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에 – 길 위의 나비

편집자 주 >> 퍼슨웹은 강산에의 인터뷰를 2001년 한 차례 진행했었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퍼슨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음주 인터뷰를 감행한 관계로 인터뷰어와 강산에 모두 만취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녹취도 못하고 숙취만 얻었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 실패기를 교훈 삼아 2003년 봄, 강산에 인터뷰에 재도전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 된 인터뷰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다시 ‘취중 인터뷰’로 진행되었고 새벽3시가 되어서 낼 수 있었다. 때문에 분량은 방대해졌고 녹취와 정리를 진행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누구 보다 오랫동안 이번 인터뷰를 궁금해 했을 독자여러분과 강산에(강영걸) 씨에게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퍼슨웹의 인터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굳은 사명감으로 이번 강산에 인터뷰를 세상 밖으로 내보인다. 본 인터뷰를 녹취, 정리하기위해 몇 날 밤을 고생한 라임즈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2주에 걸쳐 연속 개재하기로 하였으니 맺혔던 분을 조금이라도 푸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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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에 대하여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4시간,

식사, 전차, 4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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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비록 지금은 네모난 각이 진 틀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지도 모르나 가슴 한 쪽으로는 끊임없이 자유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 그것은 막연한 개념으로 인식되기 쉬운 단어들 중 하나다. 사전이라는 그 누구들의 정의에 힘을 빌려본다면, “自由.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여기서 “자기 마음대로”라는 구절이 가지는 의미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일단,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면 “자기 마음”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내야 하며 여기서는 또 “자기”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며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고 만다. (이 얼마나 거창한지..)

 

꿈꾸며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 이제는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할 나이라는 소리도 함께 듣게 되었다. 이제 꿈 다 꿨니, 이제 현실을 살아야지. 밥은 먹고 살아야지, 남들 다하는데 넌 안 할 거니. 살아봐라, 다 그런 거다. 꿈은 그야말로 꿈인 것일까,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숱한 의문 속에 파묻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점점 나를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자유롭게 나를 펼쳐가고 싶다고 말했었지만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점점 고개를 숙여만 가던 나에게 소설적 장치 하나가 등장한다. 그로기 상태였던 나의 촉수를 건드려 ‘의식이 활동을 개시’하도록 한 복선이 하나 깔렸으니 이는 강산에와 강산에의 노래, 강산에의 이야기였다.

 

 

작년 여름에 발매된 강산에의 새 앨범 <강영걸>을 듣게 되면서 나는 굉장히 끌리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를 힘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응원의 의미가 아니었다. 내 안의 나를 찾아가도록 이끌어 준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데뷔 때부터 강산에는 자유인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풍겼다. 반항적인 락커, 아웃사이더.. 그러나 지금 강산에가 나에게 주고 있는 자유의 느낌은 분명 다르다. 자유롭자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 나는 이러이러한 자유를 찾아가고 있는데 너는 네 안의 자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말하고 있는 느낌.

 

점점 궁금해졌다.강산에가 자유인이라면, 아니 적어도 자유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의 강산에를 이루어온 그의 삶의 줄기를 짚어보고 싶었고 그의 마음 속 본질을 건드려 보고 싶었다.

 

 

경의선을 타고 백마로

 

 

강산에와의 인터뷰 장소는 일산 백마로 잡혔다. 그곳에 위치한 ‘뜰’이라는 카페. 사실 인터뷰어는 강산에와 얼굴을 익힌 적이 있는데 그곳도 이 ‘뜰’이라는 카페였다. 짧지만 그때 함께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것처럼 오늘도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을까.

 

예전과는 달리 일산에는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교통수단도 다양해져 꼭 예전처럼 기차를 타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 인터뷰 일행들은 낭만적인 기차여행을 즐기겠다는 들뜬 가슴을 안고 신촌 기차역으로 모였다. 네온사인번쩍거리는 신촌거리와는 시대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허술한 대합실에는 군인 아저씨들이(군인은 다 아저씨다) 꽤 눈에 띄었고 왠지 시골 기차역과 어울릴 법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뭔가 시골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즐거웠다. 그러나 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탔을 때, 그 기분은 다소 사그라졌다. 기차 꽁무니에 매달려 머리카락 바람에라도 날리는 낭만을 기대했던 우리를 맞이하는 경의선 기차 안은 전철처럼 매끈하게 이어진 좌석이 놓여있었고 생각보다 많이, 깨끗했다. 증기라도 뿜을 줄 알았던가. 그래도 창밖에 펼쳐진 들판은 넓고 시원했다. 그만큼 하늘 또한 넓어져 있었고 어수선했던 내 머리 속도 조금은 비워진 듯 했다.

 

백마에 도착해 택시를 탄 우리는 백마 카페촌에서 내렸다. 예전에 와봤다고는 하지만 밤에 왔던 터라 위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길가에 서 있던 한 남자에게 예전 화사랑이 있던 자리를 물으니 대번에 위치를 가르쳐 준다. 화사랑. 오늘의 인터뷰이에게 특별한 공간이라고 하던데 오늘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산장처럼 듬직하고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뜰’은 정답게 꾸며진 작은 정원도 가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두울 때 왔던 예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강산에를 찾았지만 없다고 한다. 함께 있을 노정연 씨(노정연 씨는 퍼슨웹의 ‘퍼슨’ 중 한 명으로 평소에 강산에와 친분이 있어 이번 인터뷰를 연결해 주었다)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 앞에 있던 ‘오르또’라는 곳으로 오라고 한다. ‘오르또’라는 곳은 ‘뜰’과는 사뭇 다른 현대적인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제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고 이곳도 ‘뜰’의 주인인 김원조 씨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강산에가 보였다.

 

 

퍼슨웹(이하‘퍼’)> 많이 환해졌단 얘기 자주 들으시죠?

 

 

강산에(이하‘강’)> 그 사람의 심리상태나 내적 환경이 아무래도 바깥으로, 물론 내적 환경도 외적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표출되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나의 내적 환경이 그동안 지내오면서 여러 가지 경험하고 사고하고 생각하면서 변한 것들이겠지. 가죽이야 사실은 옛날하고 비교해봤을 때 싱싱함도 없어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한테 의외로 밝다라든지 그런 얘기를 듣게 됐어. 그만큼 내가 그전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궁금해하던 부분들이 하나씩 이제 좀 여유로와졌다고 그러나. 이제 조금 손을 이렇게 놓을 수 있는 부분들.

조금 전에 내 후배가 안부를 물으면서 이번 앨범에 대해서 질문하더라. 이번 앨범 많이 나갔냐.. 물론 나는 앨범이 많이 나가고 적게 나가고에 대한 부분에 데뷔 당시부터 사실 나한테 그렇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햇수를 거듭하고 앨범을 내면 낼수록 음악시장에 수요자가 점점 떨어지고.. 앨범 그 장수로 따지자면 옛날에 비해서는 턱도 없는 수준이지. 그런 데 대해서 불안함, 금전적인 것에 있어서도 사실 영향 있는 부분이긴 하니까 그러면 정신적인 타격이랄까 부담이 와야 할 텐데. 근데 이상하게 전에 없던 마음이 뭐냐면 오히려 한시름 놓은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어, 뭐 괜찮아. 아, 이 이상 안나가도 괜찮다는 생각. 그니까 장수는 이제 나한테 있어서 별로 의미가 없는 거 같애.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100만장 팔았다고 내 삶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지금은 내가 음악행위를 할 수 있는 기본환경이랄까 그 앨범 장수와 상관없는 저변이 나한테 이미 깔려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다 하고 싶다 그런 거에 대한 생각이 더 오고 있어서 별로.. 몰라, 아직도 현실감이 없는 아이인진 모르겠지만 괜찮은 거 같은데.

 

 

퍼> 저변이 따라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 상황들로 다가오시는 거예요?

 

강> 음. 첫째 물론 분명히 현실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이 있어. 공연을 하고 싶다 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오는 관객이 있어야 되고 관심이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또 내가 그 공연에 따른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되고. 내 개인적인 노력도 해야 되고 난 아직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공연을 할 수 있는 조건도 있고.

그 다음에, 아직도 내 안에는 창작에 대한 열정도 많고 나름대로 아이디어라 그럴까. 내가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런 것도 해보고 싶고 저런 것도 해보고 싶고 그런 것들이 계속 일어나니까 그런 거 자체가.. 빨리 내 집 마련하고 편하게 살고 잘 먹고 그런 거였다면 돈 버는 쪽을 생각하겠지. 업소도 다니고 지금 내 상태에서 해볼 수 있는 최대한은 해보겠지. 현실이라는 부분, 경제적 부분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나 역시도 배제할 수 없는 건데, 그렇다고 내 라이프 스타일을 변화시킬 만큼 내 창작욕이 그런 것들에 지배당하지 않고 있다는 거지.

 

꼭 얘기하고 싶은 건 여태까지 내가 11년 정도 활동해오면서 업소를 하자는 데가 좀 많았겠냐고. 사실 많았거든. 미사리라든지 나이트 클럽이라든지 이런 데서 많이 찾고 그랬어. 근데 나는 그게 본능적으로 싫더라구. 그렇게 되면 수입은 좋을 거야, 아마. 근데 내 생각에는, 자꾸 내가 타성에 젖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난 뭔가 더 만들고 싶어 하니까. 창작하는 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거든?

 

 

퍼> 타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타성이나 관습, 먹고 살아가는 문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아마 구속으로 또는 가슴을 누르는 걸로 많이 작용하시는 거 같은데, 혹시 그런 게 유년의 기억들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답답함이나 우울, 타성에 젖는 것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들.

 

강> 아마 그게 내 무의식 속에 아마 유년의 환경, 가정환경이라는 게 경제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아니고 내성적이고 그런 성격이었다는 게, 어릴 때 아버지도 안 계셨고, 아이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프라이드를 느끼고 그러잖아. 근데 어릴 때부터 좀 그런 환경이다 보니까 잘 표현은 못하고, 지금 내가 생각해볼 때 아마 그게 내 성격적인 영향을 주긴 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은..

 

 

퍼> 기존 인터뷰에서 안 들려주셨던 가족사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번 새 앨범에 대해서도 그런 기사가 많이 나왔더라구요. <명태>에 대해 아버지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강영걸이라는 본명을 내세웠을 때는 뿌리를 찾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라구요> 할 때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 홀어머니, 이북에서 오셨다고 그러셨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그런 것에 대해서 한 줄 정도의 기사로만 접했던 것들. 그리고 또 예전에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셨다든지. 음악을 하고 싶어서 뛰쳐나왔다 그런 얘기도 있고.

 

강> 이제 그냥 내가 살아온 얘기하면 되겠네, 쉽게 얘기해서. 그냥 지금까지 내가 그냥 살아온 방향이나 심리상태 그런 거 얘기하면 되겠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그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잠시 흐름을 끊고 담배부터 한 대 피우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나는 대뜸 시작부터 그의 개인사를 들으려한다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것은 능숙하게 흐름을 조절하지 못하는 초보 인터뷰어의 소심한 조심스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능숙한 인터뷰이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한동안 별다른 문답 없이 주욱 흘러갔다.


바람 찬 흥남 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강> 우리 가족을 이야기하려면 일단 우리 엄마부터 얘길 해야 돼. 우리 엄마가,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 한국 근대사예요. 엄마가 1926년생이시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 유년시절을 보냈겠죠. 그리고 해방이 되자 시집을 갔어. 근데 우리 엄마가 충청도 분이시고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뭐라 그럴까, 외할머니가 성품이 좋으신 분이어서 딸을 모질게 안 했나봐. 딸이 멍하게 자랐는데, 함경도로 시집을 갔어. 거기서 첫아이를 출산했는데 뭐 뇌염으로 죽었다나봐.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49년도, 지금의 우리 형이야. 근데 낳자마자 한 1년 됐는데 한국전쟁이 터졌잖아. 그때 아버지, 내 아버진 아니야, 내 육친의 아버진 아니야. 지금 얘기가 확 건너뛰어 버렸는데..

 

 

강산에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는 육친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전 남편이다.

 

 

어쨌든, 그때 전쟁이 났어. 근데 그때 아버지가 쉽게 얘기하면 인텔리였나봐. 학구파였고 계몽가였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땐 이데올로기의 시대이니까, 이념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내가 아마 추측하기로는 사회주의자 뭐 그런 사람이었나봐. 맡은 역할이 있었고 뭐 당장에 아이와 부인은 지켜야 되니까. 그때 전부 다 피난민들이 그 유명한 흥남부두로 갔어. 배에 실어가지고 거제도로, 그때 피난민들은 전부 다 거제도로 피난을 갔거든. 그 이후로 생사를 몰라. 그 이후로 삼팔선이 그어졌잖아. 신탁통치 되어가지고 소련군과 미군, 남한 북한 딱 그어졌잖아. 그러니까 이 엄마는 보며는 한국의 현대사를 보는 듯한, 그건 뭐 엄마뿐만 아니라 그 엄마세대가 그랬지. 태어나서 남의 나라 문화권에, 지금도 일제시대 노래를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끔 흥얼거리시고 추억도 있고. 일본 군가도 다 아실 정도니까. 그런 유년시절 보내다가 세상물정 모르고 시집을 갔고 갓난아기 낳자마자 또 전쟁이란 게 터져가지고 막 부랴부랴 피난 오게 됐고. 뭐도 모르고. 남편은, 난 여기 정리하고 내려갈게, 근데 그 이후로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그래서 이 엄마가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학교 같은 데서 그렇게 생활을 시작하셨겠지. 거기서 이래저래 아이랑 겨우 생활을 하는데 그러다가 그냥 세월이 흘러 버리는 거야.

 

 

그러던 중에 나를 낳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 이제 나의 아버지 얘긴데, 이 아버지 역시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이야. 이 사람도 함경도 사람이야. 북청 분인데, 북청 물장수 있잖아. 근데 이 분은 젊었을 때 독학해가지고 의학 공부해서 한의사였었나봐. 혼자 일본 유학도 갔다 오고 그랬나봐. 근데 이 분이 난리통에, 나도 사정을 잘 몰라, 아버지 쪽이니까, 어떻게 난리통에 자기만 오게 됐나봐. 그 이후로 끊어졌으니까. 근데 이 아버지는 연세가 좀 됐다고. 1902년생이시니까 우리 엄마랑 24살 차이지. 그렇게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났지.

 

 

퍼> 그럼 첫 번째 분은 전쟁통에 돌아가셨나 보죠?

강> 모르지.

 

퍼> 만약 살아 계시면 북쪽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실 수도 있겠네요.

강> 근데 우리 엄마 얘기로는 이 분이 출신성분 때문에 맨날 고초를 많이 당했대. 왜냐면 이 사람도 이북사람이 아니야. 이 사람도 남쪽 사람인데 거기서 출신성분 얘기 나오고 그랬대요. 어쨌든 거제에서 우리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아버지는 이북에 처자식을 두고 그런 연세의 사람이었지만 의사기술도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환경이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도 있고 고생하니까, 결혼하게 한 거지. 그래서 어머니랑 재혼을 하셨는데 거기서 우리 누나랑 내가 나왔어.

 

 

강산에의 부모님은 전쟁의 시대 속에 휘말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목적지도 모르는 피난의 길을 떠나야만 했던 실향민의 역사를 사신 분들이었다. 그 분들이 미처 자식들에게 내놓지 못하고 맺힌 말들을 강산에는 귀 기울여 보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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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 생각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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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생에 대해 한이 되게 많으셨겠다 싶더라고. 안 그렇겠어, 자기들이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누구를 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이란 걸로 인해 가지고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얼마나 그랬겠어. 근데 어찌됐든 그런 속에서 내가 나왔어. 우리 아버지가 예순 두 살 때 내가 나왔더라고, 나이로 따져보니까. 이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 근데 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셨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독. 그건 아마 정신적인 부분이 있겠지. 나중엔 심한 의처증, 이렇게 병적으로 됐었나봐. 옛날 얘기 엄마한테 들으면.. 아, 진짜 막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기 듣고 있으니까, 옛날 얘기.. 우리 형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얘기하는데, 평상시엔 괜찮으시다가 술만 먹으면 이 간나새끼, 함경도 사투리 나온대. 어느 정도 술을 드셨냐 하면 중독 말기가 되면 얼굴에 버짐 같은 게 일어난대요. 이걸 떼어 가면서 술을 먹었대. 그렇게 심하게 먹었대. 나중엔 노환과 술로 인해서 돌아가셨는데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 내가 많이 닮았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에 멍해. 이 아버지가 장롱에 쌓아둘 정도로 돈이 많았대요. 그리고 침술이 좋아가지고 명의로 거제도 바닥에서 강 의사, 강 의사 그러고 유명했었나봐. 근데 이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내가 들은 얘기로는 이런저런 사람 사업자금으로 빌려주고 뭐 그러고 죽은 거야. 우리 엄만 멍하게 있고 법적으로 대처도 못하고 이래저래 못하니까 빈털털이로. 그때 우리 엄마가 얘기하는데 만팔천 원인가 들고 우리 누나랑 나랑 형이랑 네 식구가 부산으로 왔대요. 나는 갓난아기였고. 더 이상 거제도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강> 그래서 나는 두 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았는데 엄마는 늘 일하러 다녔고 형도 일하러 나가고. 우리 형도 보면, 하고 싶은 공부를 못했어. 시대를 그렇게 타고 나가지고. 형이랑 나랑 열 네 살인가 열 다섯 살인가 차이 나는데 형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어. 누나는 누나대로 딸이라고 찬밥신세고. 그니까 내가 제일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지, 막내라고. 한편으로는 나에게 모든 기대감이 있게 됐고. 근데 우리 형 같은 경우는 또 월남전을 가게 돼. 하하.. 우리 형을 보며는 참, 불쌍한 사람이면서도 고마운 사람이지. 우리 형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거 같애. 버팀목이 딱 있으니까. 생각해봐.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놓고 월남전에 가는 거니까. 돈 때문에 가는 거잖아. 근데 형 같은 경우는 부상을 당해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일종의 상이용사야. 큰 장애는 아닌데 하튼 부상당하고 왔으니까. 지금은 멀쩡하지만 국가 유공자지. 덕분에 형은 애들 교육비를 혜택을 받았지. 형은 그렇게 했던 사람이고..

