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강사 , 정효찬

들어가기 전에

 

인터뷰의 제목을 정하는 것이 고민이었다. (정효찬 선생님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자신의 이름보다는엽기강사로 더 알려져 있는 그와의 인터뷰 제목에엽기라는 타이틀을 뺀다면, ‘신바람을 뺀 이박사, ‘홈런왕을 뺀 이승엽처럼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버린 느낌이 들 것 같고, 그렇다고엽기라는 말을 쓰자니 상업적 언론의 황색저널리즘에 동참하는 것 같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가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맡고 있는 강의의 제목인유쾌한 이노베이션유쾌한을 따서, [유쾌한 강사, 정효찬]이라는 타이틀을 정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더 중요한 이유, 정효찬 선생님과의(이하 정효찬씨 혹은 그) 인터뷰가 너무 유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힌다
.
이번 인터뷰는 필자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필자를 포함한 학생 세 명(김창, 모험, 민정)이 함께 진행하였다. 처음에 정효찬씨는 덩치 큰 학생 세 명이 인터뷰를 하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적잖이 당황을 했지만, 이내 그의 특유의 유쾌함으로 인터뷰이들의 꼬장꼬장한 질문에 즐겁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시는 독자 분들은 이번 인터뷰가 시종 즐거운 분위기였음을 상상하며 글을 읽어주시라.(사실 우리는 즐거웠지만, 정효찬씨는 속으로뭐 이런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엽기라는 말의 의도

 

()> 아직도 엽기강사, 엽기강사 이런 말 들으세요?

> 대놓고 엽기 강사라고 부르시는 분들은 없고 신문이나 이런 매체 쪽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고, 근데 그런 질문을 받았었어요. 키팅선생이 좋냐? 엽기 강사가 좋냐? 키팅선생 이런 말은 너무 부담스럽고, 차라리 엽기라고 부르는 게 부담은 없다고 하니깐, 신문에 그 다음날나를 엽기로 불러 달라.” 이렇게 나오고 그러더라구요.

()> (웃음) 처음에는 원하지 않은 이름인데 붙게 되어버린 경우네요.

> 그렇죠. 원했던 것들은 없었죠.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정작 본인은 원하지도 않던 것이 본래 존재했던 것처럼 달라붙어서,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인 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 친구나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들은 귀엽기라도 하나, 대한민국 같이 닫혀있는 사회에서엽기라는 꼬리표는 불이익의 훈장이 된다. 사실엽기라는 말이 그 사회에 판을 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만큼 닫혀있다는 사후징후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엽기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정효찬 선생의 진면목이 드러나길 바라며, 진행되었다.

 

 

 

 

 

 

째즈처럼

 

()> 지금부터 자세한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 , 긴장되네요.(웃음)

()> (웃음) 요즘 학기 시작하고 어떠세요? 수업 잘 되고 있습니까?

> , 지금까지는. 지난주까지 추석이라서. 그 지난주에 오리엔테이션 했었고, 본격적인 수업은 오늘이 첫날이었습니다. 별 무리 없이 잘 끝났어요. 몸 상태가 지금 별로 안 좋아서, 아마 대구 내려가면 앓지 싶은데, 지금은 꾸역꾸역 버티고 있거든요.

()> ‘생기고 난 후, 지난 계절학기가 첫 수업이신 건가요?

> 아니요, 작년 1학기부터 수업하고 그러고 나서 계절학기 하고 지금 세 번째 학기죠.

여기서이라 함은 그를엽기강사로 만들어버린, 문제의 경북대학교 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인터넷에 유포된 후 한바탕 난리가 있었고, 이를 알게 된 경북대학교에서 그에게 다음학기 강의를 맡기지 않은, 그 일을 말한다. 경북대학교 기말고사 문제는 인터넷에 너무도 많이 깔려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인용하지 않는다.


(
)> 선생님이 이번에 쓰신 책을 읽어보았는데요, 처음부터 책을 쓸 생각을 하시고 있었던 겁니까?

> 그건 아니고요. 제가 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 저는 책 내는 거 참 싫어했었는데, 수업 좀 더 하고 내공이 더 쌓이면 그때쯤 하려고 했는데, 출판하시는 분들은 상업적으로 이용 할 수 있는 시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정말 많은 분들이 연락이 왔었는데 그 중에서 젤 억척스러운 분이 이가서 사장님이셨거든요. (웃음)

무조건 비행기표 끊어서 대구 오시고, 어떻게 할 수 없이 하여튼 몰려 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고요. 그 시작하게 되고 나서는 이왕 하는 거 잘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신경을 쓰긴 썼었죠.

()> 그럼 수업의 기억을 더듬어서 쓰신 거네요?

> 더듬는다기보다는 그 학생들의 자료는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가지고 이제 만들어 냈죠. 그 중에서 생각 안 나는 것 있으면 그 친구들 다시 찾아서 만들고.

()> 근데 책은 많이 나갔나요?(웃음)

> 그건 잘 모르겠어요. (웃음) 책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번 다기보다는 저한테 필요한 작업이기는 했었어요. 그걸 자료화시키는 게. 마침 기회가 그렇게 됐으니깐 뭐 언제 어디서든 꺼내 볼 수 있는 자료가 생긴 거죠. 평생에 언제 제가 책을 내겠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개인적으로 참 고맙죠. 그렇게 조르고 매달리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 가지고 어쨌든 일을 하게 되었으니깐. 그런 거 잘 못하거든요. 게을러서.


(
)> 선생님 수업의 특징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수업의 특징은 틀이 없는 것 같아요. 틀이 없이 그날그날째즈비슷하게 기본적인 것을 요소로 가지고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같은 수업에는 특히 재밌었던 게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되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시험 문제 풀이를 해줬거든요. 그러고선 학생들한테 물어봤죠.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을 어떻게 할거냐고, 답하고 이런 것들이 사람의 느낌이 다 다르니깐

()> 그게.. 경북대 기말고사 문제와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또 내셨나요?

> 그 이후에는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내지 않았었어요.

()> 제가 문제를 봤는데, 수업을 안 듣고는 상당히 풀기가 어려운 문제라서, 그 벼락공부하는 애들한테는 지장이 있지 않을까 했죠. 그러니까 저는 그런 수업이 두렵습니다.(웃음)

> 벼락공부하는 애들한테는 지장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고, 그리고 시험문제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못했었고.

()> 이런 문제를 내겠다고 애들한테 얘기를 안 하셨던 거예요?

> .

()> 학생들이 물어볼텐데요 시험 어떻게 나오냐고?

> 물어보죠. 그러니깐 수업했던 거 기억해서 오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객관식 50문제라고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시험은 40문제 밖에 못 냈어요. 머리가 아파서.

()> (웃음) , 그래서 맨 마지막 문제가내겠다?

> . 그게 넋두리였었고, 아무도 예상 못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비도 없었던 거고, 대신 자기에게 솔직해 져야 되는 거죠.

()> 그때는 그런 문제도 내셨잖아요.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점수를 적어라라는.

> , 양심점수를 했었는데 양심점수가 문제가 있었어요. 내 양심은 믿겠는데 남 양심은 못 믿겠다. 그렇게 의견들이 많이 나와서, 사실은 수업을 하고 시험을 보면서 그런 것들을 찾았으면 좋겠거든요. 학점 때문에 양심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험문제를 냈었는데, 또 생각 외로 양심의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서 계절학기 같은 경우에는 양심점수 퍼센테이지를 낮췄어요. 20점 만점을 양심 점수로 쓰던 것을 계절학기에는 5점만 줬거든요. 그러니깐 좀더 양심적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크게 좌우 안 하니까 양심적이 됐나봐요.

