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것 자체가 두렵거나,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친구와 대화하듯이 진행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앞두고 살짝 긴장해 있는 다리나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어색해지고 말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다시 자연스러워졌고, 무사히 첫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고 글을 쓰다 보니, 난 그 때 ‘인터뷰’라는 것에 좀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1. 에피타이저
– 입맛을 돋우는 조금의 치즈와 삶은 방울토마토
다리나(이하 ‘다’): 실수해도 괜찮아?
퍼슨웹(이하 ‘퍼’): 응, 걱정하지 마.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녹음기도 없고, 사진도 안찍고 우리끼리 수다 떤다고 생각하면 돼.
다리나는 인터뷰 자리가 생소한 듯했다. 우리가 카페에 자리를 잡자마자 다리나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정말 가볍게, 다리나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을 수다를 떤다는 느낌으로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한국어를 꽤 잘 하는 다리나 덕분에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퍼: 음료는 뭐 마실래?
다: 아이스 카페모카. 항상 따뜻한 것만 먹었는데, 지금은 너무 더워서 한번 마셔볼래.
퍼: 너는 카페모카를 참 좋아하더라.
다: 응. 참치 김밥도! 흐흐
퍼: 늘 궁금했던 건데, 너는 왜 참치김밥을 좋아해?
다: 일단 맵지 않으니까.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거든. 김밥에서 특히 김이 좋아. 가끔씩 엄마가 요리를 해주실 때도 나는 김에 싸서 먹어.
인터뷰에 대해 걱정을 하던 다리나는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실수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듯했다. 역시 음식은 세계 어디를 가나 모든 이들의 공통 관심사였던 것이다!
퍼 : 참치김밥 말고 좋아하는 다른 음식은 없어?
다: 음… 아! 얼마 전에 우리가 같이 먹으러 갔던 그 비빔밥. 맵지 않은 소스에 다양한 야채들하고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 내가 그 동안 먹었던 음식들과도 전혀 다른 맛이었어. 정말 맛있었어! 크크
퍼: 혹시, 러시아에도 비빔밥 같은 음식이 있어?
다: 응, 비빔밥과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음식이 있어. 밥과 야채, 고기를 함께 섞어 먹는 음식이지. 우리는 보통 된장과 같은 소스에 비벼 먹어. 아마 이 소스 때문에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
퍼: 그럼, 다리나. 외국인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러시아 음식이 있을까?
다: 러시아 음식 중에 ‘아그로시카’라는 것이 있어.
퍼: 그게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야?
다: 아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야. 러시아 지방 어디에서도 먹을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음식이야. 더운 날씨에 먹는 샐러드 같은 건데, 정확하게 샐러드는 아니고. 야채하고 소스하고 차가운 술(정확히 술은 아닌데, 이걸 영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이나 차가운 요거트 같은 것을 섞어서 먹는 거야.
퍼: 무슨 맛일지 전혀 상상이 안 간다.
다: 응, 그치? 흐흐
퍼: 네가 러시아에서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어?
다: 나는 러시아에서 ‘golubci’라는 음식을 좋아했어. 볶은 고기랑 양배추랑 같이 먹는 음식이야. 아! 러시아 쿠키도 맛있고 케이크도 무척 좋아해.
퍼: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쿠키와 케이크를 즐겨 먹어?
다: 응! 우리는 쿠키나 케이크를 차와 함께 먹는 것을 즐겨.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말이야. 사람들이 각자 집에서 케이크나 쿠키를 조금씩 가지고 와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해.
퍼: 그럼 혹시 그 자리에서 함께 춤도 추고 그래? 너, 춤추는 것 좋아하잖아, 라틴 댄스
다: 러시아에서 학교 다닐 때, 몇 년 동안 라틴 댄스를 췄었지. 네 말대로 나는 라틴 댄스를 좋아해.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 추러가기도 했어.
퍼: 그럼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춤을 배웠던 거야?
다: 응. 배웠었어. 하지만 춤이 나의 취미는 아니야.
퍼: 다리나 네 취미는 뭐야?
그러고 보니, 친구라면서 우린 서로의 취미도 잘 모르고 있었다. 영어 학원에서 첫째 시간이면 으레 하는 것이 자기소개인데, 다리나가 소개할 때 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인터뷰를 하는 오늘에서야 다리나의 취미가 그림 그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 오래 전부터 내 취미는 쭉 ‘그림 그리기’였어. 그냥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어.
퍼: 그래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 글쎄, 우리 할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해. 우리 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화가셔.
퍼: 아~ 할아버지가 화가셨구나!
다: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 댁이 멀어서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갈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께 그림을 배웠어. 하지만 그 나머지 시간 대부분은 나 혼자서 그림을 연습했지.
퍼: 아! 다리나 그럼 혹시 네가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걸 인터뷰 기사에 좀 실어도 될까?
다: 아, 사실 내가 그린 그림은 러시아에 더 많아. 하지만 그림을 보내줄 수는 있어. 좋아!
