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초년병 시절
공숙영(“공”)> 안녕하세요, 인터뷰 웹진 퍼슨웹입니다. 퍼슨웹은 2000년에 생겨 5년 된 웹진입니다. 지금껏 지속해 온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애초에 시작한 사람들의 학번은 87,88 학번입니다. 지금은 젊은 친구들이 많기는 하지만 출발한 정신은 그 때 세대의 정신을 많이 담고 있죠.
최규성(“최”)> 그러면 거리에서 돌 많이 던진 분들이겠네요.
공> 뭐 거리에서 돌 던지고 관념적인 돌을 던지고 했던 분들이죠.
최> 저는 그때 현장에서 기록했어요, 그때 사진기자 시작했거든요. 86년에.
공>86년이면 진짜 힘드실 때 시작하셨네요.
최> 격동기죠. 고생 많이 했어요. 대학 때 시위현장에서 외신기자들 방독면 끼고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게 폼나보여 가지고 멋있네? 한번 해봐야지 했다가 들어와보니깐 완전 노가다더라고요
김명신(“명”)> 시위현장 취재하시다가 안 다치셨어요?
최> 왜 안 다쳐요? 한국일보 최규성 기자 중태라고 9시 뉴스 헤드라인으로 밑에 자막 나간 적도 있어요. 집안에서는 당장 때려 치라고 하고. 제가 외아들이거든요.
이정훈(“이”)> 어느 사건 때 그러셨어요?
최> 그때가 DJ하고 김영삼 그리고 노태우… 87년 선거 때에요. DJ가 부산가면 부산에서 생난리고 김영삼이 광주가면 거기서 생난리고…
공> 선거 취재 다니신 거예요?
최> 네, 선거취재. 그 당시 수영만에서 100만 정도 모였거든요. 그때 날아온 돌 맞아 혼절해가지고.
공> 여기 이정훈 선생님이 87학번이시거든요.
최> 그 꿈 많던 시절에 전 그러고 지냈습니다. 사진은 전공한건 아니고, 전공은 영문학 했거든요. 어릴 때 아버님이 카메라를 사주셔서 사진 찍다보니깐…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고, 여기 신문사 와서 배웠어요.
수집의 역사
최> 관심은 음악 영화 그런 쪽으로 많고 또 모으는 걸 워낙에 좋아해요. 왜 그 모으는 쪽 관심은 여성분들보다 남자들이 더 많다고 하잖아요. 뭐 하나 모으는 거 있어요?
이> 저는 이젠 없습니다.
공> (웃음) 이젠!
최> 남자 분들이 훨씬 더 많아요. 이런 쪽으로 DNA자체가 뭔가 더 있대요. 저는 모을 때 어느 분야를 파고들면 전문서적까지 탐독하고 연구하면서 모으거든요.
이> 모으신 역사 어릴 적부터 쭉 한번 말씀해주시죠.
딱지와 엽전
최> 어릴 때에는 딱지부터 시작했죠. 60년대 중반, 이때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잖아요. 신문지로 딱지 접어도 폼 나던 시절. 과자박스 딱딱하잖아요, 어릴 때 집이 좀 유복한 편이라 집에 그런 게 있었거든요, 그걸 접어 나가면 천하무적이었다고. 다 따버리니깐 애들이 매일 울었지. 근데 하루는 어떤 애가 자기 형을 데리고 왔는데 신문지를 통으로 커다랗게 접어온 거예요. 계속 잃다가, 승부욕 이야긴데 이것 때문에 하여간 너무 피곤한 인생이야, 그 작은 거로 그 큰 걸 넘겼다니깐. 팔 다 빠졌지. 지면 가서 또 접어와가지고. 하여간 밤늦도록 그걸 결국엔 넘겼다는 거 아니에요. (웃음) 그런 정도로 딱지 많이 했고. 그 당시에 판매하는 딱지도 굉장히 많았어요. 군대 계급 들어간 딱지도 있었고. 요즘 아이들도 딱지 모으는 것 같은 데. 그거하고 구슬.
이> 그건 대략 초등학교 취학 전이신가요?
최> 네. 그리고 제가 KBS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이었어요. 덕분에 각 지역 돌아다니곤 했는데 지금은 재개발 되어서 없어졌지만 그때는 유적이 곳곳에 많았거든요. 강릉에 객사문이라는 게 있어요. 아마 아실 거예요, 보물이기 때문에. 그런 곳 주변을 파면 엽전이 많이 나와요. 제가 어릴 때 엽전을 꾸러미로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이> 이야, 발굴까지. (웃음)
최> 그래서 요즘도 그쪽 지나갈 때에는 괜히 땅 한번 툭툭 쳐보고 그래요.
우표와 삼룡이
이> 우표도 모으셨을 것 같은데.
최> 아우, 우표는 어느 정도냐 하면, 도감에 보면 사진으로 나오는 우표를 비닐로 한권을 다 가지고 있었을 때니깐, 최초 우표부터.
이> 일단 뭐 모으기 시작하면
공> 뿌리를 뽑으시는
최> 네, 일단 어린애가 돋보기는 꼭 들고 다녔어요. 제가 우표를 모으게 된 것은 저희 집 앞이 옛날에 명주군청 자리였고 거기 소각장이 우리 놀이터였어요. 더미로 버리는 우편물들. 외국에서 온 것부터 해서 이상한 것들이 붙어있었거든요. 눈이 버쩍 뜨인 거예요. 그래서 매일 우편물 버리는 시간만 되면 거기 가서 우표를 모았죠. 그러다 궁금하니깐 우표 도감 같은 것도 사서보고. 서울 가면 용산에 어디 시내 어디 우표점이 꽤 많았어요. 서울 와 보니 많더라고.
이> 서울에는 언제 오시게 되셨습니까?
최> 71년도에 서울 올라왔어요. 서울에 62번 태진운수하고 25번 삼양 버스 회사를 아버지가 운영하셨거든요. 뭐 그 덕에 버스 공짜로 타고 다녔죠. 서울 왔더니 중앙 우체국이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우표 나오면 밤새워 줄 서고 그랬어요. 제가 영악한가 봐요.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우체국에 담당하는 누나들 있잖아요. 그 누나들한테 항상 선물을 했다고요. 초등학생이. 그래서 줄 안서도 버전별로 다 모았죠.
이> 뭘 선물 하셨습니까?