 

 

당시 전쟁의 포환을 피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왔던 많은 피난민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부산에 정착했다고 들었다. 부산의 자갈치 시장도 당시 월남한 피난민들이 생계의 방편으로 좌판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이 큰 장터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두 명의 남편을 떠나보내고 가진 것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건너가야 했던 강산에의 어머니 또한 아무런 기반 없이 출발해 힘든 삶을 지탱해야 했던 피난민으로서의 시절을 보내셨다. 다른 가족들 또한 집안의 생계를 위해 많은 어려움을 함께 겪었을 텐데 그중 강산에가 들려주는 형은 월남전이라는 고단한 세대의 징표를 지니신 분이셨고 아마도 집안의 가장과도 같은 역할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강산에 스스로도 버팀목이라고 말한 것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아버지의 몫을 감당했다는 뜻이겠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삶 일정부분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누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부과되었고. 강산에는 그래도 막내라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고 하지만 삶의 어려움을 짐 진 가족들을 보며 일찍부터 자기 혼자만의 세상을 꾸려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강> 하튼 엄마하고 보낸 시간이라는 게, 어릴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애. 그리고 엄마가 처음에 보험회사를 쭉 다니다가 언제부턴가 공장 기숙사, 사감 선생님으로 취직했어. 또 생활 같이 못하잖아. 그니까 어릴 때부터 줄곧 엄마랑 생활을 못하는 거야. 중학교 3학년 되니까 엄마가 재혼을 하셨어. 재혼도 따지고 보면 내 학비 때문이야. 우리 형이 벌었지만, 형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땐가 결혼을 해서 당장에 또 결혼살림이라는 게 있잖아.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교육비도 들어가고. 우리 누나 같은 경우는 그림을 굉장히 잘 그려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했는데 상업고등학교 가서 돈을 벌어야 된다, 이래 가지고 인문계를 못 간 거야. 그렇게 자기 꿈을 포기해야만 했지. 남은 게 난데 나는 공부를 계속 시켜야겠고 형은 그걸 꾸려 나가기 빠듯한 상황이었고. 그러다 엄마가 재혼하신 거지. 아마 우리 형이 리드를 했겠지. 환경이 비슷한 분이랑 결혼하셨어.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인데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렸지. 그후로 나는 엄마로부터 학비를 받았고.

그니까 결국은 어릴 때부터 엄마랑 오래 살아보지를 못했지. 내 어릴 때 기억을 보면 엄마가 회사 다닐 땐데, 회사 갔다 오면 내가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가서 기다리고.. 그때 굉장히 행복했던 거 같애. 엄마 오는 시간에 내가 정류소 앞에서 기다리고 엄마 오고 이런 기억.

 

 

정류소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아련한 끝맺음을 남겼던 것 같다. 때때로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은 세세한 정황은 떠오르지 않더라도 따뜻함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퍼> 어떤 결핍, 엄마든 아빠든 그런 품에 대한 어떤 그리움,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강> 있었을지도 모르죠. 근데 직접적으로 뭐 불만을 표현한 적도 없고 이게 불만인지도 사실 몰랐어. 그리고 늘 내가 가정환경 분위기가 범사에 감사하고..

 

퍼> 하하. 성경말씀에 나오는..

강> 그게 당연한 걸로 알았기 때문에. 어릴 때 내가 없는 것에 대해서 욱하면 딱 집 뛰쳐나가고 반항하고 그런 사춘기를 보낸 적이 없으니까.

강산에는 반항하는 사춘기를 보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강산에의 세 번째 앨범 제목이 <나는 사춘기>인 것이 생각난다. 뒤늦은 사춘기를 그제서야 보냈던 것일까.

 

학교 · 교회 · 집

 

 

퍼> 어디서 읽어보니까 학교, 교회, 집밖에 몰랐다고 그러더라구요. 지금 보니까 정말 그러셨을 것 같아요.

강> 겉으로만 보면. 속은 인제 자기도 뭔지 모르는. 뭐 몰랐는데 원래 이래야 되는 건 줄 알고. 진짜로 생활 바운더리가 그냥 학교, 교회. 가만 생각해보면 그때 제일 재밌었던 게 사실 교회지.

이제 나는 어릴 때 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게 자기 안에서밖에 살 수 없었던 거 아냐. 꿈이나 자기 안의 소망이나 희망이나.. 왜냐면 엄마를 늘 보고 살아야 되는데 늘 엄마는 직장 갔다 오고..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우리 집안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었지. 그리고 그게 내 놀이터였어. 친구들 사귀는 장소. 그게 내 안에서 일종의 학교 아닌 또 다른 학교 같은 그런 곳이었지.

그리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그나마 제일 많았었던 거 같애. 동네고 하니까 고추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고 놀고. 노래자랑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그런 걸로 나를 표현을 하는 거지. 인정받고 그러니까.. 나를 유일하게 표현하는 곳이었지.

근데 학교 가면 뭐가 프레셔됐는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는 그게 부담으로 왔는지 잘 몰랐는데.. 학교를 가게 됐는데 내가 아마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던 거 같아. 그리고 특히 중학교 때까지 내가 회장, 반장, 부반장, 이런 거 했나봐. 했어. 하하. 어릴 때 놀 때도 보면 친구들 말이 내가 그랬대요. 보면 애들 사이에서도 움직이는 애가 있잖아. 내가 그런 식으로 했나봐. 그런 게 있다 보니까 국민학교 때 내가 꼭 반장 하고 부반장 하고 했었어.

 

공부도 잘하고 반장 부반장이었던 강산에라. 사실 의외인 부분일 수 있는데 본인도 쑥스러운지 말미를 ‘했나봐’ 라고 붙이며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근데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창피한 기억인데. 학교 다닐 때 보면 그 호구조사, 가정환경.. 그리고 그때 육성회비라 그랬는데, 육성회비가 면제도 있고 150원 있고 600원이면 비싼 등급이야. 왠지 그 600원 내는 애들이 부럽고 막 그랬을 때인 거야. 회장은 뭔가 많이 내야 될 거 같은데, 그때 일본말인데 뒷돈, 그때 와이료라 그랬거든? 엄마가 찾아가고 그런 거. 근데 우리 엄마는 학교 한번 와본 적이 없었거든. 뭐 그 정도는 내가 충분히 교육을 받아서 감수할 수 있었는데 제일 창피했던 기억은, 내가 그때 꿈이 뭐였냐며는 소풍가방. 보통 소풍가방이 따로 나와요. 이놈의 소풍가방 한번 딱 사 가지고 소풍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 나는 소풍만 되면 정말 힘든 거야. 앞에 나가서 딱 서고 이러는 앤데 (웃음) 소풍 가며는 맨날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가야 되니까. 그 보자기 도시락, 그게 어릴 때 그렇게 창피하더라고. 뭐 내용물은 없다 하더라도 소풍가방 딱 메고 앞에 서 가고 그러고 싶었는데, 그걸 엄마가 못해줄 정도였으니까. 그런 게 창피했었던 그런 시절이었거든.

근데 그나마 그래도 내가 앞에서 이렇게 반장도 하고 그럴 수 있었던 건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내 끼를 발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 근데 그것도 중학교 고등학교 갈수록 바뀐 게 또 전혀 모르는 아이들하고 섞이잖아. 늘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아닌 애들이 섞이는 그런 환경 속에서, 또 학교 제도적인 거나 이런 게 점점 내 말문을 막더라고. 완전히 내성적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얼마 전에 홈커밍데이라고 20년만에 갔거든. 물론 인제 연예인이니까 (웃음) 관심의 대상은 되는데. 담임선생님도 놀래니까.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가, 학교에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던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하하.

 

 

퍼> 교회는 경제적인 거나 이런 거 따지지 않는데. 학교에서는 남들이 보면 막 뒷돈 갖다 주고, 엄마들 자주 학교 와야 되고..

강> 어릴 때 진짜 늘, 혼자 그냥 조용히 속으로만.. 우리 집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퍼> 조숙하셨네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 보면 이제 인간세상이 어떻게 굴러간다는 걸 아니까 부모님께 요구하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는 거죠.

강> 나는 요구는 안 했어. 내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게 계속 쌓이더라고, 어느 순간에.

 

 

퍼> 교회라는 곳이 자기를 표현하고 끼를 드러내고 자기를 긍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인 거 같은데.. 그러면 교회는 언제 안 다니게 됐습니까.

강> 그냥 자연히. 환경적인 영향이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랑 멀어졌어. 지금 같은 경우 내 처는 교회를 다니고 있거든. 나는 신앙이라는 게 인간의 기본적인 두려움이나 그 어느 것이든지 간에 결국 신, 하나님, 신앙, 이런 부분들은 일대일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게 내가 계속 궁금해하고 있는 부분이지.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은 안 하고.

 

퍼> 아버지는 사람마다 다양한 의미로 다가올 텐데 그러면 아버지를 떠올리실 때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남아있습니까. 혹시 아버지 하면 어떤 대상으로 떠오르십니까.

강> 그런 이미지 작용할만한 게 없다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잖아. 내가 아버님이라고 하는데 전엔 그게 되게 쑥스러웠어. 지금은 좀 안 쑥스러워졌는데 그때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내겐 무척 생소했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굉장히 쑥스러웠다니깐.

 

퍼> <강영걸>이라는 자신의 본명을 내건 앨범을 내셨잖아요. 어느 기사에서 본 게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건 몸뚱아리 외에 유일하게 이름이란 게 있다.” 결국 그 이름을 되찾는다고 하는 것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건데, 그러면 그때의 그 아버지가 지금 어떤 의미인 거예요.

강> 결국 내가 여기 있게 한 원인 제공자잖아. 원인자. 그럴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만은 일단 여기 내가 있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제 내가 또 어떤 원하는 게 있더라구. 이제까지 내가 늘 받는 거만 생각하다가, 아마 이게 내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주니어를 생각하고 있거든.

 

퍼> 받았던 사랑을 또는 받지 못했던 사랑을 2세한테 주고 싶다?

강> 아마 나름대로 의미를 찾자면.

 

길들여져 왔던 깊은 잠에서 깨어

 

 

퍼> 제가 처음에 뭔가 구속받지 않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구가 느껴진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가난에 대한 것 또는 충족되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건지. 근데 거기서 억압이라든지 속박 이런 건 느껴지지 않거든요.

강> 우리가 살다보며는 현실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잖아요. 근데 그게 자기가 의식을 하든 하고 있는지조차 못 느끼든 간에 어쨌든 분명히 내가 저장을 하고 있을 텐데.

쉽게 얘기해서 내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가면서 굳이 서울로 환경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그 테두리가 싫었거든. 그 부산에 형 밑에서. 그니깐 형이 싫었다기보다는 그 환경이. 뭐 어릴 때부터 집에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엄마가 있고 야단을 맞더라도 그런 아버지가 있고 그게 아니었고. 형이 좀 무섭지. 무서운데다가 또 한참 사춘기고 이럴 땐데.

 

내가 굳이 한의대를 선택한 이유가 부산에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있었지만 그때 거기에 한의대가 없었어. (웃음) 근데 그게 아주 절묘했던 게, 어느 날 인제 내가 입시생 땐데, 그때 교회 어른들에게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의 이미지가 있으니까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우리 집에 와 가지고 영걸이를 어디로 보낼 건가. 그 분이 미래에 전망이 좋은, 뭐 이런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왔는데 한의과에 대해서 나와 있었어. 형이랑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그때 나 혼자 생각한 거야. 나는 사실 그때 앞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뭘 해야 할지도 몰랐는데 우리 때 개념은 사회에서 나와 가지고 흔히 출세하려면 일단은 그냥 의대 법대 상대, 이렇게 가야 되는 거야. 취직 잘하고 이러니까. 뭘 전공한다, 이런 개념은 아니었던 거 같애. 나 역시도 그랬었고. 그럼 의대? 근데 의대는 부산의대도 있고.. 생각해보는 거야, 학교를 여기서 다니며는 계속 이 생활이 반복된다는 생각에 (웃음) 서울로 갈 수 있는 걸 생각해보니까 마침 경희대 한의대가 있더라구. 그게 또 아주 좋은 게 우리 아버지가 한의사였다는 거.

 

 

퍼>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걸 꼭 믿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를 싫어하는데도 어느 순간 어떤 모습이 닮아있더라. 저는 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한의대 하셨다길래 그런 계기가 있었나 했죠.

강> 생각은 했는데 꿈을 가질 수 있는 배경을 해준 건 아니고.. 나는 그냥 모나지 않게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계속 보고 있다가 어느 날 구멍이 딱 보여 가지고 그냥 나온 거야.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또 그 공부를 그냥 했어도 나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긴 해. 왜냐며는 의술이란 자체가 참 고귀한 거잖아. 인술이란 거. 이것도 사실 굉장히 가치 있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

 

 

한의대를 선택한 것이 그때 부산을 벗어나기 위해 구멍을 엿보다가 빠져 나온 거라고 한다. 가족 안에서의 흐름에 조용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드러내지 않은 속내에는 일탈의 순간을 엿보는 눈치작전이 뜨겁게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의 선택이 현재의 자신으로까지 이어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퍼> 그때 그 대학에 다니다가 후에 자퇴를 하셨지요? 그때 음악이라는 길을 자기 길로 하고자 하신 건가요? 한의대라는 길이 아닌.

강> 아, 그니까 재밌는 게 음악이라는 것도 내가 어느 날 캬, 그래 나는 앞으로 꿈을 가지고 음악을 해야 되겠다, 이게 아니라 그냥 나는 어떤 환경에 들어가 있는 거야. 그 환경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

 

 

재미있게도 한의대를 선택했을 때에도 비장한 각오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하게 된 것 또한 그리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저 어떤 환경에 놓여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고 해야 할까. 다니던 학교(그것도 소위 명문대라고들 하는)도 때려치우고 인생을 걸어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인간극장식으로 말하기에는 좀 밍밍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식의. 근데 사실 그게 더 무서운 것이다. 그저 그렇게 졸졸 흘러가는 듯 보이는 시냇물도 결국은 바다로 향하고야 마는 필연의 매커니즘이 몇 가지 키워드를 찍어가며 흥미롭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어느 날 대학을 왔죠. 오긴 왔지만 보니까 이 현실을 지탱해야 되잖아. 대학등록금은 아버지한테 받았지. 근데 또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되잖아. 2인 기준 하숙비가 15만원 할 때거든? 자취라는 건 나한테는 엄두도 안 나고. 근데 그때 교회 감리교 재단에서 만든 기숙사가 있어요.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민우학사’라고 북아현동에 있어요. 부산에서 다니던 교회가 감리교 재단이었는데 지방 감리교재단의 목사님들이 추천을 해 가지고, 내가 거길 들어갔지. 거기가 그때 오만 칠천 원이었거든? 그 돈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도시락까지 싸주고 딱이었지. 그리고 용돈이라고는 그때 기숙사비 하고 한 오천 원 남았나. 한 달 회수권 하면 땡이었지.

 

대학교 다닐 때도 스트레스 똑같이 받더라고. 어릴 때는 소풍가방 내지는 회비 이런 수준에서의 경제적 고민들이었지만 대학교 오니까 또 다른 게 뭐냐며는 하다못해 레포트 용지도 다 돈이야. 진짜 돈이야. 모든 게 돈이고, 그담에 친구들. 그때만 해도 난 술 담배 안 했거든. 그때 내 사고가 술 담배 하면 나쁜 사람인줄 알았어. (웃음) 애들 다 막 고삐 풀렸잖아. 특히 애들 보니까 공부만 했던 애들 같애. 어디서 담배 하나씩 꺼내 가지고 담배 피우러 가고 그렇게 친해져 가지고 방과후에 다방 같은 데 들어가고. 친하곤 싶은데 다 돈이잖아. 그러니까 자꾸 그런 거 스트레스 받더라고. 만나고 싶고 놀고는 싶은데. 점심 먹으러 가자, 해서 다들 나가고. 애들 대부분 도시락 안 싸오더라고. (웃음)

 

 

퍼> 그러면 어떤 기사 보면 음악을 하기 위해서 자퇴했다, 그건 완전히 뻥이네요.

강> 아니지, 전혀.

 

퍼> 아, 그럼 전혀 뻥은 아니고..

강> 아니, 뻥이라고. (웃음) 그건 기자 생각이지. 하하.

 

퍼> 그럼 돈 때문에 자퇴했다는 것도 완전히 진실은 아니고요.

강> 그렇지.

 

 

퍼> 어떤 기사에서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 자퇴했고, 돈이 없어서란 데도 있고.. 학비가 없고 그 정도로 어려웠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강> 당연히 학비 없고, 그 정도로 어려웠지. 그 다음에 이제 여러 가지로 복합적인 거지. 그런 외적인 환경과 또 하나는 나의 내적인 충격. 심리적으로 뭐가 충격을 받느냐 하면 아까 학교, 교회, 집밖에 몰랐다 그랬잖아. 안 그래도 프레셔한 애가 속은 막 무한한데 일단 와서 딱 보니까 어, 세상이 난리가 났대. 뭐가 난리가 났냐며는, 그때 한참 데모할 때예요. 내가 82학번이니까 전두환 때 아냐. 5공 때잖아. 데모하는 거야. 데모란 거는 내가 고등학교 때 그 테두리에서 전해주는 것만 듣고 일종의 세뇌만 받았던 건데. 지면상으로나 뉴스 상으로나 봤을 때 아, 저거는 공산당, 빨갱이, (웃음) 적색분자들이 섞여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실이 그런 줄 알았어. 사회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대학도 TV 프로그램에선 낭만 뭐 이런 게 있었는데 와서 보니까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더라? 고등학교 때랑 조금 달라진 건 여학생들 볼 수 있는 거. 그담에 마음대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고 이런 거 외에는.. 써클에 대한 기대도 많았거든? 무슨 써클에 가입할까. 이름 보면 ‘백록담’, ‘백합’.. 이런 언어가 주는 느낌이 딱딱하고. 옛날 어릴 때 교회에서의 내 정서적인 환경이라는 게 소풍 같은 느낌인데. 굉장히 딱딱하더라구. 알고 보니까 대부분 정치적인 게 많고 반정부적인 그런 거고. 무서워서 가지를 못 하겠더라고. (웃음) 그러다가 찾던 중에 보니까 아, 이거다 싶었던 게 ‘글리’ 라고 해 가지고 경희대 합창단. (웃음) 아 저거다 해 가지고 써클은 거길 가입했어.

 

 

퍼> 그러면 자퇴하기 전에 음악과도 연결이 있었던 건가요.

강> 음악이라고 할 순 없고. 대학을 뭘로 연결시켰냐면 밝고 환하고 즐거운, 이런 쪽으로. 놀고 소풍가고, 이랬었나봐.

 

퍼> 어머니께서 낯선 환경으로 시집오실 때와 비슷한 거네요. 하하.

