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박건웅

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아주 가끔씩 그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박건웅은 대학시절 내가 흠모했던 선배였다. 얼마동안 그가 여전히 '작업중'이라는 소문 외에 직장인을 위한 취미 미술반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학교를 떠난 서너 해가 기울면서 박건웅 선배에 대한 관심도 시간의 두께 속에 묻혀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듣는 그의 이름이 낯설기 까지 했다.

 

 

어느 날 친구에게서 박건웅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장기수의 이야기를 담은 ‘꽃’이란 만화책을 그렸으며 집회 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자신의 작품을 들고 나오는 현장미술가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미술고등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교사로 종횡무진 하고 있다는데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후배가 되어서 관심의 눈을 너무 빨리 거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건웅 선배가 아직까지 미술의 힘을 신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건웅 선배에게 일부러 술 약속을 할 만큼의 관계가 되지 못하는 나에게 인터뷰는 좋은 구실이었다.

 

 

 
박건웅 프로필

1972 서울 출생
2002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신인상 수상, 출판만화 ‘꽃’ 출간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2003 티핑 포인트전 (관훈 갤러리), 애니메이션 ‘둥지’ 공동제작, 현장미술활동으로 촛불집회 ‘촛불을 든 효순이 미선이’ 제작, 반전집회 태권브이 제작

현재 노근리 학살을 다룬 <찔레꽃>, 제주 4.3 다룬 <섬> 제작 기획 중  
 

 

 
1. 만화, 브레이크 없는 자유로움

 

인터뷰를 앞두고 찾아간 그의 작업실은 예상외로 너무 훌륭했다. 상수동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깔끔한 오피스텔은 작업용으로만 쓰게 되어있는 2층 다락과 테라스 까지 있어 미술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공간이었다. 나는 갑자기 부동산 업자처럼 굴며 보증금과 월세가 얼마인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후배에게 박건웅 선배는 원화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최근 작업 중인 노근리 학살을 다룬 만화 ‘둥지’와 ‘꽃’의 원화를 보면서 조곤조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며칠 뒤 나를 포함한 면식범 ,균. 이렇게 세 명의 퍼슨웹 인터뷰어가 작업실을 다시 찾았는데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4층 작업실 계단에는 파병반대 집회 때 쓰였던 군인 인형이 먼저 우릴 반겼다. 작업실 방문이 처음인 면식범과 균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의자에 앉기도 전에 집 구석구석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박건웅 선배는 사람들에게 방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며 낯설음을 털어내는 것 같았다.

인터뷰는 박건웅 선배가 만들었다는 조지 부시 재떨이에 담 배 꽁초 한 개비를 구겨 넣으면서 시작되었다.

퍼슨웹 (이하 )> 와, 이 재떨이 멋지네요. 직접 만드신 거죠?

박건웅 (이하 박)> 원래는 대량생산을 해보려고 했는데 단가가 맞지 않아서 아쉽게 관뒀죠. 그냥 몇 개 만들어서 아는 사람들 주고 그랬는데 이제 몇 개 안 남았네요. 퍼슨웹에도 하나 드려야죠. 하하.

퍼> 아휴,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봄> 얼마 전에 또 무슨 상 탔다는 소식 들었는데요.

박> 상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같이 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때 창작 지원 공모작에 응모해서 된 거예요.

봄> 와, 그럼 만화영화도 공동 제작하는 거예요?

박> 예, 단편으로. 이번 애니메이션 작업은 누구랑 같이 하는 거예요.

‘둥지’라고 이미지 포트폴리오가 아직 없고 시나리오만 있는데, 7분정도가 될 것 같아요.

‘면식범’(이하 면)> 7분해도 꽤 돈이 많이 들죠?

박> 예. 말이 7분이지 어마어마한 작업이래요. 애니메이션 작업 하시는 분들은 ‘아휴 일년 죽었네’ 이러실 정도로 힘든 건가 봐요.

박건웅은 선뜻 지금 작업 중인 애니메이션 몇 컷과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봄> (둥지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거 뭐에 대한 얘기예요?

박> 우리도 모르게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를 둥지에 빗대어서 표현한 거거든요. 시나리오가 많이 바뀌었어요. 너무 길고 또 엔딩 부분이 심사위원들이 마음에 안 맞는다고 그래가지고요. 우리나라의 탈춤을 주 소재로 해서 만든 건데 한 마을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그 이상한 소리에 사람들 마음들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막 탐욕스러워지고. 나중에 그게 알고 보니 그 마을이 어떤 탱크위에 올려진 알 이었다는, 그런 얘기를 해주면서 이상한 소리의 정체가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 이었다, 뭐 그런 얘기예요.

봄> 여기 기획 의도를 보니까 예술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다듬은 망치라는 브레이트의 말이 인용됐는데, 누가 예술은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세요?

박> 현실을 비추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저는 음,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데 딱 정해서 말하긴 그렇지만 그 이상의 힘도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예술이란 것들은 본질적으로 낡은 것을 깨드리고 새로운 곳으로 나가는 그런 모습이잖아요. 

봄> 낡은 건 뭐고 새로운 건 뭐라고 생각 하세요?

박> 정체되어 있고, 그냥 고여 있고. 그런 걸 예술 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잖아요. 보통 모더니즘 작가들이나 추상하는 작가들도 가만히 있고 남들과 똑같고 그러면 막 새로운 것 해보려 하고 계속 어떤 식으로든 바꿔내잖아요. 굳이 민중미술계열 쪽이 아니더라도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생각하는 낡은 것은 억압된 여러 가지 장치들, 인간에게 주어졌던 여러 가지 죄악들,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을 벗겨내는 작업들이 새로운 것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죠.