최> 그때 당시 젤 좋아하는 게 스타킹이었어요. 70년대에는 스타킹이 정말 안 좋았거든요. 똑같은 현상을 동구권 취재 갔을 때 경험했어요. 스타킹 하나 주면 뭐…
공> 그게 개발도상국의 표시인 것 같네요.
이> 중국은 90년대 초까지 그랬어요. 그 우표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최> 삼룡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김삼룡. 목사에요. 근데 그놈이 워낙 자랑하는 걸 좋아했거든.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그런 거. 걔가 다 훔쳐갔어요. (웃음) 그러니깐 그걸 돈으로 따지면 집 한 채 값이 넘었을 거예요. 신문사 들어온 다음에 종교 관련해서 뭘 하는데 거기에 삼룡이가 있더라고요. 야 너 같은 도둑놈이 무슨 목사를 하냐? 그랬더니 그때 다 회개했대. 갖고 가도 걔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순간적으로 가지고는 갔지만. 어딨는지도 모른대요.
영화 브로마이드와 ‘스탠바이 미’
최> 제가 어릴 때 되게 문제아였어요. 집엘 붙어 있질 않았거든요. 그 영화 뭐죠? ‘스탠바이 미’ 인가? 어디 시신이 있다고 그래서 애들끼리 거기까지 여행 갔다가 기찻길로 돌아오는데 기차 오니 피하고. 그 영화 보면서 울었다는 거 아니야. 내 이야기에요.
경포대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거기에 경포대 역이 있었어요. 그게 초등학교 1,2학년때인가? 경포대까지 걸어가는 게 만만한 게 아니었는데 거기까지 걸어갔다고. 처음 가봤는데 돌아올 때 기차길로 오는 게 재밌겠다 해서 갔었거든요. 근데 어두워지면서 무서운 거야. 같이 갔던 애들 다 울고. 큰일났네, 나도 이거 길도 모르고. 열차 길을 따라 가다보면 강릉역이 나올 거다 하고 갔죠. 다리를 건너가는데 기차가 오는 거야. 그때 우리는 뛰어내리지 않고, 잘 알아요. 철로 밑에 보면 내려가는 데가 있어요, 거기에 절묘하게 숨고.
‘스탠 바이 미’ 영화 보면서 그때 친구들 생각나서 영화 쪽도 모았어요. 예전에 영화관 가면 브로마이드랑 리플렛 그런 거 줬거든요. 그거 굉장히 많았어요.
이> 그걸 모으시려면 웬만한 영화는 다 보셨겠네요.
최> 영화는 어릴 때부터 정말 장난이 아니었죠. 옛날엔 선생님들이 개봉관 가면 잡았단 말이에요. 선생님한테 잡혀 정학 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성남 같은 데로 영화보러 원정 갔다니깐요. 그런 데는 브로마이드를 많이 만들더라고요. 그 아저씨들하고도 친해져 가지고 나중에는 뭐 떼로 갖다 주는 거죠.
음반과 쇼쇼쇼 키드
명> LP는 언제부터 모으기 시작하셨어요?
최> 제가 어릴 때 KBS 합창단이어서 공연을 다녔거든요. 그때부터 음악을 접했는데 대중가요는 강릉에 68년도에 텔레비젼 들어왔을 때 그때 TV에 나오는 가수들 보고. 70년 이 무렵부터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서울에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했었어요. 그때 서울 와서 TV 보니깐 우와 정말 죽인다, 너무 환상적이었어요. KBS는 공영 방송이라 그런 게 좀 쳐졌고, TBC 참 대단했어요. 쇼쇼쇼 참 대단했죠, 거의 쇼쇼쇼 키드라고 봐야 해. 그런 걸 보면서 음악을 많이 접했어요.
LP를 모으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 형이 외국 팝송을 많이 알고 동네 다방에서 음악 DJ를 했어요. 그 형이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들려줬는데 충격받았어요. 세상에 이런 음악이 다 있나. 그때 판으로 본격적으로 가게 되었죠. 그즈음 기타도 배우려고 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굉장히 보수적인 분이셔서, 만화영화 보면 기타 맞고 가운데로 뚫고 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기타로 그렇게 맞았어요.
이> 기타 치신 건 중학교 때신가요?
최> 네. 중학교 1학년 때. 맨날 기타쳤죠. 그때 청바지 유행하고 그랬거든요? 찢고 스톤워시라고 그러나? 돌로 색깔 내는 거, 벌써 그때 그랬다고. 음악 듣는 형들이 그렇게 하고 다니니깐 멋있어 보여서, 요즘처럼 많이 찢지는 않았죠. 요즘엔 살이 다 드러나 보이게 찢더구만. 그거 이미 70년대 초반에 다 했던 거예요. 유행이라는 건 돌고 도는 것 같아요. 결코 처음 나오는 거라곤 없어요.
공> 근데 본인이 직접 음악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하셨었어요? 기타를 치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지가 말리셨다는 건 말씀하셨는데, 계속 음악, 문화 이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게 삶의 일부시잖아요.
최> 많았었죠. 많았었는데 저희 아버님이 살아계시는 한은 힘들었죠.
기자, 수집가, 그리고 …
이> 최규성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페셔널로서의 ‘언론인’이라는 것을 ?惠貂?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직업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수집가’라고 하는 것. 저는 아까 말씀 들으면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생각 났거든요. 간송 미술관 건립했던, 이것은 어쨌든 다른 영역일 것 같아요. 그리고 수집가하고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컨텐츠로 재가공해서 나누고, 기자로서 가요 칼럼 쓰시는 것도 그렇고 매체를 확대해서 방송하시는 것도 그렇고 공연기획이나 음반제작 등에 관여하시는 것 이런 부분은 좀 더 다른 부분인 것 같아요. 굳이 구분해서 세 개의 아이덴티티가 있다면…
최> 세 개가 뭐라고요? 언론인, 수집가 …
이> 세 번째는 방송인이라고 해야 하나? 여러 가지 활동들, 이건 원래 언론인하고는 좀 겹치지만 또 다르실 것 같아요.
최> 그래서 눈치도 많이 보죠.
이> 그 세 개의 관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고, 굳이 따지자면 어느 것부터 가장 먼저 포기 하실 수 있으신지. 뭔가를 포기해야한다는 상황이라면.
