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신 – 축제기획자

이 인터뷰는 세계일보와 함께 기획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즐기고 공감하는 다양한 문화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꺼리’들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들여다보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들어보려 합니다. 세계일보(www.segye.com)에서는 「대담한 문화읽기」라는 제하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축제 기획자 황덕신씨를 인터뷰이로 천거한 이는 퍼슨웹의 한 퍼슨 모험양이었다. 모험양으로 말하자면 놀기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놀기도 잘하고 노는 일 만드는 것도 일가견이 있어 노느라 맺은 인연이 방대한 소녀 마당발이다. 이른바 ‘세발짝 안녕’인데, 캠퍼스판 세발짝 안녕보다 범위가 넓어서리 서울시내 한복판을 걸어가면서도 ‘세발짝 안녕’인 그런 친구다. 모험양의 넓은 발은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목격되었는데,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근처의 황덕신씨 사무실을 찾는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센터 맞은편 어디라고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사무실 간판도 없어 조금 헤매고 있을 무렵, 모험양이 느닷없이 길 건너에다 대고 고함으로 뭐라 그런다.

“어, 제리? 거기서 뭐해?”

 

제리라고, 모험양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제리는 황덕신씨와 같이 일하는 스텝 중의 하나였다. 이 바닥이 좁은 건지 모험양의 발이 넓은 건지 어쨌든 모험양 덕에 황덕신씨를 수월하게 만날 수 있었다. 황덕신씨는 모험양의 친구라고 한다. 모험양도 그랬고 황덕신씨도 그랬다. 띠동갑도 넘어선 나이에 친구라니, 여기가 미국인줄 아나 싶었지만, 모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모험양이랑 친구 먹은 사람들을 보면 나이나 직업 같은 건 별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아줌마, 아저씨, 애들 가릴 거 없이 친구다. 그리고 친구 먹은 황덕신씨도 모종의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모험양처럼 발 넓고 활달하고 재미나는 사람이 아닐까 짐작이 들었다. 친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깐 말이다.

인터뷰를 풀기도 전에 미리부터 하는 얘긴데, 이번 인터뷰는 무척 아쉬웠다. 황덕신씨가 너무도 바빠서 인터뷰는 1시간여밖에 되지 않았다. 홍보담당자가 인터뷰하는 뒷자리에까지 와서 시계와 황덕신씨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는데, 희희낙낙 인터뷰를 끌어낼 사람이 나는 못 되었다. 인터뷰는 가족오락관의 스피드퀴즈처럼 묻고 답하기를 계속 반복한 뒤 아쉽게 끝을 맺었다. 짧은 시간의 인터뷰 동안 나는 황덕신씨와 내가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하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는 이야기를 충분히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정말 마음 맞는 친구가 될 것이었는지는, 지금 말하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다시 한번 꼭 인터뷰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1. 이벤트는 거부한다

 

황덕신씨는 현재 시카프(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이벤트 팀장으로 있다. 이벤트팀장답게 그의 경력은 대개 이런 이벤트나 축제를 만드는 일이다.

“8월 8일이 콘서트예요. 꼭 보러 오세요. 이거 크게 내 주시구요. 꼭이요~!”

 

그가 대뜸 첫마디로 한 얘기는 8월8일 콘서트가 있으니 꼭 보러 오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이 사람, 첫마디부터 영업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자랑하는 모양이 마치 어린애들 생일잔치 자랑하는 것 마냥 천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모습은 정말 신나하는 모양 같아 전혀 거북살스럽지 않았다. 듣는 나도 신이 났다.

 

퍼슨웹(이하 )> 시카프에서 이벤트 팀장으로 계신데, 이벤트 팀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황덕신(이하 )> 저도 그렇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벤트라는 말을 싫어해요. 1회성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사실 일본식 표현이기도 하구요. 저희가 해보고 싶은 건. 계기가 되는 행사, 쌓여 있는 힘이 응축이 되는 행사. 그러니까, 페스티벌을 해보고 싶은 거죠. 어떤 컨셉트가 정확한 걸 원해요.

