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TV를 아니 단지 몽상을 무심코 창밖을 아니 그냥 단지 옛일을 서서히 드리우는 시간 속에 어김없이 열대야는 찾아왔네 _ 문샤이너스 <열대야>*
술과 담배 그리고 선풍기로 열대야를 지새우던 중, 차승우(이하 차차)를 만났다. 목소리만큼이나 파란 셔츠를 입고 나타난 차차는 두 시간 동안 많은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낸 후 라디오 녹음이 있다며 마시던 맥주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열대야가 한참 지난 오늘에서야 그가 한 말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로큰롤이 음악의 한 장르에 국한된 건 아니예요. 8비트의 드럼비트가 들어가고, 기타 달려줘야 로큰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밥 말리의 노래를 들어도 배호 아저씨의 노래를 들어도 제가 느낄 때 로큰롤이면 그건 로큰롤인 거죠. 삶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해서는 안될 짓을 안하는 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것. 그게 로큰롤이죠. 어떤 카테고리를 정해 놓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로큰롤이 하나의 관념체계라고 생각해요. 저만의 모럴을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로큰롤이예요.”
INTRO 꼬마 차차, 로큰롤을 만나다
나는 그냥 로큰롤의 야만인이 되겠어요 나는 그저 쉬운 것이 좋을 뿐이죠 나는 그냥 로큰롤의 야만인이 되겠어요 나는 그저 재밌는 게 좋을 뿐이죠 _ 문샤이너스 <로큰롤 야만인>
스스로를 ‘로큰롤 야만인’이라 말하는 차차. 자신이 생각하는 로큰롤에 대해 진지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수많은 음악 중 왜 로큰롤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네 살 위 누나가 두란두란을 좋아하고 ‘왬, 아하, 재팬’을 듣길래 따라 듣다 우연히 당시 유행하던 CM송 모음 테이프에서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를 들었죠. 당시 그 노래가 상일가구 광고에 나왔어요. 그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엄청난 희열을 느낀 거죠. 닭살이 막 돋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계속 찾았죠. 중독이 된 거죠. 꼬맹이가 꼬부랑 말을 들으면서 뭘 알았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제 온몸으로 받은 거 같아요. 당시 친구들이 ‘뉴 키즈 온 더 블록’ 한창 들을 때, 저는 60년대의 ‘롤링스톤즈’, ‘야드버즈’, ‘지미핸드릭스’ 들으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집에 있던 빗자루 들고 거울 앞에서 ‘긱’을 하기도 하고, 고 1 때쯤 자연스럽게 전자기타를 잡게 되었죠.”
어릴 때 테트리스를 좋아했던 아이들이 자라서 모두 오락실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는 차차는, 테트리스를 좋아하는 수많은 아이들 틈에서 오락실 주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듣게 된 5분 남짓한 노래가 안겨준 엄청난 희열이 차차를 로큰롤과 함께 살게 한 것이다.
“로큰롤의 매력은 쉽고 재미있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감히 제가 악기를 잡았겠죠. 그 당시 테크니컬한 헤비메탈이 한창 인기가 있었어요. 그러다 시에틀사운드라 하는 얼터너티브사운드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록의 판도가 일순 바뀌었어요. 70년대 핑크플로이드나 레드제플린이 활약하던 시기에 갑자기 섹스피스톨즈가 나와서 전세가 역전된 것과 비슷하죠. 코드 세 개만 알면 노래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던 시기였어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할머님께서 사주신 전자기타로 펑크음악을 시작한 거죠.”
차차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음악을 하셨다. 아마도 그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음악을 업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차차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반대하셨다 한다.
“회현동이나 지금은 없어진 상아레코드에서 음반을 구해 들었어요. 공부는 거의 전교에서 꼴지 수준이었는데 목표가 하나 생기니까 올인을 했죠. 저희 아버지께서 앨비스풍의 발라드 음악을 하셔서 옛날 음악을 많이 접할 수 있었죠. 그 영향도 있을 거예요. 대중적으로는 큰 아버님(차중락)이 더 유명하세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셨고 ‘키보이스’의 멤버이기도 하셨어요.”
