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04년 6월 2일(수)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장 소: 문학수첩 사무실
이시영 선생을 만난 날은 몹시 무더웠다. 6월초인데도 한낮 기온이 30도가 넘었다. 그래선가, 이시영 선생을 만나기는 만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론 만나기는 만났다. 이시영 선생을 만난 시각은 6월 2일 수요일 오후 2시였고, 장소는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2번 출구였다. 그곳에서 문학수첩이라는 출판사까지 졸졸 따라갔던 일도 생각나고, 근 두 시간 동안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들도 생생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시영 선생을 만났던 곳은 문학수첩 사무실이 아니라 나뭇결마다 세월의 때가 반들반들 들어찬 대청마루였던 듯하다. 뿐이랴. 이시영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는 초여름 햇살이 압정처럼 쨍쨍하게 내리꽂히던 오후 2시가 아니라 이제 막 서녘 하늘이 조금씩 발그레 물들기 시작하는 초저녁이었던 듯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시영 선생을 만나기는 만났는데 도무지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기억이란 참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생각컨대 이시영 선생을 만났던 장소와 시간을 이처럼 착각하는 까닭은 아마도 선생 특유의 목소리 때문인 듯싶다. 이시영 선생은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착하고 맑은 눈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어눌한 듯하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품새 있게 엮어나가는 나즈막한 목소리가 더 일품이신 분이다. 그래서일 거다. 그 목소리 때문에 이시영 선생을 만났던 기억이 자꾸 헷갈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 기억보다 가짜 기억이 오히려 더 매혹적이고 즐거우니 도리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기억이란 참 요상한 것이다. 나처럼 사리가 어두워 현실과 환상을 분별하지 못할 때 쓰는 단어가 미망(迷妄)이다. 미망(迷妄)과 미망(未忘)이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것도 미망(迷妄)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적어도 이시영 선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최근 이시영 선생의 시 쓰기는 미망(未忘)이 얼마나 명징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창조적인 순간이 있는 거지
채상우: 요즘도 하시는 일이 많으시죠?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도 부이사장직을 맡고 계시고, 창비에서도 편집자문위원을 하고 계시고, 문학수첩에서도 편집기획자문위원을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냐, 뭐 그렇게 바쁘진 않아.
채상우: 문예진흥원에서도 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시나요?
거기에선 금요문학강좌를 맡고 있어. 진행만 하는 건데, 세 달 동안.
채상우: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면서도 얼마 전에 시집을 또 상재하셨잖아요. 정말 놀랍습니다.
『은빛 호각』이 작년 11월(창비)에 나왔고 『바다 호수』가 올해 5월(문학동네)에 나왔으니까,
근 6개월만에 119편의 시를 쓰신 셈이 되는데, 이처럼 단시일 내에 많은 시를 쓰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시 쓰시는 일 말고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으신 건가요?
그 당시에는 그랬지. 내가 창비에서 23년 2개월 동안 근무했거든. 80년도에 입사해서 작년에 정식으로 퇴직했는데, 퇴직하고 나니까 시간이 남더라고. 시간이 남으니까 옛날 기억들도 떠오르고 그래서. 시집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다 옛날 얘기들이잖아?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기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쓴 시들이지. 그리고 시심(詩心)이라는 게 써봐서 알겠지만 한 번 고구마 뿌리 들추듯 나오면 따라나오는 거잖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시 쓰기라는 게 그런 때가 있는 거잖아? 안될 때는 한 편도 못 쓰다가 잘될 때는 잘 써지고 말야. 2000년도엔 딱 2편 썼었어.
채상우: 물론 바쁘셔서 그랬을 리는 없을 테고 다른 사정이 있으셨나요?
바빠서 그랬던 건 아니고. 시간이 바빠서 시를 못 쓴다는 건 말이 안 돼지. 시 쓰기와 소설 쓰기는 다르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창조적인 순간이 있는 거 아냐? 그런 시기가 있는 거지. 이 두 시집들을 쓸 때가 바로 그런 시기였어.
채상우: : 두 시집 가운데 특히 『바다 호수』를 보면, 문인들 이야기나 창비에서 근무하시면서 겪으셨던 일들, 그리고 칠팔십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일을 하시면서 경험하셨던 사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던데, 선생님께서 방금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까 창비에서 퇴사하신 게 이 두 시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지. 창비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조금씩 쌓이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내 자신을 이제는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홀가분한 심정으로 썼어. 창비 안에 있을 때는 여기저기 걸리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렵잖아? 그리고 창비라는 곳은 나한테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거든. 요즘에는 그냥 출판사가 됐지만, 예전에는 문단과 창비를 구별할 수 없었지.
채상우: 어떤 의미에서요?
그러니까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지. 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는 운동 단체잖아? 창비는 출판
사고. 그런데 운동 단체와 출판사가 사실상 구별이 안 되었던 시기가 있었지.
채상우: 작가회의에 소속된 문인들이라면 모두 창비에서 활동했다는 뜻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말하자면 창비가 작품 생산의 기지였다면, 작가회의는 운동 단체였다는 뜻이지. 민노총이 있고 민노당이 있듯이 말야. 창비라는 곳이 진보적인 문인들의 글쓰기를 보장하는 출판사였다면, 작가회의는 진보적인 문인들의 결사체였다고 할 수 있지. 거의 동전의 앞뒤처럼 그렇게 서로 구별을 할 수 없었던 때였어. 그래서 내겐 창비가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는 거야. 말하자면 문학운동 단체와 출판사를 겸했던 셈이지.
채상우: 선생님께서 창비에 입사하신 때가 80년 2월이죠?
그렇지. 그때 내가 삼십대 초반이었지. 지금 오십대 중반이 넘었으니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비에서 보낸 거지.
채상우: 팔십년대 초반에 일이 많았죠? 창비가 폐간된 적도 있었고, 출판사가 등록취소 당한 적도 있었고.
그렇지. 잡지 폐간 당한 건 80년 7월 31일이었지. 전두환이가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의 약칭, 1980년 5·17 비상계엄 직후 대통령 자문·보좌 기관으로 설치된 기관)를 통해서 그렇게 한 거지. 그리고 85년 12월에는 출판사 자체가 없어졌어. 등록취소 당한 게 그때야. 그 다음 89년에는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황석영씨 북한방문기를 실었다가.
채상우: 「사람이 살고 있었네」 말이죠?
응, 맞아. 그때 그 일로 구속 됐었지. 내가 그때 잡지 주간을 맡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크게 세 가지 사건을 겪었네. 하나 더 추가한다면 82년도에 터진 김지하씨 사건도 있었고.
1982년 6월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납본필증’ 없이 사전 배포했다고 하여 이틀간 안기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날 때였다. 퇴계로에서부터 트럭 하나가 우리 뒤를 따라붙더니 중앙청 문공부까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수사관들과 함께 어느 국장 방으로 갔더니 백지를 내밀며 ‘재산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 트럭에는 시중 서점에서 압수한 1만여 권의 시집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원효로 경신제책에선 나와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형과 함께 시집 1만 권이 분쇄되었는데 분쇄기를 직접 잡은 김상무의 엄지손가락 없는 오른손이 마구 떨었다. 그리고 일 주일 후 김상무에게서 폐휴지값 5만 8천원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바다 호수』
과거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고 하는 세대
채상우: 『은빛 호각』과 『바다 호수』에 실린 시를 나누어 보면 대체로 세 가지 부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선 창비에서 경험하셨던 일들과 문학운동을 하시면서 만나셨던 문인들에 대한 시, 그리고 두 번째로는 고향 마을과 관련된 시, 세 번째로는 특정 풍경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한 시, 이렇게 세 가지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문인들에 관한 시가 무척 많습니다. 문인들에 대한 시가 이처럼 많은 까닭은 무엇인지요?
