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1952년 경북 출생. 영남대 법학과 졸업,일본 오사카시립대 대학원, 창원대 교수,현재 영남대 법과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내 친구 빈센트』, 『오노레 도미에』, 『법은 무죄인가』등 다수가 있다.
사실 동양이란 말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매일 뒤통수가 가려운 듯한 느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덜컥 “동양이 뭐요?” 하고 물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냅다 줄행랑을 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뜨내기로 동양이란 이야기를 하면서 산다. 물어보지도 않고 아픈 곳을 그냥 후벼내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동양은 현실 망각을 위한 향수의 묘약이다. 모든 동양이 없어져도 동양철학(길거리의 것이든 대학의 것이든)은 장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순간적이나마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묘한 정신주의- 도사, 섹스의 도사, 힘의 도사, 칼의 도사-로 장식된 한 때의 쾌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동양이란 이름의 서양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1991, 교보문고, “옮기면서”)
삶은 어떤 때는 짐처럼 느껴지고, 어떤 때는 달랑 물통 하나를 들고 산을 오르는 사람이 가지는 갈증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 같다. 짐과 갈증, 이 두 극단을 오가다 보면 문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문구가 확 가슴을 후려칠 때가 있다.
정말 시시한, 그리고 완전히 주어진 소비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내 일상이 아닌가? 화장실에 앉아서 무의미하게 신문을 읽는, 가끔 인터넷을 뒤지며 의미 없는 이미지가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가게 하는, 그리고 가끔 거짓말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하는, 그런 일상. 벽돌, 딱 벽돌하고 닮은 일상이다. 인간이 벽돌이냐, 벽돌 같은 인간은 좀 우습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짐과 갈증 사이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갈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못난이처럼 칭얼대고, 아프다고 절규하고, 때로는 처연하고 의연한 친구, “위인도 천재도 거장도 대가도 사표도 스승도 아닌”, “지독하게 못났고 어설펐으며 서글펐(박홍규, <<내친구 빈센트>>, 1999, 소나무) ”던, 그러나 벽돌이 될 수는 없었던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
6월의 무더운 날,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한 박홍규 교수를 찾아 영남대학교로 향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데 자전거가 없는 우리 때문에 자전거 보다 더 느리고 아마 비슷하게 행복할 도보로 선생의 댁으로 향했다. 그는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적당히 어질러 놓은 책, 마늘 몇 접, 중국에서 왔다는 순한 누렁이, 그리고 투박한 통에 든 매실, 이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이렇게 정리하면서 아쉬운 마음이 있다. 나는 아주 작은 것, 꼭 물어보고 싶은 것에 너무 매달려 있었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쏟아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가끔은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어지러운 것들은 시간이 고요히 가라앉혀 주니까. 그날 짧은 기억에 의하면 그는 지식을 즐기는 사람이다. 본인이 동의할지 모르지만, 그의 지식 즐기기는 이미 완숙한 경지에 있었고, 생활에서는 지식의 가벼움을 반추하고 있었다. 박학다변과 질실소박의 조화롭지 않은 조화랄까.
공원국(이하 “국”)> 2년 전 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원문으로 읽다가 선생님이 번역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책 후기를 보면서 한 번 뵈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은 공부하는 사람들, 학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고요. 새벽형 인간 이런 거 말고요. 저 또한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이야기를 못 나누고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도 좀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법과 교양은 많은 충돌이 있다고 보통 사람들은 말하지 않습니까. 법학과 사회의 접합점을 어떻게 만들어 오셨는지?
박홍규(이하 “박”)> 야,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뭐 먹고 살려고 법학을 했지요. 법학이 아니라 밥학이니까. 법을 공부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음.
공숙영(이하 “공”)> 그림하고 싶으셨는데 돈이 없어서 미대에 못 가셨다면서요.
박> 예.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미학과 갈 생각도 했었고. 그게 다 여의치 않아서……
제가 고등하고 1학년 때 데모를 경험했는데, 3선 개헌 반대 데모.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데모 모의를 하고 프래카드를 만들고 할 수 있는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림 그리는 친구들하고 학교 주변에 조그마한 다락방을 빌려서, 아뜰리에 같은 곳인데, 아주 싼 곳이었는데, 그림도 그리고 온갖 불량스러운 짓을 다했죠. 거기가 데모를 하는 아지트가 된 거죠.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들이 삼선개헌 철폐하라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쓰겠어요. 그래서 결국 그림 그리는 애들이 결국 거기서 썼어요. 제가 나온 고등학교가 경북고등학교인데 아주 나쁜, …… . 노태우가 나온 곳인데 아주 관료주의적이었어요.
그 당시에 선언문을 쓴다거나 토론한다거나 그런 분위기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 거기서 그런 걸 제가 맡게 되었어요. 사람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별 일들이 쏟아지잖아요. 고등학교 때 그림도 그리고 학교 공부를 별로 못했지요.
미대를 갈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아서, 그래 법대에 가자. 법이 워낙 개판이니까 좀 고쳐보자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더구나 제가 재수를 했는데, 그 해 겨울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 생겼고, 그건 정말 충격이었고. 그래서 노동법을 공부해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에 저희 아버지가 60년대에 교원 노조를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노동법을 하게 되었는데, 별 희망도 없고 할 만한 것도 못되었는데, 노동법을 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대학 시절에도 계속 불량하게 놀다 보니, 뭐 다른 건 할 것도 없고 노동법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원을 갔지요. 그러다 보니 이럭저럭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사실 대학 시절에도 그렇고 노동법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법 공부가 재미도 없고, 노동법을 공부해서 노동문제 해결이나 이런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학문적으로 대성할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안 했어요. 대학이나 지금이나 불량스럽게 살았으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노련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뭔가 불량스럽게 삶을 가꾸어 가려는 사람들에게 지난 일은 대체로 쑥스러운 것이 아닌가. 지난 일을 잘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지.