열다섯 꼬맹이의 전부는 막연한 기대에 상기된 표정과 별다른 까닭 없이 두근대는 가슴 10여 년 전의 그곳으로 전축이 놓여진 방 한켠에는 낙원으로 가는 문이 있었어 마음껏 행복했어 잘은 모르지만 단 몇 분 만에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어 _ 문샤이너스 <The Wonder Years>
“처음 악기를 잡았을 때는 반대를 많이 하셨죠. 그 세계에 대해서 잘 아시니까. 제가 중학교 때 노는 형들이랑 어울려서 가출도 하고, 파출소도 가니까 음악하는 걸 내버려두시더라고요. 그래서 진로나 미래에 대한 고민 없이 그쪽으로 정하고 청소년기를 지나왔어요.
작곡은 고3 때부터 했어요. 그냥 표절이었죠. 음악을 작업으로 하는 사람은 절대 표절하면 안 되죠.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들었던 음악에서 무언가를 가져온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거예요, 어떻게 재조합 하느냐, 어떻게 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겠죠. 비틀즈 음악을 들어도 비틀즈가 들었던 음악들이 다 나오거든요, 코드 진행도 결국엔 전 세대 파이어니어들의 음악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재조합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거든요.”
음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차차는 노브레인이라는 밴드에서 꽤 유명짜하게 활동을 하다 유학길에 오른다.
“도피였어요. 노브레인은 청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했던 밴드였는데 밴드를 나오니까 되게 허무하고 공허해지더니 삶의 무게가 밀려오더라고요. ‘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돼, 나 이제 어떻게 살아.’ 밴드 나와서 모든 의지를 잃은 상황이었죠. 한 삼개월 정도를 집에서 플레이스테이션만 했어요. 턱수염 이렇게 길어서. 엄마는 방문 열어보고 ‘쌀이 아깝다’ 이러고 나가시고, 컵라면은 쌓여 있고.”
교차로에 어둠이 내려 문득 나를 사로잡아 버렸네 이윽고 내게 다가오네 어느덧 그는 내 앞에 서 있네 검은 벨벳으로 짜인 망토를 걸친 이제 나는 깨달아야 하네 _ 문샤이너스 <검은 망토의 사내>
“노브레인 때 모은 돈이랑 앨범 인세 합쳐서 ‘나 도망가야지’ 그래서 일본으로 간 거거든요. 명목은 유학이었어요. 음악학교에 들어갔죠. 한국의 전문대 같은 건데. 학교는 그냥저냥 비자 기간 유지해야 되니까 출석만 하고. 그래도 성적은 좋았죠.(웃음)”
시모키타자와에 살면서 시부야, 하라주꾸, 나까메구로, 다이칸야마를 전전하며 돈 낭비를 했다는 차차에게 어느 날. 밴드 제의가 들어왔다.
“레트로 스타일의 옷만 파는 옷가게가 있었거든요. 그때 제가 50년대에 앨비스 스타일(엘비스 특유의 머리스타일을 허공에 그려 만들며)에 꽂혀 있었어요. 셔츠를 산 후 계산을 하는데, 점원도 저랑 똑같은 머리스타일이더라고요. 취미가 같은 거 같아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제게 음악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거예요, 대뜸.
한국에서 밴드하다 왔고 기타리스트라고 했죠. 자기가 아는 밴드가 지금 놀고 있는데 인디씬에서 한 십 년 활동한 밴드라며 기타리스트 오디션을 받아보겠냐고 묻더라고요. 그 밴드 데모 테이프에 든 노래가 좋았어요. 그래서 밴드를 또 하게 됐죠. 한 2년 했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밴드의 프론트맨이었는데, 이번에는 밴드의 완전 막내로 리더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치라면 이렇게, 저렇게 치라면 저렇게 하는 과정도, 타국 사람들이랑 혼연일체가 된 경험도 다 재미있었어요.”