금방 얘기했던 것처럼 창비에 들어가서 만난 사람들이 다 문인들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내가 문학운동에 뛰어든 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부터 따지면 근 30년이 돼. 그때 내 나이가 만 25살이었어.
채상우: 그때 이야기를 적은 시가 「1974년 11월」이라는 시죠?
1974년 11월 18일 오전 열시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인 세종로 의사회관 계단. 고은 선생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백1인 선언’의 결의문을 읽고 있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 사상의 자유는……” 경찰이 들이닥쳐 고선생의 입을 틀어막고 그의 팔을 사정없이 나꿔채갔다.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는 플래카드를 펼쳐 든 내 뒤에서 석영이 형이 급박한 목소리로 나머지 대목을 읽어나갔다. “서민 대중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획기적……” 이번에는 당황한 경찰이 그쪽으로 몰려가 그를 막 덮치려고 할 때였다. 스크럼을 짠 삼십여 명의 문인들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시인 석방하라!”는 구호를 연달아 외치며 완강히 저항하자 경찰이 곤봉을 꺼내어 마구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그날의 집회는 끝났다. 그리고 양쪽 겨드랑이를 단단히 잡힌 채 철망이 쳐진 경찰 호송차에 오르자 거기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석영이 형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보니 건너편 보도 위에서 그가 V자를 그려 보이며 유유히 웃고 있었다.
―「1974년 11월」 전문, 『바다 호수』
그렇지. 그 시에 적힌 그대로야. 그날, 그러니까 1974년 11월 18일에 101인 선언을 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시작되었지.
채상우: 그러고 보니 정말 30년이네요.
그래서 이번에 30주년 행사를 치를 예정이야. 그 세월만큼 창비라는 곳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인 거지.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문인들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내 시의 중요한 부분이 된 거야. 문인들 얘기가 좀 많은 편이기도 한데, 실은 의도적이기도 해. 요즘 세상을 보면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개인들이 다 단자화 되어 버렸는데, 옛날에는 연대감도 있었고 문화공동체에 대한 신념도 있었고 그랬거든. 그런 것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그리움도 있어서 그렇게 좀 많이 쓴 거야. 창비도 지금은 그냥 출판사가 되어버렸지만, 예전엔 문인공동체적인 요소가 강했더랬어.
채상우: 문인들에 관해 시를 쓰신 이유가 공동체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말씀이시죠? 반면에 요즘 시대는 개인이 모두 단자화된 세상이라는 말씀이시고요?
응 그렇지. 칠십년대는 계몽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고, 팔십년대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혁명적 낭만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 구십년대는 좀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뒤 개인들이 모두 단자화 되어버린 시대잖아. 게다가 역사를, 팔십년대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고 하는 시대이기도 하고. 지금 이천년대가 되었는데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점이 그런 거라니까. 물론 월드컵 응원이라던가 촛불시위라든가 이런 기회를 통해 팔십년대의 정신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어느 정도 전승이 된다고 봐. 지난번에 광화문에 나가봤는데, 촛불시위를 보니까, 개인들이 단자화 되고 뭐 분자화 되고 그래서 팔십년대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문인 사회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칠팔십년대에 비해 각개약진만 하려고 하지 공동체적인 정서랄지 움직임은 느슨해지는 것 같고.
채상우: 선생님 시를 보면 예전 선배 문인들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겠더라구요. 특히 문인들끼리 술 마시고 벌어진 일화가 무척 많던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요즘은 술도 안 마시고 그러지?
채상우: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또 어울리는 사람들끼리는 밤새워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자면 문인 사회에서 이젠 예전의 마을공동체 같은 그런 정서는 사라진 것 같아. 그런데 탄핵 국면 때의 촛불시위나 지난번 효순이·미순이 사건 때의 촛불집회 같은 걸 보면, 시대를 달리해서 팔십년대의 정신 특히 자발성 같은 그런 요소는 계승된다고 봐.
채상우: 그런데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촛불시위나 탄핵 국면 때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집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십대 초중반의 젊은이들도 많긴 많았지만 주도 세력은 삼십대 이상이 아니었나 싶은데.
이십대가 주도 세력은 아니었지. 주도 세력은 386 세대였지.
채상우: 그렇죠. 주도 세력은 386 세대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방금 팔십년대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는 말씀은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약간 이의를 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계승되고 있다고 봐. 좋은 취지로.
채상우: <좋은 취지로>라는 말씀은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이신가요? 제 생각엔 팔십년대의 정신이 시대를 달리해서 계승되고 있는 영역을 찾자면, 인터넷 쪽이 금방 떠오르는데요.
그렇지. 인터넷 쪽을 보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단자화 되고 분자화 된 세계 속에서도 하여간 자기들 나름대로 시민공동체가 되었건 안티 사이트가 되었건 간에 결사체를 만들어서 서로 소통하고 있잖아.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지. 시대가 달라진 만큼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 나름대로 결사하는 방법이 있고 힘이 있다고 봐.
채상우: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면, 과거에 대해서는 참 너그러우신데 현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컨대 좀 전 얘기 중에 나온 「1974년 11월」이라는 시에 그려진 황석영 선생님에 대한 선생님의 시선은 무척 너그럽거든요. 그에 반해 요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는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 아니냐는 판단이 미리 전제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령 「이 세계」라는 시를 보면 요즘 세상은 비록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악의로 가득 찬 세계 아니냐 이런 생각이 깊게 배어 있는 듯한데요.
주 예수 크라이스트가 이 세상에 오신 날
한 사내가 진도빌딩 17층 꼭대기에 매달려
물걸레로 유리창을 북북 닦고 있는데
지상에 그를 팽팽히 묶고 있는 밧줄을
행인들이 무심히 툭툭 치며 지난다
―「이 세계」전문, 『은빛 호각』
「이 세계」는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잊혀진 시대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는 시지. 공동체라는 건 일단 타인들을 안고 가는 세계잖아? 황석영씨처럼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같이 끌어안고 가는 게 공동체지. 그런데 지금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세상이잖아? 「이 세계」는 그런 세태에 대한 비판이지.
채상우:「탄생」이라는 시도 현세태에 대한 비판인 셈인데, 짧으니까 전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알집을 열고 나오자마자 가시고기는 제 애비의 시신을 파먹고 바다로 나아간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저 가시고기떼의 늠름한 입이여!”(『은빛 호각』) 이 시는 물론 과거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후세대를 비꼬는 시이겠는데, 선생님께서 후세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전세대의 시신을 뜯어먹고 과거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만, 너희를 키운 것은 실은 바로 전세대 그러니까 네 아비들이다, 그걸 좀 알아라 이런 내용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데요?
그렇게 읽어주면 좋은 거고. (웃음) 하여간 나는 구십년대에 등장한 문학 세대는 뭐라고 해야 할까, 과거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고 하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어.
