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옥.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사단법인 참여성복지터(“참터”: http://spark.or.kr/ )의 소장. 전태일 열사의 동생. 서울 평화시장과 창신동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 영국 유학 길에 나선 그녀는 뜻 있는 이들의 성원과 도움 끝에 “They are not machine”이란 제목의 19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운동 연구(국내에는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어 있다)로 영국 워릭(Warick)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전순옥에게는 영국인 남편이 있다. 크리스토퍼 조엘(Christopher Joel). 그녀의 영국인 남편, 말로만 듣던 그 영국인 남편을 작년 말 참터의 송년행사에서 처음으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아내 전순옥과 함께 참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참터의 아이들이 이른바 고품격 “옥스포드 잉글리쉬(Oxford English)”를 배우는 셈이다. 2002년 말에 여성영세의류봉제노동자들을 위한 참터를 세우는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상대로 생활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시급하다고 느끼는게 무엇이냐는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자녀교육이 가장 큰 문제라는 답변이 나왔다고 한다. 고민 끝에 전순옥은 사교육을 시킬 만한 여력이 없는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나서서 참터에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 남다른 부부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사연을 직접 듣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전순옥 선생 부부는 인터뷰를 청한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퍼슨웹]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인터뷰는 커플 인터뷰인데 (웃음) 우선 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조엘] 이름은 크리스토퍼 조엘(Christopher Joel), 영국인입니다. 고향은 옥스포드이고 나이는 65세지요. 해군 비행사로서 오래 군에 복무했어요. 47세에 군에서 은퇴한 후 4년은 초등학교(primary school)에서 교사로 지냈죠. 그 때 정치에 관심을 가져 옥스포드의 러스킨(Ruskin) 칼리지에서 정치학 특히 좌파 정치를 공부했어요. 그 전에는 정치적 인간은 아니었어요. 러스킨 대학은 좌파 정치학으로 유명하죠. 1994년 겨울에 전순옥을 거기에서 만났어요. 그 전에 결혼 경험이 있고 세 아이가 있죠. 자식들은 다 장성해서 손주도 있습니다. 전순옥이 러스킨에서 학위를 따고 워릭으로 가서 석박사를 할 동안 우리는 계속 만났고 전순옥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2001년 말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2002년 9월에 한국에 왔죠.
[퍼슨웹] 처음에 어떻게 만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조엘] 제가 그녀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었죠. (웃음) 그 때 저는 일제 혼다 오토바이를 갖고 있었죠. 러스킨의 학생식당에서 일어로 된 오토바이 매뉴얼을 갖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 일본인이냐고 물은 거죠.
[퍼슨웹] 그녀의 반응은?
[조엘] “아뇨”였죠 뭐. (웃음)
전순옥(“전”): 그게 첫만남이었죠.
[조엘]두 번째 만남은 좀 나았어요.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들었는데, 어느 날 강의실에서 그녀 뒤에 앉게 되었죠. 그 때 나는 그녀의 머리모양에 반해서 계속 머리를 보고 있었어요. 아주 멋진 커트였죠. 짧게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가 매혹적이었죠. 그래서 강의가 끝나고 그녀에게 가서 말했어요. “당신 커트머리가 마음에 들어요(I like your haircut).” 그러자 그녀는 “고맙다”고 하고 사라졌죠. (웃음)
[퍼슨웹] 전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전] 매우 이상했죠. (웃음) 낯설었고요. 영국인 남자가 그렇게 와서 칭찬하다니,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조엘] 우리는 서로 아는 친구가 있었어요. 미국인 여성. 그 친구의 집에서 셋이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나는 우파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통점이라곤 없었어요.
[퍼슨웹] 게다가 당신은 보수적인 집안 출신이겠죠?
[조엘] 맞아요. 전형적인 영국의 중산층. 그래서 우리는 싸웠죠. 그 때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토론했죠.
[전] 크리스는 노동자의 권리랄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논쟁할 수밖에 없었죠.
[퍼슨웹] 당신들은 아주 반대의 사람들이었군요. 그 뒤에 어떻게 가까워지신 거죠?
[조엘] 이건 틀에 박힌 진부한 이야기(cliche)일 수 있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죠. 비슷한 사람들과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겨워요. 새로운 걸 얻지 못하잖아요. 이게 인생의 진실의 일면일 거예요.
[전] 영국은 토론 문화가 있어요. 그들은 토론을 참 좋아하죠.
[퍼슨웹] 토론하면서 가까워졌다는 말인가요?
[전] 그렇죠 뭐. 우리는 계속 토론하면서 가까워졌어요.
