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슨웹은 후지이 다케시를 두 차례(2006년 8월 27일 / 2007년 1월 12일)에 걸쳐 인터뷰하였다. 첫 번째 인터뷰 참석자는 아래와 같고, 두 번째 인터뷰는 편집장이 진행하고 문수현이 옵서버로 부분 참여하였다. 후지이 다케시의 개인사에 대한 초반의 문답에서는 질문자를 ‘퍼슨웹’으로 통일하였고, 후반의 논의에서는 질문자 개인의 이름을 밝혔다. 본문에 삽입된 글과 인물 및 사건소개는 단행본(제목과 저자 및 역자, 출판사와 발행연도 명기)으로부터 인용하거나, 네이버(naver.com)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aladdin.co.kr)을 참조하였다. (편집자)
나는 달리기를 잘 한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후지이 다케시 상을 모셨습니다. 퍼슨웹 북포럼에서 정희진 선생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할 때 후지이 상이 패널로 오셨잖아요. 그 때 사회자(공숙영)가 유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본인은 자신을 실업자라고 소개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웃음) 사카이 나오키 교수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번역과 주체』란 책도 내셨지요. 출생과 성장과정을 비롯하여 여기에 오기까지 본인의 개인사에 대해 먼저 쭉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72년 3월생이고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 7km 거리 떨어져 있고 버스도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니는. 나고야 근처인데 미에라고. 아버지는 가구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가 자영업을 했고 어머니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어요.
부모님의 신혼여행지가 한국여행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생겼을 수도 있는데. (웃음) 시모노세키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배로 가셨대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차 몰고 다녀오고. 그런 의미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엄마 화장대에 십 원짜리 한국 동전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나요.
시골이라 초등학교에 반 하나밖에 없어서 6년 동안 한 반으로 다녔죠. 중학교도 반이 3개 밖에 안 생기더라고요. 그 정도로 사람이 없었어요. 공부는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었고. 초등학교 때 성적표 보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잘 하는데 자기가 관심이 없는 분야에서는 전혀 안 한다고. (웃음)
뭘 좋아하는 아이였나요?
곤충을 좋아했어요. 곤충 도감 보고 실제로 시골이니까 많이 잡기도 하고. 책도 많이 봤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역사를 좋아했지요. 그리고 달리기를 잘했어요. 단거리는 아니고 장거리. 초등학교 때 반에서 5등을 했나. 근데 그때까지 자기가 특별히 잘할 수 있는 게 있다고는 생각을 안했어요. 아, 이건 잘할 수 있겠다는 것.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나는 달리기를 잘한다, 이게 나의 정체성이다, 라고 생각하고 커서 희망은 국제 마라톤에 나간다, 그런 거였죠.
애니메이션은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바람계곡의 소녀 나우시카가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구원하는 내용의 일본 만화영화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84)를 봤어요. 그 때부터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됐죠. 애니메이션 잡지도 사보고. 그래서 일단 미야자키 하야오. 대학 가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졸업했어요. 나우시카 보면, 구세주가 나타나서 세계를 구원해 준다는 건데, 그러니깐 아주 순진하게 인민과 자연이라는 것을 믿죠. 구좌파 같은 느낌이 나잖아요. 대학 가서는 오시이 마모루(- 미래의 가상국가를 다룬 일본 만화영화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70년대 작가. 그래서 삐딱하게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냈군요. 고등학교 때도 계속 그 지역에 살았습니까?
거기서 계속 살았죠. 고등학교는 26km 정도. 멀었어요. 기차 타고 자전거 타고 왔다 갔다 했어요. 운동이 되었어요.
그 지역에 특정한 정치성은 있었어요?
시골이니깐 자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근데 아버지는 사회당 지지했고 어머니도 사회당 지지했고 일본 공산당 신문을 집에서 봤고.
아버지는 전공투 세대인 45년생입니다.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갔는데 대학을 갔다면 아마 운동했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렇게 구체적인 계기는 없었는데 이상하게 우익들은 싫어했어요. 일단 우익들이 하는 소리는 너무 바보 같고.
이제껏 진로를 결정하면서 부모님이 반대하시거나 그런 적은 없으셨나요? 한국 오시는 것도 포함해서.
부모님이 문제된 적은 없었어요. 저에게 맡겨 두시는 편이거든요.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교토(京都)대로 진학하죠. 그럼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대학 가서 학생 운동 하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운동에 대한 관심은 고 3때부터 생겼거든요. 60년 안보투쟁에 대한 책을 읽고 감동 받으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안보투쟁은 1960년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민 주도의 대규모 평화운동을 말한다. 당시 안보투쟁에는 시민들 외에도 평화운동에 참여하던 일본 기독교와 사회당(現 사회민주당)과 일본 공산당도 참여하였다.
1990년에 대학 입학한 거죠? 90학번인데 당시 일본에 학생운동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요?
한국은 90년대에도 학생운동이 활발한 편이었지만, 일본은 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총학생회가 명의상 있는데 같은 사람이 총학생회장을 4~5년 동안 하고 그랬거든요. 아무도 안하니까. 그래도 대학 당국과 교섭은 해야 하니깐 학생회가 있기는 했어요. 하려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 일본의 학생운동은 어떤 식으로 조직이 되고 운영이 되었나요?
한국에서는 학생회가 운동의 중심이잖아요. 일본은 거의 서클적인 조직이에요. 거기서 개별적인 과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큰 사건이 있다. 예를 들면 걸프전이 터졌다 그러면 따로 조직을 만들어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럼 계속 더 들어보지요.
대학 들어가기 전 전공투에 관한 책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서 헌책방을 다니며 전공투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어요. 그 영향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특히 전공투가 매력적이었던 게 자율적인 운동이었잖아요. 대학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외부의 권력에 대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지식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동경대 전공투가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죠.
전공투란 잘 알려진 대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일본의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 그 운동의 전개와 의미가 학생운동이라는 틀로 국한될 수 없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은 이들이 내세운 ‘자기부정의 논리’에 집약되어 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행동강령은 이 논리가 육화되는 방식이었고 말이다.
– 미시마 유키오 외,『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역자 서문에서
동경대 전공투의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실제 전공투를 안 했으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을 거라는 말도 있어요. 실제로 그 사람이 쓴 물리 책도 여러 권 있는데 지금 대입학원에서 강사를 하거든요. 강의가 대단하다는 평이 있죠.
이 사람이 쓴 『지성의 반란』이라는 책이 있어요. 동경대 투쟁 과정에서 쓴 건데 그걸 보면서 좋았던 게, 동경대 투쟁을 통해서 세계혁명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 식으로 나올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전혀 그런 식이 아니고, 전공투 투쟁이 끝나면 나는 다시 물리학도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1941년 출생. 1964년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선생의 부름을 받고 교토대학으로 옮겨 소립자 물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차세대 노벨상 수상자’로 불리기도 했다. 60년대 말 도쿄대 전공투 운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의 한가운데에 섰고, 1969년에는 “평범하지만 자각한 인간이 되어 한 사람의 물리학도로서 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글과 함께 대학을 떠났다. 이후 대입학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여러 권의 물리학 관련 저서와 번역서를 냈고, 20여 년의 노력 끝에 『과학의 탄생』을 썼다. 이 책으로 마이니치 출판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학생 운동 인자가 전체 학생 중에서 극소수였을 것 같은데, 내부에서 강한 연대감 같은 건 있었나요?
소수이긴 하지만 내부에서 자꾸 싸우고 그러지요.
엘리트 의식 같은 건?
초기엔 있었어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익들은 바보니깐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안 그러면 천황이 신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안 하는 거지요. 운동이라는 게 대안을 제시하거나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 때만 사람들이 반응하잖아요. 운동이 그렇게 하지는 못했어요. 물론 반대한다, 그런 건 좋은데 그렇다고 그것이 대부분 학생들에게 위기 상황으로 느껴지지는 않으니까요. 천황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 생활은 있는 대로 굴러가는 거고. 그렇다면 굳이 반대 같은 거 할 필요도 없을 거고.
일반적인 교토대 인문대 학생들의 행태나 관심은 어떻게 되나요?
실제 대학 들어가면 공부 별로 안 해요. 동기 집에 놀러갔는데 책장이 없더라고요. 책이 없고. 연애는 하는데 다른 건 뭘 하는지 잘 모르지요.
근데 교토대가 아주 좋았던 게 좋은 교수들이 많았어요. 교토대 전공투 투쟁 때 직접 관여했던 사람도 있고, 투쟁의 일환으로 바리케이드 안에서 맑스를 가지고 수업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아직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컸어요. 그래서 대학 1학년 때부터 발터 벤야민에 대해 알게 되고 벤야민의 저작을 읽었고요. 그런 교수들을 못 만났다면 무식한 운동권이 되었을 텐데.
선배들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어떤 서클에서 어떤 운동을 하셨어요?
어떤 특정한 서클에 소속되어 운동했다기보다는 ‘스케쥴 투쟁’이라고 해서 그때그때 이슈별 투쟁에 참가했어요. 89년에 히로히토 천황이 죽고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천황제 반대 투쟁이 크게 벌어졌고. 91년에 걸프전이 터지면서 관련 투쟁이 있었고 92년에는 캄보디아 파병 저지가 가장 큰 이슈였어요. 그 때부터 여론 분위기가 달라졌고요. 자위대의 존재 자체가 위헌이냐 아니냐를 얘기했었는데 걸프전 겪고 나니까 자위대를 파병할 거냐 말 것이냐, 로 간 거죠. 자위대가 있는 건 당연한 게 되었고.
운동 진영에서 캄보디아 파병 저지 주장을 했고, 정부에서는 캄보디아 파병으로 일본이 국제적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어요. 캄보디아 파병 문제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는데 결국 캄보디아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투쟁은 지고 만 셈이 되었어요. 어쨌든 지고 나니까 우리한테 뭐가 부족했을까 심각하게 반성했지요. 구호로는 국제공헌이 아니라 국제연대다, 이런 걸 얘기했는데, 사실 말은 연대라고 하는데 실속이 없잖아요. 실제로는 연대라는 것이 아무래도 구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제 연대라는 걸 실제로 만들어가야겠다, 그런 의지를 굳게 가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국주의국가 내부에서 운동하는 어려움이라는 게 여기에 있어요.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단위로 생각을 하면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는 ‘국제공헌론’에 맞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국제연대라는 것은 ‘일본/일본인’과는 좀 다른 기반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먼저 일본인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그런 의식을 바꿀 수 있을까, 국제주의적이라는 사고방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러면 재일조선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국제 연대라 하면 팔레스타인에 간다든가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는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재일조선인은 금방 만날 수 있어요. 바로 옆에 사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런 운동을 하게 되었죠. 92년의 일인데, 또 그 때 한국에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도 있었어요. 그때 교토에“일한민중연대 교토연락회의”라는 조직이 있었어요. 80년대 말부터 한국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가 일본에도 많이 생겼는데 교토 지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한국의 노동운동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하면서 교류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거기 관여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일본에 온 사람이 오두희라고 지금 대추리에서 일하는 분입니다. 그 사람을 만난 게 개인적으로는 컸어요. 그러니깐 관념적인 연대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실 정치권과의 교류는 없었어요?
제도권과는 전혀 무관해요. 일본에서는 선거를 통해서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해요. 찍을 만한 정당이 없으니까. 사회당이나 공산당에 대해서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고. 특히나 일본에서는 국제적인 이슈를 생각해야 하는데 일본 공산당 같은 경우는 국내 이슈밖에 생각 안 해요. 파병 반대도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 밖에 없어요. 국민조직이죠. 사회당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은 많았어요. 투표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사회당이나 공산당을 찍기는 찍었는데.