()> 그럼 1학기 때는 양심점수 그대로 주신 건가요?

> 1학기 때는 그렇게 했었죠. 그것은 약속 이였으니깐.

()> 자기가 생각하는 점수랑 객관적으로 봤을 때의 점수랑 다른가요?

> 그게 다르다는 이야기가, 희망점수가 있고, 객관적인 점수가 있고, 그 다음에 양심점수가 있어서 그걸 써내라고 했는데, 다 틀렸었거든요. 스스로가 다 느끼고 있어요. 있으면서도 선뜻 점수를 막상 내야 되는 양심점수에서는 차라리 양심을 조금 버리고 학점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 제가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웃음)

> 그런데 안 그러는 학생이 있어요. 어떤 학생이냐면 계절학기 했는데, 시험을 치고 25점 중에서 5점을 양심점수로 쓰라고 이야기했는데, 이 학생이 뭐라고 썼냐면, ‘나는 점수가 필요 없기 때문에, 나머지 5점을 조원들에게 1점씩 주라고 이야기를 한 학생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거든요. 혹시라도 오기(?)나 그런 것 때문에 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마음을 바꿔도 괜찮으니깐 이야기를 해달라고. 근데 그 친구가 사회생활 하다가 학교에 왔대요. 그래서 자기는 학점 따고 이런 게 목표가 아니라 수업을 듣고 싶고 이런 것들 때문에 수업을 했었고, 같이 고생했던 조원들에게 1점씩 주고 싶다고, 그래서 마음은 참 고맙게 받고요 해달라는 대로 해줬어요. 그래서 그 친구는 C를 받게 되었고 나머지 친구들은 A를 받았을 거예요.

()> 제가 마지막 질문으로 준비한 게학생을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에요.

> , 그거는 믿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설령 제가 학생들을 이용하고 사기를 치고 반대로 제가 뭐 이용 되 먹더라도 그건 한 두 명이잖아요.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고, 일단 먼저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믿어 줘야지 나머지 사람들이 믿고 따라오는 거고, 제가 계속 의심을 하면 서로가 못 믿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번 학기에 학점 평가단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평가단들이 학생들의 발표를 보고 점수를 내는 거였거든요. 그러니깐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제가 뭐를 유도를 하나면 강사의 성향을 파악하지 않도록. 제가 어떤 발표 주제를 주게 되면 그 선생의 성향에 맞춰서 가게 되잖아요. 근데 그거는 정말 진정한 자율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차라리 저는 빠지는 거죠. 그렇게 맡겨놓고. 저도 같이 보면서 점수를 매기기는 하지만 그것은 들어가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해서 학생 평가단을 만들었었고, 평가단이 12명인데 젤 최고점과 최하점을 빼요. 10개를 가지고 평균을 내는데 이건 미스코리아 점수 낼 때 (웃음) 이렇게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는데 만약 우리 중에서 이 친구가 학점 평가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조 발표할 때 친구니깐 부탁할 수도 있고, 친구니깐 잘 봐 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도입된 게 뭐냐면 마피아 게임이였어요. 그러니깐 나머지 학생들은 평가단 학생들을 찾아내야 되는거고요, 평가단 학생들은 들키면 안 되는 거구요.

()> 진짜 재밌겠다.

> , 재밌었어요. 보통 학생들은 와 가지고 당당하게저 메일 주소가 어떻게 되죠?” 물어보고 그러는데, 평가단 학생들은 지나가면서 (고개를 딴 쪽으로 돌리고) “저 메일주소가 어떻게 되죠?” (웃음) 그럼뭐라고요?” 라고 물으면 또 한쪽으로 다시 돌려서저 평가단이거든요.” 라고. 그냥 이야기하면 의심받을까봐, 재미는 있었는데, 그게 불신사회를 조장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계절학기 할 때는 그거 하지 않았었어요. 그냥 다 같이 점수를 매기는 걸로, 만약 1조가 발표하면 나머지 조에서 점수를 내서 그 점수를 저에게 주면 그 점수 평균을 내서 점수를 냈었죠.

()> 학생들이 점수에 불만을 가지고 점수를 정정해달라는 사람들은 없었나요?

> 있었죠. 있었고, 메일이 와요. A+받은 사람 아니고는 다 점수에 불만이 있어요. 이거는 결국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야 되는 건데, 그런 학생들의 불만이 들어오면 전화를 해요. “이렇게 해서 점수가 이렇게 나갔다. 학생들이 준 점수는 이렇고 중간고사는 기말고사는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다 수긍을 하거든요. 그래도 막 매달리는 친구들이 있어요. 졸업 앞두고 뭐. 근데 그렇게 야박하게 짤라내는 건 힘들잖아요. 또 구제할 방법을 찾아내 보기는 하죠. 근데 찾기는 힘들어요.

()> 출석체크는 매일 하세요?

> 아니요. 매일 하지는 않아요. 전자출결 시스템이 있는데요. 그 시스템을 할거냐고 물어보시길래 하면 편할 것 같은데 좀 비인간적인 느낌도 좀 있고, 카드만 갖다 대면되는 거잖아요. 수업이 정말 재밌고 유익하면 누구든지 와서 들을 것이고, 근데 이 수업이 의미가 없으면 차라리 그 수업 대신 딴걸 하는 게 가치가 있지 않겠나. 근데 말은 이렇게 하지 마음은 굉장히 조마조마 (웃음) 한꺼번에 다 빠지면 어쩌지 그러고. (웃음) 출석은 어쩌다 한번씩 부르죠. 시간이 좀 남거나 할 때 부르는데 출석 자체도 어쩌다 한번씩 누가 안 오면 참 반가워요. 점수를 깔 수 있겠다 이런 생각 때문에. (웃음)

보통꼰대라는 호칭(?)은 학생 혹은 젊은이들이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갖다 붙이는 말이다. 그러나 인터뷰 도중 나는 내가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학생들을 어떻게 무작정 믿을 수 있느냐 하는 의심에 대한 답변과 강사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학생평가단의 구성 등 상하수직관계가 더 어울리는 선생과 제자의 사이에 무한한 자율성을 주기 위한 정효찬씨의 노력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자율성평등성을 위한 노력들이 하나의 잣대 아래서망나니짓으로 매도되곤 한다. 째즈를 연주하듯이 수업에 임하는 선생님, 너무 괜찮지 않은가?

창조되는 수업

 

()> 지금 3학기 째 가르치시면 노하우 같은 게 붙으셨겠어요?

> 노하우? 글쎄아직까지 노하우는 잘 모르겠고요. 1학기 때는 정말 많이 떨었었거든요. 왜냐면 이번 학기를 잘 끝내야 다시 보따리 싸 가지고 내려가는 일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고, 어떻게 보면 명예회복 이런 차원도 있었었고, 좀 많이 떨었어요. 긴장도 많이 했었고. 근데 계절학기하면서 긴장은 많이 풀었는데, 노하우는 아니고 이제 똑같은 수업을 두 번 하니깐, 어제 했던 이야기를 오늘 또 하니깐 딴 사람들은 모르는데 저는 혼자 뻘쭘해요. 어제 했던 건 데 또 하면서 재미도 없고 그런건데, 반응은 똑같이 나오고 하니깐 그것이 참 신기하다 하고 (웃음) 그런게 좀 있었는데, 될 수 있으면 좀 비우려고 노력을 해요. 몇 가지지 이야기할 요소들만 가지고 들어가서, 나머지 부분들은 거기서 생성이 되는 거죠. 결국 함흥차사처럼 딴 길로 새다가 몇 가지 가져 간 것도 다 못하고 나올 때도 있거든요. 어떻게든 그렇게 서로 얘기하고 대화해서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한 부분들인 것 같아요.

