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김미화

김미화.
1983년 KBS 개그 콘테스트로 데뷔. KBS 코미디세상만사, SBS 코미디전망대 MC,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카드 후견인, KBS TV는 사랑을 싣고 공동MC, MBC FM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앵커우먼, KBS TV 책 소개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 공동사회자

김미화 씨를 만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녀가 유명 코미디언이자, 잘 나가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여서만은 아니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박미화로 살아온, 남편과 이혼하고 두 딸 아이를 데리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녀를 본 후였다.
편집장에게는 ‘코미디언 김미화가 말하는 호주제 폐지’ 정도로 아이템을 제출했지만, 정작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깟 TV 프로그램으로 날 울렸던 그녀를 만나, 날 울린 그녀의 아픔을 대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기를 놓쳐버렸다. 여기저기서 박미화였던 그녀의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다. 아쉽지만 묵혀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시사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활약하는 그녀가 개편된 ‘TV, 책을 말하다’의 새 진행자로 나선 것이다. 회사일도 제치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손톱을 깨물며 날 울린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미소를 곱씹었다.  [
참석자: 공숙영, 김성환, 김조영혜]

 

 

 

[김성환 (이하 “성”)]  새롭게 맡으신 프로는 어떠신지 그거부터 말씀해 주시죠.

 

 

[김미화 (이하 “김”)]  TV 책(TV, 책을 말하다 – 이하 “TV 책”)이요? TV 책은 너무 어려워. (웃음) 예전에는 포맷이 책 한권을 소개하고 그 저자와의 인터뷰였는데 지금은 북 클럽이라고 십여 분의 북클럽 책벌레를 뽑았어요. 그 분들이 돌아가면서 패널을 해요.


예를 들어 내일 녹화가 들어가는 것은 과학책인데, 이분들이 추천해 주신 재밌는 책 서너 권을 MC가 다 소화해야 해요. 지금 삼주 째인데 일주일에 책 한 권 읽을까 말까 하다가 세 네 권씩 소화하고, 어떤 때는 장편소설로 여섯 권씩 봐야 하는 아픔이 있어요.(웃음) 힘들어도 뭔가 남는 게 있어서 흘러가는 시간에도 짬짬이 (책을) 봐요. 근데 과학책이 의외로 재미있어요. 정재승 선생이 쓴 과학콘서트는 굉장히 재밌어. 파인만씨는 농담도 잘 하시네, 얼마나 재밌어. 저도 사실 약간은 편식을 하는데, 책도 말장난이 많이 들어있다든지, 내용이 서정적이라든지 그런 걸 골라봤는데 여러 방면의 책을 본다는 게 괜찮아요, 다들 전문가시니까 모르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죠, 여쭤보면 되는 거고.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내내 느낀 것은 김미화 씨가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을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여자였다. 
 

[김] 첫 회에 제가 옛날 책이지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소개했는데 그것 때문에 아줌마들이 “저도 사서 읽었잖아요” 할 때, 아 이런 재미가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김조영혜 (이하 “영”)]  예전에 세계는 그리고 지금은, 아니 우리는. 긴장했어요. 제가 연예인을 처음 만나서. (멋쩍은 웃음)

[김]  괜찮아, 다 헷갈려

[영]  진행하시는 걸 보면, 질문의 수위를 굉장히 낮춰서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질문이 청취자에게 편안함을 이끌어내기도 하고요. 택시 타고 오면서 택시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아저씨가 “김미화 씨, 편안하죠. 내가 모르는 것을 질문해주니까 대변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너무 질문의 수위를 낮추다 보니까 콕콕 찝어주는 맛이 없다”는 평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일단은 편안하다는 점에서는 접근을 잘 한 것 같아요. 코미디언이고 대중적인 사람이니까 편안하게 접근한 것은 성공했죠. 제 기본 스타일이 코미디를 하더라도 남한테 공격적이지를 못 해요. 아마도 오래 이걸 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손석희 씨 식의 딱딱 끊거나 콕콕 집어주는 거는 못 해요. 게스트가 자기변명을 길게 하면, “아, 이쯤에서 됐구요, 다음 질문 넘어갑니다”하고 탁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실제로 밖에서는 그런 주문을 많이 해요. 하지만 (그런 진행이)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차가워 보일 수 있어요.