다른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패턴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렇다고 친구들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운동권에 있으면 운동권 이외에는 안 만나게 되는 것 같은데 저는 안 그랬거든요. 친구들하고 놀았고.
교토대 사학과 나온 친구들은 뭐해요? 직업적으로.
제가 대학원은 딴 데로 갔잖아요. 대부분은 대학원은 안 갔고. 두세 명 정도 대학원 가고 나머지는 다 취직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사학과 가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 역사공부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선택지가 몇 개는 있었어요. 사학과나 독문과 아니면 미학과. 벤야민과 브레히트를 좋아해서.
근데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교양학부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있는데. 그래서 포기하고 사학과 갔어요. 특히 좋았던 게 사학과 안에 현대사 전공이 있었어요. 사학과 안에 동양사, 서양사, 일본사처럼 지역별로 구분되는 전공이 있고, 현대사처럼 시대별 전공도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현대사 전공을 했죠. 일본 현대사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일반적으로 근대는 자본주의 시대고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후부터 현대라고 구분할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거기 가면 좋은 게 고문서를 안 봐도 돼요. (웃음)
현대사 전공을 정한 게 그럼 언제인가요?
3학년 올라갈 때 정해요. 근데 수업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별로 의미는 없었어요. (웃음)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게 1학년 때 외에는 없거든요.
그럼 독서는 어떤 식으로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1, 2학년 때는 전공투 관련된 걸 일단 많이 했어요. 전공투가 제게는 아주 중요했어요. 그래서 어떤 주어진 이슈로만 사고하는 방식에서 벗어났지요. 자기 자신이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또한 그런 공동체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갖게 되었어요. 독문학도 좋아했고. 한 3학년 때 쯤부터 맑스도 읽게 됐고. 책으로 영향 많이 받은 사람이 교토대의 노무라 오사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벤야민을 많이 번역했어요.
전공투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다른 친구들하고는 공유할 수 있었나요?
나름대로.
맑스를 함께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나요?
아니오. 혼자서 읽었어요.
그럼 92년 이후의 삶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다시 들어 볼까요?
그래서 92년 쯤 큰 전환이 있었고, 재일조선인과 같이 운동했고.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 93년에 처음 한국에 왔어요.
다 혼자서 한 거예요?
다른 친구들도 스케쥴 투쟁만 하다 보니깐 지치게 되었어요. 나름대로의 운동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일본의 요세바라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서 운동을 하기도 했고. 그렇다면 나는 뭘 할까, 아무래도 자기가 꾸준히 하는 뭔가가 없으면 그때그때 반대한다고 해 봤자 근거가 될 만한 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한국에 와서 주로 노조 사람들 만나고 한총련 간부도 만났는데 근데 그때 놀란 게, 연세대에 갔어요. 거기 총학생회실 들어가니까 컴퓨터도 있고 놀라웠어요. 일본 같은 경우 제가 있던 교토대 학생회에는 돈이 없어서 컴퓨터도 없었고,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학생운동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있구나. 저에게는 학생운동이란 가난하고 수공업적인 것이란 이미지 밖에 없었거든요.
들어보니까 일본은 개인주의, 서클주의라 하면 우리는 집단주의,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서클주의적인 게 나름대로 좋기도 했고요.
말씀 들으면 부러운 점도 있어요. 시대적 상황이 달랐으니 무조건 비교할 순 없지만, 개인의 지향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 조직에 의지했던 것 같아요.
논파되었다, 할 수 밖에 없겠다
제가 태어난 72년 초에 발생한 연합적군 사건 때 죽은 사람의 일기가 책으로 나온 게 있는데 그걸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일기의 주인공이 무장 투쟁에 회의를 가졌는데, 선배가 와서 설득 당했어요. 그 날 일기를 보면 딱 이렇게 적혀 있어요. “논파되었다, 할 수밖에 없겠다.”너무 무섭더라고요.
결국 그 사람도 무장 투쟁 과정 중에 죽어요. 그래서 제 결론은, 아무리 논파되더라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깐 운동이라는 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논리적으로 설득 당했다고 해서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조직을 못하는 운동가가 됐는데. 그걸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항상 느슨하게 관계를 가지게 되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무책임한 운동이 되죠. 인간관계로만 돌아가니까. 그런데 그 일기를 읽고 받은 공포라고나 할까요? 그 글이 전달한 공포. 그건 몸에 아직도 박혀 있어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연합적군(聯合赤軍): 1971년에 ‘공산주의 동맹’의 가장 과격한 분파인 적군파와 ‘게이힌(京濱) 안보 공투’가 무장투쟁을 목표로 결성한 군사혁명조직. 혁명이론의 불일치에는 신경 쓰지 않고 ‘총이 당을 만든다’는 슬로건 하에 산악캠프를 바탕으로 군사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경찰에게 캠프가 발각된 후 아사마 산장에서 총격전이 일어나 캠프가 해체되었고 이후 조직 강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14명(이전의 2명을 포함해 총 16명)의 동지를 살해했다. 연합적군의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일본 좌파운동의 몰락을 상징하며, 전공투 세대의 사상적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 미시마 유키오 외,『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p.193
연합적군의 린치 사건이란 1972년에 일어난 것으로, 깊은 산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혁명 완수를 위한 인간형에 다다르지 못한 동지를 집단 린치를 통해 살해한 사건이었다. 매일 밤 ‘총괄’을 통한 자기반성, 그리고 훈련 지휘자의 감시와 처벌에 의해 린치의 대상이 결정되었고, 그 대상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했음을 시인한 뒤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 위의 책, 역자 서문에서
그때부터 한국어도 배우기 시작했어요. 기초를 하고 혼자서 책을 읽었어요. 역사책을 봤고,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책들 몇 개 봤어요. 졸업논문을 쓸 때에도 실제로 한국 책을 보고. 학교에서 현대사 전공이긴 했지만 한국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할 생각은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운동을 계속 재일조선인과 한국과 관련된 것을 하니까 공부도 같이 해볼까 해서, 공부도 한국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럼 학사논문부터 한국 현대사에 대해 쓰신 건가요? 뭘 쓰셨어요?
경성제대에 대해서 썼어요. 처음에는 식민지 시대의 재조선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그 사람들의 심성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인들이 억압을 하고 수탈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외면하지요. 그런 관계를 부인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들이죠. 알면서도 부인하는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지식생산을 했던 경성제대 사람들에 대해 썼어요.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이라고 있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제동맹을 같이 했거든요. 실제로 한 건 별거 아닌데 그래도 중요한 게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이 했다는 것. 일본인이 주도했어요. 어떤 책에 의하면 이치카와(市川朝彦)라는 일본인이 왜 이런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지금 조선에 와 있다, 여기에 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한국어도 배웠다고 하고요. 옆에 있는 한국인들을 직시하고 실제로 관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경성제대 반제동맹의 일본인들의 문제의식은 일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틀을 강화시키잖아요? 자기를 지켜야 하니까.
그럼 대학 4학년은 전반적으로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 5학년까지 다녔는데요. (웃음) 일본 운동권이 좋은 게, 뭐 운동권뿐이 아니지만 일단은 나이를 안 따져요. 선배다, 형이다, 안 따지고.
한국은 따지죠. (웃음)
근데 저도 그런 게 몸에 배었어요. 일본에 가서도 나이 물어보고. (웃음)
재일조선인과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같은 것도 하고 그랬는데, 재일조선인 조직이 몇 개 있어요. 재일한국학생동맹이란 데가 있는데 원래는 민단계열로 있다가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된 민단의 민주화, 한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삼게 된 조직이에요. 그런 사람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같이 하는 조직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기서도 같이 하고.
재일조선인 문학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특히 김시종이란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김시종이 전후 30여 년간 재일조선인은 양심적인 일본인의 거울에 불과했다고 했거든요.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양심적인 일본인인가, 비양심적인 일본인인가 판정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연대나 관계는 없었다는 지적을 했어요. 저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저에게도 재일조선인이 그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거울 정도.
제가 졸업논문 준비하다가 어느 친구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분이 문세광(-재일조선인,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암살범)의 형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친구가 문세광 조카예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재일조선인 문제로 논문을 쓴다니까 조선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는군,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그런 관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고민을 계속 하게 되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상대방을 착취하는 거잖아요. 그냥 거울로만 이용을 하는 거면. 그런 건 결국 진정한 연대라고 할 수 없고. 거기서 벗어나려면 일본인이라든가 조선인이라는 틀을 깨버려야 한다, 그걸 유지하고는 안 되는 거지요.
어떻게 깨요?
그거야말로 인식론의 문제인데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서양이라는 걸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라는 지표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잖아요.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키고 있다기보다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을 때 사카이 나오키가 쓴 것을 만났어요. 95년도에 나온 건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어요.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공부를 안 해서 그 때는 무슨 소린지도 잘 몰랐지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 고민과 비슷한 고민, 어떻게 하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일본인이라든가 한국인으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그런 틀을 넘어서 어떻게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고민.
*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영국 회사에 입사해 런던에서 일했다. 공부를 결심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일본의 여러 대학에 ‘후기 구조주의와 현대 일본사상’이라는 연구 주제를 제출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코넬대에서 아시아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다언어 잡지’흔적(Trace)’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1991) (1997), 임지현과의 대담집 <오만과 편견> 등이 있다.
이 글들을 여러분 앞에 내놓다는 생각은 나를 겁나게 하면서도 흥분시킨다. 여러분과 나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국제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일본인으로 처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해 종족과 인종, 민족 정체성은 원해서 선택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사실 가능하면 일본인으로 처신해야 하는 상황을 피해온 터다. 그러나 이따금 일본인으로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역사적 이유로 불가피한 때가 그러하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이유들이 이 순간도 그런 경우로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아직도 동아시아와 미국을 지배하는 식민지 관계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나 자신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일본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여러분께 말을 걸며 나는 마치 한국 국민에 대한 일본 혹은 미국 국민의 위치와 관련된 나의 거북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모두 극복이라도 한 듯 이 더러운 역사들을 초월한 어떤 결백한 지위를 누린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국민의 위치를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 종족적, 민족적 지위를 해산하고 여러분과 나의 관계에서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갈수록 덜 중요하게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을 일본인으로 내세운다.
– 사카이 나오키,『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이득재 옮김, 문화과학사, 2003, 한국어판 서문에서
95년이면 대학원에 가셔서인가요?
제가 바로 대학원 들어가지 않고 졸업하고 2년 정도 후에 갔어요. 사실 졸업논문 쓸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논문 내면 바로 대학원 시험인데 논문도 못 썼어요. 제출이 1월 11일 경이었는데, 12월 31일까지 한 자도 못 썼어요. 자료 준비해서 대충 머릿속에는 있는데 못 쓰겠더라고요.
바로 1월 1일 집에서 결심했어요. 그 때 친구들이랑 같이 살았는데, 연말이라 딴 친구들 다 나가고 혼자 집에 있었어요. 새벽에 샤워를 했나 그러고 나서 대학원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대학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편해졌어요. 논문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고. 그리고 열흘 만에 썼어요.
그럼 5학년 후반기 때 대학원 가려고 생각했겠네요.
