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가 남성들의 군대 이야기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근거를 확인 할 바 없지만 축구가 남성적 군대문화와 동일한 코드로 인식되고 무식하고 과격한 남성의 스포츠로 각인 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나마 이 나라에도 월드컵이라는 것이 열려 축구를 싫어하거나 그저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께 축구를 응원하는 분위기와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라는 구호를 주셨고 무엇보다 축구 선수는 11명이고 공이 둥글다는 사실 까지 알게 해주었으니 축구팬들에게는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이 남긴 것이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축제가 끝난 뒤 사람들은 광장증후군에 시달려야했으며 몇몇 사람들은 국제축구연맹 (FIFA) 같은 자본으로 뭉친 조직의 상업주의의 맛을 봤고 우리 안에 잠재되었던 민족주의, ‘대~한민국’의 씁쓸함을 곱씹어해 했다. 다만 이제는 축구가 어떻게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분노케 할 수도 있었구나 하는 회상을 하며 ‘다시 한 번 빨간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벼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월드컵이 끝난 일 년, 기대했던 축구 붐은 없었고 비싼 돈을 주고 만든 축구장은 썰렁했다. 몇몇 구단은 이름 있는 선수들을 비싼 값에 팔아먹기에 급급하고 서포터즈는 구단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지루한 싸움판을 벌였다. 일부 선수들도 한몫 거들었다. 돈을 목적으로 일본과 유럽을 전전하며 한국 축구가 언제나 변방에 서 있을 것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월드컵 특수는 이렇게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야구장으로 향했다. 눈먼 이승엽 홈런 볼이 ‘인생역전’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 그것은 마치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같이 보였다.
축구가 ‘국가 대항전’ 외에는 ‘비인기종목’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무렵 나는 축구팀을 인터뷰했다. 프로팀이나 프로 선수, 프로 서포터즈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도시의 공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순수 아마추어 클럽 축구팀과 일과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 축구클럽의 이름은 ‘봉신축구클럽(이하 ‘봉신FC’)이고 선수와 감독 모두 ’주식회사 봉신‘의 직원들로 구성되어있는 팀이었다. 이 인터뷰는 특별하지도 않고 앞에서 씹어댔던 한국 축구 이야기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노동자 축구단의 이야기이다.
▣ 목 차 ▣
Intro /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되거나 말거나 / 봉신 축구클럽, 한국판 깔레의 기적인가?
1. FA 컵 32강의 신화/ ROUND 1 – 축구광들의 화려한 골 잔치
/ ROUND 2 – 실업최강 할렐루야를 만나다. 할렐루야~
2. 일과 축구의 경계/ 스트라이커와 공작기계 노동자
3. 아마추어리즘은 우리의 힘 / 인천축구를 말하다
4. 32강을 넘는다고?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되거나 말거나
별들의 잔치 유럽 챔피언스 리그*가 시작되었다. 새벽중계를 찾아보느라 다음날 벌건 눈으로 출근하게 되는 일이 생겼지만 그야말로 ‘별’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넋을 잃을 잃고 침을 흘리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 고통은 당분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 주변에 축구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전 날의 흥분을 이야기해도 별 반응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달랠 길 없어 그저 속으로 궁시렁 거린다. ‘당신 월드컵 때 대~한민국 응원했지? K리그에 몇 팀이 있는지는 알아? 모르면 말고’
TIP 1. 유럽의 리그는 상당히 복잡하다.
각 국가에서 벌어지는 리그 이외에 유럽 국가를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UEFA컵, 유로 컵 등이 있다. 챔피언스 리그는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터키, 네덜란드, 벨기에리그에서 우승, 준우승(각 리그의 수준마다 출전 권한이 다름)한 32개 팀이 참가한다. 어떤 면에서는 챔피언스 리그가 FIFA 월드컵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약 7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중계권료, 입장료, 스폰서로 벌어들이는 것이 이를 일부 증명한다.
최근 한국 선수들이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출전하면서 재미는 배가 되었지만 빅 리그의 높은 문턱에서 우물쭈물 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유럽 챔피언스 리그는 시작되었고 한국은 월드컵의 열기가 홀라당 식어버린 2003년의 가을이 왔다. 세상에 월드컵을 치른 나라의 리그가 이렇게 썰렁할 수 있을까? 관중 없는 K리그(부산이 가장 심하다. 2003년 10월 12일 부산 홈경기에는 140여명이 관전했다.)에는 성남의 독주가 지루하게 계속 되고 있고 한일전에서 묵사발이 된 일본이 울면서 집으로 갔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신문 인터넷 판을 뒤적거리며 소일 하고 있었는데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아마추어 동호회 클럽 축구팀 펄펄! FA컵 이변 속출!’
‘봉신 축구클럽 실업 축구의 강자
할렐루야 누르고 이번대회 최대 이변 연출’
아, 비 오고 심심한 날 친구가 술 마시자고 불러낸 전화의 목소리라고나 할까? ‘봉신 축구클럽’ 32강 진출! 눈을 의심케 하는 이 기사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찌릿함(닭살, 찌릿, 부르르 뭐 이런 것)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피부 외피를 뚫고 나가 수십 만 개의 피부를 자극시키려 했으나 그 약발이 좀 약했다. 어째서냐고? ‘FA 컵 최초로 32강에 진출한 아마추어(공식명칭은 2종 클럽)팀’이란 수식어는 이미 ‘재능교육 축구팀’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최초’라는 말의 ‘압박’이 봉신 축구클럽의 ‘32강 진출’이라는 빛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TIP 2. FA 컵 대회: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가 주관하여 자국의 통합챔피언을 가리는 축구대회이다. FA앞에 각 국가의 이름을 붙여 대한축구협회 KFA(Korea Football Association) 컵 대회, 유럽축구연맹 (The Union des Associations Europeennes de Football) 컵 대회라 부른다. 원래 FA컵은 유럽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국내의 모든 팀들이 참가하여 홈 앤드 어 웨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국내 최강팀을 가리는 대회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1946년부터 전국 축구 선수권대회가 매년 가을 열려왔다.