봄> 어느 기사에서 보니까 ‘꽃’이 4년 동안 평균 7시간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하던데요. 사람이 쉽지 않은 일을 할 때 그걸 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 있잖아요. 원동력 그런 게 뭔지 궁금해요. 돈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 않은 시간과 굉장한 노동력을 투자해서 한다는 게 보통일은 아니거든요.

박> 솔직한 생각은 작업을 하다가 그러니까 97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2,3년 정도 지나니까 지치고 그런 적이 3번 정도 있었어요. 그만두려고 하니까 해놓은 게 아까운거야. 내가 생각하는 엔딩 작업으로 가는 거였는데요. 엔딩을 생각해 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해놓은 게 아까워가지고 그때부터 내가 하는 게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오기도 생기고 역사적 책임감 무게감들이 갈수록 더 느껴지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는 초월해가지고 나도 모르게 자꾸 나를 세뇌 시키는 거 있잖아요. 너 이거 안하면 죽는다 해야 된다, 뭐 그런 식으로 됐어요. 해보니까 어느새 완성이 돼 있더라고요.

균> 아까 역사적인 책임감 이란 말씀을 잠깐 하셨는데 그게 어떤 건가요?

박> 더 이상은 잘못된 역사를 사람들에게 넘겨주진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도 고등학교 때 역사를 배우잖아요. 4.3은 빨갱이들에 의해 일어난 폭동이었고, 뭐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왜곡된 역사들이 즐비한데 아직도 바뀌지 않은 역사들이 많고 그런 것들을 제대로 진실 되게 그려서 전달 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만화라는 매체가 대중적인 파급력이 크잖아요. 그래서 채택을 했었고 그런 걸 통해서 후대에겐 잘못된 역사를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얘기하는 거죠.

균> 박건웅씨에게 미술작업이 가지는 의미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박>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했어요. 개인적으로 좋은 작품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어느 세월에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의 부분까지 접근해 들어가게 된 거예요. 아 이게 이런 거구나 이제부터 장난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수렁에 빠진다는 느낌 있잖아요. 4.3같은 경우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방대해가지고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는 상황 있잖아요. 그걸 느끼겠더라구요. 웬만한 종합적인 의사가 되지 않고서는 잘못 건드리면 죽겠다는 생각도 하고 이제는 장난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도 모르게 커다란 짐을 가지게 됐는데 이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 커지는 거 같아요. 욕심도 생기고.

 

 

어떤 예술가들이든 왜 쓰는가? 혹은 왜 그리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한 번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데 박건웅은 그것을 역사적 책임감이라 했다. 책임감이란 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지는 것일 텐데 박건웅은 결코 가볍지 않은 그것도 ‘역사적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듯 것처럼 보였다.

균> 역사라는 것은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권력을 가진 주체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또 다른 권력을 가진 그야말로 정사(正史)가 되는데요. 박건웅 씨의 작품 ‘꽃’의 경우는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 나오는 개인의 이야기, 미시사잖아요. 미시사는 자료나 사료 같은 객관적 근거가 없으면 자칫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 감정적으로 흐를 수도 있는데요.

 

박> 다분히 감정적이에요. 두 분이 제 작품 평을 했어요. 나보고 낭만주의자 같다 낭만성이 강하다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런가? 란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것 같아요. 다분히 자족적이고.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역사 안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한 적이 굉장히 많고 사실 보면 지금 끝까지 안 나와서 모르시겠지만 한 이야기가 있어요.

1부는 그 중에서 대사가 없는 부분인데 프롤로그에 해당되고 대사가 나오면서 진짜 극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데 낭만주의적인 느낌들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작위적인 느낌도 많이 들고. 그 속에서 역사를 보는 입장을 잡으려고 했던 거구요. 처음에 그냥 홍대학생회관 앞에서 밥 먹고 나와서 차 한 잔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뒷통수를 때리더라구요. 아, 이런 구조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전향 장기수 얘기를 다루는데 이걸 어떻게 극적인 감동을 끄집어낼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큰 줄기가 잡혔거든요.

봄> 미술전공자들 보면 서사만화 분야로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문 경우로 알고 있거든요. 처음 만화를 시작 하실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했습니까?

박> 회화를 전공했는데 회화의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예전에 초등학교 때 만화그리기도 하고 낙서해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그러잖아요. 그런 식으로 초등학교 때 만화책도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가 어느새 만화는 접어두고 그냥 좋아하는 걸 가지고 있다가 대학 진학을 해서 미술을 전공 하면서 만화가 색다르게 다가오더라구요. 눈이 높아지면서 유희적으로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측면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새롭게 보기 시작했죠. 박재동 선생님 카툰 같은 경우도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고 이두호 선생님이나 오세영 선생님처럼 리얼리즘작가로서 활동하시는 분들 보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 생각을 가지면서 시작을 하게 됐죠. 그리고 사실 보면 돈이 없어가지고 대학 졸업하고 앞으로 뭐 먹고 살지 생각을 하다가 하하.

돈 벌려고 한건 아닌데 화가나 이런 사람들보면 물감 사는 것도 장난 아니거든요. 물감 하나에 2,3천원 하고 어떻게 앞으로 그릴 것인가 생각해 보니까 만화는 펜하고 종이만 있으면 싸게 먹히는 재료기 때문에 이거면 뭐든지 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에서 처음에 시작했는데 만화의 가능성도 매치가 돼서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시작을 하게 됐어요. 효율적이다…. 영화는 돈이 비싸가지고 만화면 되겠다. 만화면 싸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죠.

박건웅은 역사 만화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과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림보다 더 구체적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만화는 박건웅이 생각하는 ‘효율성’에 부합되어 ‘선택’된 것이었겠지만 만화가 그림쟁이 박건웅에게 찾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균> 기본 만화보기 형식에 대중들이 익숙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박건웅 씨 만화 보면 좀 ‘난해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 저도 그거 공감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할 거예요. 좀더 유연하게 풀어낼 방법을 고민하는데 제가 이번에 처음 시도한거는 모험이기도 하고 부딪혀 보자는 생각 했었어요. 저한테는 제동 걸 장치가 아무것도 없거든요. 출판사가 의뢰해서 한 것도 아니고 제가 그냥 좋아서 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런 게 이점으로 작용한거죠. 제가 표현함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없었으니까 표현 창작에 대한 자유로움이 있는 거지요.