퍼: 근데 네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니까, 만날 학원 끝나면 너 데리러 오시는 너희 아빠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다: ‘만날’은 아니고, 거의지! 흐흐
퍼: 그래. 네가 한국에 온 것도 아버지 일 때문이니까, 네 인생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꽤 클 것 같거든. (다리나의 아버지께서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한국어 번역 일을 하신다)
다: 사실 내 인생에서 우리 부모님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계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나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어.
퍼: 그래~
다: 처음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사실 난 그림과 관련된 전공을 생각했던 때도 있었어.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림은 나에게 어떤 이익을 안겨 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퍼 : 어떤 이익?
다 : 예를 들면, 내가 그린 그림이 매일 팔릴 때도 있고, 아예 팔리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잖아. 또 그림과 관련된 디자인 관련 전공을 선택하려면, 특별한 과정을 거쳐서 전공 학교에 진학해야 하잖아.
퍼: 보통 그렇지.
다: 그때 부모님께서 국제 관계와 관련된 전공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셨어.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퍼: 그래서 네가 국제관계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거였구나.
질문을 하고나서 생각해보니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서의 부모님 영향력이 새삼 느껴졌다. 사실 나도 대학을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저 크면서 보고 배운 것이 아빠가 하시는 일에 관련된 쪽이었으니까, 막연히 경영 쪽으로 진로를 정했었다. 그러다 실패의 쓴 잔을 마시기도 했더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금만 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봤더라면 하는 아주 얕은 후회도 남는다. 조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내 전공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됐다, 뭐.
퍼: 그런데 다리나 너의 아버지께서는 처음에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기 시작하신거야?
다: 아빠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하나 선택해서 공부를 해야 했대. 원래 아빠는 일본어를 배우기 원하셨대.
퍼: 아, 그랬구나!
다: 하지만 그건 단지 아빠의 바람이었지. 이미 교수님께서는 한국어로 결정하신 상태였고, 아빠는 그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퍼: 아버지께서 좀 힘드셨겠네.
다: 그래도 한국어는 일본어랑 비슷하니까 다행이었지. 사실 그때 교수님은 유럽 국가 언어 중 하나를 아빠에게 추천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빠가 원했던 일본어와 비슷한, 아시아 언어인 한국어를 선택해 주신 거잖아.
대학에 들어가서 언어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 상황이 나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중에 다리나에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물었더니, 아버지께서 외교 관련 학과에 진학을 하셨기 때문이란다. 러시아 대학교의 외교 관련 학과는 러시아어와 영어를 기본으로, 다른 국가의 언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퍼: 너의 아버지는 사실 처음에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던 거네?
다: 그런 셈이지.
퍼: 근데 처음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일본어를 어떻게 아셨을까?
다: 그냥 집에서 혼자 조금 공부할 기회가 있으셨나봐. 하지만 대학에서는 한국어를 전공하셨고, 지금은 아빠의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한국어를 러시아어로,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며 지내시지.
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과거에 먼 훗날 한국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셨을까?
다: 사실 아빠가 처음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시기에는,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로 알고 있어. 아마 그 시기에 한국과 러시아의 미래 관계에 대한 예상은 누구도 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아빠는 예상을 하셨나봐. 미래의 언제가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할 것을.
퍼: 아빠의 예감이 적중하신 거네? 호호
다: 그러게 말이야. 호호. 아마 아빠는 자신이 미래의 어느 날 한국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나봐.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지.
퍼: 내 생각에 한국은 너의 아버지의 운명이었던 것 같아.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다. 만약 그 때, 다리나의 아버지가 한국어를 거부하셨다면, 그래서 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랑 다리나도 만날 일이 없었을 테니까. 내가 또 하필 그 영어 학원 그 반에 가지 않았더라면 또 다리나를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새삼스럽게 이런 인연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퍼: 아버지의 영향으로 너도 한국어에 흥미가 있었던 거야?
다: 사실 처음부터 나의 목표가 꼭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것은 아니었어. 그냥 한국어 공부를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어. 아빠도 만약 내가 한국어에 별 흥미가 없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지.
퍼: 그랬구나. 난 네가 지금 한국어를 진짜 열심히 하니까. 원래 흥미를 느꼈나보다 했어.
다: 응. 하지만 엄마는 달랐어. 한국어를 배워두는 것이 너에게 분명 도움이 될 테니,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 지금 고려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제야 나는 한국어라는 언어를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배워나갈 생각이야. 한국어가 점점 재미있어지고, 또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요즘은 한국어를 조금 더 일찍 배워 둘 걸 하는 생각도 들어.
퍼: 그럼 혹시 다리나, 나중에 한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
다: 내가 전공하고 싶어 하는 쪽이 아무래도 외교 쪽이니까, 보다 다양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우선 한국어랑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려고. 다른 언어들은 좀 더 나중에!
퍼: 그래, 하나씩 천천히!
다: 내가 미래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게 된다면, 다른 분야의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나 같은 10대의 대부분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 자신이 선택할 전공에 대한 확신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잖아. 흐흐
민망한 듯 다리나가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다리나가 민망해 할까봐, 또 나도 민망해서 그랬다. 20대의 중반에 접어든 나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기 때문에.
