황을 알 수 있다. 기사 바로 가기
5년 전 도쿄에 놀러갔을 때 한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유카를 소개 받았다. 빵집 공장장 유카는 곧 오픈할 예정이라며 시범으로 만든 빵을 주섬주섬 꺼내어 시식을 권하였다. 지역 내 학교 안 가는 청소년들이나 히키코모리, 니트 친구들과 같이 빵을 만들고 있다 했다. 그때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나는 니트, 히키코모리와 같은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건네준 빵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꽤나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출판사를 그만두고 한국의 청년들의 사회적 데뷔를 돕는 청년 네트워크 센터인 희망청(www.hopenetwork.kr)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2009년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단체의 스텝들이 한국을 방문하며 희망청과 교류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그 자리에서 유카를 다시 만났다. 직접 만든 빵과 <바람이 머무는 농장>에서 농사 지은 쌀로 니트, 히키코모리 친구들과 함께 만든 술을 지참한 그녀를.
희망청 일을 하며 일본의 “일을 하는 것, 사회에 참여하는 것에 높은 장벽을 느끼는 청년들”을 많이 만났다. 그 장벽이 자기가 만든 것이든, 사회가 만든 것이든 그로 인해 그들은 현재의 삶에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에는 ‘청년 자립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돕는 센터가 마련되어 있다. 유카는 그 중 하나인 <문화 협동 네트워크>(이하, <협동 네트워크>)에서 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유카가 청년 자립 지원 활동가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일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희망청 일을 하며 ‘청년이 청년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나?’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나는 못하는 일인가 보다’라며 하루하루를 좌절하던 시기였다. 무엇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유카를 10년 동안 청년 지원 사업에 몰두하게 만든 것인지 그동안 과연 어떤 일을 해왔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즈음 2009년 스텝들의 한국 청년 기관 방문이 계기가 되어, 올해 가을 유카는 다시 은둔형 외톨이, 니트 청년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다!’ 싶었다. 바쁜 서울 연수 일정을 쪼개 유카와 마주앉을 시간을 부탁하였다.
2. 빵집 공장장 유카의 일은
방황하고 갈등하기
인터뷰는 저녁 11시부터 12시 반까지 서교동의 호텔 로비에서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할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중간 중간 통역자들이 이것저것 물어대고, 다른 스텝들은 끊임없이 내일 일정을 확인했다. 유카는 서류 뭉치와 내일 방문할 단체들에게 전할 선물을 한 가득 안고 있었다.
유카(이하 ‘유’)> 모험, 블루베리 잼이에요. 5병 부탁한 거 맞지요? 포장이 좀 벗겨졌는데 괜찮아요?
퍼슨웹(이하 ‘퍼’)> 무거웠을텐데 고마워요. 정말 다시 먹고 싶었어요. 한 병에 얼마예요?
유> 한 병에 540엔이에요.
유카에게 이번 한국 방문 길에 <바람이 머무는 곳> 빵집의 블루베리 잼을 가져다달라 부탁하였다. 함께 운영하고 있는 <바람이 머무는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블루베리로 만든 잼인데, 한번 맛 본 사람은 그 맛을 쉽게 잊기 어렵다. 빵집의 빵도 부탁하고 싶었지만, 자연효모로 만들기에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 하였다.
자연효모를 사용한다는 점이외에 빵집이 지닌 또 다른 특징은 ‘커뮤니티 베이커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파는 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먹을 만큼만 생산한다. 가끔 지역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거나 지역에 사는 아이 가운데 생일파티가 있으면 대량 생산 주문도 받는다. 일하는 청년들은 ‘빵’을 매개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한다.
퍼> 빵집은 잘 되죠?
유> 네. 잘 돼요. 근데 지금 저는 전혀 다른 분야 일을 하고 있어요. <협동 네트워크> 일이긴 하지만.
퍼> 빵집 공장장 아니에요?
유> 아니요. 지금은 도쿄 네리마 구에서 생활 보호 대상 가정을 지원하고 있어요.
퍼> 정말요? 그럼 빵집은요?