그러던 것이 83년 프로축구가 창설 되면서 전국 축구선수권대회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프로와 아마추어 팀을 통틀어 한국 축구의 최강팀을 가리는 FA컵을 창설하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1996년 대한축구협회 주최로 FA컵 축구대회가 시작되었다.
현재 FA컵에는 국내 프로 전구단과 그해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마추어 팀들이 참가 자격을 부여받고 있다. 올해는 FA컵 2라운드를 통과한 16개 팀과 K리그 12팀, 실업 및 대학부 대회우승 4팀이 단판 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팀을 가릴 예정이다.
정규리그와 FA컵 우승팀에게는 이듬해 아시아 각국의 FA컵 우승팀들이 참가하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한국 대표로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봉신축구클럽 한국판 깔레의 기적*인가?
나는 재능교육 축구단과 봉신 축구클럽의 역대 전적을 찾아 살펴보며 객관적으로 두 팀을 비교해 보았다. 예선 1회전에서 재능교육은 4승 1무 승점 13점. 봉신축구클럽 3승 1패 승점 12점으로 재능교육이 조금 앞서는 것 같았지만 2회전 대학, 실업팀과의 경기에서 봉신축구클럽의 선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두 동호회 클럽 팀이 밥 만 먹고 축구만 한다는 실업팀이나 대학팀을 상대로 이기고 FA컵 32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전년도 K2리그 3위 팀을 꺾은 봉신축구클럽에 내 관심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연한 일이었거나 어쩌다 강팀의 경기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FA컵 대회는 특성상 의외의 팀이 좋은 경기결과를 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아마추어 클럽 팀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실업리그에서 활동하는 팀과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할렐루야 팀’을 이겼을까? 나의 궁금증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99~2000년 프랑스 FA컵에서 보았던 ‘깔레의 기적’을 연상케 했다. 우리의 ‘봉신’도 홈구장이 없고, 리그로 치면 4부 리그 정도 되는 팀에 구성원은 공장 노동자였다. ‘봉신FC’에 대한 흥분과 관심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계속 되었다.
TIP 3. 깔레의 기적:
99∼2000년 시즌 프랑스 FA 컵에서 도버 해협을 맞대고 있는 인구 7만의 소도시 깔레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4부 리그 팀이 1부 리그 팀들을 차례로 꺾는 기적을 연출하며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동네 우체부, 슈퍼마켓 점원, 술집 웨이터 등으로 구성된 깔레가 결승에 진출한 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우승팀이 유럽의 명문 클럽들과 경합하게 될 UEFA 컵 출전 자격을 갖기 때문에 이것은 전 유럽의 화제가 됐다. 프랑스 축구 협회로서는 홈구장 시설도 제대로 돼있지 않는 깔레 가 UEFA 컵에 출전할 때 조롱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전전긍긍했었다. 그들이 우승할 경우를 대비한 대책회의를 진행하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신문 카툰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고 이것이 바로 ‘깔레 의 기적’이라 불렸던 사건이다.
며칠 동안 ‘봉신FC’에 관한 기사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주)봉신’이라는 회사에 소속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찾기는 힘들었다. 결국 ‘(주)봉신’에 전화를 걸어 ‘봉신축구클럽‘ 감독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 ‘봉신FC’ 한영진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 당일, 지난 이틀 동안 비가 많이 내려 연습장소가 인천대 운동장에서 인천시 동구 구민운동장으로 변경되었으니 그쪽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인천에 살지 않는 내가 택시 기사도 잘 모르는 동구 구민운동장을 찾는 데 상당한 애를 먹어야 했다. 구청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묻어 택시 기사에게 알려주었더니 ‘아, 거기가 구민운동장이었구만!’이라고 한다.
따블 요금을 택시기사에게 주고 겨우 찾아간 구민운동장에는 너 뎃팀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어떤 팀이 봉신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한참동안 선수들 유니폼을 뚫어져라 쳐다보아야 했다. 한참동안 멍하니 여러 팀들을 살핀 끝에 구민운동장 구석 농구코트에서 미니게임을 하고 있는 봉신 선수들을 찾을 수 있었다.
퍼슨웹 (이하 )> 찾기가 꽤 힘들었습니다. 매번 이렇게 연습장소가 바뀝니까?
한영진 (이하 ‘한’)> 저희 팀은 운동장이 없어서 주로 인천대 운동장을 사용했었는데 그쪽 운동장 사정이 좋지 않아서 갑자기 이쪽으로 왔어요. 그런데 먼저 온 팀들이 경기를 하고 있으니까 할 수 없이 미니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퍼슨웹이 뭐하는 뎁니까? 이거 어디로 나가는 거죠? 인터뷰는 여기 나오신 우리 부사장님이 훨씬 잘 하실 것 같은데. 그런데 혼자 왔어요? 난 또 여러 사람 오는 줄 알고.
퍼슨웹이 뭐하는 데인지 모르는 것은 흔한 일이라 상관없었지만 혼자 인터뷰 나왔냐는 말에 매우 민망해졌다. ‘자주 있는 일인데요’라고 말하려다 이제부터라도 팀으로 구성된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여럿이 함께, 떼거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퍼슨웹이 뭐하는 곳인지 간략하게 상황정리를 하고 마이크를 꺼내드는 순간 한영진 감독과 봉신 부사장이 서로에게 인터뷰를 미루려 하고 있었다.
한> 어, 우리 부사장님이 더 잘 말씀해 주실 거예요.
류승호 부사장(이하 ‘부’)> 아니, 한 감독을 만나러 왔는데 왜 내가 나서나?
한> 그래도……허허.
그냥, 한 마디씩 하시죠?
FA컵 32강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봉신축구단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궁금합니다.
한> 감사합니다. 88년도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1년에 한 번씩 회사에서 체육대회를 해요.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생산직하고 관리직하고 축구시합을 시켜봤는데 그때 게임하는 것을 보고 20명 정도 뽑아서 가르치면 팀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체육대회 끝나고 나서 회사에 팀(동호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던 게 동기가 되었지요.
역시 봉신FC의 정체는 예상 했던 대로 특별하지 않은 동기로, 아주 평범하게 시작된 직장인 축구팀이었다.