프로그램을 그렇게 하면,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참 좋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코 잘 하는 진행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시사 프로그램이라도 저쪽 사람을 면박주거나 차갑게 대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이 화끈한 맛을 원하는데, 그냥 은근하게 가면서 뭔가 느끼게 해주는 거죠. 여태 내가 코미디를 하던 스타일이 있는데, 단지 코미디언이 하는 시사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니까, 일부러 스타일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영]  지금 김미화 씨는 유능한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이고 방송인인데, 코미디언으로서 자신을 낮춰서 질문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김]  청취자가 일주일 동안 제 방송을 다 들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일주일에 삼일 듣는 분은 저 얘기가 뭐야, 할 수 있는데 청취자 입장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이야기해야죠.


수능공부하는 학생이나 주부들이 우리 프로를 많이 들어요. 용어를 반복적으로 쉽게 설명하니까 시험 볼 때 이해하기가 쉬워서, ‘공부가 되는 프로그램’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많이 와요. 안다 치고 넘어가던 것들이 많잖아요, 대학교 나와서 또는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이런 것도 몰라, 하고요. 창피 안 당하려고 그냥 넘어가던 것들이 있어요. 어느 프로에서도 깨지 못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전문 용어를 써 버리는 것 말이죠.

전 아직까지 나서서 아는 체 하기에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어요. 시사 프로그램을 맡은 지 2년째인데 5~6년 이 프로를 이끌어 갈 수 있다면 전문가가 돼서 그 때쯤 되면 뭔가 방향을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 수준이 사람들의 이해를 도우면서 나한테도 맞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영]  매일매일 정보가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그 사안들 각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시나요. 사안 자체를 소화해야 질문도 하고 코멘트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김]  가치 판단은 쉬워요. 정의로운 거, 부정부패 없는 거 쪽으로만 가치 판단하면 돼요. 마음 속에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 쉬워요. 어떤 현상을 편견에 의해 진행할 수도 있으니까 작가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자료 뽑아서 주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이외에는 하는 일 없으니까 일찍 와서 찾아보고요. 라디오정보센터에는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이 모두 있으니까 신문도 뒤적여 보고. 이 신문에서는 이렇게 썼구나, 사설에서는 이런 시선도 있구나 살펴볼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하루에 다루는 게 고작 열 개 남짓한 사안이니까 미리 공부만 하면 쉬워요. 유전개발 의혹 사건이 있다면 어제는 사건 진행이 이만큼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구나, 조금씩 발전하는 거니까 생소하지는 않고 요령이 생겨요.

 

[성]  새로 맡은 티비책 프로는 어떠세요. 처음 보고 나서 너무 겸손하시다, 는 생각이 들었는데.

[김]  오늘 좀 봐주세요. 5•18, 어찌나 어려운지 웃길 대목도 없고.(웃음) 공부를 한다는 건 좋아요. 5•18을 잘 몰랐어요, 도대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는 알았어도 현대사에서 어떤 커다란 일이 벌어졌고는 정확하게 몰랐어요.
근데, ‘신 현대사’를 다시 사서 읽어보니까 그제 서야 이해가 돼요. 위에서는 쉽게 풀어주기를 주문하고 내용은 어렵고, 자칫 잘못하면 교양프로그램의 흐름이 흩어질 수 있죠. 너무 엄숙하면 아나운서도 아니고 코미디언인데 어색할 수 있고요. 참 어려운데 무거운 얘기 나오면 그 흐름에 맞추고, 그 때 그 때 달라요.