네. 대학원은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취직을 하면 그러기 어려우니까 그냥 막연하지만 자연스럽게. 대학 졸업 직후 아르바이트하고 운동하면서 지냈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한 1년 정도 지나니깐 아닌 것 같더라고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가 없잖아요. 누구하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리가 없으니깐 그리고 소속이 없으니까 정보량 같은 게 전혀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대학원 석사과정 들어가신 게 97년이겠고, 대학원을 교토가 아니라 오사카로 가셨네요. 교토에서 대학원 진학 안 하고 오사카로 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교토대 선배 중에 사키야마라고 라틴아메리카 연구를 한 사람과 어디 가는 게 좋을까 상의했더니 오사카대 일본학과 가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도미야마 교수가 그리 오는 걸 사키야마가 알고 있었어요.
『전장의 기억』 쓰신 도미야마 교수요?
네. 맞아요. 그 책, 제가 추천해서 번역된 건데요. 이산출판사에서 낸 것 중 두 번째로 잘 안 팔린다더군요. (웃음)
*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1957년 일본 교토(京都) 시에서 태어났다. 교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베(神戶) 외국어대학을 거쳐, 현재 오사카(大阪) 대학 일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에 『근대 일본사회와 ‘오키나와인’: ‘일본인’이 된다는 것』과 『폭력의 예감』, 『전장의 기억』 등이 있다.
도미야마 교수가 어떤 분인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도미야마도 교토 사람인데요. 오사카 가기 전에는 고베 외국어대에 있었는데 먼데도 교토에서 계속 다녔어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대중적인 사람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오키나와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아요. 『전장의 기억』은 1995년 8월 15일, 전후 50년 되는 바로 그 날에 낸 건데. 기억의 내전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역사 수정주의에 기반한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등장하고, 바로 그랬던 시기거든요.
그 전부터 도미야마가 쓴 걸 읽긴 했어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근대 일본사회와 오키나와인』도 재밌게 읽었고, 『전장의 기억』도. 일상적으로 보면 둔한 사람이에요. 나사가 몇 개 빠진 게 아닌가 싶게. (웃음) 원고를 봐도 조사가 꼭 몇 개씩 빠지고. 또 한자에 약해요. 기억나는 일화를 하나만 들면, 수업을 하는데 어떤 한자를 못 써서 조교한테 부탁해서 쓰게 했지요. 泥 자를 쓰려고 하는데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난감하지요. 웃긴 일화를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날카로워요. 언어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힘이 존재한다고 할까 문장 강도라는 게 읽혀요.
일본학과, 우리로 치면 한국학과네요.
네. 웃긴 건 일본학과라고 하면서 일본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요. (웃음) 오사카대 일본학과는 나카소네 수상 때 만든 건데. 원래 우익 국가주의자들이 만들어서 이상하게 좌파의 소굴이 됐어요.
대학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열심히는 안했고요. 거주지를 오사카로 옮기지는 않았고 계속 교토에 살았어요. 멀어서 더 안 가게 되었어요. 94년부터인가 친구들이랑 셋이서 집 빌려서 같이 살았거든요.
같이 산 친구들의 경향도 비슷했어요?
비슷한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이과대였어요. 생물학과, 물리학과. 기본적으로 학생회장 집이었어요. 저는 문과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친구 둘도 이과대 학생회장을 지냈어요. 한 애는 연극을 했고요. 방이 세 개였는데 개인 방은 안 만들었어요. 그런 좋은 환경에서 사니까 옮기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로 대학 관계자들은 교토에 살게 되면 못 떠나요. 너무 좋아서.
그 집이 당시 교토대 학생회의 산실이네요. (웃음)
외교가 아니라 연대를
오사카 시절의 특기할만한 점은?
97년은 그럭저럭 지냈고, 한국인 여자친구 얘길 해야 되는데,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고베 외대에서 재일조선인 심포지엄이 있었는데 서경식이 연사고, 패널로 도미야마, 박일(- 재일조선인, 오사카시립대 교수, 경제학 전공), 정영혜(-재일조선인, 오즈마여대 교수, 사회학 전공, 여성학 연구) 등 규모가 컸죠.
* 서경식(徐京植)
1951년 일본 쿄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도쿄케이자이대학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7년 현재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로 한국에 체류 중이다. 재일교포학생간첩단사건으로 복역한 서승, 서준식의 동생이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밖의 지은 책으로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등이 있다.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근대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희생되어 지금도 분단의 고통에 억눌리고 있는 우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주의로 전락하기를 최후까지 거부하면서 미래에 모범이 될, 진정으로 열린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일조선인은 그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것이 일본 것이든 조국 것이든 모둔 국가주의의 허위성과 위험성에 가장 민감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일본인 뿐 아니라 조국 사람들에게도 재일조선인은‘탄광의 카나리아’인 것이다. 조국의 독자들은 이 카나리아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 서경식,『난민과 국민 사이(부제: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임성모, 이규수 옮김, 돌베개, 2006, 서문에서
심포지엄 준비과정에서 그 친구와 인연이 닿았어요. 그 친구가 97년에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어요. 그 때부터 저도 자주 한국에 오게 됐어요. 쿄토의 여름은 지옥이거든요. 습하고 더위가 몸에 달라붙어요. 더위라는 물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 여름방학 때 한국에 피서를 왔고 한 달 정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저도 한국사를 공부하니깐 한국어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98년에 휴학하고 한국에 왔어요. 여자친구가 계기가 된 셈이에요.
만화가 고경일이라는 사람을 일본에서부터 알고 지냈어요. 교토 세이카대라고 거기 만화학과 대학원이 있었어요. 한국인으로는 고경일이 만화 석사 1호일 거예요. 그래서 일본에서 전시회도 같이 하고. 옛날에 경일이 형 기사가 한겨레에 나왔는데 거기 제 이름도 나와요. 한국 와서 경일이 형이랑 같이 살면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을 다녔어요.
그땐 얼마나 한국에 계셨어요?
어학당 다닌 건 9개월. 12개월 다닐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학기는 선생님이 너무 안 맞더라고요. 아무리 말을 못 한다고 해도 어른이잖아요. 그런데 어린애 취급을 하니까 너무 기분이 나빠 이틀인가 다니다 말았어요. 여자친구 이야기를 또 하게 되는데, 제가 어학연수 오고 나서 그 친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때가 안 맞았던 거지요. 그러면서 계속 떨어져 있다 보니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때 연세대 앞에는 아직 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이 있었어요. 거기 너무 좋잖아요. 볼만한 책 많죠. 거기서 또 사람을 사귀게 됐는데 [오늘의 책]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오늘의 책]에 매일 다녔어요. 어학당 수업이 1시에 끝나면 서점으로 갔어요. 거기서 책 정리도 하고요. 그래서 한국의 인문사회 출판 상황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어떤 책은 번역이 되어 있구나, 라는 식으로.
소위 진보적 출판 계통은 다 알게 되었겠네요. 여자친구도 사귀고.
그래서 [오늘의 책]이 저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에요.
석사논문은 어떤 내용으로 쓰셨나요?
학부 졸업논문도 근대사를 했는데, 대학원 가서도 처음엔 근대사 하려고 했어요. 일제 시대 도시빈민인 토막민에 대해 도시위생이나 그런 관점에서 논문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 와 보니깐 현대를 모르고 근대사 공부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배자 입장에서는 8월 15일에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후로도 삶이 연속되잖아요. 그러니까 연속성에 대해 모르면 의미가 없지요. 가령 독립운동에 대해 연구한다면, 현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지 않고, 그냥 독립운동을 했다, 그게 다라고 끝낼 수는 없잖아요. 현대사를 모르면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하고 얘기할 통로가 안 만들어져요.
그래서 현대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다면 석사논문을 뭘 쓸까, 그런 상태로 99년에는 일본에서 우울증 비슷한 상태로 지냈죠. 논문을 써야 하는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몇 달 학교 나가다가 안 나가게 됐어요. 집에서 친구들이랑 영화나 보면서 은둔 생활했는데 그래도 도미야마가 신경을 써 줬어요. 도미야마 집에는 가끔 갔는데 중학생 아들 과외를 해 달라고 해서 거기서 과외하고. 그래서 도미야마는 자주 만났어요. 요즘 대학이 어떤지 그런 소식도 듣고.
아무래도 그런 상황에서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0년에 다시 한국으로 왔어요. 무작정. 논문도 안 쓰고. 여자친구가 서울에 있으니까 그냥 서울 와서 일본어 강사나 할까, 논문 때려치우고, 그런 생각도 해 보고. 그러다가 여기 서울에서 논문 준비를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석사논문을 한국에서 썼거든요. 그 때는 신분이 불안정했어요. 신분이 관광객이잖아요. 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성균관대의 서중석 선생님 수업을 청강하기 시작했고 청강하니까 자극이 되더라고요. 사실 일본에서는 한국 현대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근데 여긴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러면서 많이 공부하게 되고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죠. “대한민국 초기의 반공체제 형성과정”이라는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어요.
*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한국 학계 최초로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학위논문 주제를 “해방 후 민족국가건설운동과 통일전선”으로 정하고 일제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 시기의 역사를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면서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고 독립·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을 각 정치세력의 활동을 통해 그려낸 바 있다). 동아일보 기자, 역사연구소 부소장,「역사비평」편집주간으로 일했다.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근현대 민족문제연구』,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등이 있다.
큰 주제네요.
내용은 별거 아닌데요. 근데 나름대로 1차 자료를 많이 찾아가면서 썼으니까.
한국 현대사 공부를 제대로 했겠어요.
1차 자료를 보면서 하는 거니까 제 입장에서 역사를 재구성해 보는 거잖아요. 공부가 많이 되었어요. 석사논문 제출하고, 박사는 한국에서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청강도 하기 시작했으니까. 경비가 문제였는데 한국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이 있어서 그게 되어 정부초청장학생으로 2001년 가을 성균관대로 왔어요.
그러면서 2001년부터 통역도 하기 시작했어요. 동시통역을 해 봤어요. 그 전부터 가끔씩 통역은 했었는데. 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학술대회가 있는데 97년에 대만에서, 2000년에 광주에서 했고. 2001년 교토에서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동시통역이라는 걸 해 봤어요. 해 보니까 되더라고요. 훈련을 받은 적은 없는데.
그러면 지금은 한국에 오신 지 한 5년 되셨나요? 요즘엔 어떻게 지내요?
집에서 공부하고 처박혀 있어요. 너무 시간이 없네요. 역사학연구소 등 여러 군데 나가는 데도 있어요. 갖가지 일 때문에 계속 바쁘네요. 통역이나 번역도 있고.
일본은 잘 안 가고요?
부르면 가긴 해요. 재일조선인 문학에 대해 발표하기도 하고요. 최근엔 작가 이양지에 대해 얘기했죠.
* 이양지(1955~1992)
일본명 다나카 요시에(田中淑枝).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 출생. 작품을 통하여 재일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의 뿌리에 대한 갈망과 오뇌를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1975년 와세다대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1980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1982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휴학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첫 소설 「나비타령」을 발표하였다. 1983년 「해녀」를 발표하였고, 1984년 서울대학에 복학하여 「각(刻)」을, 잇달아 「내의(來意)」, 「푸른 바람」등을 발표하였다. 1988년 서울대학교 졸업 후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 대학원에 입학, 「유희(由熙)」를 발표하여, 1989년 이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하였다. 1992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돌의 소리」를 집필하던 중 감기로 인한 심근경색증을 일으켜 죽었다. 모든 작품을 통해 재일한국인의 모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또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들이 설 땅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갈등과 고뇌를 집요하게 모색하였다. 「돌의 소리」는 10장에 이르는 방대한 장편소설로 구상되었으나 그 중 제1장으로 유작이 되었다.
