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일시: 2004 8 24()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장소: 인천 자유공원 입구 리치 카페

참석자: 장석남(시인), 채상우(시인), 안이현(퍼슨웹)

 

 

 

장석남 시인은 1965년 인천 덕적도 출생으로, 제물포고등학교와 서울예술전문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전임강사로 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온 이후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젖은 눈』(, 199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  등의 시집과 산문집으로 『물의 정거장』(이레, 2000)이 있다. 김수영 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으며, TV 드라마, 영화 등에 배우로 출연한 적도 있다.

 

 

 

<자발적 가난>은 근래 들어 자주 거론되는 용어다. <자발적 가난>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가난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의미다. 법정 스님의 유명한 수필집 『무소유』는 <자발적 가난>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 가난>은 개인의 삶을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로까지 이끌어 올리는 구도적인 행위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자발적 가난>은 종교적인 맥락보다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연결되었을 때 그 진정한 의의를 발한다. 짧게 말하자면 <자발적 가난>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 혹은 대안의 거점에 해당하는 담론의 핵심어로써 기능할 때 그 가치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발적 가난>은 이제 거대담론이 스러진 자리에 비록 집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인간 고유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작년에 출간된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펜클럽』(한겨레신문사, 2003) <자발적 가난>과 가장 잇닿아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장석남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 소설이 떠오른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장석남 시인과 약속한 장소가 인천 자유공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장석남 시인의 시의 뿌리가 가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인터뷰에 동참해준 안이현 씨도 한때는 라디오 방송국 PD였다는데 지금은 백수로 지낸다고 한다. 게다가 나도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백수다. 요컨대 백수 둘이서 가난한 시인을 만나러 간 것이다.

너부리 장명부를 아시나요?

 

 

 

채상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읽어 보셨어요?

 

장석남: 아직 안 읽어 봤어. 재미있다고 그러더라구.

 

 

 

채상우: , 재미있어요. 더구나 전 딱 그 세대여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전 경북에서 나고 자랐는데, 프로야구 처음 시작할 때 삼성 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했던 게 생각나요. 그때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하면 야구복이랑 모자랑 줬거든요.

 

장석남: 삼미도 그랬지. 처음 시작할 때는.

 

 

 

안이현: 그 소설로 영화도 만든다고 하더라구요.

 

장석남: 코메디 되겠네.

 

 

 

안이현: 영화 제목이 더 웃겨요. <슈퍼스타 감사용>이라고 그러던데, 감사용이라는 투수 있었잖아요? 패전 전문 투수.

 

장석남: , 그 패전 처리 전문 투수.

 

 

 

채상우: 그 영화 광고 카피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당신의 1승 이제는 온 국민이 당신을 응원합니다>이더라구요.

 

장석남: 1승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허허허(웃음). , 장명부라는 투수 있었잖아? 일본에서 온 투수. 그 투수가 특이한 기록을 세웠지. 20 몇 연승인가 그랬지?

 

 

 

채상우: 너구리 장명부 말이죠?

 

장석남: 진짜 도깨비 같은 팀이었지.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기억나네 이제, 그때 그게 만들어졌나?

 

 

 

채상우: 고등학교 2학년 때요?

장석남: 아마 그랬을 거야. 2때였는데, 내가 저쪽 학교에 다녔는데, 그늘에서 땡땡이 까고 라디오 듣던 게 생각나.

 

 

 

 한국 프로야구는 1982 OB 베어스(1982. 1. 15), MBC 청룡(1982. 1. 26), 해태 타이거즈(1982. 1. 30), 삼미 슈퍼스타즈(1982. 2. 5), 롯데 자이언츠(1982. 2. 12), 삼성 라이온즈(1982. 3. 5) 6개 팀의 창단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프로야구 창단은 스포츠의 대중화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실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겠지만, 3S 정책이란 스포츠(sports), 섹스(sexy), 스크린(screen)의 약자로 스포츠와 매춘을 비롯한 섹스 산업, 영화 등을 통해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바깥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일종의 우민화 정책을 말한다. 독재는 가끔 너무나도 달콤해서 헤어나기 힘들다.

 

 

 

채상우: 어느 학교요?

 

장석남: 제물포고등학교. 하여튼 그때 장명부가 유명했어. 3루 던지는 척하다가 1루에 견제구 던져서 무지하게 죽었지. 그리고 던질 때 보면 아주 웃겨. 어떨 때는 아주 세게 던지다가 어떨 때는 국민학교 학생이 던지는 것처럼 이렇게(아주 느리고 완만하게) 던져, 이렇게. 하늘로도 던지고. 시속이 뭐 백 이렇게 나올 때도 있었는데, 전혀 말도 안되는 데도 타자들이 못치는 거야.

 

 

 

채상우: 박민규 소설을 읽어 보니까 인천이 어떤 곳인지 좀 감이 잡히더라구요. 뭔가 좀 낡아 보이고 뒤쳐져 보이고 말이죠.

 

장석남: 그런 게 있지. 요 아래 중국인 거리도 그렇고.

 

 

 

채상우: 아마 서울에 그런 거리를 만들어 놨으면 삐까번쩍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죠. , 이홍섭 형하고 많이 친하신가 봐요. 홍섭 형에게 보내는 시도 있던데.

 

장석남: 친하지. 오랫동안 만났지.

