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하워드 진과의 대화

최근 이라크전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북핵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 공군 폭격수의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반전운동가로 변신한 하워드 진의 인터뷰를 싣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인터리뷰소리없는 프로파간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겠다.
이 인터뷰는 대안라디오(Alternative Radio)에서 감독 겸 제작자로 활동하는 데이비드 바사미언이라는 인물이 1992 11 11, 하워드 진과 함께 나눈 대화록이다. 아래에는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서 별도의 설명을 넣지 않았다. 다만 사진캡션과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몇 가지 인물, 사건 등에 대한 역자주를 달았으니 읽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인터뷰 마지막 부분이 잘렸는지 마무리가 시원스럽지 않다. 원문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1 . “나는 폭격수였습니다

 

 

보스톤 대학 명예교수 하워드 진(80)은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역사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2차 대전 당시 폭격기 폭격수였던 그는 60년대 미국의민권운동(civil right movement)’과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의 독창적 저서 [미국민중사]는 대학교재로서 폭넓게 읽히고 있다. 그의 최근작은 [독립선언](인터뷰 당시편집자주)이다.

 

Barsamian(이하 데이빗)> 당신의 성장기<주1>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이하 진)> 저는 주거단지가 아니라 브루클린의 슬럼가에서 자랐어요. 내 기억으론 뉴딜의 첫 번째 주택사업은 브룩클린의 윌리암스버그(Williamsburg)였을 겁니다. 부모님은 유럽에서 이주한 뒤 뉴욕 공장노동자로 생활했습니다. 노동계급가정이었지요. 양친은 노동자로 일하면서 만났습니다. 유태계 이민들이었는데,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시베리아 출신입니다. 언제나 이사를 해야했던 기억이 나네요. 학교도 한 군데 오래 다니지 못하고. 아버지는 늘 이직으로 시달리셨는데, 결국 실직상태가 되어 WPA<주2> 사업에 동원되었습니다. 난 언제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우리가 살던 곳은 쾌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난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죠. 집보다 길거리를 더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내가 자랐던 방식이에요.

 

남들은 대학갈 무렵, 저는 조선소 노동자가 되었어요.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으니까. 전쟁 후에 이스트 사이드로 오게 되었죠. 공군에는 자원입대 했고 폭격수가 되었습니다. 참전하기 직전에 결혼했는데, 전쟁 후에는 쥐가 들락거리는 베드포드스투베산트(Bedford-Stuyvesant)<주3>의 지하방에서 살았습니다. 릴리안 월 주거프로젝트의 혜택을 입게 되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저소득자를 위한 거주프로젝트 때문에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로 오게 되었죠. GI법안(GI Bill)<주4>덕에 대학으로 가게 되기까지 7년 동안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 진학을 했고. 내 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두 딸은 간호학교에 입학했고.

 

데이빗> 집에서는 이디쉬(Yiddish)<주5>를 쓰나요?


> 난 안 씁니다. 부모님은 서로 썼으니까 나도 알아는 듣습니다. 허나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영어로 말했지요.

 

데이빗> 당신은 언젠가 당신 아버지의 웨이터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어요. 아버지가 그 일<주6>을 오래 하셨다구요?


> 아버지는 많은 유대식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17살 때 나도 그 일을 하게 했어요. 난 웨이터 일이 너무 싫었어요. 아버지 역시 그랬던 것 같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종종챌리 채플린이라고 불렀습니다. 걸음걸이가 비슷했거든요. 아버지는 평발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오랫동안의 웨이터 생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성실했습니다. 뉴딜시대 때 아버지는 루즈벨트의 열렬한 지지자였어요. 그 당시 실업자들이 대부분 그랬지요. 그때도 결혼식은 많이 있었지만 웨이터에게 돈을 주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WPA 지원으로 도랑 파는 일을 해야만 했지요. 결혼 전에 공장노동자였던 어머니가 결혼 후에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데이빗> 집에서 책을 보거나 잡지를 볼 만한 조건은 안 되었겠군요?


> 그렇죠. 집에는 책이나 잡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길거리에서 주웠던, 앞부분 몇 페이지가 떨어져나간 책이었어요. 하지만 뭐 상관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책이니까요. <타잔과 오파의 보석>(Tarzan and the Jewels of Opar)이란 책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제목이지요. 집에 비록 책은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뉴욕포스트지가 창간할 때 있었던 사은행사, 그러니까 신문에 실린 쿠폰을 25센트와 함께 부치면 25권 짜리 찰스 디킨즈 선집을 차례대로 보내준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서슴지 않고 나를 위해 응모했습니다.