 

[공숙영 (이하 “공”)]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소개하면서, 차라리 그 때 미국에 갔었으면 오프라 윈프리가 됐을 텐데, 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오프라가 책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고요. 언제부터 오프라 윈프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김미화 씨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그녀를 미국으로 입양 보낼 생각도 했다고 한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김미화 씨는 웃음의 소재로 바꿔, 말 그대로 ‘방송’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마치 그녀가 “나를 봐요, 나도 이렇게 아팠어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당신도 힘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김]  오프라 윈프리가 미국에서 김미화처럼 되고 싶다, 이래야 하는 건데.(웃음) 오프라 윈프리 같은 역할 모델이 한국에는 없어요. (오프라 윈프리는)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방송으로 다루기 힘든 사안을 굉장히 따뜻하게 다뤄요. 딸을 강간한 범인을 용서할 수 없죠,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용서할 수 있게 만들어요.


내가 코미디언이지만 공익적인 사회 복지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 사회를 바꾸는 선도적인 역할도 해 보고 싶어요. 물론 그런 역할이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국민의 신뢰도가 따라줘야 하겠죠. 내가 대통령 나갈 건 아니지만, 사회를 바꾸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을 때는 꾸준하게 봉사활동 하면서 저 사람 착한 일 많이 하고 사회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해요. 제가 봉사활동 하는 게 기뻐서 하는 것도 있어요. 행복하지 않은데 억지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이 들어서 정말 그런 프로그램 해 보고 싶다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성]  그런 생각이 언제 드셨어요? 어느 순간에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온 사람으로서…(말 끊김)

 
이 대목에서 김미화 씨는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김]  그래요? 저는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꾸준하게 방송을 안 한 적이 없어요. 개그 콘서트를 하다가 안 하고 ‘티비는 사랑을 싣고’ 등 교양 프로그램 꾸준히 했어요. 지금도 왜 요즘 방송 안 하세요, 하는 질문을 듣기도 해요. 코미디를 안 하니까요. 또, 이제는 시사 프로그램 전문이세요?, 라고 묻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저는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이에요. 코미디 안 써주면 딴 거하고. 신인 개그맨을 발굴하는 코너를 새로 시작해요, 재밌잖아요, 코미디. 내가 얼굴이 교양스럽지가 않잖아요.(웃음)
어디서든 불러주면 최선을 다 한다, 모든 걸 경험해 보는 게 저의 소망이에요. 그냥 재미있잖아요, 이쪽에서는 책 프로 근엄하게 하다가 코미디에서 또 망가지고. 저 사람은 코미디언이니까 코미디만 해야 해, 이런 사회의식이 바뀌고 있어요. 방송국에서도 시사프로그램 두 시간 진행에 코미디언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창의적인 시도예요. 위에 있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졌던 높은 분들도 이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단면일 수도 있죠.

 

김미화 씨는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단호하기까지 했다. 그녀에 대한 부단한 오해가 그녀를 그만큼 단련시킨 것 같았다.

 
 
[영]  높은 사람들도 김미화 씨를 콕 집어서 “저 사람을 쓰자”라고 한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텐데요. 왜 선생님을 발탁하고 프로그램을 맡겼다고 생각하세요?

[김] 뭔가 의식이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웃음) 사회봉사나 시민단체 활동을 꾸준히 한다는 것에 점수를 많이 준 것 같기도 해요.

[영]  게다가 학교도 많이 다니셨잖아요.

[김]  많이 다녔지요.(웃음)

 

김미화 씨는 올해 초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을 수료하기도 했으니, 가방끈이 길긴 긴 셈이다.