 

 

 

나는 매일 소리 속에 돌담을 쌓고 왔다

소리는 허공을 떠돌다 돌로 앉고

내 사는 달팽이집 속까지

소리의 빛들이 이어졌다

달팽이집 처마에 누군가

그네를 매고 갔다

나는 위태로운 사랑 위에 앉아

흔들리며

지난밤 들은 음악을 되새김질한다

소처럼 다시 꺼내 듣는다

소리가 가는 곳까지만 가서 살겠다

그네 줄은 여기서 거기까지만

갔다가 온다

창에 일찍 온 저녁을 불러들여

돌담 속에 같이 저문다

 

―「소리 속의 그네홍섭에게」 전문,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바다처럼 상처가 넓어지면

아득히 내가 떠다니고

그러면 까마득히 내가 보이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이

마음을 달래줄 때가 많다

순개울 바닷가에 오면

넓디넓은 바다 위로 두런두런 섬들이 모여들고

내 삶의 행로가

끼룩끼룩 보이기도 한다

 

견딜 수 없는 연민이라는 게 있다면

순개울 바닷가를 달려볼 일이다

와서 반쯤만 젖어볼 일이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마을 쪽으로

마음의 반을 돌려놓고

 

―이홍섭, 「순개울 바닷가석남에게」 전문, 『강릉, 프라하, 함흥』, 문학동네, 1998

 

 

 

채상우: 홍섭 형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장석남: 처음 만난 게 고3 땐데,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시 공모전 시상식 때였어.

 

 

 

채상우: 어떤?

 

장석남: 경희대에서 시 공모전을 했는데 그때. 동국대에서도 입상한 적이 있어. 3 땐가? 동대 신문사 주최로 열렸던 백일장에서. 그때 그 시가 지금 있는지 몰라.

 

 

 

깊은 꿈결의 한쪽 마디를 지우며

느리게 찾아온 누이

편지 속에서 낮게낮게 저무는

하늘을 읽는다.

내 키 자란 만큼의 높이에서

알맞게 젖어있는 꿈은

풀잎들의 노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슬픔의 내용으로 불어오는 바람

제몸 묶여 쓰러지는 바람처럼

그렇게 가슴에는 땅그늘이 남는다.

저문 강물을 끼고 떠나가던

내 누이의 옷고름에서 시린

바람이 일고 그 바람끝에는

자세한 어둠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가, 눈감고 바라보면

몸잘려 가벼운 낮달

하얀 실타래를 풀며 흘러가는 낮달은

언제부터 어머님 젖가슴 밑이나

흐린 이마의 잔주름같은 이야기인가

푸른 기억의 노래를 엮어 흐르는 강은

흐느낌만으로 어둠을 건너고

그 서툰 보행은 지금쯤

어느 부분에 닿아가고 있을까

 

누이가 비우고 간 벌판위에

남은 목소리 다해서 낮달 하나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풍경」 전문

 

 

 

찾아보니까 있었다. 2년 전 동국대 신문사와 문예창작학과에서 엮은 『생각의 꽃동국대학교 「전국고교생문학콩쿠르」』(동국대 출판부, 2002)에 장석남 시인이 말한 시가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시가 바로 그 시다. 이 시는 1983년 당시 제21회 동국대 전국고교생 문학콩쿠르에서 시 부문 우수 1석을 받은 작품이다. 참고 삼아 인용한다.

주류? 주류는

주류이기 때문에

망하지

 

 

 

 

채상우: 다음주면 개강인데,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으시죠? 워낙 시도 유명한데다 문단에서 3대 미남으로도 꼽히는데.

 

장석남: 모르지 뭐. 그런데 요즘은 시를 쓰려고 하는 학생들이 워낙 없어서.

 

 

 

채상우: 서울예전 나오셨죠?

 

장석남: .

 

 

 

채상우: 가끔 서울예전 출신 시인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요즘 후배들은 다들 시나리오 쓴다고 그러더라구요. 예전엔 시나리오 쓴다고 하면 별종 취급받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시 쓰는 학생들이 그런 취급받는다고 그러던데요.

 

장석남: 그러게 말야. 방송국 작가 된다는 사람은 많던데. 사실 그런 공부도 시 공부를 해야 잘 쓸 수 있는 건데, 시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시가 재미있는 것이라고 얘기해서 알아듣는 학생들이 나중에 진짜 어, 시가 재미있는 거구나 하는 건데.

 

 

 

채상우: 그런 현상은 일반적인 추세인 듯해요.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장석남: 그런데 녹음한다니까 겁나네. 허허허 (웃음)

 

 

 

채상우: 요즘은 비단 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이란 걸 읽는 사람이 참 드물잖아요? 예전엔 시집 중에 백만 부나 나간 시집도 있었다는데, 이젠 그런 건 애시당초 기대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죠. 그래서 그런지 요즘 흔히 하는 얘기들 가운데 하나가 이제는 시에서도 마니아만 있으면 다행이지 않겠느냐이더라구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우울하더라구요.

 

장석남: , 우울해 할 것 없어.

 

 

 

채상우: 선배님 첫시집은 공전의 히트를 쳤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지금도 『새떼들에게로의 망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죠. 그런데 선배님을 비롯해서 이윤학 선배, 박형준 선배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던데, 생각해보면 참 흥미로운 일이다 싶어요. 세 분 다 성향이 각기 다른데도 1990년대 시인 하면 세 분이 먼저 떠오를 뿐더러 함께 묶어 기억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마 신서정 담론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선배님 등단 당시(1987)를 떠올려 보면 민중민족문학론이 주류였잖아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박남철 시인이라든지, 유하 시인, 진이정 시인 등이 개별적인 시 작업을 하고 있었구요. 궁금한 점은 그런 시절 굳이 서정시를 고집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장석남: 글쎄, 그건 질문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내용일텐데. 그때를 생각해보면 서정시는 주목을 못 받았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른바 주류라고 하는 것, 즉 문학에서 큰 흐름이라고 하는 것에는 항상 큰 맹점이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데.

 

 

 

채상우: 그런 점이 있죠.

 

장석남: 주류라는 건 주류이기 때문에 망하지. 비슷한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다는 건 다른 분야에선 몰라도 예술에서는 틀린 거지. 예술은 무리 짓지 않는 거라고 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시가 특별히 개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고. 전통이라든지 큰 단위로 봤을 때는 흔한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채상우: 그렇긴 하지만 그때 당시로 봐서는.

