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박판식

조연호: 시인. 1969년 충남 청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이 있음.  

 

박판식: 시인.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2001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밤의 피치카토』(천년의시작, 2004)가 있음.

  

채상우: 시인. 1973년 경북 영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천년의시작』을 통해 등단.

  

  : 시인. 1968년 서울 출생. 건국대 가정관리학과 졸업. 1998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광기의 다이아몬드』(열림원, 2003)가 있음.

  

김진완: 시인. 1967년 경남 진주 출생. 1993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김춘식: 평론가. 1966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수료.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 등단. 평론집으로 『불온한 정신』(문학과지성사, 2003)이 있으며, 저서로 『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소명출판, 2003), 『한국문학의 전통과 반전통』(국학자료원, 2003), 『근대성과 민족문학의 경계』(역락, 2003)가 있음. 현재 미국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중.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교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 수료. 199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가 있음.

  

김회량: ()천년의시작 디자이너.

  

박상수: 시인. 평론가.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재학중. 2000년 『동서문학』을 통해 시 등단. 2004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 등단.

  

조하혜: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94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도넛, 비어 있음으로 존재한다』(천년의시작, 2003)가 있음.

  

황병승: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창과 석사과정 재학중. 2003년 『파라21』을 통해 등단.

  

   

 

이번 인터뷰를 읽는 분들을 위해 먼저 몇 가지 사항을 적어둔다.

 

첫 번째 사항은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 그리고 나(채상우)의 관계다. 우리 셋의 인연은 그야말로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기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박판식 시인과 나는 학교 선후배로 근 10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다. 그동안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낸 우리 둘은 평소엔 그럭저럭 잘 지내다가 가끔은 서로 악연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편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은 얼마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첫시집을 나란히 간행했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 들어 이 둘은 하루라도 통화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히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 그리고 나의 인연은 1998년 어느 겨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인터뷰 중에 나온다.) 참고로, 등단 시기로 보면 조연호 시인, 박판식 시인, 나 이런 순이지만, 나이로 보면 조연호 시인, , 박판식 시인 순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본문 중에 무수히 등장하는 형이라는 호칭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사항은 인터뷰 당시의 상황이다. 우선 나는 인터뷰 전날까지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근 두 주일 동안 연일 술을 마셨다. 그래서 말투도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고, 간혹 금방 했던 말도 금세 잊어버리곤 엉뚱한 얘기를 하기에 바빴다. 이에 반해 조연호 시인은 인터뷰 내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박판식 시인은 처음에는 관행적인 인터뷰에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연호 시인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웃음>이라고 표기된 부분이 있는데, 다른 인터뷰에 비해 상당히 많다는 걸 느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대화 뒤에 <웃음>이라고 표기해야 할 정도로 셋은 인터뷰 내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더 밝히자면 <웃음>이라고 통일해서 적은 이유는 셋 다 웃음소리가 대단히 기묘해서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다. 정말이지 셋 모두 저주받은 웃음소리의 소유자들이다. 이런 셋 곁에 조하혜 시인과 김회량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뷰 내내 줄기차게 수다를 떨어댔다. 김회량 디자이너는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이 시집을 간행한 출판사의 디자이너인데, 고맙게도 이번 인터뷰의 촬영을 맡아주었다. 인터뷰 앞부분을 보면 김회량 디자이너와 박판식 시인이 사진 촬영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 번째 사항은 이번 인터뷰는 말 그대로 날()인터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읽어 보면 금방 느끼겠지만, 이번 인터뷰는 정말 산만해 보일 것이다. 당시 녹음된 내용을 거의 수정 없이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속출하는데, 읽기에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인터뷰의 현장감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고스란히 옮겼다. 처음에는 읽기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 읽어가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이번 인터뷰만큼 유쾌하고 즐거운 인터뷰도 없었는데, 녹음 내용을 글로 풀어놓으니까 마치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인터뷰 자리에는 없었지만 대화중에 살짝살짝 등장하는 황병승 시인과 박상수 시인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인터뷰라는 형식에 좀체 걸려들지 않는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의 만행을 떠올려보면 이번 인터뷰는 인터뷰에 대한 인터뷰, 그러니까 메타인터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 그럼, 이제 황당하고 유쾌한 씨들의 엽기발랄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준비 됐나요? 시작합니다.

 

도대체 인터뷰가 뭐길래?

 

 

 

채상우오늘은 좀 편하게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조연호 ▒ (목소리) 톤이 왜 달라지냐?

 

박판식왜 톤이 달라져? (웃음)

 

조연호오늘 인터뷰는 제대로 될 리가 없어. 내가 볼 때는.

 

박판식녹음기를 트니까 목소리가 왜 그렇게 변해. .

 

채상우제 말투가 이상한가요? 그러지 말고 어서 얘기하죠.

 

조연호의식하지 마. 아니 왜 자기가 틀어 놓고 자기가 (녹음기를) 의식해.

 

박판식글쎄 말야. 왜 마이크를 의식해. (상우) .

 

조연호진짜 웃긴 사람이야.

 

박판식이거(녹음기) . 끄라고.

 

채상우, .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연호 형은 1994년도에 등단했는데, 10년만에 첫시집을 낸 거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시집을 늦게 내게 된 이유에 대해 우선 듣고 싶고요, 그리고 시집을 읽어 보면 그동안 살아온 삶이 참 불우한 듯한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판식이도 시집을 보면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평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시에 대해 왜 이렇게 알아먹지 못하게 시를 쓰느냐는 악평이 많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함께 얘기해 봤으면 하고요.

 

조연호두 가지 물었잖아? 하나는 불우한 삶을 살아온 듯한데 어떻게 살아왔느냐? 또 하나는 왜 시를 이렇게 알아먹기 힘들게 쓰느냐? 두 번째 물음에 대해 먼저 답하자면, 얼마 전에 김춘수 선생이 한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 <현대 사회는 회의의 시대이고 가치가 해체된 불편한 시대인 만큼 불편한 시가 맞다>는 얘기.

 

채상우너무 빤한 정답 아닌가요?

 

조연호원칙적인 말인데도 불구하고 가슴에 와닿드라고.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못쓴다는 걸 아니까. 의도적으로 뭔가 일탈을 꿈꾸거나, 뉘앙스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해왔던 것 같긴 한데……. 그보다 사실은 불편한 시대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가 쓰여진다는 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지금 내가 한 얘기는 내 시에만 국한된 얘기라기보다 원론에 해당하는 얘기겠지.

 

박판식 ▒ (김회량 디자이너에게) 사진 좀 고만 찍어.

 

김회량 ▒ (박판식 시인에게) . . 조용히 해.

 

조연호왜 불편한 시를, 알아먹지도 못하는 시를 쓰느냐라고 물었는데, 내가 볼 때는 내 시가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쉬운 시라고 생각해. 그건 어떻게 반증이 되냐 하면 내가 판식씨 시를 읽어보면 내 시보다 판식 씨 시가 더 어려웠어. 이해하기가.

 

박판식 ▒ (조연호 시인의 말에 대해) 이런 식의 핑계를!

 

조연호그러니까 그건 어떤 개인의 코드 문제가 아닌가, 난 이렇게 생각하거든.

 

박판식, . 이런 핑계를 대다니.

 

채상우판식이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겠어요. 물론 연호 형 시에 비하면 판식이 시는.

 

김회량 ▒ (모두에게) (사진 찍게) 자세 좀 취해봐.

 

채상우시 아래 숨어 있는 서사가 어느 정도 눈에 보이거든요. 그래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연호 형 시에 비해 좀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힘든 건 사실이에요.

 

조연호내 시가 읽기 어렵다는 선입견은 내 시 안에 서사가 없기 때문에, 혹은 서사를 일부러 끊어놓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해. 그건 뭐, 내가 시 쓰는 방식이니까. 그리고 난 그게 좋아. 세상은 부조리하잖아? 내가 지금까지 바라본 세상은 대부분 부조리했는데, 내가 쓰는 틀, 이것도 하나의 세상이라고 한다면 굳이 내 시에 서사를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자유롭게 말야, 시도 세상과 비슷하게 만들어보자, 혹은 내가 본 세상 그대로만 적자라고 생각했어. 본 그대로만 적자라는 게 내 시 쓰기의 전략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내가 시 쓰는 방식이기도 하지.

 

박판식처음부터 시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조연호아니, 상우 씨가 진지하게 물어보잖아.

 

박판식녹음을 한다니까 다들 경직됐어.

 

조연호판식 씨 얘기 좀 해봐.

 

박판식전 혀가 아직 안 풀렸어요. 그런데 인터뷰한다고 하면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럴싸한 말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조연호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되지. .

 

박판식이런 게(관행적인 인터뷰) 안 좋아.

 

조연호어렵게 묻는 것도 싫고, 어렵게 대답하는 것도 싫고.

 

박판식상우 형이 일단 너무 어렵게 질문했어. 딱딱하게.

 

채상우, 이제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할 거야.)

 

박판식우리끼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 말야. 술자리에서 다 얘기해놓고선. 이건 꼭 사기치는 것 같고. (웃음) 닭살스러움을 빨리 이겨내고 해야지. 사진까지 막 찍어대고, 이건 진짜 아니다. 이거(녹음기) 꺼요. 녹음 다 지우고 다시 합시다.

 

조연호아니, 판식 씨, 우리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빨리빨리 가자구.

 

박판식알아서 해. 형이 편집을 해.

 

 

 

<형이 편집을 해>라는 말은 인터뷰 내용을 알아서 재조정하라는 의미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번 인터뷰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은 <이건 써라>, <이건 빼라>, <이 부분은 알아서 편집해라> 등등의 말을 했는데, 1차 녹취본을 보고는 셋 모두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다만 이번 인터뷰를 읽는 분들께 부탁하고 싶은 점은 이런 대화들 뒤에 간혹 숨어 있는 의미를 잠시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채상우나도 얘기 좀 할게요. 시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인터뷰 자체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게 어쩌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데요.

 

조연호맞아.

 

채상우그런데 인터뷰의 관행들에 대해 얘기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이 다시 나를 보고 낄낄 웃었다. 내 말투가 또 인터뷰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다가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버렸다.) 하던 얘기 계속하죠.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시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근래 젊은 사람들의 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우리 세대와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조연호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아? 세대가 다른데.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야. 난 그게 진보적인 거라고 봐.

 

박판식, 자신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해설을 펴야 되는. 진짜. .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의 해설을 쓴 평론가는 김춘식 선배다. 김춘식 선배와 우리 셋의 인연 또한 오래되었는데,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 그리고 내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도 김춘식 선배 때문이다. 1998년 김춘식 선배가 동국대에서 야간 강좌 수업을 하고 있을 때, 박형준 시인, 김선우 시인, 김진완 시인, 조연호 시인 등을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박판식 시인은 그 당시 김춘식 선배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동국대 아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 나도 우연히 합석하게 되어 셋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눈이 내렸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채상우윗세대 시인들을 만나면 간혹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개탄하시더라구요. 자기가 쓴 시인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젊은 시인을 더러 봤다고 말이죠.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박판식박상수 시인이 와 있으면 분위기가 편해지면서 대화하듯이 될 텐데. 시론이니 이런 거 말고, 왜 시를 쓰는가, 시 쓸 때 어떤 식으로 쓰나 이런 이야기들.

 

조연호그러니까 나도 이 사람(채상우)이 왜 자꾸 딱딱하게 얘기를 할까 그게 참 궁금하거든?

 

박판식자연스럽게 풀어나가요. 읽는 사람도 편하게 읽게. 형이 예전에 김록, 김행숙 시인 인터뷰한 방식대로 딱딱하게 진행하니까 고뇌라니까요. 그래도 그때는 김록 시인이 갑자기 <짝짝이, 짝짝이> 그래서 분위기가 확 풀어지면서 좀 나았지. 형은 참.(김록 시인의 <짝짝이 사건>에 대해서는 퍼슨웹의 이전 인터뷰들 가운데 <사춘기의 마녀들김록·김행숙 시인>을 참조하기 바란다.)

 

조연호그런데 그 인터뷰도 장난이 아니었어. 그러지마. 상우 씨. 어렵게 얘기들 하더만.

 

박판식진짜 힘들어 죽겠데. 특히 김행숙 시인, 그리고 채상우. 둘이 배운 게 너무 많아. 우리나라 박사과정생들이 시를 죽인다. 첫 번째 장 제목. (웃음)

 

채상우난 수료했고, 김행숙 시인은 학위 받았어. 그리고 뭐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조연호이거(<우리나라 박사과정생들이 시를 죽인다>) . 반드시. 고딕체로 해 가지고.

 

김회량자리 바꿔서 사진 찍으면 안 될까?

 

박판식 ▒ (김 디자이너에게) 이젠.