공> 모범 법학도들은 선생님처럼 책을 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박> 제가 처음 책을 낸 게 20년 전인 1985년인데 전공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서 ILO에 관한 책을 번역했어요. 너무 소개된 것이 없어서. 그 다음에 국제 인권법, 국제 노동법. 이런 걸 소개함으로써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지고 볶고 하는 것보다 국제적으로 한 번 봐 보자 하는 생각에서.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을 땐데. 그게 전공으로서 한 전부라고 할 수도 있지요.
제 기억에 80년대라는 것은, 창원에 있었는데, 대단히 저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노동법을 안다는 의미에서 노동자들에게 조금씩 이야기해준다는 정도. 법이라는 것이 공부할수록 대단히 실망스럽고, 법 자체보다 우리나라의 법을 하는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대단히 절망적이었고. 최근에 와서 사법개혁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사법 개혁에 대해 논의가 되고 있는데. 저 나름대로 사법의 민주화 등을 위해 10년쯤 전에 작업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노동법에 대해 쓰기도 하고. (그러나) 그건 의무적으로 한 거고.
그것 가지고는 심심한 게 별로 안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사실은 책을 읽고 쓰고 하는 가운데서, 음 80년대 후반에 제가 30대 후반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 이반 일리히(Ivan Illich)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이드, 푸코,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지적인 그림이라면 한편에 엄청난 보수가 있고, 한편에 진보가 있었지요. 민중이랄까, 문학의 <<창작과 비평>>, 미술의 <<현실과 발언>> 정도.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사회주의, 맑시즘이라는 것과 조금 거리가 있더라고요. 항상 그 쪽 사람들 주변에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거기에 들어가기 어렵더라고요. 아마 제가 기질적으로 불량성이 있어서, 우량성 같으면 뭐에 빠지기도 할 텐데, 같이 잘 못하고.
(그 때) 이반 일리히를 소개할까 생각을 했어요. 그 때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이런 류의.제가 보기에 80년대 후반이라는 게 이미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던 시기였는데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성이랄까 이런 것이 부족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반 일리히나, 사이드나 이런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당시에 사회주의 하는 사람들이나 보수주의자들, 이런 사람들 모두 대단한 욕망의 세력이라고 느껴졌어요.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단히 소외되었던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서울이라는 건 김포나 인천공항 정도. 서울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인적인 교류나 학문적인 교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민주적인 법학 단체랄까. 민주법학연구회라는 곳이 만들어졌어요. 당시에 거의 모두 서울법대 사람들이었는데. 저하고 같이 입학했거나 대부분 후배들인데. 그 사람들하고 같이 했지요. 법학이라는 것을 통한 진보운동을 하는 단체로,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도 조영래 변호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학문으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봅니다.
사실 ‘밥학’이 아니라 법학을 한 것은 저 같은 경우는 90년대 초반이죠. 물론 현대법 비판이라는 것이 저한테는 제가 느끼는 문제를 다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었고 계속 80년대에 이반, 사이드, 푸코, 이런 사람들에 매달렸죠. 일리히가 저게 준 것은 제도비판이라는 측면이었지요. 의료다, 학교다, 사법제도다, 학문자체다 등에 대한 비판이었지요. 특히 교통시스템, 그런 것에 대한.
예를 들어 제가 김민기 세댄데, 김민기가 70년대 말엽에 <공장의 불빛>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창원공단에 그런 걸 가지고 노동야학을 한다, 뭐 (그런 일을 했습니다). 창원 시절 10년 동안은 글을 쓰는 것도 번역이었고, 활동하는 것도 낮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숨어서 하기 쉬웠던 것, 갓 형성된 창원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만드는 법이나 노동법같은 걸 읽어주고 하는 정도, 노동야학, 노동계몽운동이랄까 하는 걸 했죠.
제가 대학 다니던 그 시절에도 데모에 빨려 들지 못하고, 친구들하고 대구 주변의 공단이나 이런데 돌아다니면서 성당 등을 빌려서 노동법을 들려주고, 소설도 들려주고, 음악도 듣고 그랬죠. 그게 사실은 저한데 훨씬 좋았습니다.
공장의 불빛에도 이런 게 나와요. 노동자들도 자가용을 가진 시대가 와야 된다. 제가 유일하게 유감을 가지는 점인데. 그런데 나는 이건 아니다. 그것만은 불만이었어요. 얼마전에 한겨레21에서 저한테 자전거에 대해 써 달라고 해서, 나는 김민기에게 유감이 있다. 왜 자가용 시대를 예찬했던가, 왜 자전거를 타는 노동자를 이야기하지 못했던가 하고요. 그랬더니 그 다음날 전화가 와서 너무 무겁다고 그 대목을 지워달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저희 부모가 종교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불교적이고, 아버지는 천주교에서 뭐 이것 저것 방황을 했고. 어머니가 제가 태어날 때 중이 되는 꿈을 꾸었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다 이른바 일류학교들이었는데, 참 계급적인 학교였어요. 참 별난 교복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번도 별난 교복을 정규로 입어본 적이 없어요. 정규 교복의 칼라가 파란데, 그걸 지정 양복점에서 만들어야 인정이 되는 거예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항상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파란물을 들여서 만들어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이건 금지였어요. 항상 이게 불만이었어요. 아마 제 세대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웰빙 하지만 보리밥을 절대로 안 먹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절대로 안 먹는 게 있어요. 오그락지라고, 무우를 아주 짜게 말려서 만든 건데. 제 기억에 초등학교 다니던 때부터 한 10여년동안 나는 그것밖에 먹지 못한 것 같아요.
