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삶과 시는 빈 깡통같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버스는 유성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눈앞으로 이제 막 물이 오른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고 있었고 앞으로는 거대한 비행선을 닮은 대전 월드컵 경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면우 시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유성 터미널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식사 때라 그의 식사시간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방향을 가늠해 보다 조금 걸으며 시간을 보내 보기로 했다.
유성터미널 앞은 서울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넓은 하늘과 자동차가 밀리지 않는 도로, 그 한적한 길가에 할머니들이 난전을 차려놓고 향긋한 봄나물을 팔고 있었다. 그 고요한 터미널 앞 풍경이 봄 햇살과 적절히 섞여 발길을 붙잡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냉이 냄새와 금방 깐 도라지 냄새가 코끝에서 핑 돌다 사라졌다.
삼십분 정도 터미널 앞을 걸어다니다 택시를 탔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택시 기사는 요즘 대전 시티즌 축구팀이 정말 잘 해주고 있어서 살맛이 난다는 말과 함께 김은중 선수가 월드컵 대표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워낙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서 나는 별 말없이 “아, 예” 라는 추임새만 넣고 말았다. 택시기사가 잠시 행정 수도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독일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4강안에 들기는 힘들 것이라고 다시 화제를 돌릴 즈음 대전 정부 종합청사 남문 쪽을 보고 있는 기술신용보증금고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면우 시인과 만나기로 한 그 건물이었다.
이면우 시인에게 대전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넣자 신용보증 금고 지하 보일러실로 찾아오라고 한다. 지하 보일러실에 들어가 본 기억이 없는 터라 지하 보일러실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지하 보일러실이 시인에게는 생업의 공간이자 상상력을 불러내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갔지만 묘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곳으로의 초대에는 두려움이 먼저 앞장을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지하주차장 한 귀퉁이에 여러 배관들이 어지럽게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의 한 귀퉁이에서 작은 체구의 한 사내를 발견했다.
퍼> 보일러실에서 인터뷰하는 게 뭔가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시가 많이 알려지고 해서 이런 인터뷰가 잦으실 텐데 윗사람들이 저 사람은 일도 안하고 뭐하냐고 눈치 주지 않나요?
이> 내 직업이 보일러공이고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항상 이곳 보일러실에서 인터뷰하는 거지. 지난달만 해도 수도 없이 왔다 갔는걸.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셈이지. 이 건물엔 용역이 5명이 있는데 기계, 수도, 가스를 관리하는 나, 전기 담당하는 청년, 그라고 건물 관리하고 청소반장 하는, 그 밑에 아주머니 두 분 이렇게 다섯 명이 와있어. 내가 관리하는 게 이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눈치 주는 거? 크게 신경 안 써. 내가 용역이라 맡은 업무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가 만들어낸 열기와 온수가 배관을 타고 건물 전체로 공급되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가 만들어낸 감수성이 시라는 배관을 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면우의 직업은 보일러공이다. 일 년 연봉 1380만원의 계약직 용역 노동자로 살아가며 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새롭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노동자 시인은 많았고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이야기들을 세상 밖으로 알려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째서 이면우를 만나러 한 달에 한 번씩 인터뷰를 하러 오는 것일까?
내가 처음 이면우를 만나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그가 단순히 보일러공 시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늦은 나이에 시를 쓰게 된 이유와 시를 만나기까지의 삶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쉰이 훌쩍 넘어버린 시인은 너무 늦게 시를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늦게 시작했으니 더 열심히 써야한다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퍼> 98년이던가요? <대전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처음 선생님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시인이라고 나온 것은 아니었거든요.
이>그 방송 나왔을 땐 특허 때문에 나왔을 거야. 몇 년 전에는 시 때문에 나온 건 아니야. 시 때문에 매스컴을 탄 것은 2002년 최근의 일이고 그전에는 특허 때문에 탄 거지. 그땐 내가 김칫독인가 뭔가를 만든다 어쩐다 해서 꽤 매스컴을 탔었지.
퍼> 91년에 첫 시집<저 석양>을 내셨는데 왜 계속 시를 쓰지 않고 전혀 관계없는 특허를 하시게 된 겁니까?
이> 시라는 걸 안 쓰고 경제적으로 좋아져 볼까 해서였지. 92년 가을부터 이런 보일러 실로 들어오면서 특허를 하게 된 겨. 처음에 궁리를 하다가 W이론을 만들었던 공학박사 이면우 교수 책을 보게 되었어. 그때 엄청 유행했었지. 그 양반이 나하고 한자도 같아. (웃음) 그래 이면우 박사가 W이론 얘기했으니까 나 이면우도 한 번 따라서 해 봐야겄다 해서 그 책을 기본으로 삼아가지고 그걸 들고 생각을 한 거여.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했지. 보일러공 하면서 배관이며 물을 다뤄봤으니까 물을 이용한 김칫독을 만들어서 특허를 해 봐야겠다 한 거지. 만 6년쯤 했는디 보일러실은 24시간 근무거든 2교대로 밤에 잠 안자고 한다고 하지만 조금씩 자잖아. 그래서 보일러실에서 자고 낮에는 노가다가서 일하고 그랬어. 원칙을 세웠지. 월급은 안 건드린다. 가정생활에 필요한 거니까 무조건 월급은 안 건드리고 특허에 필요한 돈은 나가서 번다. 양쪽으로 벌은 거야.
퍼> 매일 그렇게 두 개의 일을 하려면 웬만한 체력으로 버티기 힘든 일 같은데요.
이> 매일 일한 건 아니야. 특허 관련되어서 얼마가 필요하면 날짜를 잡아 가지고 미리 현장을 알아두지. 스케줄을 짜서 가는 거지. 거기서 벌어서 특허에다 톡, 넣고 그런 식으로 했어. 6년 정도 하다보니까 농협에 적금 넣어둔 거 500만 원짜리 적금은 날아갔어. 특허 때문에 녹아 들어간 거지. 월급 타서 넣은 거니까. 그건 월급에서 날라 간 거지. 나중엔 돈이 막 들어가더라고.
퍼> 6년 동안 특허를 6개정도 받으셨다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이> 지금은 다 소용이 없어. 특허라는 게 특허권을 나라로부터 받는 건데 이게 3년 정도 지나면 특허를 유지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
그러면 현실화도 안됐는데 공부하느라 돈 들어가 그걸 유지하느라 돈이 들어가. 한번쯤 돈을 내다가 이게 아니다 하고 말았지.
퍼> 특허는 이제 그만 두셨는데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이> 특허 공부하는 것 그만둘까하다가 충남대학교 보일러실 일을 하게 됐는데 그 특허를 가지고 교수님을 찾아가서 내 특허를 보여주고 이게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물어봤지. 그런데 보더니 접으라는 거야. 현실성이 없다고. 앞으로 디지털 시대인데 이렇게 천연, 자연, 환경 같은 게 보기는 좋아도 실제로는 사용상의 불편함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걸 쳐다보지 않는다. 접어라, 하더라고.
퍼> 꽤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하셨던 건데 굉장히 서운하셨겠어요.
이> 서운하더라도 이미 각오는 했던 거지. 마지막 진단을 받으려고 했던 거니까. 그 교수님이 이런 선언을 했어.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이 리모콘으로 다 작동되는 것 아니면 쓰지 않소. 맞는 얘기였지.
퍼> 시를 다시 쓰게 된 이유가 특허 그만 두신 것하고 관계가 있는 거지요?