[조엘]러스킨 대학은 매우 좌파적이예요. 그들이 왜 내게 입학허가를 줬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나는 적(enemy)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들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 이렇게도 생각했고요.
[퍼슨웹] 그 지점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당신은 우파였다고 말했잖아요. 계속 그렇게 살 수도 있었는데 당신은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군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 전환점에 대해 더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조엘]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실은 그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죠.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거죠. 어떤 정치적 관계와 상황 속에서. 의문을 가질 수도 없는 경우가 많고요.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거죠. 내 경우, 갑자기 변화가 왔다기보다도 서서히 변했다는 게 맞을 거예요. 러스킨에 갈 때 나는 선생으로 있었는데, 좌파 사람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저는 군인이었으니까요. 나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과 맞닥뜨리고 도전(challenge)하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어요. 극단에서 극단으로 가 보기로 한 거죠. 지금의 내 정치철학은 매우 균형 잡혀(well-balanced) 있다고 생각해요.
[퍼슨웹] 현재의 당신의 정치적 입장은?
[조엘] 뭐라고 라벨을 붙일 순 없어요. 현재 나는 100% 지지하는 정당은 없어요. 예전에는 영국 보수당을 지지했죠.
[퍼슨웹] 전순옥 선생은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전태일 열사의 동생입니다. 당신들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던 셈이죠. 크리스는 자신의 입장에 의문을 가졌다고 하는데, 전순옥 선생은 어떠셨어요? 그런 생각 해 보셨어요? 내가 틀리고 그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
[전] 한국에 있을 때는 함께 운동하는 노동자들과 늘 그룹을 지어서 이야기했고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직접 토론할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러스킨에서 공부하고 다른 성향의 신문을 읽고 다른 의견의 사람들과 토론을 시작하면서 보다 많은 것을 보기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관용(tolerance)을 배운 건 맞아요.
[조엘] 그녀는 더 이상 자동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아요. 그녀를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은 옳고 또 옳아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신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마치 배신(betrayal)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녀는 덜 정치적이 되고 더 인간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less political, more humanistic).
[퍼슨웹] 배신! 그 단어가 매우 상징적인데요.
[전] 크리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줄도 몰랐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죠. 영국에 와서 공부하고 그와 토론하면서 세상을 달리 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희한했죠. 그 때 애초에 나는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가디언(Guardian)지나 인디펜던트(Independent)지,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 밖에 안 봤어요. 그 뒤 타임즈(Times) 같은 것도 읽기 시작했죠.
[조엘] 우리는 술집(pub)에서 처음 데이트를 했죠. 그녀는 그 때 내가 마치 박정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전] 그 때 노동자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 때 크리스는 노동자에게 따로 교육이 필요 없다, 그들은 일을 하면 되는 거라고 했죠.
[조엘] 그랬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때는.
[전] 그래서 저는 그와 막 싸우고 나와버렸어요. 그 다음 만났을 때에는 정치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논쟁했어요.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어떤 스캔들과 더불어, 혼외정사로 아이를 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정치가에게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생활의 영역에서도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 그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했죠.
[조엘] 저는 제임스 스튜어트 밀(J.S.Mill)의 자유론을 옹호한답니다. (웃음)
[퍼슨웹] 그럼 언제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나요?
[조엘] 지금도 우리는 연인이죠. (웃음) 1995년, 만난 지 1년쯤 뒤. 그녀의 박사논문 작업을 제가 많이 도와줬고 우린 매우 가까워졌죠. 거의 매일 만났고.
[전] 거리에 둘이 같이 다니다가 한국인이 나타나면 저는 도망갔어요.
[퍼슨웹] 노출되는 걸 원치 않으셨군요.
[전] 그랬죠. 절대 결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요.
[조엘] 그래도 친구들은 알았을 거예요. 나중에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퍼슨웹] 절대 결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다고요?
[전] 친구는 몰라도 외국인과 결혼까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또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조엘] 그녀의 친구 중에 영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을 별로 안 좋아하더라구요.
[전] 그건 이유가 있어요. 애초에 그녀들이 영국에 왔을 때 결혼보다 다른 목표가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목표가 흐릿해졌으니까요. 그게 못마땅했어요. 영국에 남으려고 영국인과 결혼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말로는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죠.
[퍼슨웹] 크리스와 함께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셨고요?
[전] 그 때나 지금이나 제게 중요한 건 제 인생이예요. 사회의 시선보다는 제 삶이 더 중요하죠.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서 외국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제게 중요한 건 친구, 동료, 가족이었죠. 그들의 이해가 중요해요. 제가 그와 사귄다는 걸 알게 된 제 동료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건 좀 심해. 너는 전태일의 여동생이야.”