아이들의 삶 속에 빈부 갈등이 분명히 있었고, 저한테는 그것이 고통스러웠고. 이것이 불량화의 첩경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이른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라는 게 어린 마음에도 소유욕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든지, 변혁이라든지 이런 게 와 닿지 않더라고요. 저렇게 욕심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공감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 때 흥미를 준 것이 이반 일리히였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걸 쓰기가 힘들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었고, 1987년 이후에 대단히 바빴고. 대학이나 사회나 진보의 흐름이 또 달랐고. 그 때는 사실 꾼들의 시대였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제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든 자본주의주의자든 나서기 좋아하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에요. 사회주의자들이 사실은 대부분 목소리 큰 사람들이에요.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바뀔 수 있지요.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는 역시 개인의 자유나 자치나 이런 것들, 또 탐욕이나 소유욕이 없는 자연스러운 삶과 연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법학연구회를 할 때도 사실 대부분의 논의들이 맑시즘 법학으로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맑시스트 법학자가 될 수 없는, 굳이 말하자면 아나키즘 법학자 정도, 제가 하는 것은 사법운용과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정도의 그런 이야기를 해 왔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소개했고, 그 책이 지금도 얼마나 읽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저로서는 대단히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서 소개했습니다.
국> 지적인 흐름이 다른 사회로 전해지면서 많은 시간적인 편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뒤늦게 안 것이지만 소련이 몰락하기 전에 이미 소비에트의 해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이드는 70년대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욕망을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고. 스웨덴에 관한 논의도 그렇고요. 저도 그런 게 고민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이냐? 인터넷에서 보는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고 받아들이고, 대개 99%는 영어로 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논의라는 것이 사실 이렇게 흘러가고 있고요. 지식이라는 것이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받아들이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식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금 과거의 흐름과 미래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어떻게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박> 제가 책을 쓰는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래도 이런 사람은 소개되어야 되는데 소개가 안 될 때입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누가 옳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이드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람들. 저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이드주의자, 모리스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질색입니다. 제가 영문과 선생님들한테 부탁을 했어요. 오리엔탈리즘은 제발 번역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은 대신 원서를 읽죠. 저는 원서를 읽는데 흥미도 없고. 저는 사이드를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소개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연구하는 분야는 노동법 정도로 충분하고.
또 하나 책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게 아닌데’ 이렇게 소개되고 있는 경우.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는는 제국주의자다] 같은 경우, 세익스피어가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면이 있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제가 그가 오로지 제국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로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게 제 생각이고. 세익스피어를 제국주의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 않는가? 이게 제 생각이고.
공> 이윤기 선생 같은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내에 그리스 로마 신화 붐이 일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죠. 최근에 따님과 함께 번역해서 셰익스피어 책도 새로 내고 계시고요.
박> 이윤기라는 사람이 어떤 면에서는 좋아요. 저와 맞는 점도 있고. 반항적이고. 그런데 그 양반이 그리스 로마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싫어요. 트로이 전쟁은 아시아 오리엔탈리즘 침략의 가장 고대적인 전형적인 예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무수히 나오죠.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변용되어 왔지요. 그리스 로마 이야기가 사실은 제국주의적이에요. 트로이 전쟁은 아시아 침략의 이야기고, 제국주의 자체예요. 이윤기 선생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그건 이 선생 이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윤기 선생이 그런 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 섭섭해요.
사실 리영희 선생도 그래요. 그분의 세계인식, 서구를 보는 인식은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이에요. 그 세대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봐요. 우리 세대도 마찬가집니다만. 우리는 일본이 제국주의라는 것에는 동감을 해요. 일부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하는 것에도 일부는 동감해요. 그런데 프랑스나 영국이 그런 것은 거의 동감하지 않아요. 세익스피어가 제국주의자라는 데는 동감을 하지 않아요. 예컨대 리영희 선생이 피라미드 같은 것을 민중적이라고 이야기해요.
공> 인민이 쌓았다는 말이지요.
박> 네. 물론 리영희 선생이 처음 이야기 한 것은 아니고 누가 한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사회주의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서구성, 근대성, 제국주의성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는데. 물론 긍정적인 역사적인 의미는 있는 반면 부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그런 걸 다양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요컨대 어떻게 사느냐? 좀 욕심 없이 편하고 간단하게 살자. 그리고 쓸데없는 권위 좀 인정하지 말자.
가령 ‘동양문화’, ‘한국문화’ 이런 걸 내세우는 것도 권위라고 생각해요.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갖고 노자 이야기를, 단군이야기를 해서 어떻게 해 보자, 그런 데는 저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게 자급자족하는 시스템 정도. 노자를 읽어서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것이지, 불교도 무소유니 뭐니 좋다, 간디도 좋고 읽고 즐기고. 이런 책도 저런 책도 읽고, 간디처럼, 소로우처럼, 장자처럼 살아야지 이런 정도로 만족하지, 그걸 가지고 서양 근대성의 대안 따위를 이야기하면 저는 그만 불량스러워집니다. 제발 고마해 고마해, 너거 끼리 많이 해! 저는 관심 없어요.
박홍규의 탈권위에 대한 자기절제는 철저하다. 그것이 수많은 고전 독해의 영향을 받은 것은 또 역설적이다. 그는 항상 “복잡하게 말하지 않고 그냥 말해” 라고 주문한다. 미덕이다. 언어는 얼치기 학문에 의해 얼마나 오염되었는가? 남들이 이미 아는 시시한 개념 딱지를 두고 남들이 모르게 조물딱거리는 것을 학문으로 아는 졸렬함으로 인해 우리 말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내 식으로 말하자면, 박홍규는 어떤 면에서 무척 ‘생산적인 인간’이다.
박> 저는 대충 쓸 책을 다 정해 놓았습니다. 제가 쓰고 싶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제 딸은 (제가 사람들을) 상습적으로 아나키즘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해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오스카 와일드가 있어요. 그의 댄디즘을 질색했지만 끊임없이 읽어왔고,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누구도 저한테 걸리면 아나키스트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하. 오스카 와일드가 반바지에 치장을 하는 거 지금은 이해가 되요. 수용이 되요. 치장, 반바지 그게 생활이고, 자기 철학이었던 거예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 평전을 쓸 때는요. 저는 위인전으로 평전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내 친구 비슷하게 생각되어야 하고.