시카프는 영화제와 전시가 메인으로 초점이 맞춰지니까, 그래서 정확하게는 프로모션과 부대행사로서 일을 해요. 그래서 이벤트 팀이란 명칭이 붙은 거죠. 그리고 지금은 저희가 가툰 콘서트를 해요. 8월 8일 이거든요. 꼭 보러오시구요.

이전에 부천 만화축제에서 만화 콘서트를 한 적이 있어요. 저희 옛날에 체인지콘서트나 애니락 콘서트 같은 건 해봤지만 이번 같은 건 없었어요.

 

퍼> 정확히 말해서 어떤 거죠?

황> 만화콘서트랑 이름이 비슷하긴 해도,, 카툰 콘서트는 이런 전망을 가지죠. 만화가와 밴드가 만나서 느낌을 공유하고 창작물을 내는 전망을 가지죠. 올해는 그 정도 까지는 어려울 것 같고.

주제가 “사랑에 관한 만개의 상상력”인데요. ‘만’자는 만개의 ‘만(萬)’자기도 하고 가득 차다는 ‘만(滿)’자이기도 하죠. 보러온 사람이 느끼는 만자기도 하죠. 애니 상영회 같은 동영상 같은 느낌이 아니라 만화의 정정인 느낌이 상상력을 끌어내고 그 것을 밴드가 음악으로 풀어낼 겁니다. 영상과 음악이 잘 어울려서 한 스토리를 짜는 거죠.

네 가지 테마로 이루어 져요. 그건 사랑의 단계인데요. 설레임, 즉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 그리고 프로포즈. 데이트. 실연이 있죠. 다분히 상식적인 수준인데, 평이한 주제에서 한국만화의 명장면을 고를 거예요.

 

퍼> 아, 기존의 작품으로 가는 거네요?

황> 네. 쉽게 말해 만화를 상영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예요. 전주영화제에서는 소니마주란 게 있었잖아요. 무성영화를 틀어놓고 그 아래 밴드가 실시간으로 두 시간동안 라이브로 연주하는 거예요. 그것 비슷하게 만화의 정적인 느낌을 살려서, 슬라이드 컷이 올려져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그 느낌 그대로 밴드가 받아서 교감하는 것이죠.

 

퍼> 재미있겠네요. 잘 어울려야 하니까 공이 많이 들어가겠어요.

황> 그렇죠. 만화는 컷 연출이란 게 있잖아요. 뭐냐면, 만화가들은 대개 칸으로 나누죠. 동일공간에서 배치를 통해서 다른 느낌을 내죠. 그 느낌이 그런 것과 맞는 밴드가 있겠죠. 이질적인 만큼 서로 만났을 때 훨씬 감동적일 거예요.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이번 행사를 설명하는 동안 황덕신씨는 아주 신이 났다. 듣는 나도 슬그머니 흥이 오른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 흥은 지속되었고, 그 덕에 인터뷰에서 무얼 물을까를 생각하는 것보다 이 사람과 한 번 놀아나 본다면 재미있겠네, 하는 기대감이 먼저 머리를 내민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이것저것 사실 관계의 질문은 좀 따분했다. 대신 사이사이의 일치된 기호(嗜好)에 더 끌렸던 것이다. 

 

퍼> 밴드는 어떤 팀이 참여하나요?

황> 아직 섭외단계긴 하지만, 설렘이라면 피터팬 콤플렉스 밴드가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프로포즈는 스웨터, 데이트는 도로시 밴드가 어울릴 것 같고요. 오브라더스는 프로포즈의 노래가 맞을 것 같아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재주소년, 푸른 새벽 등등 많죠. 올해는 시간과 예산 부족으로 네 팀뿐이지만 사실 해보고 싶은 팀은 참 많아요. 지금은 만개의 상상으로 가지만, 나중엔 만개의 호러의 밤 라든지, 만개의 명랑만화의 밤, 이런 것은 명랑스런 분위기를 만들겠죠. 예전에 애니락 콘서트에서는 노브레인과 갔었는데. 그땐 참 느낌이 좋았어요. 일본 만화 ‘GTO’와 연결했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땐 일본만화를 다룬다는 게 아쉬웠는데. 지금은 우리 만화를 하니까 좋죠. 그렇게 재밌게 되겠죠.

