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 중순, 누군가의 초청으로 베이징에 놀러 가서 퇴락해가는 루쉰문학원(魯迅文學院)에서 며칠 지냈다. 그 때 우연찮게 만난 사람들이 꽤 되는데 까오양(高洋)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독일에서 지낸 지 반 년쯤 되는데 이번에 고향에 가려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한 달 이상이나 개기는 걸 보니 아마도 부모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는 듯하다.
올해 서른 여섯 살의 까오양은 헝클어진 머리에 서양인 같이 높은 코, 윈드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오만한 예술가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그와 알고 지낸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리고 한 때 그는 날 우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꽤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그 껍데기를 벗기고 솔직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좀 비열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인터뷰 할 당시처럼 식은땀이 흐른다. 시인의 후안무치가 이 정도면 사실 그것도 거의 예술적인 경지라 할 만하다. 마오 주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은 당신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난 까오양보다 4살 위지만, 세상은 까오양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닌 듯 싶다. 왜냐면, 그는 영원히 시대의 유행을 따라잡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가 이뤄진 곳은 베이징 젠궈문(建國門) 근처의 외교아파트이다. 까오양 같은 중국 농민의 아들을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솔직히 난 생각도 못했다.
까오양 선생, 당신 이제 막 독일에 살기 시작한 거지?
그렇죠. 여기는 아내 한나요. 요즘 우리 허니문 중이라오.
중국어는 할 줄 아시나? 어떻게 만나게 된 거요?
베이징 대학 부근의 어느 술집에서 만났소. 할로윈데이 때였는데 그 때 그녀가 거기 온 거지. 한쪽 구석에 얌전하게 앉아서 다른 사람들 노래하고 춤추는 걸 뭔가 근심스런 눈빛으로 보고 있더라고. 그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야.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슬며시 다가갔지. 눈빛이 마주치자 피식 하고 서로 웃었어.
그 여자에게 시를 들려주었지. 별 건 아니고. 옛날 사람들 애정생활 얘기지. 실은 가짜야. 상상으로 만들어 내고 기억해 내는 척 했지. 근데 난 설마 그 여자가 그거에 감동할 줄은 몰랐어. 중국에 온 지도 얼마 안 되어 간단한 중국어 밖에 못했지만, 손짓으로 의사전달을 하니 큰 불편은 없었어. 그 때는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어. 한 잔 또 한 잔 술을 마시며, 한 수 또 한 수 시를 그 여자에게 들려주었지. 일상적인 대화와 시의 리듬이 정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런 경험이었어. 세상 온갖 번뇌를 잊게 해줄 정도였어.
당신 부부 요즘도 그렇게 손짓으로 얘기 나누나?
여전히 그렇지. 하지만 요즘은 내가 독일어 배우느라 바빠. 영어 스웨덴어도 공부할 생각이야. 말을 배워서 화목한 가정을 꾸릴 생각에서가 아니야. 더 중요한 건 독일어 영어 스웨덴어 문화계에 들어가기 위해서야. 내 시를 그 언어들로 번역할 생각이지. 내 생각에 내 시가 노벨 문학상을 못 받은 건 순전히 언어 때문이라고 봐. 시인 어우양장허가 이렇게 말했지. “상형적인 인간에서 표음적인 인간으로 바뀐다.” 내 생각에 나도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자기 뿌리도 뽑아 버리려고 하는 구만.
솔직히 우리 같은 세대가 무슨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유방만 있으면 여자지, 서양 유방이든 중국 유방이든 난 상관 안 해. 내가 노먼 베쑨(캐나다 출신 의사로서 스페인 내전과 중국 혁명에 참여했다. ? 편집자 주)보다 훨씬 인터내셔널 해. 온 세상이 내 조국이야. 그게 무슨 문제야?