공장 야학이나 강연을 할 때 제가 공장의 불빛 들려주면서 월광도 들려주곤 했어요. 공장의 불빛도 들어야 되지만 월광도 들어 봐라. 노동법 들려주면서 일부러 고흐의 그림을 들고 가서. 이걸 봐라. 다 당신들 아니냐. 노동자 농민들 아니냐. 70년대부터 그랬어요.지금은 이걸 알아서 강의나가면 초청자들이 제발 그것 좀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는데, 저는 지금도 강연을 하면 끝에 꼭 사족을 붙입니다.
“진짜 우리 돈 몇 푼 더 받자고 노동운동 하는 것 아니지 않느냐. 여러분들이 베토벤도 듣고, 반 고흐도 복고, 로맹 롤랑도 읽고 그런 노동자 부모가 되자.” 그런데 요새는 다 싫어하네요.
저는 노동법 강의 만큼이나 빈센트 반고흐를 노동자들에게 소개하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쓸려고 합니다.
저는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 인정도 못 받는 일이지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도 꼬박 1년이 걸렸는데 그만큼 (번역이) 어렵고. 그 동안에 제 이름으로 책을 썼으면 서너 권은 썼을 거예요. 사이드나, 반 고흐의 편지 이런 거 번역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반 일리히나, 사이드의 책, 반 고흐의 편지 등을 앞으로 번역을 할 생각입니다.
일단 제가 (대상을) 선정하면, 예컨대 반 고흐라면. 빈센트 반고흐에 대한 최근까지의 모든 문헌, 영어든 일어든 고전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글들은 모두 모읍니다. 다 보려고 합니다. 보되 당연히 취사선택을 하지요. 대부분 쓰레기 입니다.
가령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 끊임없이 자료를 모아왔는데, 국내에서 나온 잡지들에 실린 특히 영문학자들이 쓴 글은 대부분 별 쓸모가 없습니다. 예컨대 탐미주의자로서만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런 건 일단 제껴 두고요. 가령 보르헤스가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와일드를 재해석한 것 이런 건 눈에 확 뜨이죠.
박홍규의 글들은 최소한의 유형이 있다. 그의 책 앞에는 항상 선행 연구자들의 목록이 들어 있다. 물론 그 연구자들에 대한 평이 모두 들어 있다. 이전의 필자들은 아마 이런 평들을 보면 아주 재미있어 할 것이다. 사실 그런 작업은 번역하고 비슷하다. 많은 시간을 들이되, 별로 폼을 나지 않는.
공> 공부도 끊임없이 무정부적으로 하시네요. 기존에 이미 인정을 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박> 맞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옳다든가 그런 생각을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책을 소비품으로 봅니다. 남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절대진리라든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대하지는 앓지요. 가령 빈센트 반 고흐를 이야기하자만 저는 이 이야기가 어떤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저작도 그렇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지적인 다양성 보다도,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지식들의 실체를 밝히는데 관심이 있다. 젊은이들의 강박관념일까? 박홍규는 강박관념이 느껴지는 질문을 이렇게 통과한다. 지식이 폭력의 칼날이 아니라 사실 “소모품”이 된다면 얼마나 유쾌한 일일까. 모르긴 해도 아나키스트 사회의 최정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박> 그래서 법대 수업이 정말 괴로워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하면 학생들이 절망을 해요. 답을 주세요. 그래서 나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없다. 답이 없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니가 생각을 해야 된다. 시험을 치지 않고 레포트로 평가하는데, 한 개의 기준만 줍니다. 니 생각을 써라. 30년 동안 강의를 했는데 아직 적응이 안되요. 법과대학에서 그렇게 수업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고, 중고등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지요.
국> 자꾸 재미없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대체로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일관성에 집착하는데요.
박> 저도 일관성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사람의 이야기나, 삶에 있어서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살았어, 왜 그렇게 일관되지 않게 살았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요? 제가 페레라는 교육자의 평전을 썼어요,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사람들이 그렇게 묻지요. 정말 때리지 않느냐. 무슨 소리 나는 때렸지. 하하.
국> 저는 올 상반기를 식민지 근대화와 함께 보냈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면 저자들에게 직접 문의를 하기도 했는데요. 체계를 주장하는 하는 사람들의 핵심명제는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는 것입니다. 그걸 방지하는 것이 또 체계가 되고요. 그런데 나쁜 의도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체계가 자본주의라는 것인데요.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도 그런 공격을 받습니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그래서 반문하길 역사적으로 가장 작고 효율적인 체계가 무엇이냐, 그것이 자본주의 아니냐고 합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이미 틀이 서 있기 때문에 그 틀 속에서 다시 짚어보고, 다시 그 틀 속에서 해석을 하고 넘어가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의 글을 보면 언어 상으로는 무척 안정된 느낌이 들거든요. 가령, 선생님의 삼자주의(자연, 자유, 자치)는 삼위일체지요. 얼마나 안정적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언어를 벗어나서 현실로 왔을 때 어떻게 구현될 수 있겠습니까. 제국주의는 완전히 지식의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제국주의가 강제하는 체계의 밖에서 개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기질적인 아나키즘도 있구요.
그러나 책을 벗어났을 때, 체계가 다가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 구체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박> 불량스럽게 살 수 밖에 없지요. 파탄되게 살 수 밖에 없지요. 하하.
공> 원국 식 표현으로는 해탈이네요.
박> 해탈, 맞아. 해탈이 불량스러운 거 아니예요.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지 뭐, 다른 거 있나.
국> 선생님의 책을 보면 아카데미즘의 정형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고 봅니다. 내용은 분방함을 추구하지만 기본, 서지사항이나, 자료들을 보면요.