이> 특허하는 것 손 접고 한 달쯤 있다가 시를 다시 시작했어. 그 중간에 (97년) <창작과 비평>에서 청탁이 들어와서 쓴 시가 몇 편이 나가긴 했는데 그건 열흘 정도 시한을 정해 놓고 쓴 거야. 그때 쓴 게 <술병 빗돌>이었거든. 보면 알겠지만 시가 그렇게 짧고 단순해지고 그래. 특허 때문에 긴 시간을 쓰지 않으려고 했던 거니까. 써 놓곤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리고 98년에 특허가 안 되는 거 알면서 시를 시작했지. 아 쓸 건 시밖에 없구나 한 거지. 물론 그렇게 된데 누군가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유명한 소설가인데 자기 이름은 밝히지 말아 달래. 그 사람이 나한테 항상 아저씨는 시 써야 해요. 아저씨는 시 안 쓰면 후회해요. 정기적으로 전화해서는 그러는 거야. 아저씨가 할 줄 아는 것 중에 제일 잘 하는 게 시라고. 자기가 볼 때 아저씨는 시 아니면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거요, 그러는 거야.
술병 빗돌
술주정뱅이 이윽고 간경화로 죽었다 살아 다 마셔버렸으니 남은 건 고만고만한 아이 셋, 공동묘지 비탈에 끌어묻고 돌아나오는데 코훌쩍이 여섯살 사내애가 붉은 무덤 발치에 소주병을 묻는다 그것도 거꾸로 세워 묻는다
그거 왜 묻느냐니까 울어 퉁퉁 분 누나들 사이에서
뽀송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안 잊어버릴라구요
퍼> 시 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네요. 돈도 더 많이 안 들고.
이> 그러게 말이여. 생각해 보면 이려. 시는 경쟁이 심하지 않고 특허는 돈이 매달려 있으니까 경쟁이 심헌디 난 특허할 때 자전거 타고 간 거였고 딴사람들은 제트기 타고 간 거야. 이건 게임이 안 되는 거잖어. 그런데 시는 똑같이 걸어가는 정도 보행이니까 열심히 하면 되는 것 같거든. 자네가 말한 대로 효율적이지.
이면우에게 시 아니면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하던 그 소설가는 한술 더 떠서 ‘선생님이 시를 쓰면 문단이 출렁 할겁니다.’라고 바람을 넣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지극 정성으로 관심을 보내주는 소설가의 부추김과 특허 중단 선고가 잘 맞물려 떨어졌던 탓인지 다시 시를 써보기로 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특허와 소설가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회상한다.
이> 지금 생각해 보니까 특허하고 시하고는 몽상이라는데 있어서 닮았어. 다른 특허를 하는 분들이 몽상가라는 말은 아니지만 말여.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자신이 시라는 몽상을 두려워하는 것 같거든. 내가 꿈꾸는 몽상이 시로 제대로 나와 주면되는데 시로 못나올 땐 술을 먹는다던가 담배를 피운다던가 하는 일상생활에서 삐끗 하는 일이 생겼지. 그래서 시 자체를 두려워하면서 살았어. 결국 89년에 아들을 낳고서 술, 담배끊고 사람이 된 거지만 그전에는 가만히 생각해봐도 그려. 술 많이 마시고 그랬지.
퍼> 그래도 이제는 시를 통해서 그 몽상이 조금씩 빠져 나오고 있는 것 같고 선생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생기고 있지 않습니까.
이> 그런데 말이야 어찌된 건지는 몰라도 신문이나 계간지 같은데서 내 시를 조명을 하는데 참 어색하고 난감할 때가 많거든. 사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깡통 굴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퍼> 시를 조명하는 것이 빈 깡통 같다니요?
이> 응, 빈 깡통. 소리만 요란하지 실제로는 별것 아니거든.
이면우 시인은 신문이나 계간지에서 하는 인터뷰들이 대부분 자신의 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하지 않고 알맹이 없는 수많은 기표들만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인터뷰가 빈 깡통이 되지나 않을까 내심 고민하며 진땀을 빼야했다.
1. 나는 근대화의 주변부, 잊혀진 존재
손공구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
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
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
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
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초등학교 이학년 아이에게 공구세트를 선물했다 지퍼
를 당기는 손이 가볍게 떨고 바로 그때 아이의 탄성처럼
은백의 공채가 그곳에 떠도는 것을 나는 처음이듯 보았다.
퍼>제가 읽은 이면우의 시는 무미건조한 삶의 호수에 작은 파장이었다고 할까요. 그게 선생님 시의 색깔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이> 그랬나? 자네는 어떤 시를 좋아해?
퍼> <손공구>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선생님이 경험하신 것하고 좀 다른 거지만 군대있을 때의 기억이 났다고 할까요? 겨울에 끌려가서 맞으니까 몽둥이가 아니라 몽키 렌치 같은 거였어요. 그걸로 한참을 맞았는데 고참이 나가고 그 렌치를 쥐어 봤어요. 잡고 있으니까 처음엔 찬데 나중엔 뜨뜻해 졌는데 <손공구>라는 시가 그 기억을 끄집어냈거든요.
이> 그래. 손공구. 슬픈 얘기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수용하는 거야. 팔자를 받아들이는 거지. 고은 선생님이 이걸 일독 하시고 처연하다고 쯧쯧 하셔. 시 읽고 나서 그러시는 거야. 사는 거 참, 인생 힘들었겄다. 내가 조금 더 힘들었던 건 마음속에 있는 시 때문에 조금 더 힘들었던 거여. 시가 아니었으면 나도 똑같이 저기 했으면. 참, 먼 길을 돌아서 왔지.
퍼>대전에서 태어나셔서 지금까지 사신 거죠? 혹시 떠나려고 마음먹은 적은 없으셨어요?
이> 잘난 사람은 서울로 가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식으로 나도 대전을 떠나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암만해도 그게 안 되더라고. 결국 눌러 앉게 되었지. 어쩔 수 없이 말이야. 잘난 사람은 서울로 간다니께, 하하…
퍼> 잘나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웃음) 고향에서 태어나서 학교 다니고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거든요.
이> 자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근대화되기 이전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 선조들도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남들이 멋지게 근대를 건너갔거나 건너갈 동안 나는 주변부에 있었고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었어.
퍼> 근대의 주변부에 있었고 잊혀진 사람이었다니요? 선뜻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 뭐 이런 거지. 다른 사람들이 근대화니 발전이니 해서 그것들을 누리고 있을 때 나는 노동현장에서 등짐 지고 있거나 공구 들고 일하고 있었거든.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는 이곳 건물이 근대의 전형이라고 했을 때 지하 보일러실에 있는 나는 지금도 하나의 잊혀진 존재 아니겠어? 내가 이런 것들에게서 느낀 것을 시에 녹아 넣은 것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 한 거라고 보면 되는 거지.
아까 자네가 얘기한 한 곳에서 나고 자라서 연애해서 결혼하고 애 낳고 하는 것들이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향수 비슷하게 작용한다면 내 경우도 그 비슷한 것의 일종이라고 보면 되겠네.
퍼> 그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는 것이 결국 선생님께서 살아온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좀 해주세요.
이> 그럼 초등학교 졸업하고부터 얘기해야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빵 장사를 시작하게 됐어 가업이니까 그 일원이 되어서 한 거야. 우리 집은 형제들이 많아서 난 일년 먼저 국민학교를 들어갔고 그 터울을 조절하느라고 중학교는 일년 놀고 들어갔는데 그 일 년 동안 빵 장사를 하고 돌아다닌 거여. 당시에는 일년씩 놀고 들어가는 일이 많았으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아무튼 그때 차도 없고 걸어서 다녔거든 보따리에다가 빵을 싸들고 말이여. 대전도 조그만 했었어. 지금이야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죄다 논 투성이 뿐이었으니까. 그 보따리를 들고 십리를 걸어가서 빵을 팔았어. 완전히 시골만 돌아다닌 거야. 그렇게 장사하느라 일 년 후에 중학교를 들어갔지.