 

채상우요거 써, 저거 써 하지 마세요. 다 쓸 거예요. 했던 얘기 고대로 다 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갑자기 진행자한테 딴지 걸었다고 다 쓸 테니까.

 

조연호 ▒ (재미있어 죽겠다는 목소리로) 알았어. 알았어. (웃음)

 

김회량자리 좀 바꿔서 찍어.

 

조연호 ▒ (김 디자이너에게) 아이, 알았어요.

 

김회량나도 (사진 찍기) 힘들어.

 

채상우형은 1994년도에 등단했는데, 왜 이제서야 시집 나온 거예요? 10년이나 지났는데.

 

조연호아는 얘기는.

 

박판식아는 얘기는 하지 마요. 딴 사람들한테 알리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채상우난 자세히 몰라.

 

조연호솔직히 그 얘기는 타인들한테 알려지는 게 싫어.

 

박판식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조연호그게 좋은 일도 아니고.

 

박판식자연스럽게 나중에 잘 꼬드겨서 그 얘기가 나오도록 해야지. 그러면 진실한 말이 나오잖아요.

 

조연호이거(캔맥주) 드셔.

 

박판식 ▒ (김 디자이너에게 캔맥주를 내밀며) 누나, .

 

김회량다들 먹는 거에만.

 

박판식일단 먹어. 일단 먹자. (조하혜 시인은) 갔네.

 

채상우근데 왜 다들 카스를 좋아하지?

 

조연호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박판식.

 

채상우하이트는 안 마시고.

 

조연호그보다도 음악에 대해서 좀 물어봐.

 

채상우지금까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산만한 인간들은 처음 보네.

 

조연호아하!(맥주를 마시고 나선) 빨리 물어. 술 먹고 인사불성 되기 전에.

 

채상우질문을 하면 거기에 대해 충실하게 답변할 생각은 안하고 다른 얘기나 하려고 들고 말야.

 

조연호 ▒ (조하혜 시인에게) 이거 드세요. (조하혜 시인은 그동안 잠시 출판사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김회량다들 오징어 물고 있고 말야. 사진 찍으려고 하는데.

 

조연호난 사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판식 씨한테.

 

박판식 ▒ (김 디자이너에게) 사진기 내려 놨다가 나중에 찍어요.

 

김회량 ▒ (단호하게) 안 돼.

 

박판식서로서로 물어가면서 할테니까, (상우) 형은 중간중간에 이야기 조율하고 그렇게 해요.

 

김회량술 먹으면 얼굴이 뻘개져서 안 돼. 지금 찍어야 돼.

 

박판식우리끼리 문자 자주 주고받잖아. 이 시는 어떻다 하고 말야.

 

조연호사랑 표시(예컨대 <♥> 이런 문자) 넣어서.

 

박판식, 사랑 표시 넣어서.

 

채상우, 얘기할 거 많으시다메요?

 

조연호?

 

채상우판식이 시에 대해 얘기할 거 많으시다메요?

 

박판식제가 형한테 질문할 것도 많아요? 옛날에, 기억나죠?

 

조연호, 할 거 많지.

 

박판식우리의 첫 번째 인연. 1998년도에 만났지. 등단하기 전에.

 

조연호즐거운 시간이었어.

 

채상우 (연호 형을) 기억 못하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그 자리>란 앞에서 설명한 1998년의 그 술자리를 뜻한다.)

 

박판식. (채상우)도 있었어. 그래서 이 대담은 정상적인 대담이 될 수가 없어. (웃음)

 

화남에서 당나귀를 타다

 

 

 

조연호판식 씨 시 중에 「화남풍경」있잖아? 예전에 판식 씨한테 <화남>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안 가르쳐주더라고. 뭔데?

 

박판식  신비주의 컨셉이에요. (웃음) 이건 농담이고.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박판식, 「화남풍경」전문, 『밤의 피치카토』

 

 

 

조연호   이게 어느 지명인 것 같은데, 혹은 없는 지명일 수도 있고.

 

박판식.

 

조연호  그렇지? 내가 볼 때는 없는 건데. 이미지상으로 만들어낸 것 같은데.

 

박판식   그때 얘기해줬잖아요.

 

조연호   나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박판식  그때 비 오는 날 걸으면서 얘기해줬잖아요.

 

조연호   아무 의미 없다고.

 

박판식  . 아무 의미 없어.

 

조연호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화남>이라는 말은 굉장히 잘 어울려. 왜냐하면 무슨 뭐, 화북 지방 이런 식으로 말야, 만주, 북만주라든가.

 

박판식   만약 화북 그랬으면 백석이라든가, 그런 시인 생각나지 않겠어요?

 

채상우화남하고 화북은 완전히 틀리죠.

 

박판식  , 완전 틀리죠.

 

채상우화북은 뭔가 대단히 선이 굵은 서사가 있을 것 같은 지명이죠.

 

조연호  그러니까 화남에 대해.

 

박판식   (화북이라면) 당나귀보다는 말이 어울리고.

 

조연호  화북에 대한 화남, 이런 형식으로 쓰지 않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 시가 웃긴 게 제목을 이렇게 붙이고 나니까 백석 시처럼 보이는 거야.

 

박판식.

 

조연호   백석 시의 한 장면이 막 떠오르고 말이지. 당나귀를 끌고 말야. 북만주로 가는.

 

채상우백석 시 보면 당나귀가 나오죠.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 마신다

燒酒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동순 편, 『백석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7

 

 

 

박판식소재적인 측면에서 당나귀를 말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시인들이 있을걸.

 

조연호그런데 쭉 시를 읽어보니까 그렇지는 않다라는 판단이 들어.

 

박판식어제 김기덕이 앙코르 기행 다큐멘터리에서 당나귀 타는 거 나오던데. 청송에서. 청송에서 당나귀를 키우더라구요. 김기덕이 당나귀를 타는데.

 

채상우김기덕? 뭐 하는 사람인데?

 

박판식영화감독요.

 

채상우, 영화감독.(이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네 명 모두 어이없다는 듯 픽픽 웃었다.)

 

박판식김기덕이 그걸 탔는데, 되게.

 

채상우 ▒ (계속 깔깔대며 웃는 김 디자이너에게) 괄호 하고 써넣어야 되거든.

 

박판식착하고 양순한 동물이라고 그러는데. 사람이 그걸 타니까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수레나 끌게 하고 그러면 또 모를까. 그 동물 몸 위에 사람이 직접 올라가 타는 걸 보니까.

 

조연호그 얘기 하니까 생각난다. 얼마 전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 있었잖아?

 

박판식형도 봤어요?

 

조연호.

 

박판식저도 봤는데. 진짜 좋더라.

 

조연호. 멋졌어. (채상우에게) 안 멋졌어? 나는 멋졌는데.

 

박판식아유. (정말 좋은 영화죠.)

 

채상우난 못 봤는데.

 

박판식. 그 영화는 애인하고 안 봐도 돼.

 

조연호그 감독 이름(바흐만 고바디)은 생각이 안 나는데, 키아로스타미 있잖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하고 <체리 향기> 만든 감독 말야. 그 감독 조감독이었는데, 이 사람은 키아로스타미의 미학이 싫었던 거야. 왜냐하면 키아로스타미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해서 너무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반기를 들다가 결국 뛰쳐나왔어. 뛰쳐나와서 만든 게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인데, 정말이지 무슨 치장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진짜 현실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A Time For Drunken Horses)>은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2000년도 작품이다. 그리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Where Is The Friend’s Home?)> <체리 향기(The Taste Of Cherry)>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87, 1997년 작품이다.

 

 

 

 

 

 

 

 

박판식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너무 좋더라. 현실만 있는데, 미학적이잖아요? 그런 거야 말로 진짜 뛰어난 기법이지.

 

조연호난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의도하진 않았는데, 무의식 중에 키아로스타미와 비교를 하게 되더라구.

 

채상우판식이 시를 보면서요?

 

조연호아니, 당나귀 얘기가 나왔길래 하는 말이야. 지금 얘긴 판식 씨 시하고는 상관없어. 하여튼 결론은 두 가지 다 뛰어나다는 거야. 그러니까 키아로스타미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을 미학적인 틀로 포장한 것이나 미학은 없지만 현실만 가지고 미학적으로 보여질 수 있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다 뛰어나다는 걸 난 깨달았어.

 

박판식맞아요.

 

조연호그래서 두 가지 다 좋더라구.

 

박판식 ▒ (조연호 시인의 이야기에 대해) 말도 쉽게 잘 풀어나가네.

 

조연호당나귀 이야기였어.

 

채상우지금 그 얘기는 연호 형이 형 시에 대해 얘기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박판식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

 

채상우판식이 시 가운데 「주말 저녁」은 어린 시절의 스산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대단히 사실적이잖아요? 그런데 판식이 시의 주류는 사실적인 풍경이 텍스트 전면(前面)에 배치된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에 있다고 전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나 경험했던 일들 자체로 시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화남풍경」같은 경우도 <화남>이 어디냐고 묻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화남>은 연호 형이 아까 말한 것처럼 일종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죠.

 

 

 

 

동생은 잠언을 외우고 있었다, 여름 성경학교

나는 감꽃을 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나의 주, 나의 하느님

주일은 언제나 맑았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주여

나는 동생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 한다

동생은 성경학교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

엄마의 부업은 끝이 없어 낚시 바늘 만들기에 바쁘시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달 전구를 만드실 거다

나는 다짐한다 겨울이 오면 꼭 우리 방 창문에

빨갛고 노란 셀로판지를 넣어 주리라

나는 빵 부스러기를 올려놓고 기다린다

오래지 않아 새들이 날아와 찍어 먹을 나의 삶

그 동안 나는 주워온 껌종이를 하나 하나 펴놓고 냄새를 맡을 것이다

이건 국화 냄새, 이건 커피 냄새, 그리고 이건,

내일은 주일

엄마는 밀린 잠을 잘 것이다, 교회에서 소보르빵을 쥐어들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박판식, 「주말 저녁」 전문, 『밤의 피치카토』

 

 

 

조연호  그렇지. 그 상(). 그런 점에서 판식 씨와 나는 비슷한 부류야.

 

채상우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조연호  난 비슷하다고 보는데. 이미지를, 혹은 이미지에.

 

박판식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시를 쓸 때 미리 제목을 정해놓고 쓰는 게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나 이미지의 흐름에 따라서 그리고 그 흐름들을 더 넘어서 말이죠, 의식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무의식 같은 것에 따라 쓰는 거죠. 무의식의 층위가 오히려 나를 이끌어서 어떤 시적인 공간을 형성해나갈 때 전 그냥 그것에 따라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 만약 의식이 개입하게 되면 그 흐름이 다 깨져버리고 갑자기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다 뭉뚱그려서 다시 시작해야 되잖아요? 제가 시를 쓰는 건 그림을 그린다고 치면 다 그려놓고 난 뒤에 제목을 다는 셈하고 똑같아요. 처음부터 제목을 달아놓고 그리거나 혹은 한참 그리다가 <, 이 제목이면 좋겠는데> 이렇게 돼버리면 그 순간 의식의 층위로 달아나버리기 때문에 시가 안 좋아질 수 있잖아요? 「화남풍경」도 마찬가지예요.

 

조연호  그건 사실 나하고 동일한 방법인데, 거기에는 위험이 좀 있어. 뭐냐 하면 어떤 땐 좋고 어떤 땐 안 좋을 수 있다는 거야. 왜냐하면 내 의식이라는 거, 혹은 무의식이라는 거 그 둘을 총합해서 시를 순간적으로 딱 뽑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지. 그래서 어떤 땐 좋고 어떤 땐 안 좋을 수 있어. 그에 대한 대책을 난 인상주의에서 찾았는데,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을 보지만 그 순간에 매어 있지 않는 게 아니야. 그 순간의 감흥을 수정하고 고치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한번 어떤 시적 뉘앙스를 잡으면, 그 뉘앙스를 끊임없이 극대화시키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야. 난 시에서도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은가 싶어. 판식 씨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무의식에만 의존해서 시를 쓰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박판식   , 맞죠.