32강을 진출하게 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한> 축구분위기는 일단 선수들이 가장 많이 달라졌고요. 주위에서 아무래도 그런 공식대회에서 성적을 내다보니까 뭐랄까, 많이 격려해주고 알아주는데 이제는 그런 게 좀 부담스러워요. 아마추어클럽인데 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람들이 우리 팀은 일은 안하고 공만 차는 팀으로 오해를 하는 점이 그렇죠. 선수들도 자꾸 성적을 내다보니까 그 이상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런 부분이 감독입장에서는 부담스럽죠.
그래도 축구하는 여건 같은 건 아무래도 좀 좋아지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 저희들이 32강가기 전에는 회사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물론 많이 도와주셨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을 못 냈어요. 그냥 짬나는 시간에 공을 찼었는데, 32강가기 전 FA컵 2차전부터 회사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시간을 내주셨어요. 그나마 상당히 도움을 주신 거죠. 저희들 입장에서는.
부사장님 봉신의 주 업종은 무엇입니까?
부> 저희 주 업종은 주물 및 산업기계 공작기계 제작입니다. 여기 선수들은 다 종업원이고요.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은 FA컵 임하면서 선수들하고 같이 전후반 45분을 지켜봤는데 직장에서 일주일간 일하고 수요일 오후 다섯 시 반에 퇴근을 하고 일 주일에 한번 찼어요. 이거야 뭐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거니까 회사에서 시간을 내주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운동장에서 그런 부분을 봤을 때 상당히 안타까웠죠. 앞으로 32강정에서도 체력은 분명 쳐질 겁니다. 이게 마음이 아픈데 제 개인 적인 욕심은 연습시간이나 이런 걸 충분히 할애해 주고 싶은데 우선 회사가 먼저고 일이 먼저기 때문에 그건 조금 불가능하고 다른 종업원들 간의 형평의 원칙도 있고 그런 부분에서 상당히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32강까지 가는 길에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텐데요. 특별히 준비했던 과정이 있으셨다면 말씀해주시죠.
한> 작년에 생활체육에서 주체하는 직장 축구대회가 있었어요. 필라 컵*이라는 대회가 있는데 저희 봉신이 항상 인천의 대표로 뽑혀서 권역별 전국대회 가서 매번 삼익악기하고 만났거든요. 그래서 전국 결선에는 못 가봤어요. 삼익악기 때문에. 그래서 올해도 필라 컵 전국 직장인 축구대회에 나가려고 목표를 세웠었죠. 그런데 축구협회에서 클럽 팀에게도 FA컵에 출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길래 작년 푸티리그에 나가서 준우승을 했어요. 거기서 좀 자신감을 갖고 해보자해서 참가한거죠.
원래 욕심은 필라 컵이든 FA컵이든 두 개 다 해보려고 했었는데 날짜가 겹쳐버렸어요. 두 대회가 말이죠. 필라 컵을 참가하고 싶었지만 FA컵은 우리가 힘들게 여러 경기를 거쳐서 올라온 거잖아요. 어렵게 올라왔는데 포기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TIP 4.
필라 컵
FILA KOREA가 주관. 1999년 시작되어 매년 3,4월에 시작되는 전국 직장인 축구대회. 공식 명칭은 “FILA CUP 전국 직장인 축구대회“
푸마 푸티리그
2002년 스포츠 용품업체인 “푸마 코리아”는 회사 마케팅과 이미지제고 차원에서 작년 5월부터 전국 11개 도시에서 전국 최대 아마추어 축구리그인 ‘2002 푸마컵 푸티리그‘를 개최하였다. 푸티 리그 우승팀에게는 연말 FA컵 출전권이 주어졌고 봉신은 이 대회 4강에 올랐다.
매년 FA컵을 준비했었던 것은 아니군요?
한> 그렇죠. 이게 올해부터 우리 같은 클럽들이 참가하게 된 것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감독님께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시지만 부사장님 나름대로 이 클럽에 대한 생각이 있으실 텐데요.
부> 저는 선수들한테 이런 부분을 주문합니다. 올바른 직장인이 먼저고 그다음에 여가를 즐기는 축구를 생각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지금도 현장에서 일우선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일부불만이 있는 직원들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앞으로도 클럽 팀에 대한 비전이다 뭐다를 떠나서 일을 하면서 자신이 즐기는 축구를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회사가 지원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수에 대한 욕심, 대회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축구단을 운영을 한다면 회사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항상 그런 점을 선수들에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시합 때도 상대방 선수들을 배려하고 다치지 않게 매너를 가지고 하는 축구, 경기결과에 관계없이 경기를 주관하는 심판에 복종하는, 물론 불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경기 이후에 말 해야겠지요. 그건 왜 그러냐면 이것도 어떻게 보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회생활의 연장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선수들에게 그러한 심성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밑바탕이 돼야 회사 내에서도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노사간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하죠.
32강 출전 기대 많이 되시죠?
부> 저는 사실 FA컵 할렐루야랑 할 때도 물론 예선전부터 참관을 했는데 그날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걸 축제로 생각하고 할렐루야하고 게임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니까 승부에는 집착을 하지 말아 달라. 물론 선수들은 어차피 시합이기 때문에 승부에 연연할 수 있습니다. 이번 32강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는 일반 직장인으로서 선수 자신들이 중,고등학교 때 선수의 꿈을 접고 입사해서 직장인이 된 이상 실업팀이든 프로팀이든 그라운드를 밟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을 승부를 생각하고 게임을 한다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렐루야한테 이긴 것은 운이 좋아서 이긴 거지 실력이 좋아서 이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32강에서도 아마추어답게 축제로 생각하고 하루 즐기는 것으로 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론에서 많이 주목하는데. 이 클럽 팀을 키워볼 생각은 없습니까?
