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프롤로그

 

 

 

2006 6, 14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2000년부터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계속되어 왔으니까 이 행사도 7년째에 접어들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특별한 사연을 가진 가족이나 유명 인사들은 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았고, 우리들 대다수는 그런 뉴스 기사나 자료 사진을 통해저들이 만나는구나하고 막연하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의식도 가물가물하는 고령의 노모와 초로의 아들이 전하는 안타까운 사연, 고위 관료 혹은 저명한 학자와 그 가족들의 어색함과 기쁨이 뒤섞인 만남의 장면들. 뉴스의 조명을 많이 받는 이들은 특별히뉴스 가치가 될 만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들 가운데 어디 구구절절한 사연 없는 가족이 있을까. 하나하나가 다 한 편의 드라마로 그려질 법한 이야기들일 터이다.

 

 

지금까지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을 만난 사람들은 정말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아파트 분양보다 대학 입시보다 훨씬 경쟁률이 높은 추첨에서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봉 시스템은 남북한 각각에서 신청자 가운데 추첨으로 뽑힌 100명씩이 5인 이내의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 놓았다(정부에서는 신청자들을 몇 가지 기준의 심사를 통해 추려낸 뒤 마지막에는 추첨으로 100명을 가려낸다고 한다). 운 좋게 생전에 가족을 만난 사람들은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초조함을 일단 덜어낼 수 있긴 하지만, 또 그들 나름대로 혹독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2 3일간의 짧은 만남 이후에는 또다시 만날 기약 없는 긴 이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14차 상봉에서는 4진으로 나뉘어 총 2000여 명의 남북한 이산가족이 만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소설가 구보씨 즉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을 쓴 소설가 박태원의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작가 이상과 함께 한국의 193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 박태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월북했고, 그의 맏딸 설영 역시 전쟁 통에 월북한 뒤 현재까지 북한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 만남은 북의 맏딸 설영(70)과 남쪽에 살고 있는 그녀의 동생들(소영, 재영, 은영)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월북 작가의 자제들로 남북한에 흩어져 살아야 했던 이들이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음은 물론이다.

 

 

미사일이다 수해다 해서 남북한이 다 함께 어수선하고 힘들었던 7월 말과 8월 초, 구보씨의 둘째 아들 박재영 다니엘(64)을 이틀에 걸쳐 만났다. 하루는 세상을 쓰러뜨릴 듯이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고 또 다른 하루는 세상을 녹여버릴 듯이 폭염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그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것은 소설가 박태원, 월북자의 자손, 이산가족 상봉, 이런 매력적인 몇 가지 키워드들이었는데, 바로 그것들이 그 혹독한 날씨들을 뚫고 갈 수 있게 해준 셈이다.

 

 

첫 인터뷰가 진행된 용인의 자택에서, 그는 아버지와 관련한 자료 파일들과 이번 이산가족 상봉 관련 자료들을 잔뜩 쌓아놓고 인터뷰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어는 첫대바기(“맞닥뜨린 맨 처음이라는 뜻의 우리말편집자)에 그의 모습에서 그의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박태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터뷰어가 너무나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영국 신사로 불릴 만큼 키가 컸던 아버지처럼 그도 그 연배의 어른으로서는 큰 키에다, 사진으로 접했던 구보와 미소 띤 입매와 눈매가 매우 흡사했다. 그가 구보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한 젊은이가 구보라는 작가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열과 성을 다해 질문에 응해주었다.

 

 

 

 

 

[사진] 1938년 가을 서울 예지동 집에서. 어머니, 누나 설영, 소영

“5분 이상 울면 안 된다

 

 

누님 만나신 지 한 달이 넘었는데, 후유증 같은 건 없으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다른 체제에 살던 사람들이 만나서 충격도 있고,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한동안 앓아눕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별로 그런 건 없었어요. 잘 살고 있는 것 확인해서 반가웠지. 대학교수(평양기계대학 영문과)도 했고 훈장도 받고 평양에 있는 아파트에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릴 때 누님 얼굴은 기억하고 계셨죠? 56년만인데 알아보실 수 있으셨어요?