오히려 대중들과의 소통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일단은 처음 시도였고 그런 소통에 대한 부분은 착오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많이 변화를 해야죠.

균>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스토리 라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들이 그렇게 새롭게 다가오진 않습니다.

박> 진부하죠?

균> 약간 신파스럽기도 하고요. 어떤 모델이 있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박> 모델은 없었구요. 제가 이야기꾼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면 얘기를 재밌게 할까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진부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단은 그냥 그림으로 땜빵을 한거죠. 역시나 이야기가 문제예요.

 
균> 그런 욕심은 없으세요? 스토리 작가를 둬서 같이 공동작업을 하는 방법이던지, 좀 더 길고 오래갈 수 있는 서사적인 힘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박> 그런 생각 가지고 있어요. 좋은 작업 있으면 같이 할 수 있는데 아직까진 제가 이야기를 다 만들고 싶어요. 부족한 부분이나 이런 부분들 바꿔내고 싶고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죠. 형식 같은 것은 이야기에 맞춰서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이 되는데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냐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죠. 요즘엔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해요. 이야기 작가를 따로 두는 게 필요다면 할 수 있겠지만 제가 그런 훈련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키우는 이야기를 만드는 훈련을 하고 싶고 영화감독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듯이 가급적이면 제가 만들어 보고 싶은 거죠.

만화가 소설과 어떻게 비교 되는가, 또는 만화는 그림과 어떻게 비교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닌 듯 하다. 다만 박건웅은 한 칸 한 칸 그림을 채우면서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자를 오염시키고 소설을 모욕하는 소설이 난무하는 시대에 오히려 박건웅의 만화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본다.

정작 중요한 것이 새로운 표현이나 양식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매커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삶의 어두운 심연까지를 들여 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문학이 세상을 향해 끝없이 던지는 물음과 다를 바 없다. 비단 박건웅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

 

2. 문화는 경쟁하지 않는 것

면> 만화의 대중성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박> 대중성이라 말하면 대부분 재미있는 거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재미있다는 게 나는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재미의 코드는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재미를 가슴 깊이 오는 문학적인 재미를 느낄 수도 있는 거고 어떤 사람은 개그적인 유희를 재미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찾고 싶은 재미는 만화적인 재미예요. 칸에 대한 고민 연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대사가 없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감정을 칸에 차이로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림으로만 연결시켜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잔재미를 찾으려고 생각했어요. 만화를 깊이 있게 보시는 분들 평론가분들 보시면 이건 참 재밌는 표현이네 이런 말씀도 하시고 하하하. 제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하하. 단 몇 분이라도 감동을 받고 약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더 좋은 거 같아요.

비 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시선이 많이 예전에 나쁜 사람이라는 걸 넘어서 역사의 피해자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많잖아요. 그런데 피해자는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들이 투철하게 자기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들은 무엇이었고 내가 그때 당시에 있었다면 이승만과 독재, 제주사람들 자기 권력을 위해 희생시켰던 상황에 대항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떳떳하게 젊은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용기 있게 행동했고 그것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이라고 저는 확신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를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많이 송환 되셨죠.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걸 다 만들어서 사회적으로 반응이 있어가지고 북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중간에 다 나오셨더라고. 한 3년 정도 작업하니까.

봄> 아쉬웠겠네요.

박> 좋은 일이지만 좀 그랬죠.

봄> 우리나라 만화계에 대해 할 말이 많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박> 저도 잘 몰랐거든요. 미술계는 화단이라고 하잖아요. 화단의 권위주의에 빠진 모습이라던지 그런 문제점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밖에서 봤을 때 만화판은 참 건강하게 보였어요. 그런데 만화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2년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만화도 알고 보니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만화공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체계 속에서 대여점 문제, 우리만화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 일본만화에 대한 문제 같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인지를 하고 있어요. 지금 개방 같은 게 되면 진짜 힘들거든요. 정부에서 만화 지원 육성한다고 5년 해서 백억 정도 지원해주겠다,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이게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가 의문스러운 게, 사실 작가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가가 작품을 내올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돼야 하는데 유통만 생각하는 거예요. 작가시스템은 생각 안하고 유통시스템만 생각하는 거죠. 어떤 분이 비유를 하셨는데 중국집이 잘 안되는 거는 배달의 문제가 아니라 자장면이 맛이 없기 때문이라 하셨는데 정말 배달의 문제는 아니거든요.

작품의 질에 대한 문제죠. 작가가 많이 나오고 좋은 작품이 많이 만들어 져야지만 그거 자체가 유통이 되는 거고 잘 팔리고 그런 건데 가장 기초적인 마인드조차 가지지 못한 그런 행정자들이 많아서 정부에서 만화를 육성하겠다는 그 어마어마한 돈들이 과연 어디로 갈까 생각을 해보면 잘 모르겠지만 대형 출판업자들한테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들의 방식은 일본만화 싸게 들여와서 벌어서 크게 된 출판사들이거든요.

결국은 그 출판사를 또 지원하게 돼서 악순환이 되는 경우죠. 이런 문제를 계속 비판해도 쉽게 바뀌어 지지 않는 게 아직도 행정 처리자들이 만화에 대한 인식을 산업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문화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요. 문화는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1등 2등 경쟁하지 않는 거잖아요.