도망치다시피 오른 유학길에서 낯선 사람들과 밴드를 결성한 차차. 차차에게 유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히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그가 타국생활을 하며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전까지는 그냥 본능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술 먹고 그냥 내키는대로 하는 거죠. 3년간 타국생활을 하며 환경이 바뀌다보니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고, 망상 내지 공상을 할 시간이 많아 큰 폭으로 정리가 되며 제 나름의 교범이 생긴 거 같아요. 유학을 갔다와서 제 나름대로 체계가 생긴 셈인데, 호재인지 악재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1. 차차, ‘문샤이너스’의 기타리스트가 되다
차차와 인터뷰 일정을 잡기 전, 나에게는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이라는 중대한 여름휴가 계획이 있었다. 엄마와 친구들은 ‘더운데 그런 델 왜?’라며 타박했다. 그러나 나는 꾸역꾸역 짐을 싸서 잔디밭에 누워 낮술에 음악을 안주 삼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상 낙원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멤버들끼리 새하얀 ‘마이’(재킷이라는 표준어가 있긴 하지만 그들이 입은 하얀 재킷은 꼭 ‘마이’라고 불러줘야만 할 것 같다.)를 맞춰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을 하는 차차를 보았다.
“이미 공연 전에는 중취상태였고요. 덥고, 정신 없는 상태여서 술 계속 먹었어요. 공연 끝나니까 좀 확 가더라고요. 그래서 (멤버들끼리) 공연 좀 보고 가자 그랬죠.”
언제부턴가 문샤이너스는 비틀즈 느낌의 의상을 맞춰입고 무대에 나타났다. 로큰롤을 하는 이들이 움직이기에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공연을 하는 건 좀 의외였다.
“(지산에서) 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얇은 기지로 했었어야 했는데 실패였죠. 유니폼이나 단정한 수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밴드의 일체감을 고취시켜보자’는 목적이 있었고요. 사실은 비틀즈를 위시한 밴드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예요. 또 ‘광폭하게 연주를 하는데 도시적인 감각의 홀쭉이 양복을 입고 있으면 얼마나 깔끔하고 멋있을까’ 그런 생각도 있었어요.”
“저희는 양복을 입은 미치광이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갤럭시 익스프레스처럼 무대에서 라이더 재킷을 입은 미치광이랑 양복을 입은 미치광이는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양복을 입은 미치광이 쪽이 더 좋고. 이면과 표면의 이미지가 충돌할 때 생기는 매력이 좋아요.”
홀쭉이 양복이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문샤이너스다. 설마 의상 컨셉을 예견해 양복빨 잘 받는 사람들끼리 모여 밴드를 만든 것은 아닐텐데.
“저희는 홍대 음악계의 낭인 같은 존재였어요. 몇 년씩 장기간 활동을 하다 밴드가 해체되거나 거기서 나온 사람들이 움막을 형성한 건데. 저는 ‘노브레인’에서 기타를 쳤었고, 송경호 씨는 ‘원더버드’와 ‘3호선 버터플라이’에서 드럼을 쳤고, 백준명 군은 ‘게토밤즈’라는 펑크밴드에서 활동을 했죠.
처음엔 저하고 베이스 최창우 씨, 드럼 송경호 씨, 셋이었는데. 제가 기타치면서 노래 부르는 게 힘들더라고요. 여백이 많아지고 노래 부를 때는 뭘 못하겠고.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게 많은데 구현되는 퍼센티지는 얼마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놀고 있는 백준명 군에게 몇 번만 도와달라 회유하다가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제가 “오늘부로 정식 기타리스트가 된 백준명 군!” 그래 버렸죠. 그때부터 빼도박도 못하게 된 거죠.”
문샤이너스 1집 앨범에는 30곡이 CD 두 장에 나뉘어 빼곡히 담겨 있다. 음반 하나에 남들 몇 배나 되는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이다.