퍼: 근데, 다리나. 너 요즘 졸업 시험 준비 때문에 만날 피곤해 하잖아. 잠 잘 시간은 안 부족해?
다: 잠자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아. 단지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피곤해. 더 큰 문제는 내가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다는 거야.
퍼: 요즘 친구들도 못 만났어?
다: 응.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시간 없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갔어. 나하고는 상관없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시간이 없어서 어디를 못가고, 시간이 없어서 누구를 못 만나고 그러는 것들이. 그런데 요새는 부쩍 ‘시간 없다’는 말을 자주하게 돼.
퍼: 그럼 졸업 시험은 언제 끝나는 거야?
다: 아마 6월 중순쯤이나 돼야 쉴 수 있을 것 같아! 휴우~
퍼: 한국의 고3 학생들은 거의 일 년이란 시간을 다리나 너처럼 보내.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서 말이야.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 생활을 하기는 힘들지. 이런 사실을 너도 알아?
다: 응, 알고 있어. 러시아에서도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 러시아 학생들도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 공부만 열심히 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낼 시간도 없을 만큼.
‘시간 없다’는 말의 의미를 한국에 와서 알아버린 것 같아, 괜히 다리나가 안타까워졌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시간 없다’의 의미를 알아버린 다리나는 러시아에 돌아가도 여전히 이 의미를 순간순간 느끼며 살아갈까.
퍼: 러시아에도 한국의 대학입시 시험 같은 것이 있니?
다: 있어!
퍼: 러시아에서는 그럼 대입 시험을 어떻게 봐?
다: 음… 먼저 모두가 기본적으로 치러야 할 과목들이 있어, 러시아어! 만약 네가 기술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면 수학을 해야 하고.
퍼: 그럼, 기술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만 수학을 보면 되는 거야?
다: 응, 아마도. 그 다음에는 경제 같은 과목을 치러야 할 거야. 그 외는 네가 어떤 대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시험 치르는 과목이 달라져.
퍼: 아, 그러니까 먼저 네가 전공하고 싶은 대학을 정하고, 그 전공에 따라 시험 과목이 달라지는 시스템이구나.
대입 시험을 치르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전공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 동안 목표 의식이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항상 ‘목표 의식을 가진 자만이 성공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자라왔다. 다리나의 말을 듣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실제로 학생들 스스로가 목표 의식을 세울 수 있는 입시 시스템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샐러드
– 상큼한 레몬소스에 예술적 감성을 버무린
퍼: 다리나, 한국에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야?
다: 나는 자연을 좋아해. 그래서 ‘동해’가 좋아. 정말 평화로운 장소야. 도시 근교에서는 일산이 좋아.
퍼: 조용하고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장소가 좋은 거야?
다: 응. 조금 조용한 곳을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북적이는 곳보다는. 하지만 내 기분에 따라서 또 달라지기도 해.
퍼: 아, 다리나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구나.
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는 미술관을 즐겨 찾았어. 도시 중심에 있는 미술관은 내게 굉장히 실용적인 공간이었어. 모스크바 중심가에는 유명 화가들의 아주 큰 전시회가 있거든. ‘Tretiyakovskaya’와 같은 미술관에서 말이야. 이 미술관을 만든 남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거야.
퍼: 모스크바에 있을 때 그 미술관을 자주 갔나 보구나. 그럼 넌 그곳에서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얻었던 거니?
다: 아니 영감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너무 거창하고, 그저 난 그냥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이 좋아서 그냥 잠깐 잠깐 들렀던 거야.
퍼 : 그림 그리는 것,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다 : 난 주로 그림 속의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고는 했어. 그림을 그린 방식이라든지, 그림 속에 사람들의 옷차림이라든지 표정, 뭐 그런 거. 그런 부분들이 나에게는 정말 흥미로웠어.
퍼: 그럼 너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가본 적 있어?
다: 아니, 아쉽게도 가본 적이 없어.
퍼: 그럼 인사동은?
다: 당연히 가봤지. 그곳에 가면 한국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 매우 다양한 것들이 있잖아, 그곳에는.
퍼: 인사동에 우리나라의 옛 전통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있어. 그냥 무료로 전시를 하는 곳들도 꽤 있고 말이야. 시간이 없으면 인사동에 잠깐 들러서 그림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어.
다: 나도 가게에서 한국 그림을 본 적이 있어. 전시회는 아니었지만, 그냥 가게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봤었지. 몇 개의 그림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색채가 없는 그냥 흰색과 검정색만으로 그려진 그림 스타일이 정말 좋았어.
퍼: 아, 우리는 그런 그림 종류를 ‘수묵화’라고 불러.
다: 수무콰? 흐흐 수묵화?
퍼: 응, 수묵화! 흐흐. 네 얘기를 들어보니 러시아는 참 예술적인 나라인 것 같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봐도 그렇고. 다리나는 이런 작가들을 좋아해?
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는 물론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들이지.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도 그들에 대해서 잘 알고. 하지만 나는 솔직히 ‘Lermontov’를 더 좋아해.
퍼: ‘Lermontov’는 누구야?
다: 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공부한 게 계기가 되어 그를 좋아하게 되었어.
퍼: 혹시 소설가니?