정효찬씨는 경북대학교에서 미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였다. 미술사 관련 수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미술사 관련 수업은 슬라이더를 보면서 이건 누구의 그림이고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쩌고 저쩌고로 수업이 진행된다. 물론 이런 수업 역시 나름대로의 장점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창조고 생산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수업을 하면서생성을 자연스럽게 유도 하다면, ‘미술의 이해라는 과목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달성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수업에서 중요한 게 100명이나 되니깐 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에 몰려요. 몰려 있으면 소외감 같은 것도 크고 그 소외감에서 점수차이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 그게 아직까지는 학생들이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자유로운 토론 이런 게 좀 불편해 해요. 질문을 하거나 그러면 어려워하고, 제일 많이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어떤 질문을 하면 한참 생각을 해요.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나오는 답이 상투적인 답들이 나오거든요. 왜 그런가 생각을 하면 질문을 받았을 때 첫 번째 드는 생각이 저 선생이 원하는 답이 뭘까라고 찾기 위한 생각을 하고 두 번째로는 내가 이런 대답을 했을 때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굉장히 소극적이 되요.
그래서 사랑이 뭐냐고 질문하면 한참 이야기 하다가 나오는 게항상 곁에 있어주는 것이 정도 답? 근데 이런 것들을 익명으로 써서 내라고 하면 정말 다양한 답이 나와요. 정말 섬뜩한 답도 나오고, 다만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소극적인데, 학생들이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사회에 나가서는 조심해야되고 그렇게 해야될 부분들이 많은데, 아직은 배우는 단계이고 막 이야기를 하고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고쳐서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
정답만 가지고 다 같이 앉아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해서 대화를 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렇게 토론의 장이 열리는 건 아니에요. 아니고 제가 몇 가지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을 시키려고 노력을 하죠. 그러고 나서 발표를 시작하면 발표에 대한 이야기를 조별로 이야기를 나눠요. 거기서 이제 그들의 공동된 의견들을 모아 보고요.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다 보면 학기 끝날 때쯤 되면 굉장히 분위기가 좋아지죠.

()> 전 상당히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일단 할 만 해 질 때 수업이 다 끝나버리잖아요.

> 그렇죠. 지난 1학기 때는 수강인원이 110명이였거든요. 계절학기가 재밌었던 게, 매일매일 학생들을 만나고, 또 수강인원이 한 70명 정도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한눈에 다 들어와요. 어떤 친구가 안 왔고, 그 다음날 초췌(?)한 모습으로 오면 전날 술마셨구나. 이런 감정이 왔다갔다하는데, 사실 1학기 때는 그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110명이 넘으니깐. 정말 원하는 수업은 70명정도 80명정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는데,

()> 저 같은 경우엔 학교가 작아서 전공 필수가 아닌 경우에는 많아야 뭐 10, 7, 많으면 25명에서 30명 정도 되는데, 그렇게 학생수가 작을 경우엔 수업을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 대학 다닐 때는 그런 수업을 받은 적이 없죠.

()> 근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셨어요?

> 그런 수업이 어디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서 본적은 있었어요.

()> 어디서요?

> 다른 대학교였었는데, 영남대학교에연극이해라는 수업이 있었어요. 거기 선생님이 이런 식으로 수업을 한다고 했어요. 연극이나 영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데, 모든 학생들이 관객의 위치에서 어떻게 해야될지를 배우는 거고, 그 다음에 연극이나 영화를 만드는 학생들은 연극할 때 필요한 대본도 만들게 되고, 스탭도 필요하게 되고 어느 것이 필요한지를 스스로가 알아 나가게 되는 거죠. 그 선생님 수업 이전에는 연극의 역사라던가 이렇게 영화의 그런 거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그 선생님이 그 수업을 다 바꿔놨다고 들었어요.
그 선생님하고 되게 친해졌어요. 그 수업을 청강을 하고, 제가미술의 이해수업을 맞게되면서 그 선생님을 찾아가고, 그렇게 이 수업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는데,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게 하면 아마 짤릴거다.” 그 선생님도 짤렸어요. 짤린 이유가 뭐냐면 공대 쪽 학생들이 그 수업 때문에 전공을 등한시한다는 이유로 압력이 와서 밀려났다고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조금은 씁쓸한 게, 뭐 공대나 그런 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공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건 맞아요. 근데, 그것만 가지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문화하고 섞여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지금 세계적인 수학경시대회 같은데 나가면 정말 점수를 잘 받아오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 외국사람들의 마인드를 못 따라가는 것들이 그 사람들은 노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전공을 섞어 나가기 때문에 굉장히 그런 시너지가 큰 게 나올 수가 있는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계산밖에 안되잖아요. 그것을 응용하기엔 너무 머리가 굳어져 버리잖아요. 그런 것들이 문화랑 섞이면 굉장히 잘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정효찬씨는 자신이 찾아가 청강도 하고, 수업방식에 대해 자문도 구했던, 그 연극의 이해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자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알려져 수업을 다시 맡았지만, 그 선생님은 현재 수업을 맡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 나는, 언론이 그에게 붙여준엽기라는 꼬리표가 양날의 칼처럼 느껴졌다. 시끄러운 세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일은 득도 있고 해도 있는 것인가? 어쨌거나, 그는 지금 강의를 맡고 있고, 그 연극의 이해 선생님은 강의를 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과 관련된(자신의 유명세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었음을 그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했다.(이와 관련된 것은 밑에 나온다) 그는 교양과목이 전공과목에 밀려서, 즉 먹고살기 위해 들어야 하는 수업에 학생들이 집중하다 보니, 교양수업이 갈수록 뒷전이 되는 현실을 씁쓸해했다. 아마 이것은 요즘 문제시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문학의 위기와 동시에 이공계의 위기도 함께 거론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학교육,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교육 전체가 위기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들어야 하는 수업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위기의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 신기한 게 경북지역이 보수적인 색깔이 많이 강하잖아요?

> 대구가 특히 많이 그렇죠.

()> 경북대학교 수업 처음에 시작할 때 반응이 뭐 안티라고 해야되나 그런 반응들은 없었나요?

>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가진 성향이 보수적이더라도 한번쯤 뒤집어 볼 수 있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젊은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만약에 노인 대학에 가서 이런 수업을 하려면 힘들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에 대해 그 사람들이 많이 시도를 하고 연구를 하고.

()> 그런데, 수업 끝나고 압력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들어오던가요?