저는 마치 한국어의 바다와 같은 국문과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인간에 있어서의 언어, 다시 말해서 인간에 있어서의 모국어와 또한 모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저 자신의 존재, 즉 실존의 문제와 직결하는 심각한 과제로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습을 한국어의 바다에서 헤매는 조난자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나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유학을 단념하고 다시는 모국에 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서울대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언젠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이었고, 도중에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저 자신에 대한 판단과 객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이양지,「나에게 있어서의 母國과 日本」(1990년의 한일문화교류기금 초청 강연회에서 이양지가 직접 우리말로 써서 발표한 글)에서, 『돌의 소리』, 삼신각, 1992
그러면 지금은 박사 논문 쓰시는 건가요?
논문 방향은 잡았어요. 족청계에 대해 쓰려고요. 족청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정확하게는 모두 민족청년단(“족청”) 출신들은 아니고요.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자유당을 만들었어요. 재미있는 건 그 사람들 중엔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그러다 1930년대 중반 쯤 전향하고서 해방 후 우익이 되는데 이들의 활동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게 녹아들어가 있어요.
나치들이 국가사회주의자였던 것처럼?
그렇죠. 실제 미국에서도 족청계 이 사람들 국가사회주의자라 했고 그래서 나중에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이건 한국의 분단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해요. 보통 냉전구도가 그냥 생긴 것처럼 인식되는데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에도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에도 반대했어요. 제3세계적인 현상이죠.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는 대체로 그런 현상을 보였죠. 혼합경제라든지 민족주의적인 기반 위에 국가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는데, 그런 요소들이 한국전쟁이 나고 휴전될 무렵 제거되고, 50년대 후반에는 완전히 미국식으로 변해가지요.
사실 동아시아에서는 좌파, 우파라고 하는 분석 도구로서의 개념이 애매하죠. 좌파,우파가 딱 붙어있으니까. 좌파가 별다른 노력 없이 우파로 전향하는 게, 크게 보면 전향이지만 어떤 아비투스의 차원에서는 함께 가는 거고. 민족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1930년대라는 위기의 시대니까 그랬던 거지요. 30년대에는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가 밝은 미래가 아니고. 거기서 국가 사회주의, 국민 사회주의가 세계적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유당이 만들어졌지요. 자유당을 만들 때 모델이 중국 국민당이었어요.
아까 사카이 나오키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후지이 상이 번역한 사카이 나오키의 책 『번역과 주체』 번역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제가 그 책을 처음에 특별히 소개한 건 아니었고요, 원래 번역은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어요. 제가 같이 사는 사람이 이산출판사에 다녔거든요. 그래서 아까 말한 책 도미야마의 [전장의 기억]도 소개해줬고. 출판사에서 초고를 봐달라고 해서 검토하는 과정에서 제가 아예 번역을 하게 되었어요.
번역을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번역을 할 때 사실 중역은 피해야 되잖아요. 그 지점에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번역이라는 것, 어떤 관계가 접혀있는 거잖아요. 그걸 펴야 되는데 펴게 되면 거기에 있던 역사적인 과정을 없애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번역에 있어서 원본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까지 고민하게 됐어요. 이걸 번역하면서. 그렇게 되면 사카이 나오키가 무슨 말로 생각했을까를 끝까지 따져야 되잖아요. 처음에 영어로 생각해서 썼을까, 일본어로 생각해서 썼을까. 머릿속에서 번역 과정부터 있는지.
사카이 나오키가 말한 거, 객체라는 게 만들어지면서 주체가 만들어진다, 객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게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아주 좋은 시사점을 줬어요. 관계도 인식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점. 이런 식으로 인식론적 주관과 실제 행위체로서의 주체를 분리할 수 있는 게 저에겐 아주 희망적이었어요.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개념은 주관에 속하는 거잖아요. 주체는 다르지요. 재일조선인과 같이 운동을 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만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적인 존재가 만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 그렇다면 무언가 할 때,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틀에만 수렴되지 않고, 넘쳐난다고 해야 할까, 새로 우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출발점은 그랬어요. 그렇게 우리라는 부분을 만들어 나가면서 도대체 나의 어떠한 부분이 일본인인지 검증이 될 것이고.
한국어판 출판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번역의 이미지가 이제 실현되는구나 하는 느낌이 문득 들었습니다. 번역의 번역의 번역……이라는 연쇄가 바로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대부분 처음 영어로 쓰였고 그것을 내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래 일본어로 썼던 글을 거꾸로 고쳐 쓴 것도 있습니다. 지금 그런 글들이 번역자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남몰래 품어왔던 기대의 실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쓴 글이 번역되었을 때 어떻게 읽힐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영어 독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쓸 수도, 일본 독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쓸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미지의, 내가 모르는 말을 하는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내 언어 속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이 완결된다는 환상을 나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진지하게 말한다는 것은, 민족이나 국민으로 표시된 안전권에서 떠나는 것, 그러한 안전권에 의해 보장된 안심이나 연대감에 작별인사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은 나에게 사활의 문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작별인사를 할 상대인 일본어나 영어가 마치 명료하게 구성된 공동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 자체는 엄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두 개의 민족어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양의적인 입장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번역자 후지이 다케시 씨 덕분에, 한국인 대 미국인 또는 한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식의 국민 대 국민 또는 민족 대 민족이라는 관계와는 약간 다른 관계를 독자들과 나 사이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약간 다른 관계를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부를까 내심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카이 나오키,『번역과 주체(부제: ‘일본’과 문화적 국민주의)』, 후지이 다케시 옮김, 이산, 2005,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은 외국인이 외국어로 쓰고 외국인이 외국어로 옮긴, ‘외국인’을 위한 불순한 책이다.
사카이가 실제로 이 책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열린 민족주의’나 세계시민주의 같은, 이른바 모범답안과는 거리가 멀다. 사카이는 사회의 이미지로서 “외국인들의 비집성적 공동체”라는 파격적인 이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이라는 것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이 통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타자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대화라는 실천적 관계는 결코 어떤 일정한 결과를 보장하는 행위가 아니며,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항상 ‘외국인’을 만나고 자기 자신 또한 ‘외국인’이 된다.
사카이가 인식론적 주관과 구별해서 도입하는 실천의 행위체로서의 主體란 바로 이런 ‘외국인’의 별명이기도 하다. subject라는 말 안에는 이미 主體라는 ‘외국인’이 살고 있는 것이다. 主體는 실천을 통해서 항상 주관의 의도를 넘어 뜻밖의 무언가를 낳음으로써 주관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침범한다. 말실수를 하고 오해를 하며 엉뚱한 행동으로 자꾸 맥이 끊기는, 매끄럽지 못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主體들이다. 하지만 경계선이 흐려지는 공포, 자아가 상실되는 공포에 직면한 주관은 외국인이라는 실정적 형상을 만듦으로써 내국인이라는 내부성을 확보하려 한다.
끊임없이 균질적이기를 요구하는 세계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역자 멋대로 이 책을 바친다.
– 위의 책, 옮긴이의 말에서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산다는 것
공숙영: 한국 유학생으로 오시기 전까지의 개인사를 쭉 들어보니 흐름이 잡히네요. 학생운동 하신 분인지 몰랐는데 흥미롭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꽤 시간이 흐른 편인데요. 한국에 사시는 일본인으로서 느끼는 소회랄까요, 그런 게 있을까요?
일본인이라는 점을 많이 의식하지는 않거든요. 대학원에서도 일본인 취급은 안 받았어요. 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남파 간첩이다, 그런 이미지였어요. (일동 웃음)
공숙영: 하긴 한국 일반인들보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아시잖아요. 그런 점을 감안하면 사실 한국인보다 훨씬 더 한국인 같아요. 주변에 계시는 한국인들, 주로 만나시는 한국인들도 같이 공부하거나 활동하는 분들이니까 동반자적 관계라고 할 수 있겠고요. 하지만 국가적 관계를 놓고 보면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청산 안 된 여전히 불편한 관계거든요. 아까 국가를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지만, 현실을 사는 일반인, 여전히 세금 내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국가라는 틀 안에 사는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이야기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일반적인 반일감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는 없었나요?
한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을 통해 느낀다기보다는 재일조선인과의 차이를 통해 내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느껴요. 한국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을 만나면 그 사람이 한국말 아무리 잘해도 한국말 잘한다는 소리를 안 하거든요. 근데 저는 잘한다는 소리 듣게 되잖아요. ‘국민’에서 ‘국민’으로 이동하는 이미지로 파악이 가능하니까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건데, 재일조선인들이 언어에 대해서 느끼는 이율배반적인 애증관계? 그런 게 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언어에 대한 고민을 안 해도 되는 거지요.
모험: 서경식 선생님의 글에서 봤는데, 재일조선인이 한국말 못 하는 걸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재일조선인도 한국인인데 당연히 한국말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런 거지요. 재일조선인의 경우 한국에 와서 살아도 자기가 어떤 언어로 살아야 하는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 저는 그런 고민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죠. 국어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재일조선인은 그 사이에 있잖아요. 오히려 그럴 때 일본인이라는 걸 느껴요. 소속이 확실하니까.
공숙영: 아까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라는 주관의 틀을 넘어서보자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인식 하에서 실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실제로 많은 것을 하지는 못했어요. 연대를 하는 방식이 재일조선인이 제기한 방식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정도였어요. 연대운동을 하는 일본인들도 한국어 공부를 안 했어요. 이것은 들은 이야기인데, 아까 재일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같이 하는 조직 같은 게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그 회의에서 어떤 일본인 학생이 재일조선인 측에서 나온 방침에 반대를 했어요. 그랬더니 다른 일본인 학생 왈 “누구누구씨는 일한연대운동을 할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재일조선인이 설정하는 방식을 일본인이 따르는 게 연대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분업이 있었어요. 재일조선인의 고유 영역이란 게 있고 그걸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틀이 너무 뚜렷하잖아요. 접점에서만 같이 하면 된다, 저는 정말 그게 싫었어요. 연대를 한다면 끝까지 다해야 하는 것이 연대지, 자기하고 관련된 것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외교잖아요. 연대가 외교는 아니지요.
공숙영: 소위 공동체라는 걸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나라는 개인이 공동체의 진보나 개선을 염두에 둔다면 이 때 공동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인가, 어떤 맥락에서 구성되는가. 여기 함께 자리하신 중문학자 이정훈 선생의 말이 기억나네요. “북경 가는 게 부산 가는 것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단순히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겠죠. 후지이 상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실 법한데요.
이정훈: 국민적 경계를 넘어 새로운 우리를 만드는 게 궁극적으로 가능한가 아닌가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도의 비극성에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경계가 깨지면 또 다른 경계가 만들어지고, 그건 아주 거시적인 것이고 경계를 깬다는 것은 실제로 주관을 깨뜨리는 건데, 주관을 깬다고 새로운 주체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은 열리고 실제로 주관만 깨어지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고요. 현실의 운동에서는 실제로 몸에 좌절만 남죠. 이게 비극이라는 거죠.