 

 

 

 

 

조연호  판식 씨 시를 보면 나보다는 서사가 더 탄탄하고 좋아. 그런데 나하고 비슷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내가 판식 씨 시에서 좋아하는 방식은 개연성이 없는 듯한 구절이 시 중간에 툭툭 있는 거, 그런 게 난 좋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면 판식 씨 시집 중에 「우연한 수확」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표면적으론 돼지 잡는 얘기거든. 돼지 잡는 얘기가 앞부분에 계속 나오다가 갑자기 <나는 새해 선물로 붉은 털실로 짠 보드라운 장갑 한 켤레를 원한다>(박판식, 「우연한 수확」, 『밤의 피치카토』)라는 구절이 생뚱맞게 나와. 그런데 난 이 구절에서 감명 받았어. 난 이런 스타일이 좋아. 표면적으로 보기엔 개연성이 없는 듯한데, 그러나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스타일 말야. 그러면서 일률적인 것으로부터 확 벗어나 있는 스타일. 난 이걸 보다가 <, 이 부분은 참 좋은 구절이다>라고 생각했어.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잠 속에서 눈을 뜨는 일은 무섭다

수확철을 맞아 손길들이 모두 분주하다

지켜보는 사람은 나까지 모두 두 명이다

도살된 수퇘지의 그림자와 빛을 나누는 역할을 맡았다

하필 수퇘지도 이빨이 날카로워지는 계절이다

내 가느다란 그림자가 수퇘지의 이빨에 걸려 무한정 늘어나고 있다

숫돌에 잘 갈린 칼이 슥슥 수퇘지를 면도하고 지나간다

공중에 떠오른 수퇘지의 발굽이 칼날의 움직임에 따라 자꾸만 헛발질한다

이쯤에서 돼지의 피를 보는 일은 나쁜 징조다

수퇘지의 몸은 무겁지만 연안의 파도처럼 풍요롭게 출렁인다

대빗자루 같은 세찬 물살로 외삼촌이 검은 털이 옹골진 수퇘지의 몸을 씻어낸다

털 뽑힌 수퇘지는 무르익은 복숭아처럼 진실한 분홍빛으로 넘실거린다

끈질긴 등에도 뜨끈뜨끈한 돼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새해 선물로 붉은 털실로 짠 보드라운 장갑 한 켤레를 원한다

찬 배() 속처럼 흰 수퇘지의 배에는

오래 전 거세된 남성이 차갑고 온순한 채찍자국으로 남았다

죽은 수퇘지의 밤이 무게를 더하며 깊어간다

출산으로 잔뜩 고무된 우리 안에서는

암퇘지의 부풀어 오른 젖꼭지에 게걸스러운 아홉 마리 새끼가 매달린다

 

―박판식, 「우연한 수확」전문, 『밤의 피치카토』

 

 

 

박판식   연호 형 이야기에 이어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사람들 시를 보면 환유 가지고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환유적인 시 쓰기에도 두 가지 층위가 있는데, 하나는 한 문장 안에서 일상적인 어법들을 비껴나가면서 만드는 거고, 또 하나는 전체 시의 틀을 정해 놓고 문장끼리 부딪히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주 낯설지만 개연성 있는 풍경을 끝없이 지향해나가고 있을 때는 미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 환유는 말장난에서 그치지 않고 의식의 층위 밑의 어떤 것, 시적인 것, 진실한 것, 혹은 아름다운 것, 그런 걸 향해서 갈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조연호  층위가 넓어진다는 표현이 아마 더 맞을 거야. 의미망이 좀 더 넓어지는 형태.

 

채상우판식이가 방금 환유의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얘기했는데, 전자는 다분히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시 쓰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에 비해 후자는 시인이 시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임하는가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쉽게 말하자면 세계관의 문제인 거죠. 그래서 그 둘은 층위가 다른 얘기라고 할 수 있겠고, 후자는 시적 진정성과 관련된 이야기인 셈이죠.

 

박판식   잘 푸네. 말들 잘해요.

 

조연호  내가 층위가 넓어진다고 말한 건 어떤 문장 하나가 시 속에 들어왔을 때 낯설게 파생되는 <효과>에 대해 얘기한 거야.

 

박판식   연호 형이 저한테 선생 노릇을 한 시가 몇 편 있는데. 형 시를 보면 지금은 그 원형들이 다 흐트러지고 깨져 있고, 전혀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데.

 

조연호  난 많이 고치니까.

 

박판식시가 잘 쓰여질 때를 생각해보면 의식의 층위 이전의 것들이 시 속으로 막 길어 올려지고 그러는데, 그럴 때 시가 훨씬 아름다워지고 미학적이 되잖아요? 그런데 의식이 개입하면, 이를테면 <이건 내가 생각하기엔 내 눈에 뻔히 보여>, <지루해> 이런 생각이 들어서 바꾸게 되면 오히려 예전에 좋았던 점들이 깨져버리더라구요.

 

조연호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구.

 

 

내 사랑 미나

 

 

 

김회량상우 씨, (사진) 하나씩만 있으면 돼지?

 

채상우.

 

김회량그럼 다 됐어. 이제.

 

조연호낮술부터 먹고 와가지고.

 

박판식  (회사) 일찍 마쳤나 보네요? 오늘은.

 

조연호 ▒ (술을) 점심 때부터 먹었어.

 

박판식  아휴.

 

조연호   개차반 인생이야.

 

박판식  (김 디자이너에게) 누나, 맥반석 계란은 왜 안 사왔어?

 

김회량없대. 골뱅이 사오려다 말았어.

 

박판식  , 이제부터는 제 시 말고 형 시 이야기해요. 제가.

 

조연호난 판식 씨 시 중에 「주말 저녁」하고 「장지」가 제일 좋았어.

 

박판식  이게 엉뚱한 점이라니까요. 왜냐하면 「주말 저녁」하고 「장지」는 이십대 초반에 쓴 시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저 스스로는 그런 시에 대해서 지루하고 밋밋한 세계라고 여기고 있는데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거예요. 몽환적인 세계를 끌어나가다가 중간에 그런 시들, 옛날에 썼던 서정적인 시들 있잖아요? 그런 시들을 집어넣으면 역설적으로 신선하게 느끼더라구요.

 

 

 

입 벌리고 잠든 아버지

힘없이 누워 있는,

사실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엉뚱하게도 감자 캐던 날들을 떠올린다

쭈글쭈글한 반쪽의 감자 대신

산비탈에 할머니를 묻고

플라스틱 도시락 그릇이며 젓가락을 파묻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꼭꼭 밟아도 검은 연기가 땅 위로 새어 나온다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먹는 저녁

(불쌍한 내 식욕을 부디 용서하길)

기름 먹은 누런 봉지가 뜯겨지고

노릇노릇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지나간 신문에 눕혀진다

아무 말 없이 통닭껍질에 묻은 활자를 뜯어내는 어머니

지친 아버지의 턱이 아래위로 삐뚤삐뚤 움직인다

 

경북 능금상자 하나를 겨우 채운 옷가지들

팔다리 모양대로 잘 접은

가벼워진 할머니의 영혼이 한 줌 연기로 사라진다

나는 어떤 미풍이 할머니를 데려가는지 보고 싶다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

집을 뒤덮은 어지러운 줄기들이 받침대도 없이

자꾸만 공중으로 올라간다

 

―박판식,「장지」 전문,『밤의 피치카토』

 

 

 

조연호사실 난 이런 경향의 시를 좋아하지 않거든. 전통의 틀 안에 들어 있는 시 말야. 그런데 왜 이 시는 좋을까? 그건 내 성향이라기보다는, 이 시집(박판식의『밤의 피치카토』)이 가진 배열의 장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박판식   형도 시 배열에 어느 정도 신경 썼죠? 시집 전체의 서사에 대해서 말이죠. 중복되는 시들은 빼고 그러면서. 음악 앨범 만들 때도 배열에 신경 쓰지 않나요?

 

조연호예전에 술 마시면서 그 얘기했을걸. 시집에 실릴 시들의 순서를 어떻게 정했는지.

 

박판식  , 맞아. 그 이야기해 줘요. (채상우에게) 못 들었죠?

 

채상우. 어쨌길래.

 

조연호도저히 순서를 정할 수 없어서 제목만 다 프린트한 다음에 칼로 다 잘랐어.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해가지구. (웃음)

 

김회량 ▒ (황당하다는 듯이) , 뭐야!

 

박판식   뽑히는 순서대로. (웃음)

 

조연호. 그렇게 해서 뽑히는 순서대로 실었어. 시 제목이나 시 내용이 동일한 것들은 붙여 놓고. 그냥 그거야. 남들이 들으면 참 우습겠지.

 

채상우정말 그랬어요?

 

조연호.

 

박판식  그런데 제 생각엔 형 시집 중에 그런 배열 방식하고는 상관없이 넣은 시가 있을 것 같아요.

 

조연호있어.

 

박판식   「왼발을 저는 미나」는 맨 마지막에 일부러 넣은 거죠?

 

조연호. 「왼발을 저는 미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야. 내 시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지.

 

박판식   이 시에서 <미나>가 누구냐고 묻는 건 우문이잖아요?

 

조연호그건 정말 웃긴 거야. <미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살아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지.

 

박판식  이 시를 보고 박상수 시인은 참 좋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던데. 저는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층위가 있다고 이야기했었고. 그런데 다시 보니까, 사람이 귀가 얇아서 그런지 몰라도 형 말을 듣고 보니까, 그리고 형을 알고 보니까 시가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만약 형을 모르고 「왼발을 저는 미나」를 읽었다면 제 나름대로 전혀 다르게 보았을 거예요. 형을 알고 보니까 이 시가 마음 아프게 보이더라구요.

 

 

 

왼발을 저는 미나, 미나는 지금 페리호를 타고 3시간 남짓 떠나는 물 위의 어떤 여행. 미나의 허무한 이름들은 늦여름까지 계속 산등성이를 뒤덮는다. 백사장 끝에 서서 미나가 구토한다. 깨진 창문은 아름다웠는데, 방 안에 꾹꾹 찍힌 구두 발자국들은 아름다웠는데, 방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조연호, 「왼발을 저는 미나」 전문, 『죽음에 이르는 계절』

 

 

 

조연호사실은 설득용인지도 모르겠어. 왜냐하면 내 시는 여러 가지 것들이 중첩되어 있거든. 그 중첩되어 있는 것들의 알맹이를 보여주는 건 시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데, 그 알맹이, 진짜 아무런 층위 없는 알맹이 하나를 보여주고 싶었어.

 

박판식제가 그 말 했었잖아요. 이 시는 진짜 알맹이라고. 시집 배열 방식만 봐도 형이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뭐 초현실주의자나 다다나 이런 사람들이 했던 방식이 그런 거잖아요? 무의식에 있어서나, 미적인 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나 어떻게 그런 세련된 방식을 쓸 줄 알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 초현실주의적이다 다다적이다 하는 시인들은 많지만 재기발랄하게 혹은 자기 시를 가지고 형처럼 유쾌하게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조연호그건 답이 있어. (정말 단호한 목소리로) 난 시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어쨌든 난 그걸 가지고 놀아야 되거든. 재미가 없으면 안 돼. 재미없으면 버려야지.

 

박판식그런 게 참 재미있는 점 같아요. 내용은 서정적이고 진중한데, 그걸 다루는 방식은 유쾌하다는 게. 그런 점이 형의 장점인 거 같아요.

 

조연호그건 판식 씨도 마찬가지야.

 

박판식그리고 형 시집을 보면 도덕이 없어요. 예전에 연호 형이, 제가 등단하기 전에 선생 역할을 했던 이유가 그런 데 있는 거 같아요. 도덕 없는 서정시. 우리나라에는 드물잖아요. 그런 점이 아주 좋아요. 이번에 또 봐도, 다시 또 읽어봐도 그런 점이 너무 좋아.

조연호그걸 좀 다르게 얘기하면 허무주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거칠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도덕 없는 아름다움이라, 그건 이미 김종삼 시인이 한 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김종삼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채상우도덕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인가요?

 

조연호판식 씨가 얘기하는 도덕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통념상의 도덕.

 

박판식그렇죠.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시에 적이 있다면, 특히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시인들한테 적이 있다면, 『좋은 생각』이나 『샘터』같은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착한 생각들이죠.

 

 

 

 

 

 

 

조연호, 맞아, 맞아.

 

박판식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조연호착한 척하기.

 

박판식그런 류의 생각. 그런데 시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그런 척한 척하기라는 건 시인이란 세계에서 악당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도 되죠.

 

조연호그래, 착한 척하기는 시인한테는 최대의 적이야.

 

박판식진짜 악당보다 대적하기가 더 어려운 상대죠. 서정성을 지닌 어설픈 착함이나 도덕으로 무장한 착함과 싸운다는 건 정말 어렵잖아요? 그래서 시인이라면 그런 류의 착한 생각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그게 뭔가 계속 되묻고.

 

조연호의심해야 돼. 시인은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이야. 어쩔 수가 없어.

 

박판식 ▒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같은 영화가 좋았던 이유가 일부러 따뜻해지거나 착해지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잖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다 보고 난 뒤에는 사람 마음속에 따뜻함이나 착함 같은 걸 저절로 조금이라도 생기게 만드니까. 그건 좀 믿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죠.

 

채상우그야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착한 시를 더 좋아하죠. 읽기 편하니까.

