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움에서 연대로
배식을 담당하는 이들이 자리를 펼쳤고, 이주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식사를 했다. 오늘은 네팔 노동자들이 식사당번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식사는 콩을 갈아 만든 국과 쌀밥, 김과 김치, 기름에 튀긴 고추, 삶은 콩 등으로, 네팔과 한국 음식이 섞여 있었다. 비닐을 씌운 냉면 그릇에 한데 담아 먹는 식사는 매우 초라해 보였고 기름에 튀긴 고추는 굉장히 매웠지만 꽤 맛이 있었다. 심지어는 지나가는 관광객들도 한 그릇씩 얻어먹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식사를 준비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민수(가명) 씨는 노숙자를 포함하여 하루에 열 명 정도의 외부인이 그들의 식사 대접을 받는다고 말했다. 누군가 고추가 너무 맵다고 투덜거리자 민수씨는 “그러길래 누가 고추 심으래?” 라고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무슨 말인가 해서 묻자 그는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 가져온 네팔의 고추씨를 명동성당의 뜰에 심었는데 이상하게 맵다며 웃었다. 네팔에는 훨씬 매운 고추도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민수 씨는 밝게 웃을 줄 아는 청년이었다.
마문 씨와 마숨 씨 등 몇 명은 밥 대신 죽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의해 폭력적으로 표적단속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얼마 전까지 지지단식을 했다고 한다. 본인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의해 표적단속되었다가 이주노동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보호해제된 적이 있었던 꼬빌씨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꼬빌 : 10월 26일날 비두와 자말 동지가 비정규직 집회에서 잡혀가고, 1월 7일날 방글라데시 대사관 집회하다가 돌아올 때 가스총 사용해서 두 명의 동지를 잡아갔습니다. 또 2월 15일날 혜화동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과 평화적으로 선전전이랑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우리 대표 샤말 타파 동지가 폭력적으로 연행되었습니다. 저희가 걱정이 되어서 출입국에 전화해보고 알아봤는데 처음에는 그런 사람 단속한 적 없다고 거짓말만 했습니다.
퍼 : 미디어를 통해서 개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만 안에 계신 이주노동자분들은 어떻게 되셨나요?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이주노동자의 단식이라는 선정적인 주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정작 이주노동자분들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꼬빌 : 비두와 자말 동지는 12월 31일날에 강제추방 보내고, 비두 동지는 방글라데시에서 테러리스트라고 얘기하고 감옥에 있었어요. 샤말 동지도 네팔로 불법적으로 돌려보냈구요.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했지만 해결 안됐습니다.
퍼 : 농성이 길어지면서 점점 힘들어지실 텐데 큰일이네요.
꼬빌 : 장기적인 싸움을 하면 어디서나 좀 침체되는 것이 사실이에요. 돈도 없고. 그렇다고 싸움을 정리하는 건 아니고. 본국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거기서 싸움 조직하고 있구요. 현재 농성은 앞으로 언제 정리할지 모르겠지만, 더 크게 만들고 끊임없이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 정부도 우리 한꺼번에 본국으로 보낼 수 없으니까요. 한국 사회에 많이 알려져야 되는게 있고, 우리 노동자 스스로도 변화해나가야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회단체들과도 같은 이슈 만들어서 더 큰 싸움 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누아르 씨가 끼어들었다. 추방된 샤말 타파 씨 대신 이주지부 대표를 대행하고 있다는 그는 뼈가 굵고 몸피가 큰 사내였다. 짙은 눈썹 밑의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말을 할 때는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아누아르 : 우리는 지금 시작이에요. 명동의 동지들이 수원, 안산, 의정부, 서울, 인천 지역에 나가서 다른 동지들 조직하고 교육하고 있어요. 지역에서 돈 못 받고 다쳤는데도 치료 못 받는 동지들 있으면 우리가 공장에서 집회하고 투쟁해서 도와 줘요. 명동 농성단은 줄었는데, 아니 줄어들어 보이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점점 많은 동지들이 지역에서 생겨나고 활동하고 있어요. 예전엔 잡혀갈까봐 무섭고 돈 못 버니까 투쟁 안 하던 친구들도 이제 우리 도와 줘요. 다들 노동자니까. 예전에는 우리 보면 돈 받고 투쟁하는 거라고 욕하던 친구들도 이제 안 그래요. 노동자로 인정받고 일하면 일한 돈 받을 때까지 투쟁할 거예요.