문수현: 이정훈 선생님은 한국적인 민족주의의 기반으로 말씀하신 것 같고요.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상황을 보면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세계대전 참전에 찬성하면서 인터내셔널이 흐지부지되고, 이차대전 후 유럽 재건 움직임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서 유럽통합이 시도되고 지금까지 온 건데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건 어떤 식으로건 민족주의를 극복한 거잖아요. 조금 더 넓어지려는 주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고. 민족주의라는 좁은 주관을 깨뜨리는 과정인데 그렇다면 깨뜨려진 주관이 객관적인 주체 형성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숙영: 유럽 통합이란 이상이 유럽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계속 존재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유럽 통합이라는 게 그 자체로 진보라 말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결국 그들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것일 테고. 게다가 그들의 이상을 우리 동아시아에 그대로 적용한 건지 의문이고, 유럽이 동아시아와 다르다는 점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겠죠.
문수현: 유럽 연합은 일상과 근접해 있어요. 자신을 ‘유럽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유럽 연합은 정치적인 공동체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이죠.
공숙영: 경계가 넓혀지고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진 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현상이 되고 그것을 진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실제 개개인의 삶의 질에 있어서 향상인지, 유럽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구체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인지 물어보고 싶은 거죠.
문수현: 간단히 말하면 예전엔 크로아티아로 갈 수 없었는데 이젠 갈 수 있고, 외국의 느낌이 아니라 같은 유럽연합 내를 여행하게 된 거죠. 그 안에서 내가 정체성을 펼 수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고.
공숙영: 외연의 확장을 느끼는 건데……
문수현: 유럽에 있었던 제가 감으로 느끼는 건 더 많았어요. 일상에 침투해오니까. 실제 생활로 온다고 생각해요.
이정훈: 국민주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지역과 함께 하는 국면이겠죠. 그런데 국민주의가 필요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99%가 국민주의적 생각 안에서 살아가는데.
문수현: 그게 유일한 현실이라 생각하시는 것 아녜요? 1%는 이상이고.
이정훈: 아니 그게 아니고, 1%의 소수가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 1%가 삶을 건다고는 하지만, 그 선택이 갖는 효과랄까, 그 점에 생각이 미치면, 아까 비극성이란 말도 했지만……
그 1%가 한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정훈: 내가 묻는 건 이런 거예요. 아까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윤리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는데, 후지이 상이 말하길, 일본 지식인에게 재일조선인 문제가 거울로 작용하는 상황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실천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롭냐는 거죠.
한계적인 상황이 돌파, 해탈되는 상황이 아니라 어느 날 다시 일어나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닌지, 열심히 투쟁, 실천했지만 많이 움직였지만 눈을 떠 보면 다시 그 자리로 늘 되돌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종류의 감수성, 감각이야말로 진정성과 연관되는 거 아닌가. 왜냐하면 자기의 위치가 1%든 뭐든 간에, 이런 종류의 운동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 제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자기 자신은 별로 반성이 안 되는 거죠.
가령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일본인이 개입할 수 있을까요? 재일조선인이나 한국인과 연대하는 방식으로? 제가 중국 민주화 운동에 관심은 있지만 관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자칫 잘못 관여하면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이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여해야 하는가에 관한 딜레마 비슷하게 한국의 좌파들이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무얼 할 수 있는가, 어찌 생각하면 심플한 문제죠. 기본적인 인권 의식이 있다면 가서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감각적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게 제 답이거든요. 방관론자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 상황 속에 뿌리박는 거라면 정답이겠지만, 그게 다른 경우에도 늘 정답은 아니죠. 그래서 늘 안전하고 쉬운 자리가 되죠. 삶 속에서 매일 좌절해 본 사람들과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비극적인 인식이랄까, 늘 느끼는 자기 한계가 있는 거죠.
어떤 상태를 지속하는 게 중요한데,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국민 아닌 상태라는 게 성립되긴 어렵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국민으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이라는 건 극소수죠. 그런 극소수가 존재하느냐 않느냐는 것, 일 프로씩이나 있으면 어디나 존재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런 존재, 어떤 상황이 되건 간에 “나는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극소수라 하더라도 한 사회는 단일한 정치체제로 완전히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극소수라도 그런 존재를 사회적으로 완전 배제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김시종이 그런 얘기를 했는데, 우리는 계속 패배를 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계속 패배하기를 그만 뒀을 때 진정한 패배가 온다고.
이정훈: 저도 패배가 중요하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 자체가 일본적인 맥락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요? 한국을 보면 진보주의자가 이젠 결코 극소수가 아니거든요. 현재의 참여정부도 진보주의자에 넣는다면 50%가 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사람들이 가지는 한계가 있잖아요. 우리가 문제 삼는 빈민주적인 생각에 봉착되어 있다는 것. 어떤 종류의 사람들도 특정한 상황에 놓이면 다수화해요.
그래서 소수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결론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고.
이정훈: 51%가 소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미 다수화되어 가고 있는 자기를 스스로 비판하고 내부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제기를 하는 겁니다, 저는. 뉴라이트로 가지 않으면서 좌파 내부에서 선택지가 뭐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자는 큰 프로젝트와 더불어 생각해봐야 할 단계에 오지 않았는가.
사카이 나오키가 제기한 문제가 일본에서 이론적인 약발이 떨어졌다고 보는데, 그건 담론 그 자체로 떨어져버린 것도 있겠지만 상황이 어떻게 보면 사카이가 십 몇 년 전에 던진 문제들을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자본 또한 자기들의 방식으로 국민국가의 관계를 넘어서고 있죠. 물론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국민국가가 이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국민국가 비판이라는 코드 하나가 가지는 유효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거죠. 어떤 방식으로 국민국가 비판을 어떻게 다시 비판할거냐. 지금에 와서는 이 기획이 중요한 문제 같은데.
그러니까 어떻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냐가 관건 아닐까요.
이정훈: 한국의 현 상황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과잉적이고 또 힘이 없잖아요.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영역이나 비판의 공간이 한국에서는 넓게 만들어져 있잖아요. 근데 그래서 훌륭한 게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고 있죠. 일본의 우익화가 그렇고 한국의 잘 나가는 시민사회가 별 힘이 없는 거죠. 또 다른 좌절. 한국이라는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문제를 겪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후지이 다케시의 문제의식이 약간은 시대착오라고 해야 하나, 일본 말고 한국에서는 힘이 없는 문제 제기 아닌가 하는 거죠.
실은 자기 안의 소수성을 인식하는 것 못지않게 자기 안의 다수성을 인식해야 총체적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텐데요. 궁극적으로 국민주의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내안의 국민주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없어지지 않는 국민주의, 이것을 인정해야 그 다음이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는 건 느끼는 바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개입할 것인가, 그런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데……
이정훈: 저는 박노자란 존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데요. 박노자가 외부인으로부터 편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이런 감을 지울 수가 없어요. 좌파는 우파와 다른 방식으로 편안해질 수 있어요. 좌파를 선택함과 동시에 안전해지는 게 있는 거죠. 자신을 계속 위험 속에 처하게 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진정성이 나오는 게 아닌가. 우파나 진정성 없는 좌파나 공히 특정한 입장을 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안전해지는 것이라면 결국은……
좌파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무능력이랄까 괴리 같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능한 좌파와 반성 없는 좌파와 비교할 때 뉴라이트들이 그렇게까지 비겁한가, 물론 그 중에는 투기꾼들이나 기회주의자들도 많겠죠. 하지만 매일 욕먹으면서 자기 자신을 불안전한 위치로 놓는, 좌파와의 생산적인 논쟁에 있어서 기여할 수 있는 우파라면 필요한 존재들 아닌가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본인은 개인 후지이 다케시로서 인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본인으로서 불가피한 지점을 관념적인 차원에서 봉인해 버리고, 나머지 것만 우리에게 얘기할 때 그게 과연 힘이 있느냐는 거죠. 지금 여기 한국에서 특이한 존재라는 점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기특한 일본 젊은이라는 정도?
애초부터 난 길이란 없다
공숙영: 사실 애초에 후지이 상을 인터뷰 하고 싶었던 이유를 따져 보면,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해볼 때 우리 또래 일본 젊은이가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지금 이정훈 선생이 문제제기하신 것과 유사한 맥락일 텐데, 일단 일본에 계실 때는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고민을 창출하고 그 안에서 흐름을 만들어 오셨잖아요. 그 결과로 여기까지 오신 거고. 아까 두서없이 한국인들과의 차별의식이 생기느냐고 질문했던 건 한국에 오신 이상 새로이 위치를 잡고 문제설정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어쨌든 지금 여기 발을 붙이고 살고 계시잖아요. 그건 굉장한 의미인데 결국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사는 존재고 이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그게 자기를 규정하니까. 현재의 고민은 뭐예요? 물론 박사논문 쓰시는 거 일단 중요한 문제일 테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어느 위치에서 뭘 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해요. 한국 사회라는 것에 대한 감이 온 게 최근 몇 년 간이거든요. 그 전에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디에 어떤 운동이 있고 그런 게 감이 잘 안 잡혔는데. 최근에 어느 정도 파악이 됐어요. 할 일은 있을 것 같은데요.
한국에 와서 좋았던 게 우선은 편했어요. 일본 사회는 대단히 꼼꼼하게 짜여 있어요. 그래서 숨 쉴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는데 여기는 사회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싸우는 게 좋았어요. 그냥 길가다가 싸우는 사람들도 보잖아요. 일본에서는 볼 수 없거든요. 사실 그렇게 싸운다는 건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거든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되잖아요. 일본은 안 싸우고 신고를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거든요.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공숙영: 사회가 느슨하게 짜여 있고 잘 싸운다, 그게 긍정적이기만 한 현상일까요? 상대적인 입장 차이라고나 할까……
한 사회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것이죠.
이정훈: 제가 중국 처음 갔을 때 느낀 거랑 비슷하네요. (웃음)
일본에 있었을 때부터 느꼈어요. 사람들이 싸우는 게 중요하다.
모험: 촘촘하지 않은 것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고 계신 것 같네요. 싸움 하는 사회에 대해 좋게 말씀하셨는데, 한편으론 싸움도 무섭거든요. 다른 문화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도 드는데요. 익숙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일본에 대해 잘 모르지만, 피스보트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3개월 반 정도 일본 사람들과 생활할 기회가 있었어요. 배에서 각국을 돌아다니는데, 기항지마다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어요. 근데 케냐나 칠레 그런 곳에 가면 프로그램이 촘촘하게 짜여있지 않고, 약속 시간도 잘 안 지켜지고 그랬는데, 그럼에도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느긋한 거예요. 근데 그게 그냥 느긋한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긋함이라고 할까.
그때 만난 친구들은 문제의식이 뛰어난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의 관심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또는 캄보디아에 대한 국제적인 문제의식으로 가 있고, 자이카(日本國際協力機構, JICA: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본의 국제 경제사회 협력기구)에서 활동하거나 UN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물론 그런 문제의식의 이면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도 봐요. 외부를 해방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저는 화살이 내부에도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내부의 문제도 있는데 왜 외부의 문제만 보느냐? 한국에도 요즘엔 그런 친구들 많이 있거든요. 유학 가고 싶어 하고, 국제 NGO나, 코이카 등 그런 것 하고 싶어 하죠, 근데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그런 경험이 경력이나 때론 권력이 되고. 흐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 개인적인 고민도 좀 있어요.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도 싶지만 어른들은 우려하는 식으로 바라보거든요.