 

디킨즈는 나의 첫 작가였습니다. 물론 선집 가운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예컨대 <피크위크 페이퍼>(The Pickwick Papers, 1836) 같은, 있었어요. 난 순서대로 전부 다 읽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지요. 뉴욕포스트가 디킨즈의 소설을 순서대로 보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 제일 처음 보내왔던 것은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1849)였고 그 다음은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1837), <돔비와 아들>(Dombey and Son, 1846), 그리고 <블리크 하우스>(Bleak House, 1852) 였어요. 내가 13살 때 부모님이 타자기를 사주셨습니다. 비록 부모님은 타자기나 책에 대해서 무지하셨지만, 아들이 읽기와 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아셨으니까요. 그 후로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용했던재생품 언더우드 No.5′를 거금 5달러나 들여서 사주셨어요.

 

데이빗> 2차 대전 폭격수 경험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강연이나 당신의 책에도 가끔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중에 유독 자주 언급되는 두 가지 작전이 있습니다. 체코슬라바키아 필센(Pilsen) 공습과 프랑스의 로얀(Royan)에 대한 폭격입니다. 그 두 가지 사건이 왜 그렇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나요?


> 당시 그 두 작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죠. 공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많은 군인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는데공군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 전에 브리핑을 받고는 브리핑대로 그 지역에 날아가서 폭탄을 떨어트리고 오면 끝입니다. 그곳이 어딘지, 누가 살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죠. 내가 마지막 출격을 했던 건, 독일에서의 작전이 거의 마무리되고 동유럽을 공격할 때였습니다. 헝가리와 필센을 폭격했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 그 공습에 관한 글을 봤던 기억을 합니다. 처칠의 회고록이었는데 필센 공습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는 그 뒤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필젠에서 온 부부 한쌍을 만났습니다. 주저주저하면서 말했죠. 예전에 필젠 폭격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들이 말하더군요. 그 폭격이 끝난 뒤 거리는 수 백, 수천 명의 시체로 뒤덮였다고.

 

> 공군이 되어 3 5천 피트 상공에서 폭격을 한다는 건 이런 겁니다. 비명도 안 들리고, 사람도 안 보이고, 피자국도 안 보이지요. 물론 토막난 시체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살육을 현대전이 저지르고 있는 셈이지요. 나는 그걸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군에서 내가 했던 일은 그런 것이었어요.

 

로얀폭격은 훨씬 더 쓰라린 경험입니다. 당시는 거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폭격임무는 없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연합군은 이미 프랑스를 회복했고 대부분의 독일을 점령했기 때문에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들은 모두 몇 주 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기상나팔이 울렸습니다. 6시 폭격이 예정되어 있을 때나 울리던 시각이었죠. 영화에서처럼 침대에서 튀어나가 곧바로 비행기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그런 건 아닙니다. 다섯 시간에 걸쳐 지리한 브리핑을 듣고, 장비를 점검하고, 전기보온비행복을 입어야 하고, 폭격브리핑, 조종사브리핑을 마쳐야 하며, 또 동그란 프라이를 먹어야할지 네모난 프라이를 먹어야할지도 고민하는 거, 그런 게 실제 폭격을 나가기 전에 해야할 일들이지요. 보르도 옆의 작은 해안마을을 폭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습니다. 그 작은 마을의 이름은 로얀이었습니다. 누군가 지도상의 그 마을을 설명했을 때, 아무도도대체 왜 해야하죠?”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브리핑 때에는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라고 묻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데, 왜 폭격을 해야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미 프랑스는 모두 연합군이 점령했는데 거길 다시 폭격해야 하는가 말이지요. 그 곳에서는 수천의 독일군이 전쟁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물론 누구를 해치거나 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모두 천 이백 개의 폭탄을 갖고 갔습니다. 2-3천 명의 독일군들 머리 위로 모두 1,200개의 대형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브리핑에서 들은 말은 그 폭격에서 우리가 투하할 폭탄은 여느 때의 폭격과는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보통의 폭탄이 아니라일종의 산탄형 폭탄인데, 개솔린 젤로 가득찬 긴 실린더형 폭탄이었죠. 우리에게 당시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린 개솔린 젤로 만들어진 폭탄은 지상에서 활활 타오르리라는 것쯤은 알았지요. 네이팜탄 말입니다. 그건 네이팜탄이었어요.