[김]  MBC 라디오에서는 처음 일 해 봐요. (저를) 잘 모르니까 잘 할 것 같다 하신 건데, 우리 PD가 남자 화장실에 참 많이 울었어요. 내가 하도 진행을 못 해 갖고, 왜 저런 여자를 뽑았나 화장실 바닥을 머리로 막 박으면서. (웃음)


처음엔 혼자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두 시간이나 진행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어요. 지금은 피드백이 와서 “잘 하셨어요, 속 시원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우리는 인기인이잖아요, 사람들의 기를 먹고 사는 사람, 위로를 받고 자신감도 생기고 책임의식도 생기고요. 내가 마이크에서 한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건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피부병을 앓고 있던 여자 환자가 TV에서 그 병을 불치병으로 진단하니까, 자살을 했어요. 그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거든요. 알려진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 많아요.
 

[영]  선생님께서 하시는 정치적인, 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예를 들면 전쟁반대… (말끊김)

여기서 또 질문이 끊겼다. 김미화 씨의 답변이 이어져 나왔다.

30분 남짓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인터뷰이에 대한 호칭이 변하고 있었다. 김미화 ‘씨’에서 ‘선생님’으로. 선생님, 이란 호칭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뱉어놓고 ‘씨’라고 교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저는 정치적인 입장을 밝혀 본 적 없어요. 활동 해 본 적도 없어요. 전쟁반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 일이고, 저는 어떤 정당과도 무관해요. 방송하다 내가 한나라당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김미화는 열린우리당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열린우리당에서 절더러 한나라당이다, 그래요. 그런데, 프로그램에서 이게 우리 프로그램에 맞다고 하면 하는 거예요.

김미화 씨는 정치와 관련된 질문에 꽤나 민감했다. 정치적 입장을 묻는 질문에서도 그녀는 한층 높은 톤의 목소리로 “아니요”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다음 장에서 알 수 있다.

 

[공]  인생에는 선택의 순간이 있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하지 않는 쪽으로 선택할 수도 있는데 하는 쪽으로 선택해 오셨다는 거죠. 시사 프로그램 제안 왔을 때도, 책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로 행동반경을 넓혀 오셨어요.
 

[김]  어, 아닌데, 처음에 못 하겠다 했는데. 책은 내가 꽁으로 읽을 수 있으니까, 책은 하겠다 했어요.(웃음)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못 하겠다고 했어요. 대신 “게스트로 1주일에 한 번씩 출연하겠다”라고. PD가 집 앞에서 보자고 하는 게 왠지 날 꿰려고 하는 거 같아서 선수를 쳤죠. 그러다 메인 진행자를 맡긴다 하니까, “시사 프로그램, 말도 안 돼요”라고 펄펄 뛰었죠.

그런데 우리 PD가 그러더라구요, “나이 사십 넘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코미디 무대에서 써 줄 것도 아니고 김미화 씨는 이런 거 하셔야 합니다”라구요. 또, PD 얘기가 “나쁜 뉴스도 있지만 좋은 뉴스도 있는데 좋은 뉴스를 부각해 희망을 주는 뉴스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요.
그 PD가 여성시대, 손석희의 시선집중 등을 만든 MBC의 스타 메이커예요. 사람을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해요. 그리고 따뜻한 뉴스라면, 내가 하는 사회봉사활동과 맞아 떨어져요. 방송을 통해서 소개를 할 수 있다면 파장이 클 수도 있고요.


지율스님이 천성산 지키기 단식을 하실 때, 1만명이 서명을 하면 단식을 풀겠다고 하셨어요. 근데, 하루 방송 딱하고 1천명 모자란 1만명이 서명했어요. 그런 걸 보면 방송 통해 전도사 역할 할 수 있겠다,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시작을 한 거죠.
처음엔 참 가관이었죠. 불안불안했던 거죠. 지금 너무 잘 한다는 게 워낙 처음에 목젖이 떨리면서 진행을 해서예요. 그 때보다 양반이 됐으니까 칭찬해주는 거죠.

 

[영]  활동이 여러 방면이세요. 코미디언, 진행자 등.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김]  저는 코미디언이죠. 저는 죽어서도 코미디언이죠. 죽을 때 무대에서 코미디 연기하다가 쓰러져 죽는 게 소원이에요.