 

장석남: 그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난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태생부터 그런 거부감이 있었고.

 

 

 

채상우: 거대담론이라든지에 대해서 말이죠?

 

장석남: 그렇지. 떼로 몰려 있는 것, 많이 몰려 있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지. 그리고 솔직히 그때 당시에도 민족문학론이라든지가 얼마 안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채상우: 민족민중문학 쪽이 1990년대 초반 들어서는 대단히 상투적인 경향을 보였죠. 한마디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장석남: 그렇지. 그리고 진실성도 없고. 평론 쓸 때는 이야기하기 좋았겠지만 허황한 거지. 서정시라고 하는 것은 늘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건데. 그리고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개성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지. 그런데 사실 이게 모순인데, 서정시라는 것은 가장 진보적인 거거든. 가장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지향해야 하는 거잖아? 시의 속성은 그런 건데, 그 속성에 가장 충실하기 위해서는 가장 자유로워야 되는 거거든. 아주 보수적인 입장인데, 아주 보수적인 입장이라는 게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그런 입장인 거지. 그러니까 어떤 담론에도 묶이지 않는, 담론이라는 말도 요즘은 낡은 용어가 되었지만, 묶이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이게 모순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정치가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이런 것을 쫓아가면서 쓰는 시가 진보적인 시 같지만, 그건 이미 정치나 이념에 묶여 있는 시일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는 이미 시 자체가 낡은 것이고, 낡아질 수밖에 없어. 난 가장 보수적인 것이 가장 자유로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채상우: 제 생각엔 선배님이 등단한 시기를 곰곰이 따져보면 당시 문단 상황이 선배님이나 몇몇 시인들에게는 일종의 혜택으로 역작용한 것은 아닌가 싶어요. 조금 전에 주류에 대해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선배님, 이윤학 선배, 박형준 선배 등 1990년도 전후에 등장해서 서정시를 쓴 시인들의 경우, 주류이긴 하지만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민족민중문학에 질려 있던 독자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거죠. 특히 신서정이라는 담론이 그 당시 문단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면서 더더욱 그렇게 된 듯한데요.

 

장석남: 신서정이라는 용어는……. 용어라는 게 좀 그렇지. 신서정이 있고 구서정이 있고 그런 건가? 옛날 서정과는 다르다는 건데, 이른바 전통시와는 다르다는 그런 의미에서 썼을 텐데……. 경향이 분명히 다르긴 다르지. 그런데 원래 신서정이라는 용어가 나온 건, 1990년대 초에 시운동이 없어지고 다시 그런 걸 하나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어. 동인을 하나 만들려고 그랬는데 그 이름이 아마 신서정이었을 거야. 에콜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신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묶은 적이 있어. 아마 김기택, 이진명, 이홍섭, 전동균, , 주창윤 등등 이렇게. 신서정이라는 게 그때 붙여진 이름이야.

 

 

 

채상우: 그 시집은 기억에 없는데요.

 

장석남: 시집 자체는 묻혔지. 그때부터 신서정이라는 이름이 나온 거야. 그런데 신서정이 뭐냐고 물어보면 사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 이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다르니까 구별짓기 위해 붙인 이름이지.

 

 

 

채상우: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집단적인 이념이나 주체에 대해 시를 썼다면, 선배님과 그 당시 등장했던 일군의 시인들은 개인의 내면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서정성을 발굴하는 쪽으로 시를 썼다고 정리해도 괜찮겠죠?

 

장석남: 그렇지.

 

 

 

채상우: 이름은 붙여야겠는데 마땅한 명칭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문제는 선배님 시와 이윤학 선배, 박형준 선배의 시가 추구하는 방향에서나 직조되는 방법에서나 각기 틀리거든요.

 

장석남: 그걸 묶어서 이름을 붙인 건 맞지 않는 거지. 그냥 그런 시기였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채상우: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있다면 얘기해주시죠. 산문집을 보니까 두리뭉실하게 넘어가셨던데.

 

장석남: 특별한 동기라는 건 없지. 시를 쓴다는 게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말할 순 없지. 조금씩조금씩 쌓여서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되었다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부터 딱 시를 쓰겠다 하고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어렸을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이 된 게 아닐까 해. 어렸을 때 형제들, 부모님과도 흩어져서 살고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혼자 놀고 이러는 시간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문학이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던 거고.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문예반이라는 데가 그런 걸 공부하는 덴가 보다 해서 들어간 거고. 그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를 쓰게 된 거고 그런 거지. 대학교도 시를 쓰는 곳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채상우: 지금까지 시집을 4권 내셨는데, 선배님 시의 뿌리가 어딜까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해본 적이 있어요. 제 생각엔 가난이 아닐까 싶은데요. 덕적도 얘기도 그렇고, 특히 도화동에서 사실 때 겪었던 일들을 쓴 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장석남: 도화동은 복숭아꽃 동네라는 뜻인데 이름은 참 좋지. 무릉도원이라는 말인데, 도화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흔해. 가난이란 건, 현실적인 가난에 심리적인 가난이 보태지면 참 극심한 가난이 되지. 그리고 시 쓰는 친구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이잖아? 부잣집 아들이 시 쓸 일은 없잖아? 가난이라는 건 시인에겐 거의 태생적인 게 아닌가 하는데. 그리고 극빈층이라면 살아남기 급급할 텐데 어떻게 시를 쓰겠어?