최> 모르겠어요. 그런 걸 다 떠나서 가장이기 때문에 요즘 제가 젤 중요시하는건 우리 가족들이 잘 사는 거거든요. 지난 1년간 어머니가 폐암 말기를 앓으셔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약이 없다고 해서 보험이 안 되는 약을 구하다보니 1년 동안 한 8천만원 정도 들었거든요.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철부지처럼 살아왔구나. 남들 다 하는 재테크, 주변에서 친구들 주식 어쩌고 할 때 그게 뭔지 몰랐거든요. 재테크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옷도요, 양복 한 벌에 세일해서 10만원만 넘어가면 안 사요. 벌벌 떨면서. 근데 음반은 한 장에 백 만원 줘도 산단 말이에요. 청와대 출입기자할 때 사진기자들 세계에서 제가 3대 기인으로 통했어요.
난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는데, 어머니 아프시면서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고 와이프가 힘들어하니깐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 되면 이판은 내가 아무 미련 없이 정리하겠다고 했어요.
이> 백만원이 넘는 LP 사고 그러면 저항을 추스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굉장히 이해를 잘해주시는 편인가보죠?
최> 3년에 한번은 혼나요. 딱 문을 닫고요, 얘기 좀 하자고 하면 그날은 죽었다 하고 무릎 꿇어야 되요.
이> 그럼 어떻게 하세요?
최> 이해하죠. 그냥 혼나고 당분간은 판 안사고 가만히 있다가…
이> 연봉의 몇 프로 까지 써보셨어요?
최> 연봉으로는 안 했구요. 어느 날 도로가 난다고 보상비를 받아가라고 하더라고요. 제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1억 5천 받았어요.
공> 눈 먼 돈 같이 생각이 되셨겠네요?
최> 야 이거, 그때 우리 처는 아파트를 사놓자 했는데 그건 아무 때나 살 수 있지만 이 판은 아무 때나 못 사는 거야 하면서 기기들 사고 그랬어요. 근데 어머니 아플 때는 참 미안하더라고요. 내가 나이만 들었지 철부지구나. 그래서 저는 술도 끊었어요. 그 모으는 것 때문에.
이> 그때 물려받은 재산은 다 여기에 들어간 셈이네요.
최> 근데 사실은요, 우리 아버지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인가 석유파동 겪고 건설 포크레인 사업을 하셨는데 그거 하시다가 또 안 맞으시는지 갑자기 뭐 어디 불광동인가 까페를 내셨다고요. 음악카페를.
이> 아니, 기타로 아들을 막 혼내셨던 분이 어떻게.
최> 모르겠어요. 어느 날 집에 내 판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때 쯤 돼서는 (숨기지 않고) 내놓고 있었으니깐, 그래서 판 어디 갔냐 했더니 아버지가 카페를 해서 거기 다 가져갔다고, 그때 3,000~4,000장 됐었거든요. 지금 사람들이 구하고 싶어 하는 그런 포크 음반이나 락 음반들이 거기 다 있었거든요.
그래도 어떻게 해?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깐 카페를 접으셨대요. 3~4개월 후에. 몇 달 후에 카페를 접으신 거지. 그럼 내 판은 어떻게 된 거냐고? 카페를 넘기면서 같이 넘겼다는 거예요. 화가 또 이만큼 나서 거길 ?i아갔지. 그 전에 DJ들이 그랬어요. 진짜 좋은 판은 다 있다고, 이걸 어디서 갖고 왔냐. 뿌듯했죠. ?i아갔더니 이미 좋은 판들은 애들이 다 빼돌리고 후진 판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 150장 간신히 가져왔는데 그때 난 참 많이 울었어요. 그게 한 81,2년 될 거예요.
“청개구리” , 정통 포크의 부활
명> ‘삶터’ 아세요? 운동권 노래책. 대학 1학년 때 학교 앞 작은 서점에서 구했어요. 거기서 김의철이란 이름을 본 적 있었어요. ‘불행아’, ‘민중의 함성’ 등의 작곡가.
최> ‘이 땅의 축복을 위하여’
명> 네.‘불행아’ 는 김광석 씨도 불렀죠. 그 노래를 작곡하신 분이 김의철 씨라는 것을 절판소장님 블로그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제가 워낙 그런 쪽에 아는 게 없기도 하거니와 제가 알기로도 김의철 씨는 김민기 씨처럼 많이 소개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분을 필두로 포크그룹이 다시 부활되고, 그분은 한국의 포크 부활을 위해 미국에서 교수직 제의도 거절하고 한국에 오셨다는데, 그 포크그룹 탄생에 절판소장님이 계시더라고요.
최> 그 포크그룹 ‘청개구리’ 공연 기획도 하게 되면서, 그것도 참 제가 무슨 공연기획을 해본 사람도 아닌데. 당시 마땅히 나설 사람도 없었고, 단호하게 거절을 못하는 제 성격 탓도 있어요.
‘청개구리’는 예전 70년도 YWCA에서 출발한 청년 문화를 이야기하는 그 흐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젊은 친구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향유할 공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명동 YWCA에서 선구적으로 직원 식당을 개조해 공간을 만들어 줬고 거기서 젊은 친구들이 노래도 하고 연극도 하고 차도 마시고 그랬죠. 김민기 씨의 ‘아침이슬’도 양희은 씨가 그 무대에서 불렀어요. 한국 포크의 고향이거든요, 청개구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 것이지…
포크 부활의 기폭제, 소시적 짝사랑 ‘얼굴’의 윤연선
최> ‘얼굴’을 부른 윤연선 씨 있잖아요. ‘동그라미 그리려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부른. 그분을 어릴 때 제가 짝사랑했거든요. 긴 생머리에 포크송.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스타일들을. ‘추억의 LP 여행’ 칼럼을 쓰면서 내 어린 기억에 그렇게 좋아했던 그 분을 만난 게 숨이 다 막히더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노래가 ‘얼굴’이에요. 그렇지만 그 곡에 대해 동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가곡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 잘 몰랐거든요. 제가 그걸 밝혀냈어요. 신귀복 씨라고 당시 음악 교사이셨던 분이 작곡을 했고, 윤연선 씨가 그 곡을 불러 크게 히트했었죠. 윤연선 씨가 그 곡을 받게 된 상황이 무척 드라마틱한데 윤연선씨 데뷰 30 주년을 맞아 제가 작곡가와 가수를 모시고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그걸 기사로 썼어요. 근데 그 기사를 부산의 ‘가람 아트홀’이라는 곳의 관장님이 본 거에요. 한 300석 규모의 공연장인데, 그곳 관장님이 윤연선 씨 기념 공연을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윤연선 씨한테 그 공연 제의를 연결해드리고 궁금해서 그 뒤에 연락을 해보니 진행되는 게 영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 전에 알고 지냈던 김의철 씨에게, 그 공연 이렇게 해서는 시작이 끝일 수 있으니깐 형이 이번 기회에 이끌어 보시라고 했죠.