제가 학생운동 할 때도 보면 NGO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물론 운동권에서는 비판적이었어요. 실제로는 어디 나가서 무엇을 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는 것이잖아요. 문제는 그런 경험들이 다시 재구성될 때겠지요. 어떤 경험을 했다, 무엇을 바꾸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옮길 수 있는지, 돌아오려는 생각 없이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전 그런 입장이에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볼 때까지 가보자. 한국을 또 떠나서 다른 데로 갈 수도 있는 것이고.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그냥 거기서 하면 되는 것이고. 꼭 한국인이니까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한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근데 한국 사회에 눈을 안 돌린다면 그것은 문제겠지만요.
실은 역사적으로 아예 자기 조국을 떠나 살았던 난민의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주류 역사에서는 안 나타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경험에서 배워야겠고 그런 의미에서는 진부한 말이지만 교류라는 것은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운동을 할 때도 흔히 그런 말하잖아요.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꿈같은 얘기 하지 말고 발을 내려야 한다. 그런 말이 싫었거든요. 그러니까 내딛는 게 중요한데 땅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 수도 있는 거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가 땅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길도 똑같죠.
애초부터 난 길이란 없다 part 2
프롤로그
여름의 첫 번째 인터뷰는 끝날 때 쯤 비로소 달아올랐다. “기특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일본 젊은이”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이정훈(존칭 생략, 이하 같음)이 도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서부터 인터뷰이 후지이 다케시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하던 인터뷰어들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정훈과 후지이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이미 알고 지낸 사이. 중문학 박사인 이정훈은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지니고 있고 중국과 대만, 일본을 자주 오가며 동아시아를 사유하는 인물. 그런 만큼 후지이의 활동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질 만하다.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문수현과 일본의 피스보트를 타고 여러 나라를 둘러 본 모험도 각자 이야기보따리를 조금씩 열어 보였다.
뒷풀이를 겸하여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오갔다. 나는 일본 영화 [박치기!](공식홈페이지: http://blog.naver.com/pacchigi) 이야기를 꺼냈다. 1968년 쿄토를 배경으로 당시 재일조선인들 특히 고등학생들의 삶과 청춘을 보여 주는 영화 [박치기!]는 재일조선인 여학생과 일본인 남학생의 사랑을 밝고도 애틋하게 그린다. 1968년에 고교 1학년이었다는 이 영화의 감독은 “어쩌면 우리는 그 소년의 시대(68년 교토)로부터 뭐 하나 진보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어 영화를 찍게 됐다고 어떤 인터뷰에서 밝혔다. 후지이도 [박치기!]를 봤다면서, 영화 내내 아주 친숙한 장소들이 보여서 이상할 지경이었다고 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일본 학생들이 재일조선인 여학생의 한복 차림을 놀리며 희롱하자 재일조선인 남학생들이 몰려와 도망가는 일본 학생들을 쫓아가 통학버스를 뒤엎어버린다. 이 압도적인 장면은 일본 내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를 소재로 했다고 하는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발 동기가 되었다는, 일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 댕기며 놀려서 조선 남학생들이 격분했다는 식민지 시대의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영화의 제작자는 재일조선인이지만 감독도 배우도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이 실은 놀라웠다. 젊은 일본인 배우들이 재일조선인으로 나와 일본말과 우리말을 섞어 말한다. 두 민족어가 섞인 독특한 이중적 언어, 아마도 그게 재일조선인의 말일 터이다. 방한한 일본인 주연배우는 우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한국어만큼이나 큰 부담은 사투리였다. 영화 배경이 교토여서 간사이 지방 사투리를 써야 했는데, 난 도쿄 출신이어서 표준어밖에 할 줄 몰랐다. 사실상 2개 언어를 배운 셈이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의 말은 외국어라기보다는 일본 내 방언의 일종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셈이다.
기사 전편 첫머리에 언급되듯, 편집장으로서 이 인터뷰를 기획한 나는 2006년 2월 퍼슨웹 북포럼에서 후지이를 처음 만났다. 그날의 저서『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일상의 성 정치학』의 저자 여성학자 정희진 본인이 그를 패널로 초대하기를 청했다. 그가 우리말을 기막히게 잘 한다고 미리 전해 들었지만, 행사를 진행하다가 연사의 말이 빨라지고 있어서 사회자로서 외국인인 그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쑥 물었다. “듣는 데 지장 없으신가요?”그는 살짝 웃더니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퍼슨웹 멤버가 쓴 한국 현대사에 관한 책이 마침 당시에 막 출판되어 기념으로 그 책을 선물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그 책보다는 이왕이면 퍼슨웹이 기획한 작가 김승옥에 대한 책을 달라고 주문했다.
서경식을 만나다
그 뒤, 인터뷰 후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2006년 10월 퍼슨웹 북포럼은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 서경식을 초청했다. 한국의 독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서경식을 소위 “재일동포학원침투간첩단”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때 체포되어 각각 19년, 17년을 복역한 재일조선인 유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이자, 1992년에 국내에 출간된 후 꾸준히 읽히며 사랑 받아온 여행기『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북포럼 진행을 준비하며 서경식의 저작들을 읽는 과정에서 나는 재일조선인 문제를 새로이 접하고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종결로부터 한참 후에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모어 겸 모국어로서 한국어를 쓰며 싫건 좋건 ‘단일민족국가’의 국민으로 지금껏 살아온 나에게 재일조선인 문제는 남의 일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남의 일이었다고 인정하는 게 솔직한 고백이리라.
후지이 다케시도 함께 떠올랐다. 그날의 인터뷰가 남긴 아쉬움, 풀리지 않은 모종의 불편함도. 막연히 다음을 기약하였으나 진전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던 터였다. 서경식이 오는 날 후지이도 초대하였지만 선약이 있어 그는 오지 못 했다(당일 그는 어떤 행사에서 일본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통역을 하게 되어 있었다).
행사 전 인사말을 건네는 나에게 서경식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말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못 알아듣습니다.”행사가 시작되고 그를 소개하며“오늘 강연은 통역 없이 우리말 그러니까 조선말로 진행하십니다”라고 말하는 내 가슴이 뛰었다. 조심스레 ‘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도대체 우리란 누구인가? 저 말을 할 때에 ‘우리’란 일차적으로 그날의 행사에 함께 모인 사람들을 뜻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국적으로만 보면 모두 대한민국 사람들. 재일조선인 서경식도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말을 곧 한국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할 순 없었고, 그렇게 말해지지 않았다. 한국말 대신 ‘조선말’이라고 발음하고 나니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특유의 날카로운 위트와 유머감각을 발휘하며 서경식은 자신의 삶과 사유에 대해 우리말로 차분히 풀어나갔다. 그는 부락민이나 오키나와인 등 일본 내 소수자들의 실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재일조선인들이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해야 하고 연대의 방식에 관해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답했다. 옆에 있던 나는 ‘연대’라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후지이 인터뷰 이후 전공투에 대한 책을 찾다가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를 발견하고 읽었기에 책의 부제이기도 한 전공투의 구호가 기억났다. “지금 연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공투 구호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가 떠오르기도 합니다만”이라고 사회자인 내가 말을 받자, 다름 아닌 1969년에 동경에서 대학에 입학한 서경식이 일침을 가했다. “전공투 그 사람들 말은 멋지게 했죠. 그들 대부분이 지금 아베 정권 밑에서 일본 사회를 그 모양으로 만들고 있어요.”
행사가 끝나고 서경식을 배웅하던 길에 내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자, 바로 뒤에 있던 그가 순간 일본말로 뭐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즉시 우리말로 덧붙였다. “괜찮아요?” 아마 일본말로도 같은 뜻이었으리라. 재일조선인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난 그의 모어는 일본어, 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일본말이 먼저 튀어 나올 수밖에. 듣는 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면 ‘한국말’ 잘한다는 소릴 안 들을 거라던 ‘일본인’ 후지이의 말도 떠올랐다. 작별인사를 나눈 후 깊은 밤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지는 서경식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그는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그 후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 나온 서경식은 일본어가 아닌 모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밝혔다.
나의 모어는 일본어지만 모국어는 조선어다. (……) 일제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어느 소학교에서 한 조선인 학생이 넘어졌을 때 엉겁결에 “아야!”라고 외쳤다가, 선생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심한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야!”는 일본말로 “이타이(아퍼)!”다. 여기서 학생에게 “아야!”는 모어이며 “이타이!”는 강요된 모국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상의 땅인 한국을 방문한 재일조선인 3세가, 모여든 친척에게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했다가, “한국 사람이라면 ‘안녕하십니까’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지”라며 꾸지람을 들었다. 여기서 이 재일조선인에게 “곤니치와”는 모어이며 “안녕하십니까”는 모국어다. (……)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다수자 쪽에서 보면 같은 모어를 지닌 소수 민족(에스닉 마이너리티)이며, 본국(한국 또는 북한)에서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 모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인 셈이다. 식민지 피지배자의후손이면서, 구식민종주국에서 태어난 탓에, 지배자의 국어를 모어로 하는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 서경식,『디아스포라 기행(부제: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6, 17~19쪽
다시 만난 후지이 다케시
해를 넘겨 2007년 1월 12일에 후지이를 다시 만났다. 문수현이 그날 다른 일정이 있어 바쁜데도 불구하고 성의를 발휘하여 잠깐이라도 두 번째 인터뷰에 참가하려고 짬을 내어 왔다 갔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의 대담을 다룬 그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일단 기사 제목을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로 붙여 놓았어요.
그 제목 마음에 안 드는데요. 그 구호는 너무 상징적으로 들리거든요. 제가 전공투 세대도 아니고……
외교가 아니라 연대를 원한다고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 구호가 지금껏 살아오신 행보와도 유사한 것 같고요.
이 책을 읽어 보진 않았지만, 지금 본 제 느낌에 술집에서 자기들끼리 하면 될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 것 같아요. 운동 경험의 상품화지요. 누구를 위해서 이런 책을 만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을 위해서겠지요. 그걸 부인할 순 없겠죠. 후지이씨는 학교 다니던 시절의 경험을 기록할 생각 없나요?
기록할 것까지는 없지요. 누가 필요해서 물어 보면 이야기해 줄 수는 있지만.
제도권으로 흡수된 사람들 말고, 전공투 투쟁은 현재의 운동으로 어떻게 이어져왔나요?
천황제 반대 운동의 중심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전공투 C_ 근데 그렇잖아요. 당신은 그래서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미시마_ 안 넘어서도 되지. 나는 일본인이고,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인으로 죽는다. 이걸로 족한 거야. 그 한계를 나는 전혀 벗어나고 싶지 않아. 뭐 그래서 당신이 볼 때 불쌍하게 보이겠지만 말이야.
전공투 C_ 응,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경우에는.
미시마_ 하지만 역시 난 일본인인 이상 일본인 이외의 것이 되고픈 마음은 없어.
전공투 C_ 하지만 일본, 일본인이란 어디에 사물로서 존재하는 겁니까?
미시마_ 사물로서? 외국에 가 보면 알죠. 영어로 말하고 있으면 내가 일본인이 아닌 듯합니다. 영어를 다소 잘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쇼윈도에 어떤 모습이 보이는데, 허리가 길고 코도 낮고, 아, 일본인이네 하는데, 누구지? 하고 자세히 보니까, 어, 나구나……. 이건 외국 가면 통감하는 일입니다.
– 미시마 유키오 외,『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부제: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79쪽
여기 좀 보세요. 재미있지 않아요?
재미있네요. 미시마 유키오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군요.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미시마에게 일본인 되기는 선택의 문제였던 거지요. 일본인 이외의 것이 될 수 있는데도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범석이 생각나는데, 이범석은 건국 초기의 과제를 민족 만들기로 봤거든요. 국민은 국가가 생긴 이상 되는 것이고 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봤어요.