채상우: <과거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고 하는 세대>라는 명명은 구십년대 초중반부터 등장한 것으로 아는데, 좀 깊이 따져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우선 누가 그렇게 명명하는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명명하기에 의해서 발생하는 효과는 무엇인가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과거를 적극적으로 망각하려고 하는 세대>라는 명명은 칠팔십년대 세대의 자기 보존 전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십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세대에게 망각할 만한 과거가 있기는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물론 지금 제가 말씀드린 과거란 지극히 사적이며 내밀한 경험의 층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의 장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만큼 지금 세대에 비해 칠팔십년대 세대가 좀더 행복하게 자신이 갈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 또 그런 만큼 문학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안도 명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때는 단답이 나올 수 있는 시대였지. 그에 비해 요즘은 더 복잡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질문은 항상 근본적인 건데,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삶의 마지막 질문에 마주서는 거라고 생각해. 삶을 밀고 나가는, 삶에 대한 마지막 질문 말야. 이제 금방 팔십년대가 행복했던 시대였지 않았냐 이렇게 말했는데, 충분히 이해가 돼. 왜냐하면 그때는 반대만 하면 됐으니까. 군부독재만 물리치면 당장 무언가가 되리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그런 믿음들이 계기가 돼서 지금 노무현 정부까지 온 거고.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오늘날의 절차적인 민주주의까지 온 거잖아? 아까 민노당 얘기가 나왔었는데, 구십년대에 서부구치소에서 단병호 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었어. 그 사람도 감옥 갔었잖아? 그런데 그 단병호 위원장이 국회 앞에서 민노당 사람들과 모여 입소식 비슷한 것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그러더라구. 예전에 우리에게 친구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거라면서 말야.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참 찡하데. 하여간 그래도 민노당이 국회에 진출하는 데까지 왔잖아? 그렇게 온 건데 말야. 오늘의 세대는, 오늘의 문학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너무 자기 문제에만 갇혀 있는 것 같아. 그게 내 불만이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타자에 대한 배려라든가 그런 게 없고 자꾸 자기 문제에만 골몰한데, 그렇게 자기 문제만 자꾸 뚫다 보면 과장되게 되어 있잖아? 그런 문제가 좀 있더라고.
채상우: 자기 문제에 대해서만 말이죠? 요즘 흔히 말하는 자폐적이고 내폐적인.
내폐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 자기 문제에만 좀 골몰하지 않나 싶고 그래서 좀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자기 문제에만 갇혀서 출구를 못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느낌이 들어. 특히 모던한 시를 쓰는 모더니스트들의 시를 보면 좀 과장이 심하지 않느냐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대개 맥락을 보면 자기 존재의 문제들이야. 진지한 질문들이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와 같이 내성적인 질문들인데, 난 다른 세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 저렇게 자기 회로에만 갇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미로라는 게 그렇잖아? 자기 응시만 하다보면 미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문학이라는 건 그런 진지한 물음들을 뚫고 올라가서 자기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하는 건데, 누가 나를 구해준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지. 그렇잖아? 김수영을 보면 이런 측면도 가지고 있고 저런 측면도 다 가지고 있잖아? 모던한 시의 측면도 가지고 있고 현실에 대한 발언도 아주 강렬하잖아? 말하자면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김수영한테는 자기 회로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걸 과감하게 뚫고 나가는 측면도 있단 말야. 그런 게 요즘은 안 보이더라고.
인간이란게 맨날 옳은 소리만 하고
사는게 아니란 말야
채상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시들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칫 오해를 사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했는데, 예컨대 황석영 선생님이나 송기원 선생님, 김사인 선생님 등에 대한 일화는 좀 과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전형적인 삶의 모델들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존재들이 아닌가라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이 분들에 대해 굳이 이렇게 쓰신 의도가 따로 있으신지요?
태순이 형님의 소설은 언제나 진지하였다. 그가 서울신문에 연재하던 『어제 불던 바람』도 그러하였는데 여주인공 유이안과 또다른 남자 주인공이 여관에 들어가서도 해방 직후 임정 노선이 옳았느냐 박헌영 노선이 옳았느냐로 밤새도록 토론이 그치질 않았다. 갑갑한 송기원이 그만 술자리에서 울컥 토해내고 말았다. “아니 형님, 여관에 들어가면 일단 한번 붙고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뭐야, 이 새끼야!” 콩비지찌개가 냄비째 엎어지고 안경알처럼 투명한 소주잔이 쨍그렁 하고 천정에 가붙었다가 발 아래 박살난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제 불던 바람」 전문, 『바다 호수』
그것에 대해서는 그래. 팔십년대 시들은 너무 규격화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거든. 당위론적이었고 민중적 전형이라든지와 같은 이론에 의해 강제된 문학이었지. 난 그런 점에 대해서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 문학이라는 게 원래 생생한 숨결을 지녀야 하는데 팔십년대엔 밖에서 강요된 이론적 규제들에 의해서 생동감 대신에 근육이 굳어진 경우가 많았지. 송기원이나 황석영씨 같은 경우엔 일탈적인 면모를 좀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렸다고 할 수 있지.
채상우: 이문구 선생님께서 <제1회 민족문학의 밤>이라는 행사에서 사회를 보시다가 말실수하신 내용도 재미있더라구요.
1978년 4월 성공회 서울대교구 강당.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백범사상연구소 공동 주최 제1회 민족문학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를 가르며 사회자의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민주화투쟁에 앞장서신 성내운 선생을 모시겠습니다. 낭송할 시는……” 갑자기 청중석 여기저기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참지 못하고 와르르 웃음 보따리가 터지고 말았다. “아니 반민주화투쟁이라니? 그러면 우리 성선생님도 반민주인사 아냐?” 단상에 올라 막 옥중시인 양성우의「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를 낭송할 예정이던 성선생님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사회자인 젊은 소설가 이문구씨는 이미 홍당무가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반독재투쟁’ ‘반유신투쟁’을 너무 자주 외치다보니 어느새 입에서 반민주화투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후로 성내운 선생은 이문구씨만 만났다 하면 이렇게 놀리곤 했다. “어이 이선생, 요즘도 반민주화투쟁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시나?”
―「제1회 민족문학의 밤」전문, 『바다 호수』
인간이라는 게 맨날 옳은 소리만 하고 사는 게 아니란 말야. 때로는 술도 먹고 바람도 피우고 그러는 거지. 그런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게 문학이지. 박노해의 후기시들을 보면 구호나 슬로건이 무지하게 등장하잖아? 『노동의 새벽』시절의 시들 말고 후기시들 말야. 그리고 후기 카프의 권환 같은 시인의 시를 보면 상당히 경직되어 있잖아? 그런 요소가 팔십년대 문학에도 있었단 말야. 내 생각엔 그래. 전형이라든지 민족적 형상이라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란 거지. 인간에겐 일탈적인 면모도 있다는 말이야. 그런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냐, 그런 것을 좀 편안하게 보여주자, 이것이 말하자면 내 시관이지. 살아 있는 것을 뻣뻣하게 만드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라 죽은 뼈들에, 경직되어 있는 것들에 생동하는 숨결을 부여하는 것이 리얼리즘이지. 죽은 사물을 살리는 게 리얼리즘이지 산 사물을 죽은 사물로 박제시키는 게 리얼리즘은 아니란 말야. 리얼리즘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창조적으로 달리 해석해내는 것인데 팔십년대엔 오히려 박제화하고 경직화하는 면이 있었지. 살아있는 문학을 도구화 시킨 측면이 좀 있었어. 그리고 어떤 걸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거든. 당위로서 말야. 분단 현실을 그려야 한다든가 노동자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든가 말야. 이처럼 이론에 의해서 강제된 측면들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재미가 없지 않았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
채상우: 그런 문제가 있긴 있었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팔십년대에 생산된 문학적 자산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물론이지. 그리고 그 시대를 거쳐왔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비판적으로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지. 그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런 얘기를 어디 할 수 있겠어?