박> 그것, 음 물론 기본이지요. 개판이 되면 안되니까. 저는 사실 기본이 안된 것은 정말 싫어해요. 얼마 전에 일년 동안 무슨 잡지에 인터뷰를 했는데, 영화나 연극이나 이런 거를 판단할 때 무엇을 중요시하나 이렇게 물어봐서 끝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영화나 음악이나 뭐나 도덕성이나, 메시지 이런 거 필요 없다. 그런데 작품성이 없는 것 이거는 안 된다. 그거 오스카 와일드가 한 이야기예요. 그거는 필요하죠.
공> 형식을 중요시하시는군요.
박> 물론이죠.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도 그거예요. 법도 지키지 않고 개판으로 노는 것으로 알고 있는대,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일상적인 거 담배꽁초, 침, 아주 일상적인 기본이 안 되는 것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신삽니다.
공>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아나키스트라는 것이 자기결정력이 뛰어난, 고도로 계몽된 사람인 것 같거든요. 현대는 욕망의 사회이고, 고도로 자기결정력을 가지기도 어렵고, 학교 제도교육에 익숙한 애들도 자율적인 것을 어려워하는데요. 해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끊임없이 노력이 필요한데,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구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불량스럽게 산다는 것은 하나의 수사이고, 아나키적인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지켜나갈지?
박>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 “아나키스트야?, “아나키스트가 어떻게 살아?” 제일 대답하기 어렵고 뻘쭘한 질문이죠 하하. 다시 말하지만 자기결정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성적이고 철저하고, 이런 때 아나키즘으로서의 의미가 있지요. 예를 들면 가장 괜찮은 아나키스트 중의 한 사람이 예수, 부처?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를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고, 부처도 마찬가지죠.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이 참 웃기는 이야기죠. 해탈 딱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삶? 저 같은 경우에 뭘 말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참 반사회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2-30년 전부터 동창회 같은 데는 거의 안가요. 관혼상제도 거의 안가요. 꼭 갈 데는 집사람이 가고. 자전거 타고 학교 다니고, 학생들 가르치고, 글 쓰고 이런 생활이 거의 전붑니다.
저는 학교 회식에 가지도 않습니다. 학생들과는 놀고 술 먹고 하는데, 교수들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집에 와서 먹지요. 그냥 가르치기만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간단하게 살려고 합니다. 서울에 가도 마찬가집니다. 일부러 모임을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딸애가 서울에 학교를 다녔는데 한 7년째 서울에 사는데 최근에 딸 집에 한 번 가 봤어요. 지가 만나고 싶어하면 만나고. 애들한테도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제가 월급, 원고료, 수입이 얼만지 저는 모릅니다. 비겁하지만 집사람한테 일임을 해놨고.
공> 아니키스트로 선생님이 사시기 위해 사모님의 희생이 필요했군요.
박> 하하. 제 아내도 아나키스트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최소한의 분업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어쨌든 될 수 있으면 단순하게, 제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꼭 달성되어야 할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렇게 꿈꿀 수 있는 여유, 그런 게 필요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답을 줄 수 없고, 그냥 이런 저런 다른 생각들이, 다른 꿈들, 다른 발걸음들이 조금씩 생길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또 이런 저런 걸 보고 또다른 자기의 발걸음을 만들어 볼 필요도 있고 자기의 꿈을 꿀 필요도 있다, 언젠가는. 그런 과정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고, 결정적인 변혁을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그런 생각, 절대적인 진리로서 변혁을 시킨다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국> 승단이 만들어지고, 승단이 커지고, 반목하고, 싸울 것을 예상하면서도 생전에 승단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모순적인 것 같습니다. 초기 경전에서 사람이 없는 들판에서 혼자서 생활하라고 하고는 승단을 만들거든요. 승단은 참으로 원형적인 것인데요. 아나키즘은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는데요, 가장 뛰어난 수행자들의 모임인 승단도 갈등하는데. 작은 공동체의 유지 같은 걸 분명히 생각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박> 물론이죠. 자유학교도 다니면서 살펴봤고, 저 나름대로 관찰도 해 봤습니다. 지금 저로서는 달성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언젠가 발작처럼 오는 것 같애요. 사람이 살다 보면은 혼자 사는 것이 좋다가도 갑자기 외로워져서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저는 불교의 경우 승단화 되는 것이, (그렇게) 이행되는 것은 싫어요.
제가 좋아하는 경전은 초기 수타니파타 같은 것들인데, 화엄경 같은 건 좋아하지 않고. (그런데) 승단화되고, 조직화된다고 하더라도, 승단이던, 수도원이든, 그 정도의 엄격한 자기 수행을 할 수 있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음…… .
또 그런 엄격한 규율이 주어진다면, 그게 뭐 아나키즘으로서의 공동체성을 갖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고. 모르겠습니다. 간디나 톨스토이도 대부분 실패했고. 아쉬람 같은 곳을 가봐도 ‘내가 이런 곳에 살겠나, 이런 걸 하겠나’ 이런 생각도 들고. 결국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절체절명의 명제이기 때문에, 이런 걸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어떻게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절대적인 자기결정의 원리에 따른 자유나 자치가 구현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거 연구하는데 별 흥미가 없어요. 수많은 공동체들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실패했는지. 원시공동체에서 시작해서, 종교 공동체 또는 역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동체들의 성패를 연구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저 자신의 욕구로서 그런 것들이 부닥치는 경우는 분명히 있는데 죽기 전에 한 번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점심 때가 되자 우리는 박홍규 선생님 사모님께서 정성스레 준비하신 식사를 들었다. 한 사람의 아나키스트가 있기 위해 희생이 필요했다고 우리가 농담 조로 말했던 그 분. 밭에서 일하다 와서 얼굴이 발그레하신 품이 박학다식한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여유로워 보인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다고 하더니, 음.
