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진.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민중노래패 한울림 활동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가 좋은 글을 쓰고 싶어 과감히 그만 두다
시,음악,여행,사진,자연,소주,산,연극,인사동을 사랑하는 남다른 몽상가
이 글은 인터뷰어 파이와 인터뷰이 연진이 2005년 10월 22일부터 26일까지 주고받은 이메일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파이가 썼습니다.
친구가 있다. 1999년,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하여 알게 된 친구. 친구는 ‘한울림‘이라는 민중노래패에 발을 들였고 나는 문학 동아리에 몸을 담았다. 길은 달랐지만 비슷한 고민을 했고 비슷한 꿈을 품었다.
파이 : 요즘 생활은 어때? 대학 졸업을 하고 어떤 일을 했지?
연진 : 졸업하기가 많이 겁났어. 기형도의 “대학시절”이 왜 이리 공감이 가던지…졸업하고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전자출판?취재기자를 양성하던 평화아카데미를 6개월 간 다녔어. 취재기자가 되고 싶었거든. ‘오마이뉴스‘나 ‘노동의 소리‘같은 곳에서 움직이는 취재기자가 되려고 준비했었는데, 그 준비 기간에 잠시 외도를 했어. 올해 9월 중순까지 방송작가 일을 했지……
파이 : 그랬구나. 몰랐는데…… 어떤 프로그램 작가였어?
연진 : 방송작가는 정말 재밌는 경험이었어.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있었는데 배우는 기분으로 열심히 했지. 처음은 KBS2 의학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그 후 토론 프로그램을 했는데 그 동안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어. 사회 운동하는 분들은 정말 많이 만났지. 여성신문, 위민넷, 참여연대 등등. 그리고 특집 때 김남조, 문정희, 신달자 시인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잠자던 문학에 대한 욕구가 다시 살아났지. 그들이 시를 쓰기까지의 고달픔과 아픔이 신선하게 다가왔어.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 나에게 그게 문학이었으면 해.
파이 : 내가 아는 후배들 중에 네 팬 많은 것 알지? 네가 민가(-“민중가요”의 약칭) 부르는 모습에 반했던 애들이지. 나도 네가 “창살 아래 사랑아” 부를 땐, 우와! 정말 반할 것 같더라니까! 그동안 음악에 대해 꾸준히 도전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과정에 대해 좀 묻고 싶어.
연진 : ㅎㅎㅎ 후배들이 좋아해 준다는 사실은 잘 몰랐는데…… 고맙다…… 2001년 정기공연을 인문대 소극장에서 했어. 너는 그때 군에 있을 때구나……“다시 서는 봄”이라는 주제로 우리 동기들이 집행부였을 때 한 공연이야. 그때가 학교 선거철이라 한참 바쁠 시기였는데도 선거 후보들이 잠깐이라도 오는 성의를 보여줘서 고마웠던 공연이었어. 그때 부른 독창이 꽃다지 1집의“창살 아래 사랑아”였어. 국문과 김재용, 최경봉 교수님이 우연히 노래 듣고 들어오셔서는 나중에 아는 척도 해 주시던 기억 ㅎㅎㅎ 두 교수님도 민가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
파이 : 나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문학 동아리도 가끔 합숙이며 퇴고모임이며 하는데 한울림의 연습은 더 했겠네.
