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에 익은 듯, 선 듯
처음 보는데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눈에 익은 듯한 사람이 있다. 김승옥이 그렇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래 전에 이미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김승옥소설전집」(전 5권)을 읽고, 거기 실린 그의 세 장의 사진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무수히 그를 떠올렸다. 소설 속의 ‘나레이터‘narrator가 작자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문학 이론의 ‘기본‘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그 숱한 나레이터와 등장인물 속에서 무던히 작자 김승옥을 상상했다. 그를 읽으면서 웃기도 했고, 눈물짓기도 했으며, 때론 심각하고 센치해져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으면 절로 나오는 한숨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를 맨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도 나는 이미 그를 ‘보았다‘. 어쩌면 본 것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가 믿는, 한 때 나도 열렬히 믿었던, 기독교적인 어법으로 얘기하자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The belief is to see what is unseen)이니까.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은 봄날의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차를 타고 성수대교를 지나면서 본, 강 건너 왼편의 야트막한 언덕은 개나리로 노랗게 물들어 언덕 전체가 거대한 개나리 노란 꽃송이였다. 그 한 송이, 한 송이는 고흐의 <해바라기>만큼 빛깔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그 모든 낱 송이들이 모이자, 그 때문에 더욱, 마치 온 세상이 하늘의 은총으로 빛나고 땅에는 삶의 찬가로 가득한 것 같았다. 물론 언덕 뒤편으로는 볕이 들지 않아 여전히 차갑고 음습한 곳이 있다는 것이 삶의 진실임을 알지만, 어쨌거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크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의 따사롭고 환한 햇살은 그가 통원 치료받고 있는 경희대 한방병원 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란 개나리 외에 붉은 홍매화와 하얀 목련이 뜰에 함박 피어 있었다. 병원이란 곳이 으레 그렇듯, 소독약 냄새와 흰 가운, 환자들의 낮은 신음 소리와 보호자들의 한숨, 또각또각 냉정하게 울리는 하이힐 소리,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고통과 죽음의 냄새가 풍기기 마련이지만, 그날따라 내게는 별다른 그 무엇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병원이 상징하는 바, 육체의 고통과 죽음을 잠시 잊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마저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그 날의 햇살 때문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여름의 따가운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지만, 나는 그 따스한 봄날의 햇살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넘어섰다. 비록 그것이 대단한 착각이라 할지라도…
대개 숨막힐 듯 지극한 아름다움은 고통과 죽음에 따르는 슬픔의 빛살 속에 있다. 둘은 서로 잘 어울린다. 그래서 사람은 아름다움을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하고, 죽음을 통해 아름답게 되기도 한다. 비장한 죽음은 늘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고귀한 자의 숭고한 죽음이 그렇다. 그러나 나같은 보통의 인간은 무미건조하지만 길게 늘어진 ‘생‘을 선호한다. 일상에는 ‘로맨티시즘‘이 설 자리는 거의 없다.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처럼 김승옥(의 소설)은 내게 양가적인ambivalent 의미로 다가왔다. 거기에는 죄의식과 자기연민으로 속으로만 파고들던 시인 윤동주의 순수함과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친부살해patricide를 교사하던 이반 까라마조프의 악마성이 공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보여주는, 불안의 색채를 강하게 띤 무한한 동경과 끝없는 지적 호기심의 한편에, 카프카의 모호하고 불가해한 세계를 병치시키거나 또는 뒤섞어 놓았다. 여기에서 나는 불안과 공포로 콩닥거리는 심장의 맥박 소리와 함께 관음증 비슷한 쾌감마저 느꼈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환상수첩>의 ‘환상‘과 ‘수첩‘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심저(心底)의 맨바닥마저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 필연적으로 치부를 들켜버린 듯한 수치심과 불쾌감이 곧바로 뒤를 잇게 된다. 그의 ‘환상‘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다분히 기괴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내 안에도 똬리를 틀고 있음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김승옥을, 아니 그의 소설을 통해 나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시선은 대상을 향하다, 언제나 그렇듯 대상을 관통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2. 언어를 잃어버린 이카루스
장미꽃 한 다발을 안고 김승옥 선생이 기다리는 병원 앞 까페로 들어섰다. 어두운 실내였고 더구나 초면이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사진에서 ‘보았던‘, 그리고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옆에는 선생의 부인이 있었고, 그들 앞에 내 앞서 병실로 찾아가 선생을 모셔온 다른 인터뷰어(이정숙)가 앉았다.