채상우: 얼마 전에 김영하의 『검은 꽃』을 읽었는데, 선생님의 근래 작업과도 어느 정도 맥이 닿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검은 꽃』을 읽으면서 진정한 역사란 민족 혹은 민족국가와 같은 거대 담론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런저런 모습들의 총합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기 남미 얘기 나오고 하는 소설 말이지?
채상우: 예. 에네킨 농장 얘기도 나오고.
농장 얘기도 나오고 공화국도 만들었다 며칠만에 붕괴되고 그런 소설 말이지. 글쎄 뭐 꼭 그런 의도라기보다는 나는 내가 겪은 시대, 내 기억의 지층에 묻힌 인물들을 다시 불러내서 지금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번 들려주고 싶었던 거야. <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개인이 있었구나. 이처럼 각별한 인물이 있었구나. 송기원이라는 일탈적인 사람도 있었구나.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라고 읽어주었으면 하는 거지. 우리 주변에 이처럼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근조근 후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거야. 무슨 거창한 것을 지향한 것은 아니고. 한 가지 바라는 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문학의 블럭들의 쌓여서 토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채상우: 그런데 송기원 선생님 얘기나 김사인 선생님 얘기를 다룬 시를 보면 당사자들이 좀 수치스러워할만도 한데요, 굳이 이렇게까지 다 쓰실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이 얘기들을 쓴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 난 꼭 근엄한 얘기들만 써야 할까 싶어. 그런 생각을 좀 깨뜨려주고 싶어서 이렇게 쓴 거지. 일종의 금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내 자신 어떤 이야기는 다루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금기를 뛰어넘어 보자는 생각도 있었어. 술 먹고 바람 피우고 그런 일들은 수치스러운 일들이지. 그래도 그런 얘기들도 쓰자는 거야. 시에서 그런 얘기들을 다루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좀 깨자 이렇게 생각해.
음울한 봄날 아침이었다. 인사동에서 마신 밤샘술을 이기지 못하여 허청이며 낙원동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근처 낙원탕에서 갓 나온 듯한 여인이 목욕 대야를 낀 채 흘낏 나를 돌아본 뒤 청바지에 긴 생머리를 찰랑이며 나비처럼 경쾌하게 앞서가고 있었다. 처음 본 여인이었다. 무심코 따라가보았더니 낙원약국을 돌아 탑골 안으로 쏙 사라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컴컴한 탑골 문을 열었더니 거기 어둑한 홀을 향해 열어젖힌 안방 벽에 한 낯익은 윗도리가 걸려 활짝 웃고 있었다. 송기원의 것이었다.
―「송기원의 윗도리」 전문, 『은빛 호수』
채상우: 전 90년대 초반 학번인데요, 선생님 시집에 일탈적 인물들로 그려진 문인들이 제가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접했던 분들이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황석영 선생님, 조태일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도 그렇고 제가 존경하는 분들인데, 그 이미지가 어떠냐 하면 가히 지사라고 할 만큼이거든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지사의 삶이란 것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지. 백기완 선생 얘기도 썼지만, 고기 먹으면 노래도 나오고 그런 게 인간이지. 투사의 삶이라고 해서 맨날 <님의 행진곡>만 부르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 돈 몇 푼 생기면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흥얼흥얼 하고 이런 게 인간의 삶이지. 문학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투사의 문학이라고 해서 투사의 일생만 있는 건 아니지. 그런데 김학철 선생 같은 경우는 달라. 김학철 선생은 그런 게 없어.
70년대의 한 시기, 돈이 생기는 날이면 고은 선생은 광화문 뒷골목의 백범사상연구소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곳의 백기완 선생을 불러내 문턱이 새까맣게 닳은 고깃집에 마주 앉았다. 불판에 고기가 툭툭 튀며 익어갈 때마다 아, 나직이 들려오던 백기완 선생의 노래 “갈매기 바다 위에 나지 말아요.”
―「갈매기」전문,『바다 호수』
채상우: 어떤 면에서요?
김학철 선생은 실생활과 신념이 거의 일치된 사람이야. 그 양반은 술 마시고 뭐 어디 가서 주정하고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 술도 안 마실 뿐더러 담배도 안 피워. 혁명가는 그런 걸 가까이 둬서는 안 된다 해서 말이지. 그 양반은 진짜 혁명가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아간 분이지. 참 최근에 누가 박헌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송기원씨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재미없어 못 쓰겠대. 남아 있는 기록들 중에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말야. 박헌영에 대한 기록이 전부 위대한 선생님으로만 나와 있다는 거야. 모든 사람의 회고도 그렇고. 그 사람이 술을 먹었는지 뭐 어떻게 살았는지 하여간 인간적인 기록은 하나도 없다는 거야.
채상우: 영화가 심심하겠네요.
그러니까 거기다 이제 허구를 집어넣어야 되는 거지. 시나리오를 쓰려면. 박헌영이나 김학철 선생처럼 혁명가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도 있지만, 백기완 선생처럼 투사이면서 탁월한 예술가인 분도 있지. 백기완 선생은 뭐 민중연희패라고도 할 수 있지.
채상우: 두 권의 시집을 읽어보니까 대개 선생님 선배 세대 혹은 동년 세대에 속하는 분들 얘기들이더라구요. 후배 세대로는 아마 김정환 선생님뿐인 거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지금까지는 선배들에 좀 치중해서 썼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라야겠지. 후배들에 대한 얘기를 쓰려면.
채상우: 후배 문인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작가를 들라면 누가 있나요?
김정환이지. 지금도 인사동에 가면 뭐 술집에 앉으면 그렇지. 예전에 점심이나 먹자고 한번 불렀더니 밥은 안 먹고 술만 먹어. 네 시까지. 저기 삼각지 가면 돼지껍질 굽는 데 있잖아 왜? 거기서 그랬는데, 자기 체질에 딱 맞대. 그때도 소주하고 맥주하고 섞어서 다섯 병을 마셨는데, 두 병만 더 먹자고 그래서 한 병만 더 먹고 일어났지.
채상우: 지난번에 김정환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술을 못 드시겠다고 그러시던데요?
아니야. 최근 일인데. 선거 직전 날 그랬어. 4·15 총선 전날 말야.
월드컵 한국–폴란드전이 막 열리려고 하는 6월 초순이었다. 집에 가서 빨리 텔레비전을 켜려고 잰걸음으로 불교방송 옆 도화소공원 앞을 지나치는데 거기 맞은편 마포곱창집에 웬 낯익은 뒷모습의 사내가 앉아 스님과 함께 그런 것하고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유쾌한 대작을 하고 있었는데, 김정환이었다.
―「김정환」 전문, 『바다 호수』
한편의 시를 쓰는 것도
자신의 과거 전체를 걸고 쓰는 것이지
채상우: 참, 김정환 선생님께서 근래에 내신 『하노이–서울 시편』이라는 시집을 보셨나요? 3년 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일로 베트남을 방문하셨을 때 겪었던 일들과 이런저런 소회들을 엮은 시집인데, 서시격에 해당하는 시를 보면 <회고는 음탕하지>(김정환, 「대한(大寒)―하노이–서울 시편 序」, 『하노이–서울 시편』, 문학동네, 2003)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베트남 거리를 바라보면서 박정희 없는 칠십년대나 김일성 없는 평양 거리를 떠올렸다고 하는데, 그런 회고의 감정이란 실은 대상에 대한 철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요컨대 왜곡된 시선에 불과하다라는 반성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선생님께서 근래에 내신 두 권의 시집들을 보면 모두 과거에 대한 기억의 소산이잖아요? 그래서 여쭙겠는데 선생님께 과거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를 기억한다는 행위는 어떤 것인지를 듣고 싶습니다.