 

> 종전 이후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조사를 했고, 로얀을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복원되었습니다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된 도서관에 들어가 봤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그 폭격에 대해서 기록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폭격과 관련한 글도 쓴 적이 있는데그 폭격은 현대전의 우둔함을 상징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5분만 생각해봐도 당장에 그만둘 이 잔악한 짓을, 이 거대한 전쟁시스템은 군인들이 그 일을 하게끔 만듭니다. 우린 그 작은 도시를 파괴시켰고, 독일군 그리고 거기에 살던 프랑스 사람들을 말살했습니다. 어떤 글에서 나는 히로시마의 원폭과 내가 경험한 두 차례의 폭격을 비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을 나는 환영했는데, 그건 그때 내가 멀리 태평양지역으로 다시 가서 더 이상 폭격임무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빗> 1960년대 중반쯤 히로시마를 방문하셨죠. 그때 생존자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 그때는 정말 참담했습니다. 매년 8월에 약간의 미국인들이 히로시마를 방문합니다. 원폭투하를 기념하기 위한 국제적 모임 때문이지요. 우린 그때 생존자의 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약간의 미국인, 프랑스인 그리고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방문단이었습니다. 마루에는 생존했던 일본인이 앉아있더군요. 우린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 방문객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습니다.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의 전쟁고통을 설명하고 또 일본에 대한 조의를 표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만, 속으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비록 일본을 폭격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폭격수였다는 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히로시마에서처럼 나는 무고한 사람들, 시민들을 폭격했노라고. 이제 막 내 차례가 되어서 일어나는 찰나, 내 눈에는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 버렸어요. 눈 앞에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장님이거나 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건 현실이었어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말문이 열리질 않았습니다. 그 뒤로 나는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았지만 그때와 같은 기분은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목이 메어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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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워드 진은 1922년에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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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35 1월 미의회가 통과시킨 일종의공공근로사업이었다. 노동자임금보다는 낮지만 실업수당보다는 두 배 가까운 임금으로 대량의 실업자들을 공공근로사업에 동원했다. 이 사업으로 2500개의 병원, 5900개의 학교, 1000여개 이상의 비행장, 13000여개 이상의 운동시설을 신축보수되었다. 1935년부터 41년까지 이 사업에 투입된 재정은 모두 110억 달러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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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드포드스투베산트(Bedford-Stuyvesant) 지역은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역으로 주로 흑인들이 사는 곳이다. 미국이민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 지역의 지지(地誌)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시라.
http://www.nyc.gov/html/hpd/html/about-us/bed-stuy-walking-tou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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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확한 명칭은 GI Bill of Rights이다. 미국은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한 후, 종전 이후 발생할 대규모의 실업자와 귀환 군인들의 재취업재교육을 위해서 이 법안을 입안했다. 대학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1944 6 22일 미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 따라서 퇴역 군인들은 대학, 전문학교, 각종 집업훈련원 등에서 재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모두 14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되었고 1956 7 25일 부로 공식 종료되었다. 이와 유사한 법안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가난한 청년들에게 재교육취업이라는 미끼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세 살먹은 아이들도 알 수 있다. 물론 클린턴 같이 부유한 집안 자제들을 이같은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음은 뻔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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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부와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쓰기 시작했던 언어로, 헤브라이 문자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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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터뷰 본문에는 ‘Bar Mitzvah'(son of commandments)라는 유태인들의 풍습이 나오는데, 아마도 하워드 진의 아버지는 결혼식날 열리는 이계율암송행사의 진행을 담당하는 허드렛일을 했던 모양이다.

 

2. 부자와 백인들의 역사

 

 

데이빗>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역사라는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그 개념을 인정하시는 편인가요?


> 어느 글에선가역사는 개인사업이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많은 역사들이 사회적 의식 없이 쓰여진다는 점입니다. 혹은 설혹 어떤 역사가들이 그런 사회적 의식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역사를 쓰는 동안에는 그 같은 의식을 옆으로 밀쳐놓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역사서술이 직업이니까요. 출판목적을 위해 쓰이거나,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쓰여지거나, 정년보장과 진급, 그리고 개인의 영예 따위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렇게 쓰여진 것들은 이윤을 위해서 출판업자들에 의해 출판됩니다. 이윤동기. 이건 우리의 사회경제체제 전체를 왜곡시켜 놓은 몹쓸 존재죠. 이윤을 남길 수 있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생산될 것인가가 결정되는, 그래서 더 많은 중요한 것들이 생산될 수 없게 만들고 맙니다. 이 이윤동기 덕분에 백해무익한 것들이 만들어지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거지요.