 

퍼> 이벤트 이외에 하는 일은 없나요?

황> 일이라면 프로모션과 마케팅이죠. 잘은 못하지만, 제가 광고 대행사에 있었으니까. 체계화된 마케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은 안됐죠. 협찬도 못따고.

 

퍼> 자유로운 분위기의 일을 즐기시는데, 실무적인 일에 매달리는 것이 어떠세요?

황> 일은 되게 재미있어요. 역시 똑같은 기획이지만, 이쪽은 좀 더 다른 창조거든요. 사업국장이 둘리 라이센싱을 처음 하신 분이세요. 그건 창조거든요.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간다는 거거든요. 때로는 영업맨처럼 궂은 일을 해야긴 하지만.

시카프의 경우 그 툴을 꼼꼼히 둘러보면 그 중에 기업 프로모션과 맞는 게 있어요. 이런 걸 찾아내고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다보면 기업에게도 좋고 시카프에게도 좋은 툴이 나와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올해는 못했지만, 이런 게 있었어요. 속옷만화전이라고…

 

퍼> 속옷이요?

황> 네. 이거하면 정말 좋아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하려면 프로페셔널한 실무가 필요하죠. 예를 들어 속옷만화전을 하는데, 왜 이걸 하고, 당신들이 이걸 지원하면 효과는 어느 정도고 돈으로 환산하면 이 정도다, 이런 말은 할 수 있어야죠.

 

퍼> 시카프에 참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건 뭐였어요?

황> 신문에도 좀 났었는데, 오리콤을 그만두고 옷과 꽃장사 했죠. 그러다 1년만에 상경했습니다. 사실은 중학교 때 친구가 불렀어요. 문학 동인지를 같이 하던 친군데, 그게 뭐냐면 그 때 mbc문학상을 받으려고 만든 동인지죠. 상금 받으면 그걸로 출판사 하나 만들자 그랬죠. 한2000천부만 만들면 뭐 될 것 같더라구요.

 

퍼> 중학생이 그런 생각을 하셨다구요?

황> 네.

 

퍼> 상당하시군요. 저도 비슷했는데, 동서커피문학상을 노렸더랬죠. 상금이..

황> 네.. 오백만원이었죠.

 

퍼> 오옷.. 잘 아시는군요. 그래요, 오백만원. 저도 그래서 여동생이름으로 냈어요. 그거 여자만 가능하거든요. 물론 떨어졌지만..(웃음)

 

황> 그 친구가 오랫동안 만화를 좋아했었는데, 저를 부른 거죠.

 

오백만원을 알고 있다니! 것참, 반갑기 짝이 없다. 끼리끼리 통한다고 하면 황덕신씨가 기분나빠할까? 어쨌든 조 중학생들의 맹랑한 모습이 좋았다. 나도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 그처럼 철딱서니 없이 놀았기 때문이다. 물론 황덕신씨는 훨씬 더 생산적인 에너지로 화한 것 같다.

2. 축제를 위하여

 

 

퍼> 함께 일하시는 분들 소개해 주시죠.
황> 이만진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블루라고 불러달라고 해요. 파란색이 좋대요. 한겨레 문화학교 출신이죠. 이벤트 회사 있다가 그런 게 싫어서 나왔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죠. 고맙게도 저희와 같이 일합니다. 그리고 제리라는 친구가 있어요. 하자학교 1회졸업생이죠. 능력이 대단한 친굽니다. 그래도 나이가 벼슬인 세상이라 아직 날개를 못 펴고 있죠. 웹디자인. 영상편집도 하고 레코딩도… 일반사람이 보면 학교를 안 다녔으니 이상하게 보기도 하죠. 정헌수라는 친구도 있는데, 이 친구는 유도 2단.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도 있고 응급구조 자격증도 있죠. 조경우라는 친구는 99년 유스페스티발을 했었고 젊음문화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신당동 떡볶이 축제도 자기들끼리 만들었죠. 