나이 들어도 코미디 무대에 서고 싶은데 사람들이 받아주느냐, 그게 문제죠. 돈 좀 그만 벌지 할 수도 있고요. 선배들이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의 사랑을 못 받고 무대에서 물러나요. 돈 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성취감을 쫓고 무대에서 일생을 마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도 못해요.

저는 그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도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열심히 하고 후배들의 영역을 넓혀 줘야 해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게끔. 저 스스로도 게을러지지 않게 채찍질하고, 나이 들었으니까 너희들이 나를 받들어라, 하는 건 젊은 PD나 후배들이 피곤해 하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 갭을 줄여야 해요. 나이 드는 게 힘든 건, 인간관계를 맺는 거죠. 젊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고 다가가느냐가 어려워요, 하지만 진실로 대하면 돼요. 또, 제가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재밌게 바라봐 주기도 하구요. 내 직업이 코미디언인게 너무너무 좋아요, 행복해요.

 

[영]  저는 코미디는 잘 모르는데, 재밌다 그러고 마는데. 김미화 씨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뭔가요?

[김]  재밌는 거예요, 그냥. 하는 사람이 재밌고 보는 사람이 재밌으면 그만이지, 코미디에서 무슨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머리 아프잖아요.

[영]  근데 오프라 윈프리와 코미디가 연결이 되나요?

[김]  오프라 윈프리도 웃겨요. 비슷한 점 많아요. 한국의 실정에 맞게 나이 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오프라 윈프리처럼 꼭 똑같이 해야 한다는 건 아녜요. 코미디 연기하면서 시사 프로그램이나 책 프로그램 할 수 있죠. 양립가능하다고 봐요.

 


[공]  앞으로 정치 코미디도 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한국의 여성 정치인이 많지 않은데, 혹시 여성 정치인을 소재로 재밌는 개그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  코미디언들이 정치 풍자를 한다고 하면, 정치인들 흉내만 내고 말아요. 그건 진정한 정치 코미디가 아니죠.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려면 정치 돌아가는 것을 다 알아야 해요. 알면서 풍자를 하는 것과 모르면서 하는 건 엄연히 달라요. 모르고서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요. 라디오도 모르면서 진행하면 사람들이 “모르면서 진행하셨죠”라고 말해요, 다 아는 거죠. 시사 프로그램을 10년 할 수 있다면, 나이가 쉰이 넘을 테니까 그 정도 깊이가 쌓이면 정치 코미디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지금 하고 싶다는 건 없어요.

[성]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여기서 김미화 씨는 다시 한 번 흥분했다.

[김]  시사프로그램을 하고 자기의 소신을 밝히면 무조건 저 사람 정치하려나봐, 하고 색안경을 끼는데 저는 정치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어요. 백이면 백, 기자들이 똑같이 물어요. 얼마나 피곤해요. 국민들도 그렇게 바라보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 외국 같은 경우는 대통령 영부인, 잘 나가는 영화배우들이 어려운 일에 나서는 걸 프라우드하게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는 좋은 일을 하는데도 구설수에 올라요. 그런 시선들 때문에 자기 맘을 닫고 차단하는 경우도 많아요.


대중연예인들이 나서면 카메라도 한 대 더 오고 시선을 모을 수 있어요. 요새는 연예인들도 소신 있게 의견을 밝혀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보탬을 주는 거잖아요. 이게 상당히 중요해요. 그런 일 하는 거 칭찬하고 박수 치고 응원해주시고 해야죠. 그랬다가 누가 정치를 나선다면, 아 저 사람 그 때 정치 안 한다고 해놓고 정치하네, 그리고 안 뽑아주면 그만이잖아요. 이 질문을 이십 수년을 들으면서 산 거 같아요. 쓰리랑 부부하면서도 NGO 활동하는 저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봤죠.

 

[성]  의혹의 눈이면서 애정의 눈이죠.
 