어린 시절 이면우는 집안의 가업을 돕기 위해 일 년 늦게 중학교를 들어갔다. 시골 논바닥으로 들어가 빵 장사를 했었던 짧은 사회 경험을 밑천 삼아 중학교 백일장에 나가 온갖 상을 휩쓸게 된다.
퍼> 중학교 백일장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가 일년 동안 빵 장사했던 것이 밑천이 되었다는 것일 텐데 어떤 것이 도움되던가요?
이> 그렇겠지. 초등학교 때 책도 많이 읽고 해서 뻔히 글이라는 걸 어떻게 쓴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리고 장사를 했으니까 상대방 마음 꽤 뚫어 보는 걸 알고 있었거든. 장사라는 게 그런 거잖아. 상대 마음을 뚫는 거.
그리고 다들 같은 중학생이었지만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사람들이 세상을 한 면만 볼 때 나는 뒷면까지 보게 된 것 같아. 생활과 장사로 일년을 보냈는데 오죽했겄나? 그러니 심사위원들이 이렇게 쓰면 뽑아 줄 것이다 생각하는 거지. 또 그게 맞아 들어갔고. 하도 자주 받으니까. 그 당시에도 스타는 스타였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상을 받고 생각해봤어. 시가 어릴 때는 관념에서 나왔거든. 어릴 때 그러면 자기 스스로 내가 썼지만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렇게 상을 받고서도 그런다구. 이건 어디서 교과서에서 본 거 아니여? 하하. 뭐 이런 식으로 짜깁기 한 거 아니여? 이런다구. 뭐 지금은 몰라도 그 당시 백일장이라는 게 어디서 좀 그런 것 바꿔서 넣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솔직한 얘기로, 뭐 새로운 것만 나올 수 있나? 하하.
퍼> 지금이야 좋은 시들을 쓰고 계셔서 그렇지만 어렸을 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치켜세웠다고 생각하세요?
이> 그때는 사람들이 순박했었던 거지. 별로 따지지도 않고 또 접할 수 있는 매체가 거의 없었던 시기 아니었겠어? 소설책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해서 아이들이나 선생님들도 시란 걸 대단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지.
하지만 선생님중의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셨지. 중3 기술 시간이었나?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나를 쳐다보면서, 예전에 이씨 조선이 500년 동안 시라는 걸 써서 양반들이 앉아서 그거나 주고받고 하다가 나라 조졌다, 기술, 기술 입국을 해야 한다, 이래. 그분은 검정고시로 기술 선생님이 된 분인데 나중에 작은 도시의 장학사 가 되셨거든. 애들 데려다 놓고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겨 나를 쳐다보고 나를 들으라고 하는 거지. “너 임마, 이 얘기 잘 들으란 말이다. 시 쓰고 그랬다간 인생 조지는 수가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 만약 내가 쭉 공부하면서 시를 썼다고 해봐. 나는 가네 가. 시 자체만으로 볼 때 내가 계속 시를 쓰겠다 생각했으면 중도에 틀림없이 그만 뒀을 거야. 중, 고, 대학교 했으면 그때쯤에서 그만두지 않았을까? 시를 다시는 안 썼을 거야, 다시는.
그렇게 어른들이 너 시 쓰면 안 된다고 그것 하면 가난해진다고 하더라고. 자꾸 그러니까 나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난 시 쓰려고 태어난 게 아니고 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태어났는데 돈도 많이는 아니고 내가 그냥 살아 갈 수 있게 벌었으면, 했거든.
내가 원하는 건 장터 고무신 장사꾼 같은 사람이었어. 학자나 대단한 시인을 원하는 건 아니고 평범한 삶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이 얘기하고 생각하는 건 조국 근대화였잖아. 이걸 말하려다 보니까 합리적 사고, 과학적 생활 이런 게 중요했던 것 아니겠어? 학교에서는 말 잘 듣고 모범생이 필요한 시기였었고. 그런데 난 시를 쓰지 시 쓰면 배고플 건데, 집안도 어려웠고 해서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해 봐야겠다라고 생각한 거야.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맨 처음 시작했던 일은 머리카락 장사였다. 미장원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을 모아 중간 수집상한테 파는 일을 시작했지만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서 가져왔던 머리카락을 중간 수집상은 항상 가짜 저울로 속였다. 결국 이면우는 남들을 속이거나 속아야 하는 장사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비록 고무신 장사를 꿈꾸었지만 실제 장사체질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퍼> 고등학교 때 그런 결정을 보신 건데……
이> 나도 요즘 와서 원고청탁 때문에 스트레스가 좀 생기는 데 난 스트레스 받는 생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고등학교 문제도 그런 거지. 첫째 공부를 해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체 없었어. 공부로 남과 승부하는 게 싫었거든.
내 성격이 남들하고 경쟁하는 걸 지극히 싫어해. 지금 내가 돈을 조금 받아도 경쟁할 일이 없으니까 좋아. 일체 스트레스를 안 받는 거라고. 뭐 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 그것이 은연중 작동했는지도 모를 일이지.
우리는 대부분 20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상위권에 들어야 나머지 40년 동안 좋은 직장과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 사회교육제도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따라가야 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은 곧 좋은 직장과 보수를 보장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남들과 경쟁은 처음에는 타의로 주입되다 결국 자신과 동일화되고 만다.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와 경쟁하고 그 결과로 한쪽에서는 보상을 다른 한쪽은 처벌을 받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 상반된 두 얼굴은 고무신 장사를 꿈꾸던 이면우에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공포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그래도 내가 장사란 걸 하면서 얻는 게 있다면 이해의 폭이 좀 넓어지게 되었다는 거였어. 사람이 젊으니까 고지식하고 그렇잖아.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속이면 막 화가 나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야가 넓어지더라고. 뭔가 있었기 때문에 나를 속인 거라는 거지. 저 사람이 나를 속였으니까 나쁘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무슨 이유가 있긴 있어 하면서 웃는 거.
이면우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선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필수였다고 말한다. 이면우가 만드는 세상의 기본 바탕은 가족이었다. 결혼이란 막막한 동경에 지나지 않을 스물 일곱 살의 방위시절, 그는 한 친구의 먼 친척뻘이라는, 지금의 아내를 만난다.
퍼> 결혼하시고 생활이 좀 안정되면서 뭔가 변화가 있었나요?
이> 노가다 생활을 계속 하다가 시골로 가서 서른 아홉에 첫 아들을 났어. 술, 담배를 끊었고. 그걸 끊은 것도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방이 조그만 해. 시골집들이 다 조그만 하잖아. 그 방에다가 갓난아기를 눕혀 놨는데 술 먹고 들어가면 잘못하면 밟잖어. 비틀거리니까 아휴 이거 안 되겠다 까딱하다간 이거 아들 하나 난거 밟어서 없애겠다 해서 술 끊은 거고, 담배는 애 있는데 어떻게 피우나 그래서 그것도 끊었지. 나라는 사람이 밖에선 해도 여기선 안 한다 이런 것은 못해. 그냥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생활의 바탕을 마련한 것이 결혼이었다면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간 것은 시의 밑거름을 만드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시골로 들어간 이면우는 버섯재배를 시작한다. 그가 버섯을, 그것도 값나가지 않는 하품만을 직거래로 내다 판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청호 근처의 작은 오두막에서 버섯재배를 하며 쓴 시집<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는 이면우가 말하는 일과 삶이 조화된 삶이 왜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 호숫가에 버섯막 짓고 첫 느타리 출하하여 날마다 현찰로 착착 들어오는데 이게 또 사람 미칠일 하나다 밤낮없이 재배상에는 돈이 쑥쑥 자라고 물만 주고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오, 새벽좆 같이 불끈 일어서는 너, 돈아
나는 골방 장롱 속에 천원 오천원 만원권을 따로이 쌓아가며 그 어두컴컴한 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낙날락 손가락에 침 발라 자꾸 세어 보았다 온갖 사는 이들의 손때 묻은 돈 냄새 참 앗찔하다 드디어 금사백만원 아귀 맞춘 날 돼지 살코기로 두 근이나 끊고 느타리 못행긴거 한 소쿠리 솎아 우리식구 배가 봉긋해지도록 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괜스리 눈물만 많아졌다 돈아, 너 참 이쁘구나.