연진 : 공연 연습은 하루에 3~4시간씩 세 달 정도 했어…….목이 아플 정도로 연습량도 많았고 동아리 식구들이랑 꾸준히 발성연습도 했지. 하지만 연습과 노래음보다도 가사에 충실 하는 것이 민가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진심을 다해 부를 때 그만큼 공감하는 것이 민가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해……. “창살 아래 사랑아”도 그때 감정을 많이 실어서 나도 모르게 너무 취해서 부른 거 같아…… ^^ 비밀이지만 지금도 노래의 꿈은 여전해……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그리고 아픈 사람들에게 안식이 되리라고 믿어…… 민가는 세상을 바꾸는 힘!!! 앞으로 좀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노래패에 들어가서 전문적으로 해 보고 싶은 소망도 있어……
파이 : 새내기 시절 네가 부러웠다고 말 했나? 넌 그 때, 한울림에 들어가서 민가를 부르고 있었지. 그런 네가 부러웠어. 안타깝게도 난 노래를 못 부르지! 한울림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연진 : 오빠가 골수 운동권이었어. 오빠는 91학번이야. 중학교 때부터 가장 정의로운 사람은 오빠라고 생각했지. 늘 망설이지 않고 불의를 보면 싸우고 다녔으니까…… 언젠가 서울에 있는 오빠 자취방에 찾아갔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빠 방 대신 친구 방을 보여준 거야. 오빠 자취방엔 시위깃발들이 너무 많아서 식구들에겐 안 보여줬대. 오빠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강경대 열사 등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지.
파이 : 그 무렵이 가장 위험한 시기였던 것 같아. 그때 난 무협지나 읽고 있었는데. 고교시절에 가서야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연진 : 오빠는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쳤어. 노래패 노래공장에서 잠시 노래 부른 이력이 있지. 그 때 오빠로부터 처음 배운 노래가 민중가수 윤선애가 부른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와 꽃다지의 “민들레처럼”이야.
파이 : 이야! 노래공장 가끔 듣는데…… 네 오빠 소리도 있었겠네……
연진 : 오빠가 군대에 가면서 모든 짐이 시골집으로 왔는데 그러면서 봇물 터지듯 여러 문화를 접하게 됐어. 소설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 등>, 공선옥의 <피어라 수선화>, 김영현의 <첫사랑>,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등. 시인 김남주, 박노해, 김정환의 시를 읽으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나네…… 그 전만 해도 양귀자나 신경숙 같은 정서의 책들만 보다가 충격 그 자체였지. 안치환의 1집은 거의 달달 외울 정도였고 노찾사의 음악도 참 좋아했어. 대학에 가면 정말 열심히 살 거라고 다짐했지. 대학에 가서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한울림……
파이 : 그랬구나. 네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구나. 선배들한테 사랑 많이 받았겠다. ㅋㅋ
연진 : 신입생 때 안치환의 “철의 노동자”를 부르자 선배들이 많이 놀라던 표정이 생각난다. ㅎㅎㅎ
파이 : 그 때 선배들 표정이 궁금한데? 그 당시 선배들이라면 꽤 멋있는 사람들이었겠는데.
연진 : 선배들의 전력이 화려했어. 노찾사 대표 하신 선배도 계시고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는 꽃다지 선배도 계시고 무엇보다도 아직도 지하에서 활동하는 선배도 계시고 노조에서 일하시는 선배도 계셨지. 나도 정말 열심히 싸워야지 생각했어. 선배들에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허나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학원은 너무 조용했지. 4.19도 아무 소식 없이 지나갔고, 그래서 동아리방 칠판에 “진달래”가사 써놓고 추모했던 기억…… 새내기 시절 광주 망월동을 돌면서 충격 받은 것은 내 인생을 많이 바꿔 놓았던 계기였던 거 같아. 무명열사의 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혁명의 도시 광주는 나에겐 십자가처럼 새겨진 거 같아. 그 후부터는 노래를 쉽게 할 수 없었어. 민중가요도 새로운 과도기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많이 한 거 같아.
파이 : 수단은 달랐지만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구나. 나도 촌스럽게만 취급 되고 있는 참여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길 원했거든. 유행처럼 번지는 생태시를 넘어서 말이야. 생태시의 태생이 ‘참여‘는 아니라고 생각되거든. 그건 그렇고 한울림에서 정말 많은 것을 겪었구나.