[김]  그럴 수도 있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데, 저는 방송이에요. 성취감 있고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좋아해 줘요. 할머니랑 아이들도 좋아하고 장애인 단체에 가도 좋아하고. 내가 이런 행복을 그렇게 쉽사리 놓을 것 같아요?

[공]  나중에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이라기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서 특정 정당에 대한 입장을 가질 수 없어요. 지금도 여기저기서 많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입장이 갈라지는 것은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진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거든요.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면) 내가 어디 얼굴을 내비쳤을 때는 정당하다고 보일 수 없어요.
 
 
 

[성]  파병반대 시위를 두고 옳은 일을 한다고 정당하게 말하지만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거든요. 정의롭고 옳은 일에 김미화 씨가 와서 목소리를 내주면 좋지 않나요.

[김]  파병반대도 어느 당에서 어느 입장을 가지는지 모르고 시작했어요. 유니세프에서 일하면서 케냐, 에티오피아에 가서 아이들 죽어가는 걸 보면 가슴 아프지 않을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어요.

우리 군인이 가서 총을 겨누지 않아도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나가면서 유전자가 오염될 수도 있는데 폭격의 피해를 미국이 공개하지 않잖아요. 목숨을 안 잃어도 갔다 와서 우리 젊은이들이 힘들 수도 있는데, 현재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간과해요. 그러니까 보내지 말아야죠.
뉴스 앵커가 나보고 파병 반대한다니까, 평화 전도사로 이라크에 가실 용의는 없으시나요, 라고 묻더군요. 제가, “싫어요, 제가 왜 가요”라고 했어요.

전쟁을 반대하면 ‘인간 방패’라도 하지 왜 안 하냐, 그러는데 개인적으로 전쟁이 싫어서 전쟁을 반대하는 것 뿐이예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아픔은 내가 눈으로 봐서 더욱,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앞장 서는 거예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르게 보면 속이 점점 좁아지는 걸 느껴요. 제 답답함이 전달이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 (시계를 보며) 한 10분만 더 할게요.

김미화 씨와 약속한 인터뷰 시간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때까지 눈물젖은 그녀의 미소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질문은 다른 게 나왔다. 때는 5월, 코미디언 간의 폭행 사건과 ‘노예 계약’ 사건으로 코미디계가 폭탄을 맞은 시점이었다.

[영]  코미디계에 우울한 소식이 두 개나 있었는데, 보시면서 어떠셨어요.

[김]  마음이 아프죠, 후배들이 연루돼서. 저는 개인적으로 코미디에는 매니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코미디에서는 방송에서 키워주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하는 거죠, 매니저가 방송사에 넣어줬다고 해도 3개월 인기 반짝이다가 아이디어가 없으면 그만이에요. 후배들한테 젊으니까 돈을 좇지 말고 성취감을 좇아라, 이런 이야기 하고 싶어요. 때리고 이런 건 안 돼. 그건 뭐로도 변명이 안 돼.

[영]  코미디계 전통이라고 말했는데요.

[김]  그럼 나한테도 맞은 애들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22년째인데, 없어요. 개인적으로 악감정이 있어서 지들끼리 치고 받을 수는 있지만, 관행은 아니에요. 완력다툼으로 그럴 수는 있지만, 선후배와 조화가 이뤄지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대학 나온 애들이 선배 커피나 타 주고… 코미디계 저질이다, 그런 말이 나돌았어요. PD들이 코미디 프로는 연출 안 하려고 하고.
코미디계는 왜 이럴까, 선배로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신인들을 배출하고 선배가 인기 없으면 후배들 인기로 기중기 역할을 해서 선배들도 끌어올려주고, 서로 상승세를 탈 수 있도록 말예요.