 

어릴 때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워낙 서로들 늙었으니까. 북측에서 온 사람들이 상봉 장소에 줄줄이 입장을 해서는 다들 번호표를 보고 테이블을 찾아오는 거야. 같은 번호표를 가진 사람들끼리 알아보는 거지. 먼저 둘째 누나가 큰 누나 손을 덥석 잡고는언니하고 불렀는데, 다들 서로 손을 마주 잡아도 생각과는 달리 눈물이 별로 안 나더라고.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북극 빙하와 남극 빙하가 녹을 새가 없어서 눈물이 나올 틈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2006. 06. 19. 금강산에서 상봉.   4 남매

 

 

 

사실 박태원의 맏딸설영은 그의 소설이나 수필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모더니스트로 그리고 당대 최고의 댄디보이로 이름을 날렸던 박태원도 처자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고, 생계를 위해 다른 작가들이 그러하듯 역시 번역이나 역사소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밥벌이를 하던 시절(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는 자신의 생활 면면을 옮겨놓은 작품들을 여럿 발표하기도 했다(<투도>, <채가>, <재운> 등 소위 자화상 3부작과 수필들). 그 속에서 설영은 의젓하게 유치원 입학 면접을 치르기도 하고, 이빨이 다 썩었는데도 치과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도 하며, 동생과 과자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누님하고는 어떤 이야기를 하셨나요?

 

사실 2 3일 동안 가족들끼리만 오붓하게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채 몇 시간밖에 안 되더라고. 너무나 아쉬운 시간이었죠. 누님이 훈장을 많이 탔다면서 가져와서 보여주고 아버지의 열사증도 보여주고 그랬는데, 둘째 누나가훈장 받느라 고생 많았다고 말해줬지. 나는 누님 손을 가만히 잡고 한 시간 동안 쳐다보면서 텔레파시를 보냈어요. 말은 안했어도 아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서로 통했겠지.

 

 

 

어떤 텔레파시를 보내셨는데요?

 

그냥 이런 저런 생각들이지 뭐. 워낙 대화할 시간이 없다 보니까 깊은 얘기를 나눌 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그랬죠. “만남의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5분 이상은 울면 안 된다.”

 

 

 

북한에서 누님은 어떻게 사셨는지 이야기를 좀 들으셨나요?

 

누나는 북에서 김일성대를 나온 음악가와 결혼을 해서 1 4녀를 뒀고 손자 손녀가 9명이라고 해요. 금년 말에 막내딸이 또 하나를 출산할 예정이어서 곧 10명이 되죠. 누나가 올해 초에 평양에서 칠순잔치를 해서 그 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줬어요. 그리고 손자들이 손수 남쪽의 가족들에게 쓴 안부편지도 가지고 왔죠. 통일이 되서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한사람씩 각각 편지를 써 왔어요. 매형은 일찍 돌아가시고 누님 혼자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오셨나 봐요.

누나가 북에 가서 이룬 가족이 자식들에 사위 며느리 손자들까지 스무 명이에요. 우리들은 이제 죽을 때까지 다시 못 만날지 모르지만, 나중에 아이들끼리는 또 이산가족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아이들 이름이랑 나이랑 서로 적어서 교환하는 데 시간을 한참 썼죠. 아버지는 남쪽에 있는 자식들을 잊지 못해서 누나 아이들 이름에 우리 형제들 이름자를 한 글자씩 따서 붙여줬다고 해요.(박태원은 1964년 공개서한의 형식으로 남쪽의 자식들에게 <싸워라!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라는 제목의 편지를 쓴 바 있다)

 

조카인 봉준호 감독 이야기도 하셨다면서요(봉준호 감독은 알려졌다시피 박태원의 외손자(둘째딸의 막내아들)이다)?

 

봉준호 감독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북한에서도 인터넷이 보급되고 접속이 가능한 모양이지.

 

 

 

선생님은 <괴물>을 보셨나요?