얼마나 다양한 종자를 심어 놓느냐 또 잘 키울 수 있게 해주는 게 문화 산업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잘 크는 작물들 돈 되는 작물들 더 키워주고 팔아먹어 돈벌겠다는 논리라는 거죠. 그러면 안나오죠. 좋은 종자들 희귀 종자들이 안 나오는 거죠. 일본이 만화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마어마한 꽃밭에 다양한 종자들을 풀어 논 거예요. 이렇게 자르질 않죠. 검열이나 규제를 안 하고 일단 나쁜 만화 좋은 만화 이런 거 상관없이 다 키워놓고 그중에서 대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폐단도 있겠지만 저는 장점이 더 많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다 자르죠. 우리의 규격에 맞는 만화만 그러니까 독자층을 아이들의 기준에 맞추다 보니까 그 유치해질 수밖에 없고 좋은 작품들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일례로 저와 같이 공모전에서 됐던 만화가 중에서 김대중 씨라고 ‘자지도시의 아름다운 추억’이란 만화책을 냈거든요. 남자 성기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애들 보면 안 된다, 그러면서 교보 같은 곳에서 판매 불허를 자체적으로 내린 거예요. 그런 것도 웃기거든요. 사실 더 천박한 일본 만화는 엄청나게 많거든요. 진짜를 못 보는 거예요. 그 만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지 않고 단순히 그런걸 보여줬다고 그러는 거예요. 사실 일본만화가 엄청나게 더 경박스러운데 다 유통되면서 왜 그런 것은 안 되냐고 생각하면 상당히 답답한 느낌이 들죠.

균> 꽃은 이념적인 문제라던가 그런 것 때문에 검열이나 외부적인 압력 같은 게 있었는지요?

박> 그런 건 없었어요. 조선일보 에서도 ‘꽃’이랑 제 기사가 나왔어요. 장기수 얘기를 다룬 만화다 이런 식으로. 걔네도 맛이 간 건지.

봄> 변하긴 변한 거 같아요. 이런 얘기가 제도권 안에서 상을 탔다는 것 자체가요.

박> 그런 압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요. 그러니까 전화해서 ‘당신 이거 하지마’ 이랬으면 막 또 투쟁해야죠. 그래서 화제가 돼서 대체 꽃이 뭐예요? 사람들이 그럴 거 같아 가지구요. 에잇, 뭐 별 반응도 없고 연락도 안 오고 속상했었어요. 사실은.

봄>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요.

박> 아직은 이게 공개된 게 아니거든요. 첫판 찍어도 천부밖에 안 찍었고 다 나갔다고는 하지만 별로 알려진 게 없어요.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판단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아직 공개된 건 아니죠. 올해 이제 11월까지 끝내고 11월 되면 한꺼번에 나오게 될 텐데 그때 되면 아마 정확한 평가가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은 종종 경쟁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경쟁 하려고 한다. 삶, 사랑, 예술 등. 경쟁의 논리 안에 만화도 호흡곤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만화계에 대응해 박건웅이 취한 전략은 ‘무시하기’였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 되어버렸다. 만화계 어디에서도 박건웅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박건웅은 자신이 가는 길대로 유행과 대세에 편승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기만의 보호구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3.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역사는 진행되었다

봄> 전에 아무도 안했기 때문에 근대사를 하셨다고 했는데 정확한 대답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도 하지 않은 건 아직 많은데, 그 중에서 선택을 한거라고 봐야겠네요. 그런데 그게 90년대 초반에 학교를 다녔던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박> 예전에 학생회일을 했거든요. 일하면서 많이 느끼고 현실에 대한 모순이나 이런 걸 느끼고 부딪히고 그랬어요. 그랬잖아?

봄> 전 몰라요.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에게 당시의 기억은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교실보다는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91학번에겐 그럴 것이다 (라는 추측을 해본다). 나는 박건웅의 예민한 기억 속살에 닿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보았다. 주춤하는 그의 대답에 ‘전 몰라요’ 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넉살을 부렸지만 학교 미대에서 전설로 회자되던 박건웅의 이야기는 남들이 흥미꺼리로 얘기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의 심장도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박> 그때 느낀 게 뭐냐면 모든 모순들이 결국은 거기서부터 시작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잘못된 역사에서 시작되고 교육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물론 다는 바꿀 수 없지만 이런 시각 정도는 있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거죠. 왜냐면 다양한 시각이 있어야 그래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데 일방적인 역사가 되게 많잖아요. 그런 속에서 저도 배워왔고. 그런 것들이 많이 답답했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림이든 뭐든 문화적인 힘이 있으니까 그걸로 바꿔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 거죠. 학교 다닐 때는 그림은 안 그리고 연속 올 빵꾸로 6학년까지 다녔었는데….

봄> 장(長)학생 이네요?

박> 나중에 교수님한테 걸개를 그려서 검사를 맡았거든요. 800호 크기를 한 학기에 내야 하는데 걸개를 밖에다가 펼쳐 놓고 보여줬어요. 그런데 그 교수님이 통하는 선생님이세요. 막힌 사람이 아니라 뭔가 이해하시는 분이셔서 넘어갔죠. 그런 식으로 많이 해가지고 실기수업을 많이 못 들어갔죠. 소홀히 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좀 후회스럽죠.

균> 후회스럽다고요?

박> 그림 좀 그려 놀 걸 하는, 남들은 4학년 청소할 때 그림 잔뜩 가지고 트럭에 세우고 가져가는데 저는 달랑 몇 개 들고 가니까 좀 그랬죠. 걸개 같은 거는 다른 학교 빌려줘서 다 없어지고 그림도 100호 4점 달랑 들고 오고, 물론 그런 게 후회스럽다는 건 약간 그렇지만 그리고 싶었는데 많이 못한 거 아쉬워요. 그런데 학생회일 때문에 그림 못 그렸다는 건 핑계인거 같고 많이 좀 피해 다녔던 거 같기도 해요.

면> 실례지만 학번이?

 

박> 91학번 이예요.