KBS에서도 ‘개그 콘서트’를 안 만들겠다는 걸 제가 우겨서 만들었어요. 그러다 개그 콘서트가 처음에 너무 확 떠버린 거죠. 신인이라 돈도 안 들고 연극식 무대로 하니까 세트도 안 들고 조명만 때려서 하니까요. 방송사 입장에서는 상업적으로 돈도 남으면서 편하네,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선배들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이것만 살려놓는 상황이 연출된 거죠. 선배들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에요, 코미디언실 가도 선배가 없어요. 개그 콘서트 1~2년 한 애가 겨우 선배에요, 관행이라면 그 안에서의 관행일 뿐이죠.

(코미디계가) 규율이 엄하기는 해요. 우리는 일주일에 프로그램 세 개를 하는데 가족처럼 붙어 지내요. 근데, 엄마 아빠 앞에서 술 마시고 담배 필 수는 없으니까. 다른 연예인들은 6개월 일하고 헤어지지만 코미디언들은 가족 개념으로 일해요. (코미디계 관행이라는 말은) 후배들이 인터뷰를 잘못 한 거예요.

 

[공]  후배들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는지.

[김]  좋은 누나예요. 후배들 잘 되는 거 보면 굉장히 흐뭇하고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응원하는 사람 중 하나죠. 후배들 위해서 밑거름이 돼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돈 꿔달라고 하면 안 꿔주는 거 외에는 해 달라는 거 다 해줘요. 밥 사달라고 하면 사주고, 술 사달라고 하면 사 줘요.(웃음)

[성]  신인 개그맨을 뽑는 대모의 역할을 하고 계신데요.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김]  코미디계가 아무 탈 없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1년에 20명씩 방송 3사에서 60명을 선발해요. 그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저는 개그콘서트가 고정 코너로 가면서 아이들이 해이해졌다고 생각해요. 봉숭아 학당처럼 매번 같은 틀로 가면 해이해질 수가 있어요. 아이들에게 아이디어 가져오라고 해요. 책?연극?영화?인터넷 뒤져서 아이들이 보는 작업을 많이 하게 (아이디어를) 짤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어떤 프로를 해도 기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KBS에 오래 있으면서 기획을 짜 보니까 뒤에 SBS 넘어가서 프로그램 짜면서도 기획하는데 떨리지 않아요. 밑작업이 안 되면 못 하는 거예요. 그런 뒷받침을 해주고 싶어요.
후배한테 예의 바라라, 해 봤자 말 들어요? 애들한테도 “선배 말고 누나라 그래”라고 해요. 격의 없이 지내야죠. 막말로 걔네들이 날 받아줘야죠. 또 반복인데, 김미화 선배랑 일할 때 껄끄러워서 안 한다, 하면 주인공이 걔네들인데 어쩌겠어요. “고맙다, 후배야” 하고 가서 할 수 있도록 해야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거죠. 나 아니면 안 된다가 없고 주어진 것에 노력한다. 말 잘했죠? 뭔가 폼 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거야.(웃음)

 

벌써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애가 타다 못해 초조해졌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영]  실은 제가 인터뷰를 하자고 막 졸랐거든요. MBC 사과나무에서 호주제 폐지 얘기 하시는 거 보면서 엄청 울었거든요. 그래서 만나 봐야 돼, 하면서 인터뷰기획서를 써냈는데 그 사이에 다른 언론들과 다 인터뷰 하셨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질문지 만들어 왔는데, 하나도 못 여쭤보고 끝나게 돼서 하나만 여쭤볼게요. 호주제 폐지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자기 가족사를 털어놓는 것은 어렵거든요. 왜 그러셨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어요?

[김]  그러게. 내가 여성단체연합 홍보대사라, 호주제 폐지 얘기하다가 저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어려움에 있는 분들 용기 잃지 마세요,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근데, “김미화, 나도 박미화였다” 이렇게 타이틀로 뽑혀서 언론에 나온 거예요.