[조엘]저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퍼슨웹]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건 어떻게 설명하셨어요?
[전] 언제였더라……
[조엘] 글쎄 그걸 모르고 있을 때가 있긴 했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서 (웃음) 전순옥의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건 그녀로부터 직접 들어서 안 건 아니예요.
[퍼슨웹] 그래서 전순옥 선생이 영국을 떠날 때가 되자 어떻게 하셨어요?
[전] 슬펐죠. (남편을 보며) 그 때 당신 담배 끊지 않았나?
[조엘]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웃음)
[전] 2001년 4월20일에 영국을 떠났죠.
[퍼슨웹] 그녀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나요?
[조엘] 솔직히 기억이 안 나요.
[전] 근데 우리는 늘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것,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내가 떠나는 건 자연스러웠어요.
[조엘] 정말 그 때가 기억이 안 나요.
[퍼슨웹]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의 삭제인가요? (웃음)
[전] 그 때 영국 카디프 대학의 위촉으로 백색가전 산업 리서치를 맡았고 그 일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다시 곧 영국에 갈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곧 볼 수 있긴 했었죠.
[퍼슨웹] 영국을 떠나기 전에 프로포즈할 생각은 없으셨나 봐요.
[전] 우리에겐 자연스러웠어요. 헤어지는 게.
[조엘] 나는 이미 결혼을 한 번 해 봤고 결혼을 다시 할 생각은 없었어요.
[퍼슨웹] 그런데 결국 결혼하셨군요. (웃음)
[조엘] 이메일로 프로포즈했어요.
[전] 3페이지짜리 이메일. (웃음) 7월에 프로포즈 이메일을 받았고 10월에 영국으로 다시 갔죠.
[퍼슨웹] 만약 그가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전] 그전에 제가 전화하긴 했었죠. 그립다고.
[퍼슨웹] 그게 다였어요?
[전] 그게 다였죠. (웃음)
[퍼슨웹] 당신들은 꼭 새로운 버전(version)의 로미오와 쥴리엣 같아요. (웃음) 이별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셨죠?
[조엘] 결혼은 저보다도 그녀에게 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예전에 이미 결혼해 봤죠. 문화 차이도 있었고. 그녀는 더 어렵고 복잡한 입장이었어요. 나는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고 또 그녀가 그렇게 공부하기까지 다른 분들의 크나큰 도움도 있었고, 그러니 그녀는 돌아가는 게 맞았죠. 그게 내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떠난 후 그녀 없이 영국에 있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녀가 가고 나서 내 삶이 비참(miserable)해졌어요. 그래서 결국 프로포즈했죠.
[전] 그의 이메일 마지막에 이 말이 있었죠. “나와 결혼해 줄래요(Will you marry me)?”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러죠(Yes).” 그리고는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는 이렇게 물었죠. “그를 사랑하니? 얼마나 사랑하니? 그와는 다른 문화와 언어인데 그를 얼마나 이해하니?” 단 두 가지를 물으셨죠. 사랑과 이해에 대해서. 저는 사랑하고 이해한다고 대답했죠. 엄마는 그렇다면 됐다고 하셨어요.
[퍼슨웹] 역시 이소선 어머님은 대단한 어머니세요. 그거 외에는 안 물으셨어요?
[전] 그것만 물으셨어요. 10월에 영국에 다시 갔을 때, 웨일즈에 회의가 있어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결혼식을 올렸죠. 아주 간단하게. 결혼식 올리고 이틀 있다 한국으로 왔고.
[퍼슨웹] 한국에서 다시 결혼식을 하셨어요?
[전] 아뇨. 제 지인들은 왜 안 하냐고 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죠. 저도 뭐 상관 없고요.
[퍼슨웹] 가족에게는 언제 그를 소개하셨어요?
[전] 결혼 후 그가 한국에 왔을 때. 그 때 처음 가족들과 식당에서 만났죠. 장기표 씨도 계셨고.
[퍼슨웹] 그 때 어떠셨어요?
[조엘] 별로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대화의 부재 때문에. (웃음) 서로 별 말 안 했으니까. 지금껏 서로 별로 말이 없죠. (웃음) 동서인 임삼진 씨(녹색도시연구소 대표)나 장기표 씨와는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고.
[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그러셨죠.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조엘] 순옥의 오빠(전태삼)와 대화를 별로 하지 못해서 유감이죠. 내가 그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그 아이들을 통해서 대화가 가능해졌어요.