면> 저도 91학번인데.

박> 아 진짜요? 강경대 세대네.

우연찮게도 면식범은 그와 같은 91학번, 나와 균은 96학번 이였는데 학번이라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이상한 연대의 끈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면> 91학번만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당시 학생회 활동을 하셨으면 학생회에 대한 얘기들, 특히나 91학번들이 그랬던 거 같은데.

박> 공부를 안 했죠.

면> 공부 안 했죠.

박> 공부 안 해서 바보죠. (웃음)

면> 어딜 가도 다 그래요.

박> 선배들이 그래요. 이상하다, 얘네들은 공부도 안하고. 90학번까지만 해도 학습 분위기가 있었고 그랬잖아요. 91은 좀 별로 없고 그러면서 뭉치기는 잘 뭉치고.

면> 하라는 거 잘 안하고.

박> 아 그랬어요? 우린 잘했는데..(웃음) 약간 과도기였던 것만은 분명하죠.

면> 학생회에 대한 실망이라든가 조직, 조직 활동에 대한 실망 이런 것들이 다른 대안을 찾게 했던 적은 없으셨는지.

박> 많았죠.

봄> 저번에 작업실 놀러 왔을 때 얘기하다가 얼핏 조직 활동에 대한 거부반응 같은걸 느꼈었는데요.

박> 그런 건 아닌데 예술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현재 보여 지는 것들은 그게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오히려 있으면 더 잘 돼야 되는데 개인적인 역량들이 많이 떨어지는 느낌들 받거든요. 결국은 뭐냐 하면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는 조직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옭아 메는 역할밖에 가지지 않는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또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다르게 접근해야 될 것 같아요. 보통 일반적인 조직체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사안에 따라서 해낼 수 있지만 예술관련 사람들은 조금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특수한 경우고 특수한 경우인 만큼 좀 더 특수하게 이끌어 내지 않으면 힘들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어요. 저도 좀 조직의 쓴맛을 봐가지고.

봄> 그거요. 그 조직의 쓴맛이 뭐예요?

 

박> 단맛은 아니었죠.(웃음) 그러니까 분명히 비판은 필요해요. 예전에 저도 배울 때 비판문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서로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서 바로 잡아 나가고 그리고 또 올바로 갈 수 있게끔 비판과 견제는 필요하고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세월에 그게 없어지더라고요. 어느 세월에. 그게 우리 편, 너희 편 그렇게 되면서 그것이 비판이 아니라 포용으로만 가는 거 같았어요.

봄> 비판이 존재해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얘기네요.

박> 이건 아닌데 하는 게 하나의 거대한 진리로 자리잡아나가는 모습을 볼 때 좀 그랬어요. 민주적인 것들을 우리가 견지를 하면서도 왜 이렇게 안 될까, 비판에 대한 그런 문화가 없어진다는 게 실망을 했죠.

균> 90년대 학번이시고 대학생활을 하셨는데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90년대를 돌이켜 보면 어떻습니까?

박> 글쎄 나는 휴거가 일어날 줄 알았어. (웃음) 휴거가 안 일어나더라고요.

봄> 가장 쇼킹하다. 오늘 답변 중에.

박> 근데 역사가 계속 이어 지더라구요. 희한하더라.

봄> 희한할 것 까진 없잖아요. (웃음)

박> 잘 모르겠는데 사실 정리를 잘 못했어요. 아직도 90년대가 이것은 이렇다고 정리가 잘 안되거든요. 제가 나중에 하려고 하는 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지금 당장 할 수 있지만 한 10년 뒤에 하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때 가야지 정확하게 상이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얼마 안 된것 같아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생각들이 짧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좀 더 정리가 된 다음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죠.

이건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아닌 것 같아요. 대신에 저한텐 소중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삶의 목표 방향을 잡아줬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죠.

봄> 같은 90년대 초반 학번들 보면 대중간부로서의 박건웅에 대한 단상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거든요. 정말 유명했어요. 미술대 학생회장이었는데 총학생회장으로 나가기만 하면 백 프로 당선 이런 거였던데요. 상당히 대중적인.

면> 고급간부였네?

봄> 저는 자세한 얘기는 모르지만 그때쯤 군대를 가셨다고 하시던데 그 얘기 좀 해주세요.

박> 95년도였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있었고 학교 안에서의 문제도 많았었고 그랬죠. 되게 힘든 때였어요. 그때 당시에 94년도 제가 미대 회장할 때, 미대회장 하면서 힘든 경우가 많았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지만. 아 계속……

봄> 심적으로 힘드신 거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요?

박> 그러니까 솔직해지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도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았거든요. 학우들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솔직해 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려서. 뭐 그런 문제……

균> 아픈 데를 자꾸 왜 건드려?

봄> 내가 원하지 않는데 떠 밀려 가고 있다 뭐 이래서 솔직해 져야 겠다, 이런 건가요?

박> 그런 측면도 있고 그 조직이 하면 우리가 한다, 이런 건 내가 싫거든요. 그러니까…….

박건웅의 말소리가 나의 귀 앞에서 뿌옇게 흩어졌다. 나는 나빴다. 스스로 부정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가 나만의 착오가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유치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여기서 그만하기로 했다. 내가 건드린 건 그의 속살이 아니라 나의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4. 90년대라는 프리즘

 
봄> 아까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낭만주의적인 시각들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화 그리는 사람 또는 예술 하는 사람들이 모든 걸 다 할 순 없는 거잖아요. 스스로 예술가의 역할이나 사회에서 어떤 영역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있으세요?

박> 사회적인 역할은 다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개인이 자기 수준에 맞춰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거 같아요. 예술가는 예술을 함으로써 그 자신이 사회적 참여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구는 이런 그림 그리니까 사회적 참여 한다 안 한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에 놓인 상황을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맞추고 있는가, 그런 문제인거 같아요.