“‘모험광백서***’라는 노래는 샤워하다가 만든 곡이예요. “다다다 다다다 다다다” 제가 휘파람을 불고 있더라고요. 머리 쥐어 뜯으면서 ‘이 부분이 또 막히네’하는 곡는 십중팔구 거지같더라고요. 자연스럽지가 못해요. 좋은 곡은 뼈대를 가지고 가서 합주 한 번 해보면 결판이 나요. 멤버들의 화학반응이 달라요. 폭발적인 연주가 되는 거지. 그게 로큰롤인데 그렇지 않은 곡은 버려야 해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만은, 그래도 열 손가락이 모두 똑같은 강도로 아픈 건 아니다. 문샤이너스에게도 더 애착이 가는 노래가 있지 않을까?
“글쎄요. 노래 하나하나가 나름의 진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제 얘기를 할 수 있는 창구가 넓지 않고, 노래를 통해서 제 얘기를 하는 건데. 제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차차가 말하는 ‘자신의 진심이 설득력 있게 다가간다’는 것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인가.
“그러고 싶어요. 제 나름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자체가 사람들한테 온전히 받아들여지면 좋겠어요. 그만큼 매력 있는 무언가가 탄생되야 되겠죠, “나는 인디뮤지션이 되고 싶어” 라며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희더러 인디록, 인디뮤지션이라 하는데, 락이면 락이고 로큰롤이면 로큰롤이고 가요면 가요지 인디는 뭔지. 왠지 인디라고 그러면 되게 칙칙하잖아요. 지하실에서 라면 먹으면서 악보랑 싸우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고. 저는 그런 거 싫거든요. 저는 무조건 번쩍번쩍한 게 좋아요.”
“저는 번쩍번쩍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로큰롤이 번쩍번쩍하게 보였기 때문에 매력을 느낀 건데. 제가 비틀즈의 음악을 처음 듣고 인생이 고무된 것처럼.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거예요. 골자는 그거예요.”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고 그댄 내게 얘기하지 그대가 말하는 세상엔 애당초 난 흥미가 없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 걸 내가 틀림이 없다는 걸 어느샌가 알게 될 걸 내가 번쩍번쩍할 거란 걸 _ 문샤이너스 <모험광백서>
문샤이너스를 오랫동안 지켜본 어떤 이는 말한다. “처음에 날 것의 이미지라든가 신나는 무대가 좋았다. 갈수록 연주는 훌륭해지지만, 홀쭉이 양복을 차려 입고 댄대해진 이후 어느 지점에서 딱 멈춰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나름대로 원한 그림이었어요. 댄디해지고 싶었으니까. 근데 여기까지 했으면 됐다, 더 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똑같은 거 계속하다 보니까 관성화된 거 같예요. 각자 바빠지면서 연습이 많이 줄었요. 앨범을 두 장으로 낸 건 나름 무리수로를 둔 건데 여파가 컸어요. 일 년 정도는 밴드끼리 만나도 별 말 없었어요. 요즘 다시 문샤이너스 밴드 초기의 기분도 조금씩 느껴요. 슬럼프 타계가 지금의 목표죠. 뻔한 스토리대로 가는 건 재미도 없고 여기에서 안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고요. 지금은 아직 반에 반도 못 왔다고 봐요.”
#2. 차차, <고고70>의 ‘만식’이 되다
차차의 팬 중에는 영화 <고고70>****을 보고 그를 처음 알게 됐다는 이들도 있다. 차차는 이 영화를 통해 2009년 춘사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을 거머쥐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 좀 부끄러웠어요. 제가 뭐 그렇게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도 아닌데. 시상식장 분위기도 좀 뻘쭘하더라고요. 다 턱시도 입고 왔는데 저는 청바지 입고 와서 ‘뭐냐 이거’ 그러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배우로 얘기가 된 건 아니었어요. <고고70>이 70년대 우리나라 음악씬을 배경으로 삼고 있잖아요. 제가 신중현 씨 음악, 히식스 등 70년대 그룹사운드 음악을 상당히 좋아해요. 지인의 소개로 <고고70>에 음악적으로 조언을 해주려고 대표님과 둘이 만났는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더니 “배우로 등장을 하지 않겠느냐. 뮤지션이 해줬으면 좋겠는 역할이 있다.” 해서 “하겠습니다.” 했는데 그게 커져가지고 만식이 역할이 되버린 거죠. 처음엔 그렇게 비중이 크지 않았어요.”