유> 빵집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 했어요.
퍼> 그렇구나… 몰랐어요. 왜 그 일로 바꾼 거예요?
유> 먼저 제가 일하고 있는 <협동 네트워크>가 구청에 제안했어요. 근데 제가 한 건 아니에요. 다른 직원이 했어요. (웃음)
퍼> 빵집은 왜 그만 뒀어요?
유> 빵집은 그만 둔 건 아니라… 잘 생각해보면 빵집은 누구나 조금 트레이닝 받으면 할 수 있는 일 같아요. 근데 지금 하는 일은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 경험도 있어야 했어요. 위탁 사업이라고 신입 직원 뽑아서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퍼> 결심하기까지 고민 안 했어요?
유> 했어요. 원래 3월까지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어요.(웃음)
퍼> 그만두고 뭐 하려고요?(웃음)
유> 한국에 오려고요. 그냥 연애하려고. 농담이에요. 한국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겨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작년에 우리 만났을 때 제가 빵집 일 하고 있었나요?
퍼> 네, 그때 빵집 일 하고 있었어요.
유> 아, 그때도 제가 빵집 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원래 처음에 빵집 만들고 정착해놓은 다음에 저는 한국 유학 갔어요.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했는데 제가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다 그만뒀어요. 그래서 어쩔수 없이 제가 계속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빵집 운영 할 스텝 찾아서 연수시키고 지금 인수인계 다 했어요.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는 빵집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겪게 된 여러 에피소드를 책으로 묶어 출판했다. 책 제목은 <바람이 머무는 곳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니트에서 일의 세계로>(風のすみかにようこそ 〜ニートから仕事の世界へ). 그 책에는 “공장장 유카의 마을 빵집을 만드는 것”이라는 유카의 에피소드도 담겨있다.
(빵집 공장장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여느 때처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료에게 들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방황도 하면서, 갈등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일을 하는 그 모습을 살아있는 교재로 모두에게 보여주면 되지 않아? 그게 정말 최고의 교재라고 생각해.”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책임질 수 없는 역할이겠지만, 스스로 일이나 일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청년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해나가면 되겠다,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실패하고 후회하는 게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해보자.
– <바람이 머무는 곳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니트에서 일의 세계로> 중에서
책을 읽기 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듣기 전, 나는 빵집 공장장 유카를 확신에 찬 활동가로 생각했었다. ‘지금 일을 찾는 데 어려워하는 청년들을 위한 작업장이 필요해! 빵집이 좋겠어!’라는 결심 이후 기꺼이 빵집 공장장의 책임을 다 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책 속 에피소드는 어떠한 사명감보다도 유카 스스로 방황하며 갈등하며 청년 자립 지원 일을 이어가고 있음을, 그러는 과정 속에서 그녀 자신이 생생한 교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3. 유카가 일본 청년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이유
퍼> 작년 <협동 네트워크> 스텝들이랑 함께 한국 시찰한 후 그랬죠. “다음에는 스텝 말고 <협동 네트워크>의 친구들이랑 오고 싶다”고. 그게 실현되었네요. 이 일을 열심히 준비한 이유가 궁금해요.
유> 제가 기본적으로 일은 목숨 걸고 해요.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만족할 때까지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협동 네트워크> 친구들과 함께 오고 싶다 계획했는데 그게 실현 안 되면 그건 내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해요.
<협동 네트워크> 친구들이랑 한국 와야겠다고 생각한 게 1년 전이죠. 여기저기 연수비 지원 받으려고 알아봤는 데 잘 안 됐어요. 그럴수록 나는 한국이랑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퍼 > 왜요?