사실 그 날 그렇게 오랜 시간 선생과 얘기를 나누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2년 전,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몸을 움직이는 일은 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고사하고 첫 인사만 나누어도 족하리라 생각했다. 나로서는 그저 선생을 뵙는 것만도 뜻있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녹음기도 없이, 그저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장 찍어두리라 생각하고 사진기만 들고 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언젠가는 꼭 그에 관한 글을 한 편 써보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거동이 완전히 가능했고, 뇌출혈로 기억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지만, 그럼에도 그 날은 선생 부인의 중개와 선생 자신의 더듬거리는 몇 마디의 말과 짧은 필담으로도 단지 약간의 불편을 느끼는 것을 생각지 않으면 그런 대로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이 가능했다.
나는 서둘러 강의록의 빈 부분에 아주 휘갈긴 글씨로 그들과의 대화를 옮겨 적었다. 물론 대화는 주로 선생의 부인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선생과 대화하는 데에는 아직 많은 힘이 들었다. 사모도 선생의 말을 선생에게 거듭 되물으면서 분명한 뜻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제대로 구사하기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내가 선생께 인사드리며 세종대에서 문학 강의를 한다고 하자 뜻밖에 선생은 아주 반가와 하신다. 세종대면 선생이 몸담아 문학 강의를 하던 바로 그 대학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르던 일이었다. 2년 전 사고 이후, 1년이 지나고서는 어쩔 수 없이 세종대 교수자리를 내놓아야 했다고 선생의 부인이 귀띔을 하신다. 건강만 괜찮았더라면, 나는 같은 학교에서 선생을 뵐 수도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묻고, 수첩을 꺼낸다. 그 두꺼운 수첩엔 이미 검은색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슨 내용일까. 이어서 힘들게 펜을 꺼내 든다. 펜 세 자루. 색이 모두 다른 것도 아닌데 왜 세 자루씩이나 꺼내는 것일까. 그 수첩에 펜으로 내 이름을 적어 넣는다.
퍼슨웹(아래 ‘퍼‘)> 선생님의 건강이 훨씬 좋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말씀도 곧 잘 하시고… (하고 보니 이 두 번째 말은 좀 어색하다. ‘어른‘에게 할 말인가?)
사모> 네, 많이 좋아졌지요. 병원도 다니고… 조금씩 나아짐에 따라 희망도 보이고요.
퍼> 편찮으신 분을 이렇게 불러내어 질문을 해대고 해서 도리어 곤혹스럽게 해드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피곤하실 텐데.
사모> 아니에요. 김승옥 씨는 옛날 얘기를 하자면 좋아하실 거예요. 자주 걷고 운동도 하고 해야지요.
퍼> 주로 누워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거동에 전혀 불편함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사모>거동하는 덴 별다른 불편이 없어요. 올 때도 버스 타고 왔는 걸요. 김승옥 씨는 길도 잘 찾아가요. 산보도 자주 하고요. 길 찾는 건 오히려 저보다 나아요.
퍼> 이렇게 좋은 날씨에 두 분이 같이 산보도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모> 김승옥 씨는 나랑 산보 안 해요.(웃음) 혼자 가지. 그런데 위험해요.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어떤 때는 밤 늦게 들어오고 그래요.
퍼> 말씀을 거의 못 하신다던데, 지금은 어떠세요?
사모> 사고 나고서는 그랬죠. 말도 전혀 못하고, 예전 일은 전혀 기억도 하지 못했어요. 언어치료를 받으면서 이런 정도나마 나아진 거예요. 그래도 아직 기억력이나 언어 구사에는 어려움이 많아요. 예전엔 컴퓨터도 잘 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고요. 안철수 씨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해요. 더듬거리면서 말은 해도 우리말의 조사는 못해요.
그때까지 옆에서 잠자코 계시던 선생은 윗옷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든다. 아마 언어치료와 관련된 것이리라. 종이 위에는 간단한 문장이 열 개 정도 적혀 있었다.
김승옥> 이거… 이거 배워.
선생은 종이에 적힌 단문 가운데 <나는 버스를 탑니다>라는 문장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어렵게 꺼내든 볼펜으로 조사 ‘는‘과 ‘를‘ 밑에 밑줄을 그으며 “잘 몰라, 잘 몰라.” 하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신다. 그러면서 다시 종이에 ‘영어‘, ‘프랑스‘라는 낱말을 쓰고는 “괜찮아”라고 하신다. 아마도 조사라고 하는 것은 영어, 프랑스어에는 없는, 낯선 것임을 말하려는 듯하였다.
퍼> 한국어의 조사를 잘 모르신다고요? (나는 선생께 되물었다) 말씀 하실 때는 조사를 잘만 쓰시는데요?
사모>말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 조사를 읽고 뜻을 새길 줄은 모른다는 거죠. 의식적으로 배워야 해요.