 

그 같은 이윤시스템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었어요. 이젠 순수한 대학생들, 사업과 장사치들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어야 할 대학생들에게까지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출판계, 그리고 학계는 이제 더 이상 이윤추구가 횡행하는 속세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의식적으로 이윤동기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직업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필수적인 원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직업적인 저술가들, 역사학자들은 의식적이거나 혹은 적어도 반 정도는 의식적(semi-conscious)으로 혹은 이미 뼈 속 깊이 그런 생각이 사무쳤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경제적 안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마련이어서 결코 자신의 직업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매우안전한 역사만을아주 많이가지게 되는 거지요.

 

데이빗> 선생께선 조지 오웰의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하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1984])라는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 조지 오웰은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앞으로 많이 써먹게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글쟁이들이야말로 진짜 도둑놈들이죠. 좋은 표현을 보면 꼭 써먹게 되는데, 그 중 양심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그걸 어디서 보았는지 밝히지요. 슬그머니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오웰의 그 말은 내게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 사람들이 배우게 마련인 바로 그 역사를 통제할 수 있다면, 혹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역사와 그들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역사를 결정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고, 어떤 것이 가치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앎을 통제함으로서 그들의 두뇌를 지배하는 거죠. 그런 능력이 있는 자들, 과거를 지배하는 자들은 바로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람들, 교과서를 집필하는 자들, 지배적인 사고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사람들,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통제하는 사람들이지요.

 

데이빗> 그들이 누구죠? 과거를 우리로부터 격리시키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그 같은 사람들의 대체적인 계급적 배경이나 혹은 인종적 배경에 관한 대략적인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죠.


> 대부분 남자들이죠. 또 잘 살고 그리고 거의가 백인들입니다. 종종 부자와 백인들의 역사라고 부르죠. 잘 사는 백인 남자들의 역사는 있습니다만, 그런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들이 잘 사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교과서를 출판하는 사람들, 미디어를 통제하는 이들, 그리고 필요한 시점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에 어떤 역사학자들을 불러내어 적절한 도움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사는 백인들이지요.


정보를 통제하는 주체가 잘 사는 백인 남자들이기도 하지만, 또 그들이 역사학자들에게 잘 사는 백인 남자들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서술에서 흑인 민중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는 건 그 때문이지요. 여성의 관점 역시 그러하고.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는 턱없이 모자라게 역사에서 자신의 몫을 할당받지 못하는 노동인민의 관점 역시 그 때문이고.

 

데이빗> 미디어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객관적‘?‘현학적인 것바람직하지 않으며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 정확히는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실상 모든 역사는 무수한 사실로부터 무언가를 선택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선택을 하는 순간 이미 당신의 머리 속에 그려놓고 있는 중요한 것들의 순서에 충실하게 마련입니다. 이미 객관적임과는 거리가 멀지요. 정보의 취사선택자로서 당신은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미리 정해 놓은 방향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정말 불가능한 기획인 셈이지요. 물론 어떤 사람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니까요. 역사학자들이 마땅히 해야할 말은, ‘내가 평가하기에는‘, ‘내가 관심이 있는 문제는‘,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배경에는…’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독자들이 과연 필자가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할 때만, 역사를 읽는 젊은 대학생들이 한 가지 의견만을 맹신해서는 안 되고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임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애써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란 가치와 관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객관적이지 않은 역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는 인간의 가치들, 인류의 가치들, 형제애, 자매애, 평화, 정의, 그리고 평등과 같은 가치들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은 지금껏 제가 그같은 가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점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민의 권리인 평등,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 이런 가치들은 역사서술에서 역사가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원칙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이 곧 역사를 쓰면서 중요한 사실을 빼놓거나 혹은 왜곡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만약 그같은 가치들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역사가들은 미래의 우리 세대가 타인을 동등하게 대하고, 전쟁을 멀리하며, 모든 형태의 정의로움을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역사책을 쓰게 될 것입니다.

 

데이빗> 그런 편향()들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게 가능했습니까?


> 아까 말했듯이 나도 물론 그 같은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 콜롬부스에 대해 말하거나 쓴다면, 그가 대양을 종단하며 미지의 파도와 싸웠던 위대한 사실을 빼놓거나 왜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콜롬부스의 도전정신과 항해술과 관련한 점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콜롬부스의 긍정적인 면으로 평가하는 점을 숨기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콜롬부스의 또 다른 면, 뛰어난 그의 항해술이나 종교인으로서의 콜롬부스를 능가하는, 한층 더 중요한 점이 있다고 말할 겁니다. 그 점은 그가 이 땅에서 마주쳤던 인류에 대해서 어떤 짓을 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노예화, 고문, 살인 등 그는 이땅에 살던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점입니다.