김의철 씨도 가요 칼럼 때문에 만나 존경하게 되었는데 더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며 지내게 됐거든요. 기타 연주 실제로 들어보니 너무 좋더라구요. 그때 김의철 선생님도 정통 포크 부활을 꿈꾸고 계셨어요.
김민기 씨도 찾아갔지만 뮤지컬에 매진하고 계시고, 예전 동료들도 다 하는 일들이 있으니까. 옛날에는 금지 되어서 부르지 못했던 그 노래들이 지금은 또 다른 여건으로 죽어가니까 김의철 선생님 혼자 절망하시던 그런 상황이었어요. 포크를 다시 무대에 올릴 기회인데 그걸 누가 나서서 해줄 사람이 없어 제가 공연기획을 그때 맡게 됐어요. 그렇게 청개구리 공연이 시작된 거예요.
부산 공연이 2003년 3월이었어요. 포크부활, 공식 공연인 셈이었죠. 근데 그 공연이 크게 화제가 됐거든요. 신문에 기사도 많이 나갔고 제가 신문사 있으니 홍보는 제대로 했죠. 메이저 신문에 다 나갔고요. 지방에서 그것도 주말이 아닌 주초에 한 공연인데 서서 볼 정도로 미어터졌거든요. 그 후 그걸 서울서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제가 그거 준비 하느라 아주 죽었어요. 보통 서울에서 공연하려면 6개월 내지 1년 전에는 장소를 잡아야 되는데 예약이 거의 다 차있던 상황이었거든요.
하튼 6월 29일 서울에서 윤연선 단독 콘서트 형식으로 다시 무대가 마련되었는데, 그날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70년대 YWCA의 청년 문화공간 ‘청개구리’에서 처음 공연이 있던 날이기도 한 거였어요.
명> 청개구리 부활이 거의 운명적이라고 느껴지는데요.
최> 그러게 말이에요. 게다가 더 기억할 만한 일이 있었어요.
윤연선, 콘서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옛 연인과의 조우 그리고 결혼
서울에서 윤연선 씨가 몇 십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이 나가게 되자, 윤연선 씨 대학시절에 헤어졌던 옛날 남자친구가, 그 분이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왔거든요, 아직도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윤연선 씨 공연 소식을 듣고는…
공> 그 기사 본 것 같아요.
최> 그 기사 제가 쓴 거예요. 그 분이 그걸 보고 그날 윤연선 씨를 찾아가서 결혼을 하게 된 거야. 그 바람에 더 화제가 되었죠. 공연이 6월인데, 5월에 두 분이 결혼을 했어요. 기사를 쓸 때 저는 항상 청개구리의 부활을 꿈꾸며 기사를 썼어요.맑고 순수했던 그런 정신들. 이제는 그 시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음악 한번 들을, 씨디 한 장 살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 서글퍼서.그리고 주요 매체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음악은 잘 안 들려주잖아요. 그래서 수용자들의 문화반란을 한번 해 보자. 우리가 원하는 뮤지션들을 우리가 불러서 우리가 무대에 한번 세워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 바람에 이게 7080까지 간 건데.
콘서트 7080
명> 콘서트 7080이 포크그룹 공연 부활과 관계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최> 근데 그게 애초에 우리가 꿈꿨던 것은 추억으로 가는 열차만은 아니었어요.
숨어서 불렀던 노래들, 다시 불려지는 노래들
최> 우리나라에 정통포크가 제대로 울려 퍼진 적이 없었거든요. 70년대에는 숨어서 불렀어야 했죠. 그 시대에는 심의를 많이 하면서 금지가 되고 매장에 있던 게 다 회수 되어서 폐기되기도 하고. 지하에서 유명해진, 오히려 금지가 되면서 유명해지기도 했죠. 공개적인 석상에서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아니었죠.
외국 경우는 프로태스트 포크와 상업 포크 등 장르 형성이 되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부를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참 힘들었거든요. 이제까지 포크가 제대로 불려졌다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데 노래들은 너무 아름답고… 그때 노래 발표했던 분들이 꼭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어요.
김민기 씨부터 앨범 컨셉이 시작됐는데, 젊은 친구들이 이전의 사랑 노래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노래에서 벗어나 자기의 고민을 시적인 언어로 이야기 하면서 직접 멜로디도 만들게 되었어요. 이런 일단의 그룹들이 포크 싱어송라이터들이었거든요.
각자 자신의 음악세계에 빠져들었고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나왔던 노래들은 아무리 금지를 시켜도 지금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노래뿐만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겠죠. 이런 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자기 생명력을 스스로 갖는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침이슬’도 그렇고 김의철 씨의 ‘불행아’도 그렇고 가수에 의해서든 구전으로든 다시 불려지게 되는거죠.
포크 그룹 ‘청개구리’를 부활시키면서 생각하기를, 그때의 문화를 향유했고 그런 음악을 즐겨듣던 사람들이 지금은 생활에 찌들어있는데, 뭔가 휴식터, 그때는 오갈데 없는 젊은 친구들을 위한 휴식터가 필요했다면, 이젠 중년 세대가 된 이 사람들의 쉼터가 필요하지 않겠나 해요.
대형 미사리?
이> 최근에 70년대 포크음악이 일정 부분 음지에 있다 양지로 끌어 올려진 셈인데, 말씀하신 대로 벌써 좀 상업화라고 할까 과잉 주류화가 보이고, 일각에서는 그러니까 가요나 이런 음악으로 비평적인 문화담론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벌써 7080쇼 라는 게 공연으로 만들어지고 하면서 일명 대형 미사리, 미사리 그러면 사람들이 딱 가지는 약간 부정적인 인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들도 벌써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런 점에 대해서도 이 붐을 만드시는데 말하자면 일조하신 분으로 감회가 엇갈리실 것 같은데 좀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그리고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최>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저희가 원했던 방향은 아닌데 결국은 이렇게 갈 거라는 예견은 했었어요.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예견은 했었고. 근데 70년대 당시에도 김민기 선생님의 전통 포크 같은 그런 부분이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대학생이라든가 지식인층에 어필했던… 포크송 자체가 그랬었기 ??문에.
