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

1965년 홋카이도에서 출생한 나가오카 겐메이는 1990년 일본디자인센터에 입사, 1991년에 하라 켄야와 함께 일본디자인센터 하라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1997년에는 일본디자인센터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무실 DRAWING AND MANUAL을 열었다. 여기까지, 그의 이력은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성장과 변화와 별다르지 않다. 이 다음 대개의 디자이너들의 경력은 성공한 오너가 되거나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거나, 아니면 사라진다. 그런데 겐메이는 리싸이클링 제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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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디자인을 말한다.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 사회를 바꾸는 디자인과 생활을 바꾸는 디자인, 사람을 바꾸는 디자인과 환경을 바꾸는 디자인 등등등, 누구나 디자인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이 넘친다. 본래 ‘디자인’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디자인 하는 것도 디자인이고,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도 디자인이다. 우리 모두가 디자인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셈. 그러니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다소 도발적인 타이틀로 자신을 소개한 일본 디자이너의 책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 

 

하지만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에 이어 <디자이너 함께하며 걷다>,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까지 연달아 3권을 번역 출간한 나가오카 겐메이의 경우는 다소 이례적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디자인 출판계에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디자이너의 책이 이렇게 연이어 출판되는 것은 드문 일이고, 디자인 전문지가 아니라 일반 서평에 소개되고, 일반인들의 블로그에 감동적인 후기가 올라오는 것도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는가, 궁금하던 차에 리블랭크*의 초청으로 나가오카 겐메이가 한국을 찾았다. 

 

*리블랭크 www.reblank.com _ 폐 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친환경 디자인그룹이며 제품 생산과정에서 일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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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홋카이도에서 출생한 나가오카 겐메이는 1990년 일본디자인센터에 입사, 1991년에 하라 켄야**와 함께 일본디자인센터 하라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1997년에는 일본디자인센터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무실 DRAWING AND MANUAL을 열었다. 여기까지, 그의 이력은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성장과 변화와 별다르지 않다. 이 다음 대개의 디자이너들의 경력은 성공한 오너가 되거나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거나, 아니면 사라진다. 그런데 겐메이는 리싸이클링 제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면서 주말마다 취미 삼아 리싸이클링 샵을 돌아다니면서 리싸이클링 제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것이 너무 많아져 1999년부터 인터넷에서 판매하던 것을 2000년에는 오프라인 샵으로 확장오픈, D&DEPARTMENT PROJCET를 시작했다. 현재 일본 전역에 47개의 D&DEPARTMENT PROJCET 샵이 만들어졌고, 나가오카 겐메이는 대표에서 물러나 잡지 <D Travel>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하라 켄야 原硏哉 _ 전 방위 생활용품 디자인, 디자이너가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한 브랜드 MUJI를 만든 디자이너. 현재 일본디자인센터 대표로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 스타일을 완성한 디자인계의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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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슨웹(이하 ‘퍼’) D&DEPARTMENT PROJCET(이하 D&D로 약칭)의 상품들은 어떻게 선택합니까?

 

 

나가오카 겐메이(이하 ‘겐’) D&D의 첫 번째 기준은 제조된 지 40년이 지난 물건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불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20~30년 후에도 낡지 않을 물건을 고릅니다. 

 

 

[퍼] ‘낡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파손되지 않는다, 아니면 기능이 변하지 않는다?

 

 

[겐] 두 가지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기능적으로 ‘낡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수리가 가능하고, 부품이 계속 생산되는 제품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디자인적으로 ‘낡지 않는다’는 건 유행하는 디자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행하는 디자인의 제품은 그 유행이 끝나면 낡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퍼] D&D 상품 선택 기준에서 ‘디자이너의 관점’이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러면 D&D의 모든 물건을 나가오카 씨가 직접 선택합니까?

 

 

[겐] 거의 대부분 제가 선택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구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디자인’이 어떤 건지 잘 모릅니다. D&D는 그 기준을 만들어서 누구라도 ‘좋은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D&D의 물건은 모두 제가 골랐습니다만, 계속 그렇게 된다면 D&D는 그냥 “나가오카가 고른 셀렉스 숍”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의 기준을 만들어서, 누구나 ‘좋은 디자인’의 제품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D&D 상품의 선택 기준에 제 개인적인 기호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40년 이상”이라거나 “수리가능”이라는 기준을 둔 것입니다.

 

 

[퍼] 하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D&D의 물건이 나가오카 씨가 골랐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겐] 처음에는 제 이름 때문에 구매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D&D의 물건을 만나서 안목을 키운 다음에는 필요한 물건이 생겨서 살 때, 무의식적으로 ‘좋은 디자인’을 선택하면 됩니다.