 

퍼> 다들 일당백이군요.
황> 사실은 좀 어설프긴 하죠.(웃음)

 

퍼> 지금 하시는 일이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공공기관적인 성격의 일인데, 관료적 특성과 충돌하거나 아쉽거나 하는 점은 없나요?

황> 이 말을 좋게 하면 아부 같아 보이긴 하지만, 아부가 아니라 지금 일 하는 데는 많은 도움을 받아요. 서울시 산업지원과 산하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데, 관료적인 사람들을 보면 실적주의거나 보신주의일 수가 있죠. 실적주의는 의욕만 넘치고 보신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데 우리 일 담당하시는 문현렬 주임은 일을 되게 하는 방법을 잘 아시는 분이죠. 시카프에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관계도 좋고 재미있는 분이네요. 마인드가 다른 분이예요. 버스 4대 협조 하는 일이란 게 사실 쉽지 않죠. 그런데 자기 일처럼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일하기는 괜찮아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서울시 공조직 전체를 상대하면 어려운 점은 많죠.
실무자 분들은 인간적으로는 좋은데,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니까… 예전의 일인데, 전인권씨가 마지막 무대에 올라와서 한참 노래 부르는데 막 끌어내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시장이 올라올 시간이라고.


퍼> 상업기획도 하신 걸로 아는데요. 경험적으로 상업기획, 민간기획, 공공기획이라는 범주를 둘 수 있겠는데 일을 하시면서 차이를 느끼시나요?
황> 별 차일 모르겠어요. 염두에 두지 않아요. 목적과 의도하는 바가 뚜렷하면 그걸 이루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게 불분명하다면 하지 않아야죠. 누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가 명확하다면, 뭐든지 좋은 거죠. 


퍼>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는 어떤 것이었나요?
황>  2000년 서울 시민 축제 때인데, 종묘에서 세종로 까지 막아 놓고 했거든요. 그렇게 한 건 그게 처음이었어요. 사람들은 많이 기억 못 하는데 저희로서는 뿌듯한 행사였어요. 거기서 우리는 퍼레이드를 조직했어요. 구청단위가 아니라 테마 정해서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조직해서 나가는 거죠. 저희가 했던 건 ‘선데이 서울 퍼레이드’였죠. 내 마음의 일요일이었죠. 인라인 탄 사람들이 기차놀이도 하고 테크노 차량도 있었구요. 저 멀리 길 끝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데, 멀리서 사람이 오는 게 참 예뻤어요. 고교 외인부대 한 장면 같기도 했어요. 10만 정도 왔는데, 많았던 거죠.
근데 월드컵 때는 더 많이 모이더라구요. (웃음) 그때 고민이 서울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라는 것이었거든요. 답은 간단하더라구요. 월드컵이 답을 보여준 거죠. (월드컵처럼) 자발적인 걸 만들고 싶어요.

 

황덕신씨는 ‘예쁘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말이야 나쁜 말이 아니지만, 자주 쓰면 그 주어가 되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가볍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듣는 나로서는 그가 만든 것들이 ‘예뻐’ 보이기보다는 연신 예쁘다는 그가 더 예뻐지는 것 같았다. 예쁘다는 말을 막 하는 이 경상도 사내는 참 드문데 말이다.

 

퍼> 축제서 가장 필요 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황> 컨셉트요. 컨셉트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일본과 유렵 축제와는 다르긴 하지만, 비즈니스 축제라면 기획의도를 잘 살려야겠구요. 시민 자발 축제라면 판 벌리기가 중심이 되겠죠. 이 지역에는 어떤 요소가 있으니 어떤 걸 해야할까 하는 거죠. 축제 성격마다 다른 거 같아요.
각자 피땀이 스며들었겠지만 우리나라 향토 축제 중에는 애매한 게 많은 게 현실이죠. 저는 10만원 영화제가 컨셉트가 잘 살아 있는 축제라고 생각해요. 또 전주 국제 영화제가 있고 전주 시민영화제가 있는데, 시민영화제도 컨셉트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이번의 컨셉트는 리셋(reset)이예요. 그래서 포스터부터 영화제 내용까지 모든 것이 리셋이라는 컨셉트에 맞춰서 나가죠. 기업프로모션도 그렇죠. 예를 들어 스타벅스가 감성마케팅을 펼친다면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나가겠죠. ‘우리 커피는 어떤 맛일까’, ‘그 맛에 맞는 색깔이라면 어떤 것일까’ 이런 것들을 찾아내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감성’ 그러면 일단, ‘고객체험단 2만명 모집~!’ 이렇게 시작하죠.