부> 저희 회사는 1936년도에 만들어진 회사이기 때문에 역사는 상당히 깁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는 규모도 작은 중소기업이고 업종자체가회사홍보나 소비재라던가 서비스 계통의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으로 봤을 때 아마추어 직장 축구로서 만족을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을 해봅니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올해부터 아마추어 축구 클럽 팀을 2종 클럽팀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받아 FA컵에 출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그동안 아마추어 클럽 팀이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월드컵 이후 대한축구협회가 축구 저변 확대라는 이름아래 아마추어 클럽 팀을 ‘2종 클럽’이라 명하고 FA컵 참가를 허락하였지만 아마추어 클럽 팀은 연습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고 협회로부터 다른 컵 대회의 일정조율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나 홀로 축구’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류 부사장과의 대화에서 그나마 봉신축구클럽은 회사차원에서 여러모로 편의를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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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A컵 32강의 신화
공단리그에 대한 것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난 몇 달간 진행 되었던 FA컵 예선전 경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한 감독은 좀더 상기된 표정으로 당시의 기억을 유쾌하게 대답해주었다.
주변에서 알아보고 인터뷰를 오거나 봉신이라는 클럽 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아휴, 팬클럽은 굉장히 많아졌어요. 사이트를 만들어 놓지는 않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봉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특히 대한축구협회하고 전국 단위에서 좀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3년 동안 전국대회 심판을 봤었는데 그 전국단위 클럽 팀들이 이제 봉신을 좀 알죠. 그러다 보니까 회사 봉신이 팀도 가지고 있었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고 그러죠.
인터넷을 통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봉신을 응원할 수 있다면 선수들에게도 도움도 되고 회사차원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한> 32강 들어가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회사 일하고 이 축구하고 병행을 하다보니까 시간이 나질 않더라고요. 생각은 가지고 있는데 이번 계기를 통해서 해봤으면 하네요. 뭐 이번 한 번 축구하고 말 것도 아니니까 말이죠. 좀더 오픈을 하고 잘못된 것도 지적받고 또 칭찬도 받고 싶고 그렇죠.
ROUND 1
축구광들의 화려한 골 잔치!
2003 코니그린 컵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53강(FA컵 1회전)경기는 권역별리그전으로 서울과 각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경기 북부에 속한 봉신FC는 5개 팀과 리그전을 펼쳐 1위를 기록한다. 1라운드 2회전에서는 각 지역 상위 팀과 2차전을 갖게 된다.
1라운드 때부터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1라운드 전적을 보니까 4전 3승 1패네요. 5월 4일에 첫 경기를 파주 드래곤즈와 경기를 했는데 15:0으로 이겼더라고요.
한> 수원에서 치른 경기였어요. 저희는 사실 클럽대항이라고 하면 전국에서 모인 팀은 지역을 대표하는 팀인 줄 알고 사실 굉장히 염려를 많이 하고 준비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붙으니까, 우리가 잘 했다기 보다는 그쪽이 준비가 덜 됐는지, 너무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는지 게임이 잘 풀려서 좋은 성적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제이클럽(전적표 참조)인가요? 그 팀은 약간 힘든 상대였던 것 같은데요.
한> 아, 저희 팀이 졌을 때요? 그 팀은. 아휴, 이거 얘기하면 안 되는데. 저희들이 조별 1위로 다음 라운드에 나가는 것이 결정이 되었는데 제이클럽은 저희들한테 지면 못 올라가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주전을 다 빼고 경기를 했죠.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3,4차전 까지 계속 주전 선수들로 경기를 운영하다보니까 경기에 뛰지 못한 후보 선수들이 있잖아요. 그 선수들을 자리에 넣고 ‘너희들 지던 이기던 멋있게 해봐라‘라고 했어요. 일단 성적에 관계없기 때문이었죠. 일부러 졌다라고 보기보다 뭐, 승패에 상관없는 거였으니까요.
경기는 굉장히 재미있었겠네요.
한> 그럼요. 오히려 주전 선수들이 하는 것 보다 더 재미있었죠.
그래도 예선에서 힘들었던 팀이 있었을 텐데요.
한> 연천FC. 2라운드 때였어요. 그때 저희 선수들이 회사 출장을 많이 가서 선수도 부족하고 회사가 굉장히 바빴어요. 철야 야근하는 선수들도 한 두 명 씩 있었고 굉장히 몸 상태가 안 좋았는지 힘든 게임을 했죠.
낮에 일하고 저녁에 지친 몸을 끌고 경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축구에 미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과연 그들이 축구에 미친, 축구에 대한 열정을 갖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FA컵 2종 클럽 팀 경기 1라운드는 봉신의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었다.
ROUND2
실업 최강 할렐루야를 만나다. 할렐루야~
1라운드에서는 각 권역리그를 통과한 팀과 16강을 치러 2라운드에 나갈 수 있는 팀이 결정되었다. 경기북구 1위로 16강에 진출한 봉신은 서울A조에서 2위를 한 북악클럽을 맞아 4:2(1차전),3:1(2차전)로 2승을 거두며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러나 2라운드는 일반 K2리그 실업팀과 대학팀이 대거포진 되어있어 아마추어 2종 클럽 팀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조 추첨에서 운이 따라주어야 했던 그때 봉신축구클럽은 작년 K2리그 3위, 창단 20년, 프로팀 수준의 공격력을 갖춘 할렐루야 축구단과 만나게 된다.
2라운드에서 할렐루야를 만났을 때 어떠셨어요? 굉장한 강팀인데. 조 추점이 끝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한> 할렐루야가 K2리그 3위했더라고요. 조 추첨 할 때 제가 우리 코치 데리고 직접 갔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슨 시시한 대학팀이나 창단한지 얼마 되지 않는 팀이 되는 운을 바랬는데 조 추첨 해보니까 할렐루야가 딱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야, 이거. 경기를 떠나서 애들한테 너무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많이 안 얻어맞으면 한 다섯 골로 보고 아니면 한 여섯 일곱 골은 나지 않겠나 싶었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대처를 하셨을 텐데요. 막무가내로 졌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니었습니까?
한> 그렇죠. 할렐루야가 결정되고 났을 때 저희 팀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광운 전자고등학교를 섭외해서 연습게임을 해봤어요. 간접비교를 한건데 고등학교 잘하는 팀이 대학팀이나 실업팀한테 다섯 골 정도로 지거든요. 그렇게 고등학교 팀하고 경기를 하는데 성적은 3:3으로 비겼는데 실력은 우리들한테 3:7 정도 밖에 안 되더라고요. 광운 전자가 전적이 꽤 좋은 팀인데. 그러면 아, 지더라도 한 세골 정도만 지자. 멋있게 아마추어로 남자 그런 생각을 해봤죠.