 

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문장을 배열하는 데에 재미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입니다만. 내 방식은 이런 겁니다. 콜롬부스를 예로 듭시다. 하버드대 역사학자인 사뮤엘 엘리어트 모리슨(Samuel Eliot Morison)이 콜롬부스의 전기를 저술할 때 썼던 방식입니다 ; 콜롬부스는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항해가이다. 콜롬부스는 서반구의 이 섬들을 발견해내는 위대하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강조가 어디에 있죠? 학살자지만 결국 훌륭한 항해가라는 점입니다. 나는 그 반대로 말하겠습니다. 좋은 선원이기는 했지만, 사람을 잔인하게 다루었다고. 같은 사실들을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이지요.

 

데이빗> 1992년 현재, 콜롬부스에 대한 거부감이나 그를 향한 광범한 비판여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매우 기쁜 현상입니다. 올해(콜롬부스의 미대륙발견 500주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저항을 기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미국을 순회하면서 제가 가졌던 강연이나 또 제 책([미국 민중사])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럴 만 했죠. 여담입니다만, 제 책의 판매 부수가 수십만 부<주7> 라고 합니다. 그 책 역시 콜롬부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읽은 사람들은 아마 콜롬부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최근 몇 년간 좋은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 책이 나오기 전에 발간되었던, 한스 쾨니히의 탁월한 저서 [콜롬부스의 모험]같은 책이 그렇죠. 미 대륙 원주민 후손들의 일부는 이미 그 같은 저항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일어날 일은 어떻게 해도 일어나는 법인데, 사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많은 저항들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 역시도 충분히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아무튼 매우 만족스러운 현상임에는 분명합니다. 재미난 것은 그런 사람들은 쓸만한 통제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나나 당신처럼 미디어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지요. 그런데, 비록 우리가 메이저 미디어를 통제할 수 없고 또 대형 출판사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진정한 우리의 목소리, 아주 작은 라디오 방송국들, 소규모 신문들, 하루에 수백 개의 도시를 향해서 수십 차례의 연설을 마다하지 않는 노엄 촘스키처럼 여기 저기서 진실을 퍼트리는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적 변혁을 이루어 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매우 감동적인 사업이지요.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뉴욕 타임즈가 콜롬부스의 500주년에 관한 스토리를 실었을 때 많은 이들이 저항으로 비웃어줬습니다. 덴버에서는 반대시위 때문에 퍼레이드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 같은 일들이 있었지요. 버클리는 콜롬부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꾸어버렸어요.

 

데이빗> 아무튼 좌파들은 한줄기 빛이 자신들에게 내려오길 고대하는 거군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이렇게 어둡고 희미하지만.


>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경험한 것들은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단지 콜롬부스와 관련한 사실뿐 아니라도, 민중들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 언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콜롬부스에 관한 강연을 준비하면서 이런 걱정이 들기도 했어요. 콜롬부스의 범죄행위들을 열거했을 때 청중들이 야유를 하기도하고 심한 경우에는 뭔가를 집어던지면서 협박을 늘어놓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제일 심한 경우라고 해봐야, 이탈리아 출신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이태리인들이 할 일은 뭐죠? 우리가 경축해야 할 인물은 도대체 누굽니까?”라는 정도였어요. (콜롬부스는 이태리인이었다편집자 주) 난 이렇게 답했어요. “조 디마지오, 토스카니니, 파바로티, 피오렐로 라과르디아(Fiorello LaGuardia)<주8> 같은 훌륭한 이태리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난 용기를 얻었어요. ‘이 땅에는 진정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클린턴으로 상징되는 그런 자잘한 변화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보다는 자잘한 변화라도 있는 게 낫겠지요. 하지만 이 땅에는 정당 따위가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작은 변화들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7>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1980)는 한국에서도 [미국민중저항사]라는 제목으로 1986년 번역출간되었다. 1999년까지 미국에서만 35만부 정도 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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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태리계 미국 정치인. 뉴욕시장 재직시 유명세를 얻었으며, 1917년부터 3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하원의원직을 지냈다.

3.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

 

 

데이빗> 소규모 라디오 방송국들, 케이블 TV, Z매거진, 코몬 커리지 출판사<주9>, 사우스 엔드 출판사<주10> 그리고 오픈 매거진 팸플릿 씨리즈 <주11> 등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발전들도 당신에게 영향을 줬겠군요?


> 물론입니다.

 

데이빗> 지난 10-15년간 미국에서 일어난 독립미디어의 폭발에 비유할 만한 사건이 미국사에 또 있을까요?