유> 작년에 스텝들이 왔을 때, 며칠 동안 연수하면서 한국 청년들이 뭔가 하려 움직이는 걸 본 거죠. 그 움직임에서 스텝과 참여자 사이의 경계가 거의 없어 보였어요. <협동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에요. 니트나 히키코모리, 학교 안 가는 친구들이 주 멤버이고 저같은 사람들이 스텝이지만 경계가 모호해요. 제가 스텝이긴 해도 어떤 때에는 멤버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요. 그게 한국에서도 보이니까 뭔가 통하지 않을까 했어요. 한국 청년들의 파워를 <협동 네트워크>의 청년 멤버들도 느끼면 ‘우리도 뭔가 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며 주체로 일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Empower”라는 말 알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한데 그 자극을 한국의 청년 기관들 시찰하면서 발견한 거죠. 발견한 걸 어떤 형태로 만들어 낼 것인가 고민했는데, 역시 직접 서로 만나게 하는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결론이 나왔어요. 우리가 한국 다녀왔던 걸 <협동 네트워크> 청년들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직접 만나서 뭔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함께 해봐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그때는 노리단이나 하자센터에서 인턴을 해본다거나 사회적 기업의 프로그램에 참가해보는 게 어떨까 정도의 아이디어였어요.
유카가 일하고 있는 <협동 네트워크>(http://www.npobunka.net/)는 자립해 살아나가기에 곤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해 30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 시작은 동네 학원이었다.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세대들이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 학원을 차린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 가지 않거나 일명 문제아로 찍힌 친구들을 학원의 이미지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경우, <협동 네트워크> 학원에서 그들을 받아 들인 것이 청년 자립 지원 사업의 발단이다. 이 친구들이 늘어나자 학원 외에 ‘프리 스쿨’을 만들고, 그 친구들이 취업할 때가 되니 일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 빵집을 만들고 농장도 운영하게 되었다. 지금은 지역 구청이나 도쿄 도청으로부터 청년 자립 지원에 관한 사업을 위탁 받아 진행하기도 한다.
퍼> 이번 연수 준비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죠?
유> ‘스텝들이 한국 와서 느꼈던 한국 청년들의 에너지라고 할까, 모든 것들을 다 느꼈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협동 네트워크>의 청년들은 한국에 가서 청년들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는 의욕이 없으니 한국에 왔을 때에도 과연 스텝이 느꼈던 것처럼 느낄 수 있을까? 그 사이에서 발란스를 잡는 게 힘들었어요.
<협동 네트워크>에서 이번 연수에 참가하는 친구들이 의욕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제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회상해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이런 체험이나 경험 있으면 좋겠다’ 하며 의견을 냈어요. 물론 직접 현장에서 한국 청년들이랑 일본 청년들이 만났을 때 순조롭게 진행되느냐는 전혀 보장할 수 없잖아요. 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준비하고 서울로 온 거죠.
오늘 그 첫날이었어요. 근데 식사 할 때부터 딱 갈라져 있는 거예요. 일본에서 같이 온 청년들 한쪽에 앉아 있고 한국 청년들도 거기에 섞이지 못하고 한쪽에 앉아있고. “대체 어떻게 교류 하라는거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왜 그렇게 어색하게 앉아 있는지… 그건 예상한 그대로였고 ‘역시 어렵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같이 홍대 거리 걸어다니는 데도 일본에서 온 <협동 네트워크> 친구들은 ‘어디 가고 싶어요’라는 의견이 전혀 없으니까 그냥 한국 친구들이 제안하면 따라 다니고… (웃음)
퍼> 한국의 청년들과 교류하자는 연수 프로그램 자체가 스텝들이 기획한 거라 <협동 네트워크> 친구들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닐까요?
유> 물론 처음 시작은 그랬죠. 그렇지만 사전 모임에서 여기저기 가고 싶다는 의견도 나왔어요. 도서관에 가고 싶다거나 서점에 가고 싶다는 의견… 가고 싶다는 곳을 지금 생각해보니 역시 히키코모리들 같네요. (웃음)
사람들과 뭘 하고 싶다는 의견보다는 뭘 먹고 싶다든지 개인적인,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의견은 많이 나왔지만, 다 같이 만나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견은 없었어요. 원래 그런 속성임을 감안해야 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인사동 같은 관광지를 갈까 고민을 했는데,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를 누벼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홍대로 정했어요. 오늘 한국에서 참가한 친구들이 ‘히키코모리, 니트 친구들이라고 들어서 아무 말도 안하고 조용히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활발하네요’라고 했어요. 맞아요. 활발하지만 홍대에서 어색하지 않게 섞이는 데는 역시 무리였나 했어요. (웃음)
퍼> 그랬군요.(웃음). 유카는 학교 안 가는 청소년들이나 니트, 히키코모리 친구들 지원하는 일을 10년 넘게 해왔잖아요. 그 경험 살려서 이번 연수 기획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안 된다고 하는데, 혹시 평소에 <협동 네트워크>에서 일 할 때에도 그런가요?