<고고70>의 만식은 차차가 맡은 배역이라기보다 차차 그 자체의 느낌이 더 강할 정도로 리얼하게 와 닿았다.
“감독님이랑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음악영화라서 술먹으면서 나눈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영화에 반영이 되더라고요. 그러니 그냥 몰입이 되더라고요. 저는 연기에 ‘연’자를 모르는 인간인데 제가 아는 게 나오니까 그런 감정에 젖기도 수월했었던 거고요. 사실 전 연기를 한 게 아니에요.”
일각에서는 조승우보다 차차가 낫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에이, 그건 아니고. 조승우 씨는 저를 계속 자극하더라고요. 제가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저를 흥분시켜요. 멱살을 잡을 때도 피멍이 들 정도로 잡고. 그럼 저는 “야!” 막 이렇게 되잖아요. 리액션이 자연스럽게 되는 거죠. 조승우 씨가 계속 유도해주니까 ‘이 친구가 괜히 프로가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죠, 덕분에 흥분해서 찍다보니까 한씬 지나가고 ‘이렇게 영화 찍는가 보다’ 했죠.”
“영화는 그냥 즐거웠던 추억이죠. 제 음악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색다른 경험이었죠. 만식이었기 때문에 제가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거죠. 배우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다면 제가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영화 찍으면서 한 1년은 음악을 못해서 리듬을 좀 잃은 것도 있어요, 영화 끝나고 정신 없는 상태에서 문샤이너스 1집을 내서 만족도가 조금 떨어지는 면도 있죠.”
#3. 차차,
<로큰롤 스타>의 칼럼니스트가 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써 본 적이 있으신지. 불행히도 나는 없다. 좋아하는 것은 많지만 그것에 대해 글을 쓰려면 이상하게 생각이 정리되질 않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으며, 오 분 전에 먹다 남긴 과자가 생각나 당장이라도 냉장고로 달려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을 온전한 형태로 내놓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차차가 요즘 용기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예스24>에서 로큰롤 스타들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 칼럼의 퀄리티가 상당히 높다는 것.
“너무 힘들어요. 자료의 힘을 많이 얻죠. 버디 홀리부터 비틀즈까지 썼는데 한국 웹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 웹도 뒤지고 저의 주관적 견해까지 섞어야 하니 정신이 없더라고요. 원고 한 번 쓰는 데 이틀에서 한 사흘 잡아먹으니까. 잠도 잘 못 자고. 그런데 써 놓고 나면 재밌어요. ‘내가 이런 걸 썼다니…’ 싶기도 하고.”
읽어 볼수록 차차 글 참 잘 쓴다. 갑자기 하늘에서 툭, 글 쓰는 재능이 떨어졌다면 나같은 사람은 억울할 노릇이다.
“제가 가사를 쓰잖아요. 근데 가사는 짧은 문장 안에 함축적으로 뭔가를 내포해야 되지만 칼럼은 풀어서 서술하는 거라 가사랑 다르고 더 힘들죠. 가끔 패션지에 글을 쓴 적은 있어요. 조그맣게 ‘데님이 입기 힘든 이유’ 같은 거. (웃음) 음악에 대한 저의 지론을 중심으로 잡지에 기고한 적은 없죠.”
“책 읽는 거 좋아하죠. 요새 많이 못 읽고 있는데 책 선물도 많이 받고. 분야에 상관없이 좋으면 그냥 읽어요.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좋아해요. 물론 쓰레기 같은 거지만 책 자체는 재밌으니까. 알퐁스 도데의 소설 <꼬마 철학자>은 제일 좋아하는 책이죠. 수십 번은 읽은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처음 접한 소설이었는데 지금도 그걸 읽으면 어렸을 때 기억이 소환되면서 좀 아련해지는 기분도 있어요.”