다른 이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였을까, 신념에 가득찬 이 덩치 큰 사내가 조금 외로워 보였다. 어리석은 질문을 해버린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퍼 : 아누아르씨는, 힘들지 않으세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누아르 : 투쟁은 개인적인 문제 아니에요. 희생할 각오하고 있어요. 물론 힘들어요. 돈도 없고, 우리 지금 몇 달째 투쟁하고 있는데 투쟁 결과도 없고 반응도 없어요. 그래도 계속 해야 돼요. 우리 지금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하고도 연대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민주노총 회의 가도 우리 문제 한국인 동지들이 발언하고 우리는 발언권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우리 활동 우리가 조직하고, 회의 나가면 우리가 발언해요. 점점 나아질 거예요.
옆에 있던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마하붑 씨도 거들었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인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조리 있게 주장을 펼쳤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마하붑 씨는 이주지부에서 선전물을 만들고 보도 자료를 제작하는 선전국에서 일한다고 했다.
마하붑 : 우리 문제인데 우리한테는 협상권이 없잖아요. 그냥 정부랑 중기협이 정한 대로 따라야 하는 거예요. 최소한 우리 문제는 우리가 제일 설명 잘 할 수 있잖아요. 문제는 우리가 노동자라는 걸 인정해 주지 않는 거예요. 피부색이 다르니까 (우리한테) 무관심하고 우리랑 연대 안 하려고 해요. 한국인들은 내셔널리즘이 강하잖아요. 그냥 우리를 노동자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어요.
퍼 : 그렇다면 한국인 동지들과 연대해서 투쟁하시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으신가요? 문화적 차이라든가, 그런 점에서 말입니다.
마하붑 : 예전에는 조금 어려웠어요. 한국말 잘하는 동지도 많지 않았구요, 한국 분들 중에 좀 무례하거나 그런 동지들도 있어요. 그래도 사람들 많이 모이면 그 정도 문제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심각한 것들은 아니에요. 그런 것보다도 문제는 종교 단체나 그런 데서 우리를 도와 주겠다고 오는 분들이에요. 좋은 일 하시는 건 아는데,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고 우리를 불쌍하게만 보려고 하니까. 그게 문제가, 동지들이 노동자처럼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예전에 소설가 김훈은 남을 돕는다는 일은 도움을 주는 쪽에 지극한 선의의 바탕이 있었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쪽에는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초콜렛을 이쪽저쪽으로 마구 던지던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주워먹던 한국 아이들에겐 생존의 문제에 치달을 때에는 치욕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도움이라 한다면 치욕의 주인공은 오히려 미군이다.
우리는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좀더 치열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주노동자들을 ‘검은 피부의 불쌍하고 말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로 간주하고 맹목적인 동정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우리의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낯선 시선, 익숙한
잠시 후 몇몇은 이주지부의 봉고차를 타고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나섰다. 다행히 의료 봉사를 해줄 분이 있다고 했다. 네팔인 이주노동자 민수씨는 자기가 여덟 명의 동지를 책임지고 데려가는 거라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또 다른 이들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예정된 집회를 위해 나설 채비를 했다. 이주노동자의 강제추방 저지와 비정규직 철폐, 대학인 노동의 불안정화 분쇄를 그 구호로 하는 집회였다.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우리 주변의 소수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뻗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구호가 인쇄된 붉은 조끼를 입었고,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 등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지시하지 않았지만 일들은 순식간에 착착 이루어졌다. 명동성당 농성단은 이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한국인 자원봉사자나 활동가에 의존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구성원에 의해 합의된 자치 규율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같이 부대끼다 보면 갈등도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수하나 씨를 비롯한 여성 이주노동자가 두 명밖에 없어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남성적으로 흐르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충돌이 생길 때는 자체적인 규율로 이를 해결하고 처벌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명동성당 들머리는 이미 하나의 자치 공동체와 같은 분위기였다.