 

퍼> 본인이 했었던 것 중에서 상품으로서의 축제와 자발적인 참여 축제 중에 어떤 것이 더 자신과 맞다고 생각하세요?
황> 글쎄요. 모험과 같이 했던 하자센터의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하는 게 있었는데, 상상력, 감수성을 개발하는 수업을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대안학교 교사라는 건 아직 거창하구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해보고 싶은 건, 어디서 본 건데, 공동육아를 위한 마을을 만드는 게 있더라구요. 공동육아를 하다보면 보면 그 동네 노인분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잖아요. ‘젊은 것들이 모여서 이상한 짓하네, 애기도 희하게 키우네.’ 이런 말도 하실 테고.
그럴 때 뭔가를 할 수 있죠. 마을 어른들께 ‘큰나무 할아버지’라는 식의 별명을 부르게 한다든지, 명절마다 인사를 가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죠. 그 덕에 그 마을에서는 사라졌던 대동제가 생겼다죠. 보름마다 보름제도 하고… 그게 축제의 동력이죠. 그런 거면 재밌겠다, 이런거라면 10년을 유지하겠구나 하는 그런 포맷의 축제를 해보고 싶어요.

 

내 질문도 좀 뜬금 없는 얘기였다. 앞서 말했듯이 시간에 쫓겨 적어놓은 질문은 다 해야지 하는 생각에 던진 질문이었다. 황덕신씨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 여태껏 그의 기획들을 보면 그야말로 아마추어축제도 있었지만, TTL과 같은 대기업 프로모션 축제도 있었다. 어떻게 잘 놀 수 있는가가 문제라면 어디서 주관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테다. 공짜는 없는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노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는 그것을 잘 안다.

 

퍼> 모험한테서 들었는데 대학 시절 파란만장 했다고 하던데요.
황> 하하. 그 얘기요? 농땡이도 많이 까고 참 여러 가지 했죠. 총 열 두 학기를 다녔어요. 군대 간거 빼구요. 90년에 들어가서 99년에 졸업했으니..


퍼> 지금 되돌아 보면, 대학시절을 어떻게 평가 내릴까요?
황> 연애 말고는 별 것 없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나쁜 자식’ 이럴 것 같아요.

퍼> 그렇게 오래 다닌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한 일이…
황> 이런 행사조직의 비정규직이었죠.

퍼> 취직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요?
황> 네. 면접 보기도 싫고 해서..(웃음)

 

퍼> 특별히 축제 기획의 일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황> 대학 졸업할 때는 광고 대행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학부 때 아르바이트도 했었구요. 그런데 너무 엄혹하더라구요. 자기를 찾을 여유도 없고. 그렇게 졸업하고서는 홍대판에서 퍼포먼스 같은 거 하면서 알게 된 안영로씨라고 있는데, 안영로씨가 같이 일해보자고 해서 발을 담그게 되었죠. 그전에 홍대에서 밴드도 하고 그랬어요.
사실은 고등학교 때 축제를 만든 적이 있어요. 그게 처음이었죠. 89년 청소년 자발축제라고, 국내에서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안양에서 형, 누나가 내려와서 청소년 운동을 하겠다고 해서 시작했죠. 첫해에 성공적이었어요. 부산대 강당에서 했는데 4천여명이 왔죠. 그 당시 부고협이라고 있었는데, 그쪽과는 조금 달랐어요.
저는 해운대고를 나왔는데, 평교사 협의회가 있어서 분위기가 남달랐죠. 그것과 별개로, 공장노동자, 상고, 공고 친구, 아무 연고 없는 친구들이 모였어요. ‘우리 한번 해보지 않을래?’ 라면서 시작했죠. 시화전에서 글씨가 예뻐서 끌어들인 친구도 있었어요. 공연도 하고, 시화전도 만들고 밴드도 우리가 만들어 했죠. 행사가 끝나고 뒷풀이 할 땐데요, 당시 경성대 다니던 형이 있었어요. 그 당시나이로 28-9세 정도였죠. 공장노동자로 오랫동안 일 했던 분이었어요.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 당시에 등록금도 빠듯할 정도였는데. 이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우리랑 같이 일 했죠. 우리는 되게 미안했어요. 어린 나이지만, 형 사정 뻔히 아는데… 그 때 그 형이 이야기 한 말이 있어요.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내 삶에서의 작은 혁명이었다.” 라고 하더라구요. 그때까지 혁명은 우리에게 큰 일이었잖아요. 아직도 이 말을 쉽게 하지는 못하는데, 무대에 서거나 기획하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기획자로서는 두 가지만 노려요. 감동과 이익창출이죠.