하지만 선수들도 처음에는 크게 위축되어 있었죠?
한> 그렇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봉신과 할렐루야와의 경기는 철저한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장하고 도전한 봉신 클럽의 승리였다. 물론 할렐루야 축구단은 당시 익산시와 지역연고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어 K2후반기 리그에 참가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경기력과 선수들의 심리적 상태가 상당히 저하 되어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이 같은 변명을 무색 하게 했다. 전후반을 0:0으로 대등하게 경기를 운영한 봉신은 승부차기에서 4:2로 할렐루야를 이기고 32강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경기를 이기고 소감으로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겼는데 주변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라고 이야기 하셨던데요?
한> 일간 스포츠 기자가 그런 얘길 했어요. 전화가 여러 군데서 오더라고요. 저도 의외지만 할렐루야를 이길 거라곤 이만큼도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다들 안 믿는 거예요. 사람들이 “너희들 정말 이겼냐?” 해놓고선 이겼다고 그러면 에이 어떻게 믿냐? 그래서 못 믿겠으면 신문보라고 했죠.
경기내용은 어땠습니까?
한> 저희가 애들한테 이야기하기론 너희들 학교 때나 그런 부분이 있고 일단 추억으로 생각하라고 이야기 했어요. 직장 다니면서 우리 같은 클럽 팀이 실업팀하고 경기를 하고 이런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고 게임을 하라는 주문을 많이 했죠. 그런데 막상 10분까지는 겁을 먹었는데 10분이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뚫리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 있게 하라고, 해볼만하다고 주문을 했어요. 져도 좋으니까 해봐라 하지만 전술 면이나 짜임새가 있는 팀이기 때문에 수비 위주로 허리를 놔두고 밖으로만 몰아라, 가운데를 차단하라고 했지요.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승리의 기쁨은 선수들도 마찬가지 일 텐데 그날 대단했겠습니다. 기록이라도 남겨두셨어요?
한> 그날 같은 시간에 세 게임을 했는데 한쪽 팀이 너무 밀리는 경기만 보다가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넘어 오더라고요. 구경하는 사람들이 500~600명이 넘어왔는데 다 우리편이였죠. 원래 약한 편한테 응원해주는 것 아닙니까? 하하.
기록은 뭐, 저희가 사진기 하나도 안 가져갔어요. 진다는 생각만 했지 이긴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거든요. 그래서 사진도 하나 못 찍었는데 연대에서 유학하는 일본 여학생 하나가 있더라고요. 그 학생이 아주 좋은 사진기로 저희경기를 찍어서 보내줬어요. 찍은 것 보니까 완전히 프로예요. 잘 나왔어요. 그리고 그 학생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연구대상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32강팀이 결정되면 장소하고 시간 연락을 달라고 편지가 왔더라고요.
한감독의 상기된 얼굴에서 할렐루야를 이겼을 때의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카메라 한 대도 가져가지 않았다니 확실히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아마추어 팀의 모습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재능교육 축구팀이 32강에 함께 진출했잖아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아, 잘해요. FA컵에서는 한 번도 붙어보지 못했지만 연습게임은 많이 해봤어요. 하지만 한 번도 져 본적은 없어요.
재능교육은 경일대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긴상황에서 승부차기(5-4)로 극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봉신의 한영진 감독은 재능교육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그었다. 자기 팀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같은 조에 있었으면 이겼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한> 연습게임하고 시합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선수들 마음가짐이나 컨디션, 집념이 중요하기 때문에 꼭 이긴다는 보장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 해고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객관적 전력은 훨씬 낫다는 거죠?
한> 모르겠어요. 지금 저희는 보강할 선수가 없지만 그쪽은 보강할 지도 모르죠. 직원들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변동이 없는데 클럽이라는 것은 선수들을 항상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 좀 더 작용을 하겠지요.
2. 일과 축구의 경계
재능교육도 같은 클럽 팀인데 봉신과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봉신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분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면 재능은 대기업에 속하지 않습니까? 하는 일도 다르고요. 금방 말씀 하셨듯이 전력보강을 위해서 지원하는 규모도 다를 텐데요.
한> 하하, 그런데 저는 항상 애들(선수들) 모아놓고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항상 아마추어 정신을 버리면 안 된다. 직장생활하면서 일 하는데 만 기준을 삼지 말고 뭔가 즐거움을 찾으라고요. 그래야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지, 그런 부분을 생각을 해야지 실업팀이나 프로팀이 아닌 이상 무조건 축구하는 것에만 우선을 두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거예요. 직장생활 하는 것의 일부로 서로 유대감, 분위기를 쌓는 것을 우선에 둬야지 축구를 먼저 생각하면 그런 이기려고만 하는 생각을 하겠지요.
아마추어 클럽 축구의 특성상 재능교육이 얼마든지 더 좋은 선수들로 보강 할 수도 있다는 말은 어찌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클럽 팀의 문제이고 다시 ‘자본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 감독은 아마추어리즘과 직장축구의 선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선수들에게 그것을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재미있는 축구를! 누가 말했더라…
하지만 감독님께서도 일과 축구를 50대 50으로 딱 잘라 놓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한> 그럼요. 그건 부인 못하죠. 여기 선수들 중에도 우리가 자꾸 좋은 성적도 나고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 하니까 회사에 요구하는 부분도 다르고 하는 것은 부인 못하죠.
선수들 연령층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한> 스물 세 살부터 마흔다섯까지 있어요. 저희들 주전 멤버 중에도 서른일곱 된 선수가 이번 FA컵에도 뛰었어요. 제가 좀 놀란 게 할렐루야랑 경기를 하면서 서른일곱, 서른여섯 되는 선수들이 뛰고 그랬는데도 우리가 이겼다는 거예요. 이런 것 보면서 프로나 아마추어나 꼭 매일 밥만 먹고 공만 차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놀라셨다는 이유가 뭐죠?