강> 그때부터 애가 쇼크를 받기 시작하더라고. 어, 왜 이렇게 다르지. 내가 있던 기숙사에는 대부분 서울대, 연대, 고대 이런 아이들이었는데 여기서도 정치 얘기하고. 거기서 귀동냥하는 거야. 군대 가기 시작하고. 세상이 그랬어. 그때부터 짜증내기 시작하고 사회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더라고. 학교는 한번 빠지니까 두 번 빠지고 두 번 빠지니까 학교 가기 싫어지고. 그래서 슬슬 주변 친구들 연대 다니고 그런 애들 따라 걔네들 학교 가 가지고 (웃음) 여긴 어떻게 하나 걔네들 강의도 한번 들어보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서 겪는 문화적 충격은 꽤 컸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라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대였고. 익숙한 테두리를 벗어나 처음 맛보는 세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소풍이었을 것이다.

 

백마 화사랑

 

 

강> 그런 식으로 있다가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재수생이 있어. 그림 그리는 재수생이 있었는데 걔는 제주도 아이야. 이 아이가 나랑 좀 친했거든. 정서가 맞는 거야. 정치적인 이런 건 정서에 안 맞고. 이 아이는 맨날 시 쓰고 그림 그리고 또 통기타로 노래하고 이러니까. 이 아이랑 노는 게 재밌어.

근데 이 아이가 어느 날 기숙사를 나갔어. 자기 작업실을 시골에 구해 나간다고. 난 혼자 학교는 안가고 점점 계속 쌓이는데 학교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네.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 얘를 학교에서 딱 봤는데 미술재료를 구하려고 왔대. 자기가 지금 경기도 백마라는 데, 지금 일산인, 거기서 뭐 방이 싸니까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다고. 그래서 연락처 주고받고.

난 학교를 안 가게 되고 보니 할 일이 없잖아. 어느 날 있다가 갑자기 그 아이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애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갔지. 얘를 만났지. 근데 얘가 나를 데려간 곳이 아까 얘기한 옛날 백마 화사랑. 지금은 없어졌어. 그때 백마엔 아무 것도 없었어. 기차를 타고.. 아까 기차 타고 왔다 그랬지? <예럴랄라>가 거기서 나온 거야. 어떤 그 정서들이. 진짜 숨이 확 트이잖아. 특히 여름에 벌판이 쫘악 열려 있는데 화물칸 문 열어놓고.. 그 완행열차 같이 생긴.. 기분 진짜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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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럴랄라>

예럴랄라 햇살이 부서져 예럴랄라 하늘이 높으다

예럴랄라 평온한 바람이 흘러흘러 시원한 들판은 넓다

풀냄새 참 흙냄새 참 오래간만이네

 기분이 좋아 천국 같은 세상이야

 야호 나는 살아있네

이런 날엔 혼자라도 불만없어

답답했던 모든 걱정 잊혀지니

하모니카 입에 물고 예럴랄라

 예럴랄라 새들이 날으네 예럴랄라 자유는 참 좋아

예럴랄라 기차는 시원히 달려가네

어쩔 줄 몰라라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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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역에 딱 내렸는데 백마강 이런 생각나고. (웃음) 진짜 썰렁하게 간이역이고 아무 것도 없고. 철길 따라 주욱 와보니까 조그만 데가 있어. 그때 또 쇼크 받은 게 보니까 목재 테이블에 전원적인 분위기, 바닥에 촛농도 막 이렇게 쌓여있고 천장은 지푸라기에.. 내가 처음 보는 풍경인 거야. 지금은 돈을 들여서 인공적으로라도 전원적인 거를 꾸미잖아. 근데 그곳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세월이 흘러서 이래 돼 가지고 자연스럽게 목가적인 그 분위기가 딱 연출되어 있으니까.. 안에 들어가니까 뭔가 편안한 거야.

 

 

퍼> 가고 싶었던 대학이네요. 하하.

강> 아까 그 가게 주인, 그 형이 그때 27살, 나 20살 때 첫 대면을 한 거지. 그 때 테이블에 여학생들도 있고. 이 주변에 학교가 있냐고 내가 물어봤어. 다 서울에서 왔대. 아이들은 어떻게 이 공간을 알고 왔을까? 그 정도로 내가 그때 이 공간이 앙증스러웠고 아, 이런 데가 있구나 싶고. 무슨 내가 살맛 난 거 같애. (웃음) 바깥에는 철길이지요 벌판이지요 아무도 없지요 안에는 보니까 막 음악은 흐르지요 막걸리는 있지요 흙 냄새 나고.. 그땐 그게 너무 좋았지. 그래서 그게 계기가 돼서 결국에는.. 그날 당연히 술을 한 잔하고 같이 친구 작업실로 갔지. 그게 시작이었지. 그날 부로 이 친구 작업실에 눌러 앉았지. 결국 내가 기숙사를 짐 싸서 나오게 되고.

 

 

옛 화사랑을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평화로워 보였다.

 

 

퍼> 그럼 기숙사 나오고 학교 그만두고 이 카페 와서 친구 작업실에 가 있고 그러면서 음악을 하게 된 거예요?

강> 아냐, 학교는 그냥 안 간 상태고.

 

퍼> 그럼 자연히 자퇴

강> 자퇴는 나중에. 학교를 하도 안 가게 되다보니까 안 되겠더라구. 그래서 일단 휴학계를 냈지. 여기가 편하고 너무 좋으니까. 그때 그곳이 나는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지금은 내 가슴속에 아마 영원히, 당시 그곳의 흔적은 다 사라졌지마는.. 그때 느낌이라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거야. 그때 진짜 최고였지, 진짜. 상업적인 냄새도 안 나고. 그니까 그때 뭐 음악 하는 사람, 시인, 그림 그리는 사람, 주로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많이 왔고 그리고 나머지는 학생들이고. 그니까 얘기하고 시간 보내는데 최고의 장소였지. 그리고 뭐 그때 그렇게 북적대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기차가 한 시간마다 오는데 많이 오면 열 팀 오니까 같이 어울려 놀고 막 이랬지. 그땐 우연히 들른 술집이었기 때문에 내가 거기 눌러 앉는다고는 생각을 안 했지. 단순히 이 친구 집이 일단 편하니까 있다가 또 이 카페 와서 노는 거야.

근데 어느 날 친구 작업실에서 자고 있는데 카페 주인, 이 형이 나를 찾아 왔어. “산에야.”

 

 

여기서 잠깐 강산에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일화가 소개된다.

 

 

강> 아, 근데 그때도 내가 산에란 이름을 쓰고 있었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 이 그림 그리는 친구가 그냥 이야기를 해도 될걸 항상 학원에 학생들 공부 가르치러 나갈 때 꼭 머리맡에 편지를 놔두고 가요. 시 쓰고 이런 걸 좋아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편지를 딱 뜯어보니까 사랑하는 친구 강산에 군에게, 딱 이렇게 썼더라고. 분명히 나한테 쓴 건데. 어우, 좋더라구. 하하. 알았다, 이게 인제 내 이름이다. 그래서 내가 그 강산에란 이름을 가졌거든.퍼> 그거에 대해서 설명을 안 해줬어요? 왜 그런 이름을 지어준 건지.강> 글쎄, 걔가 왜 그랬는지, 나한테 그런 이미지가 있었는지, 아니면.. 뭔진 잘 모르겠어. 지는 구씨인데 지 이름을 이리라고 했거든. 구이리. 걔 원래 이름은 구양숙이야. (웃음)

 

 

강산에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 궁금했는데 그것도 화사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강산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있는데 강산‘에’라서 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래서 “산에야, 카페로 누가 찾아왔다.” 처음에 난 우리 집에서 온 줄 알고 어, 누가 찾아왔느냐고. 뭐 가족들은 아닌 거 같고 가보니까 전에 한번 놀았던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하고 찾았던 거야. 같이 놀았지. 그 당시 놀 수 있었던 도구가 노래, 같이 노래하는 거. 통기타가 있으니까. 수준이라는 게 뭐 책 펴놓고 코드 치면서 노래하고 이런 식이었는데. 점점 사람들이 나를 두고 그 노래하는 사람 어디 갔냐고, 노래하던 가수 어디 갔냐고, (웃음) 이런 식으로 되어버린 거야. 그러니까 이 형이 점점 나를 데리러 오는 횟수가 많아지는 거야. 맨날 “산에야, 누가 찾아왔다.” 또 가고. 그러니까 매일 출근하게 되더라고. 그 가게랑 친구 작업실이랑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기 때문에 철길 따라서. 맨날 오토바이 타고 가야 되는 거리인데도 매일 갔지.

이 형이랑 인제 같이 놀고 얻어먹고 뭐 그러던 차인데 그 주인 누나가 나보고 “산에야, 너 지금 학교는 어떻게 돼있냐.” 그때는 내가 일부러 안 나가고 있었지만은, 휴학중입니다. “아, 그러면 우리 집 좀 도와주지 않을래.”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 (웃음) 예, 해 가지고. 식구처럼. 내가 이 형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내가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먹여주고 재워주고, 내가 서울 올라간다 그러면 용돈 주고 그런 개념이었거든. 그렇게 좋아했었어. 나도 좋았고. 근데 어느 날 보니 난 인제 거기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는 거야. 오면 내가 일종의 분위기 담당하는 거지. 오늘은 손님들 오면 서빙도 했다가 내가 몸이 근질근질하면 노래하고 판도 틀고. “아, 아저씨 노래해주세요.” 그게 점점 노하우가 생겨 가지고 어느 날 보니까 내가 화사랑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되어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끔 신촌에 나가잖아? 나가면 그때 이대 학생들이 많이 왔거든? 연대생들도 많이 왔고. 신촌이 가까우니까. 이대생들이 알아볼 정도였으니까. “아, 아저씨,” 이러고. 그때도 인기 있었어, (웃음) 아마추어였는데도.

 

그때의 그 형제들 중 막내형이 바로 서두에 잠깐 소개했던 김원조 씨이다. 후에 강산에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원조 씨가 막걸리, 사랑, 자유.. 8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상징했던 백마 화사랑을 기억하며 만든 웹사이트에서 발견한 사진이다. “옆에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은 가수 강산에이다. 물론 데뷔하기 전의 모습이지만 그는 절정의 인기를 얻게된 이후에도 한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덕분에 우리 집은 그를 찾아오는 팬들로 인해 자주 시끌시끌해지곤 하였다.”

 

퍼> 그때의 강산에는 어땠나요.

김원조> 뭐 그때나 지금이나 미남이지. 잘생겼잖아. 그때 막 학교 들어갔을 땐데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은 시기였지. 경희대 한의과, 맞는 인생인가. 제주도 친구가 우리 집 옆에다 숙소 겸 작업실을 열었어. 그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인생 망가지고.

 

퍼> 행복하게 잘 찾아간 거 같은데요. 복 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김원조> 복이 많은 편이죠.

 

 

강> 그 생활이 나는 너무 좋지. 학교는 뭐 이미. 근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싶더라고.. 이제 여길 통해서 연극하는 사람, 그림 하는 사람, 인생의 선배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나한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계속해라. 임마, 그래도 공부해라.” 어떤 사람은, “니 하고 싶은 거 해.” (웃음)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여름방학이라고 집엘 내려갔어. 내려가야 되잖아. 휴학했다는 걸 알리면 안되니까. 그때는 금의환향인 거지. (웃음) 근데 집에 있는 그 시간이 난 미치겠는거야. 그래서 집을 나와버렸어. 무작정 나와버린 거야. 인제 무전여행을 하게 됐지. 돈이 없으니까. 그때 처음 가출이란 걸 하고 결국 내가 집에 돌아온 게 인제 한 달 반 정도 됐더라구.이미 새 학기는 시작된 때였고. 그니까 자연스럽게 들킨 거지. 난 포기하고 들어갔는데 이미 집에서는 형이 알아볼 거 다 알아봤지. 아, 얘가 휴학을 냈구나. 인제 어머님한테 야단도 맞고 형님한테 야단도 맞고. 그러다가 이제 형은 “네가 마음 정리 되는대로 다시 복학해라.” 난 이제 조용히 생각을 하고 있었어. 생각을 하는데 그때 인제 엄마한테 처음 내가 뺨을 한 대 맞았던 일이 있었지.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식구들끼리 밥을 먹다가 TV에서 뉴스를 하고 있는데, 그 동안 내가 이 사회를 보는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 딱 보는데 기분 되게 나쁜 거야. 내가 뭐라 뭐라고 떠들더라고. 엄마가 놀래가지고, (웃음) 형이 화를 내고.. 그니까 그때는 내가 귀동냥으로 듣기도 했고 사회를 나름대로 보고 막 얘기를 했어. 어머니, 뭐 세상이 이렇게 어쩌고 저쩌고.. 생각만 하고 있던 걸 막 드러낸 거지.

 

 

그때의 강산에는 이미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환경 속에 놓여 부대끼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다르게 뜨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이제 생각해보는데 내가 잠시 냉정을 잃었단 생각이 들더라고. 현실에서 지금 내가 직시해야 할 부분, 어머님에 대한 생각을. 그래 갖고 시간을 좀 보내고 “복학하겠습니다.” 다시 가면 공부를 해야 되겠다,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올라갔지.

복학을 했어. 열심히 다녔어. 중간고사를 또 쳤지. 근데 인제는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더라고. 시험을 딱 쳐놓고 답답하니까 가는 곳은 화사랑. 여기 오니까 또 가기 싫지. 고민을 또 하다가 하다가 어느 날 마음먹었어. 아, 나 학교 그만 다녀야겠다. (웃음) 근데 처음엔 학교 그만 두는 거 자체가 좀 겁이 나더라고. 혹시 내가 또 나중?div id=”article-content” class=”text-content”>

 

3. 바다를 건너는 나비

 

 

강> 그때 내가 내 처를 알게 되는데 그때가 1987년이거든. 그땐 내 처와 친구관계였는데 “일본에 한번 놀러 가지 않겠니.”그랬지. 나야 좋지, 다른 세계를 가자는데. 난 그때 뭐 가진 게 없으니까 겁이 없었거든. 내가 늘 자신만만했을 때였지. 구경 시켜준다니까 그래 가자, 가는데 그게 진짜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인 게, 가치관이 확 완전히 변하게 되더라고. 내가 결정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가 내가 처했던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 물론 내가 원해서 바꾼 건 아니야, 어느 날 그런 환경이 와 가지고 가게 된 건데.. 사실 그 환경이라는 게 내가 사는 환경이거든. 거기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부분들인데, 사람이 그 환경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가치관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강산에는 줄곧 덧붙이기를, 자신이 원해서 환경을 바꾸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러한 환경이 자신에게 “왔다”고 표현했다. 또한 그로 인해서 많은 것이 바뀌었고 결국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퍼> 거기서 주로 뭘 보셨나요.

강> 사는 걸 봤지.

 

퍼> 뭔가 색다른 거였나요?

강> 그때 나한텐 색다른 거였지. 쉽게 예를 들어서 공항에 내렸는데 냄새가 뭔가 달라요. 그니까 우리가 익숙해짐이라는 게, 늘 이 공기 속에 있다가 다른 나라 가면 냄새가 다르지. 그런 게 있어요. 처음에 딱 가면 내가 거기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보고 있잖아. 말을 못 알아 들으니까. 이상한 소리로 서로 통하고 있고. 지금은 좀 알아듣지만. 또 리무진 탔는데 차가 왼쪽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내가 유학생 입장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든지 그런 게 아니잖아. 아무 경험 없는 아이가 정말 빠르게 그쪽 삶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언어문제도 답답했지. 난 당연히 일본 말 전혀 못하고 와이프도 한국말 잘 못하고. 그래도 얘가 한국말 조금 알아듣는 정도였지. 그러다 몇 개월 되니까 말은 잘 못하더라도 귀가 좀 트이더라고. 그렇게 한 1년 정도 있었지.

처음에는 얘가 놀러오라고 해서 같이 놀러간 거였어. 비자가 보름 비자니까 이것저것 구경하고 왔지. 근데 여기가 재밌는 거지.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얘가 일본에 있다가 나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또 부르는 거야. 난 또 갔지. 그러다 얘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할 바에야 한 일년 정도라도 있어보면 어떨까 했나봐.

 

퍼> 그때 많이 좋아하고 그러셨던 거 같아요.

강> 걔가 나한테 완전히 갔지. (웃음) 그랬던 거 같애. 우리 만남도 그랬었어. 내가 그때는, 나는 멍하다 그랬잖아. 진짜 난 평상시에 멍해.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도 나는 몰랐었어. 나중에 이 아이가 나한테 고백을 해서 알았어. 그 동안의 행동들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구나 알게 됐었어. 나는 만나고 있으면서도 몰랐었거든. 난 내가 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고. 나는 그냥 멍하고 있었는데 얘는 나를 그렇게 좋아했더라구. 근데 그게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다는 거야. 그니깐 나는 기분이 좋지. 근데 이 아이는 딸만 셋인 집안인데 믿음이 있었나봐, 기독교. 근데 이 큰 딸이 어디서 애인이라고 데려왔는데 그것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멍한 애 한 명 와 가지고. 뭘 하냐니까 하는 거 없잖아. 하는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뭐 아무 비전이라고는 제로인 아를 데려왔는데. 그래도 그 집에서 이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잖아. 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냥 있는 거지. 나야 뭐 간다, 이러면 그만이니까.

그러고 보면 내 와이프에게 참 감사한 부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딱 데려가 가지고 발전의 많은 계기를 마련해줬지. 내가 배우기도 정말 많이 배웠으니까. 지금도 느끼고 있고.

 

 

강산에의 아내 다카하시 미에꼬. 후에 더 언급되겠지만 이 분을 빼놓고 강산에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 이상은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한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초대자인 찐빵 안정혜 씨는 미에꼬를 이렇게 소개했다. (안정혜 씨는 <강영걸> 앨범 재킷을 디자인한 강산에의 친구이다.)