<돈아, 너 참 이쁘구나> 중에서
퍼> 더 오래 버섯재배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만두셨어요?
이> 그 버섯이 포자가 날려서 사람 기관지에 치명타를 입혀. 그래서 우리는 3년 했어. 3년하고 말었지. 그 버섯 해서 18평짜리 주공 아파트를 샀는데 뭐 재수가 좋았던 거지.
그때 4백만 원 벌고 나서 ‘아휴‘ 한거야. 단위 농협에서 버섯 판 대금 받아서 그걸 들고 버스타고 그냥 집에 가는 거야. 집에 가서 장롱에 촉촉 쌓아놨고 만 원
2. 삶의 모든 것이 시의 재료
퍼> 시골로 들어가서 버섯재배를 한 것 때문인지 선생님의 시를 보면 주로 농촌에서 볼 수 있는 생활, 삶의 모습들이 시의 중요한 소재인 것 같습니다.
이> 도시에서 노가다 하다가 시골에 들어간 이유도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상승되는 것 보다 논둑길 걸어가는 게 더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국민학교 졸업하고 빵 장사하면서 일년간 걸어 다녔던 게 논둑길이었거든. 자연의 아름다움,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아니면 우비를 쓰고 냇가를 간다고 생각해봐.
무서운 버드나무
이른 봄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뱉어낸다
회초리 가지 산들바람에 낭창낭창대다
해바라기씨 기총소사하듯 다다다다 뱉어낸다
아니다, 버드나무는 참세떼 한번 빨아들일 때마다 꼭
한 마리씩 삼키는 거다 옛 이야기 속 냇둑 산발한 여자
술취한 남자 홀랑 벗겨 냇물에 떠내려보낸다는
무서운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휘이익 뱉어낸다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간다.
이> 그래. 내가 이 시 쓰고 나서 내가 이 시를 왜 썼을꼬? 했어. 어떻게 내 속에 이런 게 들어있지? 하고 생각해 봤는데 어릴 때 냇둑 길을 갈라면 수양버들 있으면 무섭잖어.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공포심으로 들어와 있다가 시 쓸 때 나왔는가봐. 쓰고 나서 일년 뒤에 알게 됐어. <무서운 버드나무>를 왜 내가 썼을까? 하니까 어릴 때 냇둑 길 갈 때 애들은 다 학교 가고 사람들은 별로 없을 때 혼자 그 길을 가면 무섭잖아 아마 그게 시에 나왔나봐.
퍼> 그래서 그런가요? 시의 소재들을 보면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새, 호수, 나무 같은 것 말이지요.
이> 음, 그래 그런데 내가 주로 쓰는 건 짐승이라는 걸 잊지마. 식물성이 아니야. 내 상상력은 동물성이야.
퍼> 왜 굳이 동물이지요? 시골에서 보면 풀이나 나무 같은 것들이 시심을 더 자극하던가 하지 않나요?
이> 그런 것도 있겠다. 그런데 내가 동물을 무척 좋아 해. 개며 고양이, 모든 새끼들은 얼마나 이쁜지, 쥐새끼까지도 이뻐. 얼마나 이쁘다고. 그래서 내 상상력이 그렇게 된 건가봐.
꽃을 싫어하는 건 아니여. 지금도 목련꽃 같은 거 보면 하루에 한번씩 코에 갖다 대고 맡아보고 좋아하는 데 말하자면 이런거여. 내가 밥을 아주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찬도 없는데 그래도 조금 더 좋아하는 반찬이 있다면 집중공략 되지 않겄어? 그런 식이여. 근데…지금 당신하고 이렇게 말을 하면서 뭔가 치유가 되는 것 같아. 내 과거의 어떤 상처, 가려져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면서 그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아.
이> 내 어릴 때..일본 책을 베껴서 배웠는데..아이가 꽃밭에서 넘어졌단 말이야. 근데 무릎에 피가 났어요. 아이가 어, 피! 하고 울어. 한참 울다가 거길 만져보니까 그게 피가 아니고 꽃잎이었단 말이야. 내 머릿속에는 국민학교 일 학년에 배운 게 깊이 각인되어 있어.
삶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 고통이란 것조차 어떤 순간에 기쁨이나 쾌락으로 바뀌는 다른 것으로 변용되는 게 있잖아? 머릿속에는 이 이야기가 있는 거야….교과서라는 게 무지하게 중요해 살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어렸을 때 배웠던 그것이 나에게 삶이란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그걸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거야. 정서적으로 맞았나봐.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는 의식 말이지.
퍼> 시도 그렇지 않나요? 이제 교과서를 보지 않는 어른들은 시를 보면서 삶은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는데요.
이> 그랬어? 오늘 이건 진짜 쌩짜 얘기다. 삶이란 행복한 거야. 내가 조금씩, 조금씩 개선 시키려고 노력을 해야지. 그라고 절제하고 그래야지. 화목하게 지내야하고 가족 내에서 기여를 많이 해야 하고. 가정이 좋아야 해. 가정 내에 불화 없고 서로 호흡을 맞춰서 살다보면 인생이 좋지.
퍼> 누구나 가족에 대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유달리 삶의 중심과 목표가 가족 중심적이거든요. 시에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지요?
이> 그려, 가족이라는 거 이게 훌륭한 사람들은 뭔가 가족말고 다른 게 있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네 같은 사람들은 가족이상 더 큰 게 없어. 더 이상 껴 앉을 대상이 없다고 그렇잖아.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죽는 것이 50년 전 이럴 때에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잖아. 하지만 이젠 가족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퍼> 사람들의 중심이 자신의 완성이나 명예, 돈 같은 것 일 수도 있고 가족과 일을 동일하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가족을 뒤에 두고 나의 완성을 위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선생님 같은 경우엔 이제 시가 많이 알려졌고 어느 정도 나이도 있으시니까 가족을 챙기는 것만큼 나를 위해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시는지?
이> 음..(잠시고민) 하지. 책 사는 게 투자하는 거지 뭐. 하하. 원고료 50만원 받아서 절반은 책 사고 나머지는 안식구 주니까 그게 나한테 투자하는 거지.
사실 내가 받는 월급 액수가 작지만 우리 안식구도 그걸 참고 잘 생활을 해. 가끔 그렇게 원고료가 들어올 때 내가 책을 사면 우리 안식구가 이런 얘길 해. 글 써주고 그걸 다 책을 사면 어떻게 해요? 라고 말이야. 그건 안식구가 가계에 좀 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자는 얘기잖아. 그런데 난 다들 어렵다니까 책 많이 사줘야해, 이러거든. 그런 생각의 차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가 나에게나 가정 경제에 도움이 많이 됐어. 우리 마누라는 국졸이고 나는 중졸 아니여. 그런데 안식구가 시 쓰는 걸 아주 좋아해. 왜냐하면 시를 쓰니까 경제적으로 좋아졌다니까.