> 운동을 조직하고 일으키는 데 팸플릿이나 신문이 중요했던 시기가 물론 있었습니다. 독립전쟁 직전, 식민통치자의 통제 밖에 있던 많은 팸플릿 발행인들이 있었지요. 노예제도 반대운동이 진행되던 시절에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민중들의 글이 온 나라에 넘쳐났었어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우편국장에게 남부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글이 유통되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그런 명령을 다 내렸었지요. 우린 노동자들만의 신문을 가졌던 적도 있고, 대중적인 운동은 언제나 엄청난 분량의 팸플릿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TV나 라디오 시대에 이르러 그런 미디어들은 자리를 내줬지요.

 

하지만 최근의 이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걸프전 때 전 그걸 느꼈습니다. 저는 보스톤에 모인 수백 명의 지역방송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지역방송인(community broadcasters)들이 존재하는 줄 몰랐어요. 걸프전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지역방송국 뿐이었어요. 이들을 통해서 당신(David Barsamian)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분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요. 그때 당신은 주요 텔레비전프로그램이나 거대 미디어에 출연하지는 않았지요. 또 요새는 많은 위성안테나가 보급되어 있습니다. 진보적인 운동이 이제 그같은 위성접시들을 통해서 전 세계에 방송을 내 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지역 신문(community newspapers)들이 있지요. 그런 매체가 바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매체이고 또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들이지요.

 

데이빗> 대중문화 속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들이 우리의 적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것들이죠. 당신은 강연과 글을 통해서, 이같이 실제로 미국에서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가 엄청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 미디어나 교과서 그리고 여러역사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데올로기뿐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은 이런 겁니다. 정부가 우리의 정보를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역사적 실례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죠. 그런 사례들은, 보통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부와 권력, 정복 욕구, 군사주의적 유인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바로 미디어고, 교과서이고 또 역사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미서전쟁(美西戰爭)<주12>을 살펴봅시다. 대부분의 역사교과서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이유를 당시 사람들 대다수가 전쟁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대통령은 단지 그걸 추종했을 뿐이라는 거지요. 당시는 여론조사는 물론 없었고, 쿠바로의 진격을 지지하는 아무런 대중적 집회나 움직임도 없었어요.

 

여론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인용하는 것은 사실 몇 종류의 강력한 신문들입니다. 베트남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가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정부가 전쟁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대중을 조작하고, 신문, 의회에 손을 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린든 존슨이 의회에서 전면전 개전에 관한 전권(carte blanche)을 위임받기 위해서 어떻게 1964년 여름 통킹만 사건이 교묘하게 조작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역사책이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했던 일들을 어떻게 감추고 있는지, 또 역사책이 미서전쟁 당시 쿠바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필리핀에서 또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쿠바에서의 전쟁은 3개월이었지만, 필리핀에서는 무려 몇 년간 전쟁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베트남전과 유사한 대규모의 그리고 살육으로 점철된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데이빗> 베트남전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하죠. 아직 베트남전은 끝나지 않은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병역문제와 관련한 논란<13>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는 싸웠는데 누구는 안 싸웠느니 하는. 그리고 또 실종자나 전쟁포로 문제도 그렇구요. 왜 이런 문제가 계속해서 반복될까요?


> 우리 민중을 강제로 베트남전에 보냈던 정부, 권력자들은 베트남전이 종전된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엔딩을 바꾸고 싶어하죠. 역사를 다시 쓰고 싶은 겁니다. 그들 권력자들은 패전의 이유를 미디어로 돌리고 있습니다. 반전운동 말입니다. 한마디로 한 손을 뒤로 묶인 채로 싸웠다는 거죠. 우린한 손을 뒤로 묶인 채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7백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어요. 2차대전 때 투하된 폭탄의 두 배에 해당합니다.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단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쟁 중에 발생한 학살문제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베트남인들을 대량학살 했던 마이라이 학살과 같은. 베트남 국민 백만 명, 미군 5 5천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한 인명의 희생 때문에 미국인들이 군사적 개입을 반대할까 염려하는 거지요. 베트남전이 끝난 1970년대 후반의 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국인들은 이제 지구상의 어떤 곳이라도, 어떤 이유라도 군사적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군사, 정치, 산업계의 지배층들은 그 같은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군사개입을 미국의 기본적 대외정책으로 다시 확립하려는 시도인 셈이지요. 그레나다, 파나마가 그런 증거입니다. 중동전쟁(1990년 걸프전)도 그러하고.

 

데이빗> 그런 군사개입들은 전부 신속하게 종료되었죠.