 

 

 

채상우: 선배님 산문 가운데 『갈증의 시간들』을 보면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금성라디오로 음악을 듣던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던데, 선배님이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단지 음악 자체에 대한 동경 때문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가난 체험이 큰 작용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가령 <그동안 나는 음악을 듣는 기계가 없다는 문화적 열등감에 얼마나 시달렸던가>(「갈증의 시간들」, 『물의 정거장』, 89) 같은 구절을 보면 말이죠. 이제 금방도 얘기하셨지만, 가난을 체험했다는 사실은 시를 쓸 때 아주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선배님이 도화동 오동나무 집에서 사실 때 경험했던 일, 즉 바닷물이 하수구를 타고 역류할 때 도무지 어쩌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던 일을 시로 쓰신 걸 보고는 가난에 찌든 자의 내면이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나더라구요. 그런데 선배님 시를 보면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들이 있는 반면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동경하는 자의 막막함 혹은 슬픔이 중심인 시들이 있더라구요. 즉 하나는 대단히 현실적인 계열의 시들이라면 다른 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 계열의 시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근래에 내신 시집은 후자에 가깝더라구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밀물이 부엌 하수구 구멍을 들추고 들어와서 놀자고 할 때가 있었다. 대개는 그 해의 가장 추운 때였다. 그 물은 퍼낼 데가 없었다. 하수도에 밀려온 바닷물은 그냥 막막한 기억에 넘겨둘 수밖에 없었다. 퍼낼 데 없는 그 곤궁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력이 해결하지 못했다. 정오만 되면 울리던 공작창 사이렌 소리나 박정희를 생각하게 했다. 아버지는 벽에 박정희의 초상화를 걸었다. 그분이 든든했었나 보다. 알고 보면 아버지는 참 소문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중략…)

그런 어느 해 매일 밤마다 까닭 없이 캠핑용 도끼를 숫돌에 갈다가 한 번씩 찍어보는 바람에 오동나무는 죽었다. 다음해 싹이 나지 않자 아버지는 나를 나무랐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다음핸가 뿌리에서 새순이 나서 자랐다. 그것이 마당을 덮는 동안 어머니는 저승을 돌아 나오고 오동나무는 다시 마당을 넘어 지붕에도 그늘을 뿌렸다. 막 오동꽃이 필 무렵 누이는 그 장독대에서 떨어져 다리가 깨졌고 방학 내내 별 까닭 없이 아이들을 패주고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던 나는 그 집 골방에서 몇 번의 겨울을 나고는 시를 써서 시인이 되기도 했다.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1」 부분, 『젖은 눈』

치한처럼 봄은 오고

 

 

 

장석남: 그런데 그 당시에도 별로 주목한 사람이 없었지만, 내 시 중에는 실은 굉장히 의도적인 정치시들이 있어. 선입견 때문에 주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첫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 2부 같은 경우는 일부러 정치적인 상상력의 시들을 중심으로 묶어놨거든. 그런데 그런 시들은 열어놓고 읽지 않더라구. 「무꽃」이라든지「5월」, 「라일락 밑」, 그리고 표제작(「새떼들에게로의 망명」)도 광주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채상우: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요?

 

장석남: 그 시는 광주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전문,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채상우: 5월」이라는 시를 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장석남: 5월」도 그렇고. 광주의 상상력이라고. 우리 때 광주의 실체가 봉해져 있다가 겉으로 나오기 시작했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서 <새떼> <봄 하늘>, <환한 봉분> 이런 시어들은, 물론 그냥 서정시의 시어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우리는 너나 없이 광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대였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부채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조리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절망 같은 게 있었지. 인간에 대한 절망도 있었고. 5월」도 그렇고 「무꽃」도 그렇고 표제작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런 정서가 다 묻어있는 건데. 물론 그런 정서가 생경하게 튀어나와서야 시가 안 되겠지. 나 같은 경우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엎혀서 나온 거라고 할 수 있어. 추억과 오버랩 돼서. 그런데 그런 측면들은 닫아놓고 읽는 경향들이 있더라구.

 

 

 

채상우: 5월」이라는 시는.

 

장석남: 그 시는 사실 좀 노골적이지.

 

 

 

아는가,

찬밥에 말아먹는 사랑을

치한처럼 봄이 오고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는 열매

앵두나무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앵두꽃잎을 내밀 듯

세월의 흉터인 우리들

요즘 근황은

사랑을 물말아먹고

헛간처럼 일어서

서툰 봄볕을 받는다

 

―「5월」전문,『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채상우: 그렇죠. 선배님 시를 오월과 관련지어 읽은 평론가는 한 명도 없었죠? 아마 독자들도 대부분 그럴 텐데, 좀 서운하시겠어요?

 

장석남: 서운하기까지는 아니지. 그런데 2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거의 선명하게 들어올 거야. 물론 개인적인 서정에 머문 소품들이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다른 시들도 그냥 서정시는 아니지.

 

 

 

채상우: 『젖은 눈』에 덕적도에 관한 시가 있잖아요? 저도 선배님 시를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읽어 온 방식대로만 보아서 그런지 그 시가 무척 생경했어요.

 

장석남: 德積疏」라는 시 말이지? 핵에 대해서 쓴 시.

 

 

 

여기 덕적의 살림살이에서 정지처럼이나 여기는 굴업도에 그 알갱이 된 것은 이곳과 전혀 상관없는 데서 다 써버리고 나머지 위험스런 쓰레기만을 이곳 백성들을 업수이 여겨 여기에 세우고, 수만 세월과 사람의 정리와 꿈에 비하면 돈냥에 불과한 돈으로 무마하려는 전하의 은혜는 실은 신하 된 이들의 잘못된 계책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많은 배운 선비들은 증언하고 있거니와 여기 어리석은 백성들마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국정의 꼴로 보아서는 앞으로 당대를 무사히 넘길까도 의문이거니와 일천 대를 완벽하게 보전해야 하는 끔찍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야기한 것 자체가 이미 그른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핵발전과 폐기장을 만드는 일은 언제 이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킬지 모르는 일이므로 대국의 눈치를 살피거나 해서 될 일이 아니니 자세히 사방팔방으로 굽어보고 탐문하여 후세에도 열 번 물어보며 백 번 살펴 재고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누대를 협심하고 살아온 이곳 백성들은 이 일로 하여 몇몇 잘못된 자가 부화뇌동해 서로 편을 짜고 반목하며 장사집이 생겨도 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있어 풍비박산이 난 흉흉한 세월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덕적소」부분, 『젖은 눈』

 

 

 

채상우: 제가 「덕적소」를 생경하게 느낀 건 제 머리 속에 각인된 선배님 시의 이미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석남: 그러니까 그게 선입견이지. 선입견일 수도 있고, 남들이 먼저 해놓은 이야기를 참조만 하는 것일 수도 있지. 남들이 못 본 부분을 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남들 얘기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해. 사실「붉은 구름」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시라고. <太平聖代> <아관파천>이니 이런 말들이 적혀 있는데, 이게 보통 정치적인 용어가 아니라구.