“영화도 장르에 상관없이 <첨밀밀> 같은 최루성 멜로도 좋고 <로키호러픽쳐쇼> 같은 B급 호러도 좋아해요. 쿠로사와 아키라 영화도 좋아하고. <요진보> 완전 좋고. 아 저희 노래 중에 <Rosemary`s Baby>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악마의 시>를 보고 만든 거예요.”
오리보트를 타고서 우주로 가네 나 홀로 남겨진 지구의 외로움이 밤이나 낮이나 가려진 시간들 나는 권총을 들고서 일어서네 _ 문샤이너스 <오리보트>
#4. 차차, <뮤직 아지트>의 DJ가 되다
<차승우의 뮤직 아지트>(이하 뮤직 아지트)******는 매일 자정부터 두 시간 동안 경인방송에서 들을 수 있다. 경인 지역 분들은 라디오 청취가 가능하고 그 외 지역 분들은 경인방송 홈페이지를 통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보이는 라디오 시스템이라 그날 차차의 컨디션뿐만 아니라 음악이 흐르는 동안 게스트와 DJ의 어색한 순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프로그램 시작하기 일 년 전부터 얘기는 있었어요. 원래 안병진 PD님이 음악을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프로그램에 구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대단하셨거든요. 기회가 없다가 개편을 계기로 확 꽂아 넣은 거죠.”
“제가 마이크나 카메라 울렁증이 되게 심하거든요. 처음에는 “나 못하겠다. 다른 사람 시켜라” 그랬죠. 저희 레이블(루비살롱) 사장님이 저를 회유하셨는데, “이런 것도 해야 성공하는 거야!” (혼잣말로) 성공은 무슨. (웃음)
막상 시작하니 재밌어요. 피디님이랑 저랑 반반의 주도권을 가지고 곡의 컨셉을 잡아요. 마니악한 음악들, 가령 60년대 음악하면 브리티시인베이전, 비틀즈나 롤링스톤즈 말고도 게러지 밴드라고 음악 꽤나 듣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보석 같은 음악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발굴해서 공개하는 맛이 있어요.”
타락한 도시 네온의 성으로 술취해 걷네 난 한밤의 히치하이커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네 마을로부터 고작 몇 마일 술취해 걷네 난 밤의 히치하이커 지긋지긋한 저 마을을 떠나네 _ 문샤이너스 <한밤의 히치하이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수많은 음악을 청취자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것을 프로그램의 매력으로 꼽는 차차. 다른 방송에서 틀지 않았을 법한 음악을 들려주는 PD와 DJ.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컨셉이다.
“주류나 비주류에 관계없이 다양한 것을 틀어보자. 국내 인디밴드도 많이 틀어보자는 포멧으로 시작을 했죠. 요즘 지상파 라디오 프로그램은 팝음악을 틀어주는 데도 거의 없어요. ‘틈새시장을 노려보자’ 그런 거였죠.”
컨셉, 마음에 든다. <뮤직 아지트>의 매력에 빠진 나는, 직장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심야 시간대의 ‘뮤직 아지트’를 종종 듣는다. 마이크 울렁증이 있다더니 말만 잘한다, 차차.
“처음에 DJ를 하라고 했을 때 손사레를 치다가 하겠다고 한 이유가 있어요. 무대에 서는 퍼포머인데 마이크나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해야 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트레이닝 찬스가 아니겠는가 싶어 그냥 부딪쳐보기로 한 거죠. 아직까지 진행이 원활하진 않은데 나름대로 적응해가고 있는 단계예요.”
“청취자의 반응은, 글쎄요. 정확한 통계는 제가 알 도리가 없는 거고. 일단 반응은 좋은 것 같은데요. 기존의 문샤이너스 팬분들이 문자 사연이라든지 여세를 몰아주고 계시는 분위기가 있고요. 가끔 원래 경인방송 청취하시던 분들도 사연을 주세요. ‘오늘 처음 들었는데 재밌네요’라고 말해주시는 분들도 있고. 제가 발음이 좀 새는데 이런 게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도 있어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해요.”