그럼 당신 다음 조국은 어딘데? 당신 아내가 중국어를 잘 몰라서 천만다행이군. 내가 보기엔 당신은 목적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그런 인간이야. 당신한테 낭만이라고? 얼어 죽을 낭만 같은 소리 하지 마. 솔직히 당신, 낭만 따위는 안 믿는 그런 인간 아냐?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는 당신 같이 예술가라는 탈을 쓴 작자가 한 둘이 아니야. 배고픔과 추위를 억지로 참고 말이지. 웃는 얼굴로 외국인들이 나오는 동네에서 어떻게 엉켜 보려고 설치는 인간들. 90년대 들어서 생존경쟁이 전례 없이 치열해졌지. 모두가 불안하니까, 중국 여자애들 중에 낭만을 믿는 애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그러니, 똑똑한 놈들은 모두 눈에 불을 켜고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멍청한 외국 여자들을 노리지. 그 여자들이 당시(唐詩)나 송사(宋詞) 말고는 중국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어?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 주시오! 당신 같이 정직한 위인이 있을 자리가 아냐!
이건 모르지? 나한테 당신 첫 번째 아내 사진이 있어. 올해 서른 여덟 살이니까 당신보다 겨우 두 살 많은데 머리가 완전히 할머니야. 겉으로 보면 마치 당신 어머니 같지. 그리고 당신 아들은 뭐 하는 줄 알아? 외로움에 시달리다 실어증까지 얻었어. 최근에는 가출까지 해버렸지. 당신 독일인 마누라한테 과거를 모두 가르쳐 줄까 말까, 응?
이런 행패가 있나, 당신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별 다른 요구 하나? 내 취재에만 잘 협조하라고. 그럼 되지. 당신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해 주지. 당신, 소위 시대의 대표적 예술가 중 하나 아냐? 당신 소설이나 시를 보면 마치 외국 걸 번역한 것 같아. 자기 혈연을 지워버린 것 같단 말이야. 아마 당신이 가장 싫어하고 끔찍해 하는 건 어머니지, 그렇지? 절망과 자기비하를 하면서도, 고상한 시를 써서 그걸로 자기 출신을 바꾸려고 껄떡대지. 당신은 숱한 농촌 출신 시인 놈들처럼 러시아 영미 고대 그리스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살지. 까오양 선생, 어쩌다 이름을 날리게 됐는지 얘기나 한번 들어 봅시다.
자, 자, 이러지 말고, 우리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는 게 어떻소? 근처에 괜찮은 술집이 하나 있는데.
좋지.
진작 당신 의도를 눈치 챘어야 하는데. 좋소, 내가 졌소. 알다시피 난 원래 농촌 출신이오. 순전히 혼자 힘으로 죽어라 노력해서 성(省)에 있는 유명 의과대학에 들어갔지. 졸업한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의사를 하려고 했는데……
고향은 어디지?
구이저우성 츠수이 현이요. (구이저우성은 중국의 모든 성 중에서 각종 사회경제지표에서 언제나 최하위다. ? 역주)
당연히 구이저우 츠수이 인민공사 홍기(紅旗) 제7생산대겠지. 동네 이름은 뤄자거우(羅家溝)일거고. 이름은 뤄푸구이(羅富貴), 어렸을 때 이름은 소똥이. 18살 무렵에 대학시험에 떨어지고는 아버지 말 따라 지역 위생학교에 들어가서 2년 공부하고는 바로 결혼했지. 나중에 애가 생겼지만, 당신 아마 5년 동안 양육비도 안 보내줬지. 그렇지?
당신, 날 가르칠 자격 따위 없어! 그래, 난 가난한 산골 출신이고 본명은 뤄푸구이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난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위로 올라가야 했어. 우리 고향에서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나 같은 예술천재가 나왔는데 그냥 그 시골 구석탱이에 썩으라고? 죽어도 그럴 순 없지.
그래, 매년 <<시간(詩刊)>>이나 <<성성(星星)>> 같은 잡지에 흙냄새 나는 시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농민 시인을 기억한다고 치자. 그래서 무슨 희망이 있어?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외국도 못 나가는데? 천재는 책상물림하고는 달라. 설사 책상물림처럼 생겼다고 해도, 타고난 재주를 적재적소에 딱 맞춰서 쓰는 게 중요해. 루야오의 소설 <인생>에서 그런 걸 잘 보여주지
그럼 인민공사 병원에서 얼마나 일 했는데?