지하철을 타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동한 이주노동자들은 익숙하게 대오를 구성하고 구호를 외쳤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의해 집회 도중 연행된 이주노동자들을 석방하라는 내용과 농성단 대표 샤말 타파의 불법 강제 출국에 항의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대표 직무를 대행하는 아누아르씨의 발언에 의하면, 전 대표 샤말은 올해 2월 15일 출입국에 의해 납치되어 여수 보호소에 감금되었고 이후 한 달간의 단식으로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법무부는 그런 그를 합법적 퇴거 절차를 무시하고 4월 1일에 본국으로 강제출국시켰다는 것이다.
아누아르씨와 대학생 활동가 한 명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리고는 모두 함께 한국의(!) 민중가요를 불렀고, 네팔인 이주노동자들이 나와서 마임을 보여주었다. 들머리 계단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유일한 여성 이주노동자인 수하나 씨와 아직 앳된 선주 씨, 다소 무뚝뚝한 얼굴에 연신 웃음을 띄우던 라주씨였다.
퍼 : 마임 잘 하시네요. 연습 많이 하시나 봐요. 재밌어 보이시네요.
선주 : 재미있어요. 연습도 많이 했구요.
퍼 : 특히 마임 하다가 전투적(?)인 부분에서 더 흥이 나시는 것 같던데….(웃음)
선주 : 제 친구가, 굽타가 잡혀갔어요. 굽타랑 저랑 연수생 자격으로 삼년 같이 일했구요. 그 후에도 일년 더 같이 일했습니다. 투쟁하러 명동에 왔다가 일을 못했고, 집에서 올 때 돈 많이 주고 왔으니까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한 상황이었어요. 계속 명동에서 농성하다가 출입국 관리소 앞에서 집회하러 갔다가 잡혔어요. 두 달 동안 보호소에 있어요. 한 달 동안 단식 투쟁했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내보내 줄 수 없다고 하고, 한달 동안 단식 끝에 목숨이 위험한데, 그래도 안 되니까 아직도 보호소에 있고 언제 나올지도 몰라요. 굽타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걱정도 많이 했었어요. 직접 만나고 싶었어요. 건강 아주 나빠진 상태에요. 2)
퍼 :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요. 선주씨도 몸 조심하세요.