한> 나이 때문에도 그렇고 우리 선수들은 일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실업 팀들은 밥 먹고 공만 차는데 그런 부분은 조금 그렇죠.
선수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낸 것도 그렇지만 감독님의 지도력도 굉장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 아휴, 애들 직장 생활하는데 꼭일 만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재미있게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죠. 얘들이 공만 찼지 사회라는 걸 잘 모르잖아요. 꼭 봉신에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걸로 발판을 삼아서 기초가 된다면 이런 것이 사회가 떠안고 회사가 떠안아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부사장님도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그 부분은 저보다도 ‘직장 생활하는데 일만하면 어떻게 하냐, 재밌게 보내라‘는 그런 부분이 크죠.
선수들은 주로 어떻게 뽑습니까?
한> 저희들이 일부러 뽑는 게 아니고요. 선후배 관계가 처음에 순수한 아마추어였는데 동호회가 생기다 보니까 중, 고등학교 때 공 찼던 애들이 올 것 아닙니까?그러면 선배가 있으니까 후배가 나도 그 회사 들어가서 일도 하고 비록 일요일 한 번 이지만 공을 차고 싶어 했죠. 옛날 꿈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선수를 수급하지 일부러 선수를 뽑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럼, 입단 테스트 같은 것도 없겠네요.
한> 지금은 테스트는 없는데요. 일단 우리 회사직원이면 가입을 시키는데 본인들이 성적도 내고 하다보니까 웬만한 사람들은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냥 들어와서 물이나 떠오고 그냥 같이 어울리고 애경사도 하는 좋은 의미죠.
투 톱 중에 이번 예선에서 꽤 유명해진 스트라이커가 있던데요.
한> 스트라이커 ‘나일균‘. 이 친구가 일 차전 때 박현석 씨하고 아주 열심히 뛰었죠.
물론 감독의 생각이 팀을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지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팀은 분열되고 성적은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나는 선수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한영진 감독에게 선수와 인터뷰를 요청 했을 때 검은 운동복 차림의 선수 한 명을 불러냈다. 봉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나일균 선수였다.
스트라이커와 공작기계 노동자
이번 결과에 선수 스스로도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거나 체력적인 한계 같은 것 느껴지지 않으세요?
나일균 (이하 ‘나‘)> 그런 건 별로 없어요. 오히려 2라운드 보다는 3라운드가 낫고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요. 감독님도 욕심이 있으실 거예요. 32강에 올라온 지금이야 뭐 어떤 이랑 붙는다 해도 기량차이가 많이 날 것은 뻔한 사실이죠. 팀 현역 선수들하고 붙으니까 말이예요.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번 FA컵 그 자체를 즐길 생각이예요.
나는 인터뷰 중간 중간 봉신의 미니게임을 지켜보았다. 어느 프로팀에 못지않은 성실함과 연습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특히 축구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다는 나일균 선수의 모습은 진지하기까지 했다.
언제부터 축구를 했습니까?
나> 초, 중,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고 이제 직장생활 시작했죠.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를 했으면 꽤나 잘 할 텐데요. 대학이나 실업팀으로 나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겠지요?
나> 있죠. 저도 고등학교를 지방에서 나왔는데 저희 다닐 때만해도 4강 제도라는 게 있었어요. 성적을 못 내면 대학도 실업팀에도 갈 자격이 없었어요. 운이 없었는지 저희가 항상 8강에서 떨어지다 보니까 대학의 꿈도 접었습니다.
실수다. 나는 너무도 쉽게 대학이나 실업 아무데나 가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내가 또 한 사람의 상처를 박박 긁어놓은 것은 아닐까. 나일균 씨와 인터뷰가 끝나는 동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굉장히 아쉽고 서운했겠습니다.
나> 그 당시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뭐 괜찮습니다. 지금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신에서 더 애정을 가지고 좋은 성적을 내려는 노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 이번이 계기가 되어서 잘 된다면 좋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운동을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테고 주위 친구들이 운동만 하다가 다른 일을 못하잖아요. 그런 친구들이 진로를 못 찾고 방황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여기가 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서 저희 회사도 알리는 방법으로 했으면 좋겠고요.
꼭 운동을 해서 성공을 한다는 것보다 길이 아니었을 때나 길이 막혔을 때 바꿀 수도 있잖아요?
축구선수로서 경기도중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나> 봉신에서요?
어디서든, 축구선수로 그라운드에 있을 때 말이죠.
나> 저는 선수생활 할 때 우승을 많이 못해봤어요. 제가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서 우승하면 아마추어 대회든 뭐든 우승해보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스트라이커라면 해트트릭 같은 것 꿈꾸지 않습니까?
나> 뭐 꼭 해트트릭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골을 제가 넣어서 우승해보고 싶은 거죠.
우승에 대한 욕심이 크군요.
나> 예.(단호하게)
스트라이커 나일균의 모습에서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만족감과 우승을 해 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었다. 더구나 학창시절 자신의 모든 삶을 지배 했던 운동을 할 수 없이 그만두게 되면서 겪은 고민과 방황은 이제 봉신이라는 일과 축구가 공존하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일균 선수가 말한 ‘ 길이 아니었을 때나 길이 막혔을 때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봉신축구팀에서는 스트라이커인데 회사인 봉신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 저는 지금 공작기계일을 하고 있거든요. 뭐 기계 만드는 거죠. 도면보고 주문 제작이 들어오면 그대로 조립해서 생산하는 거죠, 힘들어요. 하하.
감독님은 반반이라고 하던데 개인적으로 일하는 것과 축구의 비율을 따져본다면 어떻습니까?
나> 사실 저 같은 경우는 뭐 어차피 정규 근무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 외에는 시간이 된다면 헬스를 한다던지 하는데요. 어떻게 보면 감독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어요. 반반이라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 아뇨, 거의 다 안 그래요.
축구가 훨씬 더 크다는 말이죠?
나> 그런데 회사 출근하게 되면 운동장 일은 잘 생각이 안 나죠.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3. 아마추어리즘은 우리의 힘
봉신 축구클럽 감독으로서 축구 지론이 있으실 텐데요?