 

퍼>제일 처음 만든 기획은 어떤 것이었어요?

황> 특별히 처음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고, 제 작품이라 할만한 것은, 썩 훌륭하진 않지만 애착이 갔던 하자센터의 ‘죽은 시인의 사회’도 있고 ‘러브 미(米) 켐페인’도 기억에 납니다. 쌀소비 촉진 캠페인인데, 러브미 크리스마스라고 불렀어요. 모양새는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지만 컨셉트 만큼은 예뻤다고 생각해요. 그건 쌀로 만든 하얀 크리스마스였거든요. 왜 쌀과 크리스마스랑 합쳐서 11월에 했냐면, 쌀이란 것이 낡고 구태의연한 이미지잖아요. 반면에 크리스마스는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구요. 하지만 쌀도 아름답고 멋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퍼> 아쉬웠던 기획이 있다면요?
황> 다 아쉬웠어요. 의도는 이만했지만 결과는 아쉬웠죠. 그래도 조금씩 가자. 반보만 내딛자 이런 생각이죠. 내가 반보 내딛으면 딴사람이 반보 내딛어 줄 것이고, 그렇게 같이 조금씩 걸어 가고 싶어요. 그리고 지난 작품을 돌아보면, 사실 쪽팔려요. 안 쪽팔린 것이 없어요.

 

3. 유목민도 프로가 있다.

 

 

 

축제 기획자란 직종이 얼굴 드러내고 하는 일이 아닌지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질 기회는 없다. 황덕신씨는 그 중에 매체에 좀 알려진편이다. 러브미축제로 신문에 이름이 올랐기도 하고 경향신문에도 났었더랬다. ‘재야에서 오리콤이라는 메이저 기업으로, 다시 낙향한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퍼> 오리콤입사와 퇴사로 말들이 많았었죠?
황> 오리콤시절은 제겐 좋은 경험이었어요. 디테일이 안 다듬어진 것을 다듬게 되었구요, 견문도 넓힐 수 있는 기회였죠. 실은 더 있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어머님이 그때 많이 아프셨어요. 이번에 서울 올라온 것도 동생과 많이 상의 했어요. 부산에 간 것도 어머니와 많이 있고 싶어서였어요. 사실 저는 여기 있는 모험이나, 주위 친구들한테는 잘 하는데, 가족들에겐 잘 못했어요. 경상도 남자가 좀 그렇잖아요. 여동생한테 선물사준 적도 없고. 여동생 고등학교 진로 상담 때도 후배들 친구들 상담만 들어주고 막상 여동생 진학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참 미안하더라구요. 동생이 그만두라 그랬어요. 같이 있자고.

                                 

퍼> 입사한 이유는?
황> 프로답지 못하다는 소릴 좀 들었어요. 열이 받더라구요. 프로란 어떤 건지 보고 싶어 들어갔어요. 
 