참 이상하기도 하다. 많은 낱말을 알아 듣고, 문장 구사도, 말을 심하게 더듬고 천천히 말하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이상한 것 같지 않는데, 우리말의 조사를 모른다니…
로만 야콥슨이 쓴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1956)에 따르면, 실어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환자가 ‘인접성 연관‘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사물이 환기시키는 다른 사물이나 대상, 관념을 떠올리지 못해 문장(또는 명제)을 구성해내지 못한다. 한편 ‘유사성 연관‘이 파괴된 환자는 어떤 사물과 유사한 다른 사물, 대상을 생각해 낼 수 없어, 하나의 통사적 문장을 구성하는 개별 단어들을 다른 비슷한 단어로 대체하는데 곤란을 겪는다. 예컨대 ‘밥을 먹는다‘에서 ‘밥‘ 대신에 ‘빵‘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런데 김승옥 선생은 문장 구성과 유사 단어 대체에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부수적인 ‘조사‘를 모른다고 하니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퍼> 언어 치료 받는 건 어때요?
사모> 처음에는 치료를 꿈도 꿀 수 없었어요. 가는 병원마다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어요.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지금도 사진을 찍으면 분명하게 김승옥 씨의 왼쪽 뇌 부분의 1/3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왼쪽 뇌라면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이잖아요? 그나마 지금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서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 거지요. 젊은 여의사가 아주 똑부러지게 하지요. 가끔 야단도 치고요.
퍼> 언어치료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요?
사모> 주로 간단한 몇 문장을 외워서 시험 보는 식으로 진행 되요. 숙제도 내주고요. 때로는 가위, 숟가락, 붓, 전화, 망치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고 난 뒤 감춰요. 그런 다음 잠시 뒤 다시 그림을 보여줘요. 예를 들면, 붓과 전화를 고르라고 하면서 감춰준 그림을 보여주면, 전화와 붓을 짚어내야 하는데, 그림 두 개까지는 되지만, 세 가지 물건을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해요.
퍼> 정말요? 그 정도에요? 믿기 힘든데요. 이렇게 제법 길게 대화를 하시고, 또 그 모든 말을 달 알아들으시는 것 같은데요?
사모>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다 알아 듣는 것 같아도 가족들의 말도 채 50%도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의사의 말이. 그러니까 단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는 게 아니고 대강 분위기를 통해 알아듣는 다는 것에요.
퍼> 그럼 지금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뭔가요?
사모> 의사가 그래요. 지금 이렇게 말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발화‘라고… ‘보너스‘라는 거죠. 무의식 중에 나오는 거.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진 말래요.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한대요. (약간 틈을 두고) 하지만 난 믿음이 있으니까 섭섭하진 않아요. 기독교 신자니까… 또 기도를 하고…”
사모는 말을 흐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살짝 웃는다. 선생은 선생은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다. 아니, 우리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믿음이 있으니까…?’
실어증의 사례는 신약성서에도 나온다. 제사장 사가랴. 나중에 세례요한의 아비가 되는 그에게 어느 날 천사가 찾아 와서 그가 애기를 낳게 되고, 그 낳은 아기는 메시아를 예비하는 선지자로 자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가랴는 아내가 수태를 못하고 이미 나이가 많은데 어찌 가능한 일이겠느냐고 반문한다. 인간으로서는 극히 당연한 의문인데 천사는 그것을 불신으로 간주하고 그에게 아기가 출생할 때까지 말을 못하는 벌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생의 경우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일까? 신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어떤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있으랴마는, 선생은 자신의 눈 앞에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목도하였을 정도로 대단한 체험이 있었으니, 어쩌면 선생에게는 남들보다 더 큰 수준의 믿음이 요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을 일을 누가 알며 이해하랴. 구약성서의 욥Job처럼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에게도 하느님은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행을 주지 않았던가. 재산은 물론이고, 여러 자식과 며느리들마저 한 날 한 시에 모두 앗아가 버렸다. 거기다 극심한 질병을 얹어주고 벗들마저 욥을 정죄(定罪)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결국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가? 아니! 신은 이유 없이 주고, 이유 없이 가져가신다. 신은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승옥이 만난, 바로 그 절대적인 신은 그의 입에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유려한 언어를 주었다가 다시 별 이유도 없이 거두어 가셨다. 탁월한 언어와 현란한 문체로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던 그에게서, 더구나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부정하고 이미 신께 귀의한, 무엇보다 이제는 새롭게 신을 위해 글을 써보려던 그에게서 신은 지난 죄를 추심(推尋)하여 벌한 것인가, 인간의 나약함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자신이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았던 이카루스의 ‘추락‘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서너 살짜리 아기처럼 다시 말을 배워야 한다니…
나는 당혹스러웠다. 김승옥을 만난 기쁨은 잠시, 이내 오랜 의문 속에 빠졌다. 나는 이제 김승옥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그리고 나도 한때 믿었던 신께 묻는다. 그러나 내 온갖 물음에 신은 별 말이 없다. 신은 그런 것이다. 신을 향하던 물음은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 온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작가는 보았어도, 말을 못하는, ‘언어를 잃어버린‘ 작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언어를 잃어버린‘과 ‘작가‘는 그 자체로 모순형용이 아닌가. ‘언어의 연금술사‘는 금을 벼리던 화로의 맹렬한 불길에 데여 온 몸이 오그라들었다. 손도 다리도, 그리고 아름다운 눈과 입술도.