한> 프로팀은 저마다 옛날 생각하면 기량도 비슷하고 하지만 .여긴 기량차이도 많이 나고 하니까 잘 차는 사람이 혼자 플레이 하면 저한테 욕을 먹어요. 팀플레이를 해야지. 못 차는 사람이 따라오게끔 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해요. 그리고 저는 공 끌고 다니는 걸 싫어해요. 축구경기라는 게 잘하는 사람이 물론 있어요. 하지만 잘하는 사람이 팀을 이끌다 보면 다른 사람은 서있게 되는 쟤 혼자 끌고 다니는데 난 그냥 서 있지 뭐. 그렇게 하면 저한테 욕을 먹어요. 그렇게 하는 건 안 된다고 봅니다. 열한 명이 다같이 움직이는 축구를 해야지. 한두 명 움직이는 축구를 선호하게 되면– 개인플레이 하는 축구를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에이, 저놈 또 혼자 잘난 체 하네‘ 한단 말 이예요. 그러다보면 팀 웍도 깨지죠. 잘하는 선수는 박스 (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는 결정적일 때는 개인기가 필요하죠. 그런데 가운데 뭐 이런데서 혼자 드리블하고 끌고 나가면 제가 뭐라고 혼을 내죠.
혼을 내요? 어떻게요?
한> 하하. 그냥 못 끌고 다니게 하죠.
영국에서 축구가 인기를 얻게 된 계기가 노동자를 중심으로 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거든요. 봉신 축구단도 노동자 축구단인데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나라도 그런 리그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낮에 일 하고 저녁에 리그하고 말이죠.
한> 저도 신문에서 보면 저는 한국축구가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이거죠. 학교 때든 실업이때든 프로팀이 아닌 이상 학교에서는 공부하고 실업팀은 직장 다니면서 자기 일을 가지고 클럽이든 실업이든 일을 갖고 일이 끝나면 모여서 본인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미치지 않으면 일하고 축구하고 같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정말 축구에 미치지 않으면 이건 불가능 한거죠.
저는 그런 쪽으로 한국축구가 가야 여러 사람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고 그래야 중, 고등학교 때 실패 하더라도 나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실업이나 프로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좋아요. 이 애들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축구에 대한 신앙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심판도 하셨고 축구에 대한 지론도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봉신 축구단 감독이 되셨습니까?
한> 아까 말씀드렸지만 처음에는 어차피 제가 지도를 하고, 선수출신이 아니고 하다보니까 팀을 이끌고 가르치다 보니까 내가 감독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감독을 뽑고, 회장 뽑고 했던 거죠. 거기서 감독으로 뽑혔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계속 감독으로 뽑혔던 거예요.
10년 동안 감독 하셨네요?
한> 10년 더 됐어요. 거의 뭐 제 독재죠. 독재. 하하.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물려주고 순환이 되어야 발전 하는데 이거는 좀 문제죠.
봉신에서 한 감독님 같은 역량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한> 그건 모르겠어요. 그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프로나 실업팀은 1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모르지만 이런 데에서는 저보다 좋은 사람도 많고 훌륭한 애들도 많은데 돌아가면서 해도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감독직 그만두시면 다시 들어가셔서 선수도 활동하시는 겁니까?
한> 한 삼년 전까지는 제가 뛰었는데..지금은. 그리고 아마추어라는 게 그래요. 지도자가 들어가서 뛰게 되면 영향력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저의 플레이가 된단 말 이예요. 저도 공을 안주면 뭐라고 하게 되고 선수들 자체도 제 눈치를 보게 되지요. 제가 그걸 피해줘야지 마음 놓고 선수들이 플레이를 하죠.
나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요?
한> 아뇨, 저도 지금 하죠. 직장인 축구대회가 있으면 저도 뱃살 빼려고도 하죠.
선수 출신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한> 아주 아닌 건 아니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했는데 축구보다는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공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 그만 둔 것 같아요. 오래 했으면 정말 못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회사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한> 인사와 노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역시 인사와 노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 축구감독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 같아보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평소모습을 보면 선수로서의 컨디션까지 챙겨야 하는 시안은 장악하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큰 형님처럼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마추어라고 하지만 전술연구는 하시죠?
한> 저희는 주로 4:3:3을 많이 쓰는데 아마추어 팀이 왜 그전 술을 쓰냐면 실업이나 프로처럼 3:5:2같은 시스템이 잘 안되거든요. 막 오버래핑 나면 윙이 수비까지 가담을 못해주니까 체력적인 한계도 있고요. 그래서 이 전술을 많이 쓰죠. 한 십분 정도 뛰어보면 알아요. 아 이 팀이 우리보다 약하다 뭐 이건 해볼만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좀 더 뛰다보면 3:5:2로 전환해서 투 톱 놓고 왼쪽 윙을 허리로 내리고 아무나 올라갈 수 있게 금 전환하죠. 저희는 오버래핑을 많이 올리는 편이고 미드필드진이 공격가담을 많이 하는 편이예요. 그건 팀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센 팀은 안 되죠. 많이 올라갔다간 큰일 나니까. 하하. 주로 4:3:3을 쓰고 그래요.
(오버래핑: 후방에 있던 수비들이 공격에 가담하는 행위)
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감독님의 능력도 있지만 선수들의 의지도 무시 못 하겠습니다. 눈에 띄는 선수들도 있으시죠?
한> 그럼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도 여건만 아니면 실업팀 정도는 뛰어도 감독만 잘 만나고 하면 한 두 명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죠. 그런데 취재하려면 우리 코치 같은 사람을 취재해야 해요. 고생을 많이 하는데 물론 선수들 모두 누구든지 일하고 와서 축구하는 게 다 힘들겠지만 코치가 거의 뭐 다하죠. 저는 뭐 여기서 지시만 하지만 발로 뛰는 애들 지도는 코치가 다하죠.
코칭 스테프는 감독님하고 코치하고 두 분이네요.
한> 그렇죠. 그리고 저희는 아마추어니까 다른 데는 주무라고 그러는데 우린 총무라고 해요. 셋을 두고 있지요. 그리고 부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시니까.
회사가 축구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도 못하잖아요.