다: 소설가? 딱히 소설가라고만 할 수는 없어. 그는 시도 참 잘 쓰거든. 학교 다닐 때 나는 그의 시를 참 좋아했어. 그의 시는 내면을 표현하는 것 같았어.
퍼: 그럼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라고 할 수 있겠네.
다. 응, 그렇지.
퍼: 내 생각에 너는 예술적인 부분에 참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다: 응, 그럴 거야. 왜냐하면 우리 가족 자체가 매우 예술적이거든. 우리 가족은 함께 클래식 연주회에 가거나 전시회 등에 다니는 것을 좋아해.
퍼: 예술을 사랑하는 가족이네~
다: 그렇지. 흐흐. 러시아에서 우리 엄마는 ‘formal cultural worker’였어.
퍼 : formal culutral worker? 무슨 일을 하시는 거지?
다 : 문화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시지. 예를 들어 러시아 대사관에서 새해 행사를 하면, 그 행사의 프로그램들을 기획해. 능력이 뛰어나시거든. 엄마는 대학에서 그런 쪽을 전공하셨어.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도서관에서 일하셨어.
퍼: 러시아에서는 일을 하셨구나.
다: 응, 지금 엄마는 일을 하지 않으시지만, 러시아에서는 일을 하셨지.
퍼: 엄마께서 도서관에서 일을 하셨으면 너, 책 많이 읽겠다.
다: 아니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 난 보통 기분이 좋을 때에 책을 읽어.
퍼: 기분이 좋을 때?
다: 보통 저녁에 시간 있을 때 책을 읽지.
뜨끔했다, 괜히. 기분이 좋을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손에서 책을 놓은 지 꽤 되었다. 기분이 좋을 때 책을 읽는다며 다리나는 쑥스러워 했지만, 그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워야 했다. 책이 싫은 건 진짜 아닌데!
퍼: 넌 소설이 좋아, 시가 좋아?
다: 난 러시아 고전을 좋아해. 하지만 최근에 읽은 외국 소설책은 <트와일라잇(twilight)>이야.
퍼: 아, 그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남자 배우 중에 누굴 좋아해?
다: 주연 말고, 늑대 역할을 한 조연 배우가 좋아.
퍼: 아 울프로 나오는 덩치 좀 있고, 그치?
다: 응, 난 그 배우가 좋아.
퍼: 다리나, 근데 너도 배우 경력이 있잖아. 너 MBC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 출연했었다면서.
매주 일요일 아침. 엄마가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밥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와 동생, 아빠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MBC <서프라이즈>의 ‘진실 혹은 거짓’을 보며 어떤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지를 맞추고는 했었다. 김치찌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질 때쯤 우리는 식탁에 앉아 텔레비전에 귀를 기울이고는 끝까지 어떤 이야기가 거짓인가를 확인하고는 했었다. 그 사건을 재연하는 배우들 가운데 다리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일었다.
다: 흐흐. 너~ 무엇을 알고 싶은 거야?
퍼: 호호. 너 거기서 연기 했었잖아, 그치?
다: 응.
퍼: 그냥 네가 연기했을 당시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TV 출연이 너에게 미친 영향도 좀 있을 것 같거든.
다: 한국에 다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출연을 했지. 사실 그 전에 러시아 학교에서 연기를 할 기회는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다시 그 기회를 갖게 됐지.
퍼: 원래 연기를 조금 했었구나~
다: 그냥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싶어서, <서프라이즈>에 나오기 전에 문화 관련 프로그램에 몇 번 출연 한 적은 있었어. 하지만 <서프라이즈>는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었어.
퍼: 뭐가 달랐지?
다: 거기에서 나는 그냥 러시아인으로 러시아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됐거든. 나는 그 때 당시 한국어를 못했어. 감독님은 연기가 맘에 안 들 때면 움직임으로 직접 설명해주고는 했어. 하지만 난 그 당시 그런 상황에 많이 긴장했고, 어려웠어. 아마 지금 연기한다면 그 때보다는 나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
퍼: 사실 <서프라이즈>는 사람들이 꽤 즐겨보는 프로그램이거든. 언젠가 내가 봤던 <서프라이즈>에 네가 나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신기했어. 흐흐
다: <서프라이즈> 출연은 내 인생에서 아주 흥미로운 경험 중 하나야. 하지만 전공으로 연기를 생각해 본적은 없어. 왜냐하면 연기는 아주 어려운 분야거든.
퍼: 그럼 연기는 그저 흥미로운 취미로 생각하는 거야?
다: 응. 그저 흥미로운 부분이었어. 그 당시 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거의 하루를 기다리기도 했었어. 그 때 알게 되었지. 항상 내가 연기하는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3-1. 메인 요리
– 러시아와 한국의 만남, 퓨전 스테이크
퍼: 다니라 그럼 너는 러시아에서 얼마나 산거야?
다: 음… 그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조금 있다가 러시아로 돌아가고, 다시 한국에 10살에 왔다가 14살에 러시아로 돌아갔어. 그리고 다시 한국에 온 건 17살 때 작년 초쯤이니까. 최근에 한국에서는 1년 반 정도를 살고 있지.