3년이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어. 하루 종일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뭘 해? 농민들은 원래 나이든 중의사(中醫師)만 믿거나, 아니면 아예 무당을 찾아서 굿을 하는 사람들이야. 나 같이 위생학교 갓 졸업한 애송이는 아예 찾아오지도 않아.우리 세 식구는 아파트에 살았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벼락이라도 한번 치면 건물 전체가 쿵쿵거리며 장난이 아닌 그런 데야. 난 천성이 책 읽는 걸 좋아하니 매달 월급을 받아도 책 사는 데 쓰고 나면 몇 푼 남지도 않아. 그러니, 가족이라고 해 다니는 꼴이 거지랑 별 차이도 없지. 게다가 이웃이니 농민이니 모두 도둑놈 새끼들이야. 돈 될 만한 게 없으니까, 솥이나 그릇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들 녀석 공부하는 책상까지 훔쳐 간다니까. 한번은 친구 한 명이 시인들 전부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이 중국 작가를 한번 보러 오라고 호소까지 했다니까. “까오양과 이웃은 거의 빈농과 지주의 관계나 다름없다. 해방 전에는 빈농이 많고 지주는 적었지만, 지금은 지주 여럿이서 빈농 한 명을 괴롭힌다” 고까지 얘기했으니까.
또 한 번은 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방 안에도 비가 줄줄 새는 거야. 마누라하고 같이 부랴부랴 책들을 침대로 옮겼지. 거기가 유일하게 비가 안 새거든. 쌓아 놓으니까 산더미 같았지. 옆에서 깜빡 조는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정말 눈물이 줄줄 흘러 나오는 거야. 나도 사내인데, 마누라하고 새끼를 이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보내고 커넥션도 만들었지. 유명해져야 해! 유명해지지 않으면 안 돼! 발악을 했어.
첫 번째 이혼을 한 건 언제였나?
1989년 겨울. 문학판이 점점 저속해지고 있던 때였어. 나도 책을 내고 성(省)으로 판을 옮겼지. 그래도, 마치 내 자신이 혁명소설 <홍암>에 나오는 반도(叛徒)인 푸즈가오(甫志高) 밖에 안 되는 거야. 외투 깃 세우고 어슴프레한 거리를 걷는 거 그 모습 말이지. 난 사람들이 모두 날 무시하는 걸 잘 알고 있어. 왜냐하면, 중국 남방은 아주 보수적이라, 문인이 이혼을 하면 그건 바로 따돌림 당하는 일이지. 향토작가 저우커친처럼 이혼하려는 생각만 해도 그건 바로 영원히 오명을 뒤집어쓰는 게 되는 거야.
다행히 내 전처가 사리에 밝아. 인연이 다 하면 깨끗이 갈라서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같이 민정국 가서 수속 끝내고는 학교로 가서 애를 데리고 집으로 왔어. 그 때 막 열 살쯤이었지. 담벼락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개미들이 이사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내가 말했지, 얘야 아빠 간다. 근데, 녀석이 아무 소리도 안 해. 손가락으로 축축한 담벼락만 조금씩 파고 있어. 다시 말했지, 얘야 다시 만나러 올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웃고만 있었어.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신 이혼 전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다며?
그건 말 못하겠네.
그리고 그 때 주색에 빠져 있을 때, 오히려 정기(正氣)있고 당당한 그런 작품을 많이 썼다며? 그 때 당시 대표작이 <견수진지(堅守陣地)>와 <진리여귀족(眞理與貴族)>이지 아마?
문화적인 인격은 내재적인 것 아냐? 랭보도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고귀했고, 역시 농촌 출신이었어.
유럽과 중국의 시골은 같은 게 아냐, 이 친구야! 까오양 선생, 요즘 전국을 강타한 전기(傳記)소설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인물 하나가 바로 당신이랑 닮았어. 내가 한번 읊어 볼 테니 들어 봐. “한 시인이 밤에 <요재지이>를 읽다가, 사람하고 여우가 같은 데서 자다가 같이 한 번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 눈을 떼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읽었다. 그러다가 따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친구가 밖에 나간 사이 그 마누라와 여동생을 덮쳤다. 그런데 이 두 여자가 충절이 곧아 힘을 합쳐 저항을 하니, 이에 시인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면서 몽둥이로 엄청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뒤통수에 축축하게 젖은 콘돔이 붙어 있었다.”