 

 

가수 강산에 씨의 하우스 매니저

배고프고 외로운 젊은 음악인들의 따뜻한 형수님

아직도 핸드폰이 없는 귀여운 전업주부

다까하시 미에꼬 여사를 소개합니다

 

 

 

하튼 그러고 있는데 감성이 좀 예민했던 건지 내가 잘 배우더라구. 흔히 발전이라는 부분 있잖아. 최근에 발전이라는 부분을 생각해보는데 내가 거기서 참 발전을 많이 했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내가 만약 화를 못 참아서 욱하고 지나가다 쓰레기통 찬다거나 부순다거나 그런 게 없어졌어. 그 것만 해도 발전인 거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잖아. 나이 들어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의식의 확장이라면 확장이고 발전이라면 발전이고.. 하여튼 의식이나 가치관이 다른 환경 속에서 내가 살아온 문화와 많이 비교도 하면서 서로 갭도 많이 느꼈지. 그렇게 거기 있으면서 많이 바뀌더라고.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것도 많이 바뀐 게 그전에 한국에 있을 때는 아, 내가 무엇을 해야 되지, 이것도 해보고 또 안되면 저것도 해보고 그래서 음악인가, 아, 그래 음악이다. 막연하게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지만 가수가 돼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아이가. 여기 와보니까 음악을 할 수 있는 채널이 너무 다양한 거야. 가수라는 직업을 갖지 않고도 음악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직장생활 하면서도 밴드 만들어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추어 밴드도 너무 많은 거야. 다 기타들고 다니고. 지금 우리도 홍대 앞에 가보면 기타 메고 다니는 아이들 많이 볼 수 있지. 옛날에는 한국 안 그랬거든. 그때 내가 일본 가서 살던 곳이 그런 거야. 일단 패션부터가 막 가죽잠바에 너무 다양하고 또 그런 걸 사람들이 그냥 바라보고 그러려니 하고. 한국에서는 그냥 난리가 나지. 모든 사람의 시선의 대상이 될 사람들인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얼마나 쇼크겠냐.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니까 스톱이 되어 있더라구. 마치 내가 화사랑에서 학교를 갔을 때처럼. 심리적으로 내가 꼭 일본에서 20여 년을 살다온 것처럼. 1년 살았는데. 딱 돌아보니까 내가 변해 있더라구. 늘 놀던 친구들이랑도 달라졌고. 사고에 유연성이 생겼다고 할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어쨌든 내가 여러 가지로 다각도로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구. 예를 들어서 음악을 직업적으로 갖지 않고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더란 거. 직업이란 프레셔를 안 갖고. 그러니까 내가 꼭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부담을 비어버린 거야.

인제 일본이라는 곳에서 이 아이가 얘기하기를 내가 거기 오래 있으려면 비자 문제가 있으니까 유학비자를 받아가지고 머물라는 거야. 그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했어. 요리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지. 그리고 주말마다 우리는 공연을 보러갔어. 나는 인생에 대한 계획을 못하는 사람이야. 근데 이 친구가 그런 걸 잘해요. 뭘 해야겠다, 뭘 보여줘야겠다, 맨날 데려가는 거지. 내가 가자마자 U2 공연을 봤었어.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 뛰어. U2, 폴 매카트니, 음악하는 사람들로선 우와 하는 동경의 대상인 사람들의 라이브를 직접 보니까. 팔자도 완전히 변한 거 아니냐. 동시대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 현장에 가서 공감하고 있다는 게 참, 그런 게 나에게는 굉장한 자유를 주더라구. 그때 음악을 생각하고 접하는 게 조금 더 전문적이라 그럴까, 좀 더 집중하게 되었지. 진지하게. 그땐 음악이 참 좋더라고. 세상엔 어떤 음악들이 있나. 그때 내가 주로 들었던 음악들이 블루스 음악들이었어. 그걸 듣다보니까 어느 날 또 귀가 뚫리는 부분이, 아까 언어가 뚫렸다고 그랬잖아, 그것처럼 음악들이 들어오더라고.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 내가 뭔가 만들고 싶다, 라는 나만의 창작에 대한 그런 게 생기더라구. 그때 곡을 만들게 됐는데 그게 실은 처녀작인 거야. 그전에 물론 아마추어 시절에 시도는 해봤지. 몇 곡 있어요. 근데 그래봐야 뭐 서너 곡 만들어봤던 경험이 있는 거고. 곡을 제대로 만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다시 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느낌이 살아나더라고.

그래서 일본에서 만들었던 곡들이 <할아버지와 수박>, <예럴랄라>, <라구요>… 곡을 만들 때는 아무래도 가사 생각하게 되었는데 <라구요> 같은 건 어느 날 내 앞길만 막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번씩 그럴 때가 있잖아, 문득 내가 너무 우리 엄마 생각을 안 하고 살았구나. 약간의 향수병도 있고. 어머니 생각 하니까 막 엄마에게 참 감사하단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죄책감도 있고. 이번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선물을 해드리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나 딴에는 아, 곡을 만들어서 테잎으로 녹음해가지고 엄마한테 드려야겠다. 엄마를 위한 곡을 만들어야지 딱 마음을 먹고 썼는데 엄마 생각하다보니까 뭐 엄마 역사가 생각이 나고 그러다가 이 가사가 나온 거야. <라구요> 곡이 나오게 된 거지.

 

이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아까 가수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거기서 내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랬잖아. 독특한 문화 속에 있다보니까 여러 채널들이 많았어. 거기서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떤 블루스 할아버지였어. 우리로 치면 인간문화재 같은 사람이었는데. 난 거기 가서 살아야 된다, 저 할아버지한테 가서 하모니카 배우고 싶고 기타 배우고 싶고 그냥 저기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 꿈을 얘기했어. 그 정도로 내가 가수에 대한 미련 자체가 없어져 버리고 더 넓은 세상 보고 싶고 그랬었지.

 

근데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 그 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인데 내가 노래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던 선배였어. 그 사람이 레코드사랑 인연이 돼 가지고 주변에 신인을 찾던 중이었나봐. 스카우터가 돼 있었던 거야. 이 형이 딱 내가 생각나서 일본까지 전화를 걸어가지고 너 앨범 내지 않겠냐. 난 이미 꿈이 딴 데 가 있었는데. 아뇨,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뭐 한국 나오면 한번 보자. 그리고 91년도에 한국 왔어. 이 형이 만나자 해서 만나가지고, 이런 가수 될 길이 있는데 해보지 않을래. 너 혹시 만든 곡 없냐. 있긴 있는데. 한번 해보래. 그냥 해봤지. 그니까 데모 테잎 만들래. 이 형이 잔말 말고 만들자고. 만들고 된 게 결국 내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지.

옛날에 내가 정말 무언가 되고 싶었을 때는 길이 안 보이다가 거기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 길이 딱 열리고 보이는데 그걸 가지고 내가 고민을 하더라구.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을 한참 했었어. 이 형은 계속 하자하자. 고민하고 의논도 많이 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선택을 하게 된 게, 난 나한테 물어봤지. 네가 지금 바깥에 나가서 하고자 하는 게 뭐냐. 뭣 때문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늘 이게 세상이구나 알았다가 우연찮게 다른 세상에서 엇, 이런 세상도 있었네. 내 세상과도 비교가 되는 거야. 그니까 거기에 대한 어떤 호기심도 있고, 재밌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그 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재미라는 차원에서 생각한 거지. 니가 더 재밌고 그런 것을 하고 싶냐, 근데 지금 앨범 내는 건 어떠냐. 앨범 내는 것도 재밌긴 재밌겠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여기는 답답해 보이는 거야. 이곳, 한국이. 그래서 좀 안 답답한 곳에서 좀 보고 그러고 싶은데. 결국에는 그래도 내가 여기서 해야 되겠다고 정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저쪽 다른 데 가면 내가 재미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내가 재미를 주는 부분에서는 장담 못하겠고 두려움도 많고. 그 다음에 뭐 내가 볼 때 한국이라는 곳은 너무 재미없었던 나라였어. 그렇다면 이 나라는 재미가 무궁무진한 나라네. 앞으로 재미가 나올 나라네. 그럼 내가 거기서 재미 역할을 해도 재밌겠네. 이렇게 평가를 내리더라구. 이 나라는 앞으로 재미가 무궁무진하겠더라고. 다른 곳은 센세이셔널할게 뭐 특별한 게 나올 틈이 없어. 근데 여기는 보니까 조금만 빨갛게 칠해도 와 재밌다 할 그런 구멍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곳이었으니까. 아, 앞으로 이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역할이 될 수 있을까. 자신감을 가지고 한다 해 가지고 했어.

 

 

다큐멘터리 속 블루스 할아버지를 찾아가 하모니카도 배우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강산에는 재미없는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앨범을 내게 된 것이다. 과연 당시 강산에는 그 몫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근데 쉬운 건 아니었지. 답답하니까. 벌써 코드가 안 맞고. 처음에 계약하고 녹음 다 해놓고 인제 이걸 앨범으로 노래 제목을 내야 되는데 내가 낸 제목을 보더니 이건 안되겠대. 왜요. <예럴랄라>가 무슨 뜻이냐고. 그냥, 기분 좋은 느낌에서 만든 말이라고. 사전에 있는 거냐고. 아니 그냥 내가 만든 말이라고. 어떻게 말을 만들어?

내 가치관이랑 너무 다른 거지. 공식적인 건데 사전에 없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그담에 <라구요> 같은 경우는, 이게 듣는 사람은 영어 같기도 하고 헷갈리게 한대. 또 <훔쳐본 여자>란 제목을 보고는 그때 사람들이 기겁을 하더라구. 이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 <할아버지와 수박>은 막 웃었어. 동요 같다고. 그런 나의 느낌이 전달이 안되니까. 아, 그래요. 그렇다고 내가 막 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럼 해보시라고. 나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하려고 그랬지. 시간을 줬는데 나중에 그 사람들이 갖고 온 게, <라구요>는 <갈 수 없는 고향>, <예럴랄라>는 <시골여행>, <훔쳐본 여자>는 <해바라기 여자>. 그런 식으로 해오니까 나한테는 감각이 안 맞더라구. 사실 이 창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잖아. 그건 내가 못 굽히겠더라구.

 

계약 안 하겠다, 나 안 한다, 다른 건 내가 다 양보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레코드 사람들이 참 나쁜 사람들이지. 남의 권리를. 인세 장 당 100원 이러고 뭐. 계약금은 말도 안되고. 돈은 자기들이 다 번다 이런 식이고. 근데 그때 내가 좀 팔렸으니까. 이런 건 내가 다 양보했는데, 그 제목은 양보를 못하겠더라구. 그럼 나 안 하겠다고 그랬거든. 그쪽에선 마지못해서 한 거야. 초반에는 매니저가 라디오에 홍보를 하러 갔는데, 힘들었대요. 어느 날 나한테 아, 산에 씨, 제목 좀 바꿔봐요. 자기가 PR해야되는데 어떤 PD한테는 모욕감을 받으면서 해야 된다고 제목 좀 바꿔보라고. 그러면서 들려주는 얘기가 앨범 들고 갔는데 PD가 딱 보고 에이, <할아버지와 수박>? 그때 마침 또 수박이 완전 풍년이 돼 가지고 수박값이 완전 똥값이 됐었거든. (웃음) PD가 그러더래요. 뭐야 이거. 수박값 똥값인데. 아, 그래요? 그럼 안 할랍니다.

 

 

힘을 원해

 

 

강> 근데 여러 사람들이 대중적인 것에 대해 항상 얘기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대중성이란 걸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대중이라는 게 지금 우리들의 대중은 들려주는 대로 보여주는 대로, 나쁘게 얘기하면 길들이기 나름이다. 만약에 <라구요> 길들여봐라, 그렇게 알고 들을 겁니다. 그때 내가 좀 건방지게 얘길 했어. 그땐 무슨 얘긴지도 잘 모르고. 시간이 지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잖아.

 

퍼> 대중을 무시한 거 아닌가요?

 

강> 아니, 똑바로 보자는 거지. 사실은 그래서 전체의식이 깨어있다고 보면, 뭐 어디까진지 모르겠지만, 깨어있는 차원에서는 대중을 쉽게 길들일 수가 없어요. 근데 그때는. 내가 그때 머리 길러서 묶고 이어링하고 버스 타면 막 수군수군 소리가 들려. 모든 사람들이 거의 그런 식이었지. 난 이미 그 시대를 먼저 가 있는 나라에 갔다 왔잖아. 거기는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고 그러려니 하고 일상적이던 나라에 있다가 돌아왔으니까 나는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지. 날 보는 이 낯선 시선들도 익숙해지기 나름이다 아마 한국도 금방 변할 거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내가 아랑곳하지 않았어. 그 말대로 지금 그렇게 됐고. 얼마나 또 빨라, 가속이 붙어서. 한국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지, 그땐.

 

 

 

강산에가 대학을 들어갔던 80년대 초와 가수가 되어가던 90년대이후는 상당히 많이 변화해 있다. 80년대란 일상의 의식과 행위마저 정치에 저당잡혀 있는 시절이리라. 경찰이 여자들의 스커트길이까지 재던 시절. 자유, 벗어나고 싶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데 그것을 찾지 못하게 하는 강산에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퍼> 그렇다면 그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으로도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나 그런 소명감 같은 것은 없었나요?

강> 당연히, 당연히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니까 내 <삐따기> 앨범에 <차라리>란 노래가 있는데. 지들끼리 모여서 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도 마음도 삐딱 삐딱하고 말겠어. 차라리 삐딱하고 말겠어. 그니까 뭔가 내가 삐딱하다면, 물에 기름 같은 존재라면 차라리 기름으로 자유롭고 싶다 한 거죠. 내 바램은 전체의식을 당연히 의식하고 한 거죠.

 

 

퍼>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의 운동으로서는?

강> 아직 내가 그 참여에 대한 부분에 대해 의식해 본적은 없어요. 왜냐면 그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원래 그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고. 근데 그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달이 될 수 있고. 나는 그런 게 없는데 정치적인 것 같고. 아, 그러면 내가 하고 있는 행위나 사고, 평상시에 내가 꾸는 꿈 이런 부분들이 존 레논이 얘기했던 imagine이라는 걸 통해서.. 어쩌면 이게 내가 가수로서 찾아가는 부분들이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다가가고 있구나 하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무의식적으로 힘을 원한단 얘길 한 적이 있는데, <깨어나> 노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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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

 

나의 앞을 항상 가로막고 서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며는

이젠 그 벽을 나는 자유롭게 가볍게 뛰어 넘어가고 말테야

언제나 그런 순간이 오면 망설이다 포기하게 되지

내가 길들어져 왔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었던 거야

우린 서로 너무 다르다고 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거야

바로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이 촌스러운 잠에서

깨어나고 싶어 일어나고 싶어

이젠 망설이지 않겠어

 

 

깨어나 일어나 힘을 원해 힘을 원해

Get up Stand up 힘을 원해 힘을 원해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기울여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기울여

보인다고 그게 다 보는 게 아니야 들린다고 듣는 게 아니야

익숙해져 버린 촌스런 잠 때문에 나의 눈도 먹고 귀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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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떤 식으로든 힘이라는 건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뭘 하고 있지, 이런 거. 내가 힘을 원한다고 하는 것은 만약 힘이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뜻, 좋은 생각을 펼쳐야 하는 게 아닐까, 의미 있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

 

 

강산에라는 이름을 듣고 쉽게 떠오르는 단어는 저항과 자유. 태극기를 휘날리며 삼풍(三風)은 또 불지 않았으면, 태우(太雨)는 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노래했던 락커를 떠올리기 쉽다. 긴 머리를 분방하게 휘날리던 한 청바지 광고에서도 알 수 있듯 저항하는 락커, 자유인의 이미지가 주는 에너지는 강렬했다. 또한 그의 음악세계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포크 락으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굳어져버린 이미지가 새로운 에너지로 노래하는 지금의 강산에에게 지나친 꼬리표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 그럼 이때까지 인식해왔던 게 본인도 지겨우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적인 락커, 또는 반항적인 락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본인의 생각에 대해 좀 말씀해주신다면.

강> 나는 그냥 자연스런 행위였는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한국적이었나 생각하게 되고. 한국적이다 락이다 뭐다, 그건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름일 뿐이고 관념일 뿐인 거 같애. 결국에는 음악이 뭡니까. 정의 내릴 수 없는. 진짜..

처음 데뷔 당시에는 내가 락이라는 부분을 부르짖고 다녔어요. 재미가 없는 나라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흔히 사람들은 그 락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받아들이더라고. 뭔가 세상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락이란 건 구태의연한 가치관이나 사고에 종속된 것을 좀더 평등하게 하자라든가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 평등, 그게 결국 love일 수도 있고 peace일 수도 있고. 한국적이다 저항적이다 그거는 그냥 껍데기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까도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부분이, 사람다움.

내가 저항하고 삐딱하게 된 건 어느 날 보니까 왜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게 했는지. 왜 우리 엄마가 그런 역사를 살게 했는지.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는데. 뭣 때문에. 도대체 느그는 누구를 위한다고는 하는데. 웃기지마. 누구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누구를 위해서 하는데 이거야. 그래서 남북으로 이렇게 된 거야, 하는 그런 것들. 결국에는 사람다움 아닐까. 그러니까 내 환경에 대한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내가 추구해가는 건 뭘까, 사람다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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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더는>

 

어디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건가

어디까지 계속되어 있는 건가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틀린 건가

 

누구가 그 누구를 위한 건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하늘과 저 붉은 태양의 빛깔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바람에 이는 저 잎들의 소리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봄이 다가오는 저 들판의 향기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단잠에서 깨어난 아침의 기분을

 

예 더 이상 더 이상 더는

누구를 위한다고는 말하지 마

 

더 이상 더 이상 더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stop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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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그럼 처음에 사람들이 붙여줬던 저항하는 락커라는 의미를 거부하셨던 건가요.

강> 거부를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흔히 얘기하는 만약 그게 학문이라면 낭만파, 무슨 파 나뉘는 것처럼 그런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난 그게 아니라고 보거든. 내가 한국적이라는 부분도 예를 들어서 내가 고무신 신고 도포 입고 갓 쓰고 해서가 아닐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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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다를 건너는 나비

 

 

강> 그때 내가 내 처를 알게 되는데 그때가 1987년이거든. 그땐 내 처와 친구관계였는데 “일본에 한번 놀러 가지 않겠니.”그랬지. 나야 좋지, 다른 세계를 가자는데. 난 그때 뭐 가진 게 없으니까 겁이 없었거든. 내가 늘 자신만만했을 때였지. 구경 시켜준다니까 그래 가자, 가는데 그게 진짜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인 게, 가치관이 확 완전히 변하게 되더라고. 내가 결정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가 내가 처했던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 물론 내가 원해서 바꾼 건 아니야, 어느 날 그런 환경이 와 가지고 가게 된 건데.. 사실 그 환경이라는 게 내가 사는 환경이거든. 거기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부분들인데, 사람이 그 환경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가치관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강산에는 줄곧 덧붙이기를, 자신이 원해서 환경을 바꾸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러한 환경이 자신에게 “왔다”고 표현했다. 또한 그로 인해서 많은 것이 바뀌었고 결국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퍼> 거기서 주로 뭘 보셨나요.

강> 사는 걸 봤지.

 

퍼> 뭔가 색다른 거였나요?

강> 그때 나한텐 색다른 거였지. 쉽게 예를 들어서 공항에 내렸는데 냄새가 뭔가 달라요. 그니까 우리가 익숙해짐이라는 게, 늘 이 공기 속에 있다가 다른 나라 가면 냄새가 다르지. 그런 게 있어요. 처음에 딱 가면 내가 거기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보고 있잖아. 말을 못 알아 들으니까. 이상한 소리로 서로 통하고 있고. 지금은 좀 알아듣지만. 또 리무진 탔는데 차가 왼쪽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내가 유학생 입장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든지 그런 게 아니잖아. 아무 경험 없는 아이가 정말 빠르게 그쪽 삶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언어문제도 답답했지. 난 당연히 일본 말 전혀 못하고 와이프도 한국말 잘 못하고. 그래도 얘가 한국말 조금 알아듣는 정도였지. 그러다 몇 개월 되니까 말은 잘 못하더라도 귀가 좀 트이더라고. 그렇게 한 1년 정도 있었지.