 

조연호그러게 말야. 참 이상한 거야. 현대시의 방향은 세계와 불화하는 쪽으로 자꾸 가고 있는데 대중이 찾는 시는 착한 시란 말이지. 비유를 들자면, 난 평생 일을 하는데도 나한텐 돈이 없는 거와 같아. 그런 것처럼 들려. 어이없잖아. 너무. 허이.(허탈하다 못해 망연자실하게 내뱉는 웃음소리)

 

채상우뭐 세상일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웃음)

 

박판식그런데 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염세적이기까지 하잖아요. (웃음)

 

조연호판식 씨나 나나, . (웃음)

 

박판식 ▒ (신발 밑창을 보면서) (밑창을) 붙였잖아.

 

조연호내가 내일 (신발) 사줄게. 불쌍해서 못 보겠다니까.

 

박판식밑창 두 번 갈았는데. 말짱해졌어. (조연호 시인이 자꾸 들여다보니까) , 말짱해졌어요.

 

조연호 ▒ 275쯤 될까?

 

박판식됐어요. . 아예 단단한 걸로 해주더라구요. 상우 형, 이런 건 쓰지 마요. 그 뭐냐, 일부러 없어 보이는 척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것도 너무 싫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도 쓰지 마요. 자발적 가난이니 그런 말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도 가짜 도덕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한테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시 쓰는 사람한테는 그런 의식 자체가 아예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채상우짜증나죠.

 

박판식, 이제 끊고.(자발적 가난에 대해서는 이만 말하자는 뜻.)

 

조연호인터뷰 진행자가 말야, 지금 자기 주관이나 읊고 말야, 뭡니까? 이게.

 

박판식, 이제 원래대로 돌아갑시다. (웃음) 이 부분은 싹 자르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사실은 해야 하는데, 워낙, .

 

조연호적들이 생겨.

 

채상우그냥 넣죠. 물론 신변 보장은 할 수 없죠.

 

박판식만약에 넣을 거 같으면 <짜증납니다>도 넣어야 돼. 상우 형.

 

채상우싸가지 없다고 그러겠지.

 

박판식그러니까 이것들이, 어린 것들이 모여가지고. (웃음)

무끼와 뽕끼

 

 

 

채상우도덕이나 윤리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80년대에 쓰여진 시들은 대부분 지극히 윤리적인 자세에서 쓴 시들이잖아요? 그런 시들은 이제 안 읽히죠. 그런데 아방가르드 쪽……. (잠시 침묵) 그런데 무슨 얘기하려다 이렇게 됐지?

 

박판식    맥락을 잘 찾아봐.

 

조연호글쎄 제대로 된 인터뷰가 아니라니까. (웃음)

 

박판식   그런데 나중에 보면 자기가 다 알아서 그럴싸하게 다 정리하더라고. (웃음)

 

조연호너무 재미있다. (웃음) 다음에 또 인터뷰하자. (정말 얄밉게 웃음)

 

박판식    이거 깨져버렸다. 외피가. , 왜 웃겨요? (상우) . 그런데 이거는 내면하고는 상관이 없잖아요?

 

 

 

박판식 시인이 말한 <이거>란 조연호 시인의 음악 앨범 CD 케이스를 뜻한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이야기의 맥락을 놓쳐버리자 모두 깔깔대고 웃었는데, 그 와중에 박판식 시인이 조연호 시인의 음악 앨범 CD를 깨뜨린 것이다. 참고로 지금 흐르고 있는 음악은 모두 조연호 시인이 직접 제작한 곡들이다.

 

 

 

조연호그러엄. 본질이 중요한 거야.

 

박판식그래도 이게 깨지니까.

 

조연호껍데기가 중요할까!

 

박판식형 시집을 보면 무기(巫氣)라곤 없거든요. 무속적인 느낌이나 그런 건 전혀 없고 진짜 맑은 서정시인데.

 

조연호시는 어쨌든 간에 정신의 영역 아냐? 내가 그때 판식 씨한테 얘기했지만 난 진짜 무병(巫病)에 들고 싶었거든. 신이 내렸으면 하고 원했어. 그것도 간절히. 그런데 안 와. 안 오는 거야. 신이 내려서 미쳐 날뛰는 사람들 보면 정말 너무 부러웠어. 내 정신이 멀쩡한 건 너무 합리화가 돼버린 때문이지. 그러니까 외적인 것으로만 자꾸. 외적인 것으로써 무(), 무속(巫俗)을 찾으려고 했지.

 

박판식그런데 어설퍼질 수도 있어요. 조심스러워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죠. (예전에) 형이 선곡해준 음악들을 들으면서 느낀 건데.

 

조연호 ▒ (자신의 음악 앨범을 가리키며) 그런데 이건 더 할 걸.

 

박판식그러니까요. 저한테 선곡해준 음악들보다 더 무기 있는 음악일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말했었잖아요. 어릴 때 한 집 건너 한 집이 무당집이었다고.

 

채상우, 별별 걸 (다 부러워하네.)

 

박판식학교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맨날 옆집에서 굿하는 거예요. 만약 옆집에서 굿 안하면 그 옆집에서 하고 있고 말이죠. 그런 걸 맨날 보고 다녔거든요. 그게 제겐 일상생활이었어요. 그런 일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또 시인의 광기하고도 상관없는 것이고. 진짜 몸 아프고 가난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 내리는 게 무기인데. 전 그런 거 보면 좀 싫더라구요.

 

조연호나도 알아. 주위에 무병 걸려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몇몇 봤어. 그런데 내가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정신적인 일탈이라든지 무속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근본적으로 끌려서 그러는 거야. 막 꽹과리 치고 화려한 원색 옷, 그 유치한 원색 옷을 입고 날뛰는 춤사위들이 멋지잖아? 그런 것이 한번 되어보고 싶었던 거지.

 

박판식발터 벤야민 평전 읽다 보니까 그런 게 나오더라구요. 옆에서 의사가 주관하는 가운데 적절한 양의 환각제를 환자에게 투입하는 장면이. 그리고 환각제 투입하고 난 뒤에 그 상황을 기술하고 그러는 거 읽었는데, 형이 방금 말한 거하고 비슷한 걸 느꼈어요. 어떤 외적인 것에 의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요소들이 발아되어 나오길 원하잖아요? 그러니까 형의 음악은 내부에서 발아가 안 되니까. 왜냐하면 형이 지극히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조연호그렇지. 아주 정확한 말이다. 내부에서 발아가 안 되니까 외부적으로 만드는 거야.

 

박판식그러니까 그게 세계하고의 불화를 뜻하는 거죠. 이 세계가 진짜 싫고 살 만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시인은 괴로운 거잖아요? 그 괴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라고 물을 때 세계하고의 불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연호다시 말하면, 시라는 것은 어쨌든 내 양심이 벗어나기 힘든 정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내가 직조할 순 없어. 그러나 내가 이건(음악) 직조할 수 있단 말이야. 이런 차이인 거지. 이건 직조한 거야. (웃음) 그러니까 가볍게 들어줘. 사실 별로 안 좋아.

 

박판식일단 들어보고 이야기해볼게요. 그런데 앨범 CD 외피에 박생광(화가, 1904-1985, 대표작으로 <무당>(1981), <무속>(1983), <토함산 해돋이>(1984) 등이 있음) 그림까지 넣은 걸 봐서는.

 

 

 

조연호박생광을 너무 좋아하니까. 난 예전부터 좋아했는데, 왜 사람들이 왜색, 왜색 그러는지 모르겠어.

 

박판식   박생광 저도 좋아해요. 그런데 박생광의 그림 세계가 많이 변해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서양화 색깔을 많이 띄고 있다가.

 

조연호정통수묵화도 그리고 그랬어. 이 사람이.

 

박판식    그런데 이 사람 그림들을 보면 소재는 무속적인데 무기라고는 없잖아요. 그런 맑음이 있는 게 사실은 좋은 거거든요. 되게 역설적인 거죠.

 

채상우이 앨범에 있는 곡들은 전부 형이 작곡한 건가요?

 

조연호. 여기에는 아무도 안 들어갔어. 내가 다 한 거야. 누구의 손길도 거치지 않았어.

 

박판식   제목도 형이 다 지은 거죠?

 

조연호. 정말 기대는 하지 마. 별로 안 좋은 거니까.

 

박판식   <붉은 겨우살이>, <모래의 숲>, <알렙>, <시원의 숲>, <나의 나무>, <버려진 인형에게>, <흐르다>, <()>. 눈에 딱 띄는 제목이 두 개 있네. 3, 4. <알렙>하고 <시원의 숲>. <알렙>은 형이 좋아하는 보르헤스의 그 「알렙」(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이죠? 그런데 형 시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웃음)

 

조연호. 보르헤스의「알렙」하고는 상관이 없어.

 

박판식   그런 걸 보면 형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게.

 

조연호 ▒ <알렙>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게. 내 취향도 참 희한하지. 거의 엽기 수준인데, 난 무속적인 것도 좋아하지만 정가(正歌)도 너무 좋아해.

 

박판식   정가라면 그거.

 

조연호선비들이 왜 시조 가지고 길게 빼면서 부르는 노래 있잖아? 그보다 더 좋아하는 건 제례악들, 죽은 혼들에 대한 제사음악들이야.

 

박판식   전생에 뭐가 있었나 보다.

 

조연호그런데 그 제례악이란 게 무속과는 전혀 틀려. 제례악도 무속처럼 신을 영접하는 것이지만, 양식은 너무나도 틀리단 말야. 제례악은 엄격하고 규율화되어 있어. 굉장히 딱딱하고 듣기에 좀 지루해. 한 음 자체를 몇 분씩 길게 뽑는 형태의 음악이거든. (調)도 바뀌질 않고. 그런데 그런 제례악을 들으면서 이것도 좋겠다 싶어서 <알렙>에다가 제례악에서 샘플을 좀 뽑았어.

 

박판식   샘플링했어요? 제례악을.

 

조연호.

 

채상우미안하다. 나 일하고 있거든.(학교 후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중)

 

조연호일이래, .

 

박판식일하고 있대. (웃음)

 

조연호우리나라엔 제례가 두 가지잖아? 문묘제례하고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역대 왕들을 모시는 거고, 문묘제례는 공자부터 시작해서 최치원 등등 이런 사람들 제사 지내는 건데, 나는 개인적으로 종묘제례가 좋더라구. 그래서 종묘제례악 부분이 여기(<알렙>) 좀 나와.

 

박판식   이런 것도 아까 형이 시집 배열 정할 때 통에 넣어가지고 막 흔들어서 무작위로 나온 순서대로 했던 방식하고 똑같은 거예요. 뭐냐면 생의 우연성에 기댄다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한테 어떤 감흥을 순간적으로 주면 그 순간에 충실한 거예요. 그러니까 쾌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거고.

 

채상우제례악 들으면 그런 장면 안 떠올라요? 누가 언제 등장하고 언제 절을 하고 그런 장면들. 그 절차나.

 

조연호아니, 전혀. 물론 그런 양식이 있어. 굉장히 딱딱하게 정해진 양식이 있긴 하지.

 

채상우그렇죠.

 

조연호그렇지만 난 그냥 음악으로 들을 뿐인데. 난 그걸 음악으로 듣지 실제로 절을 어떻게 하는지 어떤 예복을 갖춰 입는지 그런 거엔 관심 없어.

 

박판식   그 지루한 걸 끝없이 듣고 있다는 건 대단한 거죠. TV에 그런 게 나온다 그러면 그거 보고 있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재미있게 보니까 진짜 특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죠. 게다가 그런 지루함 안에서 미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으니 시가 이렇게 특별하지. 연호 형 시집 읽으면 딱 그 생각이 들잖아요.

 

조연호아니, 그건 착각. 그것과 이 시집과는 아무 개연성이 없어. 왜냐하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뿐이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한 것뿐이지. 음악에 대해서는.

 

박판식    형식을 봐요. 첫 번째 시 빼고는 나머지는 한 행이 한 연이잖아요? 그리고 시 한 편이잖아요?

 

조연호산문시지.

 

박판식   대부분의 시가 그렇죠. 여하튼 모순의 인간이라는 건 분명해요. (웃음) 그리고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채상우한 가지씩만 얘기하지.

 

박판식   나중에 정리하기 힘들 거예요. 상우 형이. 여하튼 1998년도 그때 형하고 연호 형하고 저하고, 그리고 이렇게만 본 게 아니라 또 중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김춘식 선배까지.

 

조연호, 그렇지.

 

박판식   그 술자리 기억나요? 김춘식 선배가 야간 강좌 수업할 때 연호 형이 초청돼서 왔을 때.

 

조연호, 김선우.

 

채상우박형준 시인.

 

조연호박형준, 이렇게 셋.

 

박판식   김진완. 김진완 시인까지. 김진완 시인도 왔었어요.

 

조연호그런데 왜 내 기억엔 안 남아 있냐?

 

박판식    기억 안 나죠?

 

조연호안나.

 

박판식   그게 그때는 서로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어서.

 

조연호그 네 명이 모였던 거야?