선주 : 저도 잡힐 뻔 한 적 있어요. 한국에 온 다음에 연수생으로 삼 년 일했어요. 그 다음에 다시 네팔로 가야하는데 돈 못 벌어서 안 갔어요. 그래서 의정부 공장에 있다가 수원 공장으로 갔는데, 밤에는 사장님들이 문 잠그고 가요. 굽타가 전화카드가 없어서 전화카드 사러 나가려는데 출입국에서 우리 잡으러 와서, 제가 도망가야 된다고 했는데, 굽타가 못 믿었어요. 나는 빠져나왔는데, 굽타는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굽타는 옷장에 들어가 숨어 있었어요. 그때 시간 여섯 시 반. 나는 산에 올라가서 아홉시까지 있었어요. 다음에 만났을 때 끌어안고 울었어요.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의 이 청년은 산으로 도망가 춥고 어두운 기슭에 숨어 떨고 있었을 것이다. 집에 두고 온 친구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을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산 속과 옷장 안에 어린 짐승처럼 숨어 있던 그들이 느꼈던 아득함과 공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숨을 죽이고 두려움에 떨면서 터져 나오던 울음에 어금니를 깨물던 두 친구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집회와 마임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집회 방식에 있어 지나치게 과거 선전선동론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한국의 집회 문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아쉬웠다. 무대에 선 사회자에게 시각이 집중되었고, 몇몇 활동가들만이 발언을 했다. ‘전위’와 ‘대중’은 구분되었고, 대오 밖의 시민들을 아우르기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 중 일부분은 지나치게 ‘한국적’인 집회 문화로 보아 이주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배후 조종하는 세력이 있을 거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길고 복잡한 논의와 경험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주노동자들의 문화가 그들의 집회와 투쟁의 방식에 드러날 수 있다면 그들의 주장이 오히려 더욱 강한 힘을 지닐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에 대해 이주지부의 선전국에서 일하는 마하붑 씨에게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마하붑 : 방글라데시에서도 저는 학생 운동을 했었어요. 방글라데시에서도 기본적인 집회 구조는 여기랑 비슷해요. 스피치 하고 다같이 노래하고 또 스피치 하고 그런 식이에요. 그런데 집회에 대한 탄압이 훨씬 심해요. 학생들 조금만 운동해도 체포당해요. 저도 감옥에 있었어요.
퍼 : 그렇군요. 정치적 환경이 비슷했기에 비슷한 집회 문화가 생겨날 수 있었나 보네요.
마하붑 : 그런데 조금 많이 틀리기도 해요. 방글라데시에서 집회 할 때는 맨 처음에 사람들이 나와서 다 같이 노래 부르고 춤도 춰요. 악기도 연주하고 기분이 좋아진 다음에 집회를 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나서 시작해요. 체포되기 전까지는 다들 즐거워해요.
퍼 : 그런 종류의 집회 문화를 한국에도 좀 나누어 주시면 좋겠네요. 사실 한국의 집회 문화도 비판을 받고 있거든요. 여러분들의 다양한 문화가 우리 집회 문화도 좀 풍요롭게 바꾸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마하붑 : 처음에는 우리가 방글라데시 말로 구호 외치고 방글라데시 노래도 부르고 방글라데시 춤도 추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잘 안 해요.
퍼 : 왜죠? 사람들 눈도 더 끌 수 있고 본인들도 더 자연스러우실 텐데…
마하붑 : 한국 사람들이 좀 어색하게 봐요. 너희 나라 가, 막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방글라데시 식으로 집회를 하면 건방지다고 욕하고, 한국식으로 집회를 하면 누군가가 사주했다고 수군거린다. 결국은 이주노동자의 집회 결사권을 인정할 생각 따위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면전에다 대고 너희 나라 가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마저 저버린 것이 아닌가. 마하붑 씨는 내 얼굴에 떠오른 부끄러움을 눈치챈 듯 서둘러 덧붙였다.
마하붑 :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큰 게, 우리가 지금 투쟁하고 있어서 그래요. 우리는 지금 우리 권리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장애인 이동권 연대 분들이나, 일용직 노조 분들이나, 민주노총이랑도 같이 연대해서 투쟁해요. 그래서 집회하는 방식을 비슷하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큰 집회 같이 할 수 있어요. 집회 하면서도 한국 말 많이 배워요. 사실 예전에는 한국 말 잘 몰랐던 동지들 많아요. 그래도 지금은 한국 말 알아야 돼요. 그래야 발언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할 말도 더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생각 다 다르거든요.
퍼 : 그렇죠. 대화를 많이 하셔야 할 테니까요. 사실 평등노조 이주지부가 민주노총 산하라고 하지만 민주노총이나 민노당 정책팀하고 이주지부 분들의 주장은 또 다르잖아요. 3)
마하붑 : 예. 그래서 우리 이주노동자들, 회의 같은 데 가면 얘기 많이 하려고 해요. 다 동지들이니까요. 서로 오해하면 안 되니까요.