공> 책에서 신채호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셨거든요. 신채호의 사상은 단순하다, 증오의 사상이라고.
박> 음. 서양 아나키스트들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중국으로 건너와서 중국아나키즘이 성립하는 과정에 많은 왜곡이 발생합니다. 결국 그들이 장개석의 앞잡이로 바뀌지요. 신채호가 접한 이석증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아나키즘이 중국화한 아나키즘의 한 변종이에요. 이런 것이 독특한 자신의 역사관과 결합을 해가지고, 음. 제가 특히 싫어하는 것이 우익적 아나키즘인데요.
신채호의 아나키즘이라는 게, 조선혁명선언까지 이어지는 논의가, 일제시대 아나키즘이 기본적으로 그런 성격이 있지만, 개인주의 대해서는 무척 소홀해요. 자치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중국의 아나키즘도 우익이나 테러리즘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요. 신채호도 그런 측면이 있지요. 러시아 아나키즘도 테러리즘으로 변형되는데, 중국아나키즘도 테러, 우익으로 변하죠.
공> 기본적으로 반제국주의지요.
박> 그렇죠. 저는 신채호를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보는 일반적인 학계 등의 의견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신채호 아나키즘 자체를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민족차원의 자기결정, 개인차원의 자기결정, 자유나 자치, 신채호의 글을 보면 그런 것들이 많이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 면에서는 한용운이 낫습니다. 개인의 자유, 독립, 해탈. 한용운은 해탈이 개인의 자유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이야기가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적 자유와는 거리가 있습니다만 무척 가깝다고 봅니다. 일제시대에 민족의 독립 이전에 개인의 독립을 말한 사람은 거의 유일하다고 봅니다.
일제지식인, 소설가는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염상섭이나 이기영이나 이런 사람들을 찾아봐도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물론 일제시대에 개인의 독립을 요구할 수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의 서울에서의 생활에 대한 보고도 나오고 있잖아요. 수유연구실 같은 데서 낸 책을 보면. 이걸 보면 외양으로서는 이미 서울은 근대의 서구적인 소비 생활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이나 나혜석, 그 시대의 댄디들. 그런 소비생활 내지 수준, 그 당시의 문인들이 읽은 책들을 보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다양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왜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은 없었을까.
공> 막 나가는 사람요?
박> 가령 이상은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이 사람은.
공> 김수영은 어떻습니까? 흔히들 김수영을 개인주의자나 자유주의자로 많이 이야기하지요.
박> 그 사람이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는 좋아합니다. 그 정도 시를 쓰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돈에 대해 그렇게 짜게 굴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정말 싫더군요. 남한테 술도 안 사고.
이야기가 이상을 거쳐 김수영까지 흘러왔는데 박 선생은 짐짓 딴 소리를 한다. 밥값 이야기 많이 하는 곳은 아마 경상도가 아닐까 하는데, 가끔 밥값론은 거의 구양수의 “붕당론” 수준으로 발전한다. 여하튼 밥값은(붕당) 밥값을 내는 사람(군자)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다. 그런데 밥값을 내지 않는 사람이 밥값을 논하면 그것은 “소인이 붕당을 논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교수사회에 밥값을 안 내는 사람만 있다면 과연 누가 밥값을 냈단 말인가?” 라고 박홍규는 되묻는다. 소인이 붕당을 말하다니!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말씀이 이 인터뷰의 하일라이트다.
박> 대학 선생들의 의식이 어느 정도냐면, 한 30년간 대학교수들에 대한 이미지는 단 하납니다. “저 사람 차값 낸 적 없다. 밥값 낸 적 없다. 술값 낸 적 없다. ” 모든 교수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럼 누가? 지금 제 결론은 아, 학교 돈으로 먹었구나, 애들 공납금 가지고. 선생들 세계가 그것밖에 없어요. 진짜 유치하죠. 지금 90 넘은 사람들을 만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들의 인간관계가 그것밖에 없어요. 시인들도 마찬가진가 싶습니다만, 여하튼 선생들은 짜요. 그 사람들이 대부분, 지방에서 교수사회는 여전히 특권층입니다. 교수사회에서 지금까지 느끼는 곤혹스러움 중 하나는, 이 사람들이 대개 지역의 지배층과 모두 친인척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요. 교수들 사이도 그래요. 그래서, 대부분 특히 양반 사회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빈곤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들이 대단하게 놀았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거든요.
국> 요즘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선생들이 짜다고 말하는 것 보면 분명히 경험적인 근거가 있었을 거예요. 산업화의 좋은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교수사회도 경쟁으로 가는 것 같아요. 학생들을 위한 경쟁이건 아니건 간에. 학생들과의 대화 자체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이제 서서히 학생들과의 대화도 시도하는 것 같고.
박>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기회주의적인 변화예요.
국> 생존을 위한. 하하.
박> 허허. 저는 선생이 되기 전부터 도시락을 싸 다니니까 저보고 밥값을 안 낸다 하는 소리는 없어요. 술은 집에 불러서 마시니까 술값 안 낸다는 소리도 안 들어요. 사실 그런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얼마든지 기회주의적으로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여전히 저보다 젊은 교수들도 모든 관심은 점심값과 차값에 쏠려 있습니다.
김수영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어떤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지는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시나 에세이는 좋아하기도 합니다만. 모던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반항적이라는 의미에서.
공> 개인이 작정하고 자기를 노출하고 치열함을 보여주니까요. 자신을 폭로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자신을 떨어버리고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고양된 개인의 자치 수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박> 맞습니다. 그건 공감이 갑니다. 근데 저는 차라리 김남주가 좋습니다. 김남주의 남민전이라는 것은 사실상 대단히 아나키적인 아이디어였는데. 김남주의 대결의식, 이런 게 다른 나라의 아나키적인 시인들과 비견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수영의 경우는 스스로 말하듯이 “왜 나는 이런 시시한 음탕, 시시한 일에 화내는가”,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일상 속에 치열함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김남주가 이야기한 그런 지경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아요. 나는 김남주가 법 욕을 하는 게 좋아서.