 

박판식   남 세계가 안 보인 거예요. 지금 보면 그 중에 박형준 시인이나 김선우 시인은 자리도 잡고 그런 반면에 형은 말 그대로. 그래도 진짜 시인의 모습은 연호 형이 제일 가깝잖아요? 이건 연호 형을 띄워주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형은 시인이라는 자의식마저도 없이 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여하튼 즐거운 것 같아요. 김춘식 선배 해설이 안 나와서 둘이 계속 기다리다가.

 

조연호내 시집 해설은 6개월만에 (나온 거지?) 이런 얘긴 쓰지 마. 진짜. (웃음)

 

박판식    이런 얘기는 써도 돼.

 

채상우춘식이 형이 아마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이거(해설)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하나 하고.

 

조연호최현식이라는 평론가가 있어. 너무 고마워서 이번에 시집을 한 권 보내주려고 했는데 주소를 모르겠더라구. 내 시 중에 「모네의 저녁 산책」이라는 시 있잖아?

 

박판식·채상우.

 

조연호그 시에 대한 평을 썼는데, 정말 정확하게 잡아내더라구. 의도한 바를.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전화 통화를 한 번 했었는데.

 

박판식   그 시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시인데. 형 시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시에요.

 

조연호  사실은 잔머리 많이 굴리면서 쓴 시야.

 

박판식   아니, 그렇지 않아요. 되게 잔잔하고 부드럽게, 이음새 없이 쓰여진 시에요. 시가 매듭 없이 쫙 풀어졌어요.

 

 

 

산책이 시작되는 길 위에서 모든 아침은 세상 밖의 것이 된다. 응달 위에 내린 눈이 따뜻하게 익어갈 때 바람은 모인 쪽으로 날아가곤 했다. 나는 산기슭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어둠의 입문서를 읽었다.

모든 산길의 나무는 浮力 가진다. 나는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을 불러 여러 번 캐물었다. 아직도 불지 않겠는가, 배후는 누구냐. 날개 없는 나무가 새의 날개 속으로 날아간다. 집으로 가서 빨래들과 함께 잠들고 싶었다. 이방인들이 편히 쉬는 7일째의 날에 나는 옥수수알처럼 노릇노릇 굳어가는 저녁길을 걸었다. 낡은 책 속에서 읽은 밤의 이목구비가 내 앞에서 뚜렷이 깎이고 쉰소리로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공중으로 떠오른 흙과 돌이 나무의 부레 속에서 함께 맴돌았다.

 

간선도로 끝에서 세상의 본을 뜨는 무딘 쇠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결심이 수난 쓰고 낙엽이 땅보다 더 밑으로 걸어갔다. 오후는 공원과 도살장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을 만들고, 밤은 그 위에 목탄가루를 뿌렸다.

 

나는 모래흙 위에 하늘과, 땅과, 집과, 집과 집이 모여 만드는 天地宇宙 관한 쉬운 이국어의 뜻문자를 썼다. 모든 명료함은 아팠다.

 

나는 아프게 말했고 누구의 말도 읽지 못했다. 붉은, 푸른, 흰 바람이 먼저 순례하고 간 저녁 산책길은 아이들만 남아서 딱지와 고무줄을 흥정하는 흐린 풍경의 것이었다.

 

―조연호,「모네의 저녁 산책」 전문, 『죽음에 이르는 계절』

 

 

 

채상우형 시는 해설 쓰기에 힘들죠. 시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뒤죽박죽이니. 쉽게 말하면.

 

조연호일단 시제가 왔다갔다 하고, 서사도 딱딱 끊어져 있으니까.

 

채상우그렇죠. 그런데 형 시를 읽어 보면 문장마다 시제라든가 이야기가 끊어져 있지만 그걸 입 속에다 넣고 궁글려가면서 가만히 읽어 보면 어떤 흐름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 흐름을 따라 읽어 가면 되는데, 문제는 그 흐름이란 게 설명하기엔 도무지 요령부득이라는 거죠.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시집 중에 형처럼 시를 쓴 경우는 없어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형 시는 마지막까지 내용을 종결짓지 않아요. 예전에 정반대의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시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마 형 시를 보고 맨 마지막 문장에 시의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요소가 없을까라고 찾곤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조연호안 그래도 그때 중간에 말 끊고 틀린 말이라고 얘기하려고 했었어. 내 시를 보고 끝에 의미가 있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전적으로 의미가 없어.

 

채상우그러니까요. 그런데 어떻게든 시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게 시를 읽는 일반적인 독법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형 시는 비유컨대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형 시를 읽고 나서도 이게 뭔가 하고.

 

조연호의미를 찾으려고 하겠지. 그런데 내 시를 내가 다니는 직장 사람들 몇몇한테 줘봤거든. 반응이 너무 재미있는 거야. (웃음) 분명히 이 문장이 끝나면 다음 문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거야. (웃음) 기대했던 내용은 없고, 그 다음 문장을 읽어도 또 그렇다는 거야. (웃음)

 

박판식맞아요. 형 시의 매력을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정확하게 본 거죠. 그런데 그런 걸 머리로 의도한 게 아니라는 점이 좋은 거죠.

 

채상우판식이 시를 보면 직접적인 자기 체험이 녹아 있는 시가 좀 있잖아요? 「주말 저녁」이 아마 대표적인 경우일 텐데 형 시도 보면.

 

조연호난 그런 시가 많은 편이 아닌가?

 

박판식많아요. 거의 대부분의 시의 내용이 가족사하고 애인이잖아요. 소재는 거의 거기서.

 

조연호거기서 거기지 뭐.

 

박판식연호 형이 이번 시집의 세계를 뚫고 앞으로 어떻게 다르게 써나갈 건가에 대해 둘이 술 마시면서 무진장 고민했었잖아요.

 

조연호, 그래. 그때 얘기했잖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기로 했다고.

 

박판식그러니까 앞으로 시를 전략적으로 어떻게 쓰겠다 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했죠. (웃음)

 

 

 

채상우둘 다 대책이 없군.

 

조연호만약에 이 다음 시집이 개차반이야. 그러면 개차반인 거야. (웃음) 그렇지 않고 다음 시집이 좋아. 그러면 이 사람 열심히 노력했구나 이렇게 판단되는 거야. 난 지금까지 시 쓰면서 남들 시선을 의식하면서 쓴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그건 장난감이지

 

 

 

채상우그런 거 있잖아요? ? 내가 말만 하면 진짜 (널부러져!)

 

조연호    ? 얘기해. (웃음)

 

채상우공준 같은 거 말이죠. 한 세대가 공유하는 척도. 예컨대 팔십년대 시인들을 보면 공통적인 신념이나 방향 이런 게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근래 들어 간행된 시집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자면 충분히 찾을 수 있겠지만, 과연 이전과 같이 그렇게 강력한 공준이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묻겠는데, 형이나 판식이나 <, 이 시집은 참 읽을 만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척도는 뭐예요? 물론 그 판단 척도는 다분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리고 그냥 읽어보면 안다고 답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만.

 

조연호    판단 근거 기준이 어떻게 되느냐?

 

박판식   역시 박사과정다운 질문이죠. , 수료지. (웃음)

 

조연호    참 길게 질문한다. 그치?

 

박판식   그렇죠.

 

조연호    엄청 길게 질문하네. 그냥 시 읽는 판단 기준은 뭐냐 이렇게 물어보면 될 걸, 참 길게 질문해. (웃음)

 

박판식   , 어떤 시인의 어느 시가 좋은가,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되는데, 아니면 좋은 시라고 말할 때 나름대로 미적인 기준은 뭐냐, 그냥 이렇게 물으면 될 걸. (웃음)

 

조연호    그런데 그런 질문이야말로 난 진짜 우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답변도 간단하게 하면 되고. 읽으면 돼. 진짜.

 

박판식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웃음)

 

조연호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나 스스로 시에 대한 어떤 규정화된 딱딱한 기준이 있어서 그걸로 남의 시를 보는 건 절대 아니거든. 판식 씨도 뭐 그렇지 않나?

 

채상우괜히 물어봤네.

 

박판식   전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시야가 더 넓은 편이잖아요? 편애는 하는데, 좋은 시면 무조건 좋아하잖아요.

 

조연호    읽어서 좋으면 좋은 거지.

 

박판식   경향에 상관없이.

 

조연호    . 경향에 상관없이.

 

박판식   뭐 리얼리즘 시니 초현실주의 시니 이런 경향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시이고 마음을 움직인다면,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하나라도 있다면 일단 동하죠. 그래서 한 번 더 읽어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전체 형상화나 그 다음에.

 

조연호    판식 씨가 방금 한 얘기 중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동하다>라는 표현을 썼잖아? 난 그게 실은 미적인 것을 움직이는 동인이 아닌가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체계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 내가 무슨 미학주의자도 아니고. 그걸 체계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

 

채상우형이 미학주의자가 아니라구요?

 

박판식   (연호) 형은 미학주의자예요.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가 있는데, 그런 책들이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잖아요? 베스트셀러에 대해 약간의 질투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 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우린 우리가 좋아하는 작은 그룹만 있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가니까. 그리고 최고의 독자는, 최선의 독자는 자신이니까. 아까 말했듯이 시는 장난감이고 하나의 유희이기 때문에 우선은 내가 쓰고 난 뒤에 내가 즐거우면 되는 거니까. 사실 베스트셀러가 되건 말건 상관없는 거잖아요?

 

조연호    그렇지.

 

박판식   그리고 만약 내 주변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시를 읽고 난 뒤에 <, 좋다!>라고 말해주면 좋은 거고, 그럼으로써 시를 매개로 대화도 가능하고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시에 대해 바라는 기준은 이처럼 소박한 건데. 이를테면 그런 것도 있잖아요? 시 한참 공부할 때 이성복이나 기형도의 시집을 보면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런 거요.

 

조연호    .

 

박판식   그런 감정 들게 하면.

 

조연호    그런데 그런 감정이, 이성복이라는 한 시인을 바라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달랐을 거란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복 독자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단 말야.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아까 상우 씨가 말한 기준, 그런 건 사실 판단하기 너무 어려워. 끄집어내서 말하기가.

 

박판식   형 시집을 놓고도 좋은 시를 골라 봐라 이러면, 지금 당장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몇 명에게만 물어봐도 다 다른 시를 고를 거예요. 연호 형부터 시작해서. 그런 점에서 보면 어떤 오해 속에서 미적인 게 싹튼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연호    이 얘기도 좀 그런데, 시인들하고의 인터뷰에서 미학 얘기 나오는 거 참 진부하지 않아?

 

박판식   다 미적인 인간들인데. 기본적으로.

 

조연호    스스로 미적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데.

 

채상우그럴 필요도 있어요. 나는 이런 면에서 미적인 인간이다라고 표나게 말하는 거 말이죠. (웃음)

 

조연호아휴, 우리는 쇼맨십이 없는 인간들이라.

 

채상우그런 생각은 들어요. , 또 말투가 이러네. 가끔 이런저런 대담에 참석해보면, 기성 시인들의 경우는 서로 할 말만 하고 하지 않거든요. 그런 자세가 정석인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전혀 시인답지 않은 태도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런데 형이나 판식이는 지금 전혀 다르니 제가.

 

조연호    그건 분위기 탓도 있을 거야. 예를 들면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이 상우 씨가 아니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 판식 씨가 아니라면 또 다르겠지.

 

박판식    그러니까 우리끼리가 아니면 이런 분위기가 절대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연호 형 시를 보면 이미지도 잔잔하고 여백도 많고 그래서 독자들도 그런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다들 이렇게 망가져서는. 이렇게 수다 떨고 있는 게 그대로 나가면.

 

채상우그런데 형, 진짜 시집 왜 늦게 나온 거예요?

 

조연호    출판사 얘기하는 거 싫어.

 

박판식   그 이야기는 하지 마요.

 

채상우난 몰라. 그 얘기.

 

 

조연호    그런데 왜 안 와? 연락한 거야? 황병승이 왜 안와?

박판식   안 오네.

 

조연호    벌써 여덟 신데.

 

박판식   (채상우에게) 이거(녹음기) 지금 꺼놓으려고 그러지? 아까와서.

 

조연호    속 좁은 인간.(황병승 시인을 가리킴) 삐져가지구. 시집 안 준다구.

 

박판식   그런데 누나(김 디자이너) 우리 서평 누가 쓰기로 했어요?

 

김회량몰라.

 

박판식   몰라? 직원 맞아?

 

김회량몰라. (웃음)

 

채상우가르쳐주면 안 되나 보지. 둘이 들고 일어날까봐.

 

조연호    (김 디자이너를 가리키며) 아까 머리가 제대로 안 됐다고 그래서 열 받았어 지금.

 

김회량몰라이.

