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캐나다에서 살다 왔다.
– 캐나다에는 언제 간 거야?
은혜: 17세에 갔어. 토론토. 그 당시에는 아팠어. 이민 가기 직전 2년을 학교에 안 가고 집에만 있었으니까. 간염이었는데 일어나서 걷기도 힘들었어. 아버지가 먼저 캐나다에 가신 후 엄마랑 나는 이모네에 살았는데, 엄마는 바빠서 집에 잘 안 계셨고 아파서 누워 계신 이모와 역시 아픈 나만 종일 집에 같이 있었지. 종일 라디오만 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 2년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일 거야. 그러다가 캐나다에 가서 거기 고등학교에 입학했지. 2년을 꼼짝 못 하다가 학교를 다니게 되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말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입학했지만 나중에는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여러 가지 책도 많이 읽고 음악과 미술에 심취했어.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악기도 열심히 배웠어.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하고 그랬으니까. 그 때는 안 해 본 게 없어. 원 없이 다해 봤어.
– 거기 가서는 건강은 괜찮았어?
은혜: 간염은 나았는데……갑상선에 문제가 있었어. 원래 갑상선이 안 좋았는데 검사를 받아보니 암인 거야. 그래서 수술을 받았어.
– 암?
은혜: 응, 암.
그러고 보니 은혜의 목에 절개한 자국이 남아 있다. 엷은 흉터. 미처 보지 못 했던 수술 자국.
– 지금은 괜찮아?
은혜: 응. 괜찮아, 지금은. 수술 직후 방사능 치료를 받았는데 정말 끔찍했어. 일주일 간 격리되어 아무도 못 만나고 아무것도 못하고 갇혀 있었어. 거기 있다 나오니까 정말 살 것 같더라구.
그 뒤 대학에 간 은혜는 백인 사회에 사는 유색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은혜: 음악을 할까 미술을 할까 고민하다가 미술을 하기로 하고 킹스턴에 있는 퀸즈 대학에 입학했어. 거기가 완전히 백인 중심이거든. 입학하니 과에 유색 인종은 나 밖에 없어. 기숙사에 들어가니까 백인 남자애들이 왕따를 시키면서 괴롭히는 거야. 알고 봤더니 그 애들이 나 말고도 동양 애들을 그런 식으로 괴롭히더라구. 그래서 그 애들을 상대로 학교 징계위원회에 고소하고 싸웠어.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대학 시절 내내 인종차별과의 싸움에 큰 관심을 가졌어. 대학원 때는 여성학과에서 개설한 [Race & Racism] 과목에 조교로 지원하기도 했지. 그 강좌 경험은 정말 감동적이었어. 교양 과목이었는데 처음에는 학생들이 자기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다가 강의를 들으면서 본인에게 인종차별주의자인 면이 있다는 걸 깨달아 나갔지. 강의를 듣기 전과 후의 변화가 눈에 보였어. 주로 법대생인 동양계 여학생들과 그룹을 만들어서 어울리면서 반인종차별이랑 여성주의적 활동을 했어. 이 친구들과 함께 교내에서 소위 ‘정신대’ 할머니들을 알리는 행사를 조직했지. 우리가 그 행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그런 걸 잘 몰랐거든. 전시회도 하고 모금 활동도 하고 심포지움도 열었지. 영화 [낮은 목소리]도 상영했어. 모은 돈은 한국의 나눔의 집에 보냈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그림 전시회 북미 투어가 있었는데 우리가 토론토 지역 책임을 맡았어.
– 계속 그림은 그렸어?
은혜: 전공을 중간에 바꿨어. 미술사로. 대학원에서도 미술사를 공부했어. 대학원 석사 과정 마치고는 음악학교에서 일하기도 했고 가정폭력피해 여성을 위한 센터에서도 일했어.
– 한국에는 언제 다시 온 거야?
은혜: 2001년 5월 경. 2000년에 베니스로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퍼슨웹 멤버인 정미 언니를 만났어. 거기서 너무 죽이 잘 맞아서 여행 목적지를 바꾸어서 같이 여행을 다녔지. 헤어질 때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 한국에 와서 바로 연락을 했어. 그리고는 정미 언니 때문에 알게 되어 퍼슨웹에도 오게 된 거야.
– 한국에 와서는 뭘 했어?
은혜: 사실 특별히 계획을 갖고 온 게 아니라 캐나다에서 너무 고민이 많아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무턱대고 온 거였거든. 영어 통역이나 번역 아르바이트 하려고 알아 보다가 덜컥 미술관에 취직이 되어 버렸어. 내 이력서랑 면접이 그 쪽 마음에 들었나 봐. 그 미술관이 디지털 아트 쪽이었는데 내가 캐나다에서 디지털 미디어 학교를 다니기도 했거든.
그래서 은혜는 제법 유명한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되어 일하다가 작년 가을에 그만 두었다.
은혜: 미술관 다니면서 작가들도 많이 알게 되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잘 안 맞는 면도 많았어. 직장 상사나 일 때문에 만나야 하는 교수 같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았지. 아랫사람들이나 젊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의례적으로 관행적으로 원하는 게 있는데 내가 그런 걸 잘 안 맞추고 못 맞춰 주니까. 어떤 교수님은 날더러 자기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교수님 제자가 아니라구. 3년을 일하고 그만 뒀어. 그리고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지. 일할 때는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막상 그만 두니까 그 자유란 게 불안하기도 했어.
결국 은혜가 택한 것은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길이다. 곧 은혜는 미국 시카고로 떠난다.
은혜: 지금까지 쭉 내가 살아온 걸 보면 미술치료를 공부하기로 한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야.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단순히 미술만 공부한 걸로 한계를 많이 느껴서 심리학이랑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 20대 초반에 3년 정도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 사실 내가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건 나를 코너로 모는 일이야. 다른 사람을 치료하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어떤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의식의 힘으로 부족하여 무의식의 힘을 끌어다 써야 할 때가 있다고.
– 얼마나 공부해야 하지? 공부를 마치면 뭘 할 거야?
은혜: 적어도 3년은 해야지. 한국에 와서 치료 센터(healing center)를 세웠으면 해. 마음 맞는 사람들과 커뮤니티 아티스트(community artist) 활동도 하고 싶어. 미술치료가 꼭 필요한 곳에서 미술치료를 하고 싶고. 교도소나 병원 같은 데에 필요하거든. 호스피스 활동도 해 보고 싶어.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는 게 결국 미술치료잖아.
그리고 은혜는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한 동안 못 보게 될 우리는 잠시 서로를 껴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먼 길을 떠나는 은혜의 눈이 촉촉히 젖어 들었다. 이미 은혜는 자신의 힘으로 많이 행복해진 것 같았다. 은혜가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