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85% 정치인
퍼슨웹: 우선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김희숙: (웃음) 자기소개요? 저 자기소개 같은 거 잘 못해요. 자기소개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안 좋아하는 세 가지가 하나는 폭탄주, 하나는 자기소개,하나는 돌아가면서 강제로 노래하는 거.
퍼: (웃음) 인터뷰 자체가 자기소개니까 차차 어떤 분인지 듣도록 하고요. 원래는 대학원에서 노문학 공부를 하시다가 현재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이신데요. 어떻게 해서 정치를 하게 되었는지, 정치입문부터 설명해 주세요.
김: 정치입문이라고 부르니까 좀 거창하게 들리는데요, 박사과정 마칠 때쯤이었어요. 번역을 하고 있었죠. 근데 한동안 제가 저한테 필요한 공부만 한 것 같아서 다른 일도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마침 집이 경기도 파주로 이사를 갔어요. 신도시가 조성되었죠. 거기서 개혁당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2002년8월 개혁당 창당 발기인이 되었죠.
퍼: 개혁당에서 활동을 시작하셨네요.
김: 온라인 정당이었죠. 웹상으로 가입하고, 지구당 위원장은 번개 제일 먼저 때린 사람이 하기로 했어요. 재미있었어요.
퍼: 꼭 과거의 PC통신 동아리 같이 들리네요.
김: 새로운 형식의 정당을 해 보자는 정신이 있었어요. 이후의 정치적 일정 때문에 다 실험하지는 못 했지만, 학생부터 농민, 군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죠. 대학 다닐 때부터 제가 기대했던 정당의 모습이었어요. 대학 때 같이 공부한 사람들 중 일부는 민주노동당, 일부는 사회당으로 가기도 했지만, 제 지향이나 노선과는 달랐어요. 노동자계급정당은 19세기적 마인드라고 생각했죠. 단지 경제적 토대나 계급에 기반해서는 정치적 성향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민주노동당 같은 정당도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결국 기성정당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조별 그룹별로 가입하는 게 정당인가요? 정파 싸움하고…. 굳이 입당하고 싶지는 않았죠. 그러다가 개혁당 모임을 하게 되니 내가 원하는 게 여기 있구나 싶었던 거죠. 그러다가 점점 더 정당 활동의 비중이 늘어났어요. 번역을 하던 중인데 원고 마감 맞추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웃음) 한20년간 꾸준히 활동할 마음이었어요. 죽을 때까지.
퍼: 꾸준히 길게 활동할 생각이셨네요.
김: 저 뿐만 아니라 모인 사람들 다 그랬죠. 나중에 열린우리당이라는 기성정당 모델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사람들이 자부심이 컸어요.문화적 코드로 모인 네트워크 정당인 셈인데 예를 들자면 녹색당과 유사하죠. 생활정치를 지향하는. 활동하면서 다 같이 애정이 생겼어요. 그 1년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환상적이예요. 꿈의 정당이었어요.
퍼: 그러다가 열린우리당이 생기죠.
김: 개혁당을 해산하는 상황이 힘들었어요. 기존의 지역 구도를 깨려면 기존의 민주당을 깨야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지향에 동의하는 지지자들이 신당을 준비한 거죠. 2003년 5, 6월에.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는 게 2003년 11월 11일입니다. 그 때 개혁당 당적 포기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어요. 여기 와서는 터프해졌어요. 개혁당 하던 사람들이 다 오지는 않았어요. 생활인들이라. 파주는 오프에서 활동하던 당원 숫자가 열 몇 명 정도로 적은 편이고 서로 함께 책임지자는 생각이 있어서 거의 다 열린우리당으로 같이 왔어요.
퍼: 열린우리당 창당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김: 그 때 민주당 시절부터 일하신 나이 드신 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별 일 다 있었어요. 책상 치며 싸울 때도 있었고. 이 분들이 우리를 볼 때는 철없고 생각 없고 당을 동호회 정도로 생각하는 어린 친구들이었고, 우리는 우리대로 그분들이 어이가 없었죠. 이 분들이 과연 민주주의 절차를 아나 싶기도 했고.
퍼: 그리고는 중앙위원 선거에 출마하시잖아요.
김: 열린우리당 창당하고 나서 지역 분들이 절더러 중앙위원 나가라고 권하셨죠.그 때만 해도 열린우리당은 ‘벤처정당’이라 기득권 싸움이 당내에서 그리 크진 않았어요. 처음엔 안 나가려고 하다가 누군가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열린우리당에 함께 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출마했죠. 2004년 1월 말에 나가 2월에 당선되었죠. 당시에 현실정치로 들어온 개혁당 친구들은 스스로를 ‘보트 피플’ 같이 느끼고 있었어요. 이방인 같았죠. 우리 중에도 누가 중앙위원회에 나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결과를 열어보니 15명 중앙위원 중에서6등을 했어요. 무명의 지역 평당원이었는데. 다들 결과에 놀랐죠.
퍼: 주위에서 왜 하필 김희숙 님더러 나가라고 한 거죠? (웃음)
김: 주위에서 제가 마음에 들었나 보죠. 마침 제가 직업도 없었고. (웃음) 원래2천원 내는 당원으로만 남으려고 했어요. 중앙위원까지 할 생각은 없었죠. 개혁당 해산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고,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이 결국 관건이었죠. 무책임하게 발 빼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구요. 제 생각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매우 특이한 집단이 출현한 거였거든요. 이 사람들이 그냥 흩어지는 게 싫었고 다 함께 남길 바랬죠.
퍼: 상황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 건가요?
김: 대신 중앙위원 임기 2년 마친 후엔 내가 뭘 하건 내버려 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랬죠. 사람들이 중간에 그만 두지만 말라고 했죠. 일을 시작해 보니 정당개혁 일이 재미있고 창조적인 부분도 많았어요. 올해로 2년이 끝나는데, 그 때 한 약속은 지킨 거죠. 근데 이 시점에서 (정치를) 더 해야 하나 고민해봤어요.
퍼: 결론은요?