과거라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리고 김정환 시집은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말하기 힘들고. 그런데 과거라는 건 현실과 단절될 수는 없는 거지. 그리고 과거를 경험했으니까 미래를 보는 거잖아. 오늘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만 내 속에는 과거가 집적되어 있는 것이고, 내가 살아온 과거의 집적이 나의 현재를 규정하고 나아가야 할 길도 말하자면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해. 물론 기억은 미화될 수도 있겠지. 그건 개인의 눈이 다 다르듯이 시간이 멀어지면 미화하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야. 그런 측면도 분명 있을 거야.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아련한 추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만 사람이 산다는 게 아까 말한 「가시고기」에도 있지만 과거를 망각하고는 살 수 없는 거 아냐? 내가 살아온 과거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 가고, 오늘의 내가 미래를 만들어 가고 그런 거지. T . S 엘리엇은 자기는 유럽문학 전체의 역사를 쓴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한 편의 시를 쓸 때도 내 과거 전체를 걸고 쓰는 것 아냐? 시작 행위를 한다는 건 그렇다고 봐. 내가 이제껏 살아온 한국문학사와 더불어 같이 쓰는 거지. 『바다 호수』 서문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내가 시를 쓰는 건 내 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내 기억과 김사인, 이문구 형의 기억과 함께 쓰는 거라고 생각해. 내 속에는 수많은 내가 들어와 있는 거지. 수많은 시간들이, 수많은 과거들이 집적되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과거가 미화될 때도 있겠지. 인간의 기억이란 간사하기도 하고 그러잖아. 자기한테 불리한 건 삭제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런 위험은 피할 수 없겠지. 그건 역사가의 몫이겠지.
채상우: 아까는 리얼리즘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고, 방금은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는데, 이와 직간접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팔십년대 중후반에 제안된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야기시?
채상우: 예. 이야기시요.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과거를 기억하고 복원하는 일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합을 거는 행위라면, 그것을 풀어나가는 가장 적절한 시법은 아마 이야기시가 아닐까 해서요.
그렇지. 거기에 가장 친숙한 시적 스타일이 스토리텔링이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시를 쓸 때는 과거 전체가 현재가 돼서 한 줄 한 줄 쓰여지는 거 아니겠어? 과거를 시화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 양식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지. 난 서정시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해. 서정시 그러면 절제된 형식에 14행을 넘지 말아야 하고 운율도 적절하게 있어야 하고 그러는데, 이런 통념들은 계속 바뀌는 거잖아. 창조적인 개인에 의해 계속 수정되어 나가는 게 서정시의 역사라고 생각해. 고정된 것은 없다고 봐. 그랬을 때 서사성과 설화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양식이 이야기 스타일은 아닌가 생각하지. 그래서 내 시가 산문시 스타일이 된 거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대학원에서 내 시를 가지고 수업을 했대. 그런데 이게 무슨 시냐 산문이지, 이렇게 평한 사람이 있었대. 난 그렇게 생각하는 게 고정관념이라고 봐.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시의 임무 중에 하나란 말야. 세상에 정해진 시의 양식이라는 게 어디 있어? 그걸 깨나가는 게 시지. 삼십년대에 이상의 시가 발표 됐을 때 잠꼬대라고 했잖아. 미친놈의 잠꼬대라고 말야. 그런데 오늘날 이상의「오감도」를 잠꼬대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이상처럼 창조적인 개인이 기존의 개념을 깼단 말이지. 고정관념을 깼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한국시의 외연이 확장되는 거지. 이상이 있었기 때문에 황동규나 정현종,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의 시가 있는 거지, 그렇지 않겠어? 이상이라는 선배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최승호라는 시인이 오늘날 시를 쓰는 것은 그 개인의 창조력을 통해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문학사 전체가 최승호라는 뛰어난 창조적 시인과 함께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나도 시를 쓸 때는 이용악이나 백석과 같이 쓴다고 할 수 있겠지. 신경림 선생의 「농무」라는 시가 그냥 나온 게 아니란 말야. 백석이 없었으면 안 나왔겠지. 신경림 선생도 창조적이고 재능 있는 개인인 거지. 신경림 선생의 시는 선배들이 개척해나간 문학사의 축적 위에서 한 발짝 더 나간 거라고 할 수 있지.
채상우: 저도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수업 시간에 선생님 시집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물맞이」라는 시를 학생들과 같이 읽었는데, 학생들이 무척 좋아하더라구요.
경희대학에서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이 내 시집을 읽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한 것 중에 복사해다 준 게 있는데.
채상우: 학생들이 낸 리포트 말이죠?
응. 요즘 신세대는 어떻게 내 시집을 읽나 봤는데, 서너 명은 너무 옛날 일들이라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라고 썼고, 무용과 4학년 학생인가는 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썼더라고. 쿨하다고. (웃음)
채상우: 쿨하다구요?
신기하더라구. 뭐가 쿨하냐 하면 고향 얘기 같은 게 쿨하대. 그리고 서정주 선생이 옛날 시 베껴먹은 얘기를 읽고는 배꼽을 쥐었다고 그러더라고. 쿨하다는 느낌이 들었대. 신기하더라구.
말년에 서정주 선생은 원고청탁이 들어오면 옛 시를 슬쩍 새 시처럼 베껴서 팔아먹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다고 한다. 새 원고지에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아직 잉크빛이 선명한 원고를 받아들고 그것이 설마 옛 시일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시 연구로 박사까지 한 어느 잡지의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사람에게까지 그 기술을 발휘하셨던 모양이다. “선생님, 저한테까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선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아아 알고 계셨던가……”
영문학자 P선생의 말에 의하면 D. H. 로렌스도 곤궁했던 한 시절 그의 초고들을 미국의 대학박물관에 팔아먹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더이상 팔 것이 없자 어디서 낡은 종이들을 구해와 그 위에 새 타이핑을 입혀 아주 오래된 원고처럼 속여 팔아먹었다고 하니 이는 미당과 정반대의 경우이다.
―「미당의 또다른 얘기」전문, 『은빛 호각』
채상우: 쿨하다는 말은 요즘 학생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 의미의 범위가 상당히 넓은 용어더라구요. 쿨(cool)이라는 용어는 개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인데, 이에 대한 책도 얼마 전에 나왔구요.(딕 파운드 외저, 이동연 역,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사람과책, 2003) 그건 그렇고 선생님, 방금 하신 얘기 중에 대학생들 가운데 옛날 얘기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어.
채상우: 「청진동에서」 같은 시가 그 적절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를 보면 송영 선생님, 방영웅 선생님, 그리고 아마 신경림 선생님인 듯한 분도 나오고, 무엇보다 <부용산>이라는 노래 제목도 나오고 그러는데, 인명이라든지 노래 제목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 혹은 아련함,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애절함 같은 요소들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청진동>이라는 지명도 그렇구요. 분명 시적 울림이 있긴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시적 울림이잖아요. 이런 시들이 몇 편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면.