물론 시작할 때에는 그런 작은 ‘정통포크 다시 부르기’가 운동처럼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죠. 그런데 방송에서 큰 관심을 보이면서 7080이 크게 히트하고 뭐 난리가 났었잖아요. 처음에는 좋았어요.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분들이 무대에 서니까. 근데 공연을 보는 우리들 하고 직접 나와서 노래 부르는 분들하고는 입장이 틀리더라고요. 그 분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이 되는 거고, 우리들은 항유하는 층이니 문화적인 방향이 제대로 가냐 이런 거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한가한 축이고, 실제로 그쪽 세계에 들어가서 같이 공연 기획이나 음반 제작을 해보니깐 모든 일들이 만만하지 않더라고요.
그것은 지나간 거고
나는 그 노래, 내가 불렀던 노래
다시 부르고 싶지 않다
이> 김민기 씨는 이런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 선을 그으시는 걸로 들었거든요. 그것은 지나간 거고 나는 그 노래, 내가 불렀던 노래 다시 부르고 싶지 않다. 이런 입장도 있으신데 그 점은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까요?
최> 근데 관심은 많이 보이세요. 그 애정 어디 가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학전’에서 뮤지컬하시고 거기에 충실하셔야 되는 입장이니. 대부분 자기 음악으로 이야기 하는 분들은, 스무 살 무렵 청년 시절의 감성으로 불렀던 노래를 50이 넘은 지금 다시 부르라고 하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자기 음악세계가 있는 분들은 잘 안 부르려고 하는 게 상례고요. 이해가 되죠. 그래서 그 분들이 새로운 음악 하려고 하면 대중에게 쉽게 수용되지 않고, 예전 노래 듣는 입장에서는 귀에 익숙한 노래들만 요구를 하고…참 힘겨운 환경이에요. 어떻게 보면 듣는 사람들의 태도가 각별하지 않고는 전 희망이 없다고 보거든요.
요즘 노령화 사회로 가니깐 이 문화가 좀 더 지속적으로 갈 거라고는 봐요. 그렇지만 지금 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점점 고급화될 거예요. 그 당시 학생층이었던 향유자들이 지금 사회에 중추적인 성원들이고, 그리고 포크를 좋아했던 엘리트층들은 지금 사회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라 실제로 공연이나 후원을 요청할 때도 좀 좋은 장소를 원해요. 예전에는 잔디밭에 앉아 무릎 부딪치면서 사회를 고민하고 논하고 그러면서 노래로 울분을 달랬다면, 지금은 전혀 어떤 (다른) 수단으로서의 노래, 추억 혹은 회사를 운영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좋았던 시절의 그 노래를 부르면서 들으면서 푸는, 여흥이라 그러면 너무 떨어뜨려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어떤 그런 쪽으로 변모되어 역할이 다르게 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심지어 제가 한 기업체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요. 강남 청담동의 와인 클럽이 있는데 멤버들이 대부분 40~50대 분들이에요. 포크송을 굉장히 듣고 싶다며 대부분 경제력 있는 분들이니깐 50명을 위한 공연을 해 달라. 100만원씩을 내겠다. 이런 식의, 아휴, 그러니깐 정서적으로 김의철 씨나 그런 분들이 맞겠어요? 그거 부르주아 아니에요? 근데 사실 그런 걸 안하니깐 생활은 어렵고, 이런 악순환, 저는 요즘 굉장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LP 이야기
이> 왜 그 TV에서 하는 ‘TV 진품명품’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혹시 세월이 많이 흘러서 판 같은 것도 얼마나 귀한건지 따지고 그렇게 되면……
최> 지금도 실제로 나오고 있죠?
이> 그러면 감정위원으로 나와 계셔야 될 것 같은데, (웃음) 절판소장님께서 이제는.
공> 절판소장님이라고 해서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어요. (웃음)
이> 전쟁이 나서 급히 LP 몇 장만 집어가야 된다. 5장만. 처음엔 석장을 생각을 했는데, 석장은 너무 적고 한 장은 고르고 힘드실 것 같고 10장은 시간이 걸리실 것 같고, 5장만 골라야 한다면요? 이렇게 골라주시면 절판 소장님이 가져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또 가격이 30%씩은 지금 현재 거래가에서 오르지 않을까?
최> 저는 못 고를 것 같아요.
이> 그럼 울다가 그냥 가실 것 같아요?
최> 아니요. 거기서 같이 자고 있어야죠. 근데 제 가족보다는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는 해줄 수 있어요. 근데 힘든데… 가격으로 이야기하는 게 서글픈데요, 근데 그게 대중의 속성이더라고요. 제일 이해를 빨리 해요. 이거 정말 귀하고 이런 이야기 백날해봐야. 근데 이게 얼마짜리다 그러면 눈빛이 틀려지면서.참 회의를 많이 느껴요. 저도 경매 LP판 경매 많이 하거든요. 얼마전에 이정선 씨 판이 기록 깼어요. 포크 쪽에서는. 윤연선 씨 판이 151만원에 낙찰됐었는데 이정선씨 판이 171만원인가? 근데 황당한거지. 황당한데…
공> 그렇게 시장이 만들어지는구나!
최> 근데 웃기는게 예전에는 참 편하게 구할 수 있었어요. 오해도 많이 받고, 왜냐하면 그걸 일반 사람들은 돈으로 환산하니깐, 그럼 나는 떼부자야? 물론 그래요, 인터넷 샵에서 파는 가격에서 본다면. 만약에 판다면 자기한테 팔아라 이런 사람들 많아요. 이제는 더 이상 안 나오니깐.
한때는 제가 집 벽면에 귀한 LP들 붙여놨었어요. 1년 동안 판 구해주면서 샵 주인들하고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는데 저희 집에 와서 벽 보더니 아파트 한 채 값이라고, 도배지가 너무 고가라고 그랬어요. 넓은 벽면을 실제 음반으로 다 채우고. 그런 걸 참 좋아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게 자랑하는 것 같고 도난의 위험도 있어서 다 떼어 냈어요. 지금 뭐가 있는지 다 파악이 안 되어서…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 해야 되는데 그것도 일이예요. 우리 처가 음반을 3천장 정도까지 하다가 포기했거든요. 보통일이 아니더라고.