퍼: 으~ 잠깐만! 조금 복잡하다, 그치?
다: 좀 헷갈리지? 흐흐
퍼: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한국 나이로 계산해보면 태어나서 2살까지 한국에 있다가, 러시아로 돌아가서 10살까지 모스크바에서 살았던 거지?
다: 응!
퍼: 그리고 다시 한국에 와서 10살부터 14살 때까지 살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17살 때까지 지냈고,
다: 응, 맞아!
퍼: 그리고 17살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19살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는 거구나!
다: 맞아~ 흐흐
복잡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쭉 자란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내가 잠시 느꼈던 이 혼란은 그저 순간의 헷갈림일 것이다. 다리나는 분명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문화에 그 이상의 혼란을 여러 번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다.
퍼: 네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니? 언어, 문화 차이 등등.
다: 처음에는 모든 부분들이 러시아와 전혀 다르니까 힘들었지. 그런데 작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서서히 한국의 생활방식을 좀 더 잘 알아가는 것 같아.
퍼: 그 전에는 어땠는데?
다: 내가 10살 때부터 한국에 살 때는 러시아 대사관 ‘territory’(러시아 영역 내 지역)에 살았거든. 그곳에는 오직 러시아 사람들과 러시아어, 그리고 러시아 문화만 있었어. 그래서 그 곳을 나온 작년부터 진짜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퍼: 그럴 수 있지~
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기회가 더 많아졌거든. 이제 나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
퍼: 혹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거나 하지 않았어?
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나는 러시아에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경우가 더 어려웠어.
퍼: 왜?
다: 러시아 사람들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길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네면 상대방도 그냥 인사를 해주잖아.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아. 만약 상대방에게 내가 먼저 ‘하이’하고 인사를 하면 ‘Who are you?’라는 대답이 돌아오거든.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조금 두려운 감정이 들기도 했어.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모두가 먼저 다가와 주고, 뭔가 틀려도 크게 상관하지 않아서 편해.
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 이리 친절한 사람들이었던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다. 허나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했을 때 선뜻 인사를 해줄 정도의 친절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다리나가 우리나라 사람들에 관한, 기분 좋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기분 좋은 오해이니까. 나중에 이 인터뷰 글을 보고 알게 되면 그때 친절하게 설명해주리라.
퍼: 그래도 가끔은 러시아와 관련된 것들이 그립기도 하지?
다: 당연히 가끔씩은 그립지.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 친구들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그렇게 많이 그립지는 않은 것 같아. 그 친구들은 러시아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거든.
퍼: 네 친구들과 너는 조금 다른 상황에 있는 거야?
다: 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대사관의 ‘territory’에 살고 있거든. 지금 그들의 삶은 한국의 진짜 모습과는 조금 분리되어 있어. 그래서 아마도 러시아를 나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 같아. 7년 정도의 시간은 한국, 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내가 점점 그들과 같아지고 있는 것이지. 흐흐
퍼: 맞아, 넌 생각은 거의 한국 사람이라니까! 흐흐 네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아마 초등학생이었나, 그치?
다: 응. 맞아.
퍼: 물론 지금 다리나 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거의 적응한 것 같지만, 어린 나이에 접한 새로운 나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아. 어땠어?
다: 한국에 처음 왔을 당시에 나는 러시아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었어. 그 이유는 언어 때문이었어. 처음에 내가 한국에 왔을 때는 거의 영어를 못했거든. 처음에는 언어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아.
퍼: 그럼 너는 한국에 와서 영어를 배운 거야?
다: 응, 한국에 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어.
퍼: 근데 다리나, 나는 너의 어린 시절 모습을 모르잖아. 러시아에서의 너의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어? 갑자기 궁금해져서.
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하지? 음… 내 말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주된 어린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10살에서 13살사이야. 이 기간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나지만, 그 때 나는 한국에 살았으니까.
퍼: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이 잘 안 나는 거야?
다: 러시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글쎄… 러시아의 삶은 조금 덜 안전해. 먼 거리에 있는 어딘가를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어. 학교나 집 근처를 돌아다녔어.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것 같아.
퍼: 그랬구나. 그럼 혹시 어렸을 때 하키 같은 것도 하고 그랬어? 왜 너 저번에 친구랑 하키 경기 보고 왔었잖아.
다: 아~ 그거. 근데 사실 난 스포츠를 즐기진 않아. 흐흐
퍼: 아! 맞다. 그리고 왜 저번에 너 수영 배웠다고 하지 않았었나?
다: 수영? 그건 어렸을 때, 러시아에서. 아! 내가 수영을 배울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어.
퍼: 뭔데? 말해줘. 흐흐
다: 내가 초등학교 때 난 수영 하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거든, 진짜! 수영 수업 시간에 반 친구들은 모두 수영을 했어. 하지만 나는 못했어. 그저 두렵기만 했지.그러자 선생님께서 내게 막대기 같은 것을 잡게 하시고는 물에 나를 집어 넣으셨지. 물 안에서 나는 수영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막대기를 잡고 있을 뿐이었어. 선생님은 물 밖에서 그 막대기를 잡고 나를 끌고 다니셨지. 흐흐 그 모습이 너무 웃겼어.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나에게 수영을 가르치시기보다는 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시려고 한 것 같아. 나를 물에 적응시키려고 하셨던 거지. 하하
퍼: 막대기를 잡고 끌려 다니고 있는 다리나를 상상하니까 웃기다. 하하
다: 그 당시는 정말 웃겼어. 결국 그래서 지금 나는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퍼: 그럼 이제 넌 수영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거지?