송영은 휘파람을 잘 불고
방영웅은 <부용산>을 잘 불렀다.
예나 이제나 신선생은 추임새를 잘 넣고.
그러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옛일
아무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 않는다.
―「청진동에서」 전문, 『바다 호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이거나, 송영이나 방영웅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유추가 말하자면.
채상우: 불가능하죠.
그렇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웃음)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렇다고 시에다 각주를 달 수는 없는 일이고 말야. 말하자면 시집에 넣지 않아야 된다는 얘긴데, 그에 대해서 생각해봤지, 나도. 예를 든다면『은빛 호각』에 실린 「김사인의 흰고무신」 같은 시도 말하자면, 탑골도 모르고 김사인도 모르고 송기원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 수 있겠지. 그건 뭐 그냥 난하게 놀았다 정도로 읽힐 위험이 있긴 있어. 어느 사회학자가 그러더라고. <아, 이 사람 참 난하게 놀았다> 뭐 이런 얘기는 객관적이지 않지 않느냐, 문학작품이라면 말이지. 그래서 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 양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이 돼. 그래서 문학이라는 게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서만 쓰는 게 아니라 객관적 입장에서 읽는 사람들 말야, 수용자의 입장도 고려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들긴 드는데 그런 걸 고려하다 보면 늙지. 그리고 송영이나 방영웅을 모르고 신선생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청진동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지나간 한 시절을 같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약간의 울림은 주지 않겠는가 이런 거지, 내 나름대로는. 시라는 게 미세한 부분을 건드리는 게 아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회학자 얘기를 들을까 하다가 그냥 넣었지. 문학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참 난감한 것이거든.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김사인이가 왔었고 흰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새로 막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천둥소리 속에 밖에서 누가 희미하게 나무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설연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송기원과 나의 처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세등등 들이닥치고 있었다.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바로 그때였다.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김사인의 흰고무신」 전문, 『은빛 호각』
채상우: 당연히 그렇죠.
어디까지가 문학의 영역이냐 그런 질문들 말야. 기자 하나가 그러데. 이게 산문이지 시입니까라고 말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산문은 산문이로되 나는 액자 같은 걸 노리고 썼다라고. 일종의 격자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줄글처럼 당신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면 그건 실패한 시이고, 그래도 읽고 난 뒤에 약간의 웃음이라든가 익살이라든가 아니면 서글픔이라든가 그처럼 감정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면 시의 구실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지. 산문과 시의 구별이 뭐냐? 이거야 내 말은. 산문은 정보 전달의 기능으로 끝나는 것이지. 정보 전달 체계로써 서술이 끝나는 게 산문이지. 그런데 산문이라 하더라도 어떤 아련한 느낌을 준다거나 아니면 과거를 회상케 한다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가 있다면 난 시라고 생각해. 기자가 한 질문이나 아까 사회학자가 한 말이나 경희대학 학생이 쓴 감상문의 평도 모두 이해해. 그런 면이 있지. 소통이 좀 껄끄러울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지만 그래도 시집에 넣었어.
채상우: 창비 홈페이지에 가보니까 창작과비평사가 그간 걸어온 내력에 대해 인터뷰하신 내용도 있던데, 한번쯤은 선생님께서 창비를 중심으로 하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혹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중심으로 하건 칠팔십년대 문인들의 속사정이나 문학운동의 흐름 등에 관해 산문으로 펼쳐주시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겠지
한번 더 치고 나가는 게
진짜 리얼리즘이지
채상우: 그런데 아까 이야기시 얘기를 하다 말았는데, 이야기시에 대해 말하다 보면 결국 인물전 형식의 시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사실 인물전 형식의 시는 우리 문학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요, 백석의 「여승」부터 말이죠.
이용악도 있고.
채상우: 그렇죠. 또 근래에 고은 선생님은 「만인보」를 5권이나 더 펴내셨던데, 고은 선생님의 작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배 시인의 시에 대해서 평가할 수는 없겠고. 그런데 아까 말했던 그 기자도 「만인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난 <사건보>라고 생각한다고 그랬지.
채상우: <사건보>요?
난 고은 선생의 「만인보」가 인물을 중심에 두고 서술한 시가 아니라, 특정 시기에 박절한 모습으로 발현된 사건과 겹치는 그 속에서의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 인물에 중점을 둔 것은 아니거든. 내 시를 보면 알겠지만 난 인물에 중심을 두고 썼어.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구치소에서, 유치장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 특정 시기의 이문구를 그리고 싶었던 거지, 이문구 일반론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란 말야. 그렇지만 하여간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이용악, 백석, 신경림, 고은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하면 안 되겠지.
채상우: 장석남 시인도 서평에서 <스냅사진>이라는 용어를 썼던데(「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가락들」, 『창작과비평』, 2004.여름, 422쪽), 저도 선생님의 시를 보면서 스냅사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방금 말씀하셨지만 선생님 시의 특징은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기 위해 인물을 배치한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 속에 포착된 인물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그런 시를 쓴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편이야. 기승전결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 스냅사진처럼 말이지. 말하자면 특정한 부면을 잘라서 처리해주는 게 시란 거지. 어느 문창과 대학원 교수가 그러더라고.「차부에서」라는 시를 두고 아버지 얘기를 더 쓰지 그랬느냐 이거야. 차부에 잉크병을 흘려서 야단을 맞고 있는데 곰 같은 손이 어깨를 짚더라, 그런데 그 손의 임자가 아버지였다라는 내용의 시거든. 그 교수 말이 그 다음에 더 이어가야지 시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아버지에 대해 좀더 서술해야 한다고 말야. 그래 난 좀 다르다, 끊어줘야 할 때 끊어줘야 한다고 했지. 시에 대한 감각이 다른 거지 뭐.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차부에서」 전문, 『은빛 호각』
채상우: 그게 시와 산문의 차이 아닐까요?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양반은 좀더 진술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독자들에게 좀더 친절한 설명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지.
채상우: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짚어 보면 예전에 한창 논의되었던 이야기시론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야기시 시론과는 안 맞아. 그리고 난 그런 식으로 이야기시를 쓰면 안 된다고 봐.
채상우: 이야기시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아까 리얼리즘론에 대해 얘기를 좀 했는데, 리얼리즘론도 그렇고 이야기시론도 그렇고 뭐라고 그래야 하나, 범속화되어 있어. 그러니까 기존 관념이나 통념을 깨는 게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리얼리즘도 마찬가지지. 리얼리즘이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걸 깨나가는 게 리얼리즘 아냐? 이야기시론도 그런데, 가령 민중적 전형이 있어야 하고, 기승전결을 갖추어야 하고 뭐 그런 도그마 같은 것들을 자꾸 시 이론에다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비창조적이라고 생각해. 그건 살아있는 시론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나온 시론 중에 사십 년이 다 되가는 글인데도 나한테도 울림을 주는 시론이 있다면 김수영의 산문이야. 전집 2권에 실린 산문들 말야. 「시여, 침을 뱉어라」 같은 시론을 보면 살아 있는 시론으로서 아직도 울림을 준단 말야. 예를 든다면 이런 거지. 모든 시는 무의미를 추구하는 것인데, 김춘수처럼 의미를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무의미시가 아니라 의미를 한번 더 치고 나가는 게 진짜 무의미시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 게 울림을 주지. 내가 보기엔 김수영의 「꽃잎 1」이나「꽃잎 2」「풀」 같은 시는 무의미시거든. 말하자면 고도의.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김수영, 「꽃잎 1」, 『김수영 전집 1 시』 , 민음사, 1981/2003, 개정판, 348쪽
채상우: 특정한 의미화를 거부하는 시라는 말씀이신가요?