명> 저는 블로그 통해 절판소장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정훈 씨한테 인터뷰 하고 싶은 분이 있다고 닉네임을 얘기하니 딱 아시더라고요.
이> 저는 예전에 하이텔에 글 쓰신 것부터 봤죠.
최> 엇? 그걸 아시네요??
이> 네
최> 그때도 제가 ‘절판소장’이라는 아이디로..
이> 네, 그때 이런 아이디가 있구나 했죠.
최> 예전에 서울음대 작곡과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하이텔 시절 이야기에요. 제가 LDM(Laser Disk Mania의 모임)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최원태 이런 사람들이랑 같이. 에이브이(AV)쪽에서는 유명하잖아요. 전설적인 아이디예요. 레이저 디스크가 정식으로 수입 안 되던 때였는데, 하여간 제가 우리나라 레이저 디스크 가격을 정했던 사람입니다.
이> 그렇죠.
최> 지금도 그런 거 아주 짜증나요. 이걸 얼마를 해야 되고 어떻게 싸게 해야 되고 그거 정말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거거든요.
이> 그렇죠.
최> 이게 어떤 사람한테는 쓰레기 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한테는 100만원에 살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걸 무슨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냐고, 말이 안 되는 거지. 근데 제가 경매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그냥 사람들이 붙어요. 이게 뭔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아주 피곤해요. 요즘 저는 컨셉을 좀 달리해서 가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이 가수 그러면 그 컨셉을 한 아이템으로 삼아 분야를 세분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템 하나 불려가는 것에도 들어붙어가지고 한 1~2만원에 사는 판을 십몇만원 만들어 놓고 미치겠어요.
이> 주로 옥션에서 진행하시나요? 따로 하시는데가 있습니까?
최> 음반쪽은 auc25. 그 사이트가 문화 예술 골동품 그런 쪽으로. 그래서 저 요즘 판 구하기 힘들어요. 제가 가면 비싸게 불러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저 선수가 없는 귀한 거다, 그래서 피곤해요. 마이너스도 많아요. 아이디 바꿔야 될 것 같아요. (웃음) 에이브이동(AV 동호회) 이야기하니깐 갑자기 친근감이 느껴지네.
한국음악 라이브러리를 향해
명> 들국화도 불렀던 ‘사노라면’이라는 노래, 길옥윤씨가 작곡했다는 것도 절판소장님 블로그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길옥윤씨 10주년이 거의 조명이 안 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자료도 직접 모으고 공부하셔서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길옥윤’ 추모 특집 방송도 기획, 진행하시고 그러셨죠.
최> 아무리 이전에 최고의 작곡가였고 그래도 죽으면 소용이 없더라고요. 길옥윤 씨 우리나라에서 진짜 대단했던 사람이거든요. 올해 10주기인데… 그냥 참여해주길 바라는 식으로 하니깐 안 되더라구요. 이제는 사람들이 뭔가를 할 때 정확한 상품 가치로 움직이지 예전처럼 70년대처럼 정이나 의리, 마음, 이런 걸로 움직이는 세상은 아닌 것 같아요.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쉽게 허물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고요.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데이터베이스가 나중에는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공> 제가 작년에 대중음악비평웨진 웨이브 [weiv] http://www.weiv.co.kr 를 방문했는데 그 분들이 한국 독립음악 인디음악 라이브러리를 언젠가는 만들고 싶다고, 사적으로 모으고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아마 최기자님 같은 분이 대표적인 분 아닐까 싶네요. 그러면서 LP로 되어있는 음반들을 다 데이터베이스화해야되는데 그걸 나라에서 해주지도 않고 결국 하고 싶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작업을 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최> 상당히 의미 있는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고맙죠. 글 써주고 그러면.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으면 거기서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된 연구로 갈 수 있으니깐. 그 시절을 접하지 못하고 음원으로만 접하는 젊은 친구들로선 왜 이 사람이 이런 음악을 했는지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고 또 연구를 할 수 있죠.
한 사람 한사람을 나무를 만들면서 숲을
저는 한 사람 한사람을 나무를 만들면서 숲을 만들었다고 생각을 해요. 거기서 좀 더 미세하게 들어가고 싶거든요. 예를 들어 김민기 데뷔 음반이 실제로 어떤 환경에서 녹음이 되었고 그 작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당시 끌려가서 뭘 했고 당시 정치 상황이 어떤 영향을 미쳐 어떻게 됐고 이런 것까지도 파고들고 싶어요.
저는 실제 연주나 창작 부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가 받은 느낌이나 노래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로 풀어내요. 이를테면 한돌 씨가 여울목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를 어떤 환경에서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나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도보여행이나 등산을 많이 하거든요. 하루는 산에 올라갔는데 너무 힘들어 계곡에 앉아 있다 아래를 보니 낙엽이 떨어져 물을 따라 흘러가더래요. 어떤 물은 그냥 잘 내려가는데 어떤 낙엽은 가다 여울목에 걸려 몇 번을 돌다가 힘겹게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만든 노래거든요.
우리도 예전에 했던 도보여행 같은 거 생각해 보면, 들판에 다 쓰러져 가는 탑 하나 마주칠 때, 뭐 하나 있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친다고. 하지만 그 탑 관련해서 벌어졌던 역사, 그 탑 하나를 놓고 그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투를 벌이고 죽고 이런 것을 알게 되면 그 탑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잖아요. 근데 음악 하는 당사자들도 말로 하지 못하는 게 많거든요. 그런 이야기들 술술 안하죠.
공> 또 신뢰관계가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한국 가요 자료
최> 추억의 LP 여행 칼럼과 포크 청개구리 이후 관련 기사를 무지하게 많이 썼어요. 또 각 신문사 가요담당 기자들한테 이 노래야 하면서 들려준 것만도 한도 끝도 없어요. 모르니깐. 음반도 없고. 자료도 없고. 제가 인터뷰하고 또 당시 자료 모아 연구하고 해서 정리해 쓰면, 다른 음악 담당 기자들에겐 그게 바로 텍스트가 되곤 해요.