다: 응, 이제는 없지! 흐흐
퍼: 초등학교 때 너는 꼭 수영을 배웠어야만 했니?
다: 아니. 수영은 그냥 체육 수업 시간의 한 부분이었어. 난 한 번도 수영 대회에 참석한 적은 없지만.
퍼: 러시아 초등학교에서 수영은 아주 기본적인 체육 활동이야?
다: 대부분은 그래.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겨울 동안에는 실내 수영장에서 체육 활동을 하기도 하지. 하지만 몇몇 특별한 학교에서는 겨울 동안 스키를 타기도 해.
퍼: 스키? 러시아에는 눈이 많으니까!
다: 하지만 산에서 스키를 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스키를 타고 달리는 거야. 그래서 사실 조금 어렵기도 해. 모스크바에서 보통 학교 가는 길은 꽤 멀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에는 스키를 가지고 다니면서 타. 스키는 타고 다니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
퍼: 너는 스키 잘 타?
다: 아니. 사실 스키를 타봤던 건 한국에 와서가 처음이었어.
퍼: 정말?
다: 응, 스키 인생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셈이지. 그 외에도 난 뭔가 해보려는 새로운 시도들을 대부분 한국에서 시작했어.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는 느낌은, 두려움과 설렘의 공존이다. 다리나도 이곳에 살면서 처음 시도해야 했을 때는 아마도 두려움이 차지하는 부분이 더욱 컸겠지. 그러다가 설레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렇게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겠지. 한국이란 나라, 서울에 사는 것에 점점 적응해 나가고 더욱 친숙해지고, 이제는 스스럼없이 한국을 사랑한다고 웃으며 말하게 된 것이겠지. 그렇게 사랑하는 한국을 곧 떠나게 된 현실이 슬프다며,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그 시간동안 다리나에게 러시아와 한국은 각각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퍼: 아까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러시아와 한국 사람들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 것 같니? 사실 한국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들을, 일본이나 중국 사람만큼 가깝게 느끼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
다: 응, 사실 한국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이 그닥 가깝지는 않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음… 당연히 한국과 러시아 사람들의 성격은 다를 수밖에 없어. 아마 한명의 러시아 사람이 다른 러시아 사람들하고 있을 때조차 그들의 성격이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단지 한 사람만 보고 그 나라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조금 어려운 것 같아. 상황마다 다를 수도 있으니까.
퍼: 그래, 당연히 개개인의 성격은 다를 수 있어. 이런 상황은 어때? 한국 사람들은 월드컵 시즌이면 다 같이 거리로 나와서 열정적으로 응원하거든. 그런 열정이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비슷한 성향 같아.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의 경우는 사람들의 성향이 어떤지 궁금해.
다: 러시아에는 한국보다 다양한 민족이 존재해. 나라가 크다 보니까 각각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요인들이 다를 수밖에 없어. 그 시작은 학교인 것 같아. 학교는 중요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들을 모두 습득하는 곳이니까. 내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어.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알지 못했어.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다 같이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퍼: 끼리끼리?
다: 응, 자신들의 친구들끼리. 그래서 그 당시 난 모두를 신뢰할 수는 없었어.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잘 대할 수도 없었어.
다리나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그 순간, 초등학교 때의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친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벌써 이번 전학이 3번째라고 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난 후 다른 곳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키가 작았던 그 아이는 나와 짝꿍을 하던 때에 잠시 속내를 비췄었다.
‘어차피 얼마 있으면 또 다른 학교로 갈 텐데, 뭐. 친구 많이 사귀어봤자 소용없어’ 그 말을 그저 표면적으로 받아들였던 나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 건방지다고… 하지만 그 아이는 매번 다른 환경과 친구들에게 일일이 정을 붙이기가 참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모든 사람을 잘 대할 수 있었어. 내가 느끼기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점도 없었고.
퍼: 아, 그렇게 느꼈구나.
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닌 것 같아. 뭐 그렇게 열렬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러시아의 문화나 전통에 관한 한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퍼: 맞아, 문화는 네가 관심이 많은 분야니까!
다: 곧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면, 러시아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할 거야. 모든 것이 나에게 다시 새롭게 느껴질 테니까. 지금은 한국의 생활 방식에 더 익숙해져 있으니까. 한국 음식, 한국 사람들, 한국 친구들.
퍼: 그래 이해해. 나도 가끔 너무나 익숙한 서울에서 살다가 시골에 내려가면 조금 적응 안 되는 부분들이 있거든. 넌 러시아와 한국. 전혀 다른 두 나라에서 살아야하니까. 거기에 적응하는 시간이나 어색함의 정도가 더 심하겠지.