 

채상우 ▒ (조하혜 시인을 향해) 뭐 인터뷰가 이러나 싶죠? 그래도 나올 때 보면 그럴 듯해져요.

 

박판식   (채상우) 신발 바꿨네. 귀여운 걸로. 그 뭐냐 엄청난 군화 같은 거 그런 거 벗고 이제.

 

 

 

조연호     어디 저기 한적한 데 가서 낮술이나 먹고 싶다.

 

채상우지금 저녁이야.

 

박판식   시집내고 형하고.

 

조연호      야유회 진짜 언제 가자.

 

박판식   형하고 진짜 마음 탁 다 풀어놓고 술 먹기로 했는데 결과적으론 그렇게 안됐죠.

 

조연호     그렇게 한번도 한 적이 없잖아? 서로 시집에 사인해서 주지도 못했다니까. 그러자고 해놓고.

 

박판식   남들은 엄청나게 많이 해줘놓고.

 

채상우서로 시집 안줬어요?

 

박판식   우린 서로 알아서 출판사에 있는 거 하나씩 빼갔지 사인해서 정식으론 안줬다니까.

 

채상우주지. 지금.

 

박판식   교보 가서 사서 서로 주기로 했지.

 

채상우하긴 한 권이 아깝지.

 

조연호     묵언의 약속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좋은 자리, 좋은 분위기에서 주자 뭐 이런 게 있는 것 같아.

 

박판식   그리고 그게 뭐냐 하면 가난한 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생일 안 챙기잖아요? 그런데 시집 냈다고 출판기념회니 뭐니 계속 챙기라고 하는데, 그런 비슷한 거 안 해본 사람한테는 영 어색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예의라고 해서 잘도 하던데 우리끼리라도 그런 거 안 하는 게, 계속 지연시키는 게 오히려 의미가 있지.

 

조연호     맞아. (김 디자이너에게) 담배 좀 꺼내놔요. 다 줘요. 그냥. 이따가 한 갑 사줄게요.

채상우 ▒ (김 디자이너와 조하혜 시인에게)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고.

 

김회량사귀는 거 맞아. 커밍아웃할거야.

 

조하혜내가 했잖아? (웃음)

 

조연호     둘 다 하면 안 되는데. 한 사람만 커밍아웃해야지.

 

박판식   그렇네. (웃음)

 

김회량나 양성이야.

 

채상우.

 

조연호     상우 씨 맨날 술 취하면 하는 말, <, 여자야.> (웃음) 상우 씨는 가면을 벗어. 인터뷰 진행한다고 여기 앉아 가지고 무게 잡고 말야.

 

채상우내가 언제 그랬어, .

 

박판식   무게 잡는 게 아니고 바보 노릇한다잖아요. 그런데 바보 노릇을 안 시켜주니.

 

채상우 고만 좀 하고, 인터뷰 제대로 합시다.

 

조연호     같이 뛰어들고 싶은데 이러지도 못하겠고, 지금 (죽겠지?)

 

박판식    내버려둬. 그러다 하겠지.

 

채상우나마저 그러면 이 인터뷰 읽는 사람들 괴로워진다니까.

 

박판식   시간은 가고 점점 침묵으로만 쫘악. (웃음)

 

조연호    그 다음부터는 소설 쓰는 거지 그냥.

 

박판식    알아서 써야지 뭐.

 

조연호    좋게 써. 알아서.

 

채상우뭘 좋게 써요.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조연호    <사상 최악의 인터뷰> 그래가지고. (웃음) <더 이상 이런 인터뷰는 있을 수 없다!>

 

박판식   자세도 늘어지고. (웃음)

 

채상우고대로 쓸 거예요. <조연호>라고 쓰고 콜론() 찍고 <헛헛헛헛헛헛헛헛헛헛헛헛> 이렇게.(조연호 시인의 웃음소리를 옮긴 것인데 영 시원치 않다.)

 

박판식    형들 웃음소리나 제 웃음소리나 셋 다 만만치 않아. 이거 나가면 엽기야 엽기.

 

조연호    (박판식 시인에게) , 나더러 지금 뭐라 그럴 게 아닌데.

 

박판식   , 다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까? (웃음)

 

조연호    우리가 마무리하자. 뭔 얘기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박판식   고민된다.

 

채상우네버앤딩 수다도 아니고 진짜 참. 이따 술 마시면서 계속 얘기하고 그래요.

 

조연호    아니 사람들(황병승 시인과 박상수 시인) 올까봐.

 

채상우그런데 형 시나 판식이 시는 일반적인 낭송용 시와는 많이 틀리잖아요?

 

조연호    ?

 

채상우판식이 시는 좀 덜한데.

 

박판식   (조연호 시인에게) 낭송용.

 

조연호    , 낭송. 난 낭송을 염두에 두지 않아. 현대시에서 낭송이 중요한가? 현대시에서는 낭송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박판식   전 또 그런 생각을 해요. 이 부분에 있어서.

 

조연호    물론 이런 게 있어. 그걸 달리 말해 리듬감이라고 한다면, 리듬감은 굉장히 중요하지. 왜냐하면 내 시에는 서사가 없기 때문에 리듬은 정말이지 내게는 생명이야. 하지만 그 리듬은 낭송을 위한 것은 아니야.

 

박판식   내적인 리듬이다! 일반적인 낭송용 리듬이 아니라.

 

조연호    의미도 없어, 서사도 없어. 대체 누가 (내 시를) 읽냐고? 너무 툭 까놓고 얘기했나?

 

박판식   . (웃음)

 

채상우그렇죠. 형 시집을 읽는 방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좋으니까 그냥 입 속에 넣고 웅얼웅얼거리면서 읽는 건데, 그러다 보면 어떤 리듬이 잡혀요. 그리고 그 리듬을 따라 읽다 보면 처연한 풍경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구요.

 

조연호    맞아. 나도 그렇게 읽으니까.

 

박판식    그 뭐냐.

 

채상우그것만 해도 대단한 미감을 주거든요.

 

박판식   웅얼웅얼하고 읽으면 리듬감이 잘 느껴지는 게 ?연혁?이라는 시 있잖아요? 이런 게 좋아요. 저는.

 

 

 

비가 온 후 10 17일은 추워졌다. 형과 나는 닭발에 술을 먹고 닭발처럼 외롭게 몸을 굽히며 잠들었다. 10 15일에 문득 애인이 내 전화를 받았다. 졸리다고, 끊으라고 그녀의 잠이 그녀의 아버지처럼 엄하게 말했다. 73년에 내가 새끼양보다 힘 없을 때 태양이 나를 잡아 일으켰다. 파리들이 앉아 있던 도마 위를 부엌칼로 긁고 나서 엄마가 생선내장을 냄비에 풀었다. 숲은 방울 모자를 쓰고 마을 반대편의 방앗간으로 걸어갔다. 희망과는 다른 삶이 눈을 비볐다. 내 비밀의 숲에서 부리 큰 새가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빵을 쪼아 먹었다. 엄마는 입에도 대지 않은 찌개를 내가 다 먹고 나서 13년 후에 나와 내 背後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보나파르트의 안개의 달()에 사람들이 장님처럼 거리를 헤맸다. 이듬해에 내 구두 앞코는 닦아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11 13일에 나는 증명사진을 찍었고 입사원서를 냈다. 그날 오후엔 애인이 내가 먹은 돈까스 값을 치렀다. 1월에, 좁은 학원골목에서 재수생인 친구와 재수생인 내가 만나 헌책방에서 실천이성비판을 샀다. 자장면도 먹었다. 3 20일에, 식당엔 배부른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6월 장미의 날에 장미 송이를 들고 애인은 다른 남자를

 

하류 인생의 아우라

 

 

 

 

박판식  연호 형을 약간 돕기 위해서 한마디 거들면 형이 그렇게 말할 때 위험한 게 뭐냐 하면 형 시를 사람들이 키치로 오해하는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닌데, 오히려 굉장히 엄격한데. 그런데 키치가 아니라는 걸 형 스스로 증명하기는 싫고. 맞죠?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키치가 아닌 건 분명한데 뭐라고 말을 할 것이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죠. 이제.

 

조연호    내 시집 해설에서 내 시에 대해 키치 얘기한 건 사실 마음에 안 들어. 이 얘기는 빼줬으면 하는데.

 

박판식  아니 자연스럽게 지금 이야기하는 맥락 안에서 그런 혐의를 벗으면 되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채상우춘식이 형이 키치라고 한 건 연호 형 시에 드러나는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대상들이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뜻 정도고, 판식이가 말하고자 하는 맥락은 시인의 태도 문젠데.

 

조연호    이상하지. 사람들이 내 시를 읽으면 꼭 해설을 보려고 해. 그리고 해설을 읽고나서는 키치 뭐 어쩌고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한단 말야. 키치에 대해서 그렇게 묻는 사람들마다 일일이 붙들고 설명할 수도 없고. 아니다. 키치건 아니건 나한텐 상관없어.

 

박판식  소재 측면에서 보면 키치라는 오해를 살 소지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보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어요. 상우 형이 말을 잘 푸니까 몇 가지 말을 꺼내 봐요. 왜 사람들이 그러는지. 상우 형이 바보 노릇하면 제가 반박하는 말을 할게요.

 

채상우연호 형 시에 키치적인 요소가 있긴 분명히 있어요. 춘식이 형 해설을 보면 예로 든 시인들이 유하 시인하고, 또 누구죠?

 

박판식  배용제.

 

채상우배용제 시인? 그렇네. 배용제 시인이 키치적인 시를 쓰나? 배용제 시인의 시가 키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하여튼 키치(kitsch)라는 용어는 90년대 초반 등장했는데 주로 대중문화 혹은 저급문화의 재발견과 깊은 관련이 있죠. 9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자기 시 세계의 진원지로 지목한 장소가 삼류극장이라든지 세운상가 등이었는데, 연호 형 시를 보면 그런 요소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긴 해요. 그렇긴 하지만 형 시가 90년대 초반의 키치적 시들과 다른 점은 비루하고 비천한 삶의 세목들을 그저 단순히 소재 차원에서 가공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또한 90년대 초반의 키치적 시들이 저급문화의 재발견을 통해 그 이전의 시들과 스스로를 변별코자 했다면, 형 시에서는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게 다른 점이죠. 요컨대 형 시의 키치적 요소들은 반드시 키치적이다라고 명명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보다 형 시에서 그런 요소들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제 생각엔 연호 형 시에 자주 출몰하는 스산한 유년 시절의 기억들, 그 편린들을 잘 살펴보는 게 오히려 형 시를 이해하는 데 올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예컨대 「쥐의 날」 같은 시 말이죠. 이런 시를 읽어 보면 연호 형 어릴 때의 가정 환경이나 형편이 참 신산스러웠던 것 같은데.

 

 

 

국수를 삶으며 생각하는 쥐의 날, 단단히 묶은 폐휴지 사이에 얇게 접혀 있던 쥐의 날, 쥐약을 쳐야지, 라고 마음먹는 쥐의 날, 약병 속에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누군가의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들어가 위벽을 헐어내고 싶었던, 엄마의 등때를 밀어주고 싶었던 쥐의 날, 미루나무가 내게 고아라고 불러줄 때, 뙤약볕이 나무를 녹여 동글동글한 오색구슬을 만들 때, 벌레들아, 너희들의 잠은 얼마나 설익은 밥알들이었니? 한낮 공원에 앉아 타들어가는 담배와 함께 하늘로 풀려 올라가던 쥐의 날, 녹슨 철봉대에 반쯤 칠이 벗겨진 채 서 있던, 세상의 기억 모두가 엄마젖을 빠는 외로운 포유류들이기를 바랐던 쥐의 날, 우윳빛처럼 흰 訃告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던, 돌아간 그가 그리워 눈물 흘리던, 밤새 기둥을 갉아 마땅한 쥐의 날

 

―조연호,「쥐의 날」 전문, 『죽음에 이르는 계절』

 

 

 

박판식   시인으로서는 복이지.

 

조연호      복이지.

 

채상우가난하게 산 거 같더라구요. 단적으로 말해 형 시를 보고 키치적이라고 하는 건 틀린 얘기죠. 형 시에 드러나는 가난은 시를 쓰기 위해 전략적으로 차용된 소재나 장치가 아니라 형이 직접 겪어온 생()의 체험이기 때문이니까요. 연호 형이 얘기한 것처럼 키치건 아니건 상관없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죠.

 

박판식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안 돼죠. (웃음) 잘 얘기해 봐. 연호 형.

 

조연호     이상해, 이게(인터뷰). 재밌어 아주.

 

채상우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가만 보면 대부분 족보 있는 용어들인데 그 족보를 무시하고 얘기하는 경우가 상당수여서 말하기가 참 힘들어요.

 

박판식  (캔맥주를 찌그러뜨리며) 아휴, 술이 떨어졌네.

 

채상우판식이가 사용한 <영성>만 해도.