간혹 모르고 쓴 기사 보면 ‘80년대 70년대 말 국내 최초의’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한다고요. 예를 들면 조용필 씨, 국내 최초의 팬클럽이 있었던 가수 아니거든요. 제가 현재 연구한 바로는 66년의 이금희 씨라고 ‘키다리 미스타 김’을 부른 최초의 댄스가수 있어요, 물론 황우루라는 걸출한 기획자가 있었지만, 최초로 팬클럽을 결성했구요. 또 30년대 40년대에 그거보다 더 한 일이 이미 있더라고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근데 무슨 80년대 70년대 그게 우리 나라 80년 역사에서 최초라는. 황당하죠.
우리나라 가요 역사가 192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보면 벌서 80년이 넘었잖아요. 그런데 최근 60년, 해방 이후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미국 팝이 들어올 즈음부터는 정리가 오히려 더 안 되어있어요. 책 하나 변변히 없어요. 어떤 환경에서 음악을 하게 되었다 뭐 그런 정도의 사실도 데이터베이스화 안 되어 있거든요.
LP로 탄생한 난지도 갑부
최> 일반 사람들도 외국 팝송이나 클래식 원판들 이런 거는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때 실제로 당시 공무원들 한달 봉급 되고 그랬거든요, 70년대에 굉장히 비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가요음반은 천시했기 때문에 쉽게 버렸다고요. 그리고 또 가옥구조가 예전 적산가옥에서 아파트로 넘어가는, 그러니까 이사 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다 버리고 그랬으니깐. 이런 경험 많이 하셨을 거예요.그러면서 그게 다 난지도로 가서 난지도에서 쓰레기 정리하시던 분이갑부가 된 전설도 생기는 거고. 그거 아세요? 업자들이 음반 리스트 적어주면서
이런 거 가져오면 돈 줄테니깐 소각되거나 부서지기 전에 빼놓으라고 해서 거기 계신 할아버지가 나중에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그런 얘기. 암튼 그러면서 음반이 거의 다 없어졌어요.
방송국 테잎 재활용
명> TV 방송국에서도 쇼쇼쇼 같은 방송 프로그램 테잎을 재활용했다면서요.
최> 그것도 다 ‘추억의 LP여행’ 칼럼을 쓰면서 알게 된 거예요. 그 당시의 각양각색 아티스트들이랑 음악 관련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를 했거든요. 황당한 일이죠. 그게 예전에는 가요를 천시하고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들이에요. 한편으로는 그 당시 우리나라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나라는 문화 자체가 그렇잖아요.
기록을 보존하기 보다는 기록을 폐기하는 역사가 더 많았기 때문에 그런 자료보존은 어느 분야이든 간에 미진한 편이에요. 그래서 방송국 통폐합 즈음 얘기인데. 나중에 문광부 장관 하게 되는 친구가 KBS 사장을 하면서 보관의 문제라든가 이런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깐 대중문화 음반은 쓰레기라고 표현을 하면서 다 내다 버리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수가 청계천 이런 데로 가죠.
이> 황학동에 흘렀죠.
최> 네, 그리고 그런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전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한다기보다는 거기에 재녹화하고 그래서 거의 다 없어졌어요.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70년대 최고 인기가수인 나훈아, 남진 자료도 방송국에 없어요.
작년에요, 한 프러덕션에서 KBS 위성 통해 우리나라 중요 뮤지션들의 영상실록 같은 걸 방대하게 보여주자고 저를 찾아 왔었어요. 내가 웃었어요. 그거 하는 거 어려운 건 아닌데, TV 매체라는 건 보여주는 거 아니냐? 그러면 영상 자료 한번 찾아보시라고 당장 막힐 거라고. 그 프로덕션 사장부터 PD 몇 명 작가들 대여섯 명 와서는, 결국 포기하고… 없어요, 우리나라에. 예전 자료나 이런 인프라는 정말 황당할 정도예요. 그리고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군사정권하의 금지문화가 강하다보니,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음반이 많이 양산된 특이한 나라죠.
방송과 책
명> 방송도 하고 계시죠. 청개구리 음악실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지난 11월에 김정호 씨 추모 방송하셨잖아요. 그때 김정호 씨 생전 육성이 들어가 있던 추모음반 얘기가 나올 때 쯤 우시던데.
최> 그건 제가 만든 음반이거든요. 제가 음반 제작자였거든요. 생전의 육성을 넣었던. 제가 기획해서 추모공연을 열었거든요. 9시 뉴스까지 나갔었어요. 올해가 김정호 20주기잖아요. 늘상 듣던 건데 그날 갑자기 울컥하더라고 그러면서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또 제가 그 프로 생방송을 처음 하는 날이었거든요. 상당히 긴장도 하고 있던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요.
방송 제의도 많이 들어오는데 예전에는 제가 방송을 기피했었어요. 방송 공포도 있었고. 어느 정도냐 하면, 재즈 보컬리스트 윤희정씨가 예전에 포크가수였거든요. TV 아침프로에서 어떤 프로를 만드는데 윤희정씨 관련 예전 자료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방송국에는 없으니깐 한국일보 최규성 기자님 만나야 된다 이렇게 해서 저한테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어요.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 인터뷰 하는데, 빨간 불이 들어와요. 갑자기 긴장이 되면서 제 첫 멘트가 뭐였는지 아세요? 윤희정 씨가 누구죠? (웃음) 싹 지워지듯이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그런 정도로. 방송하는 거 싫어했어요. 공포가 있었죠.
SBS FM 박성원 PD님은 아주 집요했어요. 청개구리 공연에 6개월 동안 아나운서랑 작가를 보냈다고. 관객으로 항상 인사만 하고 가는 거지. 그래서 자주 보니깐 얘기하고 친해지잖아요. 그런 다음에 방송하자고 해서 (웃음) 그래서 방송하게 된 거예요. 하다보니깐 방송이 재밌더라고.
공> 종이랑 다르죠.