> 그렇습니다. 베트남전에서 많은 걸 배운 셈이지요. 전쟁을 하려거든 신속하게 끝내라, , 이런 거죠. 대중들이 전쟁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정보를 통제해서 진실이 알려지기 이전에 전쟁을 끝내는 거죠. 걸프전에서 부시행정부는 전쟁을 신속히 마무리했습니다. 희생자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했지만, 교전상대의 희생에 대해서는 침묵했죠. 그러고는희생없는 전쟁이라고 명명했어요. 수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이라크인 10만 명이 사망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겠죠. 그러고는정말 쉬운 전쟁이었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데이빗> 선생은 여론호도에 대한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먼(Edward Herman)의 인용도 자주 인용합니다. 그 두 사람은 미디어가 기꺼이 (정부의 정책에)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 미디어 조작을 논증하기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 저도 그 인용을 즐겨 쓰는데요, 사람들은 사실,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고 떠드는 미디어의 말에 쉽게 넘어가곤 합니다. 사실 자신들은 절실히 진실을 대중에게 알려주고 싶어한다는 거죠. 하지만 물론 그건 거짓입니다. 이라크전에서 미디어는 스스로가 백악관 관리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유약한 아첨꾼일 뿐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들이 방송에 출연시킨 전직 장성들, 합참관리들, 그리고 군사전략가라는 사람들은 스마트 폭탄의 위력에 감탄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는 역할만 했어요. 미디어는 역사적 배경지식이나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을 절대 출연시키지 않았습니다.

 

데이빗> 알란 더쇼위츠(Alan Dershowitz)는 당신이 좋아하는 지식인입니다. 최근의 한 칼럼에서 알란은 발칸반도의 학살극과 관련한 글에서 나치와 발칸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인식 가능한 내용은 없고 오로지 호소와 남용만 존재한다라는 건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유사성논법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유추가 아니라 동일시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A B가 비슷하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그러니까 당신 말은 A B는 같다라는 거로군이라고 할겁니다. 나찌에 비유하는 방법은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그러니 당분간 그 같은 방법은 계속 사용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언젠가 보스턴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었지요. 도대체 히틀러와 콜롬부스 중에 누가 더 나쁘냐고. 이건 아주 훌륭한 유비법입니다.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학살이 있었습니다. 사실 죽은 사람의 수로만 따지자면 히틀러가 죽인 사람의 수는, 콜롬부스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콜롬부스의 뒤를 이은 여러 정복자들에 의해 희생된 숫자보다 작습니다. 콜롬부스를 비롯한 그 정복자들이 카리브연안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학살한 원주민의 수는 적어도 5천 만명 이상입니다. 이들은 모두 혹사와 처형, 질병, 노예화 등등으로 학살당한 것이죠. 유비법에 호소하는 것은 뭐,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양자간에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분명히 지적하기만 한다면 뭐, 괜찮겠겠죠.

 

데이빗> 원주민을 몰살시킨 것 말고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데려다 썼지요.
> 인디언들이 노동자로 끌려간 뒤 새로운 학살이 또 시작되었는데, 천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노예로 죽어갔습니다.

 

데이빗> 더쇼위츠의 같은 칼럼에서는 학살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독특한 유태인 대학살에 관해 설명합니다. , 유태인 대학살은 그 자체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는 건데요, 이에 대해서 동의하시는 편입니까?


> 당신이 말한특별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달렸겠네요. 모든 학살은 각기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어떤 한 가지의 학살극을 강조하여 역사에는 단 한가지의 엄청난 학살만이 존재했고 그 외 다른 학살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혹은 비교조차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유태인들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히틀러가 얼마나 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는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끔찍한 경험을 되살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그와 유사한 다른 모든 사건들에 투사시키는 일입니다. 오늘날도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야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존재합니다. 소말리아에서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경제적인 이유나 전쟁으로 인해 희생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아픈 경험을 투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태인 대학살에서 일어난 일들은 결코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유태인 대학살만 따로 저 높은 곳에 그 위치를 정해둘 수는 없지요. 그나마 유태인 학살은 과거지만 지금 현재에 있는, 그리고 미래에도 있을 다른 학살극에 그러한 교훈이 강조되어야 할 겁니다.