 

조카가 시사회에 초대해서 봤어요. 보고 내가 그랬지. 괴물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지 않았겠느냐, 하고. 그런데 젊은 사람들 취향은 어떨지 모르니까.

 

 

 

아버님과 누님이 월북하신 동기 같은 것은 알 수 있었나요?

 

그런 이야기를 자세히 나눌 수 있는 여유는 없었는데, 누나는 전쟁 때 인민군 병원에 간호부로 자원해서 일하다가 여차여차 해서 가게 됐던 모양이에요. 아버지는 56년 전 등산 가듯 흰 륙색(배낭)을 메고 잠깐 다녀온다고 나갔던 게 마지막이었고. 종군작가로 전쟁 중에 남북을 왔다 갔다 할 때 그 당시에 아버지가 가족을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러니까 국민학교 3학년 열 살 때에 멈춰 있죠.

 

 

 

박재영 다니엘 (인터뷰 당시)             1965년 월남전참전. 사이공 여대생과 함께

 

 

 

아버님과 누님의 월북 시점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

 

월북 시점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여러분들의 참고 증언과 또 어머님의 기억에 의하면, 6 25일 한국전쟁이 나서 28일에 서울이 북의 손에 들어간 후, 문학가동맹에 소집되어 나가셨다가 평양 시찰을 다녀와야 한다고 차에 싣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때가 아마도 1950 7월이었을 겁니다.

누나는 1951 1. 4. 후퇴 때 이화동 외가에 막내 은영과 남아 있었어요. 다시 적 치하가 되니까 서울에 남아있던 여자 중고생들을 찾아내서 인민군 야전병원 자원봉사자로 동원한 거예요. 그때 누나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동원돼서 수색등지에서 일하다가 다시 한국군이 밀고 올라가니까 그 병원과 함께 후퇴를 해서 북으로 가게된 거죠. 이건 이번 6 19일에 금강산에서 만났을 때 큰누나로부터 직접들은 이야기에요. 아버지는 나중에 평양에서 만나게 됐다고 해요.

 

 

 

보통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 하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한테 선물 준다고 이것저것 챙겨서 바리바리 몇 짐씩들 가져가던데요. 선생님도 선물 준비 하느라 고생이 많지 않으셨어요?

 

그런 게 좀 있었어요. 옷을 사더라도 여름이니까 여름옷을 사야 될지 겨울이 추우니까 겨울옷을 사야 될지 난감했고. 전열 기구는 다 110볼트를 쓴다고 들었는데 요즘 우리는 다 220볼트짜리를 쓰니까 110볼트짜리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그런데 만나서 들어 보니까 220볼트도 쓴다잖아. 우리 가족 살아온 이야기 말로 다 할 수 없으니까 사진이라도 보라고 사진첩을 한 권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누님은 가운데 몇 장만 빼서 가져갔지. 이걸 다 통째로 가져가는 게 부담스러웠나 봐요. 

 

 

 

북의 누나가 남의 동생에게 되돌려 보낸 사진첩에는 남쪽 가족들의 50여년 역사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두툼한 한 권의 사진첩 안에서 동생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또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정말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한, 사진 하나하나에 직접 설명 문구를 타이핑해 붙이고 정성스럽게 배치해서 만든 어엿한 작품집이었다. 56년 동안 피붙이이되 단 한 번도 피붙이로서 곁에 있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누나로서는 그런 모습들을 차마 손에 쥘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연좌제 그리고 이산가족의 삶

 

 

 