처음에는 얘가 놀러오라고 해서 같이 놀러간 거였어. 비자가 보름 비자니까 이것저것 구경하고 왔지. 근데 여기가 재밌는 거지.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얘가 일본에 있다가 나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또 부르는 거야. 난 또 갔지. 그러다 얘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할 바에야 한 일년 정도라도 있어보면 어떨까 했나봐.

 

퍼> 그때 많이 좋아하고 그러셨던 거 같아요.

강> 걔가 나한테 완전히 갔지. (웃음) 그랬던 거 같애. 우리 만남도 그랬었어. 내가 그때는, 나는 멍하다 그랬잖아. 진짜 난 평상시에 멍해.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도 나는 몰랐었어. 나중에 이 아이가 나한테 고백을 해서 알았어. 그 동안의 행동들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구나 알게 됐었어. 나는 만나고 있으면서도 몰랐었거든. 난 내가 얘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고. 나는 그냥 멍하고 있었는데 얘는 나를 그렇게 좋아했더라구. 근데 그게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다는 거야. 그니깐 나는 기분이 좋지. 근데 이 아이는 딸만 셋인 집안인데 믿음이 있었나봐, 기독교. 근데 이 큰 딸이 어디서 애인이라고 데려왔는데 그것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멍한 애 한 명 와 가지고. 뭘 하냐니까 하는 거 없잖아. 하는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뭐 아무 비전이라고는 제로인 아를 데려왔는데. 그래도 그 집에서 이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잖아. 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냥 있는 거지. 나야 뭐 간다, 이러면 그만이니까.

그러고 보면 내 와이프에게 참 감사한 부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딱 데려가 가지고 발전의 많은 계기를 마련해줬지. 내가 배우기도 정말 많이 배웠으니까. 지금도 느끼고 있고.

 

 

강산에의 아내 다카하시 미에꼬. 후에 더 언급되겠지만 이 분을 빼놓고 강산에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 이상은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한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초대자인 찐빵 안정혜 씨는 미에꼬를 이렇게 소개했다. (안정혜 씨는 <강영걸> 앨범 재킷을 디자인한 강산에의 친구이다.)

 

 

가수 강산에 씨의 하우스 매니저

배고프고 외로운 젊은 음악인들의 따뜻한 형수님

아직도 핸드폰이 없는 귀여운 전업주부

다까하시 미에꼬 여사를 소개합니다

 

 

 

하튼 그러고 있는데 감성이 좀 예민했던 건지 내가 잘 배우더라구. 흔히 발전이라는 부분 있잖아. 최근에 발전이라는 부분을 생각해보는데 내가 거기서 참 발전을 많이 했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내가 만약 화를 못 참아서 욱하고 지나가다 쓰레기통 찬다거나 부순다거나 그런 게 없어졌어. 그 것만 해도 발전인 거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잖아. 나이 들어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의식의 확장이라면 확장이고 발전이라면 발전이고.. 하여튼 의식이나 가치관이 다른 환경 속에서 내가 살아온 문화와 많이 비교도 하면서 서로 갭도 많이 느꼈지. 그렇게 거기 있으면서 많이 바뀌더라고.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것도 많이 바뀐 게 그전에 한국에 있을 때는 아, 내가 무엇을 해야 되지, 이것도 해보고 또 안되면 저것도 해보고 그래서 음악인가, 아, 그래 음악이다. 막연하게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지만 가수가 돼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아이가. 여기 와보니까 음악을 할 수 있는 채널이 너무 다양한 거야. 가수라는 직업을 갖지 않고도 음악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직장생활 하면서도 밴드 만들어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추어 밴드도 너무 많은 거야. 다 기타들고 다니고. 지금 우리도 홍대 앞에 가보면 기타 메고 다니는 아이들 많이 볼 수 있지. 옛날에는 한국 안 그랬거든. 그때 내가 일본 가서 살던 곳이 그런 거야. 일단 패션부터가 막 가죽잠바에 너무 다양하고 또 그런 걸 사람들이 그냥 바라보고 그러려니 하고. 한국에서는 그냥 난리가 나지. 모든 사람의 시선의 대상이 될 사람들인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얼마나 쇼크겠냐.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니까 스톱이 되어 있더라구. 마치 내가 화사랑에서 학교를 갔을 때처럼. 심리적으로 내가 꼭 일본에서 20여 년을 살다온 것처럼. 1년 살았는데. 딱 돌아보니까 내가 변해 있더라구. 늘 놀던 친구들이랑도 달라졌고. 사고에 유연성이 생겼다고 할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어쨌든 내가 여러 가지로 다각도로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구. 예를 들어서 음악을 직업적으로 갖지 않고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더란 거. 직업이란 프레셔를 안 갖고. 그러니까 내가 꼭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부담을 비어버린 거야.

인제 일본이라는 곳에서 이 아이가 얘기하기를 내가 거기 오래 있으려면 비자 문제가 있으니까 유학비자를 받아가지고 머물라는 거야. 그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했어. 요리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지. 그리고 주말마다 우리는 공연을 보러갔어. 나는 인생에 대한 계획을 못하는 사람이야. 근데 이 친구가 그런 걸 잘해요. 뭘 해야겠다, 뭘 보여줘야겠다, 맨날 데려가는 거지. 내가 가자마자 U2 공연을 봤었어.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 뛰어. U2, 폴 매카트니, 음악하는 사람들로선 우와 하는 동경의 대상인 사람들의 라이브를 직접 보니까. 팔자도 완전히 변한 거 아니냐. 동시대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 현장에 가서 공감하고 있다는 게 참, 그런 게 나에게는 굉장한 자유를 주더라구. 그때 음악을 생각하고 접하는 게 조금 더 전문적이라 그럴까, 좀 더 집중하게 되었지. 진지하게. 그땐 음악이 참 좋더라고. 세상엔 어떤 음악들이 있나. 그때 내가 주로 들었던 음악들이 블루스 음악들이었어. 그걸 듣다보니까 어느 날 또 귀가 뚫리는 부분이, 아까 언어가 뚫렸다고 그랬잖아, 그것처럼 음악들이 들어오더라고.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 내가 뭔가 만들고 싶다, 라는 나만의 창작에 대한 그런 게 생기더라구. 그때 곡을 만들게 됐는데 그게 실은 처녀작인 거야. 그전에 물론 아마추어 시절에 시도는 해봤지. 몇 곡 있어요. 근데 그래봐야 뭐 서너 곡 만들어봤던 경험이 있는 거고. 곡을 제대로 만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다시 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느낌이 살아나더라고.

그래서 일본에서 만들었던 곡들이 <할아버지와 수박>, <예럴랄라>, <라구요>… 곡을 만들 때는 아무래도 가사 생각하게 되었는데 <라구요> 같은 건 어느 날 내 앞길만 막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번씩 그럴 때가 있잖아, 문득 내가 너무 우리 엄마 생각을 안 하고 살았구나. 약간의 향수병도 있고. 어머니 생각 하니까 막 엄마에게 참 감사하단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죄책감도 있고. 이번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선물을 해드리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나 딴에는 아, 곡을 만들어서 테잎으로 녹음해가지고 엄마한테 드려야겠다. 엄마를 위한 곡을 만들어야지 딱 마음을 먹고 썼는데 엄마 생각하다보니까 뭐 엄마 역사가 생각이 나고 그러다가 이 가사가 나온 거야. <라구요> 곡이 나오게 된 거지.

 

이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아까 가수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거기서 내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랬잖아. 독특한 문화 속에 있다보니까 여러 채널들이 많았어. 거기서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떤 블루스 할아버지였어. 우리로 치면 인간문화재 같은 사람이었는데. 난 거기 가서 살아야 된다, 저 할아버지한테 가서 하모니카 배우고 싶고 기타 배우고 싶고 그냥 저기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 꿈을 얘기했어. 그 정도로 내가 가수에 대한 미련 자체가 없어져 버리고 더 넓은 세상 보고 싶고 그랬었지.

 

근데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 그 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인데 내가 노래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던 선배였어. 그 사람이 레코드사랑 인연이 돼 가지고 주변에 신인을 찾던 중이었나봐. 스카우터가 돼 있었던 거야. 이 형이 딱 내가 생각나서 일본까지 전화를 걸어가지고 너 앨범 내지 않겠냐. 난 이미 꿈이 딴 데 가 있었는데. 아뇨,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뭐 한국 나오면 한번 보자. 그리고 91년도에 한국 왔어. 이 형이 만나자 해서 만나가지고, 이런 가수 될 길이 있는데 해보지 않을래. 너 혹시 만든 곡 없냐. 있긴 있는데. 한번 해보래. 그냥 해봤지. 그니까 데모 테잎 만들래. 이 형이 잔말 말고 만들자고. 만들고 된 게 결국 내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지.

옛날에 내가 정말 무언가 되고 싶었을 때는 길이 안 보이다가 거기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 길이 딱 열리고 보이는데 그걸 가지고 내가 고민을 하더라구.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을 한참 했었어. 이 형은 계속 하자하자. 고민하고 의논도 많이 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선택을 하게 된 게, 난 나한테 물어봤지. 네가 지금 바깥에 나가서 하고자 하는 게 뭐냐. 뭣 때문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늘 이게 세상이구나 알았다가 우연찮게 다른 세상에서 엇, 이런 세상도 있었네. 내 세상과도 비교가 되는 거야. 그니까 거기에 대한 어떤 호기심도 있고, 재밌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그 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재미라는 차원에서 생각한 거지. 니가 더 재밌고 그런 것을 하고 싶냐, 근데 지금 앨범 내는 건 어떠냐. 앨범 내는 것도 재밌긴 재밌겠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여기는 답답해 보이는 거야. 이곳, 한국이. 그래서 좀 안 답답한 곳에서 좀 보고 그러고 싶은데. 결국에는 그래도 내가 여기서 해야 되겠다고 정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저쪽 다른 데 가면 내가 재미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내가 재미를 주는 부분에서는 장담 못하겠고 두려움도 많고. 그 다음에 뭐 내가 볼 때 한국이라는 곳은 너무 재미없었던 나라였어. 그렇다면 이 나라는 재미가 무궁무진한 나라네. 앞으로 재미가 나올 나라네. 그럼 내가 거기서 재미 역할을 해도 재밌겠네. 이렇게 평가를 내리더라구. 이 나라는 앞으로 재미가 무궁무진하겠더라고. 다른 곳은 센세이셔널할게 뭐 특별한 게 나올 틈이 없어. 근데 여기는 보니까 조금만 빨갛게 칠해도 와 재밌다 할 그런 구멍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곳이었으니까. 아, 앞으로 이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역할이 될 수 있을까. 자신감을 가지고 한다 해 가지고 했어.

 

 

다큐멘터리 속 블루스 할아버지를 찾아가 하모니카도 배우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강산에는 재미없는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앨범을 내게 된 것이다. 과연 당시 강산에는 그 몫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근데 쉬운 건 아니었지. 답답하니까. 벌써 코드가 안 맞고. 처음에 계약하고 녹음 다 해놓고 인제 이걸 앨범으로 노래 제목을 내야 되는데 내가 낸 제목을 보더니 이건 안되겠대. 왜요. <예럴랄라>가 무슨 뜻이냐고. 그냥, 기분 좋은 느낌에서 만든 말이라고. 사전에 있는 거냐고. 아니 그냥 내가 만든 말이라고. 어떻게 말을 만들어?

내 가치관이랑 너무 다른 거지. 공식적인 건데 사전에 없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그담에 <라구요> 같은 경우는, 이게 듣는 사람은 영어 같기도 하고 헷갈리게 한대. 또 <훔쳐본 여자>란 제목을 보고는 그때 사람들이 기겁을 하더라구. 이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 <할아버지와 수박>은 막 웃었어. 동요 같다고. 그런 나의 느낌이 전달이 안되니까. 아, 그래요. 그렇다고 내가 막 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럼 해보시라고. 나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하려고 그랬지. 시간을 줬는데 나중에 그 사람들이 갖고 온 게, <라구요>는 <갈 수 없는 고향>, <예럴랄라>는 <시골여행>, <훔쳐본 여자>는 <해바라기 여자>. 그런 식으로 해오니까 나한테는 감각이 안 맞더라구. 사실 이 창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잖아. 그건 내가 못 굽히겠더라구.

 

계약 안 하겠다, 나 안 한다, 다른 건 내가 다 양보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레코드 사람들이 참 나쁜 사람들이지. 남의 권리를. 인세 장 당 100원 이러고 뭐. 계약금은 말도 안되고. 돈은 자기들이 다 번다 이런 식이고. 근데 그때 내가 좀 팔렸으니까. 이런 건 내가 다 양보했는데, 그 제목은 양보를 못하겠더라구. 그럼 나 안 하겠다고 그랬거든. 그쪽에선 마지못해서 한 거야. 초반에는 매니저가 라디오에 홍보를 하러 갔는데, 힘들었대요. 어느 날 나한테 아, 산에 씨, 제목 좀 바꿔봐요. 자기가 PR해야되는데 어떤 PD한테는 모욕감을 받으면서 해야 된다고 제목 좀 바꿔보라고. 그러면서 들려주는 얘기가 앨범 들고 갔는데 PD가 딱 보고 에이, <할아버지와 수박>? 그때 마침 또 수박이 완전 풍년이 돼 가지고 수박값이 완전 똥값이 됐었거든. (웃음) PD가 그러더래요. 뭐야 이거. 수박값 똥값인데. 아, 그래요? 그럼 안 할랍니다.

 

 

힘을 원해

 

 

강> 근데 여러 사람들이 대중적인 것에 대해 항상 얘기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대중성이란 걸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대중이라는 게 지금 우리들의 대중은 들려주는 대로 보여주는 대로, 나쁘게 얘기하면 길들이기 나름이다. 만약에 <라구요> 길들여봐라, 그렇게 알고 들을 겁니다. 그때 내가 좀 건방지게 얘길 했어. 그땐 무슨 얘긴지도 잘 모르고. 시간이 지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잖아.

 

퍼> 대중을 무시한 거 아닌가요?

 

강> 아니, 똑바로 보자는 거지. 사실은 그래서 전체의식이 깨어있다고 보면, 뭐 어디까진지 모르겠지만, 깨어있는 차원에서는 대중을 쉽게 길들일 수가 없어요. 근데 그때는. 내가 그때 머리 길러서 묶고 이어링하고 버스 타면 막 수군수군 소리가 들려. 모든 사람들이 거의 그런 식이었지. 난 이미 그 시대를 먼저 가 있는 나라에 갔다 왔잖아. 거기는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고 그러려니 하고 일상적이던 나라에 있다가 돌아왔으니까 나는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지. 날 보는 이 낯선 시선들도 익숙해지기 나름이다 아마 한국도 금방 변할 거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내가 아랑곳하지 않았어. 그 말대로 지금 그렇게 됐고. 얼마나 또 빨라, 가속이 붙어서. 한국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지, 그땐.

 

 

 

강산에가 대학을 들어갔던 80년대 초와 가수가 되어가던 90년대이후는 상당히 많이 변화해 있다. 80년대란 일상의 의식과 행위마저 정치에 저당잡혀 있는 시절이리라. 경찰이 여자들의 스커트길이까지 재던 시절. 자유, 벗어나고 싶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데 그것을 찾지 못하게 하는 강산에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퍼> 그렇다면 그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으로도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나 그런 소명감 같은 것은 없었나요?

강> 당연히, 당연히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니까 내 <삐따기> 앨범에 <차라리>란 노래가 있는데. 지들끼리 모여서 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도 마음도 삐딱 삐딱하고 말겠어. 차라리 삐딱하고 말겠어. 그니까 뭔가 내가 삐딱하다면, 물에 기름 같은 존재라면 차라리 기름으로 자유롭고 싶다 한 거죠. 내 바램은 전체의식을 당연히 의식하고 한 거죠.

 

 

퍼>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의 운동으로서는?

강> 아직 내가 그 참여에 대한 부분에 대해 의식해 본적은 없어요. 왜냐면 그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원래 그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고. 근데 그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달이 될 수 있고. 나는 그런 게 없는데 정치적인 것 같고. 아, 그러면 내가 하고 있는 행위나 사고, 평상시에 내가 꾸는 꿈 이런 부분들이 존 레논이 얘기했던 imagine이라는 걸 통해서.. 어쩌면 이게 내가 가수로서 찾아가는 부분들이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다가가고 있구나 하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무의식적으로 힘을 원한단 얘길 한 적이 있는데, <깨어나> 노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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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

 

나의 앞을 항상 가로막고 서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며는

이젠 그 벽을 나는 자유롭게 가볍게 뛰어 넘어가고 말테야

언제나 그런 순간이 오면 망설이다 포기하게 되지

내가 길들어져 왔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었던 거야

우린 서로 너무 다르다고 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거야

바로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이 촌스러운 잠에서

깨어나고 싶어 일어나고 싶어

이젠 망설이지 않겠어

 

 

깨어나 일어나 힘을 원해 힘을 원해

Get up Stand up 힘을 원해 힘을 원해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기울여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기울여

보인다고 그게 다 보는 게 아니야 들린다고 듣는 게 아니야

익숙해져 버린 촌스런 잠 때문에 나의 눈도 먹고 귀도 먹고

 

…………………………………………………..

 

난 어떤 식으로든 힘이라는 건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뭘 하고 있지, 이런 거. 내가 힘을 원한다고 하는 것은 만약 힘이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뜻, 좋은 생각을 펼쳐야 하는 게 아닐까, 의미 있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

 

 

강산에라는 이름을 듣고 쉽게 떠오르는 단어는 저항과 자유. 태극기를 휘날리며 삼풍(三風)은 또 불지 않았으면, 태우(太雨)는 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노래했던 락커를 떠올리기 쉽다. 긴 머리를 분방하게 휘날리던 한 청바지 광고에서도 알 수 있듯 저항하는 락커, 자유인의 이미지가 주는 에너지는 강렬했다. 또한 그의 음악세계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포크 락으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굳어져버린 이미지가 새로운 에너지로 노래하는 지금의 강산에에게 지나친 꼬리표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 그럼 이때까지 인식해왔던 게 본인도 지겨우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적인 락커, 또는 반항적인 락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본인의 생각에 대해 좀 말씀해주신다면.