그는 상당한 달변이었고 논리적으로 차분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나는 이런 그에게 낯설음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분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동정의 대상화시키는 한국 언론의 방식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실제로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 문제나 자신들의 상황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도 이들에게 이런 주장을 펼칠 마이크를 쥐어 준 적은 없었다. 언론이 그들에게 허용한 것은 단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검은 피부의 불쌍한 외국인의 모습과, 프레스에 잘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보도 자체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모든 언론의 보도 방식이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획일화된 보도는 이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를 공격하여 연대의 가능성을 닫아 놓기 때문이다.
2) 2004년 3월 12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굽타씨는 체중이 74kg에서 59kg으로 15kg이나 줄고, 당뇨수치도 ’54’로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관련링크 보기)
-이후 그는 너무 심각한 몸 상태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었고 한 달 간에 걸친 단식 투쟁은 이로 인해 정리 되었다. 이후에도 보호소 측에서는 절대 보호해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농성단은 불법적으로 출국시키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4월 27일 출국을 결정했다. 굽타 역시 이에 동의했고 그는 해외 회의에 참석하는 진보진영 인사와 함께 그날 비행기에 올랐다.
3) 명동성당 농성단과 민노당, 민노총 정책팀은 고용허가제가 현실성이 없다는 부분과 궁극적으로 노동허가제를 실시하여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이룬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단에서는 직접적인 노동허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고, 민노당, 민노총 정책팀에서는 사업장 이동의 제한 철폐와 외국 인력 수급 구조의 모순 타파 등 고용허가제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먼저 개혁한 후 점진적으로 노동허가제를 실시해야 한다고주장하는 등 구체적인 노선에 있어서는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4.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집회를 마친 그들은 정리 집회를 위해 종묘 공원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깃발을 든 이들이 앞장을 섰고 한 명은 앞에서 구호를 선창했다.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했고,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몇몇 시민들은 유인물을 열심히 읽는 듯이 보였으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놀라움과 신기함, 약간의 불편함이 섞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불법체류하는 ‘범법자’ 주제에 데모까지 해서 길 막히게 하느냐는 식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아프게 쏟아졌다. 집회를 이끄는 이주노동자들은 애써 고개를 돌려 그들의 매서운 시선을 피했다. TV 프로그램이나 신문지상에 가끔 등장하는 가엾은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시민들에게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을 욕하는 한국의 시민들은 동정의 대상인 ‘낮은’ 존재가 노동자라는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신과 개발 독재의 가혹한 시대를 지나온 우리는 이미 다른 이들이 그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 그들과 어깨를 걸고 같이 싸우는 것이 결국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행위임을 알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외면했을 때 수많은 형제와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고, 소시민적인 자기 방어를 원하던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권익이 천천히 후퇴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것 역시 기억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소수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함께하여 정치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지 않는다면, 결국은 우리 안의 마이너리티, 즉 성적 소수자나 장애인, 혼혈, 노동자, 여성, 노인 등으로서의 자신 역시 주류 계급에 의해 핍박받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마땅히 선거를 맞은 각 당의 정책에도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러한 소수자를 위한 배려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 투표를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이주노동자와 같이 투표권이 없는 이들에 대한 공약(公約)은 이들 당의 노동 정책을 규정짓는 하나의 척도가 되는 동시에, 투표권이 있는 우리가 얼마나 이주노동자의 평등한 노동권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한 반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때의 공약만큼 대중이 욕망하는 바를 잘 투사해 내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진보 정당을 제외하고는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이나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인권 보장에 대해 공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당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진보 정당들의 공약도 실행 방법에 있어 현실성이 충분히 검토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급박하게 돌아가던 탄핵 정국에서 이주노동자가 송두리째 잊혀질 만큼 우리의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인식은 가벼웠던 것이다. 탄압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정당한 노동권을 주어야 한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나중에 입을 싹 씻는 한이 있더라도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에 관한 내용들이 최소한 공약에 약간이나마 반영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는 그들을 연대의 대상인 동등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한 동정의 대상 정도로 생각해 왔던 게 아닐까.