김: 더 해야겠다고 결정했죠. 2년이 지나니까 좀 더 진지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만 두기 곤란한 상황이고요. 그 사이 또 전당대회가 있었고 김두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 열린우리당 경남도지사 후보) 후보 선대본 대변인도 했죠. 그리고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령 내가 직업정치인을 하더라도 내가 나 아닌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퍼: 할 만하다는 거죠? (웃음)
김: (웃음) 그 동안 또 같이 하다 보니 또 역사가 생긴 거죠. 그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거죠.
퍼: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 체계가 어떻게 됩니까?
김: 시도별로 뽑아요. 연방의회처럼 지역별로 다 뽑죠. 지역분권정당이죠. 상임중앙위원(지금은 최고위원)이 있고요. 16개 시도당별로 선출해요.
열린우리당의 당헌에 따르면, 중앙위원회는 당무 집행에 관한 최고의결기관으로서, 16개 시도별로 선출되는 지역대표, 청년대표, 장애인대표, 노인대표, 직능대표로 구성된다. 김희숙은 지역대표로서 경기도에서 선출된 중앙위원이다. 열린우리당 창당 후 처음으로 열린 2004년 2월의 중앙위원 선거에서 여성중앙위원(전국구)으로 당선된 김희숙은 2005년 3월의 2기 중앙위원 선거에서 경기도당 중앙위원 당선자 전체 11인 중 5위의 득표로 재선된다. 당선자 대부분이 국회의원인 가운데 김희숙은 비국회의원으로서는 최다득표를 한다.
퍼: 선거운동 과정은 어땠어요?
김: 아침에 눈 뜰 때마다 후회했어요. (웃음) 원래 선거에 안 익숙해요. 비이성적인 퍼포먼스라 생각했죠. 학교 다닐 때도 학생들이 율동하며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했어요. 선거 때마다 동아리실에 들어가버리곤 했죠. 그때도 출마 권유 받은 적 있으나 고려하지 않았어요. 대학 같은 규모에서는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대의제를 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학생회장이 필요한가 싶었죠.
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 지금도 학생대표를 여러 명이 돌아가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선출직 대표에게 학생회 일을 거의 다 담당하게 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선거에 나가니 적성에 안 맞았죠. 지금은 경기도당에서 선출된 중앙위원이지만 그 때는 전국여성위원으로 출마했어요. 2004년에 처음 중앙위원 뽑을 때는 30% 여성쿼터제가 있어서 여성은 전국구로 할당했거든요.
퍼: 전국적인 선거를 한 거네요. 대단했겠네요.
김: 예,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새로운 정당을 한다는 꿈이 있었고 그에 대한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선거운동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어요. 동네 당원들이랑 기탁금 다 같이 모으고 선거 운동하러 전국을 돌아다녔죠. 직장 다니는 분들이 시간 빼가면서 부산이나 제주도까지 따라와 주셨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놀라시고 결국 제 활동을 승낙하시게 되었어요. 왜 그 사람들이 널 도와주냐면서.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옛날 같으면 동학란에 죽창 들고 돌아다녔을 놈들이라고.(웃음) 신기하셨던 거죠.
퍼: 노혜경 시인도 그 때 여성중앙위원으로 뽑혔죠?
김: 예, 2등 하셨죠. 그 때 제 구호는 “정치는 상상력이다”였어요. 선거운동하면서 안티조선 구호 들고 피케팅하고, 당직자들이 나와서 그런 거는 치우라고 하고,해프닝이 있었죠. 재미있었어요. 매일매일 모여서 스포츠 게임 하듯 즐겁게 했어요. 아까 정치입문이라고 하셨는데, 첫 번째 중앙위원 선거가 사실상의 정치입문인 것 같아요. 지금도 “정치하시죠”라는 말이 저는 어색해요. 제 인생의 여러 가지 구조물 중 하나라고 여겨요. 100% 정치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죠. 정치와 나머지 생활의 비율이 6대 4 정도가 이상적인 것 같아요.
퍼: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로 설명하길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한편, 직업정치인 즉 기존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직업정치인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거겠죠.
김: 그럴지도 모르죠.
퍼: 지금은 몇 퍼센트 정도 정치인이죠? (웃음)
김: 지금은 85% 정도. (웃음) 선거라서. 선거 끝나면 70% 정도로 돌아가야죠
우리는 탄광 속 카나리아
퍼: 그럼 이제 지금 하시는 정치활동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참정연 대변인을 맡고 계신데요. 참정연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죠, 열린우리당 내 개혁 성향을 가진 젊은 피들의 모임?
김: 예, 그렇게들 많이 보시죠. 2004년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정당이 되고 나서 ‘실용주의’ 노선이 대두해요. 창당주체세력으로 개혁당을 비롯한 비민주당 출신들이 대등하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공천이 많이 안 됐어요. 정치적 M&A(인수합병)에 성공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 중에 직업정치인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창당될 때의 노선과는 다른 노선으로 갈 수도 있는데 세력화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겠다 싶어서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죠.
“모든 이와 함께 하는 생활정치”를 표방하는 참정연은 ‘참여’, ‘분권’, ‘개혁’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된 열린우리당원들의 모임이다. 이광철, 김두관, 유시민, 장향숙 등 총 13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속해 있다.
(출처:www.modni.net)
퍼: 참정연 내에 국회의원들도 계시는데 국회의원 아닌 희숙 님이 대변인을 맡으신 데에는 이유나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김: 2005년에 중앙위원 선거 한 번 더 하고 그 시기에 여러 가지 일로 당내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참정연이 더 소수파로 몰렸어요. 더 체계를 갖추고 강한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대변인 제도를 두게 되었죠. 처음부터 이 모임은 의원 중심이 아니라 당원 중심이라 대변인을 국회의원이 맡으면 불편하겠다고 판단했어요. 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자리라 의원이 그 자리를 맡으면 발언에 제약이 많을 거구요.
퍼: 참정연의 당내 위치를 평가해 보자면?
김: 탄광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산소의 양을 재는 바로미터.참정연은 그런 역할을 자임해요. 그래서 주류나 지도부와는 다르죠. 외부에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인 모습으로 많이 비쳤어요. 우리는 그런대로 현실 속에서 수용해야 할 부분들은 많이 수용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퍼: 참정연이 당내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엔 어려움이 많다는 뜻인가요?