강> 나는 그냥 자연스런 행위였는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한국적이었나 생각하게 되고. 한국적이다 락이다 뭐다, 그건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름일 뿐이고 관념일 뿐인 거 같애. 결국에는 음악이 뭡니까. 정의 내릴 수 없는. 진짜..

처음 데뷔 당시에는 내가 락이라는 부분을 부르짖고 다녔어요. 재미가 없는 나라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흔히 사람들은 그 락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받아들이더라고. 뭔가 세상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락이란 건 구태의연한 가치관이나 사고에 종속된 것을 좀더 평등하게 하자라든가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 평등, 그게 결국 love일 수도 있고 peace일 수도 있고. 한국적이다 저항적이다 그거는 그냥 껍데기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까도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부분이, 사람다움.

내가 저항하고 삐딱하게 된 건 어느 날 보니까 왜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게 했는지. 왜 우리 엄마가 그런 역사를 살게 했는지.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는데. 뭣 때문에. 도대체 느그는 누구를 위한다고는 하는데. 웃기지마. 누구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누구를 위해서 하는데 이거야. 그래서 남북으로 이렇게 된 거야, 하는 그런 것들. 결국에는 사람다움 아닐까. 그러니까 내 환경에 대한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내가 추구해가는 건 뭘까, 사람다움이지.

 

 

…………………………………………………..

<더 이상 더는>

 

어디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건가

어디까지 계속되어 있는 건가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틀린 건가

 

누구가 그 누구를 위한 건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하늘과 저 붉은 태양의 빛깔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바람에 이는 저 잎들의 소리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봄이 다가오는 저 들판의 향기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단잠에서 깨어난 아침의 기분을

 

예 더 이상 더 이상 더는

누구를 위한다고는 말하지 마

 

더 이상 더 이상 더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stop the war

 

…………………………………………………..

 

퍼> 그럼 처음에 사람들이 붙여줬던 저항하는 락커라는 의미를 거부하셨던 건가요.

강> 거부를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흔히 얘기하는 만약 그게 학문이라면 낭만파, 무슨 파 나뉘는 것처럼 그런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난 그게 아니라고 보거든. 내가 한국적이라는 부분도 예를 들어서 내가 고무신 신고 도포 입고 갓 쓰고 해서가 아닐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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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난번에 이어 강산에의 두 번째 인터뷰를 내놓습니다. 강산에는 참으로 강렬하고 웅숭깊었습니다. 어찌 보면 휘황하기도 할 그의 말들은 듣는 이를 그 속에 편안히 담가두었기에, 그의 말들에 토를 달아 해석하는 일은 힘들고, 덧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강산에의 날목소리를 문자로나마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내 안에도 갭이 있어

 

 

 

 

강>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느낀 게 아, 내가 아무리 무슨 이념을 좇고 개념적으로 자유다 뭐다 하더라도. 여기 내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의식과 내 의식이 있는데 이 갭이 좀 있어. 이걸 위한 행위를 내가 막 하고 있잖아. 근데 어느 날 초점이 그럼 너는? 그니까 내 안에도 갭이 있더라고. 내 의식과 이 나라는 수만 가지의 나라는 갭이 있더라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아직 내 안에 있는 갭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는 거지.

 

 

 

퍼> 구체적으로 어떤 갭인가요?

강> 오늘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굉장히, 한없이 막 찌르르 하는, 저절로 노래를 하면서 너무 기뻐가지고. 한참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상대하는 이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진심이라는 게 진짜 어려운 거거든.

 

 

퍼> 아까는 사회적인 자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건 사회적인 저항, 그것과도 대비되거나 어긋나는 일이잖아요.

강>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어떻게 결론지을지 모르겠어요. 난 그냥 단순해. 나는 내 스스로 깨어나야 하는, 내가 남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계몽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 아, 인제 내가 짧은 인생을, 진짜 인생은 짧은데. 그렇지만 뭐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조금씩이라도 스스로 나비가 되고 싶은 거지.

 

 

퍼> 나비가 되고 싶다고요?

강> 의미를 일부러 부여하자면 모든 게 과정이 있잖아요. 알에서 애벌레에서 성충에서. 난 그게 발전이고 진화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이제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가 온 거지.

 

퍼> 강산에가 예전에 소리를 내지르는 그런 이미지에서 뭔가 좀 바뀌었다고들 하는데, 그런 맥락하고도 관련이 있나요.

강> 내가 소리를 바꿀 때 생각해본 게, 소리의 차이를 우리는 볼륨의 차이로 생각하잖아. 색깔의 차이, 조용하게 Oh, oh, yeah, yeah-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 (Leo Sayer의 Love you more than I can say) 하는데 강한 힘을 느껴요. 예를 들어서 아악- 하는 게 힘을 못 느끼는 게 있어요. 락 그러면 생각하는 것들이지.

 

퍼> 락이라고 하면 내지르는 소리, 뭔가 거칠고 반항하는 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락 가수들도 있잖아요. 특히 젊을 때는.

강> 젊은 애들 얘기했잖아요. 음악적으로 평하자는 건 아니고. 젊은 친구들 지금 뭔지 모르고 하는 그게 과정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랬으니까. 상황은 좀 달랐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내 나름대로 좌충우돌하고 고민하고 이랬으니까. 지나보니까 나한테 과정이었거든. 지금의 나 역시 또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무한한 어디를 향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예. 잎을 보면 자라는 것도 속도가 다 다르잖아요. 속도의 차이고.

 

퍼> 본인은 늦게 늦게 간다고 생각하세요?

강> 난 거북이에요.

 

퍼> 그 이번 앨범 노래 속 거북이가 그 의미인가요.

강> 그런 의미는 아닌데.

 

퍼> 그거 성적인 느낌도 들던데. 남성 성기를 거북이라고, 귀두라고 하잖아요, 거북이 대가리. 사막에서 발가벗고 달렸다 했을 때 성적이라고는 했지만 그때 느낌은 아기들이 고추를 내놓고 달리는, 그런 의미일 수 있죠. 사막이란 곳이 드러난 곳이잖아요. 벌거벗은 곳이고.

강> 나는 몰랐네.

 

퍼> 그럼 어떤 의미예요? 그냥 만났다?

강> 내가 어떻게 알아. 요즘 내 상황에서 생각하는 게 세상이 속도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걸 보니까 나는 상대적으로 숨이 차는 거야. 정신없이 하루 지나면 핸드폰 기능이 바뀌어서 나오고. 난 거북이인 거야. 나는 속도가 느려가지고 그런 거 아닌가 생각도 하고.

 

퍼> 그게 뭐든 간에 단초가 된 거죠. 뭔가 깨닫는.

강> 근데 그 거북이가 나한테, 사막거북이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래요. 사막에 사는 동물들이 많아. 방울뱀, 전갈. 내가 본 건 다람쥐 류, 도마뱀 이런 건 많이 봤지. 거북이 볼 생각은 못했어. 보기 힘들다 그러더라고. 근데 두 번씩이나 봤지. 그래서 조심스럽게 한 번은 그냥 보고 있다가 다음번에는 내가 말을 걸었지. 쉬익, 그렇게 소리를 내더라고. ‘저리가’ 그런 의미인지. 저리가, 도 더 닦고 와. (웃음)

 

 

퍼> <강영걸> 앨범을 여권 형식으로 꾸미셨는데 그전까지는 본명을 안 쓰다가 강영걸이라고 쓴 셀프 타이틀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누가 해석했던데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네. 결국 아까도 내가 얘기했지만 과정인데 과정이니까 그만큼 아직 두려움도 있고 자유롭지 못하니까.

 

퍼> 왜 하필이면 본명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강> 몰라, 그건. 그냥 자연스럽게. 의도적인 건 없고 그냥 아까 <라구요> 얘기했듯이 단순한 거였는데. 어머니로 시작했는데.언제부턴가 세상에 나와 보니까 CD를 만들어내는데 앨범 타이틀이 다 있더라고. 한국은 그런 문화가 좀 덜한데 나는 내 데뷔앨범부터 타이틀을 했었어. volume.0부터 시작해가지고 <나는 사춘기>, <삐따기>, <연어>, <하루아침>, 라이브 앨범은 <소풍>, 그런 식으로 해왔던 것처럼 앨범 타이틀 그런 개념으로. 예를 들어 작품 전시회를 하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있잖아. 이 앨범도 나한텐 작품이니까.

 

퍼> 앨범 보면 이게 여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평하기를 이 여권을 강산에라고 하는 나라로 오세요, 강산에의 세계로 들어오라, 그런 의미로 해석하더라고요.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권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여행을 해도 좋다, 그런 증서 같은 건데 만약에 강산에의 나라로 오라 그러면 강산에가 발행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근데 여권 타이틀에 보면 자기 사진이 딱 붙어 있단 말이에요. 이건 자기 나라가 아니라 여행자가 강산에 라는 얘기거든요. 그럼 해석을 잘못한 거죠. 얘기를 듣다보니까, 여행자, 순례, 찾아가기, 이런 이미지가 굉장히 큰 거 같아요. 이 앨범이 또 그렇게 이해가 되네요.

강> 강산에 나라로 오세요, 그건 내가 한 말도 아니고 그 사람이 한 말이고 느낌인데. 인제는 어떤 느낌을 갖든 간에 각자 나름대로 느낌을 가지고 있잖아요.

 

퍼> 본인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강> 나는, 그 디자이너의 의견을 존중한 거밖에 없어요. (웃음)

 

퍼> 지금 느끼는 건데 굉장히 의미 있는 것 같네요.

강> 난 그 아이가 좋았고 디자인 작업하면서 내가 음악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 들려줬어요. 그러면서 이야기 틈틈이 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어느 날 이렇게 생각했대. 괜찮네. 그거예요. 딴 거 없어요.

 

퍼> 그럼, 이번 앨범부터 많이 달라졌다 그러더라고요. 뭐가 달라진 거예요?

강> 난 발전하고 싶어요.

 

퍼> 이때까지도 발전했잖아요.

강> 더하면 안돼요? (웃음)자기는 만족이 안 되는 거지. 발전은 항상 현재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미래에 속한 건데.

 

 

발전하고 싶다. 강산에는 또다시 발전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한 앨범에서 다른 앨범으로 넘어가면서 보여주는 변화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놓고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그 앨범은 한 발자국 딛고 넘어간 과정으로서 지나왔을 뿐 더 이상 지금의 그에게는 화두가 되지 않는다.

2. 깨어 있는, 나

 

 

퍼> 너무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앞으로 뭘 하고 싶습니까?

 강> 뭘 하고 싶은 것보다는 지금 내가 평안하고 나의 이런 부분에 책임을 질 줄 알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깨어있고 싶은 거지. 지금 내가.

 

퍼>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강>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 거지.

 

퍼> 그럼 앞으로 가수가 안 될 수도 있겠네요.

강> 어허. (웃음)

 

퍼> 그래도 가수는 할 거예요?

강> 가수란 말, 세상이 만든 직업보다 나는 만들고 싶어요. 창작하고 싶어. 그리고 그냥 이런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사이좋게.

 

나는 지금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고 내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고 내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고 내 인연들을 말 그대로 진짜,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내가 너무 모자라다는 것을 살면 살수록 느끼니까. 그게 내 인생에 있어서 내 가치예요. 음, 우리가 흔히 진심, 진심 그러는데 일단 나는 의식세계로는 거기까지 가봤어. 이거는 그냥 하는 얘긴데.. 평상시 내츄럴한 상태에서 내가 그렇게 왜 할 수 없을까 하는 거죠. 그러니까 발란스를 맞춰야 할 부분이죠. 내가 하고 있는 행위나 음악도 내가 아무리 뭐다 뭐다 주장해도 내 안에 그게 충만하지 않았을 때는, 그래봐야 내 인생에 있어서 껍데기지. 그니까 제대로 작품 만들고. 아까 아버지 얘기했죠? 이제 주니어도 생각하고. 받은 만큼.

 

 

진심,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꾹꾹 눌러 말하는 강산에는 상대편이 아닌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 함께 전해져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심이라는 단어가 새삼 가슴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람들을 향한 진심은 기억에도 없다는 아버지와 아직 기억할 게 없는 자신의 아이에게도 이어졌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배우는 자와 배우지 못하는 자의 차이점은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그 사람 몫인데, 예를 들어서 한 아버지의 아들이 있어요. 근데 배우는 아들과 배우지 못한 아들이 어떤 차이가 있냐면 이 아버지가 술만 먹었다 하면 집에 와 가지고 아들을 패는 거야. 배우는 아이는 그게 나쁜 걸 아는 거야. 이 아버지는 왜 때리나 자꾸. 배우는 아이는 아버지가 돼서 안 때려요. 그게 나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다는 건 그런 거거든요. 근데 배우지 못한 아이는 그게 감정에 지는 거예요. 아버지가 때리면 그게 화가 나니까, 으이씨. 이 아이는 아버지가 돼서 아들을 똑같이 때려요. 그게 발전이고 배우는 것과 배우지 못한 것의 차이, 그런 부분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기억도 없는 내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부분들을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는 주고 싶다는 거지. 그냥 우리 일상에 있는 부분인데요, 내가 배우고 싶은 거죠. 받고 싶은 거 내가 많은데,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제는 내 나이도 그런 거고. 나는 사실 나이에 구애받고 싶지는 않은데 이 나이란 건 상대적인 거거든요. 난 내 안에서 항상 아직도 소년인데. 어느 날 보니까 나보고 형, 형 그러고, 뭐 인제는 아저씨, 아저씨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나이를 느끼잖아요.

 

퍼> 올해 41이신가요.

강> 전 아직 39예요. (웃음) 맞잖아.

 

 

<명태>라는 노래 속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도 사투리로 아버지를 불러낸 강산에에게 아버지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처음에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이제서야 그 연결점을 찾아갈 수 있을 듯 했다. 그것은 내 안의 나를 되찾는 일에 다름 아니며 나 자신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거칠 수밖에 없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

 

 

<명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댄 너무 아름다워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

그댄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데이

 

내장은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

눈알은 굽어서 술안주 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도 쓰인데이제이요 에

 

명태 그 말의 유래 중에

조선시대 함경도 명천 지방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가 처음 잡아 해서

리명천의 명자 태씨 성을 딴 태자 명태라고 했데지에이니

 

겨울철에 잡아 올린 동태 3-4월 봄에 잡히는 춘태

알 낳고서리 살이 별로 없어 뼈만 남다시피한 꺽태

냉동이 안된 생태 겨울에 눈 맞아가며 얼었다 녹았다 말린 황태

 

영걸이 어디갔니?

 

민물태 낚시태 막물태 왜태 바람태 애기태 노가리는 앵치

이 밖에도 그 잡는 방법에 따라 지방에 따라 이래 뭐뭐 이래 많은지 에

 

영걸이 왔니? 문웅이는 어찌 아이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쉈어? 에 히

 

 

…………………………………………………..

 

 

 

술은 술이고 마리화나는 마리화나일 뿐

 

 

퍼> 예전에 마리화나로 들어 가셨었잖아요. 좀 엉뚱한 질문인데 그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뮤지션들에게는 그 느낌이 좀 다릅니까?

강> 마리화나의 경험이요? 저한텐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이 나라도 아마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알고도 있고. 왜 자신 있게 알고 있다 그러냐면 경험자니까. 이게 변할 거라고 하는 얘기는 이 마리화나라는 그 자체가 흔히 일반적으로 마약이라는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주입이 되어있지만. 근데 사실 마약이라 의미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자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독 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술도 마약일 수도 있고 우리의 여러 가지 생활 습관도, 하여튼 모든 것들이. 예를 들어서 술은 똑같이 마시는데 어떤 사람은 중독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술이란 자체를 훌륭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의학적으로 캐미컬적으로 분석을 해봐도 사실은 담배보다 마리화나가 좋아요. 인체에 해롭지 않아요. 담배 이게 더 해로운 거예요. 저는 임상실험을 한 사람이고.

 

 

퍼>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강>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근데 그게 열쇠는 아니에요. 마리화나나 담배나 똑같은 거예요. 술은 술일뿐이고 마리화나는 마리화나일 뿐인데.

 

 

퍼> 어떤 경험인지 궁금했어요. 나도 한 번 마리화나를…

 

 

마리화나에 관해 가볍게 운을 떼자 강산에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마약이라는 규정에 대해 좀 더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간 강산에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했다더라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마리화나가 마약류에 속하는지 담배보다 덜 해롭다든지 하는 것들은 논외였고 다만 마약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더라 식의 비난 섞인 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리화나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지금 내가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강산에에게 그것은 부끄럽다거나 사죄하고 싶은 행위가 아닌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에 대한 인식에 분명 변화가 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강산에의 어조가 약간 높아지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강> 잘 아실지도 모르지만 보면 대한민국, 특이해요. 내가 가까운 일본에서 1년 살아봤고 미국에서 1년 살아봤거든요. 근데 컴퓨터 환경이라면 아무래도 시장은 저쪽일 거 아니에요. 대한민국처럼 이렇게. 난리지. 난 컴맹이라 약간의 위기감도 느끼고 이래 갖고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근데 보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늘 내가 갖고 있는 생각, 아니면 그게 바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imagine, 그랬으면 하는 꿈일 수도 있는데 그런 내 꿈과 내가 살고 있는 이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갭이 있었어요. 내가 외국으로 다니면서 느끼는 부분들인데. 한국에선 느낀 게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게 역사적이든 습관이든 뭐든. 서로 기탄없이 얘기하고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채널, 내가 자란 걸 생각해보니까 같은 연배 아니면 채널이 없더라고. 그것도 남자 여자 따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남녀는 뭔가 무슨 애인 아니면 뭐 이런 개념이 늘 우리 사회에서 있다 보니까. 외국 같은 경우 잘 아시겠지만 거기는 옛날부터 파티문화.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나이에 대한 개념이 없잖아요. 평상시 자기들의 문화나 일도 그렇고 소통 채널이 생활 저변에 있는 거예요.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나이에 대한 게 없으니까. 친구처럼 소통하니까. 우리는 형님, 이래 가지고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구요.

 

어떤 격식. 아마 우리가 상상하고 추측해본다면 예를 들어 우리 한국 근대사 봤을 때 한국 사람들 몇 세대 올라가 보면 무의식중에 소통적으로 뭔가 억압되어 있는 부분이 있잖아. 이게 쌓이고 쌓여 가지고.. 외국에 있어 보니까 평상시에 파티 매주 하고 그러면 나이 이런 게 없더라구. 그렇게 내가 친구 사귀고 해봤으니까. 내가 그때 한참 혼란스러웠을 때였는데 한 50대 아줌마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처럼 고민도 나누고 조언도 듣고.. 그렇게 통할 수 있는 채널이 그냥 일상생활에 있으니까.