다: 그래, 그래서 가끔은 자연에서 혼자 있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 당연히 적응하는 것은 조금 어렵겠지만. 하지만 나의 인생에서 나라가 바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이제는 그게 좋기도 하고.
3-2. 메인 요리
– 퓨전 스테이크 소스 좀 더 주세요!
퍼: 근데, 다리나 너 정치 좋아하니?
다: 아니! 나 정치 정말 안 좋아해. 누군가가 정치를 주제로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면, 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꺼내. 난 정치 분야를 정말 별로 안 좋아하거든. 정치 이야기를 가급적 안 하는 게 나는 좋아… 흐흐
퍼: 하지만 앞으로 네가 국제관계학 공부를 하려면 정치가 꼭 필요한 부분이잖아! 흐흐
다: 응! 나도 알아. 그게 바로 나의 문제야. 왜냐하면 난 내 전공 공부 중에서 특히 정치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거든.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하겠지.
퍼: 어떤 다른 방법?
다: 난 사실 수학을 잘 못해. 그래서 대신에 경제나 법 같은 과목을 공부했었지.
퍼: 20년 전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생각했었어. 이것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다: 아~ 그거 정치 이야기니? 흐흐
퍼: 응, 정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지. 조금이라도 그냥 네 생각을 알고 싶어서, 미안. 흐흐
다: 흐흐 맞아. 과거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정치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지. 하지만 지금 정치 체계는 달라졌어.
퍼: 예전 한국 사회의 대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레닌과 스탈린은 유명한 인물이야.
다: 아 그렇구나.
중간 중간 들리는 한숨 소리가 다리나의 고민을 말해주었다. 역시 정치 이야기는 다리나에게 별로 즐거운 이야기 거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 소리였다. 길게는 묻지 말아야지.
다: 레닌 시절,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사랑해야 했었어. 현재 러시아는 스탈린의 정치 체제는 아니잖아.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보면, 스탈린이나 레닌의 방식은 미래가 없는 정치라고 볼 수 있어. 물론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것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우리나라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많은 변화를 겪었어. 페레스트로이카가 무엇인지 아니?
퍼: 응.
다: 80년대 중반에 새로 바뀐 러시아의 정치․경제 개혁 정책 시스템이지. 우리 부모님의 경우는 개혁을 겪은 세대야. 전혀 대조적인 두 시대를 사셨지. 소비에트 연방 시절과 지금. 그래서 아마 그들은 정말 러시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몸으로 직접 느끼셨을 거야.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개혁이 이루어졌으니까.
퍼: 맞아, 그러셨을 거야.
다: 연합 국가 시절과 현대 지금의 시대는 완전히 다른 삶이지. 내가 우리 부모님과 할머니·할아버지에게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주 흥미로웠어. 왜냐하면 그들의 인생은 시대에 따라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퍼: 그럼 새로 개혁된 사회 체제의 전과 후에서 다른 점은 무엇이니? 예를 들어 본다면?
다: 예를 들어서? 글쎄, 너무 많지. 개혁 이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자유롭지 못했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 됐었지. 지금의 북한 정치체계는 물론 아주 강력한 사회주의지만, 러시아 사람들의 과거 삶은 지금의 북한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 시절에 우리 부모님은 조금은 힘든 시간을 보내셨어.
퍼: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면?
다: 한 가지 더? 어… 과거에 그들은 다른 나라의 삶, 즉 해외 상황에 대해서 잘 몰랐어. 신문에서도 정부에 대한 장점만 나올 뿐,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거든. 이해할 수 있겠니?
퍼: 응
퍼: 결과적으로 이렇게 네가 외국에서 공부를 할 수도 있게 된 거고~
다: 응, 사실 이런 상황, 외국에 나와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을 오래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겠지. 이러한 변화를 겪은 것이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퍼: 그럼, 개혁 이전과 이후에 너의 가족들과 관련된 변화는 혹시 없었니?
다: 나라의 체제가 바뀌면서, 자신들의 삶에 대한 태도나 마인드가 바뀌었지. 왜냐하면 개혁 이전의 우리의 삶은 모두 정부의 영향 아래 있었으니까. 지금 우리는 더 자유롭고, 모두 개인적인 의견을 갖고, 개인의 성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
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어. 그들은 오직 우리나라만 볼 수 있었어. 정부가 창조해낸 상황들에 의해서 러시아가 아주 완벽한 나라고 다른 나라보다 낫다고 의식하며 살았지. 누구도 정부가 의도한 것 이외의 상황을 알 수 없었어.
퍼: 그런데 이제는 정부에 대한 비판도 가능해진 거네?
다: 응, 당연하지. 소비에트 연방의 벽이 무너졌으니까. 이건 사람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이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고,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지.
다리나가 지쳐 하는 것 같아서 정치 이야기는 그만 끝내기로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정치’ 이야기가 힘들었다며 웃었다. 그랬다. 러시아의 10대 소녀도 한국의 20대 대학생도 정치 이야기가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세대 사이에서 정치는 더 이상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었다. 정치는 소위 소수의 엘리트들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거리로 인식되어 갔다.