퍼> 오리콤사보를 보니까. 중요한 약속을 깜빡하는 일이 많다고 핀잔이던데요. 프로란 어떤 것일까요? 시간약속, 스케줄 잘 잡는 것만은 아니겠죠?
황> 시간 약속 같은 거 저는 잘 못해요. 다만 돈 되는 사람에게만 약속을 잘 지키죠. (웃음)
 

퍼> 아, 그게 진짜 프론데.(웃음)
황> 이 일의 프로라는 건 이런 것 같아요. 기획하다보면 정말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친구가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은 자료 막 찾아서, 고생해야 논리가 서는 사람이죠. 아, 전제가 이렇고 이렇게 가서 저렇게 가야겠구나…. 그러나 어떤 친구는, ‘이거 재밌구나’ 하면서, 거기서 전제를 찾아 내는 사람이 있어요. 참 부럽죠. 저는 그렇게 안 되더라구요. 지금 하는 것이 만화 관련 행사인지라, 만화 찾아 읽고 책도 사서 읽고 인터넷도 뒤지고 하면서 꽤나 고생을 하죠. 그러나 막상 행사에는 도움이 안 되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낭비일 수도 있는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컨셉트가 안 서구요.


퍼>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기획하다보면 이것 저것 연결시켜서 꺼리를 만드는 일에서는 능숙하겠지만, 자신만의 전공이랄 수 있는 분야가 없어서 아쉽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황> 경기문화재단에 면접을 보러간 적이 있어요. 떨어졌긴 하지만, 그때 비슷한 질문을 받았어요. 여기저기 좇아 다니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저는 스스로를 유목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유목민이 (이 분야에서는) 옳다고도 생각해요. 저는 사업기획도 해봤고, 잘은 못하지만, 시에프도 기획해봤죠. 그렇지만 유목민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저는 끝까지 그러고 다니고 싶어요. 한 분야에 전문가도 있지만 여러 분야를 결합하고 소통시켜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메타기획자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게 필요하구요.
에스케이텔레콤이 유비쿼터스라는 환경이라는 전제에서 사업을 해요. 사업은 직선적으로 진행되겠지만 유비쿼터스를 잘 아는, 또 그것을 겪어본 유목민이라면 그 사업을 다른 쪽으로 엮어낼 수도 있는 거죠. 대신에 전문적이진 못하죠. ‘스키다시’스럽다고 해야하나.(웃음)

 

 

전화를 받느라 인터뷰가 끊어진 도중에 황덕신씨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는데, ‘스키다시 내 인생’이라는 곡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라는 가사는 가슴을 후벼판다. 그래도 중요한건 스키다시가 부실하면 그 횟집은 망한다는 거다.

 

 

퍼> 그래도 전문가시죠?
황>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요. 기획자들의 대종상 같은 걸 만들고 싶기도 해요. (웃음) 앞 세대가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작품으로 명예를 쟁취하겠다, 그런 건 아닌데, 우리의 노력이 이해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단순히 아이디어로만 보죠. 그러나 우리는 정말 많이 생각하고 새로운 컨셉트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퍼> 창조적인 일이란 말씀이시죠?
황> 네. 축제는 하나의 작품이죠. 부산에서 옷집과 꽃집을 같이 했었는데, 그때도 단순히 물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컨셉트를 맞추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오늘 날씨는 이런데, 이럴 때는 컨셉트를 어떻게 잡을까, 그 컨셉트에 맞는 옷과 꽃은 무얼까, 그런 얘기를 동생과 많이 했어요?

 

 

퍼> 그 가게 아직도 있나요?
황> 네. 여동생이 아직 하고 있어요. 


퍼> 매출은 어땠어요?
황> 불경기라서 별로더라구요. 여성복은 그런대로 팔렸는데, 남성복은 영 별로였어요. 

 

 

황덕신씨에 대한 관심의 일부는 직장을 때려치고 옷장사 하더란 것에 맞춰지기도 한다. 모든 걸 관뒀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데, 그를 만나 보고 나면, 옷장사나 월급쟁이 기획자나 그의 입장에서는 별 다를 바 없어 보일 것 같다. 신명나게 뭔가를 바쳐서 일 할 것이라면 옷을 팔든 뭘 하든 모두 자기 일이다. 