 

 

퍼> 퍼슨웹도 수요일마다 커뮤니케이션 파티 하는데. (웃음)

강> 생각해보니까 한국에서 인터넷이 이렇게 폭발적인 게 자연발생적인 거겠구나. 그러면 이왕에 이렇게 됐을 때 이게 효과적으로 잘 될 수만 있다면..

 

 

사람들 간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부족한 이 대한민국에 집집마다 뻥뻥 뚫려있는 초고속 인터넷 망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강산에는 얼마간의 외국생활 속에서 경험한 ‘일상 속의 소통채널’을 통해 느낀 바가 많은 듯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나이와 직업, 성별 등 여러 제약에 묶여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국 문화를 아쉬워했다. 서로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지 못하고 친구가 되지 못하는 관계가 우리에게는 더 많다.

 

 

3. 나비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는 계속 흘러갔고 분위기는 채워지는 맥주 따라 출렁거렸다. 그런 가운데 화제가 된 것이 나비였다. 강산에는 나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다. 미에꼬의 한국이름을 나비라고 지어주었으며 그와 함께 즐기는 팬들의 모임이 다음카페(cafe.daum.net/skql)에 있는데 그 역시 나비이다. 노래 속에도 앨범 속 사진에도 나비가 날고 있다.

 

 

퍼> 왜 나비예요.

강> 나비 얘기해줄까. 내가 나비라고 왜 지었냐면 사막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태국을 경유했다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어. 왜 그랬냐면 태국에 내가 알고 있는 미국 친구가 툭하면 거길 가요. 그래서 이 친구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경유했지. 거기서 한 일주일보냈는데 인제 내가 돌아오는 길에 이 친구가 공항에 나를 배웅하러 왔어.

나왔다가 레스토랑에 갔는데 트여있는 데야. 거기서 둘이 얘기를 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지금 나이가 50에 가까운 아저씬데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이야. 이름이 Bob인데. 둘이 오래간만에 사적인 얘기를 나눴어. 얘기하다가 우리 엄만 어떻고 아버진 어떻고 그러는데, 얘기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디서 나비 한 마리가 여기 어디서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았어. 처음엔 뭐 나비란 게 그냥 있는 거라 생각했지.

그때 엄마 얘기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 나비가 휘익 와 가지고 Bob의 입술에 딱 앉는 거야. 엇. 그 입술에 앉아있는 시간이 한 10초 정도, 인간 시간 감각으로 10초면 얼마나 길어. Bob도 놀랬지. 10초 동안 앉아 있다가 얘가 날아가. 날아가다가 또 똑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거야. 난 나비를 봤지만 설마 하고 별 생각 안하고 아, 재밌네, 나 딴에는 조크한다고 Bob, 보라고. 그때 Bob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었거든? Bob의 엄마가 Bob한테 지금 뽀뽀하는 거라고. 그렇게 내가 의미를 부여했다고.

 

아하하 웃으면서 그렇다 그렇다고 하고 있었는데. 아 진짜 나는 설마 했었어. 근데 이 나비가 똑같은 데 있다가 휘이 와 가지고 내 입에 딱 앉는 거야. 읍, 놀랬어. 나는 벌레 그 촉감을 무서워하거든. 아무리 예쁜 나비지만 그 느낌이.. 입술에 앉으니까 예민하잖니. 난 무섭잖아. 근데 그 상황이 너무 절묘해가지고 좀 참았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 6초 동안 견뎠어. 그러다 무서워서 훅 불어버렸다고. 그 이후로 이 나비가 어디론가 없어졌어.

근데 이 나비가 내 입술에 앉는 순간 Bob도 나도 너무 절묘하고 웃기니까 막 웃었어. 또 주변을 봤어. 혹시 나비가 여러 마리가 있어 가지고 이 한 마리가 길 잃어 왔나 싶어서. 근데 나비가 있을만한 데도 없고 나비들이 없어. 근데 나비가 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가지고 그 얘기하는 타이밍에 딱 앉고 그러니까 짜릿하잖아. 마치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잖아.

그리고는 그때부터 내가 나비, 이게 왜. 나비에 꽂힌 거야. 그 나비가 뭘 의미할까. 왜 하필 그렇게.. 근데 Bob이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때가 내 연어 앨범 나오기 전이었거든? 삐따기 앨범 내고 여행 갔다가 돌아올 때였는데. “산에, 아이디어가 있다. 다음 앨범 제목을 ‘나비의 입맞춤’으로 해라.” 아, 좋은 아이디어다, 적어놨어. 결국 앨범을 만들었는데 막상 앨범 제목을 ‘나비의 입맞춤’ 하려니까 내 선입견에 못하겠는 거야. 왜냐면 ‘나비의 입맞춤’ 그러니까 무슨 오페라 제목 같고 재미가 없고 영어로 ‘butterfly’s kiss’ 하기도 어색하고.

그래서 포기를 했어. 앨범 제목은 ‘연어’라고 했지. 근데 이 나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야. 그래 갖고 내가 마침 그때 내 녹음실 스튜디오를 만들 때였는데 그 연습실 이름을 나비라고 지었고, 팬클럽이 자연발생적으로 있긴 있었는데 그때 팬클럽 이름이 ‘산에랑’이었어. 그래서 내가 얘길 했지. 이름 바꿔라. (웃음) 나비라고 해라. 나중에 얘기해줬고. 노래도 미련이 많아가지고 그 앨범에 10곡이 다 끝났는데 나비의 입맞춤이라 해서 즉흥 어쿠스틱으로 통기타만 해가지고 나비의 입맞춤 노래를 내가 기어코 넣었고. 그 다음에 그 연어 앨범 잘 보면 NAVI 해서 옆에 로고 같은 걸 넣었어. 그게 앉아있는 나비 옆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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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입맞춤>

갑자기 예쁜 나비 한 마리 어디에선가

날아와 내게 입맞춤하고 춤을 추는데

 

한참동안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꿈을 꾸듯 예쁜 나비의 입맞춤 이었네

 

갑자기 예쁜 나비 한 마리 어디에선가

날아와 내게 입맞춤하고 춤을 추는데

 

사막으로 떠난 여행길 맑은 샘물 같은 너였네

꿈을 꾸듯 예쁜 나비 입맞춤 이었네

 

아직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잊을 수가 없는 아름다운 일

꿈을 꾸듯 예쁜 나비의 입맞춤 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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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비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해가지고 보니까 그게 또 나라마다 다 다르더라고. 공통적인 부분도 많은데 대부분 자유, 아름다움, 이런 건데 독일 같은 경우는 의외로 devil, 악마더라고. 그러다 어느 날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생각했지. 나, 내가 거듭나고 싶다. 발전이라는 게 사소하게는 그런 것일 수 있잖아.

 

 

 

퍼> 나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변태한다는 건가. 여러 가지 통하겠네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도 통하고 어머니 얘기도 통하고.

강> 결국 나비로 끝나네. (웃음)

 

 

밤은 깊어지고 나비로 한 템포 마무리한 우리는 취중의 담소를 더욱 즐기기 위해 ‘뜰’로 자리를 옮겼다. ‘뜰’은 어둑어둑한 불빛과 둥지 속에 들어 와 있는 듯 포근한 나무 장식들이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의 여행을 돕는 데 일조한 것은 물론이다.

 

꿈과 여행

 

 

강> 아, 아까 내가 오줌 누면서 생각했는데 (웃음) 오늘 이 자리가 나를 참 꿈속으로 여행하게 만들어.

 

 

 

퍼> 저도 사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입니다. (웃음)

강> 멍해서 있는데, 자꾸 이야기하는 게 나를 그런 식으로 여행을 시키더라구. 기분 좋아.난 오늘 녹음기 있는 인터뷰인지는 몰랐어. 내가 사실 고민하고 가끔 잠 못 자고 하는 부분들. 내가 나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간다고 그럴까? 나를 깨우기 위한 이런 부분들이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stop할 수도 있어. 뭐가 뭐야 다 필요 없어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해. 그게 체질적으로 안돼. 돈 버는 거 궁리하고 그런 거. 막말로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많아.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니까 살이 안찌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아 있겠지. 난 너무 예민한 부분이 있어.

 

근데 이제 조금씩. 하나씩 여유라 그럴까? 편안함이 오는 부분들이. 이제 하나씩 알아가는 부분인데. 내가 오늘 아침 문득 잠자리에 일어났을 때 내 안의 고마움이라든지, 내가 평생 갚아도. 내 형, 내 인연, 엮여있는 친구들 그들한테 이 인연들에게 관심 가져주고 나누고 싶고 이런 부분들. 그전에는 그런 걸 그래야 되지 않을까 하는 거지 감동하는 차원까지는 아니었거든. 벌써 생각 자체만으로도 그 시작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제 점점 직접적으로 오고하는 부분들이, 감사함이. 내가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아까 꿈속 여행 시켜준다 그랬는데, 난 도리어 고마운 부분들이 있어요. 오늘 아침 잠자리에 일어났을 때의 이거 오늘 여러분들이 확인시켜주는 거야. 말하게 함으로써 기분 좋지.

 

 

퍼슨웹이 강산에를 만나러 왔지만 강산에도 강산에를 만나는 시간이 된 듯 했다. 어느 순간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사막을 가도 나비를 만나도 결국엔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도 우리에게 꿈속을 여행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꿈길을 찾아 걸어간 것은 결국 강산에 자신이다.이미 인터뷰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야기는 너울너울 흘러갔다. ‘뜰’ 안에서는 한 외국인 가수가 무대 위로 올라와 노래하기 시작했다. 유쾌한 얼굴로 흘러간 팝송들을 노래하는 가수는 러시아에서 온 무명의 직업가수였다.

 

 

퍼> 남의 나라까지 와서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 보면 어때요.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건데 전 가난하게 생활하는 뮤지션을 보면 마음이 좀 이상하거든요.

강> 그런 거 나도 마찬가지로 있어요. 아울러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게도 되고. 물론 진짜 자기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경제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 받아야 한다면 약간 측은한 마음도 들고.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 거니까.

물론 내가 더 나아진 환경 없다 하더라도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아까 얘기했을 때 앨범 많이 나갔냐. 지금은 전혀 미련이 없어. 지금 나한테는 백만 장이든 천만 장이든 의미 없어. 물론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장수가 많이 나가는 게 나한테 영향을 많이 주는 건 사실이지만은 나한테 그리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 왜냐면 지금의 내가 공연을 하고 싶다거나 당장 하는 행위에 대한 저변이라 그럴까, 내 속에서 계속 끊이지 않고 만들고 싶어 하는 창작에 대한 이런 것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까. 별로 거기에 대한 미련은 없어지는 거 같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발전하고 싶어요. 그게 많이 팔리고 기록 남기고 그게 나하고는 별로 아닌 거 같아. 물론 내가 발전하고 그게 또 sale도 되고 두루두루, 아까 얘기한 power 생기면 참 좋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내가 더 해야 될 부분이 많은 거 같아. 내가 내 스스로 깨어나야 할 부분들이, 선행되어야 할 부분들이. 지금은 그래도 내가 다음을 또 할 수 있는 거니까. That’s OK. 내가, 진짜 찼어요.

 

 

 

퍼> 뮤지션 얘기 하다보니까 언뜻 드는 생각이 지금 다음기획 안에 여러 가수들이 있잖아요. 함께 해서 아까 그 power, 사회적 발언 이런 걸 좀 콘서트로 꾸밀 생각은 혹시.

강> 그건 지금은 계획을 몰라요. 앞일도 모르겠고. 그건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계획을 해가지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진짜 뮤지션이나 기획하는 사람이나 말 그대로 코드가 맞아야 돼요. 의식의 코드가 맞아서 뜻이 통할 때 그 뜻이 통한다는 거잖아요. 그냥 우리가 기계도 아닌데. 사람이라는 게 노래하는 기계 같을 바에야 기계 트는 게 낫죠.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 모여 뜻이 통했을 때 그럴 때 같이 하는 거죠. 아마 그럴 때가 올 거 같아요. 아직은, 아직인 것 같아요.

 

퍼> 혹시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뮤지션의 집단, 2, 30년대 문학청년들 보면 동인지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단순히 돈으로 모이는 개념이 아니라 정말 뜻이 맞는 음악가들의 집단. 준비하는 거 없으세요.

 

강> 없어요. 근데, 우리는 흔히 살면서 항상 직업으로 나누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바운더리가 비슷하니까. 근데 살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크로스오버하는 거, 경계를 넘는 거, 교류하는 거. 내가 옛날에 젊을 때 꿈꾸어오던 크로스오버는 무엇이냐면 쉽게 얘기해서 한국에 태어난 뮤지션으로서 세계로 크로스 오버하는 그런 것만 생각했었는데. 사실 요즘에 와서 생각하는 크로스오버는 뭐냐면, 이 나라의 특수한 문화가 있는데 보면 세대차이가 너무 심해. 세대간의 크로스오버. 내가 만드는 음악, 내가 하는 행위들이 10대고 20대고 30대, 50대, 크로스오버하고 싶다는. 그니까 공감대를 그렇게 크로스오버하고 싶어..

 

 

 

퍼> 근데 아까 얘기했던 그 블루스 할아버지는 찾아가 보셨어요?

강> 아니, 한국 때문에. (웃음) 내가 한국 때문에 결국 못 만나 뵈었지만 결국 그 사람이 사는 것도 내가 살아야 할 것도, 내가 알아야 될 것도 결국에는.. 그 사람이 살아간 것도 알기 위해 살아간 것이고.. 그러니까 세상에 락이다 뭐다, 사실 남들이 평가하는 거 별로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이 인터뷰도 어떤 기록으로 남겨지고 할지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거든. 진짜로, 정말로. 왜. 이 우주는 내가 있을 때 있는 우주고 내 가족이고. 이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때 삶과 죽음을 넘어갈 때, 죽기 전에 내가 후회 없으면.

 

 

퍼> 자기중심적인데요.

강> 에이, 그렇지만 내 중심은 될 수 있으면 함께 하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둔 거니까. 적어도 내가 거기에 후회 없을 때 예, 하고 넘어가는 거지.

 

 

 

퍼> 저도 못 가본 나라인데 쿠바, 예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란 영화에 보면 칠십 넘어서 음악 하는 할아버지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강산에 씨가 그런 할아버지가 될 거 같은. 그니까 블루스 할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제는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어느 순간 보니까 자기가 블루스 할아버지가 된.

 

강> 예, 나는 믿고 싶어요. 이건 종교적인 게 아니에요, 우리 공통된 얘긴데, 어쩌면 현각자, 내 안에 있어요. 모든 게 내 안에 있다는. 주가 내 안에 있다 그러는 것처럼. (웃음) 내 안에 있는 건데, 내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런 거겠죠.

 

 

 

퍼> 그럼 아까 그 질문에 대해서 부정하는 건 아니죠. 블루스 할아버지가 될 자신.

강> 내가 믿고 싶다 그랬잖아. 어쩌면 믿고 있는지도 모르죠.근데, 이건 내 이기적인 차원이 아니라 아마 그게 어쩌면 본연적인 거 같아요. 그니까 내가 나를 알아가는 부분들, 내가 깨우치고 싶은 부분들이. 이건 도가 아니에요. 우리는 도를 어떤 무슨 꼭 속세를 떠나서 구도, 뭐 어렵게 얘기하는데요. 우리가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부분에서 의문이 생기고, 거기서부터 시작해가지고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거 같애. 또 그게 체질에 맞는 거 같고. 힘들면서도. 근데 아마 느낌이 왔는데, 오늘 아침 딱 잠자리에 일어나면서 느낌이 왔어요. 그게 뭐냐면 내가 충만할 때.. 그 충만을 우리는 흔히 정의를 내리잖아요. 사랑이다 자유다 뭐다 뭐다 정의 내리는데, 그건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들일 뿐인데. 그 느낌, 충만한 느낌. 뭔가에 확 관심 보이고 세세하게 정이 가고 애정이 느껴지고 이해가 가고.. 그런 충만함으로 채워졌을 때.

 

 

 

퍼> 제가 구도자니 뭐 이렇게 오버하면서 말한 게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런 뉘앙스를 많이 풍기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게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든지 아버지에 대한, 아무리 기억이 안 나도. 아님 이 교회라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정서, 소년의 예민한 정서 속에 종교적인 뭔가가 있었을 거라 느껴지는데. 그 부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가 내 음악 또는 내 생에 부정할 순 없을 텐데. 뭔가가 있다면 그건 어떤 지점인 거 같습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강> 그건 이제 내가 앞으로 찾아야 할 부분이겠죠.내가 어느 날 꿈속에서 꿈을 꾸면서 <영걸이의 꿈>이란 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우리는 흔히 보이는 사실, 현실이라고 규정을 짓는 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감각으로 느끼고 이걸 현실이라고 하잖아. 한데 어느 날 내가 꿈속에서 꿈을 꿨는데 그 꿈속에서는 다 사실이었지. 근데 재밌는 게, 근데 요게 많이 꿔봤던 거야. 아 이거 전에도 몇 번 꿔봤는데 이거 꿈이네, 이 꿈은 자주 여러 번 꿔봤어. 기억이 나. 아, 이거 꿈이네 의식을 하다 보니까 깨더라고. 왜 자꾸 그런 꿈을 꾸지 하고 있었는데 이걸 느닷없이 또 깬 거야. 알람소리 때문인지 암튼 깼어. 또 내가 이부자리에 있는 거야. 아, 그럼 지금 이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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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걸이의 꿈>

누군가에 쫓겨 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도망쳐 보지만

점점 더 잡힐 것만 같이 가까워지고

불안에 떨며 쫓겨가고 있다가

 

갑자기 저 낭떠러지 밑으로

나는 그만 떨어지고 말았네

너무나도 깜짝 놀란 바람에

나도 몰래 눈을 뜨네

깨어보니 꿈이었네

 

꿈이란 걸 알고 나서 겨우겨우

시달렸던 마음 조용히 달래보네

그러던 중에 어디선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소리 쫓아가고 있던 난

 

그 소리가 알람 소리라는 걸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알았네

꿈속에서 깬 줄로만 알았던

그것마저 꿈이란 걸 몰랐었네

꿈이란 걸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날

눈을 뜨고 현실로만 알았던

그것마저 꿈속의 또 다른 꿈

속이네 또 다른 꿈속의 꿈이었네

어쩌면 지금도 또 다른 꿈 속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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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이것도 또 언젠가 깨야 할 꿈이 아닐까요.

강>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왜냐면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 부분들이 내가 그 속에 이 차원 안에 있을 때는 이건 절대로 내가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실이라고 믿고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몰라, 내가 이 안에서는 내가 깨기 전의 차원을 죽음이라고도 하고.. 가보지 못한 데니까 두렵기도 하고. 죽으니까. 죽고 늙고, 두렵잖아. 그리고 우리가 삶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잖아.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거를.