어떤 작가가 슬픔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추상적 언어로 표현한 그림이 있다면 그런 것들도 사회적 언어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거든요. 사회적 치유에 대한 추상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저는 그에 비해 구체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죠. 구체적이기도 하고 역사의 진실을 만화로 새롭게 그려보자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 거죠.

90년대는 타자의 부활이 이루어졌던 시대였던 것 같다. 안과 밖으로 존재하던 타자들이 우리의 인식과 문화의 장으로 비집고 들어왔던 시기, 그리하여 오랜 기간 폄하되었던 또는 부정되었던 가치들이 당당히 자리 잡은 시기였다. 모든 예술가는 나름대로의 역할과 가치가 있다고 하는 그의 말 속에는 90년대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다양한 색깔의 빛이 스며있었다.

봄> 90년대 얘기를 좀 더 하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던 논쟁이 한창이었잖아요.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졸업 후에 작가로 진출을 하면서 개인적 서사나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품을 내놓으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박> 잘 살고 있구나.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죠 뭐. 나름대로 갈 길은 가는 거고 저 같은 사람은 이렇게 가는 거고 그런 거 같아요. 언젠가는 만나는 부분이 있을 거 같아요. 제가 약간 생각을 바꿔서 좀 더 유연하게 사람들 만나는 작업들 하게 되면 만날 수 있는 거고 아니면 그 사람들이 변해서 만나게 될 수 있는 거고.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해요. 왜냐하면 각기 다른 영역을 사회에서 만들어 내야 되니까.

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아직 생생하게 기억 하시죠? 제 경험으로 볼 때 2,3년 지나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들이 생겼던 거 같은데 박건웅 씨 같은 경우에는 그 전 80년대와는 의도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문화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반응했던 양식이 있었는지 그게 궁금하네요. 그게 틀림없이 조직운동 조직 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요.

박> 양식이요.

봄> 고민하다가 군대 가셨을 수도 있고.

박> 어렵다.

봄> 아직 진행형일 수도 있을 거고.

면> 역사적으로 보면 나는 아직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경대가 죽고 나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도 하고 조금 나댔던 편인데 한 사람이 죽고 나서 왜 인지 모르겠지만 조직운동에 대한 실망, 회의 배신감 같은걸 느꼈었어요.

지금 와서 보면 도피적인 부분도 있었겠지만 조직운동에 대해서 경멸하고 포스트모던 논의 자체에 굉장히 열광을 했던 거 같아요. 일단은 비켜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었던 때가 있었어요.

박> 예전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다양성들에 대한 수용할 수 있는 조직의 그릇이 그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아요. 어느새 학우들에게 딸려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그런 걸 잡아낼 수 있는 역량도 부족했고 아무튼 조직의 상태가 그렇지 못했다는 건 분명했던 거 같아요. 진짜 빠르게 변했죠. 소련붕괴에서부터 시작해서 93년 같은 경우에 갑작스럽게 오렌지가 나오면서 확 변하기 시작하더니 애들 의식 자체가 많이 변했죠.

균> 공동체 속에 묶여 있었다면 공동체운동과 나와의 관계 이런 걸 고민하셨을 텐데 개별주체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면> 계기라고 질문할 수 있을까?

박> 다 처지가 다른 거 같아요. 또 이렇게 말하면 포스트모던적인 건가?(웃음)

봄>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진리는 없고.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 말이죠.

박> 그렇잖아요. 이 말도 맞고 제 말도 맞고 다 똑같아 그거잖아요. 거기에 맹점이 있어요. 예전에 토론할 때도 그 얘기를 했는데, 아니 그러면 너희들은 포스트모던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니 말도 맞고 내말도 맞고 그렇게 얘기를 하자고 그런데 왜 너희 미술은 맞고 북한의 미술 제3세계 미술은 안 되고 그렇게 생각을 하냐. 레드 컴플렉스 아니냐.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죠.

되게 모순이 있어요. 포스트모던 사상을 신봉하면서 북한 미술, 제3세계 그런 건 안 된다고 하는 사람 많거든요. 그렇게 보면 자기모순이죠. 인정할건 인정하고 좋게 나가자 그렇게 가면 되는데 오히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균> 원래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다가 미국에서 완성됐잖아요.

면> 말짱 황이더라고 거짓말 같다는.. 한 3년 지나니까 거짓말 같아요.

보편적 지식이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배반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몇몇 사상가들의 지휘아래 지속적으로 거대담론의 해체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실천과 비판정신이며 이를 대신한 것은 냉소와 소시민 근성이었다. 외부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타자화 된 모습으로 나는 혹은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이미 보내지 않았는가. 누구말대로 우리들 각자는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 자체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위반의 장소가 아닌가. 자신의 삶과 주변을 자신의 언어로 이론화 시키는 작업은 피곤한 상태로 늘 진행형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에게 리얼리티란 이러한 과정에서 획득되어 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우리는 늘 과정 중에 있다. 박건웅도 나도. 부시의 입에는 담뱃재가 제법 쌓여가고 있었다.

박> 우리는 미술도 자본주의 미술 사조만 배웠잖아요. 사실 인상파 다음에 입체파고 입체파 다음엔 뭐고 이런 걸 배우잖아요. 사회주의권 에서는 사실주의 넘어가고 민중적사실주의 나오고 쭉 이어졌거든요.

역사의 계보가 다른 거예요. 미술에 국한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추상주의가 현대미술로 완성된 것들이 가장 진보된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아직도 변화되고 있는 제3세계 미술 같은 경우는 아직도 나름대로의 민족적 정서와 사상성을 가지고 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그런 것을 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가까이 북한 미술 같은 경우도 어떻게 저걸 바라봐야 되는가, 그런 생각해보면 또 그들이 우리 미술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보면 맥은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뿌리나 그런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완전체가 아닌 것 같아요. 불안하게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우리사회도 그렇고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고요. 형식이면 형식 내용이면 내용이 서로 약간 비판할 부분 비판하고 이런 것들이 종국적으로 만났을 때는 여러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더 나은 미술, 더 나은 문화의 모습으로 보여 질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봄> 더 나은 미술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뭐예요? 좋은 그림 좋은 작가 나쁜 작가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구분을 한다면 그런 기준이란 게 있으세요.