동정만큼 연약하고 줏대없는 감정도 없다. 실제로 마석이나 남양주, 안산 등 이주노동자를 많이 고용하고 있는 지역의 중소기업주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을 자주 접하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공무원들은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이주노동자들은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도와 줄’ 필요가 없다, 상습적으로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하는 이도 많다, 이들 중 돈을 버는 데 성공하는 이들 몇몇은 고향에 돌아가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카펫이나 벽돌 공장을 열기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친절한 설명이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이주노동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삼아 평면적으로 이해하려고만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그 인식 체계는 한편으로는 서독의 한국 노동자를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던 박정희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이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보호해 주는 대신 순종과 섬김을 바치는 약하고 순박한 존재여야 했듯이, 한국인에게도 이주노동자는 불쌍하고 착하기만 한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가장 가혹하고 비겁한 폭력에 다름 아니다. 인권과 노동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지, 착한 아이에게 주는 사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총선 당시 노무현 선거 캠프의 공약이었던 고용허가제는 지금 입법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다. 고용허가제에서는 명목상으로 근로기준법 적용과 노동3권이 보장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사업장을 이동할 권리가 없기에 회사측의 부당한 처우를 참아야 하고, 만약 더 조건이 좋은 회사로 옮기고자 한다면, 기존의 등록된 회사가 언제든지 사업장 이탈로 신고하여 그 이주노동자를 강제출국되게 만들 수 있다. 회사와 임금 협상을 벌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노동권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될 리 없다. 결국 이는 수많은 인권 침해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산업연수생 제도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너무도 명확하다. 애초에 고용허가제 도입의 일차적 목적은 국내 기업의 인력난 해소이지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4) 이러한 경제적 논리에는 과연 그것이 옳은 행위인가 하는 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가 계속 시행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누리는 부 중 일부분은, 그것이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주노동자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싸우며 명동에서 반 년 가까이 투쟁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중 동정을 바라는 이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온정과 자비가 아니라 단지 노동권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반쯤 잊혀져 있고 우리의 편견에 의해 멋대로 재단되어 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우리는 결국 모두 이주노동자다. 평등하게 연대하고, 타인의 억압에 대해 눈 감지 않아야 비로소 그들의 족쇄와 더불어 우리의 족쇄가 풀릴 가능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노동허가제가 고용허가제보다 훨씬 선진적인 제도라는 것을 인정하고 궁극적인 정책 방향은 노동허가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노동허가제에 가까운 불법 시스템을 지금 현재 한국에서 받아들이라는 것은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외국인의 인권 보호가 아니라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들어온 노동자의 인권은 부수적으로 보호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런정책 목표에 비춰보면 고용허가제가 훨씬 맞는 제도이다. 그 사람들이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에서 과도기 상태이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불만이 제기되고 언론에서도 계속해서 사업장 이동 제한은 노예 문서다 잘못된 제도다 등으로 비판하지만 현재 제도의 목표를 생각했을 때 많은 시행착오와 비판은 있겠지만 이 제도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업장 이동 제한의 주된 이유는, 불법체류자의 특성상 한국에 들어온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때문에 임금 상승에 따른 계속적 공장 이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반복 된다면 임금을 인상시켜 줄 수 없는 정말 영세한 사업장은 또 다시 인력난을 겪게 되고 임금을 더 줄 수 있는 좀 더 우량 기업만이 인력을 충분히 수용하게 되는 우리가 원치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임금을 보고 이동하는 개인적인 것은 최대한 막고 개인적 사유가 아닌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사유 이외의 사업장 이동은 금지한 거다. (김수진. 노동부 외국인력정책과 사무관. 독립영화인 만이와의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