그건 정말 후안무치한 비난이오. 그 책을 가지고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어!
당신이 열 받았다는 말, 그 소설의 작가에게 반드시 전해주지. 남의 아픈 데를 들추어내는 건 비도덕적이지. 문명적이지도 못하지. 내가 보기엔 당신은 지금 시대의 실용주의자의 전형이 되어야 해. 열악한 환경을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니까 말이지. 안 그래? 1989년에 이혼하고 나서 바로 상하이로 갔지 아마?
솔직히 그거 하느라고 참 애도 많이 썼지. 두 번째 마누라가 상하이 사람이긴 하지만, 구이저우의 현 호구를 상하이 같은 제1의 대도시 호구로 옮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내 전략은 뭐냐 하면 먼저 데릴사위가 되는 거야. 그러고 나서는 커넥션을 넓혀서 또 다른 길을 찾는 거지. 내 은인이 누구냐, 바로 상하이 어느 큰 호텔 사장이었어. 내 마누라처럼 그 사람도 문학 숭배자였지.
당신 은인 나도 알지. 요즘 보니까 당신이 비열한 인간이라고 마구 욕을 하고 다니던데?
그 인간도 뭐 별로 떳떳한 거 없는 인간이야. 나는 그 인간을 이용해서 상하이로 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고. 대신에 나랑 내 마누라는 그 인간한테 정신적 육체적 만족감을 줬지. 그러니 피장파장 아냐? 결국 이게 두 번째 이혼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말이야.
두 번째 처는 지금 어디서 일하는데?
상하이 세인트 피터 대학.
상하이에 그런 대학 없는 것 같은데?
해방 전에는 “세인트 피터” 였고, 지금은 모 대학이야.
아, “그” 대학이라고? 그럼, 당신 대학에서 살았다는 말이네? 당신 아내 조교 노릇 했나?
글 쓰고, 음악 듣고, 산보했지. 칸트처럼 몸에 시계를 지니고 다니면서 산보 시간을 계산했지.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구만. 결국 아내한테 빌붙어서 살았다는 거네. 장장 7년이나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하루아침에 차 버렸구만.
이거 왜 이래? 이혼이나 결혼이나 모두 누가 일방적으로 원한다고 되는 일이야? 요즘 사람 중에 일방적으로 차고 차이는 게 어디 있어? 나도 원고료 수입이 있었다고. 게다가 나 상하이 일류 음악가들하고 같이 합작으로 가극도 썼는걸.
이 친구야, 구라도 사람 봐 가면서 쳐! 누가 몰라? 당신 음치잖아. 산가도 잘 못 부르면서 당신이 가극을 해?
당신 지금 이게 취재하는 거요? 완전히 시비 걸려고 왔구만.
난 당신 진짜 속내를 듣고 싶은 거지, 연기 보러 온 게 아냐. 알잖아? 물론 인생은 연기지. 하지만 난 별로 좋은 관객이 못 돼. 어떨 때는 분장실로 달려가서 배우들 얼굴에 처바른 것들을 확 까 밝혀내고 싶어지는 인간이니까.
당신은 뭐 얼굴에 안 바르고 싶나? 분장실은 배우들의 사생활 공간이야. 경찰도 못 들어와. 당신은 말이야, 마음씨가 못 돼 먹었어. 잘 생각해 봐. 중국에서 이혼이나 결혼으로 개인사를 확 바꿔 본 사람이 있나? 오직 나 이 까오양만이 결혼 한번 하면 한편의 역사를 새로 쓰는 거야. 그러니까, 시골 사람-성(省) 사람-상하이 사람-독일인 식으로 말야. 어때, 질투나? 이런 내 개인사는 바로 내 예술 창작의 역사나 다름없어.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옛날 것을 싫어하든, 아님 그 반대든. 변덕스런 유럽 귀족들처럼 항상 어떤 시대 분위기에서나 그 제일 앞에 서려 하지.