> 1학기때 수업은 압력이 없었어요. 일개 강사 하나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본관에서는 체크할 필요가 없고 그런 보고가 들어가지도 않았었는데, 2학기 때는 문제가 컸던 게 기말고사죠. 1학기 때는 그 문제가 없었고요. 학생들 발표하는 것하고 기말고사는백설공주를 죽이시요같은 그런 류의 시험을 쳤었구요. 근데 학생들이 불만이 들어 왔는 게, 학점에 대해서 형평성이라던가 변별력이 약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들어왔었어요. 정말 조를 잘 만나 가지고 점수 받는 애들 있고,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조원들이 안 따라와서 잘 못했다, 이런거 좀 고쳐줘야 되지 않겠냐,라고 해서 거기에 대한 보완점으로 구상했던 게 작년의 기말고사 였었죠.
그 시험을 치면서 최소한 수업시간에 도망쳤던 학생들은 제가 찾아낼 수 있는 거고, 그리고 또 시험이 가져야 될 원래 목적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학점을 주기 위한 거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생각했던 시험은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이 좀더 알아가길 바라거든요. 사실 수업이 지나가고 시험을 치면 그 수업을 다 잊어버렸던 게 제 경험이었기 때문에. 시험 칠 때 총정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수업 때 있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험을 치면! 그래 이런 일이 있었지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서 나가지 않을까, 해서 냈는데 그게 인터넷에 나가면서 이게 난리가 났었던 거죠
.
무슨 이런 시험이 있냐 이렇게 해서 모니터를 하시는 분들이 그걸 체크해 내시고 그랬죠. 그 압력이라는 게 굉장했었죠. 굉장해도 제가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었던 게 뭐냐면 제가 만약에 교수였거나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으면 그렇게 속편하게 나가기 힘들었을 거예요. 한번 매달려 보거나 다시 해보겠다고 해보거나, 이렇게 비굴하게 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긴 해봤는데, 그때 당시에는 어차피 강사로 해서 먹고 살수 있던 거는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따로 해야되었고 하였으니까, 뭐 쉽게 충격 같은 거 받지 않고 나가라 그러면 나갈 수 있었으니깐. 그래서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나 이런 생각들을 하죠.

()> 거기서 다음학기부터 강의를 폐쇄시킨거죠?

> , 강의를 안주는 거죠. 시간강사라는 게 그래요. 다음학기에 계약을 하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음학기에 시간표가 없으면 그걸로끝인 거구나라고 생각을 해야되는 게 그 생활이니깐. 원래는 한 3년쯤 하겠지 (웃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날 나오면서생각보다 참 일찍 끝났네그랬었죠.

()> 아버님이 경북대 교수님 아니신가요?

>

()> 별일 없으셨나요?

> 아버지가 처음에는 상처를 많이 입으셨겠죠. 왜냐면 경북대는 예술대학교가 있거든요. 예술대학교 안에 음악과, 미술과, 국악과 이렇게 있어요. 같은 예술대 선생님들이잖아요. 당신 아들 이야기이기 때문에 뭐라고 얘길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 모든 사람들이 이건 잘못됐다고 이야기를 하니깐, 얘기 들었다고 그러시면서 근데 그래도 믿고 있으니깐 걱정 안 한다고 이야기는 해주셨지만 근데 그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래도 참 많이 고맙게 생각을 하고, 그 모든 게 한양대 오게 되면서 다 회복이 됐었죠.

()> 어릴 때에는 아버님의 영향이 되게 크셨겠네요? 아버지의 교육이 자유로운 쪽이었나요?

> 그렇게 자유로웠나? 어머니 아버지 역할이 그랬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쪼면 아버지가 좀 풀어주고 그런게 조화가 이루어 졌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어긋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크리스챤인데 독특한 크리스찬인데, 어머니나 아버지는 독실하신 분들이고 그렇게 생활하시는 거 보면서 그렇게 많이 어긋나지 않으면서 중심을 잡고 왔던 것 같아요.

()> 어린 시절부터 지금처럼 성격이 그렇게 낙천적이셨나요?

> 성격은 원래 낙천적이에요. 그래서 생활능력이 좀 떨어져요. 막 어떻게 살아야지 이런 걱정도 좀 해야지 바락바락 살고 그러는데, 살도 절대 빠지는 일 없고, 처음으로 그 인터넷에 올라간 이후에 7kg빠졌어요. ‘와 사람이 고민하니깐 살이 빠지네.’ 그 생각이 막 들었었고, 그래도 고민 안 하는게 낫겠다라는 생각 들었고 일주일만에 빠진 거 2-3일만에 다시 부족함 없이 다 채워지더라구요.

()> 학생이었을 때 기억에 남는 선생님 계신가요?

> 고등학교때 선생님 두 분이 있는데, 그때 한참 참교육 뭐 이렇게 전교조 이렇게 만들어 졌을 때. 그때가 87년도쯤이였는 데, 국어 선생님이 여자선생님인데, 그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막 우셨어요. 우린 수업 안하고 우니깐 수업 안 한거는 좋은데 저 선생님이 왜 우나. 선생님이 한참 우시다가 말씀하시는 게,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끼리 다툼이 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가 최루탄에 맞아서 죽었어요. 이한열인가? 하여튼 그런 사건이 있어 가지고 교무실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많은 선생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대학가서 데모 짓이나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나봐요. 그러다가 잘 맞아죽었다. 이렇게 나온 거죠. 그 선생님이 그 선생님들한테 이야기를 한 거죠. 그게 어떻게 잘 맞아 죽은 거냐.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한 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대다수 많은 선생님들이 지금 누구 편 들고있냐 해서 그 선생님을 공격을 했던 거죠. 수업시간이 되어서 교실에 들어왔지만 울먹이면서 하는 말이 니네는 커서 그러지 말라고. 그때는 뭘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교무실에서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웃음) 수업시간에 울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그렇게 앉아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죠. 얼마 안돼서 그 선생님 나가셨어요. 거리에서 막 전단 나눠졌던 거 본가 기억나고 그 다음에 전부다 잡혔다 라고 TV에서 한번 본적 있었고.

()> 그게 영향이 있었어요?

> 저도 세월이 지나서 그게 영향이 있었구나

()> 어떤 식의 영향이요?

> 나는 커서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라는 생각.

()> 기억에 남는 학생도 있으세요?

> 네 학생들 많이 있어요. 1학기 때에도(경북대학교 시절) 이런 수업을 했었는데, 그때도 괴짜스러운 친구들이 있었어요. 첫 발표를 하는데 라면 끓이는 친구들처럼 설치하고 패션쇼 같은 것도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때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요란법석이 되지 않았었는데, 2학기 하면서는 김봉진이란 학생 같은 경우엔 기억에 많이 남고, 시험문제에 있는 학생이에요.

()> 그 미술관에 몇 번 갔냐.

()> 몇 번 갔어요?

> 그 친구는 한 번 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여자 친구는 한번도 안 갔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양다리 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 (웃음)

()> 그럼 그 문제는 맞은 사람이 없겠네요?

> 그 친구가 수업 때 한번쯤 갔다고 했으니깐 한번 간 것도 맞고, 여자친구는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그거 아는 친구들은 아니라고 답했을 거니깐 안간 것도 맞고 그래서 답이 두개였어요. 1번이랑 3. 그런 학생도 기억이 나고, 시험 문제 인터넷에 올린 학생도 기억에 남고, 지금도 연락하고. 그 시험문제를 올렸던 학생은 2학년인가 3학년이었는데 다시 시험처서 수의학과로 가서 다시 1학년 하고있어요. 제가 돌아오면 그 수업 다시 듣겠다고. 또 인터넷 올리려고 (웃음)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 한양대에선 수업을 맡기면서 뭐라고 했나요?

> 메시지가 와 있었어요. 수업을 개설하고 싶다고 연락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말 기분이 나빴어요. 그러니깐 안 그래도 마음이 심난한데 이런 장난전화를 하나 (웃음) 그때는 믿어지지 않았었죠. 나중에 다시 연락이 오셨고 진짜로 하는 거구나 라고 알았죠. ‘내가 쓰일 곳이 있구나, 어떤 곳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가야 되지만 어디 들어가면 쓰일 수가 있구나.’ 라는 이런 생각들을 했었죠. 정말 큰 힘이 됐죠. 그 때 쯤 되서는 인터넷의 의견들도 막 뒤집어 지고 있었거든요.

()>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점에 많이 얽매여 있는 것 같은데, 중간고사 기간에 휴강했었던 것도 그렇고, 근데 학점에 얽매이는 학교 말고 다른 공간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싶은 적은 있어요?