선생님 대학 졸업사진, 군대 시절 사진도 있네요.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나는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63학번으로 들어갔는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군에 입대했어요. 그리고 65 11월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월남전에 참전했고. 사실 나는 꼭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굳이 자원해서 갔죠. 연좌제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평생 이 기회가 아니면 외국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해서 외국에 나가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71년에 대학 졸업하고 형님 친구가 하는 무역회사에 들어갔죠. 그러다가 86년에 회사를 나와서 내 회사를 차렸어요. 천주교 세례명 다니엘을 따서다니엘 무역주식회사라고 이름을 지었죠. 그리고는 지금까지 세일즈맨으로 평생을 살아온 셈이에요. 지금은 아버지 자료 모으러 다니고 관련된 사람들 만나는 일을 많이 하지만 그동안 무역업 했던 경험을 살려 여기저기 사업체에 자문도 해주고, 대학원생들 영문초록 쓰는 것도 도와주고,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벌이고 있죠. 성당에 매일 아침 꼬박꼬박 다니고 블로그(http://blog.daum.net/danielpak20)도 운영하고. 편지 쓰고 사진 찍는 거 좋아하고.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딱 켜고 그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한테 메일을 써요. 편지가 길어질 때는 성당 다녀와서 이어서 쓰기도 하고.

 

 

 

월북한 사람의 가족에게연좌제는 거의 평생의 족쇄였다. 신원 조회에 걸려 공무원이 되기 어렵다거나 해외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간첩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북에서 내려온 가족을 접촉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야 했던 사람들 역시 셀 수 없이 많았다. “범죄자의 친족까지 연루되어 벌을 받는다는 원칙의 연좌제는 사실 1894년 갑오개혁 때 금지된 전근대적인 제도였다. 그러니까 5공화국 때(80) 연좌제 금지를 헌법상에 규정하기 전까지 월북자나 사상범의 가족에게 연좌제를 실시했던 것은 법적 근거도 없는 관행이었던 셈이다. 연좌제 때문에 평생 발이 묶일 거라는 생각에, 그곳이 전쟁터일지언정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면, 연좌제가 개인의 삶에 드리운 공포란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더 큰 것이었을까. 그는 월남전 참전을 위해 미군 수송기에 몸을 실었을 때의 희열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연좌제 때문에 혹시 고초를 겪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73년에 어느 날인가 직장으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데려가는 거야. 끌려간 곳이 보안사 지하였죠.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말이 4·19, 5·16 혼란기에 박태원이 남한에 내려왔었다는 정보가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때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거지. 나는 아무 거리낄 게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큰소리를 쳤어. 그때 북한에서 내려왔으면 왜 당신들이 못 잡았냐고 말이지. 이렇게 대들었더니 그쪽에서 아무 소리 못하더라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한테는 상대방도 어쩌지 못하잖아. 그런데 같이 잡혀 들어갔던 사촌형님은 매도 좀 맞고 고초를 당했던 모양이더라고.

 

그게 하나하나 감시를 받지 않는 게 없어요. 월급을 얼마 타는지, 냉장고를 몇 개월 할부로 붓고 있는지, 저축은 얼마를 하고 있고, 친구는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이런 사생활이 하나도 보장받지 못하는 거죠.

 

사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연좌제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이나 헌법 소원이라도 해야 한다고 봐요. 인생이 바뀌는 문제 아니냔 말이야. 이제 나로서는 두려울 게 없는 시점이고 짐을 덜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좌제 문제에 대해서는 꼭 한번 글을 쓰고 싶어요. 

 

 

 

큰형님은 이번 상봉에 동행하지 않으셨나 봐요.

 

90년에 범민족 대회가 열렸을 때 미국 시민권자인 형님이 평양 가서 누님을 뵙고 왔죠. 그래서 이번에는 안 간 거예요. 그때 형님은 아버지 묘소에 참배도 하고 권영희 정태은 모녀와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그랬다고 해요.

 

 

 

형님은 어떻게 이민을 가시게 된 거예요?

 

연좌제 때문에 오죽 힘들었으면 이민을 결정했겠어요. 주변 분들의 신원 확인을 어렵게 어렵게 거쳐서 68년 일찌감치 이민을 결정했죠.

 

 

 

어머님이 고생이 참 많으셨죠? 딸도 못 보고 돌아가셨네요.

 

자식들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전쟁 통에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부역죄로 걸려서 사형언도까지 받았어요. 먹을 걸 준다는데 여맹이 뭐하는 데인지 하는 게 중요하겠어요? 6년 복역하신 뒤에 재심 받아서 겨우 풀려나셨죠.