 

조연호     술이 다 떨어졌어.

 

박판식  <영성> 얘기한 거 빼버려요. 이제부턴 족보 있는 용어 쓰지 맙시다. (웃음)

 

조연호     약발 떨어졌어. 이제 인터뷰 끝내.

 

박판식  그러니까. (웃음)

 

채상우시간도 늦었는데.

 

조연호     아니 (병승 씨는) 왜 안 오냐?

 

박판식   이야기 다 하고 가요.

 

조연호     그래, 올 때까지 계속 얘기해. 이 인간(황병승 시인) 올 때까진 아직 시간 남았잖아.

 

채상우지금 병승이 형 기다리는 거예요?

 

박판식  그동안 심심하잖아?

 

채상우난 배고픈데.

 

조연호     허이. (어이없다는 웃음)

 

박판식   좀 있다 갑시다. 그래도 이 이야기까지는 해야지. 연호 형 시가 키치하고 헷갈리게 된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거 같아요. 김춘식 선배도 말 잘 풀어놓은 거 같은데, 키치에 대해서 뭐라고 했나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 일시적인 것, 키치적인 것, 잡동사니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시간의 뒤편으로 떠밀려 사라져 버릴 모든 것을 그의 앞에 다시 호명하고 불러낸다> 이렇게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아우라에 대해 얘기하거든요. <진짜에게진짜로서의 아우라가 있다면 가짜와 모조품 역시 그 가짜로서의아우라가 있는 법>이라고.(김춘식, 「허무한 붉은 꽃」, 조연호, 『죽음에 이르는 계절』, 85)

 

조연호, 어떻게 된 거야?(황병승 시인과 전화 통화중임)

 

박판식삶이 삼류극장에서 구성되었건 버려진 것에 의해 구성되었건 간에.

 

조연호빨리와. 어떻게 된 거야? 어딘데? 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황병승 시인과의 통화 내용임)

 

박판식그 안에 아우라가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어떤 시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평론가가 해야 될 역할은 김춘식 선배가 하는 것처럼 시인마다 똑같은 것을 다루고 있어도 시인마다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구석을 분별해놓는 거잖아요?

 

조연호박상수 씨하고 같이 오는 거 아닌가?(역시 황병승 시인과의 통화 내용임)

 

박판식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잘 이야기해야 될 거 같아요. 연호 형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형식(키치적인 형식)인 것 같지만 속을 보면 그 사람들(유하 시인이나 배용제 시인)과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는데.

 

조연호, 빨리 와.(이제 황병승 시인과의 통화가 끝났다.)

 

박판식저는 연호 형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연호 형 시가 키치와 다른 게 이를테면 「불을 꿈꾸며」를 보면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우물을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 없는 것이 슬펐다> 이런 구절이 있는데, <식물에게 四柱 없는 것이 슬펐다> 이런 문장은 근원적인 질문이잖아요? 키치적인 질문이 아니고. 그런데 의심을 살 만한 게 「죽음의 집」을 보면 <나는 바닷가로 가서 뜨거운 모래 위에 수많은 바다거북의 알을 낳고 행복하게 죽어가고 싶었다>, 이런 문장은 약간 키치적인 냄새를 풍겨요. 그래도 자세히 보면 이런 문장도 사실은 실존적인 발언이잖아요? 그러니까 연호 형 시는 키치하고 미묘하게 다른 경계 지점에 있는데 그런 특성을 잘 풀어서 이야기해야 될 거 같아요.

 

 

 

더러운 싸전 골목길로 비둘기들이 흙먼지처럼 내려온다. 아이들처럼 손에 흙을 묻히고 말없이 놀던, 할아버지의 치매는 겨울나무처럼 깡마르고 적요로왔다. 열린 문 뒤쪽이 싸한 박하사탕을 물고 보조개 가진 여자애처럼 웃고 있었다. 어미 밖으로 바글바글 몰려나오는 빨간 거미 새끼들이 황혼보다 붉고 아름다웠다. 풀들에 의지해서 소들이, 소들에 의지해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겨울잠이 몽당연필처럼 짧아지고, 깊은 겨울잠 속에서 찬피동물들은 푸른 물결보다 싱싱했을 것이다. 가끔씩 이 지리멸렬은 끈 놓친 풍선처럼 부풀며 하늘로 날아올라 가뭇없이 터져버리곤 했다.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 없는 것이 슬펐다.

 

―조연호, 「불을 꿈꾸며」 전문, 『죽음에 이르는 계절』

 

 

 

조연호이런 얘기 이제 그만 하자. 해설 써준 사람 기분 나쁘겠다. 그치?

 

채상우미국 갔는데요, . 내년에 와요.

 

박판식. . 해설 쓴 사람은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

 

조연호키치 얘기는 해설 중에서 일부분이었고, 전반적으로는 잘 써줬다고 생각하거든.

 

박판식김춘식 선배가 형 시를 두고 꼭 키치라고 이야기한 건 아니에요.

 

조연호그 키치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박판식아주 섬세하게 분별을 좀 안 해놓은 거지. 해설이란 게 워낙 짧으니까. 저도 개인적으로는.

 

조연호, 잘 썼다고 생각하고.

 

박판식 ▒ (김춘식 선배가) 시를 잘 봐요.

 

조연호, 잘 봤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더 이상은 얘기하지 말자. (웃음)

 

박판식상수 형은 안 온데요? 오늘.

 

조연호. 약속 있다네.

 

박판식장모 생일이래요. 그래서 못 올 거예요.

 

조연호그런데 황병승은 저기 지금.

 

김회량 ▒ (조연호 시인과 박판식 시인이 자꾸 캔맥주를 찌그러뜨리는 것을 보고는) 소주 줄까?

 

박판식맥주를 줘. 맥주.

 

채상우조금 있다 맛있는 거 먹을 거니깐 좀 참아.

 

조연호 ▒ (황병승 시인이) 지금 온다는데.

 

박판식지금 온데요?

 

조연호명지대에서 지금 출발한다는데.

 

박판식, 그러면 한참 걸리겠네. 인터뷰나 마무리합시다. 이거(녹음기) 있는 동안에는 이야기하고 놀아야죠. 그래야 나중에 말이 되게 쓰지. 지금 우리가 한 얘기들은 거의 농담 따먹기라서

 

조연호그래 여러 가지를 해놔야지. 말이 되게.

 

박판식말이 안 되요. 지금까지만 보면. 다 지우고 다시 할까?

 

채상우어느 인터뷰든 중반 이후나 막바지쯤 되면 다들 그런 얘기해요. 다 지우고 다시 하자. (웃음) 다들 그래요.

 

조연호더 좋은 방법이 있어. 몰래 이거(녹음기) 가지고 가서 술 먹을 때 딱 틀어놓는 거야.

 

채상우안 그래도 지금 그럴려고 시간(녹음할 수 있는 시간) 계산하고 있어요. 얼마나 남았는지.

 

조연호그게 얼마나 생생한 얘긴데.

 

채상우내려가서 더 얘기하자니까요.

 

박판식이따 시작 사장님 있는 데로 같이 가는 거죠?

 

조연호 ▒ (김 디자이너에게) 어디로 갔어요?

 

채상우자꾸 그러면 녹음 끊는다.

 

박판식어디 갔어요? (녹음기) 껐어요? .

 

채상우아니.

 

조연호 ▒ (박판식 시인에게) 우리 가만 있자. (웃음) 시간아, 흘러가라, 그냥 그러고.

 

박판식상우 형이 인터뷰를 잘 정리해 봐요. 순서도 그렇고. 연호 형 시 「연혁」처럼 해. 아무튼. (웃음) 왜냐하면 기억 속에서의 시간은 그 사람의 자유잖아요? 진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조연호아무도 안 읽을 거야.

 

채상우그럼 인터뷰 올릴 때 그렇게 쓸까? <이 인터뷰의 원래 순서를 알아맞히는 분께는>.

 

박판식절대 못 맞출걸.

 

채상우 ▒ <조연호 시인의 하나뿐인 음악 앨범 CD를 드립니다>라고. 그것도 <백 장!>.

 

조연호상우 씨가 고생하긴 할 거 같아. 나중에 녹음 풀 때 가서.

 

박판식전 그래도 그럴싸한 이야기도 좀 하려고 했는데.

 

조연호판식 씨 얘기를 좀 많이 했어야 했는데. 시에 대해서.

 

박판식그 뭐지? 시집 배열 어떻게 했나 이런 것도 좀 밝히고 그럴려고 했는데.

 

조연호시집 배열에 대해선 아까 얘기했잖아? 그거 녹음 다 됐어.

 

박판식아이, 제 얘기는 안했어요.

 

조연호, 그 얘기 좀 해줘. 판식 씨 시집 배열에 대해서.

 

채상우시집 배열하는 데 무척 신경 쓰더라구요.

 

박판식저요?

 

채상우.

 

박판식아니에요. 저도 (연호) 형하고 되게 비슷한 점이 있는 거 같아요. 이성복 시인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2년 동안에 막 써지더라구. (채상우)도 알다시피 제가 진짜 과작이잖아요? 1년에 10편도 못 쓰고 그랬는데, 갑자기 지난 3년 동안에 여기 시집에 실린 시들의 삼분의 이 정도를 썼어요. 그리고 지금 다시 잠잠해졌는데. 시집 배열은 그냥 순서대로.

 

조연호쓴 순서대로?

 

박판식. 그냥 묶은 거예요. 두 편 정도는, 「밤의 피치카토」하고 「화남풍경」은 일부러 맨 앞하고 맨 뒤에다 넣은 거고. 나머지는 모두 몽상으로 시작해서 몽상으로 끝내자는 생각이었어요. 시집 중간에 리얼한 시들이 몇 편 들어 있긴 해도, 연호 형이 아까 말한 것처럼 시라는 건 하나하나가 놀잇감이고 유희거리면서 몽상의 산물이니까. 전 그냥 시간 안에 누워 가지고.

 

조연호그냥 즐겁게 상상하는 거?

 

 

 

절친한 점쟁이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문지방에다 붙여주었다

장밋빛 손가락은 체온도 활기도 없는 내 소지품들 속에 섞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찾아와 그 손가락을 가리켜 이르길

더러운 샘은 왜 파놓았느냐

그러나 내 더운 피를 다 빨아먹고 생긴 더러운 샘이니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는 보아야지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전문, 『밤의 피치카토』

 

 

 

박판식. 누워 있으면 어머니 이야기나 예전 애인 이야기나 뭐 친구들이나 외삼촌 이야기나 이런 것들이 한순간 그냥 스치듯 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 집요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잖아요? 하룻밤 누워 있으면 그동안 떠오르는 상념들만 해도 얼마나 많아요? 시집이란 게 말하자면 지난 3년 동안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상념들의 연속체일 뿐이에요.

 

조연호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열이 좋아.

 

박판식그러니까 배열이 좋건 나쁘건 그건 형처럼 거의 우연의 소산인 거예요.

 


채상우솔직히 이야기하면 판식이 시 중에 「화남풍경」은 등단작이긴 해도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미지도 선명하고 하고자 하는 얘기도 또렷하고 읽고 나면 <그래, 사는 게 뭐 다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긴 한데, 우선 짧기도 할 뿐더러 「화남풍경」은 그 시 자체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게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시집에서 이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막대하다고 생각해요. 방금 전에 판식이가 스스로 말했지만 몽환이라는 단어가 아마 판식이 시집을 관류하는 맥이 아닐까 싶어서요. 시집을 보면 「환각」이라는 시도 있는데.

 

조연호

어둠 속의 기타

 

 

 

채상우판식이 시를 보면 어투가 참 냉소적이에요. 예컨대 「윤회」를 보면 맨 마지막 문장이 <어디로 가든 결국 네가 만나는 것은 바로 너니까>로 끝나거든요.

 

조연호    , 그런 류의 어투가 있어. 판식 씨 시집을 읽다 보면 툭툭 선언적으로 확 내던지는 그런 말들이 있어.

 

 

 

고대 범어에서 윤회는 수레바퀴를 뜻했다

선선에서 윤회란 목숨을 빚진 사람은 반드시 다음에라도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었다

중국의 연나라에서는 연꽃 속에서 영원히 몸 섞는 연인이라는 뜻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거란의 한 떠돌이 부족에게는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으러 나선다라는 뜻이었다

유마경에 나오는 향기의 나라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원전 그리스의 한 상인이 서역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윤회였다

불꽃과 얼음의 거대한 산을 넘어 먼지의 집들을 지나, 그는

서역의 한 작은 오아시스로 만들어진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다섯 번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섯 번을 태어나는 동안 네 번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었군요

침착해라 변하지 않는 형상이란 없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어

어디로 가든 결국 네가 만나는 것은 바로 너니까

 

―박판식, 「윤회」전문, 『밤의 피치카토』

 

 

 

채상우그런데 이게 일상어투에요.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면서 되게 즐거워해요.