>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애들하고. (웃음) 애들이 기어 올라와요.

()> (웃음) 가르치신 적이 있었어요?

> .

()> 근데 조소과 나오셨잖아요. 그럼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시는 거예요?

> 그거 하고싶은데요. 근데 지금 일 터지고 서울 올라 왔다 갔다 하면서는 제가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아까 말했듯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어요. 서울에 사는 건지 대구에 사는 건지 뭔가 꾸준히 앉아서 생각을 하고 들어갈 수 있는 여유들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다시 하긴 할거예요. 근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고 일단은 저에게 주어진 일이 한양대 수업을 완성시키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창의력에 관련된 수업이고 그 창의력에 가기 위해서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학생들하고 같이 실험을 하고 있는 거구요. 그게 그 수업이 완성이 되어서 더 이상 할게 없으면 그만둬야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해요. 매너리즘에 빠지면 그만둬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게 지난 학기나 이번 학기나 똑같다면 무의미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책으로 보는 게 좋지 굳이 여기 와서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 대구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서울만 해도 많은 실험들을 할 수 있고, 현대 미술 쪽을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제가 제.. 뭐 조각을 하면 구상도 있고 비구상도 있잖아요. 구상 쪽에서는 사람들을 만들고 그런 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가진 제 주의의 한계가 있고, 그러면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되고 그런 게 있는데, 그런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상당히 많이 겁이 났었고, 그런 것들이 무서웠거든요. 근데 이렇게 한번 찍히고 나서는 뭐든지 해봐도 안되겠나라는 생각이 들죠.

대신에 겁이 나는 것은 정말 완성도 있는 것들을 내놔야 되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학생들이 하는 거랑 똑같은 마음이죠. 뭐든지 해도 되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 되니깐.


매스컴의 집중을 받으면서 참 재밌었던 것 중에 하나가 나를 모르던 사람들이 나를 찾는 거에요. 미술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해서 이름이 나게 하고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그냥 다른 사건들 때문에 북적북적 하니깐 뭐 화랑에서도 연락이 오고요, 개인전을 열어보자. 근데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래서 연락을 피했었죠. 그런 부분들이 참 재밌어요
.


그러니깐 조선일보 같은 경우에도 신랄하게 비판들이 두 번 올라 왔었고, 그러다가 세 번째쯤에서야 이제 한양대 선생님이 됐다고 나오고, 네 번째는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그것도 언론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나가는가. 처음에 엽기라고 했다가, 조선일보에서 기억나는 게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준 부모들은 얼마나 억울할까라고 글이 나왔다가 세 번째에선괜찮게 나오네그러다가 네 번째에선 히딩크도 옆에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보다 더 크게 나왔어. (웃음) 정말 재밌는 그런 경우도 있었죠.

()> 퍼슨웹에서는 인터뷰 안 자르거든요. 있는 그대로 올려도 상관없죠?

> 뭐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으니깐 상관이 없죠.

이 인터뷰와 크게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지는 정효찬씨의 예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몇몇 신문의 신문구독률이 높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효찬씨에게는 다행이지만, 매스미디어는 점점 감당하지 못 할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매스미디어로 인해, 사회에 해가 되는 존재였다가 또 반대로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의 순간적 변태(?)가 가능한 세상이라니. 그 막강한 힘이 선정성과 상업성을 위해 사회적 의무와 책임감을 멀리한다면, 진실로 지옥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매스미디어의 표적이라면 말이다.

정효찬씨는 자신이 출제한 시험문제로 인해 인터넷 게시판에 난리가 났을 때, 몇 일을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며, 자신이 어떻게 대처를 해야되는 지를 고민했었다고 한다.

 

 

 

 

 

 

 

학문에서의 즐거움 찾기

 

()> 수업이 일단 재미 위주로 흐른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대학도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잖아요. 그 학문과 재미하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게 저는 학문을 습득하는 사람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배우는 게 즐거워야 되는 거에요. 배우는 게 즐거워지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으라고 공부해라 그래도 공부 안 해요. 근데 내가 공부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게 재밌을 때가 있고. 수학문제를 풀다가 막 풀리는 게 신기하고 재밌으니깐 막 푼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잠깐이었지만 (웃음) 만약에 다른 선생님들이 와서 이거 풀라고 하면 안 풀고. 정말 재미있는 수업이고, 배우는 게 즐겁다 그러면 강요할 필요 없이 스스로가 공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제가 그래도 이런걸 감행 할 수 있었던 이유가문화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뭐 암기가 필요하거나 그런 경우엔 기본적인걸 외워야 되고 그런걸 해 놓고 나서 들어야 되는 게 맞지만 문화는 느껴야 되는 거잖아요. 체험을 해야되는 거기 때문에 더 이게, 작년의 <미술의 이해> 같은 경우에는 미술을 다 이해시킬 수 없죠. 제가 다 이해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다 이해시켜요.

()> 그게 일반과목 아니면 미술 하던 학생들이였어요?

> 아니요. 일반과목이였어요. 그런 강좌가 7개쯤 됐었어요. 그 학생들에게 해주고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이제 미술을 입문시켜 주는 거죠. 뭐 대학 4년 동안 한가지만 해도 다 못 공부하는 건데, 그 한 학기 동안 다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일단 미술에 이렇게 재밌는 부분이 있다. 미술이 학문이 아니라 느끼는 거고 즐기는 거라는 걸 알려주는 거고, 그 학생들 중에 그걸 정말 좋아하는 학생들이 생길 거구요. 그 학생들이 매니아가 될 것이고, 그 학생들이 공부하러 들어갈 것이에요. 그게 옳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굳이 끌고 들어가서 이것까지 외워야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손잡고 다 같이 입구까지 가서 이런 재밌는 게 있으니깐 가고싶은 사람은 가라고, 그러니깐 저는 입문의 단계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했었고, 그렇게 수업을 했었던거죠.

()> 그 수업들은 친구가 있어서 그러는데, 걔가 하는 이야기가 수업이 매우 재밌는데, 남들이 하는 것은 재밌는데, 자기가 하려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거예요. 웃기게 해야된다는 게 있으니깐, 그런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것도 제가 풀어야 될 숙제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강사의 성향이 개입이 안됨으로서 학생들한테 진정한 자율이 주어 졌었을 때, 그 다음에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학점을 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이 대중적인 것을 생각하는거예요. 가장 대중적인 것들은 학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코메디를 하려고 노력을 해요.
그게 아니라 원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들인데, 정말 웃겨야 된다는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데,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그냥 예를 들면사랑의 실천이란 것들을 주제로 갖고 온 애들이 있었어요. 한양대가 교훈이사랑의 실천이죠? (웃음) 그게 있는데 그 친구들이 그걸 약간 바꿔서상식의 실천이란 주제를 가지고 왔어요. 이제 이 친구들이 어떤걸 할까 보고있었는데, 그 친구들의 상식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상식을 실천하고 온 거예요. 그 라파엘의 집이라고, 그 집에 지체 부자유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3일간 봉사활동을 하고 온 거예요. 그거를 영상으로 기록을 해서 틀어줬고, 그거는 누구도 웃지 않았거든요. 그건 그대로 상식을 실천한 거예요. 교훈을 뭐 모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요. 그것조차 실천을 안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모험이 차를 따랐다. 대화가 길어진 틈마다 정효찬씨는 썰렁하다면 썰렁할 말들로 분위기의 빈곳을 채워주었다.

> 이게 얼그레이?

()> .