선생의 그 짧은 몇 마디 말을, 그나마 대부분 지문 처리해 버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기록할 수 없는 언어들, 기록 저편에 존재하는 언어들. 태초에 말(logolos)이 있었다. 그 편만(遍滿)한 말이 유독 그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그는 답답할까. 아니면 그와 얘기를 나누려는 우리가 더 답답할까. 새삼 언어를 통해 소통해야 하는 것의 번거로움. 구속. 언어 밖의 언어. 말글이 지닌 편리함과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불편감, 구속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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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화 ‘판’ 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
잠시 카페 안을 돌아본다. 몇몇 젊은 남녀들이 정답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뒤에, 옆에 앉은 여학생들은 그를 알아볼까, <무진기행>과 <환상수첩>의 김승옥을. 환멸과 자조, 위악 속에서 저도 모르게 구원을 바라는 가난한 영혼의 나락을!
퍼> 사진으로 보면 몹시 다혈질이실 것 같았는데…?
사모> 김승옥 씨가 젊어서는 다혈질이 아니었어요. 나이 들면서 그렇게 되었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선생의 부인은 시종 그를 김승옥 씨라고 불렀다. 낯설다. 자신의 남편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별로 예가 없다. ‘누구 아빠‘, 또는 ‘저희 남편‘이라고 하든가, 바로 곁에 있을 때에는 ‘이 사람‘이라고 하는 게 흔한 일인데.
퍼> 혹시 다른 인터뷰 할 때, 사람들이 안 물어보던가요? 사모님께서 자신의 남편을 ‘무슨무슨 씨‘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사모> 글쎄요, 그런 적 없었어요. 이런 질문은 오늘 처음인데요?
퍼> 그러면 결혼하고서 늘 이렇게 ‘김승옥 씨‘라고 부르셨나요?
사모> 처음 결혼했을 때는 당시에는 잘 쓰이지 않던, ‘자기‘라는 말을 서로 썼어요. 그때로서는 아주 쑥스럽고 계면쩍은, 그래서 젊은이들도 낯간지러워 잘 쓰지 않던 말이에요. 그 때문에 시어머니께 욕도 먹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정월이었는데, 마음을 굳게 먹고 어렵게 ‘여보‘라는 말을 꺼냈어요. 그랬는데 김승옥 씨가 대뜸 ‘집어치워‘라고 해서 결국 써보질 못했어요. 그런데 나이 들고, 지금 나이가 62로 환갑을 넘겼는데…. 새삼 어떻게 바뀌겠어요?
남들 앞에서 ‘김승옥 씨‘라고 부르는 것은, 예컨대 ‘누구 아빠‘로 호칭함으로써 스스로를 ‘김승옥 부인‘으로만 규정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일까. 젊어서부터 워낙 유명한 남자와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겠으나 자신의 삶과 공간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스스로 김승옥에 거리를 둠으로써 그의 아우라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그 자신만의 객관적 거리를, 또는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예술의 차원은 몰라도 일상의 삶과 종교적 삶에서는 더욱더.
퍼> ‘EBS 마로니에‘에 두 분의 얘기가 나오던데요?
사모> 그거요?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처음엔 한두 번 보다가 이젠 안 봐요. EBS에서 처음 제안했을 때, 전 반대했지만, 김승옥 씨는 비교적 호의적이었거든요? 물론 드라마틱한 구성을 위해 과장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지만, 그건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김승옥 선생도 가만있지 못하고 손사래를 친다. 불만의 표시다.
퍼> 김승옥 선생님을 문학청년과는 다른, 세련되고 정열적인 도시적 이미지로 그렸던데요?
사모> 김승옥 씨에 대해 잘못 얘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들 결혼에 대한 얘기도 정반대에요. 마로니에에는 마치 내가 김승옥 씨에게 꽃다발을 사드리며 적극적으로 대쉬했던 것처럼 말하던데…. 그건 다 거짓말이에요. (웃음)
퍼> 그럼 결혼은 어떻게?
사모> 김승옥 씨 졸업식이 있는 날 저는 집에서 강금당해 참석도 못했어요. 부모님의 반대로. 그런데 꽃을 어떻게 갖다 줘요? 그리고 시어머님도 아들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아주 강하신 분이었어요. 이래저래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헤어져 있었어요.