 

 

 

큰딸이 북한에서 살아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1980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어머니는 큰 누나가 살아있다는 것도 모르셨죠. 생사도 모른 채로 돌아가신 거야. 참 원통한 얘기지. 내가 상봉하고 와서 통일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썼지만, 이산가족 상봉이 이런 식으로 되서는 안 되는 건데. 이산가족들 다 죽어 자빠질 때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라 생사확인이라도 빨리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야.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절대 버리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형님이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 구한 아버지의 사진 복사판을 가져와서 보여드렸죠.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에 실렸던 사진인데 1960년대에 찍은 거였어요. 점쟁이가 언젠가 그랬대요. 당신은 남편 만나고 죽을 거라고. 그런데 사진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라도 만난 셈이라고 해야 할지.

 

 

 

 

북한에서의 작가 박태원

 

 

 

북한에서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누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누님은 곧 시집을 가고(56) 아버지와는 떨어져 지냈는데, 그래서 의붓딸 정태은이 아버지 곁에 늘 같이 있었어요. 정태은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쓴 글이 [문학사상]에 발표되기도 했잖아요(북한의 문예지 [통일문학]에 연재했던 글 <나의 아버지 박태원> [문학사상] 2004 8월호에 실려 있다). 거기서 보면 아버지가 정태은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데, 당신이 즐겁게 손을 흔들어놓고는 정태은한테얘가 왜 이렇게 손을 흔드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걸 보니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더라고.

 

누님은 정태은에게 아버지를 뺏긴 것 같은 생각에 섭섭하고 맺힌 마음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어요. , 말하는 것 보고 들으면 알 수 있잖아요. 세월이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말이지. 그래서 누님에게 그랬어요. 그래도 아버지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 아니냐고, 너그럽게 풀어버리라고. 정태은은 나이 환갑인데(46년생), 평생 시집도 안 가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해요. 많이 외롭겠지 아마.

 

정태은은 박태원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소설가 정인택과 권영희 사이에서 난 딸이고, 북한에서 박태원과 권영희가 재혼하면서(1956) 두 사람은 부모자식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의로 맺어진 부녀 사이는 피로 맺어진 부녀 이상으로 매우 살갑게 사랑했다. 정태은이 쓴 <나의 아버지 박태원>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존경을 엿볼 수 있다. 잡은 손을 즐겁게 흔드는 아버지 옆에서 깔깔거리고 걸어 다니던 그 순간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던 딸은,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에게 전축을 마련해드리고 싶어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으며(결국장군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작업을 돕기 위해 아버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갔으며 아버지가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따라 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던 박태원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딸이기도 하다. 남한에서 아버지의 사망소식만을 접할 수 있었던 아들은, 그래서 얼굴도 본 적 없는 북의 여동생에게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누님은 남한에서 작가로서 아버지의 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시던가요?

 

잘 몰랐죠. 내가 누님한테 남쪽에서 아버지 이름으로 학회가 만들어지고(2005년 박태원을 연구했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구보학회가 만들어졌다)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얘기를 했더니, 누님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시더라고. 굉장히 기뻐하고 흥분을 하셨어요. 남한에서 그 정도도 큰 작가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거죠. 이번에 누님한테 작년에 발간된 수필집 <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 조이담씨가 쓴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거닐다>, 구보학회 창립 때 자료집과 사진 등을 드렸어요.

 

 

 

작년 말에 중국에서 열린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국제학술대회에도 참석하셨다고 들었는데요?

 

2005 12 11일에서 13일까지 한림대 정덕준 교수 주도로 북경에서 <갑오농민전쟁의 문학적 형상화에 관한 국제 학술회의>를 했는데, 거기서 박길남, 한중모, 리민우, 이런 북측의 연구자들을 여럿 만나고 돌아왔어요. 발표회장에서 내가 <우리들의 아버지 박태원>이라는 글을 배포했는데, 북쪽 연구자들이 남쪽에 살고 있는 구보의 아들이 예고 없이 참석했다는 걸 알고는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에요. 예정에 없던 일이라 그 문제를 어떻게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지 당황스럽다는 거였지. 그래서 문제가 되거나 곤란해질 것 같으면 내가 참석했다는 사실은 없던 일로 해도 좋다고 했죠.