> 색깔이 빨그레이. (웃음)

()> (웃음) 죄송합니다… (웃음)


이런 분위기는 인터뷰 도중 여러번 있었는데, 세 사람의 인터뷰어가 부산을 떨고 그걸 유쾌하기 넘겨주는 정효찬씨는 퍼슨웹 사람들은 재밌다는 감탄사를 발하곤 했었다.

> 제가 미술을 했을 때 가장 걸렸던 부분이 뭐냐면, 그냥 미술행위가 좋았어요. 원래 만화를 좋아했었는데, 조소를 보고저게 재밌겠다하고 뛰어 들었던 게 그거였으니깐. 그 행위 자체가 좋은 거지. 내가하고 있던 어떤차라리 음악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음악을 좋아하면 음악을 미술로 표현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데 표현할 수단이 없는 거예요. 테크닉으로는 저 사람을 따라잡을 수도 있고 누구보다 더 월등할 수 있겠지만 테크닉이 미술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차라리 사진을 찍죠. 왜 미술을 하나요?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 제 친구도 예대를 다니고 있는데, 입시학원을 다니지 않고 수능 몇 달 전에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찾아서 그 학교엔비실기 전형이 있어서 실기를 안 보고 예대엘 들어갔어요. 그 아이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비실기로 들어갔으니깐. 근데 오히려 드로잉 수업 때는 칭찬을 더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실기공부 하고 온 애들은 다 비슷하게 그리고 하니깐.

> 그렇죠, 입시 하는 아이가 봤을 땐 그 선이 엉망진창이겠지만, 제가 하는 수업도 무지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대학생활이 사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을 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웃음) 아버지가 교수님으로 있었잖아요. 그래서 일정 수준만 넘으면 학비를 안내도 됐었거든요. 그 정도만 하고 수업은 중요하지 않았었고, 뛰어 노는 거 정말 좋아했어요. 수업도 이런 거 많지는 않았었지만 작업복 입고 뒹굴고 그런 거 좋아했었어요. 작업시간에 뒹굴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대출하고, 출석 부르고 나가고, 어떤 선생님은 나가라고 그랬었어요. 지저분하다고 (웃음) 그럼 고맙다고 그러면서 나가고 (웃음) 얘들은 쫓겨났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아니었었고. 제가 <미술의 이해>도 어떻게 들었을까 막 더듬어 보니깐 잘 기억이 안나요. 기억에 남는 건 슬라이드 보고, 거기에서 이야기 한 거 기억이 남고, 저도 수업을 그렇게 준비했었고요. 그러다가 이제 아까 그 영대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데 그 선생님이 자기가 미술관 가서 액션페인팅을 보고는 정말 감동을 많이 받았었데요. 그 키가 이만한 거, 그게 무슨 감동인지 난 느껴보지도 못한걸 그 사람은 감동으로 느꼈다고 그러니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을 어떻게 가르쳐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고, 바꿔서 그렇게 수업을 했었어요. <미술의 이해>를 가르치려면 미술관 가서 거기에서 이야기 해야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기 힘들어요. 적은 사람이면 어디서 모여서 가자 그럴텐데. 120명이니까 그건 불가능 하니까, 미술가가 스스로 되는 거예요. 미술가가 되어서 미술가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거죠.

()> 근데 그 수업이 거의 설치예술이라던가 개념미술로 되는 것 같던데요?(웃음)

> , 애들이 좀 많이 설쳤었죠. (웃음) 왜냐면 이런 쪽 미술 같은 경우 힘이 들지만 그런 미술도 있더라. 지금 현대 미술도 거의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데, 가고 있어도 잘 모르겠거든요. 비엔날레 가보셨어요? 광주비엔날레 가도 저도 모르겠어요. 이걸 왜 해놓고, 내가 왜 비싼 돈 들여 여기까지 왔나 그러면서 내가 해야될 부분은 뭐냐면 같이 간 사람들한테 난 미술 학도니깐 아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아~그러면서 아는 척을 해요. (웃음) 이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왜 아는 척을 해야될까 그런게 스스로 막 걸리거든요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지만. 그런 것들에서는 좀 솔직해야되지 않을까. 사실 어렵긴 많이 어려워요, 현대미술이. 근데 현대미술이 베니스 비엔날레 그런 거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런 말도 해요. 현대미술이 참 많이 어려운데 그 중에 한 두개만 자기 마음에 와 닿으면 그게 성공하는 거라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거니깐. 근데 무슨 이야길 하다가 지금아아. 설치나 개념. 이런 쪽으로도 뭐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온 학생들도 있었어요.

()> 화투를 그려왔죠?(웃음)

> 화투도 그려왔고, 그래피티 같은 경우에는 합판에다가 그래피티 해 가지고 들고 와 가지고 이런 게 있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지루한 수업을 이겨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다시 강의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로에게필요한 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열정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소통 없는 수업은 지루한 수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두는소통이고, 그 방법은흥미롭게도흥미이다. 학문하는 즐거움은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흥미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라고 단정짓기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남지만, 이것은 대세다. ‘흥미가 없는 수업을 어찌 견뎌낸단 말인가. 흥미와 학문은 사전에서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목욕타일, 애니메이션 그리고 자유

 

()> 유쾌한 이노베이션이란 제목은 직접 지으신 건가요?

> 아니요. 제가 정한 건 아니고요. 그때 한참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겨울 방학 때 모든 걸 털어 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있었는데 그게 목욕탕 타일 붙이는 거였어요. 하고 있는데 그때 한참 콜타르를 섞고 있었을 거예요. 그거 다 하고 이제 마르기 전에 붙여야 되는데 전화가 왔어요. 여기에 대고, 그러고선, 수업제목을 뭘로 정할꺼냐고 하길래 그때 정신이 있나요? “뭘로 정할까요?” 그러니깐 “<유쾌한 이노베이션> 어떨까요?” 그래요. 그래서! 그거 괜찮네요.” 라고 대답은 했지만 머리 속에선이노베이션이 뭐지?’ 그 뜻을 몰랐었어요. 그래도 선생이라고 모셔놨는데 모른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서 괜찮다고 했지만 저녁에 집에 와서 찾아봤죠. ‘개혁, 혁신이런 단어더라구요. 그때서야 괜찮네.. 그러고.

()> 근데 시간강사 연락이 안 왔었으면요?

> 안 왔으면 계속 타일 붙이고 있었겠지요.

()> 근데 강사라는 직업이 상당히 외나무다리에 서있는 직업이라고

> 많은 사람들이 핑크 빛, 교수가 되면 고생 끝난다라고 생각하는데 얼마나 경쟁률이 치열하고 또 날고 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 자체만 가지고 생활하는 것도 힘들고, 그런 생각들도 많이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는 젊기 때문에 경북대학교에서 나오고 되었을 때 이거가지고 먹고 살 것은 아니니깐 몸으로 때워도 되는 거고 대신에 뭐 처자식 생기게 되면 또 비굴해져서 그렇게 살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까지는 잃을게 없어서 좀더 자유로운 거고, 그것에 대해서 참 많이 감사하죠. 조각 같은 거 하니깐 그게 많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선배들 돌공장 같은데 나가서 돌 나르고 했던 게, ‘아 이렇게도 먹고 살수 있다라는 게 전제에 깔려있었으니깐, 대신 그만큼 자유로워 질 수 있었으니깐.