 

조연호    난 그런(즐거워하는) 느낌은 못 받았어.

 

박판식    제가 냉소적이라는 건 아까 말했던 그 왜, 착한 서정시 있죠, 그리고 그런 서정시를 보면 도덕적이잖아요? 그런 것에 대해 먼저 의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걸 깨뜨리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냉소적인 거 같아요.

 

채상우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여하튼 말투라든지 평소에 보면 냉소적이에요.

 

조연호    이 문장도 정말 좋더라.

 

박판식    「심장의 타종」 앞쪽에요?

 

조연호    . 맘에 들어. 이것도 시를 읽는 독법 중에 하난데, 첫문장을 읽는단 말야. <사랑하는 일이 드물다는 혹성에서/철공소의 쇠망치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눈물이 흘렀다>(박판식, 「심장의 타종」,「밤의 피치카토」)라고 말야. 첫문장만 읽었으니까 아직 전체 내용은 모르는 거지. 그리고 이 문장 자체도 의문 사항이 많은 문장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의 울림이 좋은 거야. 그건 왜 그럴까?

 

박판식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조연호    ,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박판식    의미를 떠나가지고.

 

조연호    <의미를 떠나서>, 바로 이거야. 난 아직 이 시를 다 안 읽었으니까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야.

 

채상우그건 아까 판식이와 형이 얘기했던 동감의 차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시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흔히 그러잖아요. <, 맞아! 그거야!>라고. 이건 동감할 때 내뱉는 말인데, 이와 달리 감동은 <와아!>잖아요? 물론 동감이나 감동이나 둘 다 정신적인 교감에 밑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것이 시를 향유하는 데 더 올바른 자세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미세한 차이는 있죠. 동감은 자신과 동일한 실제 체험이나 사유 방식을 시 속에서 발견했을 때 이루어지는데 비해 감동은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아마 그 차이일 텐데, 그런 면에서 말하자면 동감이 훨씬 강렬한 교감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하튼 연호 형이 판식이 시를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사실 알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도 좋다라고 말하는 건 여하튼 어떻게 얘기하기에는 힘든 동감이 촉발되었기 때문이겠죠.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조연호    ,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지. 이건 설명하기 힘들어.

 

채상우 ▒ <기냥> 동감하는 거죠.

 

박판식    그냥 좋아하는 거죠.

 

조연호    그냥 좋은 문장들이 있어.

 

박판식     형 시도 똑같아요. 「모네의 저녁 산책」을 보면 <산책이 시작되는 길 위에서 모든 아침은 세상 밖의 것이 된다>라고 했는데, 저도 이 문장 보면서 형하고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조연호    그래 맞아. 의미건 뭐건 이거저거 다 버리고 그냥 좋아. (웃음) (조하혜 시인에게) 이리 오세요. 이제 끝났어요.

 

박판식     시 중에 (딥 퍼플(deep purple))는 그 뭐냐, 음악 제목 아니에요?

 

채상우.

 

조연호      , 노래 제목이야.

 

박판식    저도 분명히 들어봤을 텐데, 이렇게 제목만 적혀 있는 걸 보면 저는 그게 어떤 곡인지 모르거든요.

 

조연호    노래는 몰라도 돼.

 

박판식     이런 말(<노래는 몰라도 돼>라는 조연호 시인의 말)이 뭐냐 하면 시 쓰는 방식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작자나 제목이나 이런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잖아요? 그냥 우리를 감동시키면 그 안에 빨려들어가는 거죠. 맞죠? 그리고 누가 어떤 것의 주인이다, 이런 의식 자체가 아예 없는 거잖아요? 우리 자신도 그렇고.

 

조연호    그러면서 그렇게 써가는 거지. .

 

박판식     , 그런데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저는 그것도 궁금하더라.

 

조연호    거기에 대한 일화가 있어. 무척 생경한 경험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네 집에 갔는데 친구 형 방에 기타가 떡 하니 있는 거야. 어둠 속에.

 

박판식     어둠 속의 기타!

 

조연호    가까이 가서 봤는데 아주 희한한 몸체를 가진 뭔가가 있는 거야. 악기인 건 알겠더라구. 하여튼 다가가서 살펴보다가 제일 두꺼운 줄 있잖아, 육 번 줄. 고걸 한번 띵 튕겨봤다. 세상에, ! 그 소리가 그렇게 가슴을 때릴 수 있나! <두우우우웅> 하고 굉장히 오랫동안 여음이 남는 거야. 글쎄.

 

박판식     물질적 신비주의자! (채상우에게) 이렇게 써. (웃음)

 

조연호    그래서 반했어. 그 저음, <두우웅> 하는 거에. 그 저음 소리에. 그래서 그 이후로 기타에 집요한 관심을 가지게 됐지. 그러다가 내가 기타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누나가 통기타 하나를 사주더라고. 칠 줄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걸 계속 뚱땅거리면서 치기 시작한 게 중학교 1학년 때야.

 

박판식    , 되게 오래 됐네요.

 

조연호    그룹은 고등학교 때부터 했고.

 

박판식    그럼 시는 몇 살 때부터 쓴 거예요?

 

조연호    시도 중학교 1학년 때지. 비슷한 시기야.

 

박판식    누구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조연호    시 말이지?

 

박판식    집에 일기장이나 뭐 시 모음집 같은 거 있나요?

 

조연호    내가 미쳤어? 그런 걸 모아두게. 그런데 그런 기억이 나. 여기 시에 보면.

 

채상우, 참 드라이하다. 지금 한 얘기 그대로 써서 내면 사람들 실망 많이 하겠다. 진짜 시집이고 뭐고.

 

조연호    시집은 완전히 끝나는 거야. (웃음)

 

박판식    집에 가면요 잘 정리된 노트가 있구요. (웃음)

 

조연호    여기(시집)에 보면……, 제목이 뭐더라?

 

박판식    정서해서 쓴. (웃음)

 

조연호    (박판식 시인에게) 에잇, 조용히 해. 「얼음불꽃」이라는 시가 있어. 「얼음불꽃」을 보면 그 문장.

 

박판식    누나 얘기 나오는 거요? 전 그래서 형이 누나 영향을 받아서.

 

 

 

부지깽이 끝에 매캐한 연기가 걸려 올라온다. 겨우 입 벌린 메꽃 한 송이가 되어 엄마 곁엔 순산한 셋째 계집애가 누워 있었다. 손가락 다섯, 발가락 다섯, 생식기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 엄마가 편히 눈을 붙였고, 누룩곰팡이가 아랫목을 따라 끊임없이 기어다녔다. 달그락거리는 배고픔들이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꿈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강이 빈한한 날을 지난다. 부지깽이를 쥔 엄마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불꽃나무가 자란다. 뿌리며 가지며 아궁이 속을 확확 드나들고도 나무는 아직 차갑다. 누이가 몰래 自作詩 보여준다. 그 시구에 내가 유치한 눈물 훔치다가, 이 저녁은 느닷없는 평화 속에 끝난다. 강이 투명하고 가벼운 壽衣 입고 강 건너 천안댁 할머니를 부르러 간다. 미역줄거리가 끓고, 부지깽이를 저으면 화르륵, 엄마들이 일어서다간 도로 누웠다.

 

―조연호,「얼음불꽃」 전문, 『죽음에 이르는 계절』

 

 

 

 

조연호맞아. 그거야. 그걸로 처음에 촉발된 거야.

 

박판식누나는 이제 시 안 쓰죠? 형은 시를 쓰고.

 

조연호안 쓰지.

 

박판식이런 게 시인한테는 묘한 경험인 거죠.

 

조연호그러게. 누나가 시를 막 쓴단 말야. 그런데 누나가 시를 쓰는 걸 보면서 난 막 감명 받고 그랬단 말야. 왜냐하면 난 그때 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때니까. 그러면서 또 하나 든 생각은 <, 누나도 쓰니까 나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 그래서 하나를 써봤지. 그게 시작이 된 거야. 그리고 쓰다보니까 많이 쓰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아주 절친한 친구의 형이 학생운동을 극렬하게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그 쪽 세례를 좀 많이 받은 편이야. 그래서 고등학교 때 김지하의 「오적」부터 시작해서 「앵적가」, 뭐 양성우, 양성우는 그때 제일 좋아했었어. 고은, 신경림 그때 다 읽었어. 나로서는 복 받은 거지.

 

박판식형 시집 읽으면 시 쓴 지 오래됐다, 이런 느낌이 들어요. 기형도 생각나요.

 

조연호기형도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살아 있을 때. 볼 기회도 있었는데, 안타깝게 못 봤어.

 

박판식그러니 저는 복 받은 사람이잖아요? 형이 기형도 같은 사람을 보고 싶어 했을 때, 전 형이나 김진완 시인 같은 사람을 보고 싶어 했거든요.

 

조연호날 만난 건 말이지, 악연이라고 생각해야 돼.

 

박판식그런데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이제 (웃음) 정말 악연이라는 걸 알게 됐지. (웃음)

 

채상우인생이란.

 

박판식즐거운 악연이지. (웃음)

 

조연호술도 없고 이거 미치겠네.

 

박판식. 맨정신에 말야.

 

조연호맨정신에 이야기하라고 하는 건 고문이야.

 

채상우이제 내려가죠. 내려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얘기하죠.

 

조연호조하혜 시인은 간 거예요?

 

김회량아니.

 

채상우, 마지막으로 연호 형이나 판식이나 <부력>이라는 단어를 썼던데.

 

박판식그건 제가 영향 받은 거예요. <부력>이라는 단어는 (시에서) 형이 제일 먼저 써먹지 않았나 싶은데.

 

조연호글쎄.

 

채상우 ▒ <모든 산길의 나무는 浮力 가진다.>(조연호, 「모네의 저녁 산책」, 『죽음에 이르는 계절』)

 

박판식그전에 누가 있나? 하여튼 그 단어는 형한테서 얻어온 건 분명해요. , <부력>이라는 단어를 시에 써먹을 수 있다니. 그 전에 <부력>이라는 단어를 누가 시에 쓴 적 있나?

 

조연호글쎄, 모르겠어.

 

박판식하여튼 쉽게 시에 쓸 수 있는 단어는 아니잖아요?

 

채상우과학책에나 나오지.

 

조연호. 과학책에 나오지. (웃음)

 

박판식형 시의 비밀들이 막 드러나네.

 

조연호고등학교 과학책에 보면 나오지. (웃음)

 

박판식과학책과 신문(이 형 시의 비밀 중 하나야.)

 

조연호자연과학 쪽 책 많이 읽는다고 했잖아.

 

박판식『자본론』이런 거도. (웃음)

 

조연호그 시(「모네의 저녁 산책」) 쓸 때 생각이 나. 내가 알고 있는 <부력>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런 부력보다 물고기의 부력이었거든.

 

박판식 ▒ <부레>(「모네의 저녁 산책」)라는 단어도 나오잖아요?

 

채상우판식이가 쓴 <부력>도 그런 의밀걸요.

 

조연호. 거기서 착안해가지구 <, 물고기도 물 위로 떠오르는데, 나무나 흙이 하늘로 못 올라갈 이유가 뭐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서 썼어. 「모네의 저녁 산책」은 오래된 시야. <부력>이라는 말은 아름답지 않아?

 

채상우 ▒ <기냥> 아름답죠.

 

조연호그 단어 자체로 막.

 

채상우 ▒ <왜 아름다워요?>라고 물으면.

 

조연호그거는 한 대 맞아야지 뭐.

 

채상우 ▒ (비데 CF 가운데 나오는 어투로) 느껴봐. (웃음)

 

조연호그건 설명할 수 없어.

 

박판식 ▒ <부력>처럼 제가 요즘 써먹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게 <신기루(蜃氣樓)>거든요. 한자를 보면 <신기루>라는 단어가 진짜 좋아요. 그 안에는 누각도 있고 사막도 있고 너무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어요. 너무 많은 세계가 그 안에 들어 있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해요. <부력> 이런 단어처럼.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단어의 발견자이기도 한 거예요.

 

조연호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일 년 전 쯤 되었나? 그때 누구한테 빠져 있었냐면 아인슈타인한테 빠져 있었어.

 

채상우아인슈타인요?

 

조연호별별 책을 다 읽었어. 심지어는 아인슈타인의 논문까지 어렵게 구해가지고 읽었어.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직접 읽어본 적 있어? 상대성이론이라고 해서 나온 책 말야?

 

채상우아뇨.

 

조연호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말하는 데도 그 원래 논문을 본 사람은 없더라구. 그런데 그걸 읽다보면 써먹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은 거야. 예를 들면 <우주상수>라는 말이 대표적인데, 그 말은 내가 한번 시에 써먹어 보고 싶어. 그런데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잖아?

 

박판식참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