 

 

[퍼] 당신 말대로라면, 결과적으로 제품에서 디자인적인 요소가 많이 제거된 물건들이 ‘좋은 디자인’이 될 텐데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겐] 일본에는 G마크라는 ‘Good Design’ 마크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국가에서 ‘좋은 디자인’이라고 인증해주는 것인데요, 이 인증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 취미가 휴일마다 재활용가게를 돌아다니는 것인데, 그곳에서 이 G마크가 붙여진 제품들이 쓰레기처럼 취급되고 있는 걸 봤습니다. 국가가 인정한 좋은 디자인이면 재활용 가게에서도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려야 한다거나, 구매자도 ‘좋은 디자인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거죠. 이걸 보면서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좋은 디자인’이 뭔지, 그걸 이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다, 라는 생각에서 그러면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보자’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퍼] 한국에도 G마크가 있습니다. 디자인진흥원에서 인증하는 것인데,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겐] 네. 국가가 주는 G마크라는 건 디자인 전문가들이 디자인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 주는 마크인데요, 이게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마크라는 것입니다. 소비자도 ‘좋은 디자인’을 사고 싶어하지만, 그것에 대한 기준이 서로 공유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G마크가 붙어 있어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거죠.

 

[퍼] 본인이 직접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디자이너로서 D&D의 물건을 고른다는 것과 오너로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여러모로 쉽지 않을 텐데요,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십니까?

 

 

[겐] 지금은 제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장 자리에서 짤렸습니다. 지금은 D&D 경영도 하지 않고 d-travel 잡지 편집장만 하고 있습니다.

 

 

[퍼] 아, 홈페이지에서 잡지를 봤습니다.

 

 

[겐] D&D 일도 하고, 잡지도 만들지만, 실은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을 하고 싶은데, 그 전에 시장을 먼저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D&D를 시작했고, 또 하다 보니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도 격려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퍼] 격려 받아야 한다니, 무슨 뜻입니까?

 

 

[겐] 새로운 생산자(디자이너나 제조하는 사람 모두)가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시장에서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생산자의 제품만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물건을 만들지는 않죠. 그래서 새로운 생산자들과 기존의 장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서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D&DEPARTMENT PROJECT 이후, 나가오카 겐메이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G마크를 받은 일본의 굿디자인 제품들을 복각하는 <60 VISION Project>와 도쿄 중심의 디자인을 탈피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생산된 로컬상품들을 판매하는 <Nippon Project>, 그리고 폐자재를 재활용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가구를 만들어내는 <Sampling furniture Project>가 그것. 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디자인계와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좋은 디자인’의 물건을 찾아내서 소비자들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나가오카 겐메이가 제안하는 롱 라이프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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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에 보면, 당신은 일본 디자인에 대해서 ‘일본이 자신을 포기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겐]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이 일본다움을 포기했다, 입니다.

 

 

[퍼] 한국에서는 일본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일본의 디자인’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또 하나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성공사례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나가오카 씨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생각은 일본의 다른 디자이너들도 공감하는 것입니까?

[겐] 다른 디자이너들도 위기감은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인이 오리지널리티로 경쟁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시장에서 ‘일본다움’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지가 중요했는데, 지금은 전체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제품 각각의 디자인과 새 제품이 나오는 속도가 가장 중요한 경쟁요소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 속도전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혼다다움, 소니다움 이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많이, 싸게 팔 수 있는가로만 경쟁하고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제품만 봐도 이게 소니 제품인지 파나소닉 제품인지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잘 구별할 수 없어요. 이렇게 되면 결국 삼성도 엘지도 소니도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제품들만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가 ‘자기다움’을 잃고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각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디자이너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위기감을 느낍니다.

 

 

[퍼] 그래서 나가오카 씨는 40년 전에 만들어진 일본의 제품 디자인에서 그 ‘일본다움’을 찾고 계신 건가요?


 
[겐] 네. 그래서 D&D에서는 제 개인의 기준이 아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을 찾다가 <60 VISION Project>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디자인史에서 봤을 때, 1960년대의 일본은 디자인 산업에 굉장히 공을 기울인 시기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제품이 ‘좋은 디자인’이지 않을까, 하는 가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인 셈입니다. 그렇게 발견한 제품들을 보면 확실히 각 기업의 아이덴티티가 살아있는 디자인이 많습니다. ‘좋은 디자인’ 제품을 통해서 기업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퍼]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디자인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것이 D&D의 목표이자 기능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디자인을 하실 생각입니까?

 

 

[겐] 생각 중입니다.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지만, 제품 디자인, 주택 디자인, 마을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도 D&D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D&D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함께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분명히 전문 디자이너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비전문가스러운, 디자이너가 이렇게 말해도 좋을까, 싶을 정도의 자세로 ‘좋은 디자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래 쓸 수 있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 연구합니다. 과연 그러한지. 지금 저는 학생의 마음으로 마음껏 찾아보고, 질문하는 단계입니다.

 

[퍼] 그러니까, ‘좋은 디자인’을 찾은 다음에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으신 건지요.