사모는 부모의 반대가 없었더라도 어쩐지 김승옥 씨와 결혼은 안 하게 될 거 같더라고 했다. 물론 김승옥 씨가 다른 남자들, 당시 그가 만나던 김현, 김치수, 염무웅 이런 남자들에 비해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이라는 건 전혀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사모>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김현 씨와 그 친구들이, 김승옥 씨는 순천에 내려가 있었는데, 학교 앞에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당시 남학생들이 학교 앞에서 여학생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아주 센세이션한데, 어쨌든 김현 씨가 그러는 거예요. “승옥이에게 편지나 한 장 떼 주시오” 그래서 한 동안 안 만나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결혼까지의 이야기. 사모에 따르면 김현 씨가 둘의 결혼에 큰 역할을 한 모양이다. 심지어 두 사람의 데이트 비용도 주로 댔다고 했다. 나는 선생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선생님은 당시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였어요?”라고 물었다. 생각해 보면, 별로 실없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이에 선생은 신문지 위에 김현이라고 글씨를 쓰고 그 밑에 다시 밑줄을 그으며 “이거…” 라고 말했다.
퍼> 흔히 김승옥이라고 하면,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천천히 선생의 답변을 기다렸다)
김승옥은 ‘김승옥 무진기행 외‘라고 쓰고 그 아래 줄에 ‘백혜욱‘이라는 말을 다시 썼다.
그리고 우리 보는 앞에서 그 낱말들 사이로 가로 세로로 한 줄씩을 그어 그 전체를 네 개의 공간으로 분할한다.
그때서야 나는 사모의 성함이 ‘백혜욱‘임을 알았다. 그리고 선생이 ‘결혼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때까지, 심지어 선생의 부인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김승옥‘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나의 무의식 중에서 김승옥은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 왜 일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김승옥> 남이 와서 누가 뭐라고 하면…. ‘나‘는 없어…
김승옥은 많은 시간이 걸려서 겨우 이 몇 마디 말을 했다. 다시 그는 백혜욱이라는 이름 밑에 줄 바꾸어 ‘김융세‘를 쓰고, 다시 줄 바꾸어 ‘김융래‘를 썼는데, ‘김승옥‘이란 낱말에서 ‘백혜욱‘이란 낱말로, 다시 ‘백혜욱‘에서 ‘김융세‘, ‘김융세‘에서 ‘김융래‘로 내려오는 화살표를 그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김융세‘ ‘김융래‘가 바로 그의 두 아들임을 비로소 알겠다.
김승옥> 이러면서…. 없어졌어, 없어져.
뭐가? 진정한 김승옥이? 의아했다. 김승옥에서 아내와 두 아들, 그들 다른 이름으로 넘어가면서 김승옥 본래의 세계가 축소되고 결국 없어졌다는 뜻인가. 나는 재차 묻는다.
‘감수성의 혁명‘으로 불리는 그의 소설들이지만, 그의 소설쓰기가 그렇게 순탄한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자신이 말하는 대로 돈이 없어 만화도 그리기 시작했고, “생계를 위해서 영화각본만 쓰고 소설쓰기는 등한히” 하였다.(「김승옥소설전집」 1권 작가의 말)
1966 : 「무진기행」 시나리오 집필 계기로 영화계와 관계 시작
1967 :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 감독하여 영화로 만듦. 백혜욱과 결혼
1968 :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하여 대종상 각본상 수상
1974 : 시나리오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등 집필. 「겨울여자」, 「여자들만 사는 거리」, 「도시로 간 처녀들」 등 영화화
그래서 영화로 돈을 꽤 벌었고, 유명세도 얻었다. 그에 따르면, “그때 받은 돈으로 아파트를 한 채 샀으니까 많이 받기는 받았”다.(「김승옥소설전집」 4권) 그러나 선생 자신이 예상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영화에 뛰어든 댓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경우처럼. 차이가 있다면 파우스트는 ‘생계‘가 아니라, ‘전지(全知)’를 갈망하였을 뿐.
사모> 김승옥 씨는 젊어서는 아주 고운 성격에 순수했어요, 나이 들어 다혈질로 변했지. 저는 김승옥 씨가 영화하는 걸 반대했어요. 계속 하면 떠나겠다고. 그런데 김승옥 씨는 이게 마음이 상했던 거예요. 자기가 영화하면 바람을 필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렇게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게 전혀 아닌데.
사모> 영화판이, 당시는 대부분 깡패들이 설쳤는데, 무식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돈을 줬으니 부려먹겠다는 건지, 김승옥 씨가 작가라서 인정은 해주지만, 깡패들이 다 자기식대로 하는 거예요. 김승옥씨는 피하려고 했어요. 나는 싸우라고 했지만, 김승옥 씨는 글을 써야 하니까 피하고… 그래서 내가 나서야 했는데, 나는 무서우니까….