이범석 李範奭, 1900.10.20~1972.5.11
호는 철기(鐵驥).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의 전신) 3학년에 재학중 여운형을 만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로 진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이후 소련으로 진출해 1922~25년 소련 합동민족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1933년 뤄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장교대장을,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겸임했으며, 중국 주재 미 사령부와 합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7일 광복군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비행기로 여의도까지 왔으나 미군의 거부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46년 6월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2, 1956년 2번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 〈우등불〉·〈방랑의 정열〉·〈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출처: 다음사전 www.daum.net )
‘재일조선인’이라는 말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에 이제는 익숙해졌는데, 사실 처음 뵐 때만 해도 그 표현이 낯설었어요. 재일동포나 재일교포란 말에 더 익숙했지요. 서경식 선생님 책에 왜 재일조선인이라고 해야 하는지 설명이 나옵니다만.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이란 말이 다 쓰이는데, 조선인이나 한국인이란 말을 빼 버리고 그냥 ‘재일’이라고도 하지요. 근본적으로, 재일조선인들 스스로가, ‘조센진’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봐요.
미국 흑인들이 민권운동 과정에서 스스로를 비속어 ‘니거(nigger)’로 자칭한 것처럼?
비슷한 맥락이지요.
나는 ‘재일동포’라는 말 대신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재일조선인이란 일본에 사는 조총련계 동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원래 재일조선인을 조총련계와 민단계로 구별하는 견해는, 민족분단을 기정사실로 용인해 버릴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민족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이 기정사실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항상 하나의 총칭으로 불러야 한다. 나 자신은 한국 국적이지만 이러한 입장에서 민족의 총칭으로 불러야 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요즈음 ‘재일한국·조선인’이란 기묘한 호칭이 정착해가고 있다. 이야말로 바로 민족분단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데, 당사자인 재일조선인들이 이러한 호칭을 아무런 의문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지구상에 조선인과 한국인이라는 두 개의 다른 민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 기묘한 것은 단순한 ‘재일’이라는 호칭이다. 이것은 ‘일본에 살고 있는’이라는 상태를 기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애매함이 우리 민족과 일본 사이에 역사적으로 또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답답한 문제들을 덮어버리기 때문인지, 이 말도 최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은 조선인의 일원이며, 재일‘미국인’이나 재일‘이란인’ 등의 외국인과는 다른 이유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재일조선인 정체성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서경식,『난민과 국민 사이(부제: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임성모·이규수 옮김, 돌베개, 2006, 117~119쪽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재일조선인’이란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했는데, 정리 과정에서 실수가 있어, 지난 인터뷰 전편에서 인터뷰어 모험의 발언 중에 ‘재일동포’라는 단어가 게재되었기에, 이번에 ‘재일조선인’으로 수정했다는 점을 밝힌다. 재일조선인 문제에 식견이 있는 모험 본인이 “제가 재일동포라는 말을 썼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문제제기를 해 왔다. 또한 요즈음 ‘재일코리언’이란 말도 쓰이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인의 조선인 되기
조선인 되기의 일환으로 재일조선인 문학을 참 많이 읽었어요. 그 때는 조선이나 한국이라는 말만 나와도, 영화, 소설, 닥치는 대로 무조건 다 봤으니까요.
어, 이런 이야기 더 듣고 싶어서 또 뵙자고 한 거예요. 지난번에 개인사를 듣긴 했지만, 구체적이고 상세한 변화 과정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그런 게 궁금하잖아요.
제가 불친절해서요. (웃음)
한국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게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불충분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질문이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애초에 재일조선인과의 연대를 고민할 때도 경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왜 달라야 하는가, 라는 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도 일본인이라는 의미를 없앨 수는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고요.
재일조선인 여성, 그리고 한국인 여성과 만나면서 민족적 차이를 느끼신 점은 없나요?
민족의 차이라기보다는 문화의 차이 그리고 가족의 차이를 느꼈지요.
아까 대학 시절을 굳이 기록할 필요는 못 느낀다고 하셨지만, 본인의 삶을 글로 써서 남기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잘 못 써서요.
글도 자꾸 쓰면 늘잖아요? 달리기처럼. (웃음)
그건 그래요. (웃음)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좋아하긴 해요. 동경의 대상이었죠.
어떤 글을 좋아하시는데요?
글 자체로부터 힘이 느껴지는 게 좋아요. 전에 말했지만 도미야마 이치로 교수의 글도 그렇고, 작가 김승옥도 좋아요.
그래서 전에 김승옥 책을 달라고 하셨군요. 재일조선인 문학 중에서 소개하고 싶으신 게 있다면.
전에 언급했듯이 김시종 그리고 이양지. 김시종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평론과 에세이도 썼어요. 어색하지만 날카로운 일본어를 구사해요. 술술 읽히는 글을 결코 쓰지 않아요. 읽기 어렵지요. 김시종 본인은 그런 일본어를 쓰는 게 일본에 대한 자신의 복수라고 말해요.
이양지는 일반적인 고백체 사소설의 틀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어요. 소설 「유희」는 재일조선인 유학생 유희 본인이 아니라 관찰자인 한국인의 시점으로 썼어요. 다수자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이야기해 보려 한 거지요. 즉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한 거예요. 단지 소수자문학이 아니라 소수문학의 가능성을 가졌어요.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이다.
– 들뢰즈·가타리, 「소수적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카프카(부제: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요즈음 근황은 어떠세요? 그간 변화가 있으신지?
그 때와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여전히 통번역으로 바빠요. 통역 일이 있어서 다음 주에 일본에 가요. 이화여대 여성학과 아시아여성센터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다음 주 행사도 그쪽 일이지요.
번역은 어떤 걸 하고 계신지?
정영혜라고 재일조선인 여성 페미니스트의 책을 번역하고 있어요. 정체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해요. 물론, 못 가진 걸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은 정체성을 가져야 하되,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민족성도 그런 거겠지요.
유희 그리고 돌의 소리
그와 나는 인터뷰 장소인 카페 페이지의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번째 인터뷰 기사 초고를 읽으며 함께 검토했다. 그는 매우 꼼꼼했다. 한 문장씩 읽어가다가, 가령 구어체로 “-하죠”라고 써 놓은 것을 읽으려니 보기가 별로 안 좋다며 “-하지요”로 바꿀 것을 요청했고, 인터넷 사전이나 검색 결과의 내용상 오류를 고쳤다.
그때 카페에 번역가이자 국문학자 송태욱(존칭 생략)이 들어섰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들을 번역했고 퍼슨웹이 기획한 작가 김승옥 헌정집『르네상스인 김승옥』에 필자로 참여한 사람, 나는 그를 저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만났다.
후지이도 구면인 듯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다. 송태욱은 후지이와 나의 앞에 놓여 있는 책『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를 보더니, 마침 자신도 최근에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번역했다면서 갖고 있던 책을 선물했다. 둘 다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이다. 동일한 방식과 목적과 결과는 아닐지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대화하는 그들을 지켜보았고, 그날의 인터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와 헤어지면서 작별인사처럼 나는 언젠가 일본 쿄토(京都)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쿄토 하면 이 두 사람이 떠오를 거예요. 서경식과 후지이 다케시.”그의 덧붙임, “이양지가 가출해서 간 곳이 쿄토였어요. 쿄토의 여관에서 일했죠. 그것도 기억해 주세요.”이양지가 「유희(由熙)」(1988)로 그 해의 아쿠다카와 상을 탔을 당시에 신문에서 기사를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모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여학생이 결국 적응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유희」의 간략한 줄거리와 함께.
난, 유희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응원하고 있었어.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지금의 괴로운 심정만 극복하면 앞으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고.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야. 그렇게 지켜보게 될 때까지 조금만 더 견디어보라고 항상 유희를 응원했었다니까.
– 이양지, 「유희」,『유희』, 삼신각, 1989
일본으로부터 도망쳐 한국으로 가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던 유희는 서울에 유학 와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모국어를 익히고 모국을 알기 위해 애쓰지만,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한국어의 소음 속에서 귀를 막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정체성의 갈등을 격심하게 겪는다. 모어인 일본어와 모국어인 한국어 사이에 끼어 고통스러워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습은 「돌의 소리」(1992)에서 반복되고 확장된다. 서울에 유학 온 재일조선인 남성 주일은 한국어를 배움에 따라 그 자신에게 내밀한 존재증명과 같은 시 쓰기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일본어에는 나에 있어서 시가 걸려 있다. 대화나 독서나 사고를 위한 수단, 또는 도구 이상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슬리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는 나에게 있어 자기라는 존재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적 비밀의식이며,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대로이다. 그 시를 나는 일본에서도 계속 써왔던 것이다.
한국어는 일본어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확실히 외국어이다. 그러나 ‘재일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다. 또 단순한 외국어로는 간주할 수 없는 과거의 사정이 있다. 게다가 ‘재일한국인’ 자신이 한국을 모국이라고, 또는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한 끊임없이 자기에게 있어 한국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추구되어 가는 것이다.
외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자가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언어상의 갈등으로서 자신과 한국어와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내가 일본 태생이니까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것이다. 일본과 한국과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관계 속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2세’이니까 당연히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될 귀찮음에 틀림없다. 활활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내던 한국어에 대한 혐오감이나 일종의 저항은 단순히 외국어와의 갈등이나 그 통과의례에서 오는 것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사정이 너무 복잡했다. 그 찢겨지는 방식도 언어라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에 연루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처방전은 발견되지 않고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한국어가 나에게 시를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망상은 불유쾌한 것이었다. 뒤가 켕기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지내보고 싶다고 그토록 일본에서 고민하고, 결심하기까지 이른 나날의 일들, 그 동안에 지불한 여러 희생들을 생각하면 그 망상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 잔혹하였다.
– 이양지, 「돌의 소리」,『돌의 소리』, 삼신각, 1992
이양지는 이 작품을 마치지 못 한 채 37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돌의 소리」는 미완성의 유작이 되었다. 서울대 국문과 시절 그녀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는 어떤 이는 이렇게 전했다. “조용했어요. 그 사람들끼리 소리 없이 조용히 다녔지요.” 이 서술 자체가 어떤 편견에 기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외면적인 풍경에 대한 표면적인 묘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 사람들, 소리 없는 사람들, 이것이야말로 ‘우리’ 내국인-다수자들이 ‘그들’을 인식하는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에 다름 아니리라.
얼마 전 전철 안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본인 여성들이 자기들끼리 일본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바로 앞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들에게 일본말로 말을 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제법 길게 계속되었다. 노인이 재미난 말을 한 모양인지 그들은 까르르 웃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들이 내리고 그 역에서 승객들이 우르르 탔다. 그 속에 또 일본인들이 있어서, 그들이 일본말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자, 그 앞에 있던 사람이 – 아까 그 노인과 다른 사람인데 역시 노인이라 할 수 있다 – 그 일본인들에게 일본말로 말을 걸었다. 일본말 대화가 또 시작되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하여서 전철 안이 웃음소리 섞인 일본말로 채워졌다. 일본말로 연속된 일련의 이 광경을 나를 포함한 다른 승객들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명백히 일부는 표나게 불쾌한 눈치였다.