김: 2005년 전당대회가 있고 문희상 당의장님이 선출된 후 당 체제가 견고해지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 전에는 당에서 적극적 행동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2005년 중반 이후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일부는 참정연을 탐욕스런 집단으로 묘사하죠. “저희는 순수해요”라고 말하는 게 더 웃기죠. 너희들의 진정성이 뭐냐는 질문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도대체 진정성이란 게 뭐예요? 누군들 진정성이 없겠어요?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새로운 정당을 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언론은 “당 깨고 신당 준비한다”고 생각해요. “애초의 창당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활동을 한다” 이러면 “그럼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실 거예요”라고 묻고. (웃음)
퍼: 참정연이 목표로 하는 건 뭔가요?
김: 기성정당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정당을 해 보고 싶은 거죠. 개혁당 오래 못 갈 거라는 악담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열린우리당을 그런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참정연의 목표죠.
퍼: 실제 오래 못 갔잖아요.
김: 그건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죠. 우린 열린우리당에 가서 개혁당에서 추구하던 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최초에 열린우리당 창당할 때는 많은 걸 합의했고요.
퍼: 이렇게 말씀 드리자니 죄송합니다만, 열린우리당 안에서 원하시는 정당 개혁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으셨다, 지금도 믿으신다면, 좀 순진한 발상 같아서요. 애초에 채택한 기간당원제도 결국 변모했죠.
2005.12.26 개정 열린우리당의 당헌에 따르면 열린우리당의 당원은 일반당원과 기간당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기간당원이란, 권리행사일 1개월 전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6개월 이상 당비를 납부한 자, 당원 연수 또는 당 행사에 연 1회 이상 참여한 자를 말하고, 기간당원이 아닌 당원은 당직의 선거권, 피선거권, 당직소환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참정연 등 개혁 성향의 열린우리당원들은 기간당원제의 도입 및 정착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작년 4월 23일 전당대회 이후 기간당원제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고 두 번의 재보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참패한다. 그러자, 선거참패원인을 기간당원제로 돌리면서 이 제도를 포기 또는 완화하자는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간당원제 규정의 개정이 작년 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 그 순진한 발상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앞으로 선거구 문제 의논하면서 더 풍부해질 거라고 믿고요.
퍼: 개혁당이 열린우리당 안으로 오면서 없어졌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단언하려는 건 아닙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대안을 꿈꾸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아이콘으로 삼고 여기까지 오신 거겠죠.현실 정치 안에 더군다나 집권당 안에 계시니, 어려움도 많으실 거구요.
김: 상층부에는 우리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해 줄 사람이 적어요.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만 해도 당내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어요. 일반 당원들과 의원들 간에 괴리가 커요. 기간당원제만 해도 지도부는 원하지 않았고, 이 제도를 주장한 개혁당 출신은 열 명이 안 되었지만 토론을 거쳐 다수를 설득해냈어요. 정치적으로 훈련된 정파가 있는 민주노동당에서는 있기 어려운 상황이 열린우리당에서는 가능했어요. 계보나 정파와 무관하게 명분 있는 주장만으로도 설득이 가능했죠. 결국 기간당원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어요. 감동적이었죠.
국회의원들은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놀랐어요. 숫자로 보면 져야 할 상황인데 이긴 거죠. 2004년의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이런 역동성이 있었어요. 2005년부터 상황이 바뀌었어요. 터프한 한 해였죠. 방어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2006년은 이 매듭을 풀어야 할 때죠.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지방선거가 끝나면 참정연도 자체 평가할 거예요.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정치성
퍼: 열린우리당 진대제 경기도지사 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도 일하시잖아요. 직책이?
김: 사이버담당 부대변인 겸 온라인팀장이죠.
퍼: 선거운동하면서 느끼는 점이랄까 애로사항이 있다면?
김: 진대제 후보의 새로운 정치성이 충분히 나오길 바래요. 개인적 매력이 많은 분이고 호기심과 흡수력이 대단해요. 추리소설 매니아시죠. 합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구요. 선입견 없이 정치를 바라보죠. 자기 스타일의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는 분인데 “경제도지사”로만 획일적으로 이미지를 굳힌 게 안타까워요. 선거 운동 많이 한 베테랑들은 그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 방향을 바꿀 시간은 없지만, 선거전략의 주된 포인트와 상충되지 않은 한에서 경제도지사 이미지에만 갇히지 않게 새로운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개발하고 싶어요.
퍼: 지지율은 잘 나와요?
김: 꾸준히 오르고 있어요. 서울 분들에 비해 경기 분들이 잘 몰라요.
퍼: 경기도에서는 한나라당의 김문수 후보의 지명도가 더 높겠죠.
김: 반도체 성공신화, 삼성CEO, 최장수 정보통신부 장관, 이런 진대제 후보의 경력을 들었을 때 그게 뭘 의미하는지, 경기도 지역, 특히 도농복합지역 유권자들에게는 느낌이 잘 전달이 안 되나 봐요. 노무현이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 것처럼, 진대제 후보나 서울시장 강금실 후보의 잠재력이 참 큰데 선거의 승리라는 틀에 갇혀서 그게 다 못 보여져서 안타깝죠. 강금실 후보도 보이는 거보다 더 실력 있는 분이죠. 글을 읽어봐도 그렇고 만나 보면 내공이 깊으세요. 정치권 안에서 아직 자신만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하셔서 다 표현을 못 하고 계신 것 같아요.
퍼: 강금실, 진대제 후보의 잠재력이나 신선함이라는 게 결국 정치신인이라서, 즉 지금껏 정당정치에 노출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신선한 거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좋은 정치인이 뭔지, 그 관점과 기준도 바뀌는 중이라고 봐요. 정당 안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이 정치하는 게 점점 자연스러워지겠죠. 정치와 비정치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이죠. 당이 안 되니까 인물로 승부해 보려는 현상으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새로움도 있다고 봐요.
퍼: 정치신인이라는 점을 빼면 강금실, 진대제 후보가 어떤 면에서 정치적으로 새로운지 설명해 보시면?