특정한 의미이기를 거부한다기보다는 시가 원래 좀 해석이 불가능한 거 아니야? 그리고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좋은 시들 중에는 해석이 안 되는 시들이 많단 말야. 김수영 시 중에도 해석이 안 되는 시가 많거든. 그리고 진짜 난해시와 가짜 난해시를 구분해야 한다는 얘기도 그렇고. 시가 궁극에선 난해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게 있단 말이지. 무의미시라는 것도 시가 절정의 순간에 다달았을 때 획득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란 말야. 그 어떤 것을 김수영은 잘 꼬집어서 얘기했지. 그런 의미에서 난 김수영의 창조적인 시론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봐.
채상우: 처음 이야기시론이 제기됐을 때는 당시 리얼리즘적인 시 쓰기의 새로운 방법으로써 중요한 기능을 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 리얼리즘이 좀 갑갑했지. 그런데 내가 김수영에 대해 길게 얘기한 게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
채상우: 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난 김수영을 많이 읽었는데. 서정주하고 김수영을 제일 많이 읽었어.
채상우: 서정주 선생님도요?
정반대로.
채상우: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김수영의 시와 서정주의 시는 전혀 문법이 다르잖아.
채상우: 그렇죠.
그런 점에서 난 모더니즘 쪽이지. 김수영 시의 어법은 서정주 시의 어법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 완전히 판이하지. 그런 점에서 나한테 훌륭한 교사였던 것 같아. 요즘 내가 조금이라도 현대적인 시를 쓰려고 하는 면이 있다면 김수영 때문이지. 서정주는 전통적인 한국 서정시의 시들을 한 개인이 완성하고 체화했다고 할 수 있지. 그 속에는 김소월도 있고 정지용도 있고 그런데 그런 면모들을 자신의 시 안에서 하나의 바다로 만든 이라고 할 수 있지. 서정주 시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 김수영의 시는 반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 점에서 두 분 다 나한테는 굉장히 훌륭한 교사였던 거 같아. 그리고 김수영이 신동엽을 가리켜서 모더니즘의 세례를 너무 안 받았다고 그런 적이 있는데, 그것도 문제잖아? 난 그런 점에서 김수영에게서 배운 게 많아. 발상법이라든가 화법이라든가 말이지. 표현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채상우: 선생님 시집에 그려진 서정주 선생님이나 김동리 선생님은 좀 희화화된 면이 있는데요.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냐. 희화화한다는 것도 애정이 없으면 역설적이지만 불가능하잖아? 서정주 선생을 뭐라고 그래야 하나, 비판하기 위해 쓴 건 아니란 말야. 김동리 선생에 대해서도 애정이 없었다면 못 썼겠지. 난 그래. 누가 친일을 했으니까 때려죽여야 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건 잘못된 거지. 문학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채상우: 서정주 선생님 사후에 친일 문제가 심심찮게 제기되었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전에 사과를 하고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싶어.
채상우: 서정주 선생님도 그렇고 김동리 선생님도 그런데, 그 분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다는 말씀은 삶에 대해 다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다면적이라기보다 미워하는 것도 애정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서정주 선생의 삶을 여기서 여기까지는 좋고 저기서 저기까지는 미워한다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그 양반이 돌아가시기 전에 친일한 거나 전두환 찬양한 거나 사과하고 갔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한 문학인이 역사 속에서 부침하면서 살아온 그 모든 면들을 전면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 물론 지적해야 할 것은 지적해야 하겠지. 그리고 문학은 좋은데 뭐 이런 면은 좋지 않고 이렇게 보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서정주의 실상은 인정하되 이런 측면은 이랬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건 곤란하다는 거지. 칠팔십년대 민주화투쟁 때 서정주나 김동리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는 요만큼도 없거든. 그럼 점은 냉혹하게 비판해야 할 문제지.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이룩해놓은 문학적 성취를 모두 깡그리 부정할 필요는 없지. 내 시집에 부정적으로 그려진 면이 있긴 있지. 그런데 부정도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거 아냐?
채상우: 지금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은빛 호각』과『바다 호수』를 보면 선생님께서 예전에 징역 살 때의 얘기가 간혹 등장하곤 하는데, 그때 마주쳤던 안기부 직원이나 교도소 소장 등을 희화화한 시도 있지만 여전히 그들을 증오하는 시도 있더라구요.
증오하는 시도 있지. 아주 냉혹한이 하나 있었어. 고향 사람이라던데, 자기는 사람 잡아 넣는 게 취미라고 그러더라고. 그런 사람도 있었어. 왜 충성밖에 모르는 사람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이 동향이더라고.
고향 근처인 남원 출신으로 가슴이 떠억 벌어지고 고혈압이 있으며 말할 때마다 두툼한 목이 자라처럼 쑤욱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안기부 대공 수사요원이 있었는데 피의자 차림인 내 군복 윗도리의 아랫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이번에는 꼭 목 끝까지 채워서 구치소로 넘겨주겠노라며, 자기는 사람 잡아넣는 것이 취미라며 정말 단추 같은 눈으로 싸늘히 웃으며 말하는데 만정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고향 사람」 전문, 『바다 호수』
채상우: 예전에 운동하다 잡혀간 적이 있는 선배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때 잡혀갔을 때 고문하고 조사했던 사람들 이름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다구요. 그 얘기를 하는데 선배 눈빛이 정말 다르더라구요.
그 사람들 가명 쓰는데. 그 안에서는 자기네들끼리 사용하는 이름이 있어서 누군지 몰라.
채상우: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하실 때도 어투나 눈빛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div id=”article-content” class=”text-content”>
시는 좁고 깊게 읽혀야 한다
채상우: 참 얼마 전에 지훈문학상도 받으셨고 또 현대불교문학상도 받으셨죠?
오래간만에 시집을 내니까 그런가 봐. (웃음) 상이라는 게 믿을 만한 게 못돼. 우연의 소산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심사위원 구성하기에 따라 다르고 그러잖아. (웃음) 그리고 특정 시기에 나온 시집들 중에 한 권 주는 건데 뭐. 그래서 난 상에 대해 별로 신용을 안 해. 주니까 그냥 받는 거지.
채상우: 요즘 젊은 시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번 『창작과비평』여름호에 <신예시인 20인선>이 실려 있던데 보셨나요?
손택수라든가 박성우는 이해가 너무 잘 돼. 그런 시인들은 친숙하지. 칠십년대의 자식들이지. 신경림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지.
채상우: 정서도 그렇구요.
응, 그렇지. 다른 시인들 시를 보면 모더니즘이 강하지. 그리고 예전에 『현대시』에서 특집으로 다룬 것도 봤어. 정과리 평론가 해설이 근사하던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어. 괴롭다는 얘기 아니겠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이중적으로 소외된 삶을 겪고 있는 세대 특유의 몸부림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겠지. 얼마 전에 최근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여성 시인의 시집에 대해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자기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 거 같아.
채상우: 자기 문제라면요?
물론 그건 어렵지. 자기 문제를 벗어나면 해탈일텐데. (웃음) 그것은 뭐라고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자기 문제에만 함몰되면 과장된다고. 그리고 요즘 여성 시인들이 환유적인 글쓰기라고 해서 자유분방하게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시를 쓰고 그러는데, 좋게 얘기하면 상상력의 일대 쇄신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해. (웃음)
채상우: 안 그래도 요즘 시에 귀신이 많이 등장하죠?