 

 

 

채상우: <붉은 구름의 세월이었네>라는 결구도 그렇구요.

 

장석남: 그렇지. 「나비를 타고」는 검문 당하는 얘기 아니겠어? 그리고 「모란의 누설」에서 모란이 뭘 누설하냐 하면 <혈흔 뜬 세월>을 누설하고 있잖아? 또 「무꽃」을 보면 <화염병>이라는 시어도 있고 <바리케이드>라는 시어도 있는데, 이런 시어들은 전혀 보질 않아.

 

 

 

해가 바뀌고 첫 나비를 본다

심전도 검사 눈금모양절

뚝절뚝 날개를 저어간다

난 그 그늘이 지나간 곳을 밟는다

어디로 가는가

내 등과 머리를 열고

철근의 나비들이 날아올라 허공을

노랗게 절뚝인다

절뚝절뚝 종각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진다

봄이 뚝! 하고 꺾어져

나비 날개 속으로 들어가듯 나는

시청 지하철로 들어간다

그때 누군가 나를 가로막는다

나비는 흔적도 없고

내 등과 머리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나비를 타고」전문,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채상우: 그렇군요. 그렇게 적혀 있어도.

 

장석남: 안보는 거야. <미문화원>이니 <교보> <구리 이순신>(「햇빛이 날 사랑하사」,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니 다 나오는데. 이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청사나 풀빛에서 냈다면 확 달라졌겠지. 물론 그런 부분이 단순하게 해석되면 재미없어지겠지만, 우리 세대라면 그런 정도의 균형과 갈등은 있지. 역사에 대한 의식이나 시대에 대한 아픔과 문학에 대해서 말야. 내 시를 혹평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서정이나 사랑에 머물렀다고 그러는데, 심지어는 도피했다고까지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이런 시들을 자세히 안 읽고 하는 얘기지. 그저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건 말도 안되지. 그리고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랑이 무슨 사랑이겠어?

 

 

 

채상우: 아까 신서정 얘기를 하면서 시대적인 상황에 좀 덕본 것 아니냐 이렇게 말했었는데 도리어.

 

장석남: 그렇지. 도리어 피해를 본 거지.

 


역사가 내면화된 개인

 

 

 

채상우: 팔십년대 초중반 그러니까 87학번 이전의 선배들을 만나면 이 세계에 대해 도저한 절망감 혹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장석남: 그렇지.

 

 

 

채상우: 91학번인데 이전 선배들과는 무척 다른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투(가두투쟁)만 떠올려봐도 그렇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쇠파이프 들고 화염병 던지면서 전경들을 쫙 가르고 그랬던 기억이 일반적인데, 예전의 선배들을 만나 보면 학교 안에 전투경찰이 있어서 찌라시(선전물) 하나라도 뿌리면.

 

장석남: 찌라시는 상상도 못했지.

 

 

 

채상우: 그러니까요. 그렇게들 얘기하더라구요. 눈앞에 전경이 있으니까 뿌려진 찌라시 하나 줍는 것조차 망설였다구요. 끌려가는 친구만 바라보다 강의실로 가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구요.

 

장석남: 우리 세대에겐 오월이라는 게 최루탄 냄새로 오는 거야. 꽃향기가 아니라 최루탄 냄새로. 개학하고 나서 이른바 춘투라고 그랬는데, 그때부터 끊임없이 시달려. 지하철 들어갈 때마다 검문 당해야 하고 나올 때마다 가방 열어 보여줘야 하고. 정말 그 세월을 상상 못한다고. 그 억압받는 상황이라는 건. 그런 상황에서 개인의 삶이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런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시를 쓴다는 건 사실 말이 안되지. 물론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았다면, 수녀원에서 이해인처럼 살았다면 그렇게 쓸 수 있었겠지만, 그 시대를 산 보통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지. 물론 생경한 이념만으로 시를 써서는 안되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시인으로 머물러야 하되, 역사가 내면화된 개인이어야겠지. 그렇지 않아? 그런데 의도적으로 내 시에 대해서 그런 측면은 눈감는 듯한 느낌이 있어. 왜냐하면 그런 쪽 얘기를 하면 묶이지 않으니까.

 

 

 

채상우: 신서정 담론 같은 것 말이죠?

 

장석남: 그렇지. 그렇지 않아? 묶을 수가 없잖아. 한쪽은 딱 배제해야 묶이니까. 신서정이든 뭐든 지금까지 계속 그러고 있지.

 

 

 

채상우: 참 심각한 문제죠. 그런데 지금까지 선배님에 대해 이런 식의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걸 보면 선배님 자신도 이런 얘기를 거의 안 하셨나 보죠?

 

장석남: 그 얘기 잘 안하지, . 그냥 자연스러운 건데. 하지만 참 의아스럽긴 해. 시집에 어쩌다 한두 편 섞여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경향의 시들로 일부러 따로 한 부를 만들어서 일렬로 쭉 세워놨는데. 좀 열어놓고 보면 보일텐데 그러질 않아. 사람들이 첫시집에 실리는 해설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 고향에 관한 시라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중요하긴 하지만 하여튼.