김: 그 두 분이 보여주는 ‘새로운 정치성’이 분명 있어요. 흔히들 ‘탈정치성’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의미의 정치성에 대해 아직 명명되지 않아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보고요. 진대제 후보는 TK이고 삼성 출신인데 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 하고 나서 이번에 출마하신 거죠. 경력과 정치입문 과정을 보면, 기존의 민주-반민주 구도로 설명되지 않는 정치성이 있다고 봐요.
퍼: 과거에 정치를 안 했지만 나름 잘 나가는 경력을 가진 분들이 열린우리당에 들어와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해서 그게 새롭고 대단한 건인가요? 속된 말로 여당 프리미엄을 안고 출마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는데.
김: 여당 프리미엄이랄 게 뭐가 있어요? 지금처럼 지지율이 안 나오고 있는 마당에. 오히려 당이 그분들 개인 지지율을 깎아 먹고 있는데요. 강 후보나 진 후보 다 참여정부 내각 출신이니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퍼: 정부에서 일했다고 해서 꼭 그 당에 들어가야 하나요? 새로운 정치라고는 하지만, 기존의 정당 구조로부터는 벗어나서 정치하긴 어렵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과거에도 새로운 인사의 영입은 늘 있어왔잖아요.
김: 단지 새로운 인물이라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선입견으로 봐서는 정치를 안 했을 사람인데 유권자들이 정치를 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죠. 과거에 노사모가 노무현 후보에게 바랐던 것과 비슷하죠. 굳이 정치에 들어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들어온 거고 그게 새로운 현상이죠. 그 분들의 새로움은 그들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층이 있기에 가능하죠. 강금실팬클럽이나 진대제팬클럽 회원들을 만나면 노사모하고는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안정당을 한다면 이런 분들과도 교집합이 가능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과거의 구도로부터 자유롭길 원하는 유권자들의 기호가 흥미로운 거죠.
퍼: 과거의 구도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무슨 뜻이죠? 아까 진대제 후보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과거의 민주-반민주 구도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을 하셨죠. 강금실 후보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와의 차이에 질문 받자 이렇게 대답했죠. “나는 최소한 한나라당에는 입당 안 한다.” 이 말은 한나라당은 민주-반민주 구도에서 반민주 정당이기 때문에 그런 당에는 입당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이런 의미에서 소위 과거의 구도라는 게 정치적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습니까.
김: 역사성을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앞으로 수행할 과제를 파악하는 측면에서 과거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거든요.
퍼: 강금실 후보도 진대제 후보도 열린우리당 사람들이잖아요. 열린우리당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죠. 과거의 보수정당적 구조나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않잖아요.
김: 단순히 그분들이 열린우리당에 들어왔다고 해서 기성정당을 그대로 택했다고 보진 않아요.
퍼: 글쎄요, 밖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김: 우리는 계속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하는 중이예요. 기성 정치권의 논리에 그대로 편입되지는 않을 겁니다. 현재의 열린우리당 체제를 계속해서 고수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강금실, 진대제 같은 분들이 중요해요. 김영삼 대통령은 군정종식,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교체라는 뚜렷한 슬로건이 있었던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구도타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어떤 단일한 구호로는 설명되지 않아요. 앞으로의 과제를 설정하는 데에서 과거의 구도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예요. 역사성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강금실과 진대제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그 분들이 한나라당에 입당했거나 노태우 대통령 내각의 장관이었다면 제 생각은 또 달랐을 겁니다.
퍼: 지금 대화하면서 기성정당, 보수정당, 새로운 정당, 대안정당,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요. 인터뷰 초반에 민주노동당도 기성정당과 다름없다고 논평하셨고요. 기성정당의 기준이 뭔가요? 민주노동당은 진성당원 제도를 갖고 있고 온라인으로 경선을 하는데요.
김: 내부적인 문제는 있겠지만 민주노동당은 당내 절차나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도적인 부분 때문에 기성정당이라고 한 건 아니고요. 당의 지향점이 계층이나 이념으로 정해져 있는가 여부가 주된 기준이죠. 노동자계급 즉 특정 계급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은 여전히19세기식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 자체가 19세기의 산물이고 제가 말하는 기성정당은 그런 정당을 의미하죠.
열린우리당 안에는 특정한 계층이나 계급에 기반한 이념을 지향하지 않는 약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 총선 후 과반정당이 되고 나서 룰을 세우기 위해 내부 투쟁을 하고 있어요. 제가 관심을 가지는 건 19세기식 정당을 극복한 “포스트 파티(post party)”입니다. 정당의 역사가 100년 넘은 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실험이죠. 그러니까 기성정당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정당을 해 보고 싶은 거죠. 아까 녹색당 이야기도 했지만요.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네트워크가 가능한 조직형식.
누구를 대변할 것인가
퍼: 민주노동당을 포함해서 어떤 정당이라도 어떤 의미에서건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겠지요. 그런 실험정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궁금한데요.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걸 지양하길 원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지금의 열린우리당은 누굴 대변하나요?
김: 우리는 누굴 대변하는가에 대해 자문해 본 적이 있어요. “우리는 어떤 계층을 대변하는가” – 그런데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렇지만 그것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유권자의 40% 이상이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하죠. 이걸 단지 탈정치라고 설명할 순 없다고 봐요. 옷과 몸이 맞지 않는 거고, 선거와 정당제도가 유권자들의 수준을 못 따라가는 거죠. 새로워진 유권자의 성향과 이해관계를 설명해 줄 집단이 없어요. 열린우리당은 명시적으로는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한다고는 되어 있지만, 경제적 이해관계로 다 설명 가능할까요? 지금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아주 혼합적이고 다종다양해요. 진정한 계급정당은 아마 한나라당일 거예요. (웃음) 개혁당에서 계급, 계층과 무관하게 함께 한 것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어요. 가치지향, 문화코드라고나 할까, 아직 설명하기 어렵고, 앞으로 더 연구하고 싶어요.
퍼: 현재의 정치를 과거의 패러다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건 동감합니다. 이해관계나 출신계층이 바로 투표로 직결되지도 않지요. 그러나 아예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누굴 대변하냐고 물었습니다.