국> 책 속에 루쉰이 임어당이 민중문학이라는 것을 영차문학이라고 비하한 것을 두고, “살아남은 것이 불멸의 인간성을 제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전하지도 않는 것이 어떻게 인간성을 묘사하지 아는가” 하고 반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나 문학이나 모든 학문에서 핵심적인 명제인 것 같습니다.
촌철살인의 표현인데요, 기록 이전에 존재하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표현인데 이것은 개인을 투사하는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박> 있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물론 있었겠지요. 어떤 삶의 부분을 소개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국> 이런 표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요.
박> 루쉰은 그런 사람입니다.
국> 논리적으로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질문하는 양식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오염되지 않은 지성이랄까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형식적으로는 또 과거에 중국내의 반항적인 지식인들의 방식, 죽림칠현들도, 굉장히 반어적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방식들과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박> 맞습니다. 루쉰이 중국 전통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또 대단히 전통적인 중국 지식인 상을 보여준다,그런 느낌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며칠 전 이육사 문학관을 가서 느꼈는데, 어떻게 보면 안동이라는 곳이 사실 양반 사회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이육사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나온단 말이죠. 일제 시대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안동, 의성, 군위 쪽에서 나와요. 그런 곳에서 기개가 있는 지사들이 나오는 것은, 그걸 어떻게, 그걸 신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루쉰도 중국의 그렇게 개탄하고 비판하는 중국문화 중에서, 물론 민중문화 등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형적인 양반, 선비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뭔지 모르겠어요.
공> 이 대목 참 대단합니다. 용서고 뭐고 없다는.
국> 뼈까지 추리는 철저함. 얼치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죠.
공> 복수랄까, 맞지 않은 것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협(俠)적인 것, 선생님 말씀처럼 루쉰의 정신이 어쩌면 매우 중국적인 것이겠네요.
국> 루쉰이 살던 그 지방이 구천과 부차가 서로 복수하던 지방이지요. 분명히 그런 영향이 많았을 겁니다.
박> 그런데 루쉰에 대한 제 책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내 같은 사람이 뭐 써 놓으면, 중국문학 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하나. 하하. 물론 수준 문제겠지만. 서양에서는 제가 아는 몇 개의 예를 보면 언론인들이나 일반 저술가 쪽에서 쓴 역사책에 대해서도 역사학자들이 정직하게 진지하게 평을 써요. 그리고 논쟁도 됩니다. 우리는 그걸 체면 손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국> 단순한 거 같습니다. 자신이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남이 비판을 하면, 화가 나거든요. 그러면 어떤 방법을 누르려고 대응을 할 겁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응전하기 전에 득실을 따지는 것 같습니다. ‘응전이 필요 없다.’ 응전을 했을 경우에 얻을 것이 없으면 논쟁이 일어나지 않지요. 대체로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 전 와중에 촘스키와 전쟁 지도자들이 대대적인 논쟁을 하잖아요. 촘스키의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촘스키의 비판에 대해 전쟁지도자들이 정교하게 대응을 합니다. 그것만 읽으면 촘스키가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촘스키가 물러나지 않겠지만 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문학이든, 축적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 어쨌든 책이라는 것이 학자들 간의 편지도 아니고, 일반독자를 위한, 국민 전체의 교양을 진작하기 위해 만드는 것인데…. 글쎄 왜 루쉰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게 그렇게 없는가? 제가 쓸 때까지도 없었어요. 촌철살인의 의미를 이 사람 만큼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오랫동안 루쉰에 대한 사랑이 있었는데… 왜 안 쓰는지. 솔직히, 왜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안 써, 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지요.
국> 혁명적인 지식인인 동시에 나름대로 소심하고 꼭 갚고 마는. 물고 놓지 않는.. 성격 안 좋은 사람이지요. 성격 안 좋은 사람들을 용인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지요. (웃음)
그의 근간 <<아나키즘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다시 동일한 질문을 한다. 꼭 한 구절 정도 나오는 하이에크를 빌미로.
국> <<아나키즘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큰 문맥과는 다른데 방법론에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나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심성적으로 착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인간은 운명적으로 착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맥락이 있는 같습니다.
인간이 최초에는 이타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근래 인구도 늘어나고, 이런 상황에서 이타적으로 살아서는 생산력이 해방되지 않는다.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이기적으로 사는 인간을 최소한으로 제어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다. 최소한의 제제가 필요하데, 그것은 제도이고. 이 사람도 만만치 않는 사람인데요. 하이에크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번 이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지요.
박> 저는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이 하이에크를 들먹거리는 것이 대단히 불쾌합니다. 프리드만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하이에크를 신자유주의의 효시 정도로 타락시키는 건데. 물론 아전인수격으로 써먹을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아나키즘, 자본주의를 전제하는 아나키즘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이에크를 계승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감옥의 기업화 문제라든가. 확신은 없지만.
하이에크에 대해서는 적어도 반드시 신자유주의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적어도 마르크스나 베버에 견줄만한 이론적인 논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운 길에 대한 모색, 이것은 기본적으로 아니키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식 자본주의 전제하의 자유주의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음.
[제국]을 쓴 네그리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네그리가 계속 실증주의 법학자 한스 켈젠 이야기를 해요. 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곳. 비트겐슈타인, 하이에크, 한스 켈젠 등. 그때는 붉은 빈이라고 했거든요. 하이에크가 그 분위기, 래디컬에 대한 반동인 면도 있어요. 켈젠도 그렇고.