박> 저는 고야라는 화가를 좋아하거든요. 스페인 군중화가인데, 평생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인데 스페인 혁명 당시 민중들을 학살하고 그랬던 처참한 현실들 그려내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자기의 처지를 뛰어넘어서 그런 걸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고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화가가 되고 싶거든요. 외면하지 않는 진실 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쁜 작가라고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사실 그건 대중의 힘이거든요. 대중이 판단하고 결정내릴 수 있는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대중의 눈높이를 열어놓을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하는데 미술이나 문화 이런 것들 대중에게 돌려주는 것들이 되면 당연히 없어질 것들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들하고 싸우고 싶진 않아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대중을 만나는 작업들을 해야 하고요.

봄> 대중들이 검증할 것이라는 말이시죠?

박> 네. 그리고 또한 대중에게 올바르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작가로서의 앞서나가는 자세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거죠.

작가의 작품세계가 숭배가치가 되고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에게 고급문화에 대한 상승충동과 모방을 조장하고 자기비하를 강제하고 있는 미술계 현실 앞에서 대중들이 검증할 것이라는 말이 현실화 되는 일이 당장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 관조하는 예술이 아닌, 현실 속으로 들어가 치열하게 반응하는 예술을 원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봄> 결과물이 주인을 담는다고 하잖아요. 서울에서 자랐다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작품들이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거든요. 유년 성장기가 다른 도시 사람들하고 좀 달랐을 것 같아요.

박> 똑같이 살았어요.

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되셨어요..? (웃음)

 

박> 90년대 사람을 이렇게 버려 놨어요. 어떻게 하죠?

면> 시대를 탓해야 될 거 같아요. 나도 뭔가 달라요. 누가 사회학적으로 밝혀냈으면 좋겠어요.

 

봄> 하하, 어릴 적 어떤 동네에서 사셨어요?

박> 도시에 화곡동에서 처음에 살았는데 양평동 판자촌 있고 그런 다리 밑에서 자랐거든요. 화곡동은 다 벼 밭이에요. 발전도 안 되고 우리 집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다 풀밭, 코스모스 밭 있었고 초원의 집 있잖아요, 그런 집에서 자랐거든요. 어렸을 때 자연과 접하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발전이 덜 되가지고 개구리 잡으러 가기도 하고 그런 기억이 있죠. 저는 사실 대학 때 농활 가서 느낀 게 많았거든요. 농활 가서 농촌에 대한 모습이나 느낌 이런 것을 한꺼번에 가지고 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래 접하고 이런 건 아니지만 뇌리에 많이 남아있는 추억들 그런 잔상들이 있어요.

면> 좀 불쾌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가공된 이미지의 느낌이 드는데요?

박> 예 있어요. 제가 거가기서 나고 자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좀 그래서 아쉬워요. 그런데 어차피 팔리는 거는 도시 사람들이 많이 보고 그 감각에 맞춰서 보여줘야 되니까 너무 토속적이고 그런 것보다는 밝게 약간 가공된 이미지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생각도 했었어요. 만약에 진짜 촌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해보면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고 그런 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촌에 가서 살다보면 너무 따분해가지고 너무 사람이 그립고 그럴 것 같아요. 제대하고 일주일동안 시골에 가서 지낸 적이 있는데 처음엔 너무 좋은데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지고 누구랑 술 먹고 싶고 막 음악소리도 듣고 싶고 그래서 읍내에 나가서 놀기도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중독이 돼 있더라구요. 도시에 대한 것들이 묘한 것 같아요.

 

5. 만화로 세상 바꾸고 싶어

박> 신혜식 씨 기사 재밌더라구요.

봄> 그래요? 보수는 뭐고 진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청학동 할아버지들이 진정한 보수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박>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청학동 할아버지들이 나오셨는데,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 들더라구요. 수염 길게 기르신 분들이 남과 북이 통일해서 평화롭게 살면 되는 것이지 뭐가 복잡혀,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저걸 보수로 얘기해야 되나 생각 들더라구요. 보수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나쁜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도 좀 잘못된 거 같거든요. 오히려 갈라서 이득을 보는 게 누구인가 생각을 해보면 저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말장난에 불과한건 분명한거 같아요. 지금도 파병문제 같은 경우도 보혁 갈등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웃겨요. 이런 얘기에 이득을 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잘못된 거죠. 진보는 뭐고 보수는 뭐고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차이인데 그것이 포장된 거지.

봄> 에너지가 참 많으신 것 같아요. 현장미술 얘기를 좀 하면 제 친구가 삼월인가 집회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났다고 하더라구요. 인형하나 들고서 말이죠. 사실 졸업하고 특정한 조직에 몸담고 있지 않으면 내가 뜻을 같이 하고 시위 현장에 있고 싶어도 쉽지 않잖아요. 서 있을 깃발도 없고.

박> 3월1일에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또 한번 해방을 준비하자, 이런 의미에서 유관순 인형을 준비해서 나갔어요. 보니까 매주 토요일 마다 크게 집회를 하고 매일 촛불시위를 하고 있었잖아요. 계속 나가는데 나올 때 마다 조금씩 썰렁해 지는 거예요. 소품이나 이런 것들도 없어지고 기껏해야 플랜카드 정도 있고 재밌는 게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일주일에 하나씩 만들다 보니까 재미 붙어가지고 다음에 뭐, 다음에 뭐 생각하다가 태권브이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것도 만들게 됐어요.