김: 문화코드라고 했지만 이해관계가 빠진 건 아닙니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계속 래디칼한 입장이지만, 80% 정도의 조건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분명 소외층과 약자을 대변하고픈 건 사실이예요. 여성, 동성애자, 아이 등.
퍼: 사회가 너무 복잡해서 사회적 약자라는 것 자체가 유동적이긴 하죠.
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봐요. 그 개인이 부자건 가난하건 간에. 그런데, 가난할수록 자유와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받는 경우가 크죠. 그래서 제 시각이 그쪽으로 더 기우는 것이고. 자유와 권리 신장에는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누구나 서로 다른 신체,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죠. 장애인이라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 보수적이라고 해서 따돌림 당하지 않는, 미혼모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불이익 받지 않는, 참전용사라고 해서 극우로 몰리지 않는, 뽕짝을 좋아한다고 해서 문화적 취향이 얕다고 오해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각자의 영혼은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소통하는 사회.
퍼: 자유주의인가요?
김: 그런가요? 자유주의란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워서요. 한나라당도 자유주의라고 주장하니까. 보다 좌파적 자유주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문화적 자유주의? 참정연 회원분들은 ‘소셜 리버럴리스트’라는 말을 자주 쓰던데 그게 학술적으로 맞는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웃음)
퍼: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데에 일정한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한국 같은 동적인 상황에서 추상적으로 약자를 보호하겠다, 자유를 신장하겠다고 하면 잘못하면 아무도 대변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현실추수적이 되지 않을까요?
김: 그건 모든 정치인이 다 처하는 위험 아닌가요?
퍼: 그러니까 자신의 지향을 뚜렷이 하라는 거죠.
김: 전 특정한 누군가를 항시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건 아니예요.
퍼: 그러나 정당에 계시고 정치를 하신다면 매 순간 누구를 대변할지 요구 받고 계신 거 아닌가요. 엄연히 대의제인데, 그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민의를 늘 생각해야 하잖아요. 개혁주의자나 이상주의자로서 뭘 꿈꾸는 건 좋은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택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 정치인을 택하잖아요. 유권자가 바보는 아니니까 정치에 모든 걸 걸지는 않지요.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자기가 뭘 원하는지는 자기가 택한 자가 알아주길 바라겠죠.
김: 그럼 대변이라는 말보다는, 제가 대변이라는 단어를 굳이 택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당신과 ‘함께 하는’ 유권자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이 나올 것 같아요.민주노총 간부나 대기업 간부들이 저를 지지하지는 않겠죠. 우리 사회구조 안에서 경제지위가 고정된 사람은 지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갖는 문화적 코드랄까 가치 지향에 공감할 사람. 괴상한 사람들. (웃음)
제 중앙위원 선거구호, “정치는 상상력이다” – 이걸 야단치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기존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싫기 때문에 규정하긴 어렵지만 저와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분명 있을 거예요. 제가 현재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런 면이 열린우리당 안에 반영되어서일 거예요.
퍼: 개혁당 하던 사람들은 대통령을 만들어내면서 결국 현실 정치를 시작한 건데요. 제도권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하셨나요?
김: 이 정도는 예상했어요. 개혁이 금방 완성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정치)하는 이유도 그래서이고. 제 경우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참여정부와 함께 정치를 시작한 거죠. 그래서 참여정부의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 현재 열린우리당과 함께 하고 있는 거죠. 단순히 민주-반민주 구도나 진보-보수의 구도가 아니라 이를 넘는 새로운 코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운동을 했다는 것이 또 다른 훈장이 되어서 앞으로의 과제 설정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민주화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현재 우리의 지향이 무조건 옳거나 미래의 혁신과제가 무조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민주개혁세력을 자임하는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 의회 내부의 민주주의가 그래서 중요했던 거구요. 그럼 어떤 말로 그러한 지향을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퍼: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 계기는요?
김: 88년 5공 청문회 때 보고 좋아하게 됐죠. 그 때 이해찬, 노무현 다 좋아했죠.
퍼: 대통령과 총리가 되신 분들이네요.
김: 노 대통령이 3당 합당 때 안 따라갈 때, 국민회의 선택할 때, 정몽준과의 경선을 거부하지 않았을 때 등등 매 순간 중요한 정치적인 국면마다 그의 정치적 판단이 마음에 들었고, 제가 바라는 방향과 신기하게도 일치했어요. 교감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요. 재야로 끝나지 않고 현실 정치인으로 실리적 판단을 할 줄 아는 것도 좋았어요.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 분은 그 분대로 저는 저대로 역할이 있고 정보에 둘러싸여 있어서 교감의 기회는 줄어든 것 같아요.
퍼: 대통령과 만나신 적은 있나요?
김: 당 중앙위원들이 청와대 가서 밥 먹은 적이 있어요. 그 때 뵙긴 했죠.
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김: 열린우리당의 현 상황은 안타까워요. 참여정부 지지율보다 지지율이 낮죠.국민들이 이미 열린우리당을 참여정부와 동일하게 보지 않지요. 그 갭을 어떤 식으로건 새로운 발상으로 채워야 해요. 참여정부에 대해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쉽게 평가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그 공과가 판단될 거예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한 정부라고 봐요.
퍼: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되었습니다. 세계화 시대이고 신자유주의 시대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요. 정당개혁도 중요한 이야기지만,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신지 들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김: 양극화 해소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죠. 문제는 방법입니다. 저는 미시적으로 보이는 방법의 차이가 이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류상으로는 복지비를 2% 인상하는 것과 4% 인상하는 것이 약간의 수치차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아주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자본주의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똑같고 다만 방법이 좀 다른 것뿐이다, 라고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근간을 부정하지 않는 저로서는 그 방법의 차이가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기도지사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일자리창출과 복지제도 강화 같은 큰 제목은 김문수나 진대제나 비슷해 보이지만, 실행방법을 검토해 들어가면 두 후보의 복지정책이 미칠 실질적인 영향력은 차이가 매우 큽니다.