기사 나가고 우리 가족들이 곤란해 했어요. 엄마와 동생과 의절할 뻔하기도 하구요. 동생은 이미 결혼했고 시댁에서 굳이 이 일을 알 필요 없고 우리 엄마도 재혼하셨는데, 동네 목욕탕이나 미장원 가서 손가락질 받은 거죠.

어머니가 “너한테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왜 우리가 당해야하냐”고 물으시기도 했어요. 동생하고도 이제 화해하고 괜찮아졌는데, 가족들은 지가 왜 굳이 나서서 해야 하나, 생각하죠. 제가 가족들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하다 보면 미쳐갖고.(웃음) 기왕에 말 꺼낸 거, 내 가족이 조금 희생해서 많은 분이 용기를 얻는다면 뭐 괜찮은 거죠. 지금도 후회하진 않아요.

“이놈의 지지배, 미친 놈의 지지배 창피해 죽겠어” 엄마가 그래서 문제지만.(웃음)
그럼, 제가 “이제 와서 창피하면 뭐해, 한 번만 더 얘기할게” 그러면서 또 해요.(웃음)
어떤 일이든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혼 문제도, 그거 물어보고 싶어서 써오셨네.

 

그새 김미화 씨는 내 손에 들려있던 인터뷰 질문지를 훑어보았던 것이다.

[김]  알려진 사람으로서 있어서는 안 되는 건데 대신 일이 벌어졌으니까 당당하게 받아들여라. 아이들이 선택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엄마 김미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김]  저는 우리 엄마와 똑같이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할 마음이 있는 엄마예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선택한 거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그 길을 가야 한다. 친구도 집에 데려오라고 하고, (제가) 학교에도 가고. 아이들은 편견이 없어요. 한번도 친구들이 (우리 아이들을) 놀리거나, 아이들이 슬퍼하거나 창피해하거나 안 해요.


처음에는 무섭고 겁나고 두렵고 했어요. 결정할 때까지는 엄청나게 힘든 시간이었죠, 어떻게 보면 십수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간 동안 계속 용기를 못 내고. 사회적 편견이 이러니까 아이들이 상처 받을 거야, 그러면서.

딱 일이 벌어진 다음에는 후회하지 말아야죠. 물은 엎질러졌는데. 이게 결코 잘한 일이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수그러들어가고 인생은 왜 이럴까, 좌절하고 그러면 아이들도 있고 우리 엄마도 있는데 그건 아니고. 더 당당하게.

애들한테 “엄마 너무 불쌍하지 않니?” 그러면 애들이 하나도 안 불쌍하대. “엄마는 우리 앞에서 한번도 안 울었잖아” 그래요. 속으로 “이것들아, 차 안에서 울지”라고 말해요. 애들이 사과나무도 보고 섹션 TV, 연예가 중계도 보고 해요. 애들 못 보게 하려고 미국으로 보내기도 했었는데, 거기서도 인터넷으로 찾아서 흐름을 읽는 거야. 아이들 상처받을까봐 마음이 아팠는데, 애들이 꿋꿋하게 지내니까, 의기소침할 게 아니라 기왕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당당해라, 라고 말하죠.

 

김미화 씨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인터뷰가 끝난 후 총총히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맏딸이었고 이혼녀였고 두 딸아이의 엄마였다. 코미디언,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를 넘어서 여자로서의 그녀의 얼굴을 대면했다는 것이 기뻤다. 아울러 내가 TV 화면을 통해 본 그녀가 한 시간 남짓 내 앞에 앉아 있다 방금 자리를 뜬 그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후 기
인터뷰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 전화를 드려보니 김미화 씨는 여전히 바빠 보였다. 8월 15일, 광복절 특집으로 ‘우토로 마을(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모여사는 집단부락)’ 살리기 특집 프로그램의 공동 사회자로 활약하고 한국웃음학회 회원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사는 게 팔자죠”라며 웃어 보였다. 좋은 일 하며 바쁘게 사는 게, 마이크 잡고 방송하며 인기를 누리는 게, 어쩜 그녀의 진짜 ‘팔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