유> 이번 한국 연수도 경험이나 배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실패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실패하고 수습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빵집 공장장 할 때에도 정말 사소한 일로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문제들을 다시 수습하고 원래 흐름대로 돌려 놓는 것도 하나의 일이잖아요.
물론 거기서 포기하고 질려버리는 친구들도 있어요. 뭔가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 때문에 안 나오는 친구들 있죠. 그래도 항상 그런 친구들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은 계속 유지돼요. 그럴 때마다 오히려 스텝들이 많이 배우지요. 어떻게 대응했어야 했는지, 어떻게 같이 일을 했어야 했는지. 근데 일이 항상 좋게만 풀리지는 않잖아요. 100% 중에서 10% 정도만 순조롭게 잘 풀려도 ‘잘 해냈다’ 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퍼> 참 긍정적이네요.
유> 전혀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왔을 뿐이에요. 전 100%면 100% 다 달성해야 직성이 풀려요. 하지만 항상 그렇게 안되잖아요. “100% 중 70% 정도만 해도 아주 잘한 거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협동 네트워크> 대표라든지 다른 나이 많은 선배 스텝들이에요. 실패해도 ‘뭐 괜찮아, 죽기야 하겠어?’ 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 그럼 뭐 이번엔 괜찮나보다’ 하는 정도예요.
4.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현장에서
앞으로의 10년을 시작하며
퍼> 지금은 무슨 일 해요?
유> 올해 <협동 네트워크>가 네리마 구에서 위탁 운영 받은 일이 있어요. 4월부터는 그 일만 해요. 생활 보호 대상 가정의 아이들, 그 중에서도 학교도 안 가고, 학교에서 문제가 좀 있거나 하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이에요. 원래 생활 보호 대상 가정에는 케이스 워커라는 공무원이 한 가정당 한 명씩 지원을 하는데, 그건 공무원이 부모랑 만나는 거잖아요. 아이들을 담당하는 케이스 워커는 없었죠. 저는 지금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이들 담당하고 있어요. 매일 네리마 구에서 자전거 타고 가정 방문하는 게 제 일이에요.
퍼> 그렇구나. 지금 하는 일은 어때요?
유> 힘들지만 재밌어요. 생활 보호 대상 가정 아이들은 잘 보면 ‘문화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어요. ‘교육적인 문화’가 전혀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거죠.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게 되요. 어떤 친구는 영어를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영어 배워서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걸 1:1로 배워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 실력은 어찌 되었건 1:1로 배우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재밌다고 좋아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런 친구에게 ‘배움’의 재미를 차근차근 알아가게 하고 있어요.
퍼> 그렇구나. ‘문화가 없는 가정’이라니 유카도 상상 못 하던 세계였겠네요. 그동안 <협동 네트워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나 빵집에서 만났던 청년들이랑은 다를 것 같아요.
유> 전혀 달라요.
퍼> <협동 네트워크>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가족이 걱정해서 <협동 네트워크>에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는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협동 네트워크>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보면 유카가 직접 그 사람들에게 찾아 가는 첫 경험이잖아요.
유> 모자 가정인 경우 엄마가 정신적인 곤란을 겪고 있어서 생활 보호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엄마가 아이 둘 가운데 첫째만 이뻐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둘째는 이혼 협상 중 임신해 낳았다며 애정을 가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둘째는 애정결핍에 걸렸어요. 이런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부모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구나 실감해요.