일본 동경에 갔을 때 전철 안의 기억이 났다. 전철역을 호명하는 일본말 방송을 들으며 같이 간 친구들과 함께 장난스럽게 그 말을 따라 발음해 보았다. “시부야-, 시부야-.”전철 안은 조용했고 우리는 즐거웠다. 이방인이자 관광객이 누리는 이국에서의 일시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던 우리는 그저 외국인이었다.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시. 이윽고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말로 이야기했다. 전철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언니, 서울에 있는 바위산들은요, 한국과 한국인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 같아요. 모두가 바위처럼 발가벗고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요. 늘 다 드러내놓고 있어요.
– 이양지, 「유희」,『유희』, 삼신각, 1989
「유희」 속에 나오는 언니도, 아주머니도, 그리고 유희도 모두가 저 자신의 분신입니다. 저는 이제야 본국인의 마음이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해해 나가는 길이야말로 재일동포인 저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며 부각시킬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이양지,「나에게 있어서의 母國과 日本」, 『돌의 소리』, 삼신각, 1992
“나는 변태다”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인 2월 19일 후지이에게 전화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 때 말씀하신 일본의 행사는 잘 다녀오셨나요?
아, 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홈페이지(http://ewhawoman.or.kr/acws/index2.php)에서 그 행사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어요. <자민족중심주의를 넘어서서>라는 주제의 “2007 한일 여성지식인교류프로그램”이란 제목으로 3일간 쿄토와 오사카에서 한 행사더군요. 어떠셨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통역이란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기회였어요. 통역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인류학적으로 여성은 남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잖아요. 매체가 되는 거지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국제회의 같은 데에서 통역에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그럼에도 통역이란 존재가 잘 배려되지는 못하지요.
발표자와 토론자 명단을 보니 도미야마 이치로 교수 한 분을 제외하면 다 여성들이고 통역 후지이씨만 남성이네요.
그게 저는 불편하지는 않아요. 남성사회의 권위주의가 없으니까 분위기가 좋고 편해요. 그렇지만 저는 통역으로 존재하는 거니까 그 관계 안에서는 제가 소수자인 셈이지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김시종 시인에 대해 최근 신문에 인터뷰기사가 났어요(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9692.html). 새로 번역한 『조선 시집』이 곧 일본에서 출판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양지의 작품을 읽었어요. 언어와 민족성 사이에서 분열되고 갈등하는 자아가 강렬하더군요. 한국어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 「나에게 있어서의 母國과 日本」에 이런 대목이 있잖아요. 자신은 유희와 달리 유학 도중에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학생활을 끝까지 마쳤기 때문에 「유희」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제목 ‘유희’를 주인공의 이름인 고유명사 ‘유희(由熙)’로만 볼 게 아니라 일반명사 ‘유희(遊戱)’로도 봐야 의미가 전달되지요. 비결정성, 불확정성 속에서의 유희. 문학이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일본에 있었을 때는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보이는 후지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는데, 서울 유학을 하고 「유희」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후지산을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산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자기 안에 계속 머무르고 있으면 정체성이란 걸 알 수가 없잖아요. 정체성이란 바깥에 있는 거죠. 그리고 이양지는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도전했어요.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어요.
많지 않은 나이에 쓰던 작품도 못 끝내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게 참 안 됐어요. 한국에서 이양지는 아쿠다카와 상 탔을 당시에 좀 알려지고 지금은 망각된 존재나 다름없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는 어떤가요?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거의 안 읽히지요. 이양지를 아쿠다카와 상 수상작가로만 기억하는 게 안타까워요. 이양지 전에도 그 상을 탄 재일조선인이 있어요. 이회성(李恢成)이라고. 이양지는 두 번째지요.
네, 그의 장편소설 『금단의 땅』을 학생 시절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유신시대 남한의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북한의 노선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이회성과 이양지는 세대가 다른 작가지요. 그리고 참, 이양지는 광주항쟁이 있던 1980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어요.
후지이씨에게 이양지가 특별하다는 걸 알겠어요. 저도 후지이씨에게 감사드리고 싶네요. 후지이씨의 소개가 없었다면 이양지를 읽어볼 생각을 전혀 못했을 테고 그 덕에 재일조선인 문학 자체에 관심이 생겼으니까요. 앞으로 이양지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일이 혹시 있으신지?
이양지의 작업 전체를 정리해 보고 싶어요.
기대할게요. 『요코 이야기』파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는 사실이다 아니다, 이렇게 실증주의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프란츠 파농이 뭐라고 썼냐면, 본인은 분명히 아픈데 의사가 와서 아프지 않다고 한다고.
책의 내용과 별도로, 미국에서 교과서로까지 채택된 과정과 이유를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카이 나오키가 자신의 책에서 지적했듯이 원폭투하로 인해 미국이 일본에 대해 가지게 된, 가해자를 겸하는 독특한 위치가 이번 사태에서 확인되었다고 생각해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이런 복합적 입장 때문에 미국은 일본을 배려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고, 결국 일본과 공모하게 되잖아요.『요코 이야기』 뿐만 아니라 한국인 여성의 책도 함께 교과서로 채택했으니까 공평한 거 아니냐는, 즉 식민자와 피식민자를 대등 당사자인 양 동일하게 취급하는 미국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지요.
첫 번째 인터뷰 끝날 때 쯤, 녹음은 안 되었지만, 당신은 어쨌거나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가 주는 이익도 분명 누렸을 거라고 제가 말한 거 기억나세요?
네.
제가 그렇게 말하자 후지이씨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총 맞아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네.
학생운동 시절 국제 연대를 지향했고 그 과정에서 곁에 있는 재일조선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설명하셨는데, 그런 설명 방식이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실은 들으면서 미묘하게 좀 불편했다고나 할까요…….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좀 더 감정이 실린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친절하지가 못 해서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 말 꼭 쓸 거예요. (웃음)
네, 그렇게 써 주세요. (웃음)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국에 대하여 엄연히 가지는 역사적 책임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에게 가지는 불편이 마음에 존재하는 걸 부인할 수는 없어요. 제가 한국 국가대표가 아니고 후지이씨가 일본 국가대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도. 한편 역사는 역사이고 개인은 개인이니까 후지이씨 개인에게 그런 불편한 마음을 품고 발설하는 게 정당한가 싶어서,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네…….
첫 번째 인터뷰에서 이정훈씨가 후지이 다케시는 한국에서 보자면 그저 기특한 일본 젊은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그래요. 그럴 수 있지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답답해서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이지요. 나는 변태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야, 뭐 그런 거지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건 별 신경 안 써요. 일본에 있을 때 잡지에서 우먼 리브 운동한 다나카 미츠에 대해 읽고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전공투가 자기부정을 지향했다면 다나카 미츠는 자기긍정을 지향했지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었어요.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억압을 오른발로 차버리고, ‘자립한 여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억압도 왼발로 차버리는 것이 여성해방입니다. 교양이 없이 저급하고, 뭐 대충 대충하고, 농담을 좋아하고, 신랄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나는 ‘우먼 리브’ 운동을 했습니다.”
– 조이승미, 「日 우먼리브 선구자, 다나카 미츠의 삶과 글」,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에필로그
여전히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신중했고 –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불친절’했으나, 이제는 ‘변태’를 자칭하는 그가 살아가는 힘, 그를 살게 하는 흐름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서전 『Out of Place』에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고 썼다. 왜냐면 “이 흐름은 점점 ‘멀어지고’ 제자리에서 벗어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후지이 다케시도 사이드처럼 “아무리 고립된 처지에 내몰린다 해도 민족적, 부족적 의식보다는 지성적 의식이 우선한다고 늘 생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인용 부호 안은 모두 사이드 자서전으로부터 인용했다.)
재일조선인과의 연대를 삶과 운동의 돌파구로 삼은 그는 여기 한국에 와서 전공인 역사 공부 외에 언어 사이에서 헤매고 부대끼는 – “Lost in Translation” – 통번역 작업을 하면서, 외국인과 외국어, 국경과 정체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따져 묻고 있다. 이양지가 후지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 그가 “정체성은 외부에 있다”고 부연설명한 게 다시 떠올랐다. 그도 현해탄을 건너면서 ‘유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미지의 것을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만져보려면 먼저 그것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미지의 것에 다가가기 위한 탐구는 나에게 노력(work)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기 위한 나의 탐구는, 그 결과 드러나는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구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나의 변용에 의해서만 충족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드러냄(manifestation)을 향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방식으로 나를 낳고 동시에 변화시키는 진통/노동(laboring)이다. 따라서 그것은 황홀한 기투(企投, project), 즉 외국어의 형상이 나로 하여금 뛰어들게 하는 기투란 자기동일성(selfsame)에서 떠나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낯선 것으로 자기 자신을 변용시키는 기투이다. 혹은,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나타난다.
– 사카이 나오키,『번역과 주체(부제: ‘일본’과 문화적 국민주의)』, 후지이 다케시 옮김, 이산, 2005, 91쪽
전화통화 시 마지막으로 “처음 이 인터뷰를 기획할 때에 비해 내 문제의식이 많이 변했고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나와 다르다고 느낀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다면 잘 됐고 다행”이라고 답했다. 그에게 말한 대로 나는 변했다. 내 생활에 당장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생긴 건 아니지만, 감각과 시선의 미묘한 변화만으로도 차이를 느낀다. 그가 경계를 지우려는 인간인데 반해 나는 경계를 지으려는 인간이었던 걸까. 내가 어떤 경계를 가정하여 그에 고수하고 집착했던 걸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정적이건 실재적이건 간에, 쉽게 무화되기 어려워 보이는 경계에 대해, 그리고 그런 경계가 인식과 실천 속에서 지워져갔다면 어떻게 지워져갔는지에 대해, 나는 가능한 한 상세히 알고 싶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아울러, 다시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찬가지로 나도 그리 친절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이 글을 끝내기에 앞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후지이 다케시 – 제노사이드연구회 회원, 역사학연구소, 재일조선인 세미나, 인권운동사랑방, 일본 노숙인운동, 일본 맑스주의 다시보기, 병사가 된다는 것, 과거청산은 ‘일회적 종결’ 아닌 ‘지속적 과정’, 돌아온 ‘국민’: 제대군인들의 전후발표, ‘지도자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첫걸음, 후지이 다케시에게 감사한다, 통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우리 대화에 생산적인 오해의 활력을 불어넣어준, “이 사회에서 거리를 한번 걸어보는 것”,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 “당하면 복수하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처음에 붙인 제목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그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애초부터 난 길이란 없다>를 이 글의 제목으로 정했다. 첫 번째 인터뷰 마지막에 그가 한 말 – “그러니까 내딛는 게 중요한데 땅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 수도 있는 거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가 땅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길도 똑같죠.” – 로부터 착안하고 루쉰(魯迅)의 소설 「고향」중 잘 알려진 ‘희망’에 대한 대목을 참조하여. 그가 어디로 갈지 길이 만들어질지 그 길이 어떤 길일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 자신조차도. 섣부른 희망도 우상도 뒤로 하고서, 어린 시절 그가 잘 했다는 장거리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대로 바라는 대로 발 가는 대로 가기를, ‘변태’답게. 이제 끝.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돌연 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정한 땅이 향로, 향촉, 향대를 바랄 때 그의 변하지 않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생각하고 오로지 뭔가 잊었다는 기분이 들자, 마음 속으로 몰래 그를 비웃었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손으로 만든 우상은 아닐까.
내 눈에 어렴풋이 저 멀리 해변가 모랫펄이 떠오른다. 머리 위 푸른 바위 같은 색의 하늘에는 고리 같은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다. 생각건대 희망이란 본디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 같은 것이다. 본래 대지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은 길이 된다.
– 루쉰(魯迅), 「고향」,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