네그리가 새로운 세계가 자율적인 제국으로 나가기 위한 지적인 토대로서 한스 켈젠을 말하더라고요, 세계정부니 하는. 네그리가 한스 켈젠을 해석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얼마나 챙피스러워지는지. 말했듯이 제3세계 지식인의 주변적 열등감이라든가 그런 게 다시 생겨나는데. 하이에크도 그런 면이 있어요. 제가 정확하게 읽지 못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베버- 반마르크스주의자, 켈젠- 실증주의자, 하이에크- 반공주의 경제학자, 이런 식으로 선입견이랄까 이미지가 규정되어 있는데 이게 굉장히 위험한 거죠.
공> 한스 켈젠은 나치에게 저항했지요.
박> 하이에크도 나치에 철저하게 비판적이었습니다.
국> 이론이 건너가면서 상황에 따라 변형이 되잖아요. 처음 시작할 때 조금 더 철저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 와서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을 에둘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대리전의 장을 제공하고 있으니까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사람들이 읽지 않고 이야기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르크스주의도 물을 건너면서 변하고 통독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극우파라 불리는 사람들, 뭐 키신저든 이런 사람들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이야기 된다는 느낌이 있는데요.
박> 저도 꿈인데, 마르크스에 대해 쓸 생각이 있어요. 제가 쓴다면 저는 그를 자본론의 저자로서 쓸 생각은 없어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평생 매년 연례행사처럼 자본론을 50쪽 정도 읽었다 덮는 사람입니다. 통독 못한 것은 인정해요. 아마 결국 완독 안하고 쓸 거야. 나는 마르크스의 이모저모를 써 보고 싶어요. 오히려 마르크스가 쓴 편지라든가 그런 잡다한 예기들 들 중에 훨씬 재미있는 게 많아. 하하. 이런저런 것을 쓰다가 마지막 장에 한 두줄 정도에 쓰고 싶어. 마지막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을 생각하기도 했다.”
공> 하하.
박> 예전에 저도 마르크스 공부하는 모임에 있었죠. 그런데 저는 항상 주변에 있었죠. 사실 그 선생님들이 대부분 변했어요. 386세대도 아마 많이 변했을 거예요. 사이드가 죽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뭐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포스트 페미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끊임없이 포스트, 포스트,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잖아요. “이런 포스트, 포스트의 지적인 계보의 원조격으로 인용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나는 정말 흥미가 없다. 정말 지적으로 지리멸렬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자기는 아무런 학문적인 흥미가 없다.”
사이드는 책이 나온 후에 자기 이야기가 지적인 담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해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지 모르겠는데,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은 학문을 위해 쓴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느 시점, 어느 지점의 오리엔탈리즘이 이랬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고발, 충격, 성찰들 위해서 썼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그런데 그 이후에 계속 담론으로 재생산되고, 체계화되고, 정치화되죠.
마르크스로 돌아가면, 그는 그 시대에 주류적인 생각에 대해 저항적인 사람이었고, 특히 초기 마르크스 같은 경우, 저는 그 사람의 잡다한 취향에 끌렸어요. 교양인이었죠. 동감하는 것은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 부분이예요. 그리고 그의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어요. 자본론 같은 것만 다 읽고 그것만 쓰면 얼마나 난해하고 삭막하겠어요. 하하. 마르크스를 상대화시켰으면 좋겠어요. 교양인으로.
공>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해방시키자?
국> 저는 마르크스 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하.
박> 난 개인에 관심이 있는데. 허.
성실하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아린 과거를 들추는 것은 좋은 취미는 아니다. 하지만 성실한 사람들은 과거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얼마나 오래 전인가, 마르크스를 학자로서 존중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적인 가치랄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생기는 도그마를 통렬하게 꼬집어 슘페터가 한 말, 화가 나면서도 쉽게 대꾸할 수 없는 그런 말이 생각난다. “그에게는 반대자는 단순히 틀린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p5” 물론 슘페터도 마르크스 없이는 몇 발짝 못 나갔겠지만. 역설적이다. 슘페터도 샤뮤엘슨도 대단한 교양인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안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그런 ‘우파’ 들이 등장할까?
공>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체제에 천착하는가 개인에 천착하는가는 의미심장한 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박> 아나키즘은 체계가 될 수 없으니까.
공> 앞으로도 걸출하고 특이하고 노력하고 분투했던 인간에 관해 주목하시겠군요.
박> 네, 그렇습니다.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황급히 서울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하고 유머러스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꼭 그렇게 읽어야 한다. 혹자는 “마르크스가 뭐 공산주의 혁명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표현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으로부터 시작하는 변혁, 이게 더 어렵다는 것은 아마 잘 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 일요일이면 누워서 TV를 보다가 저녁쯤에는 후회한다. 그러다 맥주 한 잔 들어가면 변혁도 이야기한다. 박홍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맨날 맥주 먹고 변혁을 이야기하는 건 또 뭐 그리 나쁘냐?”
일상에서 삶을 반추하는 것은 참말로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그걸 해 보려고 했다”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마음과 말과 행동이 조심스럽게 따라가고자 하면서,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사람이었다. 주제넘게 평가하자면,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변부의 지식인으로 태어나, 그나마 서울이라는 중심을 벗어나, 그가 스스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조금 덜 오염된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억에 의하면 그날 마지막에 갈브레이스 이야기를 몇 마디 한 것 같다. 편집증이 도져 갈브레이스를 한 번 읽으려다 이런 구절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이 완전히 비정하게 가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의 표현이었다. “사람은 얼마나 모를 수 있는가?(나는 얼마나 몰랐던가: how much one can never know?)” (John Kenneth Galbraith, The Affluent Society, 40주년 기념판 서문) 뭘 모른다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미래를 모를 수 있는가? 한 사십 년쯤 지나면 그 때는 노예를 굶기면서 탐욕스레 먹고 토하고 또 먹는 짓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느낄지. 혹시 그 때면 아나키라는 말이 사회라는 말의 동의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성을 다해 말씀해주신 박홍규 선생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박 선생이 발급하실 노동증서를 마음에 두고 나중에 품앗이를 해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