연진 : 돌이켜보면 한울림은 존재만으로 정말 큰 힘이 된 거 같아. 울렁거리는 가슴을 잡고 민가를 부를 땐 정말 다시 사는 기분이었거든, 하지만 늘 입으로만 하는 노래는 비겁하게만 느껴졌어. 그래서 집회는 집회마다 다 따라다닌 거 같아. 하지만 늘 따라다니는 고민…… 그건 정체성!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 정말 그때는 너무 괴로웠어…… 지금까지도 그렇고…… 한울림은 많은 꿈을 준 나의 고마운 동행자야.
파이 : 요즘은 문학에 대한 열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써지지 않아서 생기는 열병이야? 아니면 등단이라는 부담?
연진 : 우선은 그동안 너무 오래 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많이 부족한 내 자신에게 채찍질을 많이 하는 편이야…… 요즘은 하루 종일 시만 생각하지. 아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해…… 하지만 중요한 걸 깨달았어. 사물을 더 아름다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거…… 남루했던 일상에 빛이 나서 좋아…… 솔직히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잘 쓰고 싶고, 꽉 차게 쓰고 싶은 열망은 있는 거 같아…… 예전보다는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조금 그런 기운이 생겨서 다행이지만. 대학 때는 정말 살기 넘치고 비판적인 시들만 썼던 거 같아…… 근데 이젠 조금 세상을 유연히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해야지^^
파이 : 네가 예전에 썼던 시를 봤는데 정말 서정적이더라고. 질투가 날 정도로. 등단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
연진 : 등단은 문학도면 한 번 쯤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거 같아. 하지만 현재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면 틀에 맞춘 시작이 대부분이라서 그런 경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열심히 해야지^*^
파이 : 내 생각에는 말이야. 기성 시인들의 시에는 일종의 벽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실험정신의 부재라고 해야 할까? 그런 벽들이 문학도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 벽을 허물려고 노력하는 시인들도 있지만… 네 생각은 어때? 기성 시인들의 보수적인 문학성에 대해?
연진 : 물론 그렇지. 현대시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소위 정통적인 시어들에 너무 익숙한 기성작가들의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해. 현대시에서 쓰이는 기교들을 가볍다고 생각하는 심리 때문인 거 같아. 나도 한 때는 정통에 길들여진 탓인지 그 안에서만 쓰려고 몸부림쳤었거든. 그렇다고 기성 시인의 시들이 다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 시조만 보더라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들이 많잖아. 다만 어떤 테두리 안에서 답습하려고 하는 데에서 시적 자부심을 가지려 하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다보니 소재 고갈이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시인 이원의 글은 재미있었어. 희곡적인 거 같기도 하고 실험정신이 보여서 좋았지.
파이 : 좋아하는 시인, 작가가 있다면 누구야?
연진 :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김남주 시인이야. 난 지금도 시를 쓸 때면 느슨한 나를 채찍질하는 시인의 옥중연서라는 책을 보곤 해. “이 가을에 나는”이라는 시를 낭독하는 시인의 쩌렁쩌렁한 기운이 느껴져……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백석,김수영,기형도,황지우,김정환,박남준,김용택,안도현,함민복,허수경시인 등등 너무 많다…… 어쩌지? 그래도 꼽으라면 김선우, 이성복 시인이야.
파이 : 김남주 시인, 나도 고교시절에 김남주, 김지하, 박노해 이런 시인들을 읽으면서 시 쓰고 싶다는 꿈을 품었었는데 …… 왜 딱 김선우, 이성복 시인을 꼽는지 묻고 싶어.