선생의 부인은 ‘판‘을 “그래요, 판이었지!”라고 하며 ‘판‘을 강하게 발음하셨다. ‘개판‘보다 더 지독한 곳이었다는 뜻이리라.
사모> 영화 <무진기행>을 만들면서 그 제작자가 서울대 학생회장 출신이었는데, 김승옥을 쥐고 흔드는 거예요. 그게 다 보여요. 그때 싸우며, 김승옥은 당하면서도 참고… 그들과 싸우면서 우리 둘이 같이 망가졌어요. 지금도 무서워서 이가 다 떨려요. 그런데 김승옥 씨는 계속 나를 원망하는 거예요. 영화하고 싶은데, 내가 김승옥 씨를 못 믿고 자기가 바람필까 두려워 반대하는 거라며 평생을 두고 원망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평생 말하지 않았어요. 왜 영화를 그만두게 했는지… 그러다가 이렇게, 지난 번에 처음 말했어요. 그런데 영화 계속 했으면 정말 바람 안 피웠겠어요?
사모는 하던 말을 잠시 끊고, 은근히 김승옥 선생을 약 올리려는 듯, 선생 쪽으로 한 번 눈길을 돌리고는 말끝을 올린다. 반은 진심인지도 모른다. 곁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김승옥은 황급히 “없어, 없어”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짓궂은 놀림에 다른 한편이 당황하는, 그런 천진한 동무 사이 같다.
사모> 김승옥 씨는 그 때 영화하면서 망가졌어요. 사람이 악해지고… 그렇게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괴롭고 힘든데 어떻게 안 말릴 수 있겠어요? 나는 영화사 불려 다니며, 글을 제 때 못 써주는 김승옥 씨 대신해 시달리고… 심지어 어떤 때는 스텝이 늦은 밤 집에까지 찾아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하며 갖은 행패를 다 부리던 때도 있었어요. 글 써내라고. 김승옥 씨는 잠적해 버리고, 그래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영화계 사람들 너무 무서워서 아이구, 지금도 덜덜 떨려요.(사모는 이 얘기를 서너 번은 하셨다) 생각도 하기 싫어. ‘씨네하우스‘ 사장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오던데…
퍼> 만일 선생님께서 몸이 회복되고 다시 영화를 하고 싶으시다면요?
사모> 지금 같으면 얼마든지 영화판에 보내지. 세상 좋아졌어. (지금 영화는) 예술적 기질이 있는데다 제작에도 상식이 있으니까. 그러나 당시는 불구덩이야. 그러니 내보내면 김승옥 씨 다 오그라들 게 뻔해요. 그러니 어떻게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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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대의 세계 속에서 자기 꼬리를 자르다
제임스 조이스가 창녀에게 자신의 동정, 이런 게 있다면,을 바치러(?) 가는 더블린 뒷골목의 질펀한 길이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내 모든 기억을 ‘고정‘시켜버렸던 것처럼 <환상수첩>은 김승옥에 대한 나의 모든 인상을 ‘고정‘시켜버렸다. 그것은 원초적 생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그로 인한 몸부림의 기록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 때는 법대생이었으나 결핵 치료에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휴학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춘화를 만들어 팔며,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여동생이 윤간을 당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던 주인공은 양심의 가책을 못이기고 자살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되뇌인다. (제 2권, <환상수첩>)
이는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병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얻은 돈으로 하루 밤 진탕하게 먹고 마셔 버린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다가 이틀 날 새벽 약을 먹고 자살한다. 그와 함께 밤새 ‘시체를 뜯어 먹은‘ 주인공 ‘나‘와 ‘안‘이라는 인물은 그의 자살을 발견하고 도망친다. 물론 죄의식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스물다섯 나이에 이미 늙어버린 자신들의 모습을 문득 발견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는 이성적 사유 또는 추론의 결과가 아니므로 논리적일 수 없고, 다만 본능적이며 충동적이다. 비록 악마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나 거기에는 어떠한 도덕적 윤리적 판단도 개입할 수 없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가 상상하던 대로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신이 없는 세계‘야말로 성속의 구별이 없는, 또는 그것을 넘어선 진정으로 ‘신성한‘ 세계이므로. 따라서 바로 그 점에서 <환상수첩>과 김승옥의 단편 소설이 추구하던 세계는 종교적 차원의 절대적 영역과도 통한다.