지난 3년 동안 양극화문제가 심화된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그래 버리면 신자유주의의 흐름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양극화문제는 계속 해결할 수 없는 게 되어 버려요. 저는 그런 거대담론으로 경제적 현실을 접근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양극화 해소에 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도지사선거초기에 정책회의에 배석한 적이 두어 번 있었어요. 이런 것도 다 도지사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놀랐죠. 지방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도 생각보다 훨씬 컸구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복지나 교육부분은 지방정부가 어떤 관점으로 예산의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현재 양극화 문제라고 비난받는 현상의 70%는 지방정부가 어떤 관점으로 시정과 도정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동안 지방정부들은 시장이나 도지사의 정치적 프리미엄을 위해서 개발에 치중하고 주민복지에 세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양극화 현상으로 불리는 모든 것을 다 중앙정부의 탓으로 돌렸던 겁니다. 그런데 왜 열린우리당이 복지정책을 두고 더 공세적으로 치고 나가지 않는지 사실 저는 좀 답답해요.
퍼: 정치가들은 자신들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나 그 말로 다 끝나는 게 아니죠. 정치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래서 정치가 무서운 거죠. 가령 어떤 정권하에서 자신의 삶이 악화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걸 잊기도 용서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정부는 책임을 면할 수 없고 심판을 피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의 철학이랄까 태도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어요.
아까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하셨지만, 한미FTA를 체결하겠다고 함으로써, 현 정부는 분명 한미FTA로 인해 득을 볼 계급의 편에 선 것이죠. 결국 어떤 뚜렷한 관점을 가지느냐가 중요한 건데, 현 정부는 확고한 입장 없이 계속 타협적으로 가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빚어내었다고 보이는데요.
김: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현 정부와 얼마나 달리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현실의 여러 세력과 끊임없이 조정하고 타협하지 않으면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정부와 열린우리당도 양극화에 대해 계속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의 양극화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공적인 문화인프라가 잘 조성되어야 한다고 봐요. 결식아동에게 도시락 주는 것만큼이나 아이들에게 많은 문화적 환경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상상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결국 상상력의 양극화가 가져 올 결과가 일종의 ‘재앙’이 될 수도 있죠. 부유층 아이들이야 그림이든 인형극이든 부모님과 많은 걸 볼 수 있겠지만,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은 집에서 볼 수 없는 걸 학교나 거리나 사회에서 볼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국가의 공적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나 니진스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왕실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꿈을 키울 수 있었어요. 상인 집안의 샤갈은 지역의 공공도서관에서 미술책을 빌려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고요. 단지 가난하다고 해서 재능을 개발할 수 없다면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손해죠. 가난한 계층의 어린이가 꿈을 키우고 상상할 수 있는 여건이 어디까지 만들어져 있나가 한 사회의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가짜 루저들의 유쾌한 리버럴리즘
퍼: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91학번이고 노문학 전공이잖아요. 특수성이 있는 학번과 전공인데요.
김: 저를 세대나 계층으로 설명한다면 91학번보다는 제 기준은 전교조 세대예요. 제가 보기에 전교조 선생님이야말로 생활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분들이셨어요. 학생 시절 해직되신 전교조 선생님의 집에 가 봤는데 감동적이었죠. 어릴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성경의 이상과 제 생활의 괴리가 힘들었어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주님의 복음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런 생각. 전교조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일상과 이상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다고 느꼈어요. 전교조 생기기 전에 서교련이라고 있었는데, 서교련 선생님 팜플렛을 학교 앞 서점에서 우연히 봤어요. 그 팜플렛에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에 대한 에세이가 있었어요. 원래 저는 대학 안 가려고 했어요. 대학 가는 걸 출세지향으로 느꼈어요. 놀 거 다 놀면서 시위하는 것도 안 좋아 보였고요. 실제 제 주위에 대학 안 가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공장에 가거나 수녀가 되거나.
퍼: 본인은 대학 안 가면 뭐 하려고 했어요?
김: 저는 아무 것도 안 하는 ‘논다니’가 되었을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그 에세이를 읽으면서 대학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전공도 없는데 왜 대학에 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 때 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진 거죠. 그전에 제가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바와 다르더라고요. [어머니]에 아들 빠벨이 교회 안 간다고 어머니가 고민하면서, 엠마오 마을에 가는 두 제자에 관한 대목이 나와요. 원래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던 대목이거든요. 나보다 백 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과 무언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노문과 가려고 그 때부터 공부 열심히 했죠.
퍼: 노문과에 입학하니까 어떻던가요?
김: 막상 가서는 억울했어요. 외국어 공부 하기 힘들어서. 국문과나 영문과만 해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고리키도 전문을 읽어보니까 그때 느꼈던 감동하고는 많이 다르고. . . 대학원에서 공부해보니까 고리끼가 다시 좋아지더라구요.
퍼: 당시 90년대 초반이 구 소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가 개혁개방하고 우리나라와 수교가 이루어지던 시점이라 노문과에 관심이 새롭게 많이 쏠렸죠.
김: 저 역시 러시아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죠. 거기를 지상낙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죠. 제가 만난 선배들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구 사회주의 체제를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 몰락으로 인해 충격 받지는 않았어요. 도리어 새로운 시작이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사회주의 몰락 후 오히려 자유롭게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었던 것 같아요. 다만 마치 그들이 악의 무리라서, 현실에 무지한 몽상가들이라서 망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화가 나죠.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의 좌절이란 누가 봐도 장중하고 기품 있는 비극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죠.
퍼: 러시아는 다녀오셨나요?
김: 94년 옐친 정권 때 휴학하고 모스크바에서 1년 정도 어학연수를 받고 왔죠.
퍼: 러시아의 인상은 어땠어요?