인터뷰가 더욱 진행되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엽기강사가 아니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주제였다. 그러나 사실시간강사선생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는 책임감과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위태로운 위치 때문에, 자유롭게 살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효찬씨가 자유롭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자랐다고 짐작할 수 있는 생활환경 탓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짐작이지, 사실은 아닐 수 있다), 그 스스로의 낙천적인 성격과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 그럼 앞으로는 뭘 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생각이세요?(웃음)

> 돈 잘 버는 분을 만나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을. (웃음)

)> 그럼 지금 결혼하는 여자 분이..?(웃음)

> (웃음) 그건 아니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학생들 한 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못해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된 적이 한번도 없어요.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계획도 정말 사실 그 디자인을 한 걸 넘었어야 되는데, 그 순간 못 넘고 저거 해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리고 또 미술의 이해 수업을 하면서 수업을 맡았던 가장 큰 이유가나라의 미술계의 큰 밑거름이 돼야지.’ 이런 건 없었고, 프로필에현 경북대 출강중이렇게 나오는 게 참 멋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그거 욕심이 나서 달려들었던 게 솔직한 제 심정이였었고, 그렇기 때문에 키팅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참 부담스럽죠.
그렇게 해서 시작했던 것들이 <미술의 이해> 수업이었고, 생각지도 못한 사건 때문에 짤렸었고, 그리고 또 생각하지 못했던 서울 생활을 하게 되고, 서울에서 수업하게 됐고, 나는 이 길로 갈 생각이 꿈에도 없었는데, 해야되는 거에요. 내 몫보다 더 가야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참 미안해요. 그래서 말은 못해요. 사실은 목표를 두고 가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살아야 하는데, 살다보니 이런 사람이 있다라는 하나의 예시가 되어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나처럼 살아라.’ 라는 말은 하기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저도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게 있고, 그게 막 돌아서 가는 것뿐이지.

()> 예술가가 되시는 거요?

> 예술을 하고 싶고, 만화책을 만들고 싶고, 그런 것들이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 꿈을 언젠가는 이루어지면 이야기 할 수 있겠죠.

()> 교육자로서의 자신과 예술가로서의 자신은 차이가 좀 있으신가요?

> 교육자가 된 것은 지금 몇 개월 안됐다고 생각을 해요. <미술의 이해> 할 때도 뭐 이 길로 가기 위한 게 아니라 팜플렛에 넣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웃음) 그게 아니라 이제 교육을 해야된다고 생각을 했었고, 지금 잘못되어 가고있는 대학교육을 바로 잡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었고 나 한사람 한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변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이제 그렇게 해서 지금 해오는 거고, 예술가로서의 삶은 좀 다른 거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만큼 그렇게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없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나도 미술 하게 되면 편협해야되고 이기적이어야겠죠. 왜냐면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가야 되니깐. 그렇게 되었을 때는 다른 내가 되겠지만, 지금은 마음을 열어 놓고 유유자적하게 그런 게 차이가 나겠죠.

()> 수업이 문화와 삶을 접목을 하는 거라고 하면,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예술과 삶이 조화된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 조화된 삶이라는 것이, 삶을 누릴 수 있게 잘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어떤 물질적인 가치를 중심에 두고 부자로 살아야 잘산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차를 타고 그런 게 아니라 조금 춥고, 덥고 힘들더라도 정말 내가 하고싶은 일들이 있고, 그것 이루는 것들이 정말 좋고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가치관들을 어렸을 때부터 심어줘야 되는데 지금 잘사는 쪽 애들 이야길 들어보면, 애들이 그 집에 가면 막 살핀대요. 살피는 이유가 뭐냐면 애들이 그걸 왜 살피냐구요? 엄마가 시켰거든요. 그 집에 뭐 있는지, 애들은 순수하지만 그걸 스파이처럼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보다는 좋은 것을, 최소한 그 집이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 계급이 생기는거죠. 애들 때부터.

> 그렇죠. 애들이 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대요. “니네아빠 차 뭐야?”, “BMW” 그 다음엔?” 이러면서 몇 시리즈냐고 물어본대요.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걔들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커서도 그렇게 살 거거든요. 애들은 애들답게 커야되고, 사실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바보스럽지만 막 풀어 넣고,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그게 더 접목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정말 검사나 판사 이런 사람들이 저녁에 집에 와서는 연극 배우가 되는 그런 삶을 살면 더 재밌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죠.

()> 경제적으로 힘드신 적 있었나요?

> 솔직히 말하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것을 많이 느끼진 않았어요. 왜냐면 그냥 의식주 해결만 되면 좋아하는 거 하고 댕겼으니깐.

()> 근데 조소라는 게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 많이 들지만 돈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해선 몸이 좀 고달파지죠. 리어카 끌고 가서 재료 가져오고 그랬으니깐. 사실 서울 사람들 스케일은 못 따라가요. 지게차로 끌어야 되고 정말 엄청난 스케일이더라구요. 제가 했던 것들은 주변에 있던 것들 주서 와서 했던 것들이니깐. 제가 혼자서 뭐이제 끝났다이런 것들을 가지고 희열을 느끼면서 살았으니깐

()> 조소에 특별한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땀 흘리는 거죠. 막 땀을 흘리고 나서 끝내는 그런 기분들, 또 뭐가 하나 나타나 있는 것도 좋았었고, 작품은 내가 생각해도 좋지는 않아요. 피똥 이런 거 만들고. 근데 그런 것들을 응용해서 재밌게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아요.

()> 제가 생각하기엔 그러니까 상당히 시대를 잘 만나신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예술가로서의 삶을 본다면?

> 예술가로서의 삶은 아직 아니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있으니깐, 이런 사람도 필요하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뿐이지, 사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업을 하고, 실험적으로 살고있고,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죠. 기말고사 문제 때문에 수면위로 떠오른 것 밖에 없고, 그것도 사실 1년을 수업을 하고 나서 일이 생겼으니깐, 정말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안되죠. 그 분들한테는 좀 미안한 감정도 가질 수 있는데, 그런 분들도 분명히 있어요 다만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뿐이죠.

()> 지금 상황은 만족하시나요?

> , 지금 상황은 만족을 해요. 잘 되고있어요.

()> 만화 좋아하신다고 하셨죠? 어렸을 때 어떤 계기로 만화를 좋아하시게 되셨어요?

> 꺼벙이란 만화아세요? 그 만화 좋아했어요.

()> 닮으신 것 같아요. (웃음)

()> (웃음) 죄송…..

> (웃음) 재밌어요 퍼슨웹 사람들.

()> 대구에서 수요일 날 서울에 올라오시면 보통 뭐하세요?

> 수요일날 오면 일단 수업 할 거 체크하고, 수요일 저녁에 쉬어요. 대구 올라오기 전에 되게 힘들게 해놓고 올라오거든요. 기차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힘들더라구요. 지겹고. 그래서 그 전날 밤까지 할 일 있으면 하고, 그러면서 자면서 기차에서 보내고, 그러고선 후배집에 오면 후배가 제가 올걸 알고는 막 어지렵혀놔요. 설거지에 곰팡이 핀거 봤어요? 오늘은 전화해서해도해도 너무하네~” 그랬더니 후배가, 미안한데 오늘은 빨래도 좀 해도.” 그래서 설거지하고 방청소 하면 하루 일과가 끝나죠. 그러고 나서 이제 그 다음날 수업하고, 이렇게 만나실 분들 연락 오면 오후 시간 비니깐 이야길 하고.

()> 인터뷰 아직도 많이 들어오시죠?

> , 아직도 들어와요. 전에 그러고 사라졌으면 괜찮았을 텐데 한양대 다시 오게 된 것 자체가 어떤 곳에선 오라고 하고 어떤데선 나가라고 해서 그게 이슈거리가 되었으니깐 지난 1학기보다는 나아요. 1학기 때는 수업 도중에 카메라 들고 들어와서

()> 진짜요?

> . 그것도 뭐 새로운 경험인 것 같고, 기자들 있는 수업은 또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적도 있었었고, 아직까지도 많이 찾아주시니깐 저는 고맙긴 고맙죠.