그니까 꿈속에서 꿈을 깼을 때 그럼 이건 뭐야. 이건 또 다른 꿈속의, 또 꿈속의 꿈이 아닐까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때부터 혼돈이 되기 시작했었어. 어쨌든 그래서 노래를 만들었어. <영걸이의 꿈>이라고. 그리고 내가 고민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형한테 전화를 딱 걸어서 형, 나 요즘 힘들다. 왜. 내가 꿈속에서 꿈을 꿨는데 이래 이래 가지고 이랬는데, 도대체 이건 뭐야. 내가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문이나 두려움이나 여러 가지 있겠지.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물어봤겠지. 근데 돌아온 대답이, 어차피 지금 꿈속인데 뭐 그렇게 생각에 사로잡혀 있니. 어차피 꿈인데.

 

아, 이왕 꿈속인데 좋은 꿈꾸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뜻 이루고.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잖아. 아까 얘기했지만 진정으로 원할 때라고 믿고도 싶고. 믿는다면 이왕이면 좋은 뜻을 세워서 좋은 꿈을 꾸고. 꿈꾸다가 또 깰지언정 내가 악몽에 시달리기보다는, 나를 번잡하고 복잡하게 만든 꿈보다는 내가 내 친구들이랑.. 어느 날 인생을 보니까 딱 찰나일지언정, 좋은 꿈은 일찍 깬다 그러잖아. 그런 찰나적인 꿈이라도 좋은 꿈을 꾸고 싶은 거지. 그래서 지금 내가..

존 레논이 얘기했잖아.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 당신이 나를 몽상가라고 말한다 해도, 그렇지만 나 혼자가 아니다.(John Lennon의 “Imagine”) .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좋은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티스트라는 게 굳이 뮤지션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좋은 꿈을 꾸고 싶은 거죠. 그니까 stop the war 해야죠. 부시 같은 꿈을 꾸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퍼> 악몽을 깨야죠.

강> 좀 웃긴 애잖아.

 

 

 

4. 몽상가라 해도

 

 

퍼> 소재를 주로 어디서 택하세요.

강>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내 안의 내 의식세계와의 차이에서 오는 저항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소원일 수도 있고.. 이건 왜 이렇게 안 될까 이거는 도대체 왜 이래야만 되지, 의문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 생활에서 느끼는 것들.. 만약에 나는 이런데 이 사람은 왜 저러지 하는 의문.“와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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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워~ 와 워~ 와 그랬쌌노

 

뭐라캤쌌노 뭐라캤쌌노 니

(니 또 와그라노)

우짜라고요 내 우짜라고 내는

(내는 우짜란 말이고)

우짤라꼬 니 우짤라꼬 그라노

(니 단디해라)

마 고마해라 니 고마해라 니

(니 그라다 나친데이)

 

와그라노 니 또 와그랬쌌노

와그랬쌌노

와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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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뭐 특별한 게 아니라 참 친구가 많다는 건 좋다, 라고 느끼는 부분들. 어느날 친구들이랑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발가벗고 온천에서 같이 목욕해 보니까 야, 옛날에 내가 살던 한국이란 나라 보면 감히 상상도 못하잖아. 근데 어느날 내가 자연 속에서.. 평상시 한국문화였다면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상황이지. 노소, 남녀노소 상관없이. 내가 옷 입고 거길 도착했을 때는 내가 이방인이 된 거지. 내가 더 못 있겠더라구. 내가 거기 있으려면 나도 벗어야 되는 거지. 그래서 벗고 같이 있는데 나중에는 내가 거기 동화되고.

 

 

퍼> 그게 일본에서?


강> 아니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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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가 춤추던 파티가 끝날 무렵 그 아침이 생각나

몸 속에서 그 뭔가 필요 없는 모든 것 ?Y-하고 빠져나가 버린 듯한

물을 나눠 마셨네 언덕 위에 앉아

친구가 많다는 건 참 정말 좋은 일이야 여자든 남자든

우리들은 다같이 따뜻한 물이 솟는 그 강가로 향했어

 아이처럼 웃으며 물 속으로 하나둘 첨벙 뛰어 들어갔었지요

물을 나눠 마셨네 언덕 위에 앉아

 친구가 많다는 건 참 정말 좋은 일이야 여자든 남자든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be your friend be your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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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내가 그런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 목욕탕이라고 생각해봤어. 우리가 사회 나오면 그런 거 있잖아. 몇 달 전에 내가 무슨 이벤트 노래하러 갔는데 그 기획직원이 나를 보고 아, 안녕하세요, 뭐 박 대리입니다, 이런 거야. 아 예… 내가 만난 사람 많으니까 기억을 못하는 거야. 전에 그거 있었잖아요, 만났잖아요, 어쩌고저쩌고. 제가 원래 이름을 잘 못 외워요, 얼굴은 기억하는데. 아, 제가 박 대리로 통하잖아요. 아, 그러세요. 근데 속으로 혼자 생각한 거야. 왜 하필 대리지, 이름이 없나. (웃음) 그럼 앞으로 박 대리라고 불러야 되나 싶더라구. 실례지만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 박 아무개입니다. 그게 그 사람한테 낯선 거야. 사회 나가도 사장님, 이사님, 무슨 님, 많잖아.

근데 내가 어느 날 사우나에 갔는데 전부 다 발가벗고 있잖아. 서로 모르잖아. 한번씩 보잖아. (웃음) 바깥에서는 사장님 뭐 하지만 전부 까놓고 보면 똑같아. 사장도 없고. 가죽만 좀 늙어지고 머리만 좀 벗겨지고. 그래서 내가 노래로는 안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 natural born dancer and singer, <나> 그 노래를 사실 ‘목욕탕’이라고 하려고 했어. 사장님 무슨 님 해가지고 발가벗고 목욕탕에서 봅시다.

내가 좀 뭔가 굳이 얘기하고 싶었던 거는 너무.. 결국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람 안에 사람 있어야지 그 사람 옆에 사람이 있다. 내가 <코메디>란 노래를 만들었어. 보니까 사람이 많아. 근데 보니까 대부분이 그 사람 위에 사람이 있더라고. 계급으로 나누고 나이로 나누고. 종속적으로. 사람 밑에 사람이 많더라고.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는 게 뭐야.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옆에 사람이 없어. 왜냐면 그 사람 안에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 옆에 사람이 없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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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

사람이 없네

사람이 없어

그 사람 옆에

그 사람 안에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리고 리고 리고

 

사람이 있네

사람이 있어

그 사람 위에

그 사람 밑에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리고 리고 리고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가 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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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내 위에는 사람이 많아. 내 위에서 나를 누르는 사람, 내가 밟고 싶은 사람이 많아. 얼마든지 내 마음먹기 따라서는. 내가 진정 사람일 때는 내 옆에 사람들이 많아. 그게 평등이고 peace. 근데 지금은 우리 사회가 그 사람 안에 사람을 없게 만들고 내 위에 사람을 만들고 내 밑에 사람을 만들죠. 그 사람 안에 사람 없으니까 그게 코메디 같다는 얘기를 노래로.. 그니까 울다가 웃다가 울리고 웃기고.. 몰라, 나도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나는, 내가 맞추고 싶은 거는, 그런 내 의식의 세계와 내 현실적인 갭을 빨리 줄이고 싶어요. 그니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싶다는 거지. 내가 아직 발란스가 부족하거든.

 

 

 

내가 나를 보는 것

 

 

 

퍼> 말씀하시는 게, 그 화법이 중요한 게 있어요. 내가 ‘그러더라고’. 내가 그렇게 ‘했어’, 가 아니라 ‘하더라’. 마치 남의 얘기처럼 하거든요. <라구요>도 보면 자기 얘기이기도 한데 그렇게 말하고.

강> 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웃음)

 

 

 

퍼> 자기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한다는 걸 의식하는지, 의식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

강> 지금 이 얘기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내가 나를 본다는 거야.

 

 

퍼> 자꾸 자기를 객관화시킨다는 거죠. 평소에도 의식하셨어요?

강> 아니, 전혀. 내가 발전이라고 얘기했잖아. 내가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은 내가 나를 자주 보는 거, 나를 객관적으로 자주 보는 거.

 

 

 

퍼> 자기를 보는 경험들이 많습니까?

강> 난 늘 보고 있지.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뭐냐며는. 늘 생활하면서 내가 좁쌀만한 나를 볼 때.

 

 

퍼> 아까 사막의 모래알처럼..

강> 나한테는 욕망이 있잖아. 될 수 있으면 마음이 좀 크고 싶고 많이 담고 싶고. 근데 현실적으로 내가 생활하는 걸 보니까 막 경계하는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그런 걸 볼 때마다 아이씨,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미치지.

그게 그렇게 된 계기가 있어요. 아까 날 사막으로 인도해준 형 있잖아. 나는 그 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두려움이 없었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도 없었고, 내가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나는 자신도 만만했었고 원래 강한 줄 알았었고.

 

근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진짜 아무 것도 아닌, 미약하고 겁도 많고 좁쌀만한 인간이란 걸 알았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내 무의식 속에 내가 강함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했었나봐. 어느 날 내가 “니가 원하는 게 뭐냐, 한 가지 소원이 지금 너한테 있다면 그게 뭐냐”라고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한 가지 소원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 되는 거야. 그래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근데 돌아오는 대답이 “강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일까?” 이왕이면 강하고 아름답고 싶은데 그런 얘기 들으니까, 아..

근데 내가 어쨌든 내 안에, 너무나, 그니까 각자가 살면서 보면은 자기 안에 영웅이 있잖아요, 영웅이. 모델이 있고. 내가 어느날 내 안의 모델을 만난 거야.

 

 

퍼> 이를테면.

강> 강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만난 거지.

내가 91년도에 미국 처음 갔을 때 그 형이랑 또 한 사람 미국친구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랑 룸메이트를 해서 1년을 살다 왔어. 그때 사람들은 내가 좀 이상하게, 이렇게 된 줄 알았을 거야. 돌아와서 내 한국 친구들이 뭐라 했냐면, 만나는 친구들마다 그랬어. 내가 너무 변해 있으니까. 형, 왜 그래요. (웃음) 내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랬어, 진지하게. 야, 나는 부처랑 예수랑 놀다왔다. 내가 만난 그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예수 같았고 한 사람은 부처 같았어. 그냥 내 안에 상식적인 개념에서. 아, 그건 내 생각이지. 누가 부처를 봐, 모르잖아. 근데 그냥 내 안에서 부처는 이럴 것이다, 예수는 이럴 것이다, 라는 개념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데 평상시 만나는 사람들이랑 너무 차이가 나니까. 너무 쇼크 받은 것도 많고.

 

두 사람을 두고 내가 내 나름대로 어떻게 정했냐며는 한 사람은 보니까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강한 쪽의 모델이고, 한 사람은 추구하고 싶은 아름다움 쪽이야. 한 사람은 너무너무 강한 사람이야. 그 강함이 어떤 거냐면.. 내가 늘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 좁쌀 같고 미약하다고 느꼈던 게 그때 사막에 그 광활한 대지에 딱 떨어뜨려 놓으니까 애걔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구. 근데 이 형이 너무너무너무 부드럽고 자세하고 섬세하고 배려있고.. 진짜 냇가에 내놓은 애기를 인도하듯이. 나는 그 안에서 그 형이나 아무도 없으면 나 혼자 그냥 깨갱인데. 나는 내가 강하다고 알았는데.. 그때 그 형이, 나 힘있다, 그런 게 아냐. 그냥 나한테는 부드러운 형인데, 지혜라는 거야, 지혜. 아, 지금 때가 이러니까 자리를 옮겨야 되고 해가 왔으니까 너무 뜨거우니까 옮겨야 되고 우리가 지금 물을 마셔야 되고..

또 한 친구는 마크라는 미국인 친구인데, 나는 세상에 살면서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나봤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일대일로 만나잖아? 왜 자기보다 남이 기준이야? 처음에 나는 그게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어. 이 사람이 내가 맘에 드니까 나를 배려해주나 보다 그렇게 알았는데. 이 사람은 생활이 그래요. 내가 볼 때는 야, 저 사람 너무 피곤하겠다 할 정도로 항상 남을 배려해. 그게 생활 습관이야. 그냥 보통 사람이야, 보통 사람인데 그렇게 남을 배려한다? 내가 너무 감성에 젖어 가지고 “마크, 내가 너의 친구가 될 수 있어? 근데 내가 만약에 어디 돌아가서 마크 보고 싶을 때는 어떡하지?” 그때 마크가 하는 얘기가 “산에, 난 너의 친구니까 니가 어디서든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달려갈게.” 감동이잖아아! 근데 말로서만 오는 게 아니란 말야. 그런 주파수가 아니란 말야. 그 친구가 평상시 하는 모든 행동이, 모든 게 중점이 자기보다도 상대.. “산에, Don’t worry, I’m your friend. 나는 네 친구야. 니가 원하면 언제든지 난 니가 원하면 내가 달려갈게.” 이게 친구구나 이게 우정이구나 배우잖아..

사막에서 아까 뭘 보냐 그랬지. 나를 본다는 거야. 많은 걸 봐. 그니까 내 요만한 것들을 보지.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막 아이씨.. 그래서 “마크, 용서해줘,” 저절로 그런 거야. “내가 진짜, 난 너무, 아이씨.. 나는 친구 될 자격 없는 거 같애. 난 너무 애가 안 된 거 같애.” 이러니까 웃으면서, “산에, Don’t say that. 그런 말하지마.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게 아니야. 난 너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 여기서는 니가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난, 울었지.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랑 놀다가 오니까 누구는 미쳤다고 하는데.. 내가 와 가지고 맨날 부처랑 예수랑 놀다 왔다 그랬거든? 그니까 나한테는 삶에 있어서 강하고 아름다운 모델들을 만난 거야. 내가 무의식중에 추구했던 강함과 아름다움의 모델들을. 나 혼자 추측이야, 이거는. 개인적인 느낌이야. 근데 그때 내가 알았지. 아름다움이란 뭐냐, 이제 정의도 내릴 수 있어. 강함은 뭐냐. 예전에 난 강함이라는 것은 그저 힘, power, 이런 건 줄만 알았는데, 한없이 부드럽더라구. 아름다움? 역시. 남을 배려하고..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퍼> 자기를 본다는..

강> 응. 매일 봐. 내 좁쌀 같은 걸 늘 보지. 근데 잘 안되지. 열도 받지 그럴 때마다. 아는 친구가 해준 얘기 중 하나가 부처의 얘기를 예로 들어주면서 분노의 절정에서 명상하라 그러더라구. 난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몰랐어. 분노를 삼키라는 거지.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부분들.. 그니까 난 내가 나를 보는 거야..

 

 

 

퍼> 아까 제가 사막에서 뭘 봤냐고 물었을 때도 뻔할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해주실 거 같았는데 아까 듣고 싶었던 얘기를 이제야 하신 거예요.

강> 아마 이럴 때를 기다렸나보지. (웃음)

 

 

 

퍼> 근데 그 마크라는 친구는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라고 혹시 알고 있었어요?

강> 지금은 알고 있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거기 가서 살면서 알게 됐지.

 

 

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반응이 틀려지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강> 그런 건 없어. 그냥 그는 나의 영원한 친구고. 나한테는 훌륭한 형이야.근데 나 이런 거 있어. 누구에게나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야. 그 마크란 사람이. 그 친구 여기 있으면 아마 나보다 느그들이 더 좋아할 걸? 그렇게 너무너무. 이건 내가 너무너무너무.. 제곱을 해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너무 귀엽고 너무 안고 싶고. 상상만 해도..!

 

퍼> 강산에에게만이 아닌 어디에도?

강> 어디에도.

 

 

 

퍼> 근데 그 사람은 항상 남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다가 딜레마 같은 거에 빠지지 않을까요?

강> 자기도 딜레마가 있겠지. 근데 내 느낌에는 이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이런 부분들로써 굉장히 채워지나 봐. 너무너무 아름다워. 그니까 영어로, 난 영어 못해, 내 아는 영어만 하는 거야. He is so beautiful. 근데 만약에 한국말로 하면 ‘그는 너무 아름다워’ 뭔가 어색하잖아. 그게 뭐냐면, 내가 그것도 생각해봤어. 아까 인터넷 문화도 얘기했잖아. 이게 왜 어색할까. 그게 익숙하지가 않은 거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그가, 아름다운 그가 많이 없었단 얘기야. 우리 문화 속에서. 근데 거기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벌써 사람까지 갔어. 성별구분하지 않고 사람한테까지 간 거야. He is so beautiful. 나이 구분하지 않고 He is so beautiful. 인간에게도 beautiful이라는 게 갔어. 일반화됐어. 지금 우리한텐 엽기적이란 말이 일반화됐잖아. 문화란 게 뭐야, 일반화돼 있는 거 아냐. 근데 우리한테, 야 저 남자 참 아름다워. 아직 뭔가 덜 익숙해져 있잖아. 아직은 남자가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나 보지. 그리고 아저씨 그러면 벌써 선입견이 안 좋잖아. 아저씨도 아름다운 사람이 나와야지. 나이에 연연해 있으면 벌써 아름답지 않잖아. 그니까 우리 때부터라도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라도 애들이랑 교류하고 인간으로서 통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You have A choice!

 

 

 

강> 난 진짜 영어 못해요. 나는 정식으로 배운 영어도 아니고 문법 맞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 느낌을 표현하는 영어예요. 난 문법 몰라요. 문법 무시해요. 영어 할 줄 안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영어에서 이런 걸 배운 적이 있어요. 영어권 문화에서.내가 외국 여자를 사귀고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약속을 했는데, 내가 어겼어. ‘너 왜 그랬어?’ ‘어쩔 수 없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I have no choice.’ 이 친구가 강력하게 반박을 딱 하는 게, ‘You have A choice!’ 그것도 a를 강조하더라구. 보통 어 하는데 에이라고. You can have A choice! 넌 선택할 수 있었어. 따져보니까 그래, 내가 만약 조금만 더 부지런했으면, 조금 뭐 했으면..

선택은 자유예요. natural born killer가 되든 natural born dancer가 되든. 내가 내 안에 있는 걸 내가 choice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natural born 어떤 행위자가 될 수 있잖아. 그건 내 선택이잖아.

 

 

 

강산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느껴지는 고리가 있다. 하나하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결국은 모두 한 고리로 묶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주어지는 질문에 따라 대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어긋나기도 하고 맥을 달리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의 삶과 노래와 말은 돌고 돌아 꼬리를 무는 일관된 흐름을 만드는 것 같았다. 내가 강산에를 만나면서 느꼈던 자유는 다른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나를 찾고 사람을 만나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것.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I have A choice. 강산에는 그것을 찾은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