제가 <협동 네트워크>에서 있었을 때에는 대부분 부모가 있고, 둘 중 한 명이 돈을 벌고 한 명이 아이를 기르고 그러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협동 네트워크>에 찾아오곤 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생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어요. 지금은 경제적으로 고생하면서 교육 환경도 어려운 아이들을 매일 만나니 역시 한 명 한 명 만날 때마다 제가 상상도 못했던 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돼요. ‘아, 그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하면서요.
퍼>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유카가 10여 년 간 <협동 네트워크>에서 일하면서 만나왔던 ‘사회’가 있을텐데, 유카가 상상하던 사회 밖에서 살아오는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거네요.
유> 맞아요. 상상도 못했어요. 뭐랄까, 드라마에요.
퍼> 영화 ‘아무도 모른다’*** 처럼?
유> 맞아요. 가정방문 전에 담당 공무원이 작성해 놓은 자료를 받아요. 지금까지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이는 어떤 경위로 태어나게 됐으며 어떻게 키웠는지,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그거 읽으면 상황은 파악돼요. 그 자료 자체가 영화 시나리오에요. 엄청난 이야기가 담긴 시나리오죠.
*** 영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04) 영화소개 바로 가기
보호 대상 가정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만나는 일, <협동 네트워크>의 선배 스텝의 제안 때문에 시작하였다지만 10여 년 간 부등교 학생, 니트, 히키코모리 친구들을 지원했던 유카의 경험을 잘 살릴 수 있는 ‘딱 맞는’ 일이었다.
퍼> 아까도 <협동 네트워크> 안에서 스텝과 청년 멤버들의 경계가 없다고 했는데, 한편으로 유카도 어쩌면 <협동 네트워크>에 찾아오는 청년들처럼 윗세대 선배들의 돌봄을 받고 있는 거네요. 스텝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고나 할까?
유> 맞아요. <협동 네트워크> 대표인 사토 씨는 저를 보면서 ‘너는 당사자 입장에서 이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해요. 한편으로는 ‘아니에요!’라고 반발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하는 면도 있어요. 실은 제가 항상 완벽주의만 추구하고 그래서 실패를 두려하는데, 어떻게 보면 <협동 네트워크> 친구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퍼> 앞으로 이 일 계속 할 거예요?
유> 모르겠어요. 정말 힘든데 계속 하게 되는 거 같아요.(웃음) 아닌 경우도 많은데 조금씩 바뀌는 게 신기해요.
퍼> 누가요?
유> <협동 네트워크>에 오는 청년들이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조금씩 말하고, 일도 하게 되고, 그런 변화를 보면 보람을 느껴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유카는 다른 청년들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협동 네트워크>의 선배 직원들과 일을 하며 성장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퍼> 앞으로는 어떤 일 하고 싶어요?
유> 이번에 <협동 네트워크> 청년들이랑 한국 왔으니깐, 내년에는 여기서 만난 청년들을 <협동 네트워크>에 초대하고 싶어요. 빵집도 좋고, 농장도 좋고, 코스모(‘프리스쿨)이나 콘파스(은둔형 외톨이 청년들 지원하는 단체로 도쿄 도에서 만든 센터 위탁운영)도 좋고, 계속 교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유카는 <협동 네트워크>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가지 않는 청소년들을 위한 배움의 장인 ‘프리스쿨’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친구들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자기다움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단다.
그 친구들이 청년이 될 즈음 ‘빵집’ 작업장을 만들어 ‘자기다움을 살린 일하기 방식’을 연구했다. 아직 일을 찾지 못하고 삶의 곤란을 겪고 있는 청년들도 이 ‘빵집’을 통해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일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역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청년 실업 문제의 심각함을 느끼고 나선 일본의 중앙과 지방 정부가 행정적 지원을 시작했고 그 가운데 몇몇 사업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나아가 이번 연수를 통해 한일 청년 교류 일도 시작하였다. 대단한 언구 업적도, 취업 성공 실적도 없는 이력이지만 청년 자립 지원 활동가인 유카가 10여 년 간 걸어온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