내 나이 마흔에 쓴 시 한편
이>나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시 한 편을 썼어. 금산에 아파트 공사장에 다닐 때였지. <내 나이 마흔이 되고서야>를 썼는데 그 공사장 사장님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책을 나눠주고 그러는 양반이었어 그래서 내가 내 시를 보여줬지. 근데 그 양반이 야! 이 시 좋다고 하더라고. 시 좋고 당신이 만약에 책 한 권 분량을 쓰면 내가 내 주겠다고 한 거야. 그래 서로 약속을 했어. 나는 일 년 안에 쓰겠다고 하고 그 사람은 그걸 내 주겠다고 했지.
서울 큰 출판사에다 해주는 것도 싫다고 했어. 내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려면 그 날은 일을 못 하는 건데..일당이 들어오지 않는데..우리생활에 문제가 있잖아. 그래서 시집은 대전에 가까운데서 버스길 옆에 있는 데서 내야겠다 한 거지. 그걸 명함 찍는 집에다 갔다 줬어요. 명함하고 간이계산서 찍는데 있잖아. 주니까 안 해 봤지만 할 수 있다고 하는 거여.
퍼> 첫 시집 <저 석양>은 ‘호서문화사‘라고 되어 있던데요?
이> 처음엔 세무서 앞에서 그런 거 해주는 거여. 근데 이것도 중요한 인연이여 웃기는 거라고 내가 아까 우리 아들한테 주는 거라고 묶어 두는 거라고 생각했잖아. 그래서 시 행갈이를 안했었어. 행갈이를 안하고 산문시 형식으로 시작, 끝 해놓고 말았다고 그러고 말았는데 그걸 출판을 할꺼요, 얼마요 하고 물어보고 주고 사흘 후에 보니까 아가씨가 새 기계 워드를 들여왔더라고 그때니까, 일본서 들여온 비싼 거래 몇 백 만원짜리. 커, 막… 근데 그 여자가 토닥토닥 하면서, “저 선생님” 그래. 그때 선생님이란 말 처음 들어봤네. 글을 쓰니까 그랬나? 선생님이라고 하는 거야.
“선생님 이 시가요, 제가요, 시를 좀 읽어봤는데 요렇게 끊으면 더 좋아요.”그러더라고. 그래서 주는데, 아, 좋아. 행갈이를 해놓은 걸 보니께. 아 좋다고 그랬어. 그랬는데, 그날 저녁에 그 명함집 사장님이 그러더라고. 들어오더니만 이거 우리 바빠서 못하겠다고, 딴 거 해야 된다고 하더라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아가씨가 행갈이 하는데 시간을 쓰니까 행갈이까지 해줄라고 하니까 오죽하겄어? 진도가 없다 이거지. 큰디가서 하셔,이러더라고.
그래가지고 그걸 들고 나와서 쭈욱 걸어가다가 처음 본 출판사에 들어 갔어. “호서문화사”라고 하는 데인데 거기는 시집을 하는 거야. 거기서 낸 거지. 그걸 사장님이 인부들한테 노놔 줬어.
퍼> 첫 시집은 서점에도 안 깔리고 했을 건데 어떻게 팔았습니까?
이> 어떻게 줬냐면, 오야지 있잖아, 오야지한테 10권을 넘겨주고 2만5천원 내, 열 권 줘. 다 노놔줘, 한권씩. 이렇게 돈을 받고 했던 겨. 6월에 냈는데 10월인가 된 밤에 그 사장이 시골로 찾아왔어. 나머지 책 하고 판 대금하고 그때 돈으로 팔십 몇 만원인가를 가져 왔어. 나는 시집도 내면서 돈 한 푼도 안들이고 팔십 몇 만원을 받은 겨. 정확하게는 몰라도 팔십육만원쯤은 될 거야. 큰돈이여. 근데 그 받은 책을 정부미 포대에다가 묶어 놨어. 노가다 하는 내가 시 때문에 잠을 설친다거나 또 시 때문에 왔다갔다하면 생활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거 잊어버려 하면서 묶어 놓은 거야. 그냥 살었어.
퍼> 첫 시집이었는데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이> 나중에 그 약속을 지켰지. 출퇴근을 버스로 하면서 아무종이에다가 메모했다가 박스에 넣었다가 노는 날 다듬고. 아이를 났을 때 큰형(이진우, 소설가)이 <저 먼 바다>라는 박용래 선생님의 시집을 보여줬어. 서른 아홉에. 그걸 내가 보고 뭔가 시의 싹이 틔여가지고 <내 나이를…> 썼을 거 아니여? 일년 뒤에 나왔는데, 그 사장님이 뭐라고 했냐면 좋은 출판사에서 내라고 하는 거여. 그런데 난 아니다, 내가 쓴 시는 나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내가 알릴 마음이 있었으면 현상 공모 같은 걸 했을 텐데 난 이 시집을 이렇게 생각한다, 아들이 컸을 때 갸만 읽어보믄 된다, 응?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이 비록 노가다를 하셨지만 정신적으로 이런 부분이 있었다는 거 그걸 자산으로 가지고 있으면 된다, 아들한테 주는 시집으로 한다… 예전 책을 읽어보면 유언 같은 걸 해서 조그만 봉투에 넣어서 주지? 난 그럴 필요 없이 책으로 주는 거지. 그렇게 마음먹었었어.
3. 이른 나이에 시 쓰는 사람들 말리고 싶어
퍼> 시를 쓰다보면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것 느끼셨을 텐데 문단에서 이름을 알리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보지 않으셨나요?
이> 그럴 욕심은 없어. 다만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든 간에 끝에 가서는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런지 몰라. 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 가다가 시 쓰고 소설도 쓰고 하는 사람도 있잖아. 전업 작가 말고 그런 사람이 다수란 말이야. 그렇게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시는 배고픈 거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한 거기 때문에 문단에 이름을 날리고 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이른 나이에 시 쓰면 안 돼.
퍼> 이른 나이에 시를 쓰면 안 된다니 어째서요?
이> 이른 나이에 시를 쓰는 학생들을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해. 야, 그 시기에는 책을 많이 읽고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글은 될 수 있으면 쓰지 마라. 그런 얘기를 훈계처럼 하지. 이유는 단순해. 아까 재능이 있다는 얘기했지. 재능이 있다는 건 그걸 일찍 꽃피워 버리면 쉽게 지거든. 그게 영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나 진짜 시는 일찍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을 우리는 대가라고 하지. 특별한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여. 그렇지 않은 대부분은 나중에 천천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퍼> 만약에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 해보지 않으셨어요?
이> 지금도 생각하지. 만약에 내 시가 안 좋으면 잊겠지 뭐. 잊겠지. 그럼 시 쓰느라고 끙끙 댈 일 없겠지.그래서 내 자신에게 항상 부탁하는 건 시 때문에 고통스럽지 말자 이거야.
시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내 삶이 늘 양보하고 집단으로부터 떨어지면서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살았는데 그것이 시적인 근성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 시가 몸 속에서 자기를 쓸쓸하게 만드는 거지.
세상에 있는 어떤 부분을 활력 있게 즐기면서 화투도 치고 관광차에서 웃고 노래 부르고 할 수 있는 삶이 있는데 난 그런 것 하나도 못해. 온갖 걸 하나도 못한다니까. 책보는 거 하고 자전거 타는 거 하고 혼자 걷는 거 하고 혼자 사람 없는 디 가서 수영하는 거 그거 말고 해 본 일이 있으야지. 없거든. 나 비행기 한 번 못타봤어. 제주도도 못 가봤고. 온갖 걸 다 희생하면서 얻은 게, 시란 말이야. 슬픔의 감정 속에서 시가 나오는 거 아니겠어?