 

 

 

채상우: 고향도 그렇고 아까 가난이라든지 허기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선배님 시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사인화된 기억 쪽으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심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요.

 

장석남: 그것이기도 한 거지. 그것이기도 하고 좀 더 나아간 것이기도 하고.

 

 

 

채상우: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아까 얘기했었던 종류의 역사에 대한 기억 혹은 체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근래 젊은 사람들의 시나 소설을 보면 어떠셔요?

 

장석남: 역사적 감각이 너무 마비되어 있다는 게 문제라고 봐.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은 역사적 인간일 수밖에 없는데. 역사와 개인이 끊임없이 균형을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한데 그런 점이 부족해. 역사와 개인 간에 끊임없는 시소 관계가 유지돼야 긴장이 있는 건데, 개인으로만 딱 들어간다, 그러면 어디로 나오나? 내가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에 대해 어떤 필터를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런 의식이 있나 싶어. 여성작가들의 소설들 가운데 가끔 보면 이 소설이 오락소설인가? 읽고 난 뒤에 나한테 남은 독후감이 이게 단가?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못 느끼는 독후감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해. 시에서도 그런 느낌을 주는 시가 있는데, 글쎄 그런 점도 중요하긴 중요하지.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좀 안 어울리겠지만, 역사성이 있는 소설도 좀 썼으면 하고 바라지. 물론 단순히 역사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닌데, 어떤 지적인 통찰이랄까 하여튼 뭘로 좀 눌러주는 어떤 게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물론 그 일은 쉽지 않겠지. 어려운 일이지.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점이기도 하고. 그리고 현실을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은 투정이지. 현실의 이면까지 꿰뚫어 보면서 노래하는 것과 그냥 단순히 비판만 하는 투정은 다르지.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모던한 시라 할지라도 진짜 울림을 가지려면 역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해. 너무 큰 얘기가 되어버렸는데, 그런 감각이 요즘 시인들에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여하튼 그런 점이 좀.

 

 

 

채상우: 그런 생각이 들긴 들어요. 팔십년대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선배들의 삶은 매번 역사와 조우하는 순간들이었다는 느낌을 받아요. 예컨대 길을 가다가 서울역 앞이나 학교 입구에서 검문 당하는 것만 해도 당대의 권력과 직접 맞닥뜨리는 순간인 거잖아요?

 

장석남: 그렇지.

 

 

 

채상우: 언제 어디서나 그런 경험들을 겪으면서 이십대를 보냈으니까 지금도 어디를 가든 그런 순간을 발견하는 눈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 세대의 경우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죠.

 

장석남: 갈수록 바뀌는 거거든. 그런데 촛불시위 같은 경우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또 의식을 갖고 참여했건 그냥 구경하러 나갔건 바로 그런 게 현실을 움직이는 거지. 그리고 우리 세대에겐 촛불시위가 정말 오래 간만에 맛보는 광장 체험이었어. 따옴표한 광장 체험. 그게 아주 중요한 거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촛불시위 현장이 바로 역사적 현장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게 정치지. 싫어도 좋아도 미치는 거야.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인간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건 거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광장에 문학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그것과는 다른 쪽에 문학이 있는 거고. 어쨌든 일개인은 정치와 역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대개는 덤터기 쓰는 거지 혜택 받는 게 뭐 있겠어? 속물들이나 혜택을 받지. 허허허. (웃음)

 

 

 

채상우: 처음 질문을 다른 맥락에서 다시 드리자면, 그처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도저한 절망의 시대에 왜 하필이면 서정시를 쓰려고 생각하셨어요?

 

장석남: 무기력이지.

 

 

 

채상우: 무기력이라구요?

 

장석남: 그렇게 얘기를 하면 너무 거창한 명명이 되는데, 사실은. 할 일도 많았을 텐데 왜 시를 썼냐고 하면 그건 질문도 좀 그렇고. 말하자면 그전에는 개인적인 삶의 경로를 따라 살았던 거고. 시는 그 이전에 내가 평생 해볼만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당연히 시 가르치는 학교로 간 것이고 그런 거지. 그러면서 내가 처한 시대가 그랬으니까 현실에 대해 시로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시대를 회피해서 태어날 순 없는 거니까.

 

 

 

채상우: 이제 새 시집을 내실 때가 됐죠? 선배님 시집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데요.

 

장석남: 진지한 독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시를 못쓰지. 시집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큰 맥락에서 말하자면 시가 뭐 팔려야 수십만 부가 팔릴 건 아니니까. 기껏해야 몇 만 부 차이일 텐데, 실은 몇 만도 아니지. 그렇게 해서 내게 돌아오는 건 크지 않지.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긴장하고 쓰느냐, 그리고 인식이든 감각이든 무엇이든 기존 문학의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소명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운명적으로 그런 거잖아? 지루한 건 못 참으니까.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소모적이고 무언가를 재생산하지 못한다면 필요 없는 거지. 그래서 사회의 문화적 토대 혹은 영역이 넓어지고, 그렇게 넓어져야 그 위에서 어떤 새로운 게 나오지 않겠어? 좀 거창하게 얘기했는데, 한 단계 나아가는 게 중요한 거지.

 

 

 

채상우: 선배님이 아까 쓰신 용어들 가운데 시적 진실성이라는 말만큼 참 애매모호한 표현도 없거든요. 시적 진정성이라는 말도 그렇구요. 이런저런 글들에서 대단히 정치적으로 쓰일 때가 많은데.

 

장석남: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표현이지.