예술이 성실함을 필요로 하는 건가?
무슨 소리! 예술은 거짓말이야. 그러면서 현실 사회를 바꾸는 도구이기도 하지. 먼저, 지독하게도 비루한 출신을 있는 힘껏 부정하지. 그거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 누가 강제로 준 거라고. 자기 피 속에 흐르는 수천 년 된 농민의 비루한 액체 말이지. 계속 반복하는 거야. “나는 농민이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라고.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나 봐.
어떤 강력한 힘이 자기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 다음엔 신이 당신 피를 바꿔주는 거야. 그리고는 또 다시 반복하지. “나는 귀족이다! 그리스 귀족이다! 러시아 귀족이다! 독일의 시 귀족이다!”라고. 이러다 보면 진짜 믿게 돼. 그래서 진심으로 남을 속이고, 그 사람에게는 “예술의 향유”를 하게 할 기회를 주는 거야. 결국 쌍방이 모두 만족하게 되지.
당신처럼 “피를 바꾸고”, “뿌리를 자른” 귀족들이 중국에 얼마나 될까?
아예 없거나, 아니면 전부지. 개방을 하고 나니까, 모든 게 명백해졌지. 미 제국주의가 이를 드러내며 발톱을 세우고 있는 게 아냐. 대만 인민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야. 물질적인 수준이든 정신적인 수준이든 우리는 모두 한참이나 낙후되어 있어. 그러니, 모두가 재빨리 피를 바꾸고 양놈이 되려고 안달하는 거지.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하는 인물은 없지.
당신 지금 또 다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으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자기자랑 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고향에 금의환향 하고 싶은 생각이 몽글몽글 생겨날걸?
고향에 돌아간다고? 내 고향이 어딘데?
여자 품 속이지. 당신은 <백 년 간의 고독>에 나오는 싸움 잘 하는 부엔디아 대령 같은 인물이 될 수가 없어. 당신 침대 위 숱한 전투에서 수많은 작은 까오양을 만들어 낸 거지?
나의 작은 까오양은 바로 내 시들이야. 그것들이 이 사회보다 훨씬 거짓말을 잘 하지. 그래서 모두가 그 시들을 잘 알지. 내가 당신한테 살짝 얘기해 줄까? 성실 정직 진리 원칙 이런 거 가지고는 밥 못 먹어. 나처럼 이렇게 대 놓고 해야지,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귀여운 것들도 살 수가 있는 거지. 안 그래?
Writer & Interviwer
라오웨이(老威): 본명 랴오이우(廖亦武)
70년대말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각종 문학상을 받음. 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맞아 시 <<大屠殺>>을 발표. 1990년 톈안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安魂>>제작에 참여하다 처음으로 체포되어 4년 형을 받음. 1994년 출옥 후 고향인 청두(成都)의 찻집과 술집을 전전하며 악기를 연주하며 생계를 이어감. 1995년 공안에 의해 가택수색을 당하고 원고들을 압류당함. 동년 유명 지식인 12명과 함께 全國人民代表大會에 반부패 관련 건의를 함. 1998년 중국 70년대 지하 시를 편한 <<沈淪的聖典-中國20世紀70年代地下詩歌遺照>>내고 베이징에서 구류당함. 1999년 결혼식 직전에 “불법인터뷰” 혐의로 구속. 동년 인터뷰의 일부분을 익명으로 출판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후, 책은 판금당함. 2001년 1월 1990년~2001년 기간에 완성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60여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한 <<中國底層訪談錄>>을 재출판하여 또다시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킴. 2001년 중국 유명 일간지 <<南方週末>>에 <<中國底層訪談錄>>관련 대담이 실린 후 당국에 의해 동 신문사 주편집 부편집 편집주임 편집부주임 등이 정직처분을 당함. 2003년 여름 프랑스 bleu de chine 출판사에서 <<中國底層訪談錄>>을 선별 번역한 <>의 출판기념회 참석을 출국하려다 사스예방을 이유로 공안당국에 의해 출국금지 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