그런 부족한 부분들이 시로 채워지는 거 아니겠냐 말이야. 만약 내 몸에서 시가 안 나온다면 뭐 다른 것이 대신 들어왔겠지. 생의 즐거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뭔가 즐거운 것이 내 안에 들어와서 안 쓰겠지 뭐. 안 쓰는 날도 내가 그것 때문에 머리 쥐어짤 일도 없어야 한다는 거지.
퍼> 시 때문에 고통 받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네요.
이> 안 된다는 거지.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 때문에 고통 받은 거야. 써서 고통 받은 게 아니고 시적인 삶이기 때문에 고통 받았다는 거야. 늘 쓸쓸해야하고 슬퍼야 되고, 외톨이가 되어야 했던 이런 것들.
퍼> 그런 자의식들이 비단 선생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글을 쓰려고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4년 내내 그걸 느끼고 혼자 고독한 척하고 혼자 슬픈 척 한단 말이예요. 졸업하고도 계속 그러고 살거든요. 그런 친구들 보면 굉장히 안타까우시겠어요.
이> 응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런 친구들이 찾아오면 늘 하는 얘기가 현실을 즐겨라. 생활을 즐겨라. 하하
퍼> 그런 문학의 진지함, 시의 진지함 때문에 항상 그 나이에 해야 할 것들을 다 못했던 것 같아요.
이> 하하. 그래도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희망이 있어. 좋아. 생을 즐겨야 한다는 것 물론 즐기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살아놓고 나서 보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한껏 즐기고 사는 것 같아. 정서적인 어떤 부분을 내 나름대로 즐기고 쓰다듬고 있었던 거야. 결이 일어서지 않도록. 가시를 선 방향으로 쓸어내면 손이 다치지 않잖아. 하지만 거꾸로 쓸면 상처 나잖아. 상처 안 나게 밑으로 쓸고 있었던 거야. 자기 마음속에 있었던 시적인 부분들을 시 속에서 쓸어 내리고 있었던 거지.
퍼> 마음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으로 변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수양을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이> 그것이 내가 시 쓰기 전에도 마음을 결대로 다듬어 주는 일을 계속 했던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의 시도 내동 그 작업이여. 결대로 다듬는 작업이지. 그래서 내시가 반항적인 것이 빠져 있어요. 일단 살아본 사람 뒤에 고이는 그런 것이라고 . 앞에서 맞서 싸운 게 아니고 살짝 뒤돌아보는 거 아니야.
퍼> 그런 문제 때문일까요? 노동이라는 문제에 대해 박노해 시인과 대조가 되는 이유가 말입니다.
이> 맞어. 얘기 잘했네. 박노해 시인은 80년대에 필요로 하는 시인이었어. 그래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지. 그 분의 지금의 역할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80년대 이미 남들은 열 번을 거듭 살아도 못할 일을 해낸 거야. 그 양반이 그렇게 했던 시절에 나는 시집 같은 것은 읽지도 않고 오로지 일만 했어. 내일 일이 있는가? 열흘 뒤에 일 할 수 있는가가 내 목전에 떨어진 현실이었지. 거기에 매달려서 간 거야. 90년대 들어서 내가 마흔이 되면서 수양을 오래 쌓다보니까(웃음)그런 게 생겼고 십 년 더 수양을 쌓다보니까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쓰다보니까 더 투명해진 거지.
퍼> 스스로 내 시가 이렇다고 평을 해보신다면?
이> 이상하게 자기는 어느 잡지에서는 안 받아 주더라고. 내가 그런데 뭐라고 말 할 수 있나? 나는 이쪽저쪽 다 가는데..나는 처음부터 다갔어. <창비>로 나오면서 <현대>, <문예중앙>으로도 갔지. 왔다 갔다 하니까 별로 리얼리즘 계열로서 뭐다 하는 그런 소리 못 들어봤어. 나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 쓰는 거 뿐이여.
“20대로 돌아가라고? 아휴, 난 싫어”
누구나 삶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꼽으라면 20대의 청춘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면우 시인은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이> 아까 얘기했지만 고등학교 이야기는 지워버리고 싶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집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공포심이 컸었어. 학교라는 거대한 집단에 속했을 때는 몰랐는데 떨어져 나오니까 자기가 소외되어 있다는 거. 외톨이었다는 게 고통스러웠지. 그런데 그게 현실생활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꿈으로 나타나더라고. 고통스러움이 꿈으로 나타나더라고. 남들은 다 이쪽으로 가는데 나만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거 꿈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겨.
퍼> 무의식중에 나타난 거네요. 겉으로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무의식중에는 그런 것이 있었던 거네요.
이> 그렇지. 그래서 그 소년 시기가 있다가 청년이 되면 다 잊혀지는 거 아닌가?
퍼> 청년이 된다고 해서 죄다 잊혀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20대를 보면 항상 불안하고 불확실, 불안정하잖아요. 선생님의 20대는 어떠셨어요?
이> 청년기 때의 문제를 물어봤지? 어느 날 도올 선생의 이야기를 보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자기는 청년이 한 번 되라면 싫다는 거야. 지겹다는 거지.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웠다는 거야. 근데 나 자신도 그걸 들으면서 쿡쿡 웃었어. 다시 한 번 청춘을 거치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 글쎄 나 자신은 아닌 것 같아. 나 자신은 싫으니까.
내 시를 보면 1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고 뒤돌아보고 그래. 내 삶의20대는 불안하고 뭐가 될지도 몰랐거든. 30대가 되니까 20대 보다 나서. 40대 되니까 30대보다 나서 50대가 되면 40대 보다 나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걸 감지 할 때 여유가 생기고 삶이 살아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퍼>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나아진다는 이야기는 의외네요.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나, 돌아갈래 하면서 후회하고 그러잖아요.
이> 나한테는 안 그랬던 것 같아. 내가 아까 다쳐서 생식을 한다고 했잖아. 만약에 내가 30대 때 다쳤다면 난 큰일 날 뻔했지. 그걸 갖고 어떻게 노가다하며 먹고사는가? 그런데 내가 쉰 하나에 다쳤기 때문에, ‘아 그래도 낫다. 이때 다친 게…’
그런 거 있잖아. 앞으로 일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거 중요한 깨달음이었어. 이제 일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버팅기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60살까지만 한다고 쳐도 10년만 버팅기면 된다. 마음 속에 그런 게 생기는 거지. 만약에 서른에 똑같은 입장을 당했다면 미쳤을 거야. 앞으로 살날이 까마득한데 다친 다리를 가지고 간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퍼> 그것도 살아가면서 경험하셨던 것들에서 나온 것 같이 들리는데요. 시에 보면 아픈 다리를 끌고서 아프지 않은 척하고 일 하러 갔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이> 공포심 때문에 그래. 그 집단에서도 또 도태 될까봐. 두려운 거였지….
이> 내가 인터뷰를 자주 하는데, 인터뷰를 할 때 전력투구를 해.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하고 나면 쓸쓸해져 가지고 아,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한다구. 그런데 얼마 지나고 나면 또 하고 싶어.
퍼> 중독인가 봐요. 인터뷰는.
이>그래 중독이다.
우리는 함께 와하하 웃었다.
서로 말이 뒤범벅이 되어 이야기가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면우 시인이 말한 아주 심층적인 이야기라서 그랬나 싶어 잠시 쉬기로 했다.
4.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작은 완성을 향한 고백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이 확 넓어졌다
그만큼 내가 작아진 게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쪽문을 닫고
눈에 띄게 하루가 길어졌다
이게 바로 고독의 힘일 게다
……….
생활이 단순해지니 슬픔이 찾아왔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빙긋이 웃는다
그렇다, 슬픔의 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젠 내가 꼭 해야할 일만 하기로 했다.
퍼> 선생님 시를 보면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소극적인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말씀도 잘하시고 해서 제가 예상한 것이 전혀 빗나가고 있네요.