최> 글로만 하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은 많았거든요. 실제 어떤지 듣고 싶고, 그러고 보면 인터넷이 유용한 매체에요. 요즘 단행본 작업 중이에요. 2001년부터 연재해 온 칼럼을 책으로 내는 건데, 원고지 3천 몇 백매 넘고 사진까지 천 페이지를 넘을 것 같으니 너무 방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이> 몇 년 전에 윤광준 씨의 ‘소리의 황홀’ 이라는 책이 나와서 꽤 팔렸거든요. 그 양반 사진작가시잖아요? 사진이라는 컨셉과 본인 나름의 오디오 편력을 대중적으로 풀어냈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최> 제 주의가 미사여구 안하기 그러면서 팩트를 많이 전달하기예요. 칼럼은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 글 분량에도 한계가 있고 LP 이미지도 몇 개 못 넣거든요. 그런데 책은 그런 제한에서 자유로와서 좋죠.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중요한 뮤지션, 아티스트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어요. 음반과 그 분들 음악 인생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음악 궤적을 음반을 통해서 정리하는 것.
명> 한국 대중 가요사 자료로서의 의미도 큰 중요한 책이 되겠군요.
최> 그렇죠. 이런 책이 아직 없어요.
문제는 소프트웨어
최> 지금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일명 ‘손안의 TV’) 시작했잖아요. DMB로 음악 나가면서 LP 자켓들 보여주고 하는 그런 걸 하자고, 저한테 계약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근데 귀찮아서 (웃음) … 그런 건 정말 문화컨텐츠진흥원이나 그런 데서 국가 프로젝트로 사실 해야죠. 광주에도 지금 돈 몇 백억 가 있는데 뭘 할지를 모르거든요. 그런 거 만들고 공공화하는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청개구리 공연할 때 회계쪽 맡아 줬던 분이 계신데, 정동진 시계박물관 건립 때 자기네들이 펀드조성 해줬다 하더라고요. 사업계획서가 중요하다고 이게 통과된 사업계획서다 하면서 그때 나한테 보내왔어요. 사업계획서 잘 만들면 하드웨어를 구축할 수 있다고, 그런데 정작 소프트웨어가 없어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뭔가 그런 걸 해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요즘 제가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이제까진 제가 보장된 환경에서만 있었거든요. 학교 졸업하고 신문사 들어가고. 월급 받아가며 일하면서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 많이 들어요. 철부지더라고요, 나이만 들었지. 그런 조성은 안 해 봐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러다보니 상처를 받기도 하고 경제적 손실도 있고 뭐 그런 부작용이 오는 거죠.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중년문화, 저는 절대로 추억에만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한류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 문화의 변변함 그런 거예요.
황당부르스 박물관
최> 남이섬에 대중음악 박물관이 생겼는데 그 과정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황당 부르스였어요. 박물관은 수십억을 들여서 지어 놓고 안에 컨텐츠는 그냥 어떻게 누가 주겠지 하는 그런 개념으로.
실제로 문광부 직원이 저희 집에 왔었어요. 최기자님이 소장하고 있는 거, 만약 최기자님이 1억 주고 샀다고 한다면 오천만원 정도는 보장해 주겠다 오천만원 정도에 사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 사람들은 그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그랬죠. 그 1억 주고 산 게 10억이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실래요? 그렇게 생각하셔야 된다고. 하드웨어를 구축하셔도 아마 소프트웨어 부분은 쉽지 않으실 거라고. 이젠 LP를 구하기 힘들거든요. 희귀한 건 비싸죠. LP뿐만 아니라 관련된 노래책도. 최근엔 60년대 극장의 쇼 티켓 등 아이템을 넓혀 나가고 있어요.
요즘 들어 중요시하는 게 라디오거든요. 우리나라 대중들이 음악을 즐겨 들었던 통로가 라디오가 대부분이었어요. 라디오라 하면 외국의 값 비싼 진공관 라디오 떠올릴 사람도 있겠는데, 물론 저도 Zenith 진공관 라디오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니고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었던 라디오. 뒤에 건전지 이따만한 거 붙여놓고 들었던 정나미 나는 라디오. 허접한 이런 게, 다시 우리한테 역사를 내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쪽 콜렉터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게 돈 있고 시간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여서. 제가 한번 해보니깐 콜렉터들이 많아. 보관하기 만만치 않아 손대지 말아야지 했고요. (웃음)
절판소장의 꿈
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을 할 때 사실 음악 쪽은 즐겁자고 했던 것이고, 그래서 이전에는 이쪽을 본업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요즘엔 개인 박물관 같은 걸 하고 싶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굳혀가고 있어요. 한 4년 넘게 가요 칼럼을 썼고, 또 어찌하다보니 공연기획과 음반제작, 라디오 방송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앞으로 뭘 할 것인가를 찾게 되었죠. 제가 이 세계를 몰라서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공부 많이 했다고 생각하구요.
박물관은, 전시공간이 박제화되어 있으면, 정지되어 있으면 생명력이 없을 것 같고요. 제가 꿈꾸는 건 70년대~80년대 초의 음악다방을 재연해서 누구든 그 꿈을 가졌던 사람은 뮤직박스에 앉아서 사람들한테 음악을 틀어주고 또 그걸 씨디로 소장하게.
자연스럽게 거기서 차 마시고. 재미난 게 뭘까 생각해서 수익사업으로 함께 맞물려 가야 할 거 같아요. 무엇보다 작은 공간이라도 공연이 병행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매주 SBS에서 한 시간짜리 방송을 하는데 뭘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건 제가 기획을 해요. 한 아티스트에 대해 음악과 얘기 등으로 한 시간 동안 들려줄 수가 있거든요. 중요 영역별로 나눠서. 그걸 준비할 때에는 너무 행복해요. 살아있는 것 같고. 그런데 그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어떤 형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좀 두렵죠. 그런 쪽으로는 안 해 봤으니깐. 근데, 하면 또 하겠죠. (웃음)
Epilogue
절판소장 프로필( 블로그에서 펌 )
I am : 절판된 소중한 음반과 자료를 많이 모으고 싶고, 모은 절판소장 ^^
Keywords : 대중음악, 모으기, 추억의 LP 여행
Wishlist : 당신의 따뜻한 마음. 좋은 친구. 절판된 희귀음반. 자료
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다락방이나 야외에서 야외전축으로 음악 감상한 아픈 추억과 기타 배우다 죽도록 맞고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한 쓰라린 기억, 그래서 음악듣기로 갈증을 달래는 음악 마니아.
칼럼
한국일보 시사 주간지 주간 한국‘추억의 LP 여행’2001년부터 연재 (블로그 참고)
방송
최규성의 LP 여행_SBS FM <이현경의 예스터데이>
청개구리 음악실_CBS FM <유영재의 가요속으로>
블로그 추억의 LP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