연진 : 김선우 시인은 관념적이지 않고 섬세하고 흡입력이 대단해. 감각적 언어에 대한 세련미도 대단한 거 같고…… 무엇보다도 여성성과 생태적인 글들은 싱싱함 그 자체인 거 같아…… 방금 건져 올린 미역을 건지듯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말갛게 회개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자분자분 내 귀 옆에 와서 시를 읊조리는 것 같은 그 운율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처를 상처로만 드러내지 않고, 그것들을 존재감으로 승화시키는 힘! 내가 앞으로 지향하는 시의 역할이기도 해. 김선우 시인의 시인은 나를 다시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야^^ 또 이성복 시인도 좋아하는데 예전부터 참 글을 유연하게 잘 쓴다고 생각했었어. 최근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이라는 시집도 잘 읽었어. 시적 화법이 아주 뛰어나다는 생각이 드는 시인이야.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사회적, 비판적 시각으로 글을 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 같은데……
파이 : 작년에 내가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했었거든. 그 즈음해서 한 선배와 뜻을 맞춰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었지. 그런데 문학을 하는 주변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 “너 그러다가 시 못 쓴다“,”정치 그만해라” 이런 말들 어떻게 생각해? 문학하는 사람들의 참여 부재에 대한 것. 나는 좀 심각하게 생각했어. 너무 개인화되어가고 있는 현실. 너 또한 네 동아리에서 그런 현실을 느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연진 : 난 누구보다도 민주노동당 날갯짓이 반가운 사람이고 원하던 사람 중의 하나야. 물론 선배의 말은 옳지 않아.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시를 쓰는 사람들은 확고한 신념을 무기로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아름답고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도 넘쳐나지. 하지만 무엇인가 화두를 던져 주고 고민을 던져주는 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역할은 우리 젊은 작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갈수록 개인적이고 편협한 사회가 되면서 그저 쉽고 즉흥적인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시인도 사회의 운동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파이 : “문학이란 배고픔을 모르는 자에게 배고픔을 알리는 일”이란 말이 생각난다. 그런 고민들이 더 좋은 작품을 나을 것이라 생각해. 쓰는 것에 대한 고민 말고……
연진 : 김용택 시인만 보더라도 섬진강을 지키자는 슬로건을 걸고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를 했고 글과 같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전사가 된 김남주 시인을 보더라도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아…… 노동과 분단 그리고 이라크와 전쟁 아직도 예고된 아픔이 많은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어. 시인은 낭만을 무기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글로서 싸우기도 하고 민중들에게 햇살을 드리우기도 해야지…… 아직도 생활보조금이 없어 일가족이 자살을 하고, 전쟁으로 아이들이 죽어가지……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앞으로만 걸어가…… 난 그게 슬퍼…… 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우리 소시민들이 공감하는 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보고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글…… 가난한 사람들이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정말 진실된 글…… 당장은 힘들더라도 나는 충분한 과정과 배움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김수영 시인이 그래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군^^
파이 : 그래! 그래서 내가 김수영을 좋아하지. 딱히 참여 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신의 참여! 정신의 부딪침들…… 네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글인지 상상이 된다. 그래도 물을게. 어떤 글을 쓰고 싶어?
연진 : 나의 탯줄이 전라도 정읍이라서 그런 걸까…… 단풍잎이 쓰러지도록 아름다운…… 시골의 정경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모든 기초를 사람에게 두는 모태를 타고 난 거 같아. 그래서인지 서민들의 일상 그리고 풍요롭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 보고 싶어. 사진에 비유하면 작가 최민식 같이, 또 김용택 시인처럼 섬진강과 아이들의 애정으로 나오는 시어들은 살아있고 감동적이잖아…… 푸르고 푸른 마음으로 정말 살아있는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큰 꿈이야. 야호^^
파이 : 네 야호 소리가 여기까지 크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 같구나 ^^ 꼭 그 꿈을 이루길 바래, 내 친구 연진아.
2005년, 내 친구 연진은 이제 다시 꿈꾼다. 꿈꾸기 위한 꿈, 시를 쓰려는 꿈, 위가 아니라 밑에서 꾸는 그런 꿈. 나 또한 연진이처럼 큰 꿈을 꾸며 연진이와 꿈을 오랫동안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