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미국인 Marcie Middle Brooks. 한국 이름 가온 여울. 가온데의 가온, 여울목의 여울. (영어 “Brook”은 시냇물을 뜻한다 한다.) 약 4년 전에 그녀를 처음 만났다. 종교학을 공부하는 미국인 유학생인 그녀는 퍼슨웹에 가끔 놀러 왔고 그 인연으로 몇 명의 퍼슨들을 상대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어느 해 겨울에는 퍼슨웹 엠티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최근 오랜만에 만난 여울은 미국으로 돌아가 박사 과정에 진학할 거라고 했다. 출국 인사를 하려고 온 것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여울은 이미 미국에 가 있다. ) 비로소 나는 여울에게 한국에까지 와서 종교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랄까 배경에 관하여 물어 보았다. 같은 인문사회과학이라도 경제학이나 사회학 등과 달리 종교학을 선택한 데에는 왠지 남다른 이유나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더욱이 극동의 ‘조용한'(!) 나라 한국에까지 유학 온 미국인이라면.

 

 

 

 

 

 

 

저는 시애틀 출신이예요. 시애틀에는 동양인들이 많아서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과 접할 기회가 많아요. 일본과 무역을 많이 해서 일본어를 배우는 미국인들이 많지요. 일본에 성경을 가르치러 간 친척 어른도 계세요.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학부를 다니고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녔는데 인류학 전공이었어요. 그러다 동양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일본에서 1년 살았고 한국에 와서는 비교종교를 공부했죠.

 

 

 

시애틀 하면 멕 라이언과 톰 행크스 주연의 로맨틱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정도밖에 떠올릴 게 없던 나는 시애틀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워싱턴 주 중부에 위치한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 최대의 도시로서 1896년의 일본 선박 입항을 시초로 무역이 시작된, 아시아 지역과의 국제무역 거점의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인구 구성비율을 봐도 백인 다음으로 제2위를 차지한 인종은 흑인이 아니라 아시아 인종이고 첫째 무역 상대국은 일본이었다.

 

 

 

제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어요. 아버지는 아니었구요. 하지만 미국에 있을 때 종교에 대한 제 태도는 일반적인 지식인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어느 정도 종교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는 태도. 여기도 그런 것 같은데, 미국을 보아도, 지식인들의 반종교적 태도는 계속 강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어느 교수와 대화하던 중에 어떤 종교 잡지에 대해 말이 나왔어요. 그 교수님은, 그 잡지를 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한심하다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그 잡지를 보시거든요. 어머니는 골수 민주당 지지자예요. 보수적인 사람도 한심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래서 실감했죠. 의식 있다는 지식인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종교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왜 종교를 믿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요. 종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어요. 예를 들어, 제 부모를 보게 되면, 왜 아버지는 그렇지 않은데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나갈까 하고 의문을 품었어요. 보통 집안에서 종교를 열심히 믿는 쪽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인 경우가 많잖아요. 제 석사 논문이 비구니 선원인 한마음선원에 관한 연구예요. 현각 스님 강의를 들으러 무불선원에 갔다가 거기서 한마음선원의 비구니 스님들을 알게 된 게 계기였어요.

 

 

 

대한조계종 재단법인 한마음선원 http://www.hanmaum.org 은 대행스님이 1971년에 경기도 안양에서 설립한 선원이다. 지금은 15개의 국내지원과 10개의 해외지원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한마음선원에서는 비구니가 비구를 가르쳐요. 이건 예외적인 거예요. 비구니는 비구보다 낮은 존재거든요. 한마음선원이 특이한 선원인 거죠. 흥미롭죠. 종단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건 비구이다 보니, 비구니들이 비구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일을 할 기회가 없는 대신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하는 거죠. 티벳 같은 남방불교권 국가에는 아예 비구니란 존재가 없어요. 여성은 계율을 받을 수가 없어요. 승려가 되지 못한 채 비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죠. 대만에는 비구니가 많고 위치도 높아요. 한국에도 비구니가 많고 활동도 활발한 편이죠.

 

 

 

비구니 [比丘尼, bhiksuni] : 불교에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여자 수행자.

 

 

팔리어() 비쿠니(bhikkuni)를 음역한 것으로, 걸사녀(乞士女)라고도 한다. 출가한 여자가 미니(沙彌尼) 생활을 거쳐 2년 동안의 시험기간인 식차마나(式叉摩那)로 있다가 평생 출가 ·수행할 수 있을 것이 인정되면 348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이 구족계를 받으면 비구니가 된다. 현재 동남아시아 일대의 불교에서는 비구니(또는 그 교단)가 소멸하였으나,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 등지에서는 지금도 비구니가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에서는 비구와 거의 같은 수를 차지한다.

 

 

 

 

 

석가모니 부처의 이모인 대애도(大愛道 Mahprajpat)가 부처의 허락을 받고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는 비구보다 더 많은 계율을 지켜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비구는 250, 비구니는 348계의 구족계를 받는다. 이밖에도 비구를 공경해야 한다는 8경법(八敬法)이 있다. 8경법이란 ①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의 지도를 받으라, ② 비구를 따라 안거(安居)하라, ③ 안거가 끝나면 자자(自恣:자신이 범한 죄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하는 상대를 비구로 하라, ④ 비구에게 구족계를 받으라, ⑤ 비구를 비방하지 말라, ⑥ 비구의 죄를 들어 잘못을 말하지 말라, ⑦ 가벼운 죄를 범했을 때는 비구에게 가서 참회하라, ⑧ 출가수계(出家受戒)를 받고 100년이 지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새로 수계받은 비구를 예우하라 등이다.

 

 

 

제 관심사에 대해서, 종교 속에서 믿는 자란 결국 다 똑같은 것인데 굳이 종교 내의 불평등과 차이에 대해 주목할 이유가 있느냐, 더 큰 그림을 봐야 하지 않느냐, 종교의 본질에 대해 더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지적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여성이니까 여성의 위치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겠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불평등 자체는 불합리하니까 시정되어야겠지만, 더 낮은 자가, 더 억압받는 자가, 더 고통받는 자가 해탈에 더 가까이 있다고. 더 많은 고통과 더 많은 억압이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는 거죠. 비구보다 낮은 비구니가 해탈에 더 가까이 있는 거죠.

 

 

더 큰 고통과 더 큰 억압이 해탈에 더 가까이 있는 거 아니겠냐고 말할 때 그녀의 갈색 눈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 같았다. 아직 잘 모르겠다, 불신자인 나는, 더 큰 고통이 어떻게 해탈에 가까이 가는지를.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저 나는 이렇게만 말할 수 있었다. 간절히 다시 태어나고 싶은 자들이 종교를 통해 소망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내 말을 들은 여울의 눈이 또 다시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여울은 인연에 대해 말했다. 그녀를 이 먼 곳까지 오게 하고 비구니를 보게 하고 우리를 만나게 한 신기한 인연에 대해서.

   

  

7년이나 한국에 있었어요. 철든 이후에는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죠. 한국에 있는 동안은 가급적 미국에 잘 가지 않았어요. 박사 과정을 마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 한국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종교에 대해 새롭게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이 배웠어요. 이런 게 바로 인연인가 봐요.

 

 

 

 

 

언젠가는 그 모든 마음의 고통이 오히려 자기를 부처님의 세계에 들게 하는 길잡이였다는 것을 스스로 알 날이 있을 것이다.

(한마음선원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