라디오 프로그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시작해서 같은 시간에 끝나는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다.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아 여기가 내 일터구나.’ 소속감도 느껴지고,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국에 가서 부스에 앉아 ‘음, 오늘도 시작해볼까’ 이런 생각도 하고 재밌어요.”
웁스! 정시 출퇴근이 재밌다니. 더욱이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음주가무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시간대에 일을 해야하는데 술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금토일(녹음 방송이 나가는 날)에 죽는 거죠, 뭐”라고 쿨하게 답한다. <뮤직 아지트>가 문을 연 지 이제 한달이다. 그만의 긍정적이고 쿨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게스트나 코너가 있을 법 한데.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가 코너를 하나 맡고 있어요. 음악계의 뒷담화를 얘기해요. 게스트는 좀 신경을 쓰고 있어요. 처음에 크라잉넛 초대했었고 언니네이발관 이석원 씨 초대했었어요. 하고 싶은 코너는 되게 많아요. 제가 칼럼을 쓰고 있으니까 PD님이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특정 아티스트를 선정해서 특집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고. 예를 들어 신중현 사단에 대해서만 하루나 이틀 동안 얘기하는 거죠. 여러 가지 썰을 풀면서 음악을 틀 수도 있는 거고. 영화음악 특집을 해도 재밌을 거 같아요. 키워드는 정하기 나름이니까.”
개인적으로 아티스트 특집은 꼭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고 싶은 코너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은 차차가 개인적으로 <뮤직 아지트>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가 좀 원활해지는 거요. 좀 능수능란하게 진행했으면 해요. 공연할 때 무대에서 거의 말을 안하고 낯을 좀 가리는데, 부딪쳐서 약간 떠벌이처럼 되면 좋겠어요.”
“청취자들이 다른 라디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고집스럽지만 그래도 약간 쿨한 맛이 있네.’, ‘여기서는 이런 노래도 나오는구나.’, ‘이런 노래도 재밌는데’ 좋은 음악은 누가 들어도 좋은 거잖아요.”
OUTRO. 로큰롤, 차차라는 행성에 불시착하다
차차는 한때 알코올 중독 직전까지 간 적도 있으며, 하나씩 새긴 문신이 어느덧 열두 개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이젠 됐다’고 생각한 순간 그만두었다 했다. 인터뷰 내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차차의 균형감. 지금의 차차를 있게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외할머니” 라고 답한다.
“할머니가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처음에 전자기타 사주신 것도 할머니죠. 청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갈 때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저의 8할은 할머니한테 받은 그 무언가라고 생각을 하고요.”
“먹여주시고 씻겨주시고 입혀주시고 사랑해주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되게 가엾게 여긴 거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제가 세 살 때 이혼을 하신 거예요. 그 다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우셨어요. 할머니는 제게 음악도 주셨고 제가 자유롭게 생각을 하고 행할 수 있게 그냥 방치해두셨어요.
제가 기타치는 거 되게 좋아하셔서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계시다가 제가 치지도 못하는 거 “띵띵띵띵” 거리고 있으면 할머니가 “아이구 잘한다” 이러셨거든요. 저는 그 잘한다는 소리가 너무 좋아가지고요. 지금도 누군가 나한테 잘한다고 해주면 너무 좋고 ‘아, 내가 살아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렇게 자라날 수 있었던 거는 할머니가 저를 그렇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이예요. 제가 되게 낙천적인 사람인데. 그것도 할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인 거 같고.”
그리운 할머니의 음성과 함께 흩날린 순간들 아득히 멀어져 가네 돌아올 수 없는 나의 모래궁전이여 작별을 고하네 돌아오지 않는 나의 오색풍선이여 어깨를 밟고 선 유령들이 이젠 어른이 되어라 말하네 _ 문샤이너스 <AM 05:30>
낙천적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차차라지만 음악이 싫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다 때려치우고 다른 걸 하고 싶을 때라든지.
“(음악이 싫을 때) 있죠, 그런데 부딪쳐 나가야죠. 관성을 극복하는 길은 그 과정 안에 있는 거 같아요. 아마 저 말고도 다른 음악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교과서적인 답을 하는 차차지만 왠지 꼰대같지 않다. 그 과정을 몸소 겪고 있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정직함이 보였기 때문일까? 차차에게 음악은 도대체 무엇일까?