 

데이빗> 헐리우드와 역사라는 문제에 대해 묻겠습니다. 마이클 파렌티는 그의 저서 <미디어를 믿게 만들어라>에서고도로 교양이 없는 사회일수록 영화가마지막 프레임‘, 역사의 마지막 장이다라고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올리버스톤의 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스톤은미국인들은 잃어버린 자신의 역사를 되찾을 권리가 있다고 했는데, 한때 우리의 역사였다가 지금은 사라졌다는 그의 가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물론 역사가 우리의 것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를 통제하는 이들의 소유물이었지요. 그들이 역사를 통제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역사를 다시 되찾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원래 미국이 있던 자리로미국을 되돌려놓자고 부르짖곤 합니다. 원래 있던 곳이 뭡니까? 노예제요? 화려한 과거를 복원하자? 화려한 옛 시절은 언제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놓여져 있습니다. 영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그게 라스트 프레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나는 영화가 당신을 바로잡는 바로 그 순간에 가지는 그 강력한 힘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가 문학이나 저술이 가지고 있는 지속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른지요?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읽기를 멀리한다고 말합니다. 그 통계는 확실한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들 해요. 요즘 학생들은 옛날보다 독서량이 차차 줄어든답니다. 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는 그 말은 맞을 겁니다. (책읽지 않는) 그들은 비디오를 보거나, 티브이, 영화관에 가지요. 책이 아니라 비디오, 영화, 티브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점차 증대합니다. 시각적 미디어의 중요성에 나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나도 영화를 무척 사랑하는 편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또 나의 사고를 키우는 영화를 볼 때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내가 본 몇몇 영화들은 내 가슴 속에 아주 강한 메시지를 남겼어요.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라는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점은, 그 영화는 엘살바도르의 독재정권과 살인집단을 지원하는 미국의 잔인한 정책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했지요. <7 4일생>이란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대단한 영화군. 스톤 감독은 수백만 인민에게 반전운동을 전파했고,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투는 군인들 간의 다툼이 아니었구나 라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는군이라고 말입니다. 베트남에서 귀국한 병사들이 반전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론 코비치가 그랬듯이. 그런데 내가 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그와는 좀 다릅니다. () 우리 미국 내에 존재했던 반전운동에 대한 영화 <7 4일생>에서 그가 했던 말과는 모순된 듯 합니다. (<7 4일생>) 만약 전쟁이 끝났다고 가정한다면, 반전운동에 참가했던 론 코비치나 베트남 참전용사들, 그리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저항이 (종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는 것과, 또 그 같은 사회운동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에서 스톤은 종전을 이끌어내는 핵심인물은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내가 줄곧 비판해온 영웅주의적 역사관에 서 있는 것이지요. 물론 나도 올리버스톤이 그의 걸작들에서 이러한 영웅주의적 사관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드러나는 영웅주의적 사관이란, ‘역사는 지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대법원 혹은 의회일 뿐이다라는 생각이지요. 만약 역사가 나에게 뭔가 보여주었다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필요한 변화는 결코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직 가능한 경로는 사회적인 운동에 의해 가능할 뿐이지요.

 

데이빗> 실제의 역사적 기록들을 가공의 기록들과 혼합하는 것의 정직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소설이 역사를 뒤틀지만 않는 한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들을 증대시킨다면, 훌륭한 것이지요.

 

 

9> 1991년 설립된 기괴한(?) 출판사. 인종, , 페미니즘, 경제학, 생태학, 미국의 국내외 정책 등과 관련한 책들을 주로 출판한다. 스스로 말하길우리 출판사가 발행한 책들은 언제나 탑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뉴욕 타임즈 같은 신문 연예란 같은 데는 절대 안 실린다.” 퍼슨웹 출판사와 모토가 비슷해 보인다. 자세한 소개는 http://www.commoncouragepress.com/griffith_reader.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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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역시 기괴한 출판사다. “혁신적인 사회변혁에 이미 가담하고 있거나 가담하고자 하는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서 1977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역시 자세한 소개는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시라. http://www.southendpres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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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90
년 출범한 게릴라 잡지사의 씨리즈물이다. 인터넷 사이트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찾기가 쉽지 않다. 이 독립언론은 1993오픈매거진 팸플릿 씨리즈라는 이름으로 그 간의 기사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였다. 혁신적 저널리즘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오픈매거진은 걸프전, LA폭동 등과 관련한 논쟁적인 기사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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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 전승국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양도받는 한편,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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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클린턴과 조지 부시(망나니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자격이 없는, 현 부시대통령의 애비)가 맞붙었던 1992년 대통령선거전에서 제기된 클린턴의 병역기피를 말한다. 월남전을 반대했던 클린턴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을 간다. 돌아와서는 예일대 법대 대학원에 입학함으로써 계속 징집을 연기했다. 이런 행위 때문에 클린턴은 징병기피자(draft-dodger)로 낙인 찍혀서 선거 때마다 애를 먹었는데, 부시가 취임 전에 발표한 예비내각에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에 지명되자, 코미디언 제이 레노는클린턴에게 징집영장을 보낸 사람이 바로 럼스펠드였지, 아마.”라고 조크를 했다고 한다.