김: 그 때만 해도 자본주의화가 심하게 되기 전이죠. 91년에 페레스트로이카 가 있었고. 그 전에는 길 모르면 할아버지가 나서서 “동무들, 남한에서 온 이 동무가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누가 데려다 주겠소?” 이러면 데려다 주었다고 하는데 제가 갔을 때만 해도 그 정도의 동지애는 못 봤어요. (웃음)
퍼: 제가 아는 89학번은 그 비슷한 경험을 했던데요. 모스크바에서 행인에게 길을 물었더니 그 행인이 자기가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같이 가는데, 그 행인이 자기가 들고 있던 빵을 나눠줘서 함께 먹으면서 갔다고 해요. (웃음)
김: 저는 그런 분은 못 만났어요. 제가 만난 분들은 주로 노어교사거나 고려인들이었어요. 리버럴한 성향이고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했죠. 가령 왜 노어교사가 되었냐고 물으면, 소련에서 외국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서 택했다고 솔직히 대답했죠.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못 했어요. 한국의 보수적인 유교문화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너무 달랐어요. 나이 오십이 넘어도 독신으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많았고요. 거기 가서 개안했어요. 저는 그 전만 해도 결혼은 꼭 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요. (웃음) 우리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웠어요.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동경의 대상이 바뀌는 과정이었죠. 사람들이 서서히 돈과 자본주의에 대해 중이었지요. 해금된 책들이 막 풀리고 있었고요. 헌책방이나 시장에 사람들이 집에 숨겨 놓았던 책들이 막 나오는 광경을 봤어요. 그런 게 다 감동적이었어요.
퍼: 91학번이시잖아요. 1991년은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이 있는 등 뜨거운 한 해였죠. 투쟁도 많았고.
김: 1991년의 시공간을 겪은 건 개인적으로 축복이었다고 봐요. 근데 늘 같이 시위 현장을 다니면서도 이 방식은 아닌데, 라는 안타까움이 있었어요. 5월 대투쟁 때 지도부나 선배들이 87년의 재연이라며 너무 흥분했어요. 전 달리 생각했어요. 저런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지도부라면 곧 꺾일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죠.타도,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테러하지 않을 거면서 왜 타도하느냐고 누가 그랬어요. 말로만 타도하자, 타도하자고. 타도 노태우라는 구호가, 선배들에게는 옛날의 타도 전두환과 연장선에 있었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무책임하게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회의감이 들었죠.
퍼: 전민항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있었군요.
김: 남들이 보기엔 당시의 저도 똑같이 운동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제 방식대로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를 기점으로 새로운 학생운동 문화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80년대적 방식을 극복 못 했죠. 제가 3학년 때 학습 커리큘럼을 원하는 대로 새로 짜 보라고 한 선배로부터 권유를 받았는데 못하겠다고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쉬워요. 그 때 해 봤어야 하는데. 내 공부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내가 후배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책임하다는 소릴 나중에 듣더라도 새 커리를 만들어봤어야 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양순했던 것 같아요. (웃음) 3학년 2학기부터 학습을 안 했어요.
퍼: 어디서 어떻게 학습을 했나요?
김: 문과대 교지 편집실에서 공부했어요. 다양한 구성이어서 유연했어요. 연세대 문과대 노문과 91학번이라는 게 제 강한 특징인 것 같아요. 연세대 문과대는 리버럴한 경향이 강했거든요. 또 우리 과는 90년에 처음 생겨서 제가 입학했을 때90학번 2학년 선배들밖에 없었어요. 80년대 선배가 없었고 제가 싫어한 피라미드 구조가 없었죠. 한국 선생님들보다는 러시아 선생님들과 공부했고요. 그 때 우리 과를 놓고 제가 이렇게 농담한 적이 있었어요. “가짜 루저들의 유쾌한 리버럴리즘”이라고. 다른 과 같으면 95, 96학번 때 일어날 현상이 우리 과에서는 우리 때 발생했어요. 우리 과에는 복학생이 없었죠. (웃음) 시위 현장에 나가더라도 다른 과는 80년대 선배들과 나갔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죠.
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래도 막강하죠. 그럴 만한 선배 없이 지냈다는 게 과연 다르긴 달랐겠네요. 그 후 대학원에 진학했죠.
김: 네, 1996년에 석사 과정에 진학했죠. 혁명기 전후의 러시아 현대문학에 흥미를 느꼈어요. 전세계 20세기 문학의 뿌리 같아요. 온갖 문학적 실험이 다 이루어졌거든요. 정치적인 상상력이 예술의 상상력과 어떻게 연동되는지 생생하게 느꼈죠.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필가가 되고 싶었어요. 대학원은 하나의 장치이자 구실이었고 학위 자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도 독서도 많이 했고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고 새로운 교양을 만났죠.
퍼: 근데 쭉 살아오신 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자신만의 길에 대한 고집이 있으면서도 공동체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김: 제가 (정치를) 하는 것은 성경이나 문학에서 느낀 것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교회도 자발적으로 다녔어요. 저희 부모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었어요.특히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놀이터에서 국기하강식 시간에 부동자세로 경례하면요. 보기 싫다면서 아이들은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 하지 말라고 말리셨어요.마음속으로 그 때는 우리 엄만 애국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별로 안 느끼고 살았어요. 그 경계를 느끼는 걸 불편해해요. 근대인이 아닌 지도 모르겠어요. 당에서 다른 분들이 고생 많이 한다, 이러시면 민망해요. 경계가 흐린 사람이라 제 일을 헌신이라 생각 안 해요. 헌신이란 개념도 나와 남의 경계가 명확할 때 내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야하는 거잖아요.
만약 전쟁 나가 죽었어도 그걸 애국이나 충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그냥 내가 못 참아서 그런 거죠. 만약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제 기질을 볼 때 만주까지 쫓아가서 독립 운동했을 거 같은데, 그래도 그걸 희생이라고 생각 안 했을 거예요. 지금 하는 것도 내가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인생 경험 중 하나예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는 항상 행복했다
퍼: 정치입문 후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요?
김: 힘든 때야 많지만 아무래도 처음 시작할 때. 대학원 공부 그만 두고 중앙위원 나왔을 때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믿기지가 않았어요.
퍼: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김: 아버지 직장 때문에 어렸을 때 전학을 많이 다녔어요. 거의 해마다요. 겉보기엔 제가 적응 잘 한 것 같지만 저에게 꽤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팔도사투리도 다 할 수 있어요. 교육학 논문 중에 전학 자주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서 읽어보니 제 이야기나 마찬가지였어요. (웃음) 전학을 다니면서 절대적인 건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한 것 같아요. 학교마다 규칙이 다 달라요.
퍼: 가족관계는 어떠세요?