 

 

 

북쪽 학자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나요?

 

그분들 통해서 아버지가 말년에 쓰시던 원고지 칸살(‘원고지 칸 나눔대‘)을 건네받았어요. <갑오농민전쟁> 쓸 때 마지막에는 거의 실명이 되어서 눈이 안보이니까 원고지 칸을 맞추는 틀을 종이에 대고 쓰기도 하고 그랬던 거죠. 그때 아버지가 정태은한테 썼던 친필 편지도 받았어요(이 자료 사진들은 [문예운동]이라는 잡지 2006 6월호에 공개되었다). 이분들한테서 정태은이 혼자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30년 넘게 내 대신 아버지를 잘 보살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북한 학자들을 만난 소감은 어떠셨어요?

 

그때 숙소에서 북측 학자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그쪽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죠. 남쪽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남한, 북한 그런 말들을 쓰는데, 그런 게 그쪽에서 들으면 별로 달갑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근데 그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을 자극하는 표현을 안 쓰려고 애를 쓰더라고. ‘남조선이런 말 안 쓰는 거야.

 

현재 리민우 교수가 박태원의 <삼국지> 편저 작업을 해서 3판이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종이가 부족해서인지 인쇄를 못하고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당의 공식 문건 이런 데 쓸 종이가 우선일 테니까 순위에서 밀리는 거겠지. 박태원 작품들을 계속 출판해 온 [깊은샘] 출판사에서 이걸 입수해서 출간할 계획에 있어요. 현재 국내에서는 아버지가 처음 <신시대>에 연재하셨을 때(1941 4~8)의 첫 회 분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해요.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 봐야지.

 

 

 

구보 박태원은 월북한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남한에서와 같이 북한에서도 최고 작가의 칭호를 받았고 죽음의 문턱 앞에 이를 때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 하다가 1986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월북한 남로당 계열들이 전쟁 직후 대부분 숙청을 피할 수 없었던 데 반해, 비록 병마로 고통을 겪긴 했지만(<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 2권이 발표된 후 66년경에 시력을 상실하여 70년에는 완전히 실명했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박태원은 작가로서의 삶을 꽤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다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양쪽에서 모두 칭송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우리 역사가 떠안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박태원은 남과 북이 모두 소중하게 간직하고 또 탐구하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양 체제의 단절은 매우 뚜렷한 편이다. 최근 들어 박태원의 북한에서의 작업이 남한에서도 조명을 받기 시작했지만 다른 체제에서 생산된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소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박태원이 남한에 있을 당시 즉 식민지시기에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남북을 아우르는 아버지의 흔적 찾기

 

 

 

아버님과 관련한 자료 수집과 기념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87년 아버지의 사망 소식(86년 사망)이 들려오고 그를 계기로 문인 단체에서 해금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죠. 그때부터 시작해서 해금 이후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을 시작했어요. 89년 해금된 이후 문공부에 저작권 상속 등록을 했고, 아버지 사망신고일(64 10 4)로부터 저작권이 유효한 상태죠. 해금되고 아버지 책들을 [깊은샘] 출판사에서 내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먼저 어떤 출판사에서 허락도 없이 출판을 해버리는 바람에 저작권 문제로 출판사 간에 분쟁도 있었어요.

 

 

 

사망신고는 언제 하신 거예요?