“우리의 왕국에서 우리는 그렇게도 항상 땀이 흐르고 기진맥진하였다. 그러나 한 오라기의 죄도 거기에는 섞여 있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거기에서 우리는 평안했고 거기에서 우리는 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제 1권, <생명연습>)
김승옥의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생에 대한 긍정과 몸부림을 떠올릴 때면, 늘 내게는 「김승옥소설전집」 2권에 실린 김승옥 젊은 시절 사진만 남게 된다. 귀 옆에 살짝 갖다 댄 오른손엔 담배 꽁초가 쥐이고, 짙은 눈썹에 중간 정도로 큰 눈과 끝이 선 코, 얇은 입술, 살짝 야윈 뺨… 몽상에 잠긴 듯, 살짝 위로 치떴지만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응시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것이 가볍게 흔들리며 끊임없이 떨리고 있다는 내 눈의 착시현상!
그런 그가 변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지만,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다. 1권에 실린, 순수한 문학청년의 이미지가 4권에 실린 사진에는 볼에 살이 붙은, 고집이 센 중년 남자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뺨은 약간 부어오르고 콧볼은 옆으로 퍼졌으며 두터워진 눈두덩 사이로 눈은 더욱 작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5권에 실린 사진의 앙– 하고 다문 입술과 코는 이미 50에 가까운 사내의 고집, 그것이 한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 동력이 되어 왔겠지만,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실망스러웠다. 만일 윤동주가 죽지 않고, 중년을 넘기며 살았다면, 그 또한 그런 모습으로 변해갔을까? 그러나 본질적인 변화는 그가 길 위에서 신을 만났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사도 바울처럼.
그가 지나온 길, 즉 문학에서 종교의 절대적 차원으로 넘어간 길과 내가 종교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문학이라는 한없이 유동적이고 덧없는 세계로 전향한, 심하게는 ‘변절한‘ 길은 분명 엇갈린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소설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이해할 만하다. 세계는 절대적인 차원과 상대적인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차원만 있을 뿐이다. 절대적 차원 그 외의 것은 모두 암흑, 또는 빈 공간으로 처리된다. 마치 중세인들이 생각한 네모난 땅덩어리가 저 먼 바다 끝에서는 곧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온갖 괴수들이 들끓는, 지옥과 다름없는 곳으로 끝나는 것처럼.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난 이상 소설쓰기가 더 이상 나의 구원수단은 아니게 됐지만 소설이라는 언어행위가 하느님의 진리와 진실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수단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1권, 작가의 말)
퍼> 선생님은 소설가에서 특별한 체험을 거쳐 종교로 귀의를 하셨는데, 사실 저는 선생님과 반대의 길을 걸었지만요, 우습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다가 교회도 그만 두고 과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했거든요. 남들은 선생님의 대표작을 「무진기행」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환상수첩」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잠자코 ‘小說家(무진기행)’과 ‘김승옥‘을 수첩에 어렵게 적는다. 이어서 그 둘을 잇는 선을 다시 긋더니 거기에 ‘곱표‘를 한다. 아마 그 두 개의 낱말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리라.
퍼> 그럼 ‘더 이상 과거의, 무진기행의 김승옥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까?
김승옥> 나는 본래부터 아냐. (다시 한 번 ‘곱표‘를 그렸다) 만들어 낸 거지.
주인석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선생이 「무진기행」이 특히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이상한‘ 대답이 떠올랐다.(「김승옥소설전집」 4권) 진부한 멜로 같다면서. 「무진기행」이 김승옥의 상징이라면, 김승옥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비단 문학적 성취만을 문제 삼는 것은 당연히 아닐 테고. ‘소설쓰기‘가 그에게 더 이상 ‘신성할‘ 것도 없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 현실에서, 그것은 이미 과거의 잔영일 뿐이다.
“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승옥소설전집」 1권, 작가의 말)
사모> 김승옥 씨는 과거의 자신의 소설과 자꾸 연결시키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예수 믿고 나서, 종교적 세계에서 보니 예전 작품들이 너무 부끄러운 듯해서 그런가 봐요.
그는 다시 수첩에 ‘러아‘라고 쓰고는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한참을 들여다 보여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모가 ‘러‘와 ‘아‘ 사이에 ‘시‘라는 글자를 한 자 적으며 ‘러시아‘ 아니냐고 하자, 선생은 머리를 끄덕인다. 부인에 따르면 선생은 러시아를 여러 번 갔다고 한다. 옆에서 그는 ‘러시아와 김승옥은 서로 접근한다‘라는, 그 비슷한 문장을 계속 말하려는 듯 했다.