김: 장녀예요. 남동생이 둘, 하나는 직장인이고 막내는 무명밴드 보컬. 부모님과는 친구 같은 관계예요. 저는 연령주의를 참 싫어하는데요. 제가 노문학 전공하려 할 때 어머니가 처음에는 반대하시다가 나중에 그러세요. 살아온 걸 생각해 보니 할머니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시대는 계속 변하고 그 시대와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옳더라, 내 고집 꺾고 할머니 말대로 해서 나은 게 없었다, (웃음) 그러니 네 뜻대로 하라면서 지지해 주셨어요.
퍼: 아까 국기에 대한 경례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가 남다른 분이시네요. 지금 생활은 어떠세요? 행복하세요?
김: 저는 항상 행복했어요. 남들은 딱하다고 볼 진 모르겠지만. (웃음)
퍼: 낙천적인가요?
김: 그런가 봐요.
퍼: 존경하는 인물이나 좋아하는 사람은요?
김: 최근에 누가 추천해 줘서 독일의 녹색당 당수였던 페트라 켈리에 대해 읽었어요. 그 사람이 어떤 고비에 어떤 좌절을 겪었나를 보면서 위로가 되었어요. 내가 겪은 거보다 열 배는 더 느꼈겠지 백 배는 더 어려웠겠지, 싶었죠. 막힘없이 자신의 활동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격려가 되었어요.
그리고 작가 안톤 체홉을 좋아해요. 러시아 다녀 온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좋아하게 되었어요. 인생이 뭔지 아는 사람 같아요. 20세기의 천재죠. 그 전에는 천재는 천재의 역할만 하면 되었지만 20세기에 오면서 천재는 생활인이 되어야 했다는 말이 있죠. 체홉이 그런 사람이죠. 의사였고 작품도 엄청나게 많이 썼고 과로를 많이 해서 일찍 죽은 것 같아요. 나중에 저도 체홉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체홉이 21세기 한국에 여성으로 태어나면 쓸 수 있을 만한 작품.
퍼: 최근에 본 좋았던 책과 영화를 들어 보세요.
김: 영화는 [오만과 편견]을 재미있게 봤어요. 풍속사가 나오는 서양사극을 좋아해요. 시골 마을의 무도회 장면이 즐거웠어요. 궁전 무도회의 유쾌한 패러디 같아서. 최근에 읽은 책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평전과 혁명가 트로츠키 평전.
퍼: 답변하시는 걸 듣자니 희숙 님의 문화적 취향이 짐작되는데요. 마지막 질문으로, 앞으로 어떤 정치인,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셔도 좋고요.
김: 사람들이 보다 더 자유로워지길 원해요.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을 원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정치인이 되길 원해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만약 당원이라면 중앙위원 김희숙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까 제가 자기소개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단일한 특정한 정체성으로 나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고요. 남들이 보는 게 다 나예요.각자 다 보는 게 다를 거예요. 그게 다 나예요.
퍼: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치인으로서 개인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 기회 되는 대로 관심 갖고 지켜볼게요.
김: 저도 제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요. (웃음)
에필로그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인터뷰는, 차차 고조되어 열기와 냉기 속을 맴돌다가, 다시금 가까스로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미래가 궁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러시아 문학에 대해 즐겁게 입을 모을 때와 달리, 선거를 비롯하여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가 집권 여당 열린우리당의 사람이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그 당과 정부를 심판대에 올린 유권자의 심정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엄연히 그녀는 거기에 속해 있으므로. 지금 그녀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85% 정치인”이므로. 달변인 그녀는 많은 말을 했지만 말을 아끼기도 했고, 언어와 친한 사람답게,질문자인 내가 택하는 단어와 표현에 신중하고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속내를 될 수 있으면 더 많이 터뜨려내고 싶었다.
선거를 코앞에 둔 현재의 심경을 써서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선거운동공식종료일이자 선거전날인 5월 30일 밤 아래와 같은 소감문이 도착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내 요청에 성실히 응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지방선거는 기초의원까지 모두 당 마크를 달고 나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당선거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은 광역시도지사선거에 좋은 인재들을 후보로 내세우고선 그 뒤에 숨으려는 인상을 주었다. 당의 메인슬로건을 무엇으로 하여 이 후보들의 새로움과 결합된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이 너무 없었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지난 두 달 동안 열린우리당의 이름으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선거는 시험공부 같다. 늘 이제 좀 알 것 같으면 끝난다. 수원 선대본 사무실에서 보낸 지난 두 달은 음악이 없는 카니발 같았다. 지지율이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 했던 선대본 사람들과 의연했던 후보. 두 달 동안 공연준비를 함께 한 사람들과 느끼는 연대감. 그러나, 내일 축제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분장과 소도구를 정리해야겠지요. 한숨 자고 일어나…… 왜 이번 카니발에는 유난히 동네 악사들이 사라졌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승을 예견한 언론의 보도대로라면, 5월31일에, 김희숙이 “새로운 정치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던 강금실과 진대제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유권자 대중이 소위 그 새로운 정치성을 외면한 셈이다. 다만 대중이 대신 택한 대안이 ‘오른쪽’인 한나라당이라는 게 현실이다.
민주노동당이라면 얼마나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김희숙의 반문이 떠오른다. 두렵다. 노무현 정부의 오류와 실책은 대중에게 ‘왼쪽'(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보다 왼쪽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있으나)은 오만하고 무능하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 준 게 아닐까.
민주노동당은 더 왼쪽, 진짜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대중은 오히려 반대로, 더 왼쪽은 더 오만하고 더 무능할 것이고, 따라서 경제는 더 엉망진창이 되고 삶의 질은 더 후퇴할 거라고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게 만약 혹시 진실이라면? 정말로 두렵다.) 이게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의 실패(라고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김희숙은 주장했지만)가 낳을 결과가 두려워지는 진짜 이유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정치는 관두고 싶다고 밝힌, 개혁당을 이끌었던 유시민 현 보건복지부 장관은 5월 14일 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본인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대한 질문에 이런 식으로 답했다. “인간은 뭐가 진짜로 옳은지를 잘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게 불확실하다. 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예수 가라사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한편 동유럽 출신의 어떤 재기발랄한 학자는 이렇게 비꼬았다고 한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