 

 

[겐] 음. 배우는 자세로 10년 이상 이 일을 해왔는데, 하면 할수록 계속 새로운 걸 발견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지금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잡지도 가게도 전혀 할 생각이 없던 것들이예요. 그저 ‘좋은 디자인’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만드는 잡지 <d>는 대도시가 아니라 그 동안 디자인에서 소외되어 왔던 지역의 디자인을 발견하기 위한 책입니다.

 

 

[마쓰조***] 제가 조금 보충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좋은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 10개 항목으로 정리했는데, 마지막 항목이 “모양(형태)이 좋은/아름다운 디자인”이었습니다. 나가오카 씨에게 앞으로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어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이 항목이 될 거 라고 생각합니다.

 

 

***마쓰조 씨는 D&D의 원년 멤버로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가 나가오카 씨와 결혼했다. 지금도 D&D 프로젝트의 모든 홍보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퍼] ‘좋은 디자인’을 찾은 다음에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를 질문한 것인데, 답변을 듣고 보니 우문이었네요. 다시 D&D로 돌아가서, ‘좋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나가오카 씨는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개입하십니까? D&D의 물건들은 새롭게 디자인된 물건이 아니라 모두 재해석되는 물건, 새롭게 발견되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겐] 맞습니다. D&D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서 디자인한다’는 개념의 디자인 리사이클링 숍입니다. 그래서 10개의 항목에서 1부터 9까지는 누구나 판단 가능한 기준들, 예를 들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가, 수리는 가능한가, 라는 식의 항목이고 마지막 항목이 바로 제가 디자이너로서 개입하는 ‘아름다운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좋은 디자인’이란 이 마지막 항목보다는 다른 9개의 항목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퍼] 마지막 항목인 ‘모양이 아름답다’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판단이 아닐까요?

 

 

[겐] 그렇죠. 이건 디자이너가 아니면 사실 불가능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요즘의 디자이너들이 이 항목 외의 나머지 9개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퍼] 그렇다면 ‘아름답다’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나가오카 씨의 눈인 셈인데, 그렇게 되면 D&D의 물건 선택 기준을 매뉴얼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반적인 재활용 제품과 D&D 물건의 차이가 최종적인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나가오카 씨의 안목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 D&D에서는 월 1회, 어떤 상품을 진열할지 다 같이 모여서 결정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결국 최종 선택은 나가오카 씨가 합니다만, 실은 그 결정까지 오기까지 아주 많은 단계를 거칩니다. 물건을 D&D에 팔려고 하는 사람은 9개의 항목을 체크해야만 하는데, 그 체크를 위해서 자기가 직접 사용해보기도 하고, 제품을 만든 사람과 이야기해 보기도 합니다. 아주 많은 물건들이 이미 그 과정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가오카 씨가 결정하는 것은 단 하나의 항목인 뿐인 겁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의 모르고 자연스럽게 D&D의 물건을 구매합니다.

 

[퍼] 9개의 항목과 최종적으로 나가오카 씨의 오케이를 받은 물건만이 판매된다니, 조만간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과연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겐] 지금 D&D에서는 다이손 청소기가 화두입니다. 다이손 청소기는 9개 항목을 모두 만족시켰는데, 마지막 항목인 ‘아름다운가?’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4년 전에 한번 탈락시켰는데 다시 들어 왔는데요, 다이손 청소기는 모두 알다시피 훌륭한 제품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됩니다. 9개의 항목을 통과했으니 보기에 아름답지 않아도 이미 ‘좋은 디자인’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퍼] 아름다움에 대한 신념이 변하는 것인가요?

 

 

[겐] 저는 물건에 대해서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고 내린 결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D&D를 통해서 ‘좋은 디자인’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제가 원하는 목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건 사람들이 디자인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을 없애고 싶은 거니까요. 

 

 

[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일본 디자인계에서 나가오카 씨의 프로젝트는 주류입니까? 디자인업계의 다른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습니까?

[겐] 디자인업계와는 교류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매년 열리는 <도쿄 디자이너스 위크>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들을 보면서 화가 났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을 하고 싶지만 디자인을 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디자이너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 고민의 결과가 바로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 ‘새로운 디자인을 하지 않지만 디자인하는’ D&DEPARTMENT PROJECT와 일련의 프로젝트들인 것이다.
나가오카 씨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지금 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할까?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시장에 선보이는 디자인 제품들을 보면서 ‘좋은 디자인’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과잉 생산된 물건들은 어떻게 ‘리싸이클’되는지.
나가오카 씨에게 한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 막막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디자인업계에서 찾기 어려운 이러한 고민과 질문이 과연 일본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 그런 점에서 디자인업계와 교류하지 않는다는 나가오카 씨의 대답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답변인 셈이다.

 

**** 인터뷰가 끝나고 귀국한 나가오카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국 다이손 청소기는 최종 탈락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