 

 

 

채상우: 그렇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예전 선배들 그러니까 구십년대 이전에 등단했던 선배들의 시나 산문을 보면 시적 진실성이나 진정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세대 특유의 공통적인 감각이나 의식이 보이거든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석남: 시적 진실성이나 진정성이라는 말을, 그냥 순진하게 진정해도 되느냐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보거든. 순진해서는 안되지. 그건 아니라고 봐. 물론 진정하지 않으면 안되지. 그런 의미에서 진정성은 기본인데, 순진성을 가리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되지.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표현인데, 진정성이라는 건 하여튼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 점에서 난 김수영을 대단한 시인이라고, 어떤 깊이를 보여주는 시인이라고 봐. 그런데 진정성이라는 말이 왜 나오냐 하면, 그 말을 쓰는 이면을 잘 보면 무엇인가를 은폐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아. 진정성이 있다, 진정성에 호소한다, 이런 얘기들은 무엇인가가 모자라니까 혹은 어설프니까 그 앞에다 간판처럼 쓸 때가 있다는 말이지. 진짜 시인은 그런 말이 필요 없지. 시인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순진하다는 것은 몰라서 속는 것이고. 이렇게 말해도 되나? 뭐랄까.

 

 

 

채상우: 말 그대로 정말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것 말이죠.

 

장석남: 그렇지. 그건 정말 아니지. 그걸 진정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거는 그야말로 공부해야 되는 입장이고.

 

 

 

채상우: 진정성이라는 개념만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용어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이 이제 금방 얘기한 것처럼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 말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죠. 제 생각엔 그렇기 때문에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최종심급으로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해요. 그런데 그 최종심급에 해당하는 항목이 지금 시인들에게는 각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는 점이 문제죠. 아니 다르다기보다 예전처럼 특정한 무엇으로 지칭하기 힘들어졌다는 게 올바르겠죠. 여하튼 이전처럼 역사에 대한 의식이라거나와 같이 특정한 항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더더욱 진정성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진 것이구요.

 

장석남: 그렇지. , 진정한 것이라야 돼! 허허허. (웃음) 

 

 

 

돌 속의 여자들

 

 

 

 

채상우: 요즘 학생들 보면 어떤 생각드셔요?

 

장석남: 답답하지. .

 

 

 

채상우: 한양여대에서 시 창작 가르치시죠?

 

장석남: 그렇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때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여러 학생들을 같이 놓고 수업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거기에서 평균을 내려고 하는 그런 게 있어. 사실 시라는 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시라는 건 몇 사람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어. 수업 듣는 학생들이 다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요즘 생각을 좀 바꿨어. 모든 학생들이 다 시인이 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평균을 내서는 안되겠다고.

 

 

 

채상우: 시 창작 수업에선 사실 편애가 있을 수밖에 없죠.

 

장석남: 그렇지. 다른 얘기로 하자면 편애일 수도 있는데, 그게 갈등인 거야. 다 생각해서 해야 되는 건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그건 소모적이고.

 

 

 

채상우: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들 중에 수업 개강 때 소주 세 병 사가지고 가서 일단 학생들에게 소주 한 잔씩 따라주고 강의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요?

 

장석남: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난 수업에선 좀 고지식한 편이야.

 

 

 

채상우: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얘기를 듣고는 <, 학생들 잡겠다> 이렇게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장석남: 내 얘기를 한다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자꾸 나를 딜레당트한 쪽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그런 게 좀 있어. 허허허. (웃음) 내가 술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수업 때 그런 적은 없거든. 물론 술자리에서 근엄해서는 안되지. 술 좀 먹다 도망가고 그래선 안되는 거고. 하여튼 나와 관련된 소문들을 들어보면 불성실한 분위기 쪽 얘기들이 많더라구. 그런 얘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그런 얘기가 재미있나 봐.

 

 

 

채상우: 선배님을 딜레당트하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여하튼 좋아하시는 일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요? 음악도 그렇고 돌에 무얼 새기는 것도 좋아하시고.

 

장석남: 돌 좋아해.

 

 

 

채상우: 그리고 여행도 좋아하시는 듯하던데요. 산문 중에 <내 마음은 늘 유목 생활이다>(「봄 들판에서」, 『물의 정거장』, 210)라는 구절도 있고, <진실한 여행객은 여행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실천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여행의 여백들」, 『물의 정거장』, 224)라는 구절도 있던데, 자꾸 떠돌아다니고 싶어하시는 것도 같고.

 

장석남: 그런데 그런 적도 별로 없거든.

 

 

 

채상우: 산문집을 보면 선배님은 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어요.

 

장석남: 그런 쪽에 좀 민감한 건 사실이지. 돌 좋아하고, 요즘은 기회가 닿아서 거문고도 좀 배우고 하는데.

 

 

 

채상우: 거문고요?

 

장석남: 거문고 아주 재밌어. 그리고 글씨도 좋아하고. 그런 건 좋아해. 좋아하는 걸 어떡해. 그리고 주로 들은 음악은 서양 클래식인데, 그 지점에서는 다 만나는 것 같아. 요즘은 거문고 하는 재미를 들여서 하고 있는데, 그런 걸 풍류라는 거창한 말을 붙여서 한다면 사람들이 사실 그 쪽에 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사실 나야 뭐 조금 흉내내 보는 정도지. 옛날 사람들, 옛날 글들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또 한번 들어봐야 할 거 아닌가 해.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는 그런 걸 할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지. 다른 사람들도 거문고니 돌이니 글씨니 다 좋아할걸? 그럴 짬을 못 내서 문제지. 과감하게 시간을 들여서 좀 해야 하는데.

 

 

 

채상우: 홍섭 형도 도장 새기는 걸 좋아하더라구요. 전각하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장석남: 그거 싫어할 사람 없을걸? 실제로 해보면 잡생각도 없어지고. 글씨 쓰는 것도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몰두할 수 있지. 실제로 해보면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구. 축구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막상 해보면 더 재미있잖아? 잘하든 못하든.