()> 근데 아니.. .. 시간강사료가 적은 게 사실인데, 왔다 갔다 차비만 해도..?

> 파격적으로 한양대에서는 차비를 대줘요. 교통비를 대주시거든요. 정말 다행이죠. 사실 처음에는 망설였던 것 중에 하나가 강사료도 있었어요. 차비를 준다길래, “아이고 뭐 할라고 그걸..” 겉으로는 그렇게 이야긴 했지만 정말 고마웠었죠.

()> (웃음) 서울로 이사오실 생각은 없어요?

> 이사오면 차비가 굳지만 방 값이 들잖아요.

()> 그럼 계속 대구에 정착하실 예정인가요?

> 그렇게 할 예정인 것은 없구요, 일단은 여기 후배네 집에 빌붙어 사는데, 첫 번째로는 후배가 결혼을 빨리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다니는 직장이 유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위기가 있었어요. 8월달에 워낙 경제가 안 좋으니깐 짤릴 위험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제 돌아가게 되고, 지금 결혼하고 싶은데 여기서 직장생활하면서 살이 너무 많이 쪘거든요. 그래서 선보는 족족 다 퇴짜맞고,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웃음)

()> 향후 활동계획 같은 거 다 말씀해주셨죠?

> 뭐한다 그랬죠 제가?

()> (웃음) 작업하신다고.

> 네 작업하고 싶고,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건 만화책 같은 게 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미션스쿨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요. 기독교 관련된 청소년 대상으로 그런 것들을 해가지고 그 아이들하고 뛰어 놀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어요.

()> 왜 하필 미션스쿨이에요?

> 원래는 독특하니깐요. (웃음) 기존의, 있긴 해도 그게 학생들을 자유롭게 풀고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직까진 준비 안됐고, 그걸 하고싶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있었어요. 2년전쯤 모였다가 건물도 하나 얻고 참 좋았었는데, 그 건물이 카바레 하던 장소거든요. 그걸 뜯어낼 돈이 없어서, ‘아직 우리가 돈이 안 되는구나. 그걸 생각을 못했네.’ 이래가지고 다시 흩어져서 각자 분야에서 그렇게 모였던 사람 중에 하나가 영대 그 수업했던 선생님이에요. 그리고 복지사 하는 분도 계셨고, 각자 분야에서 노하우를 쌓고 모이자 했죠. 다시 한번 언젠가는 모여서 그런걸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교회 지하에 나이트 클럽 같은 거 만들면 재밌잖아요. CCM같은 걸로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을까.

()> 종교라는 게 묶고 있는 게 있잖아요.

> 제가 느끼고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종교로 인해서 자유로워지는 거거든요. 그걸로 인해서 편해지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경건해야되고 자세를 잡아야 되고, 그런 부분들이 분명히 필요하지만 기독교가 가진 근본적인 건 자유로움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자유로워지면 뭐든지 할 수 있고, 기본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유로워지는 게 정말 자유로워지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다니기에는 아직까지는 성경책의 지식이 모자라지만.

()> 자유로워지기도 하지만 강요되기도 하잖아요.

> 그건 이제 자유로워진다는 것에 대해서 잘 느끼지 하는 사람이 강요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절대로 강요는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그 전체적인 흐름상에서 교회 분위기나.. 그러니깐 교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건 그 친구들이 파고 들어가겠죠. 입구까지 가면, 그거는 뭐 나머지 부분들은 목사이 할 일들이고 신들이 할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미술의 이해처럼 입구까지 가는.

()> 근데 그 성격이 폐쇄적인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거잖아요. 닫혀있거나..

> 거부감을 갖지는 않아요. 닫혀있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모든 사람이 열리면 균형이 안 잡히거든요. 제 사건에 대해서도 찬반이 양론이 많았었죠. 근데 그게 참 좋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금 가끔씩 만나는 미술 하는 선배가 있어요. 절 되게 싫어해요. 너무너무 싫어해요. 자기는 죽어라 그림을 해도 이름 한자 나기 힘든데, 나가 뭘 했다고 이름이 나냐. 그러면서. 그 선배가 그런 이야길 했어요. 자기를 도와달라며 한 학생이 와서 일을 했었는데, 그 학생이 제 수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선배한테 물어보더래요.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미술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다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이 선생님은 저를 싫어하니깐 공감할 수 없다고 했대요. 그 순간부터 이 학생이 그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안하고 끊어졌었대요
.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게 올바른 일이냐고 저한테 물어봐요. 근데 사실은 뭐 좀더 생각을 많이 했던 분들이그건 아니다라고 이야길 해줄 수 있는 부분도 필요한대, 근데 그거를 가지고 그 선배를 가지고 설전을 놓기는 힘들어요. 제가 물어봤죠 그 학생이 제 수업을 들었냐고, 그랬더니 잘 모르겠대요. 그래서 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마 안 들었을 거라고. 저는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끝났는데, 공감을 하든 안 하든 대화가 필요하다고는 생각을 해요. 폐쇄적인 부분들도 필요하고, 저도 보수적인 부분들이 있으니깐.

()> 어떤 부분에서?

> 유부남과 유부녀는 놀아나서는 안 된다, 정말 자유로운 인가의 감정을 봐선 사랑이란 감정에서만 봐선 할 수도 있지만, 근데 사실 보수적인 시각으로 봐선 가정의 부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 면에서는 보수적인 면이 있죠.

()> 앞으로 수업은 계속 하던 방식으로 하실 겁니까?

> 일단은 그렇게 하고요. 앞으로 좋은 방법이 생기면 바꿔서 하겠죠.

()> 네 언제한번 청강 가겠습니다.

> , 유료화 되기 전에 오세요.

()> 수업하시는 강의실이 층계로 되어있는 걸로 아는데, 뒤에 자는 애들 없나요?

> 있죠.

()> 어떻게 하세요 그 아이들?

> 재미없으면 자야되죠. 그걸 가지고 일부러 깨울 필요는 없고요. 다른 공부하다가 피곤 할 수도 있고요. (웃음) 이제 발표 시작하면 한번 오세요. 지금은 강의고. 영화도 볼꺼에요.

()> 무슨 영화요?

> 계절학기때는 <말레나> 라는 영화 봤거든요. 이번 학기에는 <글루미 선데이> 보려구요.

()> 여배우가 육감적인 영화를 좋아하시나봐요?

>(웃음) 선호하는 게 그래요. 말레나 같은 경우도 처음에 제목보고 이게할래나? 말래나?’ (웃음) 무삭제 판이 더 좋아요.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DVD에는 있거든요.

()> 삭제된 부분이 어디예요?

> 삭제된 장면들이..

()> 뻔하지 않나요?

> . 많이 있어요. 무삭제 판이 정말 완벽해요. ‘이게 영화다.’

()> (웃음) 인터뷰 감사하고요.

> (웃음) 저도 재밌었어요. 재미있는 분들하고.

인터뷰는 정말 재미있게 끝이 났다. 준비해간 자료와 기획적인(?) 질문들이 있었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은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효찬씨는 인터뷰이가 계속 질문할 수 있게 하는흥미를 충분히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효찬씨도 말했듯이흥미라는 것은 깊이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출입구 같은 것이지만, 우리는흥미만으로도 그가 가진 생각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갔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인터뷰가흥미있는 텍스트가 되는 것이 이번 인터뷰의 마지막 목표라는 것을 밝힌다. 아 또 마지막으로 한가지, 요즘처럼대안 없고 희망 없는 시대에도 꿋꿋이 학생의 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내시라는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