이> 내가 애초에 적극적이지는 않고 소극적인 면이 있는데 노동과 무수한 현장 경험을 통해서 이제 소극성에서 벗어난 거야. 그래서 속으로 야, 난 노동 잘 했구나? 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한 가지 일만 했더라면 지금 같은 원만함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퍼> 능숙해지고 살아가면서 점점 삶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이> 약어진거지.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갑자기 세상을 모두 알아버렸다고 들떠있던 20대 초의 나를 생각해 보았다. 무조건 튕겨내고 날카로워서 남에게 상처 주었기 때문에 남들과 쉽게 섞이지 못했던 날들을. 나는 그때 내가 세상을 이미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결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안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조금씩 깨닫고 있다. 어떤 때는 흡수되기도 하고 기름처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섞이지 않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퍼>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사이에 10년의 공백이 있었는데요.
이> 시집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가 첫 번째 시집 <저 석양>에서 스무 몇 편이 빠져나간 거야. <저 석양>달라는 사람은 많은데 책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약속을 했었어. <저 석양> 그대로 내주겠다 했는데 작년에 2001년도에 다리를 다치고 2002년도에 또 같은 자리를 다쳤어. 무릎인데 또 다쳐 가지고 완전히 이 직업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하는 그 지경까지 갔었지.
그런데 내가 이 직업을 그만두게 되면 뭐를 해. 안식구하고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보니까 칼국수 집, 만두집, 학교 앞에서 떡볶이 집, 요 세 가지가 나오더라고. 안식구가 손님 받고 만들고 내가 배달을 하고 이런 걸로 압축이 됐어. 그래서 시는 어떻게 되는 거냐. 안 써야지. 왜냐면 새 일을 맞아들이고 일로 매진하고 그야말로 골몰하게 해도 성공할까말까 하는데 그 칼국수 장사하면서 시도 쓰면, 장사를 10년쯤 했으면 모를까 우선 당장은 안 되는 거란 말이야. 이제 내 나이에 직업을 바꾸면 시는 끝이다. 그래서 안식구하고 상의를 했었어. 그때가 가장 어렵고 절망적일 때 작년 오륙월에는 내가 잘 걸어다니지 못했고. 연골이 깨졌는데 절뚝거리면서 다녔어. 지금은 뭐 신선 된 거다. 작년 오월에는 장애인처럼 하고 다녔어.
이 직업을 남 보기 미안해서 나 여기 용역이지만 채용한 사람보기 미안하고 눈치 보여서 못해 먹겠더라고 그라지. 인자 안식구하고 상의해서 그러면서 시를 그만두자 하면서 스물 몇 편 쓴 게 <바다와 뻘>있잖아. 시 고만둔다는 얘기여, 새로 산다는 얘기여.
바다와 뻘
밤게 짱망둥어 갯지렁이가 목숨을 괴발새발 뻘 위에 쓴다
온몸 밀려 끌며 쓴다 그러면 바다가 밀려와 말끔히 지운다
왜 하루 두 번 바다가 뻘을 지워버리는 지
나이 쉰에 겨우 알았다 새로 살아라
목숨 흔적 열심히 남겨라
그러면, 그러면 또 지워주겠다아아아 외치며 바다
막무가내 밀고 들어왔다.
퍼> 뻘이 지워지는 것 말씀이시죠?
이> 물결이 앞으로 오면 또 지워지지만 우리 삶은 항상 새로 살아야 한다는 거지. 자기에 대한 각오야. <바다와 뻘>이 만들어진 것이. ‘에머지‘인가 어딘가에 발표되었었어. 그때 날짜가 다치고 나서 2002년 5월인데 발표된 게 8월인가 그럴 거여. 그때도 막 다쳤을 때 뭔가 직업을 바꿔야 한다. 해서 그걸 쓴 건데 그때는 다친 것도 거듭이었고 장사해야 한다는 것도 거듭이었던 거야. 2001년에 다쳤을 때 첫 수술을 9월에 받을 때는 그동안 다리를 질질 끌고 댕겼거든. 뭐 연골이 깨지면 못 걸어 댕겨 이게 윤활이 안 돼. 그래서 안식구하고 상의해서 칼국수 만두 떡볶이 우리 상상력이 빈곤해서 고것밖에 안나와. 먹는 것밖에. 그런 생각하다가 왜 그만 뒀냐면, 수술을 하니까 좋아지더라구. 수술하고 나서 난 완전히 나은 줄 알았어. 야. 나섰다, 하고 똑같이 일하다 보니까 다음해 2002년 2월에 다쳤는데 성한 사람인 줄 알았어. 그래 똑같이 일하고 계단 왔다갔다 하면서 또 다친거야. 그러니까 절망이 보통 심한 게 아니잖아. 우는 거야, 무지하게 울었어.
퍼> 시에 눈물이 많았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요.
이> 응, 나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어. 방문 닫아걸고. 왜냐면 아이고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내가 조금 더 참고 일을 늦게 시작할걸, 하는 자책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자책이지. 괜히 몸이 성하다고 시작해 가지고 자기를 미워하는 거지. 그러니까 남하고 대화도 못하는 거야. 그 자책이 오래되니까 화가 안으로 들어가니까 간이 나빠질 것 같애. 안되겠다 싶어서 밖으로 뽑았지. 우는 거. 그래서 시도 특별히 많어진 것도 그래서 그런 거여.
스물 몇 편이 물론 눈물이 많은데 특별히 많아진 이유가. 시집 <그 저녁>에서 많아진 이유가 그런 거여.
고 몇 달간 그게 시집 준비하는 기간 가장 어려운 기간이었단 말이야. 할 일이 시를 떠나면서 시를 마지막 정리하자. 그러니까 싹 정리하고 가려던 게 그 저녁이었어. 그라고 가는데 이게 이상한 게 그 저녁을 8월에 냈는데 9월 되니까 바람이 살짝 불으니까 좋아지더라고 수술도 안하고 물리 치료만 했어. 조심하고 절뚝거리며 살았는데 9월 되니까 좋아지네? 그냥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퍼> 직장은 어떻게 하셨어요? 일을 거의 못하셨을 텐데.
이> 직장은 악착 같이 다녔지. 우리 같은 사람은 산재라고 해도 60%라고 받아도 생활을 못해요. 월급이 워낙 작기 때문에. 500만원 받는 사람들이야 60%로 하면 300만원이지만 100만 원짜리가 60%하면 60만원이야. 그러니까 눈치 다 보면서 악착같이 다녔지. 히히, 직장은 그렇게 절뚝거리면서 유지했어.
근데 9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니까 아 다리가 펴지네? 펴져? 야, 이거 봐라… 그래서 웃음도 되찾고 하는 사이에 11월 중순쯤 되니까 ?노작 문학상? 통지가 오더라고. 또 상 받으면 사람이 틀려지는 거지? 2001년 수술 받고서 시를 떠날 수 있었는데 못 떠난 이유가 술하고도 관계가 있어.
퍼> 술은 이미 끊은지 오래됐잖아요.
이> 응 그게 우리 안식구가 그러더라고. 당신은 시를 안 쓰면 술 먹는다고. 우리 안식구가 볼 때는 술을 끊고 시를 썼단 말이야. 그런데 시를 끊으면 다시 술을 마실 거라 이거지.
그런 와중에 2001년도는 수술이라는 사건으로 몸이 좋아진 거고 2002년은 가을바람이 불면서 하루하루 좋아지네? 그러면서 노작문학상 그게 왔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 나는 시 쓰라는 팔자인가보다. 칼국수는 못하겠네, 했지.