 

 

 

채상우: 홍섭 형 시집 나왔을 때 어느 분이 새겨 주신 거라면서 시집 앞에다 도장 하나씩 꽝꽝 찍어서 주던데 부럽더라구요. 그런데 하필이면 돌에 새기는 걸 좋아하셔요?

 

장석남: 돌이라는 게 만지는 것도 좋고 질감도 좋잖아. 또 찍을 때도 좋고, 무늬도 좋고. 그리고 돌이라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하고 딱딱한 게 아니라 사실은 부드러운 거랑 통해. 옛날 사람들은 마당을 꾸밀 때 늘 돌을 뒀거든. 돌을 놓고 그 앞에 꽃을 심는다구. 돌을 프레임 삼아서 꽃을 심는 거지. 돌은 늘 가만히 있고 천년만년 가는 것이라면, 꽃은 봄에 피었다가 겨울이면 지는 거지. 뭐 상징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하여튼 그런 걸 즐기는 거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내가 그런 걸 알아서 돌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제일 흔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장 오래 된 거잖아.

 

 

 

삭혀야 할 것들이 있어서

속이 아플 때나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갑자기

길눈이 어두워질 때

나는 홍예문으로

돌의 얼굴을 보러 갑니다

그 동안 내가 사귄 돌들은 벌써 많아서

봄바다로 들어간 사람을 본 돌 벚꽃 떨어져 허리를 다친 돌 뱃고동에만

귀를 여는 돌 속에 음악이 가득한 돌 열에 떠서 금강석을 쥔 돌

돌의 얼굴에 새겨진 별의 자국

바람의 애무

그런 것들도 봅니다

그날 하루 버리고 싶은 발길들

그런 것들도

흔들리는 어떤 돌 밑에 괴이고 옵니다

 

―「돌의 얼굴둘」 전문,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채상우: 산문집을 보면 카프카 얘기도 있고 하던데, 영향 받은 작가가 있다면 누구죠?

 

장석남: 다지, . 허허허. (웃음) 시인이라면 다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미당을 참 좋아했고, 또 김수영도.

 

 

 

채상우: 두 분은 참 틀리잖아요?

 

장석남: 틀리지. 전혀 다른데.

 

 

 

채상우: 제가 인터뷰하면서 무척 재미있게 생각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가, 영향 받은 작가에 대해 질문하면 대개의 경우 김수영 시인과 서정주 시인, 이 두 분을 꼭 이야기한다는 점이었어요.

 

장석남: 다 시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 그리고 시인이라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하는데. 박재삼이라든가 읽으면 다 뭘 주잖아? 그 사람들의 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지. 그게 뭐냐, 그러면 그냥 읽어 봐라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데. 그런 시인들의 시는 뭔가 자극을 주고 생각을 주지. 그런 걸 안주면 시인이 아니지.

 

 

 

채상우: 시만큼 정직한 게 없죠. 시를 읽어 보면 그 시를 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보이니까요.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장석남: 바람을 피우는지. 허허허. (웃음)

 

 

 

채상우: 선배님 글을 보면 여자 얘기도 많던데, 연애도 많이 하셨죠?

 

장석남: 미당의 시를 보면 진짜 좋은 시는 강렬한 연애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아. 연애까지는 몰라도 연애감, 연애 감정 말이지. 그게 연애시뿐만 아니고 모든 시에 다 해당되는 거지. 그저 연애한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연애하면 그 사람 시가 모두 연애시가 된다는 말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시들도 강렬한 연애감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거지. 연애감이라는 게 사실 따지고 보면 괴로움이거든. 진짜 괴로움이야. 그렇지 않아? 미당도 그렇고 김수영도 그렇고, 어떤 깊고 강한 무엇인가를 주는 건 연애감 때문이 아닐까 해. 사실 연애감만큼 일생에 사람을 붙잡아두고 사로잡는 게 없잖아? 그게 죄책감도 주고 행복감도 주면서 동시에 괴로움도 주고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주면서 사람을 휘두른다고.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타협하고 말지. 절실한 연애감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동경에서 그치고 말지.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이 동경하는 데서 그치고 마는 부분을 대신 해주는 거거든. 그러니까 진짜 시인들의 시는 강렬한 무언가를 주지. 그러니까 연애를 해야 되고. 물론 단순한 성욕은 연애가 아니지. 허허허. (웃음) 그리고 사실 연애도 힘들어 못하는 거지. 골병 들지.

 

 

 

채상우: 연애 깨지고 나면 시가 참 좋아지잖아요?

 

장석남: 그렇더라고.

 

 

 

등기소가 되어 있는, 만국공원 아래 韓末 르네상스풍 옛 건물 앞에 우연찮게도 우두커니 서 있는 기회가 되어 있자니 덧니 나듯 한결같이 상냥한 여인이 희망으로 그립다 왜 그런가 곰곰 생각하자니 돌기둥에 비끼는 찬 겨울 햇살들, 한결같이 상냥한 그 계집애들, 희디흰 옥니들, 역광에 빛나는 머리카락들, 가슴을 저미고 들어오고 있었네

―「한결같이」 전문,『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신기하게도 연애를 할 때보다 애인과 헤어지고 난 뒤에 시가 더 잘 써지는 건 사실이다. 장석남 시인의 말처럼 연애와 이별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며, 때론 까닭 모를 죄책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일도 드물 것이다.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연애는 그리고 이별은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으며, 온몸으로 감내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진정한 연애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물집들을 하나하나 모두 터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연애란 생의 도저한 심연이다. 그것은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사무침이기도 하고, 그 사무침만큼 끊임없이 응시하며 다스려야 할 깊은 상처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일 또한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리고 자신이 견뎌온 한 시대를 사랑하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건대 장석남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의 몸은, 그리고 기억은 온통 <세월의 흉터>들로 가득한 지도 모르겠다. 짧게 말하자면 그 흉터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왜곡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장석남 시인의 시쓰기의 기원이자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