그렇지. 귀신이 많이 등장하지. 환영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런 점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뭐라 얘기할 수는 없어. 개개 작품을 놓고 얘기해야지. 난 고통스럽지만 읽어내는 편이야. 김행숙이라는 시인 있잖아? 김행숙의 시 같은 경우는 이해가 돼.
채상우: 김행숙 시인과도 지난 늦겨울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얘기를 잘 하대. 조근조근. 김행숙 같은 경우는 우리와는 다른 지각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채상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말인가요?
감각이 달라. 지각하는 게 다르다고. 말하자면 감각의 시학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느끼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그런 감각 방식, 지각 방식 같은 게 있는 거 같아. 그런데 아까 얘기한 약간 과장된 면이 있는 것도 같아. 자기 감정의 과장 말야.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낭만주의라고 할 수는 없는 거고.
채상우: 낭만주의는 아니죠. 요컨대 예전의 시들에선 이념이 중심이었다면 요즘 시들에선 감각이 핵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시영: 시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감각만이 말야. 자신이 느끼는 것만이 이 세계의 전부다 이거지. 이 세계가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게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지.
채상우: 역설적이지만 그런 측면에서 말씀드리자면 선생님의 시가 신선하기까지 했거든요. 좀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감각의 과잉이라든지 자기 문제에만 매몰된 현상이라든지 글쓰기 자체에만 골몰하는 요즘 추세에 비추어보면 기존의 이야기시 형식을 이어받되 한 단계 깨고 나갔다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시 작업이 오히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아주면 뭐 과분한 거지. 과분한 거고. 어쨌든간에 내 말은 현대적 발상이어야 한다는 거야. 현대적 발상. 나이가 먹었건 간에 젊었건 간에.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행사하는 게 시잖아? 그래서 새로움이 자유인 것이고, 자유는 새로움인 거지. 그러니까 사상을 새로운 언어의 서술을 통해 자유로 행사하는 경지가 되어야 하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새로움주의, 새것 콤플렉스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이더라도 화법이나 발성법 등 말야, 하여간 선배들과는 다른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서술도 그렇고.
채상우: 현대적 발상법이라는 말씀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데요.
그건 말하자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쓸 때도 자기가 지금까지 써왔던 것을 그냥 복제하는 건 아니잖아? 옛날 얘기들을 케케묵은 방법 그대로 쓰면 말 그대로 케케묵은 시가 되는 거지. 옛날 얘기를 쓰되 새로운 방법으로 말야,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발성법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그래야 그걸 현대시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내 시 중에 「물맞이」 같은 시도 케케묵은 얘기잖아? 옛날 할머니들이 폭포에 가서 물맞는 얘기인데, 서정주 선생처럼 고렷적 얘기로 쓰면 안 될 거 아냐? 현대적인 맛이 나게 써야지. 내가 김수영한테서 배운 게 있다면 현대시를 배운 거지. 그 사람이 강조한 게 뭐냐 하면 사상도 좋고 뭐도 좋고 다 좋은데, 제발 새로운 서정시를 써라 이거야. 새로움은 자유다 이거지. 그래 젊은 사람들의 시도 보고 그러는데, 황병승이라는 젊은 시인의 시도 열심히 봤어. 데뷔할 때 작품들 말이지. 아주 반짝이데.
반내골로 물 맞으러 갔다가 보았다. 우리 어머니들의 육덕이 얼마나 좋은지를. 까마득한 벼랑에서 곧추선 성난 물줄기들이 쏟아져내리는데 그 아래 새하얀 젖가슴과 그리메 같은 엉덩이를 환히 드러낸 어머니들이 “어 씨언타! 어 씨언타!”를 연발하며 등줄기로 거대한 물좆 같은 벼락을 맞는데 하늘벼랑의 어딘가에선 정말로 “우히히! 우히히!” 하는 말 울음소리 같기도 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들은 국솥 걸고 밥 끓이며 자연 속에서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하루를 잘 놀다가 왔는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보니 아프던 내 다리도 멀쩡해졌을 뿐만 아니라 밭일을 나가는 어머니들의 다리는 더욱 가뿐하여 대지를 핑핑 날아다녔다.
―「물맞이」 전문,『은빛 호각』
채상우: 이번 『창작과비평』에 실린 병승이 형 시도 참 재미있던데요.
난 그런 시 좋아해. 발랄하게 자기를 전개시켜나가는 시 말야. 젊은 시인한테 그런 면이 있어야 하는 거지.
채상우: 병승이 형 시는 선생님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구성해나가고 있던데, 그런 면을 보면 기존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던 권위나 효력은 이미 해체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정시의 권위가 없는 시대지. (웃음)
채상우: 시의 권위 말인가요?
문학의 권위가 사라진 시대지 뭐.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요즘은 문학을 안 읽잖아? 교양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술집에 가면 다 영화 얘기나 하지. <트로이>는 봤냐는 둥 뭐 그러는데, 옛날에는 소설 읽던 사람들이.
채상우: 그런 현상에 대해 문학의 위기 혹은 죽음이라고 흔히 표현하곤 하는데 그런 표현이 반드시 정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문학이 처한 상황은 예전에 문학이 점하고 있었던 위치의 변동 때문에 생긴 것이지 문학 자체의 위기 또는 죽음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위기라는 용어만큼 정치적이고 수사적인 단어도 드물잖아요?
김행숙이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 문학의 위기나 죽음이 아니라 자리가 이동하는 거다, 이동과 탄생이라고 봐야 하는 거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낯익은 문학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는 거다라고 말야. 이동과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채상우: 문학의 지형 자체가.
변했다는 거지.
채상우: 바뀐 지형 안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아야 되겠죠.
그리고 또 마니아들만 있으면 어때?
채상우: 그렇죠. 그런데 마니아들만 시집을 읽는다면 안 그래도 쫄쫄 굶으면서 시를 쓰는 판인데. (웃음)
김영하의 마니아는 이만 명이라고 그러던데. 이만 권은 팔린데. 그러면 된 거 아냐? 나는 내 시 독자가 천 명만 있으면 참 좋겠어.
채상우: 이번 두 시집들은 그보다는 많이 나가지 않았나요?
천 부 이상은 나갔지만, 김영하가 부럽지. 이만 명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데 말야.
채상우: 하긴 천 명만 해도 많은 거죠.
그러면 참 정말 좋지. 그런데 신경림 선생이 전집 내시고 하시는 말씀이 넓고 많이 읽히는 게 아니라 좁고 깊게 읽혀야 한다고 그러시더라고. 좁고 깊게 말야. 시 독자는 원래 좁고 깊은 거다, 그러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쓰라고 말이지.
채상우: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냐. 자네가 고생했네.
이시영 선생과의 인터뷰는 원래 월간 『민족예술』에서 추진한 일이다. 『민족예술』 2004년 7월호를 보면「영구혁명을 꿈꾸는 철저한 현대주의자」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이시영 선생과의 인터뷰를 산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산문 가운데 앞부분을 본 인터뷰의 앞부분에 수정 재수록했다. 그리고 본 인터뷰에 삽입된 사진들은 모두 『민족예술』 측에서 제공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월간 『민족예술』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 자리를 지켜주고 사진 촬영을 기꺼이 맡아준 김은주 기자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