“삶의 방편이 될 수도 있고 여가가 될 수도 있죠. 하나의 관념 체계라고 생각을 해요. 단 몇 분만에 한사람의 인생을 고무시킬 수 있는 건데요. 저는 그 자체가 혁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설득력을 얻었을 때는 혁명가가 될 수 있겠죠.”
“음악을 듣고 저 같은 열등생도 뭔가 벅찬 감정에서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해요. 무조건 행복해져야 되요. 슬픈 노래라도 우울한 노래라도 이걸 듣고 무언가 방편이 될 수 있는, 보고가 될 수 있는 그런 작용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행복이라는 말인가. 사실 난 행복 따위 믿지 않는데.
“포기하지 마세요. 힘든 건 힘든 거 자체로 받아들이고, 부딪쳐서 뚫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귀찮은 것도 하게 되어 있고 결국엔 그런 걸 이겨낸 사람만이 무언가 일궈내는 사람들인 거죠.”
“저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 죽지 말아야지.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항상 생각을 하면 필사적으로 살 거 아니에요. 지금 일분일초가 너무 아깝겠죠.”
홀로 망루에 올라 안개가 뒤덮인 세상을 보네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언젠가 불어올 바람을 기다릴 거야 비루한 역사에 작별을 적어도 홈런을 날릴 거야 더 이상 숨지는 않을 거야 나는 사내아이니까 _ 문샤이너스 <Woo hoo hoo>
인터뷰는 점점 끝나가고 우리는 점점 취해간다. 흔해빠진 질문이지만 꼭 묻고 싶은 질문. 앞으로 어떤 사람 혹은 뮤지션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것.
“그런 건 없어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형 노래 듣고 제가 밴드 만들었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을 땐데요. 기타치면서 앨범도 냈다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는 이루었지만 제가 계속 부딪치면서 진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좋은 노래를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좀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차차는 아이로 살고 싶다 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차차는 이미 어른 중에서도 상 어른이었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저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것만 할 거예요. 그런 사람이 없다면 제가 그런 사람이 될 거예요. 이제 모험광으로 살아보려고요. 어드벤처 영화의 공식이 있잖아요. 악당들 만나서 어려움에 부딪치고 중간에 이쁜 아가씨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사기꾼도 만나다가 결국에는 “찾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뮤지션, 배우, 칼럼니스트, DJ 같은 타이틀 떼고 보통인간 차승우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
“너무 멋이 없어서 이런 얘기는 하기 싫은데 제게 음악은 삶 그 자체겠죠. 저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음악가’라는 어감 자체가 거창하기도 할뿐더러 콩나물 대가리랑 친하지도 않고. 저는 그냥 로큰롤 그 자체로 남고 싶어요. 그냥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로큰롤 야만인.”
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로큰롤 야만인이 되려고 하지요 좌우로 충돌하는 소음 속에 결국 마음 속의 눈을 뜨게 되지요 골치 아픈 사연은 접어두고 이 거대한 소음 속에 빠져들어요 _ 문샤이너스 <로큰롤 야만인>
이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밤마다 노트를 빼곡히 채워가며 글 쓰는 꿈을 키워왔던 나는 여차저차하여 글 쓰는 전공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글을 못 쓴다는 것을.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무언가 쓰고 싶을 때면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제 나는 다시 글이 쓰고 싶다. 못 써도 괜찮다.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우연히 찾아온 인터뷰를 통해 차차를 만나 그것을 정리해낸다면 다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로큰롤을 통해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차차에게서 한 조각의 희망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은 우주에 떠도는 작고 작은 존재라고들 한다. 그런데 내가 만난 차차는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는 말을 통해 글을 통해 로큰롤을 통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잠시 동안 나는 ‘차차’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라이카처럼 느껴졌다. 자신만의 색으로 로큰롤을 울려대며 영원히 반짝이고 있을 것 같은 행성을 만나 반가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