[퍼슨웹] 다시 한 번 결혼을 축하 드립니다.
[전] 축하해 주셔서 고마와요. (웃음)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삶이 매우 편안해지고 평화로워졌어요. 그는 날 지지해주고 믿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죠. 당신이 뭘 하건 간에 나는 100% 당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해요.
[퍼슨웹]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데요. (웃음)
[조엘] 그렇군요. (웃음)
[전] 우리 어머니와 남편의 조언이 참 비슷할 때가 많아요. 신기할 정도로.
[조엘] 아내는 매우 단호한 사람이죠. 결코 뒤를 보지 않아요. 매우 용감한 사람이지요. 지식의 힘이 아니라 용기와 결단의 힘으로 지금껏 쟁취해왔고요. 아주 드문 사람입니다.
[퍼슨웹] 그래서 그녀를 존경하시나요?
[조엘] 그럼요. 절대적으로 엄청나게 존경하죠.
[전] 귀국하고 나서 한동안 성공회대에 있었지만 그만 두고 창신동으로 돌아왔죠. 크리스의 메일에 적힌 말이 내게 큰 용기를 주었어요. “대학교수인 당신보다는 그들과 함께 있는 당신이 더 당신답다”는.
[조엘] 누가 그런 일을 하죠? 대학교수? 그녀가 창신동에서 하는 일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터에 모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엄청나다고 생각해요.
[퍼슨웹] 서울로 아예 이사 오신 거예요?
[조엘] 그래요. 2002년 9월 1일에 왔죠.
[전] 그 사이는 제가 영국에 두 번 갔다 왔죠.
[조엘] 영국에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어요. 제 어머니를 만나러.
[퍼슨웹] 결혼하니 어떠세요?
[조엘] 예전과 그렇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아요.
[전] 여전히 많이 토론하고 많이 이야기하죠. 우리는 우리가 굿 팀(good team)이라고 말하죠. (웃음)
[조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로 많이 싸워요.
[전] 저는 절대 포기 안 하죠. (웃음) 사실 그가 내게 요구하는 건 별로 없어요. 함께 저녁 먹는 거 외에는. (웃음)
[퍼슨웹]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바쁘셔서 함께 저녁 먹는 것도 쉽지 않으시죠?
[전] 그런 편이죠.
[퍼슨웹]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엘]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 읽고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이렇게 일상적으로 보내죠. 저녁 때 아내가 돌아올 때 마중을 나가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요.
[전] 저를 마중 나올 때 그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아주 환해진답니다. (웃음)
[조엘] (웃음)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환하게 활짝 웃었다. 전순옥 선생의 어머니이시자 한국 노동자 전체의 어머니가 되신 이소선 여사께서 당신의 영국인 사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사랑은 국경을 넘었다. 또한 그 이상의 장벽이었을 자신 안의 마지막 장벽까지도. 그 모든 장벽을 넘어선 그들은 서로로 인해 변화된 삶을 이 땅에서 둘이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한국과 영국의 정치와 노동현실에 대한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과연 그들은 자칭한 대로 “굿 팀(good team)”이었다. 소중한 시간과 장소를 내주신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함께 인터뷰한 문수현 씨가 아래와 같이 보내온 소감문으로 이 글을 맺는다.
전순옥 선생님 인터뷰는 무럭무럭 솟구치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피하고 싶었다. 전태일의 동생이라는 그 묵직한 이름으로 살아오신 내력 앞에서 정서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나 역시 삶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노동 연구로 유명한 러스킨 칼리지 교정에서 전태일의 동생에게 그가 건넨 일성은 “향후 한국의 노동운동 정세”, “한국 노동자의 실상”이 아니라 “찰랑찰랑한 머리가 예쁘다”였다고 했다. 이메일로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온 청혼에 대해 앞뒤 가릴 일 없는 소녀처럼 행복하게 그러겠다고 말씀하셨다고도 했다. 결혼을 얘기했을 때, 선원으로, 조종사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대학의 연구자로 여러 세계를 두루 돌아본 어깨 넓은 남자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던 장벽을, 한국의 연로하신 어머니는 “사랑하느냐,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말로 그렇게 쓰윽 넘어오셨다지 않는가.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획일화된 척도를 DNA에 각인시키는 듯한 요즘의 세태로부터 자연스러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치가 필요한 가 싶어 아득해질 때가 많다. 마음의 흐름대로 순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그래서 왠지 울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한 흐름을 쫓은 자가 행복하고 당당해 보여서, 우습지만,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