 

아버지나 누나나 생사를 알 수가 없는 상태인데 호적상에는 그대로 있고, 그 문제로 호구조사 때마다 관청과 마찰이 계속됐어요. 그래서 64년에 아버지와 누나의 사망신고를 했죠. 누나가 북한에 저렇게 살아 있는데 여기서는 사망자 처리가 되어 있는 거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아버지의 월북 이후 자료는 찾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직도 찾아내야 할 게 많이 있을 거예요. 일본이나 미국 도서관 이런 데도 좀 찾아봐야 할 텐데 아직은 여력이 없어서. 사실은 미국에 있는 형님이 90년 북한 방문했을 때, 새 어머니 권영희님이 아버지의 유고 가방을 가져가라고 건넸대요. 그런데 형님이 그 가방을 두고 온 거야. 아마 겁이 나서 차마 못 들고 왔던 모양이에요. 나였으면 들고 왔을 텐데.

 

 

 

해금되기 이전에 아버지의 작품을 보신 적이 있나요?

 

해금 이전에는 아버지의 책들이 국립도서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 책에금 대출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해금 이전에 아버지 이름은 늘으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볼 때마다 식자공이 잘못해서 빠뜨린 건가하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어요.

 

 

 

아들로서 아버지의 흔적과 기록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형님은 미국에 일찌감치 이민을 가셨고, 할 사람이 없었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데. 아버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자료제공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열심히 찾아다니고 모으기 시작했어요.

 

남한에서 40년 그리고 북한에서 37, 상당 기간 활발하게 활동을 했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에, 남과 북 두 곳에서의 삶을 모두 국내외에 알리게 되면 통일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고. 그렇잖아요? 그렇게 두 체제에서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게 참 드문 경우니까. 그런데 반대 체제에서의 삶은 거의 알 수가 없잖아요.

 

 

 

박태원이 살았고 <천변풍경>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옛 종로의 지적도, 경성고보 시절의 학적부와 같은 기본 자료는 물론이고 해금 이후의 신문 기사 스크랩, 국내외 학자들로부터 얻은 정보들, 북한에서 일본을 거쳐 입수된 자료들(북한에서 발간되는 [통일문학]과 같은 잡지나, 일본 내 박태원 문헌 정보 등)까지 그는 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문서 파일로 7~8권의 분량을 모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구보 독자 권유원”(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표현)마냥 열성으로 자료들을 보여주고 설명해주었다.

 

 

 

아버지를 해외에 알리는 작업도 많이 하고 계세요?

 

아버지를 널리 알리는 작업에 관심이 많죠. 작년에 <천변풍경> 일어 번역본이 출판됐고, 야마다씨라는 분이 현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일어로 번역 중이에요.

 

 

 

외국어로 번역 작업은 활발한 편인가요?

 

영국과 미국에서 번역 제의가 몇 건 들어왔지만 국내의 지원을 받지 못해서 진행되지 못했어요. 대산재단에서 문학작품 번역 지원 사업을 하는데 거기 채택이 되면 삼천만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채택이 되지 못하면 사실 번역을 하기가 쉽지 않죠.

 

 

 

외국에서도 구보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 꽤 있는가 봐요?

 

일본 내에는 구보 연구자들의 모임이 있고 <갑오농민전쟁>을 함께 읽는 독서회도 진행 중이라고 해요. <천변풍경>을 일어로 번역한 아끼꼬상이랑 일본의 한국문학연구자 시라카와 유타카상 등이 일본 측에서 구보의 자료도 조사하고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방송 프로그램에서 구보의 소설을 다룬 적도 있죠?

 

전에 KBS “스폰지라는 프로그램에서 <방란장 주인>이 소재가 된 적이 있어요. 한 문장으로 된 소설이라고 해서. 글자 수를 일일이 다 세 봤더니 총 5558자였다고 하더라고. <방란장 주인>에 대해서는퀴즈 대한민국 팀에서도 연락이 왔었죠. <방란장 주인>과 같이 하나의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외국어 문학작품에도 있는지, 이런 게 한국어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 영어로도 가능한 방식인지 영문과 교수인 조카에게 연구해보라고 했어요. 외국 저널에 그 연구 결과를 싣게 되면 해외로도 작가를 알리고 관심을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천변풍경>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얘기도 들렸던 것 같은데요.