퍼> 시는 사적인 영역이고 일단 시집으로 출간되면 대중들에게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가잖아요. 대중들은 더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을 요구하잖아요. 확보라는 말이 좀 우습긴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이 있으신지?
이> 아녀, 아녀. 그렇지는 못하고 앞으로 가게 되면 좀 더 진중한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으로는 시의 본류가 독자가 있으야 한다 생각하거든? 내가 시를 썼으면 많은 독자들이 있는 건 중요한 거지. 그런데 시속에 들어와서 보니까 다수가 읽어주는 것 보다 소수가 여러 번 읽어주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이 얘기하고 계시잖어. 그것도 맞는 말씀이여. 나 자신도 시를 막 읽는 게 아니라 선택해서 읽으니까. 앞으로의 시는 좀 진중 해야겄지.
퍼> 사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에서는 전체적으로 진지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는 좀 가벼운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뭐랄까 좀 희석되었다고나 할까요?
이>사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쓰고서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 좀 너무 가볍게 간 것 아니냐 하는 그런 지적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좀 시인처럼 진중한 문제도 부딪혀보고 싶어.
5. 나의 아날로그식 삶
나와 시를 놓고 볼 때는 늦게 시작한 것이 오히려 플러스야. 시 자체로는 플러스야 .분명해. 그리고 생활을 잘할 수 있었으니까. 생활의 도사, 절대 시 때문에 생활을 훼손당하지 않는단 말이지. 지금도 그래 누가 늦은 밤에 만나자고 하면은 밤에는 자야지 왜 밤에 만나는가? 이렇게 되는 거야. 그라고 모임 같은 거 있을 때도 밤 9시나 이렇게 되면 먼디 있는 사람들은 빨리 가라고 밀어내지. 특히 여자들. 내가 “빨리 집이 가아~집이 가아~” 하면 “왜 그래요~선생님 왜 그래요?” 한다구. “빨리 집이 가 자야지.” 이렇게 되는 거야.
퍼> 생활이라는 것 중요한데 젊을수록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젊어선 생활의 틀이 짜여지지 않아서 그래. 틀이. 이제 생활의 틀에 의존해서 갈 나이쯤 되면 이제 인생을 거의 다 살은 거라고 봐야 돼. 하하. 그런 거야. 따지면 이미 주어진 거에 의해서 가는 거 아닌가? 이제 무정형일 때 그때는 뭐가 될 듯이 막 질풍노도 그렇게 되는 거지. 좋을 때야 그때가.
퍼> 퇴근하시면 주로 뭐하세요?
이> 나의 낙은 드라마 좋은 거 하면 그거 보는 거. 예전에 <바보같은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어. 아, 그거 좋더라. 노희경이라는 방송작가가 있는데 나 그 방송작가 매니아야. 그것하고 일곱 개의 숟가락 그런 것들 그 사람 거는 찾어 가면서 보는 스타일이고.
대체로 내 시에 보면 테레비가 좀 나오거든. 그게 뭐냐믄 내가 시간 보낼 때 경제적으로 보내려면은 될 수 있으면 움직임을 줄여야해. 움직이면 돈 안 들어가는 움직임만 해야돼. 자전거 타거나 걸어가거나. 산에 가거나 강에 가거나 이런 식으로 말이지. 극장 같은 덴 가도 못하는 거야. 술집, 문화적인 건 하나도 못 누리는 거야. 못 누리면 뭐냐, 문화를 나는 테레비로 섭취하는 거야. 그걸로 다가 다큐멘터리도 보고. 그리고 돈 안 들어가는 거. 책. 이거 웃기는 거여 책이라는 게. 돈 최고 안 들어가는 거야.
퍼> 그럼 일년에 몇 권이나 읽으시고 책 선정은 어떤 식으로 하세요?
이> 일 년에 칠십 권은 더 보는 것 같더라. 그리고 선정은 카달로그야.
퍼> 요즘은 인터넷으로 책도 사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좀 더 수월하고 싸게 책을 살 수가 있어요.
이> 인터넷 할 줄은 알아. 집에서는 안하고 회사에서만 하거든. 이메일도 확인하고. 인터넷으로 책을 봐도 어떻게 주문하는지 그걸 모르겠더라고. 어떻게 해서 사는 줄을 몰라.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료를 얻은 적은 거의 없어. 카다로그를 보내 달라고 하고 신문 같은 거 보고. 또 누가 추천해주면 보는 거지.
퍼> 그러고 보면 아날로그 식 삶을 살아가시는 것 같아요.
이> 그렇지 아날로그지. 내가 작년에 충대 보일러실 있을 때 자동제어를 하는 부서에 있었거든. 모든 걸 다 컴퓨터로 하는 곳이었어. 그런데 기계라는 게 디지털만으로는 안 돼. 아날로그 식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있어. 부피 같은 거 조절할 때 말이야. 가령, 저기 있는 어떤 밸브의 개폐도가 10프로, 20프로, 30프로 조절되는 게 있거든? 근데 이건 디지털로는 안 된단 말이야. 켜고 끄는 건 디지털로 하지만 고건 아날로그여야 해. 퍼센트를 직접 손으로 정해줘야 하거든. 그래서 디지털만으로는 안 되고 아날로그를 겸해서 쓰는 거지. 이런 최첨단 보일러 시스템에서도 말이야. 나는 내 삶은 아까 행복했다고 했잖아. 그게 근대라는 것을 별로 세례 받지 못했어. 근대를 버팅기거나 견뎌 낸 거지. 참으면서 남들은 비까번쩍할 때 나는 그들 밑에서 전근대적인 삶을 유지했던 거야. 그래서 자기 분열이 없었어. 막 질주하다 보면 이탈 같은 것도 생기고 그러거든. 그런데 내 경우에는 그런 게 없었어.
속도도 느렸고 근대적인 세례 아무것도 못 받았기 때문에 남들이 좋은 세상인 근대를 갈 때 나는 비참하게 갔어. 그들이 볼 때는 말이지. 뭔가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 최소의 비용으로 근대를 버틴거지. 그러면서 꾸었던 꿈이 근대 이전의 생활을 동경했단 말이야.
퍼> 시골에서 논두렁 걷는 길 말이죠?
이>그렇지. 그거를 88년대에 내가 실현한 거야. 특허하면서. 그러다가 90년대에 와서 근대적인 것하고 접목이 된 거지. 그래서 내 시에는 전혀 근대화에 대한 것이나 노동의 문제가 들어있지 않아. 나는 내 시에서 아무것도 말 못 하지. 그때를 살지 못했기 때문에.
난 근대화를 겪지 못해서 스스로 행복하게 산 것 같아. 행복은 느낌이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요즘 이면우 시인은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집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쓰고 있지 않는 단 한 명의 아이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지 않겠다고 한다.
이면우 시인은 신탄진 자기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고 했다. 이미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상을 봐두라고 했고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거쳐갔다고 한다.
이> 우리 안식구 말인데 사람들이 오는 걸 너무 좋아해서. 언제 내가 선생님 소리 들어보고 언제 그이가 사모님 소리 들어보겠어? 내가 다락방도 보여 줄게.
그러나 나는 대전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다음에 들리겠다고 했다. 그런 내게 이면우 시인은 ‘이거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야 할텐데… 미안해서 어쩌나?’ 하며 자신의 지갑에 있는 1350원짜리 좌석버스 승차권을 내밀었다. 나는 힘을 다해 사양했지만 어느새 내 손에는 승차권이 쥐어져 있었다. 말없이 웃으며 내밀던 손은 아주 오랜만에 잡아보는 아버지의 거친 그것이었다.
내가 좌석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이면우 시인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출발한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대전에 다시오면 꼭 들르라는 당부가 머리 뒤에 붙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신탄진 그의 작은 집에서 저녁밥을 함께 먹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