 

 

퍼> 직업으로 하는 일 말고도 별거 별거 다 하신단 얘길 들었습니다. 루덴스라고…
황> 아, 루덴스요, 하하..
이름부터 먼저 알려진 경우죠. 어떤 인디밴드 비슷하기도 한데, 처음 활동할 때 리드 싱어가 라디오에서 떠들고 나녔대죠? 멤버도 없으면서 기가 막힌 밴드가 있다고, 그렇게 이름만 알려 놓고 나중에 밴드를 꾸렸다는데,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린 이름만 건 게 아니라 실제 활동 했어요. 그렇지만 다들 직장 다니느라 요즘에 자주 못 모였어요. 재작년 4월에 공연하고 그 뒤로 못했죠. 그래도 96년에서 99년 까지는 활발하게 했어요.
우리의 기본 취지는, 기존음악 싫다, 우리가 만든 음악 한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지 않아도 한다, 이 세 가지거든요. 멤버 중에는 노래패도 있고 저는 풍물을 했었구요. 노래패와 풍물이 만나면 새로운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했죠. 사실 절 시카프에 꼬드긴 친구도 루덴스 멤버예요. 한 달 정도 연습해서 올해 안으로 공연 한 번 해야죠.

 

퍼> 루덴스의 음악은 어떤 음악이었어요, 스타일로 말하자면?
황> 기존의 것과 전혀 달랐어요. 이런 느낌이죠. ‘난장’ 이라는 앨범이 있는데, 재즈와 국악의 만남…

 

퍼> 제가 그 시디를 가지고 있어요.(웃음)
황> 오옷… 그런 식으로 많이 했죠. 국악과 서양음악의 만남이라면 흔히 자진모리나 휘모리가 많이 합쳐지는데, 우린 안 해 본 장단을 가지고 만들어 보고 싶어요. 육채 같은 장단으로는 사이키델릭한 것이 가능할 것 같아요 굿거리는 굉장히 어쿼스틱한 느낌이 나서 가벼운 음악으로도 만들어 질 수 있구요. 오방진이라고 있는데, 이건 하드코어 랩이 될 수도 있구요. 그렇게 해보고 싶은 걸 할 거예요. 

 

퍼> 이 일을 해오면서 아쉬운 건 없었나요?
황> 내 모든 걸 박차고 내걸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프리마켓 하고 있는 이영등씨는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고 해요. 실제로 어렵게 살죠. 그렇지만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것을 빵이라는 대안문화공간에 박아 넣어요. 저도 그렇게 꿋꿋이 자기 길을 가고 싶어요. 관에서 주관을 했다는 둥, 기간이 짧다다는 둥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내가 스스로 일을 꾸려서 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죠. 당당하게 재원을 만들고 말이죠. 


 

모험에게서 얼핏 들은 적 있는 물놀이와 등불놀에 관해 물어보았다. 말로는, 낮에는 소방차 8대를 동원해서 서울광장에서 신나게 물싸움을 벌이며 놀고 밤에는 만개의 등불을 키며 놀자고 했었단다. 그다운 발상이다.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여름, 그것도 도심 한 가운데서 물대포를 쏘며 노는 건 신나지 않을까.
                     

“그거 농담 아니구요. 리허설까지 했었거든요. 요 앞에서 만 개는 아니고 260개 등을 켰었어요. 안전상태를 점검 했었는데, 그 중에 10퍼센트가 타더라고. 위험해서 안 되겠다 했죠. 초가 흔들려서 그랬거든요. 등 아래에다가 흙을 담으면 안 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안 되더라구요. 근데 나중에 들었는데, 절에 가면 답이 있대…”

 

 

농담 아니었단 말이 농담처럼 들리는 건 내가 고리타분해서 그런 건가. 어쨌든 득의만만하고 야살스럽기도 한 황덕신씨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을 내야했다. 바쁜 일정이 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쉬운 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그는 급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 짧은 인터뷰로 그의 전부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본 그는 정녕코 재미난 사람이었다. 어찌되었건, 사는 것에 이 만한 흥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닐 테다. 그로부터 그 흥의 일부만이라도 물든다면 수월해질 것 같다. 오늘 같은 무더위를 유쾌하게 보내는 일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