 

작년에 청계천 물길이 다시 열렸을 때 의욕적으로 일을 벌였으면 뭔가 결실이 있었을 텐데 잘 되지 않았어요. <천변풍경> 드라마화 얘기가 나온 적이 있긴 했는데, 지금은 시기적으로 늦어버렸지. 작년이 좋은 기회였는데.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거닐다>를 펴낸 바람구두 출판사의 박영민 사장이구보 따라 청계천 걷기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갑오농민전쟁> KBS에서 드라마화를 검토 중이라고 해서 접촉을 한 적이 있고. 나로서는 남북한의 생활을 아우르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기념사업의 궁극적으로 목표 같은 게 있으신가요? 전집 발간이라든가 특별한 사업이라든가.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평전이 씌어졌으면 하는 것이에요. 2010년에 탄생 100주년이 되는데(보통 연보에는 1909년생으로 되어 있곤 한데 양력으로 1910년이 맞다고 한다), 그즈음해서 평전이 나온다면 좋지 않을까. 최근에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거닐다>를 쓴 조이담씨를 만났는데 정말 치밀하게 공을 들여서 잘 썼더라고. 그래서당신이라면 평전도 써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어보았는데, 못 한다며 손사래를 치네요.

 

탄생 100주년 때는 구보학회에서 단체로 평양 애국열사릉(98년에 구보의 묘는 이장돼서 이곳으로 옮겨졌다)이라도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쯤이면 구보학회 평양개최를 추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밖에 선생님이 꼭 하시고 싶은 일이나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으신가요?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요? 아내가 내년에 환갑이 되는데, 환갑을 두 번 맞게 해주는 거야. 어떻게 하냐고? 생일날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넘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루를 벌잖아요. 그렇게 해서 생일을 두 번 맞게 되는 거지. 언젠가는 노트북 컴퓨터 메고 유람선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은데 언제쯤이 될지 모르겠네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미 인터뷰어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라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솜씨는 달변가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이야기꾼다운 데가 있었다. 세부적인 디테일을 풀어가는 솜씨는 물론이고 그가 만들어내는 문장이나 골라내는 어휘들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옆에서 직접 아버지를 보고 배우지는 못했어도,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몸속에 스며있는 자질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나 욕심이 분명히 그 안에도 오랫동안 숨죽여 왔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요즘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지인들과 박태원 연구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자주 편지도 쓰고, 개인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여기저기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몇 년 전 공모에 입상한 <평양행 DHL>이라는 글은 누님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였는데, 이번 상봉 때 비로소 직접 만나 읽혀 드렸다고 한다. 2004 8 [문학사상]에 정태은의 글이 실린 다음 달인 9월호에 가족사의 애환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우리들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이라는 글을 실었고, 최근에는 이산가족 상봉 중단 사태와 관련해 [프레시안] <이산가족 상봉은 생명의 문제입니다>(2006 7 20)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대개 아버지나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된 글들이었다.

 

연례행사처럼 늘 때가 되면 뉴스를 요란하게 장식하곤 했던 이산가족방문 행사는 14차 이후로 중단 위기에 놓여 있다. 이번 여름 상봉이 이루어진 지 딱 한 달 만에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상봉 중단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우리 정부가 식량과 비료 지원을 유보하자 곧이어 취해진 조치였다. 지금까지 7년 동안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이산가족은 남북한 합해서 1만여 명 남짓이다. 남한에서만 대기 중인 신청자(해당가족의 대표자)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갈 길은 멀고도 멀다. 그렇지만 이번 겨울에 15차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정세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양국 관련자들의 변덕에 오리무중인 상태다.

 

그는 이산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죽어 나자빠질 때까지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죽을 때까지 생사확인조차 할 수 없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의 토로였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이산가족 문제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에서의 아버지의 전체 삶을 오롯이 그려낼 수 있도록, 아직 많은 부분 장막에 가려진 북한에서의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남북한의 소중한 작가로서 아버지를 기리는 작업은, 그에게 이산가족 문제 그리고 통일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과 결코 별개의 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