한> 관심이 아니라 진짜 안도와주면 못하죠. 아무리 동네 축구라도 깨지가 쉽잖아요.
한 감독은 초기에 아마추어로 시작한 팀이 너무 잘해서 오히려 걱정 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선수들이 일을 소홀히 하게 되거나 축구만 생각하며 봉신에 몸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수들은 누구보다 한 감독이 말한 ‘일과 축구의 경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잠깐 쉬는 동안 선수들은 농구장에서 나와 축구골대 앞에서 센터링과 슛 연습을 하고 있었다. 코치 박영수 씨가 선수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이 꽤나 짜임새 있어 보였다.
인천축구를 말하다
팀을 운영하다보면 배울 만한 감독이 있을 텐데요?
한> 저는 차범근 감독을 좋아합니다. 잘한다는 것 보다 생각자체가 마음에 들어요. 사심이 없고 학연이나 인맥축구를 타파했거든요. 물론 우리 대표팀에서는 실패했지만 그런 부분을 실력을 떠나서 국가의 꽃을 피우려고 하는 모습 때문에 좋아합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한> 아직까지는 외국감독의 경우는 어린 선수들에게 기초나정신력이나 배우는 축구를 맡았으면 좋겠고요. 나중에는 거의 실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전술부분만 조금 변하는 거잖아요. 외국감독이 팀을 맡는다고 해서 개인기나 실력이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축구팀은요?
한> 외국팀은 어차피 상품이니까 그렇고요. 처음엔 포항을 응원했었는데. 지금도 좋아하는 팀은 포항 스틸러스죠.
인천에도 내년에 프로축구팀이 생기는데 그간 인천에 프로팀이 없어서 답답하셨겠습니다.
한> 저희는 k리그 부천 경기에 자주가요. 매일 지지만요. 하하. 제가 경기 갈 때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계속 가고 있어요. 애들하고 마누라하고 선수들 데리고 가죠. 저는 그리고 절대 공짜 표는 삽니다. 축구발전을 위해서 항상 사라고 하지 절대 그런 것 없어요.
이건 정말 만약인데요. 봉신이 FA컵 32강, 16강 올라가고 발군의 성적을 낸다면 인천프로팀 스카우터들이 봉신선수들을 노릴 수도 있겠죠?
한> 아휴, 그럼요. 그런 판단이야 본인에게 맡기는 거죠. 뽑혀서 감독들이 데려간다면 다른 걸떠나서 6개월 만에 1년 만에 잘라버리지만 않는다면 그거야 좋은 일이죠.
인천은 클럽 팀들이 축구하기가 어떻습니까?
한>저희가 제일 어려운 게 운동장이죠. 시간도 없지만 운동장이 없어서 연습을 못해요. 저희 팀 자체가 조기회수준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인천 직장인 팀의 수준 때문에 저희가 전혀 연습을 못해요. 저희들과 연습하는 팀이 거의 뭐 서울클럽팀사커메니아,재능,북악클럽이죠. 그런데 이렇게 원정 다니면서 저희들이 져본 적이 없어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해볼만하다,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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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2강을 넘는다고? 아마 그런일은 없을 거요
봉신의 잠재력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좀 전에 말씀하신 아마추어리즘이 그 대답이 될 것 같네요.
한>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이상을 바랬다면 선수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바란다면 이 클럽은 벌써 깨졌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항상 아마추어다. 저희는 어디가도 매너, 절대 심판에 복종하고 물러서라면 깨끗이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그건 아마추어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을 많이 가르치고 있고요. 선수끼리 선후배관계하는 것 말이죠. 니들도 때가되면 언젠가는 그 자리에 간다, 후배 때 선배들한테 잘 하라고 가르쳐요.
어차피 잘하는 건 한 때거든요. 한 삼사년 잘하다보면 또 잘하는 후배가 들어오고 그러면 소외되고 그래서 항상 후배들이 선배들한테 인간적인 대우를 잘하라고 말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봉신이 32강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 그러면 좋은데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이상이죠.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요.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외국 같으면 이건 가능하다고 봐요. 실업이든 대학이든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하기 때문에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실업까지 자기직업이 축구잖아요.
저희는 개인적으로 할렐루야 이겼지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쪽 감독이나 선수들의 입장이 뭐가 되겠냐 싶고요. 이겼지만 이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32강 때는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한> 아휴, 그거야 당연하죠. 봉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려고요. 그게 아마추어 아닙니까? 그래서 준비하는 거죠.
내년 FA컵도 생각 있으시죠?
한> 제 욕심은 FA컵도 준비하지만 제 욕심은 필라컵이예요. 어째 인연이 닿지 않아서 그런 건지 나이제한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도 목표를 그쪽에 두었지만 날짜가 겹쳐서 포기하고 말았는데. 필라 컵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어요. 두 군데 다해야지만..
저희는 아쉬운 게 서로 날짜를 겹치지 않게 해줬으면 싶어요. 이건 너희들이 여기 포기하든 말든 하라는 식이니까 너무 사전에 이런 게임이 있다면 날짜를 조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날짜가 안 겹쳤는데 비 오니까 겹치게 날짜를 잡더라고요. 저희는 고의가 아닌데 사회체육계에서 너희는 FA컵만 하느냐고 뭐라고 하고. 좀 고쳐줬으면 싶습니다.
한영진감독과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선수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 모여 있었다. 연습이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땀과 먼지가 섞인 냄새가 운동장 스텐드까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봉신 선수들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봉신축구단을 만나기 전 그들이 FA컵에서 ‘한국판 깔레의 기적‘과 같은, 혹은 뭔가 일을 낼 것 같은 축구팀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봉신 축구단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의 삶 속에 축구와 노동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시민이 아닌 자본이 운영하는 프로축구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한 “축구로 모든 사회계층의 통합을 이루어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해 내고, 새로운 문화의 창안 및 정신 혁명의 원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봉신FC’와 같은 아마추어 축구클럽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나 수많은 서포터들도 없는 일개 회사 동호회 클럽 팀이지만 봉신의 선수이며 노동자인 그들은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 그람시가 말했던 “축구는 야외에서 행해지는 인간적 자유의 왕국”을 지금 그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