김승옥> 인제 글을 쓰면 더 좋은 글을 쓸 것 같애”
김승옥은 어쩌면,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 이름 앞에는 언제나 ‘무진기행의‘ 또는 ‘소설가‘, ‘무엇무엇인‘ 등의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고, 그런 게 바로 유명세이긴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내심 언짢고 불안했던 건지도 모른다. ‘러시아와 김승옥이 서로 접근한다‘라는 것은 여러 번 가는 러시아가 매번 김승옥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뜻일 것이다. 러시아가 그에게 매순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김승옥‘이라는 기표가 지니는 의미도 매순간 변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또한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다의적(多義的)인 존재이므로. 그런데 김승옥은 이미 ‘김승옥‘이라는 이름을 버렸는데,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은 또는 무심한 사람들은 자꾸 과거 속의 그를 기억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미 그가 버린 물건을 다시 주워와 이미 익숙해진 새 것을 어색하다 탓한다.
“소설쓰기는 나에게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에 의해서 내 영안이 열리고… 하얀 모습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눈으로 보게 되는 등, 극치의 구원이 나에게 임하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기만 한 신비의 연속적인 체험이 나에게는 광주 사태 이상의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는 오직 성경과 그 주석서를 읽고 기도생활에 몰두하며 나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교정하는 일밖에 다른 겨를이 없이 지내왔다.” (「김승옥소설전집」 1권, 작가의 말)
1981년 하느님을 만났다는 그의 평안한 모습을 보며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갈구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신이므로. 여전히 내 영혼은 불안하므로.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불안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운명처럼.
5. 햇살이 기울다
6시가 가까와지면서 창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눈부셨던 햇살이 기운다. 몸도 조금씩 지친다. 선생은 더 그럴 것이다.
퍼> 이제 나아지면 글을 다시 쓸 생각이 있으신 거죠?
사모> 김승옥 씨가 왼쪽 뇌 3/1이 없어졌어요. 글쓰는 사람에겐 왼쪽 뇌가 중요한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글을 좀 쓰게 될지…”
사모는 말끝을 흐리셨다. 신앙의 세계는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다.
사모> 이렇게 된 것만도 감사하지. 작년에 그림을 좀 그려보라고 했는데, 본인도 애를 썼고요, 그런데 안 되더군요. 의사 말로는 한 6-7년은 걸려야 정상적인 작업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워낙 많이 다치셔서…
나는 문학동네 소설 전집에 나온 김승옥 선생의 사진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선생의 사진을 보면서 받았던 실망, 아니 충격에 대해서도 말씀 드리며.
퍼> 사실 처음엔 이런 질문 없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요, 왠지 민망한 듯해서…(웃음) 하지만 「전집」에 실린 선생님의 사진을 보면, 그 ‘돌연한‘ 변모에 너무 충격이 컸거든요? (웃음)
사모> 그 사진은 40대 후반, 50이 다 되어서의 모습이에요. 살이 찌고 싫은 모습으로 변했어요. 영화할 때는 그래도 나았는데… 지금 살진 모습 보면 아주 싫고 괴로워요. (웃음)
이때 김승옥 선생이 갑자기 사모의 툭툭 치더니, 테이블에 놓인 냅킨에 날짜를 쓰신다. ‘2005. 12. 23′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양 볼을 연신 쓸어내리는 동작을 한다.
사모> 그날, 당신 생일까지? 응, 살을 빼겠다고?
김승옥> …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가만 보면, 선생의 제스쳐가 매우 크고 과장스러워서 부자연스럽게까지 보였다. 어른답지 않은, 어떻게 보면 아이처럼 매우 귀엽기도 하지만.
퍼> 지금 보니 선생님의 동작이, 외람되지만, 매우 ‘귀여운 아이‘ 같기도(웃음) 하고 어쨌든 조금은 과장스럽게 보이기도 하는데 언어를 잃어버리는 일이 정서적 측면에도 영향을 주나요?
사모> 그럼요. 가족들만 느끼는 거지만 예전엔 상당히 부드럽고 표현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최근엔 성격이 변하고 있고, 정서적 표현이 과장스러운 게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다른 인터뷰어가 “지하철 혼자 타도 되나요?”라고 물었다가 선생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날 뭘로 알아?” ‘지하철 혼자서 탈 수 있느냐‘는 뉘앙스를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표정과 제스처가 꼭 아이와 꼭 같다. 사모가 무슨 말을 한 것에 대해, 선생은 “난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하면서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내밀어 짧고 빠르게 여러 번 내젓는다. 다시 보니 그 과장스러운 몸짓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영화판에 몸 담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다시 뵙기로 하고. 카페를 나와 골목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햇살은 이미 기울었다. 날카로웠던 빛은 부드럽게 변하고 낮의 열기는 조금씩 식는다. 어수선하던 거리도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이제 곧 저녁이 되고 밤이다. 그런데 밤은 끝이 아니다. 밤은 새 날의 시작이다. 일몰이 유태인에게는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듯이. 김승옥 선생에게도 새날이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