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私見] 애매모호 제거강박증에 대하여

<인셉션>을 보고나서 어리둥절했던 이유는 이 영화가 꿈과 별로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꿈과 현실을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각자의 토템을 사용하고, 실제로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언어와 의식의 언어는 다르다. 실제 꿈에서는 이미지와 상징이 비합리적이고 상호 모순된 형태로 뒤엉켜있지만, <인셉션> 속 꿈은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인과적이라 현실과 다를 게 없다.

  꿈을 채우고 있는 것은 꽁 막힌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공중으로 붕 떴다가 툭 떨어지는 감각, 아파트 관리 아저씨가 여동생으로 둔갑하고 수건이 할아버지라고 우기는 위장술, ‘꿈에서 볼까 무서운’이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하는 현실의 잔영들, 도저히 인지구조에 통합시킬 수 없을 정도로 비논리적이라 까먹어버린 수많은 이야기들이다. 꿈은 애매모호하며 궁극적으로 불가해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불가해한 꿈의 영역을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정교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

 

  이는 비단 <인셉션>에 국한되지 않는다. <배트맨 비긴즈>(2005)는 브루스 웨인이 고양이 남자나 코끼리 남자가 아니라 왜 하필 박쥐 남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박쥐 공포증을 갖고 있던 브루스 웨인. 그는 부모님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갔다가 박쥐가 나오자 아연실색하게 되고, 공연 도중 집에 가자며 칭얼댄다. 그러나 귀갓길에 부모님이 피살되고, 그에게 박쥐는 단순한 공포 대상에서 정신적 외상을 촉발시키는 대상이 된다. 

 
  이 영화의 악당은 정신과 의사인 크레인 박사이다. 그는 환각제를 살포한 뒤 “두려움이란 (외부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며 억압되었던 개인의 트라우마를 들춰내고, 영화 내내 배트맨의 박쥐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우여곡절 끝에 배트맨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상처는 봉합되며 아버지의 성은 재건된다. 즉, 이 영화는 현재 드러나고 있는 증상 또는 무의식적인 행동과 유년기의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연결하여 과거와 인과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병리를 치유한다는 서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즘 흔하디흔한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라는 거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오는 출연자들은 유년기에 엄마가 스킨십을 자주 해주지 않아 친밀감을 두려워하거나 친밀감에 집착하게 되고, 워커홀릭이 되거나 홈리스가 되며, 글래머를 선호하거나 기피하게 된다. 또한 정남규는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하고 열 살에 성인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유영철은 아버지가 술과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 정두영은 두 차례나 친모에게 버림을 받고 고아원에서 살아서, 김길태는 길에서 태어나 이름이 ‘길태’라는 슬픈 사연이 있어서 연쇄 살인범이 된다.


누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과거와 현재 / 상처와 병리의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접할 때면 배트맨 시리즈 사상 가장 사랑받았던 두 악당들, 펭귄맨과 조커가 생각난다.

 

  <배트맨 리턴즈>(팀 버튼, 1992)의 대표 악당인 펭귄맨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기괴한 생김새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져 하수구의 펭귄들에게 키워진다. 즉, ‘모세의 괴물(freak) 버전’ 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으나 치유하지 못 한다.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자아실현) 내러티브의 추진력은 고통의 기억을 환기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명령”(<감정 자본주의>)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펭귄맨은 고통의 기억을 떠올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수백 마리의 펭귄들과 함께 기꺼이 고통 속에 머무른다. 영원한 희생자, 슬프게 발악하는 자인 그는 상처를 봉합함으로써 은폐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세상이 자신에게 가한 짓을 환기시킨다.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는 한발 더 나아가 매번 자신의 입이 찢어진 이유에 대해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가 조롱하듯 자신의 트라우마를 읊어댈 때마다, 나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연과 징후’라는 줄거리의 허술함과 완고함을 본다. “엄마가 그래서, 아빠가 그래서(사실 이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가슴에 품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그리하여 안도하고 싶다는 소망은 절실하다. 하지만 절실함이 곧 진실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말한다. “정신분석이 개인 실존의 고통스러운 비밀들을 의례적인 진부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브루스 웨인이, 조커가, 펭귄맨이 왜 지금 현재의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인지. 그러므로 차라리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보다는 <누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가 나으리라. 불가해함을 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가 실은 잠정적인 가설이자, 수많은 판본 중의 하나이자, 오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숨구멍

 

  <다크 나이트> 역시 조커가 혼돈을 지나치게 고안한다는 점에서 <인셉션>과 비슷한 답답증을 불러일으킨다. 조커가 야기하는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는 계획과 통제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창조하기 위해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기획하고, 그의 하수인이었던 정신분열병 환자들에게 광기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가 나도 빛이 된다고 했어요”라고 말한다). 

 
  매끈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혼돈, 무의미에 부여된 의미. 오히려 조커에게는 이렇게 말장난 같은 구석이 있었기에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가 분한 ‘꿈 설계자’와 유사한 ‘카오스 설계자’에 가까워 보일 정도이다. 그에게는 자유로운 보헤미안룩을 완성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장신구와 의상을 고르는 것과 같은 부조화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화를 향한 치밀한 설계’야말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는 모티프인 것이다.

 

  오히려 혼돈과 어울리는 인물은 영화 <도쿄!>(2008)의 드니 라방이다. 그는 맨홀에서 튀어나와 꽃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아무렇게나 폭탄을 던지고 다닌다. 그를 보고 있으면 똥과 오줌으로 가라앉은, 두꺼운 겨울옷을 세 겹은 껴입고 절룩이며 돌아다니는 행려병자들이 생각난다. 그들의 중얼거림, 문장과 문장이 호응하지 않을 때의 기괴함, 동문서답, 지리멸렬, 헛소리들. 그들의 말과 행위 앞에 섰을 때, 선명하게 느껴지는 공포는 결국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 코브의 토템인 팽이는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로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 위태로운 움직임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트러질 때의 불안이 아니라, 꿈마저도 현실과 똑같이 만들어버리려는 태도에 대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시대. ‘그냥’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아니 심지어 존재의 이유를 대라는 요구 앞에서 변명하지 않기 위해서, 솔직하게 침묵하기 위해서, 개꿈이라고 호방하게 선언하기 위해서 나는 꿈을 꾼다. 꿈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빙산의 일각(의식)이 물 위로 튀어나오는 시간이 아니라, 네스호에 사는 미지의 괴물 ‘네시’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고개를 빠끔히 내미는 시간이다. 숨구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