요즘 젊은 것들은 정치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고 문제 삼는 어른들도 많다. 안다. 우리도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하기에 재밌고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정치는 더 이상 우리에게 재밌고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다. 해야만 하는 것은 아는데, 찝찝하고 따분하다. 매일 언성을 높여가며 누가 더욱 잘났는지를 어려운 말로 꼬아서 얘기하는 데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요즘 젊은 것들이 왜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를 한번쯤은 그들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4. 디저트
– 달콤한 카페모카와 치즈케이크
퍼: 다리나, 요즘 너의 하루 스케줄은 어떻게 돼?
다: 특별히 어딘가를 가야한다면, 일찍 일어 나. 하지만 보통은 음… 사실 난 조금 게으른 편이야. 흐흐 그래서 주말에 엄마가 빨리 일어나라는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워. 주말에는 보통 나의 하루가 11시에서 12시에 시작되지.
퍼: 나도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라고 말하면 항상 ‘5분만 더’를 외치고는 해. 흐흐 평일에는 몇 시에 학교가?
다: 보통 평일에는 7시쯤 일어나서 준비하고, 9시에 시작되는 수업 시간에 맞춰서 학교에 가지.
퍼: 그럼 러시아 대사관으로 가는 거야?
다: 응, 얼마 전까지는 그랬는데. 요즘은 러시아 대사관에서 공부를 안 해서, 한국어를 배우러 고려대로 가.
퍼: 그럼 9시부터 몇 시까지 공부하는 거야?
다: 9시부터 1시까지 4시간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해.
퍼: 그러고 나서는?
다: 그러고 나서는 일단 점심을 먹고, 보통은 고등학교 졸업 시험 준비를 위해서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가지.
퍼: 그럼 시험 준비를 위한 수업은 어디서 하는 거야?
다: 어,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를 공부하는데, 이건 개인적으로 배우고 있어.
퍼: 그럼 그 수업을 마치고 바로 영어 학원에 가는 거니?
다: 응, 그렇지. 가끔씩 영어 학원이 끝난 후에 수업이 있기도 해. 아주 빡빡한 일정이지.
퍼: 너무 힘들겠다.
다: 응, 정말 긴 하루지.
퍼: 그럼 몇 시쯤 자니?
다: 가끔 새벽 1시까지 깨어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11-12시 사이면 자. 그런데 내 생각에는 한국 사람들이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아.
퍼: 나는 아닌 거 같은데? 흐흐
다: 너는 아니라고? 하하
퍼: 다리나, 너의 미래 계획은 뭐니?
다: 미래의 계획? 미래의 계획이라면, 미래의 어떤 때를 말하는 거야? 가까운 미래, 아니면 먼 미래?
미래에 대한 시간 개념이 딱 ‘미래’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내 실수가 여실히 드러났다. 가까운 미래, 조금 먼 미래, 아주 먼 미래. 미래는 이처럼 다양하게 내 인생에 드리워져 있는데. 다리나 덕분에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개념이 머릿속에 콕 와서 박혔다. 음… 일단 나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목표는 뭐였더라.
퍼: 둘 다!
다: 지금 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야. 그 후에 모든 것들이 결정되겠지. 그래서 만약 내가 대학에 들어간다면, 나는 한국어를 공부할거야. 첫 번째 내 계획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야.
퍼: 그러니까,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 응.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내 꿈이야. 꼭 대사관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다른 외국계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고, 한국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으니까.
퍼: 나도 네가 미래의 어느 날, 꼭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리도 다시 만나고.
다: 만약 내가 내 전공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는 계속 공부할거야. 하지만 내가 조금 두려운 것은 내가 러시아로 돌아가면 한국어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다는 거야. 여기는 내 주위에 한국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단어나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그 단어들을 직접 들어볼 수도 있잖아. 어쨌든 나는 러시아로 돌아간다고 해도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한국 친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 삶과 관련된 것들을 계속 이어나갈 거야.
퍼: 응, 한국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을 이용해서 물어보면 되지.
다: 응, 그럴게.
이렇게 우리의 짧은 인터뷰는 끝이 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 시간이 다 된 우리는 다리나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 맛있게 밥을 먹다가 갑자기 다리나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짧게 내뱉은 한국말. ‘섭섭해요…’ 내가 뭐가 섭섭하냐고 되묻자,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단다. 한국, 또 이곳의 사람들과 헤어질 생각이 나서 섭섭하다고 대답한다.
그 순간 가슴 한 편이 찌릿. 찡해졌다. 한국말에서 ‘섭섭하다’는 의미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던 적은 없었다.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다른 친구에게서 들었던 ‘섭섭하다’라는 한국말은 그렇게 내게 ‘친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다리나가 한국을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만나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배웅을 하는 나를 꼬옥 껴안으며 다리나는 나에게 나와 함께 한 모든 것에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나의 친구가 되어 준 다리나에게 참 많이 고마웠다. 우리는 울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테니까. 2010년 6월 20일 낮 12시 비행기로 다리나는 한국을 떠났다. 출국하기 전, 다리나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 메시지는 “I will come back soon!”이었다. 그래! 곧 내 친구 다리나를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