효순이 미선이 인형 만들 때는 처음엔 나 혼자 할 생각했거든요. 대충 나 혼자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는 엄두가 안 났는데 조소과 선후배들이 와가지고 결국엔 어렵게 완성했어요. 이 인형들이 미대사관까지 갔죠.

봄> 앞으로의 또 그런 계획은요?

박> 계획은 계속 갖게 될 것 같아요.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계속 내올 생각이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는 대로 내와서 그것이 현실화 돼서 집회 판을 문화 판으로 계속 바꿔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조금이라도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하는 거예요.

외형적으로 봤을 때는 깃발 앞세우고 그러면 아직도 그런 거에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왜 아직도 저런 거 하냐? 뭐 이런 생각이요. 그런데 문화의 판으로 바라보게 되면 훨씬 더 그런 힘들이 더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파급력이나 메시지 전파력들이 좀 더 강하지 않을까 생각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방식을 생각하는 거죠. 내가 전체 판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의 한 일부분으로서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부분들을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내가 노래를 부를 수는 없으니까 구호나 이런 것 외칠 수 없으니까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참여를 하는 거죠.

균> 최병수 씨나 임옥상 씨처럼 전투적으로 작업하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박> 그분들은 통이 크시니까 그분들은 그렇게 하는 역할이 있고 전 좀 아기자기하게 재밌게 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태권브이 같은 경우도 태권브이 만들어서 악의 무리들을 무찌르는 발랄한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나오게 됐어요. 범대위 계신 분들도 저랑 비슷하더라구요. 되게 좋아하고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었죠. 그런데 허리가 부러져가지고 탱크위에 올려놓고 태권브이 손에다가 평화의 손수건을 매달아서 건네는 모습을 연출을 했었어요. 신문에도 사진이 나왔었는데 시각적인 매체는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군중들 모여 있고 피켓 드는 것 보다 훨씬 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워낙 많잖아요. 그 중에서 가장 관심 있게 주시하고 또 실천하게 되는 영역들이 있으세요? 모든 문제를 다 따라다닐 순 없으니까.

박> 최대한 자기가 외면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거죠. 미선이 효순이 같은 부분은 사실 그 전까진 활동에 대한 부분을 많이 벽을 두고 있었어요. 만화 작업만 하고 그랬는데 깨어나더라구요 사람이 방관을 못 하겠더라구요. 사람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분노 같은 거죠.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겼던 것 같고 또 지금 와서는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꿔가자 이런 생각으로 초점은 만화에 맞추는 거죠. 만화로서 세상을 바꾸어 내려고 하는 거죠.

균>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만화가 박건웅의 정치적인 입장, 지금 어디에 서있나 이런 질문을 하고 싶네요.

박> 정치적 입장이요?

인터뷰 막바지에 던진 돌발적인 질문에 그는 오랜 시간 침묵했다.

박> 어렵다. 정치얘기하면 어려워져요. 저는 처음보다 많이 편안해 졌어요. 예전에는 뭔가 이끌려 다니는 느낌도 많고 혼자만 하고 그런 거 많이 느꼈거든요. 그런데 요즘엔 그렇지 않은 느낌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일반 시민들 만나면서 아직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어요.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촛불을 시위 때 아이부터 해가지고 철물점 아저씨 여러 가지고 잡다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재밌어서 그런 건 아닐 것 같거든요. 생계도 있구요. 오히려 그들이 알고 시작하는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먼 것 같아요. 민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힘을 발휘하고 좀 더 다듬어지고 그러기에는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해요. 저의 정치적 입장은 그들과 함께 가는 거라고 생각 하거든요. 가고 싶다는 거고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정리를 했으면 해요. 노선이나 당이나 이런 건 정리가 잘 안되는 거 같구요.

박건웅에게 있어 사람들과 함께 간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정한 위력은 사람들로부터 무력감을 가져오게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허물고 방해하는 힘. 결국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는 무력감과 열패감은 일상에 안주하게 하고 현실참여로부터 도피를 조장한다. 그리고 시스템 속에 갈등 없이 흡수되어 버린다.

내가 만난 박건웅은 흡수되지 않은 이물질과 같았다. 그는 사람들의 힘을 또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고 그 힘의 근원은 분노였다. 박건웅의 힘은 분노를 참지 않고 그의 조형 언어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분노와 반역의 힘을 불러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매우 건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봄> 혼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박> 외롭죠. 개를 키웠었는데 지금은 집에 갔다 놔가지고요. 개를 다시 키울까

서른이 훌쩍 넘은 박건웅은 지금 혼자 살아서 외롭다고 했지만 진정 외로운 사람들은 분노하지 못하고 고독한 개인으로 남은 자들이 아닐까? 어쩌면 나/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한 순간의 분노 혹은 웃음일거라고,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 후 ‘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인 생각이군’ 하며 씨익 웃어본다. 왼쪽 입 꼬리만 살짝 올라간 나의 웃음의 의미를 나는 다시 찾아봐야겠다.

만화가 박건웅은 구멍이 많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구멍이 많다는 것을 질감으로 표현하자면 거친 느낌이고 색감으로 나타내자면 천연색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구멍이 많다는 것은 다른 기준으로 본다면 군더더기를 허용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연의 색감, 까슬까슬한 질감,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 그리고 이러한 느낌의 총체는 나에게 매우 가벼운 중량감으로 수렴되었다. 느낌이란 끊임없이 잊혀지고 변조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그를 기억하고 만나고 이 인터뷰를 쓰게까지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가벼워지길 꿈꾸는 사람이기에 박건웅이 부럽다.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않기를, 가벼워지길 나는 여기서 소망한다.

나는 이 글이 박건웅을 닮았으면 하는 재밌는 생각을 했다. 매끄럽지 않아서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벼워서 품기도 쉽고 날려 보내기도 쉽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